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요약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피상적 대비는 맹자와 순자의 윤리 이론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도록 오도하기 십상이다. 또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구방심(求放心)과 과욕(寡欲)은 비논리적이고, 성악(性惡)과 위선(僞善)은 상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피상적 대비와 오해는 다윈주의적 접근과 독해로 적절히 해결될 수 있다. 성선과 위선에 대한 다윈주의적 독해의 공통분모는 도덕성의 진화이다. 둘의 차이 는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갈린다. 맹자는 도덕성이 본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반면, 순자는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후천적 노력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둘은 얼핏 보면, 서로 상반되는 듯하다. 그러나 다윈주의적 독해에 따르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모순 없이 양립 가능하다. 진화의 계열 속에 놓고 보면, 위 선과 성선의 연속성과 의존성이 잘 드러난다. 진화의 전체 계열에서 보면, 성악에서 위선이 이루어지고 이 위선이 성선으로 내재 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계열을 단선적인 흐름으로 볼 필요는 없다. 위 선과 성선은 개인의 도덕성 발달 과정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경험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을 계열화하여 통합해 보면, 양육을 통한 도덕성의 획득, 진화에 따른 도덕성의 유전, 도덕 본성에 내재된 도덕성의 양육 순으 로 이해된다. 위선과 성선의 도덕성 발달은 학문과 수양에 의한 진화의 계열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본능적 욕구를 다스리는 노력을 통해 도덕적 존재가 되면, 모든 인간은 자연스럽게 이 도덕적 변화의 계열 속에 처하게 되어, 다시 학문과 수양을 통 해 지속적으로 도덕성을 계발해 간다는 것이다. 이로써 성선설과 성악설, 성선과 위선 은 연속적이고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양립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다윈주의적 접근에 따른 통합적 이해다.
주제어: 성선, 위선, 본성, 양육, 자연의 변화와 흐름, 도덕성 획득과 유전, 다윈주의
1. 서론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상반된 이론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본성의 선악을 명확히 상반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기초한 실천 이론 또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본성에 대한 선악의 규정이 수양 및 교육의 방법과 의미 해석에도 그대로 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대립은 두 이론의 논리적 미비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맹자와 순자의 이론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점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이론에 대한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으로는 상반 대립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진화의 계열 속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 양립 가능성이 설명될 수 있다.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이나 수양론에 대한 비교 연구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본성과 선악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진전된 해석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맹자의 수양론에 대한 다윈주의1)적 접근 역시 이미 시도된 연구가 있다.2) 순자의 인성론을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주목하며 논의하거나 사회생물학적 접근을 시도한 연구도 있다.3)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을 포함하여, 유가철학 전반을 진화론적 윤리학이나 사회생물학적으로 접근한 연구도 있다.4)
1) 이 글 속의 ‘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을 원형으로 한 진화생물학 또는 사회생물학을 의미한다.
과학이론의 적용은 기존의 선행연구를 따른다.
2) 김시천(2007)의 「다윈이 맹자와 만났을 때: 고전적 유가 수양론의 진화론적 사유 구조」와 류근성(2010)의 「맹자의 직관 윤리학의 진화론적 이해」 등이 있다.
3) 장승희(2011)의 「순자 인성론의 도덕교육적 의미와 한계」와 장원재(2015)의 「순자의 ‘군(群)’ 개념을 통해 본 욕망과 본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4) 김병환(2006)의 「생명공학시대의 유가 인성론: 유가 인성론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해석」, 김병환(2009)의 「유가윤리사상에 대한 도전과 성찰」, 권상우(2009)의 「유학과 사회생물학의 대화: 도덕의 기원과 정당성을 중심으로」, 허남결(2010)의 「동양적 공리주의윤리문화의 도덕적 재평가」, 김병환(2017)의 「유가철학에 대한 진화윤리학적 해석」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성선과 위선의 관계 속에서 통합하거나, 위선과 성선의 연속성과 의존성을 도덕성 발달의 맥락에서 조망한 경우가 거의 없다. 이에 대한 보완적 논의가 필요하다.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을 진화의 흐름 속에 놓고 볼 때, 가장 크게 부각되는 문제는 ‘본성과 도덕성의 관계’이다. 도덕성으로서 본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본성과 도덕성의 관계를 해명해야 하고, 인정한다면 도덕 본성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래의 천명에 근거한 형이상학적 정당화가 설득력을 잃게 됨에 따라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진화론에 의해 확보되어 있는 경험적 근거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동양의 인성론에 대한 다윈주의적 접근과 이해가 고조되고 있다. 맹자의 성선과 순자의 위선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 이 글에서 취하고자 하는 방법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물론 형식적으로 보면, 도덕성이 선한 본성에서 나온다는 주장과 후천적 노력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맹자가 주장하는 선한 본성과 순자가 주장하는 악한 본성의 의미를 각각 도덕 본성(moral nature)과 자연 본성(human nature)으로 드러내 놓고 보면, 도덕성(morality)의 기원을 성선설은 도덕 본성 안에서 찾고 성악설은 자연 본성 밖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자면, 도덕성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 차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5) 중 어느 것에 주목했는가’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5) 다윈주의에 따르면, ‘유사성’이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사성’이라는 표현은 인간에게서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미세한 변이들이 나타난다는 점, 이 변이들이 후대로 유전된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가 동물과 비슷함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순수하게 분류적 개념으로 사용하려 한다. ‘차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유사성과 차이’는 인간과 동물의 유사한 점과 다른 점, 모든 인간의 공통 본질과 수양의 정도 차이에 따른 구분과 분류에 사용될 것이다. 이 기본 입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경무(2015)의 「類개념에 대한 孟子의 인식과 활용」과 이경무(2022)의 「類개념에 대한 荀子의 인식과 활용」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선과 위선에 대한 다윈주의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성의 유래와 기원에 대한 맹자와 순자의 견해 차이를 동일한 시점에 놓게 되면, 두 이론 사이의 연속성과 의존성을 논할 토대는 사라진다.
둘의 차이를 진화의 시점에 따라 연계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다윈주의적 접근이다.
이러한 접근은, 다윈주의가 그러하듯, 유사성과 차이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차이에 주목하여 본성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이 도덕 본성이 행위로 발현되거나 이어지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반대로,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본성을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후천적 노력을 통해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에 관한 논의의 주제는 성선과 성악이 아니라 성선과 위선이 된다.
