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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 -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해석을 중심으로 - /이솔.서강대

I. 서론

II.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해석

1.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사르트르의 비판 : 범심리주의 (panpsychologisme)적 극단

2.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들뢰즈의 전유 : 변용(affection) 의 심리학

III.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의 의미

IV. 결론

I. 서론

이 논문의 목적은 사르트르(J. P. Sartre)와 들뢰즈(G. Deleuze)에게 있어서 ‘상상(imagination)’이 무엇으로 이해되 고 있으며 그것이 양자의 철학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전통 철학에 있어 상상력은 늘 우리를 착각 및 기만에 빠뜨리는 오류의 원천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서 로 전혀 다른 철학적 입장을 가진 두 사상임에도, 사르트르와 들 뢰즈는 모두 이미지를 오류의 원천으로 배격했던 전통 철학과 상반되는 견지에서 상상적인 것의 의미를 복원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사상을 펼쳐낸 이 두 철학자 의 최초의 연구가 상상력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상상 력(L'imagination)』(1936)과 『상상계(L'imaginaire)』 (1940)에서 사르트르는 ‘이미지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image?)’라는 물음과 함께 상상력의 의미를 다루는 가 운데 의식의 본성에 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으며, 들뢰즈는 『경험주의와 주체성(Empirisme et subjectivité)』(1953)에 서 ‘상상은 어떻게 하나의 인식능력이 되는가?(Comment l'imagination devient-elle une faculté?)’라는 물음으로부터 이후 ‘초월적 경험론’의 밑바탕이 될 경험주의적인 사유의 여정 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들 양자가 그 자신 사상의 핵심을 이루 는 개념으로 내세우는 ‘상상’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그렇기에 이 논문은 사르트르와 들뢰즈가 ‘상상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지는 차이를 흄(D. Hume)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양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 | 이 솔 3 자의 해석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양자의 이미지 개념의 차이 를 이해함에 있어 흄을 경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르 트르와 들뢰즈가 그들의 이미지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 직 접적으로 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 『상상 계』에서 사르트르는 ‘고전 이론들’이라는 명칭 하에 합리론과 경험론을 포괄한 다양한 이론들을 폭넓게 비판하는데, 그 중에 서도 흄에 관한 비판은 사르트르 자신의 이미지 이론의 특성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더욱이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들뢰즈는 오로지 흄의 이미지 이론 을 전유함을 통해 기존 철학과 다른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가늠 하고 있다.1)

1) 들뢰즈가 그의 전 저작에 걸쳐 ‘경험주의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뢰즈 철학에 대한 흄의 영향력은 과소평가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 렇기에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들뢰즈가 그의 철학의 첫 밑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흄을 어떻게 전유하고 있는가를 이해해 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들 뢰즈는 이 저작에서부터 그 이후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룰 경험론적 정신의 가치 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후 다른 저작들에서 이루어진 들뢰즈의 칸트 비판의 과제 역시 이와 같은 흄의 경험주의적 사유에 기반을 둔 것이다. 흄과 관련된 들 뢰즈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며, 이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다 음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김재인, 「들뢰즈의 흄 연구」, 『철학사상』 26(2007).

흄을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철학이 가지는 차이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 이 두 철학이 공명 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II.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해석 그렇다면 사르트르와 들뢰즈 양자가 흄의 이미지 이론에 천착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흄이 오류와 가상 의 원천이라는 ‘이미지’에 관한 전통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상 상력의 경계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동시에 흄은 상상 력을 지성에 종속된 하위능력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2) 흄에게 서 상상력은 그 자체 정신 활동의 근본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흄의 세계는 순전한 이미지(image)들의 세계이 다. 흄의 경험주의가 그려낸 이 세계는 “오로지 인상들의 모자 이크로만 구성되어 있[는]”3) 세계이다.

2) “[흄은] 상상력을 다른 능력에 종속된 도구적 능력이나 매개적인 하위 능력이 아 니라 정신의 근본적인 기능으로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상상력과 이성의 관계 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강동수, 「흄의 철학에서 상상 력의 성격과 의미」, 『철학논총』 70(2012), 168쪽.)

3) Sartre, J.-P., L'imagination, paris: PUF, 1989, p. 13.; 지영래 옮김, 『상상 력』, 기파랑, 2010, 39쪽.(약칭 : IMO) 이 글의 모든 인용은 번역본을 따를 것 이며, 반복해서 인용하는 저작의 경우에는 최초 인용 시 각주를 통해 서지 사항 을 밝힌 후, 이후에는 별도로 주석을 달지 않고 인용문 뒤에 (약칭, 쪽수)의 형식 으로 직접 표시할 것이다. 단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경우 최초 인용 시 각 주를 통해 서지 사항을 밝힌 후, 이후에는 별도의 주석 없이 서명은 생략하고 인 용문 뒤에 초판 및 재판의 쪽수만을 표시하였다. 또한 이 글의 모든 인용에서 원 저자의 강조는 ‘ ’로 처리하며 인용자의 강조는 볼드체로 표시한다. [ ] 안의 말 은 뜻의 이해를 위해 인용자가 추가적으로 삽입한 것이다.

정신에는 단지 인상들, 그리고 그것의 희미한 심상들인 관념들만이 있다. 정신에는 어 떤 사유의 능력도 선행적으로 들어서 있지 않다. 어떤 지성 개념 의 인도도 받지 않는 이미지들의 세계, 다시 말해 규칙에 종속되 지 않은 상상력(imagination)이 보여주는 순수한 착란의 세계 란 어떠한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진사(辰砂)가 때로 는 붉고 때로는 검은 세계, 인간이 때로는 이런 동물의 형상으로 때로는 저런 동물의 형상으로 변하는 세계, 낮이 긴 날에 대지가 때로는 과실(果實)들로 때로는 빙설(氷雪)로 뒤덮이는 세계이다. 흄이 그려낸 이 순수한 이미지들의 세계에는 어떤 규칙도 전제되어 있지 않기에, 이 세계는 “접속사 ‘그리고(et)’가 동사 ‘이다(est)’의 내성의 자리를 빼앗는 세계”4)이며, “잡동사니의 세계, 전체화가 불가능한 단편들의 세계”5)이다.

