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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서규. 제주대

한글 요약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전개한 의지의 형이상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페시미즘적 해석을 제시한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볼프-라이프니츠 적인 낙관주의와 달리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der blinde Wille zum Leben)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갈등적인 구조를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이러한 페시미즘은 E. Hartmann, P Mainlander, J. Bahnsen 등과 함께 19세기 후반 독일의 사변철학에 반대 하면서 유한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하는 철학의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전통철학에서 제시된 인간 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논의들을 해체하면서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유 한성을 주목하여 인간과 세계의 현사실적인 관계를 제시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 계내의 모든 개체들은 의지가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화(Objektivation des Willens)이며, 이런 점에서 개체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의지는 개체들로 하여금 살려는 의지를 충족시키도록 하며, 여기에서 개체들은 끊임없이 서로 대립과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가 지닌 자기분열적인 존재 특성이 모든 개체들의 삶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드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모든 현존 재의 무상성(Nichtigkeit des Daseins)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모든 인 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라 는 점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하는 인간과 세계의 본성을 폭로하면서 단지 개체화원리와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힌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 다는 점만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의 경험이 오히려 살려는 의지를 부 정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고통이 지닌 긍정적인 의미와 역할을 주목하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그의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결국은 의지의 부정 (Verneinung des Willens)이라는 점을 확인해준다.

이 논문에서는 쇼펜하우어의 페시 미즘적 세계해석의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철학이 제시한 세계관을 어떻게 비판하는지를 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위에서 쇼펜하우어의 페 시미즘이 제시하는 고통의 본질과 적극적인 의미를 고찰하며, 끝으로 쇼펜하우어의 페 시미즘이 도달하려는 의지의 부정이 지닌 의미와 문제점들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한다.

주제어: 쇼펜하우어, 페시미즘, 의지의 객관화, 고통, 의지의 부정

1. 들어가는 말

페시미즘(Pessimismus)은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페시미즘은 근대철학 전반 을 각인했던 이성중심주의와 낙관주의적인 세계해석을 해체하면서 기존의 학문 으로서의 철학이 간과한 유한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주목한다.

쇼펜하우어 를 중심으로 하여 Eduard von Hartmann, Philipp Mainländer, Julius Bahnsen 등에서 드러나는 페시미즘은 인간의 현사실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 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제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쇼펜하 우어에게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페시미즘이 단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부 정적인 해석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1)

1) 이러한 입장은 단적으로 John Oxenfeld가 쇼펜하우어를 “사람을 싫어하는 프랑크푸 르트의 성자”(the misanthropic sage of Frankfurt)로 묘사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Cartwright, David E., Schopenhauer, New York, 2010, 526쪽 이하 참고. 쇼펜하우 어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연구자나 논평자의 입장과는 달리 인 간의 유한성에 대한 전적인 승인에서 출발하고 그러한 인간의 유한성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논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표현하지 않고 페시미즘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페시미즘은 단 순히 인간이 겪는 갈등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상들을 기술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이 생겨나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고통이 없는 삶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시미즘은 인간의 특정한 기분상태나 특정한 시대와 문화를 지칭하 는 용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종교와 윤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 주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의지형이상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 은 니체조차도 쇼펜하우어를 “고집센 도덕적 인간”(hartnäckiger Moral-Mensch) 로 규정하고 “세계를 부정하는 자”(Welt-Verneiner)2)로 평가한다는 점은 쇼펜하 우어가 제시하는 페시미즘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단 적으로 드러내준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전통철학이 제시하는 인간해석을 거부하면서 인간 과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Wille zum Leben)로 규정한다.3)

2) Friedrich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Stuttgart 1996, 283쪽(이하 WM로 표 기). 니체의 이러한 쇼펜하우어비판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을 비판하면 서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Eugen Dühring의 1865년 저서 삶의 가치(Der Werth des Lebens)를 니체가 읽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특히 니체는 1875년 여름 듀링을 쇼펜하우어의 “가장 결정적인 적대자”로 규정한다.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d. 8, Berlin/New York, 1988, 131쪽.

3) 쇼펜하우어는 1828년 「비망록」(Adversaria)에서 그의 철학이 페시미즘이라는 것을 언급한 적은 있다. Arthur Schopenhauer, Der handschriftliche Nachlaß, Bd. 3, München, 1985, 464쪽 참고

쇼펜 하우어에 따르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 기 때문에, 개체로서의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의지의 충동에 사로 잡혀 다른 개 체의 살려는 의지와 충돌하면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쇼펜하우어 의 페시미즘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을 주목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의 페시미즘 을 인간의 삶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비관적인 해석이나 종말론으로 이해되어서 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페시미즘은 전통철학이 간과한 인간의 유한하고 모 순적인 존재방식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삶의 고통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고통으 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쇼펜하우 어의 페시미즘이 제시하는 세계해석의 배경을 살펴보고 이와 함께 그의 페시미 즘이 지닌 문제의식과 특징들 그리고 고통에 부여하는 의미와 의지부정의 문제 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페시미즘이 단순한 비관주의나 회의주의로 귀결되는 것 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신중한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페시미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해석의 출발점을 제공하고 자 한다.

2. 전통비판으로서의 페시미즘

1) 페시미즘과 세계해석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무엇보다도 인간존재의 불완전성과 세계의 갈등적 인 구조에 주목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페시미즘적인 세계해석의 요소들을 이미 고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O. Plümacher는 페시미즘의 역사를 논의하면서 그 출발점들을 고대의 인도, 그리스와 유대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4)

특 히 우리는 이러한 페시미즘의 흔적을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확인할 수 있는 데, 소포클레스의 작품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드러나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이미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것이 차선책이라는 언급이 그것이 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갈등적인 구 조는 페시미즘적 세계해석의 출발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러한 페시미즘적 세 계해석은 중세의 유신론적 세계관이 제시한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목적론 적 해석을 거부하고,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제시한 낙관적인 세계관을 해체하 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한다.5)

4)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140쪽 이하 참고.

