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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요한서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이재현.한동大

초록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자신의 공적 사역의 첫 선포로 외쳤다. 그의 사역과 결과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었고, 이후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이야기를 담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역사의 끝을 담은 계시록의 기본 틀이었다.

요한서신은 어떨까?

문제는 요한서신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한서신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을까?

본 논문은 요한서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고찰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 개념의 재고찰이다.

신약의 여러 용법을 고찰한 후 통치 대신 통치권과 통치 백성 요소를 담은 ‘통치 영역’으로 볼 것을 제안한 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세 요소, 곧 통치 영역과 통치권과 통치 백성을 범주로 요한 서신을 살피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본 논문은 요한서신이 하나 님 나라의 개념을 잘 보여주고 있음을 입증한다.

(1) 통치 영역과 관련해, 요한서신은 기본적으로 현 세상을 빛과 어둠의 통치 영역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으로 이해한다.

(2) 통치권자와 관련해, 각 통치 영역에는 시작자와 권위자가 있다. 빛의 영역의 통치권 자는 삼위 하나님이고, 어둠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귀(사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3) 마지막으로 통치 백성은 세상에 속한 모든 자와 빛에 속한 신자로 구분된다.

특별히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와 하나님 과 새 언약 관계를 맺고 자녀의 신분을 얻은 자다. 요한서신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제반 요소를 담은 큰 그림으로 구원 과정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신자와 교회가 처한문제를 다룬다.

이런 결과를 통해 본 논문은 요한서신이 신약의 어느 책에 못지않게 하나님 나라 제반 요소에 대한 풍부한 표현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주제어 : 하나님 나라, 두 영역, 통치권자, 통치 백성, 구원 과정

I. 들어가면서

“회개하라, 하나님(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 마 4:17).

자신의 공적 사역의 문을 여는 예수의 첫 외침이다.

이 선포는 마치 사역의 서론처럼 이후 진행될 가르침과 기적,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 있음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 예수의 사역 결과, 곧 새 언약의 성취와 새 언약 백성의 현재와 미래 삶의 요소 또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1)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을 다루는 복음서뿐 아니라,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이야기를 담은 사도행전과 신자와 교회 모습을 다룬 서신서, 그리고 구원 과정과 역사의 끝을 다루는 계시록의 기본 틀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요한서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요한서신에는 ‘하나님(하늘) 나라’ 표현이 없다.2)

1)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신현우,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신약논단 20 (2023), 425-57을 보 라.

2) 신약의 책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 없는 것은 바울서신 중에는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빌레몬서가 있고, 일반서신 중에는 베드로전서와 요한서신 과 유다서가 있다.

그렇다면 요한서신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관계가 없을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편지들 역시 예수의 사역 결과인 신자와 교회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서신과 하나님 나라와의 연결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관한 고찰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접근법이다.

쉬운 예로, 단순히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접근할지, 아니면,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접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일 단어로만 접근한다면, 요한서신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저자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 혹은 개념을 설명할 때 하나의 단어만 사용하지 않는다.3)

3) 당연히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흥미롭게도 여전히 많은 신학적 작업이 이 접근법에 의존하는 것은 놀랍다. 일례로, 본 논문 주제와 관련 없지만, 바울서신 연구에서 자주 회자되는 πίστις Χριστοῦ(‘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이 있다. 주격 속격을 주장하든, 목적격 속격을 주장하든, 이 논쟁은 주로 명사 πίστις를 중심으로만 진행되는 모습이 있다. 특별히 주격 속격을 옹호하는 측에서 는 더 그렇다(예, 리처드 B. 헤이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평택: 에클레시아북 스, 2013]). 그러나 이 문제는 명사와 함께 동사형 πιστεύω(‘피스튜오’)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논쟁 부분이 명사와 동사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일 동사형을 함께 고려하면 성경에서 예수를 이 동사의 주어로 사용한 경우가 한 번도 없기에 주격 속격의 이해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J. H. Lee, “Against Richard B. Hays’s ‘Faith of Jesus Christ’,” JGRChJ 5 [2008], 51-80). 그러나 여전히 이 논쟁에서 한 가지 단어 형태만 고려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표적 용어나 호칭이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은 같은 의미 영역의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여러 상징과 은유 표현을 추가해 설명한다.

특별히 추상적 개념일 경우는 더더욱 다양한 표현으로 구체화하거나 그것이 가진 특성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죽음이라는 단어 외에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피, 희생, 제물 등의 표현으로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무(ξύλον[‘크술론’])를 사용하기도 한다(행 5:30; 10:39; 13:29; 갈 3:13; 벧전 2:24).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구체적 물질 개념이 아니기에 ‘나라’라는 대표 단어와 함께 그 개념과 특징을 전달하는 다른 표현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특징이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찾으려면 그에 대한 개념과 특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를 통치 행위나 주권 개념에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통치와 주권에 대한 표현만 찾으면 되지만, 이런 이해가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성경의 여러 표현이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한 배경과 통치 요소, 곧 통치 주권과 통치 영역과 백성의 요소와 함께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통치 행위나 주권 차원보다 더 넓은 ‘영역’(realm)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요한서신에 나타난 개념을 실제로 관찰하고 정리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특징을 담은 여러 요소를 범주 삼아 개별 본문을 관찰하고 정리해서 큰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을 수반한다.

비록 요한서신의 저자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이 편지들을 쓰지 않았지만, 예수의 사역과 결과를 근간으로 개인과 교회에 대해 권면하는 것이라면, 나름의 일관성 있는 신학적 그림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첫째 과정을 전제로 둘째 과정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고, 그것을 근거로 셋째 과정인 요한서신의 증거들을 관찰하고 정리하려 한다.

II. 하나님 나라의 개념 다시 들여다보기: 하나님의 통치인가 통치 영역인가?4)

4) 이 부분은 이재현,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 창조와 언약의 구속사 관점에서 본 성령의 위치와 역할,” Canon&Culture 17 (2023), 198-202를 재인용하고 정리한 것이다. 재인용을 허락해 주신 Canon&Culture 편집위원회에 감사드린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단어는 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이다. 일반적으로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5)

5) 예, G. 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86), 74.

하지만 칠십인역의 βασιλεία와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l,m,(‘멜렉’), hk'l'mm;(‘마믈라카’), tWkl.m;(‘말쿠트’), hk'Wlm.(‘멜루카’) 등이 있는데, 다스림뿐 아니라 영토를 가진 왕국이나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 왕(참고, 단 11:5)을 지칭하기도 한다.6)

6) 각 단어의 용법에 대해서는 윌리암 L. 할러데이, 구약성경의 간추린 히브리어, 아람어 사전 (서울: 솔로몬, 1994), 261-64; Philip J. Nel, “$lm,” NIDOTTE, 2:956- 65를 참조하라.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3-38; M. J. Selman, “The Kingdom of God in the Old Testament,” TynB 40 (1989), 161-83을 보라.

