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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기독교의 타죄(墮罪) 신화에 대한 헤겔의 해석에 나타난 인간의 본성 및 정신의 변증적 전개에 관한 견해에 대한 고찰/백훈승.전북대

한글 요약

헤겔은 기독교 「창세기」의 인간의 타죄(墮罪)[Sündenfall] 이야기의 분석을 통해 인간 의 본성⋅인간정신의 전개⋅악의 발생과 상처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 및 상처의 치료라는 문제를 다룬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 매를 따먹음으로써 선악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 신으 로부터의 분리라는 상처, 죄인이라는 상처, 그리고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선악을 인식할 수 있음은 또한 그러한 상처를 치 료할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헤겔은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과 정, 곧 즉자[무자각적⋅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대자[자각적⋅반성적 상태]로, 그리고 즉 자대자[분열의 통일 상태]에 이르는 정신의 운동을 통찰함으로써,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 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는 다른 교리에 비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헤겔은 기독교의 타죄신화와 연관시키지 않고도 인간은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 악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즉자적 상태에서는 보편적인 선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이고 특수한 욕망⋅충동⋅경향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본고는 헤겔의 주장의 바탕이 되는 기독교의 타락이야 기 자체의 의미와 문제점을 드러내는 한편, 이에 대한 헤겔의 해석 및 그를 통한 인간정 신의 변증적 전개과정에 대한 헤겔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주제어: 헤겔, 기독교의 타죄신화, 인간본성, 선과 악, 정신의 변증적 운동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으 로서 상황에 따라 선이나 악으로 발현하는가 하는 물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이 고심하며 다루어 온 물음이다.

헤겔은 인간이 본래 선하다고 보는 타종교의 교리보다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보는 기독교의 교리가 우위에 있 으며, 「창세기」의 인간의 타죄신화는, 개화되지 않은 직접적 상태에 있는 인간 의 자기 해방 내지 자유를 지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타죄신화의 분석 을 통해 악의 발생과 상처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 성 및 상처의 치료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과정을 서술하 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헤겔이 기독교의 타죄신화를 통하여 파악한 인간본성 및 인 간정신의 변증적 전개에 대한 주장을 그의 법철학⋅종교철학 강의⋅철학 강요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것들에 대한 정합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우선, 헤겔이 법철학 § 18 추가에서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1) 라고 말할 때의 ‘본래’라는 시점은, 인간이 창조된 시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 고,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1)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oder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 (1821)(TW 7로 줄임), 69. § 18 추가.

그렇지만 법철학 § 139에서는 § 18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악 함’을 기독교의 타죄신화와 연관시키지 않고 논하고 있고, 이곳에서 헤겔이 “인 간이란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 악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내적 반성을 통해서도 악하다”라고 말할 때의 시점은, 인간이 태어나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미발전의 상태에 있는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타죄신화를 통한 인간정신의 ‘즉자[무자각 상태]’로부터 ‘대자[자각 상태]’로의, 그리고 다 시 ‘즉자대자[양자의 통일상태]’로의 이행에 대한 헤겔의 해석을 소개한다.

그 의 해석에 의하면, 창조된 인간의 원초적(즉자적) 상태는 ‘미분적(未分的) 통일 상태’로서,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러한 동물적 상태⋅원초적 이고 미분화(未分化)된 무자각적 통일상태를 벗어나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원초적인 통일로부 터의 분열을 거친 후에 획득한 통일이야말로 자각적이며 인간적인 통일이라는 것이다[2. 인간본성 및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에 관한 헤겔의 견해].

이에 대한 고찰에 이어, 기독교의 타죄신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타죄 신화 및 헤겔의 발전이론과 관련하여 인간본성에 대한 헤겔의 이해를 비판적으 로 고찰함으로써[3. 기독교의 타죄신화 및 인간본성에 관한 헤겔의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 양자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의의와 문제점을 드러낸다.

2. 인간본성 및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에 관한 헤겔의 견해

인간의 본성과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칸트를 넘어서는 헤겔의 본질적인 걸음 은, 주관적인 자유의 발생 자체가 이미 악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통찰 내지, 타죄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선악에 관한 지(知)가 바로 또한 자유의 발 생사 자체와 근원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악 일반의 근원은 신비 속에, 즉 자유의 사변성 속에 놓여 있다”2)고 말한다.

요컨 대 헤겔에 있어서 악은, 주체가 자기에게로 가는 데에 있어서의 한 계기로 되며, 타죄는 인간의 자유의 역사 속에 있는 하나의 생성계기를 가리킨다.3)

2) TW 7, p. 261. § 138 주해.

3) Joachim Ringleben, “Die Dialektik von Freiheit und Sünde: Hegels Interpretation von Genesis 3,” in: Biblical Interpretation. History, Context, and Reality, ed. by Christine Helmer with the asistance of Taylor G. Petrey, Atlanta, 2005 (pp. 133-154), p. 133 참조.

그러면 헤겔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의 법철 학⋅종교철학 강의⋅철학강요를 통해서 우선 파악한 후에 인간의 본성⋅ 악⋅인간정신의 전개 등에 대한 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음미해보고자 한다. 인 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자.

1) 법철학에서의 견해

헤겔이 법철학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언급한 곳은 <서론>[Einleitung] 과 <도덕>[Moralität]장 두 곳인데 우선 <서론>에서의 언급을 살펴보자.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은 선하다고 보는 다른 교리에 비하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겠지만 하여간에 이 기독 교 교리는 철학적 해석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충동에 의해 규정되지 않도록 하는 위치에 있는 자유로운 자다.

