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오늘날 가장 활발하게 세상의 지적 정상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평가들과 과학적 인지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결국 지식인들의 기만적 태도를 고발하는 소칼(Sokal)의 거짓 논문으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1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논쟁은 최근까지 계속되어서 2017-8년에 Grievance studies affair로 알려진 사태를 언급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학문적 편향성을 지적하는 글은 Helen Pluckrose와 James Lindsay가 2020년에 쓴 Cynical Theories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Pluckrose와 Lindsay는 Postmodern적 입장에서 문화 분석을 시도하는 것들 가운데 미리 정해진 입장에 따라서 학문적 연구의 의도적인 조작과 왜곡된 성향이 나타남을 밝히고 있다.2
이러한 문제는 학문이 지니는 체계의 불완전성3에 더하여 대중적 지지를 추구하는 일종의 사회적 권력 투쟁이4 학문적 방법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1A. D. Sokal은 1996년 포스트모던 연구지인 Social Text에 “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s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이것이 채택되어 출간된 뒤에 Lingua Franca에 자신의 글이 편집자들의 요구에 따라서 적당히 짜깁기한 거짓된 글임을 밝혔다. 그리하여 소칼 이 고발한 것은 포스트모던 문화연구가들은 학적 지식에 있어서 모르는 내용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하 면 학문적인 글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2Helen Pluckrose and James Lindsay, Cynical Theories: How Activist Scholarship Made Everything About Race, Gender, and Identity (Durham: Pitschstone Publishing, 2020) 참조.
3이러한 과학적 체계의 불완전성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수학적 방법론 자체가 근대 과학적 이념이 된 이 후로 수학적 체계의 무한성을 지적한 Cantor(Über eine elementare Theorie der Mannigfaltigkeitslehre)의 글을 정합적 체계로 수학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외부적 설명 없이 내부의 논리적 구축으로 완성되는 체계를 시도하였던 D. Hilbert의 Nomological Programm이 Gödel의 “블완전성의 원리”를 통해서 불가능한 것으로서 밝혀진 것이다(Kurt Gödel, “Über formal unentscheidbare Sät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 Ⅰ,” ed., Solomon Feferman, Kurt Gödel Collected works, Vol. Ⅰ.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144–195.).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인문학적 연관성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구조 를 자연 철학적으로 왜곡시키는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에 상응한다.
4Steven Best and Douglas Kellner, Postmodern Theory. Critical Interrogations (New York: The Guilford Press, 1991), 44-59. 미셸 푸코가 시대적인 주요 세계관을 결정짓는 지식의 성격을 episteme라고 특 징짓고 사회적 통제 기능을 수행한다고 밝히면서 사회적 지식은 대부분 일종의 권력의 형태로 파악된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이 세상의 현실 가운데 복음을 변증하고자 할 때, 대중적 입장에 따라서 신학적 진리가 왜곡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리고 신학적 인식의 정당한 자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 작업의 대상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에 대한 실 존적 이해를 밝혀야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논문에서는 신학적 인식의 주 체가 어떤 성격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되, 특히 인식하는 주체와 관련되어 최근에 심리학과 다르게 정신 상태를 분석하는 라캉의 입장을 다루면서 그에 대한 비판 적 관점을 통해서 신학적 주체에 대한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2장에는 전반적으로 신학적 주체에 대한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평 가를 전개하고, 3장에서 특히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설명하면서 신학적으로 적용하는 한계와 문제점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하여 신학적 주체의 타당성이 계시적 실존으로 여겨질 수 있는 신앙 인의 고유한 주체성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인간성에 대한 질문과 신학적 주체성의 정의
1.1. 일찌감치 신학적 주체에 대한 질문은 성경을 일반 문헌처럼 비평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서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 대치되기 시작하였으며, 인식의 확고한 근거가 의문시되는 근대 철학 이후에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석학적 입장을 따라서 인식의 주체에 대한 질문으로서 연관되어 계속해서 이루어졌다.5
이러한 질문의 핵심은 인식을 수행하는 주체가 단지 세상이나 자아 안에 고정된 객관적 구조가 아닌 역사적 과정에서 경험되어진 것들을 주관적으로 대응하는 해석학적 주체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해석적 주체의 근거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변화는 Heidegger의 철학에서 발생한 “die Kehre”에서 암시하듯이6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이해가 점점 물화(物化)되면서 인간이나 주체성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 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Dasein에 대한 해석학적 현상학을 수행한 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후 ‘존재망각’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해석의 주체가 무화(無化)되는 것과 존재의 개명을 통해서 인간의 주체성을 새롭게 파악할 것을 요구하였다.7
이 가운데 현대의 사회적 왜곡을 파악하려는 비판철학에서는 사회 전반적 현상들을 경제-정치적 기구 권력의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거대 담론의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현상의 미세적 분석의 다양성을 함께 파악함으로써 사회적 권력 자체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8
이러한 상황에서 후기 구조주의에 속한 푸코는 인간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시대의 관점에 의해서 변화되는 과학적 인식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 다.9
5Alain Badiou, “Philosophy and Desire,” Infinite Thought: Truth and the Return to Philosophy, trans and ed. Oliver Feltham and Justin Clemens (London: Continuum, 2003), 31.
6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Stuttgart: Pfullingen, 1982(1962)), 42.
7M. Heidegger, Brief über den Humanismus (Frankfurt: Klostermann Verlag, 2000) 19.
8Steven Best and Douglas Kellner, Postmodern Theory. Critical Interrogations, (1991), 8장 참조. 특 히 298-302.
9Kenneth Baynes and others ed., After Philosophy End or Transformation? (Cambridge; The MIT Press, 1987), 95-98.
그리고 이런 의심은 해체론적 입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해석의 주체라는 인간성의 동질적 차원이 근본적으로 의심스럽게 되면서, 인간 자신은 결정되어 있지 않은 무엇이며, 또한 다른 이와도 같을 수 없다는 의미의 ‘타자적 존재’라고 파악되었다. 해체론자들은 인간의 주체성 은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의 전개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해체되고 지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10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들은 인간성이라는 개념 등 인간에 대한 어떠한 동일성도 자명하지 않다고 할 뿐 아니라, 이제 인간이 자의적으로 주어진 환경의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물질이 인간을 변형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11
그리하여 이제 인간의 고유성을 전제로 인간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특히 미래적 인간을 예측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인간성을 사회적 집단성 안에서 결정된 권력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거나 혹은 물질적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해진 지평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는 파생적인 결과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인간성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애매하여졌을지라도, 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설정하여 간다는 의미에서 인간 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사회-경제, 정치적 차원에서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 대한 본질적 차원에서의 질문이 의문시되어도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설정함으로써, 심지어 물질이라고 자신을 설정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고자 의도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12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포기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구조나 물질적 변화의 원리로서만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많은 정치 철학가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소명’으로서의 존재, ‘호모 사케르’로서의 존재, ‘다중’으로서의 존재, 정치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급진적 정치적 존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있다.13
이러한 설명은 법과 제도 등, 모든 것이 정당성을 상실한 것처럼 애매해진 상황에서 인간의 존재를 어떤 구조나 물질적 가능성으로부터 설명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자유와 평등의 인간적 가능성으로서 주체성을 새롭게 밝히고자 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원에서 신학적 차원의 주체성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신학적 주체성의 논의는 우선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주체성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업과 연관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먼저 정치 철학적 입장에서 발터 벤야민이 신학과 정치의 연관을 강조하였고, 그를 이어 최근에는 정치 철학을 시도하는 이들 중에 기독교적 삶의 형식과 관계하여 각기 자신들이 추구하는 주체성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장하는 것이다.14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적 입장의 기독교적 주체성을 뚜렷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15
10앞의 글, 150-152.
11Steven Best and Douglas Kellner, Postmodern Theory. Critical Interrogations (1991), 97-104, 128-132. G. Deulez나 J. Boudrillard가 분명하게 이렇게 주장한다.
12Michel Foucault, The Politics of Truth, ed. Sylvère Lotringer, trans. Lysa Hochroth & Catherine Porter (Los Angeles: Semiotext(e), 2007), 150-151. 인간 주체성에 대한 질문과 요구는 Foucault가 자신의 철학적 과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13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현대정치철학의 네가지 흐름』 (서울: 에디투스, 2019) 참조.
