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대동합방론의 출판과 담론지형
Ⅲ. 대동합방신의에서 일본 현대어 번역까지
Ⅳ. 대한제국 사회의 대동합방론 전유 과정
Ⅴ. 맺음말
【국문초록】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은 유교의 이상적 가치를 토대로 아시아 국 가의 연대와 일본의 침략주의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기존 연구는 당대의 사상적 흐름에 주목하는가, 이후의 일본 침략주의의 확대 과정에 주목하는가 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했다. 반면 이 책의 담론지형과 한국에서의 수용 그리 고 다루이 도키치 사후 이 책이 반복적으로 소환됐던 과정에 대한 고찰은 거 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글은 기존 연구를 토대로 1910년을 전후하여 대동 합방론이 출판, 재판, 일본어 번역, 영인 되었던 상황을 고찰한다. 나아가 1910년 강제병합 직전 대한제국사회에서 이 책이 어떻게 전유 되고 있었는지 를 함께 고찰한다. 이를 토대로 이시기 지역 질서 구상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주제어 : 국가연합,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 아시아주의, 합방, 다루이도키치
Ⅰ. 머리말
1893년 일본에서 출판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大東合 邦論은 서세동점이 상황, 특히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고, 러시아가 아시아 로 남하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 대한 아시아 국가의 대응 방안을 담고 있다. 러시아의 침략을 막고, 아시아가 함께 문명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합방’하여 ‘大東國’이라는 연방국을 만들고, 이를 통해 중국, 동남아 시아와 연대하여 ‘대아시아연방’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주 장이었다. 이 책은 1898년 량치차오가 서문을 쓰고, 그의 제자 천샤쉰(陳霞審)이 교 정을 해서 大東合邦新義(이하 신의)란 제목으로 大同譯書局에서 출판되 었다. 대략 10만 부가 발간되고 그 중 1천 부 정도가 조선에 들어왔으며, 조 선에서 이 책이 유행하면서 다종의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1909년 12월 일진회가 ‘정합방’ 청원서를 제출했을 때 ‘정합방’을 지지하 는 유생층의 찬성서에서 다루이 도키치의 이름과 그의 주장이 거론되었다. 1 다루이 도키치는 1910년 6월 재판 서문을 작성하여 이 책을 다시 출판했다. 재판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합방’이 아닌 ‘연방’임을 분명히 밝혔다. 다루이 도키치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이후 대동합방론의 일본 현대어 번역본, 발췌 해설본 등이 출판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2
1 김윤희(2009), 「1909년 대한제국 사회의 ‘동양’개념과 그 기원-신문 매체의 의 미화 과정을 중심으로」, 개념과 소통 4,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97~131쪽,
2 影山正治(1963), 現代譯 大東合邦論, 大東塾出版部 ; 竹内好 編(1963), アジア 主義, 筑摩書房, 106~131쪽.
미국 과 일본 사이의 방위조약 개정, 한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재개 등을 배경으로 일본 근대 사상으로서 아시아주의에 관한 관심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합방론은 일본 근대 초기 아시아주의자들의 한국 인식을 고찰하는 텍스트로 주목받았다. 3
이들 연구는 대동합방론에 포함된 동양적 가치, 자 유민권론, 국가연합론, 일본의 침략주의 옹호 등 다양하고 양면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초기 아시아주의 사상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 는 데 기여했다. 나아가 그의 사상적 특징을 전근대적 또는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동합방론 출간 이전 잡지에 기고된 원고와 출간본을 비교 분석하고 당시 일본, 중국, 한국에서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반 응했는지를 고찰했다. 4
일본에서는 이 책에 대해 냉담했지만, 중국과 한국에 서는 이 책에 호응했던 것은 이 책의 ‘합방’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연대’로 읽 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국내 연구 역시 이 책에 대해서는 유교의 이상적 가치를 내세우고 민권론 과 문명화론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일본의 팽창주의와 침략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을 동시에 포함한 일본 아시아주의의 선구로 고찰했다. 5
그리고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대동아공영권으로 수렴되어 갔다는 것 을 전제로 하여 이 책 역시 침략주의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동합방론에서 조선을 어떻게 다루고 있었는지를 고찰한 연구는 일본 지식인들의 ‘동양’에 대한 상상 속에서 조선은 연대와 침략이라는 두 개의 갈 등 구조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었고, 일본의 팽창주의가 현실화되면서 동아시 아에서 일본의 패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변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6
3 旗田巍(1969), 日本人の朝鮮観, 勁草書房, 59~66쪽 ; 伊東昭雄(1973), 「大東 合邦論について」, 横浜市立大學論叢<人文科學系列> 24-2・3, 173~197쪽 ; 滝沢誠(1974), 「樽井藤吉と大東合邦論」, 伝統と現代 27 ; 初瀬龍平(1977), 「ア ジア主義と樽井藤吉」, 廣島平和科學 1, 111~137쪽.
4 嵯峨隆(2018), 「樽井藤吉と大東合邦論:日本の初期アジア主義んの事例として」, 法學硏究. 法律・政治・社會 91-9, 慶應議塾大學法學硏究會, 41~81쪽.
5 한상일(1994), 「근대일본사에 있어서의 한국상-樽井藤吉과 대동합방론」, 제8차 한일・일한 합동학술회의-근대사에 있어서의 한일상호인식 발표문 ; 한상일 (2002), 아시아 연대와 일본제국주의 : 대륙낭인과 대륙팽창, 오름, 47~68쪽 ; 강창일・김경일(2002), 「동아시아에서 아시아주의 : 1870-1945년의 일본을 중심 으로」, 한국연구재단 연구보고서, 9~13쪽.
6 채수도(2006), 「근대 일본에 있어서 아시아연대론-‘一方性’을 중심으로」, 일 본어문학 35, 일본어문학회, 589~591쪽 ; 라의규(2016), 「명치시대 지식인들 의 조선인식-「연대」와 「멸시」의 갈등 속에서-」, 일본문화학보 68, 한국일 본문화학회, 309~331쪽 ; 김남은(2009), 「樽井藤吉의 아시아 인식-조선인식을 중심으로-」, 외국학연구 13-2,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 221~238쪽.
아시아주의를 좌파와 우파로 구분해왔던 일본의 기존 연구를 비판하고, 민 권과 국권이 결부된 대표적 사례로서 다루이 도키치의 연대론에 주목한 연구 도 존재한다.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아시아주의에는 체제변혁과 내셔널리 즘, 아시아주의와 제국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중첩된, 복합적 층위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보고, 이것이 근대 초기 일본에서 발생한 동서고금의 사상적 접합지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7
이상의 연구는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이 유교의 이상적 가치를 토 대로 하고 아시아 국가의 연대와 일본의 주도권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란 점을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사상적 흐름에 주목하는가, 이후의 일본 침략주의의 확대 과정에 주목하는가에 따라서 그 평가는 매우 달랐다. 한편, 일진회 관련 연구에서는 1909년 일진회의 정합방 주장이 다루이 도 키치의 대동합방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이용구가 우치다 료헤이와의 대화에서 이 책에 감명을 받았다는 흑룡회의 기록, 8 이 책에 감명 을 받아서 아들 이름을 大東國男으로 지었다는 일화9 , 국가연합이론에 기초 한 ‘정합방’ 주장 등을 근거로 하여 일진회의 정합방 주장은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10
7 조관자(2018), 「청일-러일 전쟁기의 사상과 동아시아의 변혁-일본의 아시아주 의, 국수주의,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한림일본학 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 구소, 75~116쪽.
8 葛生能久(1930), 日韓合邦祕史, 黑龍會出版部, 41쪽.
9 大東國男(1960), 李容九の生涯-善隣友好の初念お貫, 時事通信社, 39~40쪽.
10 한명근(2001), 「일진회의 대일인식과 ‘정합방’론」, 숭실사학 14, 숭실사학회, 47~52쪽.