5) 하르트만은 그의 페시미즘에서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는 칸트를 근대적인 페시 미즘의 아버지로 규정한다.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64쪽 이하. 하르트만에 따르면 칸트는 1765년의 “미와 숭고의 감정에 대한 고찰들”(Beob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에서 페시미즘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하르트만은 이러한 칸트의 페시미즘적 입장이 자연으로의 회귀를 강조하는 루 소의 영향 속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88쪽 이하 참고.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편의 46절 “삶의 무상성과 고통 에 관하여”(Von der Nichtigkeit und dem Leiden des Lebens)에서 페시미즘적 세계해석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적 세계해석의 우선적인 배경을 무엇보다도 세계를 표상세계와 의지세계로 구분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세계를 표상세계와 의지세계로 구분하는 것은 다음 의 두 가지 점을 확인해준다.

첫째, 표상세계와 의지세계의 구분은 쇼펜하우어 가 일상적인 삶과 학문의 대상인 표상세계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단지 인식주관이 충분근거율을 통해 파악하는 세계일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세계경험은 세계를 표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처럼 세계를 표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피상적인 세계 이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으로서 인식하게 하는 충분근거율을 통해서는 결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 쇼펜하우어는 표상과 의지의 구분을 통해 세계의 본질이 의지이며 표상세 계는 이러한 의지가 가시화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의 존재와 자연현상들은 모두 의지가 현상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세계의 본질이 의지라는 말은 모든 개체들이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는 것을 의미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이점을 ‘의지의 객관화’(Objektivation des Willens)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한다.

의지의 객관화는 형식적으로는 의지가 구 체적인 개체들에게서 현상하는 것을 말해주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하 는 세계 전체가 전적으로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여기에서

첫 째, 세계의 본질이 의지라는 점, 그리고

둘째,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이 전적으로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은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 을 위한 존재론적 단초를 제공해준다.

의지의 객관화는 모든 개체들이 맹목적인 의지에 이끌려서 끊임없이 다른 개체들과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 을 확인시켜준다.

본래 하나인 의지가 다양한 개체들 속에서 맹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렇기 때문에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의지는 자신을 객관화시키면서 개체 들의 갈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점은 쇼펜하우어로 하여 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로 간주하는 라 이프니츠의 낙관주의적인 세계해석을 거부하게 한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살려 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세계는 가능한 한 가장 나쁜 세계이기 때문이다.6)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적 세계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합목 적성(Zweckmäßigkeit)에 대한 비판을 언급할 수 있다.

비록 쇼펜하우어는 합 목적성이라는 용어를 칸트로부터 차용하여 사용하지만, 합목적성은 칸트와는 달리 자연이 의지를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갈등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 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8장에 서 이러한 합목적성을 내적 합목적성과 외적 합목적성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에 서 내적 합목적성은 “개별적인 유기체의 모든 부분들이 질서 있게 일치해서 그 로 인해 유기체와 그것의 류가 유지되고, 그 때문에 유기체와 그 류의 유지가 질서의 목표로 나타나는 것”7)이다.

6)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I, Frankfurt am Main, 1996, 747쪽(이하 WII로 표기).

7)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Frankfurt am Main, 1996, 228쪽(이하 WI로 표기).

반면 외적 합목적성은 “유기적 자연 일반에 대 한 비유기적 자연의 관계, 또는 유기적 자연의 개별적인 부분의 상호관계”8)를 드러내준다.

즉 내적 합목적성이 한 개체 내의 다양한 기관들이 서로 작용하여 개체의 존재를 유지하는데서 발견되는 현상인 반면, 외적 합목적성은 자연을 구 성하는 서로 다른 개체들이 충돌 속에서도 적응하고 순응하면서 존재한다는 점 을 확인해준다.

자연의 합목적성은 우선적으로는 객관화된 개체들은 하나의 같은 의지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세계의 모든 부분들의 본질적인 연관”9)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개체들의 존재가 지닌 상호관 계가 전적으로 의지의 현상일 뿐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합목적성은 모든 개체들 이 갈등적인 상태에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모든 개체들 의 존재가 의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페시미즘 적 세계해석을 위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해준다.

쇼펜하우어에게서 합목적성은 내적 합목적성이든 외적 합목적성이든지간에 개체 내부의 각 기관들이 맺는 관 계나 외부의 다른 류들과 맺는 관계들은 모두 의지의 발현이므로 세계의 갈등적 인 구조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줄 뿐이다. 즉 쇼펜하우어에게서 합목적성은 모든 자연현상이 전적으로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의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연에서의 각 개체들은 서로 갈등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 인해준다.

의지가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개체들은 항상 갈등적일 수밖에 없으 며, 각각의 개체를 지배하는 의지, 즉 살려는 의지(der Wille zum Leben)가 끊 임없이 다른 개체와의 투쟁을 야기한다.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논의는 자연에서는 결코 조화로운 상 태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자연은

“자기 자신과 대체로 일치하는 하나의 의지의 단일성의 현상이 […] 공간과 시간으로 분리되어 나타난 것에 불 과하기 때문이다.”10)

8) WI, 228쪽.

9) WI, 228쪽.

10) WI, 231쪽.

오히려 자연 속에서는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충동 들이 각각의 개체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맹목적인 의지는 개체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자연 전체에서 보자면 의지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마치 자연 자체가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 체들 사이에는 갈등과 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그려내는 분 명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의지가 맹목적(blind)이라는 점이다.

