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본 연구는 ‘북에서 삼국시대의 불교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에서 ‘북에서의 삼국시대 불교철학’ 전체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남에서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북에서는 ‘삼국 시기’나 ‘세 나라 시기’라고 한다.
남북 모두 삼국 또는 세 나라는 고구려 (B.C.217? 혹은 B.C.37?~A.D.668), 백제(B.C.18~A.D.660), 신라(B.C.57~A.D.935)다.
한명환(2010) 은 ‘세 나라 시기’와 ‘발해 및 후기 신라 시기’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한다.
공간적으로 ‘세 나라’는 요 동 지역(학자에 따라 요서 지역까지)과 만주 일대 그리고 한반도다.
이 ‘세 나라’는 모두 600년에서 1,000년 정도의 역사와 특히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유서 깊은 나라다.
시간적으로 ‘세 나라 시기’는 기원 직전에서부터 백제(660) 고구려(668)가 멸망한 660년대까지 700년 정도를 가리킨다.
이 시기 고구려의 남서 지역이자, 백제와 신라의 해서지역에 있었던 나라들과 비교해 고구려 ․ 백제 ․ 신라들과 비교될 수 있다.
고구려의 영토와 존속 기간을 고려할 때, 당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성 했던 나라로 볼 수 있다.
이 세 나라 시기 고구려의 남서 지역이자, 백제의 해서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을 순서대로 보면, 후 한(後漢, B.C.25~220),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魏, 220~265), 유비가 세운 촉(蜀 또는 漢, 221~263), 손권이 세운 오(吳, 222~280)의 삼국, 진(晉, 265~316), 5호16국(五胡十六國, 304~439) 과 동진(東晉, 317~420),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386~581), 수(隋, 581~618)로 이어지는 여러 나 라들이 있었다.
이중 이 시기에 가장 오래 존속한 후한이 250년이고, 1-200년 된 나라들과 짧게는 50 년 내외 정도의 나라들이다. 한나라는 겉으로는 유교 이념으로 속으로는 법가 이념으로 제국을 지배했다.
한나라 이전 진나라 는 춘추전국 시대를 끝냈다고 하지만, 법가 이념으로 지배하며 철권통치를 하다가 진시황이 죽자 곧 망했다.
즉 80년 정도 밖에 안된 나라에 불과하다.
한나라가 망하고 유교 이념이나 법가 이념만으로 제국을 지배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끼던 시기에 불교가 동아시아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 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의 등극을 요청받던 시기였다.
동진의 권력자 환현(桓玄, 369~404)과 혜원 (慧遠, 334~416)의 논쟁이 “사문불경왕자(沙門不敬王者)” 논쟁, 즉 “사문은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논쟁이다.
이때 둘은 타협하고 사문이 임금에게 절을 하고, 불도에서 불교로 국교의 지 위를 얻게 된다.
즉 조성환(2023)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386~581) 시기 당시 “세상 사람들을 교 화하는 가르침”으로서의 ‘국교’로서의 지위를 ‘불도’에 주어, ‘불교’로 이름하고 ‘불교’를 통해 혼란 기에 ‘2교’ 체제의 안정된 국가를 만들고자 한 것이라고 한 설명1)과 북에서의 한명환(2010)이 세 나 라 시기 불교가 봉건계급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한 계급적 이익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비교 ․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나라들은 현재 관점에서 중국 지역에 있던 나라들이고, 고구려의 상당 부분도 지금의 중국 지 역에 있다.
남북이 모두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계승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남북의 학계가 고구려의 서남지역과 백제와 신라의 해서지역의 저 나라들에 비해, 고구려 ․ 백제 ․ 신라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제한적이지 않나 자문해본다.
한명환(2010)의 (특히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은 “고구려가 동방의 천 년강국으로서의 위용과 존엄”2)이라는 표현 등을 통해 고구려가 한(漢, B.C. 202~A.D. 220)과 대등 한 정도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바람과 같이 고구려에 대해 온전히 연구 ․ 평가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북에서는 어느 학자의 어떤 연구든 일관되게 ‘계급성 원칙’과 ‘역사주의 원칙’ 관점3)으로 연구되 어 기술되고 있다.4)
1) 조승환. 2023. 한국의 철학자들, 서울: 모시는사람들, 54-7쪽 참조.
2) 한명환. 2010. 조선철학전사2, 평양: 사회과학원출판사, 68쪽.
3) 북에서의 두 가지 연구 기준인 ‘계급적 원칙’과 ‘역사주의 원칙’을 간단히 살펴보자. ‘역사주의 원칙’은 “민족 문화유산의 력사적 진보성과 의의 및 그 제한성을 발생발전의 력사적 견지에서 분석평가하는” 것이다. ‘계급 적 원칙’은 “문화유산의 사상적 본질을 밝히며 계급적 견지에서 력사적 진보성과 제한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 는” 것이다. 북에서는 김철명이 1967년에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전통철학 연구의 목적인 ‘사회주의 새문화 와 생활기풍을 창조발전’시키고, ‘사회주의 애국주의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김 철명. 1967. 「사회주의하에서의 민족문화유산계승문제」, 철학연구1호, 사회과학원출판사, 16-7쪽 참조; 김 교빈. 2002. 「남북한 전통철학 연구현황과 전망」, 동양철학제18집, 동양철학회, 10쪽 참조.
4) 북에서의 철학 연구는 남에서의 철학 연구와 매우 다르다. 김교빈은 남의 연구 원칙인 ‘보편성 원칙’과 ‘객관 주의 원칙’에 대응되는 북의 연구 원칙을 ‘계급성 원칙’과 ‘역사주의 원칙’으로 요약한 바 있다. 김교빈. 2002. 「남북한 전통철학 연구현황과 전망」, 동양철학제18집, 동양철학회, 12쪽 참조.
여기에 더해 애국주의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북의 삼국시대 불교 철학 연구 관점도 비슷하다.
물론 유물론의 대척점으로서의 관념론과 종교에 기반을 둔철학이라는 점에서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런 점이 남의 일부 연구자들에게는 이미 낯익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북의 철학을 연구하는 이들 외에는 여전히 낯설고 잘알려져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 기 때문에 우리는 북의 이런 기존 연구 원칙으로 연구된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비교하고 비판하 며 설명하는 것이 여전히 요청된다 하겠다.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를 노예사회에서 최초의 봉건사회 국가로 역사적 전환이 일어난 시 기로서, 종교철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로 본다.
