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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성리학의 리 개념 비판과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를 중심으로-/김경수.경북대

초록

이 글은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의 철학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조선후기 유학의 독 창적 발전양상을 조망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18~19세기 조선의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을 개진함에 있어 각자의 독창적 사유방식에 근거하여 상이한 특징들을 드러 낸다. 이러한 상이한 특징들을 하나로 조망하게 하는 유용한 관점은 이들 철학에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성리학적 리 개념 비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들은 천인관계 속에서 인간관과 정치관이 도출되는 성리학의 철학구조를 계승하면 서도 그 최상위 존재자인 리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그렇기에 리 비판은 철학 전반에 걸 친 차별성을 초래한다. 이러한 차별성을 인간관과 정치관으로 분류하여 비교분석함으로 써 이들 철학의 독창적 전개양상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실학,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성리학, 리

1. 머리말

성리학에서 리(理)는 만물의 소이연이자 소당연으로서 만물의 본성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리는 다양한 사물의 특수성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서 인간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사회통합의 원리로 규정되는 것이다. 하지 만 조선후기의 내외적인 극심한 혼란은 일련의 학자들에게 형이상자인 리로 현실을 읽고 사회통합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 는 계기가 된다.1 당시 관념적 논쟁으로 치우친 이러한 조선 학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 고, 독창적 철학을 개진한 지식인으로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정약용(丁若 鏞, 1762~1836) 최한기(崔漢綺, 1803~1877)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8~19세기 라는 근접한 시대를 살았으며, 당시의 혼란한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것의 해결을 위해 독창적인 인간관과 경세론을 개진하였다. 이에 본고에서 는 이들 3인의 탈성리학적 성격을 비교분석하되, 특별히 리 개념 비판에 따 른 철학 전개의 과정과 특성에 연구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2

1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가 겪었던 18~19세기 조선의 혼란을 크게 ‘신분제의 동요’, ‘조정 의 통제력 상실과 민란의 발생’, 그리고 ‘서학의 유입’ 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양반의 족보를 사들여 신분을 탈바꿈한 농민과 몰락 양반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회 질서를 지탱해 오던 신분제가 근본적인 지점에서부터 요동치고 있었다. 또한 조정의 정 치는 붕당의 득세로 인해 사정(邪正)의 다툼이 날로 심해져 사회질서를 바로잡을 통제력 을 잃어 갔으며, 이에 따라 지방 관리들의 착취는 갈수록 심해져 생계를 위협받는 백성들 의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서학 유입에 관해서는 17세기 초부터 이미 본격화되어, 18세기 말까지 유입된 한역서학서는 400종이 넘는 막대한 수 량에 이르렀다[최소자(1981), 「17, 18世紀 漢譯西學書에 대한 硏究: 중국과 한국의 사대 부에게 미친 영향」, 『論叢』 39, 韓國文化硏究院, pp. 79-113]. 이에 따라 조선 지식인들의 혼란과 갈등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2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철학의 독창적 성격을 부각시킨 개별적 연구는 많은 수가 존재하 지만, 이들에 관한 비교연구는 거의 부재한 실정이다. 3인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은 한 편 이 있을 뿐이며[이인화(2020), 「18, 19세기 자연과학적 기철학의 문화공존 윤리: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의 리기론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97, 한국동서철학회], 홍대용과 최한기, 그리고 정약용과 최한기를 비교한 논문도 소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본고는 공통 지면에서 이들의 철학을 비교분석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철학의 독창적 특징 이면에는 존재론에 해당하는 천관(天觀)으로부터 인간관이 정당화되고, 다시 인간관으로부터 경세론 즉 정치관이 도출되는 성리학의 철학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의 천관은 성리학적 리 비판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 각자 상이한 천관을 수립함으로써 인간관과 정치관에서의 차별성을 초래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리 비판으로부터 전개된 이들 철학의 특징들을 비교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시도는 리 비 판의 특징과 그것에 정합성을 갖고 전개되는 철학의 특징들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성리학과의 거리두기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의 초점은 조선후기 유학의 다양하고 독창적인 전개양 상을 3인의 철학을 통해 조망하는 데 있으며, 여기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 을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2장에서는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 각각의 리 비판의 특 징을 살펴보고, 동시에 이를 통해 수립된 천관과 인간관의 차별적 성격을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각 인간관의 특징과 정합성을 이루는 정치철학 적 특징을 비교분석할 것이다. 또한 각 장에서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의 철 학을 서술하는 순서는 시대 순이라는 임의적 기준에 따라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2. 리 비판을 통해 본 인간 이해의 차별성

성리학의 인간관과 정치관은 존재론에 해당하는 이기론으로부터 정당 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즉 의리천·도덕천으로 규정되는 일리는 성즉리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본질을 도덕본성으로 규정하고, 이것은 다시 정치로 확 대되어 도덕정치를 통한 리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 러한 철학 구조는 홍대용 정약용 최한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리 비판을 통해 전개되는 이들 철학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철 학 구조에 대응시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 장에서 는 먼저 존재론에 해당하는 이들의 천관, 그리고 천관을 토대로 한 인간관 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2.1. 홍대용, 기의 생명원리에 입각한 인간관의 특징

담헌 홍대용의 리 비판의 초점은 리의 무형성에 근거한다. 성리학에서 리는 현상계 너머의 무형의 형이상자로 규정되며, 그렇기에 무형성은 오히 려 리의 주재성과 도덕적 순선함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담헌은 리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이기에 그것의 주재성과 순선함 역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리를 말하는 자는 형체는 없으나 반드시 리는 있다고 한다. 이미 형체가 없으니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형체가 없으니 있 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면서 리가 만물의 조화 와 다양성을 주재하는 근본이 된다고 한다면, 이미 행하는 바가 없는데 무 엇으로 리가 그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3 리가 본래 선하기에 악한 것은 기질에 구애된 것일 뿐 본체가 아니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리는 변화의 주재이면서도 어찌 기를 순선하게 하지 않고 탁하고 어그러진 기로 하여금 천하를 이렇게 어지럽게 하는가?4

3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凡言理者, 必曰無形而有理. 旣曰無形, 則有者是何 物. 旣曰有理, 則豈有無形而謂之有者乎. … 曰無聲無臭, 而爲造化之樞紐, 品彙之根叠, 則 旣無所作爲, 何以見其爲樞紐根叠耶.”

4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如言理本善, 而其惡也爲氣質所拘, 而非其本體, 此理 旣爲萬化之本矣, 何不使氣爲純善, 而生此駁濁乖戾之氣, 以亂天下乎.”

