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서론
2. 일본의 지정학적 위협인식과 대중국결전론
3. 일본 방위개념의 확립과 전략
3.1. 안보 이익선 개념의 확립
3.2. 안보 이익선 개념의 계승
4. 일본의 지정학적 도전
4.1. 이익선 방어와 힘에 의한 현상변경
4.2. 이익선의 주권선화
5. 결론
1. 서론
근대 일본에서 ‘지역’은 지속적인 경계와 영속적인 특질을 갖는 고정된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축적인 이미지 공간이었다.1)
지역에 대한 인식과 특정활동에 따른 이해관계가 지역 경계를 창안하고 그에 따른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본의 역사과정에서 아시아는 ‘동아’ 내지는 ‘동양’과 같은 용어로 존재했으며, 다양한 정치적 언설과 함께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새롭게 정의되었다.2)
1) 이와 관련해서는 손열(2007) “일본의 국제정치인식: 지역 공간 설정의 사례” 『일본연구논총』 26호, 현대일본학회, pp.39-70 참조.
2) 고야스 노부쿠니(2005) 동아·대동아·동아시아』 (이승연 역), 역사비평사, p.6.
특히 근대 일본의 지정학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안보적 고려에 따른 자기중심적 지역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근대 일본의 지정학적 도전의 주된 동인은 서세동점의 국제환경에 직면하여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안보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일본은아편전쟁과 페리함대(흑선) 등장과 같은 직·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약육강식의국제정세를 통찰하고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기초한 강력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또한 아시아 지역에 공동의 문화, 역사, 인종적 동질성 그리고 지정학적 숙명의 공유 등과 같은 통일성을 부여하고, 일본 중심의 아시아 통합을 구현하고자 아시아 연대에 기반을 둔 여러 가지 모형을 창안해냈다.
동아신질서, 동아협동체, 대동아공영권 등과 같은 구상은 예외 없이 물리적 공간에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공간적 일체성을 획득하려한, 이른바 ‘지정학적 운명공동체론’에입각한 전략적 시도였으며, 그 대전제는 일본의 생존권 확보였다.
과거 일본이 주도한 동아시아 50년 전쟁의 발발 배경에는 ‘지리적 근접성’에의한 제반 지정학적 요인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일본의 지정학적 전략이 근대 세계를 약육강식에 따른 제국주의 세계로 인식하면서, 부국강병을 위해 영토를 확장한 러시아 표트르 대제(Pyotr the Great) 방식을 모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3)
표트르 대제는 자국을 중심으로주변 가까운 곳부터 침략·지배를 넓혀가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지리적 근접성’에 기초한 ‘이익선(利益線)’ 확장의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지정학적 인식과 전략에 크게 기여한 것은 히틀러의 정치고문이기도했던 독일의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의 생존권 이론이다.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의 핵심은 독일의 팽창을 위한 생존 공간 확보에 있다.
그는 국경이 산맥이나 하천 등과 같은 지리적 특성에 의해 획정되는 것이 아닌민족의 생활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민족의 번영과 쇠퇴에 따라 국경 또한 변한다고 주장하며 생존 공간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토 확보를 독일민족의 미래 모델로 상정했다.4)
3) 와다 하루키(2013)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문정인·서승원 『일본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삼성경제연구소, p.33.
4) 佐藤一莊郎(1944) 『ハウスホ-ファ-太平洋地政学解説』 六興出版社, p.5.
독일의 1차 세계대전의 패전에 대한 피해의식과영토상실에 대한 원상회복 욕구에서 시작된 하우스호퍼의 이론은, 우수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여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우수한 민족의특권이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5) 또한 하우스호퍼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적하고, 대륙블록 구축 과정에서 일본이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
같은 맥락에서 대륙과의 관계를 전제로 조선을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나라로 판단하고 일본의 영향권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7)
이러한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라고 하는 우월의식에 바탕을 둔 일본 제국주의 팽창정책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특히 지역의 경계가 탄력적으로 변화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정책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독일 지정학은 1920년대 일본에 소개된 이후 1930년대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되어진다.8)
그러나 하우스호퍼식의 지정학적 사고가 국가정책에 반영된 것은 훨씬 이전부터였다.
대표적으로 189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총리의 주권선(主權線), 이익선 개념은 일본의 대륙 인식 및 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4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 또한 주권선 수호와 이익선 확대를 주장했다.
보다 이른 시기에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외무대신은 사방이 개방된 지리적 조건에서 볼 때, 일본의 국가적 생존과 발전을 위한 최상의 선택은 조선과 중국에 대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 대륙을 지배하는 것이며, 특히 조선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대륙진출의 첫 단계라고 주장했다.9)
5) 이진일(2015) “‘생존의 공간(Lebensraum)’과 ‘大東亞共榮圈’ 담론의 상호전이: 칼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적 일본관을 중심으로” 『독일연구』 29호, 한국독일사학회, pp.201-217.
