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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비)존재하는 자연: 오토래디오그래피, 객체지향 생태미학, 정신분석학적 대안/김지훈外.중앙대

국문초록

인류세는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어 생태를 교란하고 있는 현재를 지칭하 는 개념이지만, 가시적인 환경 파괴나 기후 변화의 징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 다.

이는 인간의 인지 영역 바깥에서 시간과 공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된 객 체들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면으로 직접적으로 침투했음을 뜻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문제이자, 미학의 영역이 다.

객체지향존재론을 자신의 생태철학과 결합하고 있는 티머시 모튼의 생태 미 학은 이 문제를 사고하는 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류세적 객체를 ‘초 객체’로 이론화하고 오늘날 생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농업로지스틱스’의 사고 형식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문자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고로서, 자연을 우리 인간의 밖에 있는 것으로, 하나의 통일된 객체로 상정하는 것을 말한다.

모튼 은 객체지향존재론을 수용하여 초객체의 미학적 인과성을 도출하고, 예술의 경험 을 통해 그러한 존재론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오토래디오 그래피는 이러한 생태 미학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튼의 생태 미 학은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이는 그가 해로 제시하는 미학적 인과성이야말로 오늘날 인간들이 생태 위기를 부인하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주된 동기로 작 동함을 애써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본 연구는 초객체의 출현 이 주체의 발생과 동연적임을 밝히고, 정신분석의 주체와 증상의 개념을 활용해 대안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박찬경 작가의 <늦게 온 보살>(2019)을 통해 대안 적 생태 미학을 예증한다.

주제어: 티머시 모튼, 생태 미학, 생태 영화, 객체지향존재론, 오토래디오그래 피, 정신분석, 박찬경

I. 들어가는 말

인류세(Anthropocene)는 지난 1만 2000여년 이어져온 홀로세 (Holocene)가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지질학적 행 위자로 등극한 시대를 뜻한다.

판데믹, 이상기후, 생물다양성의 축소 등 점증하는 생태적 위기가 인간의 행위 결과라는 것이다.

지난 7월 인류세 워킹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은 인류세의 대표 지층을 발 견할 수 있는 곳으로 캐나다 크로포드 호수를 공식 선정하고 인류세 선 포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간 인류세라는 용어에 관해서 많은 비판과 논쟁이 있었다. 이는 인 류세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규정하는 것 과 긴밀히 관련된다.

많은 연구들이 인류세의 기원과 원인을 두고 경합 하고 있다.

농업혁명, 산업혁명과 화석연료의 부상, 혹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 등 동시대 생태위기의 원인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에 자 본세(Capitalocene), 쑬루세(Chthulucene), 대농장세(Plantationocene)등과 같은 인류세의 대안 개념들도 등장하게 되는데, 1) 사실 이들은 서로 에게 반명제로 기능하지 않으며 종합 가능한 사고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지적하듯, 이러한 명칭들은 문제의 “규모, 비율/속도, 동시성, 복잡성”과 관련된 것이며, 사태의 복잡성을 고려했을 때 두 개 이상의 명칭이 타당한 것이다. 2)

그러므로 인류세는 단일한 의미와 일대일로 대 칭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문제’라고 간주해야 한다.

다양한 질문들과 해들이 교차하는 장소인 것이다. 3)

그럼에도 우리는 단순한 환경 파괴와 인류세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 다.

인류세에 관한 여러 가설들은 오랫동안 지속되던 감각 가능한 환경 파괴와 오늘날 인류세의 인지 불가능한 문제들 간의 경계를 흐리는 경향 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밀턴에 따르면, 인류세는 단지 인간의 환경파 괴나 가시적인 생태적 파국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처 음으로 전체로서의 지구, 즉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기권, 수권, 설빙권, 생물권, 지권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진화한 지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4)

1) Malm, Andreas, “The Origin of Fossil Capital: From Water to Steam in the British Cotton Industry”, Historical Materialism 21.1 (2013); 무어 W. 제이슨,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헤러웨 이, 도나, 『트러블과 함께하기-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16

2) 헤러웨이, 도나, 위의 책, 172쪽

3) Horn, Eva & Bergthaller, Hannes, The Anthropocene: Key Issues for the Humanities, Routledge, 2020, p. 31

4) 해밀턴, 클라이브, 『인류세-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정서 진 옮김, 이상북스, 2018, 38~39쪽

즉, 인류 세라는 것은 오직 ‘전체로서의 지구’로서 1980년대 이후 지구시스템과학 (Earth System Science)이 발전되고 나서야 식별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 기서 문제는 산불, 처치 불가능한 쓰레기, 쓰나미 등의 국지적이고 지각 가능한 환경 파괴의 산물이 아니다.

인류세는 대기 중 탄소나 방사능 오 염 등 인간에게 식별되지 않지만 행성 전체에 걸쳐 확산된 객체(objects) 들을 통해 식별된다.

지각 불가능한 확산된 객체들이 인류세의 핵심이라면 이는 필연적으 로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인류세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지 각하는 지가 핵심적 문제라는 뜻이다.

미르조예프는 인류세의 핵심 문제 를 ‘미학’이라고 단언한다. “그 어떤 인간도 인류세를 볼 수 없다. 인류세 는 세기, 시간, 차원을 횡단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시각화 될 수만 있다.”5)

5) Mirzoeff, Nicholas, “Visualizing the Anthropocene”, Public Culture 26.2 (2014), p. 213

결국, 우리가 인류세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경우는, 오직 매체들의 시각화를 통해서이다.

미학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류세를 지각 하고, 인식하며, 대안을 상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류세 연구가 영화· 미디어 연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인류세란 인식론과 미학이, 환경적 실천과 미적 실천이, 반성적 판단 일반과 예술 체험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 로 본 논문이 ‘인류세’의 생태미학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통념적인 생태미학적 실천과는 구별된다.

예컨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환경 재난 영화가 위기의식을 고취시키는 방식이나, 주류 환경주의 다큐멘터리의 교훈주의(didacticism)와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외려, 인류세의 생태미학 은 좁은 의미의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를 다룰 수도 있다.

이는 인류세의 생태 예술이 인류세의 원인이 되는 기존의 ‘사고 형식’ 자체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즉, 인류세의 생태 미학은 구체적 실천에 앞서 그 실 천을 구조화하는 사고의 형식 자체를 주제화 하며, 이를 통해 일종의 생 태적 인식 전회를 촉구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 는다”라는 진리에 가닿는 것을 뜻한다.

나와 구별되는, ‘객관화’ 될 수 있 는 일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객체지향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의 일원 중 한 명 이자, 생태철학자인 모튼(Timothy Morton)은 이에 걸맞은 생태 미학을 이론화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류세 위기를 이끈 우리의 사고 형식과 오늘날 위기를 극복하려는 여타의 노력을 ‘기계적 인과론’이 라고 지칭하며, 이를 ‘미학적 인과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오늘날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객체(objects)는 오직 초객체 (Hyperobjects)임을 주장하는 것에 함축되어 있다.

초객체는 시간과 공 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된 객체들을 일컬으며, 이때 객체들 간의 인 과는 기계적 인과론으론 해명될 수 없다.

해밀튼이 가시적인 생태적 징 후와 전체로서의 지구시스템을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튼 역시 OOO의 핵심테제인 객체의 외양과 본질의 분열을 활용하여 초객체를 생태 철학의 중핵으로 내세운다.

또한, 생태위기로 인한 초객체의 대두 와 기술 매체의 발전을 통해 초객체가 가시화된 현재의 역사적 특정성에 주목하며 현재를 생태적 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6)

6) Morton, Timothy,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esota Univ Press, 2013a, p. 128

그렇다면, 오늘날 생태적 사고는 이러한 초객체의 진실에의 충실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OOO가 전개하는 ‘미학적 인과론’과 모튼이 제안하는 개념 인 초객체의 연결 관계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서 객체지향적 생태 미학의 전모를 파악한다.

또한 이것이 기존의 지배적인 생태 미학과 갖는 변별 점을 전경화하고, 이에 응하는 생태 미학적 실천으로 오토래디오그래피 (autoradiography)를 제시한다.

