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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예기의 군왕 복상제도(服喪制度)에 나타난 존왕사상(尊王思想) 연구/정병섭.성균관大

Ⅰ. 서론

Ⅱ. 군부일치(君父一致)와 방상삼년(方喪三年)

Ⅲ. 존존의식(尊尊意識)과 참최삼년(斬衰三年)

Ⅳ. 군왕을 위한 차등적 상례제도(喪禮制度)

Ⅴ. 선충후효(先忠後孝)의 변례(變禮) 조항

Ⅵ.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의 주제는 예기에 기록된 상례제도 중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服喪 制度)를 연구하는 것이며, 세부적으로는 복상제도에 나타난 존왕사상(尊王思 想)이란 특징을 탐구하는 것이다.

초기 유가에서 주장했던 상례는 어디까지나 혈연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가족관계 내에서의 예제(禮制)였고, 군신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점차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통일 왕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군왕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존숭의식이 형성되 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왕사상이다.

유가는 이러한 존왕사상의 영향을 받아, 군왕에 대한 각종 제도와 사상들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군 왕에 대한 복상제도이다.

이러한 복상제도는 기본 전제가 군왕을 부모와 동일 시하여 군왕에 대해서도 삼년상을 치른다는 것으로, 이것은 군부일치(君父一 致)의식을 보여준다.

또 유가는 혈연과 관련없는 군신관계를 상복제도로 편입 시키기 위해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대하는 존존의식(尊尊意識)을 고안해냈고, 이것을 복술(服術) 규정으로 정착시킨다.

이에 따라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또 군왕은 계급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군왕을 중심 으로 한 차등적 제도들을 고안해냈고, 각종 변례(變禮) 조항들을 만들어내어, 군왕 중심의 상례제도를 수립하게 되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특징은 부모에 대 한 상사(喪事)보다는 군왕의 상사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효보다는 충 을 앞세우는 선충후효(先忠後孝)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전 국말기와 전한초기 유가사상의 특징인 존왕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제어 : 군부일치, 존존, 방상, 군왕, 선충후효

Ⅰ. 서론

본 논문은 예기에 기록된 상례제도 중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服喪制度) 를 연구한 것이다.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크게 두 방향으로 논증을 진행하 였는데,

첫 번째는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성립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제도에 나타난 특징을 연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제에 대해서는 별 도의 논문으로 발표를 하였다.1)

본 논문은 두 번째 주제에 대한 것으로, 이러 한 복상제도에 나타난 존왕사상(尊王思想)이란 특징을 탐구하는 것이다.

전 국시대 때 묵가가 유가를 비판하며 상례(喪禮)를 주요 항목으로 제시할 정도 로, 유가는 공자 당시부터 상례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러나 초기 유가에서 주 장했던 상례는 어디까지나 혈연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가족관계 내에서의 예 제(禮制)였고, 군왕과 신하 또 군왕과 백성의 관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 다.

초기 유가에서는 부자관계 속에서 시행되는 가정윤리인 효(孝)를 강조했 고, 이것은 혈연의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윤리덕목이었다.

반면 군신관계는 도 의에 따라 인위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로 여겼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는 혈연의식이 기반이 된 상례제도가 정착될 수 없었다. 따라서 공자와 맹자는 군주에 대한 복상제도를 논의하지 않았다.2)

1)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기의 군왕(君王)에 대한 복상제도(服喪制度) 연구-방상(方 喪) 삼년상(三年喪) 제도 성립에 대한 고찰-」(공자학 51권, 2023)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2) 맹자「만장상(萬章上)」에는 서「요전(堯典)」의 기록을 인용하여, 요임금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마치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처럼 했다.[百姓如喪考妣]”라는 기록이 있 지만, 이것은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있는 기록이 아니다. 맹자 의 제자였던 함구몽(咸丘蒙)이 “순이 남면하고 서 있는데 요가 제후를 거느리고 북면 하여 조회하였고, 고수 또한 북면하여 조회하자 순이 고수를 보고 불안하여 위축되 었다고 했습니다. …… 이 말이 사십입니까?[舜南面而立, 堯帥諸侯北面而朝之, 瞽瞍 亦北面而朝之. 舜見瞽瞍, 其容有蹙. …… 不識此語誠然乎哉?]”라고 질문하자, 맹자가 이것은 제나라 동쪽 야인들이 지어낸 말이라 평하고, 그 뜻을 설명하는 가운데, 서 를 인용하며 이 말이 나온 것일 뿐이다. 맹자의 다른 기록에도 군왕에 대해 복상해 야 한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시대 에는 점차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통일왕조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군왕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존숭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왕사상이 다.

유가 또한 전국말기 때 이러한 존왕사상의 영향을 받아, 군왕에 대한 각 종 제도와 사상들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 이고, 이것은 방상(方喪) 삼년상(三年喪) 제도로 정착하게 된다.

이 제도는 근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사회의 왕조체계가 무너지기 이전까지 지속되어 온 매우 뿌리깊은 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방상 삼년상 제도 자체는 아니고, 이 제도를 성립시켰던 이론적 근거이자 또 이 제도의 특징으로 나타난 존왕사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에 나타나는 특징은 존왕사상인데, 이것은 군왕과 부 모를 동일시하는 군부일치(君父一致)의식,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여기는 존 존의식(尊尊意識), 군주를 우선시하는 선충후효(先忠後孝)의 경향으로 나타 나게 된다.

군부일치의식은 국가윤리인 충(忠)과 가정윤리인 효(孝)를 일치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상례제도에 있어서도 자식이 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르듯이 신하는 군왕에 대해서도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방상 삼년상 제도로 정착하게 된다.

또 존존의식은 군왕 에 대한 상례제도의 근거가 됨과 동시에 군왕만을 위한 상례제도 수립의 근 거가 된다.

유가는 군왕에 대해 존귀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가 존귀한 존재이 기 때문에 복상(服喪)을 해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방상 삼년 상의 근거로 정착하게 된다.

또 군왕은 존귀한 존재이므로, 여타 계층과 다른 군왕 중심의 상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상 삼년상 제도는 부모에 대한 삼년상에 준하는 것으로, 제도의 근간은 의례「사상례(士喪禮) 」, 「기석례(旣夕禮)」, 「상복(喪服)」편 등에서 서술하고 있는 사(士) 계층의 상례제도에 있다.

그러나 군왕은 계급적 특수성으로 인해, 그에 대한 상례를 사 계층의 제도와 완전히 동일하게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군왕을 중심으로 계급에 따른 차별적 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에 따라 군왕만을 위한 각종 상례절차들이 생겨나게 된다.

선충후효(先忠後孝)는 국가윤리와 가정윤리를 동일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충을 효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상사(喪 事)에 있어서도 군왕의 상사가 부모에 대한 상사보다 더 중시되는 경향을 보 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가정윤리를 우선시했던 공맹유학의 기조와는 다른 것으로, 군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존숭을 반영한 전국말기와 전한초기 유가사상의 특징인 존왕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행연구를 검토해보니, 현재까지 인문학 분야에서 예기를 주제로 발표 된 학술지 논문들 중, 등재후보지 이상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은 총 51편이 검색된다.3)

이러한 51편의 논문들 중 다시 ‘상례(喪禮)’를 주제로 발표된 논 문은 총 5편이 검색되는데, 논자가 이번 논문과 연관해서 방상 삼년상에 대 해 발표한 논문을 제외하면 총 4편이 된다.4)

공병석의 「예기와 선진 제자 서의 상례 비교」와 「예기와 묵자의 효도관-상장관을 중심으로」라는 논 문은 효와 친애(親愛)에 초점을 두고, 상례제도의 형성 근거가 이 두 윤리덕 목에 있으며, 상례의 목적이 인의(仁義)의 실현에 있고, 그 기능은 인정(人 情)의 조절에 있음을 분석한 논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주제인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와 존왕사상과는 관련이 없다.