이처럼 리의 무형성은 그것의 주재성과 순선함을 부정하는 근거로 확 대된다. 담헌의 이러한 관점에는 당시 사회의 혼란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서는 무형이 아닌 유형의 존재로부터 철학이 정초되어야 한다는 의도가 담 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철학에는 형이하자인 유형의 기가 중심 이 되며, 리는 단순히 기의 조리이자 운동법칙으로 규정된다.5 이에 따라 도 덕적 선악 역시도 유형의 기로 말미암는 사후적인 사건으로 변모되는 것이 다.6 이처럼 리의 주재성과 순선함이 부정된 담헌 철학에서 인간이해는 성 리학과 차별성을 갖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순선한 리에 근거한 인간의 생 래적 도덕본성 개념이 정당화되지 않는다.7 기가 중심이 된 그의 존재론에 서는 만물의 생성에 관여하는 기의 생명성이 강조되며, 이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본질은 기로부터 받은 생명원리로 대체된다. 리의 주재가 탈각된 기의 유행에서 자연의 생명원리는 오직 기의 산물 로서 이해될 뿐, 당위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의예지의 성은 더 이 상 도덕가치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 사물들의 공통된 생명원리 로 확대된다. 비와 이슬이 내리고 싹이 트는 것은 측은지심이고, 서리와 눈이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수오지심이다.8

5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理無所主宰, 而隨氣之所爲而已.” 많은 연구자들이 담헌 철학에서 리는 기의 조리이자 운동법칙으로 규정된다고 평가하는데, 이에 대한 대 표적 논문으로는 다음의 두 편을 꼽을 수 있다. 김용헌(1995), 「서양과학에 대한 홍대용 의 이해와 그 철학적 기반」, 『철학』 43, 한국철학회, p. 20; 윤사순(2007), 「人間과 他物에 대한 洪大容의 脫程朱學的 哲學」, 『한국사상과 문화』 39, 한국사상문화학회, p. 204.

6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且所謂理者, 氣善則亦善, 氣惡則亦惡, 是理無所主 宰, 而隨氣之所爲而已.”

7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今學者, 開口便說性善, 所謂性者, 何以見其善乎. 見 孺子入井, 有惻隱之心, 則固可謂之本心. 若見玩好而利心生, 油然直遂, 不暇安排, 則何得謂 之非本心乎.”

8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1 「心性問」, “雨露旣零, 萌芽發生者, 惻隱之心也, 霜雪旣降, 枝葉 搖落者, 羞惡之心也.”

오륜(五倫)과 오사(五事)는 사람의 예의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울부짖고 먹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며, 떨기로 나서 가지로 무성해지는 것은 초목 의 예의이다.9 금수가 무리를 지어 사는 것과 초목이 떨기가 자라서 가지로 무성해지 는 생명현상을 담헌은 모두 인의예지로 지칭한다. 즉 생물의 종에 따라 인 의예지의 생명현상이 달라질 뿐, 그것이 모두 기의 유행에 따른 자연의 생 명원리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 사물은 그 본질이 모두 기에서 받은 생명원리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동등성을 가지며, 이것은 곧 천리에 근거한 도덕중심주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 다.10

9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4 「嬄山問答」, p. 18,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聀行⽲哺, 禽獸之禮 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10 리 개념을 통해 자연을 도덕화한 성리학적 특징을 담헌은 다시 자연의 생명원리로 회귀 시킨다는 점에서 도덕의 약화와 관련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담헌의 자 연에 대한 관점이 도덕의 약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 백민정(2008, 「湛軒 洪大容의 理氣論과 人性論에 관한 재검토」, 『퇴계학논집』 124, 퇴계학연구원, pp. 104-105)은 담헌이 자연의 필연성을 도덕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유가 전통의 윤리와 구분된다는 주장하며, 이경보(2006, 「존재론과 윤리론의 갈등 홍대용 사상의 철학적 기 초」, 『한국실학연구』 12, 한국실학학회, p. 177)는 담헌의 도덕은 자연으로 확대됨으로써 존재론적 영역으로 접근해 간다고 평가한다. 이와 달리 문석윤(2012, 「湛軒의 哲學史想」, 『담헌 홍대용 연구』, 사람의 무늬)은 자연의 생명현상을 도덕적으로 해석한 담헌의 관점 을 확장된 자연주의 혹은 확장된 도덕주의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동등성은 담헌은 만년의 저술인 『의산문답』에서 ‘균’(均) 사상으로 완성된다. 그의 균 사상은 인물무분(人物無分)의 ‘인물 균’(人物均)과, 화이무분(華夷無分)의 ‘화이균’(華夷均)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인 간과 동물의 귀천을 구별하고, 중화문명과 타 문명 간의 귀천을 구별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존재론적 동등성에 기반하여 인물과 화이를 인식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균’은 특정 대상을 기준으로 삼아 타물을 인식하 는 사고와 대립된다. 특정 대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이 타인 혹은 타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됨으로써 귀천과 우열의 구별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즉 인간을 기준으로 자연사물을 바라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은 천하며, 중화문 명을 기준으로 타 문명을 바라보면 귀천이 구별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담헌의 전기 사상과 말년의 저작인 『의산문답』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그가 귀천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근본원인을 순선한 리로 파악했음을 추측 할 수 있다. 순선한 리는 도덕본성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인물과 화이의 귀천을 구별시키는 근거를 도덕에 두게 한다. 이에 그는 리의 무형 성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서 기를 철학의 전면에 내세우고, 다시 기의 생명 원리를 만물의 공통된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균 사상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균은 도덕에 기준을 둔 이인시물(以人視物)과 이화시이(以 華視夷)의 관점이 아닌, 천의 관점에서 만물을 공평하게 바라보는 이천시물 (以天視物)의 관점으로 정의될 수 있다.11 담헌의 인간관에서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실용적 활용을 의미하 는 이용후생의 측면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균 사상과 관련된다.12

11 洪大容, 『湛軒書』 卷4 「嬄山問答」, p. 20, “實翁曰, … 今爾曷不以天視物, 而猶以人視物 也.”

12 김용헌(1995), pp. 32-33; 유봉학(1995),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과천: 일지사, p. 106; 허남진(1993), 「홍대용의 과학사상과 이기론」, 『아시아문화』 9,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 소, p. 128.

물론 성리학 역시 자연에 대한 탐구를 간과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 탐구에 해당 하는 격물궁리의 주된 대상은 당연지리이며, 그 목적 또한 구중리응만사(具 衆理應萬事)라는 마음의 전체대용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의 자연 탐구는 인간의 도덕 실천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이용후생의 측면이 이를 통해 정당화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반면에 인물균 사상은 기로 이루어진 자연 사물들의 다양한 질적 속성들과 원리를 자연 탐구의 대상으로 삼게 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실용적 활 용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화이균 또한 타국, 특히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 해 그것을 수용하고 활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용후생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도덕문명을 기준 삼아 화이를 엄 격하게 구별하였고, 이것은 청에 대한 무조건적 배척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담헌의 화이균 사상은 존재론적 동등성에 근거하여 청의 문물에 대한 객관 적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기제라는 점에서 그의 인간관의 차별적 특징을 구성한다.

