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문】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철학은 시간이 흐른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하며, 시간 흐름의 내적인 구조를 밝히는 과정 속에서 그의 지속 (durée) 이론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다. 이에 이 논문은 베르그손 철학 체계 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근거들을 통해 그 최초의 물음, 즉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 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논의는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두 방향에서 전개된다. 먼저 제시되는 것은, 시간적 종합이 지니는 내적 역량이 자신을 물질적 요소들로 표 현하고 전개시키는 동시에, 이렇게 출현한 물질이 다시금 잠재성으로 되돌아 와 이를 변양시키고 재촉발하는 수직적인 왕복운동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지 속이 곧 창조이자 발명이라는 베르그손 시간론의 대표적 테제를 보다 구체화 시켜줄 것이다. 이후 우리는 습관-기억과 꿈 속에서의 고유한 시간성에 대한 베 르그손의 연구들로 넘어간다. 이로부터 베르그손 자신과 연구자들이 간과한 것과 달리 현행적 계열 위에서 펼쳐지는 물질적 운동의 고유한 시간성 또한 지 속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임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주요 발견 중 하나를 이룬 다. 이처럼 베르그손 철학에서 시간을 구성하는 것, 이는 정신의 수직적 축과 물질의 수평적 축이다. 논문의 마지막 장은 이상의 논의를 확대시켜 인간적 시 간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세계 바깥에서 발견되는 물질의 다양한 조직화 양상과 함께, 인간적 시간을 뛰어넘는 또 다른 시간화의 가능성들을 제 시하게 될 것이다.
【주제분류】현대프랑스철학, 프랑스철학, 존재론
【주요어】시간, 지속, 베르그손, 자유, 기억
Ⅰ. 들어가는 말
시간이라는 주제가 철학사에서 지니는 중요성은 상당하다. 시간을 사유 하는 것은 곧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고,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형이상학 일 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그 의미와 층위를 바꾸어가며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 속되어 왔다. 한편 현대 철학에서 시간이 작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 는 누구보다 하이데거와 함께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공을 언급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시간이 흐른다는 단순한 사 실에 대한 경이로부터 출발하며, 이 최초의 발견을 심화시키는 가운데 흐름 으로서의 경험적 시간을 규제하는 내적 구조, 다시 말해서 ‘시간(temps)’과 구분되는 ‘지속(durée)’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과정 에서 지속 이론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본래 관심사인 시간이라는 주제를 훌 쩍 뛰어넘게 되었다면, 우리의 임무는 베르그손의 지속론을 다시 그 최초의 물음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 지속 이론이 어떻게 다시 시간의 이행이라는 사실의 해명으로 수렴되는지를 밝히는 것 이 이 글의 목표를 이룬다.1)
1) ‘시간’과 ‘지속’의 이러한 구분, 그리고 베르그손 철학 안에서 ‘시간 이론’과 ‘지속 이론’ 사이의 관계는 프레데릭 보름스의 논문 “La conception bergsonienne du temps” 으로부터 차용한다.(Frédéric Worms, “La conception bergsonienne du temps”, dans Le temps, Alexander Schenell(Dir.), Vrin, 2007, 181-184) 보름스에 따르면 베르그손 철학은 시간의 흐름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며, 이 최초의 직관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설명해주는 ‘지속’ 원리에 대한 심화로 나아간다. 이로써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은 차례로, 첫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의존해 있는 의식 혹은 기억의 내적 구조를, 물질과 기억은 이 흐름을 설명해주는 자기-구조화로서의 원뿔 도식을, 마지막으로 창조적 진화는 시간의 흐름과 정확히 동일한 창조의 역량 혹은 비결정성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 이르게 된다.
시간을 사유함에 있어서 베르그손이 철학사적 전통과 갖는 차이는 무엇보다 시간을 새로움의 몫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두드 러진다. “시간은 발명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2)라는 그의 유명한 테제는, 첫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1889)에서부터 마지막 저작인 사유와 운동(1934)에 이르기까지 지속되 어온 시간과 새로움의 동일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확고한 믿음을 표명한다.
2) EC, 341/501; 베르그손의 저작을 인용할 때 저작들은 각각 DI(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MM(물질과 기억), EC(창조적 진화), ES(정신적 에너지), MR(지속과 종교의 두 원천), PM(사유와 운동)라는 약호로 옮겨진다. P.U.F.에 서 발간된 단행본의 쪽수를 먼저 표기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하 시론으로 약칭),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세 권의 경우 뒤에 아카넷의 국역본을 병기하도록 한다.
이를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연장(étendu)적 공간이 서로 외재 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판명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시간은 불가분 의 흐름을 이룬 채 요소들이 상호 침투해 있다는 본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 라 연장을 모델로 삼는 공간적 사유는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에 게서 정점을 이루는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공간 위의 분할가능한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성립하는 정해진 법칙과 수식을 그대로 시간에도 적용한다면 미래와 과거의 모든 사건을 예측하고 재구성할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과 달리 하나의 유기적 총체(tout)를 이루 는 시간의 경우 요소들은 분할될 수 없고,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결정론적 법칙도 대입시킬 수 없으며, 이는 다시 말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점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더 나아가 베르그손이 시간적 종합의 과 정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 고유의 조직화 과정이 빚어내는 창조적 역 량이다. 이로부터 시간은 곧 ‘창조’이자 ‘예측불가능성’이라는 지속 이론의 핵심적 테제가 성립한다. 혹은 물질과 기억과 함께 동일한 주장을 다른 방향에서부터 접근해보 자. 이번에 유일하게 주어져 있는 것은 서로 반작용을 주고받는 물질적 운 동 혹은 이미지들이고, 이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지위를 지닌 신체가 그들 사이에,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 물질로부터 오는 작용과 다시 물질 로 내보내야 하는 반작용 사이에 고정적인 관계, 안정적인 기제가 세워진 경우 응답은 물음이 제기되자마자 자동적으로 내보내질 수 있다.
이때 운동 은 반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는 어떤 시 간적 간격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들어온 작용으로부터 내보낼 반 작용을 고심하고 따라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작용과 반작 용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통해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시간적 공백이야말로 물질의 기계론적 성격을 초월하게 해주고 모든 정신적 활동의 출발점이 되 는 핵심 기제이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출현시키는 심급이 된다.3) 따라서 살아 있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지속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을 공들여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탐색 없는 공들임, 모색 없는 탐색이란 있 을 수 없기 때문에 지속한다. 시간이란 바로 이 망설임 자체이며, 그렇지 않 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4)
3) 시간적 간격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속들이 특정한 두 께, 어떤 깊이를 지닌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에게 단일한 것으로 드러나는 한 색깔의 지각은 사실은 수조에 이르는 파동들을 한 순간에 응축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 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일일이 지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파동들의 미세한 순간들 하 나하나를 지각하며 살아가는 미생물이 있다면 그에게 시간은 더 이상 우리의 것과 같 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각 순간들은 결코 지각되는 바와 같이 찰나의 순간에 지나는 것이 아니며, 실은 언제나 특정한 응축의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 막대한 순간들 을 하나로 응축해내는 수축-기억, 이것이 시간에 정신적 깊이와 동시에 매순간 시간적 간격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상의 고찰은 존재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서로 다른 자유의 정도가 지속에 있어서의 긴장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는 베르그손의 또 다른 핵 심 논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4) PM, 101
요컨대 베르그손에게서 시간은 곧 ‘비결정성’이며, 비결정성의 공백에 들어서는 ‘창조’의 작업이고, 창조와 자유를 가능케 하는 ‘지연’의 효과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시간은 단번에 펼쳐질 것이 고 따라서 특정한 시간적 간격을 점유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의 고유한 속성 은 존재의 이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창조 혹은 발명을 위한 망설임 을 통해 시간을 설명하는 것이 베르그손의 핵심 주장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테제는 분명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먼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 조와 발명의 과정이 다소간 추상적이거나 거시적인 틀 안에서만 논의되고 있다면, 이를 베르그손 철학 내 다른 도식들로 옮겨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 할 수는 없는가?