이는 방사선 오염을 시각화할 수 있는 특수한 기법으로, 가이거 계수기를 통해 방사선을 측정한 뒤 통제된 장 소에서 오염 물질을 감광필름과 접촉 시켜 얻는 사진을 뜻한다.

오토래 디오그래피는 인간의 지각역 밖에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시각화한다 는 점에서 초객체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해당되는 일군의 작 품들은 모튼의 생태 미학의 골자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 과잉’과 ‘상호 객체성’을 충실히 예증한다.

그러나 모튼의 생태미학은 그 계발적 내용에도 불구, 몇 가지 이론적 교착지점을 노출한다.

본 논문은 후기 구조주의의 ‘텍스트주의’와 모튼의 ‘그물’ 개념이 어떤 공통점을 갖는 지 파악한 뒤, 모튼의 객체지향적 생 태 철학이 텍스트주의를 실재론화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할 것이다.

또한, 텍스트주의의 현재를 통해 ‘그물’의 생태적 의식이 어떤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관해 비판적으로 논구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 생태적 사고 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지목되는 ‘기계적 인과성’이 사실 모튼이 답으로 제시하는 ‘미학적 인과성’의 결과일 뿐임을 보여줄 것이다.

쉬이 말해, 모 튼의 텍스트 내에서 문제와 해가 혼융되고 있다는 얘기다. 본 논문은 이 러한 혼란의 원인이 모튼이 ‘주체’의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정신분석은 모튼과 같은 목적지에 다소 다른 경로 를 통해 접근한다.

주체-증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진리로 향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모튼의 생태 철학적 프로그램 을 정합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 주체 개념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오토래디오그래피 작업 역시 갱신된 형태로 다시 제시되어야 한다.

박찬경 작가의 <늦게 온 보살>(2019)을 분석하며 이를 예시할 것 이다.

II. 자연 없는 생태학: 객체지향존재론의 생태미학적 함의

모튼은 OOO의 기수 하먼(Graham Harman)의 미학적 인과론을 수 용하면서 자신의 생태철학을 전개한다.

먼저 하먼의 논의를 살펴보자.

하먼은 존재의 질서를 객체의 사중 구조(실재 객체, 실재 성질, 감각 객 체, 감각 성질)로 구분하고 실재의 절대적인 ‘물러남(withdrawl)’을 주장 한다.

이는 객체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하먼이 비판하는 모든 사고와 예술은 많든 적든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 다. 그것들은 객체를 그것의 구성요소로 환원하거나 (하부 채굴), 그것이 다른 객체에 미치는 영향으로 환원한다. (상부 채굴)

하먼은 이 두 종류 의 환원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이중 채 굴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객체는 그 자율성을 잃고 특정한 사건이나 연 결망 안으로 환원되는데, 이때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 소진되게 된다. 7)

7) Harman, Graham, Guerrilla Metaphysics: Phenomenology and the Carpentry of Things, Open Court, 2005, p. 191

그러므로, 물러나는 객체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나 그 자체의 성질로부터 도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라고 상정되어야 한다. 보존되는 객체의 자율성 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동력에 다름 아니다.

모든 객체가 다른 것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면, OOO는 어떻 게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OOO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 과관계는 미학적(대리적) 인과이다.

이것이 OOO가 미학을 제1철학으로 다시 부상시키려는 이유다. “만약 실재적인 것의 영역에서 접촉이 완전 히 불가능하고 감각적 영역에서 접촉이 절대적 선결조건이라면, 분명히 경험의 감각적 영역은 모든 인과가 촉발되는 곳임에 틀림없다.”8)

OOO 의 주창자들이 일컫는 미학과 가장 가까운 모델은 칸트(Immanuel Kant)의 ‘숭고’일 것이다.

즉, 여기서 미학은 칸트가 제기한 반성적 판단 력의 일종으로, 물러나는 객체는 관계로부터 자율적이기 때문에 그 관계 는 오직 환원될 수 없는 이질성의 충돌로 정의된다.

하먼은 객체들 간의 인과를 생산하는 것이 객체 바깥에 있다는 관념을 비판한다. 9)

8) 하먼, 그레이엄, 『쿼드러플 오브젝트』, 주대중 옮김, 현실문화, 2019, 138쪽

9) 하먼은 관계의 원천을 객체 밖에서 찾는 사고들은 변화를 이론화할 수 없다 고 전방위적 비판을 쏟아내어 왔다. 그 기소장에는 화이트헤드, 들뢰즈·과타 리, 라투르, 바라드 등이 기재 된다. 이중 채굴에 관한 포괄적 비판은 다음을 참고하라. (Harman, Graham, “Agential and Speculative Realism: Remarks on Barad’s Onotology”, Rhizomes 30, (2016))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객체의 자율성 없이도 변화를 사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화 이트헤드의 ‘합생(concrescence)’이나 들뢰즈·과타리의 ‘일관성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이 그 예다. (샤비로, 샤비로, 『사물들의 우주: 사변적 실재론 과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 Bennett, Jane, “Systems and Things: A response to Graham Harman and Timothy Morton”, New Literary History 43.2 (2012))

인과를 촉발하는 것 역시도 객체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매혹(Allure)’이다.

매혹은 물러나는 실재 객체 가 표면에 드러나는 감각 성질을 통해 암시되는 것으로서, 이는 다른 실 재 객체가 그곳에 이끌리게 하는 ‘인력’으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한 실 재 객체가 다른 실재 객체와 대리적으로 인과관계를 구성하게 만든다.

매혹은 한 실재 객체가 ‘환원’이 아니라 ‘진실성(sincerity)’으로 다른 객 체에게 다가가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예술의 경험과 포개진다.

예컨대, ‘인간’이라는 실재 객체는 예술작품의 감각 객체를 통해 그 이면의 실재 객체의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쉬이 말해, 매혹은 감각 성질-외양의 환원될 수 없는 ‘과잉적’ 측면에 이끌리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모든 접촉으로부터 물러난 실재 객체는 어느 정도는 그 자체에 대한 감각적 캐리커처로 번역되어야 하며, 이런 과장된 외관은 은폐되어 있는 실재적인 것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인과관계를 위한 연료로 제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하튼 감각적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은 모든 경험의 외부에 놓인 실재에 대해 소급 효과를 가질 수 있음에 틀림없다.”10)

실재 객체와 실재 객체는 서로 물러나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감각 객체를 매개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매혹이며, OOO에서 모든 인과관계 의 모터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는 실체 간의 만남이 아 니라, 오직 감각적, 미학적, 표면적 마주침일 뿐이므로 더 없이 모호하고 비결정적이다.

모튼은 이러한 하먼의 사고를 확장해 자신의 생태철학을 전개한다. 그는 하먼의 객체 개념을 초객체로 재정의하고, 대표적인 것 을 인류세라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가 목격하는, 혹은 장치로 측정되는 모든 종류의 생태재난은 단지 미학적 효과라고 단언한다.

“지금, 여기에 서의 날씨에 대한 나의 경험은 잘못된 직접성이다. 그 경험은 절대로 물 방울이 내 머리위에 떨어진다는 사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지구 온난화의 ‘나타남’이다.”11)

10) 그레이엄 하먼, 앞의 책, 138쪽

11) Morton, Timothy, op. cit., p. 48

객체지향적 생태철학의 핵심적 논제는 대문자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라는 조화롭고 일관적인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모든 객체가 물러난다면 이는 당연한 귀결일 테다.

모튼은 진정한 생태문화를 가로막는 것이 자연이라는 ‘이념’이라고 주장한다.

이 자연은 문화의 밖에 자율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된 것으로서, 모튼이 ‘에 코미메시스’라고 부르는 과거와 현재의 실천들은 이 자율적인 자연을 매 개 없이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과 테크닉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12)

자연이 하나의 객체이며, 그것을 메타적 관점에서 인간이 볼 수 있다는 관점은 작금의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이다.

모튼은 이러한 사고 형식을 ‘농업로지스틱스(Agrilogistics)’라고 일컫는데, 농업이 시작되면 서 공동체 정착 생활이 시작되고, 모든 곳에 경계를 구획하여 인간과 비 인간 영역을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3)

핵심은 농업적 인간이 비인 간들을 자신들과 구분되는 객체로 상정하고, 이를 관망할 수 있는 메타 적 위치를 점유하는 데 있다.