따라서 개화되지 않은 직접적 상태에 있는 인간은 바로 그가 그렇 게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야 할 처지에 있다.

그것 없이는 기독교가 자유의 종교일 수가 없는 원죄설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TW 7, 69. § 18 추가).

이 구절만 보면 헤겔은 기독교가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헤겔은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인 간은 선하다고 보는 다른 교리에 비하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신의 형상(形像)[첼렘, celem] 과 모양[드무트, demut]을 따라 창조되었다.4)

4) 히브리어 ‘첼렘’과 ‘드무트’는 70인역의 희랍어에서는 각각 ‘아이콘(eikōn, εἰκών)’과 ‘호모이오시스(homoiōsis, ὁμοίωσις)’로 — 그러나 창세기 1장 27절(‘첼렘’)과 5장 1 절(‘드무트’)의 히브리 단어에는 같은 용어인 ‘아이콘’을 사용했다 —, 라틴 불가타에 서는 ‘이마고(imago)’와 ‘시밀리투도(similitudo)’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정확한 의미는 용이하게 정의하기 힘들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의 창조와 관련되는 곳에 나타나는 ‘첼렘’이라는 말의 문맥을 취하여 특별한 어 구와 함께 그 주위의 문맥을 고찰하면,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도 모든 생물을 지배할 수 있는 제한된 권위를 가지고 있 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와 같은 권위를 가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권위는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하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권위다. 그러나 기독 교 성경 가운데 명확하게 기록된 곳이 없기 때문에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신약성 서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타락한 죄인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발견한다(고린도전서 11:7; 야고보서 3:9)[오토 J. 바압(박대선 옮김), 구약 성서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6), 102쪽 참조; 케네스 매튜스(권대영 옮 김), 창세기Ⅰ(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197쪽 ff. 참조].

따라서 인간은 본래 악한 자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창조한 신을 악한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맞지 않은 말일 것이고, 인간은 신을 닮아서 그 본성상 (항상) 선을 행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은 기독교의 교리를 오해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인간은 본래 악하다”고 헤겔이 말할 때 ‘본래’라는 시 점을, 인간이 창조된 시점으로 볼 경우, 헤겔의 주장은 그른 것이다.

그런데 <도 덕>장에서 이어지는 헤겔의 주장을 살펴보면, 헤겔이 말하는 ‘본래’라는 시점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선악과‘로 줄임]를 먹었을 때를 가리키 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시점 이전에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고, 단지 ‘범 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명령을 지킬 수도 있었고 어길 수도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신의 명령을 어겼다.

이에 대 해 검토하기 위해, 다소 길다고 생각되는 <도덕>장 § 139의 주해와 추가의 내 용을 인용한다.

악 일반의 근원은 신비 속에, 즉 자유의 사변성 속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악 일반의 근원은 의지의 자연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의지의 자연성 에 맞서 내면적으로 존재한다는 자유의 필연성 속에 놓여 있다.

자기 자 신(과)의 대립[Widerspruch]으로서 그리고 저 대립 속에서 자기와 불 화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의지의 이러한 자연성이고, 더 나아가 악으 로 규정되는 것은 의지 자체의 이러한 특수성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특수성은 오직 이중의 것으로서만, 여기서는 의지의 자연성과 의지의 내 면성의 대립으로서만 존재하는데, 이 대립 속에서 의지의 내면성은 단지 하나의 상대적이고 형식적인 대자존재(자)일 뿐이다. 이러한 상대적이 고 형식적인 대자존재(자)는 자기의 내용을 오로지 욕망, 충동, 경향 등 과 같은 자연적 의지의 규정들로부터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욕망, 충동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 선(善)은 의지의 자신 속으로의 반성, 즉 인식하는 의식과 더불어 동시 에, 직접적인 객관성으로서의 한낱 자연적인 것에 대한 또 하나의 극 (極)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선에 대립하는 의지의 이러한 내면성은 악이다. 그러므로 이와 동시에 인간이란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 악할 뿐 만 아니라 그의 자기내적 반성(복귀)을 통해서도 악하다. 그리하여 자연 그 자체도 만약 그것이 자연의 특수한 내용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의 지의 자연성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는 악이 아닐 것이며 또한 자신 속으 로의 반성이나 인식작용 일반도 만약 그것이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자연 성에 대한 대립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것만으로는 악이 아닐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분열이라는 저 첫 번째 입장이 도무지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입장이야말로 비이성적인 동물과 인 간을 가르는 것이 되므로 첫 번째 입장에 머무른 채 보편성에 대립하는 특수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이 분열의 입장은 무효화 되어 극복되어야 한다(TW 7, 260 ff. § 139 주해).

인간이 자연적 의지인 한에서 악하다고 하는 더 상세한 규정을 악이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로 자연적인 의지를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통상적인 관념에 대립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의지는 자유의 내용에 대립하는 것으로, 바로 이런 까닭에 자연적 의지 를 지닌 어린이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미개인)은 책임능력이 모자란 것 으로 취급된다. (…) 그런데 분명히, 자연적인 것이 즉자적으로는(그 자 체로는) 선한 것에도, 악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지만, 자연적인 것이 자유로서의 의지 및 자유에 대한 앎으로서의 의지와 관련되면 그것 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는 규정을 포함하게 되며, 따라서 그것은 악이 된다(TW 7, 264. § 139 추가).

