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약
다양한 생각을 적대시하는 반지성주의의 만연은 위험사회의 징후이다. 동아시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가사상은 지성주의를 견지하였고, 반지성주의를 앞세운 군주전제에 대항하였 다.
한자에서는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인 지(知)와 인식의 결과로서 도덕의 범주인 지(智)가 처음 부터 구별이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혼용한다.
유가사상에선 단순한 지식의 탐구보다 덕성의 함 양이 지성의 본질이며 나아가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잘 수양된 덕성을 기초로 예악교화를 실 천하는 것이 선진 유가 지성주의의 내용이다.
공자, 맹자, 순자는 지성(지식)과 정치권력의 균형 을 통해 이상적인 도덕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자를 정점으로 대일통 시대에 접어들 면서 전제군주의 권력과 지성 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진한 제국 등장 이후 왕권의 절대화에 비례하여 반지성주의가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국가 간 생존경쟁 속에 법가가 정치의 흐름을 주도 했으며, 대일통 하에 자유롭게 지성주의를 내세울 공간이 사라졌다.
특히 군권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자의 사상은 반지성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후대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도 불구하고 군주의 권력과 학문 간 균형을 이룬 지성주의는 되살아나지 못하였다.
국문키워드: 지성주의. 반지성주의. 유가. 대일통. 왕권.
Ⅰ. 서론
반지성주의 담론이 학계를 넘어 현실 정치언어로 등장하고, 여러 분야에서 각자의 개념 정립을 시도 하고 있다. 여영시(余英時)에 따르면, Anti-intellectualism의 번역어인 반지성주의는 반주지주의(反主 知主義) 또는 반지식주의라고 옮길 수도 있는데, 학설의 일종도 아니며, 이론도 아니다.
그건 하나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문화영역의 각 방면에서 발견되는데 정치적 영역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모 든 문화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반지성주의는 “‘지성(智性)’(intellect) 자체에 대한 증오와 회의에서 ‘지성’ 및 ‘지성’에서 생겨나는 지식이나 학문을 인생에 백해무익한 것으로 생각 하는 태도” 또는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분자(intellectuals)들에게 경멸이나 적대감을 나타내는 태도”1 (장현근편 1997, 185-186)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비지성주의(non-intellectualism)이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는 아니다. 오늘날 등장한 상당히 많은 반지성 운운은 비지성일 경우가 많다.
이른바 ‘영양가 없는’, ‘돈이 안 되는’, ‘실용적이지 못한’, 심지어 ‘현실적이지 못한’ 지식의 무용성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풍토 는 반지성이 아니라 비지성이다.
그러한 주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이 비지성주의이다.
반면 반지 성주의는 지성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과 이론, 또는 이념만 옳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자료나 증거보다 육감이나 원초적 감정에 의존하여 사안을 판단하는 태도 또는 생각을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 비근한 일상에서 얻어들은 가벼운 지식에서 형성된 사유에 기반을 두고, 그에 반하는 지적인 추구를 경시하거나 반대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하는 태도를 지닌다.2
1 여영시(余英時, 위잉스), 「지식을 배척한 중국의 정치전통 – 유가·도가·법가 정치사상의 갈림과 합침 -」(장현근편 1997, 185-238) 참조.
2 더 엄밀하게 따지면 non-intellectualism이 어느 정도의 지식까지를 무용한 것으로 여기는지 정의하기 어렵고, anti-intellectualism이 특정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둘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모리모토 안리는 자기성찰이 결여된 지성에 대한 반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반지성주의의 기초로 보면서 반지성주의를 살리자고 주장하기도 한다.(모리모토 안리, 강혜정 역 2016) 이 글에선 반지성주의란 용어의 범위를 넓혀서 비지성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자 한다.
반지성주의는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반정치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공부가 밥 먹여 주냐’ 고 주장하는 세상이 비지성 사회의 특징이라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리다’고 주장하는 세상이 반지성 사회이다.
지식 또는 지성이 인류문화를 발전시켜 온 가장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서 지식인에게 경멸이나 적대감을 나타내는 비지성주의의 횡행이나 다양 한 사고와 표현을 위협하는 반지성주의의 만연은 곧 역사의 퇴행이며 휴머니즘의 퇴락이며 위험사회의 징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주주의가 개개 인격의 평등에 기초하고 자유로운 토론과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를 ‘틀리다’고 말하는’ 반지성주의는 반민주적이기도 하다.
이른바 ‘진보와 보수’ - 정 확한 의미에서 보면 전혀 보수적이지도 않고 진보적이지도 않은 – 사이에서 이전투구를 하는 한국 정치의 위기 또한 불운한 이데올로기 갈등의 후유증인 반지성주의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사회에 존재해 왔다.
특히 미국 사회를 설명하는 중 요한 코드가 되면서 anti-intellectualism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리처드 호프스태터 저, 유강은 옮김 2017), 트럼프(Donald Trump)를 불러냈으며(수전 제이코비 저, 박광호 옮김 2020), 우리에게도 중요 한 화두가 되었다.
호프스태터의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1975년 여영시는 중국에도 반지성론(反智性 論)이 있었으며, 유가를 주지론(主智論), 도가와 법가를 반지론(反智論)으로 규정하였다.3
그의 논의를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고, 개념을 명확히 하며, 중국정치사상사에서의 논쟁점을 부각하여 담론의 범위 를 넓혀보는 것은 반지성주의 극복을 위한 중요한 시도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글은 반지성주의와 중국 유가사상을 연결하여 지성(지식)과 정치권력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동양 전통 정치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가 지성주의(또는 주지주의4)의 본질이 무엇인 지 파악하고, 선진 유가의 지성주의가 반지성주의로 빠지게 된 이유와 과정을 되짚어보고, 그 변천과정 에 지식과 권력이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반지성주의가 불러오는 문제점 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극복의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를 개산조사로 하는 초기 유가사상가들이 ‘앎’을 중시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무영전십삼경주소》(武英殿十三經注疏)나 《사부총간》 (四部叢刊) 등을 저본으로 보면 알 지(知)자가 논어에 118회5, 맹자에 113회, 순자에 473회나 나온다.
3 여영시, 앞의 글 참조.
4 반지성주의만큼 지성주의에 대한 개념도 다양하다. 감각보다 지성을, 정서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태도나 경향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부정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송두율은 지성주의를 “이성에 기초한 인간 능력에 대한 확신”이라고 하고, 동양에선 이를 주지주의로 이해하는데 지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비판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한다. 송두율 2022, 「반지성주의」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5250300015#c2b) 참조.
5 이 글에 등장하는 고전 속 글자의 출현 회수는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www.ctext.org)이 저본으로 사용하 고 있는 판본에 따른 것임.
그 ‘知’ 개념이 오늘날 얘기되는 반지성주의 관련 ‘지성’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중국사상사에 등장하는 知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고 유가사상을 지성주의 관점에서 재고찰하는 것은 반지성주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의미를 풍부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신유가의 해석과 재해 석 또한 선진 유가의 ‘지성’ 개념과 그 지성주의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는데 유용한 근거를 마련해줄 것이다.
먼저 지성의 경연장이던 제자백가 시대의 知와 智에 대한 개념 규정에 이어서 공자, 맹자, 순자 등 초기 유가사상가들의 지성주의를 예악교화(禮樂敎化) 차원에서 살펴본다.