그러나 최근 이용구가 대동합방론을 수용했다는 기존연구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마스타니 유이치는 1930년 흑룡회에서 발간한 일한합방비 사의 이용구와 우치다 료헤이의 대화 내용과 1907년 다루이 도키치가 조선 에서 배포한 日韓聯邦條規私案草稿에 대한 이용구의 입장 등을 분석하여 이용구가 대동합방론에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흑룡회가 각색한 것일 가능 성이 크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아가 그는 당시 ‘합방’이란 어휘가 ‘연대’란 의미로도 사용되었던 만큼 이 책을 읽은 대한제국의 지식인은 ‘합방’을 한일 의 동맹 관계를 의미했던 아시아연대론과 동일시했다고 지적했다. 11 이 연구는 이용구의 대동합방론 수용 문제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판 적으로 탐색하여 기존 연구를 수정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과를 제시했다. 그러 나 ‘합방’이란 의미가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아시아연대론이었다고 보는 것은 아시아연대론의 다양한 층위를 간과한 측면이 있다. 아시아연대론 의 내용에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안경수, 안중근, 유학지식인 등이 달랐 다는 연구를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12 이글은 기존 연구를 토대로 1910년을 전후하여 대동합방론이 출판, 재 판, 일본어 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고찰한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주목하 지 않았던 다루이 도키치의 행적을 통해 그의 사상적 배경을 고찰하고, 나아 가 1910년 강제병합 직전 대한제국사회에서 이 책이 어떻게 전유되고 있었 는지를 함께 고찰한다. 이를 토대로 이시기 지역 질서구상의 다양한 함의를 이해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의 1893년 발간본과 1910년 재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898년 상하이에서 발행된 대동합방신의는 고려대학교 육당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대 동합방론 필사본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13
11 榤谷祐一(2016), 「李容九の大東合邦論の受容について」, 東アジア近代史 第 20卷, 東アジア近代史學會, 210~227쪽.
12 김윤희(2009), 앞의 논문, 97~131쪽.
13 장서각 소장 필사본은 이왕직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필사연대에 대해서 장서 각 문헌 해제에는 1910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893년 출판 대동합 방론을 필사한 것이고, 1907년 다루이가 배포한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가 황제에게 전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0년 6월 재판본이 나오기 이전 황제에게 전달된 필사본으로 보인다.
Ⅱ. 대동합방론의 출판과 담론지형
대동합방론 저술 이전 다루이의 행적은 기존 연구에서 대략 다루어왔지 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던 師承관계와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행적은 대동합방론의 오카모토 간스케(岡本監輔, 1839~1904)의 서 문에 대략적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1885년 오사카 사건 연루에 대해서는 무 고를 당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가 동양사회당을 결성했다는 사실에 대해 서는 친구들을 모아 모두가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언급에 그치고 있어 서 그의 반정부적 행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가 결성한 동양사회당에 대해 기록인 東洋社會黨考가 1930년에 출판 되면서 그의 행적이 상세하게 알려졌다. 14 그리고 이를 토대로 사쿠라이 요시 유키(櫻井義之)는 1937년 「동양사회당 樽井藤吉과 조선합방론(1)」이란 논문 을 조선행정에 게재하여 동양사회당의 성격과 다루이 도키치의 행적을 재 구성했다. 15
14 田中惣五郞(1930), 東洋社會黨考, 一元社, 49~87쪽.
15 櫻井義之(1937), 「東洋社會黨樽井藤吉と朝鮮合邦論」, 朝鮮行政 2, 帝國地方行 政學會, 195~206쪽.
이 장에서는 오카모토의 서문, 동양사회당고, 그리고 사쿠라이 의 논문을 중심으로 다루이의 행적을 살펴보겠다. 다루이는 나라현에 있었던 야마토(大和)국의 목재상으로 태어났다. 나라현 중부를 흐르는 니우(丹生)천과 야마토천의 지천인 호우(芳野)천 사이에서 태 어나서 그는 자신의 호를 丹芳이라고 지었다. 가업을 하고 있었던 그는 메이 지 천황의 御誓文에 감동하여 정치의 길을 결심했고, 1873년 5월에 도쿄에 왔다. 오카모토의 서문에 의하면 그는 유년 시절 일본 와카<國詩>로 그 지역에서 소문난 오카다 시게로(岡田重郞) 그리고 醉陶園이란 불리는 호족에게 교육을 받았다. 16 1873년 도쿄에서 다루이는 국학자였던 이노우에 요시쿠니(井上賴國, 1839~ 1914)의 문하에 들어갔고, 이노우에의 사숙인 가미카제쥬쿠(神風塾)에서 국 학을 배웠다. 고향에서 국학 교육에 활용되던 와카를 배웠기 때문에 국학에 친연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때 도쿄에서는 정한론이 일어났고, 그는 1874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에게 함대를 갖추어야 한다는 건백서를 제 출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었던 民選論에는 찬성하지 는 않았고, 17 대신 관리선거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올리기도 했다. 당시 이노우에의 사숙에는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비분강개하고 있었던 옛 번사들의 조합이 있었고, 다루이는 이곳에서 대동합방론의 후문을 쓰게 될 이나즈 이츠키(稻津濟, 1834~1897)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다루이는 이나즈 밑에서 외교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고 이나즈가 1876년 에 발간한 皇朝駆遠私史序란 책을 편찬하는 일을 도왔다. 이나즈는 진토쿠 도(振德堂)의 교수였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화족회관의 잡역부로 일했다. 이나즈와 함께 일하는 동안 그는 유럽의 국가연합에 대해 알게 되었 을 가능성이 크다.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에 호응하는 오우 (奧羽)거병을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가 사이고 무리에 공명한 것은 그의 反메이지 정부 사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메이지 정부 때문에 일본이 퇴보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오우 거병 계 획을 일생의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18
16 樽井藤吉(1893), 「大東合邦論序」(1), 大東合邦論, 3쪽.
17 민선론은 1874년 1월 板垣退助와 後藤象二郞 등이 최초로 민선의회 개설을 요 청하는 건백서를 제출하면서 이슈가 되었다.
18 田中惣五郞(1930), 앞의 책, 78쪽.
오우 거병 실패로 상심한 다루이는 규슈의 정치가 다케노미 도키토시(武富 時敏, 1856~1938)19가 운영하는 漢學塾에서 한문 선생으로 반년을 보냈다. 이때 오쿠미야 도메이(奧宮東鳴)와 함께 近世詩文選이란 잡지를 출판했다. 대동합방론 두주에서 도메이의 코멘트를 적어 놓은 것으로 보면, 다루이와 도메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近世詩文雜誌가 1896년 詩 文이란 잡지로 바뀌어 간행되었는데 이때 오쿠미야가 ‘題敬宇文’제목의 시 를 게재한 것으로 보아 도메이는 잡지 발간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루이는 자신의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서 1878년 12월에서 1881년 12월 까지 만 3년 동안 조선의 무인도 탐험을 시도했다. 대한해협 항해를 4회, 다 도해 부근 조사를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가 나가사키에 있을 때 고토후쿠에 (五島福江, 현 나가사키현)의 번사였던 마쓰모토 다다츠라(松本忠貫)의 집에 기거했는데 그때 그의 조언에 따라 탐험에 나선 것이었다. 마츠모토는 1880 년대 메이지일보(明治日報)와 아키타일일신문(秋田日日新聞)의 기자였다. 20 무인도 탐험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 그는 1882년 5월 25일 나가사 키의 에토사(江東寺)에서 동양사회당을 결성했다. 이때 일본 국내에서는 애 국사, 자유당, 개진당, 입헌제국당 등 정당설립 붐이 일어났다. 동양사회당은 다루이의 사회주의적 사상, 다케노미의 구미 사회주의 사상이 배경을 이루었 고,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1828~1905)의 書生21이었던 모로오카 죠지 키(諸岡正直)의 후원으로 결성될 수 있었다.
19 다케노미는 사가 번 출신으로 도쿄에서 英學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漢學塾 을 세우고, 메이지 정부에 반대하는 사족들이 일으킨 사가의 난에 참가하기도 했다. 1882년에 규슈 개진당을 결성에 참여하고 히젠일보(肥前日報)를 창간했 다. 1890년 제1회 중의원으로 선출을 기점으로 정치가, 관료로 활동했다. 1916 년 헌정회를 결성하고 1924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20 秋田縣總務部廣報課(1969), 秋田の先覺 2, 秋田縣廣報協會, 65쪽.
