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신라(新羅) 원효(元曉, 617-686)의 ‘일심이문(一心二門)’과 송(宋) 주희(朱熹, 1130-1200)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은 동아시아 철학사에서 마음에 대한 불교적 설명과 성리학적 설명을 대표할 만하다.
즉 원효의 일심이문은 불교적 관점에서 ‘일심(一心)’이라는 마음을 각각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이문(二門)’에 배대하여 설명하는 구조를 취한 것이며, 주희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은 성리학적 관점
에서 마음을 ‘성(性)’과 ‘정(情)’의 측면으로 구체화하여 규명한 것이다.
일심이문과 심통성정은 각각 ‘심(心)’에 대한 구체적 해명으로서 구조적 유사성을 보이는 한편, 세부적인 설명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본 논문에서는 일심이문과 심
통성정으로 기술되는 불교와 성리학의 마음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각각의 특성을
비교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교 연구를 통해 전통철학에서의 마음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의 비교가 불교적 성격과 성리학적 성
격 각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존의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 각각을 다른 관점과 비교하여 고찰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즉 원효의 일심
사상의 경우, 서양철학과의 비교 연구1), 불교 내의 다른 시각과 비교 연구2), 정치사 상과의 비교 연구3), 다른 종교 사상과의 비교 연구4) 등이 이루어져 왔다.
1) 이찬희, 「선(禪)과 셸링(Schelling)- 선(禪)과 변증법, 일심(一心)과 자유의지」, 2017 춘계학술
대회, (사)한국불교학회, 2017 참조.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과 서양 근대 독일 관념론에서
셸링의 실존 개념을 비교하고 있다. 논자는 일심이문이 실존과 비실존을 넘어서는 개념인 반
면, 셸링의 실존은 이성이 자기 초월을 통하여 이성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김종욱, 「원효 사상의 존재론적 해명 : 하이데거의 존재 사건과 원효의 진여 일심을 중심으로」, 『철학사상』 48호,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2013 참조. 김종욱은 하이데거의 발현 사건(Ereignis)
과 원효의 일심(一心) 사상을 존재와 사유가 공속한다는 의미에서 주객 분열 이전의 근본 자리
(本處)로 제시하고 있다; 이병혁, 「원효의 이문일심 사상과 라깡의 정신분석학의 구조적 상동
성 연구」,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제10권,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 2008, 원효의 이문일
심사상과 라깡의 정신분석이론과의 구조적 상동성을 살피는 연구로, 두 사상의 목표 및 언어관
등이 비교되고 있다; 이주향, 「인간중심적인 대상적 차별을 넘어서 –니체의 헤라클레이토스와 원효의 일심을 비교하여」, 『니체연구』 제6집, 2004,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명제에 대한 니체의 분석과 원효의 일심 사상을 만물의 유전(流轉)을 통한 영속적 실체의 부정 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왕식, 「원효와 화이트헤드에 나타난 궁극적 실재」, 『종 교연구』 제8권, 한국종교학회, 1992 참조. 장왕식은 원효와 화이트헤드의 실재 개념을 비교하 였다. 장왕식 주장에 따르면, 원효를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 철학자들의 특색이 궁극적 실재의 궁극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궁극자의 실재성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의 실재 개념인 ‘창조성(Creativity)’ 또한 궁극적이지만, 실재적이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인 존 재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다.
2) 이경원, 「원효와 지눌의 심체론 비교 연구」, 『양명학』 제9권, 한국양명학회, 2003 참조. 원효 와 지눌의 일심(一心)과 진심(眞心)의 심체론을 비교한 연구이다. 원효와 지눌의 심체론은 각각 진여(眞如)와 생멸(生滅),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로 구체화 된다. 또한 수행 방법에 있어서도 각각 지관쌍운(止觀雙運)과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강조로 차이를 보인다.
3) 안효성·김원명, 「和諍과 蕩平은 어떻게 상대주의를 넘어서는가? -一心과 皇極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제81권, 새한철학회, 2015 참조. 이 논문은 일심(一心)과 황극(皇極)은 화쟁(和諍) 과 탕평(蕩平)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며, 각각 불교와 유교의 정치 이념적 관점에서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중재와 화해의 논리 바탕임을 논증하고 있다.
4) 김도공, 「『대승기신론』과 원불교」,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59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 구원, 2014 참조. 이 논문에서 원불교 교리의 핵심 내용인 ‘일원상진리’와 대승기신론(大乘起 信論)의 핵심 사상인 ‘일심사상’이 구조와 의미에서 서로 상통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주 희의 심통성정과 관련된 비교 연구로는 조선 성리학과의 비교 연구5), 현대 철학과 의 비교 연구6) 등을 들 수 있다.