이어 왕권(王權)이 신성시되고 권력의 중앙집중이 강화된 진한(秦漢) 제국 시대에 유가 외 다른 학설을 퇴출하고, 대일통(大一統)을 추구하면서 반지성주의가 고착된 원인에 대해 알아본다.
한대 유학의 반지성주의적 양상과 지식인 내 부의 갈등과 대립에 대해선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결론으로 권력의 중앙집중, 군권지상주의, 대일통의 사유를 벗어나 분권, 민주, 다양성의 존중만이 반지성주의를 극복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유가사상과 지성 개념: 덕성의 수양
영어 intellectual의 번역어로서 ‘지성’은 지식, 판단, 행동을 아우르고 있어서 한자로는 지식으로 읽히는 知와 지혜로 읽히는 智를 포함하고 있다.
한자권인 동아시아 삼국이 일치된 표기를 갖지 못한 점 도 번역의 완전한 대칭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知性과 智性을 혼용하고, 일본은 知性 이라고만 쓴다.
Intellectualism에 대해서 일본은 主知主義 또는 知性主義로만 표기하지만6, 한국은 主 知主義, 主智主義, 知性主義를 혼용하면서 대체로 知性主義를 많이 쓴다.
반면 중국은 主知主義, 主智主 義, 知性主義, 智性主義를 혼용한다.
Anti-intellectualism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은 주로 反知性主義로 표기하지만 중국은 反智主義 혹은 反智論으로 번역한다.
知와 智가 혼용가능한 글자라는 점에서 표기의 통일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개념의 명확성을 위해서 동양사상에서 두 글자가 갖는 인식론적 차이를 규명할 필요는 있다.
갑골문엔 知나 智가 없으며 금문에 처음 등장한다.
《고문자고림》(古文字詁林)에 따르면 知와 智는 처음부터 통용되는 문자였다.(5책 487-488)
(갑골문 智) (금문 智) (금문 知)
知자에 대해 《상형자전7》(象形字典)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변천 과정을 그리고 있다.
6 의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 간혹 반지성(反智性)으로 쓰는 특수한 사례는 존재한다.
7 https://www.vividict.com/Public/index/page/details/details.html?rid=7354
나진옥(羅振玉)의 은허서계전편(殷墟書契前編)에 등장하는 자는 무기를 상형하여 사냥 이나 작전을 의미하는 방패 간(干)자와 화살 시(矢)자, 얘기를 나누거나 말로 전수해준다는 의 미의 口자로 구성되어 있다.
금문에서는 순서가 바뀌고 干자가 탈락하여 知자가 되었고, 전수 해주는 말이란 의미의 曰자가 다시 덧붙여져 담론이나 경험의 전수를 강조하는 智자가 된 것 으로 보인다.
설문해자(說文解字) 또한 비슷하다.
어원으로 볼 때는 知性으로 쓰든 智性으로 쓰든 통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知와 智는 처음부터 통용되었던 개념이었고 지금도 혼용되고 있다.
그런데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비 근한 일상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는 등 인간의 선천적 능력이 智이고, 신체의 지각이나 후천적 학습을 통해 삼라만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총체를 知라고 구별 지어 개념화한 것은 선진의 제자백가였다. 智자 는 논어보다 조금 늦게 형성된 묵자에 아주 많이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에게 배운 것으로 추정되는 묵적(墨翟)이 직접 智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묵자 책을 완성한 묵자와 그의 추종 자들이 유가와 경쟁하며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묵가는 일찍부터 知와 智를 나누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통도장》(正統道藏)의 묵자에 357회 등장하는 知자는 일반적으로 안 다는 의미의 知와 모른다는 부지(不知, 묵자「七患」), 아직 모른다는 미지(未知, 묵자「辭過」) 등 오 늘날 知의 용법과 비슷하게 사용된다.
116회나 등장하는 智자 또한 지혜, 성지(聖智, 묵자「七患」) 등 오늘날과 비슷하게 사용된다.
예컨대
“아무 이유 없이 부귀하거나 잘생긴 사람을 임용할 경우 어떻 게 그가 智하고 慧가 있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에게 국가(國家)를 다스리게 한다면 이는 지혜(智慧)롭지 못한 사람에게 국가를 다스리게 하는 것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을 쉽게 알 수 있다.”8(묵자「尙賢 中」)라고 한다.
맹자 당시에는 智자가 더욱 보편적으로 쓰인 듯하다.
맹자는 인의예지 사단을 설명하면서 시비지 심(是非之心)을 지(智)의 실마리라고 말하여, 단순한 지식이 아님을 드러냈다.
개념 규정을 치밀하게 했던 순자는 당연히 知와 智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순자는 知를 지각 능 력으로 본다.9
“물과 불은 기(氣)는 있으나 생명[生]이 없다.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知]이 없다.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은 기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로움 또한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10(순자「王制」)
그리고 知와 智를 이렇게 구분한다.
“사 람에게 존재하는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지(知)라 일컫고, 인식이 (대상 사물과) 들어맞는 것을 지 (智)라 일컫는다.”11(순자「正名」)
8 夫無故富貴·面目佼好則使之, 豈必智且有慧哉! 若使之治國家, 則此使不智慧者治國家也, 國家之亂既可得而知已.
9 장원태는 “선진시대와 한나라 시대 문헌에서 지(知)는 개체로서 존재하는 생물체가 외부 대상에 대해 지각하고 이에 대해 반응하는 활동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장원태 2010, 31)라고 말한다.
10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 亦且有義, 故最為天下貴也. 11 所以知之在人者謂之知, 知有所合謂之智.
그에게 知는 인식능력이고, 智는 인식의 결과이다.
知가 智보다 선 행하며 넓은 의미를 지닌다.
감각기관을 거친 인간의 지각 능력을 知라 하고, 그 지각 능력을 통해 사물 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智라 한 것이다.
후대로 갈수록 知와 智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순자의 제자인 한비(韓非)는 知는 지식이나 일반적인 ‘앎’과 관련하여 쓰고, 智는 지모(智謀, 한비자「五蠹」) 나 지혜와 관련하여 사용한다.
인간 본성의 선함을 증명하려는 사단(四端)의 하나로서 천부적인 것으로 智를 본 맹자의 시각이나, 정신적인 깨달음과 지혜를 생각한 묵자의 시각이나,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본 순자의 시각은 일맥 상통한다.
인간은 지혜[智]가 있어 알게[知] 된다는 얘기다.
지혜는 앎의 뿌리이며, 근원이며, 옳고 그름 을 분별하는 출발점이다.
이는 공부와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묵상 또는 생각하지 않음[非想]을 통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본질을 깨치고 해탈에 이르려는 불교가 지혜(智慧) 또는 혜근(慧根)을 강조한 이 유이기도 하며, 이로써 知와 智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졌을 것이다.
기존 사상을 집대성하여 유가사상을 재탄생시킨[Neo-Confucianism] 주희(朱熹)는 한편으로 맹자를 드높여 ‘옳고 그름을 가르는 마음’을 智에서 찾아 인(仁), 의(義), 예(禮)와 연결하고 “知는 智와 같다는 것은 그 재(才)와 능(能)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알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12(주자전서제1책「詩集傳권3)라며 知와 智는 하나의 일이나 智가 있어 시비(是非)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智는 知를 포함하며 체(體)와 용(用)의 관계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희는 한편으로 순자와 비슷하게 출발점이 知이고 귀결점은 智라 하여 구체적으로 구분하였다.