생태적 의식은 정확히 이러한 농업로지스 틱스 사고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자연의 근본적인 균 열, 혹은 간극을 깨닫는 것이다.

“칸트가 발견한 실재 속의 균열 - 예를 들어, 셀 줄은 알아도 숫자 자체 가 무엇인지는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 - 은 폴립(산호류 같은 원통형 해양 고착 생물)과 대양저 사이의 균열, 혹은 폴립과 폴립 자체 사이의 균열같이 수조 개를 넘는 균열 사이에 있는 (인간) 정신적인 균열일 뿐이다.”14)

12) Morton, Timothy, Ecology without Nature: Rethinking Environmental Aesthetic, Havard Univ Press, 2007, pp. 31-32

13) 모튼, 티머시,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2023a, 68쪽

14) 모튼, 티머시, 『실재론적 마술: 객체, 존재론, 인과성』,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3b, 74쪽

그러므로, OOO는 칸트가 제기한 현상계와 예지계의 절대적 간극을 존재의 일반 질서로 확장한다.

객체는 언제나 물러난다. 객체는 ”A이면 서 A아님“이라는 아이러니로 정의된다.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이면 에는 언제나 전적으로 자율적인 객체가 있다.

이는 결국 비인간 객체들 과 인간 객체들이 애초에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비인간 객체들의 매 혹은 이미, 언제나 인각 객체들에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인간 과 분리되어 있는, 만약 인간이 파괴하지 않았다면 ‘조화로웠을 터인’ 자 연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먼의 표현대로 다시 읽자면, 대문자 자연은 상부/하부 채굴된 객체 에 다름 아니다.

모튼은 객체의 환원이 변화를 사유 할 수 없고, 결정론 적이라는 데 착안하여 오늘날 생태적 증상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오 늘날 모든 종류의 생태론은 일종의 “정보투기”이다.

모든 매체에서 생태 위기에 대한 근거들을 제공하지만, 변화가 일어나긴커녕 기존의 경향은 가속화되어가고만 있다.

즉, 생태적 정보 투기는 일종의 무의식적 쾌락 을 독려하여 현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증상이다.

생태적 정보 투기를 통해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안정화 효과를 누리게 된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데이터의 내용은 매우 긴박해 보인다. ‘이봐, 안 보여? 깨어나라고! 어떻게 좀 해봐!’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 데이터를 보내고 받는 방식의 암묵적 내용은 그 긴박함과 완벽하게 모 순을 이룬다. ‘무엇인가 오고 있지만, 아직 여기에는 없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예측하라.’”15)

그렇다면, 이 증상이 봉합하려고하는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 태적 비상사태가 이미, 여기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 투기는 근본적으로 최후의 데이터를 기다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떤 데이터도 파국 자체를 확정해줄 수는 없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복잡계의 최종결론 을 확증해주는 데이터 같은 것은 없다.

OOO에 따르면 초객체는 그 관 계의 외양 안에서 소진되지 않으며, 언제나 물러나는 자율적인 객체가 있기 때문이다. 16)

15) 모튼, 티머시, 앞의 책, 2023a, 25쪽

16) 모튼, 티머시, 앞의 책, 2023b, 199쪽

즉, 어떤 명확한 데이터를 통해 명확한 결과를 추론하 려는 기계적 인과론은 생태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증상으로 작동한다.

모 튼은 이것이 생태위기 부정론자들의 근본적 사고형식이라고 말한다.

부정론자들에 따르면, 가뭄과 지구온난화 사이에는 누구도 부정 못 할 명 증한 인과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에드워드(Paul Edward)가 밝히듯, 이는 모델을 경시하고 데이터만을 물신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들의 논 리는 파국을 경고하는 학자들에는 ‘모델’만 존재하고 확증적인 ‘데이터’ 는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데이터가 도출될 때까지 위기에 관해서는 불 가지론을 유지해야 한다. 17)

17) Edward, N, Paul, A Vast Machine: Computer Models, Climate Data, and The Politics of Global Warming, MIT Press, 2010, pp. xviii-xix

기계적 인과론은 우리의 일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우리 ‘개 인’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에어콘과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생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계적 인과론은 개인의 책임과 참여를 요구하는 보수적인 생태수사를 작동시키기 마련이다.

개인의 참 여와 책임을 강조하는 생태운동가, 기후위기 부정론자는 기실 같은 사고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학적 인과론, 혹은 모튼이 일컫듯이 “모호한 인과론”이다.

인류세에 필요한 생 태미학은 미학적 인과론을 그 중핵으로 두어야 한다.

III. 초객체의 미학: 생태 예술로서의 오토래디오그래피

1. 모든 예술은 생태적이다

오늘날 초객체를 표현하는 지배적 미학 모델은 데이터 시각화일 것이 다.

특히, 선도표(line chart)가 대표적이다.

인류세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J. Crutzen)과 그 동료들이 2011년 발 표한 논문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이들은 24개의 선도표를 통해 산업혁명 이후 인간 활동의 증가율과 생태적 변화의 추이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 다. 18)

18) Crutzen, J. Paul, et al, “The Anthropocene: Are Humans Now Overwhelming the Great Force of Nature?”, A Journal of the Human Environment (Nov) (2006)

지구온난화 문제에 관한 대중적 인식을 선도했다고 평가되는 고어 (Al Gore)의 저서 『불편한 진실』(2006)과 이를 영화화한 <불편한 진 실>(2007)에서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율을 표현하는 선도표 는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하우저(Heather Houser)는 선도표가 생태위기를 표현하는 다른 미학 적 장치들과 다른 점은 (정적인) 관점(perspective)이 아니라 활동 (action)을 시사 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선도표는 현재의 상태를 정확 히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환 경적 질병의 병인론과 제공하고 미래적 대안(혹은 파국)의 가능성을 가 늠하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19)

즉, 선도표가 궁극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명증한 기계적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동차의 생 산량과 이산화탄소 농도 사이의 인과를 확인하고, 이산화탄소 농도와 대 홍수의 빈도 사이의 인과를 확인한다.

동시에 이는 자동차의 생산량이 줄어들면, 대홍수의 빈도수도 줄어들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허용할 것 이다. 문제는 인류세라는 초객체가 이러한 기계적 인과관계로 환원될 수 있 냐는 것이다.

앞서 봤듯이, 초객체는 절대적으로 물러나는 것이며 가시 적인 모든 생태위기는 그것의 국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즉, 선도표가 나타내는 다양한 지표들은 단지 미학적 효과이며, 인류세라는 초객체 자 체는 본질적으로 포획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생태위기 에 관한 재현은 선도표의 미학에 의존한다. 데모스(T.J Demos)가 지적 하듯, 선도표와 같은 데이터 시각화의 경우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는, 중립성의 이데올로기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20)

19) Houser, Heather, “The Aesthetic of Environmental Visualization: More than Information Ecstasy”, Public Culture 26.2 (2014) pp. 327-328

20) Demos, T.J, Against the Anthropocene: Visual Culture and Environmental Today, Sternberg Press, Berlin, 2017, p. 15

사 실에의 투명한 재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선도표의 약속은 더 없이 매력 적일 테다.

더 나아가 선도표는 모튼이 말한 정보 투기의 일환에 다름 아니다.

선도표는 과거와 현재의 양적 흐름을 보여줌으로써, 미래를 결 정론적으로 제기한다.

그렇다면, 모튼이 제시하는 대안적 생태 미학의 구체적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예술의 단계는 동등하게 짝지어진 힘들 간의 기이한 비대칭성 으로 생각되는 것이 최선이다. 한 편에는 인간의 인지와 연산 능력이, 또 다른 한 편에는 거대하고 물러난 초객체가 있다.”21)

21) Morton, Timothy, “Poisoned Ground: Art and Philosophy in the Time of Hyperobjects”, Symploke, 21.1-2, (2013b) p. 37

역설적이게도, 생태 미학을 정의하는 이상의 문장에는 작품을 표현하 는 용어가 없다.