의 지는 개체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개체들의 모든 존재방 식을 제약하는데, 여기에서 개체들은 자기의 존재를 보전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든 다른 개체들의 존재, 즉 의지를 제한해야만 한다.11)

쇼펜하우어는 “행동은 존재에서 나온다.”(Operari sequitur esse)라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언급을 주목 하는데, 이것은 개체로서의 인간의 행동이 항상 존재, 즉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는 점을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이점을 “의욕은 가르쳐질 수 없다”(Velle non discitur)라는 세네카의 주장을 통해 강조하는데, 이러한 쇼 펜하우어의 입장은 “인간의 의지를 제한하고 종속시킬 어떤 법칙”12)이 존재하 지 않는다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인간의 행동이 의지의 지배를 받는 한 이기적이며, 따라서 인간의 삶은 “무한하고 화해할 수 없는 투 쟁”(endloser und unversöhnlicher Kampf)13)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페시미즘 적 세계해석을 제시한다.

11)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의 객관화단계에서 같은 단계에 있는 개체들이 서로 갈등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에 놓여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지속 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의지의 객관화는 세계의 갈등적인 구조를 드러내 준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무기체, 유기체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이 전 적으로 갈등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점을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의지 의 객관화의 모든 단계는 다른 단계와 물질, 공간, 시간을 놓고 다툰다. […] 자연 전 체에서 이런 다툼이 벌어질 수 있고, 그러니까 자연은 사실 그런 다툼을 통해서만 다시 존재한다.” WI, 218쪽.

12) Arthur Schopenhauer, Zürcher Ausgabe. Werk in zehn Bänden, Bd. 6, Frankurt am Main, 1977, 182쪽.

13) WI, 226쪽.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스토아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아파테이아의 상태나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아타락시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모든 형태의 행복주의를 비판하게 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모든 행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극적인 성질”을 갖는 다는 점을 강조한다. WI, 439쪽.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 험하는 행복은 의지가 완전하게 충족된 상태가 아니라 단지 특정한 고통이나 결핍 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있는 상태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 페시미즘과 이성비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권에서 인식주관이 세계를 표상 으로서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개체로서의 인간에 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인식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 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단지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체가 살아가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즉 인간의 모든 인식행위는 의지가 개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 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수단으로서의 인식은 항상 의지에 종 속될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인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오성인식이고 다 른 하나는 이성인식이다.

먼저 오성인식은 전적으로 충분근거율에 의존하는 인 식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오성인식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주어진 다는 점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하며, 유연하고 지극히 도움이 필요하며, 무 수히 많은 상처를 입기 쉬운 존재”14)인 인간은 오성 이외에 다른 인식능력, 즉 이성을 사용한다.

이러한 이성의 능력은 동물에게는 부여되지 않고 오로지 인간 에게만 부여된 인식능력이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이성으로 인해 인간에게 “미래와 과거를 조망하는 신중함이 생겨나고, 이를 이어서 숙고와 배려, 현재와 무관하게 앞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생겨나고, 끝으로 자신의 의지결정 그 자체라는 완전히 분명한 의식이 생겨났다.”15)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성은 현재에만 매여 있는 직관적 인식, 즉 오성인식과는 달리 개념을 매개로 해서 표 상세계에 대한 인식영역을 폭넓게 확장시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성능력이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분하게 해주 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세계경험을 더 완전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다.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성의 등장으로 인해 “(다른 극단인 무기적 자연에서 더욱이 엄격한 법칙성으로 나타나는) 의지 발현의 확실성과 틀림없음 (Untrüglichkeit)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16)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이성 은 세계를 표상으로 파악하면서 “가상과 기만의 가능성”17)을 가져온다.

14) WI, 224쪽.

15) WI, 224쪽.

16) Wi, 224쪽 이하.

17) WI, 224쪽.

왜냐하 면 이성에 의해 주어지는 “모든 것을 대체해야만 하는 고려(1권에서 상세하게 언급했듯이)가 동요(Schwanke)와 불안정을 발생”18)시키기 때문이다.

의지의 객관화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이성은 본능과 인 위적 충동(Kunsttrieb)에 사로잡혀 있는 동물들과는 다르게 의욕의 발현을 변 형시켜 인간의 세계경험을 왜곡시킨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2장에서 이성에 대한 비 판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인식된 것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오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직관적 인식은 “항상 개 별적인 경우에만 적용되고, 가장 가까운 것에만 향해 있으며 머물러 있다”19)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성에 의한 추상적 인식은 개념을 수단으로 해서 직관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변형시킨다.

이성은 직관 대신에 추상적인 개념 들을 사용하여 학문을 형성하며, 이러한 학문은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에 종속시키면서 추론을 통해 체계화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학문의 특 징이 “확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원리에서 특수한 원리로 단계적으 로 내려가는 방법을 토대로 한 인식의 체계적인 형식”20)에 있을 뿐이라고 비판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식은 직관적인 것이든 이성적인 것이든 본래 의지 자 체에서 생겨나고, 신체의 모든 기관과 마찬가지로 개체와 종의 유지를 위한 수 단인 단순한 메카네”21)일 뿐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인식행위는 어 떤 식으로든 의지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18) WI, 225쪽.

19) WI, 97쪽.

20) WI, 111쪽.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학문의 형식이 “인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 일 뿐이지, 더 큰 확실성을 얻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WI, 117쪽.

21) WI, 225쪽.