이런 용법은 βασιλεία에 대한 히브리어 성경의 예를 단순히 통치로만 한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헬라어를 사용한 신약 성경은 어떨까?

히브리어와 달리 한 단어가 일관성 있게 사용된 편이지만, 바른 이해를 위해 여러 용법과 그와 관련한 요소들을 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약의 용례를 통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 βασιλεία를 포함하는 문장의 여러 요소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7)

7) J. B. Green, “Kingdom of God/Heaven,”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2nd ed., ed. by J. B. Green, et al.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3), 468.

여기에는 함께 사용된 동사와 주어나 목적어를 통한 등장인물 정보와 부대 상황을 설명하는 표현이 포함된다.

먼저, βασιλεία와 함께 사용된 동사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이동에 대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ἐγγίζω (‘엥기조’[‘가까이 오다’]: 마 3:2; 4:17; 막 1:15; 12:34; 눅 10:9, 11; 21:31),

ἔρχομαι(‘에르코마이’[‘가다/오다’]: 마 6:10; 눅 11:2; 17:20; 22:18),

εἰσέρ- χομαι(‘에이스에르코마이’[‘안으로 들어가다’]: 마 5:20; 7:21; 18:3; 19:24; 23:13; 막 9:47; 10:15, 23, 24, 25; 눅 19:17, 24, 25; 요 3:5),

μεθίστημι(‘메티스테미’[‘옮기다’]: 골 1:13),

ἐκβάλλω(‘에크발로’[‘밖으로 내쫓다’]: 마 8:12),

φθάνω(‘프타노’[‘임하다’]: 마 12:28) 등이 있으며 장소와 관련된 전치사(ἐν이나 εἰς)가8) 함께 쓰이기도 한다.

8) Ἐν: 마 5:19; 8:11; 11:11; 13:43; 18:1, 4; 20:21; 26:29; 막 14:25 (예수의 말 안에); 눅 7:28; 13:28, 29; 14:15; 22:16, 30; εἰς: 마 5:20; 7:21; 18:3; 19:24; 23:13; 막 9:47; 10:15, 23, 24, 25; 눅 16:16; 18:17, 24, 25; 요 3:5; 골 1:13; 살전 2:12; 딤후 4:18; 벧후 1:11.

주목할 것은 이 모든 표현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 외에 다른 ‘곳’ 의 존재다. 이동 동사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 곳에서 하나님 나라로, 혹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른 곳으로 옮김을 뜻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묘사는 그것과 분명한 대척점을 이루는 다른 곳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둘째는 그 둘 사이의 경계선이다.

안과 밖은 서로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있다는 말이며, 이동은 그 경계선을 넘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는 대척점 되는 어떤 곳을 전제로 그것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경계선을 가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비록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에(요 3:3) 물리적 차원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동사들은 하나님 나라를 어떤 경계가 있는 ‘영역’(realm)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더 나아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 이런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예수와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일차적으로 영역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Βασιλεία와 관련한 또 다른 관찰점은 이 단어와 함께 언급된 등장인물이다.

두 그룹이 있다.

첫째는 통치권과 관련된 존재다.

이 역시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신적 존재다.

성경은 하나님을 왕이나 통치권자로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23은 하나님 나라(천국)를 자기 종들과 결산하려는 왕으로 비유하고, 마태복음 22:2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으로 비유한다(참고, 마 20:1[포도원의 주인]).

‘하나님=왕=천국(나라)’의 개념이다.

성경은 또한 메시아 예수 역시 왕권을 가진 자로 묘사한다.

마태복음 13:24에서 예수는 자기 밭(세상)에 사람이란 씨를 뿌리는 자로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세상의 참 주인임을 보여준다(참고, 마 16:28; 눅 1:33; 22:29, 30; 23:42; 요 18:36; 골 1:13; 딤후 4:1; 히 1:8).

흥미로운 것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서 예수가 변화산에서 보일 영광에 대해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 나라로 말하지만(막 9:1; 눅 9:27), 마태는 예수의 나라로 표현한다(마 16:28).

예수가 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모두를 왕으로 이해했음은 분명하다.

이 개념은 하나님과 예수를 나라의 왕으로 묘사한 에베소서 5:5나 계시록 11:15의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예수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통치권과 관련한 또 다른 존재는 사탄이다.

하나님/예수와 반대되는 자다.

사탄은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서, 광야 시험 때 예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자기 것으로 말한다(마 4:8-9; 눅 4:6). 자기를 이 세상에 대한 또 다른 통치자로 칭한 것이다.

에베소서 2:2는 사탄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으로 표현하고 계시록에서는 사탄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을 짐승의 나라(계 16:10; 17:12, 17) 혹은 “세상 나라”(계 11:15)로 표현하기도 한다.9)

9) 바울은 롬 5:12-21에서 βασιλεύω(‘바실류오’, ‘왕 노릇 하다’)를 통해 죄(롬 5:21)와 사망(롬 5:14, 17)을 또 다른 통치자로 소개한다. 비록 의인화시켜 사람처럼 주권자 로 묘사하지만, 사탄과 달리 실존하는 인격적 존재(being)는 아니다. 통치자라기보 다 통치 세력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런 관찰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개념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 외에 그분의 통치권을 거절하고 반대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통치자가 세상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βασιλεία와 관련한 또 다른 등장인물 그룹은 사람이다.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서의 존재다. 많은 경우 이동과 관련한 동사들과 함께 묘사되는데, 위에서 말한 εἰσέρχομαι 혹은 이동과 관련한 동사 +εἰς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표현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음을 전제하며,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긍정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로 구분해 묘사한다.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 결과이고, 때로 하나님 나라를 받거나 소유하는 것(마 5:10; 19:14; 21:43; 25:34; 막 10:14; 눅 6:20; 12:32; 18:16; 22:29; 히 12:28; 약 2:5) 혹은 상속(막 13:38, 41; 참고, 계 1:6; 5:10)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예수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며, 여러 곳에서 백성이나 자녀로 말해진다.

반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종종 심판과 연결되어 제시된다(마 8:12; 22:13; 25:30; 참고, 계 22:15).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13:24-30에서 예수는 세상(참고, 마 13:38)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사람(좋은 씨)와 사탄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가라지)이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비록,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현재 세상은 여전히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통치를 받는 두 그룹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Βασιλεία와 관련한 또 다른 관찰점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부대 설명이다.