21 막말 메이지시기 일본에서 서생은 스승의 집에 기거하면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학생을 의미했다.
동양사회당의 배후에 소에지마 의 영향이 있었다고 추측한 것은 모로오카의 후원 때문이었다. 다루이는 평소 나가사키의 농민은 히젠국 사가 번의 10대 다이묘였던 나베시마 오마치(鍋島閑叟, 1815~1871)의 德政을 계속 간직해왔다고 여겼다. 동양사회당은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그 뜻을 중국과 조선에도 펼치겠다는 목 표를 갖고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와 사가는 부호가들의 착취가 심하고, 빈부 격차가 극심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이 시기 금융경색으로 그 착취는 더욱 가혹하여 동양사회당에 찬성하는 중류 이상의 인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쿠라이는 동양사회당은 당시의 정치 사정으로 인해 자유민권운동의 일 익을 담당했지만, 기존 번벌 정부의 관료적 측면에 대한 저항 없이 하층계급 에 기반을 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사회당이란 명칭 때 문에 일본 무산정당 발달사에서 항상 첫 번째로 다루는 정당이지만, 실상은 동양적 이상주의에 기초한 국가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22 동양사회당은 1882년 7월 내무경에 의해 치안 방해로 지목되어 해산명령 을 받았고, 이에 당의 성격을 밝히는 상신서를 제출했다. 상신서에서는 당은 철저히 ‘도덕’을 일관된 지도 정신을 본질로 삼고, ‘의’로서 동양과 사회의 화 친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으로 당의 규칙을 변경하고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이미 해산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다루이는 집 회조례위반죄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유학과 국학의 자장 속에서 지내왔던 그는 유교적 도덕에 기초한 이상 사회를 지향했고, 그 실천을 위해 동양사회당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3월 출옥한 다루이는 1885년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우익 정치단체 였던 겐요샤(玄洋社)의 숙사에 들어가서 만국공법의 연방론을 읽고 대동합 방론의 초고를 저술했다. 이 무렵 다루이는 나카에 쵸민(中江兆民, 1847~ 1901),23 구리하라 료이치(栗原亮一, 1855~1911),24 이즈미 구니히코(和泉國彦), 스에히로 뎃쵸(末廣鐵腸, 1849~1896)25 등과 함께 니가타현 이토이가와 시에 가서 현양사 사원들과 함께 상하이와 푸저우를 왕래하면서 활동했다.
22 櫻井義之(1937), 앞의 논문, 198쪽.
23 나카에 쵸민은 동양의 루소라 불린 일본 근대 사상가이다. 자유민권운동에 참여 했고, 1881년 동양자유신문 주필을 지냈다. 1882년 사회계약론을 한역으로 번역한 民約訳解을 간행했고, 자유신문의 사설을 담당했다.
24 구리하라는 메이지시기 정치가이고, 저널리스트였다.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유당 결성에 참여했고, 자유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1882년에는 대동단결운 동에 참여했고, 1890년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25 메이지시대 신문기자로 반정부 평론가로 알려졌다. 1881년 자유당의 상의원이 었고, 1883년 탈당하여 독립당을 결성했다.
그러던 중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소에지마에게 알리고 김옥균을 도울 여러 가지 계 획을 세웠다. 그는 현양사 사원과 교우하면서 오사카와 도쿄를 왕래하면서 활동했다. 동양사회당 사건으로 요시찰인물이었던 다루이는 1885년 오사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오사카 사건의 주동자였던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일 당을 돕는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오이 겐타로와 공 모하지 않았고, 단지 폭발물 소지를 인지한 죄만을 인정받아 석방되었다. 다루이는 대동합방론초고를 1885년에 작성했다고 했는데 시점은 김옥 균이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이후로 추정된다.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서울 일본인에 대한 습격이 일어났던 상황 과 서울에서 일본군과 청군의 대치 상황이 일본 매체에 보도되고, 자유민권 운동세력이 조선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한일연방론을 주장했던 다루이의 입장은 자유민권 운동세력의 일반적 입장 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가즈키 유키쓰네(香月恕經, 1842~1894)가 대동 합방론 서문에서 자신은 다루이의 초고를 보고 일본과 조선이 서로 멸시하 고 원수처럼 여기고 있어서 한일의 ‘합동’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는 점을 보면, 다루이의 주장은 아시아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주류의 주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루이는 1887년 조약개정교섭 반대운동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886년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외국인의 내지 통행 허용을 조건으로 영사재판권을 폐지하고 관세를 인상하려고 했지만, 굴욕적인 조약 개정교섭 이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서 조약개정은 무산되었다. 조약개정 반대 과정에서 다루이는 비밀문서를 출판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1889년 헌법제정을 기념하 기 위해 천황이 내린 사면령을 받아 풀려났다. 출옥 후 가산을 탕진하여 곤궁하게 지냈던 시기에 그는 대동합방론이란 제목의 논설을 1891년 5월부터 11월까지 나카에 쵸민(中江兆民)이 창간한 自 由平等經綸이란 잡지에 연재했다. 이 논설은 한문으로 작성된 것으로 서문 을 제외하고 총 9개의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1893년 출판된 대동합방론은 서문을 제외하고 총 13개의 제목이었다. 잡지에 게재된 것과 출판된 것의 장 제목은 다음과 같다.
自由平等經綸 게재 논설 제목(1891년) 출판본 목차(1893년) 大東國號의 釋義 人世大勢 (상, 하) 世態變遷 (상, 하) 萬國情況 俄情 支那情況 朝鮮情況 和韓古今之交涉 國家及政治 國號釋義 人世大勢 (상, 하) 世態變遷 (상, 하) 萬國情況 俄國情況 漢土情況 朝鮮情況 日本情況 日韓古今之交涉 國政本原 合同利害 連合方法 論淸國宜與東國合從 <출전> 嵯峨隆(2018), 앞의 논문, 47쪽 재인용.
잡지 게재본과 출판본을 비교한 사가 다카시의 연구에 따르면, 잡지에 실 린 글은 책과 비교하여 문장과 내용의 완성도가 낮고 각 장의 분량도 적었다. 또한, 합동의 이익을 설명한 ‘합동이해’, 대동국이 중국, 동남아시아와 연합 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인 ‘합동방법’, 대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설명한 ‘논청국의여동국합종’이 출판 본에 새롭게 들어간 것은 1885년에 그의 일본어 초 고를 읽은 가즈키의 조언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26 앞서 언급 했듯이 가즈키는 그의 한일합동에 대해 의심을 사지 않는 제3국을 끌어들여 야 한다고 했다. 잡지 게재본과 달리 출판본에는 대동국이 중국과 합동하고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연대하여 ‘아시아 대연방’을 구상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대동합방론이 어떠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것인지를 이 책의 서문과 후 문을 작성한 인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서문을 쓴 오카모토 는 도쿠시마현 醫藥家 출신으로 1863년~1865년 사이 홋카이도와 사할린 북 부를 답사하고, 그 지역 상황을 하코다테 재판소 총독과 초대 부지사를 지냈 던 시미즈다니 긴나루(淸水谷公考)에 알려 홋카이도 경영을 일본 내각에 건 의했던 인물이었다. 1868년 하코다테 재판소의 내국 사무국 권판사(権判事) 로 재직했고, 사할린으로 이주민을 데리고 갔다. 1870년에는 사할린 개척관 이 되었지만, 메이지 정부의 사할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다. 이후 도쿄 대학 豫備門(후에 제일고등학교가 됨) 강사를 지냈고, 1895년 이후에는 대만 총독부 국어학교 교수를 지냈다. 27 그가 다루이를 알게 된 것은 소에지마 다네오미때문이었다. 28 그는 소에지 마에게 평소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다루이가 소에지마의 제자가 되면서 인 연을 맺게 되었다. 29
26 嵯峨隆(2018), 앞의 논문, 48쪽.