5) 이상익, 「주자(朱子)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의 양면성과 퇴(退)·율(栗) 성리학(性理學)」, 『영남 학』 제62권,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7 참조. 이 논문에서는 주자의 심통성정론이 ‘사 실적 설명’과 ‘당위적 설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퇴율 성리학에서도 양분 되어 나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6) 임헌규, 「朱子의 심신관계론과 현대 심리철학 과학적 물리일원론의 시대에 있어 理氣心性論 의 의의와 한계 탐색」, 『온지논총』 제19권, 온지학회, 2008 참조. 이 논문은 주자의 심성론을 현대의 물리주의적 심신관계론과 비교하여 고찰하는 연구다. 주자의 심성론은 마음을 체용(體 用) 관계로 파악하고, 신체의 정태적·동태적 양면성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마음을 신체에 환 원시키는 현대 물리주의 철학에 함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동향을 살펴 볼 때, 기존의 연구는 각각 불교와 주자학의 범주 내에서의 비교, 또는 서양 철학과의 관련성에서 주로 논의되 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불교와 주자학은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심도 있는 논의를 발전시켜 온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한국불교의 대표자 중 한 분인 원효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의 마음에 대한 세부적 고찰이 이루어 지는 특징이 있다. 즉 이 연구는 동양 철학 범주 안에서 마음에 대한 논의 및 상호 연관성의 규명이라는 측면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일심이문과 심통성정으로 대별되는 원효와 주희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 각각의 체계가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일심이문에 대한 원효의 설명은 『대승기신론 소·별기(大乘 起信論 疏·別記)』 등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심통성정에 대한 주희의 설명은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중심으로 고찰될 것이다. 이를 토대로 원효와 주희의 글에 나타난 각각의 논의가 어떠한 맥락과 특성을 띠고 있는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다음 으로는 구체적인 비교로서 일심이문과 심통성정 각각에서 드러나는 심을 비교해 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원효가 해석한 일심의 성격과 주희의 성과 정을 포괄하는 주재 로서 심의 특성이 기술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일심이문에서의 진여문과 심통성정 의 성이 비교되고, 일심이문의 생멸문과 심통성정의 정이 비교될 것이다. 일심이문 에서 진여문은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평등한 경지로서 이는 적정(寂靜)한 상태로 설명되고 있다. 반면 심통성정에서 성은 형이상의 리(理)로서 인의예지의 본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 일심이문에서 생멸문은 자체(自體)인 여래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아라야식으로 해석되면서 불생불멸과 생멸의 양 측면을 모두 포괄 한 진망화합식으로 해석된다. 정은 심에서 발용되는데, 이것은 기질의 편벽성을 극 복하고 성을 드러내야 하는 당위적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 해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 각각의 특성이 조금 더 명확히 규명될 것 으로 기대한다.
Ⅱ.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 구조
1) 원효의 일심이문 구조
원효는 『대승기신론 소·별기(大乘起信論 疏·別記)』에서 일심(一心)을 진여문과 생 멸문의 이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체용 구조와의 연관성에서 드러나고 있다. 즉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능가경(楞伽經)』 과 중국의 전통을 종합시키는 과정에 서 그 절충안으로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라는 독특한 논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7)는 것이다.
7) 김제란, 「중국철학에서 ‘체용(體用)’개념의 변천 과정 -체용의 불교적 이해와 유학적 이해」, 『시대와철학』 제17권, 2006, p.49.
『기신론』은 대승(大乘)의 의(義)의 측면에서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의 삼대라는 세 측면으로 구분되지만, 법(法)의 측면에서는 삼대를 진여와 생멸의 일심 이문으로 나누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즉 “이러한 체계에서 존재의 근거를 설명하는 중심 개념은 마음(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마음과 현상 세계와의 관계가 체상용 (體相用)의 관계로 설명되는 것”8)이다.
8) 김종인, 「體用과 元曉의 和諍」, 『동양철학연구』 제24집, 동양철학연구회, 2001, p.17
일심이문에서의 진여문은 일심의 체로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원융무애한 상태를 가리키며 이는 차별 없이 평등하여 적정(寂靜)한 경지를 의미한다. 한편, 생멸문은 자체(自體),상(相),용(用)을 지니고 있으며, 생멸문의 자체는 본각심(本覺心), 즉 여래장9)이라고 할 수 있다. 생멸문은 자체의 본각이 무명(無明)에 따라 생멸하는 측면을 나타낸다. 김종인은 “『기신론』에서 생멸(生滅)은 진여(眞如)에 대조 되지만, 진여가 일심(一心)으로부터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생멸 역시 일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심과 생멸은 둘이 아니며, 체(體)와 용(用)이 둘이 아 닌 것이다.”10) 라고 말하고 있다.
9)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 는 부처의 성품. 【시공불교사전】
10) 위의 논문, p.15.
이러한 맥락에서 일심의 마음에서 근원하는 진여 (眞如門)와 생멸(生滅門)의 이문은 일심과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특수성을 띠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진여문과 생멸문이 일심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에도 구분되어 설명되는 이 유는 무엇일까? 이는 원래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본각(本覺)과 무명(無明)의 업상(業 相)에 의한 본각의 가려짐을 모두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이도흠은 “체는 진여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증감은 물 론 늘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 등을 뜻한다. 또한 상과 용에는 각각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첫째, 상은 여래장 중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의 상을 잘 나타내는 것이고, 용은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며, 둘째, 상은 진여가 일으킨 염상(染相)이고, 용은 진여가 일으킨 정 용(淨用)이다.”11)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다시 간략히 풀어 보면 진여의 체는 불변 하는 지혜를 의미하고, 상은 진여가 생멸 변화로서 현상화한 것을 가리키며, 용은 생멸 변화로서의 현상이 진여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원효의 일심이문은 일심과 이문을 체용의 구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을 일심과 이문의 회통(回通) 구조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러한 구조는 “서양철학처럼 대립적이지도 분별적이지도 않으며, 체상용(體相用)으로서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 모두 일심(一心)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12)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심이문의 내재적 구조는 불교 내의 중관학파의 이론과 유식학파의 이론을 통합 시킨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체대(體大)에 대한 설명은 일체법이 진여(眞如)로 서 평등하므로 이는 중도(中道)의 의미로 중관의 논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 여래장은 여래장식(如來藏識)이므로 결국은 유식적(唯識的) 개념인데 『기신론』은 생 멸문에서 여래장을 불생불멸과 생멸의 화합으로 정의하여 이로부터 일체의 현상세 계를 설명하는 것”13)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11) 이도흠, 「교체설·체용론과 원효의 언어관」, 『한국불교사연구』 제2호,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p.7.