2.2. 정약용, 천의 영명을 통해 본 인간관의 특징

다산 정약용의 리 비판의 초점은 인격성에 있다. 만물의 주재로서의 자 격은 지적 도덕성과 감정 등을 갖는 인격적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인 격성이 부재한 태극 혹은 리는 자격이 없다는 관점이다.13

13 丁若鏞, 『孟子要義』 卷2 「盡心 第七」, “理無愛憎, 理無喜怒, 空空漠漠, 無名無體, 而謂吾人 稟於此, 而受性, 亦難乎其爲道矣.” 다산의 리 비판 초점이 인격성에 있다고 평가한 연구 로는 김선희(2011, 「서학을 만난 조선 유학의 인간 이해: 홍대용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68, 동양철학연구회, pp. 61-62)와 장승구(2006, 「동서사상의 만남과 정 약용의 인간관: 작위의 주체로서의 인간」, 『다산학』 8, 다산학술문화재단, p. 387), 그리 고 정순우(2011, 「다산 교육론의 두 과녁: 聖人과 上帝」, 『다산학』 18, 다산학술문화재단, pp. 56-69)의 논문이 있다. 다산이 인격성을 주재자의 자격으로 문제시 삼은 것은 『천주 실의』를 비롯한 여러 한역서학서에서 꾸준히 논의되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다산의 천관 성립에 서학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다산 은 어디까지나 유학자의 관점에서 서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으며, 이것은 그의 상제 천 과 토미즘의 천주와의 차이에서 잘 나타난다.

이처럼 그는 인 격성을 문제 삼아 주재자의 자격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성 리학의 천리는 인격성이 강조된 상제 천 개념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상제 천의 인격성을 구체화한 개념은 ‘영명’(靈明)이다. 천의 영명이란 인간의 행위와 마음을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감시하여 추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자격을 확보한다.14 영명함이 없는 존재는 주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집안의 가장이 어 둡고 우매하여 지혜롭지 못하면 집안의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않고, 한 고 을의 어른이 어둡고 우매하여 지혜롭지 못하면 고을의 모든 일이 다스려지 지 않는다. 하물며 텅 비고 막막한 태허의 한 리를 가지고 천지만물을 주재 하는 근본으로 삼고자 하니, 천지간의 일이 과연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15

14 영명을 ‘지적 도덕성’으로 풀이한 것은 김선희(2009, 「영명으로서의 인간: 『성학추술』을 통해 본 정약용의 인간론」, 『동양철학연구』 60, 동양철학연구회)의 표현을 차용한 것이 다. 또한 이 논문에서 김선희는 서학과의 비교를 통해 다산의 영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하고 있다.

15 丁若鏞, 『孟子要義』 卷2 「盡心 第七」, “凡天下無靈之物, 不能爲主宰. 故一家之長, 昏愚不 慧, 則家中萬事不理, 一縣之長, 昏愚不慧, 則縣中萬事不理. 況以空蕩蕩之太虛一理, 爲天地 萬物主宰根本, 天地間事, 其有濟乎.”

이처럼 인격성이 강조된 다산의 천관은 성리학과 차별성을 가지며, 이 차이는 인간에게 도덕을 정당화하는 방식의 차이로 확대된다. 그의 철학 또 한 천인관계로부터 도덕적 인간관이 도출된다는 점에서는 성리학과 차이 가 없다. 다만 천 개념의 차별성으로 인해 도덕적 인간관의 구조와 성격에 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리학의 천리는 의리천·도덕천으로서 인간은 천이 품부한 도덕본성 을 본질로서 갖게 된다. 이처럼 성리학에서 도덕 담론은 천에 의해 정당화 된다는 점에서 단순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도덕본성의 발현과 실천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리기불상잡·불상리의 존재론적 원리는 인간을 항상 기질이 라는 특수성 속에서 도덕 실천의 제한을 받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성·정이라는 도덕 실천의 경로 속에서 이 논의는 더욱 다층적이 고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된다. 도덕 실천에 관한 이러한 담론의 형태를 다산은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특별히 조선 성리학계의 심성론 논쟁은 도덕 실천이 아닌 이론적 특 징에 초점을 두게 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16 그의 이러한 관 점을 고려하면, 천리를 영명한 상제 천으로 대체한 데에는 도덕 실천에 중 심을 둔 인간관을 정당화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의 영명은 도덕적 지각과 판단이라는 인격적 특징을 지칭하는 것으 로서, 그 자체로 도덕을 함의하지 않는 데서 천리 개념과 차별화된다. 또한 천의 영명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질 또한 영명으로서, 다산은 이것을 무형의 본체이자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명한 마음’이라고 지칭한다.17 천의 영명과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의 영명은 도덕적 지각과 판단을 수 행하는 인격적 주체이며, 그 안에 도덕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도덕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각 사태에 대한 도덕적 지각과 판단을 수 행하는 마음의 작용일 뿐, 도덕본성과 기질에 관한 논의가 요구되지 않는 다. 물론 인간 본질의 실현이 도덕 실천에 있다는 점은 성리학과 다르지 않 다. 하지만 천에게 부여받은 인간 마음의 영명은 도덕본성과 기질에 관한 담론 없이 도덕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차별화되 는 것이다. 다산에게도 성 개념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본체로서 성이 아니라, 마음의 영명에 부속된 호선오악의 도덕적 기호이자 욕구일 뿐이 다.18

16 丁若鏞, 『茶山詩文集』 卷19 「答李汝弘載毅」, “理氣之說, 可東可西, 可白可黑, 左牽則左斜, 右䭲則右斜, 畢世相爭, 傳之子孫, 亦無究竟. … 恐其弊終, 歸於有體無用.”

17 丁若鏞, 『中庸講義補』 「天命之謂性節」, “人之受天, 只此靈明.”; 丁若鏞, 『大學講義』, 「傳七 章」. “無形之心, 是吾本體. … 是無形之體, 是不屬血肉者. 是能包括萬狀, 妙悟萬理, 能愛能 惡者. 是我生之初, 天之所以賦於我者也.”

18 丁若鏞, 『中庸自箴』 卷1, “蓋人之胚胎旣成, 天則賦之以靈明無形之體. 而其爲物也, 樂善而 惡惡, 好德而恥惡, 斯之謂性也, 斯之謂性善也.”