또 윤무학의 「예기와 선진 제자서 의 상례 비교」는 상례 중 변례(變禮)에 대한 것으로, 공자 사후 유가의 상례 제도가 발달하게 된 이유와 그 특징을 분석한 논문이다.

이 논문 또한 본 논 문의 주제와는 큰 관련이 없다.5)

3) KISS 및 DBpia 소장자료, 분야: 인문학, 등급: 등재후보지 이상, 검색키워드: 예기, 검색일 2024.1.22.

4) 공병석, 「예기 상장관의 인문의식」, 유교사상문화연구 20권, 한국유교학회, 200 4. / 공병석, 「禮記와 墨子의 孝道觀-喪葬觀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47 권, 동아시아고대학회, 2017. 윤무학, 「예기와 선진 제자서의 상례 비교」, 율곡학 연구 40권, 율곡연구원, 2019. / 임병식, 「예기에 나타난 생사관 특성 고찰」, 철 학사상 84권, 2022.

5) 윤무학의 논문 내용 중 상례의 적용 범위 확대를 논의한 부분에서, 가족 관계를 중심 으로 시행되었던 상장제도 대상에 군왕이 포함되기 시작했다는 부분은 본 논문의 주 제와 일부 관련이 있지만, 이 논문은 변례의 발생 이유와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며, 군왕의 상례제도는 예시 중 하나로 등장하므로, 본 논문과 큰 관련이 없다.

임병식의 「예기에 나타난 생사관 특성 고 찰」은 생사관(生死觀)을 다루고 있지만, 현대사회의 웰빙과 웰다잉의 구도를 비판한 것으로, 군왕의 상례제도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본 논문의 주제는 기존의 연구성과들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주제이며, 현재까지 국내학계의 연 구성과물 발표가 현저히 낮은 전국말기와 전한초기 유가사상의 특징을 분석 하는 것이다.

Ⅱ. 군부일치(君父一致)와 방상삼년(方喪三年)

방상 삼년상의 성립에 대해서는 본 논문과 함께 기획된 별도의 논문에서 이미 발표한 내용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논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만 간 략히 기술하고, 이전 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 하겠다.

전한초기에 유가는 관학(官學)이 되어 국가 공식 학문으로 인정 받 음과 동시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이론을 창출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군 왕에 대한 복상제도이다.

한대 유가는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가 요순(堯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서「요전(堯典)」의 기록을 제시 한다.

「요전」에서는 “순임금이 섭위(攝位)한 지 28년만에 제요(帝堯)가 승하 하시니, 백관들은 부모의 상을 치르듯 하였고, 3년 동안 사해에서는 팔음(八 音)의 연주를 그쳤다.”6)라고 하였다.

6) 書, 「虞書·堯典」 : “二十有八載, 帝乃殂落. 百姓如喪考妣, 三載, 四海遏密八音.”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여상고비 (如喪考妣)’이다.

즉 군왕인 요임금이 죽자 백관들이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 처럼 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유가에서는 군왕에 대한 방상 삼년상 제도의 기원을 요순시대까지 끌어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 중에서도 「우 서(虞書)」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의심되므로, 이 기록을 실제로 요순시대 때의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주서(周書)」에 해당하는 서「고명(顧命)」편과 「강왕지고(康王之誥)」편을 살펴보면 주나라 때에도 군왕에 대한 신하와 백성들의 복상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이 두 편은 성왕(成王)이 죽자 그의 아들인 강왕(康王)이 즉위 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인데, 이 기록에서는 상을 치르는 대상을 강왕에 한정 시켜 기록하고 있으며, 신하들은 상복을 착용하거나 기타 복상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신하들이 군왕에 대해 복상하는 제도는 이 당시까지 만 하더라도 성립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를 전면적으로 주장한 것은 순자이다.

순자는 「예론(禮論)」에서 “군주의 상을 3년으로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해보자 면 군주는 다스려 구별하는 주인이고, 법리와 조리의 근본이며, 충심과 공경을 다하는 자이니, 서로 이끌어 지극히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시에서는 ‘화락한 군자여 백성들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군자 라는 말에는 진실로 백성들의 부모가 된다는 뜻이 있다.

부친은 자식을 태어 나게 할 수는 있지만 젖을 먹여 기를 수는 없고, 모친은 밥을 먹여 기를 수는 있지만 가르칠 수는 없다.

군주는 이미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면서도 잘 가르칠 수 있는 자이다.

따라서 삼년상으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다.”7)라고 주장하여, 군주의 은혜가 부모에 버금가므로, 부모에 대한 상과 동 일하게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자는 군부일치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군왕을 부모에 버금가는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에 성 립되는 방상 삼년상의 기본 토대가 된다.

전국말기와 전한초기의 유가들은 바로 이 사상을 수용하여 방상 삼년상 제도를 고안해냈고, 그 기록이 예기 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예기에는 군왕과 부모를 동일시하고, 그에 따른 상례제도를 기록한 것이 다수 나타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궁상(檀弓上)」편에서 부모에 대한 상례와 군왕에 대한 상례를 정의하며, 군왕의 상사를 방상삼년(方喪三 年)이라 기술한 것이다.8)

7) 荀子, 「禮論」 : “君之喪, 所以取三年, 何也?曰: 君者, 治辨之主也, 文理之原也, 情 貌之盡也, 相率而致隆之, 不亦可乎? 詩曰: 愷悌君子, 民之父母. 彼君子者, 固有爲民父 母之說焉. 父能生之, 不能養之; 母能食之, 不能敎誨之; 君者, 已能食之矣, 又善敎誨之 者也. 三年畢矣哉!”

8) 禮記, 「檀弓上」 : “事親有隱而無犯, 左右就養無方, 服勤至死, 致喪三年. 事君有犯而 無隱, 左右就養有方, 服勤至死, 方喪三年.”

이 기록에 따르면 부모에 대해서는 “상례의 법도를 지극히 하여 삼년상을 치른다.[致喪三年]”라고 했고, 군왕에 대해서는 “부모에 대한 상례에 견주어서 삼년상을 치른다.[方喪三年]”라고 했다.

부모의 상례에 견준다는 것은 곧 부모의 상례와 동일하게 치른다는 뜻이다.

즉 부모에 대해 상례의 법도를 지극히 하여 삼년상을 치르는데, 군왕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하 게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사친(事親)’과 사군(事君)’에서 간언과 봉양 하는 방법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자(父子)관계에서 시행되어 왔던 삼 년상 제도를 군신(君臣)관계까지 확장시켰다는 점은 군왕에 대해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순자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예기에서는 더 나아가 군 왕을 섬기는 도리를 효(孝)라고 정의하고, 부모에 대한 삼년상과 군왕에 대한 삼년상을 동일한 범주에서 논의한다. 이것은 「방기(坊記)」편의 기록에 나타난 다.9)

「방기」편은 윤리덕목과 그에 따른 예제(禮制)가 백성들을 교화하고 백 성들의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기록한 편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 서는 군주를 효로 섬겨야 하고, 그에 따라 부친의 상을 삼년상으로 치르고 군 왕에 대한 상도 삼년상으로 치러서, 백성들에게 의심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왕의 존귀함에 대해 의심하 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10) 군왕의 존귀함을 부모의 존귀함과 동일시하고 있 다.

9) 禮記, 「坊記」 : “子云, “孝以事君, 弟以事長, 示民不貳也. …… 喪父三年, 喪君三年, 示民不疑也.”

10) 禮記注, 「坊記」 : “不疑於君之尊也.”

11) 禮記, 「喪服四制」 : “資於事父以事君, 而敬同.”

이러한 경향은 “부모를 섬기는 것에 따라서 군주를 섬겨야 하니, 그 둘에 대한 공경함이 동일하다.”11)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복사제(喪服四 制)」편은 상복 규정을 제정한 네 가지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기록이다.

이 기 록에서는 군왕에 대한 복상 규정을 부모에 대한 복상 규정과 동일시하며, 그 근거로 군왕에 대한 공경이 부모에 대한 공경과 동일하므로, 군왕에 대해서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효로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순자는 군왕의 은덕을 강조하긴 했지만, 부모와 군왕 자체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군왕의 삼년상을 치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군왕의 은덕 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던 것이다.