4) Deleuze, G., “Hum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 228.; 박정태 옮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8, 134쪽.

5) Ibid.

1.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사르트르의 비판 : 범심리 주의(panpsychologisme)적 극단

흄은 경험의 직접적 소여인 인상들로부터 출발한다. 인상들 은 그것의 강도에 의해 구분된다. 말하자면 강한 인상들과 약한 인상들이 있다. “즉 이미지와 지각은 본성적으로 동일하지만 그 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다. 지각들은 ‘강한 인상들’이고, 이미지들은 ‘약한 인상들’이다.”(IMO, 140) 흄의 이미지 이론의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규정으로부터 드 러난다. 흄에게 있어서 “관념들과 인상들은 본질상으로는 상이 하지 않아서, 그 사실이 지각을 그 자체로는 이미지와 구분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IMO, 39) 지각과 이미지는 본성 상 동일한 것이므로 이 양자 사이의 구분은 기껏해야 생생함의 정도의 차 이로서 설명되기에 이른다.6)

6)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시작하면서 관념들의 기원을 설명하며 흄이 다음처럼 쓰 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들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유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 다.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 일 수 있으며 (…) 나는 관념을 사유와 추론에 있어서 인상의 희미한 심상(faint image)이라는 뜻으로 쓴다.”(Hume, D.,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 오성에 관 하여』, 이준호 옮김, 서광사, 2009, 25쪽.)

그러나 사르트르에 의하면 지각과 이미지가 ‘강도’에 있어서 다르다고 주장하는 흄의 가설은 심각 한 난점을 가지는 것인데, “만일 우리가 강도(intensité)만 가지 고서 이미지를 지각과 구별해야 한다면, 오류가 잦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IMO, 141~142) “한마디로 말해서, 만일 이 미지와 지각이 우선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나 중에 양적인 면에서 구분하려고 시도해 보았자 소용이 없 다.”(IMO, 142) 이미지와 지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착란 상태를 의 미한다. 흄의 세계에서 이미지와 지각의 구분이 오로지 생생함 이라는 강도적 차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면, 이따금 발생할 지도 모를 강한 이미지와 약한 지각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밖에 없다. 흄 그 자신 역시 이러한 문제를 다음처럼 시인하고 있다. “잠잘 때, 초조할 때, 착란을 일으켰을 때 또는 영혼의 정 서가 아주 격한 상태일 때, 관념은 인상과 비슷할 수도 있다.”7)

7) Ibid., 25~26쪽.

이처럼 우리는 전날 밤의 꿈의 세계와 현실의 사건들이 온통 뒤 죽박죽으로 뒤섞인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흄은 지각과 이미지를 동일한 본성을 가진 것으 로 이해했던 것일까? 사르트르에 의하면 흄이 의식 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인상과 관념으로 환원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는 그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 로 “인간이 또한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자기 자신을 스스로에게 표상하는 존재라는 본질적인 사실”(IMO, 44)이다. 구체적인 심리학을 위해서는 반대로 다음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소여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즉 나는 내가 이미지를 형 성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 그것은 그 자 체로 전(前) 술어적인 명증(évidence anté-prédicative)이 [다.](IMO, 161) 흄의 이미지 이론에서 정신은 인상들과 관념들의 모자이크 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능동적인 힘도 발견 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사르트르는 흄이 ‘사유가 배제된 이미지’만을 간직한다고 말한다. 물론 흄은 상상적인 것들을 이 끄는 원리로서 연합의 법칙을 제시하기는 했다. “흄은 적어도 [사유를] 경험의 환영(fantôme d'expérience)[으로서] 구성 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는 연역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연합법칙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 심리학의 영역 위 에서 상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정신에 나타나는 그대 로의 현상들 사이에서의 관계들이다.”(IMO, 56) 그러나 흄이 지각의 감각적 내용물들만을 가지고 의식의 세계를 구성하고자 한 이상, “이 세계란 무기력한 내용물들이 똑같이 무기력한 다 른 내용물들에 의해서 그들의 출현 양식 속에서 규정되어 버리 는 세계”(IMO, 173)일 뿐이다. 가령 “유사성의 법칙이란 것도 심적 내용물들 사이의 외재적 관계로서의 자리매김”(IMO, 174)일 뿐이며, “인접성의 법칙에 따르자면, 두 내용물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은 결국 [그 어떤 능동적 작용이 8 인간연구 제44호 | 특집 아닌 우연한] 만남이고, 접촉이다.”(IMO, 174) 즉 흄은 “의식 의 요소들이 수동적 성질들의 것이라고 상정했기 때문에, 그는 타성의 원리를 심적 영역에 적용했고, 의식을 외재성의 관계들 로만 결합된 타성적 내용물들의 집합체로 환원시켜 버렸”(IMO, 175~176)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흄의 이미지 이론이 보여주는 세계를 사유가 사라지고 의식이 능동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되 는 “범심리주의(panpsychologisme)”(IMO, 43)적 극단이라 규정한다. 흄의 이미지 이론은 의식의 능동적인 힘을 무력화시 키며, 우리의 의식을 사물과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 채웠다. 흄이 보여주었던 것은 어떤 자발적인 힘도 없이 이미지만이 떠도는 극장과 같은 세계이다. 그리고 이렇듯 의식의 자발적인 본성을 간과했기에 흄에게서는 더 이상 실재와 가상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지각과 이 미지의 혼동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각자 자신의 내적 경험 에 미루어 짐작해 보자. 나는 앉아 있고, 글을 쓰고, 나를 둘러싸 고 있는 객체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친구 피에 르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그 이미지가 나타난 바로 그 순간에 내가 그것이 하나의 이미지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세상 어떤 학설을 가지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IMO, 153) 이러한 의식의 ‘사실’, 즉 “나는 내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 다는 것을 동시에 알고 있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IMO, 161)은 당연하게도 사르트르 사유의 핵심이 되는 ‘의식의 근본 구조’를 가리켜 보인다. 『상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 | 이 솔 9 상력』에 뒤이어 1936년에 출간된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 l'Ego)』에서 사르트르는 대상에 관한 정 립적 의식은 그 자신에 관한 “비정립적 의식(conscience non positionnelle)”8)임을 주장한다.