智는 “지인(知人)의 智”로 지식보다 훨씬 높은 실천적 지혜로 天과 人을 소통시킨다고 한 다.(和溪 2019)
주희는 맹자 사단 가운데 지(智)가 인, 의, 예 3덕을 거두어 담고 있다는 지장설(智藏說) 을 제기한 적도 있다.
知(智)는 인지의 범주와 도덕의 범주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지식론이 유입 되면서 지식(knowledge) 개념을 통해 유가사상의 知를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과거의 ‘문견지(聞見知)’ 를 ‘지식’과 대응시키고, ‘덕성지(德性知)’는 ‘지혜’와 연결하였다.
유가사상에서 지혜는 ‘인격적 성취’ 와 관련을 맺고 있다.
단순한 지식의 탐구보다는 지식을 통해 덕성을 함양하는 것을 참된 지식, 지식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유가사상의 본질은 知로부터 智에 이르는 과정 즉 문견지로부터 덕성지 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智가 있어 知를 심화시킬 수 있고, 知의 심화를 통해 智를 넓힌다는 점에서 智와 知는 여전히 상호보 완적이고 혼용이 가능한 개념일 수 있다.
또 智가 인간 개개인의 판단 및 성취와 관련이 있고, 知는 우주 자연의 섭리로부터 인간사회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知의 범위가 智보다 넓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자연, 사회, 인간에 대한 知적 도덕적 탐구보다는 깊은 사색(또는 참선)을 통해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智혜의 근원을 깨달음으로써 궁극의 知인 부처가 될 수 있다는[見 性成佛]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꼭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사회의 지식을 부처님 지혜의 손바닥 안의 미미한 인식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유가사상에서 知와 智는 상보적이고, 우열을 가를 수 없고, 혼용이 가능하므로 知는 지식, 智는 지혜 라는 각기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구별할 수도 없다.
知識, 智識, 智慧, 知慧는 모두 가능한 표현이다.
불교에 심취했다 비판으로 돌아선13 장재(張載)는 知(智)를 ‘문견지’와 ‘덕성지’로 나누고 덕성지의 우 월성을 강조하였다.
12 知猶智也, 言其才能不足以知于我也.
13 장재는 불교의 知가 견문지지(見聞之知)에 불과하여 덕성소지(德性所知)의 근본에 이르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는데, 이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耿靜波, 「關於張載心性論的幾點思考——基於佛教視覺所作的考察」(蘭州學刊, 2013年2期), 황종원, 「장재 지식 론의 특징과 그 모호성 ― 견문지와 덕성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제110집, 2022.05) 등 참조.
“그 마음을 확대하면 천하의 사물[物]을 체득할 수 있다. 체득되지 못한 사물이 있다는 건 마음의 외연 [外]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자신이 듣고 본 것[聞見]에만 머물러 있다. 성인은 본성을 다할[盡性] 뿐이며, 보고 들은 것으로서 그 마음을 옭아매지 않는다. 성인은 천하의 어떤 사물도 나[我]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데, 맹자가 마음을 다하면[盡心] 본성을 알고[知性] 하늘을 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늘은 광대하여 외연이 없으므로 외연이 있는 마음으로는 하늘의 마음[天心] 과 합치할 수 없다. 보고 들어서 아는 것[見聞之知]은 사물과 교감하면서 아는 것이지 덕성으로 아는 바[德性所知]가 아니다. 덕성으로 아는 바는 견문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14(正蒙「大心」)
知(智)에 대하여 장재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문견지지(聞見之知)와 천심이 인간의 본성과 어우러진 덕성소지(德性所知)를 구분하고, 불교는 문견지에 불과하므로 진정한 知(智)는 덕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덕성지가 맹자의 진심(盡心)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깨침인 지성(知性)을 말한다는 점에서 장재의 덕성에 대한 해석은 경험지와 선험지를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15.
덕성지는 지식의 총체를 말하며, 견문지는 이 총체 가운데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장재는 국부적이고 편면적인 그 어떤 지식도 인성의 아름다움과 이상적 인격의 양성을 촉진할 수 없으며, 총체적 지식만이 인성의 아름다움과 이상 적 인격의 양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16(王黔首 2011, 10)
일반적인 경험지식을 견문지라 하고 선험적인 도덕지식을 덕성지라 구분한 것은 신유가의 공통된 주장이었다(蒙培元 2021).
그들은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되는 단순한 지식의 추구가 아니라 도덕성의 함양을 통한 인격의 성취를 知(智)의 본질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장재가 덕성지의 우월성을 얘기한 것 또한 견문으로 얻은 제한된 지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넓혀[大其 心]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이해하고 천심을 체득하는 것이 참된 지성의 추구라는 의미이다.
정이(程頤)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덕성지와 견문지가 어느 정도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본 장재 와 달리 덕성지는 문견지가 아니며 “덕성지지는 견문지지와 아무 관계가 없다”17(二程集「伊川先生語 11」)라고 선언하였다.
그 목적은 사물의 궁극적 이치인 리(理)를 탐구하는 격물(格物)의 지가 참된 덕성 지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를 계승한 주희(朱熹)는 “문견지지와 덕성지지 모두 지(知)이다”18 (주자어류권64「中庸3.第20章」)라고 말하며 격물치지의 최종 목적지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진지(眞知) 의 획득에 있다고 다시 해석하였다.
주자는 사람의 지식(智識)은 지극히 고명하며 마음으로부터 드높은 행위로 드러나는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19(주자어류권87「禮4.總論」)
14 大其心則能體天下之物, 物有未體, 則心爲有外. 世人之心, 止於聞見之狹. 聖人盡性, 不以見聞梏其心, 其視天下無一物非我, 孟子謂 盡心則知性知天以此. 天大無外, 故有外之心不足以合天心. 見聞之知, 乃物交而知, 非德性所知; 德性所知, 不萌於見聞.
15 “장재의 수양론 체계를 개관해보면 그의 덕성소지 혹은 성명소지는 단순히 선험지가 아닐 뿐 아니라, 견문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황종원 2022, 117)
16 왕검수(王黔首 2011)는 왕부지(王夫之)가 ‘덕성소지(德性所知)’와 ‘덕성지지(德性之知)’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았는데, 그 후 장대년(張岱年 1987), 여영시(余英時 2004) 등이 이를 지적하면서도 구체적인 설득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 학자들 이 견문지지와 덕성지지를 대립 개념으로 상정한 체 장재의 지식론을 연구함으로써 객관성을 잃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17 德性之知不假聞見.
18 聞見之知與德性之知, 皆知也.
19 원문은 “人之智識不可以不高明, 而行之在乎小心. 如大學之格物、致知,是智崇處; 正心、修身, 是禮卑處.
덕성지의 우월성을 강조한 장 재, 정이와 달리 주희는 견문지와 덕성지의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는 선진 유가의 생각으로 돌아가 실천 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스승을 넘어 재해석한 지성 개념은 공자, 맹자, 순자의 지식 실천 구상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예악의 교화를 통해 이상적 정치사회를 구현하는 실천적 지식이야말로 선진 유가 지성주의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장재(張載), 정이(程頤)의 사유를 집대성한 주자의 知(智)론은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 중국에서 知와 智를 혼용하는 것은 그 어원적 특성상 문제가 없다는 사실과 관련 이 있어 보이며, 특히 우리나라에서 知와 智를 구분하는 것은 후대의 불교적, 주자학적 개념의 내면화 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분절적이던 知개념과 智개념이 주희의 해석을 통해 정합적으로 일체화한 것은 유가 지성주의의 본질을 명확히 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초기 유가의 지성주의: 지식의 실천과 예악교화(禮樂敎化)
유가사상은 출발부터 학문의 정치적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다.20
논어는 「학이」(學而)에서 출발 하고, 순자는 「권학」(勸學)에서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知는 실천의 문제였다.