주목할 것은 시간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는 마가복음 1:15 에서 ἐγγίζω의 완료형과 함께 “때가 찼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때가 찼다”는 시간과 관련해 이전 상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10)

10)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rev. and ed. by F. W. Dank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828.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시간이 움텄음을 암시한다.

동사 ἐγγίζω는 시간(예, 마 21:34)과 공간(예, 막 14:42) 에 대해 쓸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가 없던, 혹은 그분을 거절하고 반역하던 시공간을 전제로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이제 여기에(here and now) 가까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런 표현들에 의하면, 예수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그것이 없었던 때를 끝내고 세상에 실존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마 11:12).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를 통해 회복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마 12:28; 눅 16:16; 17:20-21; 롬 14:17; 고전 4:10; 히 12:28)가

확장 과정을 거쳐(막 4:26-29, 32-32; 마 13:31-33; 눅 13:18-21)

장차 온전히 완성되는 미래 시점(마 13:24-30; 47-49; 눅 13:28- 29; 22:16, 18; 고전 15:24, 50; 갈 5:21)

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상의 관찰을 종합하면 βασιλεία는

(1) 통치 영역을 기본으로

(2) 그 안에 왕과 통치권의 요소, 그리고

(3) 그 통치를 받는 백성의 요소를 담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11)

11) Caragounis는 통치를 일차로, 영역을 이차 개념으로 보았지만, 신약 증거를 보면 오히려 영역을 일차적인 것으로 보고 그 안에 여러 요소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C. C. Caragounis, “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ed. by J. B. Green, et al.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2), 417. 12) 이재현, 구원: 삼위 하나님의 역작 (용인: 킹덤북스, 2018), 33.

이 요소들을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하면, 하나님 나라란 “창조주 하나님이 왕이 되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해 그가 만든 모든 피조 세계를 영토 삼고 그가 지은 인간을 백성 삼아 창조주로서의 다스림과 관리, 보호하는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12)

신약은 이 개념을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상 나라(영역)와의 관계성 안에 위치시킨다. 즉, 아담과 하와의 반역(창 3장)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만 있었지만(창 1-2장), 그 사건 이후에는 사탄과 죄와 사망을 중심으로 한 반역의 통치가 세상에 생겨 퍼졌고(롬 5:12),

예수의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기 시작해서 장차 그분의 재림으로 온전히 회복되고 완성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란

(1) 반역의 나라(세상)와 분명한 경계선을 가진 하나님/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영역이고,

(2) 예수의 사역을 통해 반역의 나라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백성/ 자녀로서 하나님/예수와의 관계를 누리는 영역으로서,

(3) 예수의 사역을 통해 회복되기 시작해서 미래에 온전하게 되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III. 요한서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위의 관찰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통치 영역을 중심으로 통치권자와 통치 백성의 요소를 가진 개념이며, 같은 요소를 가진 반역의 나라와의 관계성이 시간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모습을 갖고 있다.

이제, 이런 요소들을 관찰점 삼아 교회와 성도의 삶과 문제를 다루는 요한서신 속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어떻게 녹아있는지를 살펴보자.

1. 통치 영역 요소

제일 먼저 살펴볼 요소는 통치 영역이다.

복음서와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처럼 요한서신에서도 여러 증거를 통해 이 요소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전치사 ἐν이다.

요한서신에서는 사람이 존재하는 영역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이 세상,13) 어둠, 악한 자, 사망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인데,14) 반역의 통치 영역을 뜻한다.

13) 세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현존하는 공간을 뜻하지만(요일 3:17), 요한서신에서는 두 가지 추가 상징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하나는 반역의 통치 영역 자체를 상징하 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진다(예, 요일 2:15-17; 4:1, 3, 4, 5, 17; 5:4, 5, 19; 요이 7). 다른 하나는 반역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을 상징하는 경우다. 부정 적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요일 3:1, 13; 4:5) 문맥에 따라 다소 중립적으로 묘사되 기도 한다(요일 2:2; 4:9, 14). 이런 특징으로 인해 C. S. Keener는 “세상은 빛의 구원이 어둠의 영역을 침범해 가는 장(場)이요 예수가 와서 구원할 잃어버린 자들” 이라고 정의한다.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Peabody: Hendrickson, 2003), 1:329.

14) 세상: 요일 2:15, 16; 4:3, 4, 17; 요이 7; 어둠: 요일 1:6; 2:9, 11(x2); 악한 자: 요일 5:19; 사망: 요일 3:14.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이 빛, 하나님, 예수, 진리, 사랑 안에 있다는 표현으로서,15)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뜻한다.

15) 빛: 요일 1:7(×2); 2:9, 10; 하나님: 요일 1:5; 2:5, 6, 24; 4:16; 예수: 요일 2:24, 27, 28; 3:6, 24; 4:13; 5:11, 20(×2); 진리: 요이 1, 3, 4, 6(계명), 9(×2: 가르침); 요삼 1, 3, 4; 사랑: 요일 4:16, 18(×2).

기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나 그분께 반역하는 통치 영역 안에 있다는 의미다.

이 두 통치 영역의 특징은 시간 흐름을 따라 정리할 수 있다.

비록 역사적으로 보면, 반역의 통치가 하나님이 창조한 영역으로 나중에 들어와 기생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요한서신은 현 세상이 어둠의 통치, 곧 반역의 통치 영역에 잠식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요한일서 2:8은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쳤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어둠이 먼저 있었고 참 빛이 나중에 들어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는 이동을 뜻하는 동사와 전치사의 사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한서신은 ἔρχομαι,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보내다’]), φανερόω(‘파네로오’[‘나타나다’])를 사용해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김을 표현하는데, 이런 이동의 대상 중 하나는 예수다.16)

16) Ἔρχομαι와 관련: 요일 4:2, 3, 6; 5:6; 요이 7; ἀποστέλλω와 관련: 요일 4:9, 10, 14; φανερόω와 관련: 요일 1:2(생명); 3:5, 8.

특별히 요한일서 4:9는 전치사 εἰς를 사용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 안으로 보냈다고 말한다.

어둠의 영역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과정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반역의 통치 영역에 회복의 통치가 나타났고, 또 다른 이동 대상자가 등장한다.

동사 μεταβαίνω(‘메타바이노’ [‘옮기다’])와 전치사 εἰς를 통해 어둠에서 생명 안으로 옮겨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대한 본격적 회복 결과가 나타났음을 뜻한다(요일 3:14).

이제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반역의 통치와 회복된 하나님의 통치가 공존하는 장(場)이 되었다.