14도미니크 핀켈데/오진석 역,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 (서울: 도서출판 b, 2015) 참조.
15신명아, “지젝의 정치신학연구,” 『라캉과 지젝』, 김석 외 편, (서울: 글항아리, 2014), 180-198. 바디우와 지 젝의 바울 해석의 관점을 설명하는 가운데 바울에 대한 해석들이 거의 자신들의 일방적인 입장에 따라서 바울을 각색하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지젝의 입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예수의 인격을 지젝이 주장하는 시각적 차이를 통해서 설명하는 부분에 도달하면 예수의 사건을 정신분석적 차원에서만 파악하려고 하면서 이러한 왜곡이 전적 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젝과 함께 신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적 의미를 무시하고 예수의 정신 적 과정을 곡해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신학적 주체성을 밝히는 것은 단지 신학을 위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요구를 무시하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적 차원은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상관없는 비역사적인 피안적 영역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며 인간의 죄와 고통 을 해결하시는 것으로서, 특히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탄식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과 함께, 인간의 사회적인 죄와 악의 고난과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통당하는 개인의 내면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것 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차원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구원 자로서 그를 만나시는 ‘타자성’을 통해서 인간의 주체성을 이루시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 미에서 신학적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은 다양한 차원에서 현실적인 구원을 받 아야 하는 존재이며 특히 하나님의 인격적 대화자로서 신적 존엄성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을 밝 히는 것이다.
이렇게 신학적 차원은 Wittgenstein이 주장한 것처럼, 언어적 세계의 신비적 차원으 로서 주어진 것으로, 맹목적인 존재에 대한 피상적인 서술어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인간과 세 상의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드러남을 다루는 것이다.16
즉, 신학적 차원의 주체성의 성격 은 일반의 사회적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인간의 주체성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시도보다 더 분명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주체성을 밝히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행위와 변화 가능성에 대한 예상된 모습 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복합적인 인간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간으로 밝히는 것이 다. 그리하여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타자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로서, 인간의 가능성 자체를 새롭 게 형성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근본적 비판적 인식을 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주체성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현대의 시도들과의 연관성을 가지 게 된다.
현대에 제시되는 주체성은 언어적 사건으로부터 드러나는 사방적 존재(Geviert der Vier)로서의 실재(das Ding)를 통해서 소명된 가사(可死)적 존재17, 다수적인 일자로서의 존재의 출현 가운데 알려지는 사건으로서의 주체성18, 혹은 자연의 무한 생산 과정 자체에 충실한 인간 동물19, 혹 역사의 차이와 반복적 과정에서 소실되는 비실존자20등으로 설명된다.
이들의 공통점 은 인간을 자신의 육체적 가능성이 물적 실재로서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생적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인간의 특별한 점은 생물학적으로 다른 생명체들과 드러난 다양성의 표현 일 뿐이지, 인간의 고유성 자체는 의문시되는 것이다.21
인간의 자의식도 언제나 자신의 욕구와 상대 사이의 시차적 시각의 차이 가운데 아무것도 확인될 수 없는 무의식이 욕망으로서 주체를 이루며 나타난 허구라고 본다.22
16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LTD, 1951), 152. 언어적 한계로서 신비는 Wittgenstein에게 있어서 단지 부정적 차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그 자체로 철저하 게 긍정하는 관계성으로서 설명되는 것이다.
17M. Heidegger, Unterwegs zur Sparche (Stuttgart: Pfullingen, 1975), 215, 228, 259, Heidegger는 시 적 언어의 사건으로서 존재를 드러내는 사방적 존재(땅-하늘-죽음의 운명-신성)의 근원적 존재론을 강조하였다. 그 가운데 가사적 존재로서 인간은 존재를 말할 수 있게 된다.
18알랭 바디우/조형준 역, 『존재와 사건』 (서울: 새물결, 2013), 623-624.
19알랭 바디우/이은정 옮김, 『사유의 윤리』 (서울: 도서출판 길, 2013), 114-116.
20앞의 글, 138-140.
21Terrence W. Deacon, “The Evolutionary Spirit: Brains, Language, and the Human Difference,” ed. James B. Miller, The Epic of Evolution (New Jersey: Pearson Education, Inc., 2004), 111.
22이것은 특히 (전기)라캉의 인간이해와 관계되어 있다. 본 논문 3장 참조.
이렇게 인간은 자연 안에 계속해서 발생하는 우연적인 물적 전개 과정의 한 부분으로 파악되는데 신학적 주체성은 인간과 자연의 과정을 통해서도 오히려 각 생명 체의 존엄성과 함께 특히 인간이 자의식을 이루며 자신의 인격을 유일회적으로 이루는 것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자연적 조건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심으로써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1.2. 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주체성은 그 스스로 확실한 것이 없으며, 전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새롭게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찾아진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생물체들은 자신의 본성적 요소라 할 수 있는 것을 따라서 행동하고 살아가지만,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부터 스스로 결정지어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탈중심적 존재”(ex-zentrische Wesen)로서 개방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자연의 과정이나 역사적 사건의 임의적 흐름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계약의 약속 가운데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학적 주체성은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진 그의 말씀과 행위에 상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주체성이란 하나님께서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 가운데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론적 상관성을 토대로 역사적 삶 전반에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실존적 주체로서 살도록 허락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그 완성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신학적 주체성의 과제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역사적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으로부터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가운데 드러난 심판과 구원의 현실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적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종말론적 실재로서 역사적 현재에 주어진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주체성은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드러난 사건 가운데 인간의 내면적인 자아를 근본적으로 구성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인격적 실재이며23,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개방적으로 발견되는 종말론적 존재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며 책임적으로 이러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다.24
23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적 사태를 분석하는 가운데 라캉이 설명한 extimité의 구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고양시: 인간사랑, 2004), 269-270. 그러나 내용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종말론적 구원을 통해서 결정된 종말론적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라고 할 수 있다.
24D. Bonhoeffer, “Christus und der Friede,” Dietrich Bonhoeffer Auswahl, Bd. 1, Hg., Christian Gremmels/Wolfgang Huber (München: Gütersloher Verlaghaus, 2006), 36-40. 본회퍼는 항상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분명하게 신앙 안에 있는 대리 행위로서 표현하였 다.
그리하여 신학적 차원에서 언급된 주체성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 가운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알려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추구하는 정치, 경제, 문화적 각 분야의 현실 가운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논쟁을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대답을 가진 신학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동과 의지를 일정한 방향으로 형상화하도록 추진할 수 있다.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의 자신의 이익에 적합한 행위를 수행하는 당파성과 다른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신학적 주체성은 사회적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당파성을 지니지 않더라도, 시대적 과제에 대한 책임적 행위를 복음의 요구에 따르는 고유한 인간성의 과제로서 밝혀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신학적 주체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모든 것들 가운데 실재하는 방식으로서 설명되는 것이다.
즉,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기독교인을 특징지을 때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이 세상에 서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존재로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신학적 주체성의 핵심 은 바로 그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이 세상에 기존하는 것들에서 근거를 찾지 않는 것에 걸려 있 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학적 주체성을 정치, 경제, 문화적 영역에서 드러난 어떤 가능성 위에 존재 가능성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적 구원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신학적 주체성에 따른 다양한 결단 과 선택들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처럼 되어서 모든 비판에 면역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지만, 분명 한 것은 신학적 주체성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의 현존으로서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 사건 이래로 항상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실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이 신학적 주체성을 종말론적인 새로움으로 진술하는 것이다.25
25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비록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고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언제나 신학의 진실한 과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보여주는 진실성 자체가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우연성, 차이, 변이 등에 의해서 무규정적이지 않고 분명하게 구체화 된다는 것이 중요하 다. 이에 대하여 K. Barth,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0), 221-223.
2. 라캉의 주체 해석과 신학적 주체성의 차이
2.1. 먼저 신학적 관점에서 파악한 정신분석학적 이해의 한계에 대하여 밝히고자 한다.