이 두 곳의 내용을 종합해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동물과 같은 자연 상태에 있을 때에는 선에도 악에도 사로잡히지 않은[unbefangen] 상태에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자연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과 대립⋅불화하게 되면서 의지는 특수한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때 의지는 자연 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으로 대립한다.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성격을 지닌 욕망, 충동, 경향 등과 같은 자연적 의지의 규정들5)은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 는데, 그것이 보편적인 것이 아닌 자기만의 특수성을 원리로 삼고 바로 이 특수 성을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할 때에 악으로 된다는 것이다.

5) 예컨대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충동은 선한 것으로도 부정적인 것으로도 규정될 수 있다”[K-H Ilting (hg), Vorlesungen über Rechtsphilosophie 4. Philosophie des Rechts nach der Vorlesungsnachschrift K.G.v.Griesheims 1824/25. Der objektive Geist aus der Berliner Enzyklopädie zweite und dritte Auflage (1827 und 1830). Philosophie des Rechts nach der Vorlesungsnachschrift von D.F. Strauß 1831 mit Hegels Vorlesungsnotizen, Stuttgart-Bad Cannstatt, 1974, 133]. 그런데 우 리가 일반적으로 의지를, ‘행위를 선택하고 결단하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 을 인정한다면, 욕망, 충동, 경향을 의지의 규정들로 간주하는 헤겔의 입장을 받아들 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의지의 자연성에 대립해 있는 의지의 내면성은 “단지 하나의 상대적이고 형식 적인 대자존재(자)일 뿐”이며, “이러한 상대적이고 형식적인 대자존재(자)는 자 기의 내용을 오로지 욕망, 충동, 경향 등과 같은 자연적 의지의 규정들로부터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개의 극(極)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첫 째로 ① 직접적인 객관성으로서의 한낱 자연적인 것이라는 극이고,

두 번째로는 ② 의지의 자신 속으로의 반성, 즉 인식하는 의식이라는 극이며,

마지막으로는 ③ 선(善)이라는 극이다.

여기서 ①에 속하는 욕망, 충동, 경향 등과 같은 자연 적 의지의 규정들은 선할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이 될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다.

이들이 악으로 되는 경우는, 자신 속으로 반성한 의지[②]가 보편자인 선[③]에 대립하여 자신의 특수성을 고집할 때다.6)

예컨대 욕망이라는 자연적 인 것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그리하여 선으로도 악으로도 될 수 있 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의지가 보편자와 대립하여 즉자대자적⋅보편적인 것이 아닌 자기만의 특수성을 원리로 삼고 바로 이 특수성을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할 때에 악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7)

6) 헤겔은 법철학 § 128 이하에서 주관적 도덕의식(도덕적 확신)인 ‘양심[Gewissen]’ 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런데 ‘선’이라는 계기와 ‘양심’이라는 두 계기는 우선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채로 서로에 대해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즉, 도덕적 주체 자신이 ‘선’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바로 (즉자대자적인) 선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선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고 보편적인 선과 합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7) 헤겔은 종교철학 강의에서도 ‘악’은 ‘이성적인 것’, ‘법칙’, ‘정신의 규정들’, ‘선’이 라는 보편자에 맞서서 자신의 특수성을 주장할 때 발생하는 개별화를 가리킨다고 말 한다: “악은 타자에 맞서는[gegen] 대자존재의 의식이며, 개념이나 이성적인 의지라 는 의미를 지닌 그 자체로 보편적인 객체[Objekt]에 맞서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러 한 분리를 통해 비로소 나는 나에 대해 존재하며, 그 속에 악이 놓여 있다. 악하다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것이며, 나를 개별화하는 것을 말한다. 즉,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는 개별화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자는 이성적인 것이며, 법 칙이며, 정신의 규정들이다. 그러나 이 분리와 더불어 대자존재가 성립(발생)하며, 마땅히 존재해야 할 보편적인 것, 정신적인 것, 법칙이 비로소 성립한 다”[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Ⅱ (=TW 17), p. 257].

이처럼 헤겔은 선에 대립하는 의지의 내면성을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헤겔이 “그러므로 이와 동시에 인간이란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 악할 뿐만 아니 라 그의 자기내적 반성(복귀)을 통해서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 미인가?

여기 § 139에서는 § 18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악함’을 기독교의 타죄신 화와 연관시키지 않고 논하고 있다.

§ 18에서 헤겔이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기 독교의 교리“라고 말할 때의 ”본래”라는 시점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시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헤겔이 “즉 자적으로‘, ”본래“, 그리고 ”자기 내적 반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들의 의미는 § 139의 <추가>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헤겔이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아직 성숙 하지 못한 미발전의 상태에 있는 시점을 가리키며, 이때의 인간의 의지는 ”자유 의 내용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자유로서의 의지 및 자유에 대한 앎으로 서의 의지와 관련되면 그것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는 규정을 포함하게“ 됨으로 써 악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래적이고 원초적인 상태는, 아직은 보편성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보편성에 대립하는 특수성을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상태이므로 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직접적인 욕망⋅ 충동⋅경향이라는 ”제한된 관점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칸트가 말한 의미에서만 인간은 본래 악하다“8)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기 내적 반성(복 귀)을 통해서도“ 악하다고 헤겔은 주장하는가? ’자기 내 반성(복귀)[Reflexion in sich]’라는 표현은 인식론적으로는 보통, 인간의 자기의식의 작용을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는바, 우리의 의식이 대상에로 나아갔다가, 대상을 의식하는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지시한다.

이것은 ‘자기성찰’이라고도 할 수 있 다.