요한서신은 이 상황을 빛과 어둠(요일 1:6-10; 2:4, 8-11), 세상과 하나님(요일 2:15-16), 예수 안과 밖(요일 3:6),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요일 3:10), 거짓과 진리의 영(요일 4:1-6) 등의 공존으로 묘사한다. 이런 공존은 상생의 관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둠의 영역은 하나님을 거절하기에(요일 2:15-17) 두 영역은 갈등과 충돌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세상 어둠의 반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로 이어지는데, 살인으로 연결되는 미워함과 증오로 표현되기도 하고(요일 3:13-15), 진리를 흔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별히, 요한서신은 진리와 관련해 어둠의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는 존재들을 적그리스도(요일 2:18-19, 22; 4:3; 요이 7)나 거짓 선지자(요일 4:1), 미혹의 자(영)(요일 4:6; 요이 7) 등으로 명명하고, 예수가 세상에 와서 존재했음을 묘사한 것과 같은 형태의 이동 동사와 전치사 εἰς를 통해 그들이 지금 반역의 영역에 나타나 존재하는 것으로 말한다.17)

17) 적그리스도: ἔρχομαι(요일 2:18; 4:3); 거짓 선지자와 미혹하는 자: ἐξέρχομαι(‘엨세 르코마이’[‘밖으로 나오다’])+εἰς: 요일 4:1; 요이 7.

그들의 존재는 빛과 어둠의 영역과 관련해 예수에 대한 진리와 거짓 가르침의 충돌이 있음을 뜻한다.

요한서신은 이 상황을 전쟁으로 표현한다(요일 5:4-5).

미래에는 이런 공존과 갈등의 현재 상황이 바뀔 것이다. 주의 재림과 최후 심판(요일 2:28; 3:2; 4:17)으로 세상과 그 정욕은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만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요일 2:7).

2. 통치권 요소

각 통치 영역에는 통치자와 다스림을 전제로 한 통치권 요소가 있다.

기본적으로 이 요소는 각 영역의 시작자로서 최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를 포함한다.

요한서신에서는 두 가지 증거를 통해 이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전치사 ἐκ(‘에크’)이다.

특별히 소속과 기원을 뜻하는 용법과 관련해 ‘~에 속한’ 혹은 ‘~에 기인하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두 통치 영역 모두에게 적용되는데, 빛의 통치 영역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소속과 기원의 근원으로 소개한다(예, 요일 2:16, 29; 3:9; 4;1, 2, 4, 7; 5:1[×2], 4, 18[×2], 19; 요삼 11 등).

반면, 반역의 통치 영역에서는 세상(요일 2:16; 4:5)이나 마귀(요일 3:8)나 악한 자(요일 3:12; 참고, 요일 5:19[ἐν])가 소속과 기원의 근원으로 제시되는데, 그들에게 속한 모든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요일 3:10; 4:3, 6).

둘째 증거는 τέκνα(‘테크나’[‘자녀들’])이다.

이 역시 관계성을 통해 두 통치 영역에 속한 자들의 소속과 기원을 알려주는 단서다.

빛의 영역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묘사하고(요일 3:1, 2, 10; 5:2) 어둠의 영역에 있는 자들은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언급된다(요일 3:10).

이는 각 영역의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가. 반역의 나라의 통치권자

반역의 나라 통치권자는 마귀(διάβολος[‘디아블로스’])이다.

요한서신에 의하면, 마귀는 반역의 통치를 시작한 존재이며, 처음부터 범죄한 자다(요일 3:8). 여기서 말한 ‘처음’의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첫 사람들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 3장 이전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마귀가 죄를 범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거절하고 자기에게만 집중해 자기를 높였다는 의미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거절과 반역은 사랑, 곧 다른 인격적 존재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마귀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거기에 따른 바른 사랑 표현이 없다.

문제는 이 마귀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곧 사람이 존재하는 영역을 반역의 통치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첫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하고, 그것을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처럼 될까 봐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속였다(창 3:4-5).

창조주 대신 자기를 선악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유혹이었다.18)

18) 창 3장의 사건은 롬 1:28의 죄에 대한 묘사와 연결된다. 이재현, “바울서신의 ‘마음’ 번역에 대한 제안: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의미론과 신학적 고찰,” 성경원문연구 40 (2016), 137-61을 보라.

이런 면에서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요 8:44). 그의 영향력은 첫 사람들 이후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동생 아벨을 향한 가인의 증오와 살인과 무관치 않으며(요일 3:12), 사람들이 창조주를 거절하는 죄를 범하고 그분이 기대하는 사랑 대신 미움의 세상과 역사를 만들도록 영향을 끼쳤다(요일 3:10).

또한, 요한서신 당시에도 미혹의 거짓 영을 통해 진리를 막고,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흔드는 주범이기도 하다(요일 2:16; 4:1-4, 5). 한마디로 마귀는 반역의 통치의 주인이며, 거짓으로 자기 왕권을 유지하고 반역의 세상에서 진리를 막는 자다(요일 5:19).

그러나 마귀는 빛의 통치를 회복하는 예수의 사역으로 인해 결정적 패배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 사역으로 마귀를 결박하고 어둠의 세상 속에 빛의 영역을 회복하기 시작했고(요일 3:8; 참고, 막 3:27; 골 2:15; 히 2:14), 자신을 믿는 자에게 악한 자에 대한 승리의 해방을 경험하게 했다(요일 2:13-14; 5:4-5). 비록 반역의 통치 영역이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고 마귀의 영향력이 신자 개인보다 강하지만, 마귀는 이미 예수로 인해 멸망으로 가고 있고, 장차 주의 재림과 심판으로 온전히 망할 것이다(참고, 계 20:10).

나.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자

1)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자는 삼위 하나님이다.

요한서신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성부 하나님과 예수 메시아, 그리고 성령의 역할을 구분해 설명한다.

제일 먼저 관찰할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다.

요한서신은 이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하는데, 빛의 영역과 어두움의 영역의 관계성과 구원 과정의 시간 요소를 함께 고려해 정리할 수 있다. 첫 단계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만 존재했던 과거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 요한서신은 하나님을 태초부터 계신 존재로 소개한다(요일 2: 13-14). 창조 이전, 영원 전부터 원래 계신 분이라는 의미다.19)

19) 요한서신에서는 ‘태초부터’에 해당하는 표현(ἀπ᾽ ἀρχῆς[‘아프 아르케스’])이 몇 가 지 용례로 등장한다(예, 예수의 공생애[요일 1:1], 복음 증거 시점[요일 2:7, 24; 3:11], 사탄과 관련한 창세기 3장 사건 이전 시점[요일 3:8]). 이곳의 용법은 창조 이전 시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분은 아들 예수와 영원한 사귐의 관계를 갖고 있었고(요일 1:2-3; 2:24; 3:23), 이후 창조를 통해 물질세계 속에서 창조주로서의 통치를 시작했다.