6) 대륙블록은 영국과 미국 중심의 해양세력을 약화시키고 종국에는 대륙세력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구축하려는 대전략을 바탕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하우스호퍼는 독일에서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질러일본에 이르는 지정학적 구상에 기초한 대륙블록론을 주장했으며, 해양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초석으로 양국의 협력, 양국을 연결하는 러시아의 역할, 일본과 중국의 우호적인 관계, 인도와의 연대등을 제안했다(김경일(2022) “다자주의 시각에서 본 근대 일본의 지정학적 구상: 비평화성에 대한이론적 분석을 중심으로” 『일본어문학』 96집, 일본어문학회, pp.418-419.)
7) 앞의 논문, 이진일(2015) p.220. 8) 채수도(2013)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지정학적 사고: 일본지정학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48집, 동아시아일본학회, p.416. 9) 앞의 논문, 김경일(2022) pp.419-420.
소에지마의 주장은 메이지 초 제기되었던 정한론과 관련이 깊다.
본 논문은 근대 일본의 지정학적 국가 전략과 과제가 이익선 확보를 위한대륙진출, 그리고 이와 관련된 국경선 획정문제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구상했던 세계질서 속에서 일본이 지리와 공간에 대해 어떠한 시각과 입장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대외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했는지 고찰하는것이 목적이다.
구체적으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전후 시기 일본의 지정학적인식과 전략을 검토할 것이다.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 전략은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지정학적 도전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은 일본의지정학적 인식의 역사적 접근, 혹은 성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지정학의 원형내지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오늘날 일본의 지정학적 인식을 추동하는 기저 요인을 밝히는 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2. 일본의 지정학적 위협인식과 대중국결전론
메이지 신정부 수립 이후 일본은 해안요새 구축을 중심으로 한 수세 전략을취하고 있었다.
이는 영토방위를 목적으로 일본 영해에 특정 방어선을 설정한다음, 침공해 오는 적을 연안포대 등으로 격파하는 방식을 말한다.10)
그러나수세 전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세 전략으로 전환되었고 그 계기는 조선 문제였다.
운요호사건(1875.9), 조일수호조규(1876.2), 임오군란(1882.6)을 거치면서 청국은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대한 개입을 강화했고, 그로 인해 일본 내‘청국위협론’이 대두되었다.
이는 서구의 지정학적 방식을 자신들의 행위의 논거로 삼으며 조선을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일본의 대외전략과 충돌했기 때문이다.11)
일본은 1882년 7월 임오군란 발발 이전부터 청국의 대대적인 군비확충, 유럽식 징병제도 도입, 해안방어 강화, 각 요충지의 포대 구축 등을 경계하고 있었다.12)
10) 서승원(2018) 『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야마가타 아리토모-아베 신조』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pp.18-19.
11) 이와 관련해서는 김남은(2016) “근대 일본과 아시아주의: 탈아(脫亞)와 입아(入亞)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44집, 일본사학회, pp.101-128 참조.
12) 이승환(2020) “청일전쟁 시기 중국과 일본의 대 한반도 지정학적 인식 비교연구: 이홍장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일군사문화연구』 30집, 한일군사문화학회, pp.169-170.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청국의 행보에 주목하고, 일본의 지정학적 위험성을 지적하며 군비증강을 주장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도서 국가는 사면 모두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지형은 길고 구불구불한 긴 뱀과 같아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기쉽다. 설령 도쿄만(東京湾)과 오사카만(⼤阪湾)에 요새의 보대(堡臺)를 견고하게 하여 이를 매우 튼튼한 성지라고 속일 수 있을지라도, 시모노세키(⾺関), 쓰가루(津軽)를 점령당하게 된다면 갑자기 한쪽의 교통이 차단될 것이다. 그지방의 인민이 적에게 항복하지 않아도 교통이 한번 끊어지면 우리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중략) 이키(壱岐), 쓰시마(對⾺), 오키(隠岐), 사도(佐渡) 등은우리 방어의 제1선과 관련된 곳이다. 이곳이 만일 점령당한다면 이롭거나 이롭지 못한 것을 떠나 우리의 체면과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다.13)
야마가타는 제국일본의 육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두 차례의 내각총리대신과 세 차례의 추밀원 의장, 내무대신,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는 제1군사령관, 러일전쟁에서는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전쟁을 직접 주도했다.