즉 군왕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있 으므로, 백성들은 그 은혜를 되갚기 위해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일방적인 제도의 강요가 아니다.

일종의 공적(功績)이 있으므로, 그에 따른 보답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기에서는 군주에 대한 신 하의 의무인 충(忠) 자체를 효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상사(喪事)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군왕의 은덕 유무와 상관없이 군왕을 부모와 동일시하고, 그에 따 라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초기 유가에서는 부모에 대한 삼 년상 자체를 혈연관계 속에서 시행되는 효의 실천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삼년상 자체는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니며, 자식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제도로 인식되었다.

반면 군신관계는 도의에 따라 맺어지는 것으로, 서로 도 의가 어긋나면 단절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예기에서는 군왕과 신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상정하여, 군왕에 대해 서도 효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군신관계를 도의에 따라 인위 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혈연관계에 준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 서 군신관계는 맺고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군왕에 대한 삼년상 또한 인 위적인 제도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자연스러운 제도이자 절 대로 어길 수 없는 제도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은 곧 군왕과 부모를 동일시하 는 군부일치(君父一致)의식을 나타내며, 이러한 의식은 군왕에 대한 절대적 인 복종과 존숭을 의미하는 존왕사상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Ⅲ. 존존의식(尊尊意識)과 참최삼년(斬衰三年)

앞서 방상 삼년상 제도에 나타난 군부일치의식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것 은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존존의식(尊尊意識)을 통 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예기에서는 군왕에 대해 삼년상을 치르는 근거 로 존존의식을 내세운다.

이것은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를 혈연관계 속에서의 복상제도로 편입시키기 위해, 일련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작업의 일환이었 다.

앞서 언급했듯이 상례제도는 본래 혈연관계 안에서 성립되는 제도이다.

그래서 상복의 제정원리를 설명하며 “친족을 친근하게 대함에 있어서, 3으로 부터 5가 되고, 5로부터 9가 되니, 위로 줄어들고, 밑으로 줄어들며, 옆으로 줄어들어서, 그 끝에 이르면 친애하는 관계가 끝난다.”12)라고 말한 것이다. 3 이라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위로 부친과 아래로 자식까지를 포함한 숫자이 다.

12) 禮記, 「喪服小記」 : “親親以三爲五, 以五爲九, 上殺·下殺·旁殺, 而親畢矣.”

3으로부터 5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부친을 통해 조부까지 연결되고, 자식을 통해 손자까지 연결되는 것을 뜻한다.

또 5로부터 9가 된다는 것은 조부를 통해 고조까지 연결되고, 손자를 통해 현손까지 연결되는 것을 뜻한 다.13)

따라서 상복관계가 형성되는 친족의 관계는 같은 고조를 모시는 자들 로부터 현손까지이다.

위아래 또는 방계 방향 안에서 이 범위를 벗어나게 되 면 친근하게 대하여 상복을 착용하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것을 상쇄(上殺)· 하쇄(下殺)·방쇄(旁殺)라고 한다.

따라서 혈연관계에 속하더라도 대수(代數) 가 넘어 친족관계가 멀어진 경우에는 관계가 단절되어, 상대를 위해 더이상 상복을 착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족관계가 끊어진 자에 대해서는 상복을 소급하여 입지 않고, 친족관계가 유지되는 자에 대해서는 상복을 착용한다 .”14)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군신관계는 본래부터 혈연과는 무관한 관계이므로, 대수와 상관없이 복상(服喪)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 유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왕의 존귀함을 내세워 존존의식을 상복제도의 생성 원리 중 하나로 포함시 킨다.

상복을 착용하는 대상과 종류를 구분한 것을 복술(服術)이라고 하는데, 예기에서는 이 복술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는 친친(親親)이고, 두 번째는 존존(尊尊)이며, 세 번째는 명(名)이고, 네 번째는 출입(出入)이며, 다섯 번째는 장유(長幼)이고, 여섯 번째는 종복(從服)이다.

‘친친’이라는 것은 친근한 자를 친근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그 대상은 부모와 처자 및 백부나 숙 부 등으로, 혈연관계 안에서도 관계가 가까운 자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존존’이라는 것은 바로 군주에 대한 것으로,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대하기 때 문에 상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명’이라는 것은 명칭이라는 뜻으로, 백모·숙모 및 자부·제부·형수 등 본래는 혈연관계가 아니었지만, 혼인으로 맺 어진 인척들을 대상으로 삼는 제도이다.

‘출입’은 딸에 대한 것으로, 딸이 시집 을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에 따른 상복제도의 차등을 의미한다.

‘장유’는 친족 이 성인(成人)이 된 이후에 죽었느냐 요절했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마지막으 로 ‘종복’15)은 남을 따라 본인도 상복을 착용하는 제도이다.

13) 禮記注, 「喪服小記」 : “己上親父, 下親子, 三也. 以父親祖, 以子親孫, 五也. 以祖親 高祖, 以孫親玄孫, 九也.”

14) 禮記, 「大傳」 : “絶族無移服, 親者屬也.”

15) 종복(從服)은 다시 여섯 가지로 구분된다. ‘속종(屬從)’, ‘도종(徒從)’, ‘종유복이무복

복술은 본래 혈연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가까운 친족을 대상 으로 삼은 친친, 인척관계를 규정하는 명, 출가외인이 될 수 있는 딸에 대한 출입, 성인의 상과 요절을 구분하는 장유, 또 가족 관계 내에서의 여러 관계 를 조율하는 종복 등, 이 모두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 내에서의 상복 수위를 조절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그 예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존존이라 는 제도이다. 존존이라는 것은 혈연관계와는 무관하지만, 그 대상이 존귀하기 때문에 존귀하게 여기는 차원에서 상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정현 (鄭玄)은 존존의 대상으로 군(君)이 처음이 된다고 주장하였는데,16) 이것은 이 제도 자체가 군왕을 위해 고안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16) 禮記注, 「大傳」 : “尊尊, 君爲首.”

이처럼 그 대상이 존귀하기 때문에, 상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의식은 의례「상복」편의 기록에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복」편은 경문(經文)과 전문(傳文)으로 구성되어 있 는데, 경문은 본문에 해당하고, 전문은 경문의 뜻을 자문자답 형식으로 그 의 미를 풀이한 기록이다.

우선 「상복」편 경문 중 참최삼년장(斬衰三年章)에서 는 참최복에 대한 항목들을 열거하고, 참최복을 입어야 하는 대상들을 차례 대로 나열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부(父)이며, 두 번째가 ‘제후위천자(諸侯爲 天子)’, 세 번째가 ‘군(君)’ 등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삼년상의 참최복 을 입어야 하는 대상으로 부친을 첫 번째로 꼽고 있는데, 이것은 초기 유가에 (從有服而無服)’, ‘종무복이유복(從無服而有服)’, ‘종중이경(從重而輕)’, ‘종경이중(從 輕而重)’이다.

이것은 친속 관계에 따라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공허하게 남을 따라 서 친속 관계가 없는 자에 대해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상복을 착용해야 하는 자를 따라서 상복을 착용해야 하지만 실제로 상복을 착용하지 않는 경우, 상복을 착용하 지 않아야 하는 자를 따라서 상복을 착용하지 않지만 실제로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수위가 높은 상복을 입는 자를 따라서 상복을 착용하지만, 수위가 낮은 상복을 착 용하는 경우, 수위가 낮은 상복을 입는 자를 따라서 상복을 착용하지만, 수위가 높 은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 중 ‘도종’은 군왕의 친족에 대해 상복을 착 용하는 경우가 포함되어, 신하가 군주를 따라서 군주의 친족을 위해 상복을 착용하 는 경우와 처가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군주를 위해서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가 여기 에 해당하지만, 본래 이 제도는 첩이 여군(女君: =본부인)의 친족을 위해서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서자가 군모(君母: =부친의 정처)의 부모를 위해서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자식이 모친의 군모를 위해서 상복을 착용하는 경우 등 가족관계 내에서의 상복관계가 주를 이루는 것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했다.