오늘 날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는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발견된다. 근대 이후에 강조되었 던 주체에 대한 “반성적이고, 실존적인, 현상학적 주체 모델”26을 탈피하고 소쉬르의 언어학적 관 점을 인류학적 연구에 적응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통해서 시작된 “인간 과학”의 방식27 이 후기 구조주의28에서 분명해지면서 “이론적 반인본주의”, “인간의 죽음” 등의 구호와 함께 라 캉의 정신분석적으로 더 엄밀하게 진행된 것이다.
물론,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시도는 제한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29
왜냐하면, 현대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넘어 물적 실재를 이루는 물리주의 (Physicalism)를 중심으로 생명 현상 자체를 이루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 의 연구를 기반으로 인간을 연구하기 때문이다.30
26알랭 바디우,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현성환 역, 『라캉, 끝나지 않는 혁명』 (서울: 문학동네, 2013), 25. 27Claude Lévi-Strauss/박옥줄 역, 『슬픈열대』 (서울: 한길사, 1998) 그리고 Claude Lévi-Strauss/김진욱 역, 『구조 인류학』 (서울: 종로서적, 1987) 참조. 이 두 가지 책을 통해서 구조주의적 인간 인해를 분명하게 주장 하였다.
28베드트랑 오질비/김석 역,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서울: 동문선, 2002), 13-15. 여기 무엇보다도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등이 중요함이 밝혀진다.
29앞의 글, 27. 정신분석학적 연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의식의 결정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차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의식의 현상을 명료하게 요구하는 심리학이나 의식을 생리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생리학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의식을 받아들여야 하며,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는 언제나 욕망의 충족을 지향하는 것으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0Michael L. Peterson, “Evolution and the Deep Resonances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The Continuing Relevance of Weslyan Theology, ed. Nathan Crawford,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1), 148-153. 과학적 차원의 실재관을 물질의 기원에서부터 세상의 생명체의 형성과 합리적 정신의 출현까지 정리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전제된 사실은 물리적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물 리주의이다. 물리주의적 사고의 기원이 근본적으로근대 계몽주의적 과학주의에 있음에 대하여 Bradford McCall, “Kenosis and Emergence.” The Continuing Relevance of Weslyan Theology, 160. 이러한 물리주의에 대 한 부정적 평가는 최근 Neue Realismus를 주창하는 Markus Gabriel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물리주의에 대안으 로 인간의 „Selbstbildfähigkeit“를 중심으로 Fiktionalität가 일종의 존재(Der Shein ist das Sein)라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Markus Gabriel, Fiktion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Verlag, 2020) 참 조.
따라서 인간의 실존적 상황 자체에 대한 물적으로서 객관적으로 진술되는 존재론적 차원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음을 전제해야 하며, 이 같은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의 공헌은 자아와 주체를 이루어가는 정신 과정에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연관성을 논리적 사유의 방식으로 체계화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31을 준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코기토의 의식의 한계를 파악함으로써 인간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정신적 제한성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를 밝히고자 시도했던 라캉의 철학적 함의32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실존을 존재론적 차원의 깊이에서 가장 타자적 방식으로 다루는 신학적 이해는33 정신분석학적으로 인식의 한계를 다루는 것보다 더 근본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 주체성을 이루는 ‘신앙의 실재’를 인간의 정신적 과정으로 보고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 드러난 한계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다.34
31알랭 바디우,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라캉, 끝나지 않는 혁명』 (2013), 33. 루디네스코에 따르면 라캉의 이러한 정신분석학은 정신병과 광기, 혹 편증집을 “형식적 사유체계”로서 다루고 있으며 심리학이 철학으로부터 분리되려는 경향과 반대로, 오히려 과학적 성격을 긍정하면서 철학적 관련성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32앞의 글, 26-27, 61, 80. 라캉은 인간성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주체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그 욕 망으로서의 주체성을 확고하게 지키고자 하는 상반된 것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그가 가장 중시 여겼던 정신분석을 실행하는 근본 자리가 그 무엇으로도 획일하게 묶을 수 없던 이 세상에 단 하나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인간의 정 신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33K. Barth, Kirchliche Dogmatik, I/2, 256. 바르트는 인간의 가장 곤경에 처한 주관적 상황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 가장 깊은 적막”(silentium altissimum)으로 표현하며, 이 가운데 전적으로 타자적 방식으로 이루 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한다.
34비교 강응섭, 『자크 라캉과 성서해석』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여기서 강응섭은 자신의 박사학위 지도교 수였던 앙살디 교수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론- 상호적 정신분석의 방법을 신학적 방법론으로 적용하고자 루터의 노 예 의지론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라캉의 세미나 1961-1962, Livre IX: L’identification과 1962-1963 Anxitety (ed. J-Alain Miller, Cambridge, polity, 2014)을 중심으로 라캉이 밝힌 욕망의 주체가 드 러내는 환상의 방식에 있어서 상호주관성에 기인한 욕망의 허구성과 그 허구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허구적 자아의 실존적 윤리를 긍정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루터가 밝히고자 하였던 인간의 상황은 단지 정신분석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실함으로써 발생한 인간의 모습이며 오로지 그리스도 안 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존재로 부름받은 새로운 인간에 대한 참여로서 신앙이라는 계시적으로 발생한 내 밖에서 이루어진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지 인간의 모순적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강응섭이 에라스무스나 스콜라주의자들이라고 루터의 맞은 편에 세워 놓은 신학적 입장을 정신분 석학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망상증적 증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이 루터의 신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루터 역시 똑같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설명하여 욕망의 구도에서 등장하 는 진실성- 애매함을 가진 존재로서의 그 자체로서 인간- 을 보여주는 존재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 해, 루터 신학의 근본으로 규정한 루터의 「노예 의지론」을 정신분석학의 예로서 설명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자가 할 수 있지만, 신학자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의 방 식을 인간을 다루는 신학적 체계에 기준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객이 전도된 설명을 하고 있 다. 강응섭의 책 전반에 등장에 신학적 진술들을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신학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을 신학의 핵심으로 세우 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에라스무스와 스콜라주의자들의 시도를 망상적 정신 현상에 따라서 발생한 신학이라고 묶은 것은 카톨릭적 신앙의 의미를 단순화한 것이고, 또 “기의없는 기표와 성서읽기,” 김석 편, 『라캉 과 지젝』 (서울:글항아리, 2014), 139-166, 특히 140-141에서 성경을 라캉(지젝)에 의해서 강조된 방식으로 해석 한다고 시도할 때,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강응섭이 주장하는 루터의 신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이룬다는 것은 매 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즉, 해석을 루터가 강조한 회개를 기의를 벗어버리는 과정으로 보면서 이것이 반복되 는 회개의 생활을 환유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모든 것을 실재와 상관없는 언어적 기표의 상징적 체계 안에서 이 루어지는 환상적인 형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진실한 실체가 없이 인간의 언어적 상징체계를 끝없 이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적 진리로서 발생하는 영감의 이해를 포기한 것 으로 그 신학적 의도의 진정성이 의심된다. 신명하 교수는 본 저자와 같은 이러한 판단을 교리에 의해 증후를 익 사시켜서 이러한 시도를 억압한다고 표현했지만, 오히려 신 교수의 수사학을 빌린다면 죽은 이후에 부활하는 것이 기독교적 진실이기에, 이것은 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항상 짊어져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즉, 신앙을 단지 일반적인 의식 현상과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상태에 대한 분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Schleiermacher가 신앙을 인간의 주관에서 발생 하는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육신 사건을 인간의 의식적 차원으로 제한하여 주장 할 수밖에 없었던 것35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실 존으로서 신앙의 모습은 Barth가 강조한, “놀라움”, “당황”, “의무”, “만남”으로서 설명될 수 있 는데, 이때 신학적 실존의 핵심은 하나님을 통한 새로운 존재로서 드러난다. 그런데 우선 신앙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라캉이 의도하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상징적인 것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어둠과 죽음의 신으로 치부된다. 이것은 라캉이 세미나 7에서 프로이트의 Der Mann Moses und die monotheistsche Religion36 주장과 같이 종교의 특징이 부친 살해를 통해서 드 러난 강박증으로서 아버지-기표의 상징적 의미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재의 죽음을 강조하는 논조 에서 드러난다.37
그에게 신의 의미는 상징적 기표 이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로서 파악된 신은 상징계 내에서 법의 보편성으로 존재하는 신으로 이것은 인간 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상징계의 출현을 지칭하는 것이다.38
더구나 라캉의 심급 구분에 따라서 하 나님을 상상계/상징계/실재계에 적용하고자 할 때 실재계에 위치해야 하지만39, 정신분석적 차원 에서 실재계는 우선 “물질적 기질”을 의미하는 질료로서 동물적 “육체성”을 지시하거나, 인간의
35F. Schleiermacher, Der Christiliche Glaube, Zweiter Band (Berlin: Walter de Gruyter & Co., 1960), 34f, 115ff.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주장하였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 간성의 Urbild이면서, Vorbild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칸트의 인식론적 한계와 스피노자의 신 이해를 전제로 신앙인의 자아의식으로서 구원을 설명하는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에 있 었던 기적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하나님이 이루신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819년부 터 그가 강의한 역사적 예수상에 등장한다.