그리고 자연 본성이 후천적 노력을 통해 도덕성을 갖추게 되고 이 도덕성이 도덕 본성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보면, 성선과 위선은 위선에서 성선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계열에 통합된다.
2. 도덕성과 도덕 본성
사물의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차이가 인정되지 않는 세계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사물의 유사성과 차이는 항상 공존한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이다’라는 진술이 유의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맹자의 성선은 동물과 인간의 종차에 주목하면서 도덕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성선설의 핵심은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가 도덕성에 대해 갖는 윤리적 함의인데, 맹자는 도덕 본성의 선험성을 제시함으로써 도덕성의 근거를 입론하고자 한 것이다.6)
6) 이후 맹자의 도덕 본성을 설명할 때 ‘선험성’과 ‘선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인간의 도덕성이 본질적으로 이성에 주어져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윈주의는 그것을 이성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화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 표현들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경험적 실제 차원에서만 주장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맹자는 도덕적 이상 실현의 근거를 인간 존재의 본질에서 찾고자 했던 것으로, 맹자에게 있어서 모든 행위의 기점은 도덕 본성이다. 맹자는 성선(性善), 존심양성(存心養性), 사단(四端), 양지양능(良知良能) 등을 주장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본질로 주어져 있는 이타적 성향인 도덕 감정을 도덕성으로 드러낸다. 도덕 감정의 이타적 성향을 기르면 도덕적 인식과 판단이 도덕적 행위로 이어지는 데 장애가 되는 생리적 요소는 극복된다.
그리하여 동물과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지고,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지위는 더욱 부각된다. 인간다움을 다하게 되며, 이로써 유사성은 은폐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타적 성향을 길러야 하며, 기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도덕성 자체에 대한 관념이 이미 마음에 있음을 증명한다.
마이클 루스에 의하면, 인간은 공통적인 도덕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유전적 토대가 보증하고 있다.7) 그에 따르면, 양육은 그 공유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양육은 동물과 다른 그 종차를 유지하고 실현하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맹자에게 부과된 문제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도덕 본성의 선험성을 경험적 실제 차원에서 입증하는 일이다.8) 또 다른 하나는 도덕성 회복과 실현을 위해 실천 이론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본성에 대한 규명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고자가 말하였다. “타고난 그대로를 본성이라 한다.” 맹자가 말하였다. “‘타고난 그대로를 본성이라 한다’는 말은 흰 것을 희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고자가 말하였다.) “그렇다.” (맹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흰 새 깃의 흼과 흰 눈의 흼은 같고, 흰 눈의 흼과 백옥의 흼은 같은가.” (고자가 말하였다.) “그렇다.” (맹자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 같고 소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이 같다는 것인가.”9)
7) Ruse, M.(1982), Darwinism Defended. 피터 싱어, 김성한, 사회생물학과 윤리, 고양: 연암서가, 2021, 106쪽에서 재인용.
8) 도덕 감정의 확충에 관한 맹자의 입장은 선험적 도덕 본성의 실재에 대한 경험적 실제 차원에서의 입증과 관련지어 고찰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 글 4장 ‘도덕성과 생물학적 본성’과 5장 ‘도덕성 발달을 위한 실천 이론’을 연결하면서 다룰 것이다.
9) 孟子, 「告子(上)」, “告子曰: 生之謂性. 孟子曰: 生之謂性也, 猶白之謂白與? 曰: 然. 白羽之白也, 猶白雪之白; 白雪之白, 猶白玉之白歟? 曰: 然! 然則犬之性, 猶牛之性, 牛之性, 猶人之性歟?”
‘타고난 그대로’는 동물과 유사한 본성을 말한다. 고자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날 것으로서의 본성을 인간만의 고유한 본질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래서 맹자는 ‘타고난 것’을 사물의 속성으로 규정한 다음, 고자가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맹자에게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맹자는 유사성에서 차이를 찾고 있지만, 아직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입론하지도 않고, 본성과 도덕성에 대한 관념도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로 주어져 있다는 점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론하기 어렵다. 고자가 주장하듯이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경우라면, 도덕성의 회복과 실현을 주장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론하지 못함으로써 도덕성의 회복과 실현을 그저 자연적 변화와 흐름에 맡겨두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도덕성의 회복과 실현이 도덕적 의무와 사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어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키고 실현해 가기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자연적 변화와 흐름’ 이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미치지 않는 것을 지칭한다면, ‘도덕적 의무와 사명’은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도덕성 회복의 가능성과 방법에 더하여 도덕 본성의 선험성이 타고난 그대로의 본성으로서 입증되어야 한다.
입이 맛있는 것을 찾고, 눈이 아름다운 색깔을 좇으며, 귀가 듣기 좋은 소리를 좋아하고, 코가 좋은 냄새를 좋아하며, 팔과 다리가 편안함을 좋아하는 것은 본성이다. 그러나 (이 본성에는 도덕적 사명이나 의무가 아닌 것으로서의) 천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군자는 그것을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적 의무나 사명으로서의) 본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로움을 다하며, 주인과 손님이 서로 예를 지키는 것, 어진 사람들이 지혜를 추구하고, 성인이 하늘의 도를 따르는 것은 천명이다. (이 천명에는 도덕적 의무나 사명으로서의) 본성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군자는 그것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천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10)
10) 孟子, 「盡心(下)」, “孟子曰: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佚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도덕적 의무와 사명은 천명이다. 이 천명이 도덕 본성의 선험성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인간이 타고나는 본능적 욕구 역시 천명이다. 그러나 이 천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한 것의 근원을 밝힌 것이다. 도덕적 의무와 사명으로서의 천명은 인간에게 동물과 다른 점이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며, 노력해서 이루어 내야 하는 영역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이다.
반면 본능적 욕구로서의 천명은 인간에게 동물과 유사한 점이 있고,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천명과 본성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의예지도 본성이면서 천명이고 이목구비도 본성이면서 천명이다.