27 https://kotobank.jp/dictionary/rekishijinbutsu/
28 大東合邦論 서문에는 蒼海副島先生이라고 했는데 蒼海는 소에지마의 호다.
29 樽井藤吉(1893), 앞의 책, 7쪽.
소에지마는 메이지 유신에 군사력을 제공했던 사가현(佐 賀) 번사로 막말에서 메이지 초기 관료, 정치가, 외교가로 알려진 인물이었 다. 말년에는 흥아회 회장(1881), 동양협회 회두(1891), 애국공당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1881년 5월~12월 사이 흥아회 모임에 청국전권공사 黎庶昌, 객원으로 김옥균, 서광범, 어윤중, 유길준 등이 참여했고, 이때 그는 宮島誠 一郞과 聯詩를 지어 김옥균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30 소에지마는 어려서 주자학과 번의 교학을 가르치는 弘道館에서 수학했고, 그의 아버지와 형은 모두 국학자였다. 그 역시 교토의 준쇼서원(順正書院)에 유학하여 복고적 국학자와 교우하였다. 그는 후쿠오카 다카치카(福岡孝弟)와 함께 1868년 일본의 정치대강과 기구를 정한 태정관 포고인 ‘政體書’를 기초 했고, 이때 令義解, 西洋事情, 聯邦志略, 萬國公法 등을 참조한 것 으로 알려졌다. 31 그는 번사로 메이지 정부의 기초를 확립하는 활동을 전개했 고, 흥아회 등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는 정치단체와 연결되어 있었던 인물이었 다. 다루이가 소에지마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1892년 중의 원에 당선된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서문을 작성한 가즈키는 1885년 다루이가 후쿠오카에 살았을 때 그와 교우하게 되었고, 이때 아직 출판되지 않았던 대동합방론을 읽은 인 물이었다. 32 후쿠오카현 아라쿠라시(朝倉市)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가즈 키는 1869년 아키즈키번(秋月)의 정보를 구루메번에게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 포되었고, 1873년에는 지쿠젠 민중봉기<筑前竹槍一揆> 33, 1877년에는 아키 즈키난(秋月の乱) 34으로 투옥되었다. 1879년에는 民權政社集志社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고, 1880년 국회 기성동맹 간사에 당선되어 자유민권 운동에 참 여했다. 이후 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다가 1887년 福陵新報의 간사로 취임 했고 1890년 제1회 총선거 때 후쿠오카현에서 출마하여 중의원에 당선되었 고, 2회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35
’ 30 東京日日新聞 1881년 6월 23일.
31 https://ja.wikipedia.org/wiki/%E5%89%AF%E5%B3%B6%E7%A8%AE%E8%87%A3 32 樽井藤吉(1893), 앞의 책, 1쪽. 33 후쿠오카 농민들이 민중과 합세하여 메이지 정부의 반대하여 일으킨 봉기
34 메이지 정부에 반대하여 사족이 일으킨 반란
35 福岡縣百科事典(1982) 上卷, 西日本新聞社, 363~364쪽.
가즈키가 1885년 다루이로부터 대동합방론에 대한 비평을 요청받았을 때 그는 조선과 일본의 ‘합동’은 시기상조라고 보았고, 조선이 일본의 ‘합동제안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별도의 제3국을 불러들여 필요 없다 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36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다루이는 그의 의 견을 받아들여 출판 본에 반영했다.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관 계는 가즈키가 서문에 언급했듯이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여러 가지 논의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이 과정에서 다루이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합방론 뒷부분에도 실린 발문은 오타시로 고토쿠(太田代恒德, 1834~ 1901)가 작성했고, 후문은 이나즈 이쓰키가 작성했다. 오타시로는 현 아오모 리현에 있었던 무쓰번의 번사로 번교였던 明義堂에서 유학을 학습하고 도쿄 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알려진 가이호 교손(海保 漁 村)에게 교육을 받고 주자학을 정학으로 가르쳤던 쇼우헤이고(昌平黌)에 들 어갔다. 이후 번으로 돌아가 번교의 교수를 지내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도쿄 에서 유자들의 개인교육기관인 사숙을 열었다. 37 그는 주자학자였다. 이나즈 이츠키는 효고현에 있었던 사사야마번(篠山藩)의 번교 진토쿠도(振 德堂)의 교수로 다른 번의 尊王攘夷 사상가들과 교우했다. 막말에는 병제개 혁을 추진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오비번(飫肥)의 貢士로 메이지 정부에 서 활동했다. 그가 재직했던 진토쿠도는 유학 교육기관이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국학과 양학을 신설했고, 메이지 정부의 관료, 외교가를 다수 배출 했다. 38
36 樽井藤吉(1893), 앞의 책, 2쪽.
37 오타시로 고도쿠는 일반적으로 오타시오 오오타시로(太田代熊太郞)라고 불렸고 호는 도코쿠(東谷), 별호는 시라지안(不知菴)이었다(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辭典 (2001), 講談社)
38 長友禎治(2008), 「幕末維新期に活躍した振德堂の儒者たち」, 宮崎縣文化講座硏 究紀要 35, 13~17쪽.
그 역시 오타시로와 같은 유학자였지만, 그는 국학에 기초하여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던 인물이었다. 오카모토 서문에 따르면 1873년 도쿄에 온 다루이가 이나즈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서 자신의 초고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 청했고, 이 과정에서 이나즈는 다루이를 알게 되었다. 대동합방론에 지지 를 보낸 인물은 다루이가 출판 이전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사승 관계를 맺게 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유학자이거나 유학을 토대한 국 학자들이었다. 한편 다루이는 책의 출판 이전인 1892년 피선거권을 얻기 위해 모리모토 (森本)란 씨를 계승하여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여기에는 나라의 토호였던 도 구라 쇼자부로(土倉庄三郞, 1840~1917)의 도움이 있었다. 도구라는 다루이 와 동향인 나라현 출신으로 임업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 근대 일본의 임업 선각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유민권운동의 후원자로 이 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1837~1919)와 친밀한 사이였다. 그의 지원 자금 으로 대동합방론 3천부가 출판될 수 있었다. 대동합방론은 일본, 조선, 중국의 서점을 통해 판매되었다. 도쿄는 마루센 서점(丸善書店),39 오사카는 마 에가와 젠베(前川善兵衛)상점40, 인천은 조선신보사(朝鮮新報社), 상하이・텐 진・한커우・충칭・푸저우는 낙선당(樂善堂)에서 판매되었다. 다루이는 1893년 출판된 대동합방론을 천황, 황후, 황족, 내각 대신, 귀 족원과 중의원 의원, 그리고 자신의 벗들에게 보냈고, 신문사에도 보내 비평 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신문은 이 책을 혹평했다. 사가의 연구에 따르면, 東 京日日新聞은 이 책은 시야가 넓으나 실행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며, 청국은 일본이 조선을 넘보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을 알게 되면 더 욱 의심하고 감정이 나빠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報知新聞은 천박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으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혹평했다. 다루이는 훗날 호치신 문의 혹평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러시아에 매수되었다는 비난 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41
39 1869년 마루센 상점으로 시작하여 대규모 서점을 열였다. 창업자 丸屋善八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인이었다.
40 마에가와 젠베의 집안은 대대로 에도시대 어용 상인이었다.
41 嵯峨隆(2018), 앞의 논문, 67쪽.
이 책이 출판될 당시 일본에서는 대외강경론이 확산하고 있었다. 1887년 영국과의 조약개정이 좌초된 후 메이지 정부의 점진적인 조약개정 노선을 비 판하는 국수주의 단체인 대일본협회의 활동이 진행되었고, 동양자유당, 동맹 구락부, 입헌개진당, 국민협회, 정부조사회 등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소위 對 外硬六派는 영일통상항해조약 체결을 반대하고, 청국과 조기에 개전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과 합종해야 한다는 다루이의 주장은 당시 일본의 주류 여론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여론지형에서 다루이가 이 책을 출판했다는 사 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日韓古今之交涉’에는 한일 간의 전쟁 그 리고 흥선대원군의 행동과 김옥균의 반란으로 서로에 대한 반감이 생겼지만, 이것 때문에 한일 합동에 반대하는 것은 장래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하여 일 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반청・조선 감정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42
42 樽井藤吉(1893), 앞의 책, 101~102쪽.