36Sigmund Freud, Der Man Moses und die monotheitische Religion (Amsterdam: Albert de Lange, 1939) 프로이트는 이집트인 모세가 있고 미디안인 모세가 있는데, 이집트인 모세가 십계명을 준 존재로서 그가 이집트인으로서 이스라엘인에게 살해당한 자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부친 살해의 신화적 구조가 이스라엘의 종교에 핵심으로 되었다고 본다.
37백상현, 『라깡의 인간학』 (파주시: 위고, 2017), 240-264.
38앞의 글, 243. 이와 연관하여 강응섭은 루터의 기독론을 강조하며 신앙이 언어를 통해서 등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바(자크 라캉과 성서해석, 316)의 의미가 라캉이 언급하는 상징계의 현상과 상응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오셨다는 것보다도 말씀으로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이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드러남과 감춤의 상징화되는 사건을 강조하고 있다.
39Jacques Lacan/자크-알랭 밀레 편, 맹정현, 이수련 옮김, 『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서울: 새물결, 2008), 88-103. 정신분석학은 실재계를 추구해야 하지만, 이것은 투계라는 트라우마의 형식 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무신론의 공식은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은 무의식이다.”(96)라고 설명 한다.
인식을 이루는 언어 밖에 있으며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의 뒤/혹은 욕망을 이루는 근원적 상실을 의미하는 “불가능한 것”으로서 무(無)적인, 말로 할 수 없는 영역이다.40
그리하여 라캉은 만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대타자적 존재로서 환상적 방식이나 주이상스41
적 표현으로 다루어진다. 이들은 상징계의 영역에 증상으로서 출현할 수 있는 실재계의 흔적들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근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것이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에서 논의되는 영역을 넘어서는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밝혀지며, 여기로부터 신앙적 실존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신학적 주체성을 밝히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인간의 정신적 주체를 상징계로부터 보지 않고, 실재계로부터 보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를 그의 『세미나 23: 생텀』42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이것은 보르메오 매듭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원래 그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시도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으나, “이론의 한계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탐구”로부터 오히려 자신의 이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43
다시 말해서 1970년대 이후로 그가 추구하였던 수학소의 인식론적 과학의 엄밀성을 설명하는 언어적 한계를 발견하고 있었으며 보르메오 매듭은 바로 이러한 언어학적 틀을 넘어서는 문제를 표현하고 있었다.44
그리하여 이제 그는 언어적 한계를 벗어나는 실재계 중심의 사고를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라캉이 시도하는 바 1960년대까지 상징계를 통해서 드러난 욕망의 주체성을 다루고자 하였다면, 1970년대부터 실재계와 주이상스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는 것과 연관되어서 변화된 그의 입장을 다루고자 한다.45
이것은 라캉이 주장하는 주체 개념의 특성과 이를 구성하는 정신적 영역의 구분 등을 전제로, 실재계로부터 새롭게 등장하는 주체성을 시도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글쓰기와 연관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46을 다루는 것이다.
40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2004), 216-218.
41딜런 에번스, “칸트주의 윤리학에서 신비 체험까지,” 대니 노부스 엮음/문심정연 옮김, 『라캉 정신분석의 핵 심 개념들』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3), 19-35.
42Jaques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XIII, Joyce and the Sinthome 1975-1976, trans. Cormac Gallagher, http://www.lacaninireland.com
43루크 서스틴, “불가해한 마디성,”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2013), 172.
44앞의 글, 176.
45김석, 『에크리』 (서울: 살림, 9쇄 2018), 37. 그리고 『라캉, 끝나지 않는 혁명』 (2013), 68-69. 라캉은 1970 년대로부터 상징화를 벗어나는 실재계를 핵심 위치에 두기 위해서 위상학적 구조인 SIR(상징계-상상계-실재계)를 RSI(실재계-상징계-상상계)로 뒤집었다. 이것은 1974-1975년 세미나 『R. S. I.』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46신학적으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연관 짓고자 할 때, 강응섭은 『자크 라캉과 성서해석』 (157-221)에서 라캉 의 정체화 이론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라캉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변화와 연관된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강응섭이 세미나 9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세 가지 자기 동일화의 과정을 라캉이 기표의 동일화와 기표와 동일화 로 새롭게 언어 중심적 전개 과정으로 재해석하며 주체의 위상학적 구조를 정립하고자 한 것을 라캉의 핵심 요지 로 판단한 것이라고 사료 된다. 그리하여 이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의 주제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주체를 현실적 욕망의 구조를 통해서 파악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삶에 성실하도록 만드는 정신치료의 목적인 일종 의 자기 긍정의 철학을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사실 라캉은 후기에 현실을 근본적으로 전혀 새롭게 구성하는 아버지-이름을 벗어난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묻는 것을 통해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하여 라캉을 연구하는 이들이 평가가 갈라져 있지만, 본 저 자는 라캉이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이 단지 인간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닫힌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외적 상황으로 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으면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욕망)으로만 보려고 하였던 것에서 긍정적(자신의 정 체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견해를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강응섭의 라 캉에 대한 해석은 이미 라캉에 의해서 새롭게 수정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정신이 현실적으로 주어진 욕망의 체계를 벗어난 새로운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조이스의 길처럼 실재를 표 현하는 방식도 시도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일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명백히 계시적 언어로 나타내는 신학적 관점만이 실재계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성에 대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한 관점으로 파악되기에 이제 먼저 주체 개념의 형성과 관련한 라캉의 인간 이해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 뒤에 실재계를 중심으로 다시금 논의되는 인간의 자기 이해의 가능성을 신학적 차원 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2.2. 라캉의 주체 개념의 특성은 무엇인가?
라캉이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 따르 면 인간의 주체는 결코 확고한 어떤 불변하는 상징계의 주인이 아니라고 한다.47
그 까닭은 인간 의 주체는 상징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언어의 흐름 가운데 욕망의 주체로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여 기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구조주의, 헤겔의 철학에 대한 재해석, 언어학의 발전48을 전제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주체는 단지 결단을 내리는 고정된 근거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주어 진 환경 가운데 끊임없이 인정을 추구하며 자신의 욕구와 요구를 언어적 세계상을 통해서 파악해 나가는 가운데 욕망의 존재가 됨으로써 자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허구적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주 체가 허구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이 욕망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 내재한 그 자신만의 고유 한 실재를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9
즉, 욕망의 주체는 우선 상상계의 자아를 매개로 성립 되는 것이다. 이때 이 자아는 “주체의 대리자인 자아가 형성되는 단계”로서 “속이는 질서”로서의 상상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50
그리하여 이제 주체는 처음부터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상상 계를 통해서 이상화된 자기에 대한 착각을 기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언어적 흐름에서 발생 하는 기표의 임의성에 의해서 드러난 동일시의 차이와 간격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은유와 환유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표현으로서 주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근원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사회적 상호적 관계성에서의 타자적 형식으로부터 드러난 대 타자의 욕망이며, 동시에 대타자의 욕망의 결여에 기인한 것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라고 알려진다. 이것을 그는 Objet a로서 표현하기 시작한다.51
이와 같은 상황에서 라캉은 주체가 자 신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자체의 한계를 동시적으로 파악하면서, 여전히 욕망의 주체가 되는 윤리 적 삶을 강조한다. 즉, 칸트가 초월론적으로 정언명령을 근거함으로써 윤리의 가능성을 밝혔던 것 처럼, 그는 자신을 기표적 주체로 보고, 환상52을 넘어서, 세미나 16: D'un Autre à l'autre, 13 장에서 강조한 잉여-주이상스로서 실재의 흔적을 나타내는 objet (petit) a53를 추구하는 것이 주 체의 본 모습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핵심적 변화는 주체가 대타자에 대한/대타자로부터 의 응답이 아니고 “실재에 대한/실재로부터의 응답”이라고 파악되는 것이다.54
47김석, 『에크리』 (2018), 83-84. 이 세미나는 에크리 맨 마지막 논문인 「과학과 진리」와 상응된 형식으로 주 체가 언어의 기표에 대리되면서 담론에서 출현하고 사라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48앞의 글, 60-76.