즉 마음의 영명은 도덕적 판단 작용을 시행하며, 성은 그 판단의 결과 에 대한 도덕적 욕구를 느끼게 함으로써 도덕 실천은 추동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 철학에서 천은 도덕의 내원이나 직접적 근거가 아니다. 천 은 인간에게 도덕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능만을 부여한다. 그러 므로 도덕 실천은 각 사람의 선택과 결단에 달린 문제이며, 이것을 설명하 는 용어가 그의 ‘자주지권’이다. 자주지권이란 각자가 도덕 선택의 주체로 서, 선택의 결과로 옮겨진 각 행위가 선 또는 악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한 다.19 즉 영명한 마음과 기호지성은 도덕적 판단과 욕구를 통해 행위의 선 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행위로 옮기는 선택과 결단은 각인의 자 주지권에 맡겨지는 것이다.20 이처럼 마음의 영명과 기호지성, 그리고 자주지권을 통해 도덕의 실천 을 논한 다산의 인간관은 도덕의 본체 확립과 수양에 중점을 둔 성리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가 덕 개념에 행을 추가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21 즉 덕 이란 마음을 실천으로 옳긴 이후에 비로소 성립하는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 장이다.22

19 丁若鏞, 『孟子要義』 卷二 「文公 第三」, “若以其自主之權能而言之, 則其勢可以爲善, 亦 可以爲惡.”

20 이와 관련하여 김선희(2009, p. 103)는 자주지권을 주장하는 다산의 목표가 선의 실현과 악의 극복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음을 확인하려는 데 있으며, 이것은 리가 내면화되 어 본성이 선하다는 선언만으로 현실의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 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21 丁若鏞, 『茶山詩文集』 卷10 「原德」, “因性與行, 有德之名, 徒性不能爲德也.”

22 丁若鏞, 『大學公議』 卷1 「在明明德」, “心本無德, 惟有直性, 能行吾之直心者, 斯謂之德. 德 之爲字, 行直心. 行善而後, 德之名立焉. 不行之前, 身豈有明德乎.”

그러므로 그의 인간관에는 도덕의 내원인 본성이 강조되는 향내 적 성격이 아니라, 다양한 외부 사태를 향한 합리적 판단과 실천이 중요시 되는 향외적 성격이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2.3. 최한기, 유형의 기와 추측의 인간관

혜강 최한기의 리 개념 비판의 초점은 리의 무형성에 있다는 점에서 담 헌과 유사성을 갖는다. 하지만 담헌의 경우는 리의 주재성과 순선함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혜강은 경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천 개념을 수 립하고 여기서부터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기 위한 목적에서 리의 무형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성리학에서 리는 만물의 소이연이자 소당연이며, 이것은 리가 지식의 근거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표준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혜강은 지식과 인사(人事)의 표준인 리가 무형의 존재라는 점에서 혼란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각자가 리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옮음을 주장할지라도, 무형의 리에서는 그 시비를 분별할 경험적·실증적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23 이에 혜강은 무형의 리가 아닌 경험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유형의 존재 인 기를 곧 천으로 규정한다.24 유형의 기 위에 철학을 정초시켜야 리의 무 형성으로 인한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리하여 그의 기일원 론 철학 체계에서 리는 그 존재성 자체가 부인된다.25 이처럼 그의 기일원론은 인사의 표준을 유형의 존재에 두기 위한 것이 며, 이를 위해 혜강은 천에 해당하는 유형의 기가 형질을 갖는다는 점을 강 조한다.26

23 崔漢綺, 『人政』 卷11 「用人門 四」 ‘事物準的’, “至曰天理曰公道曰善曰吉, 皆以運化爲準的, 明白有據. 不然各持所見, 所云天理也公道也善也吉也, 元無定準. 指東則東, 指西則西.”

24 崔漢綺, 『氣學』 卷1-33, “還天下本無之無形, 擧天下本有之有形, 措天下差誤之敎文 明天下 氣化之學問. 天人之道得正, 政治之術得安.”

25 崔漢綺, 『氣學』 卷1-17, “運化之氣卽有形之神, 有形之理也. 神理二字, 有此明證之歸屬, 可 以息千古之紛擾, 罷後世之疑惑.”

26 혜강은 한역서학서를 통해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몽기차(蒙氣差, refraction)를 접 하고, 우주가 무언가로(기체)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처럼 기가 형질을 갖는 유형의 존재라는 그의 확신은 몽기차라는 서양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유형질’(有形質)이란 기가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유형의 존재 라는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혜강 이전의 대표적 기철학자 인 장재와 서경덕의 일기(一氣) 개념인 태허기(太虛氣)와 선천기(先天氣)에는 형질이 있다는 점이 언급되지 않았다.

혜강이 이것을 부연함은 일기에 형질이 있어야만 그것에 대한 경험적· 실증적 지식의 획득이 정당화되며, 이를 통해 논쟁의 시비를 분별할 수 있 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형질을 지닌 유형의 기 개념은 무형의 리가 초래 한 논쟁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혜강의 운화기(運化氣) 개념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운화기란 ‘활동운화’(活動運化)라는 4가지 양태로 끊임없이 운동과 변화하는 본질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다.27 그러므로 활동운화는 유형의 기가 갖는 본 질적 속성이며, 이 점에서 일기에 해당하는 천의 본질은 경험적·실증적으 로 규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성리학의 리 개념을 비판 및 부정함으로써 수립된 그의 천관은 다시 인 간관으로 확대된다. 먼저 유형성이라는 기의 외적 속성은 기로 구성된 인간 의 외적 형체를 구성하며, 활동운화라는 기의 본질적 속성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 결과 생래적 도덕본성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 을 규정하는 기의 활동운화는 도덕가치가 배제된 가치중립적 운동성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활동운화라는 기의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는 인간이라는 형질 속에서 마음의 끊임없는 인식작용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도덕본성 이 아니라 인식작용으로 정의된다. 혜강은 이러한 마음의 인식작용을 ‘추 측’(推測)으로 언명한다.28 추측은 지각작용을 의미하는 ‘추’와 판단작용을 의미하는 ‘측’의 결합어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지각하고 판단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29

27 崔漢綺, 『氣學』 卷2-77, “活動運化, 乃氣之性.”; 崔漢綺, 『氣學』 권2-84, “故以活動運化之 性, 分排四端, 始可以形言. …… 則又釋之, 以活生起也, 動振作也, 運周旋也, 化變通也.”

28 崔漢綺, 『推測錄』 卷3 「仁義禮知」, “人物之生, 各具形質, 而權度於這間者, 惟有推測之條 理.”

29 崔漢綺, 『推測錄』 卷6 「推物測事」, “眼耳鼻舌身, 皆有所推, 而測在乎心. 有推之測皆實, 無 推之測皆虛. 或測其所不可測, 或測人之理外所測, ⨕是無所推也.”