8) Sartre, J.-P., La transcendance de l’ego; Esquisse d’une description phénoméologique, Paris: Vrin, 1992, p. 28.;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자 아의 초월성』, 민음사, 2017, 41쪽.

즉 내가 피에르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이미지로서의 피에르를 정립하는 의식(곧 피에르를 상상하는 의식)은 그 자신에 대한 ‘비정립적 의식’이다. 말하자 면 ‘내가 피에르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비정립적인 방식 으로 이미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지각이 아 닌 이미지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전(前) 술어적인 명증성 (évidence anté-prédicative)”(IMO, 161)을 가질 수밖에 없 다. 이러한 의식의 본성에 대해 무지했기에 흄은 의식, 혹은 정 신을 인상들이 위치하는 공간과 같은 것으로 가정하고 그것 안 으로 관념들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만일 이미지 를 의식 속에 들여보낸다면 전 우주가 그 이미지와 더불어 들어 가게 되고, 의식은 마치 포화상태를 넘은 용액처럼 단번에 응고 되어 버린다.”(IMO, 184) 『상상계』에서 사르트르는 이와 같 은 흄의 문제를 ‘내재성의 환상’이라 규정한다. 우리는 잘 따져보지도 않은 채 이미지는 의식 안에 있고, 이미 지의 대상은 이미지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의식을 자잘한 시뮬라크르(simulacre)로 가득 차 있는 어떤 장소로 생각했으 며, 시뮬라크르를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틀림없이, 공간 안에서 공간의 용어로써 사유하는 습관에서 기원 한다. 우리는 이것을 내재성의 환상(illusion d'immanence)이라 고 부를 것이다. 이 환상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흄에게서 발견된 다.9)

9) Sartre, J.-P., L'imaginaire : Psychologie phénoménologique de l'imagination, Biblothèque des Idées, Paris: Gallimard, 1964, pp. 14~15.; 윤정임 옮김, 『상상계』, 기파랑, 2010, 23쪽.(약칭 : IMA)

의식을 무기력한 공간과 같은 것으로, 그리고 이미지를 그 공간에 자리하는 사물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던 흄을 비판하며 사르트르는 의식은 그것 안에 무언가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적 인 개념이 아닌 대상을 ‘지향하는 활동’임을 주장한다. 의식의 본성은 단지 지향성으로서, 모든 의식은 늘 ‘…에 관한’ 의식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미지 역시 의식 내에 놓인 사물이 아니다. 이미지는 의식이 대상을 지향하는 하나의 활동 방식에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과 『상상계』에서 사르트르가 제시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명제이다. 이미지 는 의식이다. 가령 의식이 피에르라는 대상을 지향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피에르를 ‘지각’하는 방식으로, 즉 현전하는 실재물로서 지향적으로 정립 할 수 있으며, 그의 실존 여부와 무관하게 단지 피에르에 대하여 ‘사유’하는 방식으로 그 대상을 정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와 달리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피에르에 대해서 ‘상상’할 수도 있다. 상상한다는 것은 이처럼 대상을 무화하는 방식으로 (혹은 무를 아날로공으로 소요하여) 대상을 겨냥하는 의식의 활동에 관한 명칭이다. 피에르에 대해 상상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피에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재적 부재를 거 부하며 그를 지금 이곳에 현전케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상상계』의 결론부에서 사르트르는 상상력을 단 지 의식의 한 활동 방식 이상의 것으로 규정하는 데에로 나아간 다. 상상은 우리 의식의 여러 다른 자질들 중 하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의식에 쓸데없이 덧붙여진 경험적인 힘 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전적인 의식이다. 세 계 안에서 의식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 전체는 상상적인 것으로 가득하며 그것은 언제나 실재의 초월로 제시된 다.”(IMA, 330~331) 이제 상상력은 지향적 의식의 본성으로 서 지목된다. “상상력은 의식의 사실상의 한 특징으로 나타나기 는커녕, 의식의 본질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으로 밝혀졌 다.”(IMA, 333~334) 상상이란 의식의 다양한 활동들 가운데 한 가지 활동 양상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상상 한다는 것이 실재를 ‘무화’하는 활동이며, 무화한다는 것이 곧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와 거리를 두고 물러서는 부정성을 의미 하는 한, 상상력은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의식의 자유의 표현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상하는 의식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은 근본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들뢰즈의 해석 : 변용 (affection)의 심리학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제기하는 논점이 바로 사르트르가 지 적한 ‘내재성의 환상’을 배격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흄은 내재성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관념이 상상력 ‘안에’ 있음을 흄이 지속적으로 되풀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전치사(‘~안’)는 하나의 주체에 대 한 내속(inhérence)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치사는 은 유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정신으로부터 관념의 운동과 구별되 는 활동을 배제시킨다. 즉 정신과 정신 안의 관념이 동일함을 보 증한다. 이 전치사는 상상력이 요인이나 작인이나 결정하는 결정 (détermination déterminante)이 아님을 의미한다.10)

10) Deleuze, G., Empirisme et subjectivité :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aris: PUF, 1993, p. 3.; 한정헌·정유경 옮김, 『경험주의와 주 체성』, 난장, 2012, 21~22쪽.(약칭: ES)

즉 흄에게 있어서는 정신과 정신 안의 관념들이 구분되지 않 는다. 흄이 정신 ‘안에’ 관념들이 있다고 말할 때, 이 표현은 관 념들을 주재하고 종합하는 정신의 능력이 관념들과 별도로 존 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사르트르의 표현 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의식 안에 시뮬라크르와 같은 이미지들 이 적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곧 그 이미지들과 동일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사르트르와 들뢰 즈는 ‘정신 안에 관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일한 주 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내재성의 환상을 벗어 나는 방식에 있어서 양자는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사르트르에 게 의식이란 순전한 활동성이며 그렇기에 이미지 역시 그러한