나아가 창조 혹은 발명이라는 용어가 예술적인 억양을 지 니고 베르그손 자신도 예술창작으로부터 대다수의 예들을 선취해오는 것 과 달리 이를 존재론 일반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추가적인 물 음들 또한 이어진다. 창조는 어떻게 일회성으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 고 끝없이 계속될 수 있는가? 먼저 답해야 할 것들은 이러한 질문들이다. 이처럼 이 글은 창조와 시간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베르그손의 기본적 테 제가 남기는 의문들로부터 출발하며, 이후 순차적으로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전개될 것이다. 때로는 베르그손이 전혀 시간과 관련하 여 사유하지 않았던 지점들까지도 시간론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오고, 때로 는 불가피하게 베르그손의 기본적 테제를 전면으로 반박하지만 그 근거 또 한 베르그손 사유 체계 안에서 확충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진정한 ‘재구성’ 의 작업이 될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이 글이 주요하게 참조하 는 세 논문, 「지적 노력」, 「현재의 기억과 잘못된 재인」, 「꿈」은 이 논문들 이 수록된 정신적 에너지(1919) 속 다른 글들처럼 특정 심리적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 논문들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후자는 시간 과 창조의 동일성이라는 베르그손 시간론의 기본 테제에 던지는 우리의 의 문과 관련된다. 우리는 ‘습관-기억’과 꿈의 시간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설명 을 논거로 삼아 베르그손 시간론의 불충분성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 해 시간의 흐름을 ‘정신의 수직적 운동’과 ‘물질의 수평적 운동’이라는 두 축으로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Ⅱ. 정신과 물질, 잠재성과 현행성의 수직적 관계
앞 장의 설명처럼 베르그손 철학에서 시간의 흐름이 그 고유한 조직화의 과정 속에서 창조적 역량을 품게 된다면,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화 되어야 할, 다시 말해서 창조적이거나 자유로운 행동으로서 구현되어야 할 필요성 하에 놓여 있기도 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은 이와 70 논문 같은 내적 지속의 외화 운동, 즉 동일한 지속 안에서의 정신의 차원과 물질 적 차원의 연관 관계다. 이는 또한 시론의 발견을 물질과 기억 속에 위 치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시론의 목적이 순수 지속의 본성과 그 보존 원 리를 설명하는 데 있었던 반면, 물질과 기억은 이를 물질적 평면에 접합 시키면서 어떻게 원뿔 형태로 표상되는 기억의 총체가 운동으로 외화되어 다른 물질적 운동들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두 항들 이 연결되는 원리를 세밀하고 또한 보다 명시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하는 텍스트는 「지적 노력」(1902)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알고 있거 나 이미 외운 것을 상기하는 행위를 포함하여 창조 혹은 발명 활동들에 이 르기까지, 정신적 활동들이 수반하는 ‘지적 노력(l’effort intellectuel)’이 과 연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논문에서 베르그손의 주 요 목표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이 논문은 자신의 최초 물음 을 뛰어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발견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단일한 평면 위에 놓인 요소들이 기계적으로 서로를 잇따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운동을 ‘수평적 운동’이라 부른다면, 이와 달리 지적 노력을 들이 는 정신의 운동은 ‘역동적 도식(schéma dynamique)’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에 따라 수직적 방향으로 운동한다. 우선 그 출발점은 어떤 어렴풋한 느낌 이자 인상이다. 상기 작용의 경우 “고유한(sui generis) 인상”,5) 이해와 해 석의 작업에서는 지각된 대상들이 그 가설을 제시해주는 “의미 (signification)”6) 혹은 “어조(ton)”,7) 그리고 발명 혹은 창조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상, 달성된 특정 결과”8)가 정신에 주어지는데, 이들이 각 경우에 있어서 역동적 도식으로서 고유하게 기능한다. ‘역동적’인 이유는 “아주 다 른 역동적 요소들이 서로의 안에 주어져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어떤 표 상”9)이기 때문이며, ‘도식’이라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은 전혀 규정된 질과 형상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판명한 요소들로 전개되는 데 있어서 그 “노력의 방향”10)을 제시하는 “지도적 관념(idée directrice)”11)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2)
5) ES, 163 6) ES, 169 7) ES, 171 8) ES, 174 9) ES,
10) ES, 165 11) ES, 186
12) 역동적 도식의 지시적 기능에 대해서는 다음의 인용들도 참고: “우선 나는 나에게 남 아 있었던 일반적인 인상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기묘하다는 인상이었지만, 무규정적 인 기묘함은 아니었다.”(ES, 164); “이 감동은 단지 창조의 요구였지만, 규정된 요구이 다.”(MR, 44/66)
우리는 그리스어 어감을 빌려 그것을 역동적 도식(schéma dynamique)이 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 표상이 이미지들 자체를 포함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 한 지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13) 따라서 사태는 역동적 도식이 지닌 내재적인 힘에 의해 마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것처럼 진행된다.14) 그 가장 아래에는 무수한 세부사항들과 함께 떠올려지는 기억의 한 장면과 같이 판명한 (distinct) 요소들, 베르그손이 ‘이미지’라 부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도식 을 이미지들로 전개시킬 수 있다고 하여서, 이미 펼쳐진 이미지들을 토대로 도식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앞서 도식이 상호 함축된 형태로 이미 지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는 도식이 이미 주어진 이미지들의 단 순한 합이나 개요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식의 단계에서 는 아직 어떤 이미지들도 생각할 수 없으며, 이 점은 처음에는 막연하게 예 감될 뿐인 “탄력적이거나 유동적인 도식”과 대비되는 “판명한 개념으로 즉 각 주어질 수 있는 부동적이고 경직된 형태를 지닌 단일한 도식”15)의 경우 에서도 마찬가지다.
13) ES, 161(원문 강조) 14) ES, 160 15) ES, 176
예를 들어 기억의 단순한 회상에 있어서 이 기억을 채 우는 이미지들, 즉 회상의 대상이 되는 장면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미 결정 되어 있고 따라서 도식과 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재 빨리 등장할 테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도식과 이미지 사이에 성립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16) 그런데 방금 언급한 회상의 예시는 역동적 도식으로부터 이미지로의 전 개가, 잠재적이고 무의식적 상태로 존재하는 순수 기억이 구체적인 이미지 들로 채워진 이미지-기억의 형태로 상기되는 과정을 그린 물질과 기억의 설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사실 「지적 노력」은 베 르그손이 서두에 밝히듯 물질과 기억을 보완하기 위한 글이며, 따라서 역동적 도식 이론은 물질과 기억에 등장하는 순수 기억 , 그리고 순수 기 억이 위치해 있는 의식의 평면이 자신의 현행적 양태와 맺는 관계, 혹은 그 이행의 메커니즘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17)
16) 역동적 도식과 이미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기도 한다.
첫째, 역동적 도식은 특 정 방향을 지시하면서 복합적인 이미지들을 출현시키지만 이미지들을 출현시켜놓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버린다.(ES, 188)
둘째, 역동적 도식은 제기된 문제에 비유될 수 있으며,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이미지들을 호출하고 결집시키는 것”이 도식의 역할이다.(ES, 189) 따라서 역동적 도식과 이미지 사이에 성립하는 것은 외적 유사성의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 즉 “의미의 동일성, 특정한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서의 동등한 능력”이다.(ES, 189); 이상의 기술들은 이후 들뢰즈의 이념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다.