12) 같은 논문, p.9.
13) 김종인, 위 논문, pp.17-18.
2) 주희의 심통성정의 구조
심통성정은 성리학의 대표적인 마음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송(南宋)대 의 주희는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는 심통성정설을 통해 성과 정을 하나의 심으 로 포괄하고 이를 토대로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기술하였다. 즉 이는 “마음속의 본 성이 정서로 드러나게 될 때, 마음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밝히는 성리학의 명제이 다. 즉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란 무엇이며, 그 마음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정서라는 심적 현상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14)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심통성정에서 ‘통(統)’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대별되는데, 즉 ‘심이 성과 정을 포 괄한다’는 첫 번째 의미와 ‘심이 성과 정을 주재(主宰)한다’는 두 번째 의미로 나뉜 다.15) 심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성이 되고, 이미 움직이면 정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심통성정이다.16) 성은 체이고 정은 용이다. 성정은 모두 심에서 나오므로 심은 능히 통(統)할 수 있다. 통이란 마치 병사들을 통솔할 때의 통과 같으므로 주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17) 심이 성정을 포괄한다는 것은 심과 성정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이 성정을 갖추고 있는 것(具)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희의 심통성정에서 심과 성 정은 또한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희가 “심을 마음공부의 주체로, 성을 마음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원리로 구분하고 있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공부 자체와 공부의 근거가 동일할 수 없는 것”18)으로 보았다. 주재하고 운용하는 것은 마음이고, 본성은 곧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치이다. 본 성은 틀림없이 내면에 있지만 주재하고 운용하는 작용은 오히려 마음에 달려있 다.19)
14)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11, p.194.
15) 朱喜, 『朱子語類』 卷98, “統猶兼也, 統是主宰.”
16) 朱喜, 『朱子語類』 卷5, “蓋心之未動則爲性, 已動則爲情, 所謂心統性情也.”
17) 朱喜, 『朱子語類』 卷96, “性是體, 情是用, 性情皆出於心, 故心能統之. 統與統兵之統, 言有以 主之也.” 18)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11, p.197 참조.
19) 朱喜, 『朱子語類』 卷5, “蓋主宰運用底便是心, 性便是會恁地做底理. 性則一定在這裏, 到主宰 運用却在心,”
위의 인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심은 성정을 주재하지만, 심이 주재할 수 있는 이 치는 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주희의 이러한 언급에서 보았을 때, 심이 성을 주재 한다는 말은 “심이 성을 깨달아 성으로 하여금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순전한 ‘중(中)’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20)이라 할 수 있다. 즉 주희의 심통성정은 ‘심이 성정을 포괄하며 주재하는 것’으로서 이는 심이 성정 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심의 성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매개적 역할에 대한 언급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희는 심통성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종합적 견 해를 제시하고 있다.
마음의 온전한 본체는 담연하게 텅 비어있고 밝아서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어 져 있으며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두루 유행하여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를 관통하니, 신묘한 본체로써 말하면 본성이고, 이미 드 러난 신묘한 작용으로써 말하면 감정이다. 그러나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아우른 다”는 것은 단지 뒤섞여 있는 어떤 것 가운데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말했을 뿐이지, 본성이 따로 하나이고 마음도 따로 하나이 며, 감정도 또한 따로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뚜렷이 구별된다는 것은 아니 다.21)
20) 안재호, 「주희(朱熹)의 심(心) 개념과 "심통성정(心統性情)" 천석(淺析) -명대 심학(心學) 출현 배경이 되는 주자학에서의 문제를 중심으로」, 『중국학보』 제50집, 한국중국학회, 2004, p.13.
21) 朱喜, 『朱子語類』 卷5, “心之全體湛然虛明, 萬理具足, 無一毫私欲之間. 其流行該遍, 貫乎動 靜, 而妙 用又無不在焉, 故以其未發而全體者言之, 則性也. 以其已發而妙用者言之, 則情也, 然“心統性情”, 只 就渾淪一物之中, 指其已發未發而爲言爾, 非是性是一箇地頭, 心是一箇地 頭, 情又是一箇地頭, 如此懸 隔也.”