그러나 군자에게는 인의예지의 도덕 본성만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다. 그래서 군자는 인의예지의 보존과 회복 그리고 실현을 의무와 사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소인에게는 이목구비의 생리 본성이 익숙하고, 그래서 소인은 군자와 다르게 이목구비의 생리적 본성에 충실하다. 이렇듯 본성의 양육은 마음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음이 본능적 욕구에 빠져 있다고 해서 도덕적 의무와 사명으로서의 천명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마음이 도덕성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서 본능적 욕구 충족을 잊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이 이목구비의 감관을 타고난다는 것도 사실이며, 이 감관을 언제나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맹자는 군자만이 도덕적 의무와 사명으로서의 천명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천명 개념에는 도덕 본성의 선험성 주장과 그 실재성에 대한 경험적 실증가능성, 그리고 도덕성 회복과 실현을 위한 실천 이론의 단초가 모두 담겨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 조금의 차이를 보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자는 그것을 간직한다. 순임금은 여러 가지 일을 밝히고 사람의 도리를 잘 살폈다. 이것은 (도덕 본성에 내재된) 인의가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지 (도덕 본성에 주어져 있지 않은) 인의를 실행한 결과는 아니다.11) 맹자는 유사성과 차이를 동시에 인정하면서도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유사성과 차이는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12)
11) 孟子, 「離婁(下)」, “孟子曰: 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舜明於庶物, 察於人倫, 由仁義行, 非行仁義也.”
12) Malik, K.(2001), What Is It to Be Human?, 매트 리들리, 김한영 ․ 이인식, 본성과 양육, 파주: 김영사, 2021, 37쪽에서 재인용.
맹자는 인간임이 아닌 인간다움, 가치중립적 사실이 아닌 도덕적 사실에서 차이를 찾고, 이를 인간 존재의 본질 즉 본성으로 규정하고자 하였다. ‘인간다움’이란 인의예지의 본성을 가리키고, ‘도덕적 사실’이란 그 본성이 행동으로 드러난 상태를 뜻한다.
맹자는 유사성과 차이의 진실성에 기초하여 도덕성으로서의 도덕 본성의 실재성을 입증하려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 본성의 실재성 입증은 인의가 내재한다는 주장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도덕 본성이 실재함을 경험적 차원에서 입증하려면, 도덕 본성과 도덕 감정의 관계를 밝히고, 도덕 감정과 도덕성 회복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본성과 천명에 관한 주장들은 도덕 본성의 선험성과 절대성, 경험적 실재성과 당위성을 표명한 것이다.
3. 도덕성과 자연 본성
자연 본성이 도덕 본성과 모순적인 개념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고나는 것에는 본성, 마음, 재능, 감정도 있지만, 몸과 욕망도 있다.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천명을 모두 수용하는 것이 도덕 본성과 자연 본성, 도덕 속성과 생물 속성, 성선과 위선의 연속성과 의존성 입증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본성과 연관시켜 말하는 순간 혼동이 발생한다. 맹자의 이론을 대할 때 특히 그런데, 맹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도덕 본성의 선험성과 내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도덕 감정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발현을 강조할 때에도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타고난다’는 의미를 부각시킬 때와 도덕 감정의 본능적, 자발적, 즉각적 표출을 강조할 때 ‘자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다음에서 ‘자연 본성’의 ‘자연’은 그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연 본성’의 ‘자연’은 인간이란 “동물들의 삶은 물론이고 식물들의 삶까지 공유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연사의 한 대상이다”13)라는 제임스 레이첼즈의 표현 속에 담긴 ‘자연’과 유사한 의미이다.
13) Gray, A.(1880), Natural Science and Religion., 제임스 레이첼즈, 김성한, 동물에서 유래된 인간, 파주: 나남, 2009, 167쪽에서 재인용.
순자는 맹자가 주목했던 도덕성을 인간의 본성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순자에게 ‘본성’은 조화롭고 하나된 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유일한 질서를 위해 마련된 자리라고 할 수 있다.14)
14) 장원태, 「순자의 ‘군(羣)’ 개념을 통해 본 욕망과 본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중심으로」, 한국동양철학회, 동양철학 제44집, 2015, 203쪽.
이 자연 본성은 인간이 타고나는 물리적 능력, 생리적 능력, 심리적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자연 본성에 대비되는 개념이 ‘후천적 노력’이다. 선은 이 후천적 노력에서 나온다.
성악과 위선은 도덕성의 근거를 자연 본성에 둘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자연 본성을 ‘타고난 것’이나 ‘선천적인 것’ 이라는 의미로 한정하고, 도덕 본성을 후천적 양육의 결과로 보면, 성악과 위선과 성선의 연속성과 의존성이 명확해진다. 이렇게 되면, 성선과 위선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도덕 본성을 획득하는 도덕성의 진화 과정 중 각각 어느 하나의 지점에 서서 선악을 논한 것이 된다.
물론 이 두 지점은 양육을 통한 도덕성의 획득, 진화에 따른 도덕성의 유전, 도덕 본성에 내재된 도덕성의 양육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계열을 구성하는 것이 된다.
물과 불이 기운을 가졌다고 해서 생명체인 것은 아니다. 풀과 나무가 생명체라고 해서 지각 능력까지 가진 것은 아니다. 새와 짐승이 지각 능력마저 가졌다고 해서 의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운을 가진 생명체이면서 지각 능력을 가졌고, 의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힘이 소보다 약하고, 달리기는 말보다 느리다. 그런데도 소와 말은 인간에게 부림을 당한다. 어째서 그런가. 인간은 (도덕적 질서가 유지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지만, 소와 말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 인간은 분별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분별은 어떻게 실행되는가. 의로움으로 실행된다.15)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까닭은 두 다리의 있음과 털이 없음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분별에 있다.16)
15) 荀子, 「王制」,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 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也.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何也? 曰; 人能羣, 彼不能羣也. 人何以能羣? 曰; 分. 分何以能行? 曰; 義.”
16) 荀子, 「非相」, “然則人之所以爲人者, 非特以二足而無毛也, 以其有辨也.” 14 김 백 녕 · 이 경 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도덕적인 것을 인지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마음이 그런 능력을 타고 났기에 우리는 도덕적인 것을 분별적으로 인지하고 실천함으로써 도덕적 진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또한 분별 자체가 차이와 다름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분별’이 인지와 실천 능력의 소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화로운 사회 공동체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구분, 차이, 다름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분별 능력만으로는 인간이 도덕적 동물임을 보이는데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순자에 의하면, 감각기관도 사물의 특성을 분별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감관의 분별적 지각 능력이나 마음의 분별 능력을 순자는 후천적 노력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 본성이고, 이 본성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이로써 다른 동물과의 차이를 규명하는 데 또 다른 개념적 장치가 필요해지는데, 이때 순자는 ‘의로움’을 제시한다.