활동의 한 양상(혹은 본질)으로 이해되었다면, 들뢰즈에게서 정 신은 곧 관념들이며 정신은 곧 어떤 힘, 모종의 능력과 같은 것 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다발일 뿐이다. 곧 상상적인 것 (imagination)은 이미지들의 다발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 그러 한 이미지들과 별도로 그것들을 주재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명 칭이 아닌 것이다. “상상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 으며, 모든 것이 상상력 ‘안에서’ 행해진다.”(ES, 22)는 들뢰즈 의 표현은 이처럼 사르트르와는 정반대로 정신으로부터 능력을 박탈시키고 그것을 사물과 동종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의 원류를 들뢰즈는 흄으로부터 발견하 고 있다. 흄은 끊임없이 정신, 상상력, 관념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정신은 본성이 아니며, 본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관념은 주어지는 바대로 주어진 것(소여) 이다(le donné, tel qu'il est donné). 그것은 경험이다. 정신은 주어진다. 그것은 관념의 다발로 주어진 것이지 하나의 체계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ES, 20) 관념의 다발은 그 다발이 하나의 인식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집합, 그 말의 가장 모호한 의미에서 사물의 집합을 지칭하는 한 에서 상상력이라 불린다. 출현하는 바대로의 이 사물들은, 말하 자면 묶음 없는 다발, 무대 없는 연극, 지각의 흐름이다.(ES, 21) 주지해야 할 것은 이처럼 ‘상상(imagination)’이라는 개념에 관하여 사르트르와 들뢰즈가 전적으로 대립되는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사르트르에게 있어 서 이미지는 곧 의식이다. 이미지를 사물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 고 의식을 그러한 표상들이 놓이는 공간과 같은 관념으로 이해 했던 기존 철학을 비판하면서 사르트르는 의식은 텅 빈 것이며 (즉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며) 순전한 활동성이기에, 의식 내에 는 어떠한 내용물도 없으며, 따라서 이미지란 의식 내의 표상이 아닌 의식이 대상을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에 해당하는 명칭일 뿐임을 주장했다. 들뢰즈의 경우 이와 정반대의 관점을 취한다. 정신은 정신 안의 관념들인 이미지들과 동일한 것이다. 정신은 단지 이미지들의 다발이기에 말 그대로 ‘사물의 집합’일 뿐 어떤 체계를 갖춘 능력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관 념들과 정신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면, 즉 관념들이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신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라 면, 이러한 관념들의 연결은 어떤 규칙에도 종속되지 않는 무분 별함을 띄게 된다. 정신이 단지 이미지들의 ‘묶음 없는’ 다발인 상상력이라면, 이 정신, 곧 상상력은 어떤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 은 것이기에 제멋대로 관념들을 연결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 다. 확실히 상상력은 그 고유한 활동을 가지고 있지만, 이 활동조 차도 환상적이고 착란적인 것이어서 항상성도 균일성도 없다. 상 상력은 관념의 운동이고 그 작용과 반응의 총체이다. 관념의 장 소인 환상은 분리된 개체들의 다발이다. 관념의 끈(lien)인 환상 은 불을 뿜는 용과 날개 달린 말과 괴물 같은 거인을 만들어내면 서 우주를 주파하는 운동이다. 정신의 바탕은 착란이며 (…) 다만 환상일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는 항상성이나 균일성이 없다.(ES, 22) 들뢰즈의 흄 해석의 독창성은 이 문제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드러난다. 흄의 경험주의의 가치는 단지 착란과 환상으로 가득 한 이미지들의 세계를 제시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흄 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 이미지들의 세계의 혼란한 풍경이 아니라, 이로부터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들뢰즈 에 의하면 경험주의의 본질적 가치는 바로 이 주체성의 형성의 문제에 있다. 주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흄은 감각적인 것의 흐름, 인상과 이 미지의 다발, 지각의 집합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타난 것의 총체, 외양(appearance)과 동등한 존재이며, 또한 그것은 동일성도 없고 법칙도 없는 운동이고 변화이다. 우리는 인식능력 이나 조직화의 원리가 아니라 어떤 집합, 어떤 다발로 지시함으 로써 상상력과 정신에 대해 말한다. 경험주의는 다발에 대한 이 경험에서, 구별되는 지각들의 움직이는 계속으로부터 출발한 다.(ES, 171~172) 따라서 경험주의의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올바른] 문 제는,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떻게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주체가 구 성되는가 하는 데 있다.”(ES, 170) “흄을 사로잡게 되는 물음 은 이것이다. 정신은 어떻게 인간본성이 되는가?”(ES, 19) 이 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도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정신은 어 떻게 하나의 주체가 되는가? 상상력은 어떻게 하나의 인식능력 16 인간연구 제44호 | 특집 이 되는가?”(ES, 21) 들뢰즈에 의하면 이에 관하여 흄이 제시 한 답변은 바로 ‘변용(affection)’이다. “정신은 [변용]되어야 만 하는 것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 본성이 아니다.”(ES, 19) 흄 이 기술하려 했던 것은 바로 어떻게 변용에 의해 이미지들의 다 발이 하나의 인식능력이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변용에 의해 관 념이 체계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 바로 흄의 경험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관념의 다발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들뢰즈는 관념들이 원리에 의해 관계를 맺을 때, 정신은 주체로 서 능동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관념들 사이의 이 연관성, 다시 말해 관계는 인상 내지 관념들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이것 이 바로 들뢰즈가 이 저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명제인 “모든 관계는 그 항들에 외재적이다.”(ES, 197)라는 말의 의미 이다. 관계는 “그것을 수립케 한 관념들의 소유권 자체에서 연 유하지 않는”(ES, 196) 것이다. 가령 공간과 시간의 관계인 거리, 인접성, 선행성, 후행성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경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은 특정한 인상들이다. 내 앞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고 그 옆 에는 한 자루의 볼펜이 놓여 있다. 이 종이와 볼펜의 인상으로부 터 인접성의 관계가 형성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정신은 우 리에게 대면의 재료만을 주었지 그 현실적 원리를 준 것은 아니 다. 인접해 있거나 멀리 떨어진 대상들은 거리와 인접성이 관계 라는 점은 조금도 설명해주지 않는다.”(ES, 198) 이와는 다른 종류의 관계, 가령 유사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자루의 볼펜에 대한 인상,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닮은 또 다른 한 자루의 볼펜에 대한 인상이 내게 주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이 유사성이 라는 관계 역시 이 인상으로부터 귀결되는 결과물은 아니다. “이런 관계도 마찬가지로 외재적이다. 특수한 관념들이 서로 유 사하다는 것은 유사성이 하나의 관계라는 것, 다시 말해 어떤 관 념이 정신 속에서 그것과 유사한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ES, 199) 그렇다면 관념들 사이의 이 관계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 인가? 흄이 지적했던, 정신을 인도하는 ‘연합의 원리’가 그 원인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들뢰즈는 흄이 제시한 연합 의 원리의 불충분성을 지적한다. “연합의 원리는 사유의 형식 일반이라면 몰라도 그 특수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 다.]”(ES, 204) “연합은 다만 우리 의식의 표면, ‘외피’ 만을 설 명한다.”(ES, 204) 왜냐하면 우연히 선택된 임의의 두 관념 사 이에는 늘 유사성 내지 인접성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 에 연합된 두 관념 사이에서 발견된 유사성 및 인접성은 그 두 관념이 관계를 맺게 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흄은 기껏해야 이 연합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에서 멈추어 섰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흄은 그 자신 스스로 연합의 원리의 불충분성을 통감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 황(circonstances), 그리고 변용성(affectivité)에 대해 최초로 사유하는 데에로 나아갔다. 정황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관계를 ‘정황’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관념의 연합은 이 관념 이 저 관념 대신 환기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 는 이런 관점에서 관계를 ‘환상에서의 두 관념이 자의적으로 결 18 인간연구 제44호 | 특집 합하는 경우라 해도 우리가 그 관념들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 다고 생각하게 되는 특수한 정황’으로 정의해야 한다.”(ES, 205) 달리 말하자면 “연합이 모든 관계 일반을 가능케 하는 데 필수적이라 해도, 각각의 특수한 관계는 연합에 의해 전혀 설명 되지 않는다. 관계에 그 충족이유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정황이 다.”(ES, 206) 이 ‘정황’에 따라 ‘변용’됨으로써 주체는 구성된 다. “프로이트와 베르그손이 관념의 연합은 우리 안의 표면적인 것, 의식의 형식주의만을 설명한다고 지적할 때, 이들이 본질적 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변용성(affectivité)만이 독특한 내용, 심층, 특수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옳 다. 그러나 흄이 말한 것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ES, 206) 흄은 물론 연합의 원리를 통해 관념이 연결되는 방식을 설명해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지에 대해서 흄은 정황을 내 세운다.”(ES, 206) 즉 주체가 정신 속에서 구성되기 위해서 연 합의 원리는 정념의 원리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연합의 원리가 관념들이 연합되는 것을 설명한다면, 오직 정념의 원리 만이 어떤 순간에 다른 관념이 아닌 그 관념이 연합되는 것을, 저 관념이 아닌 이 관념이 연합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ES, 207) 어째서인가? 연합의 원리가 정신의 작용을 위한 일반성, 곧 관계를 제공한다면, 정념은 그 정신의 작용을 위한 방향을 설정 하기 때문이다. “연합의 원리는 관념들 사이에 자연적 관계를 수립한다. 정신 안에서 그 원리는 마치 수로 같은 전체 그물망을 형성한다.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이행하는 것은 더 이 상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요컨대 상상력은 이런 (연합의) 영향 아래서 이성이 되고, 환상은 항상성을 발견한다.”(ES, 247) 그러나 들뢰즈는 관념 연합에 있어 ‘관계’와 ‘방향’을 혼동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관계는 관념들 사이에서 수 립되는 운동의 형식적 조건이 된다. 그러나 관계가 항들에 외재 적인 것인 한에서, 관계만으로 우리는 어떤 관념이 어떤 관념에 선행하고 어떤 관념이 어떤 관념에 종속되어야 하는가를 결코 결정짓지 못한다. “관계는 그 자체로써 행위를 영원히 가능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겠지만, 그것으로 그 행위가 이뤄지는 것은 결 코 아니다. 오직 의미나 방향에 의한 행위만이 있을 뿐이 다.”(ES, 248) 즉 관계는 늘 어떤 종합을 전제하는데, 관념들도 연합의 원리도 그 종합을 설명하지 못한다. 관계는 “우리가 두 관념들을 비교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하는(juger bon) 개별적 정황”(ES, 200)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물음은 결국, 나 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내가 원인을 찾게끔 하는 결과는 어떤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ES, 248) 다시 말해 관계에 의해 종합 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모종 의 실천적인 차원의 종합이, 정황에 따른 정념의 변용이 선행되 어야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흄에게 있어서 정념의 원리는 절대적으로 일차 적인 것이다. 혹은 오히려 “연합이 정념을 위해 있[다]”(ES, 264)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실재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하고 나면 연합과 정념 사이의 관계는 가능성 과 실재성의 관계와 동일하다. 즉 연합은 주체에 가능한 구조를 제공하며, 오직 정념만이 주체에 존재와 실존을 부여한다.”(ES, 242) 어떻게 관념의 다발로부터 주체가 형성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흄은 연합의 원리와 정념의 원리라는 두 가지의 원리를 제시했다. “연합이 정신에 필연적인 일반성, 그러니까 이론적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한 가지 규칙을 고정시키듯이 정념은 정 신에 항상성의 내용을 제공하고,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며, 역사에 그 의미를 준다. 이런 이중의 운동이 없이 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상상력은 환상에 머무를 것이다.”(ES, 42) 바로 이런 한에서 이 두 가지의 원리 는 ‘인간 본성의 원리’라고 불릴 수 있다. “원리는 주어진 것 안 에서 발명하고 믿는 주체를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리는 인 간본성의 원리이다.”(ES, 265) 즉 인간본성의 원리가 별도로 선행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들이 주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본성의 원리라 불릴 수 있다. 정황과 변용을 통 해 주체는 주어진 것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성되며 원리는 오직 그 결과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흄에게서 발견한 경험주의적 정신인 것이다. Ⅲ.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 지금껏 살펴본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은 다음처 럼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 해 ‘이미지는 의식이다’라고 답함으로써 사르트르가 이미지를 사물이 아닌 ‘의식의 활동’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이와 반대되는 견지에서 들뢰즈는 ‘상상은 어떻게 인식능력이 되는가’라는 물 음을 제기하고 상상적인 것을 인식 주관의 선험적 능력으로 환 원되지 않는 그 이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서술함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 | 이 솔 21 에 있어 사르트르가 흄의 이미지 이론이 ‘의식’을 망각하고 있다 는 사실을 비판했다면, 들뢰즈는 흄의 이미지 이론이 경험론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의식 ‘이전적인 차원’에 관한 실험적 사유라 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사실 흄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오래된 철학적 비판을 떠 올리게 한다. 『인간오성론』(1690)에서 로크가 제기한 경험 론적 테제, 즉 ‘우리 정신에서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 『신인간오성론』(1765)에서 라이 프니츠는 ‘정신 그 자체와 정신의 작용을 제외한다면’이라는 그 유명한 답변을 보여주었다. 정신 그 자체와 정신의 작용은 결코 감각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는 것. 사르트르 그 자신 역 시 상상력에 관한 탐구를 진행함에 있어 이 오래된 철학적 비판 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다음 처럼 말한다. “우리는, 모든 이미지의 배후에서, 이미지가 권리 상 함축하고 있는 사유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사유는 사실의 직관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없을 것이 [다.]”(IMO, 45) 그리고 이에 뒤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유란 그 스스로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반성적 분석에 의해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라이프 니츠가 로크에게 그 유명한 ‘오성 그 자체가 아니라면(nisi ipse intellectus)’이라고 회답할 수 있는 이유이다.”(IMO, 46) 사르 트르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의식은 감각이 제공해줄 수 없는, 다 시 말해 감각 경험으로부터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힘이다. 그러므로 흄의 경험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은 로크에 대 한 라이프니츠의 비판에 기대어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면’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11)