여기에 서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식은 의지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세계를 표상으로서 파악할 뿐이며, 따라서 세계 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인식과 관련하여 이성의 역할을 비판할 뿐만 아니 라 이성의 실천적 사용과 관련해서도 비판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성의 실 천적인 사용은 인간만이 지닌 ‘이중적인 삶’(doppeltes Leben) 때문에 가능한 데, 인간은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삶(Leben in concreto)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는 추상적인 삶(Leben in abstracto)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이성을 지닌 인 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삶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은 “인간은 현실의 모든 폭풍우와 현재의 영향에 자신을 내 맡기고 있으며, 동물처럼 노력하고 고생하며 죽지 않으면 안 된다.”22)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성을 지닌 인간만이 누리는 추상적인 삶은 “구체적인 삶 에서 인간을 완전히 소유하고 격렬하게 움직이게 하는 일이 그에게는 냉담하고 중립적이며 현재는 관계없는 것”23)으로 간주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추상 적인 삶은 이성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구체적인 삶에서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이성에 의해 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추상적인 삶 을 이끌어가는 것을 ‘실천이성’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성이 인간의 삶을 도덕적으로 이끌어가거나, 나아가 개체로서의 인간들 사이의 갈등으로부 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덕이 있게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24)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쇼 펜하우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성은 언제나 의지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성이 자신의 살려는 의지를 강화시킬 수 있다면 어떠한 악의(Bosheit)와도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은 의 지가 객관화된 개체일 뿐인 인간에게서 의지가 자신을 드러내고 유지하는 수단 이기 때문에, 이점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이성이 실천이성 이라고 지칭되어도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실천이성에 의한 행동은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라도 모두 살려는 의지의 충실한 반영일 뿐이며,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귀결된다.

실천이성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비판은 그로 하여금 스토아주의의 이 상을 부정하게 한다.

스토아주의의 문제의식은 “삶에 가득 찬 각종의 시름과 고 통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단번에 구출해낼 수 없을까라는 생각”25)이며, 여기에서 스토아주의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 결할 수 있다고 본다.

22) WI, 139쪽.

23) WI, 139쪽.

24) WI, 140쪽.

25) WI, 141쪽.

비록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본성에 대한 스토 아철학의 진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스토아주의자들 이 이성의 역할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행복에 도달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왜냐 하면 이성 자체를 의지에 봉사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그에게는 모든 형태의 “성취된 소망은 지속적인 만족을 줄 수 없고, 또한 모든 소유물과 행복이라는 것도 단지 우연으로부터 시간을 정하지 않고 빌려온 것에 불과”26)하기 때문이다.

쇼 펜하우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토아주의는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 여 “행복한 삶에 대한 지침”27)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삶과 세계의 갈등을 극복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스토아철학이 제시하는 ‘현자’의 이상은 “인류의 본성에 정면으로 배치”28)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우 리가 자연에서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체로 의지의 전체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29)이며, 우리를 둘러 싼 세계는 “모든 의지 현상들의 서로에 대한 투쟁”30)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WI, 143쪽.

27) WI, 146쪽.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제외한 고대의 윤리학은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한 지침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WII, 193쪽 이하 참고.

28) WI, 147쪽. 쇼펜하우어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자발적인 속죄자나 그리스 도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숭고한 함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이상적 인 스토아의 현자개념을 비판한다. 같은 곳 참고. 또한 쇼펜하우어는 이성의 역할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모순된 입장은 자살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고 본다. 29) WI, 221쪽.

30) WI, 221쪽.

3. 세계극복으로서의 페시미즘

1) 페시미즘과 고통의 역할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의지의 객관화단계에 놓여 있는 모든 개체들의 존 재가 의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갈등상태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점은 하나의 개체로서 의지의 객관화단계에 놓여 있는 인간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적용 된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모든 삶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31)라는 점을 강조 하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삶을 전체적이고 일반적으로 바라보고 단지 가장 의 미 있는 특징만을 끄집어낸다면, 모든 개인들의 삶은 본래 항상 하나의 비극 (Trauerspiel)”32)이라고 규정한다.

31) WI, 444쪽.

32) WI, 442쪽.

비극이 모든 존재의 유한성과 세계의 무상 성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삶의 본질적인 내용을 비극으로 파악한다.33)

물론 쇼펜하우어의 의지형이상학은 인간이 의지의 객관화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점은 우선적으로는 인간존재가 다른 개 체들보다 우월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오히려 쇼펜하우어에게서 이점은 인간의 삶이 다른 개체들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왜냐하면 인 간은 다른 개체들보다 개성(Individualität)이 강하고, 더욱더 살려는 의지에 사 로잡히게 되어, 더 큰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인 고찰을 통해, 즉 인간의 삶 의 첫 번째의 기본적인 특징들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삶이 이미 전체적인 성향 에 따라 참된 행복이 가능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전적으 로 불행한 상태라는 점을 선험적으로 확신한다.”34)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햄릿의 독백에서 잘 드러나듯이, 인간의 삶은 “완전 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나을 수도 있는 그러한 비참한 상태”35)일 뿐이 다.

그러나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극단적인 페시미즘적인 세계해석에 대해서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서 그의 페시미즘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일반적 인 비판은 페시미즘이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삶의 조건들을 개선시키려는 인간 의 모든 노력을 공허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36)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인간의 삶 자체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Beiser가 잘 요약하여 제시하듯이, 동일한 삶의 경험이 개인에 따라 고통스러운 것으로 또는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은 삶의 경험 전체를 단적으로 고 통스러운 것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 러한 비판에 대해 플류마커(Plümacher)는 모든 인간에게는 감정의 상태나 나 이, 주변 환경, 교육과 사회적 계층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차이와는 상관없이 통 용되는 고통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형태의 삶을 고통으로 규 정하는 페시미즘의 입장을 옹호한다.37)

33) Becker는 쇼펜하우어에게는 비극의 목적이 개별적 자아의 해체(the destruction of the individual self)라고 주장한다. David Becker, “Schopenhauer on the Meaning of Tragedy: Vision and Blindness”, in Schopenhauer-Jahrbuch Bd. 91, Würzburg, 2010, 18쪽 이하 참고.

34) WI, 443쪽.

35) WI, 445쪽.

36)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43쪽 참고.

37)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182쪽 이하.

