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이 논문은 친밀성(intimacy)의 물화(Verdinglichung)를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체 계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이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작업이 수행된다.
첫째, 친밀성과 친밀 관계의 개념을 관련된 철학 적, 사회학적 연구들에 기초하여 명료하게 규정하고, 그동안 친밀성 영역과 관련된 논의 의 중심 개념을 이루어온 성(sexuality), 사랑(love), 가족(family)의 개념을 검토하고 각 각의 한계를 살펴봄으로써 이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물화 현상의 사회철학적 분석을 위 해서는 친밀성 개념이 기본 범주로 가장 적절하다는 점을 보인다.
둘째, 친밀성의 물화를 ① 주관, ② 상호주관, ③ 객관의 세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정식화 하고, 친밀 관계의 5가지 유형, 즉 ‘사랑’, ‘애정’, ‘친애’, ‘인간-동물 관계’, ‘인간-신 관계’ 중 ‘사랑’의 친밀 관계가 친밀성의 물화 과정의 핵심에 있음을 살펴본다.
셋째,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의 주요 내용을
① 상호주관의 물화, ② 주관의 물화, ③ 객 관의 물화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개괄하고, ①~③ 사이의 상호 연관을 드러낸다.
주제어 친밀성, 친밀 관계, 물화, 사랑, 상품화
1. 들어가는 말
친밀성(intimacy)은 사회 관계의 개인적 계기라는 측면에서 ‘인간들 간 의 높은 수준의 상호 침투’(hohe zwischenmenschliche Interpenetration) 1를 의미 하는 개념으로서, 친밀 관계(intimate relationship)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철 학적 분석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토대를 이룬다.
모든 인간의 사회 관계가 부모-자식 관계에서 시작하고, 이러한 최초의 친밀 관계의 경험으로부터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2
친밀 관계 는 개인이 좋은 삶(good life)을 영위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친밀 관계와 무관한 형태의 좋은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족, 친구, 지인과의 친밀 관계 는 행복한 삶의 영위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이룬다.3
아리스토텔레 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가졌더라도 친애(φιλία)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삶은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4
1 N. Luhmann (1994), Liebe als Passion, Suhrkamp, p. 200.
2 어머니와 유아 사이의 이러한 ‘원초적 상호주관성’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는 D. Winnicott (1963), “From Dependence towards Independe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The Maturational Processes and the Facilitating Environment, Karnac, pp. 83- 92. 참조. 또한 위니캇의 논의를 ‘사랑’이라는 인정 관계와의 연관하에서 사회철학적 관 점에서 분석한 것으로는 A. Honneth (1994), Kampf um Anerkennung, Suhrkamp, pp. 159-169 참조.
3 친밀 관계에 대한 경험과학적 연구들은 친밀성이 우리의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웰빙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친밀 관계가 ‘삶과 죽음의 문제’(a matter of life and death)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관 련해서는 T. Bradbury and B. Karney (2014), Intimate Relationships, W. W. Norton & Company, p. 21; G. Fletcher et al. (2019), The Science of Intimate Relationships, Wiley Blackwell, p. 90 참조.
4 Aristoteles (1920), Ethica Nicomachea (ed. by I. Bywatered.), Oxford University Press, p. 155(1155a) 참조.
특히 현대 사 회에서 낭만적 사랑에 기초해 있는 친밀 관계는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원 천이며, 타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 관계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고유한 가 치를 정립하는 과정으로서의 인정(Anerkennung)의 질서에서 핵심적인 위치 를 차지하고 있다.5
이처럼 친밀 관계가 개인 정체성의 가장 내밀한 부분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의 해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법적 조 치나 경제적 보상 등을 통해 완전히 복구될 수 없으며, 깊은 슬픔을 가져오 게 된다.6
하지만 친밀성 및 친밀 관계가 좋은 삶의 영위와 관련하여 갖는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철학의 영역에서 이를 주제적으로 다루는 연구 는 찾기 힘들다.
친밀성 일반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연구는 없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며, 친밀성과 연관되어 있는 세부 주제인 ‘사랑’이나 ‘우정’, ‘가족’ 등에 대한 연구 또한 수가 많지 않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현재의 상 황이다.7
5 E. Illouz, (2012), Why Love Hurts, Polity, p. 120. 일루즈가 여기서 사용하는 ‘인정 질서’ 의 개념은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서 가져온 것이다.
6 M. Nussbaum (2016), Anger and Forgiveness, Oxford University Press, pp. 94-95 참조.
7 친밀성과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철학적 연구로는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친애를 다루고 있는 8권과 9권,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의 우애(Freundschaft)에 대 한 논의, 인륜성과의 연관하에서 가족을 다루고 있는 헤겔의 『법철학』을 들 수 있다[G. Hegel (1986),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Suhrkamp, pp. 308-339 참조]. 친 밀성의 물화에 대한 인식은 마르크스와 루카치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아도 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남기고 있다[M. Horkheimer and T. Adorno (2012), Dialektik der Aufklärung, Fischer, p. 139 참조]. 하 버마스 또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근대 이후의 새로운 주체성의 원천으로서의 친 밀성의 영역인 핵가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J. Habermas (1962),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Luchterhand, pp. 61-69 참조].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사랑’, ‘권리’, ‘연대’ 라는 3가지 인정 관계 중 ‘사랑’을 통해 친밀성 영역 전체를 포괄하고자 하며, 특히 사회적 자유와의 연관 하에서 개인적 관계의 세 유형인 우정, 사랑, 가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Honneth, 2011: 232-317 참조]. 국내에서는 정성훈과 박구용이 각각 친밀성과 관련된 논 의를 전개한 바 있다[정성훈(2011), 「현대 도시의 삶에서 친밀공동체의 의의」, 『철학사상』 제41권, pp. 347-377; 박구용(2020), 「친밀성의 구성과 구조의 전환」, 『대동철학』 제93집, pp. 163-195 참조]. 친밀성과 참고할 만한 사회학 연구로는 근대 이후 사랑의 코드화에 대 한 루만의 연구, 그리고 성과 사랑의 영역에서의 구조 변동을 다룬 기든스의 연구를 들 수 있다[N. Luhmann (1994); A. Giddens (1992),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Stanford University Press 참조]. 바우만은 ‘유동적 사랑’(liquid love)의 개념을 중심으로 오늘날 성과 사랑의 영역에 ‘경제적인 것’의 코드가 침투하는 과정에서 이 영역이 해체되는 과 정을 분석하는데, 이는 본 연구가 다루는 친밀성의 물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성을 가진다 [Z. Bauman (2003), Liquid Love, Polity 참조]. 특히 일루즈가 비판 이론의 영향하에서 전 개하는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는 문화 산업에 의한 친밀성의 물화와 관련하여 참고 할 부분이 많다[E. Illouz (1997), Consuming the Romantic Utop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Illouz (2012)].
이처럼 사회철학에서 친밀성에 대한 논의가 주변화된 원인은 다 음의 두 가지로 진단할 수 있다.
하나는 철학의 관점에서는 공적인 것(the public)이 비공적인 것(the nonpublic)에 우선성을 가지며 더 중요하다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다.
이러한 생각을 따를 경우 비공적인 것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차원에 속하는 친밀성은 논의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거나, 혹은 공적인 것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일종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 륜성을 이루는 세 영역으로서의 가족-시민사회-국가에 대한 헤겔의 논의 는 이를 잘 보여 준다.