知(智)로 나아가는 ‘사 인지기(使人知己)’, ‘지인(知人)’, ‘자지(自知)’ 3단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실천의 최종 목적이 인(仁)이 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지(知)이다.
자로가 들어오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유야,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어진 사람은 어떻게 하느 냐?”
자로가 대답하였다.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게 하고[使人知己], 어진 사람 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였다.
“사(士)라고 일컬을만하구 나.”
자공이 들어오자 선생님이 말씀하였다.
“사야,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어진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고[知人], 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사군자(士君子)라 일컬을만하구나.”
안연이 들어오자 선생 님 말씀하였다.
“회야,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어진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안연이 대답하였다.
“아는 사람은 스스로 아는 것이고[自知], 어진 사람은 스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 다.
“명군자(明君子)라 일컬을만하구나.”21(荀子「子道」)
20 위잉스는 중국 전통 정치가 세계의 다른 문화와 비교해 봤을 때 지식인을 존중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지성주의 정치전통을 지녔다고 보지는 않으면서도 공자, 맹자, 순자 등은 지성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예악과 교화를 정치사상의 핵심으로 삼았고,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지성주의를 견지했다고 보았다.(장현근편 1997, 186-188)
21 子路入, 子曰: “由! 知者若何? 仁者若何?” 子路對曰: “知者使人知己, 仁者使人愛己.” 子曰: “可謂士矣.” 子貢入, 子曰: “賜! 知者若何? 仁者若何?” 子貢對曰: “知者知人, 仁者愛人.” 子曰: “可謂士君子矣.” 顏淵入, 子曰: “回! 知者若何? 仁者若何?” 顏淵對曰: “知者自知, 仁者自愛.” 子曰: “可謂明君子矣.” 공자가어(孔子家語)「삼서」(三恕)편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子路見於孔子. 孔子曰: “智者若何? 仁者若何?” 子路對曰: “智者使人知己, 仁者使人愛己.” 子曰: “可謂士矣.” 子路出, 子貢入. 問亦如之, 子貢對曰: “智者知人, 仁者愛人.” 子曰: “可謂士矣.” 子貢出, 顏回入. 問亦如之, 對曰: “智者自知, 仁者自愛.” 子曰: “可謂士君子矣.” 내용은 같으나 지(知)가 지(智)로, 자로와 자공을 사(士)로 안연을 사군자(士君子)로 일컬은 것이 다르다. 참고로 순자「자도」편은 한 대 후인들의 얘기가 잡박하게 섞인 작품이고(장현근 2015, 44), 공자가어는 최근 논어의 후속편이었음이 밝혀지는 중이지만 오랫동안 위서로 취급되어 왔다.
‘어떻게 하느냐’는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실천에 관한 질문이다.
공자는 지행합일을 강조하였고, 유덕 한 정치의 실현을 인정(仁政)으로 정의하였다.
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공자 스스로 논어에서 매우 다양한 해석을 제기하고 있고, 많은 선행연구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知와 士, 군자의 문제가 논의의 핵심이다.
士는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계급으로서 지식이나 무예를 익힌 뒤 문서처리, 행정사 무, 무사나 군사장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부(大夫)의 가신(家臣)이거나 제후의 국(國)에서 하급 관리 자였다.
유가사상에서 성인군자는 훌륭하고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의미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여기 등장한 세 명 제자 가운데 학문적으로 안연이 가장 뛰어나고, 그 다음이 자공, 그 다음이 자로이다.
知의 개념적 정의 가운데 공자는 ‘스스로 아는 것’[自知]을 가장 훌륭한 성취로, 그 다음이 ‘다른 사람 을 아는 것’[知人], 그 다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게 하는 것’[使人知己]으로 보았다.
바꾸 어 말하면 공부하여 자신을 알릴 수 있으면 士 즉 지식인 단계이고, 널리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사람이 지식인 정치가이고, 스스로 지적 성취를 이루어내 仁을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정치지도자라는 얘기다.
초기 유가 지성주의의 정치적 실천은 덕치 혹은 왕도정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예악으로 교화하여 모든 사람을 바르게 만듦으로써 이상사회를 건설하자는 취지였다.
공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행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에 어긋나지 않음만 다행스럽게 여기고 내면의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도덕으로 이끌고 예의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가질 뿐만 아니라 바른 사람이 될 것이다.”22(논 어「爲政」)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린다’는 말은 정치지도자가 솔선수범하고 도덕의 교화(敎化)를 한 다는 것이다.
여기서 德은 통치자의 도덕성, 禮는 사회적 공동선(善)을 뜻한다.
지성을 갖춘 정치지도자 가 “덕으로 정치를 하면, 마치 북극성처럼 제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별이 그것을 에워싸듯”23( 논어「위정」) 세상이 교화될 것이라고 한다.
논어「선진」(先進)편에서 공자는 제자들과 나라를 다스 리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염구(冉求)는 민생을 챙겨 3년이면 부자나라를 만들 것이 며 “예악의 교화와 같은 큰 정치적 행위는 더 위대한 정치가인 군자를 기다리겠다”24라고 말한다.
22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23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眾星共之.
24 如其禮樂, 以俟君子. 이들 대화는 이면에 예악교화가 완성된 태평성대의 성왕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장현근역 2019, 416-422쪽 참조.
공자 또한 나라는 예로 다스리는 것으로 단순히 민생을 챙기는 수준을 넘어 큰 정치적 교화가 완성되는 태평 성대를 꿈꾸었다.
논어「양화」(陽貨)편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다.
공자가 싫어하는 양화를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양화는 예악의 깊은 이치를 이해한 지식인이 어질지[仁] 못하고, 정치에 종사할 때를 놓치는 것 지혜롭 지[知] 못하다고 힐난하였고, 공자는 “장차 벼슬길에 나갈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25
“‘민중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에 참여하면서 여력이 있으면 글을 공부하고”(「學而」),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길에 나 가고”(「衛靈公」),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며”(「微子」)라는 등 공자는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매우 강조하였다.
벼슬을 바라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 고, 공부를 한 사람은 어진 정치를 하는 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공자의 주장은 지성주의의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공자에 의해 정치적 의미와 인격적 의미가 풍성해진 군자 개념이 맹자에 이르러 높은 도덕적 수양 을 거친 실제 정치가에 대한 기대로 발전한다. 이런 군자는 학교 교육에 의해 길러지며, 통치하는 계급 으로서 자기 위치가 정해져야 한다.”(장현근 2011, 275)
예악교화의 주체인 군자는 “덕으로 인을 실천 하는 왕도사회”26(맹자「公孫丑上」)의 건설자이다.