물론 고통스러운 삶을 강조하는 쇼펜하우어는 특정한 순간에 고통이 제거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개체 의 살려는 의지가 어떤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순간에 개체의 살려는 의지가 자신의 의욕의 대상에 도달하게 되고 그 순간 고 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제거는 일시적이며 이전의 고통 이 사라진 곳에는 또다시 새로운 고통이 다가올 뿐이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 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아픔을 단지 특정한 외부의 관계 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고 그리고 오직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압박을 받고 슬퍼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제거되기만 하면 엄청난 만족이 나타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일 뿐이다.”38)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언덕위로 바위를 굴려 올라가야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 포스처럼 묘사하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모든 고통의 원인을 의지의 본성 과 연결시켜 논의한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끊임없이 모든 개체의 삶을 지배하는 데, 이러한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der blinde Wille zum Leben)는 결코 만족을 모르는 것이며, 따라서 개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히게 한 다.

일시적으로 충족된 의지는 개체로 하여금 또다시 새로운 욕망의 대 상을 찾게 한다. 물론 일시적인 의지의 충족은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겪었던 고 통을 잠시 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이 삶에 본질적이고 따라서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르지 않는 고통의 샘을 지니고 다닌다는 쓴 약에 비유되는 인식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눈을 감아버린다. 오히 려 우리는 우리에게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대해 항상 외부의 개별적인 원인, 즉 구실(Vorwand)을 찾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사람이 주인을 갖기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39)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지배하는 한 모든 형 태의 삶은 “실존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며, 결국 이 투쟁에서 지는 것이 확 실”40)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38) WI, 434쪽 이하.

39) WI, 436쪽 이하.

40) WI, 429쪽.

여기에서 우리는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체의 삶과 고통의 관계를 쇼펜 하우어가 영원한 정의(ewige Gerechtigkeit)라고 부르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단지 특정한 개인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고통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영원한 정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통은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존재에게 반드시 주어지는 근원현상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사물들의 질서와 관념의 질서를 동일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보듯이, 영원한 정의는 개체가 살려는 의지에 사로 잡혀 있는 한 모든 개체에게 고통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즉 영원 한 정의는 우리에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고통을 야기하는 사람 모두가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지해 준다.

지금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단지 현재에 경험 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개 인은 단순히 현상이며 다른 사람과의 차이성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은 현 상의 형식, 개체화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근거하고 있다. 사물의 참 된 본질에 따라 모든 사람이 살려는 확고한 의지인 한, 즉 온힘을 다해 삶을 긍 정하는 한, 세계의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모든 가능한 고통을 자신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41)

이제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고통의 특성에 주목 하도록 하자.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고통의 특성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통은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작용에 의해서도 생 기는데, 심지어 정신적인 고통은 신체적인 또는 물리적인 고통보다 크고 더 오 래 지속될 수 있다.42)

 

41) WI, 483쪽. 쇼펜하우어는 살려는 의지와 고통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많은 종교에서 다루어지는 영혼의 윤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수많은 종교와 신화에서 언급되는 윤회에 대한 논의들은 영원한 정의를 언급하는 것인데, 윤회는 살려는 의지에 의해 고통이 생기며, 이러한 살려는 의지가 존재하는 한 고통은 지속 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42) 쇼펜하우어는 물리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다. “확실히 우리는 격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때 단지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관 심을 물리적인 고통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가한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고, 얼굴을 할퀴고, 바닥에서 뒹구는 것이다. 본래 이 모든 것 은 단지 참을 수 없게 하는 사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물리적인 고 통보다 훨씬 커다란 정신적인 고통은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 또는 병적인 불쾌감에 의해 쇠약해진 사람에게는, 비록 전에 쾌적한 상 태에서는 자살에 대해 뒷걸음질 친 사람일지라도 자살은 아주 쉬운 것이 되어 버린 다. 그와 마찬가지로 걱정과 열정, 따라서 사유의 유희(Gedankenspiel)가 물질적인 고통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신체를 파괴시킨다.” WI, 411쪽.

둘째, 개체의 인식능력의 정도가 높을수록 고통의 정도가 커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보다 높은 지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 예를 들면 천재는 다른 일반사람들 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셋째,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의 크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예들 들면 고통을 겪는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큰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볼 때에 자신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큰 고통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점을 다음 과 같이 설명한다.

“모두 사람에게 공통적이고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불행(Übel)은 우리를 덜 슬프게 한다. 이처럼 기후 때문에 겪는 불행, 모든 나라에서 겪는 불행도 우리를 별로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떠올린다면 그 고통이 진정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자 신의 고통은 누그러진다.”43)

넷째, 고통의 완전한 극복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 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체의 고유한 존재특 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한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제거는 불가능한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고통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뿐이며, 더군다나 이렇게 고통의 형태를 바꾸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 니다.

다섯째, 모든 고통은 외견상으로는 외부의 개별적인 대상에 의해 생겨나 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려는 의지에 집착하는 우리 자신에 의해 생겨 난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 자신이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기 때 문에 “각자가 마르지 않는 고통의 샘을 지니고 다닌다”44)점을 강조한다.

여기에 서 언급된 고통의 특징도 우리가 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한 고통이 우리의 삶 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고지해준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단지 외부의 특정한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 니라는 점을 주목하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살려는 의지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 고 개체화원리를 통해 가시화되는 모순의 표현”45)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고통의 경험 이 지닌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46)

43) WI, 496쪽.

44) WI, 436쪽.

45) WI, 456쪽.

46) 특히 하르트만은 그의 저서 페시미즘(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에서 고통의 의미를 다양하게 구분하여 논의하는데, 이러한 고통의 구 분들은 페시미즘이 지닌 긍정적인 역할들을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물론 하 르트만의 이러한 구분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가 고통의 경험이 가져오는 역할에 주목하면서 페시미즘의 긍정적인 역할을 제시한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327쪽 이하 참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고통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이 가져오는 결과 를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즉 지속적인 고통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첫째, 모 든 형태의 살려는 의지의 궁극적인 충족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점,

둘째, 살려는 의지의 충족은 단지 ‘소극적’(negativ)일 뿐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쇼펜하 우어에 따르면 모든 욕망은 어떤 것이 결핍되었을 경우에 생기며, 이러한 결핍 이 충족된 경우에도 또 다른 결핍이 생겨 새로운 욕망을 야기하고 이러한 과정 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왜냐하면 의지는 끝없는 노력(Streben)이기 때문이 다.