이러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마가타는 일본의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중책을 담당하며 일본의 대외전략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임오군란을 계기로 야마가타는 육해군의 전력부족 시정이 급선무라고 지적하며 “유럽 각국은일본에서 멀어 그 이해관계가 급박하지 않으며, 가까운 청이야말로 더 큰 위협”이기 때문에 청의 군사력이 강해지기 전에 지금 개전해야 한다는 대중국결전론을 주장했다.14)
1883년 6월 대청의견서(對淸意見書) 에서는 청국을 가상적국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군비확장을 통한 대외전쟁 대비를 촉구했다.
또한청국의 육해군 군비와 군제개혁 상황을 분석하고 청의 군사력이 서구열강과비견될 정도로 증강된 점을 우려했다.15)
13) ⼤⼭梓 編(1966) “進隣邦兵備略表” 『⼭縣有朋意⾒書』 原書房、pp.98-99.
14) 하종문(2020)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 정한론으로 일본 극우파의 사상적·지리적 기반을 읽다』 메디치미디어, p.176.
15) 앞의 책, “對淸意見書” 大山梓 編(1966) pp.137-138.
1887년 2월에는 군부가 공식적으로 청과의 개전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오가와 마타지(小川又次) 참모본부 육군대령은 청국과의 개전을 5년 후로 상정하고, 전쟁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과 방향을 담은 「청국정토안(清国征討策案)」을 제출했다.
이 의견서는 청과 일본의 형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의 독립보호유지, 일본의 국위신장, 더 나아가 일본이 만국 사이에 우뚝 서서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국을 분할해 여러 개의 작은 이웃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중략)
북방의 몇 곳을 제외하고는 소규모 병력이 상륙해도 바로 파괴할 수 있다. 청국은 재정이 허약하고 군비도 허술하고 민심이 이반되어 있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중략)
청의 군인의 수는 많으나 전투력이 낮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중략)
바로 그 사지를 자르고 몸을 상하게하여 활동하지 못하게 해야만 일본이 안녕을 유지하고 아시아 대세를 유지할수 있게 된다.
(중략)
청이 근래에 육해군을 개량하고 있으니 군대개혁을 실현해 실력을 갖추기 전에 대청전쟁 준비를 완성해야 한다.
(중략)
승냥이와이리와 같이 잔혹하고 무자비한 세계에서 일본이 너그럽고 인자한 정책을 펼치는 것은 양책(良策)이 아니다.16)
16) 山本四郎(1964) “小川又次稿 『清国征討策案』(一八八七)について” 『日本史研究』 75号、 日本史研究会、pp.101-105.
또한 이 의견서는 “가장 이상적인 작전은 일본 해군이 청의 해군을 섬멸시키고 베이징을 점령해 청국의 황제를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열강의 대처에 대해서도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은 방관하지 않고 반드시 기회를 틈타 청의 일부를 탈취할 것이므로 “서구세력이 개입하기 전에 청의 중부의 주요 지역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삼아 일본에게 유리한 태세를 형성해야 한다”고주장했다.
의견서는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화조약체결 시 요구할 영토할양의 범위까지도 제시했다.
내용은 실제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당시 일본측이 요구했던 것과 일치한다.
다음해인 1888년 1월 야마가타가 제출한 군사의견서(軍事意見書) 는 동아시아 형세, 일본의 군비현황, 병력의 필요성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내용의 핵심은 청이 일본의 가장 큰 안보위협이며, 청국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을 최대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략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아 자주독립국으로만들고, 이를 통해 어느 강국이 기회를 틈타 조선을 침략할 우려를 배제하는것에 있다. (중략) 청국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자주와 자치를 외치고 다니면서, 뒤에서는 조선을 부용국(附庸國)과 같이 취급하여 매번 내정을 간섭한다. 이에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국의 정략은 번번이 충돌을 피할 수 없게되었다. (중략) 만약 청국이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군비를 정비하게 되는 날에어쩌면 그들은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대국의 위엄을 보이려고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7)
이는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인해 그동안 일본이 구축해온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가 사실상 좌절된 것과 관련이 있다.
갑신정변 사후처리로 체결된 톈진(天津)조약에서 청일 양국군의 철병이 결정되었고, 이로인해 일본은 조선 내 영향력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철병해야만 했다.
반면. 청국은 오히려 조선속방화정책을 강화했고 조선 내 친청 세력 득세 양상도 두드러졌다.
게다가 1885년 4월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전개된러시아와 영국의 대립국면이 극동 지역을 향한 군사적 조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본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사이의 각축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청국과 러시아에 대한 위협인식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의 이익을 저촉하여 분쟁과 갈등의 요소가 실로 많았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의 다툼은 피할 길이 없다. (중략) 후일 만약 양국이 인도를 경계를 두고 무력에 의한 충돌을 일으킨다면,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히 대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침략하고군사전략상의 요충지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18)
17) 앞의 책, “軍事意見書” 大山梓 編(1966) p.179.