분별 능력은 의로움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의로움은 분별의 기준이다. 그리고 분별과 의로움은 조화로운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설명된다. 동물도 무리지어 살며 경우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지만, 이 무리에게는 의로움을 기준으로 하는 분별이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에 기초한 사회 공동체의 조화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위선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맹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 역시 본성에 대한 규명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본성이란 ‘맨 처음 바탕’을 의미하고, (도덕성 획득을 위한) 후천적 노력은 (이 맨 처음 바탕을 토대로) 무늬와 이치를 융성하게 하는 일이다. (자연) 본성이 없으면 (도덕성 획득을 위한) 후천적 노력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 후천적 노력이 없으면 (자연) 본성은 (저절로) 아름다워질 수 없다. (자연) 본성과 (변화를 위한) 후천적 노력이 합해져야 (비로소) 성인이라는 이름을 운운할 수 있다. 자연이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공은 이로부터 시작된다.17)
17) 荀子, 「禮論」, “性者, 本始材朴也. 僞者, 文理隆盛也. 無性則僞之無所加, 無僞則性不能自美. 性僞合, 然後成聖人之名, 一天下之功, 於是就也.”
자연 본성은 후천적 노력의 선천적 요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체적 악으로 규정될 수 없다. 동물 이상의 존재들이 갖는 생물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덕성 획득을 위한 후천적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후천적 노력으로 인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맨 처음 바탕을 타고난다는 것만큼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타고난 맨 처음 바탕 속에 의로움을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만큼은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학문과 수양의 정도에 따라 도덕성 획득과 유전의 편차가 발생한다.
후천적 노력 여하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후천적 노력은 학문과 실천으로 구분된다. 학문이란 사법과 예의에 대한 배움과 실천을 가리킨다.
순자에 의하면, 동물과 다른 점은 학문에 의해 확보된다.18) 학문이란 후천적 노력을 가리킨다. 순자는 예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본성에 이것이 더해지지 않으면 동물과 같이 되고, 본성에 이것이 더해지면 우아해지는 것이지. (…) 매우 분명하고 간략하며 순조롭게 체득되는 것은 예의밖에 더 있겠는가.”19)
여기에서 위선에 대한 순자의 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위선’에는 마음, 생각, 감정, 행동 영역까지 포함된다. 사려의 축적과 능력의 습관화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동반한다. 그러나 모든 후천적 노력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선은 후천적 노력에서 나온다. 후천적 노력의 결과가 모두 선일 수는 없다.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사물과의 자연스런 교감과 반응체계, 생각, 지각의 원인, 지혜의 원인은 자연 본성에 해당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 생각을 쌓아 능력을 습관화하는 것, 이익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 의로움을 기준으로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 후천적 경험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것, 후천적으로 익혀 능력을 기르는 것 등이 ‘위선’에 해당한다. ‘무늬’는 자연 본성과 후천적 노력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치’는 후천적 노력의 기준이나 법도를 가리킨다. 감정과 생각으로서의 자연 본성은 후천적 노력, 도덕 속성, 선함으로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생물학적 토대에 해당하고, 생각의 축적과 능력의 습관화는 도덕성 획득과 유전의 실질적 요인이다. 자연 본성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아름다워질 수 있다. 예의와 법도를 따르기에 자연 본성은 무늬를 융성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마음은 가운데 텅 빈 곳을 차지하고서 이목구비와 육체를 다스린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타고나는 ‘몸의 임금’이라 부른다. 이와 다른 부류의 것들을 이용하여 기르는 일을 두고 ‘자연의 양육’이라 부른다. (유의 본성에) 따르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화를 입는다. 이것을 두고 ‘자연이 부정한 것을 바르게 한다’고 말한다. 몸의 임금이 은폐되고, 타고난 관능이 손상되며, 자연의 양육이 멈추고, 부정한 것을 바르게 하는 자연의 일을 거스르며, 자연 감정을 위배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이 허비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대흉’이라 부른다.20)
18) 荀子, 「勸學」, “爲之, 人也, 舍之, 禽獸也.”
19) 荀子, 「賦」, “性不得則若禽獸, 性得之則甚雅似者與? (...) 致明而約, 甚順而體, 請歸之禮.”
20) 荀子, 「天論」, “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 財非其類, 以養其類. 夫是之謂天養. 順其類者謂之福, 逆其類者謂之禍. 夫是之謂天政. 暗其天君, 亂其天官, 棄其天 養, 逆其天政, 背其天情, 以喪天功. 夫是之謂大凶.”
무늬는 선천적 자질로서의 자연 본성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자연 본성과 후천적 노력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다. 자연 본성은 후천적 노력을 낳고, 후천적 노력은 자연 본성에 도덕적 특질을 심어 준다. 후천적 노력은 다시 도덕 본성을 낳는다. 이 도덕 본성에 다시 후천적 노력이 더해지면 도덕적 성숙과 완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쟁탈과 무질서의 원인은 후천적 노력 부족에 있다. 예의와 법도를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것이 분별과 실천 능력을 올바르게 발휘하는 길이다. 타고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는 노력은 자연 본성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의 범주에 속한다.
자연 본성은 도덕적 행위의 기점이 되는 도덕적 바탕이 아니다. 자연 본성은 후천적 노력을 떠받치고 있으며, 후천적 노력은 자연 본성의 존재를 드러내 준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성 진화로서의 자연사(History of Nature)의 한 대상이다. ‘도덕성 진화로서의 자연사’란 털이 나지 않은 동물들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자연의 자재한 공로를 의미한다. 순자의 자연과 인위 구분법에 의하면, 그것은 도덕성 획득과 유전을 위한 후천적 노력을 의미한다.
4. 도덕성과 생물학적 본성
맹자와 달리, 순자의 생물학적 본성에 윤리적 측면은 배제되어 있다. 능력의 소유는 실천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순자의 본성 개념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예의법도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과 인위와 결합하여 변화 가능성이 있는 것, 이 두 가지다.21)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미에 후천적 노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생물학적 본성 개념을 맹자에게도 적용하려면 그 두 가지에 윤리적 측면을 더해야 한다. 인간이 지니는 동물 종의 보편적 성향은 시시각각 변한다. 생물학적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모든 종은 유전적 역사가 부과한 명령을 수행하며, 진화하려는 목적만 지닐 뿐이다.22)
21) 장원태, 같은 논문, 198쪽.