그렇다면 여기서 헤겔은 인간의 자기의식 내지 자기성찰을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헤겔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반성(복귀) “이라는 용어는 예컨대 사변(思辨)[Spekulation]이나 이성과 대립하는 의미로, 그리하여 지성(知性)[Verstand]과 같은 수준에 있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 겠다.

즉, 반성은 신앙과 이성을, 유한자와 무한자를, 그리고 주관과 객관을 분 리하며, 자기 자신(반성하는 주관)을, 자기가 반성하는 객관과 구별되고 그것에 외적인 것이라고 구별한다.9)

이렇게 볼 때 헤겔에 있어서, 반성하는 의지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는 자의(恣意)[Willkür]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10)

8) Pirmin Stekeler, Hegels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Ein dialogischer Kommentar, Hamburg, 2021, 518.

9) Michael Inwood, A Hegel Dictionary, Cambridge, Massachusetts, 1993, 249 참 조.

10) Dirk Stederoth, ‘Wille,’ in: P.G. Cobben, u.a., Hegel-Lexikon, Darmstadt, 2006, 391 참조.

 

다시 말하면 헤겔의 법철학의 맥락에서의 ‘반성’은 선(善)과의 통일에 이르지 못하 고 선에 대립하는 의지의 내면화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의지가 단지 ”주관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하며, 헤겔은 이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종교철학 강의에서의 견해

종교철학 강의에서 헤겔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 “근본에 있어서 고차적이고 참된 신앙”이고 “인간의 근원적 규정”, 곧 “인간의 진정한 즉자존재”이며, “이러한 인간의 이념에 상응하지 않는 상태는 비신적(非 神的)인 것[das Ungöttliche]이며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이 이념으로부 터 소외되는 것은 인간의 죄책[Schuld]”이라고 주장한다.11)

그리고

“인간의 이념은 즉자적으로는 낙원의 상태로 존재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현실적으로는 자 연적인 상태로서만 존재하고 그렇게 실존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저 최초의 상태 와 이 두 번째의 상태의 결합은 하나의 이행이다. 그리고 더욱이 이러한 이행은 나쁜 것[das Schlimme]에로 타자화되는 것이고, 신적인 이념과 신의 모상(模 像)[Ebenbild]으로부터의 타락이다”(GW 17, 244)라고 말한다.

헤겔은 법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종교철학 강의에서도, 인간이 그 이념에 있어서는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낙원의 상태로 존재하지만, 현실에서 는 자연적인 상태로만 존재하는데, 이러한 이념의 상태로부터 자연상태로의 이 행은 ‘선으로부터 악[나쁜 것]으로의 이행이며 타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 기 종교철학 강의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 규정”이나 “인간의 진정한 즉자 존재”는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순진무구한 상태를 가리키고 “자연적인 상태” 는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데 반하여, 법철학 § 139의 추가에서 말하는 “자 연적인 의지” 내지 “즉자적인 의지”는 타죄신화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어린이 같은 원초적인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보편성에 대립하여 자기의 특수성을 주장 하는 악한 의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교철학 강의에서도 헤겔은 인간이 본래 악하다고 말한다:

“진리는 인간이 즉자적으로 악하고 일반적으로 악하며, 스스로의 가장 내적인 것에서 악하고, 단적으로 악하며 내면에서 악하다는 것, 악이라는 이 규정이 인간의 개념 규정 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이것을 의식한다는 것이다”(GW 17, 262).

이렇게 볼 때, 법철학 § 18과 종교철학 강의에서 헤겔이 “인간은 본래 악하다”라고 말 할 때의 ‘본래’라는 시점은 ‘인간이 창조된 당시‘가 아니라, “동산의 모든 나무에 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 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12)고 한 신 의 명령이 주어진 후에 인간이 취한 행동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1) G.W.F. Hegel, VorlesungsmanuskripteⅠ(1816-1831). Religions-Philosophie, hg.v. Walter Jaeschke, GW 17, p. 242. 이 저술은 GW 17로 줄임.

12) 「창세기」 2: 16-17(한글 킹 제임스 성경. 한영대역, 말씀보존학회, 2000). 이후 의 기독교 성서로부터의 인용은 이 책에 의함.

 

창조된 시점에서의 인간은 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악도 죄도 없는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명령을 따르는 길과 어기는 길, 이 두 길이 인간 앞에 놓여 있었고 인간은 양자(兩者) 가운데 선택한다.

그러나 인간 은 그 가운데 악을 선택하였고, 선택의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간다.

단지 추상적으로는,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헤겔은 말한다(GW 17, 245 참조).

인식과 의욕 혹은 의식 일반은 “악의 의욕인 동시에 선의 의욕”(GW 17, 246)이 므로 인간은 악을 행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헤겔은, 악은 인식능 력을 지니고 있고 자신을 대자화(對自化)할 수 있는 — 이러한 정신작용 속에서 만 부정적인 것⋅근원분할⋅분열이 정립될 수 있기 때문에 — 인간에게서만 존 재하기 때문에, 인식능력이 없는 동물⋅돌⋅식물은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GW 17, 227 참조).

3) 철학강요에서의 견해

기독교 원죄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에 대해서는 철학강요 § 139의 추가와 § 24의 추가3을 참조할 수 있는데,13) 특히 § 24의 추가3에서 헤겔은 타죄신화를 통하여 인간정신의 ‘즉자’로부터 ‘대자’로의 이행을 설명하고 있다.