헤겔의 이러한 구도에서 국가는 구체적인 자유의 실현으로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이익을 총괄하는 인륜성의 최고 형태인 반면,8 친밀성의 영역에 속하는 가족은 공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는 국가보다 낮은 단계이며 그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중간 단계로 이해된다.9
8 Hegel(1986), pp. 407-408 참조.
9 이와 관련하여 호네트는 헤겔이 실정법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는 상호작용 관계들만을 인륜성의 사회적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친밀성 영역을 혼인에 의한 가족 제도로 너무 협 소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륜성 영역은 사회적 근대화 과정 안에서 형성된 소 통 관계들을 포괄했어야 하지만, 헤겔은 결국 사랑의 상호성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포괄적인 직관을 혼인에 의한 가족 제도로 환원하고 만다는 것이다[A. Honneth (2001), Leiden an Unbestimmtheit, Reclam, pp. 114-115]. 하지만 공적인 것/비공적인 것의 구분 에 따라 친밀성 영역을 암묵적으로 평가절하할 가능성은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서도 나타난다.호네트에 따르면 사랑, 권리, 연대라는 인정 관계의 세 영역에서 ‘사랑’은 일차적 관계를 넘어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공적 관심사가 될 수 없는 반면, ‘권리’나 ‘연대’는 공적 관심사가 될 수 있다[Honneth (1994), p. 260].
또한 ‘공공의 것’(res publica)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공화주의적 전통에서는 친밀권(intimate realm)을 공공권(public realm)이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 하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개인이 도피해 들어가는 공간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대표하는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이후 친밀성의 발견은 개인이 모든 외부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내적 주관성으로 침잠 해 들어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10
개인이 공공권에서 시민으로서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영위하지 않고 친밀권안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이자 퇴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 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친밀성에 대한 주제적 탐구를 가로 막는 주요 장애물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친밀성 및 친밀 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은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판단에 맡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철학적 관 점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민주 주의 사회에서 모든 시민은 자신이 추구할 목적과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 하며, 더 나아가 어떠한 삶이 좋은 삶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을 추구 할 권리를 가진다.
말하자면 시민 각인은 좋음(good)의 문제에 대한 불가침 의 자기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친밀성 및 친밀 관계와 연관되는 개인의 자 유는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차원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완전하게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이 자신의 선관 (conception of the good)에 따라 누구와 친밀 관계를 맺을지 혹은 맺지 않을지, 그리고 자신의 가족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지 혹은 구성하지 않을지를 결정 하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개인 선택의 자유에 맡겨져 있는 것이 무엇이 있 겠는가?11
10 H. Arendt (1958), The Human Condition, 2nd E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69. 또한 이와 관련된 논의로는 齋藤純一(2000), 『公共性』, 岩波書店, pp. 90-91 참조.
11 선관의 개념에 대해서는 J. Rawls (2005), Political Liber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p. 30 참조.
이러한 생각을 따를 경우 현대 사회의 친밀성 영역에서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든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시민 각인의 자유로운 선택들이 수 렴된 결과물이므로, 그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부적절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한 논의는 자칫하면 좋은 삶에 대한 특정 한 관점을 강요하거나 개인 선택의 자유에 맡겨 두어야 할 문제에 간섭주 의적으로 개입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친밀성 영역에서 나타난 모종의 구조 변동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통계청의 2021년 출생 통계 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역대 최저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인 0.81명을 기록하였다.12
지속적인 출산율 하락으로 인해 예상되는 급격한 노령화와 인구 감소는 한국 사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 를 드리우고 있다.
정부는 2006년부터 16년 동안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200조에 가까운 예산을 지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13
12 「작년 합계출산율 0.81명, 또 역대 최저치… 신생아 전년 대비 1.2만명 감소」, 『조선일 보』, 2022.8.24(https://biz.chosun.com/policy/policy_sub/2022/08/24/HQGMXBJBO REUXG3LAFSC56RYF4/) (접속일: 2022.9.4.).
13 「황당한 저출산 대책… 200조원 퍼붓고 ‘출산율 0명’된 이유」, 『한국경제』, 2021.8.28. (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2108273965i)(접속일: 2021.9.7.)
정부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 면서 무기력감과 체념이 확산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국 사회의 출산율 하락은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의 낮은 취업률이나 실질적 기대 소득의 하락, 부동산 폭등 등의 경제 상황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 로는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과도 같은 가치관의 변화에서, 즉 더 이상 결혼이나 육아를 좋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 가치관이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제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만, 특히 개인의 가치관과 관련해서는 정부를 비롯하여 그 어떤 다른 주체 도 개입할 수 없다.
정부는 출산 장려를 위한 여러 정책들을 제시하고 시민 들이 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며, 이를 통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친밀성 영 역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그와 연관되어 있는 가치관의 변화에서 일정 부분 기인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정말 순수하게 개인 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만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 공공 철학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 각인이 누구나 자신의 좋은 삶에 대한 관념을 자유롭게 형성하고 그것을 추구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러한 사회 안에 살고 있을까?
오늘날 친밀성 영역에서 결 혼이나 출산이 감소하는 현상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만 이해하 기 어려운 것은, 그 외에도 연인 관계나 친구 관계, 지인 관계는 물론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친밀 관계들이 점차 약화되거나 해체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전반적인 흐름이 관찰되기 때 문이다.14
14 이와 관련해서는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2012), 김범수 역, 『무연사회』, 용오름, pp. 341-342; E. Klinenberg, (2013), Going Solo, Duchworth Overlook, p. 4 참조.
최근 하나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 는 논외로 하더라도, 사람들이 친밀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삶을 좋은 삶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흐름 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친밀성의 영역에는 이러 한 흐름을 은밀하게 이끌어 가는 어떤 사회적인 힘이 개입해 있을 수도 있 다.
이 영역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현재 분 명하게 인지되고 있지 못한 어떤 사회적인 힘에 의해 구조화되고 지속적으 로 관리됨으로써 개인을 그에 순응시키고 특정한 선택을 유도하도록 되어 있는 그러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친밀 관계의 약화 및 해체라는 현 상은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나타난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인식 되는 경향이 있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적어도 부분 적으로는 그러한 사회적 힘이 순응적인 개인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타 난 일종의 병리 현상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직관들을 ‘친밀성의 물화’(Verdinglichung)라는 개념 을 중심으로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 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 된다.
2절에서는 친밀성의 물화와 관련된 기본 개념들에 대한 해명이 이루 어진다.
즉 친밀성과 친밀 관계에 대한 개념 규정을 제시하고, 친밀성의 물 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3절은 다음의 두 부분으로 이루 어진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친밀 관계의 다양한 유형들을 분류하고, 이 중 ‘사랑’의 관계가 친밀성의 물화라는 현상과 가장 일차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대상 영역임을 밝힐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기존의 대부분의 연구들처럼 성, 사랑,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친밀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상을 분석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사랑’의 친밀 관계를 중심으로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의 개요를
① 상호 주관의 물화, ② 주관의 물화, ③ 객관의 물화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한다.
2. 친밀성, 친밀 관계 그리고 물화
2.1. 친밀성과 친밀 관계
친밀성의 물화를 사회철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친밀성 개념 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친밀성에 대한 루만의 개념 규정을 이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루만은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우리는 인간들 사이의 상호침투의 관계를 강화가 가능한 사태라는 의미 에서의 친밀한 것(intim), 친밀성(Intimität)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한 인간의 개인적 체험과 신체 행동의 더 많은 영역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유관성을 갖게 되며 이러한 사태가 서로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정도만큼 친 밀성이 개입한다고 할 수 있다.15
루만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이전의 사회에 비해 비개인적 관계와 개 인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함께 증가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때 비 개인적 관계는 관계의 수가 많아지고 종류가 다양해지는 방식으로 양적 으로 확장되는(extensivieren) 반면 개인적 관계는 그렇게 될 수 없고 관계가 질적으로 심화되는(intensivieren) 것만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 어떤 개인의 고유한 속성들을 비롯한 모든 속성들이 유관성을 갖는 사회 관계로 발전 할 수 있는데, 루만은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 간의 상호 침투’를 친밀 관계 (Intimbeziehung)로 규정한다.16
개인은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우연성을 감당 하기 위해 가까운 세계(Nahwelt)와 먼 세계(Fernwelt)의 차이, 즉 개인적으로 만 타당한 경험, 평가, 반응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익명적으로 구성되고 모두에게 타당한 세계 사이의 차이를 이용하게 되는바, 친밀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은 서로의 이웃세계에 개입하여 함께 공유하는 하나의 사적 세계를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이 루만의 설명이다.17
친밀 관계에 대한 루만의 이러한 논의로부터 이 개념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계기를 이끌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관계의 내밀함(closeness) 혹은 프 라이버시(privacy)이며, 다른 하나는 관계의 상호성(reciprocity)이다.18
15 N. Luhmann (1984), Soziale Systeme, Suhrkamp, p. 304.
16 Luhmann (1994), p. 13 참조.
17 Luhmann (1994), p. 16-17 참조.
18 프라이버시가 친밀성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이룬다는 점에 대해서는 R. Gerstein (1978), “Intimacy and Privacy,” Ethics 89(1), p. 81 참조.