22) 에드워드 윌슨, 이한음, 인간 본성에 대하여,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1, 24쪽 참조.
인간은 유전자의 목적에 적합한 상태로 태어나며, DNA는 다시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변해간다. 환경과 문화의 변화는 유전자로 하여금 틀에 박힌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데,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이런 패턴은 몸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반응하면서 일분일초마다 변한다.23) 이 경험의 메커니즘은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동물 종으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성향과 공통적인 도덕적 이해 역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변해간다. 지속적으로 공유될 수도 있고 단절될 수도 있다.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그리고 본성과 양육은 단선적이지 않다. 도덕성의 획득, 유전, 양육은 이렇게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이 과학은 현실적인 인본주의에 이르는 도구가 된다.24)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우리의 행동이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요임금과 우임금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걸왕과 도척처럼 될 수도 있다. 누구든지 장인이 될 수도 있고 농사꾼이나 상인이 될 수도 있다.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평소 무엇에 마음을 모으고 어떤 습관에 물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또한 이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것이지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은 뒤에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25) 사람이 착하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험적 도덕) 본성은 여전히 그렇(게 존재한)다.26)
23) 매트 리들리, 김한영 ․ 이인식, 같은 책, 346쪽 참조.
24) 스티븐 핑거, 김한영,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7, 14쪽.
25) 荀子, 「榮辱」, “可以爲堯禹, 可以爲桀跖, 可以爲工匠, 可以爲農賈, 在埶注錯習俗之所積耳. 是又人之所生而有也, 是無待而然者也.”
26) 孟子, 「告子(上)」, “人之可使爲不善, 其性亦猶是也.”
주목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것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순자와 맹자의 의견 차이이다. 이들은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 것을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다. 후천적 습관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순자는 후천적 노력의 요인들이 실재함을 주장하고 있다.
다윈주의적 접근에 따르면, 이 요인들도 양육을 거쳐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맹자는 도덕 본성의 실재를 지목한다.
다윈주의에 의하면,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위선은 성선에 의존적이고 연속한다. 후천적 노력의 요인들이 실재한다는 것은 진화된 본성을 타고나기 전에 이미 진화의 요건이 갖추어져 있고, 이 진화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바꿀 수 없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에 의하면, 선천적 본성의 변화는 유전자의 목적이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후천적 노력의 선천적 요인들은 유전자이다. 이렇게 되면, 악한 본성을 타고나기 전의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성이 후천적 노력의 선천적 요건이 된다. 악한 본성을 타고나기 전의 이기적 유전자의 실재성만큼은 환경에 의해 소멸될 수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로 인간은 점차 도덕성을 획득하게 된다.
순자에 의하면, 인간은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덕성을 획득하게 된다.27)
27) 荀子, 「性惡」, “身日進於仁義, 而不自知也者, 靡使然也.”
이 도덕 본성의 실재를 맹자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실재성만큼은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후천적 습관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도 후천적 노력에 따른 자연 본성의 변화와 도덕 본성의 발현 양상으로 의견이 갈린다.
순자와 맹자 모두 인간의 본성이 생물 속성과 도덕 속성으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후천적 노력의 요인들은 동물과 판이하게 다른 도덕 속성으로 볼 수 없으며, 또한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 도덕 본성의 실재성은 동물과 유사한 생물 속성과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의 이기성과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 속에 상반된 속성으로 진화되고, 이후 이 본성의 생물 속성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도덕 속성을 갖추게 되며, 점차 도덕 본성으로 진화하게 된다. 이때 선악 규정은 생물 속성과 도덕 속성의 조화와 도덕성의 획득, 유전, 양육에 대한 강조로 이해된다.
임금의 다스림과 예의를 통한 교화를 없애고, 올바른 것을 법 삼으려 하지 않으며, 형벌에 의한 금지를 없애보라. 세상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겠는가. 그렇게 되면, 강자는 약자를 해하며 그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다. 대중은 소수자에게 난폭하게 굴며 짓밟을 것이다. 세상에 도리를 어기고 난폭한 짓이 횡행하여 결국 머지않아 망하고 말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게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선은 후천적 노력에서 나온다.28)
28) 荀子, 「性惡」, “今當試去君上之埶, 無禮義之化, 去法正之治, 無刑罰之禁, 倚而觀天下民人之相與也. 若是, 則夫彊者害弱而奪之, 衆者暴寡而譁之, 天下之悖亂而相亡, 不待頃矣.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순자에 의하면, ‘선’은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를 위해 개인이 해야 할 것, 바람직한 것, 할 수 있는 것을 지시하고, ‘악’은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는 개인의 분별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오랜 진화의 과정 속에서 보면, 선함은 항상 악함과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실천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항상 요구되는 것은 악함을 선함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후천적 노력은 선함과 악함의 공존을 깨뜨리는 일이며, ‘위선’은 도덕성의 획득과 유전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부각시키는 순자 식의 논법이다. 사람은 모여 살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사회란 차이와 다름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차이와 다름이 존중되어야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선’에는 언제나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 유지를 위한 실천적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생물학에 의하면, 도덕 본성의 획득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인식과 이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려는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이다. 이것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자연 본성을 교화하는 과정과 계기로 이해된다.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로 형성되는 도덕성은 다시 후천적 노력의 축적으로 습득되거나 존심양성과 확충을 통해 실현된다. 맹자의 사단은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로 습득하게 된 우리의 이타적 성향이며, 초기 인류의 그 이타적 행위들이 도덕성의 원천이자 윤리체계의 뿌리가 된다.
혈연관계가 있건 없건, 이타적 성향은 행위자의 그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기여하므로 행위자의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행위라 할 수 있다.29)
29) 박승배, 「도덕적 행위, 포괄적응도, 진화범죄학」,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 제67호, 2013, 162쪽.
이런 점에서 볼 때, 순자의 후천적 노력은 도덕성이 도덕적 자연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화의 단계 중 앞선 단계에 해당한다. 이 후천적 노력은 도덕 감정의 선험성을 긍정하는 맹자의 입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다윈주의에 기초해 보면, 맹자가 강조하는 도덕 본성은 협력과 공존을 이루려는 경험들의 축적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 감정은 선험적 도덕 본성과 어떤 관계이며, 위선과 성선의 연속성과 의존성에 있어서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경험적 실제 차원에서 도덕성의 진화는 곧 도덕 감정의 진화이다. 이 도덕 감정은 이기적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이타적 행위를 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사단과 양지양능은 그 경험의 축적을 통해 진화된 결과물이다. (타고난 양지와 양능의 능력을 발휘하여) 어짊과 의로움을 천하에 퍼지게 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30)
30) 孟子, 「盡心(上)」, “無他, 達之天下也.”