즉, 선악과를 먹기 전(신의 명령을 어기기 전)의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한 즉자의 상태 —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자각적⋅즉자적 상태. 신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인 상태 — 이었으나, 열매를 먹은 후의 상태는 선악을 구별하고 죄를 자각 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 단계에서는 신과 같이 인간도 선악을 알게 되었다.14)

그런데 헤겔은 기독교의 타죄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인간은 선악과를 먹는 범죄를 통하여 “일반적인 분리의 입장“15)에 서게 되 었고 “자연적 통일의 붕괴”(TW 8, 88)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정신 의 이 기적적인 분열”(ebd.)이라는 것이다.

13) 이 글은 기독교의 원죄설에 관한 비판이 주목적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 는 하지 않는다.

14)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하시니라”(「창세기」 3:22).

15) Enz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Ⅰ(=TW 8), p. 87.

 

이에 반해 “자연에는 이러한 내적 분 열도 등장하지 않고 자연물들은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TW 8, 88)고 헤겔 은 말한다.

결국 “저 분열의 기원(起源)과 결과에 대한 고대인의 관념이 타죄에 관한 모세의 신화(神話)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TW 8, 88), 원죄에 관한 신 화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즉 “정신의 본질은 이러한 직접적인 상태를 지양(止揚)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적 생활은 자기의 즉자존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도리어 대자적으로 존재함으로 써 자연적 생,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동물적 생과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이러한 분열의 입장은 곧바로 지양되어 정신은 자기로 말미암아 통일로 되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통일은 정신적인 것이고, ”이 통일 회복의 원리는 사유 자체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상당하였다가 회복되는 것과 같다“(ebd.).

3. 기독교의 타죄신화 및 인간본성에 관한 헤겔의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기독교의 타죄신화의 문제점

첫째로, 창세기에 나타난 기독교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이후다:

“여자가 보 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 라.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 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 니, 그가 먹더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둘 다 열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의 치마를 만들더라”(창세기 3:6-7).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의 상황에 대해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하나님께 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 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하시니라”(창세기 3:22).

이로 미루어보건대 그들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 지만, 선악과를 먹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다.

그 렇다면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행한 악한 행위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것 이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 자체가, 그리고 전적으 로 선한 분인 신과 분리되는 것 자체가 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가 그리스도인지 ‘모르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16)”(디모데전서 1:15)고 고백하였다.

16) 여기서 바울이 자기를 죄인 중 첫째라고 말한 것은, 아약스(Ajax)의 영웅적인 고백 과 유사한 것으로서, ‘죄가 되줄 모르고’ 한 행위이므로 실제로는 죄가 되지 않으며, 단지 바울 자신의 겸손한 고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아약스는 아킬레 스의 무기를 얻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미친 상태에서 희랍사람의 소와 양을 죽였는 데, 그는 자기의 죄책을 광기(狂氣)에 미루지 않고, 온 행위를 범인인 자기가 떠맡 고 수치심으로 인해 자살했다(Hegel, Rechts-, Pflichten- und Religionslehre für die Unterklasse (1810 ff.), in: Nürnberger und Heidelberger Schriften 1808-1817. (=TW 4), p. 223 f. § 17 참조).

그리고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라고 말한 것으 로 미루어보아, 죄가 되는지 모르고 한 행위도 죄가 된다고 기독교에서는 주장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자가 “알지 못하고{οὐκ εἰδώς [=not knowingly]}” 행위할 때, ① “무지로 말미암아(모르기 때문에, 무지 때문에)[δι' ἄγνοιαν, through ignorance]” 이루어진 행위와, ② “무지 속에서(모르면서, 모르는 가운 데)[ἀγνοῶν, in ignorance] 이루어진 행위를 구별하고 있다.17)

첫 번째 경우에 무지는 피할 수 없다.

즉, (예컨대 오이디푸스 같은) 행위자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던 외부의 상황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 경우의 무지는 행위자가 통제할 수 있 는 상황들, 예컨대 술 취함 때문에 생기는 무지다.18)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 무지로 말미암은 행위(=모르기 때문에 행한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 장한 반면,

2) 무지 속에서 행한 행위(=모르는 가운데 행한 행위)는 죄가 된다 고 주장한다.19)

17) 아리스토텔레스(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서울: EjB, 2007), 제3권 제2장, 1110 b25 이하 참조.

18) 아리스토텔레스, ebd. 참조. T.M. Knox, (tr. with notes), Hegel‘s Philosophy of Right, Oxford: Clarendon Pr., 1953, p. 343 참조.

19) 백훈승, 「무지(無知)로 인한 행위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동서철학연구 제107 호, 동서철학연구회, 2023.3. (151-180), 164 f. 참조

예컨대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죄를 저질렀을 때, 그러한 죄를 저지른 책임은 그가 술에취한 상 태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방치한 점에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다른 사람이나 사태 에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인간에 게 ‘죄’라는 것이 존재하며, 또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타죄신화에 적용하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

아담 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것, 즉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악한 행위이며 죄가 되는지 알았을까?

그들은 그 행위가 악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기독교적 해석 에 따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죄가 되는지 모르고 한 행위라고 해서 면책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다(이 점에서 뱀의 말은 옳았다!!!)고 창 세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약에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계속하여 신의 명령을 지켰다면, 그들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신은 정녕 인간이 미련한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신이 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이처럼 선악에 무지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 로’ 창조된 자라고 할 수 있는가?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사회에 선악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선악 과 및 삶[생명]의 나무의 설정(設定)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측면인 삶과 죽 음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선한 분이고, 결코 악은 행할 수 없는 자다.

그 렇다면 인간은 신을 닮아서 그 본성상 항상 선을 행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범했고 악을 행하였다고 기독교의 경전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도 기독교의 주장의 부정합성이 발견된다.