즉 관 계에 참여하는 양쪽이 ① 상대방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까지 ② 상호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사회 관계가 친밀 관계인 것이다.19
친밀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이 개념을 다루는 철학적, 사회 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칸트는 친밀 관계의 유형 중 하나인 우애(Freundschaft)를 “서로에 대한 양편의 존경과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그들의 속마음과 판단과 감각을 교호적으로 열어보임에 있어 두 인 격의 온전한 신뢰”20로 정의하며, 헤겔 또한 친밀 관계의 또다른 유형인 가 족 내에서의 사랑을 일종의 ‘상호 침투’로 이해한다.21
호네트는 친밀 관계 를 익명성과 고립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내적 본성의 상 호 확인을 통해 자유를 발견하는 사회 관계로 규정한다.22
19 친밀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친밀성’(intimacy)의 어원에 대한 분석과 잘 합 치되는 측면이 있다. 영어의 ‘intimacy’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바, 초기 라틴어에 서 이 개념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은 ‘안쪽’(inward)을 의미하는 ‘interus’이며, 중기 라틴 어에서 이 개념의 기원은 ‘가장 안쪽’(innermost)을 의미하는 ‘intimus’이고, 후기 라틴 어에서는 ‘안에 넣다’(put in)를 의미하는 동사 ‘intimo’의 과거분사형인 ‘intimatus’이다. 악타르는 ‘intimacy’에 대한 이러한 어원적 분석에 기초하여 친밀성을 ‘타자의 매우 사 적인 어떤 것을 자기 안으로 수용하는 것, 그리고 또한 자기의 매우 사적인 어떤 것이 타 자 안으로 수용되도록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S. Akhtar (2019), “The Concept of Intimacy,” Intimacy (ed. by G. Kanwal and A. Salman), Routledge, p. 6 참조.
20 VI: 472. 칸트 원전의 인용은 관례에 따라 베를린 학술원판을 기준으로 괄호 안에 권수 (로마자)와 쪽수(숫자)를 순서대로 표기하였다.
21 “사랑의 첫 번째 계기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자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만약 내가 자립적인 인격인 경우에는 스스로를 결함 있고 불완전한 것으로 느낀 다는 점에 있다. 사랑의 두 번째 계기는 내가 나를 어떤 다른 인격 안에서 획득하고, 내가 그 안에서 가치를 가지며, 상대방 또한 내 안에서 이러한 것들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다.”[Hegel (1986), 307-308]
22 A. Honneth (2011), Das Recht der Freiheit, Suhrkamp, p. 235.
친밀 관계에 대 한 경험적 연구들은 이러한 관계의 핵심 요소로서 양쪽으로 상호적으로 성 립하는 자기 표출(self-disclosure), 혹은 상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체성 수용 을 제시한다.
델레가 등에 따르면 자기 표출이란 어떤 한 개인이 자신의 생 각, 느낌과 경험 등을 다른 사람에게 언어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친밀 관계는 이러한 자기 표출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23
애런 등에 따르면 친밀 성이란 타자를 자신 안에 포함시키는 과정으로서, 이는 서로의 자원, 서로 의 관점, 서로의 정체성을 상호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4
친밀 관계가 성립하려면 이러한 자기 표출 혹은 정체성 수용이 상호적으로 이루 어져야 하며, 한쪽의 일방적인 행위로는 친밀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친밀 관계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도 합치한다.
예를 들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짝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친밀 관계가 성립하 지 않으며, 양쪽이 서로를 짝사랑하는 것으로도 친밀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 다.
이러한 관계의 두 당사자가 상호적으로 자기 표출을 수행하여 실제로 상호 침투가 일어날 때, 그리고 이 사실이 당사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친밀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25
23 J. Derlega et al. (1993), Self-Disclosure, Sage Publications, p. 1 참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표출을 친밀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제시하는 입장으로 는 Giddens (1992), p. 61; B. Fehr (2004), “A Prototype Model of Intimacy Interactions in Same-Sex Friendships,” Handbook of Closeness and Intimacy (ed. by D. Mashek and A. Aron), Lawrence Erlbaum Associates, Publishers, p. 23; Laurenceau (2004), p. 62; K. Prager and L. Roberts (2004), “Deep Intimate Connection: Self and Intimacy in Couple Relationships,” Handbook of Closeness and Intimacy (ed. by D. Mashek and A. Aron), Lawrence Erlbaum Associates, Publishers, p. 46 참조.
24 A. Aron et al. (2004), “Closeness as Including Other in the Self,” Handbook of Closeness and Intimacy (ed. by D. Mashek and A. Aron), Lawrence Erlbaum Associates, Publishers, pp. 28-33 참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체성 수용을 친밀성 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제시하는 입장으로는 T. Kasulis (2002), Intimacy or Integrity, University of Hawai’i Press, p. 32; B. Helm (2009), Love, Friendship, and the Self, Oxford University Press, p. 10 참조.
25 이와 관련하여 호네트는 헤겔의 상호 인정관계로서의 사랑에 대한 논의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상호적인 경험이 비로소 현실 의 사랑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이 경험이 두 당사자에게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인식으 로 변할 수 있을 때이다. […] 서로가 자기 자신을 타자 속에서 인식하는 이러한 종류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헤겔은 여기서 처음으로 ‘인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Honneth (1994), p. 63]
‘인간들 사이 간의 높은 수준의 상호 침투’라는 루만의 친밀성 정의는 단순하면서도 이 개념에 의해 표현되는 일반적인 직관을 잘 담아낸다는 장 점을 가진다.
하지만 친밀성의 물화 현상을 주제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본 논문의 관점에서 볼 때 루만의 친밀성 정의는 분명한 단점 또한 갖는데, 그 것은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는 친밀성과 친밀 관계를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밀함과 상호성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핵심 으로 하는 친밀 관계는 두 사람 사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 관계 혹 은 그러한 사회 관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개념인 반면, 친밀성은 친밀 관 계의 계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친 밀 관계보다 외연이 훨씬 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명인과 팬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유명인이 특정 팬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사회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친밀 관계(intimate relationship) 또한 성립하지 않지만, 이들의 관계(relation) 혹은 연관(connection)을 지탱해 주는 것은 팬의 유명인에 대한 친밀 관계의 욕구라는 점에서 친밀성은 이들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26
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 관계(social relationship)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계 (relation) 혹은 연관(connection) 사이의 구분이다. ‘유명인과 팬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 도 없다’라는 명제는 이때의 ‘관계’가 서로의 존재를 아는 두 사람 사이의 실제로 존재하 는 사회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relationship)으로 이해되면 참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계(relation) 혹은 연관(connection)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되면 거짓이 된다.