서 부모에 대한 삼년상을 강조했던 것을 반영한 기술이다.

그런데 두 번째로 제후가 천자를 위해 참최복을 착용한다고 기술했고, 세 번째로 신하들이 군 주를 위해 참최복을 착용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의례의 기록이 삼례 (三禮)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지만, 그 기록의 시점은 전국시대 이전으 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대체적으로는 전국말기 이후의 기록들로 간주된 다.

따라서 이것은 전국말기에 나타난 존왕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전 문의 기록을 확인해보면, 이러한 특징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전문의 형식 은 다양하지만, 「상복」편의 전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자문자답의 형식을 취하 고 있다.

우선 참최복의 대상에 대해 경문에서 부를 제시하자, 전문에서는 “부친을 위해서 어찌하여 참최복을 입는가?

부친은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17)라 했고, 제후가 천자를 위해 참최복을 착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도 “천자는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18)라고 했으며, 군주에 대해서 도 “군주는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19)라고 설명한다.

17) 儀禮, 「喪服」 : “傳曰, 爲父何以斬衰也? 父至尊也.”

18) 儀禮, 「喪服」 : “傳曰, 天子至尊也.”

19) 儀禮, 「喪服」 : “傳曰, 君至尊也.”

이 세 대상 의 공통점은 ‘지극히 존귀한 존재[至尊]’라는 점이다.

즉 부친과 군왕을 동일 시하며, 부친과 군왕은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므로, 당연히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이유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존존의식이라는 것은 존왕사상을 반영한 의식 중 하나이자 군왕에 대한 복상 제도의 근거가 된다.

Ⅳ. 군왕을 위한 차등적 상례제도(喪禮制度)

전국말기와 전한초기의 유가는 방상 삼년상이라는 제도를 고안해내고, 존 존의식에 따라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상례의 세 부 절차에 있어서는 군왕이라는 계급적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했고, 그에 따 른 새로운 세부 절차들을 수립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분서갱유 이후 한대 초기에 전수된 예경(禮經)은 고당생(高堂生)이 구두로 전수한 의례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이 의례는 한서에서도 ‘사례(士禮)’20)라고 지칭할 만큼 사 (士) 계층의 예제를 위주로 수록하고 있었으며, 상례에 있어서도 「사상례(士 喪禮)」라는 편명이 붙어 있던 만큼, 사 계층의 상례제도만을 기록하고 있었 다. 따라서 한대 초기에는 사 상위 계층에 대한 예제, 특히 군왕을 위한 상례 제도의 기록이 없었다.

그에 따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게 되었고, 한대 초기 의 유가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각종 제도들을 수립하게 된다.

우선 「예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때에는 고문경전 의례 56편과 금문경전 의례 17편이 있었다고 한다.21)

금문 의례는 바로 고당생이 전수한 의례 에 해당하고, ‘예고경(禮古經)’으로 표기된 것이 바로 고문 의례인데, 이 고문 의례는 출토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서에서는 “고문 의례는 노 나라 엄중 땅과 공자의 옛 구택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 중 17개 편은 금문  의례 17편과 내용이 유사하지만 금문 의례보다 39개 편이 더 많았다. …… 천자·제후·경·대부의 제도를 수록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비록 그 제도를 모 두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후창(后倉) 등이 사례(士禮)를 기반으로 천자의 제도까지 미루어 만든 설보다는 나았다.”22)라고 하였다.

20) 漢書, 「儒林傳」 : “漢興, 魯高堂生傳士禮十七篇.”

21) 漢書, 「藝文志」 : “禮古經五十六卷, 經七十篇.”

22) 漢書, 「藝文志」 : “禮古經者, 出於魯淹中及孔氏, 與十七篇文相似, 多三十九篇. …… 多天子諸侯卿大夫之制, 雖不能備, 猶瘉倉等推士禮而致於天子之說.”

이 기록을 통해서 한 대 초기에는 두 가지 방향으로 보완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토된 고문 의례의 기록을 통해, 사 상위 계층의 예제를 복원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후창 등의 경사(經師)가 기존의 사 계층의 예 제를 바탕으로 상위 계층의 제도를 새롭게 창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문 경전들은 대부분 망실되었고, 경사들이 했던 작업들도 하나의 단행본으로 집 적되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어떠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는 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대 때 편찬된 예기는 바로 이러한 의례에 대한 기문(記文)으로, 고문경전의 일부 내용과 후창 등이 창안한 예제 중 일 부 내용이 예기의 기록들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예기에 수록된 사 상위 계층의 예제, 특히 군왕의 상례제도와 관련된 기록들은 이러 한 작업의 결과물들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예기의 기록들은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예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군왕의 상례제도가 고문 의례를 통해 복원된 것인지, 아니 면 후창 등이 새롭게 창안한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예기(禮器)」 편에는 예의 칭(稱)을 설명하며, 예제(禮制)의 제정원리를 설명한 기록이 나 온다. ‘칭’이라는 것은 해당 계급에 걸맞다는 뜻으로, 각 계층의 차등적 예제 가 수립된 그 근거를 설명한 것이다.

「예기」에 수록된 칭은 그 원리를 8가지 로 분류하여, 다(多)와 소(少), 대(大)와 소(小), 고(高)와 하(下), 문(文)과 소(素)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수많은 예제들을 8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경 우에 가장 존귀한 경우를 기준으로 순차적으로 하위 계층들에 대한 차등적 예제를 제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多)’의 경우에 있어서, “예에서는 수 가 많은 것을 귀한 것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23)라고 규정하고, 그 예시로 장 례의식을 제시하며 “천자가 죽게 되면, 7개월이 지나고서야 장례를 치르는데, 항목(杭木)과 인(茵)은 5겹으로 하며, 휘장막인 삽(翣)은 8개로 한다.

제후 의 경우에는 5개월이 지나고서야 장례를 치르는데, 항목과 인은 3겹으로 하 며, 삽은 6개로 한다.

대부의 경우에는 3개월이 지나고서야 장례를 치르는데, 항목과 인은 2겹으로 하며, 삽은 4개로 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경우이다.”24)라고 하였다.

23) 禮記, 「禮器」 : “禮有以多爲貴者.”

24) 禮記, 「禮器」 : “天子崩, 七月而葬, 五重八翣, 諸侯五月而葬, 三重六翣, 大夫三月 而葬, 再重四翣. 此以多爲貴也.”

즉 여기에서 설명하는 상례제도 항 목은 3가지로, 첫 번째는 장례를 치르는 기간이고, 두 번째는 장지(葬地)에서 구덩이에 관을 안치하며 깔게 되는 항목(杭木)과 인(茵)의 수이며, 세 번째 는 장지로 영구를 옮기며 영구를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삽(翣)의 수이다.

이 러한 3가지 상례제도에 있어서 그 제도의 생성원리는 다(多)가 되고, 많은 것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제도의 정점에는 천자의 상례제도를 기준으로 두고, 순차적으로 낮춰가는 것이다.

나머지 소·대·소·고·하·문·소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다만 예기에는 군왕의 모든 상례제도가 수록된 것이 아니며,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전 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후창 등이 새롭게 창안한 군왕의 상례제도는 이러한 기준에 따라 제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기에는 또 제정원리는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군왕만의 상례제도가 기 록된 것도 있고, 천자를 중심으로 순차적인 차등을 기록한 제도들도 나타난 다.

우선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우선 관(棺)을 설명한 기록에서, “천자가 사용하는 관(棺)은 4겹으로 만든다.

첫 번째 관은 물소와 들소의 가죽으로 만든 관으로, 시신을 직접 감싸는 관이 되는데, 그 두께는 3촌이다.

