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본 연구는 공관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을 고대 전기로 보는 최근 학계의 두드러진 동향을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그 논지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논의에 또렷한 초점 을 부여하고 시의적절함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 대상을 본드의 The First Biography of Jesus: Genre and Meaning in Mark’s Gospel에 국한한다.
본드의 장르 이해와 논리 전개에 미진한 점이 적지 않다는 관찰로 시작해서, 본론의 첫 번째 장은 현대의 장르 이론의 빛 아래에서 본드의 주장을 하나씩 따져 보고, 서양 고전학계의 고대 전기 연구 현황을 근거로 본드의 논지를 이루는 바탕—마가복음은 고대 전기에 속한다—이 견실 하지 않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본론의 두 번째 장은 현대 종교학에서 정교하게 논의된 비교 방법론, 특히 스미스(Jonathan Z. Smith)의 이론을 적용하여 본드의 논점과 논거, 그리고 논증의 타당성을 비교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런 다음 마가복음 해석에 관한 본드의 주요 논지를 이루는 지지 논증의 문제점을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마가복음의 장르 규정 문제를 그리스-로마 시대 문학의 장르 혼합, 특히 역사서, 묵시문학, 전기, 소설, 비극적 요소의 혼합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제안한다.
주제어 마가복음, 전기, 비오스, 장르, 헬렌 본드
I. 서론
마가복음을 최초의 예수 전기로 보고, 그러한 장르 이해가 마가복음 해석에 새롭게 열어주는 지평을 유려한 문체로 기술한 본드의 출중한 연구서 The First Biography of Jesus: Genre and Meaning in Mark’s Gospel이 최근 출간되었다.
본드는 자신의 책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로마 시대 전기 문학과 관련한 손꼽히는 명저인 헤이키(Tomas Hägg)의 The Art of Biography in Antiquity에서 한 문단을 길게 인용한다.
인용문 중 일부를 여기에 다시 옮긴다.
“주요 그리스-로마 전통 한편에 있는 정경 복음서와 외경 복음서는 예수를 선생만큼이나 살아 있는 본보기로 만들어 예수의 온전한 전기에 다다르려 노력한다.”1)
1) Tomas Hägg, The Art of Biography in Antiqu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397. Helen K. Bond, The First Biography of Jesus: Genre and Meaning in Mark’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2020), vi에서 인용. 본 논문에서 본드의 저서를 인용하거나 지시할 때는 번역서인 Helen K. Bond, 예수의 첫 번째 전기: 마가복음의 장르와 의미, 이형일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3)의 쪽수를 기준으 로 하되, 잦은 인용 탓에 괄호 안에 쪽수를 써넣는 형식으로 기재한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번역을 조금 다듬기도 했다.
본 소고의 목적은 본드의 주장에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데 있고, 그러한 문제점들에는 본드가 헤이키의 책을 자기주장의 주요 지지자로 종종 잘못 인용하고 기대는 모습도 포함되기에, 나는 본드와 마찬가지로 헤이키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나는 (고대의) 전기를 뚜렷한 정체성이나 그 자체로 발전하는 힘을 지닌 문학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기의 생동력과 화제/주제에 집중하는 측면(topicality)은 그와 유사한 문학 형식에 기생적 의존하며, 동시대의 문화적 유행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2)
2) Hägg, Art of Biography, 380.
본드는 헤이키가 마치 정경 복음서를 전적으로 고대 전기 작품으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인용문으로 그의 책을 열지만, 사실 헤이키는 고대 전기라는 장르를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작업 자체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실제로 헤이키는 The Art of Biography에서 고대 전기 문학을 다른 문헌과 구별 짓는 특징들을 손꼽기 어렵다는 점을 반복하여 지적한다.
본드는 헤이키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이 주장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아서, 그 박식함과 신선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미진함을 보인다.
나는 정경 복음서를 고대 전기 장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도 중에서 본드의 책이 가장 돋보인다고 생각하지만, 본드의 논증은 논리적 문제를 많이 안고 있고, 현대의 문학 장르 논의에 뒤처져 있으며,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 및 본문 이해에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고 평가한다.
본드의 결함을 지적하는 본 소고의 작업이 옳다면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종의 따름 정리(corollary)가 나온다.
즉, 마가복음을 고대 전기로 이해하는 것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관복음서를 전기 문학으로 이해하는 흐름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고민하며 본 연구는 공관복음서의 문학적 범주와 성격을 다양한 고대 문학의 혼합물로 보는 것이 덜 무리한 해석을 산출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본고의 개요를 조금 더 자세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고는 본드가 의존하는 복음서 장르 이해-구체적으로 본드는 버리지(R. A. Burridge)의 연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가 현대의 문학 장르 이론 논의 현황(장르를 분류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보는 관점)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인다.
둘째, 종교학계에서 정치하게 논의되고 다듬어진 비교 방법론의 관점에서 볼 때 본드의 논지의 뼈대를 이루는 비교 작업이 유사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었다는 점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본드가 전기적 요소만을 강조하느라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본문 주해에도 미흡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구체적 예를 들어 지적할 것이다.