17) ES 155;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의 한 대목에서 물질과 기억 속 ‘역동적 도식’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특정한 역동적 도식에 위치하는 것, 이는 물질과 기억 의 용어를 따르자면 회상의 첫 단계인 병진(translation) 운동과 회전(rotation) 운동을 거친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모든 층위는 더 이상 순수 기억도 아니고 그렇다 고 적절히 말해 아직 이미지도 아닌, 나누어지지 않은 표상 속에 수축된 채로 있다. […] 우리는 이 나누어지지 않은 표상(베르그손이 “역동적 도식(schéma dynamique)” 이라고 부를)에서 출발하는데, 거기서 현실화 도중에 있는 모든 회상들은 상호 침투의 관계 속에 있다.”(Gilles Deleuze, Le bergsonisme, PUF, 1966, 62-63.(질 들뢰즈 지 음, 김재인 옮김, 베르그송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6, 89∼90쪽))
‘병진’ 운동이란 순수 기억이 잠재적인 상태로 놓여 있는 원뿔의 특정 단면 A′B′를 수축시켜 의식의 층 위로 가져오는 것이며, ‘회전’ 운동은 이 단면의 유용한 측면들을 아직은 완전하게 판 명하지는 않은 상태로 제시하는 것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분석 하에서는 순수 잠재성으로부터 이미 호출되었지만 명확한 이미지-기억의 형태로 펼쳐지지는 않은 역 동적 도식은, 잠재성과 현행성의 중간적 상태, 그 이행적 단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순 수 기억의 현실화 과정에 관한 베르그손의 설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MM, 187-192/283∼290
게다가 그렇다면 이는 비 단 회상의 경우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 2장 에서 기억의 호출을 동반하는 정신적 활동을 독서, 청취와 대화, 주의 작용 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방대한 예들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 순수 기억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무의식 전체는 시간적 종합의 특성을 띤 것으로서 지성의 사유를 비껴가고 어떤 정해진 법칙으로도 분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잠재성에서 현행성으로, 혹은 역동적 도식에서 이미지로 향 하는 운동이 창조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역동적 도식과 이미지의 관계를 여러 층위, 여 러 조합의 수준에서 상상해야 한다. 물질과 기억 2장의 목표가 무엇보다 신체에 들어온 자극들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기억들을 호출해내는 현상을 기술하는 것에 있다면, 베르그손이 이 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렇게 완성된 지각은 “운동적 반작용의 서막, 공간 속에서의 행동 의 시작”18)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대화상대의 발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다음 발화의 의미를 움켜쥔 다음의 임무는 이 제 이를 실제 성대의 근육 움직임들과 함께 발화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 런데 베르그손은 이 과정에 다시 한 번 도식과 이미지의 관계를 적용하고 있지 않은가? 즉 그가 일상적인 행위의 배후에서 그 행동을 추동하고 있는 ‘도식’의 존재를 언급할 때, 우리는 이로부터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운동들 에 도식과 이미지의 관계를 적용시킬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게 된 다. 행동 자체를 구성하는 운동들은 우리의 의식을 피해 가거나 아니면 모호하 게만 거기에 도달할 뿐이다. 가령 팔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지극히 단순 한 행위를 고려해 보자. 그 행위가 내포하는 모든 요소적인(élémentaire) 수 축과 긴장들을 우리가 미리 상상해야 한다면, 또는 심지어 그것들이 수행되 는 동안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정신은 즉시 목적으로, 즉 이루어졌다고 가정된 행위의 도식적이 고 단순화된 직관으로 옮겨간다. 그때 어떤 반대의 표상도 최초의 표상의 효과를 중화시키지 못한다면, [목적을 이루기에] 적절한 운동들이 도식을 채우러 와서는, 말하자면 도식의 비어 있는 간격들에 의해 흡수된다.19)
18) MM, 146/226
19) EC, 299/443∼444(인용자 강조); 혹은 다음을 보라:
“예를 들어 창문을 열기 위해 일 어섰다고 해보자. 나는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게 된다. […] 완수해야 할 행위는 미리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내가 머무는 위치에 있다. 이때 나는 그 위치에 머물면서 그것을 탐색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잠시 사라졌던 그 관념을 재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관념은 이 미 윤곽이 그려진 운동과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대한 내적 심상에, 어떤 특별한 색채 를 분명히 전달했어야만 했고, 이때 만약 도달해야 할 목적이 달랐다면 그 색채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DI, 121/204)
이로써 존재의 두 차원 사이에 성립하는 운동에 대한 상이 명확히 드러 나게 된다. 우선 잠재적 심급의 무수한 층위와 수준들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고유한 종합이 행해지고 있다. 이 종합 속에 위치하여 역동적 도식을 거쳐 연장을 닮은 판명한 이미지들을 현행화시키는 것, 이것이 정신의 수직 적 운동을 이룬다. 이는 무기물질과 생명체의 관계와 같은 물질과 정신의 수평적 구분과 구별되는, 정신과 물질의 수직적 관계다.20) 베르그손이 물 질과 정신의 관계에 관한 그의 다양한 테제들 중 하나로서 물질이 정신의 중단 혹은 정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실로 우리는 매 순간 형태의 창조를 내부로부터 포착하며 체험한다. 그리고 형태가 순수하 고 창조적 흐름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경우, 거기에 바로 물질의 창조가 있 을지 모른다”.21) 이러한 관점 하에서 볼 때, 물질은 정신이 지닌 고유한 내 적 역량으로부터 발생되는 바 둘은 동일한 기원에 귀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로써 발생된 물질이 정신과는 상이한 차원에 속하게 된다 는 점에서 둘은 분명히 구별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구도 를 무엇보다 인간 의식의 예시를 통해 확인했지만, 마지막으로 베르그손에 게서 의식이란 그 심리학적 의미를 넘어서 시간의 잇따름, 그리고 존재론적 인 기억과 하나를 이룬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22)
20) 대표적으로 장껠레비치가 “베르그손주의는 본질의 일원론으로 나타나고, 경향의 이 원론으로 나타난다”(Vladimir Jankélévitch, Henri Bergson, P.U.F., 2015(4e édition), 174.)고 베르그손의 존재론을 요약했을 때, 이는 물질과 정신의 수평적 구분 을 따르는 것이다.
21) EC, 240/358∼9 22) 그렇기 때문에 보름스는 지속을 무엇보다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속은 따라서 그것 이 무엇이건 담겨진 것의 연속적 잇따름에 있다”(Frédéric Worms, Le vocabulaire de Bergson, Ellipses, 2013, 32.).
따라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수직적 관계를 지속하는 존재 일반에 적용하며, 정신의 수직적 운동 을 물질적 차원에 출현하는 모든 운동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내세 운다.