북한의 ‘역사주의 원칙’과 ‘계급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관에서 볼 때,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로도 볼 수 있다.
나는 한명환 (2010)의 ‘삼국시대 관념론으로서의 불교철학 이해’가 어떠하고, 그 이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 해하고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민하고자 한다.
나는 주 연구 텍스트로 한명환(2010)의조선철학전사(평양: 사회과학출판사) 제2권 중세철학사상1의 제1편 제4장 “세나라 시기 불교관 념론 철학”5)을 중심으로 다음순서에 따라 본문 내용을 작성할 것이다.
5) 한명환. 2010. 조선철학전사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68-95쪽.
우선, 한명환(2010)이 삼국시대 관념론으로서의 불교철학이 급속히 성행한 이유와 그 해독성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다음, 각 나라들에는 어떤 불교 승려(고구려 도랑, 신라 원측)와 어떤 불교철학(삼론종, 유식학)이 성행했고, 그에 대한 부정 ․ 긍정 평가를 어떻게 했는지 살펴볼 것 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한명환(2010)의 자세한 설명들과 최봉익(1976)의 짧은 설명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삼국시대에 전개된 민족을 구원하는 불빛이 어떻게 빛나게 되었고 빛났는지 해명하는 것은 ‘밝은 학문’ 즉 ‘철학(哲學)’이 떠안은 남북철학자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 삼국시대 관념론으로서의 불교철학이 급속히 성행한 이유와 그 해독성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발전된 철학 사상을 ‘진보 철학 사 상’으로서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의 발전’이라고 한다.(한명환(2010), 22쪽참조)
그렇지만, 내 가 보기에, 실제로는 ‘고구려의 애국적인 상무사상’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불교철학사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내심 생각한게 아닌가 추측된다.
그 이유는 내용의 깊이가 다르 다.
유물론은 체계화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고구려 승려 도랑의 경우 ‘동아시아 삼론종’6) 의 시조가 되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또 할애된 분량이 ‘유물론’과 비교해 ‘불교’가 더많다.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 ‘진보적 철학 사상’이 “진보와 반동간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크게 발 전”했고, 이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즉 ㉠“유물론과 변증법”,
㉡“종교미신비판사상들과 인민적인 륜리사상”,
㉢“애국적인 상무사상”이다.
이 ‘진보 철학사상’을 다루는 부분이 이 책의 제1편 제2장 인데, 총4절로 구성되었고, 총25쪽(22-47쪽) 분량이다. 그 가운데 ‘유물론’은 총7쪽(23-9쪽)이다.
‘고구려의 애국적인 상무사상’은 제3장 전체고 총21쪽(48-68쪽) 분량이다.7)
6) 나는 당시에 ‘중국’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당시에는 고구려 서남 지역에 여러 나라들이 명멸하고 있었 다. 한명환(2010)의 ‘중국’은 엄격성이 결여된 용어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고구려가 있 던 시기에 이런 나라는 없었다. 본 논문, ‘들어가는 말’ 참조.
7) 한명환(2010)이 ‘고구려의 애국적인 상무사상’을 강조한 이유는 북 체제가 ‘병영체제’(오구라 기조)라고 한 규정을 감안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김원명. 2023. 「북에서의 원효 화쟁사상 연구」, 철학157집, 한국철 학회, 45-6쪽 참조; 오구라 기조. 2017. 이신철 옮김. 2022. 조선사상사, 서울: 도서출판 길, 276쪽, 281-2쪽 참조.
그 다음에 제4장에서 다루는 ‘세나라시기 불교관념론철학’이 총28쪽(68-95쪽) 분량이다.
불교철학은 제5장에서 다루는 ‘유교 및 도교사상’의 총17쪽(96-112쪽)과 비교해도 상당히 더많은 분량이다.
한명환은 사실 상 ‘세 나라 시기’에서 다루는 철학사상 중 ‘불교관념론철학’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가장 깊 이 있게 다루고 있다.
유물론 사상은 ‘기(氣)’를 말하는 것이고(23-8쪽 참조), 변증법은 ‘음양(陰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29-34쪽참조)
세 나라 시기에 “유물론의 발전은 신비주의적이고 숙명론적인 종교관념론사상 들을 배격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운명에 대한 자각”을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소박한 유물론” 수준에 머물러 있고, “독자적인 유물론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중세유물론철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 다.(29쪽)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명환이 이에 대해 세 나라 시기 유물론이 중세 유물론철학 발전에 어떤 토대를 마련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까지 하지는 못한다.
한명환(2010)은 “이 시기 봉건통 치배들은 종래의 낡은 신숭배사상의 쇠퇴로 인한 반동적지배사상의 공백을 메꾸고 인민대중의 자 주의식, 투쟁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하여유교와 함께 당시 동방에서 하나의 사조로서 널리 퍼지고있 던 불교를 끌어들였다”(69쪽)고 한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한명환(2010)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 으로까지는 기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세 나라 시기에 실제 기철학으로 대표되는 유물론과 불교로 대표되는 관념론의 투쟁의 내용을 철학사적으로 기술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료가 없지 않은가.
한명환(2010)이 글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불교철학에 할애한 분량과 그 내용 의 깊이로 보면, ‘세 나라 시기 불교관념론 철학사상’이 위에 열거한 ‘유물론’과 ‘변증법’을 포함한 ‘진보적 철학사상’보다 더 중요하며, 실제 이런 유물론 대 관념론의 학문적 투쟁이 실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북이 ‘병영체체’의 ‘사회주의’ 국가고, 한명환(2020)이 여전히 ‘역사주 의’와 ‘계급주의’ 원칙이란 관점으로 조선철학사를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철학이 세 나라 시기 수입되고 ‘급속히 성행한 이유’에 대해 위의 원칙에 따라 보다 구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 누어 기술하고 있는 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지배계급이 사회발전에 따르는 새로운 통치사상의 전파를 절실히 요구하였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고구려보다는 고구려 서남쪽 지역의 나라들이 전쟁으로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불안정적인 시기기 때문에 새로운 통치 사상이 더 필요했고, 고 구려는 이 지역과 가까운 나라기 때문에 빨리 그 새로운 통치사상이 유입되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해 보인다.