그는 지성인으로서 선을 구현하는 위대한 정치가 이므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소인(小人)들이 먹여 살려야 한다.27(맹자「滕文公上」)
맹자는 항산(恒 産)과 항심(恒心)의 분업을 제창하며, 정치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므로 지식인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군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까닭은 그가 사람다운 마음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자는 인(仁)으로써 그 마음을 지키고, 예(禮)로써 그 마음을 지킨다. 어진 사람은 백성을 사랑하고, 예의를 갖춘 사람은 백성을 공경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백성도 항상 그를 사랑할 것이며, 백성을 공경하는 사람은 백성도 항상 그를 공경할 것이다.”(맹자「離婁下」)
지적인 성취를 이루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군자이며, 군자는 정치에 참여하여 도덕과 양심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어 모두 선한 본성이 충분히 발현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에 바람이 스쳐 지나면 풀은 반드시 바람이 부는 대로 쓰러지는 법이다.”28(맹자「등문공상」)
지식인에 의한 공감과 감동의 정치를 주장한 점에 서 맹자 지성주의는 공자보다 더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자는 더 구체적으로 공부의 최종 목적이 실천에 있다고 말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공부는 그것을 실천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29(순자「儒效」)
25 전문은 이렇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 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26 以德行仁者, 王.
27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28 君子之德, 風也; 小人之德, 草也. 草尚之風必偃. 논어「안연」편에도 같은 말이 있다.
29 不聞不若聞之, 聞之不若見之, 見之不若知之, 知之不若行之. 學至於行之而止矣.
순자는 예(禮)와 악(樂)을 인격 수양의 기본 덕목이자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특히 예를 우주 자연으로부터 인간사 모든 일의 기준으로 삼았다.
“악도 넓은 의미에서 예에 수렴되는 것으로 보고 예와 악은 하나의 근본이라는 예악일원(禮樂一元)론을 주장했다.”(장현근 2015, 235)
그의 공부는 예에 관한 것이고, 공부의 목적은 예악교화의 실현이었다.
순자는 제례의식을 뜻하던 禮를 인간 사회의 모든 규범을 포괄하고, 정치적 실천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승화시켰다. 예는 자나 저울과 같은 표준으로 “국가에 예가 없으면 바르게 다스려질 수 없다”30(순자「王霸」)고 보았다.
순자에 따르면 욕구를 지닌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면 세상은 이해다툼의 전쟁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예로 절제시키고[禮主節], 내적으로 악으로 화합시킴[樂主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고 보았다.
악한 본성을 교화시켜 왕도라는 인위적 질서[僞]를 창조하라는 주문이다[化性起僞].
순자가 말한 위(僞)는 위선이 아니라 예악을 통한 교화라는 인위적 실천의 의미다.
사람의 악한 본성 때문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므로 “반드시 장차 스승과 법제의 교화를 갖추고 예의로 이끎이 있은 뒤 사양함이 나타나 예의형식과 이치에 맞게 되어 치세로 돌아가게 된다.”(순자「性惡」)
위(僞)는
“타고난 본성에 서 벗어나 깊은 생각 뒤 이루어진 행위를 말하며, 의도를 가지고 하는 작업을 거친 뒤에 이루어진 상태 를 말하며, 풍성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 인위적 결과를 말한다.”(장현근 2015, 95)
지적 탐구와 깊은 사유라는 ‘인위적 노력’으로 성인이 되며, 성인군자는 바로 이 후천적 노력으로 만들어진 지성의 상징 이다.
지성으로 무장한 대유(大儒)와 위대한 정치가인 성왕(聖王)을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순자의 지성주의는 선진 유가 중 최고봉에 이르렀다.
이렇게 초기 유가사상가들은 학문 활동과 지식 탐구를 정치권력의 도덕적 실천과 동일시하였으며, 권력과 지성의 상대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성과 정치지도자[君子]를 우열 관계가 아닌 불가분리의 대등한 상호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군신(君臣) 관계 또한 상대적으로 취급하였다.
공자는 “군주가 신하 를 예(禮)로 부릴 때 신하도 군주를 충(忠)으로 섬긴다”31(논어「八佾」)는 상대성을 얘기하였고, 맹자 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주가 신하를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복심처럼 여길 것이지만, 군주가 신하를 개나 말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보통의 국인처럼 여길 것이고, 군주가 신하를 초개처럼 여기 면 신하도 군주를 원수로 여길 것이다”32(맹자「離婁下」)라고 말한다.
순자는 더 나아가 “도의를 따를 뿐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33(순자「臣道」)고 선언하며 지성의 가치를 군주에 앞세웠다.
30 國無禮則不正.
31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32 君之視臣如手足, 則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犬馬, 則臣視君如國人; 君之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讎. 33 從道不從君.
순자는 후천적인 경험지식을 더 중시하고 맹자는 선험적인 도덕지식을 더 강조한 차이는 있으나 공 자든 맹자든 순자든 견문지와 덕성지를 함께 갖춘 사람이 정치지도자가 되거나, 또는 기왕의 정치지도 자라면 둘 다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知(智)자가 예악을 매개로 교화의 정치를 실천함으로써 도덕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덕의 사회적 실천인 예악교화는 지식인과 정치지도자의 공통 된 목표였다.
군주가 예악교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은 분연히 그 나라를 떠났으며 다른 곳에서 왕도의 실현을 꿈꿀 수 있었다.
그들이 제도적 성취보다 성인(군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 – 예컨대 순자 의 ‘유치인무치법’(有治人無治法34) - 때문에 인치(人治)라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군자 정치가 는 자기 말과 자기 원칙만 옳다고 주장하는 반지성주의 소인이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는 원리원칙인 예악을 실천하는 참 지성인이란 점에서 통치자 제멋대로 하는 인치와는 다르다.
Ⅳ. 제국의 등장과 반지성주의의 고착: 왕권의 절대화와 대일통(大一統)
知와 智의 혼용, 견문지와 덕성지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예악의 교화라는 지성의 정치적 실천 문제에 집중하던 선진 유가의 지성주의는 진시황의 전국 통일과 곧 이어진 한 제국에서 ‘황권(皇權)’의 거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진한 제국 정부는 법제라는 공(公, public)의 효용에 예악이란 공(共, com- mon)의 가치를 가두면서 재탄생하였다(장현근 2010).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고, 지식인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시대적 과제와 효용을 둘러싸고 전한에 염철(鹽鐵)논쟁 이 있고, 후한에 석거각(石渠閣)회의, 백호관(白虎觀)회의가 있었다.
황권에 굴복한 한 대 유학의 반지 성주의적 양상과 그들 사이의 방대한 논쟁에 대해선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지만, 그렇게 된 시대 적 과제의 문제와 사상 내부의 문제를 몇 가지 살펴보자.
이에 대해선 도희성(陶希聖 1976)과 김영민 (2021, 특히 291-299)의 연구 등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현대의 연구들이 있다.
우선 새로 제국을 연 황제들의 생각을 보자.
영정(嬴政)은 “덕이 3皇에 필적하고, 공은 5帝를 포괄한 다”35(獨斷卷上)면서 처음 황제를 칭하였고, 신이 되었으며, 지적 성취가 가장 높은 성인(聖人)으로 부르도록 했다.
진 정부는 실용 지식만을 살려두었고, 책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법률 만능이라는 반 지성주의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민심이 이반하여 제국은 급속히 멸망하였다.
예악을 통한 사회 적 공동선(common)이 무시되고 군주 독단의 공공성(public)만이 과도하게 강조된 결과였다(장현근 2010).
이어 등장한 한 제국은 권력의 장기적 유지와 확장을 위해 진의 실패를 연구하였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순자 학통을 이은 육가(陸賈)에게
“나를 위해 진이 천하를 잃은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어떻 게 얻었는지, 옛 국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책을 써주시오”36(사기「酈生陸賈列傳」)라고 부탁하였 다.
