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집권 자민당 신임 총재가 102대 총리로 공식 선출됐다.
이시바 총리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이래의 ‘정체성 정치’ 내지는 ‘탈전후체제론’과 차별화된 정책 방향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시바 내각 출범은 본격적인 ‘포스트 아베 시기’의 개막이라는 일본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의미한다.
1. 자민당 총재 선거
지난 9월 27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9명이 입후보하여 경합을 벌인 결과, 결선 투표에서 이시바 전 간사장이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상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시바는 2012년 처음으로 총재선에 출마한 이후 높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면서도 자민당 내에서는 비주류였다. 현역 의원의 표가 당락을 좌우하는 현 총재선거 방식은 이시바에게 불리한 제도였지만, 최근 전반적인 정치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게 변화하였다. 종교단체와의 유착 문제와 정치자금 스캔들로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자민당 내에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참신한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정치자금법 관련 파벌의 힘이 약화된 것도 무파벌의 이시바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총재선 과정에서 당초 유력한 후보였던 40대의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은 경험 부족을 노출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계승자를 자처한 보수 우파적 성향의 다카이치는 강경 일변도의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 아베 노선을 비판하고 기시다 내각의 경제와 외교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어필한 이시바는 참신성과 안정성을 겸비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결선투표에서 이시바는 스가 전 총리 계열과 기시다 계열의 표를 흡수함으로써 1차 선거에서 불리했던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2. 이념 및 정책
2000년대 들어 일본 정치는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후쿠다 야스오를 배출한 ‘세이와카이’ 계열의 매파적 보수세력이 중심이 되어 자민당 장기집권을 이어왔다.
특히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 이후에는 이른바 외교안보 면에서 ‘탈전후체제론’과 경제정책에서 ‘아베노믹스’를 양대 축으로 하는 아베 노선이 정착되었다.
2020년대 들어 스가 내각과 기시다 내각은 외교안보 면에서 아베 노선을 계승하면서 경제정책에서 점진적인 전환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아베 노선’과의 본격적인 결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 총재 선거를 계기로 ‘탈아베’의 새로운 정치 지형이 가시화되었다. 자민당 정치를 지배해 온 기시다-아소-모테기 3자 연대가 쇠퇴하고, 이시바-기시다-스가(고이즈미) 연대가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내각 이후 약 2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매파적 보수의 시대가 저물고, ‘리버럴의 전성기’로 불리는 1990년대의 중도보수(이른바 보수본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이시바는 아베 전 총리의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고, ‘탈 아베’를 선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적 보수주의와 차별화된다.
이시바가 제시한 ‘지속가능하며 독립된 국가’ 비전은, 국익 극대화를 위해 ‘주권국가’ 내지는 ‘보통국가’를 추구하면서도, 애국심을 강조하거나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아닌 지정학적 현실주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보수 내지는 온건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이시바는 최근 발간한 저서에서 보수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급격한 혁신에 제동을 걸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수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와 자세”를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일방통행적이고 강압적이었던 아베식 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로 일관해온 이시바의 총재 당선이 본격적인 ‘포스트 아베 시기’의 개막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이시바 내각의 경제정책은 기시다 내각의 ‘새로운 자본주의’를 계승하여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아베노믹스(금융완화)에서 전환을 통한 재정재건화를 추구할 것인바, 증세, 금리 인상, 임금 상승과 관련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시바가 경제적으로 취약한 돗토리현 출신으로 농수산대신과 지방창생대신을 역임하였다는 점에서 이시바 내각은 지방경제활성화 정책에도 관심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는 방위청 장관과 방위성 대신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문제에 정통하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해양 진출, 북한의 핵과 탄도탄 능력 고도화 등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및 유지국과의 협력을 중시한다. 이시바 내각은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을 위한 미국과 유지국과의 연대 강화, 방위비 증액을 중심으로 하는 기시다 노선을 계승하고, 타이완 해협과 경제안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시바는 일본이 ‘주권 국가’가 되기 위해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명기한 헌법개정, 비대칭적인 미 일안보조약과 주일미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는 ‘미일 핵공유’에 대해 적극적이며, 일본과 아시아 우방국의 안전을 위해 아시아판 나토(NATO)의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시바의 이러한 안보관은 원론적인 장기 전략 차원의 레토릭으로서의 성격이 강한바, 일본의 헌법이나 법률 등 제도 상의 제약, 미중 중심의 진영화에 신중한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 미국의 대외전략 등을 감안할 때,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총리에 취임한 이후에는 현실을 반영하여 유연한 대응으로 선회하고, 미일관계나 대외관계에 당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3. 정국 전망
이시바 내각의 정권 안정성은 10월 말에 치러질 중의원 선거와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신 내각 출범이라는 컨벤션 효과와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 유지, 경제정책에 대한 재계의 지지, 야권의 분열 등을 감안한다면,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중장기적으로 이시바가 안정적인 정국 운영에 성공할지는 불투명하다. 이시바 총리는 당내 지지기반을 안정화하면서 돈과 정치 관계를 단절하는 정치개혁의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당정 인사에서 공평한 발탁, 종교단체 및 정치자금 관련 의혹이 제기된 의원들의 처우, 아베파와 아소파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의 포용 등의 난제가 남아 있다.
물가상승을 상회하는 임금상승을 실현하여 경제활성화에 성공할 수 있는지는 이시바 내각의 장기 안정화 여부를 좌우하는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대선을 40여일 앞두고 유럽과 중동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한반도 주변에서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도발적 행보가 두드러지는 상황 역시 이시바 내각이 당면한 도전요인이다.
총선거 이후 이시바 내각이 본격 출범하는 11월에 확정되는 미국 대선 결과는 미일관계에 큰 변수이다.
해리스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한미일 안보협력 등의 바이든 정부의 동맹 중시 정책이 유지되겠지만,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미국우선주의’의 부활과 동맹국의 부담 증가가 예상되는바, 이에 대한 대응이 일본 외교의 최우선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4. 한일 관계
이시바 내각은 한일관계에서 역사 갈등을 억제하고 협력을 확대해 온 기시다 노선을 확대 계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시바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이시바는 이전부터 한일협력을 중시하고,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보여왔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한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라고 발언하는 등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관련한 사과에 전향적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9년 7월 아베 신조 내각이 취한 대한국 경제 제재에 대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지난 수 년간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내각은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바이든 정부와 함께 한미일 삼각협력 체제를 강화해 왔다.
한일협력의 중요성을 숙지하고 있는 이시바는 삼국 협력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일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지만, 과거사 문제 관련 국민적 기대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2025년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이시바 내각에 대해 과거사 문제 관련 ‘통 큰 결단’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시바의 리더십과 정권 안정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거사 관련 전향적인 조치는 보수 우파의 반발을 불러 결과적으로 한일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1990년대에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로 상징되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 관련 일련의 사죄와 반성이 보수세력의 반발을 불러 21세기 들어 매파적 보수정권의 장기집권을 초래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이고 전략적 관점에서 역사직시와 미래협력의 균형적 조화를 염두에 두고 한일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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