이는 당시 확산하고 있었던 대외강경론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Ⅲ. 대동합방신의에서 일본 현대어 번역까지
대동합방론에서 긍정적 의미를 발견한 것은 청일전쟁 이후 청의 변법무 술파였다. 1898년 상하이 大同譯書局은 다루이의 책에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서문을 붙이고, 그의 제자인 첸샤센(陳霞審)의 교정과 수정을 거 쳐 대동합방신의를 출판했다. 대동역사국은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의 동생 캉유푸(姜有溥)가 변법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의 서적을 번역하여 출판했던 곳이었다. 량치차오는 신의 서문에 역경과 서경의 글귀를 인용해서 ‘保合太和’, ‘合 和萬邦’이라고 하면서 다루이의 주장에 공감을 표현했고, 공자의 대동사상을 소환하여 다루이의 계책이 아시아의 자주를 보존할 수 있는 장책이라고 평가 했다. 43
첸샤첸은 어휘와 내용 일부를 수정했다. 량치차오의 서문과 1910년 재판된 대동합방론 서문에 언급된 대로 량치차오와 다루이 사이에 출판에 대한 사전 논의는 없었다. 첸샤센은 먼저 캉유웨이가 좋아하지 않는 어휘를 수정했다. 다루이가 사용 했던 한토, 청국, 지나란 표현을 중국으로, 淸人을 華人으로 수정했다. 그리 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을 고려하고, 청의 위상과 황제 의 이미지를 손상할 수 있는 문장을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대동합방론에서 의미를 완전히 삭제하거나 수정이 이루어진 장은 중국 의 상황을 설명한 ‘한토정황’,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한 ‘조선정 황’과 ‘일한고금지교섭’이었다. ‘한토정황’에서는 만주족의 호복과 변발을 도 적들의 移風易俗으로 비판한 것, 중국 인민들이 청 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한 다는 것, 광저우나 푸저우에서는 만주족을 서양 외국인과 동일시한다는 것, 만주족이 한족을 점령한 것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을 삭제했다. 대신 중국에서 여성들이 억압받는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이 첨가되 었다. 44 캉유웨이는 중국에서 여성의 억압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여성 의 평등을 주장했던 캉유웨이의 생각이 첨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5 그러나 중국이 노쇠하여 중화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대해 오만불손하게 대우한다는 내용이나, 베트남이 프랑스에 사대하 는 것이 중국에 사대하는 것보다 낫다는 표현 등은 그대로 두었다. 이는 개혁 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의 쇠퇴를 일본인의 눈을 통해 보여줄 필요 가 있었던 것 같다. 46
43 梁啓超(2005), 飮氷室合集-集外文上冊, 北京大學出版社, 15~16쪽
44 大東合邦論의 71~73쪽의 내용을 신의에서는 중국에서 여성을 억압했던 문 제로 바꾸어 놓았다(雷家聖(2010), 「《大東合邦論》與《大東合邦新義》互校記-兼 論晩淸‘合邦論’在中國的發展」, 중국사연구 111, 89~94쪽).
45 캉유웨이, 이성애 옮김(2006), 大同書, 을유문화사, 301~400쪽. 46 배경한(2016), 「戊戌維新 전야 개혁파의 아시아 인식-大東合邦新義의 출판 과 중화주의의 변용」, 중국근현대사연구 70, 2016, 13쪽.
‘조선정황’에서는 당시 중국이 러시아에 흑룡강을, 베트남을 프랑스에 빼 앗기고, 미국과 호주에 이민한 중국인을 보호할 형편도 되지 못하는 상황이 기 때문에 조선도 도울 수 없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47 이 부분을 삭제한 이유 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48 그러나 이 장 이외의 장에서 러시아와 베트 남의 상황에 설명한 내용은 삭제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이 이제는 중국의 속 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되었다는 내용의 문장도 삭제하지 않았다. 49 따라서 이 문장을 삭제한 이유는 해외의 중국인을 청정부가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 분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일한고금지교섭’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설명 중 명군이 조선을 도운 것 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을 위한 것이고, 중국은 역사적으로 늘 조선을 노예처럼 대우했다는 표현도 삭제되었다. 50 이 문장을 삭제한 것은 임진왜란 에 대한 중국인의 기억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동시에 청일전쟁을 연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캉유웨이가 이 책에 주목한 것은 중국의 개혁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국가 연합’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출판한 것은 1898년 2월이었 고, 무술변법 운동 개시 이전인 5월에는 주청일본공사 야노 후미오(矢野文雄, 1851~1931)와 ‘합방대회의’를 개최하고자 했다. 이 회의는 러시아가 알게 되 어 중지되었지만, 무술변법 개혁파와 주청일본공사관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던 것 같다. 51
47 大東合邦論 81쪽.
48 배경한의 연구에서는 이 문장을 삭제한 것은 중국이 조선에 대해 여전히 지배력 을 미치거나 원조할 수 있다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배경한, 앞 의 논문, 15쪽).
49 大東合邦論 102쪽 ; 新義 48쪽.
50 大東合邦論 99~101쪽.
51 雷家聖, 앞의 논문, 99쪽.
그리고 1898년 7월 홍루충(洪汝冲)이 광서제 에게 올린 3가지 개혁안 중 하나가 연방제였다.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 영국 선교사로 당시 북경에 있었던 티모시 리차드가 제의한 중국, 영국, 미국, 일본 4개국 연합을 실천에 옮기자는 것이었다. 캉유웨이는 중국과 일본의 연방을 통해 중국, 아시아, 황인종 국가의 보존 과 문명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공자의 대동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양학파였던 그는 당시의 국제질서를 국가가 난립했던 거 란세로 파악했고, 자강과 동종의 연합을 통해 국가 단위의 평화 시대인 승평 세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연합의 확대를 통해 대일통의 태평 세인 대동사회를 이를 수 있다는 지향을 갖고 있었다. 52 캉유웨이는 유교적 이 상과 유럽의 국가연합이론을 접맥시킨 다루이의 책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술변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899년 대동역서국은 량치차오의 서문을 빼고 다시 발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3 신의는 현재 고려대학교 육당문고에 소장되어 있 는데 이 책은 량치차오의 서문과 오카모토의 서문이 없고, 가즈키의 서문은 작성 시기가 1897년으로 되어있다. 신의가 중국에서 무술변법 개혁파에 의해 ‘국가연합’의 중요성을 설명한 서적으로 소환되는 동안 다루이는 사회문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1897 년 그는 아시오(足尾) 동 광산의 환경오염에 항의하는 운동에 관여했다. 일본 관동지역 도치키현과 군마현에 위치한 오미지구 동광산 개발로 배연, 광산의 독가스, 독수 등으로 인근 지역에 심각한 오염이 발생했고, 지역 농민들이 도 쿄에 올라와 문제해결을 요구하면 시위를 벌였다. 다루이는 이 운동에 참여 하여 광독예방령이 제정되는 데 기여했다. 다루이가 훗날 광산경영을 했던 것도 이 운동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1897년에는 國有銀行論 을 잡지 太陽에 연재했다. 54
52 캉유웨이, 이성애 옮김(2006), 앞의 책, 217~260쪽.
53 배경한, 앞의 논문, 11쪽.
54 櫻井義之(1937), 앞의 논문, 206쪽.
청일전쟁 이후 그는 일본의 경제적 변화와 그 에 따른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활동을 했다. 1905년 이후 그는 몇 차례 한국에 와서 연방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에는 한일 연방안을 조목 수십 개로 제시한 책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제작하여 배포하다가 통감부에 의해서 회수되고 일본으로 보내졌다. 55 이 책자로 인해 전국에 소동이 빚어지고 합방안을 둘러싼 찬반 여론이 비등해졌다. 56 그가 다시 한국에 온 것은 1909년 4월경이었다. 5월 대한매일신보는 다 루이가 鏡城에서 체류하다가 일이 여의치 않아서 4월 30일 부산으로 갔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57 그리고 그해 7월 농상공부는 그에게 함경남도 영흥군 장흥사에 있는 흑연광 237,075평에 대한 채광을 허가했다. 58 이때 그가 한국 에 온 것은 광산경영을 위한 것을 분명해 보인다. 그의 한국 체류 시기에 연 방론 여론이 다시 확산하고 있었다. 1909년 4월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연방 또는 합방에 대한 한국인의 의견이 분분하게 일어나고 에 대한 기사가 실렸 다. 59 또한, 일본에 간 한국인관광단이 연방제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 도 했다. 60
55 皇城新聞 1907년 3월 24일 「樽井逐送」.