고통의 경험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의 불가능성과 모든 행복의 소극성을 고 지해 준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충족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그럴 뿐이고, 도달된 것은 결코 갈망이 약속한 것을 가져오지 않 으며, 즉 격렬한 의지의 충동의 궁극적인 진정을 가져오지 않으며, 오히려 욕구 의 충족은 단지 그 형태를 바꿀 뿐이며, 이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 고통에 시달 리며, 결국 모든 욕구가 고갈되게 되면, 의지의 충동 자신은 동기를 인식하지 않고 남아있게 되고,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 무서운 황량함과 공허함의 감정으 로서 고지된다는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47)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모든 개체의 삶을 관통하는 고통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궁극적인 행복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에 대해 비도덕적이거나 도덕적 행위를 위한 동기를 전혀 제공하지 못 한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Beiser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은 페시미즘에 대 한 가장 오래된 형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48)

그러나 하르트만의 경우에는 페시미즘이 이처럼 비도덕적이라는 비판에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하르트 만은 페시미즘이

첫째, 이기주의적인 목적이 도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 면서 이기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으며,

둘째, 우리로 하여금 악과 고통에 대해 싸 우게 하면서 행복주의적 페시미즘과 점진적인 낙관주의를 제공한다고 보기 때 문이다.49)

47) WI, 496쪽.

48)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163쪽.

49)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163쪽 이하.

하르트만은 도덕의 첫 번째 요구가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페시미즘의 긍정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다.

물 론 페시미즘에 대한 하르트만의 긍정적인 해석이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을 그 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쇼펜하우어가 고통의 긍정적인 역 할을 언급할 때 고려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하르트만은 고통의 윤리적 의미와 가치를 주목하면서 페시미즘이 주목하는 고통의 경험이 자기애 (Selbstsucht)를 부정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을 강조하는데,50) 이것 은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지닌 역할을 논의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이다.

50)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349쪽.

2) 페시미즘의 본질과 의지부정

쇼펜하우어가 앞서 제시한 고통에 대한 논의는 그의 페시미즘이 추구하는 목 표를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권에서의 논의들은 고통의 긍정적인 역할을 바탕으로 페시미즘이 지닌 적극적인 의미를 주목하게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단지 인간의 유한성이나 인 간의 현존재에 대한 비관주의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선적 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고통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 해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는 삶의 방식을 주목하게 하는데, 이점은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듀링(O. Dührung)조차도 인정하고 있다.51)

왜 냐하면 개체로서의 인간이 실제로 겪는 수많은 고통들은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 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할수록, 이러한 고통의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모든 개체가 살려는 의지의 지 배를 받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고,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마야의 너울(Schleier der Maja)이라고 부르는 개체화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 결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과도한 고통 속에서 삶의 마지막 비밀, 즉 불행과 악, 고통과 증오, 고통을 당하는 사람 과 고통을 가하는 사람이 근거율에 의해서는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자체 로는 하나이고, 개체화원리에 의해 자기 자신과의 대립을 객관화하는 살려는 의 지의 현상이라는 점”52)이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51)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87쪽 참고. 52) WI, 535쪽.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고통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야기하는 개 체성에 근거한 모든 형태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여기에서 페 시미즘은 고통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관통하는 근본사태라는 점을 확인해주 고, 고통의 본질을 직시함으로써 이제 우리로 하여금 개체성을 부정하도록 한 다.

고통의 본질을 통찰한 사람은 “그 어떤 것을 의욕 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 의 의지가 어떤 것에 매달리는 것을 주의하고,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확 립”53)하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고통의 본질과 그 역할을 통찰한 사람을 ‘고귀한 사람’(der Edle)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고통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은 그 러한 고통을 야기하는 살려는 의지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만들어낸다 는 점을 간파한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고귀한 사람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귀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보는 고통은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그렇게 가깝게 느낀다. 그런 까닭에 고귀한 사람은 자기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 사이에 균형을 만들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만족을 거 부하고, 궁핍함을 받아들인다. 그는 악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틈인 자신과 다 른 사람의 차이가 단지 일시적으로 기만하는 현상에 속할 뿐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추리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고유한 현상 그-자체 가 또한 다른 사람의 현상 그-자체, 즉 어떤 사물의 본질을 완성하고 모든 것 속에서 살아있는 저 살려는 의지라는 점을, 이것이 더구나 동물과 자연 전체에 까지 미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54)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통의 본질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쇼 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종교의 핵심적 가치를 잘 드러내준다는 점이다.55)

53) WI, 517쪽.

54) WI, 507쪽.

55) 프라우엔스테트(Frauenstät)와 마인랜더)Maunländer) 그리고 반센(Bahnsen)은 이점을 주목한다.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235쪽 참고.