2) 인간본성에 관한 헤겔의 이해: 타죄신화 및 헤겔의 발전이론과 관련하여

① 타죄신화와 관련하여

우선은, 위에서 행한 기독교의 입장에 대한 비판을 헤겔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왜 기독교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서는 지적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 자신도 타락 이전의 인간의 순진무구한 상태를 진정한 인간적 상태가 아니라 동물적 상태로 보고 있 다.20)

‘인간임’은 ‘죄책이 있음[Schuldigsein]’을 뜻한다.21)

20)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Ⅰ(=TW 16), 264; TW 17, p. 253 참조. “왜냐하면 죄 없는 상태, 이러한 낙원의 상태는 동물적인 상태이기 때문 이다. 낙원이란, 인간들이 아니라 동물들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공원이다. 왜냐하 면 동물은 신과 함께 하나가 되어 있지만, 단지 즉자적으로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정신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자존재, 이러 한 의식은 동시에, 보편적⋅신적 정신으로부터의 분리다. 내가 나의 추상적인 자유속에서 선(善)에 맞서서 행위한다면, 이것이 바로 악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타죄는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바로[그야말로, eben] 인간이 되는, 인간의 영원한 신화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머물러있는 것은 악이며, (…)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TW 12), p. 389].

21) Friedrich Hermanni, “Vom Bösen, das noch stets das Gute schafft. Hegels sündenfalltheoretische Funktionalisierung des Bösen,” in: Jahrbuch für Philosophie des Forschungsinstituts für Philosophie, Hannover, 6, 1995 (pp. 29-46), p. 35 참조.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를 벗어나려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신에게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 의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적인 통일상태, 원초적⋅미분적 통일상태를 지 양하고 인간다운 자유의식 및 그에 따른 인간적인 행위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22)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이 선에 맞서는 입장, 그리고 타죄로 말미 암아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이러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악이어서, 이러 한 입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헤겔은 말한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창조’ 로부터 ‘타락’,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창조된 인간의 원초적(즉자적) 상태: 이러한 상태는 ‘미분적(未分的) 통일 상태’로서,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상태이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동물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선악과’를 먹은 상태: 이 단계는 “일반적인 분리의 입장“에 있는, “자연적 통일의 붕괴” 및 ‘분열의 상태’이며, “이 직접적 상태가 지양(止揚)되는 것” 인데, 사람들은 이 입장을 “모든 악과 원죄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상태는, ‘분열⋅자각⋅대자의 상태’, ‘인식으로 인해 둘로 찢어진(상처난) 상태’, ‘아욕적(我慾的) 상태[Selbstsucht]’, ‘특수성(주관성)을 고집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정신에 의해 이러한 분열의 입장은 곧바로 지양되어 정신은 자기로 말미암아 통일로 되돌아간다.

최초의 ‘원초적⋅미분적 통일’의 상태는 여 기서 극복(지양)되고, 매개적 통일⋅완성된 통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제2단계가 ‘상처를 입은’ 상태라고 한다면, 이 단계는 상처가 봉합되고 치 유되는 단계이고, 화해(和解)23)가 이루어진 상태라 하겠다.

22) 이정은, 「헤겔의 문화-역사 발전과 악의 관계」(헤겔연구, vol. 26, 한국헤겔학회, 2009) (65-94쪽), 80쪽 참조.

23) 기독교에서는 분열로부터 회복되는 이 단계를 Versöhnung [화해(和解)]의 상태라 고 말하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타락한 인간이 예수를 믿어서 ‘아들이[zu Sohn] 됨[zu werden]’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정리해서 말하면 제1단계는 ‘원초적⋅미분적 통일’[ursprüngliche⋅ungeteilte Vereinigung / original⋅undivided union]이고, 제2단계는 ‘분열[Trennung / seperation]’ 이며, 마지막 단계는 ’재통일⋅회복[Wiedervereinigung / reunion]’24)이다.

24) 여기서 ‘원초적 통일’의 상태를 ‘Vereinigung, Union’으로, ‘회복된 통일’의 상태를 ‘Wiedervereinigung, Reunion’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최초의 상 태가 이미 ‘통일상태’이기에 ‘Union’으로 표현하고,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일을 회복 한 상태를 가리키기에 ‘Reunion’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발전이론과 관련하여

 

헤겔은 자신의 발전이론과 관련하여, 인간의 원초적(즉자적) 상태를 미성숙 상태로 본다.

따라서 그가 법철학 § 139에서, “그러므로 이와 동시에 인간이 란 즉자적으로 혹은 본래 악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내적 반성(복귀)을 통해서 도 악하다”고 말할 때의 “본래”는 어린아이와 같은 즉자적 상태에서는 보편적인 선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이고 특수한 욕망⋅충동⋅경향을 충족시 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악하다는 점에서 법철학 § 18과 종교철학강의에서의 주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어린아이가 지니고 있는 자 연적인 의지를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통상적인 관념”과는 달리,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내용에 대립하는 것이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이며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4. 맺는 말

헤겔은 기독교 「창세기」의 인간의 타죄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 간실존을 지시하는 하나의 신화(神話)[Mythus]로 이해하면서, 거기에서 인간 의 본성 및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과정을 도출해낸다.