요한일서 1:5-7은 이 개념을 ‘하나님은 빛이다’라는 표현으로 제시한다.

물질세계의 빛은 그분의 피조물 중 하나이기에(창 1:3) 이 말은 그분 자체가 빛이라는 뜻이 아니다. 어둠으로 상징되는 반역의 세상 통치와 달리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빛으로 상징해서 그분이 그 영역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그분은 창조주로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속성에 어긋나게 말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요한일서는 이 속성을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요일 1:5).

창조 후 어느 시점에 사탄을 중심으로 한 첫 사람들의 죄로 반역의 통치 영역이 존재하기 시작했지만(창 3장),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반역의 통치 영역에도 불구하고 피조 세계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통치자 역할과 사람과 세상을 향한 구원자 역할을 계속 이행했다.

결정적 회복의 시작은 예수를 보낸 사건이다(요일 4:9, 10, 14). 사람을 향한 사랑의 발현으로서(요일 4:9; 참고, 요 3:16; 롬 5:8), 마귀의 일을 멸해서 어둠의 세상 속에서 빛의 통치를 회복하고(요일 3:8)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이다(요일 3:5).

이뿐 아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 증거, 곧 세례를 뜻하는 물과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피와 성령을 통해 예수의 메시아됨과 그의 사역의 확실함을 증거함으로써(요일 5:9-10)20) 이후 복음 전도자의 선포를 통해 사람들이 빛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

20)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필자는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이에 대해 이재현, 요한서신, 한국신약해설주석 14 (서울: 감은사, 2021), 286-97 을 보라.

하나님의 일하심은 예수에게 믿음의 반응을 보인 자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죄 사함(요일 2:13)과 빛의 영역으로 옮기는 구원(요일 3:14)을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 곧 새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가 그분께 속한(요일 3:9, 10) 자녀의 신분을 주신다(요일 3:1; 4:4; 5:1).

요한서신은 그 관계를 하나님을 아는 것(요일 2:3, 4, 13, 14,; 4:7)과 하나님이 신자 안에 거하고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호 거함’으로 표현한다(요일 3:23-24; 4:12-13, 15, 16).

기본적으로 이 관계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공유하던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사귐’]) 속에 신자가 참여하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요일 1:2).

요한서신에 의하면, 하나님은 빛의 영역에서 자신과 관계 맺은 신자에게 여러 선물을 더 주었다.

첫째는 성령이다.

상호 거함의 보증(요일 4:13)이자 진리의 증거자(요일 4:2, 6; 참고, 요일 2:20, 27)로서, 신자가 하나님의 통치 백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둘째는 계명 이다(요일 2:3-5; 3:23-24; 5:2; 요이 4).

언약 백성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계명을 지켜서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로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간 자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계명을 지켜야 한다.

모세를 통한 옛 언약 백성뿐 아니라, 예수를 통한 새 언약 백성에게도 적용되는, 사람 편에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참고, 신 6:25).

하나님이 빛의 영역에 있는 새 언약 백성에게 계명을 준 것은 그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방법을 알려준 것인데, 역으로 보면, 그만큼 그분이 언약 백성과의 관계 유지를 원한다는 의미다.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온전히 계시한 예수에 대한 진리에 충실한 것으로 묘사된다(요일 3:23).

셋째는 죄 용서다(요일 1:9; 2:1).

이 선물은 빛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그 영역 안에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계속된다.

하나님이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를 계속 신실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기도 응답이다(요일 3:22; 5:13-14).

빛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어둠과 부딪쳐야 하는 신자를 위한 신적 도움이다.

이 역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표현 중 하나다.

빛의 영역의 주인인 하나님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일하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심판이다.

창조 이후 모든 역사를 평가하고 완성하는 과정이다(요일 3:21; 4:17).

이 심판은 첫 창조 과정에 있었던 피조물에 대한 평가(창 1:3)의 결론 과정인데, 통치권자의 주권을 온전히 실행하는 것이자 반역의 통치 영역에 대한 완전한 회복이다.

2) 예수

빛의 영역의 또 다른 통치권자는 예수다.

요한서신은 전치사 ἐν을 사용한 ‘예수 안’이란 표현을 통해 예수가 통치자임을 보여준다(요일 2:24, 27, 28; 3:6, 24; 4:13; 5:11, 20[×2]).

예수에 대한 설명도 빛과 어둠의 두 영역과 시간 요소를 따라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빛의 통치 영역만 존재했던 과거 시점과 관련해, 예수는 창조 이전에 성부 하나님과 κοινωνία를 가진(요일 1:2) 참 신(神)이며(요일 5:20),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 과정에 참여해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였다(요일 1:2; 5:11, 20).

반역의 통치가 피조 세계에 존재한 이후, 예수는 빛의 통치를 회복하고 사람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는 핵심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사역했다.

이에 대한 요한서신의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체성과 관련한 주요 호칭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독생자라는 표현을 포함해 스물세 번 언급되고 그리스도는 열한 번 나타나는데, 이 중 여섯 번이 함께 사용된다(요일 1:3; 2:2; 3:23; 5:20; 요이 3, 9).

많은 학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예수의 신성과 연결해서 편지의 상황과 대적자들을 이해하는 열쇠로 보곤 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는 표현을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분별 근거로 제시한 것(요일 4:2-3; 요이 7)을 통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룹이나21) 신성을 강조해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과의22) 논쟁이 요한일서와 이서의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21) 이 대적자를 케린투스주의자(D. L. Akin, 1, 2, 3 John, NAC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1], 172-3; I. H. Marshall, The Epistle of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8], 205; John Stott, The Epistle of John, TNITC [Grand Rapids: Eerdmans, 1964], 154; R. W. Yarbrough, 1-3 John, BECNT [Grand Rapids: Baker, 2008], 35, 38, 224)나 초기 가현설주의자(R. Bultmann, Johannine Epistle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3], 62; C. G. Kruse, The Letters of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ns, 2000]. 147; D. M. Smith, First, Second, and Third John, IC [Louisville: John Knox, 1991], 68)로 보는 것이 있다.

22) 이들은 요한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의 지상 사역(R. E. Brown, The Epistle of John, AB [New York: Doubleday, 1982], 493, 505, 508; J. L. Houlden, A Commentary on the Johannine Epistles, BNTC [London: A & C Black, 1994], 107; John Painter, 1, 2, and 3 John, SP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02], 260, 299)이나 십자가 사역(M. C. De Boer, “The Death of Jesus Christ and His Coming in the Flesh (1 John 4:2),” NovT 107 [1991], 330-46; R. Schnackenberg, The Johannine Epistles: A Commentary [New York: Crossroad, 1992], 201)을 폄하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표현 자체를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신성’의 공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의 헬라어 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인성과 대조되는 신성 표현이라기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올 존재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한 사무엘하 7:14의 연장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다(참고, 시 2:7; 막 1:11; 9:7).