56 皇城新聞 1907년 4월 21일 「所謂聯邦組織의 文子」.
57 大韓每日申報(한글) 1909년 5월 15일 「진즉가지」.
58 皇城新聞 1909년 7월 21일 「鑛業許可數」.
59 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9년 4월 22일 「聯邦成乎」.
60 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9년 4월 24일 「傳說難信」.
1909년 4월에서 7월 사이 한국에서 그가 연방운동을 재개했는지 는 분명하지 않지만, 1910년 ‘병합’에 앞서 그가 자신의 책을 다시 발간했다 는 점을 보면, 그는 한일연방운동을 지속해서 전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루이는 1910년 6월 대동합방론을 다시 출판했다. 1910년 재판 본에 는 다루이의 재판서문이 붙어 있고 서문과 본문의 내용은 대동합방론과 동 일했다. 책 뒤편에 실린 ‘宇內獨立國一覽表’의 내용은 독립국 상황의 변화로 수록하지 않았다. 1909년 10월 이후 일본 신문 매체에서 조선 병탄론이 제기 되고, 12월 일진회가 청원서를 제출한 이후 일본의 조선 병탄에 대한 여론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1910년 5월 제2대 소네 통감의 경질설이 기정사실로 되 는 시점에서 다루이는 평소 한일 ‘합방’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대내외에 알리 기 위해 이 책을 발간했다. 그는 자신의 책이 ‘국가를 연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개괄적으로 말한 것으로 지금 그 시기가 무르익었으니 연합이 지체되 지 않고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대동합방론을 쓴 이후로 남아프리카, 말레이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연방제를 설립하여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중앙아메리카 나라들도 연합논의가 제기되고, 벨기에가 독일연방에 가입하고 싶어 하며, 하와이가 미국에 멸망했다고 하면서 ‘세계 대세가 스스로 증명’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했다. 61 그러나 그는 재판 서문을 통해 1893년 주장한 자신의 연합론 일부를 수정 했다. 자신의 책이 국가연합 방법에 대한 개괄서로 ‘합방’의 제도만을 채택하 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아프리카가 연합하여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어 결국 독립국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세계 대세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재판 서문에서 밝힌 ‘연합’은 양국의 대등한 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합방론과 日韓聯邦條規私案草稿에서는 일본 의 천황이 연합국의 왕이 되지만, 한일 양국은 기존의 왕을 그대로 추대한다 고 하여 지방정부로서의 양국의 위상을 대등한 것으로 구성했다. 또한 재판 본 서문에는 정치참여 여부를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한일 인민의 정치참여 에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양국의 대등한 지위와는 다른 내용 이다. 그는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합방’ 방식을 의식하여 자신의 기존 견해를 일부 수정했다. 강제병합 이후 그는 함경남도 흑연 광산경영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나 1912년에는 함경남도 영흥군 소재 임시거주지에서 퇴소했고, 62 1915년에는 광산경영 대리인을 정하고 사실상 경영에서 물러났다. 63 1919년에는 明治維 新發祥記를 저술하였다. 64
61 樽井藤吉(1910), 再版 大東合邦論, 3쪽.
62 「鑛業事項」, 朝鮮總督府官報 578, 1912년 7월 30일.
63 「鑛業事項」, 朝鮮總督府官報 884, 1915년 7월 14일.
64 樽井藤吉(1919), 明治維新發祥記, 明治維新發祥地記念銅標建立會.
1863년 존왕양이를 기치로 메이지유신 시작을 알 리는 거병이 일어났던 나라현의 오조시가 메이지 유신 발상지 기념동표를 건립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 이 단체가 다루이에게 책의 저술을 부탁했던 것을 보인다. 1922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매우 궁핍하게 살았다고 한다. 다루이의 사후 그와 대동합방론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은 1937년 이었다. 서지학자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사쿠라이 요시유키(櫻 井義之)는 「동양사회당 樽井藤吉과 조선합방론)(1)」을 게재하여 다루이 도키 치를 다시 소환했다. 65 동양사회당의 성격과 그의 행적을 고찰했지만 정작 다 루어야 할 ‘조선합방론’에 대한 내용이 담길 후속 논문은 작성되지 않았다. 66 그의 논문 제목이 ‘조선합방론’인 것으로 보아 그는 대동합방론을 ‘조선합 방’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4년 구지 한지로(久慈畔二郞)는 「樽井藤吉と朝鮮」이란 글에서 대동합방론은 일본을 맹주로 한 아시아 민족 의 대동단결, 소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주장한 것으로 평가했다. 67 중일전쟁 이후 동남아시아로 침략을 확대했던 상황 속에서 다루이는 남방경영의 선각 자로 조명 받았다. 대동합방론에서 베트남의 주권을 회복시키고 인도차이 나의 나라와 연합하고, 말레이 반도를 백인들의 손에서 탈환해서 일본과 인 도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를 개통할 것 등을 주장한 내용을 소환하여 일본의 남방경영을 아시아의 번영으로 의미화했다. 68
65 櫻井義之(1937), 앞의 논문, 195~206쪽.
66 그의 환갑기념으로 그의 글을 모아서 발행된 明治와 朝鮮(櫻井義之先生還曆記 念會, 1964)에도 이와 관련한 논문은 조선행정에 게재된 논문이 유일했다.
67 久慈畔二郞(1944), 「樽井藤吉と朝」, 朝鮮 344, 朝鮮總督府, 68쪽.
68 本庄榮治郞(1942), 先覺者の南方經營, 日本放送出版協會, 150~152쪽.
일본이 패전한 이후 대동합방론은 그 이전과 다른 방향에서 다시 소환 되었다. 1963년 가게야마 마사하루(影山正治)는 현대역 대동합방론을 출판 했다. 한문으로 쓰인 대동합방론을 최초로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 러나 가게야마의 번역서는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목차 는 같았지만, 내용에서는 대동합방론의 유교적 언설이 모두 빠져 있다. 그 는 ‘원문의 의미를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중요하지 않은 사유가 드러나는 부분은 생략’했다고 했다. 69
69 影山正治(1963), 앞의 책, 6~7쪽.