11)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미지 이론이 이렇듯 단지 ‘반 경험주의’적인 성격을 가진다 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분명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그 자체로 실재를 무화하는 의식의 초월적 본성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상상은 ‘경험을 참조하려는 정신’ 혹은 ‘사유의 강등’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것에 걸맞는 정의 (definition)를 찾으려 순수하게 사변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사유라면, 상상 이란 그 물음에 대하여 밀로의 비너스를 가리켜 보임으로써 답한다. “그것은 관 찰하기 위한 노력, 사물 자체를 참조하려는 노력, 그것을 검토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경험에 주어진 우월성이며 순박한 경험주의를 긍정하는 방식이며 이 또 한 사유의 하위 단계들 중 하나이다.”(IMA, 206) 이처럼 사르트르에게 상상은, 감각 경험을 벗어난 순수성을 지향하는 사유와 다르게, 경험적 기반으로 되돌아 가려는 의식의 성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경험의 세계라는 결과들 의 차원을 헤매는 정신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상상의 의미는 스피노자적인 전 통에서의 ‘상상지’와도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사르트르 와 들뢰즈에게서 상상은 공통적으로 인식의 발생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 당한다. “[사르트르와 들뢰즈] 양자는 모두 인식은 형성(발생)의 관점에서 기술 되어야 하며, 그 형성의 도정에서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은 이미지라는 것 을 발견했다.”(서동욱, 「인식의 획득에서 상상력의 역할: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경우」, 『철학연구』 100(2013), 236쪽.)