둘째, “불교의 사상적내용들이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 요구와 리해관계에 부합되였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불교가 이른바《악》을 배격하고 《선》을 주장한다는 《권선징악》사상과 무 차별적인 《평등》, 래세에서의 《행복》과 같은 사상으로 인민대중을 유혹한데도 있었다”고 한다.(한 명환(2010), 72쪽)
이를 더 요약하면, ㉠‘봉건지배계급의 새로운 통치사상의 필요’와 ㉡‘봉건지배 계급의 계급적 요구와 이해관계의 부합’ 그리고 ㉢‘불교의 인문대중 유혹’으로 요약된다.
다음으로 당시 성행한 불교사상 조류(74쪽)와 불학자들(71쪽) 그리고 불교의 해독성(75쪽)을 간 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 나라 불학자들이 많이 연구한 불교사상조류는 대승불교계통과 소승불교계통으로 나뉘고, 대 승불교 계통으로는 삼론종과 유식종을 들고, 소승불교계통으로는 구사종과 성실종을 든다.
이 구사 종과 성실종은 초기에 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밖에 열반종계통과 율종계통 사상 들도 많이 유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삼론종 계열 불학자로는 고구려에는 도랑(승랑, 450경~530경)8), 인법사, 실법사, 그리고 일본 삼 론종 효시가 되었던 혜관과 도등, 백제에는 혜현과 관륵이 삼론사상에 정통했다고 본다.(한명환, 74 쪽)
신라 승려 언급은 없다.
고구려 승려 도랑은 양나라에 가서 삼론종의 시조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 고, 고구려 중 지황은 진나라에서 살파다학파 학설에 능통한 고승으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백제의 중 혜현은 당(唐, 618~907) 나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승려고, 신라의 원측(圓測, 613~96)은 유식 종의 대가로서 당나라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자장(慈藏, 590~658)은 황제가 비단 200필을 선물 로 줄 정도로 불교학설에 능통했다고 한다.
신라의 중 혜초는 직접 인디아를 여행하며 남긴 왕오천축국전 이란 기행문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71쪽)
그런데 혜초는 8세기 신라 승려로 세 나라 시기 승려가 아니다.9)
또 의정(635~713)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기록에 당나라 초 서역으로 구법 순례여행한 이 61명을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신라인이 8인(아리야발마법사, 혜업법사, 구본법사, 현태법사, 현각법사, 또 다른 법사 2인, 혜륜법사)이고 고구려인이 1인(哲禪師 제자1인 玄遊) 있다.10)
이들보다 100여년 전인 526년 백제 겸익이 서역 구법 순례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8) 승랑의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러 사료 기록들을 종합해 추정될뿐이다.
9) 혜초는 8세기 승려고, 왕오천축국전은 725~27년(박대제 ․ 원영만 연구책임, 13쪽) 혜초가 당시 인도와 중앙 아시아 5국을 여행하며 그 나라들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1908년 3월 프랑스 문헌학자 이자 서지학자인 펠리오(P. Pelliot)가 둔황(敦煌)의 일명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17석굴에서 발견한 문 서들 속에 총 227행의 잔간(殘簡) 5,839자의 두루마리 형태 필사본 1권(본래 3권이나, 본 필사본은 앞부분과 뒷부분이 없고 가운데 1권만 있음)의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9년 류오젠유(羅振玉)의 둔황 석실유서(敦煌石室遺書)1집에 이것이 수록되며 알려졌고, 1915년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이 글의 저자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점과 밀교승 불공의 6대 제자 가운데 한 명임을 밝혀냈다. 1934년 오타니 가쓰나 오(大谷勝眞)는 이 책이 절략본이 아니라 사록본이라고 주장했고, 30세 전후한 722년에 남해에서 인도로 출 발해 729~30년 사이 장안으로 귀환한 것으로 추정했다. 2010년 이후 혜초와 그의 책에 대한 남의 국내 연구자 들은 정기선, 박기석, 신은경, 박상영, 정병헌, 이정수, 박현규, 남동신 등이 있다.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 장되어 있다. 이것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 유일의 기록이다. 박대재 ․ 원영만(정산) 연구책 임. 임상희 교감 및 역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엮음. 2014. 왕오천축국전-돈황사본의 복원 및 역주-, 서울: 아연출판부 56-72쪽 참조.
10) 박대재 ․ 원영만(정산) 연구책임. 김복순 교감 및 역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엮음. 2015. 대당서역구법 고승전, 서울: 아연출판부, 16-8쪽, 49-52쪽 참조.
11) 윤병렬. 2020.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긴 철학적 세계관, 파주: 지식산업사, 143쪽 참조.
이들의 구법 순례여행은 어떤철학적 지향 을 뜻하는 것인가?
세 나라 가운데, 특히 신라 승려들의 구법 순례여행자가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를 생각하게 한다.
고구려에서 주로 많이 유행한 삼론종의 기본 사상은 ‘일체개공(一體皆空)’으로서 세계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고 ‘공’하다는 것을 말하는 사상으로 설명한다.
유식종은 원측을 비롯한 신라 불학자들 이 많이 연구한 것으로 설명한다.
유식종은 삼론종에 대립하여 나온 것으로 ‘만법유식(萬法唯識)’ 즉 ‘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라 설명한다.(한명환, 74쪽)
유식종 학자로 고구려와 백제 승려 언급은 없다.
한명환(2010)은 위에 설명된 모든 불교철학사상들이 “다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되는 반동적 세 계관들”로 규정한다.
그리고 “세 나라 인민대중의 사상의식과 사회발전에 커다란 해독을 끼쳤다”고설명한다.
우선 일체가 다 ‘공’하다고 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인생을 ‘고통’으로 규정하 는 것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모든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또 불교의 ‘열반’, ‘자비’, ‘평등’ 사상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고 ‘착취와 억압을 감수하며 관념상 위안’을 주어 ‘무저항주의’와 ‘현실도피’사상을 고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불교철학사상은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인민대중의 투쟁’을 가로막았고, “지배계급의 봉건적 억압과 착취를 사상적으로 묵인하고 비호해주는 반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판한다.(한명환, 75쪽)
또 불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노동 의욕’과 ‘삶의 의욕’을 잃고 ‘생산활동에서 이탈’하여, 산속 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무위도식’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절간건립, 불탑조성, 불상주조 를 ‘비생산적 활동’으로 비판하고, 각종 불교행사들로 ‘국가재정이 낭비’됐다고 비판한다.