그는 연방과 연합의 이유, 형태, 이해관계 등을 중심으로 발췌하여 번역했다. 유교적 언설을 모두 누락한 것은 독자층 의 차이로 보인다. 유교적 언설은 1960년대 독자층에는 설득력 있는 것은 아 니다. 가게야마는 책의 서문에 “본 책 논점에서 중대한 항목의 하나는 백인침략 주의에 대한 통렬한 탄핵, 저항”이라고 하면서 “피압박 아시아의 비통한 혼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귀중한 반성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 다. ‘백인침략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대동합방론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가게야마는 1933년 사이토 마코토 수상 암살계획으로 투옥된 적이 있었 고, 1937년 일본주의문화동맹을 결성하고, 1939년 國學院 대학생 중심의 維 新기숙사를 大東塾으로 개칭하여 운영했었다. 패전 후 大東塾이 강제 해산된 후 후지(不二)출판사를 설립했다. 1954년에 大東塾을 재건하고 大東농장을 경영했다. 그는 패전 후 일본 우익운동의 중진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다.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학생운동이 격렬하게 일 어났고, 자민당은 이를 강경 진압하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우익운동가였 던 가게야마 마사하루(影山正治)는 다른 우익과 달리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 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가 현대 일본어로 대동합방론을 번역한 것은 미일 안보조약으로 일본이 미국에 의해 주권을 침해당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조약을 계기로 1963년 한일협정 문제가 한일관계의 의 제로 떠올랐던 상황도 번역서를 출판하게 된 배경이 되고 있었다. 그는 현재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차선책으로 ‘남에서 결합해서 북에 이르는 것이 한국에 대한 처리의 역사적 통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언급 하고 있다. 즉 일본과 남한이 먼저 협정을 체결하고 이어서 북과 협정을 체결 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미일안보조약과 한일협정이란 아시아 지역 질서의 변화를 배경으로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반감과 한일 연대의 가능성 을 대동합방론을 소환하여 주장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게야마의 현대역 대동합방론 출판은 1960, 70년대 일본 사회에서 제 기된 아시아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가게야마의 번역서가 출판된 1963년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는 대동합방론의 내용을 부분 발췌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70 다케우치는 대동아전쟁은 식민지 침략전 쟁과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두 개의 측면을 갖고 있는데 사 실상 하나이지만 논리상 구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두 측면의 유착을 벗겨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아시아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 개되었고,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은 점차 아시아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쓰루미 요시유키(鶴見良行)를 꼽을 수 있다. 아시아에 관한 관심은 반전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공해 반대운동, 민주 화 지원운동, 성침략 반대운동, 국제연대운동 세력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일 본 사회의 아시아에 관한 관심을 배경으로 1970년대에는 아시아 연대 의식 을 강하게 드러냈던 대동합방론이 아시아주의의 기원 또는 선구로서 주목 받았다. 1970년에는 1930년에 간행된 다나카 소고로(田中惣五郞)의 東洋社會党 考가 다시 출판되었다. 71 그리고 1975년에는 대동합방론이 복각 출판되 었으며, 72 그의 사상을 근대 지역 질서였던 아시아주의의 전체적 흐름에서 자 리매김한 연구가 제출되었다. 73
70 다케우치 요시미, 서광덕 외 편역(2004), 일본과 아시아, 소명출판사, 262~ 269쪽(竹内好의 アジア主義(1963)를 번역한 것이다.
71 田中惣五郞(1970), 東洋社會党考, 新泉社.
72 樽井藤吉(1975), 覆刻大東合邦論, 若月書店.
73 初瀬龍平(1977), 앞의 논문, 1977, 111~137쪽.
일본의 아시아주의의 두 측면이었던 침략과 연대에서 연대주의를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일본 지 식인들은 그 기원이었던 대동합방론을 소환했다.
Ⅳ. 대한제국 사회의 대동합방론 전유 과정
대동합방론이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에 관한 연구는 앞서 언급했던 마스터니의 연구를 제외하고 아직 충분히 진행되 지 않았다. 다루이의 이름이 매체에 처음 등장했던 것은 일본에서 발생한 오사카 사 건에 대한 보도에서였다. 1885년 12월 자유당 좌파였던 오이 겐타로가 주도 하여 조선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발각되었고, 관련자 139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한성주보는 도쿄 시사신보와 보지신보를 인용하여 사건의 내용과 처리 과정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다루이는 1월 19일 아라이고(新井毫, 1858~1909)과 함께 사가에서 체포되었다 고 했다.
아라이는 군마현 기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배웠고, 게이오기쥬쿠를 졸업했다. 국회 개설운동에 참여하였고, 1890년 중 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가주의 사상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오사카 사건 기사 이후 1898년까지 그의 행적이나 대동합방론에 대한 매체의 보도는 확인되지 않다. 다만, 대동합방론의 유통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1898년 매일신보에 실린 대한신보사의 광고다. 최남선이 다녔던 명동의 경성학당 내에 있었던 대한신보사는 신국민이라는 잡지를 발간하 기로 하고 잡지에 실릴 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투고된 글을 심의하여 상품을 준다고 했는데 이때 제시된 상품이 대동합방론이었다. 74 1등부터 3 등까지 대동합방론 1권, 그리고 발간 예정인 신국민이 1등 2권, 2등 1권 으로 제시되었다. 강제언의 연구에 따르면 1898년에 상하이 대동역서국에서 발간된 대동 합방신의가 1천 부 정도 대한제국에 수입되어 유통되었고 모두 판매되어 등 사본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했다. 75
74 每日新聞 1898년 6월 23일, 「大韓新報社廣告」,
75 강재언(1984), 「아시아주의와 일진회」, 한국사회연구 2, 한길사, 242쪽
2월 상하이에서 발간된 책은 기선으로 3월이면 대한제국 서점에서 판매할 수 있다. 매일신보의 광고는 6월에 실렸 기 때문에 대동합방신의가 한국에서 유통된 후였다. 경품 서적 제목이 대 동합방론이기 때문에 책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거나 일본에서 발간된 대 동합방론의 등사 또는 필사본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육당문고에 소장된 신의는 량치차오의 서문이 빠지고 대신 겉표지 다음 장에 ‘대동합방론’이 란 또 다른 표지가 함께 나와 있었기 때문에 신의가 곧 대동합방론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신의와 대동합방론의 내용적 차이가 대한제국 독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후 ‘대동합방’ 이 란 용어가 대한제국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1905년 이전 다루이와 대 동합방론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동합방’이란 어휘와 1907년 다루이가 배포한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 을 처음 주목한 마스터니에 따르면, 이용구가 대동합방론에 공감하고 있었 다는 흑룡회의 기록이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용구가 이 책에 기초하여 ‘정합방’을 주장했고 볼 수 없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그리 고 한국 인사들은 다루이 책을 한일의 동맹적 관계를 의미하는 아시아연대로 받아들였다고 보았다. ‘아시아연대론’이 지역 질서에 대한 포괄적 담론이기 때문에 마스타니의 지적 역시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 동합방론이 대한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좀 더 구체적인 고 찰이 필요하다. 1898년 11월 매일신보는 중국 무술변법의 실패와 뒤이은 서구열강의 중국 분할을 보도하면서 ‘동양’이 위기에 처해있는데 동양에서 “오직 일본 한 나라가 아직 가히 일을 함직하니 (중략)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중 략) 일한 양국이 협력하여 청국을 협동 보존하면 이른바 대동합방”이 될 수 있다는 논설을 게재했다. 76
76 每日新聞 1898년 11월 3일, 「론설」.
‘이른바 대동합방’이라고 한 것은 매일신보 독자층이 이미 대동합방론을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표현이고, 동시에 ‘일한 협력’하여 청국을 보존해야 해야 한다는 것은 한일 연대의 중요성을 강 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열강의 중국 분할과 러시아의 동청철도와 만 주 철도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1898년 독립신문, 황성신문 역시 삼국 공 동의 경제개발과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뒤이어 독립신문에서는 영국 스코틀랜드 사람이 저술했다는 世界傍觀 을 인용하여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넘보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은 동양에 먼저 깬 나라로 대동합방하는 높은 의리로 동점하는 서세를 함께 방비할 생 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본의 이권침탈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77 ‘대 동합방하는 높은 의리’라는 언표는 연대를 저해하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 하기 위한 것으로 활용되었다. 이때 ‘대동합방’은 ‘연대’라는 포괄적인 아시 아주의 담론의 자장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1898년 대동합방론이 유행한 이후 신문에서 ‘대동합방’이란 용어는 거 의 등장하지 않았다. 연대, 동문 동종, 근친 의리 등 아시아연대론의 언표가 다양하게 등장하면서도 연대의 형태 또는 방안으로서 대동합방론은 언급 되지 않았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제의 반일정책, 일본의 침략 심화 등으로 한일 연대의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체성이 없는 포괄적 의미의 연대 담론을 통해 일본의 지원을 끌어내면서도 그 침략 적 행위를 비판했다. 대한제국 신문과 달리 연대의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의화단 사 건으로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이 심화하였을 때 안경수는 「일청한삼국 동맹론」을 일본 잡지 일본인에 연재하여 경제, 군사 동맹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고, 황성신문 역시 군사력의 확보를 위한 한일연대를 주장했다. 78
77 독립신문 1899년 11월 16일, 「론설」.