 

반대로 흄을 통해 들뢰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사 르트르가 경험론의 한계라 지적했던 바로 그 문제인 감성으로 부터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탐구이다.12)

12) 안 소바냐르그는 이것이 바로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의 기획의 핵심이며, 이러한 기획이 들뢰즈의 첫 저작인 『경험주의와 주체성』(1953)으로부터 시작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들뢰즈의 초기 저작들은 실체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사유와 감성적인 것의 관계를 고찰한다. (…) 감성 및 감성이 주체의 형 성과 맺고 있는 관계는 1953년 출간된 그의 첫번째 저작 『경험론과 주체성』의 과제를 이룬다.”(Sauvagnargues, A.,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성기현 옮 김, 그린비, 2016, 23쪽.) “1947년 작성되어 1953년 출판된 흄에 대한 첫번째 개별연구이자 자신의 학부 졸업논문인 『경험론과 주체성』이후, 들뢰즈는 개체 적 주체를 하나의 효과, 하나의 결과로 만드는 주체성 이론을 지속적으로 가다듬 어 왔다.”(Ibid, 30) “첫 저작인 『경험론과 주체성』이후 들뢰즈는 거듭해서 다 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론이 본질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정신의 기원에 대한 문 제가 아니라 주체의 구성에 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칸트의 관념론을 실재적 경험과 대면케 하고자 경험론자들의 ‘경이로운’ 계보, 즉 루크레티우스,흄, 니체에게 의지한다. 들뢰즈는 바로 이 이중의 목표―초월론적 비판을 수행할 것, 칸트의 경험론을 참된 경험론으로 대체할 것―에 따라, 『경험론과 주체성』 에서 『차이와 반복』까지 초월론적 철학의 경험론적 판본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낸다.”(Ibid, 42)

들뢰즈는 흄의 경험론을 ‘변용의 심리학’이라 명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지 적한다. “결국 [변용]의 심리학은 구성된 주체의 철학이 된다. 합리주의가 잃어버린 것이 이 철학이다.”(ES, 38) “합리주의는 철학에서 실천과 주체의 의미와 내포를 제거해 버리고 정신의 결정을 외부의 대상으로 옮겼다. 사실 정신은 이성이 아니며, 이 성이 정신의 변용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본능, 습관, 혹은 본성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ES, 38) 흄의 이미지 이론으 로부터 들뢰즈가 발견하고 있는 것은 지성 및 상상력과 같은 선 험적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 주관(agent)으로서의 주체 가 아닌, 습관의 소산으로서 구성된, 상상적인 것의 결과 (effect)물로서의 주체이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들뢰즈가 흄을 통해 맞서고 있는 것은 칸트의 초월 철학이다. 상상에서의 종합에 대하여 칸트는 다음 처럼 말한다. 자주 잇따르고 수반하는 표상들을 마침내 함께 연합하고 그렇 게 해서 연결시키는 단적인 경험 법칙이 있으며, 이 연결에 따라 서 대상의 현전 없이도 이 표상들 가운데 하나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마음을 다른 하나로 이행시킨다. 그러나 이 재생의 법칙은 [곧 상상력은] 현상들 자체가 실제로 그러한 규칙에 종속해 있다 는 것과 표상들의 잡다 안에서 일정한 규칙들에 따르는 수반 내 지 잇따름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험적 상상력은 결코 자기 능력에 맞는 어떤 일 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만약에 진사(辰砂)가 때로는 붉고 때로는 검고,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다면, 인간이 때로 는 이런 동물의 형상으로 때로는 저런 동물의 형상으로 변한다 면, 낮이 긴 날의 대지가 때로는 과실(果實)들로 때로는 빙설(氷 雪)로 뒤덮인다면, 나의 경험적 상상력은 결코 붉은 색의 표상에 서 무거운 진사를 생각해 낼 기회를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현상들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의 선험적 근거가 됨으 로써 현상들의 이런 재생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13)