헤겔은 기독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장에 의하면 인 간은 본래 악한 자로 창조되지 않았고 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 렇다면 헤겔이 말하고 있는 ‘본래’라는 시점은, 인간이 창조된 때가 아니라 선악 과를 먹었을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시점 이전에 인간은 범 죄하지 않았고, 단지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명령을 지킬 수도 있었고 어길 수도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가 신화인가를 판별하는 일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 이 선한가 악한가 아니면 중립적인 것인가 하는 것도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야 기를 통해서 어떤 교훈과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특히 헤겔이 이를 통해 인간정신의 전개과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비판 적으로 음미해보는 일이다.

기독교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계속하여 신의 명령을 지켰다면, 그들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상태가 신 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발생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낙원(에덴동산)을 “후진적 유토피아[regressive Utopie]”로 이 해하고 “타죄”를 “행복한 범죄[felix culpa]”로 이해할 수 있다.25)

프롬(Erich Fromm)은 ‘행복한 범죄’라는 개념을 행복한 결단 내지 성장의 걸음으로 이해하 며 이런 입장을 옹호한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 3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죄가 아 니라 자유와 독립(성)이며 “신”에 맞서는 인간의 불순종은, 전제적(專制的) 신 성(神性)에 맞서는 인간의 해방행위로 이해된다.26)

25) Dieter Fugger, “Der liturgische Begriff und das Motiv der felix culpa in dogmatischer und spiritueller Perspektive unter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Menschwerdung Christi,” Masterarbeit, Wien, im August 2016, p. 26 참조.

26) 에리히 프롬(이종훈 옮김),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서울: 한겨레출판(주), 2013), 30쪽 ff. 참조.

헤겔은 위와 같은 의문점에 대해 거론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에 의하면, 인간 은 본래 악하다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은 선하다고 보는 다른 교리에 비 하면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기독교 교리는 철학적 해석에 따라 이해되 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타죄신화를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정신의 변증적 전개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정신이 즉자[무 자각적⋅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대자[자각적⋅반성적 상태]로, 그리고 즉자대 자[분열의 통일 상태]에 이르는 정신의 운동을 통찰한 것은 헤겔의 탁월한 식견 이라 하겠다.

헤겔이 보기에 순진무구한 상태란, 신 및 자연과의 직접적인 통일 상태이며, 그 자체로 대자존재⋅자유⋅인식⋅의지의 결여다.

한마디로 말하면, 순진무구한 상태란 아직 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이며, 정신은 결코 단지 즉자적이고 직접적이지 않다. 정신은 오히려 바로, 직접적인 것의 부정이자, 즉자의 대자다.27)

정신은 자기를 자기인 바로 만듦으로써만 존재한다.

정신 은 자신으로부터의 분열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직접적으로 순진무구의 상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이며, 순진무구인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 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분열을 통해 서만 자기의 통일에 도달한다.28)

여기에, 모든 종류의 근원사유 내지 근원상태 의 사유에 대한 헤겔의 거부의 뿌리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것은 참된 것 이 아니며(TW 16, 262)29) 즉자적인 것은 실현되어야 하고30) 신과의 통일은 결과가 되어야 한다.31) 헤겔에게 있어서 타죄 이야기는 “인간정신의 역사”32)로 서 이해되고 있고, 이와 더불어 역사적⋅사실적 일회성(一回性)이라는 의미를 지닌 모든 해석은 미리 배제된다.33)

창세기 3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인 간으로 됨이라는 영원한 신화[ewige Mythus der Menschwerdung]”다. 그것은 즉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이 하나의 사건의 형태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 다.34) 다시 말하면, 창세기 3장은 모든 인간에게서 반복되는 것을 표상에 적합 한 형태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서, 아담은 인간 일반을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5)

27) TW 8, p. 88; TW 12, p. 389;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I (=TW 19), p. 525, 530 참조.

28) TW 16, p. 264, 267 참조. “인식은 정신성의 원리다. 그러나 정신성은, 이미 말한 것처럼, 또한 손상과 분리를 치유하는 원리이기도 하다”(TW 17, p. 258).

29) Joachim Ringleben, Hegels Theorie der Sünde. Die Subjektivitäts-Logische Konstruktion eines theologischen Begriffs (Berlin/NY.: Walter de Gruyter, 1977), p. 39 f., p. 45 참조. 헤겔에게 있어서, 타자에 매개되지 않은 최초의 즉자적 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참된 것이 아니다[“참된 것 은 완전한 것이다(Das Wahre ist das Ganze)”,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hg. v. Johannes Hoffmeister (Hamburg, Felix Meiner, 1952), p. 21]. 참 된 것은 매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30) TW 16, p. 264 참조.

31) TW 8, p. 89 참조.

32) TW 8, p. 88.

33) Enz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Ⅲ (=TW 10), p. 57 참조.

34) TW 12, p. 79, 389 f.; TW 16, p. 265 ff., TW 17, p. 72, 76, 78 참조.

35) TW 8, p. 88 f.; TW 17, p. 72, 76, 259; TW 19, p. 499; Joachim Ringleben, ebd., p. 45 참조.

타죄와 더불어 의식은 자기에 관한 분열된 지(知) 속으로 그리고 선악에 관한 분열된 지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타죄는 인식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 다.36)

자아는 단박에 자기를 인식하고 선악의 대립을 인식한다.37) “인식은 그 속에 악이 존재하는 대립을 비로소 정립하는 것이다.”38)

타죄의 근본규정은, 인 간은 자연적인 자로 머물러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존재한다.39)

인간은 자기 의 “본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즉자존재의 구속으로부터 대자존재의 자유로 나 가야 한다.40)

순진무구의 상태는 자유를 의식하지 못함이며 자유의 반대다. 순 진무구의 상태는 곧 “정신의 비유기적인 실존”41)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정신이 온전한 통일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열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며, 분열 없는 원초적인 통일상태는 미성숙한 동물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기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은 상처를 만들고, 또 그것을 치료한다”42)는 헤겔의 표현은 바로 이러한 통찰을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6) TW 8, p. 87 ff.; TW 9, p. 18 Zus.; TW 10, p. 129 Zus.; TW 12, p. 389 f., p. 391; TW 16, p. 260; TW 17, p. 257; TW 18, 314, 515; TW 19, p. 349, 499, TW 17, p. 76 참조.