34 순자「君道」.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법제를 갖추었다고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지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35 德兼三皇, 功包五帝. 사기「秦始皇本紀」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동한 채옹(蔡邕)이 지은 獨斷에 따르면 한 고조 유방도 천명을 받았고, 진시황의 공적과 같아서 명칭을 바꾸지 않고 황제라고 했다고 한다.
36 試爲我著秦所以失天下, 吾所以得之者何, 及古成敗之國.
그의 아들 혜제(惠帝)는 협서율(挾書律)을 폐지하였다37.
박사가 부활하고 유생들이 대거 임용되었다.
일견 지성이 부활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가의 외피를 둘러썼을 뿐 실질적으로는 진의 법제 를 유지하는 이른바 외유내법(外儒內法38)의 정치체제였다.
한 초 군국(郡國)의 세력이 강하고, 황노(黃 老)사상이 지배하면서 비교적 느슨했던 중앙집권체제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거치면서 중앙 황 권의 강화로 이어졌고,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천하를 경략하며 군주 중심의 대일통(大一統)을 추구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의 법치를 주도한 사람이 순자의 제자인 한비(韓非)와 이사(李斯)였는데, 한 초 유가를 자처한 육가, 숙손통(叔孫通), 공손홍(公孫弘), 가의(賈誼), 동중서(董仲舒) 등 또한 모두 순자 의 학통을 이은 사람들이었다(장현근 1991; 2015).
유가의 지성주의를 겉으로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 법치를 행했다는 사실은 군주입법 시대에 군권의 절대화와 다르지 않다.
대일통은 춘추의 “원년춘(元年春), 왕정월(王正月)”이란 경(經)에 대한 공양전 의 해석에 처음 등장한다.
“원년이란 무엇인가? 군주가 시작하는 해이다. 봄이란 무엇인가? 한 해의 시작이다. 왕은 누구를 일컫 는가? 문왕을 일컫는다. 어째서 먼저 왕을 말하고 나중에 정월을 말한 것인가? 왕의 정월이기 때문이 다. 어찌하여 왕의 정월이라 말한 것인가? 대일통 때문이다.”39(춘추공양전隱公元年)
대일통(大一統)이란 통일을 넓히고, 확대한다[大]는 뜻이다.
군주 중심의 권력을 확장하고 천하의 정 치, 경제, 문화, 사상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의미이다.
진시황보다 정교한 독재를 꿈꾼 한 무제는 춘추공 양학을 추종하였고, 사마천은 온 세상 사람의 조상이 중국인이라는 화이공조(華夷共祖)론을 주창하고 (장현근 2014), 전분(田蚡) 동중서 등은 다른 사상을 몰아내고 유가 학술만을 온존시키자는 소위 ‘파출 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40을 주장하였다.
38 외예내법(外禮內法) 또는 양유음법(陽儒陰法)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향, 사상, 태도,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지만 이것이 황노사상의 흡수나 ‘유가의 법가화’(여영시 1997) 때문이라는 견해는 재고찰이 필요하다.
39 元年者何? 君之始年也. 春者何? 歲之始也. 王者孰謂? 謂文王也. 曷爲先言王而後言正月? 王正月也. 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
40 ‘파출백가, 독존유술’이 한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주창되고, 정책으로 채택되고, 사회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는 견해는 최근 무너지고 있다. 반고(班固)의 한서「武帝紀」찬(贊)에는 무제 초기 백가를 파출하고 육경(六經)을 표장하였다고 하고, 무제의 외삼촌인 전분 등이 유가 학술만을 존중하고 법가를 억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노사상에 몰입한 두태후(竇太后) 등과 정치투쟁을 전개한 데서 기원을 찾거나, 재상이었던 공손홍의 정책에서 원인을 찾는 주장도 있다. ‘파출백가, 독존유술’이란 말은 1916년 역백사(易白沙)가 민주와 자유를 주창하면서 제왕들이 공자를 괴뢰로 삼아 백성들을 노역시키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처음 쓴 말이기도 하다.(박성진 2004 등 참조) 그러나 동중서가 천인삼책(天人三策)에 “諸不在六藝之科孔子之術 者, 皆絕其道, 勿使並進”이란 주장을 한 것 또한 사실이므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한 대 유생들은 선진 유가가 제기한 지성과 정치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지성을 군권에 예속시키는 반지성주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군권의 신성화와 절대화를 주장하고, 사상의 획일화를 꾀하여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이를 정책과 제도로 추진함으로써 반지성주의를 시대의 흐름으로 고착시키고 말았다.
진한 제국 시대 반지성주의가 고착된 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춘추전국 시대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법체계를 둘러싼 지성의 설득보다는 이익을 앞세운 빠른 경제적 효과가 시 37 B.C.213년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용 지식 외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거나 집에 소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협서율(挾書律)을 제정하였고, 혜제는 B.C.191년 이를 폐지하였다.
대의 흐름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부터 예견된 것으로
“노공 백금이 처음 노나라에 봉지를 받 았는데 3년이 지난 뒤 주공에게 정무보고를 하였다. 주공이 말했다. ‘어찌하여 늦었는가?’ 백금이 말했 다. ‘풍속과 예법을 변혁시키려니 3년을 보낸 뒤에야 제거되어서 늦었습니다.’ 태공 또한 제나라에 봉해 졌는데 5개월 만에 주공에게 정무보고를 하였다. 주공이 말했다. ‘어찌 이리 빠르신가?’ 태공이 말했다. ‘제가 군신 간 의례를 간소화하고 지역 풍속에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나중 백금의 정무보고를 늦게 듣고 난 주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오호라! 나중에 노나라는 북면하여 제나라를 섬길 것이다. 정무 를 간결하고 쉽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가까이하지 못하게 되고, 평이하게 하여 백성들을 가까이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그에 귀의할 것이다.’”41(사기「魯周公世家」)
41 魯公伯禽之初受封之魯, 三年而後報政周公. 周公曰: ‘何遲也?’ 伯禽曰: ‘變其俗, 革其禮, 喪三年然後除之, 故遲.’ 太公亦封於齊, 五月而報政周公. 周公曰: ‘何疾也?’ 曰: ‘吾簡其君臣禮, 從其俗爲也.’ 及後聞伯禽報政遲, 乃嘆曰: ‘嗚呼, 魯後世其北面事齊矣! 夫政不簡不易, 民不有近; 平易近民, 民必歸之.’
노나라 백금은 예악교화라는 지성주의 를 채택하였고, 제나라 태공은 경제우위의 사법통치라는 반지성주의를 채택하였는데 나중에 노나라는 제나라에 병합되었다.
지성은 장기적 태평을 기약하지만, 작금의 생존을 위해선 돈과 채찍의 효과가 빠를 수 있다.
둘째, 어떻게 하면 민심의 지지를 얻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제자백가 의 다양한 논쟁에서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건 법가가 정치의 흐름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후예에 게 공부한 상앙(商鞅)이 진 효공(秦孝公)의 초현령(招賢令)에 응해 세 번의 실패 뒤 마침내 설득에 성공 한 얘기를 사기「상군열전」(商君列傳)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배알했다. 공은 상앙과 더불어 얘기를 나누면서 방석 앞으로 무릎이 나오는 것도 모를 정도였고 며칠을 대화해도 싫증 을 내지 않았다. 경감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 주군의 의중을 꿰뚫었소? 우리 주군께서 너무나 기뻐하시오.’ 상앙이 말했다. ‘제가 제왕의 도를 가지고 삼대를 견주면서 주군을 설득했는데, 주군께서 “너무 오래 걸립니다. 현명한 군주라면 각자 자신의 당대에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자 하지 어떻게 가만 히 수십, 수백 년이 지나 제왕으로 성공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국의 술로 주군을 설득하니 주군께서 크게 기뻐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은나라 주나라의 덕에 견주기는 어려 울 것입니다.’”42
42 衛鞅復見孝公. 公與語, 不自知厀之前於席也. 語數日不厭. 景監曰: ‘子何以中吾君? 吾君之驩甚也.’ 鞅曰: ‘吾說君以帝王之道比三 代, 而君曰: “久遠, 吾不能待. 且賢君者, 各及其身顯名天下, 安能邑邑待數十百年以成帝王乎?” 故吾以彊國之術說君, 君大說之耳. 然亦難以比德於殷周矣.’