특히 우리는 고통과 개체화원리의 본질을 통찰한 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종교적인 삶의 지향점을 공유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본성과의 수많은 힘겨운 투쟁에 의해 마침내 완전히 극복한 사람 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만 남아 있게 된 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를 불안해하게 하거나 동요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세계에 붙잡아 메어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 욕망, 두려움, 질투, 분노로써 우리를 이리저리 끌어당기는 의욕의 수많은 끈들을 끊어버렸기 때문이 다.”56)

이처럼 살려는 의지가 야기하는 고통에 대한 성찰과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려 는 시도는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등 모든 형태의 종교에서 발견되 는 성자들의 삶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양한 종교를 관통하 는 살려는 의지의 부정이라는 근원현상을 주목하는데57),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의 복음서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의지의 본질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각각의 종교는 살 려는 의지의 부정을 자신들의 고유한 교리에 의해 설명한다는 점에서만 서로 구 분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쇼펜하우어가 페시미즘에 부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의 페시미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즉 단순히 고통으로부터 의 도피가 아니라 모든 개체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개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체로서의 인간의 삶이 의지의 객관화단계 속에서 살려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체성 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살려는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다. Beiser가 강조하듯이, 이러한 의지의 부정의 문제는 쇼펜하우어철학에서 중 요한 문제이다.58)

물론 우리는 자살을 이러한 개체성의 부정, 의지의 부정이라 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르트만도 스토아주의자들과 에피쿠로스주의자들 이 자살이 삶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을 주목한다.59)

56) WI, 530쪽 이하.

57)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인 도인의 속죄 또는 성자의 삶을 읽을 때 발견하는 일치점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 게 된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상이한 교리들, 풍습과 환경들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노 력과 내적인 삶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 가르침들은 동일하다.” WI, 528쪽.

58)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53쪽.

59)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ü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29쪽.

그러나 쇼펜 하우어는 자살이 결코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 면 자살은 오히려 살려는 의지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이런 점에서 쇼펜 하우어는 자살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살려는 의지의 부정은 […] 의지의 개별적인 현상의 자의적인 폐기(Aufhebung)인 자살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자 살은 의지의 부정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며 의지를 강하게 긍정하는 현상이 다. […] 자살하는 사람은 삶을 원하지만 그가 처한 조건들에 만족하지 않을 뿐 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코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개별적 인 현상을 파괴하면서 단지 삶만을 포기 할 뿐이다.”60)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세계 내에서의 “모든 노력의 덧없음과 무상성”(die Vergeblichkeit und Nichtigkeit des ganzen Streben)61)을 폭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개체성의 부정을 통해 “세계의 정복자가 아니라 세계의 극복자”62)가 되 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페시미즘의 입장에 대해 의지의 부정을 통한 개체성의 부정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단호하게 제기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의지형이상학에 따르면 의지의 긍정은 개체로서의 인간의 삶이 주어지는 근본조건인데,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 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이 ‘도대체’ 가능한지의 물음 대신에 의 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권에서 의지의 부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언급 할 뿐이다.

이에 따르면 의지의 부정에 도달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 길은 개체화원리가 가져오는 고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 은 개체화원리와 살려는 의지가 가져오는 고통의 본질을 통찰하게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첫 번째 길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가능하며,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세계의 모든 고통을 그들 자신의 고통으로 인 식”63)한다.

60) WI, 541쪽.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권에서 강조하는 예술에서 이념의 관조를 통해 개체들의 다양성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념의 관조는 일시적으로 개체성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려는 의지의 부정은 쉬운 것이 아 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예술에 부여하는 역할, 즉 이념의 조망을 통해 개체화원 리가 야기하는 인간 현존재의 갈등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역할을 비판한다. 니체에 따르면 “예술은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긍정, 축복, 신격화이다.” WM, 553쪽(821번) 이런 점에서 니체는 페시미즘적 예술(pessimistische Kunst)이라는 것은 모순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61) WI, 524쪽.

62) WI, 524쪽.

63) WI, 533쪽.

다음으로 두 번째 길은 운명에 의해 부과된 고통을 통해 그리고 죽 음을 통해 의지의 부정에 도달하는 길인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소 극적인 방식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파우스트에서 고통을 겪는 그레첸이 이러한 길의 예이다.

이점은 악한 사람일지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의지의 현 상을 부정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64)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하든지 의지의 부정 상태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완전한 개체 성의 극복은 살려는 의지의 부정, 의지 자체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가 개체로서 살아가는 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쇼펜하우어가 강조하듯이, 의지로부터의 벗어남 은 일시적이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아직 부정되지 않은 의지가 여전히 새로운 고통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는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오히려 살려는 의지의 부정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항상 새 롭게 쟁취되어만 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의지 자신이고, 단지 객관성의 형식 속 에서만 또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므로, 신체가 살아있 는 한 살려는 의지 전체도 그 가능성에 따라 존재하고 항상 현실 속으로 들어가 서 새롭게 완전히 격정을 불태우려고 하기 때문이다.”65)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권에서 의지의 부정과 이러한 상 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금욕과 체념을 강조하는데, 금욕과 체념은 의지 의 부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체성의 부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의지의 부정을 유지하는 수단인 금욕과 체념이 모 두 고통을 필요로 한다는 점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의지의 부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고통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금욕과 체념은 “의지의 부정에 도달한 사람들이, 항상 다시 생겨나는 의지를 억누르기 위해, 모든 종류의 것을 단념시키고, 속죄하는 가혹한 생활방 식을 취하고 그들에게 불편한 것을 찾아 나서며, 아주 애를 써서 이러한 방식을 유지하려는 것”66)이기 때문이다.

64)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아주 악한 사람이라도 때로 는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이 단계에까지 정화되는 것을 본다. 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완전히 변해버린다.” WI, 533쪽 이하.

65) WI, 532쪽.

66) WI, 532쪽.

그러나 이처럼 삶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의지의 부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고통을 동반하는 금욕과 체념을 요구하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받아들 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의지의 부정이 근거율의 사용을 폐기시키는 순수인식주관(reine Erkenntnis des Subjekts)의 상태에 도달하여 개체화원리가 가져오는 고통에 찬 삶의 모습을 간파할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우리가 도달한 이러 한 순수인식주관의 상태에서는 고통의 의미가 이전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 이다.

그러나 이 점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부정은 근본적으로 개체로서의 인간에 게는 살려는 의지의 부정을 의미하며, 이러한 의지의 부정 자체는 쇼펜하우어철 학의 근본전제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 즉 모든 개체의 삶은 전적으 로 살려는 의지의 현상일 뿐이라는 주장과는 대립한다.