공동체 속에서의 사법에 의한 교화와 예의 실천은 부류의 같고 다름에 따른 분별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로써 이기적 욕망의 절제된 충족과 협력을 통한 이타적 성향이 길러진다. 이 양육의 과정을 거쳐 이타성이 사단이라는 형태로 내재화된다. 이 양육을 통한 본성은 양지와 양능에 의해 발현되고 확충된다. 생물학적 본성 속의 도덕 속성은 유전자의 이타적 성향의 유전으로 인한 것이다. 맹자는 그 도덕 감정의 발출 역시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이것은 후천적 노력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경향이다. 양지와 양능은 생각이 쌓이고 도덕적 습관이 형성됨으로써 얻게 되는 본능이다. 이로써 도덕 본성의 선험성과 도덕 감정의 경험적 실재성이 생물학적 본성에 공존하게 된다. 도덕 감정은 도덕성이 생물학적 본성에 토대를 두며, 이 생물학적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경험적 근거이다. 기본 감정이건 도덕 감정이건, 인간의 감정은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 성선설은 자연적이며 생물학적 근거를 갖는 보편적 이론이라 할 수 있다.31) 매트 리들리에 의하면, 감정은 이타주의가 궁극적으로 이익이 될 때 그것을 향해 행동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32)
31) 김시천, 「다윈이 맹자와 만났을 때: 고전적 유가 수양론의 진화론적 사유 구조」, 한국의철학회, 의철학연구 제4집, 2007, 80쪽.
32) 매트 리들리, 신좌섭, 이타적 유전자, 서울: 사이언스북스, 2021, 192쪽.
이에 따르면, 도덕성은 생물학적 본성에 토대를 두고, 생물학적 본성은 도덕성을 드러내는 경험적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 도덕성과 생물학적 본성에 관한 다윈주의적 독해는 도덕성 발달을 위한 실천 이론의 근거가 된다.
5. 도덕성 발달을 위한 실천 이론
사회생물학에서는 도덕규범의 원천인 도덕 감정과 이성 역시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성향으로 설명한다.33)
33) 이상형, 「생물학적 인간 vs. 윤리적 인간」,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 제90 호, 2018, 465쪽
이에 따르면, 도덕 감정은 인간의 감정적 반응과 도덕 실천의 누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맹자는 이 도덕 감정을 도덕규범의 원천으로 간주하였다. 도덕 본성은 그 감정적 반응과 도덕적 행위가 오랜 세대를 거쳐 유전자의 선택을 통해 프로그래밍된 결과로 이해된다. ‘성악, 위선, 성선’의 계열은 도덕성 획득과 유전을 단선적으로 설명한 것일 뿐 경험의 다양한 국면과 개체의 수양 정도를 모두 고려한 것은 아니다. ‘도덕성 획득과 유전’이란 개인의 도덕성 발달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과 다른 점을 강조할수록 유사한 면도 동시에 부각될 수 있다. 따라서 성선을 수용한 뒤에도 성악과 위선은 여전히 뒤따를 수밖에 없으며, 성악과 위선이 정당화되더라도 성선의 수용가능성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성선과 성악이 별개의 것일 수 없으며, 위선과 사단의 확충은 상보적이고, 확충 속에서도 위선은 여전히 실천 이론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노인들을 노인으로 모시면 젊은이들이 따르고, 가난한 사람을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면 잘 사는 사람들도 도우려고 모여든다. 좋은 일을 남모르게 하고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현명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 다 그를 존경할 것이다. 이 세 가지만 실천해도, (설령)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하늘이 이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34)
“감히 여쭙건대, 선생님께서는 무엇에 뛰어나십니까?” “남의 말을 잘 이해하고, 나의 맑고 한없는 기운을 잘 기르는 것이다.” “감히 여쭙건대, 무엇을 맑고 한없는 기운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기운의 성질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고 곧다. 잘 길러서 해치지만 않는다면, 하늘과 땅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 기운의 성질은 의로움과 바른 도에 짝이 되는 것이어서 그것이 없다면 허탈해진다. 그것은 의로움이 모여서 생기는 것이지 의로움이 밖으로부터 밀고 들어와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35)
34) 荀子, 「修身」, “老老, 而壯者歸焉, 不窮窮, 而通者積焉. 行乎冥冥而施乎無報, 而賢不肖一焉. 人有此三行, 雖有大過, 天其不遂乎.”
35) 孟子, 「公孫丑(上)」, “敢問, 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以直, 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기른다는 것은 의로움을 주체 내부에 확고히 세우는 일이다.
‘큰 기운’은 우리가 타고나는 이타적 성향을 의미한다. ‘크다’는 말은 개별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에 상대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강한 기운’은 이기성을 극복하려는 성향으로 이해된다. ‘강하다’는 말은 개별 마음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는 실천적 의지로 이해된다. ‘곧은 기운’은 우리가 도덕적인 성향을 타고난다는 점, 그리고 우리에게 바른 도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곧다’는 말은 이기적 성향에 이끌려 다니지 않음을 가리키고, ‘도를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치우침이 없음을 뜻한다. 이치에 맞게 행해야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위태롭지 않아야 마음에 걱정, 근심, 두려움이 쌓이지 않는다. 도덕성 양육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마음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마음은 평소에 언행을 신중히 하는 데에서 생긴다. 이것은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공동의 마음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양육은 개별 마음이 주변 환경이나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공진화(coevolution)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이 도덕성의 유전과 양육은 지속되어야 한다. 마음은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성장한다.36)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기르는 것만으로 실천 이론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본성에 주어진 그 도덕 속성의 유래와 실천 방법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여 부분은 순자의 위선으로 보충된다. 모심, 도움, 베풂은 후천적 노력이다.
이 후천적 노력은 자연 본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동시에 자연 본성을 변화시켜 준다. 이 후천적 노력은 과거의 잘못된 행실과 무관한 것일 수 있으며, 또한 그 잘못된 행실의 부정적 영향력을 상쇄하기도 한다.