78 김윤희(2009), 앞의 논문, 112~122쪽.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하기위한 전거로 소환되기 시작했다. 보안회 사건으로 검거된 송수만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기 위해 “丹蒡씨의 대동합방은 진실로 不易之論”이라고 하고 “청인이 청나라를 보호하는 방책은 한・일을 보호하는 것이고, 한인이 한국을 보호하는 계책은 청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루이의 주장과 맞지 않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했다. 79 을사조약을 비판하기 위해 13도 유생이 연명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장서에서 시모노세키조약과 포츠머스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일본이 이를 저버리는 것은 신의를 배신한 것이고 일본이 신의를 저버리면 동양을 보존할 수 없다고 했다. “귀국에 大東合邦錄은 이미 선견지명이 있었다. 내가 어찌 감희 여기에 군더더기의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면서80 일본의 을사조 약 강요는 다루이가 말한 합방과 다르고 일본이 신의를 버리고 동양을 위험 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1906년 일본의 대한정책에 분개하여 할복자살한 아이치현(愛知현) 출신 西坂豊의 추도사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尹聖善 등은 자신들 이 자주독립에 고심하고 대동합방에 열성하는 자로 西坂을 추도한다고 하면 서 일본의 침략행위로 인해 “한일의 脣齒輔車의 관계가 점차 없어지고”, “대 동합종의 책이 부패”했다고 했다. 81
79 皇城新聞 1904년 8월 2일, 「宋氏供案」.
80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11일, 「大韓十三道儒生金東弼氏等이 伊藤候에게」.
81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3일, 15일, 「吊西坂氏文」, 「吊西坂氏文續」.
대동합방론은 신의에 기초한 한일의 연대 주장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신의를 저버린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할 수 있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위 기사가 게재된 지 2개월 후 대한매일신보는 다루이가 배포한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가 황제에 전달된 사건을 비판하는 논설을 게재했 다. 다루이는 대동국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와 방법을 조규의 형태로 작성하 여 10쪽 분량의 팜플렛을 평양 부근에 배포했고, 이 책자를 내각 대신 중 한 명이 황제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82 수도를 도쿄에 두고 지방정부는 순연한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중앙정부는 군사, 재정, 세납, 입법을 주관하고 관세를 폐지하는 형태의 ‘맹국’으로 소개되었다. 83 이 초안은 대동국의 구체적 형태 를 규정한 것이었고, 다루이는 재판 서문에서 연방 제도를 연구하고 이 초고 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다루이는 이 책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었다 고 생각했고, “독자 중 사고(私稿)와 공문(公文)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 어 혹시 물의를 일으킬까 염려되어” 결국 (재판에서는) 생략하기로 했다. 84 대 한매일신보는 이 팜플렛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합방’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이용구 역시 박제순 내각 탄핵문에서 이 팜플렛을 비판하면서 이것을 황제에게 전달한 내각 대신의 처 벌을 요구했다. 대동합방론은 연대를 위해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전거로 인용되면서 초 안은 일본의 병탄으로 비판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는 ‘동양’의 가치 를 중심으로 한 연대라는 유교의 이상이 드러난 것이었다면, 후자는 고통스 러운 현실의 구체성이 드러난 것이란 차이가 있다. 이는 동양의 위기에 대처 하는 데 필요한 한일 연대 담론과 국력과 국제적 지위의 차이라는 현실을 반 영한 연대의 구체성 사이의 괴리였다. 일한합방조규사안초고가 대한제국사회에 유통되면서 지식인들은 한일 연방의 실현 여부와 구체적 형태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갖기 시작했다. 1909년 통감 통치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고, 4월에는 이토 통감이 가 쓰라 총리로 교체될 것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85
82 「한일합방조규사안초고」의 발견 과정과 여기에 대한 이용구의 반대입장에 대해 서는 마스타니 유이치의 연구를 참조할 것.
83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9일, 「又一長森藤吉」.
84 樽井藤吉(1910), 앞의 책, 2쪽.
85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8일, 「통감총리상환」.
통감 통치의 변화 가능성 이 제기되면서 앞서 언급했듯이 한일연방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근일 한일 연방 문제가 나서 한인들이 연방인지, 합방인지 분개한 뜻을 품고 이것을 환영할까, 방해할까 의론이 분분하다.”라는 보도에서는 이완용, 이용구 등이 앞 으로 어떤 운동을 전개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86 그리고 이때 한인들의 논의는 막연한 한일의 연대가 아니라 한일의 국가연합에 대한 것임을 알려준 다. 1907년 이후 아시아연대론을 비판하고 나섰던 대한매일신보는 한일연 방론에 분명한 반대를 표명했고, 한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는 자세히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 간 한인 관광단과 송병준의 합방운동에 대한 추가 보도가 나온 것을 보면, 집권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여기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12월 일진회의 ‘정합방’ 주장에 대해 찬성을 표명한 찬성서에서 다 루이의 대동합방론은 ‘근친의 의리’에 기초한 연대뿐만 아니라 국가연합형 태에 대한 모델로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진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례를 제시했지만, 국민동지찬성회는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사례를 제 시했다. 두 사례는 동군연합국이었고, 다루이는 대동합방론(1893)의 부록 표 「宇內獨立國一覽表」에서 헝가리와 노르웨이는 동군연합의 독립국으로 분 류했다. 87
86 大韓每日申報(한글) 1909년 4월 18일 「흉측한 계책」.
87 樽井藤吉(1893), 「宇內獨立國一覽表」, 앞의 책, 145~152쪽.
그리고 연합국의 왕을 일왕으로 하고, 한국과 일본은 각기 자신들 의 왕을 섬긴다는 다루이의 주장과 유사한 형태는 국민동지찬성회가 제시한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사례였다.
다루이의 대동합방론은 초기 포괄적 의 미의 연대로 받아들였지만, 1907년 이후에는 점차 연대의 의미를 포함하면 서도 국가연합의 형태로 해석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한편으로는 본서가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형태의 합방을 주장한 점에 착 안하여, 본서에서는 한일 연대사상의 맹아가 있다고 해서 다루이를 한일 연대운동의 선구자라고 칭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본서가 일본의 한국 병합 때에 한일병합론자들에게 애독되어 한국 병합에 한몫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한국 침략의 무기가 되었음을 비난한다.”88
88 旗田巍, 이기동 역(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27쪽.
하타다 다카시는 이 책이 연대와 침략이라는 양면성을 갖는 문제적 저술 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기 이전 이 책은 대동 아공영권의 하위 서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다. 패전 이후에는 미국의 일본 주권 침해를 비판하기 위해 또는 한일의 외교 관계를 축으로 하는 아시 아 지역 질서구상을 복원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양면성을 가진 이 책에서 침 략주의를 소거하고 연대의 지역 질서를 복원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 다. 이 책의 양면성은 미래지향의 담론과 자각된 현실 사이의 간극이 빚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 사회에서도 이 책은 한일관계의 전망에 따라 일본의 지 원을 요청할 때도, 일본의 침략적 행위를 비판할 때도 중요한 전거로 인용되 었다. 또한, 1909년 ‘정합방’청원서가 제출된 이후 이 책은 일본의 병탄을 비 판하고, 대등한 국가연합을 주장할 때도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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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Publishing and Appropriation Process of National Union Theory
Kim, Yun-hee*
Daridokichi's theory of "Daedong annexation" is based on the ideal values of Confucianism, which includes both the solidarity of Asian countries and Japanese aggression. Existing studies have different assessments depending on whether they pay attention to the ideological trend of the time or to the process of further expansion of Japanese aggression. On the other hand, few considerations have been made about the discourse of the book, its acceptance in Korea, and the process in which it has been repeatedly summoned since the death of Daridokichi. Based on existing research, this article examines the situation in which the theory of the Great East Joints was published, reissued, translated into Japanese, and recognized around 1910. Furthermore, we look at how this book was being inherited by the Korean Empire society just before the forced annexation in 1910. Based on this, we intend to contribute to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regional order initiatives at this time.
Key word : United Nations, Japan and Korea’s annexation, Asianism, Daridokichi
논문 투고일: 2020. 11. 14 심사 완료일: 2020. 12. 18 게재 확정일: 2020.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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