Ⅲ. 일심이문과 심통성정에서의 ‘심(心)’
1) 일심이문에서의 ‘심’
원효는 일심이 진여문과 생멸문의 ‘두 측면[二門]’이 있다고 한다. 일심은 불멸하는 본성과 생멸하는 현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이 두 측면이 둘도 아니 지만 하나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하나이면서도 둘이 고,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것, 혹은 그 반대로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고, 둘이 아니지만 하나도 아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일(一)’이 될 수 있는가? ‘일(一)’도 있는 바 가 없는데 무엇을 ‘심( 心)’이라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를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一心)이 라 하는 것이다.22)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은’ 상태는 어떠한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 궁극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사려 분별이 사라진 경계의 마음은 다른 말로 어디에도 머 물지 않는 마음이다. 유에도 머물지 않고 무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서 유나 무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바로 유에도 머물고 무에도 머무는데 걸림이 없는 마 음이다. 그래서 일심의 본체는 본래 적정하다고 한다.”23)
『기신론 소·별기』에서 진여와 생멸의 이문은 곧 일심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일심이문’라는 말이 ‘일심’에서 ‘이문’이 파생되는 것 으로 들릴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심과 이문을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분리해 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효는 이문일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원효가 이문일심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일심 이문이라고 말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심이 문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심에서 이문이 나온다거나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 그러나 이문일심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심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문을 통해 일심이 나타나고 이문이 각각 일심이라는 뜻을 담을 수 있다 .”24)
즉 일심과 이문은 별개가 아니라 이문이 곧 일심이고, 일심이 곧 이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문은 일심의 구체적 설명이 된다. 즉 일심은 이문을 통해 드러나므로 이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일심이 어떻게 유전하게 되는 것이고 무엇을 일으키며 유전하는 것인지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원효는 곳에 따라 약간 다른 말들을 하지만, 바로 무명(無明)을 연하여 무상심(無常心)을 일으키고, 다심(多 心)이 일어나는 것”25)으로 설명하고 있다.
22)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然旣無有二, 何得有一. 一無所有, 就誰曰心. 如是道 理, 離言 絶慮. 不知何以目之, 强號爲一心也.” ; 은정희 역주, p.88 번역.
23) 김원명, 「원효 일심의 정의와 의미」, 『한국불교사연구』 제2호,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p.20.
24) 정영근, 「불교에서의 자기이해」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문화』 제49집, 한국사상 문화학회, 2009, p.16.
25) 김원명, 「원효 일심의 정의와 의미」, 『한국불교사연구』 제2호,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p.27.
한편, 일심은 이문으로 구체화되고 이문은 다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취한다. 이는 일견 분리된 과정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사태이다. 즉 일심은 언제나 상주하는 것으로 무명의 분별심을 통하여 생멸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나 생멸문에도 여래장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일심은 단 한 순간도 훼손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원효가 가리키는 일심은 공(空)과 마찬가지 로 어떤 고정된 절대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원효는 일심의 체(體)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불가의 체용(體用)의 논리를 따라서 하는 말이 다.”26) 즉 일심은 체용의 구조로 설명되는 동시에 고정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수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2) 심통성정에서의 ‘심’
심에는 체용이 있다. 아직 발현하기 이전이 심의 본체요, 이미 발현한 때는 심 의 작용이다.27) 텅 비어 있고 밝으면서도 만물에 감응하는 것이 바로 심이고, 만물에 감응할 때 그 속에 들어 있는 도리가 바로 성이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정이 다. 이것은 단지 하나이이다.28) 마음은 하나다. 그런데 체(體)의 면을 지적하여 말하는 수도 있고 용(用)의 면 을 지적하여 말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보는 바의 여하를 잘 관찰해야만 하 는 것이다.29)
주희는 심을 체용 구조로 규정하고 있는데, 즉 아직 발현하기 전[未發]의 성을 심 의 본체로, 이미 발현한 후[已發]의 정을 심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한편, 심과 그 본체인 성, 작용인 정을 모두 하나라고 말하는 동시에, 심이 본체로서의 측면과 작 용으로서의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주희의 심 개념은 형이상적인 성격과 형이하적인 성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신묘함과 밝음을 헤아릴 수 없는 심은 도덕관념과 도덕의 식의 형이상적인 심이라고 할 수 있고, 경험적인 지각 운동을 하는 영명한 인식심은 형이하적인 성격을 띤다”30)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6) 김영호, 「원효사상의 특수성을 찾아서–두 개념(一心, 和諍)을 중심으로」, 인하대 한국학연구 소 주최 제3차 국제학술대회, 1997, p.13.
27) 朱喜, 『朱子語類』 卷5, “心有體用, 未發之前則心之體, 已發之際是心之用.”
28) 朱喜, 『朱子語類』 卷98, “虛明而應物者便是心, 應物有這箇道理便是性, 會做出來底便是情. 這 只一箇 物事.”
29) 朱喜·呂祖謙, 『近思錄』 卷1, “心, 一也, 有指體而言者, 有指用而言者. 惟觀其所見何如耳.”
30) 蒙培元 저, 홍원식외 옮김,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11, p.412.