하늘에 대한 순자의 관념을 고려한다면, 하늘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능력을 가진 존재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 과거의 잘못된 행실이 야기하는 부정적 영향력이 상쇄될 수 있음을 말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진화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유가의 덕목들을 배우고 실천할수록 생존과 번식의 확률은 높아진다.
도덕 적응설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포괄적응도를 높이고 비도덕적 행동은 포괄적응도를 떨어뜨린다.37)
36) Wilson, E. O.(2005),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 장대익 옮김, 통섭: 지식의 대통합,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5, 232쪽에서 재인용.
37) 박승배, 같은 논문, 161쪽.
도덕규칙들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진화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순자의 위선은 선한 요소를 선한 것으로 양육하고, 악한 요소는 선한 행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실천적 의지와 노력이 오랜 세대에 걸쳐 누적됨으로써 인간은 맹자가 말한 그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타고나게 된다. 도덕적 속성을 가진 이 기운이 다시 도덕적 행위를 낳고, 이로써 도덕성의 유전과 양육이 이어진다.
지금 길거리의 사람에게 도를 익히게 하고, 학문을 하게 하며, 한결같은 마음과 한결같은 뜻을 가지고 사색하고 숙고하게 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쉬지 않고 선을 쌓도록 하면, 자신도 모르게 천지자연의 변화와 함께 하게 된다.38)
군자가 지나가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머무는 곳에서는 신기한 일이 생긴다. (군자의 덕은)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을 한 흐름 속에 두게 한다. 이것을 어찌 작은 변화라 할 수 있겠는가.39)
38) 荀子, 「性惡」, “今使塗之人, 伏術爲學, 專心一志, 思索孰察, 加日縣久, 積善而不息, 則通於神明, 參於天地矣.”
39) 孟子, 「盡心(上)」, “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豈曰小補之哉.”
개인의 도덕성 발달은 사회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며,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진행된다.
‘환경의 영향’이란 도덕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의미한다. 배움, 사색과 숙고, 선행, 감화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속적이며, 개체에 큰 변화를 야기한다. 이것은 자연의 거대한 변화요, 진화의 흐름이다. 물론 이 자연의 변화와 진화의 흐름은 사회 공동체의 안녕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변화와 함께 한다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발전이 그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과 사회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 발달과 사회 공동체의 안녕 역시 자연의 변화 속에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자연과 인간, 생물 속성과 도덕 속성의 일치를 주장한 게 아니다. 도덕성 발달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도덕성의 진화와 유전과 양육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자연사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말처럼, 이 과정과 결과는 결코 작은 변화라 할 수 없다. 인간 본성론은 자연사 연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도덕성 진화로서의 자연사’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을 조화시키고, 다양성을 갖춘 인간세계를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자연의 변화와 흐름을 의미한다. 이 자연의 변화와 흐름은 ‘진화’로 대체될 수 있다. 맹자와 순자의 실천 이론은 양육을 통한 도덕성의 획득, 진화에 따른 도덕성의 유전, 도덕 본성에 내재된 도덕성의 양육을 위한 것이며, 이 도덕성 발달의 관건은 도덕적 심성과 윤리의식의 발달에 있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와 흐름’과 ‘진화’는 다시 ‘도덕적 심성과 윤리의식의 발달’로 대체될 수 있다. ‘진화’란 한 마디로 변화를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세대 간에 일어나는 생물체의 형태와 행동의 변화를 뜻한다.40)
40) 최재천, 「사회과학, 다윈을 만나다」, 박만준 외, 사회생물학,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부산: 산지니, 2010, 22쪽.
이 인간 행동의 변화는 심성과 의식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므로 도덕성 발달의 관건은 마음가짐의 변화에 있다.
마음은 항상 움직인다. 그러나 고요해질 수 있다. 몽상과 번잡한 생각이 인지를 어지럽히지 않을 때를 두고 ‘고요하다’고 말한다. 미처 도를 터득하지 못해 도를 판단하고 실천하려는 자가 있다면, 먼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비워 내고, 변함이 없도록 해야 하며, 고요해져야 한다고 말하겠다. 이렇게 도를 따르기 위해 비운 사람이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 도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마음을 바꾸지 않아야 도를 다할 수 있다. 도를 다하려 하는 사람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해야 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도를 안다’는 말은 도를 살피고 도를 실행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을 두고 ‘도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도를 체득한 사람의 마음은 어지럽지 않으며, 변함이 없고, 고요하다. 이것이 큼, 맑음, 밝음이다. (…) 만물을 마름질하는 우리의 관능이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우주 안 모든 곳에 자연의 위대한 섭리가 운행되도록 한다.41)
41) 荀子, 「解蔽」, “心未嘗不動也, 然而有所謂靜. 人生而有知, 知而有志. 志也者, 臧也. 然而有所謂虛, 不以所已臧害所將受, 謂之虛. 心生而有知, 知而有異. 異也者, 同時兼知之. 同時兼知之, 兩也. 然而有所謂一, 不以夫一害此一, 謂之壹. 心, 臥則夢, 偷則自行, 使之則謀. 故心未嘗不動也. 然而有所謂靜, 不以夢劇亂知, 謂之靜. 未得道而求道者, 謂之虛壹而靜. 作之, 則將須道者之虛則人, 將事道者之壹則盡盡, 將思道者靜則察. 知道察, 知道行, 體道者也. 虛壹而靜, 謂之大清明. (…) 經緯天地而材官萬物, 制割大理而宇宙裏矣.”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맞게 되는 모든 사물, 상황, 사건에는 도리가 있다. 이 도리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덕을 성취하는 방법이다. 마음을 다스리고 기르면, 과거의 것에서건 멀리 있는 것에서건, 보이는 것에서건 보이지 않는 것에서건, 항상 도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마음의 덕이다. 이 덕은 한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관능 역시 자연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도리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실천이 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곳곳에 운행시킨다. 도리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실천하려면, 마음을 크고 맑고 밝게 해야 한다. 이 마음가짐의 변화로 다시 마음은 크고 맑고 밝게 된다. 크고 맑고 밝은 마음이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길러준다. 반대로,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기름으로써 마음은 다시 커지고 맑아지며 밝아진다. 크고 강하고 곧은 기운을 기르지 않으면 다시 크고 맑고 밝아질 수 없다. 도덕적 심성과 윤리의식을 발달시키면 자연히 행동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영향을 받는다. 이로써 거대한 자연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 자연의 변화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며, 자신의 행동과 덕이 영향을 미치는 모든 존재에까지 확장된다. 그러므로 이 자연의 변화는 자연사의 흐름이며, 이 자연사의 흐름은 곧 도덕성의 획득, 유전, 양육의 발달사이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를 인식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생물학적 인간에서 윤리적 인간으로의 전환은 도덕 감정과 마음가짐의 변화로 설명될 수 있다.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42) 그러나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이타성을 발견한다. 루스에 따르면, 진정한 이타성은 인간 개인의 진화적 성공을 촉진시키며, 이로써 이타성은 선천적 성향으로 진화해왔다.43) 이 도덕감에 사회적 의무감도 포함된다. 루스는 의무감을 유전자와 인간의 사고나 행동을 매개하는 생물학적 규칙에서 찾았는데, 이에 따르면, 도덕 감정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주관적 경향을 넘어 옳고 그름의 평가에까지 이른다.44)
42)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 이상임, 이기적 유전자, 서울: 을유문화사, 2022, 49쪽.