‘인간의 인지와 연산능력’이 ‘관람자’라면, ‘물러난 초객 체’는 작품 뒤로 물러나는 ‘실재 객체’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모튼의 정 의는 하먼의 ‘매혹’을 다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이 ‘물러난 초객 체’를 암시할 때 실재 객체인 ‘관람자’의 ‘진실성’이 작동하고 작품과 관 람객의 인과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생태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관람자를 상호객체성(interobjectivity)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모튼에 의하면 상 호객체성은 초객체의 다섯 가지 특성, 즉 점착성(viscosity), 비국지성 (nonlocality), 시간 파동(temporal undulation), 위상화(phasing), 상호 객체성 중 가장 예술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상호객체성은 앞서 말한 미 학적 인과가 일어나는 양태인데, 모튼은 이를 ‘그물(mesh)’라고 부른다.

예술 작품을 포함한 모든 감각적 영역에는 객체들의 흔적들만 존재하며, 각 객체들은 다른 객체의 흔적을 ‘번역’한다.

모튼은 미국 로키힐에 보존 되어 있는 공룡 발자국을 보는 관람자를 예로 예술 체험을 기술한다.

“진흙 위의 공룡 발자국은 6500만년 이후의 인간에게 돌 위의 발 모양 의 구멍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감각적 연결만이 있다. 공룡, 돌, 인간 사이 에. 그것들의 광대한 시간적 척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우리 가 공룡의 살던 그 시간에 정신의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뭔가 기이한 것을 발견한다. 거기서 우리가 찾는 것은 또 다른 상호객체적 공간일 뿐이다. (...) 모기도, 지구에 충돌한 소행성도 그만의 ‘공룡성’의 표본만을 가질 뿐이다. 어째서인가? 왜냐하면 스스로 조차도 스스로에게 물러나는 실재 공룡이 있기 때문이다.”22)

22) ibid,. p. 41

그러므로 하나의 생태 예술은 상호객체적 양태를 제시해야 한다.

동시 에 그것은 그것의 ‘미학적 모호성’을 활용하여 실재 객체를 암시하여 관 람자 주체를 그 상호객체성의 공간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이때 작품 과 관객 사이의 인과성이 작동한다.

즉, 예술은 관람자에게 무언가를 ‘한 다.’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모든 비인간 객체들과 ‘평평한’ 미학적 공간에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이 미학적 영역에서 객체는 다른 어떠한 객체도 완전히 포획할 수 없다.

우리는 실재 객체, 즉 모튼이 ‘기이한 낯선 자 (strange strangers)’라고 부르는 것과 불가분하게 엮여 존재한다.

이것이 농업로지스틱스와 대립하는 ‘생태적 의식(ecological awarene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튼에게 있어 ‘생태 예술’과 ‘예술’은 구분되지 않 는다.

매혹을 통해 인과성이 작동하는 모든 예술은 곧 생태 예술이기도 한 것이다.

2. 오토래디오그래피의 인과와 추상

그렇다면, 초객체와 시각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아르세뉘크 (Luka Arsenjuk)은 이미지가 OOO에서는 아무런 존재론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실재와 감 각, 혹은 존재와 외양 모두에 동시에 참여하며, 두 차원을 구별할 수 없 게 만든다.

그러나 OOO는 실재 객체와 감각 객체를 급진적으로 분리함 으로써, 이미지를 존재가 아니라 단지 시뮬라크럼으로 전락시킨다. 23)

23) Arsenjuk, Luka, “On the Impossibility of Object-Oriendted Film Theory”, Discourse 38.2 (2016) p. 204

이 어, 그는 존재와 외양의 불가분한 변증법을 이론화했던 영화 이론가들을 소환하여 이를 OOO에 대당시킨다.

예컨대, 바쟁(Andre Bazin)이나 벤 야민(Walter Benjamin)에게 실재는 오직 외양의 조작을 통해서만 접근 할 수 있다는 것은 공리였다는 것이다. 24)

그러나 OOO가 제시하는 예술에의 ‘매혹’ 역시 감각 성질(외양)의 과 잉적 특성을 통해 실재 객체로의 접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지 위를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전적 영화 이론에서 전개했던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과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는 주로 ’지표성 (indexcality)’과 관련된다.

곧 밝혀지듯이 이는 초객체를 다룬 예술에서 현저하다. 이러한 생태미학의 예가 오토래디오그래피다.

2011년 후쿠시 마 원전 유출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후쿠시마-이후-예술(postFukushima art)의 작가들이 주로 활용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카가야 (Masamichi Kagaya), 타케다(Shimpei Takeda), 카와쿠보(Yoi Kawakubo) 등이 대표적이다.

2011년 당시 주류 미디어는 지각적으로 확인되는 재앙들, 즉 지진과 쓰나미의 여파 등을 스펙터클로 전달하는데 혈안이었다.

이에 해당 작가들은 즉각적이진 않지만, 오랜 시간 동안 생 태를 천천히 파괴시키는 더 큰 재앙인 방사능 오염을 시각화할 예술을 고안하려고 시도했다. 25)

24) ibid., pp. 206-207

25) Davre, Amandine, “Revealing the Radioactive Contamination after Fukushima in Japanese Photography”, Trans Asia Photography 10.1, (2019)

오토래디오그래피를 통해서 우리는 모튼의 생 태미학의 두 축, 즉 상호객체성과 감각 객체의 과잉(모호성)이 기존의 이 미지 이론과 어떻게 변별되는 지를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카가야의 오토래디오그래피 그림 2 타케다의 오토래디오그래피

1) 지표성의 시간적 차원

오토래디오그래피는 기존의 사진의 계보와 어느 정도 연속성을 이룬 다.

포토그램, 엑스레이 등 사진예술과 그 이론에서 ‘사진기 없는 사진’은 특별히 예외적인 기법이 아니었다. 26)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나 레이(Man Ray)의 포토그램 작업 등은 사진기 없이 물체와 감 광면을 직접 접촉시켜 대상을 얻어내려고 했다.

즉, 카메라의 여부와 상 관없이 사진의 특정성은 지시체와 재현의 존재론적 연결을 지칭하는 ‘지 표성’이다.

모튼의 생태 철학은 이러한 사진의 지표성 모델을 존재 일반 으로 확장시킨다.

앞서 말한 그물(상호객체성)이 그것인데, 이에 따라 세 계는 초객체를 기록하는 거대한 감광면이 된다.

이는 오토래디오그래피 에 대한 기본적 서술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모튼이 가하는 수정은 지표성과 시간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예컨대, 바쟁이나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진적 이미지에서 지시체 의 과거성과 지표적 흔적의 현재성의 모순된 시간에 천착했다.

바쟁은 사진에서 시간이 ‘방부 처리’되면, 과거는 현재를 향해 지속된다고 주장 했다.

바르트는 사진의 시간성을 “이것은 지금이었다(this was now)”라 는 모순된 문장으로 정의하면서 과거 리얼리티의 현재로의 발산에 주목 했다. 27)

즉, 양자에 공통적인 전제는 지시체(혹은 촬영의 순간)의 ‘과거 성’과 사진을 보는 ‘현재성’의 모순적 결합이 사진적 지표성의 현상학적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모튼은 ‘미래성’과 ‘현재성’의 결합을 사진적 지 표성에서 발견한다. 미학적 경험에는 두 가지 시간만 존재한다.

“외양은 과거다, 본질은 미래다.”28)

26) Moskatova, Olga, ”Photographing hyperobjects: The non-human temporality of autoradiography”, Philosophy of Photograph 13.1, (2022) p. 122

27) 멀비, 로라, 『1초에 24번의 죽음』, 이기형·이찬욱 옮김, 현실문화, 2007, 73~75쪽

28) Morton, Timothy, op. cit., 2013a, p. 91

이러한 결론은 앞선 모튼의 생태 미학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이다.

모든 감각 영역의 흔적이 지표성이라면, 이는실재 객체의 ’이미 일어난’ 번역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지표성이 인과로 (즉, 예술로) 기능한다면, 물러나는 실재 객체가 암시된다.

이 실재 객체, 절대적으로 물러나지만 존재는 암시되는 이 비결정적인 객체가 관람자 에게 열린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로 재기입되며, 현재의 형이상학을 종결시킨다. 이는 깔끔 한 철학적 솜씨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객체의 거대한 유한성이 인간을 기 이한 미래에 공존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 없는 미래 말이다. (플루 토늄과 지구 온난화와 상쇄 속도가 각각 24,100년과 100,000년이 걸린다는 것을 상기해보라)”29)

모스카토바(Olga Moskatova)는 이러한 미래성을 오토래디오그래피 작업에서 발견한다.