이러한 분석에 따라 본 논문은 내밀함과 상호성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회 관계를 친밀 관계로 규정하고, 친밀성을 이러한 친밀 관계의 계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2.2.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개념 규정
물화(Verdinglichung)는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학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루카치에 의해 최초로 정식화된 이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그 리고 하버마스를 거쳐 호네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되 고 새롭게 해석되어 왔다는 점에서 독일 사회철학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개념(Schlüsselbegriff)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중 누군가의 물화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에 기반하여 친밀성의 물화를 이해하기보 다는, 본 연구와의 연관하에 새롭게 재정식화한 물화 개념을 통해 친밀성의 물화를 규정하고자 한다. 재정식화된 물화 개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다.
(1) 좋은 삶의 영위를 위한 상호주관적 총체, 즉 ‘인륜성’(Sittlichkeit)이 물 화 비판의 규범적 기초로 이해된다.27
물화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삶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는 상호주관적 조건들을 훼손한다는 점에 있다.
(2) 물화와 ‘경제적인 것’ 사이의 일차적인 연관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물화 를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 정한다.28
이에 따라 물화는 다음의 세 가지를 의미하게 된다.29
27 이와 관련해서는 정태창(2022a), 「좋은 삶의 형식적 개념에 기초한 ‘물화’(Verdinglichung) 의 재정식화」, 『철학사상』 제85권 참조.
28 이와 관련해서는 정태창(2022b),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병리현상으로서의 물화」, 『인문논총』 79권 4호 참조. 29 이전의 논문에서는 물화를 1) 주관의 물화, 2) 상호주관 및 객관의 물화의 두 가지로 분 류하였으나, 이후 2)를 세분화하여 상호주관의 물화와 객관의 물화를 별도로 분류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전의 논문에서의 물화 개념에 대해서는 정태 창(2022b), pp. 382-389 참조.
a. 주관의 물화: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의 정체성을 점점 더 순수한 형태 의 생산자 및 소비자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현상.
b. 상호주관의 물화: 개인들 사이의 사회 관계가 경제적으로 코드화됨 에 따라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현상.
c. 객관의 물화: 개인이 욕구하는 대상을 상품화 및 시장화하는 과정에 서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현상.
이렇게 재정식화된 물화 개념을 친밀성에 적용할 경우 친밀성의 물화 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1)에 대하여: 친밀성의 물화란 친밀성의 영역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사 회적 병리현상, 즉 좋은 삶의 영위를 위한 상호주관적 조건들의 훼손을 의 미한다. 어떤 사회적인 힘의 개입에 의한 왜곡 때문에 친밀 관계가 점차 해 체되고 친밀 관계를 갖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친밀 관계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이 증가하거나, 혹은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친밀 관계를 맺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친밀 관계가 좋은 삶의 영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에 대하여: (1)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병리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 소비가 사회적 삶 전체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친밀성의 물화는 (2)의 a~c에 상응하여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다음의 3가지 현상을 의미하게 된다.
a. 주관의 물화: 친밀 관계가 좋은 삶의 영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하기 때문에, 친밀성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의 정체성을 점점 더 순수한 형태의 생산자 및 소비자로 변형해 가는 과정의 핵심에 놓이게 된다.
즉 친밀 관계가 경제적으로 코드화되고 계층화됨에 따 라 친밀 관계를 맺음으로써 좋은 삶을 영위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 해서 점점 더 병리적인 방식으로 과도한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강요되는 것이다.
b. 상호주관의 물화: 친밀 관계의 성립 및 유지와 관련되는 모든 것 들이 시장과 긴밀하게 연관되고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코드화되 고 계층화됨으로써, 친밀 관계가 점점 더 일종의 경제적으로 코 드화된 특권으로 변형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자의든 타 의든 친밀 관계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된 다.
c. 객관의 물화: 친밀 관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나 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친밀 관계를 포기하고 그에 대한 욕구를 소비에 대한 탐닉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선택 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a에서 서술된 바와 같은 주관의 물화 가 촉진된다.
혹은 이들은 친밀 관계와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해소, 혹은 대체해 줄 수 있는 친밀성 상품들에 대한 소비를 선택할 수 있다.
문화 산업을 통해 생산되는 친밀성 상품들은 사람들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하거나 대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 인다.
특히 오늘날 새롭게 대두되는 인공 친밀성(artificial intimacy) 상품들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본 논문은 친밀성의 물화를 위의 (1)과 (2)에 의해 규정되는 복합적인 형태의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오늘날 이 영역에서 나타나는 물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3.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몇 가지 예비적인 고찰
3.1. 친밀성의 물화와 친밀 관계의 유형들
친밀 관계를 ‘인간들 간의 높은 수준의 상호 침투’로 정의하는 것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관계를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만 한정하여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실제로는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관계들을 포괄한다.
일반적으로 친밀성과 연관되는 (사회) 관계들은 다음의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사랑’(love) - 성(sexuality)에 의해 매개되는 연인 혹은 배우자 관계.
(2) ‘애정’(affection) - 혈연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남매 관 계, 그 외의 친척 관계.
(3) ‘친애’(friendship) - 성에 의해 매개되지도 않고, 혈연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지도 않은 타인과의 관계. - 친구 및 지인들과의 관계.
(4) 인간-동물 관계30 - 인간과 동물이 맺는 친밀 관계. - 일반적으로 개인과 그 개인이 기르는 애완동물 사이의 관계인 경우 가 많다.
30 악타르에 따르면 친밀성을 이루는 주요 구성요소들, 예컨대 돌봄, 신뢰, 경험의 공유 등 은 인간-동물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진정한 의미에 서의 친밀성이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Akhtar (2019), pp. 21-22 참조.
(5) 인간-신 관계 - 인간과 신적인 존재가 맺는 친밀 관계. - 종교적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5가지 유형의 친밀 관계 중 (1)~(3)은 인간들 사이의 사회 관계 이지만, (4)와 (5)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을 정립하고자 하는 본 연구에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사회 관계이기 때문에, 친밀 관계를 편의상 ‘인간들 간의 높은 수준의 상호 침투’로 정의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1)~(5)는 원칙적으로는 모두 물화라는 개념과의 연관하에서 다루어 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친밀성의 물화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1)에 해당하는 ‘사랑’의 친밀 관계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인간들 사이의 사회 관계가 아닌 (4)와 (5)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스스로의 선택 에 따라 맺게 되는 친밀 관계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2)는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혈연 관계에 기초하여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양육이라는 사회적 실천의 경제적 코드화와 연관되는 부 모-자식 관계를 제외하면 경제적 코드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형태의 친밀 관계다.