불교는 전체적으로 생산력을 억제해 국력을 약화시켰고, 착취와 억압을 더욱 강화시켰고, 사회적 폐해를 강 화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큰 해독을 끼쳤다고 비판한다.(한명환, 75쪽)
전체적으로 한명환(2010)은 삼국시대 불교철학을 봉건지배계급의 인민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 의 지배질서를 합리화해주는 사상적 통치 수단으로 평가한다.
불교철학은 객관적인 물질 세계의 존 재를 부정하고 인간의 주관적인 심을 강조하는 허무주의, 현실도피사상, 노예적 굴종사상, 무저항 주의를 설교하는 종교사상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제4장을 마무리하면서 이와는 매우 다른 논조의 민족주의적 애국주의 적인 태도의 글로 마무리를 한다.(한명환, 95쪽참조)
나는 한명한(2010)의 설 명과 비판에서 논리적 비약과 모순, 근거 제시 부족을 발견한다.
한명환(2010)은 불교가 세 나라에 수입된 지 수십 년 만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의 각 분 야에 광범위하게” 퍼졌고, “유교사상과 함께 봉건지배계급의 사상적통치수단으로 확고”해졌다고 기술한다.(한명환, 74쪽)
여기서 한명환(2010)이 ‘수십 년 만에 불교가 세 나라에 그렇게 광범하게 유포됐다’고 할 때, 나는 “광범하게 유포됐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 십년 만에”라 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명환(2010)은 이 글 앞 부분에서 ‘불교가 전파된 후 급격히 보급되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부 분 가운데 두 번째 부분에서 “불교는 전통적인 민간신앙 및 민족심리와 결합되면서 더욱더 세나라 의 사회생활전반에 깊숙이 침투되었다”(70쪽)고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민 족심리와 결합되었다’는 내용과 앞에 ‘급속히 성행한 이유’ 세 가지와 비교해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 하고 있지 않다.
또 불교가 ‘급격히 보급’되고 ‘깊숙이 침투’된 이유와 ‘급속히 성행한 이유’ 사이에 모순과 불일치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3. 고구려 불교: 도랑(승랑)과 삼론학을 중심으로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중 고구려를 두 가지 점에서 강조한다.
첫째, 고구려가 세 나라 가운데 가 장 크고 강대하며 문화적으로 발전했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한 철학이 세 나라의 철학으로 발전 했다고 기술한다는 점이다.
둘째, 요동성 출신의 고구려 불학자 도랑(승랑, 450경~530경)이 476년 전후 서른 즈음에 고구려 요동 지역을 떠나 장안, 둔황, 양주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더 공부하고 (당 시 동아시아) ‘삼론종불교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김성철(2014)은 승조(僧肇, 384~414)를 구삼론 (舊三論), 승랑(450경~530경)을 신삼론(新三論)을 대표하는 인물로 본다.12)
로버트 버스웰(2014) 은 승랑이 중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최초의 한국인 승려로 추정되고, 삼론종 전통의 선구자로 간주되지만, 출신성분과 중국불교에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한다.13)
그렇지만 그는 UC 버클리 대학의 마이클 로저스(Michael C. Rogers)를 인용하면서 “한국인들은 그들 역사를 통틀 어 중화 문명에 활발히 참여하면서도 또한 항상 그들의 ‘문화적 자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14) 고 한다.
나는 한명환(2010)이 도랑(승랑)을 ‘중국삼론종불교 시조’라고 하는 표현이 아주 틀린말이 아니 지만, 다소 거칠게 느껴진다.
남의 김성철(2014)은 승랑(도랑)을 “구마라습 사후 수십 년이 지나면 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고삼론의 가르침을 재정비하여 중국 남조(南朝) 불교계에 착근(着根)시킨 인물”15)이라고 평가한다.
한명환(2010)은 그를 통해 고구려의 철학적 사유 수준이 매우 높았고, ‘백제와 신라보다 훨씬 앞 서 있었다’고 강조한다.
한명환(2010)은 고구려 상무정신을 강조하지만 고구려 불교의 성격을 국가 불교적이라고 하는 점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오구라 기조(2017)(이신철옮김, 2022) 는 고구려 불교 성격을 국가 불교적 성격과 삼론종 계통 중심이라고 설명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세 나라 가운데 고구려에 가장 먼저 불교가 들어왔다.
전진(前秦, 351~94) 전래설과 위(北魏, 386~534) 전래설 그리고 동진(東晋, 317~420) 전래설이 있다.
전진 전래설은 삼국사기, 삼국유 사, 해동고승전 설로서, 372년(소수림왕2년) 순도(順道)가 전진(前秦, 351~94)으로부터 불상과 경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위(北魏, 386~534) 전래설은 374년(소수림왕 4년) 아도(阿道)가 위(北 魏)로부터 불교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375년에는 불교사원이 처음 고구려에 세워졌다.
순도가 머물 던 곳을 성문사(省門寺) 또는 초문사(肖門寺)라 하고, 아도가 머물던 곳을 이불란사(伊弗蘭寺)라고 부른다.
동진 전래설은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따르는 것으로서, 동 진(東晋)의 지둔도림(支遁道林, 314~66)이 고구려 도인(道人, 불승을 가리킴)에게 글을 보냈다고 하 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16)
12) 김성철.2014. 「승랑과 승조: 생애와 사상, 영향과 극복에 대한 재조명」, 로버트 버스웰 외, 동아시아 속 한국 불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37쪽 참조.
13) 버스웰의 이런 유보적인 관점은 中朝佛敎文化交流史(黃有福 ․ 陣景富 저,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3) 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중국인 입장에서 고구려의 요동성 출신 고구려인을 중국인으 로 보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승랑의 현존 저술이 없는 것을 해석 관점에 따라 해석 내용이 달라질 여 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버스웰, 「동아시아 맥락에서 본 한국의 불교사상」(15-35쪽), 로버트 버 스웰 외. 2014. 동아시아 속 한국 불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7쪽 참조.
14) 로버트 버스웰, 「동아시아 맥락에서 본 한국의 불교사상」(15-35쪽), 로버트 버스웰 외, 동아시아 속 한국 불 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31쪽.
15) 김성철.2014. 「승랑과 승조: 생애와 사상, 영향과 극복에 대한 재조명」, 로버트 버스웰 외, 동아시아 속 한국 불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37-8쪽.
16) 오구라 기조. 2017. 이신철 옮김. 2022. 조선사상사-단군신화부터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서울: 도서출 판 길, 49-50쪽 참조.