이러한 심 개념의 형이상적인 특성과 형이하적인 특성은 두 가지 측면이 포괄적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각각의 특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말하기를, 심과 성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를 말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 나오 니, 원래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역시 본디 구별하기도 어렵다. 마음을 버리 면 본성을 볼 수 없고, 본성을 버리면 또한 마음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맹자는 마음이나 본성을 말할 때 언제나 서로를 연결 지어 말했다. 인자함·의로움·예의 바름·지혜로움을 본성이라 하고, 또한 가엾게 여기는 마음·부끄러워하고 싫어하 는 마음·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참과 거짓을 가리는 마음을 말했으니 이는 더욱 세밀하게 생각한 것이다.31) 심과 리는 자연히 구별됨이 있다. 영명한 것은 심이요, 실제적인 것은 성이다. 영명한 것은 곧 지각하는 것이다.32) 첫 번째 인용은 심과 성이 분리되지 않은 측면에 관한 것으로, 형이상적인 도덕 본성과 그 발현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용은 도덕본성으로서의 리와 이를 지각하는 인식심의 층차로 인한 구 별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성을 ‘실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원리로서의 이치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심을 ‘영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원리를 지각하 여 깨닫는 능력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인용들로 살펴 볼 때, 주희의 심통성정에서 ‘심’은 도덕 형이상의 본체론적인 의미와 지각 기능으로서의 인식론적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3)
31) 朱喜, 『朱子語類』 卷5, “曰: 此兩箇說著一箇, 則 一箇隨到, 元不可相離, 亦自難與分別. 捨心 則無以 見性, 捨性又無以見心, 故孟子言心性, 每每相隨說, 仁義禮智是性, 又言”惻隱之心羞 惡之心辭讓之心 是非之心,“ 更細思量.”
32) 朱喜, 『朱子語類』 卷15, “心與理自有分別. 靈底是心, 實底是性. 靈底便是那知覺底.”
33) 주희의 심통성정론은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는 비교적 자세하지만, ‘사려미맹(思慮未萌)’과 ‘지각불매(知覺不昧)’ 등으로 제시되는 마음의 지각과 인식 기능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자 세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정을 주재하는 마음의 능력으로서 지각 에 대한 고찰이 상세화 될 필요가 있다. 김광수, 김원명, 「주희(朱熹) 심성론(心性論)을 중심으 로 본 복괘(復卦) 해석의 문제」, 『한국철학논집』 제52권, 한국철학사연구회, 2017 참조. 주희 는 마음을 지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는 허령지각(虛靈知覺)으로서 성을 깨달을 수 있는 능 력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논자는 심통성정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주재를 마음이 성을 지각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며, 이를 마음의 매개적 역할로 기술하고 있다.
Ⅳ. 일심이문의 ‘진여문’과 심통성정의 ‘성’
1) 일심이문에서의 ‘진여문’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 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인 체 (體)이니, 이른바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 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여라 이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 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34) 『기신론』에서 진여문에 대한 언급은 생멸문에 비해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다. 원 효는 진여가 평등하여 말을 여윈 이유에 대하여 “모든 언설이 오직 임시로 지은 이 름이므로 실성(實性)에 있어서는 끊어버리지 않을 수 없으며, 언설은 단지 망념에 따라 생긴 것이므로 진지(眞智)에 있어서는 여의지 않을 수 없다.”35)라고 말하고 있 다. 즉 진여문은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원융무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경지는 차별 없이 평등하여 적정(寂靜)하다고 할 수 있다. “진여심은 ‘적멸(寂滅)’로 표현될 수 있는데, 적멸은 열반(涅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곧 진여심은 열반을 의 미하는 것”36)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 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37)
34)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不生不 滅. 一切 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 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 故名眞如.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 은정희 역주, p.103 번역.
35)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所以眞如平等離言者, 以諸言說唯是假名, 故於實性不 得不絶, 又彼言說但隨妄念, 故於眞智不可不離.” ; 은정희 역주, p.107 번역.
36) 이시온, 「‘大乘起信論’의 眞如心 硏究」, 『동양철학연구』 제22집, 동양철학연구회, 2000, p.25.
37)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言眞如者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遣言. 此眞如體 無有可 遣,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 故 名爲眞如.” ; 은정 희 역주, p.107-108 번역.
위의 인용에 따르면 진여는 상(相)이 없고 체(體)만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진여의 체는 일체가 참이며 평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말이나 생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 인식의 일반적 조건에서는 불가해한 특성을 띠고 있다. 즉 이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진여는 언설이라는 형태적 상(相)이 제거될 때 드러나는 현상의 본질 그 자체이며, 그러한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항상 참이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여문의 추상적 특성은 일면 현상 세계의 생멸문과 괴리된 것으 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조수동은 “대승기신론에서 마음을 진여문과 생 멸문으로 구분한 것은 마음을 깨달음과 미혹의 이원적 구조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심진여가 그대로 심생멸이며, 심생멸의 세계 전체가 바로 심진여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문에도 진여를 말하고 생멸문에서도 진여가 있다고 말하는 것 이다.”38)라고 지적하고 있다.
38) 조수동, 「원효의 본각과 여래장」,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0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2, p.6.
즉 원효의 대승기신론 해석에서 진여는 진여문에만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문에도 존재하므로 진여문과 생멸문은 근본적으로 이원적 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진여문이 언급될 때는 생멸 문과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심통성정에서의 ‘성’
주희는 정이(程頤)의 ‘성즉리(性卽理)’의 관점을 받아들여 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성은 곧 이치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본성이라 부르고, 모든 일에 있는 것을 이치라고 부른다.39) 성 속에는 이치가 가득 차 있는데, 인자함·의로움·예의바름·지혜로움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40)
39) 朱喜, 『朱子語類』 卷5, “性卽理也. 在心喚做性, 在事喚做理.”