방사성 동위원소라는 ‘거대한 유한’, 즉 초객체를 암시한다.

이것의 반감기는 인간의 시간척도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다.

이에 오토래디오그래피가 지시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미래를 지시한다.

이는 선도 표가 예시하는 결정론적 미래와는 구분되는데, 방사능 오염이 소멸되는 것은 아득한 미래의 일이고, 미래를 위해서는 이 오염된 객체들의 관리 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대안적 미래나 생태적 파국은 정량적 으로 예측되지 않으며, 미래는 잠재적인 영역으로 개방된다. 30)

29) ibid., p. 94

30) Moskatova, Olga, op. cit., p. 129

2) 아날로그 데이터 시각화와 도상성의 삭제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오토래디오그래피의 형식 자체 가 일종의 감각적 과잉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은 물러난 실재 객체를 암시할 수 없고, 작품과 관람자의 인과도 일 어나지 않을 것이다.

타카하시(Tess Takahashi)는 오토래디오그래피와같이 초객체의 흔적을 머금은 작품들을 수량화/균질화된 일반적인 데이 터 시각화 미학과 구별하여 ‘아날로그 데이터 시각화’라고 지칭한다.

이 런 양식의 특징은 상호객체적 지표성과 미학적 추상의 기이한 결합이라 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데이터 시각화는 정보를 과학적으로 제공한다. 레프 마노비치는 ‘반-숭고적 추상’이라고 부르길 제안했는데, 이는 압도하거나 어리둥절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사안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기술한다. (...) 반 면 (아날로그 데이터 시각화)는 모더니즘의 형식적 추상을 활용하여 다른 종류의 정동적 인식론적 경험을 제공한다.”31)

이제 우리는 오토래디오그래피의 추상성을 모더니즘적 숭고의 계보에 위치시킬 수 있다.

거닝(Tom Gunning)은 사진적 지표성은 언제나 도상 성(iconicity)과 결합해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이미지는 지시체와 존재 론적으로 결속됨과 동시에, 감각적인 유사성을 담보해야 작동한다는 것 이다. 32)

반면, 대부분의 오토래디오그래피 작업에서 우리는 아무런 일상 적 형체를 포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명백한 도상적 유사성은 작품에 전무하다. 33)

31) Takahashi, Tess, ”Fukushima Abstraction: Sound of a Million Insects, Light of a Thousand Stars as Analog Data Visualization”, ASAP, 6.1 (2021) p. 73

32) Gunning, Tom, “What’s the Point of Index? or, Faking Photographs” Still Moving, ed. Karen Redrobe and Jean Ma, Duke Univ Press, 2008, p. 40

33) 오토래디오그래피의 추상도는 작품마다 다르다. 모스카토바는 현재 작업되 는 오토래디오그래피를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식별할 수 없는 패 턴과 색으로만 구성된 가장 추상적인 작품. 둘째, 전통적 사진과 오토래디 오그래피의 추상적 작업을 병치 하는 작업. 셋째, 식별 가능한 객체의 오염 도를 확인시켜주는 작업이 있다. 추상도는 첫 번째 것이 가장 높고 두 번째 와 세 번째는 작품에 따라 덜 할 것이다. (Moskatova, Olga, op. cit., pp. 120-121)

앞서 우리는 매혹과 인과의 추동이 일종의 칸트적 숭고와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그것은 관람자를 압도하고, 잠재적 의미의 영역으로 내던진다.

이 의미가 실재 객체와 완전히 무관해져 서 상상력이 전적으로 해방되어선 안 된다.

또한 완전한 무의미의 심연 으로도 추락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물러나는 실재 객체는 암시되는 것 이 아니라 소멸되기 때문이다.

하먼은 매혹의 숭고를 칸트의 숭고와 거 리를 두면서 OOO의 객체는 절대적 크기나 힘이 아니라 단지 ‘거대한 유한수’라고 주장한다. 34)

매혹이 제공하는 숭고 경험은 일종의 부정신학 적 체험이 아니라, 객체의 간접적 경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토래디오그래피와 모더니즘적 추상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모 튼은 생태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이라는 ‘배경’과 우리라는 ‘전경’의 구획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쓰나미, 지구온난화 등의 생태위기의 징후들이 자연을 더 이상 우리의 일상과 상관없는 배경 으로 존속시킬 수 없게끔 하기 때문이다. 35)

브레우너트(Svea Braunert) 는 전경과 후경의 구분이 불식되고, 선형원근법이 기능부전에 빠지는 추 상예술의 속성 일반이 오토래디오그래피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면 서, 오토래디오그래피의 추상은 그것이 기록하는 상황의 직접적 결과물 이라고 말한다.

이에 오토래디오그래피는 과거의 모더니즘 예술과 같이 ‘부정성’의 지위를 획득할 수는 없다.

이때의 형식은 예술적 자율성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현재에 상응하는 시각적 코드에 가깝기 때문이다. 36)

34) 하먼, 그레이엄, 『예술과 객체』,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2, 126쪽

35) Morton, Timothy, op. cit., 2013a, p. 104

36) Braeunert, Svea, ”Notes on the Index: matter as image testimony in the art of the anthropocene”, Angelaki 28.4 (2023) p. 113

IV. 미학적 인과성은 문제인가, 해답인가

1. 텍스트주의의 실재론적 변종?

모튼의 핵심은 기존의 질서 내에서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고 바꿀 것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다.

일 만년 이상 지속되었던 농 업로지스틱스의 사고 형식을 생태적 사고 형식으로 교체하는 것을 뜻한 다.

앞서 자세히 해명했듯, 그것은 하나의 일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부지불식간 낯선 객체 들과 그물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생태적 삶을 위해 세계를 송두리째 변형할 필요도 없다. 유관성 올가미를 더 크게 만 들 필요도 없다. 유관성 올가미가 있다는 관념만으로도 깨닫고도 남는 다.”37)

37) 모튼, 티머시, 위의 책, 2023a, 114쪽

생태적 의식은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컨대, 비인간에 대한 공감이나, 멸종에 대한 우려, 지속가능성의 대한 전망 등은 모튼의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예술이 생태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오직 형식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생태적 사고 형식은 이미 우리에게 꽤 익숙한 사 고다.

이는 정확히, 메타언어를 비판하는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와 같지 않은가?

요컨대 하나의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석은 지시체와 재현의 이중 적 층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 르면, 하나의 해석은 작품에 대한 메타적 자리에 위치될 수 없으며, 또 다른 번역일 뿐이다.

그리고 번역은 이어진다.

무한한 번역의 과정 속에 서 텍스트의 ‘진리’는 포착되지 않는다. 동일한 환유의 연쇄일 뿐이다.

그 러므로 모튼은 이러한 ‘텍스트주의(textualism)’를 OOO와 결합해서 존 재론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상호객체성-그물이 정확히 이런 것이라고 확인했다.

모든 객체들은 서로를 번역할 뿐이며, 실재 객체는 절대적으로 물러난다고 말이다.

물론 이러한 “메타언어는 없다,” 혹은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선언하는 위치야말로 궁극적인 메타언어의 위치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튼 역시 이를 의식한 듯 하다.

“OOO는 포스트구조주의보다도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러한 주요 교리를 더 잘 실현한다. 현상학으로 돌아가며, OOO는 냉소적 거리 두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실성’을 말한다. (...) 인식론에서 근본 적인 존재론으로 무대를 높임으로써, OOO는 ‘메타언어는 없다’라는 태도 에 어떠한 오만함이나 거리감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한다.”38)

모튼이 제안하는 생태 의식의 형식적 상동물이 이미 텍스트주의라는 형식으로 존재했으므로, 우리는 모튼이 그리는 생태적 미래 역시 텍스트 주의의 현재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은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나온다.

라투르는 미국의 한 공화 당 전략가의 일화로 시작한다.