Ⅲ. 정신의 수직적 왕복운동으로서의 지속
이상의 설명이 지속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정신과 물질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에 대한 자세한 상을 제시해주었다면 이제 시간의 문제로 넘어가야 한 다. 먼저 시간의 펼쳐짐이란 전체가 결코 완성되지 않고 무언가가 계속해서 생성된다는 사실, 즉 단번에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는 점을 떠올려보자. 왜 전체는 닫히지 않는 것이며 생성의 과정은 어째서 이처럼 이어지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왜 잠재성에서 현행성으로 향하는 수직적 운동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는가? 어째서 “우 리 삶의 각 순간들은 일종의 창조”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23)게 되는 것인가? 데자뷔 현상을 분석하는 논문 「현재의 기억과 잘못된 재인」(1908)에서 베르그손은 시간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분석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는 과 거가 현재와 동시간적으로 생성된다는 것이다. 현재와 과거가 본성상 차이 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현재가 어느 순간에서인가 과거가 될 수 있는 것, 그 핵심은 어떤 이중적 발생에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출현과 동시에 그 ‘현 재의 기억’이, 즉 그것의 과거적 양태가 나란히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은 이중적인 측면을 제공한다. 그것은 현실적이면서 잠재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지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이다”.24) 이때 우리의 행동이 현행적 대상 위에서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의 복사물이라 할 수 있는 현재의 기억은 무의식적 종합 속으로, 즉 기억의 질적 다양체 속으 로 합류하여 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역동적 도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이 출현시킨 이미지와 함께 계속해서 변화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가?25)
23) EC, 7/28∼29
24) ES, 136
25) 지속의 이중화(dédoublement) 운동에 관한 베르그손의 발견은 결코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비드 라푸자드는 이를 베르그손의 초기저작에서부터 핵심적인 요소로서, 즉 시론에서 표층자아와 심층자아의 구별과 공존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해석한다. 의식 수준에 행동의 주체로서의 표층적 자아가 있다면, 심층에서는 그 “세계속 실제적 운동들을 이중화하는 잠재적인 운동”(45)이 공존하고 있다. 전자가 현재의 물음에 응답하는 의미에서의 주체라면, 후자는 이 내적인 진동들을 질적 다양체의 고유한 종 합으로서 조직화하고 있으며 창조의 요구나 자유로운 행위를 이룰 ‘정신적 에너지 (l’énergie spirituelle)’를 축적하는 숨겨진 종합의 중심이다. 창조적 진화로 나아가 서, 동일한 생명계에 속하면서도 하나가 축적한 창조적 에너지를 다른 하나가 물질계 속에 구현해내는 식물과 동물은 심층자아와 표층자아의 관계에 정확히 상응한 다.(David Lapoujade, Puissances du temps : Versions de Bergson, Minuit, 2010, 40-48.)
예견되지 않은 것의 몫은 무엇보다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미지가 도식을 향해 되돌아서서 그것을 수정하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운동 속에 있다.26) 우리 삶의 각 순간들은 일종의 창조이다. 그리고 화가의 재능이 그가 만든 작품의 영향으로 형성되거나 변형되고, 어쨌든 수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각 상태들도 우리로부터 나오는 동시에 우리 인격을 수정시켜서, 우 리에게 막 주어지는 새로운 형식이 된다.27)
26) ES, 176; 혹은 다음을 보라: “이 글자들은 바로 함께 완성되려 하건, 서로를 대체하려 고 하건 간에 어찌되었든 도식의 지시에 따라 조직화되려 한다. 그러나 흔히 이 작업의 도중에, 실현 가능한 어떤 조직화 형태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미지들 그 자체에 의해 요구되는 도식의 점차적인 수정이 일어난다. 도식이 불러일으킨 이 이미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자신들이 [도식을] 변형시키거 나 심지어 사라지게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ES, 181-182)
27) EC, 7/28∼29
따라서 앞 장에서와는 달리, 이제 이미지는 도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적 극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도식이 분만한 이미지는 다시 자신을 낳은 다양 체로 되돌아와 그것들 사이의 새로운 종합, 새로운 조직화를 생산해내는 것 이다. 이러한 베르그손적 구도 하에서 물리적 현상들은 어떤 상위의 심급에 의존해 있지만,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양된다는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 서 플라톤이 그리는 불변의 이데아와 구분된다. 우리는 결국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변화한 도식을 토대로 계속해서 새로운 발명의 노력이 이어지는 것 으로 이루어진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도식이 이와 같이 이미지들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할 운명에 놓여 있다면 도식과 이미지 간의 최종적인 일치는 무기한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형식을 이루는 것, 이는 분열과 결합을 거듭하는 자기-촉발의 형식이며, 정신의 수직적인 왕복운동이다.28) 다른 한편으로, 지속은 이처럼 도식과 이미지 사이의 잔여와도 같 은 ‘불일치’로 정의되지만, 도식과 이미지 사이에 성립하는 내적 관계의 본 성 그 자체로 해석되는 한 이 불일치는 더 이상 그리스철학에서와 같이 부 정적 어감을 띠지 않게 된다.29) 나아가 지속이 도식과 이미지 사이의 불일치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삶 은 도식과 이미지들을 일치시키려는 과정인 “시행착오들과 다소간 유용한 시도들, 도식에 대한 이미지들의 적응과 이미지들에 대한 도식의 적응, 이 미지들 서로 간의 간섭과 중첩”30)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8) 이러한 관점은 들뢰즈의 베르그손 해석과 맥을 같이 한다. 들뢰즈는 현재와 이 현재의 기억이 함께 ‘수정-이미지(image-cristal)’를 이루고 있으며,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스 스로를 재촉발시키는 영속적인 자기 구별의 운동이 시간을 이룬다고 말한다. 수정-이 미지와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Gilles Deleuze, L’image-temps. Cinéma 2. Minuit, 1983, 108-111.; 이처럼 순환 관계를 이루고 있는 현행성과 잠재성 사이에서 시간의 ‘구성’이 아닌 ‘발생’을 논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의 항에 특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이 점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가 발생의 원천으 로 삼는 것은 잠재성이다. “시간 그 자체, 즉 촉발하고 촉발되는 가운데 이중화되는 순 수 잠재성, 시간의 정의로서의 ‘자기에 의한 자기 촉발’”(Ibid., 111). 들뢰즈가 차이 와 반복 2장의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서 베르그손 시간론 속 네 가지 역설(과거와 현재의 동시간성, 모든 과거와 현재의 공존,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의 현재에 대한 선 재, 과거 수준들의 공존)을 언급하면서 유일하게 베르그손 자신은 언급한 적 없는 과 거 일반의 선재라는 역설을 끼워 넣는다면, 위의 의도로부터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재성의 특권화라는 이러한 비약은, 강도의 발생적 역량을 잠재성에 해당하는 이념이 취해온다는 들뢰즈 철학의 고유한 구도 안에서만 타당성을 지닐 수 있을 뿐, 베르그손 철학에 적용하기 힘들다. 베르그손 철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직 두 항 사이에 성립하는 자기 지시적 관계이며, 따라서 시간의 ‘발생’이 아닌 ‘구성’에 한 정된다.
29) 베르그손이 보기에 플라톤은, 유일한 실재인 완전한 이데아의 결손으로서 모든 생성과 소멸의 물리적 현상들, 나아가 물리적 시간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베르그손는 이 순서를 과감히 전도시킨다. 즉 실재는 운동과 생성이며, 이데아 철학은 오히려 고정 불변성을 이상으로 삼는 지성적 사고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결국 물리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의 변질이라는 말이 된다. 이데아 철학 전체는 이 명제로 요약된다”.