그리고 그 겉에는 피나무로 만든 이관(杝棺)이 있게 되니, 1겹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겉에는 가래나무로 만든 재관(梓棺)이 있게 되는데, 2겹으로 되어 있어서, 안쪽에 있는 관을 속관(屬棺)이라고 하며, 바깥쪽에 있는 관을 대관(大棺)이 라고 부른다.

이처럼 4중으로 되어 있는 관들은 상하 및 사방을 둘러싼 형태 로 제작한다.”25)라고 설명한다.

이 기록에는 천자의 관 제도만 수록되어 있 고, 그 하위 계층에 대한 상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천자의 제도를 기준 으로 순차적인 차등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정현은 그에 따라 천자의 관을 이처럼 여러 겹으로 만드는 것은 “깊숙하게 감추는 것을 숭상했 기 때문이다.”26)라고 설명하고, 나머지 계층들에 대해서 “제공(諸公)은 관을 3겹으로 만들고, 제후(諸侯)는 2겹으로 만들며, 대부들은 1겹으로 만들고, 사 는 겹으로 만들지 않는다.”27)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또 관과 관련해서, 예기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게 되면 자신의 시신을 안 치할 관(棺)을 만들고, 매년 한 차례 옻칠을 하고, 그 속에 물건을 채워둔다 .”28)라고 하였다.

25) 禮記, 「檀弓上」 : “天子之棺四重, 水兕革棺被之, 其厚三寸, 杝棺一, 梓棺二. 四者 皆周.”

26) 禮記注, 「檀弓上」 : “尙深邃也.”

27) 禮記注, 「檀弓上」 : “諸公三重, 諸侯再重, 大夫一重, 士不重.”

28) 禮記, 「檀弓上」 : “君卽位而爲椑, 歲一漆之, 藏焉.”

이 기록에는 군왕 이외의 계층에 대한 예제가 나타나지 않 아, 그 제도의 차등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대상을 ‘군(君)’으로 한정한 것으 로 보아 군왕만을 위한 상례제도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와 관련해서 군왕의 관곽(棺槨) 제도를 설명한 것이 있는데, “천자가 죽었을 경우, 우인(虞人)에게 명령을 내려서 수도 안에 있는 사당의 나무들 중 천자의 관 (棺)과 곽(槨)의 재료로 쓸 수 있는 좋은 재목을 골라서 베고, 그 목재를 공 급하도록 시킨다.

그런데 만약 목재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사당을 없애버 리고 그 사람의 목을 벤다.”29)라고 하였다.

우인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 을 담당하던 관리이므로, 우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군왕으로 한 정된다. 또한 ‘백사지목(百祀之木)’이라는 것은 수도 안에 있는 모든 사당의 나무들을 뜻한다.

고대 사회에서 사당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그 중요도와 상징성은 매우 크다.

그런데도 군왕이 죽었을 때 이 사당 주변에 심 어둔 나무를 베어 군왕의 관곽을 만든다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바치지 않는 사당과 그 담당자에 대해서는 사당을 폐지하고 담당자에 게 사형을 내리는 형벌을 시행한다고 했다.

이것은 당시 군왕의 권위를 이러 한 사당의 신령보다 높은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 계층의 상례는 한 집안에서 이뤄지는 제도이다. 따라서 그 제도의 규모 는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주는 한 나라의 주인이다.

따라서 군왕만의 상례제도는 규모면에 있어서 다른 계층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예기 에서는 이러한 사안을 감안하여, 군왕만의 특별한 제도들을 만들어내는데, 초 혼(招魂)의식의 제도를 통해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혼은 죽은 자의 혼 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의례 「사상례」편을 살펴보면, 사 계층의 초혼의식이 자세히 나타나는데, 우선 “초 혼을 할 한 사람이 죽은 자의 작변복 하의를 상의에 연결하여 좌측 어깨에 메 고 옷깃을 자신의 허리띠에 꽂는다.

동쪽 추녀의 앞에서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으로 올라가서 중앙까지 가 북쪽을 향해 옷을 흔들며 혼령을 부르는데, ‘아무 개는 돌아오라!’라고 세 번 외치고 옷을 당 앞으로 던진다.”30)라고 하였다.

29) 禮記, 「檀弓下」 : “虞人致百祀之木, 可以爲棺槨者斬之. 不至者, 廢其祀, 刎其人.”

30) 儀禮, 「士喪禮」 : “復者一人, 以爵弁服, 簪裳于衣, 左何之, 扱領于帶. 升自前東榮, 中屋, 北面, 招以衣, 曰, “臯某復!” 三, 降衣于前.“

이것은 사 계층의 상례제도이다.

따라서 초혼을 하는 자 또한 신하가 아닌 임 시적으로 상사를 담당하게 된 유사(有司)가 맡게 된다.

그러나 군왕의 경우 에는 휘하에 신하들이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자의 경우에는 하채(夏采) 라는 관리31)와 제복(祭僕)이라는 관리32) 등이 담당하게 되며, 제후의 경우 에는 소신(小臣)이 담당하게 된다.33)

또 초혼을 하는 자에 있어서 사는 1명 이 담당하지만, 그 상위 계층들은 자신의 관직 등급인 명(命)의 수에 맞추게 되어, 천자의 경우에는 12명, 상공(上公)은 9명, 삼공(三公)은 8명, 후작과 백작은 7명, 천자에게 속한 경은 6명, 자작과 남작은 5명, 천자에게 속한 대 부는 4명 등이 맡게 된다.34)

또 초혼의식에 사용되는 죽은 자의 의복에 있어서, 사는 작변복을 사용한 다고 했는데, 작변복(爵弁服)의 작변은 적색과 흑색이 뒤섞인 30승(升)의 포 로 만들고, 상의는 검은색의 명주로 만들며, 하의는 분홍색의 명주로 만들게 된다.

이 의복은 예복(禮服)에 해당하지만 다른 예복들에 비해 등급이 낮은 것이다.

반면 제후의 경우에는 포의·면복·작변복을 사용하게 된다.35)

포의(褒 衣)는 천자의 명령을 받아 제후가 되었을 때 천자가 하사해준 복장을 뜻한다.

면복(冕服)의 경우에는 여섯 가지로 구분되는데, 대구(大裘), 곤면(袞冕), 별 면(鷩冕), 취면(毳冕), 희면(希冕), 현면(玄冕)이 그것이다.

이때 천자는 대 구부터 현면까지 여섯 가지 면복을 모두 사용하고, 상공은 곤면으로부터 그 이하의 5개 복장, 후작과 백작은 별면으로부터 그 이하의 4개 복장, 자작과 남작은 취면으로부터 그 이하의 3개 복장을 사용하게 된다.36)

초혼을 시행하는 장소에 있어서도, 사는 자신이 거주하던 건물의 지붕에서 만 시행한다.

그러나 군왕의 경우에는 그 장소가 소침(小寢), 대침(大寢), 소 조(小祖), 태조(太祖), 고문(庫門), 사교(四郊)로 늘어난다.37)

31) 周禮, 「天官·夏采」 : “夏采; 掌大喪以冕服復于大祖, 以乘車建綏復于四郊.”

32) 周禮, 「夏官·祭僕」 : “祭僕; …… 大喪, 復于小廟.”

33) 禮記, 「喪大記」 : “小臣復.”

34) 儀禮注疏, 「士喪禮」 : “天子三公八命, 其卿六命, 大夫四命, 上士三命, 中士再命, 下士一命; 上公九命, 侯伯七命, 子男五命, 皆依命數, 九人以下. 則天子宜十二爲節, 當十有二人也.”

35) 禮記, 「雜記上」 : “復, 諸侯以褒衣冕服爵弁服.”

36) 禮記注, 「雜記上」 : “冕服者, 上公五, 侯伯四, 子男三.”

37) 禮記, 「檀弓上」 : “君復於小寢·大寢·小祖·大祖·庫門·四郊.”

‘소침’은 고조 이하 선조들의 침(寢)을 뜻하고, ‘대침’은 시조의 침에 해당한다.