49앞의 글, 94. 주체성이 근거하는 자아는 거울 단계를 통해 “허구적 상상계의 작용”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50앞의 글, 95.
51『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 (2008), 121. 254, 271. 366-367, 390-391.
52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2004), 436-439. 특히 438.
53앞의 글, 400-402. 일반적으로 대상 a로 소개된 것의 시대적인 의미를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무의식의 특징으로 라캉이 적용한 사유방식으로 “사후작용”에 의해서 서로 연관된 의미가 적용되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54파울 페르하헤어,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 『라캉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 (2013), 229.
이제 objet a는 1972-73년 『세미나 20: Encore』에서 라캉이 “존재의 모사”라고 대치되어 설명하게 되는데, 『세미나 21: Les non-dupes errent』에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제계를 연결하는 보르메오 매듭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55
여기 라캉이 사용하는 보르메오 매듭은 주체를 이론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주체를 다루었던 라캉의 개념화 작업을 다시 개념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매듭은 일종의 “외심(extimité)”으로서 언어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무엇을 수반하는 것을 제시한다.56
즉, 그리하여 보르메오 매듭의 세 영역이 겹치는 중심에 위치한 objet a는 주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표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 상징으로 표현되지 않는 스스로 “의미화하는 사슬의 실재 구축”을 나타내는 것이다.57
좀 더 분명하게 말해서, 보르매오 매듭은 라캉의 『세미나 19; … ou pire』에서 3개의 동사인, “제안-거절-그게 아니니까”를 매듭짓는 부정적인 것으로 objet a와 동일하게 이해된다.58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59고 하였던 것과 동일하게 언어의 논리적 한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55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2004), 402.
56루크 서스틴, “불가해한 마디성,”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2013), 181-182.
57앞의 글, 182.
58앞의 글, 185.
59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LTD, 1951), 188.
그리고 이제 이것은 1975년부터 단지 모델이 아닌 실재를 나타내는 방식이 된다. 여기서 obejt a를 추구하는 주체는 욕망과의 연관에서 상징적 차원에서부터 허구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실재계의 현실 가운데 오로지 자신만의 새로운 주체성을 밝히는 것으로 강조되었다.
2.3. 보르메오 매듭에서 드러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 이해:
보르메오 매듭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세미나 23: RSI』이다.
여기서 이전에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심급을 정리하였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다시금 보르메오 매듭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제까지 상상계는 거울 단계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기초적 단계로, 상징계는 언어적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자아 이해에 따른 요구와 욕구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욕망의 존재로서 주체가 출현하는 곳으로, 실재계는 그 자신 자체로서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항상 모든 것의 한계를 제시하는 무화되는 영역이라고 보았고, 이들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르메오 매듭의 특징이 세 개의 고리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것임을 볼 때, 이 매듭으로부터 세 영역을 이해한다면,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가 상호적으로 합하여 더 큰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새롭게 규정되기 시작하였다.60
즉, 보르메오 매듭은 이제 기표의 논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상징계를 통해서 알려진 기표적 요소가 상상계와 실재계의 현상을 조직하면서 지배적이었다면, 이제는 상징적인 것의 특권이 사라진다. 그리고 매듭을 통해서 드러난 세 가지의 통합적 모습은 상상계나 상징계를 통해서 포착되지 않는다.61
60루크 서스틴, “불가해한 마디성,”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2013), 186.
61앞의 글, 189.
상징계의 욕망을 나타내는 팔루스를 쫓지 않고, 상상계도 보이는 영상 대신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캉은 보르메오 매듭에서 밝혀진 실재의 재현을 이루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다시 새로운 도식으로 대치된다. 상상적인 것은 일관성으로, 상징적인 것은 구멍, 실재는 탈존이라고 설명한다.62
그리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가장 기초적인 형식을 제공한 상상적인 것은 허구적인 시각적 차이를 통해서 알려지는 영 상이라 아니라, 모든 것의 근거로서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일관성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실재적인 것은 그 스스로 자기 자신 밖으로 드러남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탈존의 성격이 주어지고, 상징 적인 것은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일상적인 언어와 기표의 체계를 넘어서 대타자의 결 여를 나타내는 증상으로서 순수한 비움을 추구하는 구멍이라고 특징되는 것이다.63
그리하여 세 가지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이제 한 개인의 구체적인 순간에서 상황과의 연관성에서 탈존하며 드러나는 일종의 새로운 주체성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정신분석 이 상징적 체계에서의 연속되는 은유와 환유의 전달과정에서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의 주체 중심 으로 이해되었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증상으로서 의미화 과정에서 남겨진 불활성적인 주이상스를 체현하는 것으로서 실재가 실체화된다는 의미에서 반-주체적인 주체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인간의 욕망으로 설명되는 틀을 벗어나 실재의 드러남과 더 연관된 다. 그리고 라캉에 따르면,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주체성은 결국 비 실체로서의 주체라는 개념 을 포기하고 “주체의 전복”으로서 “의사-존재론적인 또는 그려진-존재(onto-graphic)로서의 실체 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64
62앞의 글, 190.
63앞의 글, 190-191.
64앞의 글, 193.
2.4. 생텀으로서의 글쓰기에서 드러난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
보르메오 매듭을 통해서 드러 난 새로운 실재의 드러남을 표현하는 것으로 라캉이 강조하는 것은 글쓰기이다.
특히 이 글쓰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강조된 기표의 체계와 상징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된다.65
65앞의 글, 194-196.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체계와 부성으로서 병리학적인 특성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라캉이 정신분석을 통해서 정신병의 원인을 찾고자 할 때 1938년부터 그는 가족구조에서 아 버지의 축출을 언급하고 특히 상징적 아버지의 부재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폐제(forclusion, 상속인의 자격이 상 실되는 법정판결과 연관되어 라캉에 의해서는 저당물에 대한 반환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를 지 시하는 것으로서, 자아가 자기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을 철저하게 방어하는 의미에서 전혀 그런 적이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상실된 것은 상징계에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며, 더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다시금 실재계를 통해서 출현하게 될 때는 그 자신이 견딜 수 없기에 정신병에 빠지며 환각 혹 망상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는 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2004), 409-411. 이 처럼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까지 인간의 상징계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 정신분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지 만, 이제는 증상으로서 주어진 objet a를 글쓰기의 정화라는 방식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 화에 있어서 근거가 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objet a이다. objet a는 1955년 근본적으로 자아와 연관된 상호교환적이고 반사적 차원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 칭하는 것이었는데 1957년 환상의 수학소를 대입하면서 욕망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 다.
그 후 타자 안에서 드러난 아갈마로서 타자 속에서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그러 나 1962-1963년 『세미나10: L'angoisse』 이후, 특히 『세미나 11;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에서 objet a는 시니피앙과 대립적으로 설명된 충동의 대 상으로서 불안의 대상이다. 그리고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설명된다. 이제 1969-70년 『세미 나 17: L'envers de la psychanalyse』에서 objet a는 상징적 체계를 벗어난 실재계 이면에 남 겨진 잔여로서 잉여 향락(plus-de-jouir)으로 성격을 얻게 된 것이다.66
그리고 보로메오 매듭을 말하는 단계에서는 상징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 주이상스로서, 은유가 아닌 외상적으로 기입되는 존재의 모사 혹 외형(semblance)으로서 파악되며 보르메오 매듭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67
그리고 둘째로 정신분석의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적인 것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를 의식과 무의식의 상관성에서 표현할 때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로서 표현하는데 이것들이 분리된 작용이지만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드러난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고 작용하게 된다고 보았다.