40) 朱喜, 『朱子語類』 卷5, “性是實理, 仁義禮智皆具.”
이러한 설명으로 볼 때, 이치로서의 성은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도덕 본체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도덕 본체로서의 성은 심이 성정을 주재하 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다음의 인용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심은 진실로 주재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른바 주재자는 바로 리이다.41) 주희는 여기서 심이 주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심의 주재 자는 리, 즉 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성은 마음에 내재된 인간의 본성인 동시 에 심의 주재자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은 다음과 같은 추상적 특성을 띠 는 것으로도 기술되고 있다.
본성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치를 궁구하여 외물과 일처 리에 이르면, 본성은 본 디 그 속에 있으니 반드시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 므로 성인께서도 본성은 드물게 말씀하셨다.42)
여기에서 성은 마음 안에 내재한 인간 본성의 이치로서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띠 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희는 다른 인용에서 심통성정에서의 성이 도덕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의 당위성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현실적 구체성은 없 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본성과 감정 그리고 마음은 오직 맹자와 횡거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 좋다. 인 자함은 본성이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감정이니 모두 반드시 마음에서 드러난다.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아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본성은 다만 그렇게 마 땅한 것이고 단지 이치일 뿐이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구체 적인 어떤 것이면, 이미 선함도 있고 반드시 악함도 있게 된다. 그러한 것은 없 으며, 단지 이치일 뿐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을 수 없다.43)
41) 朱喜, 『朱子語類』 卷1, “心固主宰底意, 然所謂主宰者, 卽是理也.”
42) 朱喜, 『朱子語類』 卷5, “性不是卓然一物可見者. 只是窮理格物, 性自在其中, 不須求, 故聖人 罕言性.” 43) 朱喜, 『朱子語類』 卷5, “性情心, 惟孟子橫渠說得好, 仁是性, 惻隱是情, 須從心上發出來. “心 統性情 者也,” 性只是合如此底, 只是理, 非有箇物事. 若是有底物事, 則旣有善, 亦必有惡. 惟其無此物, 只是 理, 故無不善”
성은 본래 마음에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은 다시 마음을 통하여 발현되는데, 발현되기 전(未發)에는 마음에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 상태로 있다가 발 현 될 시(已發)에는 구체적인 정감으로 드러나게 된다. 위의 인용에서 주희는 성을 정과 대비한 맥락에서 ‘구체성이 없는 이치’로 파악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주희의 심통성정에서 성은 마음 안에 내재하는 인간 본성으로서 마음의 주재자로 기능하는 한편, 인간의 도덕 행위에 규범적 당위성을 부여하는 도덕형이상 학의 가능 근거로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일심이문의 ‘생멸문과 심통성정의 ‘정’
1) 일심이문에서의 ‘생멸문’
심(心)의 생멸은 무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생멸의 마음은 본각(本覺)에서 이 루어져 두 가지 체가 없으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에 화합이 되는 것 이다.44) 앞서 원효의 대승기신론에 대한 해석에서 진여문은 생멸문과 완전히 구분되어 독 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였다. 원효는 생멸문 또한 진여문과 괴리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즉
“생멸문에는 자체(自體)와 상(相), 용(用)이 있으며, 생 멸문에 있는 자체는 본각심(本覺心)을 가리킨다. … 생멸문이란 일심의 체인 본각이 무명의 작용에 따라 생멸하는 측면을 각각 가리킨다.”45)
이러한 관점에서 생멸문은 불각(不覺)에 의하여 진여가 현실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개되는 마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생멸문과 진여문의 구체적 연관성에 대하여 원효는 생멸문의 자체인 본각심을 여 래장(如來藏)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생멸문 속에 있는 본래의 자성청정한 마음이 여래장이며, 그것은 진여문의 진여와 동일한 것으로 원효는 이것을 진여의 자체상으 로 보고 있는 것이다.”46)
생멸문의 자체인 여래장은 또한 아라야식(阿羅耶識)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라야식은 불생불멸의 자성청정심과 생멸의 식이 동시에 포괄되어 있는 식이다.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 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라야식(阿羅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47)
44)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別記云. 心之生滅, 依無明成, 生滅之心, 從本覺成. 而 無二體, 不相捨離, 故爲和合.” ; 은정희 역주, p.123 번역.
45) 남동신, 「元曉의 起信論觀과 一心思想」, 『한국사상사학』 제22집, 한국사상사학회, 2004, p.24.
46) 조수동, 「원효의 본각과 여래장」,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0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2, p.9.
47)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 滅和合, 非一非二. 名爲阿羅耶識.” ; 은정희 역주, p.120 번역.