즉,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라는 표현은 모두 구약에서 구원의 통로로 약속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참고, 롬 1:3-4).

또한, 요한일서 4:2에서 말한 ‘육체로 왔다’라는 것은 신성/인성의 구분 표현이라기보다, 성육신과 공생애를 아우르는 예수의 지상 사역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23)

23) D. R. Streett, They Went out from Us: The Identity of the Opponents in First John, BZNW (Berline: De Gruyter, 2011), 248.

바로 뒤에 나온 요한일서 4:3은 메시아라는 호칭 없이 예수를 시인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교회가 직면한 거짓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의 신성/인성 논쟁이 아니라 그가 구약에서 약속된 참 메시아인가이며, 이에 대해 저자는 편지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반역의 통치에 와서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한 메시아라고 역설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4)

2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재현, 요한서신, 216-24를 참조하라.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행한 사역과 결과도 구원 과정의 시간 요소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사역의 시작은 성육신이다.

이동의 동사와 전치사 εἰς를 통해 어둠의 영역으로 왔다고 묘사한다.25)

25) Ἔρχομαι: 요일 4:2; 요이 7; ἀποστέλλω: 요일 4:9(εἰς), 10, 14; φανερόω와 관련: 요일 1:2(생명); 3:5, 8. 동사 φανερόω와 관련한 기독록 고찰에 대해서는 채영삼, “요한일서의 φανερ- 용어 사용과 ‘나타남’의 신학적 의미,” 신약논단 27 (2020), 499-546을 보라.

성부 하나님이 보냈지만, 예수 역시 메시아이자 세상의 구주로서 자발적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이후 그는 물로 상징되는 세례를 시작으로 피로 상징되는 십자가까지 공적 사역을 행했다(요일 5:6).

이 과정에서 새 언약의 계명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요일 1:5; 2:7), 세상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통해 죄 용서의 길(요일 2:2; 3:5; 4:10)과 마귀를 멸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요일 3:8).

예수의 사역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이동한 신자의 현재와 미래 삶에서도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신자는 예수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한 상호 거함과 κοινωνία를 갖고 있는데(요일 1:3; 2:24; 5:20), 그 관계 안에서 예수는 신자의 죄를 위해 중보하며(요일 2:1; 참고, 요일 1:9) 성령을 보내 진리에 머무르도록 돕고(요일 2:20, 27) 지각을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한다(요일 5:20).

또한, 세상 어둠에 대해 신자를 지키는 사역도 한다(요일 5:18). 더 나아가, 예수는 재림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고(요일 2:28) 신자 부활의 본이 될 것이다(요일 3:2).

3) 성령

숨이나 바람을 뜻하는 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활동을 묘사하는 단어인데, 성령의 실체는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다.

요한서신은 이 성령을 예수가 보낸 ‘기름부음’(요일 2:20, 27)으로 부르는데, 그가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에게 했던 약속의 성취다(요 14:26; 15:26; 16:23).

비록 예수가 보냈지만, 성령은 궁극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보냈기에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한다(요일 4:13).

성령의 역할도 구원 과정의 시간 요소에 따라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구원 과정과 관련해 성령은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자이다(요일 5:6-8).

구체적으로 어떻게 증거 사역을 하는지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신약 다른 곳의 표현처럼 능력과 지혜로 선포자를 돕거나(참고, 고전 2:4) 선포를 들은 자가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하도록 이끄는 역할일 것이다(참고, 고전 12:3).

이후 성령은 두 가지 역할로 빛의 영역에 들어간 신자를 돕는다.

첫째, 하나님/예수와의 새 언약 관계를 유지하도록 돕는다.

성령은 신자 안에서(요일 2:20, 27) 하나님/예수와 신자의 상호 거함과 κοινωνία를 유지한다(요일 2:27; 3:24). 빛의 통치 안에 있는 새 언약의 관계와 정체성의 보증이라는 의미다.

둘째, 어둠의 세상에 대해 신자를 보호하고 돕는다.

특별히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영의 활동에 대해 신자 안에서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진리를 기억나게 하거나 이해하게 해서 진리에 계속 머무르도록 돕는다(요일 2:20, 27; 4:2, 6).

이런 역할들도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다룬 요한복음 14-16장과 관련 있다.

예수는 자신이 떠난 후 이 땅에 남겨져 세상과 충돌하게 될 제자들을 사랑해서 자기와 같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는 약속했는데, 이제 부활과 승천 이후 신자에게 성령을 보내 세상에 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지만, 아직 반역의 통치를 경험해야 하는 신자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사역이다.

3. 통치 백성 요소 각 영역에 속한 통치

백성은 일차적으로 인칭 대명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빛의 영역에 속한 자들은 주로 일인칭 복수(‘우리’)와 이인칭(‘너희’)으로 불리며, 어둠에 속한 자들은 삼인칭 복수(‘그들’)로 표현된다.

이외에도 빛의 영역 사람은 ‘형제들’이란 표현(예, 요일 2:9, 10, 11, 요삼 1:3 등)과 ‘사랑하는 자들아’(요일 2:7; 3:2, 21; 4:7, 11), ‘자녀들아’(요일 2:1, 12, 28; 3:7, 18; 4:4; 5:21), ‘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요일 2:13-14),26) ‘부녀와 그 자녀들’(요이 1, 5) 등으로 불리며, 요한삼서에서는 구체적 실명으로 몇몇이 언급된다(예, 가이오, 데메드리오).

26) 요일 2:13-15의 대상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필자는 전체 교인을 자녀들과 아이들로 지칭하고, 연령에 따라 청년과 연장자로 구분하는 견해를 따른다. 이재현, 요한서 신, 104-105.

어둠의 영역에 속한 사람의 경우는 세상이라고 불리는 일반 사람과 적그리스도와 미혹하는 자, 거짓의 영으로 불리는 특정 사람들이 포함된다.

가. 반역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백성

요한서신에 의하면, 반역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의 기본 상태는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계시한 예수를 부인하기에 하나님/예수와의 관계 밖에 존재하며(요일 2:23; 3:10; 4:3, 6), 그들이 순종하는 자는 반역의 통치자인 마귀다(요일 3:10, 18-19; 4:6).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에(요일 2:15; 4:5)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죄의 삶(요일 2:1; 3:4, 6, 8)이기에 하나님/예수를 따르는 의로움이 없고, 악을 행하며(요일 3:10, 12) 빛의 영역에 있는 자를 미워한다(요일 3:7, 13).