즉, 주체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서 욕망의 가능성을 얻었으며, 후에는 잉여 향락으로서 자신의 주이상스의 추구를 지속할 수 있다고 보았었다.68
그런데 보르메오 매듭을 통해 세 영역의 묶음을 언급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통합적 성격이 불필요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아버지의 이름의 상실을 통해서 드러난 정신병적인 원인도 다른 것으로 대치된다. 즉, 아버지 이름의 폐지(대타자의 부재)가 정신병의 원인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 아래 자아의 자기기만과 상징의 권위적 요소를 통해서 의미화의 장을 성립하고 있었던 욕망의 환상적 성격이 실재의 출현으로 인해 세 영역의 얽혀진 관계가 해체되면서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정신병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제 세 영역의 해체를 다시금 묶어주는 것으로 보르메오 매듭의 특징은 상징적 통일성을 해체하면서 새롭게 실재를 중심으로 세 영역을 묶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라캉은 1975년 이러한 실재계에 대한 개념으로 증상개념을 재해석한 생텀(sinthome)을 언급하고 있었다. 증상은 신경증적 차원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징적 차원을 넘어서, 주체가 무의식을 즐기는 방식으로 실재계를 표현한다고 보았다.69
그리고 이것이 언어의 근본적 가능성이며 “실재 속의 공백”을 상징계 속에 포함된 증상을 통해 드러난다고 하였다.70
비록 정신분석학이 증상을 다룸에 있어서 언어의 상징적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평가가 다르지만,71
라캉은 증상(symptȏme)개념을 재해석하여 상징적 차원이 아닌 실재의 출현으로서 ‘일자’의 주이상스적인 요소가 자아 주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새롭게 생텀(sinthome)이라고 표현한 것이다.72
66무까이 마사아끼/임창석, 이지영 공역, 『라캉 대 라캉』 (서울: 새물결출판사, 2017), 291-298.
67루크 서스틴, “불가해한 마디성,”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2013), 184. 이것에 대한 위상학적 표현 은 라캉의 1975년 12월 9일 세미나에서 나타난 보르메오 매듭의 도안에 잘 나타난다.
68무까이 마사아끼/임창석, 이지영 공역, 『라캉 대 라캉』 (2017), 354-355. 이러한 주체의 삶의 실질적인 성 격은 결국은 죽음의 특징을 통해서 규정된 일자로서의 유한성의 반복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에 있어서, “대타자가 없다.” “성관계는 없다.” 등의 언급 등을 제시하면서 실재계와 조우한 흔적으로 단독적으로 존 재하는 시니피앙(S₁)으로서 일자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69앞의 글, 199. 그리고 홍준기, “우리시대의 비평읽기: 후기 라깡과 보르매우스 매듭, 그리고 조이스의 증 상,” 영미문확연구회, 「안과 밖」 28권 (2010년 5월), 202. 그리고 증상에 대한 의미에 대하여 『라깡 정신분석 사 전』 (2004), 377-380, 146-149. 1962년 이전에는 상징적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해석이 불 가능한 순수 향락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런 가운데 핵심은 증상이 단지 언어학적으로 무엇을 표현하 고자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무의식이 그를 결정하는 한에 있어서 각 주체가 무의식을 즐기는(jouit) 방식 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 1975년 2월 18일 세미나).
70Jaques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Book XXIII, Joyce and the Sinthome 1975-1976, trans. Cormac Gallagher, http://www.lacaninireland.com,
71앞의 글, 201. 이와 연관해서 정신분석학의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 대하여 김정한, “정신분 석의 정치,” 김석 외 편 『라캉과 지젝』 (서울: 글항아리, 2014), 67-68.
72파울 페르하헤어,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 『라캉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 (2013), 230. 그리고 김석, “라캉과 지젝: 주체화의 윤리와 공동선을 향한 정치혁명,” 『라캉과 지젝』 (2014), 43-44. 한국에서도 김석
즉, 생텀으로서 증상은 상징적으로 말될 수 없는 기표 어떤 것에 대한 유형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가 주관적 주이상스의 방식으로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에는 분명히 증상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글쓰기의 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의 확립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 분석을 통해서 시도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 사례가 된다.73
여기서 라캉은, 어린아이 가 그냥 좋아서 내는 소리로서 현실적인 무의식을 표현하는 비소통적 언어를 지칭하기 위해서 lalange라는 말을 만들었던 것처럼74,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Finnegan Wake)를 주목하 면서, 조이스의 글을 통해서 전혀 다른 정신분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75
라캉에 따르면, 조이스의 글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욕망의 세계를 구성하는 신체적 이미지와 상상적 자아의 모 습을 벗어버리고, 아버지의 이름 없이 자신만의 예술적 에고를 실현한 것이다.76
라캉은 『세미나 23; 생텀』에서 소크라테스를 이러한 실재적 언어의 기원을 보여준 사람으로 제시하며 그의 죽음 의 성격을 통해서 생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 은 일상적인 언어 세계가 아버지의 이름을 상실함으로써 오류가 발생하면서 해체되고, 다시 생텀 을 통해서 언어적 실재가 교정되고 상쇄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계를 작동시킴으로써 의 미를 구현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를 라캉은 무의식을 대체하는 향락의 신체로서 말하 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parlȇtre라고 지칭한다.77
73파울 페르하헤어,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 『라캉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 (2013), 229.
74딜런 에반스/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2004), 244,
75무까이 마사아. 『라캉 대 라캉』 (2017), 361.
76앞의 글, 368.
77앞의 글, 369-370.
이것은 욕망의 상징적 체계에서 기표의 은유나 직유 혹은 환유적인 과정에 등장하는 영상적 이미지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 를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5. 라캉의 인간 이해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한 것은 라캉의 사상에 있어서 전기와 대변되는 방식으로 후기의 사고구조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라캉의 전기 사고에 전제가 된 것이 욕망이며 이를 설명할 때 프로이트의 관점과 관련한 오이디푸스 콤플 렉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알게 된다.78
78이에 대하여 백상현, 『라깡의 인간학』 (2017), 253-255. 여기서 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인용하는 강조 점이 프로이트와 라캉의 입장이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자녀)사이의 성적 인 욕망을 토대로 모든 분석이 시작되는 것은 공통적이다.
후에는 이를 대체하는 것이 생텀이라는 방식의 새로 운 형식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라캉의 초기 정신분석의 요점이 인간의 상징계를 중심으로 하는 욕망의 주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기의 정신분석은 실재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새로 운 주체성의 형식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조이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대체하는 것 으로서 예술적인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을 성립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다.
여기서 신학적인 인간 이해에 대한 연관성을 말한다면, 굳이 전기 라캉의 사고보다는 후기 라 캉의 사고가 신학적으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일단 라캉의 전, 후 기 사상 모두가 기독교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유한성에 대하여 분명한 평가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 이다.
전기에, 욕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결여에도 불구하고 현실 적인 사회적인 삶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것으로서 죄된 인간의 한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고, 과 위에 언급한 홍준기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기에 언급된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증상(sinthome)과 자신을 일치함으로써 새로운 상징계를 구성하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의미가 아닌 그 자신의 유일한 인격적 의미구현으로서 인간 각자의 차이 가운데 드러난 유한성을 즐기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후기 라캉의 사고에는 인간의 주체가 실재계의 반영으로 자아를 근본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변화가 사회적 그물망에 갇혀서 대타자에 의한 환상적인 시도를 수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발생하는 실재의 새로운 출현을 통해서 사회적인 상징체계와 상관없이 인간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주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히고 있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적 문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조이스의 언어적 특성을 통해서 인간의 자아 경험이 주체적으로 확인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방언이나 중생의 경험을 서술하는 신학적 진술의 의식적인 과정을 밝히는 것으로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기 라캉이 정신분석을 시도할 대상을 전반적으로 일상적 인간에서 예술적 인간으로 옮겨놓았다는 것과 연관해서 볼 때, 후기 라캉의 방식은 정신분석의 대상을 신앙적 인간으로 적용해야 당연하다.