(3)은 경제적 코드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3)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친밀성 상품들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사회 문제로 대두된 친밀 관계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개 인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1)에 비해 중요성 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1)에 해당하는 ‘사랑’의 친밀 관계는 오 늘날 친밀 관계 붕괴의 핵심에 있고, 또한 개인을 순수한 형태의 생산자 혹 은 소비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경제적 코드화의 주요 대상이 되는 친밀 관계이고, 개인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 충족 이라는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따라서 본 논문 또한 친밀성 의 물화와 관련하여 (1)에 해당하는 ‘사랑’의 친밀 관계를 집중적으로 논의 하고, 그 외의 친밀 관계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에만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둘 만한 점은 친밀 관계의 5가지 유형들 사이에 어느 정도 기능적인 상호 대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밀 관 계에 대한 개인의 욕구 충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5가지 유형의 친 밀 관계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킬지의 여부는 개 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물론 특정 유형의 친밀 관계의 결핍을 다른 관계를 통해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러한 결핍을 일정 정도 보완 혹은 대체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사랑’의 친밀 관 계가 부족한 사람은 ‘친애’의 친밀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그러한 부족함을 상쇄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며, 어떤 사람은 인간-동물 관계 에서 친밀성에 대한 욕구의 대부분을 충족시킬 수도 있고, 또한 종교적 믿 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과의 친밀 관계가 다른 어떤 친밀 관계보다 중요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능적 대체는 반드시 친밀 관계의 유형들 사이에서 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 관계와 무관하지만 마치 어떤 친밀 관계가 성립한 것처럼 느껴지게 함으로써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친밀성 상품들이 존재할 수 있는데, 친밀성의 물화에서는 이러한 상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2. 성, 사랑, 가족 vs 친밀성
친밀 관계는 자아가 타자가 관계 맺는 하나의 근원적인 방식이라는 점 에서 친밀성은 사회 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31
31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사회적 인정 관계의 기본 범주로서 ‘사랑’, ‘권리’, ‘연대’의 3가지를 제시하는데, 이 중 ‘사랑’은 본 논문에서 제시한 친밀 관계의 유형들 중 인간들 사이 의 관계인 (1)~(3)에 해당한다.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 관계로서의 ‘사랑’은 두 사람 사 이의 에로틱한 관계, 우정, 부모-자식 관계라는 유형에 따라 소수의 사람들 사이의 강한 감정적 결속으로 이루어진 모든 일차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Honneth (1994), p. 153]. 이는 호네트가 친밀 관계를 하나의 근원적인 사회 관계로 간 주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루만의 개념으로 표현하면 ‘가까운 세계’, 즉 개인적으로만 유효한 경험, 평가, 반응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기초해 있는 개인적(persönlich) 관계는 ‘먼 세 계’, 즉 익명적으로 구성되고 모두에게 유효한 세계에 기초해 있는 비개인적(unpersönlich) 관계와 동근원성(co-originality)을 갖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좋은 삶의 영위의 측면에서 보면 친밀 관계는 다른 모든 유 형의 사회 관계에 우선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관계들은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 및 남매 관계, 부부 관계 및 애인 관계, 친구 및 지인 관계 등의 친밀 관계들이 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누군가의 부모, 자식, 남편, 아내 등등) 및 자기 이해는 이러한 친밀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32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친밀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고 대체불가능한 욕구를 갖게 된다. 따라 서 그러한 욕구가 실제의 친밀 관계의 성립을 통해 충족되기 어려운 경우 에 그것은 어떤 다른 방식을 통해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친밀성과 관련된 그동안의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는 주로 성, 사랑, 가 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33
32 이와 관련해서는 C. Taylor (1994), “Politics of Recognition,” in: A. Gutmann (ed.), Multicultural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6 참조.
33 친밀성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성, 사랑, 가족 등 친밀성 과 관련된 다 른 개념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친밀성 일반에 대한 논의를 적당히 우회하 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친밀성을 다루는 대부분의 연구들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 어 루만의 저서인 『열정으로서의 사랑』(2001)은 ‘친밀성의 코드화’(zur Codierung von Intimität)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주로 성과 사랑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든스 의 『친밀성의 구조 변동』(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1992) 또한 친밀성 일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지만, 부제인 ‘현대 사회에서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이 책의 실제 내용에 더 잘 부합한다. 이처럼 친밀성에 대한 논의를 성, 사랑, 가족 등 그와 연관되어 있는 세부 주제에 대한 논의로 암암리에 환원하는 경향은 친밀성을 하나의 독립된 주제 영역으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이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물화 현상의 사회철학적 분석을 위해서는 친밀성 개 념을 기본 범주로 삼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 이유를 성, 사랑, 가족의 개념을 순서대로 살펴보면서 밝히도록 하겠다.
성(sexuality)의 개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 하나는 에로틱한 육체적인 관계와 관련된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젠더 (gender) 혹은 흔히 ‘성 역할’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의미다.
성 개념이 전자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보통 ‘친밀 관계’(intimate relationship)가 ‘성적 관계’(sexual relationship)를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특히 영미권에서는 전자를 후자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하는 경우 들이 많지만, 이 두 가지는 개념적으로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상호적인 자기 노출이나 정체성 수용의 과정이 전혀 없이,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철 저하게 배제하면서도 에로틱한 육체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있고, 그와 반대 로 육체적인 관계가 전혀 없이도 친밀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성 상품화와 친밀성의 상품화 또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다. 친밀 관계의 특정 유형이 성적 관계를 수반하거나 그와 긴밀하게 연관 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성이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분석에 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성 개념이 후자의 방식으로 이해되는 경우, 그것은 친밀성의 물화와 일차적인 연관 관계를 갖지 않는 다.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분석은 성 역할과 상관 없이 친밀성이 개인을 순 수한 형태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 혹은 친밀성이 상품 화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성 역할의 문제를 다루어 야만 친밀성의 물화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볼만한 이유가 없다면, 먼 저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성 역할과 관련된 논의는 그 이후 로 남겨 두는 것이 올바른 순서로 보인다.
사랑(love)은 사회 관계가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과 연관되는 특정 유형 의 감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랑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되 더라도 친밀 관계와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앞서 분류한 친밀 관 계의 유형들 중 (1)~(3)에 해당하는 ‘사랑’, ‘애정’, ‘친애’의 친밀 관계들은 그 이름에 걸맞는 감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러한 감 정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친밀 관 계의 경우 연인 혹은 배우자 관계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감정 상태를 수반 해야만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래야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34
처 음에는 사랑으로 인해 관계가 성립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감정 이 잦아들어 잠재되어 있는 상태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서로를 증 오하는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 상태의 이러한 변화와 무관 하게 친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특히 근대 이전의 결혼은 낭만적 사랑 과 무관하게 사회적 관습에 의해 성립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경우도 부 부 관계는 여전히 친밀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여 파악하 기 어려운 주관적인 성격을 갖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안정적으로 지속 되며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회 관계로서의 친밀 관계에 초점을 맞 추는 것이 물화 분석을 위해 더 적합해 보인다.35
34 이와 관련하여 기든스는 친밀성이 지속적인 감정적 가까움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매우 억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Giddens (1992), p. 3 참조.
35 사랑의 개념을 중심으로. 348
사랑은 현상학적 관점에 서 매우 불분명한 현상이기 때문에,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논의는 ‘사랑이 란 무엇인가’라는 답변이 곤란한 물음에 얽매여서 개념적으로 불명료한 방 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가족은 일종의 사회 제도 혹은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이라는 점에서 사회 관계로서의 친밀 관계와는 분명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반 적으로 가족이 친밀성을 위한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 련하여 사이토 준이치는 친밀성의 영역, 즉 친밀권(親密圈)과 가족의 차이점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제시한다.36
첫째, 가족과 사랑의 공동체는 동일한 것 을 가리킬 수 없다.
가족과 사랑을 결합하는 가족애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 며, 이때 사랑이 이성애만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이성애주의를 재생산하는 장치가 된다는 것이다.37
둘째, 친밀권은 가족이라는 형태(혈연, 동거, 가계의 공유)로 환원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자조 그룹(만성질환 및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이 상호 지원을 위해 조직한 그룹, 환자회 등) 또한 분명히 친밀권의 한 형 태이며, 이보다 더 느슨한 관계인 친구 관계나 지인 등도 친밀권에 포함된 다는 것이 사이토 준이치의 설명이다.
박구용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가족 이 친밀 관계를 위협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38
36 齋藤純一(2000), 『公共性』, 岩波書店, pp. 93-94 참조.
37 이와 관련하여 김혜경은 가족 이후의 대안적 친밀성을 모색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비혼 청년층의 공동 주거를 들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 친밀성은 근대 가족에 제한된 친밀 관계 및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혜경 (2017), 「가족 이후의 대안적 친밀성」, 『한국사회학』 제51집 제1호, p. 192 참조.
38 박구용(2020), pp. 165-168 참조.