베르그손의 플라톤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EC, 313-328/462∼483 30) ES, 181;
“따라서 기다림의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채워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특 정한 여러 상태들이 잇따라 나타나야 한다. 이 상태들은 어떠한 것인가? […] 따라서 정신이 통과하는 상태들은 도식 속에 삽입되기 위해 이미지들이 행하는 시도들, 혹은 적어도 몇몇 경우들에서는 이미지들로 표현되기 위해 도식이 감수하는 수정들에 상응 한다. 지적 노력의 특징은 이러한 매우 특수한 주저함에 있음에 틀림없다.”(ES, 177)
지속을 이루는 시간적 길이, 경험적 시간, 혹은 우리 삶 자체를 채우고 있는 것 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시행착오의 과정인 것이다. 인생을 하나의 아름다운 춤동작을 구현해나가기 위한 과정이라 해보자. 이 “춤의 도식은 처음부터 적절한 이미지들로 채워지지 않”31)으며, 이를 신체 위에서 운동감각적 이 미지들로 구현하기까지의 지난한 시행착오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
31) ES, 180
먼저 모 호하게만 인지되는 춤을 거듭 관찰함으로써 이 시지각을 요소들과 요소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들로 분절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뚜렷한 형태로 소유된 시지각에 신체의 운동을 맞추어 나가야 한다. 신체에 이미 새겨져 있는 다른 조직화들, 예를 들어 걷거나 뛰는 행위의 습관들에 저항하며 이들과 공존할 수 있는 또 다른 조직화 방식을 새기기 위한 다양 한 방식들을 시도하면서 말이다. 완벽한 춤동작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는 이 처럼 필연적으로 어떤 투쟁의 시간, 반쯤은 걸음이고 반쯤은 춤인 발동작들 의 잇따름이 요구되며, 시간을 채우고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고 되지만 희열 가득한 몸짓들이다. 우리가 지속 이론으로부터 어떤 윤리학의 가능성을 또한 엿볼 수 있다면, 이는 이처럼 삶을 대하는 근본적 태도에 관 한 가장 기초적인 윤리학일 것이다.
Ⅳ. 물질의 수평적 운동 1 : 습관-기억의 시간성
이상에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항의 상호교차운동, 두 항 사이 에 성립하는 수직적 왕복운동으로 지속의 사실을 재구성했다. 지속으로서 의 시간이 곧 창조이고 발명이라는 베르그손의 핵심적 주장에 대해, 잠재적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종합의 내적 역량으로부터 실제적 운동들이 전개되며, 반대로 이렇게 출현한 현상들이 다시금 잠재성으로 합류하고 이 를 변양시킴에 따라 두 항 사이의 끊임없는 교차와 불일치가 지속의 사실을 구성한다는 설명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은 이러한 지속 이론의 공 리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보고자 한다. 즉 발명 혹은 창조의 작업, 즉 정신의 수직적 운동은 왜 반드시 특정한 시간을 들이고 서야 행해지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왜 창조의 작업은 무한한 속도로, 단번 에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인가? 사실 시간을 들이는 것은 단지 자유의 몫이 발견되는 체계와 영역들만이 아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론적으로는 어떤 시간도 필요로 하지 않을 고 정된 물리법칙들로 이루어진 운동들 또한 특정 길이의 시간 속에서 전개된 다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이다.32) 축구장 한복판에서 골대를 향해 축구공 을 시원하게 찼을 때, 축구공이 축구장을 가로질러 골대에 무사히 안착하기 까지 고려되어야 할 것은 날아가는 축구공의 힘과 공기의 저항, 그리고 축 구장의 길이 사이에 성립하는 지극히 단순한 물리법칙뿐이다. 그러나 철저 하게 기계론적인 법칙을 따르는 이러한 축구공의 이동운동에도 언제나 일 정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가? 지구의 공전과 자전은 수십 억 년 간 단 한 번의 예외를 보이지 않았을 반복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구는 언제나 특정한 주기를 통해서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인가? 베르그손은 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규칙적인 운동을 수행하는 한 체계 역시도 우주 전체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시간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축, 즉 물질적 축이다.33)
32) “물론 우주 그 자체 안에서도, 나중에 말하겠지만, ‘하강descente’ 운동과 ‘상승 montée’ 운동이라는 두 대립된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이미 준비된 두루마리 를 펼치는 데 불과하다. 그것은 이완되는 용수철처럼 이론상으로는 거의 순간적인 방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EC, 11/35∼36)
33) 베르그손의 논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EC, 10-11/34∼36
어린아이가 그림맞추기 놀이에서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조립시 키는 놀이를 할 때 그 아이는 더 많이 연습을 함에 따라 점점 더 빨리 재구성 에 성공한다. 게다가 그 재구성은 이미 준비되었던(instantané) 것으로서, 아이가 상점에서 나오면서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아이는 그것을 주어진 것으 로서 발견했다. 따라서 그 작업은 특정한 시간을 요구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론적으로는 그것에는 어떤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 […] 그러나 자신의 영 혼의 밑바닥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끄집어 내 창조하는 예술가에게 시간은 더 이상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 발명의 시간은 여기서 발명 자체와 하나를 이룬다.34) 어떤 특정한 독서의 기억[이미지-기억]은 하나의 표상, 단지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그 기억은 내가 내 맘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정신의 직관 속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에다 임의적인 어떤 지속을 할당할 수 있다. 그것을 하 나의 그림처럼 단번에 포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암기된 학과의 기억[습관-기억]은 비록 내가 이 학과를 내적으로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을 때조차 어떤 정해진 시간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필요한 모든 발음의 운동들을 전개시키기 위한 만큼의 시간을 요구한다.35)
34) EC, 339-340/498∼499
35) MM, 85/141
두 텍스트들 중 첫 번째는 지속이 언제나 창조적 생성 혹은 발명의 과정 과 함께 성립한다는 베르그손의 대표적인 입장을 따른다. 시간을 자유 혹은 비결정성과 동의어로 보는 베르그손적 관점 하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그림맞추기 놀이는 그 순서와 조합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시간을 들여 고 심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는 유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두 번째 인용문은 이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즉 가장 공간화된 양태를 보 이는 습관-기억, 첫 번째 인용문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반복적인 운동 의 전형으로 제시하는 이 자동적 기제에도 작동에 고유한 시간이 요구된다 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손이 습관-기억의 시간성을 주 장할 때 그는 그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형식에 주목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 히려 이 대목에서 습관-기억의 시간성이 의미하는 바는, 현행성의 평면을 따르는 물질의 운동들에도 고유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요 컨대 위의 두 인용문은 시간을 이루는 두 축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시간의 형식이라면, 두 번째 인용문은 시간의 질료에 관계한다.
첫 번째 인용문이 정신의 수직적 운동에 대해 기술한다면, 두 번째 인용문은 물질의 수평적 운동을 다룬다.