추측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지식이다. 유형의 일기 개념은 모든 사물을 감각기관이 지각할 수 있는 유형의 대상으로 규정 한다. 그렇기에 인식주체인 추측과 인식대상인 유형의 사물 간의 인식론적 교감을 통해 습득되는 지식은 경험적·실증적 지식이 되는 것이다. 도덕가치 또한 추측의 산물일 뿐이다. 선악의 구분과 유교의 핵심 가치 인 효제자 역시도 추측을 통해 얻게 되는 도덕적 지식이라는 것이 그의 주 장이다.30

30 崔漢綺, 『推測錄』 卷4 「克己」, “善與不善, 皆出於推測.”; 「神氣通」 권1, 「發用於外」 참고.

그러므로 그의 인간관에서는 도덕본성이 내재한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추측 대상인 외부 세계가 중요시된다. 외부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추측 활동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한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 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3. 인간 이해를 통해 본 경세관의 특징

담헌, 다산, 혜강이 처한 18~19세기의 조선은 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이들 철학의 귀결점을 정치철학 에 두게 하였으며, 그 방향 또한 수성(守城)이 아닌 경장(更張)에 있다는 특 징을 갖는다. 이에 따라 3인의 정치철학은 그 내용이 매우 방대하며, 이 장 에서 모든 내용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 장에 서는 특별히 앞에서 살펴본 3인의 인간관과 논리적 정합성이 두드러지는 경세관의 대표적 특징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3.1. 홍대용, 균 사상과 정치철학의 상관성

담헌의 리 비판은 성리학의 도덕중심주의의 약화로 연결되며, 균 사상 은 이것을 체계화함으로써 인간관의 특성을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의 인간관에 토대를 둔 정치철학의 핵심내용 또한 균과 관련된다. 담헌은 학문의 목표를 ‘징심구세’(澄心救世)로 명시하며 당시 조선의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 고자 하였는데, 징심구세의 요체가 균에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31 담헌은 먼저 그의 역사관을 통해 균이 치도(治道)의 요체라는 점을 정 당화하고자 한다. 『의산문답』에서 서술된 그의 역사관에서는 당시의 극심 한 혼란을 야기한 근본 원인이 생명의 근원인 기로부터 인간이 단절된 데 있다고 진단한다. 기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만물의 존재론적 동등성 을 보장하는 기제다. 하지만 인간은 중고시대 이래로 기의 생명원리로부터 단절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사회의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문명의 발달 에 따라 혼란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설명이다.32 기와 단절된 결과로 인간에게 나타난 현상은 긍심(矜心)의 발현이다. 그 리고 긍심의 발현이 인간사회의 혼란을 야기한 실제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도(大道)를 해치는 것은 긍심보다 큰 것이 없다. 인물의 귀천을 구별하 는 마음은 긍심에 근본 한다.33

31 洪大容, 『湛軒書』 外集卷1 「與嚴九峰書」, “要歸於澄心而救世, 則勿論儒釋, 俱不害爲賢豪 君子, 惟不至於絶倫逃空, 則是亦聖人之徒也.”

32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嬄山問答」, p. 34, “降自中古, 地氣始衰, 人物生成, 轉就駁濁, 男女相聚, 乃生情欲, 感精結胎, 始有形化. 自有形化, 人物繁衍, 地氣益泄, 而氣化絶矣. 氣 化絶則人物之生, 專珟精血, 滓穢漸長, 淸明漸退. 此天地之否運, 禍亂之權輿也.”

33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嬄山問答」, p. 18, “夫大道之害, 莫甚於矜心. 人之所以貴人而 賤物, 矜心之本也.”

이처럼 긍심은 인물의 귀천을 구별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인물무분 (人物無分)의 균과 대립된다. 그렇기에 긍심이 대도를 해치는 것이라면, 이와 대립되는 균은 대도를 세우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긍심은 일종의 자기중심 적 사고로서, 타인과의 구별을 초래한다. 반면에 이천시물의 균은 존재론적 동등성에서 기반한 것으로서 귀천의 구별을 지양하는 사고다. 그렇기에 긍심으로 인해 훼손된 사회질서는 균 사상에 기반한 제도개혁론에 의해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균의 제도개혁론은 담헌의 저술인 『임하경륜』에서 나타나며, 특별히 사민관(四民觀)과 교육제도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34 먼저 담헌의 사민 관은 직업에 따른 사농공상의 분류를 주장한 것으로, 신분제에 기초한 당시 의 사민관과 구분된다.35 이처럼 그가 직업에 기초한 사민관을 주장한 데에 는 균의 정치사회적 실천이 자리하고 있다. 귀천의 구별이 내재하는 신분제 가 아니라 각인의 자질에 따른 직업의 개념으로 사민이 분류된다면, 존재론 적 동등성이 사회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담헌은 이러한 사민관에서의 균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만민개로’(萬 民皆勞)를 주장한다. 사(士)에 속한 양반 계급의 무위도식을 금지시키고, 신 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각기 적합한 직업을 주어 만민개로를 실천하 자는 것이다.36 백성 모두가 직업을 갖는다면, 직업에 기초한 사민관이 확 고히 됨으로써 균의 사회적 실현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교육제도 개혁안 또한 균의 사회적 실천을 준거로 삼는다. 그 개혁안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8세 이상의 모든 아이들이 동등한 교육 기 회를 받을 수 있도록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37

34 『의산문답』이 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담고 있다면, 『임하경륜』은 균에 따른 제도개혁 론을 제시한 다는 점에서 서로 표리를 이룬다.

35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林下經綸」, “凡人品有高下, 材有長短, 因其高下, 而舍短而用 長, 則天下無全棄之才. 面中之敎, 其志高, 而才多者, 升之於上, 而用於朝. 其質鈍而庸鄙者, 歸之於下, 而用於野, 其巧思而敏手者, 歸之於工, 其通利而好貨者, 歸之於賈, 問其好謀而有 勇者, 歸之於武.”

36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林下經綸」, “歸之於武. 烀者以卜, 宮者以꫰, 以至於ㄤ聾跛鸭, 莫不各有所事. 其遊衣遊食不事行業者, 君長罰之, 鄕黨棄之.”

37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林下經綸」, “內而王都九部, 外而自道以至於面, 皆設學校, 各 置敎官. 面各有齋, 齋必有長, 取年高德ⷪ可爲師表者. 面中子弟八歲以上, 咸聚而敎之, 申之 以孝悌忠信之道, 習之以射御書數之藝.”

둘째, 이들 가운 데 학업과 행실이 우수한 자들을 상위 교육기관으로 보내어 교육하는 방식 을 취하되, 마지막에는 관직에 천거하는 것이다.38

38 洪大容, 『湛軒書』 內集卷四 「林下經綸」, “其有茂才卓行, 可以需時適用者, 貢之於司. 司之 敎官, 聚而敎之, 擧其最而以次升之, 至于大學. 大學之敎, 司徒掌之, 聽其言而觀其行, 考其 講而試其才, 每於歲首, 擧其賢者能者於朝. 授之以職而責其任, 才高而官卑者, 以次而陞之, 其不能者斥之.”