상앙의 영도하에 진나라는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급성장하였고, 천하통일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상앙 강국지술은 강력한 법치, 지적 논쟁의 멸절, 병농일치, 가치의 획일화 등(장현근 2005) 인간의 문화이상을 부정한 극단적 반지성주의이다.
전국시대 후반은 법가적 정치개혁이 거의 모 든 나라를 지배하였다.
진시황은 이 방법으로 천하를 통일하였고, 그의 법제는 한나라에 그대로 계승되 었다.
셋째, 토지 기반을 가진 대부(大夫) 귀족계급이 소멸하고 군주가 사(士)를 직접 고용하고, 천하가 통 일되면서 지식인이 이상을 좇아 떠날 수 있는 곳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느슨한 귀족들의 연합인 봉건(封建)체제가 와해되고 귀족들이 독점하던 지식은 아래로 내려와 사(士) 계급을 흥기시켰다.
춘추 전국시대는 가(家)를 경영하던 대부가 국(國)을 경영하던 제후를 몰아내고 군주가 되는 하극상이 빈발 하였다.
특히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독자적 생산기반을 갖지 못한 사 계급은 대부로 군주가 된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은 그의 생계와 출세를 책임져주는 고용관계로 변화하였다.
고염무(顧炎武)에 따 르면 전국 133년 사이 예의와 신용 따위는 언급되지 않았고, 연회나 시부를 짓는 행위도 없었고, 기록 을 남기지도 않았으며 “나라엔 정해진 외교의 틀이 없었고, 사(士)에겐 고정불변 섬기는 주인이 없었 다.”43(日知錄「周末風俗」)고 한다.
43 전문은 이렇다. 春秋時猶尊禮重信, 而七國則絶不言禮與信矣. 春秋是猶宗周王, 而七國則絶不言王矣. 春秋是右嚴祭祀, 重聘享, 而七國則無其事矣. 春秋時猶論宗姓氏族, 而七國則無一言及之矣. 春秋時猶宴會賦詩, 而七國則不聞矣. 春秋時猶赴告策書, 而七國 則無有矣. 邦無定交, 土無定主, 此皆變於一百三十三年之間.
각종 지식으로 무장한 사는 천하를 유세하며 정치권력을 움직여 뜻을 펼쳤는데, 통일제국이 되자 떠날 곳도 유세할 곳도 없어졌다.
피라미드식 권력구조하에서 황제의 은전에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지성은 정치권력과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권력 을 확장하려는 군주의 반지성주의에 저항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넷째, 유가 지성 자체의 문제이다.
공자는 “옛날엔 자신을 위해 공부했는데 요즘은 남을 위해 공부한 다”44(논어「憲問」)고 질타한 적이 있다.
44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자아완성을 중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지, 출세를 지향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유가 지성주의를 대표하는 명제로 동아 시아 사상사 전체를 지배한 명언이다.
맹자의 호연지기, 사단(四端), 성선, 양지양능(良知良能)은 자기수 양의 발현이고, 순자의 화성기위(化性起僞), 천생인성(天生人成), 예의통류(禮義統類) 또한 위기(爲己) 의 마음공부와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천지간에 우뚝 선 존재로서 인간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 였지만, 순자를 정점으로 유가 지성주의는 멈추고 말았다.
지성이 시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지성을 이끄는 시대로 변모하고 만 것이다.
위인지학은 필경 군주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순자도 여기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그의 사상은 융예의(隆禮義) 즉 예의지상주의와 융군(隆君) 즉 군권지상주 의를 두 기둥으로 하는데, 둘 다 가치의 획일화, 권위주의 위험성, 인간의 자각 능력 부정 등(장현근 2015, 347-348) 반지성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45
45 청 말 담사동(譚嗣同)은 인학(仁學) 권2에서 순자를 진시황 독재의 원형으로 보며 그 위선적 도둑 학문이 2천 년간 중국을 지배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래도 순자는 두 사상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위기지학을 하였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융군 사상에 빠진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 는 예를 법(法)으로 치환하여 군주 권력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그에 대항하는 지성을 액살하였다.
순 자 제자의 제자들은 한 초에 부흥한 유학의 담당자들이었으나 숙손통, 공손홍의 사례에서 보듯 지성주 의의 상징인 예를 군존신비(君尊臣卑)의 의례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동중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주, 아버지, 남편이 기둥이고 신하, 아들, 아내는 그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삼강(三綱)설을 만들었고, 수천 년 동아시아 사회를 옥죄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 삼강설은 반지성주의의 상징인 한비자「충효」 (忠孝)편의 발전으로 그 목적은 왕권을 한없이 강화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익지향의 사회, 법가의 유행, 국가 규모의 거대화라는 시대의 변화는 모든 지식인의 논의를 통일과 천하국가의 문제에 집중시켰다.
지성과 정치권력의 균형은 사라지고, 지식인은 군주권력에 예속 되고 말았다.
진한제국의 등장은 마음에 안 들면 떠날 수 있었던 지성의 자율성을 원천 봉쇄하였고, 군주의 ‘은덕’(?)으로 생계와 출세를 보장받은 지식인이 군주의 권력에 맞서기는 불가능해졌다.
대일통 의 전개는 군권의 절대화를 더욱 촉진하고 군주의 말만이 말이 되고 그에 대항하는 지성의 목소리는 ‘반역’일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 중 하나로 평가받는 후한 광무제(光武帝)는 참위(讖緯)신 학에 빠져 살았는데, 올곧은 지식인 환담(桓譚)이 “도참은 바른길이 아니라고 극언하자” 황제가 대노하 여 참하라고 명하였다.
환담은 이마에 피가 철철 흘러넘칠 때까지 땅에 머리를 박고 사죄하여 겨우 사 형을 면하였다.46(후한서「桓譚馬衍列傳上」)
46 譚復極言讖之非經. 帝大怒曰: “桓譚非聖無法, 將下斬之.” 譚叩頭流血, 良久乃得解.
그리하여 권력자의 언어만 말이 되고 지식인의 질타는 빈말이 되는 반지성주의 풍토는 ‘왕권주의’(劉澤華 2000)가 몰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진한 이래 중국정치사상사는 왕권을 극대화하려는 정치권력에 대항해 실천적 지성이 균형을 찾아가 려는 논쟁사로 재구성할 수 있다.
동중서의 천인감응(天人感應)론, 성리학의 ‘존천리(存天理), 멸인욕 (滅人欲)’ 등 군주 권력을 제한해보려는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시도가 없지 않았으며, 왕충(王充) 등 비 판적 지식인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늘 외로운 함성으로 그쳤으며 끝내 세습 군주 의 절대권력과 학문 간 균형을 이룬 선진의 지성주의는 되살아나지 못하였다.