이 남자는 전형적인 기후위기 부정론자로 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말하는 기후 위기는 환상이며, “과학적 확증”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이제 위험은 마치 사실처럼 가장하는 이데올로기 주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나오지 않는다. - 우리가 과거에 그토록 효율적으로 싸우는 법 을 배웠기 때문에 - 문제는 나쁜 이데올로기적 편견으로 위장한 사실에 관한 지나친 불신에서 나온다.”39)

38) 모튼, 티머시, 위의 책, 2023b, 90쪽

39) Latour, Bruno,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Critical Inquiry 30 (2004) p. 227

모든 객관적 진술은 일종의 번역일 뿐이고, 발화의 메타적 위치는 존 재하지 않으며, 기실 객관성은 텍스트의 진리-효과일 뿐이라는 것. 이것 이 후기 구조주의의 교훈이자, 지식인들의 주무기였다.

라투르는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이미 기후위기 부정론자와 같은 보수주의의 전가의 보도 가 되었으며, 이에 메타언어 비판은 시효를 다했다고 주장한다.

전술했 듯, 모튼은 기후위기의 부정을 기계적 인과론의 발현으로 보고 그물에의 의식을 해법으로 제안한 반면, 라투르는 모튼의 해법을 정확히 문제로 전도하고 있다.

즉, 우리 모두 메타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한 부인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튼과 라투르 중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이미 모튼이 같은 논리를 구사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이트적 전도를 꿰고 있다.

즉, 증 상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무엇에 관한 해결책이라는 점 말이다.

모튼은 기후위기 부정론자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담배회사와 지구 온난화 부정자들은 공통적으로 실재적인 것의 갈라짐 에 대한 깨달음에 내재한 무에 저항하며, 그 저항에 의존한다. 흡연과 암 사이에 ‘검증된 연결고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요지가 아니라는 점에 명확하다. 마찬가지로, 지구 온난화 부정은 결정론을 본보기로 삼는다.”40)

여기서 대번에 드러나는 점은 기계적 인과론과 미학적 인과론이 문제 와 해법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려, 기계론적 인과론은 미학적 인 과론의 ‘증상’이다.

다시 말해, 기계적 인과론은 미학적 인과론의 ‘결과’ 다. 기계적 인과론은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응하기 위한 주체의 저항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때 오토래디오그래피 역시 생태적 미학은커녕 생태적 증상을 촉발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모튼은 이러한 미 학적 인과론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예술을 통해 모호한 인과성 을 인정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안하지만41) 이는 계몽주의 예술관을 크 게 벗어나지 못한다.

모튼은 메타언어를 비판할 때 종종 후기 구조주의 와 라캉(Jacques Lacan)을 구별 없이 병치한다.

그러나 라캉의 메타언어 비판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지젝(Slavoj Žižek)에 따르면, 결 국 후기 구조주의는 메타언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시학주의를 지향하 게 된다. 즉, “우리 자신의 텍스트가 얼마나 이미 복수적인 과정의 탈중 심화된 네트워크 속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다시 말해 텍스트의 과정은 얼마나 우리가 ‘말하려고 의도했던 바’를 항상 뒤집는가”를 보여주려 한 다는 것이다. 42)

40) 모튼, 티머시, 위의 책, 2023b, 119쪽 41) Morton, Timothy, op. cit., 2013b, p. 39 42) 지젝, 슬라보예,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246쪽

모튼이 초객체의 예술은 ‘아이러니’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하먼이 매혹의 원형적 모델로 ‘비유’를 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캉의 해법은 다르다.

“라캉은 그것을 단순히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라고 덧붙인다. (...)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것의 자명한 부조리 를 통해 자기 자신의 불가능성을 육화하는 순수한 메타언어의 발화를 만들 어내는 것이다.”43)

43) 같은 책, 249쪽

라캉의 제안은 대문자 자연, 기계적 인과론, 상부/하부 채굴 자체를 피 해가는 대신 그것을 거침없이 단언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것들 자 체의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메타언어의 불가능성 자체가 드러날 수 있다.

정신분석 역시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로 이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모튼과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

요컨대, 대타자의 완전성이라는 환상을 횡단하여 ‘대타자는 존재하 지 않는다’로 이행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인 것이다. 44)

44) 지젝 역시 자연을 오늘날 생태주의의 대타자로 간주하며,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지젝, 슬라보예,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박정수 옮김, 그린비, 2009, 660쪽) 78 비교문학 제91집 (2023년 10월)

다만, 그 방법 이 다르다.

생태 철학적으로 이를 번안하자면, 대문자 자연을 단언하는 그 순간에서만 대문자 자연의 불가능성이 증상처럼 발현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태 미학은 자연의 비-존재로의 계몽적 도약이 아니라, 자연의 불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증상의 구조에서 그 균열을 포착하는 실천이 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그 존재를 단언하는 한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비)존재이다.

2. 초객체와 주체의 동시 발생

모튼이 프로이트적 사고를 간간히 내비침에도, 궁극적으로는 텍스트 주의적 전략을 취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주체(subject)’의 개념을 받아들 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학적 인과성과 기계적 인과성의 변증법 적 관계를 부인하게 된다.

즉, 기계적 인과성은 미학적 인과성의 내재적 부정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앞서 강조했듯, 본인 스스로 그 관계를 은 연중 암시하면서도 말이다. 이 관계가 부인되는 한, 그 안에서 이론화되 는 생태미학이란 유사 교훈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튼 역시 주체를 언급한다. 다만 여기서 주체는 단지 그물(상호객체성)의 부대 효 과에 불과하다. 나(인간)의 사유는 초객체의 번역일 뿐이라는 것이다. 45)

혹은 주체가 느끼는 멜랑콜리는 단지 다른 객체의 발자국일 뿐이다. 46)

45) Morton, Timothy, op. cit., 2013a, p. 85

46) 모튼, 티머시, 위의 책, 2023b, 275쪽

즉, “주체는 단지 하나의 객체이다.”

이는 OOO가 인간중심주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내건 핵심 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주체 개념은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라캉적 주체는 대문자 자연과 아 무런 관련이 없다.

주체는 외려 그것의 불가능성의 기호다.

이에 따르면 주체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며 객체도 아니다.

주체는 ‘물러남’ 그 자체 다.

사실 이는 인간중심주의로 퇴행하지 않고서, 즉 칸트의 초월론적 주 체 개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서 동시에 생태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소 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퇴로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초객체의 등장을 주체와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모튼은 초객체가 인간에게 가시성을 획득하는 역사적 순 간이 현재의 시간을 정의한다고 말하면서, 이제 생태 의식을 위한 토대 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한다. 47)

당연히 초객체의 가시성은 근대 과학 기술 로 인해 획득된 것이다.

라캉의 해법도 여기에 근거해 있다.

다만 초객체 가 (정신분석학적 의미의) 주체와 동시에 출현했다는 사실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주체 는 과학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48)

47) Morton, Timothy, op.cit., 2013a, p. 128

48) 라캉, 자크, 「과학과 진리」, 『에크리』, 홍준기·이종영·김대진·조형준 옮김, 새 물결, 2019, 1015쪽

이에 대한 해명으로는 밀너 (Jean-Claude Milner)의 주석이 유용하다.

그에 따르면, 라캉은 17세기 과학혁명 이후의 단절을 정신분석적 주체의 전제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 가 당대의 지배적 모델이었던 철학적 관념론과 싸우기 위해 과학주의에 기대었듯이, 라캉은 당대에 만연한 과학주의의 통치와 맞서기 위해 ‘시대 구분’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49)

핵심은 전근대적 과학과 근대적 과학의 차이다.

밀너는 라캉의 논의를 뒷받침하는 과학철학자 코이레 (Alexandre Koyré)의 정리를 제공한다.

1) 고대적 에피스테메와 근대 과학의 단절이 있다.

2) 근대 과학은 갈릴레이적 과학이며, 그것의 전형은 수학화 된 물리학 이다.

3) 그것의 대상을 수학으로 바꿈으로써, 갈릴레이적 과학은 대상으로부 터 감각적 성질을 벗겨낸다. 50)

쉬이 말해, 전근대적 수학은 우리가 감각 가능한 자연의 수학적 본질 을 캐내려고 했다.

여기서 과학의 대상은 우리의 가시장 안에 있다.

반 면, 수학이 된 물리학은 그 대상으로부터 모든 감각적 성질을 제거한다.

즉, 근대과학에서 수학은 인간이 감각 불가능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 내 부에서 창설한다.

칸트의 용어로 다시 쓰자면, 선험적 종합 판단이 형이 상학적 세계 개념으로 이행해가는 것이다.