‘소 조’는 고조 이하의 선조 묘(廟)에 해당하고, ‘태조’는 시조의 묘에 해당한다.

‘고문’은 제후에게 있어서는 고문(庫門)이라 부르고, 천자에게 있어서는 고문 (皐門) 또는 곽문(郭門)이라고도 부르는데, 궁성의 가장 바깥에 있는 문을 뜻한다.

‘사교’는 네 방면의 교(郊)로, 도성에서 100리(理) 떨어진 지점까지 를 교라고 부른다.

따라서 네 방면의 교라는 것은 교 지역 중 네 방면에 설치 된 교 지역의 관문을 의미한다.

군왕의 상례는 국가차원의 상사이기 때문에, 초혼에 있어서도 단순히 거주하던 건물에서만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 의 중요 장소에서 모두 시행했던 것이다.

또 초혼을 하며 외치는 말에 있어서 남자는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고, 여자의 경우에는 자(字)를 부르게 되어 있 다.38)

그러나 천자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천자시여 돌아오소서.”39)라고 부른 다.

그 이유에 대해 공영달(孔穎達)은 “천자의 경우 이름이나 자(字)로 부르 지 않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는 신하는 군주를 이름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 이며, 두 번째는 천하를 두루 통솔하는 자는 천자 한 사람 밖에 없기 때문이 다.”40)라고 설명한다.

38) 禮記, 「喪大記」 : “凡復男子稱名, 婦人稱字.”

39) 禮記, 「曲禮下」 : “復, 曰天子復矣.”

40) 禮記正義, 「曲禮下」 : “王者不呼名字者, 一則臣子不可名君, 二則普天率土, 王者一 人而已.”

즉 천자는 존귀한 존재이므로, 신하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없고, 또 천하에 오직 한 사람만 있기 때문에, 초혼에 있어서도 ‘천자 (天子)’라고만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군왕에 대한 존숭과 그에 따른 차등적 제도를 나타낸다.

이처럼 예기에는 신분에 따른 각종 차등적 제도들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제도를 상기(喪紀)로 규정하고, “천자는 맹동(孟冬)의 달에, 유사에게 명령하 여 상기를 신칙하니, 상복의 상의와 하의가 정해진 법도에 맞는지를 변별하 고, 시신을 안치하는 관곽이 정해진 법도대로 두껍게 하는지 아니면 얇게 하 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며, 묘역을 정해진 법도대로 크게 하는지 아니면 작게 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봉분을 정해진 법도대로 높게 하는지 아니면 낮 게 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며 두텁고 얇게 하는 척도를 자세히 살펴보고, 귀천의 등급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시킨다.”41)라고 했다.

이러한 신분에 따 른 차등적 제도들은 군왕을 중심으로 수립된 것이다.

또 군왕에 의해 제정된 제도의 준수는 군왕에 대한 복종을 뜻하고, 신분 체제를 공고히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규정의 준수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천자가 직 접 유사에게 명령을 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제도의 준수 여부를 감독해야 한 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례는 혈연관계 내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그 대상은 죽 은 자의 가족과 친족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군왕의 상례는 혈연관계에 속한 가족과 친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제정된 방상 삼년상 제도에 따라 신하들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신하들에 대한 상례규정 또한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곡(哭)·용(踊)·상장(喪杖) 제도 등을 통해 서 확인할 수 있다.

‘곡’은 죽은 자에 대해 울부짖는 의식이고, ‘용’은 곡을 하 며 발을 구르는 의식이다.

상례 초반에는 수시로 곡과 용을 하게 되어 있지 만, 일정 시일이 지나게 되면, 아침 저녁으로 특정 시간을 정해 빈소에서 곡 과 용을 시행한다.

또 그 대상은 주로 상주(喪主)와 중주인(衆主人)들로 제 한되는데, 이들은 죽은 자의 가족들이다.

그러나 군왕에 대해 곡과 용을 할 때에는 왕위의 계승자와 그 가족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예기에서는 말단 관리에 해당하는 사 계층까지 모두 곡과 용을 하 는 장소로 들어와 자신의 대열에 합류한 이후에 시행하도록 규정한다.42)

또 천자의 상에서는 성(姓)을 구별하여 곡을 한다는 규정을 만든다.43)

정 현은 이 규정에 대해 천자의 상에 임하는 제후들에 대한 규정으로 설명하며, 동성(同姓)·이성(異姓)·서성(庶姓)에 따른 자리 구분이라고 하였다.44)

41) 禮記, 「月令」 : “飭喪紀, 辨衣裳, 審棺槨之厚薄·塋丘壟之大小高卑, 厚薄之度·貴賤 之等級.”

42) 禮記, 「檀弓上」 : “士備入而後朝夕踊.”

43) 禮記, 「檀弓上」 : “唯天子之喪, 有別姓而哭.”

44) 禮記注, 「檀弓上」 : “使諸侯同姓·異姓·庶姓, 相從而爲位.”

‘동성’ 은 천자와 동성인 제후로, 친족관계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이성’은 천자와 혼 인으로 맺어진 인척관계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서성’은 천자와 아무런 친족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자들을 뜻한다.

제후들은 천자에게 있어 신하의 입장 이 되고, 이들은 모두 군왕인 천자의 상사에 참여하게 되므로, 동성·이성·서성 에 따른 자리의 배열에 참여하여 곡을 하는 것이다. 예기의 기록뿐만 아니 라 주례에도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는데, 우선 ‘내종(內宗)’이란 관리는 천 자의 상이 발생하면, 여자들에 대해 내종과 외종을 구별하여 서열에 따라 곡 하는 자리를 정해준다고 했다.45)

이 여자들은 내종(內宗)과 외종(外宗)에 해 당하는 자들이다.

‘내종’은 천자와 동성인 여자들과 천자의 오속(五屬)에 속 한 자들의 딸을 의미하므로, 천자와 친족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반면 ‘외종’은 천자의 고모 및 자매의 딸 및 외가 친족의 부인들을 뜻하여 천자와 친인척관 계에 속한 자들도 있지만, 외종에는 친인척관계와 상관없는 신하의 부인들도 포함된다.

즉 천자와 친족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여자들 또한 곡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또 조석곡(朝夕哭)의 의식은 아니지만, 궁궐을 호위하 는 말단관리인 호분씨(虎賁氏)도 군왕의 장례(葬禮)를 치를 때 견거(遣車)를 따라가며 곡을 한다고 했다.46) 이 외에도 상복(喪服)47), 상을 치르며 잡게 되는 상장(喪杖)48), 임시거처지인 거려(居廬)49)에 대해서도 신하들에 대한 별도의 규정들이 나타난다.

45) 周禮, 「春官·內宗」 : “大喪, 序哭者”

46) 周禮, 「夏官·虎賁氏」 : “及葬, 從遣車而哭.”

47) 禮記, 「檀弓下」 : “天子崩, 三日, 祝先服; 五日, 官長服; 七日, 國中男女服; 三月, 天下服.”

48) 禮記, 「喪服四制」 : “三日授子杖, 五日授大夫杖, 七日授士杖.”

49) 禮記, 「雜記上」 : “大夫居廬, 士居堊室.”

위 논의들을 종합해보면,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는 군왕이라는 신분의 특수 성으로 인해, 상례의 규모가 확장될 수밖에 없었고, 또 신하들도 상례를 치르 는 대상에 포함되어, 신하들이 준수해야 하는 별도의 규정이 필요로 하게 되 었다.

이러한 제도들은 고문 의례의 기록들을 통한 복원과 후창 등의 경사 들이 새롭게 창안한 제도들도 보완되는데, 예기의 상제 기록들은 바로 이 러한 작업의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또 이것은 군권의 강화와 함께, 군왕 에 대한 절대적인 존숭과 복종의 영향을 받은 전국말기와 전한초기 유가들이 고안해낸 제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들은 존왕사상의 특징을 반영한 것들 이라 추정할 수 있다.