두 요소들 중 어떤 하나라도 부재할 때 시간은 지속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논문 「지적 노력」은 수직적 운동과 수평적 운동을 구분하고 그 기본적 성격을 정의해주고 있다. 전자가 상호 함축적인 상위의 의식의 평면으로부터 요소들이 판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위의 물질적 평면으로 움 직인다면, 후자는 이미 완벽하게 외운 시의 기계적인 암송과 같이 이미지의 물질적 평면 위에서 수평적으로 전개되는 운동이다. 현행성의 평면 위에서 실제적으로 펼쳐지거나, 적어도 의식 속에서 이 운동을 내적으로 수행해보 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수평적 운동은 본성상 운동적(moteur)이다.36)
36) ES, 158-159
그러나 앞 장에서 제시된 정신과 물질의 수직적 구도와 함께 우리는 이제 두 운 동을 과감히 접합시키고자 한다. 즉 수직적 운동과 수평적 운동은 서로 다 른 두 종류의 운동이 아니라, 동일한 운동의 두 측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무리 깊은 숙고로부터 내려진 결정이라 할지라도 공간 위 근육의 움직임 들로서 표현되고 외화되어야 하는 한, 그 물질적 차원, 연장적 질서와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하는 모든 것은 실로 정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 며 수직적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 오로지 순수 공간에서만 수직적 운동은 부재할 것이지만 그것은 지속하지 않는 비실재다. 이와 동시에 수직적 운동 은 현행적 계열 위로 외재화되어야 할 운명 하에 놓여 있으며, 그 방식을 규 제하고 구성하는 것이 물질의 수평적 운동이다. 베르그손은 새로움과 창조 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수직적 운동, 즉 시간의 형식에 대해 강조하면서 지 속에 있어서 물질의 몫을 간과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대한 고려 없이 시간은 다시금 단번에 펼쳐지는 순간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Ⅴ. 물질의 수평적 운동 2 : 꿈 속 시간의식
꿈이라는 주제에 대해 베르그손은 시론에서부터 계속해서 관심을 가 져왔으며, 무엇보다 정신적 에너지에 수록된 논문 「꿈」은 당대의 과학연 구와 본인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바탕으로 그 작동원리를 가장 명확하면서 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꿈을 꿀 때 우리 정신 속에 펼쳐지는 광경들은 어 디에서부터 온 것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가? 게다가 꿈 속 시간의식에 대한 베르그손의 분석은, 앞 장에서 주장한 시간에서의 물질의 지분을 다른 방향에서 증명해줄지도 모른다. 수면은 실재 세계로부터 우리를 얼마나 차단하는 것이며 수면 중에 사라 진 것은 무엇일까? 감각적 활동과 신체의 운동성이 독자적으로는 기능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수면은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고립시키지는 않 으며 감관은 여전히 모호하게나마 감각적 자극들을 수용한다. 꿈속에 출현 하는 대상들이 완전히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수면 중인 신체가 외부로부터 받은 자극에 어느 정도 그 기원을 갖는다면, 이는 수면 중에도 계속되는 감 관의 활동에 빚지는 것이다.37) 또한 우리는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신체 가 무의식적으로 이런저런 움직임을 행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반면, 당 대의 연구를 따라 베르그손은 수면이 기본적으로 “감각적 신경 요소들과 운동적 신경 요소들 사이 접촉의 단절”38)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둘의 연결과 접합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먼저 물질과 기억이 밝혀낸 바와 같이, 신체는 “받은 운동과 내보내는 운동의 통행로 (lieu de passage), 즉 나에게 작용하는 사물들과 내가 작용을 행사하는 사 물들 사이의 연결선, 한마디로 감각-운동적인 현상들의 중추”39)라 할 수 있 다. 이때 감각, 즉 들어온 작용은 그에 적절한 반작용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습관-기억은 신체의 수준에서 일차적으로 모호한 감각 덩어리 중 나의 행동과 관련된 것을 선별하고 그 마디를 적절 하게 분해하는 식별의 기초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동적 식별 에 만족하지 않는 정신적 활동들은 의식의 더욱 깊은 심층으로 들어가 잠재 적인 상태로 놓여 있던 관련된 기억들을 호출하고, 이로써 감각을 보완하거 나 뒤덮게 된다.40)
37) “청중들 안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더 뚜렷해진다. […] “나가라! 나가라!” 나는 이 순간 갑자기 깨어난다. 개 한 마리가 이웃집 정원에서 짖고 있었고, 개의 “왈 왈” 짖는 소리 하나하나가 “나가라!”라는 외침 각각과 뒤섞이고 있었다. 바 로 이것이 포착해야 할 순간이다.”(ES, 102)
38) MM, 171/263
39) MM, 169/259
40) 이상의 내용은 물질과 기억 2장에 등장하는 ‘습관-기억’과 ‘이미지-기억’, 혹은 ‘자 동적 식별’과 ‘주의적 식별’의 구분에 해당된다.
도식화해보자면 감각과 기억, 물질과 정신, 마지막으로 형상과 질료의 교차점에서 우리 경험에 주어지는 구체적 지각이 탄생하는 것이다.41) 깨어 있을 때 이 두 항 사이의 조절이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정신 전체를 긴장 상태 하에 놓는 ‘삶에의 주의(l’attention à la vie)’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살아 있다는 사실은 행동해야 하는 필요성과 다르지 않으며, 이 행동의 필요성이 정신 전체를 특정 관점 하에서 긴장시킴에 따라 의식에는 수용된 감각과 필요에 적합한 기억들만 이 주어질 수 있게 된다.42)
41) 감각과 기억을 ‘질료’와 ‘형상’에 비유하는 것은 「꿈」에서 등장한다. “꿈은 어떻게 만 들어지는가? 우리에게 질료(matière)를 제공하는 감각들은 모호하고 규정되어 있지 않다. […] 질료의 비규정성에 자신의 규정을 새겨 넣을 형상(forme)은 어떤 것인가? 이 형상은 기억(souvenir)이다”(ES, 92).
반면 물질과 기억에서 이 관계는 역전되어 등장한다. 즉 이번에는 감각이 형상을 제시하면, 그 세부사항들을 채우는 것은 기억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 유연성으로 인해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이 기억은, 대상 위에 점 점 증가하는 수의 연상되는 사물들을 – 때로는 대상 자체의 세부사항을, 대로는 대상 을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동반적인 세부사항들을 – 반사한다.”(MM, 115/183)
우리가 보기에 전자는 단순 지각에 있어서, 후자의 관점은 정신의 능동적 활동이 요구 되는 독서나 대화와 같은 경우들에 있어서 각기 타당성을 지닌다.
42) “따라서 한편으로 받아들인 감각들, 다른 한편으로는 행사할 수 있는 운동들과 함께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정신을 고정시키고, 정신에 추와 균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축척 된 기억들의 총체가 현재 주어진 감각들과 운동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처럼, 정신의 활 동은 축적된 기억들의 총체를 훨씬 넘어선다. 그런데 이 감각들과 운동들은 삶에 대한 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조건 지어준다. 따라서 정신의 정상적인 작업에서 모든 것 은 꼭지점 위에 서 있는 [거꾸로 된] 피라미드처럼 감각과 운동의 응집력에 달려 있 다.”(MM, 193/291(원문 강조))
반대로 감각과 운동 사이 교신의 단절 혹은 약화 를 의미하는 수면 상태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감각이 여전히 본성 상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반면, 이 느슨해진 긴장의 틈에 서 자유를 되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억이다. 기억의 호출 대상은 더 이상 감각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는 삶에의 주의에 의해 억제되고 있었던 수많은 기억들이 꿈속에서는 주어 진 감각에 달라붙어 현재화되기 위하여 애쓰게 된다. 일상에서는 그다지 주 목되지 않았을, 기억의 밑바닥에 있던 아주 세부적이고 무용한 기억들까지 도 무작위적인 호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솟아오른다. 그것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막대한 죽음의 춤을 선보인다”.43) 꿈속에서 펼쳐지는 무작위적이고 환상적인 광경의 기원은 이로 써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느슨해진 접합 사이로 물밀 듯 밀어닥치는 기억 의 과잉이다.44)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더욱 중요한 점은, 꿈속에서 이미 지들은 대개 깨어 있는 것과는 다른 속도로, 보통은 보다 빠른 속도로 전개 된다는 점이다. 원래라면 수 시간, 수일에 걸쳐 전개될 사건들이 꿈에서는 잠깐 잠든 짧은 순간 속에서 압축적으로 펼쳐지는 것, 이는 모두에게 친숙 한 경험이다. 꿈이 전개되는 속도의 이 같은 독특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 을까? 깨어 있을 때, 시각적 감각을 해석하는데 사용하는 시각적 기억은 정확히 그 감각 위에 놓이도록 강제된다. 따라서 그 기억은 감각의 펼쳐짐을 따르 고, 동일한 시간을 점유한다. 요컨대 외부 사건들을 식별하는 지각은 딱 그 것들만큼 지속한다. 그러나 꿈속에서 시각적 감각을 해석하는 기억은 자신 의 자유를 되찾는다. 시각적 감각의 유동성은 기억이 거기에 접합하지 않게 만든다. 따라서 해석하는 기억의 리듬은 더 이상 실재의 리듬을 채택할 필 요가 없다.45)
43) ES, 95-96
44) 따라서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일상적 지각과 꿈은 실재와 환상, 혹은 참과 거짓의 문제 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잘 때 우리의 지각이 축소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적어도 몇몇 방향들로는 자신의 작동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확장 (extension)이라는 측면에서 얻은 것을 긴장(tension)이라는 측면에서 잃는다. […] 하 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실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ES, 92) 이처럼 깨어 있는 상태를 특징 짓는 것은 의지, 노력, 긴장에 기인하는 “조정의 정 확성”(ES, 104)에 한정된다.