그에 따르면 본 래 가족은 생산과 소비 경제의 기초로서 생존을 위해 따라야만 하는 지배 의 세계이자 필연의 세계였으며, 경우에 따라 구성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자유를 구속하고 친밀 관계의 구성에도 간섭하는 억압의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이처럼 가족은 하나의 사회 제도라는 점에서 친밀 관계와는 구별되어 야 하기 때문에,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분석에서 가족이 기본 개념의 역할 을 할 수는 없다.
이는 ‘가족의 물화’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친밀성은 성, 사랑, 가족 혹은 그것들의 묶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차원을 갖고 있는데,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차원이다.
친밀성의 물화와 관련하여 본 논문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핵심 물음 중 하나는 그동안 친밀성의 핵심으로 이해되어온 낭 만적 사랑 및 근대적인 형태의 핵가족이 점차 붕괴되어 감에 따라 생겨나는 친밀 관계의 공백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으며, 친밀 관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가이다.
그런데 성, 사랑, 가족 등 친밀성과 관련된 세부 영역에 초점을 맞추면 해당 영역에서의 변화만이 눈 에 들어올 뿐이며,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 일어나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바우만은 ‘유동적 사랑’(liquid love)에 대한 논의에 서 소비자 시장 경제의 힘이 공동체(communitas)에 침입하여 상품화해온 것 이 친밀성 영역이 붕괴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39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지만, 아쉬운 것은 친밀성 영역이 해체 되면서 생겨나게 된 공백이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는 바우만의 논의 에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을 기본 개념으로 삼는 연구 에서는 예전과 달리 오늘날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든가 혹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사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만 드러날 뿐, 사랑이라는 친밀 관계가 약화됨에 따라 생겨나는 공백이 친밀성의 전체 영 역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 친밀 관계들이 붕괴함에 따 라 생겨나게 되는 친밀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욕구의 불만족이 어떻게 처 리되고 있는지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40
39 Bauman (2003), Liquid Love, Polity, pp. 74-75.
40 이와 관련하여 신경아는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해체됨에 따라 친밀성의 자원을 가족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경아 (2014), 「가족과 개인, 개인화」, 김혜경 외, 『가족과 친밀성의 사회학』, 다산출판사, p. 141 참조. 350
4.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의 개요
본 논문은 ‘사랑’의 친밀관계를 중심으로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 학적 분석의 개요를
① 상호주관의 물화,
② 주관의 물화,
③ 객관의 물화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한다.
①~③의 서술 순서는 친밀성이 물화 되는 과정의 내적 논리를 따른 것이다.
4.1. 친밀성의 물화①: 상호주관의 물화
친밀성의 물화라는 병리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 사회에 서 개인이 좋은 삶을 영위하고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 ‘사랑’의 친밀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형의 친밀 관계가 중요한 이 유는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친밀 관 계는 낭만적 사랑이 갖는 유토피아적 차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루즈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허위 위식이나 이데올로기로 간단 하게 환원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바, 낭만적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은 성스러운 것의 체험과 강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41
벡과 벡-게른스하임은 이러한 의미에서 낭만적 사랑은 일종의 신 흥 종교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된다고 본다.42
완벽한 행복을 약속하는 낭만 적 사랑은 일상성에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하여 세계를 새로운 의미로 가득 차게 하며, 자기 감정에 고무된 연인들은 새로운 세계, 즉 두 사람만의 왕국 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친밀 관계는 인정 질서의 핵심에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의 중요한 원천을 이룬다.43
41 Illouz (1997), pp. 7-8 참조.
42 Beck and Beck-Gernsheim (1990), p. 231 참조.
43 Illouz (2012), pp. 111-112 참조.
다른 유 형의 사회 관계들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갖는 속성들 중 일부만이 평가 의 요소로서 유관성을 갖는 반면, ‘사랑’의 친밀 관계에서는 개인이 갖는 모 든 속성, 즉 외모, 능력, 성격, 재력, 사회적 지위, 가정적 배경 등등의 모든 것들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랑’의 친밀 관계를 누구 와 어떻게 맺는가 혹은 맺지 않는가는 개인에 대한 일종의 종합적 평가 및 인정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셋째, ‘사랑’의 친밀 관계는 개인이 자신 만의 친밀 공간으로서의 가족을 새롭게 만들고 아이를 가져서 부모-자식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경로이다.
‘사랑’의 친밀 관계를 맺지 않으면 많은 경우 아이와의 부모-자식 관계로부터도 배제되 며, 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랑’의 친밀 관계가 개인의 행복 추구에서 이처럼 특별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친밀 관계에 대한 경제적 코드화 및 그와 관련된 욕구 의 관리는 개인을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대로 길들임으로써 순수한 형 태의 생산자 혹은 소비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친밀 성은 보통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되어 왔지만,44 근대 이후의 친 밀성에 대한 연구들은 이 영역이 처음부터 ‘경제적인 것’과 긴밀하게 연관 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근대 이후 등장한 친 밀성의 공간으로서 가부장적 핵가족이 순수한 인간성의 영역으로 스스로 를 인식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은 노동과 상품교환의 영역에 종 속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45
일루즈에 따르면 근대 이후 등장한 낭만적 사 랑 및 그와 관련된 관행 또한 궁극적으로는 시장에 기초해 있다.46
자본주 의 사회에서 상품은 낭만적 사랑의 경험적 경계를 구조화하는 역할을 하는 바, 20세기 이후 구혼과 결혼을 비롯한 낭만적 사랑의 관행은 점점 더 새로 운 여가 및 상품 시장과 결합되어 왔다는 것이다.47
44 V. Zelizer (2005), The Purchase of Intima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20 참조.
45 Habermas (1962), 63 참조.
46 Illouz (1997), p. 10 참조.
47 Illouz (1997), pp. 76-77 참조.
오늘날 낭만적 사랑의 관행들은 대부분 소비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엄 밀한 의미에서 소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걷기, 가정 내 상 호작용, 집에서 사랑을 나누기의 3가지 범주밖에 없다는 것이 일루즈의 설 명이다.48
자본주의 사회에서 친밀 관계를 경제적으로 코드화하고 개인의 욕망을 그에 순응하도록 조형하는 작업은 문화 산업을 통해 낭만적 사랑의 모델들 을 확산시키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49
아도르노는 이러한 과 정을 일종의 물화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젊은 여성이 통상적인 데이트를 받아들이고 끝내는 방식, 전화를 받을 때나 가장 친밀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억양, 대화에서의 단어 선택 등, 지금 은 쇠퇴한 심층심리학의 개념에 따라 분류될 수 있는 내면 생활 전체는 자 기 자신을 성공에 적합한 장치로 만들려는 시도를 보여 주는데, 그러한 장치는 충동이 드러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깊숙하게 문화 산업이 제시하는 모델에 상응한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반응들조차 스스로에게까지 철저하게 물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관념조차 가장 외적인 추 상성의 형태로만 존속하게 된다.50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대의 부르주아 소비 사회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관리되고, 제도화되며, 상품화되는 방식으로 환상 (Phantasie)을 만들어 내고 그를 통해 소비를 부추기는 힘으로써의 상상력이다.51
48 Illouz (1997), pp. 122-123 참조.
49 루만에 따르면 낭만적 사랑의 관행이 일종의 행동 모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이미 17세 기부터 분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Luhmann (1994), p. 23 참조.
50 Horkheimer and Adorno (2012), pp. 195-196. 51 T. Adorno (1972), “Einleitung,” T. Adorno u. a., Der Positivismusstreit in der deutschen Soziologie, Luchterhand, pp. 62-64 참조.