“근대적 단절은 수학이 영원 과 연결되는 것을 부분적으로 중단시킨다.”51)

49) Milner, Jean-Claude, A Search for Clarity: Science and Philosophy in Lacan’s Oeuvre, trans. Ed Pluth, Northwestern Univ Press, 2021, p. 36

50) ibid., p. 21

51) ibid., p. 32

모튼이 말하는 초객체가 가시화된 역사적 순간은, 사실 생태 위기로 인해 갈릴레이적 과학이 인 문학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월경하기 시작한 오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이 ‘과학의 수학화’란 ‘실재의 상징화’의 등가물 이라는 점이다.

자연적 대상의 수학적 측정은 소여를 즉자의 속성이 아 니라 인간의 상관물로 격하시킨다.

“과학은 더 이상 대문자 숫자로 기능 하지 않으며, 동일자로 접근하는 황금열쇠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 자로서, 다양성의 영역에서 타자를 끊임없이 포착하려고 노력한다.”52)

이는 오늘을 보는 관점에 관해 즉각적 수정을 요청한다.

즉, 인간이 지각 불가능한 초객체가 가시화된다는 것은 우리와 탈상관적인 세계와 마주 대하는 생태적 경험이 아니라, 외려 세계 자체가 급진적으로 상관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주판치치(Alenka Zupančič)에 의하면, 라캉이 코이레의 논의에서 빌려온 것은 바로 이 수학-언어의 힘, 그 자체 로 실재를 절단하는 기표의 힘이다.

“과학의 대상이 과학 공식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대상이 과학 공식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학 대상은 과학 공식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재한다.”53)

52) ibid., p. 33

53) 주판치치, 알렌카, 『왓 이즈 섹스?: 성과 충동의 존재론, 그리고 무의식』, 김 남이 옮김, 여이연, 2021, 154쪽

이는 특정한 과학 공식이 실재적 자연을 ‘재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공식은 말 그대로 자연-대상을 ‘대체’한다.

이것이 우리가 앞선 말한 대 문자 자연에 관한 ‘단언’의 상관물이다.

물론 수학을 통한 자연의 대체는 조화롭고 매끈한 과정이 아니다.

기표가 실재를 절단하면 객체는 필연적 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인식론적 교착지점이야말로 주체의 출현을 담보 하는 것이다.

진리와 과학 사이의, 혹은 진리와 지식 사이의 간극이 드 러난다.

라캉의 핵심은 수학공식이 필연의 보증물이 아니라 언어처럼 모 종의 우연성에 의해 규정된다면, 진리와 지식은 불가피하게 분열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주체들은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의심하는 자들이 며, 스스로를 실증적인 지식의 공간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증상으로 내 세운다.

정신분석의 주체가 과학의 주체라는 라캉의 말은 이런 의미다.

이 말은 곧 초객체가 주체와 함께 출현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초객체 의 과학적 측정 결과는 그 자체로 감각 객체로 나타나지만, 진리의 차원은 그만큼 물러선다.

그러한 이미지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더 없이 ‘환상적’으로 나타난다.

즉, 하먼이 말한 ‘매혹’의 경험이다. 인과성이 작 동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를 “평평한 존재론”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 라, 증상-픽션에 사로잡히게 할 것이다.

Ⅴ. 신화의 귀환 : 박찬경의 <늦게 온 보살>

이상의 논의를 통해 진정한 생태 미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첫째, 모튼이 그러했듯 기계적 인과성과 미학적 인과성을 분리 하는 대신, 그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의식할 것.

둘째, 대문자 자연에서 물러나는 대신, 그것을 단언하고 그 증상-픽션을 내파시키는 것이다.

신 화는 그 대표적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 후루하타(Yuriko Huruhata)는 오늘날 인류세 담론 내에서 신화의 귀환은 새로운 세계관, 혹은 우주론 을 찾아내고자하는 ‘증상’임을 단언한다.

인류세 담론의 대표적 철학자인 라투르와 해러웨이 모두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새로운 우주론을 모색한 다. 54)

54) Huruhata, Yuriko, “Weathering with you: Mythical Time and the Paradox of the Anthropocene”, Representation 15.7 (2022) pp. 74-75

라캉과 마찬가지로 라투르 역시 코이레의 과학혁명을 자신의 전제로 삼는다.

코이레에 따르면, 17세기 이후로 우리는 제한된 ‘세계(cosmos)’ 에서 무한한 ‘우주(universe)’로 나아갔다.

앞서 말했듯, 이는 수학화 된 물리학이 우리의 감각 너머를 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이 거기서 기 표가 창설하는 실재에 주목하는 반면, 라투르는 같은 곳에서 인간중심주 의의 해체를 본다.

“코이레가 말했듯이, 우리는 제한된 세계에서 무한한 우주로 나아가야 만 했다. 일단 우리가 인간 정치체의 협소한 경계를 넘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같은 물질적 질료로 구성된다. 땅, 공기, 달, 행성, 은하수, 빅뱅까지.그것이 코페르니쿠스적, 혹은 갈릴레이적 혁명이 시사하는 것이다.”55)

55) Latour, Burno, ”Waiting for Gaia. Composing the common world through arts and politics”, in What is Cosmopolitical Design?, ed. Albena Yaneva & Alejandro Zaera-Polo, Farnham: Ashgate, 2015, pp. 8-9

이에 새로운 우주관이 요구되는데, 라투르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 하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새로운 우주관으로 요청하고 있다.

인간에 게 (물러나는) 객체들의 불연속성에 맞서, 가이아는 새로운 연속성의 모 델을 제공해서다.

그러나 라투르의 흥미를 끄는 곳은 단지 가이아가 연 속성을 함의하는 신화여서가 아니다.

가이아는 영국의 과학자 러브록 (James Lovelock)이 제안한 과학적 이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지구 행성 은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으로 재구성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가 단단히 얽혀 있어 공생과 공멸로 함께 나아간다.

즉 가이아는 신화이면 서, 동시에 과학적 ‘모델’인 것이다.

이는 다시 한 번 진리와 과학의 분열 이라는 테제를 확증해준다.

과학적 모델에서 진리는 물러나고, 그 자리 를 신화의 내러티브가 봉합한다.

진리를 잃은 과학적 모델을 신화가 보 충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는 또 있다.

1964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힉 스(Peter Higgs)에 의해 ‘계산된’ 힉스 입자는 2013년에서야 유럽입자물 리연구소(CERN)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다.

이는 그동안 “신의 입자(the particle of God)”라고 불려왔는데, 과학의 영역이 보증해주지 못하는 진 리의 영역을 신화가 보증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태초에 신은 창조물 들을 힉스입자로 빚었다.”

인류세의 인식론적 위기는 결국 과학과 진리 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태 미학의 공간은 이 분열을 통해서 만 구성되는데, 이 간극을 주체가 픽션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토래디오그래피는 생태 미학의 ‘질료’이다.

오토래디오그 래피 작업은 효과적으로 지식과 진리의 간극을 개방한다.

그러나 그것으 로는 부족하다.

이 간극 자체를 봉합하려는 증상적 실천을 전면화하고 그것의 균열을 포착해야 한다.

박찬경의 영화 <늦게 온 보살>은 정확히 이러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보살>은 오토래디오그래피, 불 교의 고사, 통일성 없는 내러티브, 시간적 도약, 명확한 동기를 알 수 없 는 인물들의 행동 등을 혼란스럽게 보여준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의 전체적 형식이다. <보살>은 앞서 언급한 카가야의 오토래디오그래피 작업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흑백 네거티브 효과를 활용해 영화 전체를 오토래디오그래피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모든 공간은 방사능에 의해 침식되어 있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 능이 사실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종 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두려운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경험하는 것은 ‘사실’에 의한 위협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미학적인 종류 의 것이다.

사용된 시각적 모티프가 영화 초반에 카가야의 오토래디오그 래피를 통해 암시되는 데도 불구,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과학적 사 실이나 일상적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주술적 세계처럼 보여 진다.

여기까지 <보살>은 모튼이 개념화한 생태미학의 정의에 충실한 듯 보인 다.

상호객체적 지표성과 감각적 과잉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귀결인데,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과학적 기표에 의해 새롭 게 창설된 공간을 시뮬레이션해서다.