13) Kant, I.,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322. (A100~101.)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는 가운데 들뢰즈는 칸트 역시 흄과 마 찬가지로 우리 인식의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서 ‘상상 (imagination)’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구절의 일차적 관심사는 문제를 그것이 있어야 할 곳에, 그리고 있어야 할 방식으로, 즉 상상력의 면 위에 위치시키는 데 있다.”(ES, 223) “칸트는 어쨌든 상상력이 우리가 인식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최상의 영역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이 구 별한 세 가지 종합에서 칸트는 스스로 상상력의 종합을 나머지 둘의 바탕으로서 제시한다.”(ES, 223)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이 상상력이 흄이 제시했던 이미지들 의 자의적인 연합(arbitrary collection of images), 혹은 관념 (image)의 묶음 없는 다발로서의 상상(imagination)이 아닌, 초월적 통각을 그 근간으로 하여 지성의 원리에 종속된 능력으 로서의 ‘상상력(Einbildungskraft)’, 즉 인식 주체가 인식을 이루기 위한 마음의 한 ‘능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한가?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칸트에게서의 “상 상력의 선험적 종합은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통각의 종합적 통 일로 우리를 되돌려 [보내기 때문이다.”(ES, 225) 칸트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에 의하면 칸트의 한 계는 바로 그가 흄을 비판했던 바로 그 구절로부터 가장 명확하 게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 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B1) 흥미롭게도 칸트의 이 표현은, 앞 서 살펴본 흄에 관한 사르트르의 비판인 ‘의식은 결코 주어진 인 상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일 수 없다’는 말을, 그리고 로크에 관한 라이프니츠의 그 유명한 비판인 ‘오성 그 자체가 아니라면(nisi ipse intellectus)’을 떠올리게 만든다.14)

14) 익명의 심사위원께서는 이 글에서 흄을 비판한 사르트르의 논의가 라이프니츠 및 칸트 철학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이것이 사르트르 철학에 대 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음을 지적해주셨다. 이에 대해 분명히 답하자면, 사르트르와 라이프니츠, 칸트 철학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란 오직 이 들이 모두 ‘의식(칸트 및 라이프니츠에게서는 지성)의 역량까지도 경험적 소여 로 환원하고자 하는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제한된다. 라이프니츠가 로크를 비판할 때, 그리고 칸트가 흄을 비판할 때 이들이 모두 ‘지 성의 역량만은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로 사르트르 역시 흄을 비판함에 있어 ‘자발적 의식’ 만은 세계 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며, 대상 세계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것 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흄은 이 의식의 근본적 특성인 ‘비정립적 자기의식의 구 조’를 모르고 있었기에 지각과 상상을 혼동하는 범실을 저지른 것이다.

들뢰즈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초월 철학의 논리이다. ‘어떻게 인식 능력은 종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종합할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칸트가 지적한 흄의 한계였다. 우리가 선험적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기에 모든 종합을 우연과 습관의 산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이와 반대로 흄의 경험론적 정신을 계승하여 들뢰즈 가 비판하고자 하는 칸트의 한계는 바로 다음의 문장에서 선명 하게 드러난다. “주체가 참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 해도, 처음부터 주어진 것에게 스스로를 넘어서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ES, 174) 흄의 경우, 사 유 안의 어떤 것도 상상력을 넘어서지 않으며, 어떤 것도 초험적 이지 않다. 연역의 성급함을 비판하며 들뢰즈가 흄을 통해 일관 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들로부터 시작되는 주체 형 성의 문제이다. 이미지들은 정황에 따라, 변용에 의해 연합된다. 연합의 원리는 정념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운동하며, ‘관계들’ 은 그러한 운동의 결과 주어지는 산물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 에서 흄은 “오성은 다만 사회화되는 정념의 운동에 불과”(ES, 20)하며, “오성[은] 정념에 종속”(ES, 20)된다고 말했던 것이 다.

Ⅳ. 결론

이처럼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들뢰즈는 경험론적 사유 를 다시 개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계승 하고자 하는 이 경험주의는 칸트가 정식화한 것과 같은 경험주 의, 즉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고방식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적 전통에서 제시된 경험주의의 고전적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즉) 경험주의는 인식이 오로지 경험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내용의 이론이라는 것이다.”(ES, 217) 그러나 들뢰즈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험 주의를 정의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우선 인식은 경험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실천적 수단에 불과하다.”(ES, 217)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칸트의 한계는 실천과 유리된 한 에서 인식론을 구상했다는 사실에 있다.15)

15) 물론 이와 같은 비판은 오직 『순수이성비판』의 논의에 한정된 것이다. 『실천 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론적 인식 이전적인 실천의 우선성을, 그리고 『판단 력비판』에서는 지성 개념으로부터 탈주한 상상력의 작용을 보여주고 있다고 반 론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 『경험주의와 주체성』에 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이미지 이론만을 다루고 있다.