18) 앞의 책, “軍事意見書” 大山梓 編(1966) p.177.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야마가타는 어느 강국이 극동의 패권을 차지하기위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일본의 방위정책 범주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개념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창안해낸 것이 바로 ‘이익선’ 개념이다.
3. 일본 방위개념의 확립과 전략
3.1. 안보 이익선 개념의 확립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고, 같은 해 12월 야마가타는 제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앞서 언급한 군사의견서 와 자신의 대외정책 의견서인 「외교정략론(外交政略論)」을 각료 전원에게 회람토록 했다.
대외정책에 대한 내각의 관점을 통일시키고자 한 것이다.
「외교정략론」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에 기초한 방위개념을 제시하고, 주권선 수호와 이익선 방어를 위해 군비확장이 불가피하다는 부국강병론을 주장했다.19)
주권선은 영토를 구분하는 국경선이며, 이익선은 주권선의안위와 긴밀한 지역을 의미한다.
야마가타는 일본의 외교 및 군비가 ‘주권선’과‘이익선’에 기초하여 존재하고 성립해야 하며, “지금 열강들 사이에서 국가의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단지 주권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적극적으로 이익선을 방호하여 항상 유리한 지형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파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이익선이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했으며, 일본의 대외전략이 이 지역에 대한 제3국의 영향력을 군사력으로 배제하는공세 전략으로 나아갈 것을 천명했다.
야마가타가 조선을 이익선으로 규정한 것은 러시아와 영국의 극동진출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조선의 전략적 가치가 제고되었기 때문이다.
야마가타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며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일본의 이익선을 위협하는 가장큰 위기가 될 것이며,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경쟁으로 머지않아 극동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20)
19) 芝原拓司·猪飼隆明·池田正博(1988) 対外観 (日本近代思想体系12)、岩波書店、pp.81-86.
20) 앞의 책, 芝原拓司·猪飼隆明·池田正博(1988) pp.81-86.
그 배경에는 1885년 러시아가 1891년 착공을 목표로 시베리아철도 부설계획을 발표한 것과 관련이 있다.
시베리아철도가완공될 경우 대규모 병력이동이 가능해져 러시아가 조선의 군사요충지를 차지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영국 또한 1885년 캐나다 횡단철도 개통으로 한 달 내에 병력을 극동에 수송할 수 있게 되어, ‘조선해’에서 러시아와 영국의 충돌이불가피한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의 국경선 수호를 위해 이익선을 방어해야한다는 주장은 국가 자위의 차원에서 제기되었지만, 일본은 이 방위개념에 기초해 1945년 8월 패전까지 대외팽창과 공간 확장을 반복하게 된다.
3.2. 안보 이익선 개념의 계승
주권선, 이익선 개념으로 구성되는 일본지정학을 창안한 사람은 야마가타지만, 이와 같은 논리는 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 내 제기되고 있었다.
1887년 1월 후쿠자와는 「조선은 일본의 울타리(朝鮮は日本の藩屏なり)」라는 사설에서 약육강식의 서세동점 속에서 “일본의 섬만을 방위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본의 방어선을 반드시 조선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쿠자와의‘울타리론’은 야마가타의 이익선 논리와 일치하며, 일본의 대륙정책은 후쿠자와의 ‘울타리론’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본의 섬을 방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중략) 멀리 일본의 섬 이외의 지역까지 방어선을 확장하고, 하루 속히일본의 섬 밖에서 적의 침입을 막을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긴요하다. 오늘날일본의 섬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가까운 방어선으로 정해야 할 지역이 반드시 조선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조선이 적의 지역에 편입된다면 일본의 불이익은 실로 예측하기 어렵다. 조선이 적지가 된 후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적지가 되기 전에 비해 몇 배의 힘이 필요하다. (중략) 하루 속히 일본을 방어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21)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연방국가, 이른바 ‘대동국(大東國)’의 수립을 제안한아시아주의자다.
다루이는 저서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서 일본이 조선의 방위를 부담하는 것은 일본의 국방을 위한 것이며, “조선의 방위는 곧 일본의 방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일합방의 실현은 일본에 대륙 국가들과의 통상의 이익, 그리고 러시아의 침략을 방어하는 지정학적 완충지대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루이의 이러한 주장은 ‘이익선’, ‘울타리론’과 일맥상통한다.
변경(邊境)의 방위를 부담하는 것은 조선을 위한 것만이 아닌 우리 국방을위해서이다.
만약 조선이 다른 나라에 침략을 당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비록합방하지 않아도 이를 방관할 수 없다.