두 가지 뜻이 있지만 심체(心體)가 둘이 없으니, 여기서는 두 가지 뜻(각과 불 각)이 합해져서 둘이 아닌 심체를 아라야식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48)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생멸문은 자체인 여래장을 지님으로서 불생불멸과 생멸의 양 측면을 모두 포괄한다. 즉 “원효는 여래장 사상을 생멸문의 이론적 근거로 하고 있으며 … 이 자성청정한 여래장이 개별적 생멸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아라야식이라 하고, 아라야식과 여래장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즉 무명과 함께하고 있는 여래장 이 그 생멸의 현상을 전개시키는 것을 아라야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49)
48) 元曉, 『大乘起信論疏別記』, 「解釋分」, “別記云 雖有二義, 心體無二. 此合二義不二之心, 名爲 阿羅耶 識.” ; 은정희 역주, p.125 번역.
49) 조수동, 위 논문, p.11
이와 같 이 생멸문에서 여래장이 아라야식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불생불멸과 생 멸이 하나로 연결되고, 본각과 불각이 하나로 연결되게 된다. 즉 진여는 진여문과 생멸문 모두에 존재하며, 각각의 진여는 본각의 여래장으로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원효는 생멸문의 진여를 여래장으로 해석하고, 이를 다시 아라야식과 동일한 것으로 연관 지었다. 이러한 해석은 생멸문의 생멸 작용을 진여와의 연관성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즉 생멸문이 진여문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 하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2) 심통성정에서의 ‘정’
주희의 심통성정에서 ‘정’은 심과 성의 연관성 속에서 고찰되고 있다.
성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정으로 발출하므로, 이 정으로 인해 그 성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정이 있기 때문에 본래부터 이러한 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50) 성리학에서 정은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七情)51)을 가리킨 다.
. 50) 朱喜, 『朱子語類』 卷5, “有這性, 便發出這情, 因這情, 便見得這性, 因今日有這情, 便見得本 來有這 性.”
51) 『禮記』, 「禮運」,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弗學而能.”
위의 인용에 따르면, 정은 성의 외화(外化)라고 할 수 있다. 성은 운동성 및 작 용성이 없으므로 기의 유행(流行)을 통해 정으로 발용 되는데, 즉 정으로 인해 성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발용에서 중요한 것은 도 덕 이치로서의 성이 현실에서 본체로서의 도덕성을 얼마나 잘 구현하는가이다. 실상 “정으로 인해 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실제로 정감 체험이 자아를 초월하는 것으로, 사람의 정감 활동을 도덕화된 본체로 승화시키는 것”52)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 은 정을 통해 드러나고 정은 성의 존재를 확인해 주지만, 정이 온전히 성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이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심의 본체는 원래부터 불선함이 없는데, 그것이 흘러서 불선하게 되는 것은 정이 사물에 옮겨가면서 그러한 것이다.53)
위의 인용에 따르면 심의 본체인 성은 원래 선한 것이지만, 정으로 발현되는 과정 에서 왜곡되어 불선하게 된다. 즉 이것은 현실적 인간의 감정이 본연의 성을 발현시 키지 못하고 편벽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정이 성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발현될 때 불선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불선으 로 흐른 정은 본래의 성을 회복해야 하는데(復性), 이것은 발현된 정에 대한 조절 및 통제를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중절(中節)한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過不及) 치우친 정을 바로잡아 이치에 맞게 발용 되도록 하는 화(和)를 목표로 한다. 즉 정은 심에서 발용하고, 현실에 구현된 성이다. 정이 심에서 발용 한다는 것은 “처한 상황에 따라 심이 지각·판단하고, 일신을 주재하여 대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은 심에서 근원하는 것”54)이라고 할 수 있다.
52) 蒙培元 저, 홍원식외 옮김,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11, p.520.
53) 朱喜, 『朱子語類』 卷5, “心之本體, 本無不善, 其流爲不善者. 情之遷於物而然也.”
54) 윤용남, 「朱子 心說의 體用理論的 分析」, 『동양철학연구』 제41집, 동양철학연구회, 2005, p.19. - 60 -
한편 성의 현실적 구현은 정의 발용 과정에서 인간의 수양의 노력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심에서 발현하는 정은 성의 올바른 현실적 구현으로서 제시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는 것이다.
Ⅵ. 맺는 말
우리는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을 각각 불교와 성리학에서 바라 본 마음에 대한 규명으로 정의하고, 이들 각각의 구조를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세부 개념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효의 일심 개념과 주희의 심 개념이 각각 진여문과 생멸문, 성과 정을 포괄하고 있는 구 조의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일심을 이문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고, 심통성정에서 심의 본체와 작용을 각 각 성과 정으로서 심성정의 통일로 이해한다면, 원효와 주희의 심에 대한 해석은 구 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심이문은 진여문과 생멸문의 이문에 대하여 체용 구조로서 설명하고 있으며, 심통성정에서는 심의 본체를 성으로, 심의 작용을 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각각의 설명은 체용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각각의 구체적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있어서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일심 은 진여문과 생멸문의 두 측면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일심이 곧 제 현상의 본체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문은 일심의 현상적 측면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주희의 심통성정에서 심은 성과 정을 주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은 도덕 본성인 성의 이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즉 심통성정에서는 성에 대한 자각의 매개자로서 성과 정을 주재하는 심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심통성정의 심은 성정을 포괄하 고 있다는 측면에서 도덕 형이상의 본체론적인 의미와 지각 기능으로서의 인식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도덕 본성의 현실적 구현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일심을 제 현상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깨달음을 중요시 하는 불교적 해석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일심이문에서의 진여문은 마음의 본체로서 차별 없이 평등하며 적멸한 열반의 경 지를 가리킨다.