일루즈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논의를 이어받아 현대 사회의 ‘사랑’ 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일루즈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 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이야기, 사건, 그리고 감정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규격화하는 코드화된 문화적 환상들이 다.52
‘사랑’의 친밀 관계는 마치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유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연인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행위하 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소비 문화에 의해 규격화된 ‘원본’ 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루즈는 이를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대한 언어 및 행위의 사생활에서 우리가 쓰지 않은 문화적 시나리오를 리 허설(rehearse)하고 있다.”53라고 표현한다. 문화 산업이 ‘사랑’의 친밀 관계 에 대한 양식화된 서사를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에 기초하여 자신의 사랑의 경험을 이해한다.54
이러한 방식으로 친밀 관계에 대한 비현실적 허구가 우 리의 감정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서 친밀 관계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가 확 산되며, 그 결과 많은 경우 현실의 친밀 관계는 실망스럽고 초라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55
52 Illouz (2012), pp. 198-199 참조.
53 Illouz (1997), p. 293.
54 Illouz (1997), p. 171 참조.
55 Illouz (2012), p. 215 참조. 354
4.2. 친밀성의 물화②: 주관의 물화
문화 산업이 제시하는 낭만적 사랑의 모델들은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들을 무시하고 친밀 관계에 대한 비현실적이지만 매력적인 ‘이데아’를 좋은 삶(good life)의 추구와 관련된 일종의 유사 규범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 에서 억압적이고 배제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델들 은 보통 특정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젊은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을 이상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친밀 관계의 ‘이데아’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 으로든 현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 그에 충분히 ‘참여’하지 못 하는 현실의 다양한 친밀 관계들은 충분히 좋다고 할 수 없는 것, 즉 좋은 삶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되기에 부족한 것으로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
친밀성의 물화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모델들이 소 위 중상계급(upper-middle class) 이상의 ‘생활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경우 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객관적 자원, 즉 좋은 직업, 남녀 평등의 문화, 높은 교육 수준, 충분한 가용 여가 시간, 높은 소득 등을 요구 한다는 점이다.56
따라서 이러한 모델을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강 해지면 강해질수록, ‘사랑’의 친밀 관계는 점점 더 소수의 특권이 된다.
낭 만적 사랑의 모델들은 매우 이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적 자원은 이러한 모델들을 실현하기 위한 충분 조건을 이룰 수는 없지만, 가장 기본적인 필 요조건을 이룸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진입장벽의 역할을 한 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난이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는 바우만의 지적은 친밀 관 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57
56 Illouz (1997), pp. 284-285 참조.
57 Z. Bauman (2005),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Open University Press, p. 38 참조.
문화 산업이 소설, 영화, 드라마, TV프로그램, 애니메이션, 게임, 광고 등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확산시키고 재생산하는 이러한 낭 만적 사랑의 모델들은 관련 콘텐츠들의 광범위한 소비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의식중에 자리 잡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좋은 삶에 대한 일종의 유사 규범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러한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든, 혹은 의식적으로 거부하든 그와 상관없이 이러한 모델은 모든 사람들의 삶에 상 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델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회 적 압력에 직면하여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 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 소비에 병리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전반적인 흐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는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높은 수준의 객관적 자원을 요구하는 친밀 관계의 모델들, 그리고 마치 현대판 주자가례(朱子家禮) 처럼 친밀 관계의 관행들을 세세하게 규정하는 관련 유사 규범들을 명시적 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사람들에게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를 강제함으로써 순수한 형태의 생산자 및 소비자가 되도록 유도한다.58
친밀 관계가 과도하게 경제 적으로 코드화되고 계층화됨에 따라 친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점점 더 병 리적인 방식으로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갖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 있는 자아는 물화하는 주체인 동시에 물화되는 객체 이기도 하다.59
다른 하나의 가능한 선택지는 이러한 모델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의 영향으로 친밀 관계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친밀 관계로부터 소외되 는 것이다.60
58 경제적 인간의 합리적 소비를 넘어서 강제되는 이러한 과잉 소비야말로 자본주의 사 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J. Miller (2009), Spent: Sex, Evolution, and Consumer Behavior, Viking Press, p. 65 참조.
59 E. Illouz (2019), The End of Love, Oxford University Press, p. 140 참조.
60 야마다 마사히로가 말하는 가족 난민, 즉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및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존재가 없는 사람들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야마다 마사히로(2019), 니시야마 치나·함인희 역, 『가족 난민』, 그린비, p. 22 참조. 356
이러한 선택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 및 소비에 대한 개인의 종 속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친밀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은 친 밀성에 대한 욕구 자체를 줄이고 그만큼 다른 욕구의 충족을 통해 보상받 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친밀 관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소 비주의에 더 취약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밀 관계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비(非)상품적 욕구 충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욕구 충족 을 위해 그만큼 더 상품과 시장에 의존적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들은 바우만이 말하는 소비적 인간, 즉 소비를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될 위험성이 있다.61
친밀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은 문 화 산업이 제시하는 친밀 관계의 ‘이데아’의 허구 세계에 빠져 그 안에 존 재하는 어떤 상품적 이미지로서의 인물과의 가상적 친밀성을 통해 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러한 친밀성 상품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들 은 점점 더 현실의 친밀 관계를 맺기 어려워진다.62
61 Bauman(2003), p. 69 참조.
62 이러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곳은 일본으로서, 일본어에서 이러 한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말인 ‘오타쿠’(お宅)와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는 둘 다 가 족과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친밀 관계에서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 그래서 집이나 자신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람들마다 정도의 차 이는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문화 산업이 제공하는 친밀 관계의 ‘이데아’를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4.3. 친밀성의 물화③: 객관의 물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모든 형태의 친밀 관계들이 점차 약화되거나 해 체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저 홀로 고립되어 가는 전반적인 흐름이 관찰되는바, 이 흐름 속에서 친밀 관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그 자체로 하 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친밀 관계에 대한 이들의 욕구를 시장 을 통해 구매가능한 상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으려면 친밀성 은 상품화되어 생산 및 소비가능하게 가공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문화 산 업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 상품은 친밀성의 상품화와 직간접 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일종의 친밀성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적어도 부분 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3
63야마다 마사히로에 따르면 친밀 관계로부터 배제된 가족 난민들은 아이돌이나 한류 스타, 혹은 게임 및 애니메이션 등의 가상 인물들을 일종의 유사 파트너, 가상 가족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야마다(2019), pp. 152-153 참조.
이러한 친밀성 상품을 통해 매개되는 실제 인물 혹은 가상 인물과의 유사 친밀 관계는 친밀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거나 친밀 관계를 일정 부분 대체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러한 상품 소비에는 상대와의 사회 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관계의 내밀성 및 상호성 또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친밀성 상품은 친밀 관계와는 무 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유사 친밀성(pseudointimacy), 친밀성 대체물(intimacy-substitute)에 불과하며, 실제의 친밀 관계를 갈음할 수 없다. 최근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할 현상으로 ‘인공 친밀성’의 확산 이 있다.
‘인공 친밀성’(artificial intimacy)은 최근 몇 년 전부터 사용되기 시작 한 신조어로서, 인간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물과 인간의 관계성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64
다 양한 형태의 인공 친밀성 상품들은 인간의 친밀성에 대한 근원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감정 상품(emodities)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5
64 인공 친밀성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인공 친밀성은 인간의 친밀감에 대한 욕구를 첨단 기술을 매개로 하여 충족시키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방식들을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브룩스는 이러한 의미에서 SNS를 “가장 성공적인 인공 친밀성의 형태”라고 부른다[R. Brooks(2021), Artificial Intimacy, Columbia University Press, p. 66]. 좁은 의미의 인공 친밀성은 인간의 친밀 관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기반의 인공물과 인간의 관계성을 가리키 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본 연구에서는 좁은 의미로 이해된 인공 친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자 한다. 인공 친밀성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공감은 인간 고유의 영역인가, ARTIFICIAL INTIMACY」, 『NC SOFT 공식 블로그』, 2020.6.8.(https://nc-blog.newtype.design/news/ article/artificialintimacy-20200608)(접속일: 2022.11.10.) 참조.