먼저 처음의 개혁안은 사민 모두에게 교육에 있어 동등한 기회를 제공 한다는 차원에서 균의 실천과 관련된다. 두 번째 개혁안에서는 교육제도가 인재등용방식과 연결되고 있는데, 교육의 동등한 기회가 각인의 자질에 따 라 관직으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균의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당시 과거제는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귀천의 우열을 심 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에 인재등용방식을 천거제로 일원화 하고, 교육제도와 연계시키는 방식을 고안함으로써 과거제의 폐단을 바로 잡고 균의 사회적 실천을 확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담헌의 정치철학은 균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대도를 세운다는 점에서 균에 입각한 인간관의 특징과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 리에 대한 비판으로 수립된 균 사상이 인간 이해와 사회경장의 핵심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담헌이 기의 생명원리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질을 인 의예지의 도덕가치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 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균 관념에서는 도덕중심주의가 약화되고 있으며, 균의 실천이 정치철학의 핵심내용이라는 점에서 성리학적 담론과 일정 부분 차별성을 갖는다.

3.2. 정약용, 덕치와 행왕의 군주론

다산 철학은 도덕을 통한 인륜의 실현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 에서 그의 정치관을 덕치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다산에게서는 도덕의 정당화가 리가 아닌 영명한 상제 천에 근원하고 있으며, 이것은 덕치에 있어서의 차별성으로 확대된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영명한 천으로부터 도출된 그의 인간관은 행(行)을 수반한 덕 개념과 정합성을 갖는다. 그렇기 에 다산이 덕치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가 새롭게 규정한 덕 개념으로 인 해 덕치의 실행방식과 성격은 성리학과 차별화된다. 그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정’(政) 개념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원정」에서이다. 이 글에서 다산은 공자의 “政者正也”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도, 치인의 정치행위로만 ‘정’(正)의 내용을 설명한다. 물론 다산의 대학관 (大學觀)을 살펴보면 군주의 자수(自修)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 이다. 하지만 군주의 수기에 초점을 둔 성리학의 특징과 비교하면 치인의 정치행위에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처럼 치인의 정치행위에 중점을 둔 다산 덕치의 특징을 한마디로 ‘행 왕(行王)의 도(道)’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39 행이 결합된 그의 덕 개 념이 덕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치인의 정치적 실천행위가 강조되는 행왕 의 성격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수기치인의 정치적 구조를 밝 힌 『대학』의 해석서인 다산의 『대학공의』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자찬묘지명」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대학』의 삼강령을 효제자로 해석한 다는 점은 덕치를 치도로 삼고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효제자의 덕목을 정 교(政敎)의 수단을 통해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 강조되는 군주론은 어디까지나 행왕이다. 『대학공의』에서 다산은 효제자의 인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恕 者 仁之道也)를 제시한다.40

39 다산은 「孟子策」에서 왕도정치를 ‘행왕의 도’로서 정의하고 있다.

40 그는 ‘서’(恕)라는 하나의 글자가 모든 경서와 예법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강조하는데, 이런 점에서 서는 『대학공의』(大學公議)뿐 아니라 그의 저술 전체를 관통하 는 인륜의 실현 방법이라 할 수 있다(丁若鏞, 『論語古今注』 卷7 「衛靈公 第十五」, “一者, 恕也. 五典十倫之敎, 經禮三白, 曲禮三千, 其所以行之者, 恕也.”).

다산의 ‘서’ 개념은 곧 추서(推恕)로서, 추서가 군주의 자수에 속한 것임을 명시하면서도, 타인에게 선을 베푸는 실천 원리 라는 점을 강조한다.41 추서를 통한 군주의 정치적 실천 행위는 구체적으 로 용인(用人)과 이재(理財), 그리고 태학의 삼례다.42 먼저 용인은 군주가 사 (士)의 욕망이 귀함에 있음을 추서하여 인재등용의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며, 이재는 민의 욕망이 부유함에 있음을 추서하여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43 다음으로 태학의 삼례(養老·序齒·恤孤)는 민의 욕망이 효제자 에 있음을 추서하여 주자(⫠子)가 태학에서 삼례의 모범을 친히 보이는 것 이다.44 용인과 이재는 효제자의 실현에 전제가 되는 양민(良民)의 정치행위 이며, 태학의 삼례는 민의 효제자를 흥기시키는 교민(敎民)행위다. 그러므로 군주의 정교는 추서라는 덕에 속한 개념에 의거할지라도, 추서가 실천을 수 반한다는 점에서 행왕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처럼 덕치에 있어 행왕이 강조되는 다산 정치철학의 특징은 ‘유위이 치’(有爲而治)로 요약될 수 있다. 유위이치는 주희가 군주의 수기를 강조하 면서 군덕이 성대하면 작위하지 않고도 저절로 백성이 교화된다는 의미로 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말한 것과 구분된다.45 다산은 『논어』의 동일한 구절을 무위이치가 아닌 유위이치로 해석하며, 군주의 무위를 주장하는 것 이 국가를 부패하게 하는 이유라고 강하게 비판한다.46

41 丁若鏞, 『大學公議』 卷3-4, ‘鏞案’, “推恕者, 主於自修, 所以行己之善也.” 안외순(2010), 「茶山 丁若鏞의 관용(tolerance) 관념: 恕 개념을 중심으로」, 『동방학』 19, 한서대학교 동 양고전연구소, pp. 251-256은 충(忠)에 중점을 둔 소극적 서를 말하는 주희와 달리, 다산 은 충서를 ‘진실된 서’로 해석함으로써 서의 적극성과 실천성을 강조하였다고 평가한다.

42 丁若鏞, 『大學公議』 卷3-8 ‘議曰’, “國者,其大政有二,一曰用人,二曰理財.”

43 丁若鏞, 『大學公議』 卷3-8 ‘議曰’, “大凡人生斯世, 其大欲有二, 一曰貴, 二曰富. 在上者, 其 所欲在貴, 在下者, 其所欲在富.”

44) 丁若鏞, 『大學公議』 卷3-6 ‘鏞案’, “先聖先王, 處胄子於太學, 侷胄子以老老長長之禮, 示萬 民以老老長長之法, 使嗣世之爲人君者, 身先孝弟, 以率天下, 使當世之爲臣民者, 興於孝弟, 咸歸大化. 其大經大法, 亦皆湮晦而不章, 其失不小.”

45) 丁若鏞, 『論語集註』 「衛靈公」 15장의 注, “無爲而治者, 聖人德盛而民化, 不待其有所作爲 也.”