도랑(승랑, 450?~530?)은 처음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왔다는 시점(상한 317년 하한 374년)과 비교 했을 때, 고구려 불교 전래 후 76년~133년 후에 태어났고, 30살 무렵 고향 요동성을 떠난다.
승랑은 불교 공부를 익히고 고구려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한명환(2010)은 제2절 ‘도랑의 철학사상’(76-85쪽)을 10쪽으로 구성해 고구려 불교를 대표하는 철학사상으로 설명한다.
우선 한명환(2010)이 ‘도랑(道朗)’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 다.
근대학문이 시작되면서 국내에서 ‘승랑’에 대한 최초 언급은 이능화(1918)의 조선불교통사에 서다.
이후 ‘도랑’과 ‘승랑’이란 이름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김성철(2011) 연구에서는 그간 한국 과 일본 학자들 연구를 모두 검토하고 ‘승랑’으로 확정하고 있다.17)
고구려인 불교와 관련해 거론되 는 승랑(도랑)계 승려들은 법랑, 부계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지역)인 승려 길장(吉藏, 549~623), 고 구려 승려 혜관 등이다.
그중 대표적인 이가 승랑(도랑)이다. 승랑(도랑)은 요동성 출신이다.
한명환 (2010)과 오구라 기조(2017)가 장수왕 대(413~91) 후기에 구마라즙(鳩摩羅什, 344~413) 및 승조(僧 肇, 384~414) 계통의 삼론(三論) 사상을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조는 장안 사람으로 경전과 역 사에 밝고, 특히 노자와 장자를 좋아했고 의지처로 삼았지만 귀의하기에는 부족함을 느꼈고, 유마 경을 보고 자신이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고 하고 출가한 사람이다.18)
17) 혜교의 고승전(高僧傳), 강총지의 「서하사비명(棲霞寺碑銘)」에서는 ‘승랑(僧朗)’이라 쓰고, 혜균의 대승 사론현의, 삼론조사전집(三論祖師傳集)에 실린 대승사론현의(大乘四論玄義) 인용문, 또 안징의 중론 소기(中論疏記)에서는 ‘도랑(道朗)’이라고 쓴다. 길장은 두 호칭 다 쓰지 않고, ‘섭론대사(攝論大師)’, ‘섭령 사(攝嶺師)’, ‘대랑(大朗)’ 등으로 쓴다. 김성철 교수(2011)는 ‘승랑’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철. 2011. 《승랑-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파주: 지식산업사, 36-44쪽, 409쪽, 각주2) 참조.
18) 김성철. 2014. 「승랑과 승조: 생애와 사상, 영향과 극복에 대한 재조명」, 로버트 버스웰 외, 동아시아 속 한 국 불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39쪽.
한명환(2010)은 제2절 ‘도랑의 철학사상’ 10쪽(76-85쪽) 중 처음은 도랑(승랑)과 삼론종의 불교 철학사적 배경 2쪽(76-7쪽)과 삼론종 내용4쪽(78-81쪽)을 다루고, 비판을 2쪽 분량(82-4쪽)으로 기 술하고, 의의를 1쪽 조금넘는 분량(84-5쪽)으로 기술하며 맺는다.
한명환(2010)은 인디아에서 동아시아에 삼론 사상을 전한 이는 구마라즙(344~413)이지만, 도랑 이후에야 삼론 사상은 성실론 사상을 비롯한 소승불교와 뚜렷이 구분되며 대승 공종의 면모를 갖추 게 되었고, 종파로서의 계승관계도 뚜렷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78쪽참조)
도랑(승랑)이 중론소 를 저술했다고 하지만, 현존 저술이 없다.
그래서 그의 삼론 사상을 직접확인하는 것이 불가하다.
보 통 길장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다.
한명환(2010)은 우선 인디아의 중관파 사상을 소개하고, 승랑의 삼론 사상을 설명한다.
한명환(2010)은 삼론종이 인디아의 중관학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종파로서, 중론, 백론, 12 문론의 3개 경전에 의거한 “일체개공(一體皆空)”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개괄한다.
이후 내용을 요약하겠다.
중관파에서는 이 공을 논증하기 위해 진제와 속제의 이제설(二諦說) 형식을 사용한다. 도랑은 이제설을 발전시켜 ‘삼종이제설’을 제기한다.
길장(吉藏, 549~623)은 도랑의 ‘삼종이제설’ 을 소개한다.
‘세 가지의 이제설’을 뜻하는 것이 ‘삼종이제설’이다.(78-80쪽)
첫 번째 이제설은 속제 는 유, 진제는 무라고 보는 견해다.
유에만 집착하는 보통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기 세운 것이다.(80쪽)
두 번째 이제설은 유나 무를 말하는 것은 다 속제라 하고, 비유비무를 진제로 하는 견해 다.(80쪽)
한명환(2010)은 길장은 두 번째 이제설까지 이전 불교철학에서 제기된 것이고, 세 번째 이 제설이 도랑 이래로 새롭게 제기된 것이라 밝혔다고 설명한다.(81쪽)
유․ 무의 견해, 비유비무견해 모두 속제로 보고, 유․ 무의 둘도 아니고 비유비무의 둘 아닌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진제라고 보는 세 번째 이제설이다.
도랑은 이런 경지가 ‘무소득(無所得)’의 경지고, 이것이 ‘중도(中道)’고, ‘참다 운 공(空)’이며, ‘진리’고, ‘세계의 실상’이라 보는 것이다.(81-2쪽)
비판 내용은 앞에서 다룬 승랑의 ‘3종2제설’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 판을 반복하는 수준이다.
도랑의 이제설 비판 내용은 우선, 기존의 이제설과 “일정한 차이”에도 불 구하고 “결국 관념론적인 견지에서 기존의 이제설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 ‘진여’를 논증하 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또 “3종2제설”에서 주장한 “무소득(無所得)의 중도”가 본 질적으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고취하는 ‘반동적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현실세계를 공으로 보고, 가상세계로 보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삶도 부정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도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주적 요구”나 “자연과 사회의 예속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라고 한다.(82쪽)
도랑의 삼론종 철학이 불교의 견해를 철학 이론으로 더욱 합리화하고 심화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극단적인 허무주의와 무저항주의, 현실도피사상을 설교하는 반동적 이론”(83쪽) 으로서, ‘인간의 운명 문제를 왜곡’하고, 이를 ‘그릇되게 해결하는 반동성, 비과학성, 해독성’이 있다 고 비판한다.