“이론적 주체성이라 는 것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은 경험주의의 근본 명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잘 살펴보면 결국 주체는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주체가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 다면 결국 실천적 주체만이 있을 뿐이다.”(ES, 209) 들뢰즈가 흄에게서 발견한 ‘변용의 심리학’은 관계가 정황과 분리될 수 없 다는 사실을, 나아가 정황에 따른 변용에 의해 관념들이 연합된 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 는 결국 순수한 ‘인식주체’를 규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릇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고발되고 비판되는 것은 주체가 인식주체일 수 있다는 관념이다. 연합론은 공리주의를 위해 존 재한다. 관념의 연합은 인식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로 실천적 주체를 위한 가능한 수단들의 집합을 정의한다. 이 실 천적 종합에서 모든 실제적 목적은 정념적,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질서이다.”(ES, 243) 이와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흄의 경 험주의가 이후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 되는 초월적 경험론의 기 획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행동주의적인 견지에서 주체의 탄 생을 서술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실천적인 관점에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이 논 점은 이미 사르트르가 선취했던 것이 아닌가? 사르트르는 일찍 이 1945년의 한 유명한 강연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떤 본성 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가운데,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 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16)임을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본질도 선행함 없이 주체는 형성되는 것’이라는 공통 된 논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와 들뢰즈 양자가 이 동일한 메 시지를 펼쳐내는 층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 을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주체의 형성은 그 자신의 ‘선 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나, 들뢰즈는 주체화를 설명하는 경 험주의의 비밀을 바로 ‘습관’으로부터 발견한다. “습관은 주체 를 구성하는 뿌리이며, 주체는 그런 뿌리 안에서 시간의 종합, 즉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와 과거의 종합이다.”(ES, 184) 그리 고 이는 1989년 이 책의 영역판 서문에 들뢰즈가 남겨 놓은 문 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들뢰즈 철학의 일관된 핵 심이다. “우리는 습관들, 그저 ‘나(I)’라고 말하는 습관들일 뿐이다”17) ‘선택’과 ‘습관’이라는 두 표현의 간격으로부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르트르와 달리 들뢰즈의 관심이 선인격 적이며 선개체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들뢰즈의 관심의 ‘방향’이 사 르트르라는 ‘정황’으로부터 ‘변용’된 것임은 자명하다. 사르트르 에게 헌정된 한 짧은 글에서 드러나듯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철 학이 표상이라는 개념, 그리고 표상의 질서 그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로부터 발견한 것 은 ‘선-판단적’이며 ‘표상 이전적인’ 생생한 세계의 모습이 다.18)

17) “We are habits, nothing but habits - the habit of saying 'I'.”(Deleuze, G., trans. Constantin V. Boundas, Empiricism and Subjectivity - an essay on Hume's theory of human n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p. ⅹ.)

18) “Toute sa philosophie s'insérait dans un mouvement spéculatif qui contestait la notion de représentation, l'ordre même de la représentation : la philosophie changeait de lieu, quittait la sphère du jugement, pour s'installer dans le monde plus coloré du «préjudicatif», du «sub-représentatif».”(Deleuze, G., “Il a été mon maîtr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p. 110~111.)

그렇기에 어쩌면 칸트가 그려낸 인식 주체의 조화로운 능 력 이전적인 비표상적 세계에 관한 들뢰즈의 관심은 자아 없는 의식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사르트르의 사유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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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이 글은 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 있어 ‘상상(imagination)’이 무엇인 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전통 철학에서 상상력은 늘 우리를 착각 및 기 만에 빠뜨리는 오류의 원천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서로 전혀 다른 철학적 입장을 가진 두 사상임에도, 사르트르와 들뢰즈는 모두 이미지 를 오류의 원천으로 배격했던 전통 철학과 상반되는 견지에서 상상적 인 것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듯 공통적으로 전 통 철학의 상상력 관념에 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와 들뢰 즈의 상상력 이론은 그들의 서로 전혀 다른 관심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의식 주관이라는 차원과 의식 이전적이며 주체 이전적 인 차원이라는 서로 다른 수준에서 상상적인 것의 의미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상상력 이론의 근본적인 차 이를 흄의 이미지 이론에 관한 양자의 해석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양자의 이미지 개념의 차이를 이해함에 있어 흄을 경유해야 하는 이유 는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와 들뢰즈가 그들의 이미지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 직접적으로 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 『상 상계』에서 사르트르는 흄의 이미지 이론을 비판하는 가운데 그 자신 의 현상학적 이미지 이론의 근본 정신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경 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들뢰즈는 흄의 이미지 이론을 전유함을 통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탐구로서 초월적 경험론으로 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흄을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사르트르와 들뢰 즈의 철학이 가지는 차이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 이 두 철학이 공명하고 있 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사르트르, 들뢰즈, 이미지, 상상력, 주체, 인간, 현상학, 초월적 경험론.

【 ABSTRACT 】

The Meaning of the "lmagination" in Sartre and Deleuze: The Interpretation of Hume’s Image Theory Lee, Sol (Sogang University of Korea ‧ Philosophy ‧ Lecturer) In this paper, I want to answer the question of What is “imagination” in Sartre and Deleuze. In traditional philosophy, imagination has always been regarded as a source of error that leads us into illusion and deception. From a standpoint that is contrary to the traditional philosophy, Sartre and Deleuze introduce a new meaning of the imaginary. However, despite their common criticism of the notion in traditional philosophy, Sartre and Deleuze's concepts were built on the basis of their completely different interests. Sartre’s image theory is grounded in the dimension of subjectivity of consciousness. On the other hand, for deleuze, image and imagination constitute the very elements of reality, which are defined as pre-consciousness and pre-subjectivity. This paper attempts to show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Sartre and Deleuze's imagination theories through their differing interpretations of Hume's image theory. In Imagination and Imaginaire, Sartre presents his own phenomenological image theory while criticizing Hume's theory. In Empiricism and Subjectivity, on the other hand, Deleuze begins a journey to transcendent empiricism by appropriating Hume's theory. Therefore, by using Hume as a conduit, we will be able to clearly show the difference between the philosophies of Sartre and Deleuze, and furthermore, we will be able to reveal in what aspect these two philosophies resonate despite their differences.

Key words: Sartre, Deleuze, Image, Imagination, Subject, Human, Phenomenology, Transcendental Empiricism.

접수일 : 2021. 07. 12. 심사 완료: 2021. 08. 10. 게재 결정: 2021. 08. 11.

 

01 이솔_사르트르와 들뢰즈에게서의 상상(imagination)의 의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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