37) TW 16, p. 262, 266; TW 17, p. 258 참조.

38) TW 17, p. 257.

39) TW 17, p. 78 참조.

40) TW 8, p. 88; TW 12, p. 389 참조.

41) TW 12, p. 81, 389. Joachim Ringleben, ebd., p. 54 참조.

42) “그런데 인식에는 신적 전환원리가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게로의 복귀가 있다.

인식 은 상처를 내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한다“[GW 17, p. 246. 그리고 헤겔(최신한 옮 김), 종교철학(서울: 지식산업사, 1999), 292쪽도 참조]. ‘상처’에서는 무엇인가 가 찢겨지고 분리된다[귄터 델브뤼거현욱 옮김), 인식의 상처와 치유. 인간 지성 을 위한 헤겔의 투쟁(파주: 서광사, 2012), 42쪽 참조].

인간이 미성숙과 무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상처를 만드는 일이지만, 인 간은 상처를 입은 만큼 성숙해지며 온전함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며, 인식으 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 또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정(道程)에서 선악과는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불행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기독교의 주장과 는 달리, 인간이 원초적인 미성숙 상태를 벗어나 자각적이고 주체적인 사유와 결단에 따른 행위를 통해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에 이를 수 있다는 헤겔의 통 찰은 상처와 그 상처의 치료⋅미성숙으로부터 성숙으로의 이행⋅매개와 부정을 통한 완성에로의 접근 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에게 제공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Ⅰ. 사용된 Hegel의 전집

1. Theorie Werkausgabe in zwanzig Banden, Redaktion von Eva Moldenhauer und Karl Markus Michel, Ffm, 1969 ff. (=TW) 2. Gesammelte Werke, in Verbindung mit der Deutschen Forschungsgemeinschaft, hg. v. der Rheinisch-Westfal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Hamburg, 1968 ff. (= GW)

Ⅱ. Hegel의 텍스트

1. Rechts-, Pflichten- und Religionslehre fur die Unterklasse (1810 ff.), in: Nurnberger und Heidelberger Schriften 1808-1817. (=TW 4). 2.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oder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 (1821)(=TW 7). 3. Ilting, K-H (hg), Vorlesungen uber Rechtsphilosophie 4. Philosophie des Rechts nach der Vorlesungsnachschrift K.G.v.Griesheims 1824/25. Der objektive Geist aus der Berliner Enzyklopadie zweite und dritte Auflage (1827 und 1830). Philosophie des Rechts nach der Vorlesungsnachschrift von D.F. Strauß 1831 mit Hegels Vorlesungsnotizen, Stuttgart-Bad Cannstatt, 1974. 4. Enz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Ⅰ(=TW 8). 5. Enz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Ⅲ (=TW 10). 6.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TW 12). 7.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Ⅰ(=TW 16) 8. Vorlesungen u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Ⅱ (=TW 17). 9. Vorlesungen u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I (=TW 19). 10. VorlesungsmanuskripteⅠ(1816-1831). Religions-Philosophie, hg.v. Walter Jaeschke (=GW 17).

Ⅲ. 기타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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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 examination of the views on the human nature and the dialectical development of spirit in Hegel's interpretation of the Christian myth of human fall [Sündenfall] Paek, Hun-Seung (Jeonbuk Natl. Univ.) Through the analysis of the story of human sin (Sündenfall) in the Christian Book of Genesis, Hegel discussed the issues of human nature, the development of the human spirit, the occurrence of evil and the occurrence of wounds, as well as the possibility of doing good and the healing of wounds. Man came to know good and evil by eating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nd because of this — by disobeying God's command — he suffered the wounds of separation from God, the wound of being a sinner, and the fatal wound of being forced to die as a penalty for his sins. However, being able to recognize good and evil can also be a way to heal those wounds. In this process, Hegel describes the dialectical development of the human spirit, that is, the movement of the mind from the in-itself [a state of unawareness and immaturity] to the for-itself [an aware and reflective state], and then to the in-and-for-itself [a state of unity of division]. By this insight, he claims that these Christian doctrines occupy a higher position than other doctrines which regard human nature as good. On the other hand, Hegel, without relating it to the Christian myth of sin, says that human beings are in themselves not inherently evil, which means that, in their child-like state, they do not aim for universal good, but pursue their own subjective and specific desires, impulses, and inclinations. This paper reveals the meaning and problems of the story of the fall of Christianity itself, which is the basis of Hegel's claims, and examines the validity of Hegel's interpretation of it and his claims on the dialectical development process of the human spirit through it.

Keywords: Hegel, Christian Myth of Transgression, Human Nature, Good and Evil, Dialectical Movement of Spirit ▫

2023년 11월 29일 접수 2023년 12월 13일 심사완료 2023년 12월 20일 게재확정

한 국 동 서 철 학 회 논 문 집 동서철학연구 제110호, 2023. 12.

 

기독교의 타죄(墮罪) 신화에 대한 헤겔의 해석에 나타난 인간의 본성 및 정신의 변증적 전개에 관한 견해에 대한 고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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