함께 신학자가 일상적 인간의 성적 욕망의 결과에 따라서 상징적인 팔루스를 따르는 정신분석학의 내용을 신학적 진리와 성경해석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인간이 자아의 신체적인 새로운 동일성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내는 삶을 파악하는 과정을 하나님의 실재가 드러나는 신앙의 자기 이해 과정으로 밝혀 나가는 것이 과제가 된다.
3. 나가는 말
현대에 있어서 대규모의 기계 문명의 진보와 발전을 통해서 세상의 존재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물질적 세계관이 미래가 나가야 할 유일한 가능성인 것처럼 공론화되었다. 이 가운데 과학을 근거로 이루어진 기술적 발달은 인간과 세상을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포스트모던 입장과 연관되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데 문화적 과학주의와 대중적 언론을 이용하여 개인적 혹 집단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을 만드는 오류의 근거로서 지적되는 것은 physicalism, neuro-centrism, moral nihilism이다.
즉, 과학적 기준을 모든 존재의 기준으로 삼는 physicalism과 뇌의 기능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루는 것처럼 파악하는 neuro-centrism, 그리고 개인의 상대적인 다양성을 전제로 도덕적 판단을 권력의 표현으로 해석하려는 moral-nihilism은 근본적으로 과학 기계 문명에 따른 문화적 효과가 포스트모던 상황과 연관되어 주관적으로 왜곡되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79
이 가운데 물질과 정신의 이원적 통일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과 주관적 감옥을 벗어나 타자적 실재를 분명히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위한 행위의 가능한 지평으로서 도덕적 요구야말로 인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신학적인 주장은 현대에 제시되는 여러 가지 대안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함께80, 분명하게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역사의 기초가 될 것이다.
79Kevin J. Vanhoozer, “Pilgrim’s Digress: Christian Thinking on and about the Post/Modern Way,” ed. Myron B. Penner, Christianity and Postmodern Turn (Grand Rapids: Brazos Press, 2005), 75f.
80참고 이용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 한국조직신학회 편, 「한국조직신학논총」 170
이제까지 본 논문에서는 최근에 이루어진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도들에 암묵 적으로 전제된 인간 이해나 혹 인간의 주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신 학적 관점의 특징과 관련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학이 다른 학문과의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은 질문의 상호교차를 통해서 서로에게 비평에 도움을 받는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학문의 방법 론을 도용함으로써 자신의 근본적 과제를 오도하는 위험한 사태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신학의 학 문적 절대성은 있을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주어진 영감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복음의 진 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오늘날 신학적 주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논문은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강조한 것은 신학적 주체성은 인간 욕망의 세계를 이루는 무의식적 상징적 세계 안에서 출현하는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라캉이 후기에 시도하고자 하였던 인간의 삶에 드러난 새로운 실 재를 지시한다는 것이었다.
라캉은 이것을 상징적 세계를 넘어서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실재계의 증상으로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정신분석학은 오히려 주관에 집착한 정 신병의 표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신앙을 통해 드러난 실재계의 모습은 일반 사람들의 상징계에 사로잡힌 주체성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가장 분명하게 사물의 객관적인 역사적 실재 가운데 발생한 신앙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주어진 새로운 실 존으로서 신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주체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 시적 실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선물로서의 참된 존재를 제시하는 종말론적 실존을 지시하 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 후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설 명될 수 있는 실재의 참된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로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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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찬/ 정대인 (협성대)>
황돈형 교수님(이하 연구자)은 본 논문은 인간의 주체성을 다루는 여러 철학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주체를 신학과 대화시키고 그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낸다.
연구자는 특히 후기 라캉의 주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실재계와 생텀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개념이다. 하지만 본 연구는 이러한 정신분석의 주체 개념은 결국 증상으로서 간주 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에 신학적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적 실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선물로서의 참된 존재를 제시하는 종말론적 실존을 지시한다고 그 차이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신학은 하나님은 형상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실재의 참된 면모를 신학적 주체성으로 나타내는 과제를 수행해야 함을 제언하고 있다. 본 논문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과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의 공명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에 궁극적으로 정신분석학적 주체와 신학적 주체가 철저하게 떨어지게 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부드럽고 깊이 있는 글쓰기로 뉴노멀 시대 인간에 대한 심층적이고, 간학문적인 신학적 시도는 매우 환영할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Ⅰ. 내용 요약
1. 근대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간성에 관한 탐구는 하이데거와 비판철학을 거쳐, 포스트모더니티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들은 진단한 인간성은 어떠한 동일성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이 주위 환경의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물질이 인간을 변형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인간 이해는 인간의 고유성을 전제로 출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성이 애매해진 상황이라도 인간은 결코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포기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서로 상이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황돈형 교수는 신학적 주체성의 논의는 이러한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의 의견을 전제하며 출발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주체성 연구에서 하나님은 인류 역사와 인간의 실존적 차원, 그리고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적 차원에 개입하시는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 주체성을 밝히는 작업은 사회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영역과 같은 복합적인 차원을 고려하여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타자적’으로 드러나는 존재임을 밝히는 작업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아울러 연구자는 신학적 주체성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밝혀지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에 174 제17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 3분과 | 뉴노멀 시대의 인간 정대인, “‘신학적 주체에 대한 이해: 자크 라캉의 인간 이해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중심으로’에 관한 논찬” 주목한다. 여기서 저자가 정의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부터 스스로 결정지어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닌 “탈중심적 존재”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신학적 주체는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진 그의 말씀과 행위에 상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 이처럼 신학적 주체성은 사회적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당파성을 지니지 않더 라도, 시대적 과제에 대한 책임적 행위를 복음의 요구에 따르는 고유한 인간성의 과제로서 밝혀나 갈 수 있기에 신학적 주체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모든 것들 가운데 실재하는 방식으로서 설명되는 것이다.
2. 이어서 연구자는 라캉의 주체 해석과 신학적 주체성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라캉의 정신분 석학의 공헌을 데카르트가 제기한 코기토라는 의식 주체의 한계를 파악함으로써 인간 인식의 가 능성에 대한 정신적 제한성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밝히고자 시도했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연구자는 인간의 실존을 존재론적 차원의 깊이에서 타자적 방식으로 다루는 신학적 이 해는 정신분석학에서 인식의 한계를 다루는 것보다 더 근본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임 을 분명히 한다. 즉 신앙은 단지 일반적인 의식 현상이나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정신과 의 식적 차원에 제한된 것이 아닌, 바르트의 표현을 빌려 진정한 신앙의 모습은 놀라움, 당황, 의무, 만남으로 하나님을 통한 새로운 존재로서 드러나게 됨을 주장한다.
3. 라캉에게 신의 의미는 상징적 기표 이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엄밀히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만일 라캉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종의 대타자적 존재로서 환 상적 방식이나 주이상스적 표현으로 다룰 것인데, 이는 상징계의 영역에 증상으로서 출현할 수 있 는 실재계의 흔적들이기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근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고 본다. 이어서 연구자는 하나님은 정신분석학에서 논의되는 영역을 넘어서서 밝혀 지며, 여기로부터 신앙적 실존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신학적 주체성을 밝히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실재계에 대한 라캉의 접근 방법만은 인간의 정신적 주체를 상징계로부터 보지 않고, 실재계로부터 보고자 시도 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고 표현한다.