특별히 진리에 대해 적그리스도와 거짓 영을 따라 진리를 거절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신자의 삶을 흔든다(요일 2:19; 요이 2-11; 요삼 9-10).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요한서신의 저자가 편지로 강력하게 경고할 정도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다르다.

장차 예수가 재림으로 반역의 통치 영역을 끝낼 때, 그들도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4:17-18).

나.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백성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백성은 원래부터 그 안에 속했던 것은 아니다.

여느 사람처럼 어둠에 속했었기에 그들의 특징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구원 과정의 시간 요소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 단계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동을 담은 시작 과정이다. 하나님이 예수 메시아를 보냄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람과 관련해 두 가지 과정이 더 있다.

하나는 예수의 제자들을 통한 복음 증거다.

일인칭 복수로 묘사된 증인들은 자신이 예수의 공적 사역 처음부터27) 보고 듣고 만진 것, 곧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자 세상의 구주인 것을 독자인 ‘너희’에게 전했다(요일 1:1-3; 4:14).

27) 종종 ἀπ᾽ ἀρχῆς라는 표현 때문에 요일 1:1을 창조 이전에 존재한 예수의 선재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서신의 ἀρχή는 반드시 창조 이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일 2:7, 24; 3:11; 요이 6은 기독교의 복음을 처음 들은 시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일 1:1의 용법을 창조 이전으로 못 박을 필요는 없다. 한편, 요일 1:1의 관계대명사 ὅ(‘호’)는 중성이기에 여성 명사인 생명이나 남성 명사인 말씀과 연결할 수 없다. 예수에 대한 메시지나 복음 등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정리하면, 요일 1:1은 예수의 선재라기보다 복음의 시작부 터 ‘우리’가 경험한 예수에 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Brown, The Epistle of John, 158; W. Hall Harris III, 1, 2, 3 John (Dallas: Biblical Studies Press, 2003), 49; K. H. Jobes, 1, 2 & 3 John,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4), 44; Painter, 1, 2, and 3 John, 120; ESV; NASB; NIV; 이재현, 요한서신, 49-52.

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요일 4:21) 예수의 가르침과 계명도 함께 전했다(요일 1:5; 2:7; 요이 6).

또 다른 과정은 전도자의 증거에 사람들이 응답하는 것이다. 요한서신은 그 과정을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인정하는 것으로 말하는데(요일 4:2, 15; 5:1), 이는 복음 증거자를 통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요일 5:10).

다음 단계는 사람이 예수의 증거를 받아들인 결과다.

신자는 예수의 속죄 사역으로 죄 사함을 받고(요일 2:2, 12; 3:5, 9; 5:18), 어둠 속 사망에서 빛의 생명으로 옮겨와(요일 3:14)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게 된다.

그 관계는 하나님에게서 난(요일 2:29; 3:9; 4:7; 5;1, 4) 그분의 ‘자녀’(요일 3:1, 2, 10; 5:20)와 ‘속함’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 상호 거함(μένω[‘메노’]: 요일 2:6, 28; 3:6, 14, 24; 4:12, 13, 15, 16 등)으로 묘사된다.

또한, 그들은 성령(요일 2:20, 27; 3:24; 4:13)과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명(요일 2:7-8; 3:23-24; 요이 5)을 받았고, 또 다른 신자들과κοινωνία 관계를 가진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되었다(요일 1:3).

그러나 신자의 삶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비록 공간적으로 어둠에서 생명으로 옮겨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몸은 아직 반역의 세상 통치가 존재하는 이 땅에 살고 있다. 시간적으로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귀의 일을 깼지만, 재림을 통한 완성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 이런 시공간적 중첩과 과도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세상의 영향력을 받고 사는 이중 정체성을 가진 자로 존재한다(요일 5:19).

더 나아가, 세상의 직접적 미움(요일 3:13; 참고 3:1)과 진리를 흔드는 거짓의 유혹을 받는다(요일 2:18-19; 4:1-3). 어쩌면, 이중 정체성을 가진 신자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빛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영향력에 저항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삶의 명령이 필요하다.

요한서신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시작으로(요일 2:15) 이인칭과 삼인칭 명령법을 사용해서 진리를 통해 주 안에 거하고(요일 2:24, 27, 28) 세상의 미움에 놀라지 말며(요일 3:13) 거짓을 분별함으로 악을 따르지 말라고 촉구한다(요일 4:1[×2]; 5:21; 요이 8, 10[×2]; 요삼 7, 11).

아울러 명령법은 아니지만, 빛의 영역의 통치자인 하나님/예수를 본받아 죄와 관련해신앙 고백과 삶을 일치시키고(요일 1:5-10) 고백과 계명 지킴의 연결(요일 2:4-6)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계명은 예수를 믿는 진리 차원(하나님을 사랑함)과 사람을 사랑하는 차원(요일 3:23)이 있는데, 구약에서 제시한 율법의 핵심 정신(신 6:5; 레 19:18)이자 예수가 제시한 계명이기도 하다(참고, 마 22:37-40; 요 13:34).

진리의 계명은 어둠의 공격을 막는 방패이자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공격 무기라면, 사랑의 계명은 빛의 영역에서 동료 백성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예수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촉매제다(요일 4:12).

신자는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어둠의 영향력을 이기고 빛의 영역 안에서 새 언약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모습을 ‘의로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자의 이런 삶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신적 도움이 필요한데, 성령은 신자 안에서 진리를 기억하고 적용하게 하며(요일 2:20, 27), 하나님은 기도 응답으로 돕고(요일 3:20; 5:14-15), 예수는 신자를 위해 중보하며(요일 2:1) 악한 자에게서 지킨다(요일 5:18). 이런 면에서 빛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안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신자의 애씀과 신적 도움이 함께 해야 한다. 빛에 속한 백성은 현재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미래는 다르다.

주의 재림과 심판으로 어둠의 영역에게는 두려움과 형벌이 임하지만, 빛의 영역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가족이기에 담대함과 기쁨이 있게 될 것이다(요일 2:18; 3:20-21).

또한, 그때가 되면 어둠의 영역이 멸망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자녀의 신분만 남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신자의 육체 몸이 부활한 예수의 몸처럼 변화 되어(요일 3:2)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호 거함의 κοινωνία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IV. 정리 및 결론

지금까지 관찰에 의하면, 요한서신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지만, 신약의 어느 책 못지않게 하나님 나라의 제반 요소에 대한 풍부한 표현을 담고 있다.

통치 영역과 관련해, 요한서신은 기본적으로 현 세상을 빛과 어둠의 통치 영역이 충돌하는 현장으로 이해한다.