모든 개체를 지배하는 것이 살려는 의지이지만, 고통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살려는 의지 를 부정해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모순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순적인 주 장은 우리로 하여금 쇼펜하우어가 페시미즘에 부여하는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 게 한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 니라 그의 페시미즘이 지닌 특징과 역할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의하고 이 위에 서 그의 페시미즘이 야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고찰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은 인간과 세계의 현사실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이 맹목적인 의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는 점을 제시해준다.

그의 페시미즘은 전통철학과 달리 세계의 본질을 의지로 파악하여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과 세계의 합목적성을 비판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갈등적인 구조에 주목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객관화단계에 놓여 있 는 모든 개체들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인간이 경험하는 모 든 형태의 고통이 맹목적인 살려는 의지 때문에 생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 나 그의 페시미즘은 인간과 세계의 파국적인 관계를 부각시키는 종말론이나 비 관주의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페시미즘은 고통의 본질을 주목하 면서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쇼펜하우어의 페 시미즘이 단순히 낙관주의에 대한 반대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현사실적인 삶에 대한 신중한 성찰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 는 것이 자신의 페시미즘의 궁극적인 과제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이러한 고통 이 살려는 의지 때문에 생긴다는 점을 밝혀낸다.67)

여기에서 고통의 극복은 의지의 부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이 제시된다.

그러나 고통의 극복은 의지의 부 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쇼펜하우어의 페시미즘이 제시한 귀결은 개체의 존재 를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의지를 긍정해야 한다는 점과 대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지의 부정과 의지의 긍정의 문제에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태도가 쇼펜 하우어철학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의지의 부정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부정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지 속적인 의지의 부정을 위해서는 고통의 경험을 통해 의지의 부정 상태를 유지해 야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 또한 모순처럼 보인다.

물론 쇼펜하우어 자신도 인간을 “사제이면서 동시에 희생자”68)라고 부르면서,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 으면서 이러한 의지를 부정해야만 하는 인간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주목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살려는 의지를 적극적으 로 부정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의지의 부정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형태 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금욕과 체념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 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일종의 순환논증이라는 비판을 제기 할 수 있을 것이 다.

67)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고통은 금욕과 체념에 대한 요구이므로, 잠재적으로 성스럽게 하는 힘을 갖기 때문에, 여기에서 큰 불행, 깊은 고통은 이미 자체로 어떤 외경심을 불어넣는다는 점이 설명된다.” WI, 537쪽.

68) WI, 517쪽.

참고문헌

1. Arthur Schopenhauer, Der handschriftliche Nachlaß, Bd. 3, Munchen, 1985 2.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Frankfurt am Main, 1996 3.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I, Frankfurt am Main, 1996 4. Arthur Schopenhauer, Zurcher Ausgabe. Werk in zehn Banden, Bd. 6, Frankurt am Main, 1977 5. David Becker, Schopenhauer on the Meaning of Tragedy: Vision and Blindness, in Schopenhauer-Jahrbuch Bd. 91, Wurzburg, 2010 6. Cartwright, David E., Schopenhauer, New York, 2010 7. Eduard von Hartmann, Pessimismus. Zur Geschichte und Begrundung des Pessimismus, Leipzig, 1891 8. Frederick C. Beiser, Weltschmerz. Pessimism in German Philosophy, Oxford, 2018 9. Friedrich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Stuttgart, 1996 10.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Studienausgabe Bd. 8, Berlin/New York, 1988

[Abstract]

A New Consideration of Schopenhauer's pessimism

Lee, Seu-Kyou (Jeju Natl. Univ.)

Schopenhauer's metaphysics of will in “the world as a will and representation” reveals a pessimistic interpretation of humans and the world. Schopenhauer's pessimism, unlike Wolf-Leibniz optimism, presents us with the conflicting structure of human life and the world under the control of the blind will to live. In the late 19th century his pessimism, along with that of E. Hartmann, P Mainländer, and J. Bansen, became a tendency of philosophy to seriously raise questions about the value and meaning of life given to finite humans while opposing German speculative philosophy. Schopenhauer's pessimism dismantles the discussions on the nature of humans and the world presented in traditional philosophy and presents a realistic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the world by noting the finiteness of humans under the control of the will. According to Schopenhauer, as is well known, all individuals in the world are the visualization of will, that is, Objektivation des Willens, and in this respect, the existence of individuals is entirely governed by will. However, this will allows individuals to satisfy their willingness to live constantly, where individuals are placed in endless confrontation and conflict with each other. According to Schopenhauer, the self-divisive nature of existence of the will makes the lives of all individuals painful, in this respect he emphasizes the impermanence of all beings. Schopenhauer's pessimism highlights that overcoming suffering is the ultimate goal of philosophy, noting the problem of suffering that all humans experience. Schopenhauer's pessimism exposes the nature of humans and the world dominated by blind will, not only suggesting that our lives obsessed with the principle of individuation and the will to live are painful, but also that this experience of pain actually denies the will to live. Schopenhauer's pessimism, which focuses on the positive meaning and role of pain, confirms that the ultimate goal of his philosophy is, in the end, Verneinung des Willens. In this paper, we will look at the starting point of Schopenhauer's 270 이 서 규 pessimistic interpretation of the world and discuss how to criticize the worldview presented by traditional philosophy based on this. And above this, we will examine the nature and active meaning of pain presented by Schopenhauer's pessimism, and finally discuss the meaning and problems that Schopenhauer's denial of will seeks to reach.

Keywords: Schopenhauer, pessimism, objectification of will, pain, denial of will

2023년 11월 29일 접수 2023년 12월 13일 심사완료 2023년 12월 20일 게재 확정

동서철학연구 제110호, 20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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