4. 라캉에게 주체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기표적 주체라는 환상을 넘어, 잉여-주이상 스로서 ‘대상 a’(objet petit a)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주체는 대 타자에 대한/대타자로부터의 응답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실재로부터의 응답으로 파악된다는 데 있다. 이때부터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바로 보르메오 매듭과 생텀이다. 후기 라캉은 보르메오 매듭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상징계의 특권을 무화시킨다. 이전까지는 상징계의 지배 적인 기표의 논리에 따라 상상계와 실재계의 현상이 조직되었다면, 이제 매듭을 통해서 드러난 R-I-S 통합적 모습은 상상계나 상징계를 통해서 포착되지 않는다. 즉 이제 상징계는 욕망을 나타 내는 팔루스를 쫓지 않고, 상상계도 보이는 영상 대신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상상적인 것은 모든 것의 근거로서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일관성으로, 상징적인 것은 여전히 자아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일상적 언어와 기표의 체계를 넘어서 대타자의 결여를 나 타내는 증상으로써 구멍으로 특징지어지고, 실재계는 한 개인의 구체적인 순간에서 상황과의 연관 성에서 탈존하며 드러나는 일종의 새로운 주체성(반주체적인 주체의 전복)임을 강조한다. 3분과 | 뉴노멀 시대의 인간 제17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 175정대인, “‘신학적 주체에 대한 이해: 자크 라캉의 인간 이해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중심으로’에 관한 논찬”
5. 보르메오 매듭은 신경증적 증상을 야기하는 상징적 통일성을 해체(아버지의 이름의 폐지) 하면서 새롭게 실재계를 중심으로 세 영역을 묶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증상개념이 필요한데, 라캉은 보르메오 매듭 통해 드러난 새로운 실재계를 중심으로 증상개념을 재해석하면서 생텀을 언급한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붕괴를 막는 생텀은 과거 신경증적 증상의 상징적 차원을 넘어서, 주체가 무의식을 즐기는 방식으로 실재계를 표현하고 있다. 생텀으로서 증상은 상징적으로 기표의 한 유형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가 주관적 주이상스의 방식으로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남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라캉의 전기 사유에서는 욕망을 중심으로 상징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후기 사유에서는 이를 대체하는 생텀이라는 방식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초기 정신분석의 요점이 인간의 상징계를 중심으로 “욕망하는 주체”를 밝히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후기 정신분석은 실재계를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6. 연구자는 결론에 이르러 이러한 라캉의 인간 이해와 신학적인 인간 이해의 연관성을 언급하면서 실재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후기 라캉의 사유가 신학적으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인간의 변화는 사회적 그물망에 갇혀서 대타자에 의한 환상적인 시도를 수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발생하는 실재의 새로운 출현을 통해서 사회적인 상징체계와 관계없이 육체적으로 경험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주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자의 의도인 듯하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적 문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연구자는 후기 라캉의 방식은 정신분석의 대상을 신앙적 인간으로 적용해야 하며, 신학자는 인간이 자아의 신체적인 새로운 동일성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내는 삶을 파악하는 과정이 하나님의 실재가 드러나는 신앙의 자기 이해의 과정으로 밝혀나가는 것이 과제임을 제언하고 있다. 상술한 내용은 필자의 짧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지만, 논문은 전반적으로 탁월한 논지와 글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귀한 옥고에 대한 감사와 건설적 참여의 표현으로 미흡하게나마 실재계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과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Ⅱ. 질문과 제안
1. 연구자는 신학적 주체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실재,” “신앙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적 실재”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신학적 주체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을 종합해볼 때, 실재는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모두 관계하는 일종의 ‘타자성’으로 읽힌다. 여기서 필자의 물음은 신학적 주체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사용된 실재라는 개념과 라캉의 실재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라캉의 주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신학적 주체 역시 자신의 내/외부에 출현하는 실재에 대한/ 실재로부터의 응답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실재(계)가 증상이라는 것 외에 둘 사이에 다른 어떤 차이는 없는 것인지 보충적인 설명이 듣고 싶다. 176 제17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 3분과 | 뉴노멀 시대의 인간 정대인, “‘신학적 주체에 대한 이해: 자크 라캉의 인간 이해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중심으로’에 관한 논찬”
2. 연구자는 또 다른 문장에서 “신학적 주체성은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드러난 사건 가운 데 인간의 내면적인 자아를 근본적으로 구성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인격적 실재이며, 인간은 자신 의 환경 가운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알려질 수 있다”(159)고 주장하고 있 다.
이는 앞선 질문과 동일하게 신학적 주체에 대해 다루는 것인데 사용되고 있는 표현을 라캉의 도식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신학적 주체는 상징계에 위치 지어지는 것 인지? 아니면 실재계에 위치 지어지는 것인지 다소 혼란스럽다. 예컨대 또 다른 문장에서 연구자 는 신학적 주체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모든 것들 가운데 실재하는 방식으로서 설명되는 것”(159)이라는 표현의 경우는 실재계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 반하 여, 어떤 부분은 상징계적인 성격으로 읽히기도 한다.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는 “신학적 주체성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알려질 수 있다”는 표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초자아적인 성격에 가깝게 읽혀진다. 글의 전반적인 전개를 봐서는 실재계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연구자께서 주장하는 신학적 주체는 라캉의 실재계와 상징계 가운데 어느 지 점과 더 크게 공명하는 개념인지 의견을 듣고 싶다.
3. 연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라캉의 실재계를 대체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듯 보인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의 본래적 의미의 주체에게서 탈구된 무엇이라는 점에서 실재계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주체에게 서 채울 수 없는 근본적 결여를 나타내는 개념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에 어쩌면 주체의 욕망을 조 건 지어 “욕망하는 주체”가 되게 만드는 신학적 결과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점을 간과할 수 는 없다. 연구자는 실재계와 생톰으로 대표되는 후기 라캉의 개념이 신학적 주체에 더욱 적합함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사상에서 대표적으로 “욕망하는 주체”를 생산하는 신학적 개념을 차용 한 까닭이 궁금하다.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라캉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이름, 법과 같은 강력한 상징계적 기제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는 결론에서 실재계에 대한 일정 한 거리를 두고, 다시 잃어버린 것, 결여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개념으로 회귀하는 듯한 까닭이 궁금하다.
4. 연구자는 라캉의 실재계가 어떤 형태이든 증상과 관련된 것이기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의 견해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라캉의 실재계의 가 장 중요한 특징은 ‘생산성’(productivity)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의 출현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화한다는 측면에서 실재계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새로움과 잇닿아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에서 기계 개념은 사실상 라캉 의 ‘부분 충동’이나 ‘대상 a’로부터 기인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나 개념을 더 확장시킨 것이고, 드 세르토 역시 『신비의 우화』에서 신비가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분열에 주목한 까닭 역시 바로 새로 운 이념(실재계)의 생산과 관련시켰기 때문이었다(물론 세르토의 분석에서 신비주의는 영적 체험 과는 별개의 새로운 인식론에 대한 것이었다). 연구자께서도 결론 부분에 “신앙을 통해 드러난 실 재계의 모습은 일반 사람들의 상징계에 사로잡힌 주체성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이와 유 사한 언급을 하고 있다. 또한 지젝 역시 실재계 중심으로 현행하는 상징계적 질서(자본주의 이데 올로기)와 냉소적 주체(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전복시킬 혁명성을 이론적으로 모색하기도 한다. 이 런 맥락에서 보면, 증상 혹은 생텀이 반드시 신경증적/병리적인 것만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생 산하는 역동적인 힘으로 읽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작금의 기독교 신학이 처한 위기와 신학적 주체 연구는 오히려 라캉의 실재계를 더욱 면밀하게 검토하고, 좀 더 긍정적/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좁은 안목에 대한 연구자의 고견을 구한다.
5. 연구자께서 주장하는 신학적 주체의 발견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점이 궁금하다.
그 답이 하나님의 계시적 실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종말론적 실존이라는 표현 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 듯한데, 이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과 논문의 집필 의도를 듣고 싶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는 신학적 주체가 지니는 실천적 혹은 문화적(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이 있을지 저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필자는 귀한 연구가 더욱 널리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황돈형 교수님의 연구는 신학의 체계 안에서 라캉을 비판적으로 흡수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라캉의 체계가 모두 담아낼 수 없는 보다 넓은 차원의 신학 체계를 통해 신학을 통해 라캉을 해석하는 방식이 후배 연구자로서 상당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와 같은 황돈형 교수님의 후속 연구가 한국 신학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신학적 주체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할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신학적 주체에 관한 간학문적, 통합 학문적, 다중학문적 연구는 지속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라캉과의 대화가 중심을 이 작업을 하셨다면, 앞으로 이어질 후속 연구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후 등장한 중요한 존재론들과 신학적 주체의 대화가 성사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예컨대 객체 지향 존재론, 신유물론, 배치의 존재론 등과 같은 현대적인 담론들과의 대화 속에서 신학적 주체가 얘기되어 진다면 뉴노멀 시대의 인간에 대하여 신학계에서도 중요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해본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현시점에서 시대적 필요를 반영하는 인간 이해에 관한 건설적인 신학적 대안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귀한 논문을 발표해주신 황돈형 교수님의 학문적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제17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2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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