승랑의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의 숙명론적 특징이라고 한다. 그 다음 의의를 밝히는 내용은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철학적 사유 수준”을 언급하며, 도랑이 까 다롭고 번쇄한 불교철학을 이해했고, 독자적인 3종론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삼론종 철학자 들에게 영향”을 준 것과 “중국 사람들의 찬탄과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것, 고구려 불교학자 대부분 이 삼론종 불교철학자거나 삼론종 철학을 잘 이해했고, 고구려 삼론종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전반적으로 관념론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철학 발전과 동방철학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 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애국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평가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84-5쪽참조)
한명환(2010)은 고구려 불교학자 대부분이 삼론종 불학자거나 삼론종 철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 고 있다고 한다.(85쪽) 그런데 원효(元曉, 617~86)가 고구려 보덕(普德) 스님19)으로부터 열반경 강론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열반경을 주로 강의한 보덕으로 보아, 한명환(2010) 설명을 그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9)보덕은 650년(보장왕9년) 고구려를 떠나 백제 완산주 고대산으로 옮겨와 경복사를 지었다고 한다.
셋째, 고구려 불교는 국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한명환(2010)은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85쪽)
오구라 기조 (2017) 기술은 한명환(2010) 기술보다 상세하다.
551년경 혜량(惠亮)이 신라로 가 불교를 전했고, 혜자(惠慈) 및 담징(曇徵)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삼론종의 종조인 혜관(慧 灌)은 승랑(僧朗) 문하였던 길장(吉藏) 문하의 승려인데, 일본 스이코 천황 대에 간고지(元興寺)에서 공종(空宗)을 시작했다.
4. 신라불교: 원측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 신라 불교 대표자를 원측(圓測, 613~96)으로 보고, “제3절 원측의 철학사상”(85-95쪽)을 10쪽 조금넘게 기술하고 있다.
최봉익(1976)은 “2) 유식종불교철학과 그 해 독성”(39-42쪽) 제목으로 3쪽 남짓 설명하고 있다.
한명환(2010)의 원측 설명 내용이 분량과 내용 면에서 훨씬 자세하다.
원측은 세 나라 시기 말기 당(唐, 618~907) 나라에서 활동한 신라인 승려다.
그의 말년에는 서명사에 주석했다.
그는 법상유식종 철학의 창시자들인 현장(玄裝, 602~64), 규기 (窺基, 632~82)와 어깨를 나란히 한 승려 학자다.
남에서는 원측이 신라 출신의 동아시아인으로서 당나라에서 활동한 동아시아사상사 속에서의 불 학자로 규정한다.20)
20) 로버트 버스웰 외. 2014. 동아시아 속 한국 불교사상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참조.
그는 구유식과 신유식을 섭렵했기 때문에, 호법의 입장을 중시하는 규기 중심 의 자은학파 사상과 대립하는 경향에 주목한다.
이는 원측을 이단시하는 것과 관련을 갖는 것 같은 데, 구체적 내용 언급은 없다.
또 원측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향은 송고승전(권4, 당경사 서명사 원축전)에서 규기를 위한 현장 강의를 몰래 훔쳐들었다는 ‘도청설’ 사례로 생각되지만, 이에 대해 최 봉익(1976)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한명환(2010)은 자은종파의 원측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짧게 언급할 뿐 그 내용에 대한 기술은 없다.(최봉익, 39쪽참조; 한명환, 86-7쪽참조)
최봉익(1976) 설명에서는 “원측의 《유식종》불교사사상이 주로 도랑을 비롯한 《3론종》불교사상 에 대립하여 발생하고 발전하였다”(최봉익, 39쪽)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한명환(2010) 설명에서는 “유식종철학에서는 《일체개공》을 주장하는 삼론종철학에 대립하 여 세계의 사물현상들은 다 《공》이지만 오직《식》만은 존재하며 세계는 하나의 《식》의 변화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해서, 최봉익(1976)보다 엄밀하게 쓰고 있다.
즉 ‘원측’이나 ‘도랑’ 을 언급하지 않고, 유식종철학을 삼론종철학에 대립하는 철학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봉익(1976)과 한명환(2010)은 둘 다 삼론과 유식의 투쟁과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는 역사주의 원칙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봉익(1976)은 고구려 도랑(승랑)의 삼론종에서 ‘일체 가 다 공하다’고 물질세계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신라 원측의 유식학에서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보 면서 ‘세계가 오직 식의 작용’이라고 선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최봉익, 39쪽 참조)
한명환(2010) 은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하면, 정신 의식까지도 부정하게 되고 결국 불교자체도 부정하게 되므로, 식만은 존재하고, 이것이 세계의 다양한 가상적인 사물현상을 생산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것 으로 설명한다.(한명환, 88쪽참조)
이는 유식학이 중관학에 대한 전승과 비판 속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는 불교사적 관점이라는 틀 속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능하다.
그런데 도랑(승랑)의 삼론종과 원측 의 유식학 간 이론적 차이에 대입해, 원측에게 도랑(승랑)을 의식한 철학을 전개했다고 보는 데까지 나아가기 어렵다.
엄밀히 말해, 이는 실제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평가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렇지 만 한명환(2010)에게서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 다음비판 후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아뢰야식 설과 종자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그것들 모두 비판한다.
비판의 요지는 세 가지다.
첫째, 아뢰야식설이나 종자설 모두 관념론 철학의 한계와 신비주의 성 격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한명환, 88-89쪽 참조)
둘째, 종래 ‘무소득’의 ‘진여’로 표현된 ‘부처 신’이 유식종철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실체를 가진 존재’로 여겨져 ‘관념의 세계’, ‘부처의 세계’가 보다 뚜렷해졌다고 비판한다.
셋째, 인간의 운명 개척을 허무하다는 숙명론 관점이 삼론종철학이라 면, 인간의 운명이 아뢰야식과 종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숙명론적 관점이 원측의 유식종철학 관점이 어서, 인민대중의 운명 개척을 가로막는 매우 해독적인 철학이라고 비판한다.(한명환, 90쪽 참조)
결과적으로 원측의 유식철학은 인민대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통치배들의 억압과 착취을 강 화하는 계급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원측의 서명파가 규기 자은파의 교조주의적 태도를 배격하면서, 독자적인 견해들을 많이 주 장했다고 평가한다.