즉, 영화가 보여주는 기묘한 매혹 은 정확히 과학과 진리의 분열에 근거해 있다.

그림 3 <늦게 온 보살> 그림 4 <늦게 온 보살> : 생략(첨부논문파일참조)

이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의 이미지에서 당대인들이 느꼈던 ‘매혹’과 다르지 않다.

그 이미지를 둘러싸고 만연했던 각종 음모론들은 매혹과 증상의 관계를 정확히 지시한다.

<보살>은 내용적 차원에서 이 증상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주요 내러티브는 불교의 곽시쌍부 고사를 따른다.

곽시쌍부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반에 든 부처를 다비(茶 毘)하려고 하였으나, 무슨 수를 써도 불이 붙지 않았다. 이때 부처의 열 반 소식을 전달받은 제자 가섭존자가 늦게 서야 나타나자, 그제 서야 불 이 붙어 부처를 보내드렸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오토래디오그래 피가 개방한 미학적 인과성의 공간이 신화로 다시 봉쇄되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개념화 될 수 없는 오토래디오그래피의 감각적 과잉은 신화 라는 서사로 봉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서사를 정확히 내파시키기 위해 동원한다.

즉, 고사는 여기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된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 불교의 열반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등장인물들이 이 ‘무대’로 향하는 과 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로 활용 할 콘테이너가 바다 건너로부터 운 송되고, 누군가는 무대를 장식할 조각과 그림을 준비하며, 또 다른 누군 가들은 무대를 위해 땅을 고르고 배우로서 무대로 향하기도 한다.

그러 므로,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오토래디오그래피 내의 간극을 내러티브로 메우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시도 자체를 무대화해서 일종의 소격효 과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보살>은 앞서 모튼과 관련해서 개괄 한 오토래디오그래피의 미학적 특성에 더해, 수행적 픽션이라는 형식을 중첩시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영화가 제공하는 또 다른 계열과 공명하면서 확증되는 데, 영화가 계속해서 일본이나 인도 등에 소재한 많은 원자로가 불교적 모티프를 통해 이름 붙여졌음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는 고사의 수행과 는 정반대로 진리와 과학의 간극이 상징적 봉합을 통해 수행된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방사능의 측정 불가능한 파괴력과 윤리적 불확실성은 ‘지 혜’(일본의 원자로 몬쥬 = 문수보살), ‘진리와 덕’(일본의 원자로 후겐 = 보현보살) 등으로 상징화된다.

또한, 인도에서 최초로 성공한 핵실험의 암호명은 ‘미소 짓는 부처’였다.

영화는 방사능에 의해 침윤된 삶의 이미 지들과 실제 원전의 불교적 모티프를 병치함으로써, 실재와 증상의 대구법을 수행한다.

그림 5 <늦게 온 보살>, 몬쥬 /그림 6 <늦게 온 보살>, 후겐 : 생략(첨부논문파일참조)

그러므로 영화가 수행하는 곽시쌍부 고사는 일종의 반성적 내러티브 라고 할 수 있다.

증상적 서사를 ‘수행’함으로써, 역으로 그것의 가상성을 폭로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의 입안자들이 사로잡혀 있던 증상을 폭로하고 그 간극 자체를 가시화하고자 함이다.

오토래디오그래 피가 연 그 틈은 영화 끝까지 봉합되지 않는다. 바로 이 틈이 생태영화의 창조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은 물러난 진리와 과학적 기표 ‘사이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예술이 오늘날의 인류세 위기에 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VI. 나가는 말

모튼의 객체지향적 생태철학은 오늘날 대다수의 생태적 실천에 대한 날 선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대다수의 생태주의적 실천을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에 빗댄다.

마치 이 오염된 세계의 창조와는 아무 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거리를 두고 개탄하는 것 말이다.

아름다운 영혼 들은 세계의 아이러니를 불식하고, 메타적 위치를 점유하며, 생각은 그 만두고 지금 당장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56)

이러한 생태적 실천의 지배적 흐름에 맞서, 모튼은 행동을 멈추고 생각하라고 제안한다.

인류세는 아 름다운 영혼이 세계를 ‘객관화하는’ 형식에 의해 도래한 것이기 때문이 다.

지젝은 이를 ‘실재적 행위’라고 부르는데, 이는 특정한 능동적 행위 이전에 이미 우리의 지각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57)

오늘날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 어떤 증상의 굴절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자연의 실 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을 위해 싸울 필요도 없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8)

56) Morton, Timothy, op. cit., 2013a, p. 92

57) 지젝, 슬라보예, 위의 책, 337쪽

58) Dodds, Joseph, Psychoanalysis and Ecology at the Edge of Chaos: Complexity Theory, Deleuze|Guattari and Psychoanalysis for a Climate in Crisis, Routledge, 2011, p. 108

그럼에도 모튼의 주장이 생태 철학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전복의 형식을 띠고 있음은 두 말 할 것 없는 사실이다.

앞서 강조했듯, 그는 일만 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사고의 형식 자체를 포기하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이것이 오직 미적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오늘 날 생태 미학을 이론화하는 데 모튼을 건너뛰기는 어렵다.

본 연구가 문제 삼은 것은, 모튼이 인간중심주의로부터의 탈출속도를 얻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증상을 사고하는 데 필 수적인 주체의 개념까지 함께 버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발 견을 무효화한다.

바로 기계적 인과론은 미학적 인과론의 결과라는 점과 그것이 오늘날 반(反)생태적 사고의 중핵에 있다는 점 말이다.

이것을 염 두에 두지 않는 다면, 어떠한 종류의 생태 미학적 실천도 계몽적 언사에 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초객체의 진실에 충실한 생태 미학이란 초객체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픽션 구조를 탐사하는 것을 뜻한다.

박찬경의 경우처럼, 오토래 디오그래피와 같은 사진 작품에서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그는 같은 해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라는 사진 연작도 함께 공개했는 데, 이 작품은 카가야의 오토래디오그래피 작업과 재난 현장을 찍은 일 반 사진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이는 초객체의 ‘물러남’을 과장된 수사로 기술한다.

<보살>은 사진 작업이 보여주는 초객체의 특성을 정확히 증상적 픽션으로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픽션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영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태 미학의 매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뜻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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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Nature is (Non)existent: Autoradiography, Object-Oriented Ecological Aesthetic, Psychoanalytical Alternative Jihoon

Kim, Yongjin Kim

The Anthropocene refers to the current period in which humans are becoming geological agents and disturbing ecosystems. But it is not limited to visible environmental degradation or manifestation of climate change. It also refers to the fact that objects outside the realm of human perception, distributed over vast range of time and space, are no longer in the background, but have penetrated directly into our daily lives. The Anthropocene is therefore fundamentally an epistemological crisis and a matter of aesthetics. Timothy Morton’s ecological aesthetics, which combines object-oriented ontology with his ecological thought, is a useful way to think about this issue. Morton considers anthropocene as ”Hyperobjects” and argues that the cause of today’s ecological crisis has always been the agrilogistic mode of thinking. This is the idea that there is a ”Nature,” which means that Nature is regarded as something outside of us, as a coherent object. Morton derives the aesthetic causality of the hyperobjects from Object-Oriented Ontology, and suggests that the solution is to acknowledge this ontological fact through art. Autoradiography is an example of this ecological aesthetic. Nevertheless, Morton’s ecological aesthetic has certain limitations. Because he ignores the fact that the aesthetic causality which he presents as a solution is exactly a primary cause for people to disavow the ecological crisis and maintain the existing order. To address this, this study reveals that hyperobjects and subject is simultaneously has emerged in the wake of Scientific Revolution and proposes an alternative by utilizing the concepts of subject and symptom of psychoanalysis. Finally, an alternative ecological aesthetic is exemplified through Park, Chankyong’s (2019)

Key words: Timothy Morton, Ecological Aesthetic, Eco Cinema, OOO, Autoradiography, Psychoanalysis, Park, Chankyong

논문투고일: 23년 9월 8일 심사완료일: 23년 10월 12일 게재확정일: 23년 10월 12일

비교문학 제91집 (2023년 10월)

(비)존재하는 자연 오토래디오그래피, 객체지향 생태미학, 정신분석학적 대안.pdf
8.0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