조선의 방위는 곧 일본의 방위다.22) (중략) 한일합방이 성취되면 일본은 조선을 통해서 중국, 러시아 등의 대륙과편하게 통상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이 기대하는 첫 번째 이익이다. 한인(韓人)들은 일본인에 비해 몸이 강대하고 완력이 강하다. 그들을 일본식 군사제도로 훈련시키고, 우리의 병기를 쓰게 한다면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할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이익이다.23)
21) 福沢諭吉(1960) “朝鮮は日本の藩屏なり” 福沢諭吉全集11、岩波書店、pp.175-178.
22) 樽井藤吉(1963) 『大東合邦論』 (影山正治 訳) 大東塾出版部、pp.52-53.
23) 앞의 책, 樽井藤吉(1963) p.77.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륙·남진론’에 기초해 대외확장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있다.
쇼인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야마가타, 이토,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의 제자 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쇼인은 1854년 발간한 『유수록(幽囚錄)』에서 서구열강의 서세동점 앞에서 일본의 독립보전과 안위를 걱정하면서,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 영토만을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 지역을 개척 및 탈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홋카이도의 개척, 오키나와의 일본영토화, 조선의 일본귀속, 만주·대만·필리핀의 일본영유를 제시했다.
특히 조선을 발판으로 만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러시아, 미국과의 무역에서 입은 손해를 상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해가 뜨면 지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국가 또한 번영했다가쇠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없는 것을 차지하여 늘려야 있다. 지금 서둘러 군비를 정비하고 군함과 포대 갖추어 국력을 키운 뒤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해 제후를 봉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류큐도 일본영토로 흡수하며, 조선정벌로 영토를 되찾아 원래대로 속국으로 해야 한다.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일대 섬을 확보해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중국영토를 점령해 무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입은 손해는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보상받는 것이 상책이다.24)
24) 吉田松陰(1973) 『日本の名著(31): 吉田松陰』 中央公論社、pp.3-4.
쇼인이 설파한 이러한 논리는 제자였던 야마가타, 이토 등에 의해 계승·발전된다.
그리고 일본의 이익선이 조선, 만주, 홋카이도, 캄차카,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전체로 확대되고 일본이 영유하게 되는 구상이 1940년대 태평양전쟁에서 실현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쇼인의 ‘대륙·남진론’이 정한론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대동아공영권 이론으로 계승된 것이다.25)
4. 일본의 지정학적 도전
4.1. 이익선 방어와 힘에 의한 현상변경
일본의 국가적 위기와 이익을 위해 이익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론은 야마가타를 비롯한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다.26)
러시아가 반드시 만주를 침략하고 조선으로 향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때문이다.27)
그리고 러시아 남하에 대비해 일본이 이익선을 확보해야 한다는전략에 의해 시작된 조선 진출은 먼저 전통적으로 조선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중국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중화를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질서였고, 조공체제는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 간 대외정책의 기본방침이자 규범이었다.
그러나강력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서구의 제국주의적 세계대세론에 따라 국익을 추구해온 일본의 노정에 있어 중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28)
즉 청일전쟁은 일본의 중화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선포였다.
청일전쟁 발발 후 일본 육해군이 연전연승을 거듭하자, 일본 국내에서는 보다 강경한 대청결전론이 팽배해졌다.
민권파 정당인 개진당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1894년 12월 28일 『개진당보(改進黨報)』에 기고한 글에서 청국 4백여 주를 유린하여 청국의 굴복을 받아내고, 필요하다면 중국 대륙을 영구 점령하여 동화정책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진당의 중진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도 서세동점을 막기 위해 베이징을 점령하여 청국을 천황의 주권 하에 두고, 이를 통해 유럽 제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다.29)
25) 김영(2019) “근대 조선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울릉도론(竹島論)을 중심으로” 『일본어문학』85집, 일본어문학회, pp.359-361.
26) 고사카 시로(2007) 근대라는 아포리아 (야규 마코토·최재목·이광래 역) 이학사, p.106.
27) 야마다 아키라(2019)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p.25.
28) 이와 관련해서는 김남은(2022)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제국 일본: 조선 ‘속방자주’ 논쟁을 중심으로” 『한림일본학』 41권,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p.103-124 참조.
29) 박영준(2020) 『제국 일본의 전쟁: 1868-1945』 사회평론아카데미, pp.129-130.