규기는 ‘8식체일설’을 주장했는데, 원측은 ‘8식체별설’을 주장한다고 설명한 다.(한명환, 90-1쪽참조)21)
21) ‘8식체일설’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스식, 아리야식의 8개 식의 본체와 성질이 동일하다 는 것이다. 반면에 원측의 ‘8식체별설’은 심(제8아라야식), 의(제7마나식), 식(6의식-안식)을 구분한다. 제1 식부터 제6의식까지는 본체와 성질이 같지만, 제7마나식과 제8아라야식은 본체와 성질이 다르다고 하는 것 이다. 제8아라야식은 앞의 7개 식이 발생하는 원인과 조건을 가지고 있고, 종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만물을 산생시킨다. 제7마나식은 ‘나’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이 관념을 고집하고 미혹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남지 6개 의식은 제7마나식의 ‘나’라는 관념에 기초해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에 해당하 는 모든 사물현상들과 그 이치를 식별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한명환. 2010. 조선철학전사2, 평양: 사 회과학출판사, 90-1쪽 참조.
또 원측은 진제(499~669)를 시조로 하는 섭론종의 9식설도 반대한다고 한다.(한명환, 91-2쪽 참조)
인식론에서 자은파의 ‘4분설’과 다르게, 원측은 ‘마음은 대상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1분설’을 주장한다고 설명한다.(한명환, 92-3쪽 참조)
불성 문제에 있어서는 자은파의 ‘5성각별설’에 대해 반대하고, 원측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 체개성불’을 주장한다고 설명한다.(94쪽참조)
한명환(2010)은 원측의 ‘일체개성불론’을 원측이 당 나라에서 민족적 차별을 하는 협애한 당나라 불학자들의 태도에 대한 반발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한명환, 95쪽참조)
그렇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고 있지 않다.
최봉익(1976)은 “2) 유식종불교철학과 그 해독성”(39-42쪽) 중에서 본체론(30쪽), 인식론(41쪽), 논리학(42쪽)으로 나누어 원측의 유식종철학을 설명한다.
본체론은 아뢰야식과 종자설을, 인식론 에서는 일체유식의 종전 내용을 심화했다고 일반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한명환(2010)이 전혀 언급 하지 않은 최봉익(1976)의 원측의 논리학 설명에서는 논제, 근거, 논증의 삼단논법 추리론식을 제기 하는 것과 발생․ 소멸과 같은 대립 개념이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견해를 내놓은 것에 대해 설 명한다.
그리고 당시의 논리학사적으로 의의가 있으나 자신의 불교철학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이 용한 것이라고 비판한다.(최봉익, 42쪽참조)
최봉익(1976)은 마지막에 총체적으로 “원측의 불교철학이 삼국시기 신라봉건귀족 계급의 이익 을 대변하고 있던 관념론 철학으로서 신라사회발전에 커다란 해독을 끼쳤다”(최봉익, 42쪽)고 평가 한다.
원측은 15세에 당나라로 간 신라 사람이다.
한명환(2010)은 삼국유사를 근거로 모량리 출 신으로 “중의 벼슬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한명환, 86쪽 참조)
그는 이후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다.
최봉익(1976)은 원측이 고구려 도랑(승랑)의 3론종 철학을 의식했다는 설명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 지 않다.
원측(圓測, 613~96)이 55세 때인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당했다.
그는 신라의 모량리 출신이고, 15세에 당나라로 갔고 귀국하지 않았다.
신라에서 중도 될 수 없는 출 신 성분의 사람이었고, 귀국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시 신라 봉건귀족의 계급적 이익에 힘썼다 고 할 수 있겠는가.
글의 앞뒤가 맞지도 않고, 이 주장의 근거도 없다.
원측은 불전 연구(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2권,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10권, 주별장(周 別章), 유식이십론소(唯識二十論疏) 2권, 성유식광초, 성유식응초, 관소연연론소(觀所緣 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因明正理門論本疏) 등 유식계통 문헌 주석서와 반야심경찬 (般若心經贊) 1권, 인왕경소(仁王經疏) 6권 등 반야 계통의 문헌)와 역경관으로서 불전 번역(대 승밀엄경(大乘密嚴經),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보우경(寶雨經), 화엄경(華嚴經) 등)에 힘썼던 증거가 더 많다.(한명환, 87쪽 참조)
원측의 연구와 번역 덕에 자은 규기의 법상유식과 다른 서명유식의 불학자 위치가 더 중요해 보인다.
즉 그에 대한 동아시아불교의 불교사적 평가가 더 중 요해 보인다.
한명환(2010)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동아시아) 유식종철학에 큰 자욱을 남겼다 고 평가하며, 신라에도 영향을 미쳐 승장, 도중, 순경, 둔륜, 대현과 같은 이름난 불학자들이 나왔다 고 한다.
한명환(2010)은 고구려 도랑과 함께 신라 원측은 “우리 민족의 철학사를 더욱풍부하게 해 주고 있다”고 제4장의 글을 맺는다.(한명환, 95쪽)
이는 앞에서도 당나라 자은파와의 투쟁적 성격과 독창적 견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중국을 의식한 애국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한명 환, 90쪽)
한명환(2010)은 당나라 혹은 삼국인이 아닌 사람이나 학파와 비교할 때는 내부 단결을 위 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내부에서는 유물론이 아니면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5. 맺음 말
본 연구는 북에서 삼국시대의 불교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 에서 ‘북에서의 삼국시대 불교철학’ 전체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남에서 ‘삼국시대’라고 부르고, 최 봉익(1976)은 ‘삼국시기’라고 하고,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라고 한다.
최봉익(1976)은 ‘삼 국 시기’와 ‘발해, 신라 시기’로 세 시기로 나누어 기술한 반면, 한명환(2010)은 ‘세 나라 시기’와 ‘발 해 및 후기 신라 시기’로 나누어 두 시기로 나누어 기술한다.
최봉익(1976)은 삼국시기 초기 소승불 교철학인 구사론과 성실론을 한명환보다 더 상세히 설명하고, 또 같이 대표적인 불교 승려 학 자로 고구려의 도랑(승랑)과 삼론종, 신라의 원측과 유식학을 설명한다.
한명환(2010)은 불교철학 을 관념론으로 이해하고 비판하면서도, 유물론과의 투쟁적 관계에서 관념론으로서의 불교철학으 로 설정해 비판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도랑(승랑)과 원측의 철학사상을 설명할 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불교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엉성하게 얼버무린 것 같은 인상이다.