Ⅴ. 결론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John Dalberg-Acton 1887)는 명 제가 절대적으로 맞지는 않겠지만, 이상의 분석에서 우리는 반지성주의가 절대권력과 짝을 이루고 있음 은 확인하였다.
선진 유가는 지성을 통해 권력의 절대화를 막으려 노력하였으며, 이론적으로 덕성지의 함양을 통한 예악교화의 실천으로 지성과 권력 간 균형을 유지하였다.
도덕적으로 뛰어난 지성이 권력 의 담당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권력의 담당자라면 뛰어난 덕성지를 가져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실제 정치에 온전히 실현된 것 같지는 않다.
순자가 말년에 난릉령(蘭陵令)이 되어 정치를 했다지만, 공자든 맹자든 순자든 생전에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선진 유가 정치사상이 민주주의나 선거처럼 정치권력의 ‘창출’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면 유 가 지성주의와 예악교화의 실천이 권력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 좋은 정치이념 중 하나로 현대에도 유용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가 도덕주의는 권력의 창출 문제보다 권력의 유지와 확장에 관심을 두었다.
공자든 맹자든 순자든 최고권력자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보다 기존의 권력자를 어떻게 도덕적 지 성으로 만들어 백성들을 평안하게 할 것인가, 즉 수기치인(修己治人 또는 修己安人)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주장은 군주의 전제(專制)나 절대권력이 확립되기 전에는 민심 획득에 유리하기 때문에 지성과 정치권력의 균형을 이루어낼 수 있다.
그러나 대일통을 이루고, 군권이 절대화되면 지식인은 “말을 많 이 해도 모두 원리원칙에 맞아떨어지는 성인”47(순자「非十二子」편)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말만 많 고 쓸모는 없는”48(염철론「利議」)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군주를 하늘에 비유한(좌전襄公 14년) 것은 그의 행동을 경계하기 위함이고, 군주를 ‘천지이자 부모이자 스승처럼 높인’ 것은(순자「 禮論」) 예악교화라는 지성주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는데49 나중 군권이 절대화되면서 뜻이 변질되어 군주는 신과 동격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50) 일체화를 통해 – 특히 한 대 이 후 유생들에 의해 - 최고권력자의 말은 곧 신의 목소리가 되어 그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반지성주 의를 고착시켰다.
47 多言而類, 聖人也.
48 多言而不用.
49 예컨대 故禮, 上事天, 下事地, 尊先祖, 而隆君師. 是禮之三本也.
50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 일체화는 순자에 의해 주장되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순자에 그렇게 유추할만한 내용이 있을 뿐 직접 언급된 적은 없다. 좌구명(左丘明)의 국어에 군주를 드높이는 얘기가 많은데, 예컨대 「晉語1」에 “부모가 낳고, 스승이 가르치며, 군주가 먹인다”(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고 하는데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군주를 높이는 내용은 아니다.
유가가 출발부터 군주권력을 추상적 가치 아래 두었기 때문에 군주권력의 절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는 비판은(예컨대 장현근 2015, 258-263 등) 가능하다.
맹자의 천명(天命), 동중서의 천인감응, 성리학 의 천리 등은 군권을 제약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예컨대 王崴巍 2013 등)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선진 유가는 지성을 존중하고 그 지성의 힘으로 군주 권력과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그 바탕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民惟邦本: 서경「五子之歌」), “백성이 신뢰하지 않으면 권력이 설 수 없고”(民無信不立: 논어「顏淵」), “백성이 소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民爲 貴, 社稷次之, 君爲輕: 맹자「盡心下」),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天之立君, 以爲 民也: 순자「大略」)라는 사고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민심의 지지야말로 유가 지성주의의 가장 큰 우군이었다.
그런데 ‘도에 따르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며 지성을 강조하던 스승의 말씀과 반대로 한 비는 노자를 흡수하여 ‘도와 군주는 한 몸’이라는 군도동체(君道同體)설을 주장하였고(류쩌화 편, 장현 근 옮김 2019, 650-651), 진시황은 이를 현실정치에 옮겼다.
군도동체설은 반지성주의의 상징이다.
한 대 유가는 이에 대항하여 다양한 논쟁을 전개했으나 결국 반지성주의의 고착을 막지 못하였다.
동중서의 주장이 군주 전제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군권을 제약하 려는 시도였다는(鄭濟洲 2016) 등 한 대 유가사상을 지성주의 회복 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오히려 군권 절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많다.
군도동체설과 한 대 유가 지성주의 관련 논쟁은 새로운 연구가 필요한 과제이다.
진한 이래 유가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당송시대 신유학의 탄생을 가져 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는데, 이 또한 후속 연구가 필요한 작업이다.
선진 유가 지성주의의 본질은 예악의 교화라는 실천적 지식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현실 정치권력과 의 균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권위주의 경향성 등 유가사상 내부의 문제, 통일제국의 왕권 절 대화의 흐름, 법가의 지배와 공리주의 숭배라는 현실은 후대 유생들을 반지성주의의 질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중앙 황실을 중심으로 한 대일통의 추구와 군주권력의 무한한 확대라는 두 기둥이 너무 비대해 지면서 권력과 지성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최고권력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적, 정신적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출세를 위한 공부보다 위기지학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상통제의 원흉인 대일통을 막아야 한다.
법치는 중요하지만 공공성(public)과 더불어 공동선 (common good)을 살릴 수 있는 예치(禮治) 등 보조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학문의 다양성, 분권, 민주화만이 지성주의를 회복하는 길이다.
참고문헌 : 생략 (첨부 논문 파일 참조)
Abstract
Reconsideration of Confucian Intellectualism: Balance and Imbalance between Intellect and Monarchical Power
CHANG Hyun Guen (YongIn University, Dept. of Chinese Studies, Professor)
The prevalence of Anti-intellectualism, which antagonizes various ideas, is a sign of a dangerous society. The Confucian ideology, which had the greatest influence on East Asian history, maintained intellectualism and opposed the monarchy with anti-intellectualism at the forefront. In Chinese characters, 知(zhi) which is the ability to recognize objects, and 智(zhi) which is the category of morality as a result of recognition, were not distinguished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re still mixed. In Confucianism, they think cultivating virtue is the essence of intelligence and the goal to move forward rather than simply exploring knowledge. The content of pre-Chin Confucianism is to practice ‘the edification of rites and music’(禮樂敎化) based on well-disciplined virtue. Confucius, Mencius, and Xunzi(荀子) tried to establish an ideal moral state through the balance of intelligence(or knowledge) and political power. However, as Xunzi peaked and entered the era of ‘the expansion of unification’(大一統), the imbalance between the power of despotic monarchs and intelligence intensified. After the emergence of Qin and Han empire, anti-intellectualism has been fixed in proportion to the absolutization of monarchical power. Amid the survival competition between countries, the legalism(法家) led the flow of politics, and the space for free intellectualism under the expansion of unification disappeared. In particular, Xunzi's idea of monarchical power contained a risk of leading to Anti-intellectualism. Despite the constant efforts of later Confucian scholars, intellectualism, which balanced the monarchical power and intellectuals, could not be revived.
Key Words: intellectualism. Anti-intellectualism. Confucianism. the expansion of unification. monarchical power
한국정치학회보 57집 4호 2023 겨울
원고접수일 2023년 09월 01일 | 심사시작일 2023년 10월 30일 | 게재확정일 2023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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