43) Ruse, M.(1986), Taking Darwin Seriously: A Naturalistic Approach to Philosophy., 장대익, 「다윈 인문학과 인문학의 진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연구원, 인문논총 제61집, 2009, 14쪽에서 재인용. 44) 이을상, 「다윈주의 윤리학: 유전자의 기능과 이성의 역할」, 박만준 외, 같은 책, 174쪽.
도덕 감정이 사회적 의무감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기적 욕망과 행위는 규제를 받게 된다.
여기에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바르게 행동하는 능력으로서의 도덕성이 발달하게 된다. ‘자연의 변화와 흐름’이란 곧 이 도덕성 발달을 의미한다. 도덕성 발달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변화와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맹자가 말한 것처럼,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을 한 흐름 속에 둬야 한다’가 된다. 천명과 본성은 별개의 것일 수 없고, 자연과 도덕은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의무감과 도덕적 사명감이 분리를 통합으로 이끈다.
6. 결론
타고난 그대로의 자연 상태를 벗어나 도덕적 기준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도록 수양하고 교육하는 것은 도덕성 발달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해당한다.
이 노력이 도덕성의 획득, 유전, 양육이라는 자연의 변화와 흐름을 ‘이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천지자연을 도덕성의 모범으로 본받고 그 흐름 속에 참여하려는 군자의 덕행으로 ‘이어진다.’ 위선이 성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이 연결은 유전자의 자연선택으로 인한 도덕성 진화로 이해된다.
이것은,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자연의 흐름이며, 이 흐름이 곧 자연사 그 자체이다.
인간의 생리적 감성은 본성이다. 도덕성은 이 생리적 본성과 연계되어 있다. 인간의 생리적 본성은 인간이 도덕성을 습득하고 회복하며 실현시키는 경험적 토대이다.
다윈주의적 접근과 독해에 따르면, 성선과 위선은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순자의 위선과 맹자의 성선은 연속적이고 의존적이다.
맹자와 순자는 서로 다른 곳에 서서 동일한 목표를 지향해 나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윈주의적 접근으로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은 위선과 성선의 연속성과 의존성에 대한 통합적 이해와 설명이다.
연속적 흐름 속에 둠으로써 비로소 그 두 가지 이론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순자의 성악과 맹자의 실천 이론에 대한 낡은 오해들이 해소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성악설과 성선설은 도덕성의 획득, 유전, 양육의 과정 속에서 각각 서로 다른 지점에 서서 선악을 논한 것이다.
위선과 성선은 그 과정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도덕성 발달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강조한 이론이다.
순자가 강조한 후천적 노력은 도덕성이 도덕적 자연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화의 단계 중 가장 앞선 단계에 해당한다.
맹자가 강조한 사단의 확충은 그 앞선 단계 위에 세워 놓은 하나의 도덕규범이다.
다윈주의에 기초해 보면, 도덕 본성 역시 협력을 통해 공존을 이루려는 실천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위선과 성선의 양립 가능성을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찾음으로써 우리는 자연사의 흐름 속에서 유교 윤리학의 도덕성 발달 문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는 맹자와 순자의 윤리 이론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경험적 토대를 갖고서 바라보는 하나의 시작이다.
송명이학과 조선유학 속의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다윈주의적 접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낀다.
구체적인 연구는 과제로 남겨 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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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arwinian integration of Mencius' xìngshàn (性善) and Xunzi' wěishàn (僞善)
Kim, Baeg-Nyeong (Chuncheon Natl. Univ. of Education) Lee, Kyoung-Moo (Chuncheon Natl. Univ. of Education)
The superficial contrast between the xìngshànshuō (性善說) and the xìngèshuō (性惡說) is likely to misrepresent the understanding of the ethical theories of Mencius (孟子) and Xúnzǐ (荀子) as incompatible. In addition, it is easy to think that the hàoránzhīqì (浩然之氣) and qiúfàngxīn (求放心) and guǎyù (寡欲) are mysterious, and that xìngè (性惡) and wěishàn (僞善) are contradictory. In the continuous and dependent context of evolution, it is understood that wěishàn (僞善) can be achieved in xìngè (性惡), and xìngshàn (性善) can be achieved in this wěishàn (僞善). Of course, it is not necessary to view this line of evolution as a linear flow. This is because wěishàn (僞善) and xìngshàn (性善) are not limited to the process of individual moral development, and they do not comprehensively consider the various aspects of experience. It can be explained in the order of acquisition of morality through parenting, the inheritance of morality according to evolution, and the parenting of morality inherent in moral nature. This line of evolution is accomplished by learning and discipline. Acquired efforts to control instinctive desires cause you to put yourself in the changes and flow of nature. The person who learns and practices unknowingly falls into this line of change. Humans can create and sustain this flow through learning and discipline. As a result the xìngshànshuō (性善說) and the xìngèshuō (性惡說),as well as the wěishàn (僞善) and xìngshàn (性善) also form a continuous and dependent relationship. This is also an integrated understanding of the Darwinian approach.
Keywords: xìngshàn (性善), wěishàn (僞善), nature, nurture, change and flow of nature, acquisition and inheritance of morality, Darwinism
2022년 11월 11일 접수 2022년 12월 20일 심사완료 2022년 12월 21일 게재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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