후쿠자와는 이 전쟁을 “일본국의 존망과 흥폐를 가르는 전쟁”이라고 표현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우리 일본의 국위가 금세 동양에 날리고 멀리구미열강의 경의를 받고, 치외법권의 철거는 물론 모든 일에 동등한 문명강국으로서 오랫동안 동방의 맹주로서 존경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30)
한편, 청일전쟁에 제1군사령관으로 참전한 야마가타는 평양전투를 치루고1894년 11월 7일 천황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서 그는 청국의 영향력을 불식시키고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을 관통하는 철도 건설과 평양 이북의 중요한 지역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산-경성-의주를 거쳐 중국을 횡단해 인도에까지 이르는 철도부설을 일본이 동양에서패권을 떨치는 대도(大道)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이 보건대 가장 급무인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책입니다. 첫째, 부산에서 경성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입니다. 둘째, 평양 이북에서 의주에 이르는 중요한 지역에 일본인을 이식하는 것입니다. 약소한 조선을 도와 그 독립이 온전하기를 바란다면 청국의 군대를 조선 팔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야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금후 수년 간 일본 병력을 주둔시켜 그급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우리가 그 운수교통의 권리를 장악하여 동양 유사시 이를 이용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부산-의주 간 철도입니다. (중략) 부산-의주 간철도는 동아대륙에 이르는 대도(大道)이며, 후일 지나를 횡단하여 인도와 연결될 것이라는 점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동양에 패권을 떨치고 영구히 열국 사이에 위세를 떨치려고 한다면, 부산-의주 간 철도를인도에 이르게 하는 것을 대도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합니다.31)
30) 福沢諭吉(1960) “戦争となれば必勝の算あり” 福沢諭吉全集10、岩波書店、p.161.
31) 德富蘇峰(1969) 『公爵山縣有朋傳 』 下卷、原書房、pp.255-257.
야마가타는 청일전쟁 승전 직후인 1895년 4월 15일, 천황에게 이익선 확대와군비확장의 필요성을 다시 역설했다.
바야흐로 시베리아철도가 틀림없이 수년 안에 준공된다고 합니다. 이를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종래의 군비는 오로지 주권선 유지를 근본으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의 전승의 효과를 헛되게 하지 않고, 나아가 동양의 맹주가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이익선을 확대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현재의 병비를 가지고 금후의 주권선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군비를 확충해 이익선을 확대하면 일본은 반드시 동양의 맹주가 될 수 있습니다.32)
32) 앞의 책, 德富蘇峰(1969) pp.241-242.
야마가타가 「외교정략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 의견서에도 시베리아철도완공에 대한 위기의식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 대안으로 조선-중국-인도에까지이어지는 철도망 확장을 제안한 것이다.
청일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 일본의승전이 예견되는 가운데 야마가타는 조선 전역의 철도부설, 일본인의 이주 등사실상 식민지화를 겨냥한 대조선정책을 주장하는 동시에, 중국 본토로의 이익선 확대를 일본의 대방침으로 삼았다. 또한 이를 위한 군비예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일본은 반드시 동양의 맹주”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야마카타의 의견에 따라 1895년 12월 개최된 의회에서 전후 10년에근거한 예산이 통과되었다.
10년 후인 1905년 시베리아철도 완공을 염두에 두고, 그때까지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정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은 청일전쟁 개전 전 1893년도 총 예산의 9배에 달하는 예산을 각의 결정했다.
야마가타가 설파한 이익선의 방어가 곧 이익선의 확대를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4.2. 이익선의 주권선화
청일 양국은 188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条約) 체결을 통해 국제법상 청일전쟁을 종결했다.
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자주독립에 손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 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고 명기했다.33)
33) 外務省 編(1985)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 上巻、 永集文化社、p.165.
이로써 일본은 이익선 방어의 첫 관문인 전통적인 조청관계를 해체하는 데 성공하고, 대륙진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예기치 않는 외교적 변수에 봉착하게 된다.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이 시작되어 일본의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영유에 반대하며 그 반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익선을 방어하는 동시에 확대해간다는 전략이 삼국간섭으로 좌절된 것이다.
한편, 1898년 러시아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어낸 영광의 표상과도 같았던 뤼순(旅順), 다롄(大連)의 랴오둥반도를 조차했으며, 1896년 시베리아철도를 만주로 잇는 철도부설권도 획득하여 중국 본토까지의 수송능력도 증대시켰다.
더욱이 러시아는 1900년 의화단사건을 자신의 권익을 극대화하는데이용했다.
즉 당시 러시아는 의화단 세력을 단호히 응징하려는 열강과 보조를맞추기보다는, 만주철도 부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에 17만 명의 대군을투입했다.