Ⅴ. 선충후효(先忠後孝)의 변례(變禮) 조항

상례는 부모에 대한 슬픔으로 인해 시행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 동안 상주(喪主)에 해당하는 자식은 외부 행사나 자신이 치르고 있는 상과 관련없는 것에는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증자가 삼년상을 치르는 도중 남의 상사에 조문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공자는 “자신이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라면, 소상(小祥)을 치른 상태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가서 뭇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며, 뭇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다. 군자는 예법대로 시행하여 애통한 감정을 나타낼 따름인데, 삼년상을 치르는 도중에 남의 상에 가서, 자신의 애통한 감정을 누그러트리 지도 못한 채, 남을 위하여 조문을 하고 곡을 하는 것은 또한 허례(虛禮)가 아니겠는가?”50)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50) 禮記, 「曾子問」 : “曾子問曰: 三年之喪, 弔乎. 孔子曰: 三年之喪, 練, 不群立, 不旅 行, 君子禮以飾情, 三年之喪而弔哭, 不亦虛乎.”

즉 상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에 자식은 부모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지속된다.

따라서 다른 의식에 참여할 의지조차 없게 되며, 만약 다른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허례가 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효를 강조하고 부모에 대한 삼년상을 고수 했던 초기 유가사상의 기조와 일치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상례는 단시일내에 치르는 것이 아니며, 만 25개월 또는 27개월이 라는 긴 기간 동안 시행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군왕의 상사와 개인의 상사가 겹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상황에 따른 대처법이 바로 변례(變禮) 조항이며, 이러한 변례 조항들을 위주로 기술한 문헌이 예기의 「증자문(曾 子問)」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례 조항들은 철저히 군왕을 중심으로 제정된 다.

이것은 군왕에 대한 충(忠)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대부와 사가 자기 부모의 상을 치르며 탈상(脫喪)을 앞두고 있는데, 상을 끝내 기 이전에 군왕의 상이 발생한 경우, 변례 조항에서는 군주에 대한 상복을 착 용하게 되었다면 개인의 상복은 착용할 수 없으므로, 부모에 대한 탈상 또한 치를 수 없다고 규정한다.

또 상례 규정에서는 정해진 시기를 넘기게 되면 해 당 제도를 소급하여 지낼 수 없다고 했으므로, 부모에 대한 탈상은 군주의 상 사가 완전히 끝난 뒤에 부모에 대한 성대한 제례(祭禮)로 대체한다고 했 다.51)

여기에서는 개인의 상사보다 군왕의 상사가 우선시된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군왕의 상사가 끝난 시점에 부모에 대한 탈상을 소 급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선왕이 예법을 제정하며, 시기를 넘기게 되면 시행 하지 않는 것을 예로 규정했으므로, 이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탈상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왕이 제정한 예법을 어기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52)

여기에서도 자식의 감 정보다는 국가에서 제정한 규범이 우선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군주의 상이 발생하여 발인을 하는데 부모의 상이 발생한 경우에 있어 서도, 자식은 군주의 상을 치르는 장소에 머물며 하관(下棺)을 끝마친 뒤에 야 집으로 돌아간다고 규정하였고,53) 반대로 부모의 상이 발생하여 발인을 하는데 군주의 상이 발생한 경우에는 부모의 무덤을 만든 뒤에 군주에 대한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을 치르는 장소로 찾아간다고 규정한다.54)

51) 禮記, 「曾子問」 : “曾子問曰: 大夫·士有私喪, 可以除之矣, 而有君服焉, 其除之也, 如之何. 孔子曰: 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 於是乎, 有過時而弗除也, 君之 喪服除而后, 殷祭, 禮也.”

52) 禮記. 「曾子問」 : “曾子問曰: 父母之喪, 弗除, 可乎. 孔子曰: 先王制禮, 過時弗擧, 禮也. 非弗能勿除也, 患其過於制也, 故君子過時不祭, 禮也.”

53) 禮記, 「曾子問」 : “曾子問曰: 君之喪, 旣引, 聞父母之喪,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而歸, 不俟子.”

54) 禮記, 「曾子問」 : “曾子問曰: 父母之喪, 旣引, 及塗, 聞君薨,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改服而往.”

이 두 상황 은 앞뒤의 대상만 서로 뒤바뀐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군주의 상을 우선시하 는 경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은 되돌아간 이후의 상례 규정이 생략되 었기 때문이다.

군주에 대한 하관을 마치고 자식이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상주로서의 역할 때문이며, 빈소 등을 마련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주요 시점 마다 군주의 상사에 참여하게 되어, 부모에 대한 상복을 벗고 군주에 대한 상 복을 착용하게 된다.

또 부모의 상사에서 하관을 하게 되면 집으로 되돌아간 뒤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를 비롯한 주요 절차들을 진행해야만 하는데, 이 때에는 군왕의 상이 더 우선되어 상주로서의 역할을 중지하고 군주에 대한 상복을 입고 군주의 상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례 조항에서 도 군주의 상사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군왕의 제례에 대한 변례 조항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례가 개인의 상사보다 우선시되는데, 예를 들어 제부나 곤제 등 의 상이 발생했을 때, 이미 숙계(宿戒)를 한 상황이라면 군주의 제사에 참여 해야 하고, 제례가 모두 끝난 뒤에야 궁문 밖으로 나와 제복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상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55)

숙계라는 것은 제사 3 일 전에 시행하는 재계인데, 군주의 제례에 참여할 자들이 따르는 것이다.

즉 상사가 발생하더라도 이미 간택이 되어 군주의 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국가의 일이 더 우선시되므로 개인의 상사를 미뤄야 한다는 규정이다.

또 군 주의 시동(尸童)으로 선발된 자에게 집안 내의 상인 내상(內喪)이 발생한 경 우에 있어서도, 별도의 공간에 머물며 재계를 이어나가고, 군주의 제사가 끝 날 때까지 기다린 뒤에 집으로 되돌아와 상을 치른다고 규정한다.56)

제부나 곤제의 상, 또 내상의 경우가 아닌 부모의 상이 발생했더라도, 이미 군주의 제사에 참여한 상태라면, 제사가 모두 끝난 뒤에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기 물의 세척상태를 감독하는 말단 관직의 일을 맡은 경우에도 부모의 상이 발 생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승낙을 얻은 뒤에야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57)

55) 禮記, 「雜記下」 : “如諸父昆弟姑姊妹之喪, 則旣宿則與祭, 卒事出公門, 釋服而后歸. 其他如奔喪之禮. 如同宮, 則次于異宮.”

56) 禮記, 「雜記下」 : “曾子問曰, 卿大夫將爲尸於公, 受宿矣, 而有齊衰內喪, 則如之何? 孔子曰, 出舍乎公宮以待事, 禮也.”

57) 禮記, 「雜記下」 : “大夫士將與祭於公, 旣視濯而父母死, 則猶是與祭也. 次於異宮, 旣祭, 釋服出公門外, 哭而歸, 其他如奔喪之禮. 如未視濯, 則使人告, 告者反而后哭.”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제례를 시행하게 되어 곡에 대한 금령을 내리면, 신하는 부모에 대한 상사에서 곡을 중지하게 된다.58)

이처럼 국가의 제례는 개인의 상사보다 우선시되었는데, 이것은 자식의 효보다는 군주에 대 한 충을 우선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또 개인의 상사와 국가의 정무(政務)에 있어서, 본래의 규정에는 전쟁 등 의 중요 사안에 있어서는 상사를 중지하고 군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래 서 「증자문」에서 자하는 두 차례에 걸쳐, 이러한 규정이 맞는 것인지 공자에 게 질문했던 것이다.59)

이에 대해 공자는 “군자는 남의 상을 빼앗지 않으며, 또한 부모에 대한 마음을 빼앗을 수도 없다.”는 기문을 인용하여, 하후씨 때 에는 부모의 빈소를 차린 뒤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은나라 때에는 장례를 치 르고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부모의 상을 치르는 도중에 국가의 정무에 복귀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고,60) 또 옛날 노나라 백금(伯禽)은 부득 이하게 전쟁에 참여했지만, 삼년상을 치르면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여 전쟁 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61)

「증자문」에 나타난 공자의 두 대답은 개 인의 상을 우선하는 초기 유가사상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예기의 다 른 기록에서는 국가의 정무에 중점을 두어, “삼년상을 치르는 경우에는 대상 (大祥)을 끝내고서 부역에 참여한다.