심통성정에서의 성은 ‘리(理)’로서 인의예지의 본성을 가리키는데, 이는 인간의 도덕 행위에 규범적 당위성을 부여하는 도덕형이상학의 가능 근거로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일심이문에서 생멸문은 자체(自體)인 여래장을 지님으로써 불생불멸과 생멸의 양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특성을 보인다. 즉 생멸문의 진여는 여래장으로서 아라야식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생멸문의 생멸 작용을 진여와의 연관성에서 설명 하는 것이다. 이는 즉 이문이 일심과 별개가 아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심진여와 심 생멸이 별개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통성정에서의 정은 심에서 발용되는데, 이것은 기질의 편벽성을 극복하고 성을 구현해야 하는 당위적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 즉 정은 심의 작용으로서 이것이 현 실에 구현될 때는 도덕 이치에 적합하도록 발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의 발용은 인간의 수양 노력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에 대한 연구는 각각의 개별 연구에 있어서도 심화되어 논의될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비교 연구는 각각의 구조적 유사 점과 개념의 차이점을 개략적으로 고찰되었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하여 각 개념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더 심도 있게 규명하여 의미 있는 논의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여러 측면에서 각 개념의 특성이 더욱 명확히 규명되도 록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논평문
엄진성(영남대)
이 논문은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의 비교를 연구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교를 위해 논자는 우선 각 개념들이 가지는 논리적 구조와 성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 주제는 이미 상당부분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 특별히 기존의 견해와 다른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개념의 정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난한 논문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제목과 연구의 목적에서 보이는 각 개념들 사이의 비교가 적절하게 이루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논자의 부족 한 식견으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부족한 식견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한다면 이 연구는 연구자가 결론에서 말했듯이 각 개념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보다 심도 있 게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연구는 긴 여정에 있어 출발점 혹은 이정표를 제시하는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는 총 6장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2,3,4,5장에서는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의 개념들 을 분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2장에서 전체를 정리한 후 3장에서는 심, 4장에서 는 진여문과 性을 그리고 5장에서는 생멸문과 情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4장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존 연구 성과와의 차별성을 보이지 않 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개념의 논증에 대한 지적을 따로 하지 않도록 하 겠다. 다만 글을 읽는 동안 보이는 개념들의 모호성과 해석의 대한 의견을 제시하도 록 하겠다. 그리고 연구의 방향성에 대해 짧은 견해를 피력하는 것으로 논평을 마치 도록 하겠다. Ⅲ장 일심이문과 심통성정에서의 ‘심(心)’에서 논자는 일심의 본체에 대해 “…그래서 일심의 본체는 본래 적정하다고 한다.”는 적정하다는 표현을 인용해서 사용하고 있 다. 적정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정도가 알맞고 바르다’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사전 적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 혹은 다른 용례가 있는 것인지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 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 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논자는 다시 “즉 일심은 체용의 구조로 설명되는 동시에 고정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수한 성격 을 띤다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일심을 설명하며 실체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때 본체와 실체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 개념적 차이 를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나아가 주자의 심통성정의 해석에서 또한 본체란 말을 자 주 언급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본체와 일심이문에서 사용된 본체와의 상관관계는 무 엇인지 이 또한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Ⅲ장의 2)에서 논자는 朱喜, 『朱子語類』 卷1, “心固主宰底意, 然所謂主宰者, 卽是理也.”을 해석함에 있어 주재자로 표현한다. ‘주희는 여기서 심이 주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심의 주재자 는 리, 즉 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성은 마음에 내재된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심의 주재자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 또한 맞지만 주재자란 해석은 자칫 리의 능동성 또는 인격성으로 해석될 여지도 함께 보인다. 그러므로 주재자란 표현 보다는 주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오해의 여지를 제거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다음은 연구의 방향성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이다. 첫째 : 논자가 보기에 이 연구가 보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원효의 일심이문과 주희의 심통성정 사이의 공통분모를 상정하고 이들을 잇는 논리적 가교를 제시해야 만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연구는 단지 기존의 연구를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처음 이 연구를 접했을 때 제목을 보고 과연 어떤 형태의 비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학설이 평행선을 달릴 뿐 어떠한 접점도 보이지 않고 끝마친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에서 보이는 ‘비교’ 찾아볼 수가 없다. 비교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각 개념들 사이의 접점을 마련 해야 한다. 논자는 이점이 보완되기를 희망한다. 둘째 : 논자가 이 연구의 제목을 들었을 때 떠올린 두 번째 의문은 서로 상이한 패 러다임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이 연구의 핵심이 되는 心 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원효의 심은 불교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으로서 그 속에 존재적론, 인식적론, 우주론적인 영역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반면 주자의 심은 그 범위가 인간에게 국한되며 도덕적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이 때문에 두 개념 사 이의 심은 비록 그 외연을 동일할지라도 내포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므로 이 연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원효의 和諍과 보다 한 차원 높은 범 주의 제3의 논리적 구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원효(元曉)의 일심이문(一心二門)과 주희(朱熹)의 심통성정(心統性情) 비교 에 대한 논평을 마치고자 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주제를 제공한 연구자에게 이 자리 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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