통치권자와 관련해, 각 통치 영역에는 시작자와 권위자가 있다. 빛의 영역의 통치권자는 삼위 하나님이고, 어둠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귀(사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통치 백성은 세상에 속한 모든 자와 빛에 속한 신자로 구분된다.

특별히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와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를 맺고 자녀의 신분을 얻은 자다.

이런 요소를 가진 하나님 나라는 요한서신과 관련해 두 가지 중요성을 제공한다.

첫째는 구원 과정에 대한 이해다. 비록 위의 관찰이 요한서신의 표현에 국한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여러 요소는 구원 과정의 큰 그림을 시간 흐름에 따라 그릴 수 있게 한다.

아래처럼 정리할 수 있다.

1. 창조 이전

1) 삼위 하나님의 영존과 서로 사귐

2) 어느 시점에 사탄이 창조되었고 반역을 시작함

2. 창조

1) 삼위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창조해 통치권을 행사함

2)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좋은 관계 속에 존재함

3. 반역의 통치 영역의 시작

1)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에 따라 하나님을 반역함

2) 죄와 죽음과 사탄이 통치하는 반역의 영역이 피조세계에 존재하기 시작함

3) 하나님이 여전히 피조세계를 통치하지만, 반역의 영역이 온 세상에 퍼짐

4) 세상은 반역의 통치 안에 있게 되었고, 사람도 그 안에서 하나님 대신 자신과 사탄을 따르는 삶을 유지함

4. 구원과 회복의 시작

1) 하나님이 아들을 어둠의 세상에 보냄으로써 구원과 회복의 과정을 시작함

2) 예수는 십자가 사역으로 사탄의 일을 멸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문을 엶

5. 복음 증거와 신자의 현재 삶

1) 사도들의 전파와 가르침으로 구원의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짐

2) 예수가 메시아라는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믿는 자는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됨

3) 구원 과정은 죄 사함을 받고,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으로 옮겨져, 하나님 과 새 언약 관계(자녀됨)를 맺는 것을 포함함

4)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교회)에 속하게 됨

5) 빛의 영역에 속한 신자는 어둠의 세상과 영적으로 충돌하는 삶을 살게 됨

6) 신자는 예수에 대한 진리 계명과 서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어 둠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해야 함

7)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고 기도 응답을 통해 신자들이 잘 견디도록 도움

6. 구원 과정의 미래 완성

1) 예수는 재림을 통해 어둠의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회복함

2) 신자는 예수의 부활처럼 새로운 몸으로 변화해 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림

이런 정리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보여주는 구원 과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죄 사함이나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 국한되는 좁은 개념이 아니다.

시간적으로 영원한 과거에서 시작해서 현재를 거쳐 미래 완성을 통해 다시 영원으로 이어지고, 공간적으로 개인과 사람들과의 관계와 세상과 모든 피조 세계를 아우른다.

그 안에 삼위 하나님과 사람들과 영적 대적자라는 등장인물 요소가 어우러진 큰 그림이다. 둘째, 요한서신의 내용 이해다.

전체적으로 요한일서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교회에게 경고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진리와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라는 권면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신자의 현재 삶에 대한 가르침인데, 이 주제들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 속에 있는 구원 과정의 큰 그림과 관련 있다.

기본적으로 어둠과 빛의 충돌을 전제로 어둠과 싸워야 하는 숙명을 가진 신자에게 빛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의로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요한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또 다른 교회에게 편지를 쓴 것이지만, 다루는 주제는 요한일서와 동일하다.

그렇기에 이 편지 역시 어둠과 빛이 충돌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삼서도 다르지 않다

. 가이오가 있는 또 다른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어둠의 세상을 향해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데메드리오)을 추천하고, 교회에 있으면서도 세상 모습과 비슷하게 행하는 디오드레베를 꾸짖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렇듯 요한서신 전체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 안에 있는 요소를 바탕으로 신자와 교회의 삶을 다루는 모습을 보인다. 안타깝게도 요한서신이 제시하는 구원의 큰 그림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신자와 교회를 다루는 모습은 현재 교회에서 행해지는 가르침 형태와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내용의 차이라기보다 전체 구성과 범위, 그리고 그것에 따른 적용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적어도 요한서신의 저자에게는 신자와 교회의 삶과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별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적절한 자리매김을 통해 문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비록 구체적 문제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오늘의 신자와 교회도 어둠의 세상과의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요한서신의 저자가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과 그것으로 신자와 교회와 세상을 볼 필요성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로 인한 구원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미래를 기대하고 반역의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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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The Kingdom of God in the Johannine Letters

Lee, Jae Hyun (Handong Global University, Professor/Chaplain)

Jesus proclaim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as the first declaration of his public ministry. From then on, everything in his ministry and its results were related to the kingdom of God. In essence, the kingdom of God served as the central theme of Jesus’ ministry and teaching, and it subsequently provided the basic framework for the expansion of the gospel and the narratives of the early churches in the books of Acts and the epistles, and for the culmination of history in the book of Revelation. What about the Johannine letters? The problem is that there is no expression of the kingdom of God in these letters. Does this mean that the Johannine letters have nothing to do with the kingdom of God?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epistles to find out the portrayal of the kingdom of God in these letters. Two approaches are used to accomplish this. First, a rethinking of the concept of the kingdom of God is undertaken, suggesting a perspective that sees it not solely as a reign, but as a realm of governance that includes elements of rulership and ruled people. Second, an exploration of the epistles is undertaken through the lens of the three essential components of the kingdom of God: the ruling realm, rulership, and the ruled. Through meticulous examination of the text,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the Johannine epistles effectively present the concept of the kingdom of God. (1) Regarding the ruling realm, the Johannine epistles fundamentally understand the present world as a battlefield where the realms of light and darkness collide. (2) Regarding the ruler, each realm has its initiator and authoritative figure. The ruler of the realm of light is the Triune God, while the ruler of the realm of darkness is Satan, who rebels against God. (3) Finally, the ruled people are divided into all those who belong to the world and the believers who belong to the light. The believers have been moved from darkness to light through faith in Jesus, entering into a new covenant relationship with God and receiving the status of children, but still live in the world. The Johannine epistles provide a comprehensive framework with various aspects of the kingdom of God, illuminating the process of salvation and dealing with the challenges faced by believers and the church. In this regard, this paper argues that the Johannine epistles contain rich expressions of the elements of the kingdom of God, not inferior to any other book in the New Testament.

Keywords the kingdom of God, two different realms, the rulership, the ruled people, the salvation process

신약논단 제31권 제2호(2024년 여름)

투고일: 2024. 5. 7. 최종심사일: 2024. 5. 31. 게재확정일: 202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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