사실상 만주를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면서,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단순한 안보 위기의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 내 러시아의 세력확대에 대한 갈등도 고조되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개전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야마가타 내각은 “조선을 우리의 세력구역에 흡수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와 개전할 결심 없이는 안 된다. 오로지 이 결심만 있다면 능히 북방경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방침을 결정했다.34)
1901년 4월 야마가타가 이토에게 보낸 의견서에는 러시아와 조만간 일대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대세이며, 러시아가 일본의 이익선을 침범한다면 일본 또한 결의하여 맞설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35)
내각은 전쟁에 대비해 조선 내 경인철도 부설 예산과 미국인 소유의 경인철도 부설권 매입을 위한 80 만 엔 추가지출에 대한 제국의회 승인을 얻어냈다.36)
34) 橫手愼二(2005) 『日露戰爭史』 中公新書、pp.25-26.
35) 다나카 아키라(2002) 소일본주의: 일본의 근대를 다시 읽는다 (강진아 역) 소화, pp.103-104.
36) 박영준(2008)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외정책론, 1895-1904: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전략론과 대항 담론들” 『일본연구논총』 27호, 현대일본학회, p.272.
또한 1901년 1월 30일 영국과의 동맹 체결로 세계최강 해양국가라는 안전판도 확보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 6월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육군 참모총장이 제출한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朝鮮問題解決に関する意見書)」는 당시 일본측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오야마는 청일전쟁에는 육군 제2군사령관으로, 러일전쟁에는 만주군총사령관으로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우리 일본이 조선반도를 우리 독립의 보장지(保障地)로 삼은 것은 개국 이래의 국시이며, 현재 및 장래에도 변동이 없을 것이다. (중략) 이미 메이지유신 초기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마침내 청국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었을 때에는 수만의 전사자를 내고 수천만의 예산을 투입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켜 우리의 보장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 청국의 약점이 세계에 폭로되자 갑자기 러시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 요동반도를 점령하고 동청철도를 장악하여 만주의 실권을 쥐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속도로 팽창했다. 만약 제국이 이것을 방관하고 그대로 두면 조선반도를 그들의 점유로 하는 데에는 3, 4년도 걸리지 않을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유일한 보장지를 잃게 되어 서해의 문호가파괴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조선 문제를 즉시 해결해야 한다.37)
오야마는 이익선 대신 ‘보장지’라는 용어로 조선을 지칭하면서 “조선을 일본독립의 보장지인 것은 개국 이래 국시”라는 지정학적 인식에 기초해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시베리아철도 완공에 대한 위기의식을 드러내며 지금 즉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러시아와의 국교단절과 개전을 각의 결정하고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군함을 기습 공격하는 것으로 개전을 단행했다.
전쟁 와중에 공수동맹을 전제로 일본이 전략상 필요한 조선의 영토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으며(1904.2.23.), 조선의 재정권 및 외교권에 개입할 수 있는 한일협약(1904.8.22)도 체결했다.
또한 종전을 앞두고 한국의 지배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7.)과 제2차 영일동맹(1905.9.5)도 체결했다.
그 결과,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 제2조는 “러시아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우월권을 가지고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않는다”고 명시했다.
또한 러시아 보유의 랴오둥반도 조차권 및 기타 이권의양도(제3조, 제5조), 남만주철도 및 관련 이권의 양도,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지역의 양여 등도 규정했다.38)
37) 후지와라 아키라(2013) 『일본군사사(상): 전전편』 (서영식 역) 제이앤씨, pp.151-159.
38) 外務省 編(1985)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 上巻、永集文化社、pp.245-249.
이는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와 남만주로의세력 확장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은 일본이 이익선 방어를 위해 일으킨 두 번의 전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참된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아시아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동양의 국민은 하나이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막아내지 않으면 그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 (중략) 몇 곳의 적대국이 반도를 점령하는 순간 일본에도군대를 쉽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은 언제나 뾰족한 은장도처럼 일본의 가슴을 향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사정으로 우리는 부득이하게 우리 고대의 영토였던 조선을 합법적으로 우리 방어선 내에포함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지나와 개전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1894년 반도의 독립이 지나에 의해 위협받았던 때였다. 우리가 1904 년 러시아와 싸웠던 것도 이와 같이 독립을 위해서였다.39)
39) 가쓰라지마 노부히로(2009) 동아시아 자타인식의 사상사: 일본 내셔널리즘 생성과 동아시아 논형, p.128.
대동아공영권 시대에 유명했던 ‘아시아는 하나’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아시아일체론’을 강조한 오카쿠라는 애초에 한반도가 일본의 ‘방어선 내’, 즉 ‘주권선’ 이라는 논리에 입각하고 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이익선은 주권선으로의 변환을 완료했으며, 동시에 이익선은 만주로 확대되어간다.