65 감정 상품의 개념에 대해서는 E. Illouz(2018), “Introduction: Emodities of the Making of Emotional Commodities,” in: E. Illouz (ed.), Emotions as Commodities, Routledge, p. 7 참조. 358
현실 의 친밀 관계는 점점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소수의 특권이 되는 반 면, 그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은 첨단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친밀성 대체물들 의 시장에 점점 더 종속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인공 친밀성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인공 친밀성 상품은 효돌(Hyodol)과 같은 반려 로봇(companion robot) 의 형태로 상용화되었고 한국에서도 뉴스에 소개된 바 있다.66
특히 친밀 관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반려 로봇은 돌봄(care)과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67 인공 친밀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이 보여 주는 것은 현재의 기술로 구현가능한 수준의 로봇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쉽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것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 다는 사실이다.68 인간과 로봇의 상호작용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형성 된 인류의 ‘다윈적 단추’(Darwinian button)를 누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나 동물을 닮은 로봇에게 쉽게 공감을 느낀다고 한다.69 앞으로 인공지능과 로봇 관련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사람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수준의 친밀 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인공 친밀성 상품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70 이러 한 추세가 계속되고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 배우자가 로봇으로 대체되는 인공 반려(artificial companionship)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71
66 이와 관련해서는 「“놀아줘” “싫어요”…말 안 들어 더 귀여운 ‘반려’ 로봇」, 『MBC 뉴스데 스크』, 2019.1.19.(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 214&aid=0000909968)(접속일: 2022.11.10.) 참조. 67 이와 관련해서는 「고령층, 코로나 대인관계 단절… 반려로봇 확대 ‘활짝’」, 디멘시아 뉴 스, 2021.01.05.(https://dementia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6) 참조.
68 이와 관련해서는 홍성욱,(2021), 「포스트휴먼 테크놀로지」, 『인문학연구』 제35권, pp. 26-28 참조.
69 S. Turkle(2011), Alone Together, Basic Books, p. 8 참조.
70 이와 관련하여 뮤지얼(M. Musial)은 인공 친밀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될 이유 로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인공 친밀성 상품은 이미 구 현되어 상용화되어 있다.
둘째,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기반한 러브봇, 섹스 봇, 케어봇 등의 인공 친밀성 상품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잠재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셋째,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의인화와 애착의 역사를 고려할 때 사 람들이 인공 친밀성 상품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와 관련 해서는 M. Musial (2019), Enchanting Robots, Palgrave, pp. 14-16 참조.
71 D. Levy (2007), Love and Sex with Robots, Harper Collins, p. 22 참조. 정태창 친밀성의 물화 359
그런데 이러한 로봇과의 이러한 친밀 관계는 친밀성의 물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인 병리 현상을 가속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로봇을 향 한 상호성이 없는 일방향적인 감정적 유대는 친밀 관계로부터의 소외 상태 및 그로 인한 욕구 불만을 시장에 기초한 상품 소비로 충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병리를 심화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72
현시점에서 반려 로봇이란 일종의 반려 대체물(companion-substitutes), 즉 인간에게 공감하는 존재가 아닌데 인간들이 마치 그러한 존재인 것처럼 대우하려는 성향을 갖 는 대상인바, 반려 대체물과의 관계가 일반적인 것이 될 경우 진정성의 위 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73
72 이와 관련하여 박구용은 친밀성의 자본주의적 소비와 상품화의 맥락에서 친밀성의 영 역에 비간섭 자유(freedom as non-interference)를 요구하는 흐름이 강해지면 결국 사람 이 아니라 사물과의 친밀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구용 (2020), p. 190 참조.
73 천현득(2018), 「인공지능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존재론』(이중원 편), 한울아카데미, p. 173; 천현득(2019), 「인공반려의 유혹」, 『과학철학』 제22권 2호, p. 45; M. Scheutz (2012), “The Inherent Dangers of Unidirectional Emotional Bonds between Humans and Social Bots,” Robot Ethics (ed. by P. Lin et al.), The MIT Press, p. 216; B. Whitby (2012), “Do You Want a Robot Lover? The Ethics of Caring Technologies,” Robot Ethics (ed. by P. Lin et al.), The MIT Press, p. 245 참조. 360
인공지능에 기반한 인공 친밀성 상품의 확산은 친밀성의 물화 과정의 정점에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기술 발전에 기초하여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어떤 친밀 관계가 성립하는 것 같은 주관적 느낌을 만들 어 내어 현실의 친밀 관계를 밀어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공 친밀성 상 품이 기술적으로 고도화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그것과의 관계가 진정한 친 밀 관계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인공 친밀성 상품이 현 실의 친밀 관계를 위협하고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상황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흐름은 친밀 관계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의 고유한 부분까지 훼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가는 말
본 논문은 친밀성의 물화 현상을 사회철학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이 론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 다.
먼저 2절에서는 친밀성과 친밀 관계의 개념을 루만의 논의를 토대로 하 여 관련 연구들을 종합함으로써 명료하게 규정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친 밀성의 물화를 ① 주관, ② 상호주관, ③ 객관의 세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 회적 병리현상으로 정식화하였다.
계속해서 3절에서는 친밀 관계의 유형들 을 ‘사랑’, ‘애정’, ‘친애’, ‘인간-동물 관계’, ‘인간-신 관계’의 5가지로 분류 하였으며, 이 중 ‘사랑’의 친밀 관계가 친밀성의 물화 과정의 핵심을 이룬다 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친밀성에 대한 그동안의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 의 중심을 이루어온 성, 사랑, 가족의 세 가지 개념을 검토하고 각각의 한계 를 살펴봄으로써 이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물화 현상의 사회철학적 분석을 위해 친밀성 개념이 기본 범주로 가장 적절하다는 점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친밀성의 물화에 대한 사회철학적 분석의 주요 내용을 ① 상호 주관의 물화, ② 주관의 물화, ③ 객관의 물화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개괄하 였으며, ①~③ 사이의 상호 연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논문은 친밀성 물화의 사회철학적 분석을 위한 시론으로 기획된 것 이다.
이어지는 후속 논문들에서는 이 논문에서 이루어진 작업을 기초로 하 여 4절에서 개괄한 바 있는 ①~③의 물화 과정에 대한 심화된 분석을 제시 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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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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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ification of Intimacy- A Socio-Philosophical Analysis
Jung, Taechang( Kongju National University )
This paper aims to lay the foundation for a systematical theorization of the reification of intimacy from a socio-philosophical perspective. To this end, this paper attempts to perform the following three tasks. First, the concepts of intimacy and intimate relationship are clarified in the light of relevant philosophical and sociological researches, and the concepts of sexuality, love, and family, which have been central to discussions related to the intimacy domain, are reviewed and their limitations are examined to show that intimacy is the most appropriate basic category for a socio-philosophical analysis on the phenomena of reification related to this domain. Second, this paper formalizes the reification of intimacy as a social pathology that occurs in three dimensions: ① subjectivity, ② intersubjectivity, and ③ objectivity, and examines five types of intimate relationships: love, affection, friendship, human-animal relationships, and human-divine relationships, with intimate relationship of love at the center of the reification process. Third, it outlines the main contents of the socio-philosophical analysis on reification of intimacy in three parts: (1) reification of intersubjectivity, (2) reification of subjectivity, and (3) reification of objectivity, and reveals the logical interconnection between (1) and (3).
Keywords Intimacy, Intimate Relationship, Reification, Love, Commodification
인문논총 80권 2호 2023. 5. 31
원고 접수일: 2023년 4월 10일, 심사완료일: 2023년 5월 12일, 게재 확정일: 2023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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