45) ES, 106
따라서 감각과 기억 사이의 정확한 조정이 사라지는 것은 그 내용물에 대해서만 성립하지 않는다. 기억이 감각에 엄밀하게 조응해야 할 필요가 없 다는 사실은, 시간의 리듬 또한 그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로써 독특한 시간성 의 체험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앞 장에서의 논의와 같이 물질의 실재적 인 작용 혹은 진동들은 언제나 특정 지속을 점유하면서 펼쳐진다. 이는 물 질의 전개에 필연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성이며, 깨어 있을 때 기억은 언제나 이러한 물질적 운동에, 그리고 이 운동을 정확히 따르는 감각의 속도에 발 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정신이 아무리 상상의 나래 속으로 빠져든다 하더라도 기초 층위에 놓여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과 감각이 극도의 느슨한 결합을 보이는 수면상태에서, 기억은 더 이상 외부의 실제적 운동들과 조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운동들의 전개를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저 멀리 오래된 친구로 추정되어 보이 는 사람이 서 있다면, 현실에서와 달리 꿈은 곧장 친구와의 해후 장면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꿈이 지닌 특수한 조건은, ‘이미지’로 전개시키 지 않고도 ‘역동적 도식’이 지닌 그 어렴풋한 인상 혹은 모호한 의미만으로 정신적 활동이 수행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즉 꿈속에서의 대화는 물질적 차원에 해당하는 정확하고 세부적인 음성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거치는 일 을 생략시키고, 단지 대화의 핵심인 사유, 의미, 어조만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46) 이상의 조건들과 함께 결국 꿈은 이론적으로 정신이 원하는 만큼 빨리, 심지어 무한한 속도로 전개될 수 있으며, 다시 말해서 “이미지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영화 필름의 이미지들이 그 풀림이 조절되지 않았을 때 그러할 것 처럼 현기증 나는 속도로 쏟아질 수 있”47)게 된다. 그런데 동일한 유의 진 술이 결정론적 세계관, 공간적 사유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에서도 발견되 지 않는가?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근거가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 을 목격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과학이 다루는 결정론적 세계에서 “시간 의 흐름은 무한한 속도를 가지며, 물질적 대상들이나 고립된 계들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가 공간 속에서 단번에 펼쳐진다고 가정”48)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46) “우리의 대화자와 우리 사이에는 사유의 직접적인 교환, 소리 없는 대화가 있었 다.”(ES, 89)
47) ES, 106
48) EC, 9/33 86 논문
이는 결정론이 시간마저도 공간을 모델로 사유한 결과, 실재적 시간의 흐름,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구성되는 정신적 축 을 무시한다는 점에 근거를 둔 주장이었다. 반대로 꿈에 대해 동일한 주장 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물질의 운동에 소요되는 고유한 시간성이 부재하기때문이다. 꿈은 기억의 과잉, 정신의 준(準) 독재 상태를 의미한다. 물질과 조응하지 않는 이 정신적 활동 속에서 시간은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 처럼 일정한 간격을 차지하지 않으며, 심지어 단번에 펼쳐져 지속성을 상실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요컨대 꿈이 보여주는 독특한 속도는 곧 물질 적 운동에 소요되는 고유한 시간성의 존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예증해준다. 창조와 발명의 운동이 지속이 될 수 있는 것, 이것은 그들이 물질 속에서 구 현되어야 하며 물질의 운동이 반드시 특정 시간을 들이고서야 완수되기 때 문인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형식에 물질의 운동이라는 질료를 부여함으로 써, 우리는 최종적으로 시간을 정신의 수직축과 물질의 수평축이라는 두 축 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Ⅵ. 나가며 : 인간적 시간을 넘어서
우리는 베르그손 철학의 다양한 가지들로부터 중요한 근거들을 취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사유의 가장 첫 출발점이었던 시간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두 축을 발견했다.
하나는 시간 흐름과 함께 구성되는 종합이 자신이 산출해낸 물질, 자신이 분만한 타자와 맺는 자기 지시적 관계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 운동의 연쇄가 보이는 수평적 축으로서, 이를 습 관-기억과 꿈의 예시와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주장대로 꿈이라는 현상이 단순한 가상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면, 꿈에서 드러나 는 시간성은 인간이 갖는 시간의식 혹은 인간적 시간의 형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특히 물질적 축에 주목해보았을 때 물질이 조직화되는 양태들과 함께 다양한 시간성을 상상해 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쟁점은 바 로 이러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현행성의 차원은 비록 지속을 결여한 순수 공간 자체는 아니더라도 순수 공간으로의 경향을 지니는 운동들로 채워져 있다고 전제되어 왔다. 베르그손에게서 물질을 순수 공간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상호외재적인 성질을 갖는 판명한 요소들로 나뉠 수 있고, 이들 사이에 그 자신 또한 기하학적 공간의 형식에 의존하는 자연법칙들, 특히 인과율에 따 른 결정론이 수립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해서 실제 물질은 단지 이러한 공간성으로의 경향을 지닐 뿐이나, 이를 완벽하게 공간적 평면 위에 배치하여 사유하는 것은 지성의 작품이다.49) 오랜 기간 인류가 의존해온 천구의 운동, 그리고 오늘날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세슘 원자의 진동과 같은 물리적 대상들은 이러한 법칙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운동들로서, 인간은 이 들과 함께 단선적이고 주기적이며 규칙적인 것으로 시간을 개념화하고 측 정해왔다. 그러나 우리 지각이 접하고 있고 따라서 인간적 시간의 모태가 되는 우리세계의 자연법칙, 물질의 조직화만이 과연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인식의 근원적인 한계에 대해 우선 고찰해보자. 이에 대한 탐구는 인간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물질의 실재를 재구성하기를 시도하는 물질 과 기억 4장에서 수행되고 있지만, 사실 여기서 베르그손은 물질의 두 가 지 층위를 뒤섞고 있는 듯하다. 먼저, 직관의 방법론이 발견하는 것은 공간 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떤 요소들로도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총체를 형성 하고 있는 운동들이다. 그 속에서 물질은 “모든 것이 중단 없는 연속 속에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서로 연대적이며, 그만큼의 떨림들로서 모든 방향 으로 퍼져나가는 무수한 진동들로 용해”50)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정의된 다. 그러나 해당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이 이 물질적 운동들을 다시금 필연성 에 종속시키는 우를 범했던 것과 달리, 사유와 운동의 출간을 기념하여 1922년에 작성된 「서론Ⅱ」의 한 주석에서 그는 물질의 필연성에 대한 근 원적 의문을 제기하고 이러한 조직화가 물질의 특정한 층위 위에서만 발견 되는 것이 아닌지를 신중한 어조로 자문하고 있다.51)
49) 공간과 물질, 지성과 과학의 연관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고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EC, 201-221/301∼331
50) MM, 234/347∼348
51) “받아들인 작용에 대해 그것의 리듬에 꼭 맞으면서 같은 지속으로 연속되는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답하는 것,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물질의 근본적인 법칙이다. 필연성이란 이 사실로 이루어진 다.”(MM, 236/350);
“만일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며, 필연성에 종속되어 각각이 선행하는 것과 등가적이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일련의 순간들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 의 과거는 진실로 그것의 현재 속에 주어진다.”(MM, 250/371); 그러나 우리의 논의와 는 독립적으로, 물질과 기억 4장에서 물질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물질에 대한 완성된 이론, 직관의 완벽한 적용은 이 장의 목표가 아니라고 선언되고 있 다는 바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의 적용이 인도할 수 있는 결과들 가운데서 우 리의 탐구에 관련된 것을 곧바로 선택하도록 하자. 우리는 단지 몇몇 지적을 하는 것으 로 만족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물질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MM, 209/313).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우리 지각이 요소적 사건들의 응축의 구체적인 특정 정도에서 멈춰서는 것은, 정확히 물질을 이 결정론에 밀어 넣기 위해 서가 아닌지, 즉 우리가 그것들에 작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잇따름의 규칙 성을 우리를 둘러싼 현상들로부터 얻기 위해서가 아닌지를 물을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활동은 사물들의 지속을 응축함을 통해 그것들의 고정대(support)로서 역할하는 필연성에 기대며 [동시에 그로써] 거기에 맞서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52) 이미 지속의 응축의 서로 다른 정도를 제시한 바 있는 베르그손은 위의 텍스트에서 결정론을 응축의 특정한 한 수준에 위치시킨다. 이에 따르면 결 정론을 따르는 물질은 인간 경험에 고유한 지속의 리듬을 조건으로 해서만 출현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물질의 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한다. 하나는 들뢰즈(Gilles Deleuze)가 묘사한 것과 같이 “축도, 중심도, 좌우도, 위아래도 없”는 “우주적 변화, 우주적 파동, 우주적 물결의 세계” 혹은 ‘원시 수프’와도 같이 “그 안에서 고체적 물체를 구분해내기에 는 너무 뜨거운 물질의 상태”53)다.