5. 결론
1890년 12월 6일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열린 제국의회 시정방침연설에서 야마가타가 주권선·이익선론을 국책으로 결정한 이래, 일본은 청일전쟁 후 50년간모든 대외전쟁에서 이 방위개념을 세력 확장의 중심논거로 삼았다.
이는 세력확대나 패권 추구를 꾀하는 대륙계 지정학적 발상이었고, 20세기 초에는 서구열강보다 더한 제국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특히,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대륙계 지정학의 논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러시아 및 청국의 잠재적인 위협과 압박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적극적 방어를 표방한 선제 타격이였다.
한국 병합을 통해 대륙진출의 발판과 동시에 러시아 및 청국 사이의 완충지대를 확보함으로써 나름대로 자의적인 안정화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의 주권선이 한반도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의 이익선이 만주로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만주는 이익선에 머무르지 않고 주권선과 유사한 개념인 ‘생명선’으로 격상되었다.
이러한 방위개념은 칼 하우스호퍼의 지정학 개념과 매우 근접해있다.
특히 영향 권역의 동심원적 확대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오늘날 미중대결이 첨예화하는 가운데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말이 회자되고있다.
중국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전개된 ‘일대일로’ 구상은 근본적으로 거대한 지정학적 전략이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추진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및 ‘재균형 전략’, ‘인도태평양 전략’ 또한 지리적 관점에서 입안된 치밀한 지정학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역시 그동안 쇠퇴의 길을 걸었던 지정학적 사고를 소환해 일본 자체 방위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일동맹강화를 통한 대중국 억지전략을 구사하며 적극적으로 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있다.
여기에는 일본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당위성이 작동하고 있다.
일본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을 하나로 엮어내며 ‘자유와번영의 호’, ‘아시아 민주주의 안보다이아몬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와같은 새로운 지리적 개념을 도입했으며, 이 지역에 일본이 리더십을 발휘하는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보편적 가치를 지역에 접목하여 새로운 지역의 경계와 질서를 구축하려는 고도의 지정학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일본은 북한, 중국 등 주변국의 미사일 기지를 직접 타격하는 적기지 ‘반격 능력’ 보유 및 방위비 2배 이상 중액을 채택했다.
이러한 일본의 행보에는 국가적 생존과 발전을 위해 군비확장과 더불어 자국의 안보적 고려에따라 지역에 대한 경계를 창안하고 자기중심적 지역을 추구했던 근대 일본의지정학적 사고가 엿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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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文抄錄>
近代日本の地政学的認識と戦略 -安保利益線概念を中心に金男恩近代日本の地政学的思考の最大の特徴は、安保的考慮に基づく自己中心的な地域を追求したことで ある。かつて日本が主導した東アジア50年戦争の勃発背景には、「地理的近接性」による諸地政学的要因が何よりも大きく作用していた。日本の国境線を守るために利益線を防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主張は、国家の自衛のための次元で提起された。日本はこの防衛概念に基づき、1945年8月の敗戦まで 対外膨張と空間拡大を繰り返すことになる。本研究は、近代日本の国家戦略と課題が利益線確保のた めの大陸進出と関連した問題であったことに注目した。そして本研究は、西欧帝国主義勢力が構想した 世界秩序の中で、日本が地理と空間に対していかなる視角と立場を確立し、自らの対外的行動に動機を 与えたかについて考察した。
キーワード:近代日本,地政学, 山形有朋,主権線 ,利益線
<Abstract>
Geopolitical Perceptions and Strategies of Modern Japan -The Concept of Security Interest LinesKim, Nan-Eun A major feature of modern Japanese geopolitical thinking is the pursuit of a self-centered region founded on national security. The outbreak of the Japanese-led Fifty-Year War (1895–1945) in East Asia was largely due to geopolitical factors—geographical proximity in particular. Japanese statesman, military commander, and former prime minister Yamagata Aritomo’s concepts of sovereignty lines and profit lines had a profound influence on Japan's continental perception and strategy. The argument for defending Japan's sovereignty line was made in terms of national self-defense; in reality, it was a continental geopolitical idea that sought power expansion and hegemony. Japan’s forced annexation of Korea after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1905 is a prime example of the logic of continental geopolitics. Based on this defense concept, Japan expanded outwardly and spatially until its defeat in August 1945 during World War II. This study notes that modern Japan’s national strategy and objectives were intended to advance on the continent and secure its lines of interests. Accordingly, how Japan’s views and positions on geography and space in the world order envisioned by Western imperialist powers motivated its external behavior is analyzed.
Keyword : modern Japan, geopolitics, Aritomo Yamagata, sovereignty line, interest line
논문 투고 일자 : 2023. 07. 09. 논문 심사 일자 : 2023. 07. 28. 게재 확정 일자 : 2023. 08. 09.
日本文化學報 第98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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