기년상(期年喪)을 치르는 경우에는 졸 곡(卒哭)을 하고서 부역에 참여한다.

대공복(大功服)의 상을 치르는 경우에 는 장례를 끝내고서 부역에 참여한다.

소공복(小功服)과 시마복(緦麻服)의 상에서는 빈소를 차린 뒤에 부역에 참여한다.”62)라고 말하고, 또 “장례를 끝 내고서 남과 함께 서 있을 때, 제후는 천자의 일은 말해도 자기 국가의 일은 말하지 않는다.

58) 禮記, 「雜記下」 : “國禁哭則止, 朝夕之奠, 卽位自因也.”

59) 禮記, 「曾子問」 : “子夏問曰: 三年之喪, 卒哭, 金革之事, 無辟也者, 禮與, 初有司 與.” / 禮記, 「曾子問」 : “子夏曰: 金革之事, 無辟也者, 非與.”

60) 禮記, 「曾子問」 : “孔子曰: 夏后氏, 三年之喪, 旣殯而致事, 殷人, 旣葬而致事, 記 曰, 君子, 不奪人之親, 亦不可奪親也, 此之謂乎.”

61) 禮記, 「曾子問」 : “孔子曰: 吾聞諸老聃曰, 昔者, 魯公伯禽, 有爲爲之也, 今以三年 之喪, 從其利者, 吾弗知也.”

62) 禮記, 「雜記下」 : “三年之喪, 祥而從政. 期之喪, 卒哭而從政. 九月之喪, 旣葬而從 政. 小功緦之喪, 旣殯而從政.”

대부와 사가 이러한 경우에 처한다면, 국가의 일은 말해도 자기 집안의 일은 말하지 않는다.

제후가 장례를 마치게 되면 천자와 관련된 정 무가 제후의 조정에 들어올 수 있고, 졸곡(卒哭)을 치러서 변질(弁絰)과 대 (帶)를 착용했다면, 천자와 관련된 정무를 처리한다.

대부와 사가 장례를 마 쳤다면, 국가와 관련된 정무가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고, 졸곡을 치러서 변질 과 대를 착용했다면, 국가와 관련된 정무를 처리할 수 있으니, 전쟁과 관련된 사안이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는다.”63)라고 말하고 있다.

63) 禮記, 「喪大記」 : “旣葬, 與人立, 君言王事, 不言國事; 大夫·士言公事, 不言家事. 君旣葬, 王政入於國; 旣卒哭, 而服王事. 大夫·士旣葬, 公政入於家; 旣卒哭, 弁絰·帶, 金革之事無辟也.”

이 두 기록은 앞서 공자의 대답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상을 치르게 되더라도 관직 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을 지나게 되면 다시 정무에 복귀해야 하고, 경중(輕重)을 구별하여, 각 계층마다 국가의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시 기를 정하고 있다.

특히 자하의 질문에 공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전쟁에 참 여해서는 안 된다고 한 부분에 있어서도, 졸곡을 마치게 되면 전쟁 등의 사안 에 대해서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논의들을 종합해보면, 군왕에 대한 상례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삼 년상에 준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존존의식이다.

즉 부모가 지극히 존귀한 만 큼 삼년상을 치르게 되는데, 군왕 또한 지극히 존귀한 존재이므로, 부모와 동 일하게 삼년상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군(君)과 부(父)를 동일한 존재로 인 식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군주에 대한 충을 일치시킨 사상이다.

그러나 군권 이 강화되고 통일왕조가 형성됨에 따라 국가윤리가 더욱 강화된다.

효와 충 에 있어서도 둘의 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충을 효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군왕의 상사와 개인의 상사가 겹쳤 을 때의 변례 조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모든 변례 조항에서는 군왕의 상사를 우선시하고 있다.

이것은 존왕사상에 입각한 선충후효(先忠後孝)의 경향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Ⅵ. 결론

본 논문에서는 예기에 기록된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의 특징인 존왕사상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존왕사상은 군왕에 대한 절대적인 존숭과 복종을 의미하 는 것으로, 군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전국말기의 시대적 흐름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유가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각종 제도와 사상들을 만들어내는데, 상례제도에 있어서도 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초기 유가에서 주장했던 삼년 상은 오직 혈연관계에 속한 부모에 대한 것으로 한정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는 혈연으로 맺어진 필연적 관계였고, 가정윤리인 효는 모든 윤리의식의 근간 이 되는 것으로, 취사선택이 불가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자식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제도이다.

반면 군신관계는 도의에 따라 임의적으로 맺게 되는 관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군왕에 대한 복상제도 자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존왕사상의 영향으로, 유가는 군왕을 위한 제 도를 수립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방상 삼년상 제도이다. 이 제도 는 군왕을 부모와 동일시하여, 군왕에 대해서도 삼년상을 치른다는 규정으로, 군왕과 부모를 동일시하는 군부일치(君父一致)의식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유가에서는 존귀한 자를 존귀하게 대하는 존존의식(尊尊意識)을 상례제도 중 하나인 복술(服術) 규정에 편입시켜, 방상 삼년상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더 나 아가 군왕을 중심으로 한 차등적 제도들을 고안하게 된다.

이것은 군왕이라는 계급적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다.

군왕은 통치영역이 넓고, 복상 대상에 친족 뿐만 아니라 신하들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사 계층의 상례제도와 동일하게 치 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존귀한 제도 규정을 군왕의 것으로 한정 하고, 신하들이 따라야 하는 각종 상례제도를 별도로 제정하게 된다.

그런데 상례기간은 단시일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

따라 서 군왕의 상례와 개인의 상사가 겹치는 변수가 발생하게 되는데, 예기에서 는 변례 조항들을 마련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변례 조항에 나타나는 경향을 분석해보면, 부모에 대한 상사보다는 군왕의 상사를 우선시하고 있으 며, 이것은 효보다는 충을 앞세우는 선충후효(先忠後孝)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예기는 이와 같은 군부일치, 존존의식, 선충후효의 사상을 반영하여군왕에 대한 복상제도를 제정하고 있다.

이것은 전국말기와 전한초기 유가사 상의 특징인 존왕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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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idea that respects the emperor in the mourning system of "Liji"

Jung, Byung-sub

The topic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funeral system for the king among the records of "Liji". In particular, it is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the idea that respects the emperor in this funeral system. The funeral system, which was claimed in the early days of studying abroad, was carried out in a blood relationship and was implemented within a family relationship. Therefore, it was not relate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 and his subjects. However, during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royal authority was strengthened, and absolute obedience to the king was strengthened. This is the idea that respects the emperor. Confucian scholars accepted these ideas and created systems and ideas for the king. One of them is the funeral system for the king. This system identified the king with the parents of the servant, and also followed the funeral system of the servant's parents for the king. In addition, Confucian scholars incorpor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monarchs and subjects not related to blood relations into the funeral system. In the process, a new funeral system was devised. This appears to be a king-centered discriminatory funeral system. The subjects came to value the king's funeral more than the funeral for their parents. This is an idea that prioritizes loyalty to the state over filial piety to parents. And this is the characteristic of Confucianism that emerged at the end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and the early Han Dynasty. Keywords : the idea of equating the king with his parents, the idea of treating the dignified with dignity, the funeral rites system, the idea that respects the emperor, an idea that prioritizes loyalty to the king

유교사상문화연구 제95집 / 2024년 3월

투 고 일 : 2024년 1월 22일 심사완료일 : 2024년 3월 27일 / 게 재 확 정 일 : 2024년 3월 30일

『예기』의 군왕 복상제도(服喪制度)에 나타난 존왕사상(尊王思想)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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