46 다산은 堯舜이야말로 事功에 분발한 대표적 정치지도자로서, 無爲而治라는 공자의 언명은 단순히 순임금이 성실한 신하를 22명이나 두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丁若鏞, 『尙書知遠錄』 卷2 「下丁十 有能奮庸」, “余觀奮發事功, 莫如堯舜; 「邦禮艸 本引」: 孔子謂舜無爲者, 謂舜得賢聖至二十二人, 將又何爲, 其言洋溢抑揚. 有足以得風神於 言外者. 今人專執此一言, 謂舜拱默端坐, 一指不動, 而天下油油然化之. 乃堯典蔯陶謨, 皆浩 然忘之, 豈不鬱哉.”).

유위의 정치행위가 강조되는 행왕이 덕치의 정치적 주체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의 덕 개념은 행왕과 정합성을 가지며 치인의 정치행위가 강조되는 정치철학적 특징을 구성하는데,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강력한 왕 권과도 상관성을 갖는다.47 다산이 강력한 왕권을 주장한 것은 행왕의 도가 실행된다 할지라도 붕당의 득세와 이로 인한 관리들의 중간착취로 인해 그 정책이 민에게 도달할 수 없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된다.48 이에 그 는 제도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켜 군민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원인을 원 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제도개혁론을 담은 『경세유표』와 제도개혁의 경학적 근거로 삼은 『상 서고훈』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고적제(考績制)와 토지제도, 그리고 황극(皇 極) 개념을 논한 것도 이와 같은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49

47 ‘신아구방’(新我舊邦)을 기치로 세운 다산의 제도개혁론은 『경세유표』와 『상서고훈』의 「홍범」편 등에서 나타나듯이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48 중간계급의 착취를 향한 다산의 비판은 『목민심서』와 『상서고훈』 등의 저술 곳곳에 나타 나며, 붕당의 득세로 인해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중간계급의 착취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 한다(丁若鏞, 『尙書古訓』 卷4 「洪範」, “日月歲時旣易者, 小陵大, 下僭上, 庶官陵大臣, 大臣 僭乘輿也. 如是則權柄下移, 欺蔽比周, 治道昏亂, 賢俊隱微, 而家亦以亡矣.”).

49 『상서고훈』의 「홍범」편은 다산이 왕권 강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경학적 근거로서 활용한 책인데, 여기서 그는 관리의 등용과 경제권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권력이 모두 皇極인 군주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이러한 권력이 군주의 소유인 것은 중간계 급의 개입 없이 군주가 직접적으로 백성과 관계할 수 있게 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丁若鏞, 『尙書古訓』 卷4 「洪範」, “斂時五福者, 人主總攬權綱, 握之在手中也. … 凡此威福之 權, 皇則攬之, 皇則布之, 斂時五福, 用敷錫厥庶民也. 後世人私其田, 皇無寸土, 則皇無以錫 民富矣.”).

그러므로 다산의 왕권 강화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왕을 통해 덕치의 실효성을 높 이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3. 최한기, 사회통합의 원리로서 소통

혜강은 리의 무형성에 비판의 초점을 두고 유형의 기 위에 철학을 정 초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측기능으로 규정한다. 그의 기일원론 체계 내 에서 인식주체인 추측과 인식대상인 인정(人情)과 물리(物理)는 모두가 기의 산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과 사태들은 모두 추측의 대상이며, 추측을 통해 획득한 지식은 사회통합의 원리로 활용 됨으로써 일기(一氣)에 부합하는 사회가 건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추측을 통해 검증 가능한 사회통합의 원리를 수립하고자 한 혜 강 정치철학의 특징은 성리학과 구분된다. 성리학에서 사회통합의 원리는 일리에 있다. 리일분수의 존재론은 다양한 사물의 분수리를 통합하는 근원 이 일리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 과 사태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원리 혹은 표준은 일리로 규정되는 것이다. 사회통합 원리에서의 이러한 차별성은 그것을 수립하는 추측의 학문방 법론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혜강은 정치에 있어 추측의 방법론을 특별히 ‘소통’[氣通] 개념으로 설명하곤 한다.50 소통은 기와 기의 상통을 의미하는 데 인식주체와 대상이 모두 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추측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51

50 혜강 철학의 핵심원리를 기와 기의 소통으로서 규정한 금장태의 연구 이후로 소통을 주 제로 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금장태, 1980, 「『人政』 解題: 崔漢綺의 『人 政』과 人道哲學」,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6, p. 134). 이에 관한 대표적 연구를 나열 하면 다음과 같다. 구자익(2019), 「承順의 疏通行爲的 意味」, 『철학논총』 59(1), 새한철학 회; 이영찬(2010), 「최한기 기학의 소통적 인식론」, 『한국학논집』 40, 계명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김진웅(2013), 「최한기의 氣 소통 사상 연구」, 『커뮤니케이션학연구』 21(2), 한국 커뮤니케이션학회; 柳生眞(2011), 「최한기의 윤리사상: 기통적 윤리관을 중심으로」, 『윤 리교육연구』 26, 한국윤리교육학회.

51 혜강은 추측을 ‘기의 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崔漢綺, 『神氣通』 卷1 「體通」 ‘通之所止及 形質通推測通’, “天之生物, 各具形質, 色通于目, 聲通于耳, 味臭通于口鼻, 是乃形質之通 也. 從其形質之通, 而推測之通生焉.”).

이러한 소통 개념은 인식주체와 대상 간의 인식론적 소통을 의미하는 개인적 차원과, 개인들 간의 지식과 정보의 소통을 의미하는 사회적 차원으로 분류된다.52 특별히 정치철학에서 그가 강조하는 소통은 후자에 있으며, 후자를 통해 사회통합의 원리가 비로소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유가 군주정을 옹호한 그에게 사회통합을 시행하는 정치적 주체는 군 주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관료들로 규정된다. 하지만 소수의 정치지도자가 국가운영에 필요한 제반사항 모두를 추측하여 각각에 대한 지식들을 수립 하는 것은 추측의 양에 있어 현실적인 한계가 존재한다.53 더욱이 그의 정 치철학 저술인 『인정』에서 ‘민원(民願)에 대한 추측’을 정치의 필수적 추측 대상으로 강조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 현실적 한계는 더욱 자명해진다.54 이러한 한계를 해결할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사회적 차원의 소통 이다. 보고 듣고 경험함으로써 익히고 얻은 것에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다. 남 이 통(추측)한 것을 나는 통하지 못한 것도 있고, 내가 통한 것을 남이 통하 지 못한 것도 있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남이 통한 것을 거둬 모아서 나의 통하지 못한 것을 통하게 하고, 내가 통한 것을 널리 알려서 남이 통하지 못하는 것을 통하게 해야 한다.55

52 서로 간의 지식과 정보 교류를 의미하는 사회적 소통도 타인의 지식과 정보를 추측 대상 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 방법과 원리는 개인적 차원의 소통, 즉 추측과 동일하다.