즉, 한명환(2010)이 유물론과 대립적인 관점의 반동적인 관념론철학으로서의 불교철학을 비판하는 정도로 한다. 또 이들의 불교철학이 봉건계급사회의 계급 이익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보는 평가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명환(2010)은 최봉익(1976)보다 중국의 삼론종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준 고구려 사람 도랑(승 랑, 450경~530경)과 중국 유식종 불교철학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신라 사람 원측(613~96)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읽힌다.
또 도랑의 삼론종 철학이 일본에까지 거대한 영향을 준 것을 강조한다.
고 구려(B.C.217? 혹은 B.C.37?~A.D.668), 백제(B.C.18~A.D.660), 신라(B.C.57~A.D.935)가 공존하 던 600년 정도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그 외 지역보다는 세 나라가 비교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 서,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해서와 고구려 서남쪽 지역 에서는 한나라(B.C.206~A.D.220)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당나라(618~907)가 시작되기 전까지 400년 동안 전쟁과 혼란이 계속되던 분열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지만 사상적 으로 특히 불교는 더욱풍부해진 시기다.
나는 한명환(2010)이 고구려 승려 도랑(승랑)을 통해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철학적 사유 수준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주의와 계급주의 원칙의 기술과 다소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남한을 모두 의식한 기술로 민족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더 큰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든다.
오구라 기조(2017)(이신철옮김, 2022)는 남과 북이 모두 고구려를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 국가로 인식한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나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꼭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현 재 관점에서 중국 지역에 있던 나라들을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도 대부분 학자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
고구려의 상당 부분이 지금의 중국 지역에 있었는데, 지금 중국인들은 고구려 를 중국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남과 북에서 고구려를 조선 민족 또는 한민족으로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고구려를 한민족 또 는 조선민족 국가로 규정하는 인식은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첫째, 나라 이름을 보자. 명 칭은 구려, 고구려, 고려 등이 있었다.
그리고 후대에 왕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부르게 됐 다.
둘째, 민족 구성을 보자. 고구려는 실제 한민족이란 단일민족 구성도 아니고, 여러 민족으로 구성 됐다. 오구라 기조(2017. 신일철 번역 2022)는 “조선반도의 북부는 중국 동북 지방과 연결되어 있” 어, “이 지역을 이동하면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과 민족적 분류를 정밀하게 행하기는 거의 불가능 하다”(오구라 기조, 13쪽)고 단언한다.
셋째, 영토를 보자. 고구려 영토는 만주와 요하지역 및 한반도 일부다.
즉 고구려 영토는 한반도보다 현재 중구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이 더많다.
그래서 고구려 연 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 불교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고구려 문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고구려 당시의 글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 고구려 당시의 생활상과 세계관을 알 수 있는 그림으로 잘 남아있다.22)
22) 고구려 고분벽화? 참조.
고구려 문명의 토대 는 동북아시아의 ‘수렵 문명’과 ‘농경 문명’이 공존하는 형태로서, 하늘 신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고구려는 10월에 하늘 신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東 盟)이란 축제가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바다.
제사면서 동시에 축제로 보이는 동맹은 낮과 밤 동안 술 을 마시고 춤을 추며 노래하며 하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런 풍속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황제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는 것은 잘알려진 것이다.
고구려 및 퉁구스계 나라 들이 거국적으로 하늘 신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중국이나 일본 고대 국가 풍속과 확연하게 다른 것인지 아닌지 밝혀야 할 주제로 보인다.
그것이 고구려 사람들이 불교를 수입하면서 그것을 이해하 는 틀의 하나로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연구로까지 나아간 연구는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고구 려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당시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를 백제와 신라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불교 가 꽃핀 나라다.
앞으로 남한 연구자들이 본 한국철학의 여러 특징들과 더비교․ 논의되어야 할 것이 다.23)
본 연구는 비판을 위한 검토라기보다, 북에서 삼국시대 불교철학에 대한 남에서의 이해를 제고하 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남과 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다 명확히 알아야 한다.
북에 서의 불교철학 이해가 무엇인지 알고 그 토대 위에서 남과 북의 삼국시대 불교철학 연구가 하나됨을 지향하기 위한 것24)으로 쓰일지, 미래 한반도의 여러 정치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23) 조성환(2023)은 최근 최치원(857~908?)이 풍류를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으로 정의한 것 을 근거로, ‘포함’과 ‘창조’라는 관점에서 한국철학사를 보려는 시도를 했다. 또 그 이전에 조성환(2022)은 정진홍, 김경탁, 김형효 등의 연구를 계승하는 관점으로 중국의 ‘천’이 아닌 한국의 ‘하늘’이란 관점에서 한 국철학사를 관통하는 특징을 규정하고 있다. 오구라 기조(2017)는 한국(조선)사상의 특징을 ‘순수성을 지향 하는 경향’과 ‘다른 사상 체계’와 ‘하이브리드 지향’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관점으로 조선사상사를 보기도 한다. 조성환. 2023. 한국의 철학자들-포함과 창조의 새길을 열다-, 모시는 사람들, 5-8쪽 참조; 조성환. 2022.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소나무, 9-13쪽 참조; 오구라 기조. 2017. 이신철 옮김. 2022. 조선사상사, 길, 15-9쪽 참조.
24) 김교빈. 2002. 「남북한 전통철학 연구현황과 전망」, 동양철학제18집, 동양철학회, 3쪽 참조. 김교빈은 1988년 처음 시작된 이후로 2002년 당시까지 남 학자들의 북 전통철학 연구에 대한 연구를 주로 비판을 위 한 연구로 평가한다. 2002년 김교빈은 남과 북의 통일을 준비하는 남과 북의 하나됨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 고 그런 의미에서 김교빈 연구는 그것을 지향함을 역설한다. 2024년 나는 나의 연구가 남과 북이 하나됨을 위한 연구로 읽힐지, 남과 북이 평화 공존을 위한 연구로 읽힐지는 우리가 앞으로 굴리게 되는 역사의 수레 바퀴가 굴러가면서 결정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연구가 남북의 갈등과 전쟁에로 향하는 것보다는 공생 공영의 미래로 향하는 디딤돌 중 하나가 되는 연구가 되길바란다.
2024년도 한국철학회 학술대회(2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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