52) PM, 61
53) Gilles Deleuze, L’image-mouvement. Cinéma 1, Minuit, 1983, 86. 베르그손 시간론의 재구성 89
다른 한편, 이 원시적 질료가 직관이 적 분의 방법을 통해 ‘이론적으로’ 재구성해낸 것인 반면에 인간을 포함한 모 든 주체는 이 우주의 구체적인 어떤 한 수준, 어떤 한 층위에 위치해 살아가 야 한다. 인간이 자리해 있는 특정한 긴장의 수준에서 목격되는 것, 그것은 고체적 요소들이 결정론을 형성하고 있는 물질세계다. 물론 우리 지각은 유 동체와 같은 대상들 또한 포착하지만, 이들은 단지 인류의 관심사가 아니었 다는 사실에 의해 크게 주목받지 않는다.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고체 형식의 무기물질을 제작의 대상으로 삼 아왔으며, 이것이 생명적인 임무와 구분되지 않는 원초적 지성의 임무였 다. 이로써 고체와 기하학의 모델이 인류의 인식 틀 자체를 결정 짓게 되 는 것이다.54) 현대과학은 그러나 실로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물질성, 또 다 른 물질적 조직화의 양상으로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고전역학의 기계론적 모델을 따르는 거시세계와 공존하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법칙을 보이는 양자역학의 발견은 익히 알려져 있는 현대 과학의 위대한 성과이다. 작용에 서 반작용으로 이어짐의 항구성에 대해 확률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예측가능성과 결정론이라는 신화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는가? 혹은 광자의 운동처럼 하나의 작용이 동시에 두 개의 반작용으로 이어지는 체계라면 어떠한가? 거기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끝없이 분기해나가 는 작용들을 따라 무한한 갈래로 흩어지는 시간일 것이다.55)
54) 이상은 동물계가 발달시켜온 지성의 특징에 관한 창조적 진화 2장의 설명을 간략하 게 요약한 것이다.(EC, 152-158/231∼240)
55) 물질의 다양한 조직화 방식과 관련하여, “물질이 완전히 응고되기 전” 세계에 대한 베 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가설 또한 흥미롭다. “생명이 반드시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기체 속에서 집중되고 정밀하게 될 필요는 없었다. […] 에너지가 저장되고 나서 아직 고체 화되지 않은 물질을 관통하여 흐르면서 다양한 노선들 위에서 소비될 수 있다고 생각 된다(비록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 이처럼 모호하고 희미한 생명성과 우리가 알고 있는 한정된 생명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우리의 심리적 삶 속에서 꿈의 상태와 깨 어 있는 상태 사이에 있는 차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EC, 257/382).
이처럼 미시 적 물리세계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고 반대로 더 큰 물리적 단위에 대한 탐 구가 점차 진행될수록,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작용들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들의 존재가 발견될 것이다. 또한 이와 나란히 우리 앞에는 인간적 시간을 넘어서는 다양한 시간화의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을 기대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베르그손의 저작들 Bergson, Henri, Œuvres, P.U.F., 1959.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2001.) Matière et mémoire (1896)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Le Rire (1900) L’évolution créatrice (1907) (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L’énergie spirituelle (1919)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15.) La pensée et le mouvant (1934) , Durée et simultanéité, P.U.F., 2009. 2. 그 외 저작들 Bachelard, Gaston, La Dialectique de la durée, P.U.F., 1972.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P.U.F., 1966. (김재인 옮김, 베르그송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6.) ,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U.F., 1968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 L’image-mouvement. Cinéma 1, Minuit, 1983. , L’image-temps. Cinéma 2, Minuit, 1985. Jankélévitch, Vladimir, Henri Bergson, P.U.F., 2015(4e édition). Lapoujade, David, Puissances du temps : Versions de Bergson, Minuit, 2010. Worms, Frédéric, “La conception bergsonienne du temps”, dans Le temps, Alexander Schenell(Dir.), Vrin, 2007. , Le vocabulaire de Bergson, Ellipses, 2013. 92 논문
ABSTRACT
The reconstitution of Bergson’s theory of time
Byun, Yae Eun
The philosophy of Henri Bergson departs from the simple fact that time flows, and it is in the process of investigating the internal structure of time that the theory of duration (durée) expands to various domains. This study, hence, aims to relocate in his very first question and reconstitute the passage of time through the sources found in the theory of duration. First of all, we describe duration as a sort of reciprocal crossover between the virtuality and the actuality corresponding to two dimensions of duration, by which the actual aspect produced by an inner force of synthesis in the virtual dimension affects and reactivates the virtuality in turn. This demonstration will serve as a detailed and concrete explanation of Bergson’s representative argument on time, namely the equality of time and creation or invention. On the other hand, the material movement unfolding upon an actual plan constitutes the other key factor in time, despite the fact that Bergson himself and other researchers are not clearly aware of this point, which therefore would be one of the main discoveries of this study. To sum up, this paper argues that there are two axes which constitute time as duration in Bergsonian philosophy, the vertical axis of spirit, and the horizontal one of matter. The last chapter of this paper will reveal the fundamental limits of perception and accordingly, the form of time appropriate for mankind, and present the possibility of other temporalizations beyond the human concept of time, in accordance with various organizations of matter. Subject Class: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french philosophy, ontology
Keywords: time, duration, durée, Bergson, liberty, memory
투 고 일: 2019. 01. 16 심사완료일: 2019. 02. 01 게재확정일: 2019. 02. 09
변예은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
철학사상71권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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