53 국가운영에 요구되는 추측 지식의 양은 방대할 수밖에 없다. 혜강은 이것을 17가지 조 목으로 분류하는데, 그 다양성과 각각에 속한 하위범주들을 고려하면 소수의 인원이 추 측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崔漢綺, 『神氣通』 卷1 「體通」 ‘十七條可通’ 참고.

54 崔漢綺, 『人政』 卷17 「選人門 四」 ‘言事之選卽選人’, “國家大政, 當上順運化, 下協民願, 乃 可治平.”

55 崔漢綺, 『神氣通』 卷1 「體通」 ‘通人我之通’, “惟其見聞閱歷, 所習所得有萬不等, 人之所通, 或我不能通, 我之所通, 人或不能通. 是當收聚人之所通, 以通我之所不通, 敷告我之所通, 以 通人之所不通.”

추측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공통된 기능이기에 각 관료들은 자신의 추측 기능을 통해 맡은바 각 분야의 사물과 사태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획득한 지식은 서로 간의 소통을 통해 합쳐지고, 최종적으로 군주에 이르러서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수렴되는 것이다.56 이 처럼 추측 지식의 교류를 의미하는 사회적 차원의 소통은 방대한 양의 지 식들을 하나로 모으는 방안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이처럼 추측의 방법론을 사회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사회통합의 원리를 수립하고자 한 혜강 정치철학의 특징을 성리학과 비교하면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 사회통합을 위한 각종 정책의 수립이 현실의 사무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성리학과 차이를 갖는다. 성리학 에서는 당면한 사태를 해석하고 처사하는 기준이 ‘리’라는 점에서 현실과 유리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최한기에 있어서는 사태에 대한 해석이 사태 에 대한 추측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에 대한 처사 역시도 추측으로 획득 한 지식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각 사태마다 그에 따른 추측 지식이 수립되 며, 이에 따라 정책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의 소통이 수반되는 경우도 추측의 원리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둘째, 정책 결정에 있어 민원을 중요한 사회적 소통의 대상으로 삼는다 는 차이가 있다. 성리학에서는 리에 근거한 도덕성에 공적 성격이 부여되기 에, 정치에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군덕이지 민원이 아니다. 반면 에 추측의 방법론은 민원에 대한 추측이 전제가 될 때만이 백성을 위한 정 치가 성립할 수 있다. 정책의 수혜자는 백성이기에, 정책 결정에 있어 민원 이 추측의 대상이자 사회적 소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57

56 崔漢綺, 『人政』 卷1 「測人門 一」 ‘一統測’, “萬民, 皆有測人之諸具. 各有可測之事物, 有千 萬人, 則千萬人皆有測, 有億兆民, 則億兆民皆有測, 甲之所測, 乙不能測, 丙之所難測, 丁或 容易測, 得優劣淺深, 又有倍讞之不等. 然箇中, 有天氣人道一統之測, 提䭲億兆之測, 建其有 極, 派分億兆之測, 充其範圍.”

57 崔漢綺, 『氣學』 卷2-25, “合天下人之見聞, 以爲耳目, 統天下人之驗試, 以爲法例, 得之於天 下之人, 以傳之于天下之人. 是與天下共學.” 혜강은 또한 『인정』 곳곳에서 공론의 수립과 인재선발 등의 정책 결정을 위해 민원이 중요한 추측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4. 맺음말

본고에서는 담헌 다산 혜강 3인의 리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이 인간관과 정치관에서 확대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담헌은 리의 무형성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리의 주재성과 순선함을 부정하고 기의 생명원리를 철 학의 기초로 설정한다. 이에 따라 만물은 기로부터 받은 생명원리를 공통된 본질로 갖는다는 점에서 인·물, 나아가서는 화·이 간에 존재론적 동등성이 성립되며, 이것을 그는 ‘균’으로 체계화한다. 그렇기에 균 사상은 그의 인간 관과 정치관을 아우르는 핵심원리로서, 균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둘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리의 비인격성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영명한 상제 천으로 일리 를 대체하고, 이에 따란 인간의 본체는 영명한 마음으로 규정된다. 지적 도 덕성을 의미하는 마음의 영명은 기호지성과 자주지권 개념과 결합하여 도 덕은 오직 상황에 따른 실천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러한 인간관은 덕치를 표방한 그의 정치관에 있어서도 수기보다는 치인에 중점을 둔 행왕의 군주 론이 강조되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개혁론이 수반되는 것이다. 혜강은 리의 무형성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경험적 인식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천관을 정당화한다. 유형의 기와 운화기가 바로 그것이며, 이로부 터 특징지어지는 인간은 추측의 인식활동을 통해 경험적·실증적 지식을 획 득하고 획득한 지식을 다시 인사에 활용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에 따른 그의 정치관 또한 정책 수립 이전에 추측이 전제되어야 하며, 추측 지식의 교류라는 소통의 측면이 강조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처럼 18~19세기 조선의 혼란에 대처하기 위한 이들의 사상적 고심 은 리의 비판이라는 공통된 출발점을 갖지만, 그것의 전개과정과 철학적 특 징에 있어서는 독자성과 차별성을 갖는다. 물론 이들의 철학적 결과물이 조정에 채택되어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 현실적 효용을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3인 모두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학의 보 편가치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유학의 발전 가능성과 다양성을 보여 주는 지표로서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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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riticism of the Concept of Li in Neo-Confucianism and the Development of Silhak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ing on Jeong Yakyong, Choi Hanki, Hong Daeyong

Kim, Kyungsoo(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mparatively analyze the criticisms of Li (理) put forward by Hong Daeyong, Jeong Yakyong, and Choi Hanki, and to examine the development of Confucian philosoph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ccordingly. In developing their philosophies to overcome the chaotic situation of Joseon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different characteristics based on their original ways of thinking were revealed. A useful point to view to adopt in focusing on the commonalities among the different characteristics is to notice the distance from Neo-Confucianism, which is common to these philosophers. This paper, in particular, presents the criticism of Li that is common to Hong Daeyong, Jeong Yakyong, and Choi Hanki. While inheriting the philosophical structure of NeoConfucianism, from which derives their view of human beings and their view of politics in ontology, they criticize Li. Therefore, their criticism of Li forms the basis of differentiation throughout their philosophies, which is the focus of the discussion in this paper.

Keywords Silhak, Hong Daeyong, Jeong Yakyong, Choi Hanki, NeoConfucianism, Li

원고 접수일: 2023년 1월 10일, 심사완료일: 2023년 2월 12일, 게재 확정일: 2023년 2월 13일

서울대 인문논총 80권 1호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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