결론부에서는 다양한 문학적 장르의 혼합이 고대에 흔한 현상이었음을 보여주면서, 마가복음이 지닌 비극적 요소와 역사 서술적 요소, 그리고 묵시적 요소를 고스란히 존중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을 다양한 문학적 장르의 혼합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제언할 것이다.
II. 본론
1. 최근의 문학 장르 이해에서 바라본 본드의 논증의 문제점
가. 서양 고전학계의 전기 이해와 본드의 문제적 주장
1992년 버리지의 중요한 연구서 What Are the Gospels?: A Comparison with Graeco-Roman Biography가 출간된 이후 신약학계에서 고대 전기 (βίος, vita)를 향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3)
3) R. A. Burridge, What Are the Gospels?: A Comparison with Graeco-Roman Biography, SNTSMS 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쪽수는 2판의 것을 따 른다. What Are the Gospels?: A Comparison with Graeco-Roman Biography,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04). 고대 전기에 주목하는 신약학자 일부는 변증적 의도(가령 복음서의 역사성)를 드러낸다. 주목할 만한 최근 연구로는 Craig Keener, Christobiography: Memories,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 (Grand Rapids: Eerdmans, 2019)가 있다.
하지만 고대 전기 연구는 최근까지도 서양 고전학에서 가장 관심을 받지 못한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4)
4) Koen De Temmerman, “Writing (About) Ancient Lives: Scholarship, Definitions and Concepts,” The Oxford Handbook of Ancient Biography, ed. by Koen De Temmerma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4.
거의 오십 년에서 백 년 전에 출간된 백과사전적 연구 몇 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즉, 2000년 이후) 견실한 연구물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서양 고전학자가 인정하듯, 고대 전기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가장 큰 이유는 “고대의 전기는 기존의 형식적인 장르 범주로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5)
5) De Temmerman, “Writing (About) Ancient Lives,” 4.
서양 고전학계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작가들의 글에서 전기에 관한 구체적, 양식적 정의나 작성 지침 같은 것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으로 전기로 간주된 작품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두드러진 공통적 특징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널리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정경 복음서나 외경 복음서를 βίοι로 읽으려는 신약학계의 흐름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고대 전기라는 장르 자체를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며, 설사 작업가설로 고대 전기라는 장르를 정의하고 논할 때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본드는 몇몇 학술 사전과 안내서(companion)의 사례를 들어 자신의(그리고 버리지의) 고대 전기에 관한 장르적 이해와 정의가 마치 학계의 합의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본드는 스웨덴 학자 헤이키가 고대 전기를 다룬 권위 있는 책에서 복음서에 대한 항목을 별도로 담았다는 점을 들고, 헤이키의 문장을 종종 인용하며 그가 자신의 고대 전기 이해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하지만 본드가 헤이키의 책에서 문장을 따온 부분 바로 다음에 헤이키는 아래와 같이 신중한 생각을 내비친다.
복음서가 비-그리스 문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배 경이 어떤 면에서는 초기 그리스 전기(the early Greek Lives)와 공유하는 요소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 학 자가 주장하듯이, 족장들과 예언자들에 대한 구약성서의 전기적 기록이 가장 단일하고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을 수 있다.6)
앞서 언급했듯이 본드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전기라는 독자적 장르가 존재했다고 말하며, 그 근거로 버리지의 연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약학계의 현황을 든다.
하지만 버리지의 연구는 방법론에 논리적 문제가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본 소고의 본론 전반에 걸쳐 이를 논하겠지만, 먼저 다른 학자가 버리지에 대해 내린 부정적 평가를 인용하겠다.
이러한 식별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미리 선택된 텍스트 표본에 기 반하기 때문에 순환 추론에 특히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버리지는 5개 의 텍스트(이소크라테스의 에바고라스, 크세노폰의 아게실라우스, 사 티루스의 에우리피데스, 네포스의 아티쿠스, 필론의 모세)를 전기 로 규정하면서, 크세노폰의 메모라빌리아는 너무 길며 철학적 대화가 들어 있고 연대기적 요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그러나 에드워 즈(M. J. Edwards)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7) 이러한 사고방식은 장르가 [작품에 대한 장르적] 기대(expectations)를 정의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장르에 [장르적] 기대치를 [인위적으로] 부과하고 있다.
만약 메모라빌리아가 처음부터 표본에 포함되었다면, 버리지의 이러한 추론은 불가능했 을 것이다.8)
6) Hägg, Art of Biography, 155.
7) M. J. Edwards, “Epilogue: Biography and the Biographic,” Portraits: Biographical Representation in the Greek and Latin Literature of the Roman Empire, ed. by M. J. Edwards and S. Swai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230.
또한 전기를 특징짓는 외적, 내적 특징(예를 들어 버리지는 작품의 길이, 동사의 주어의 빈도 등에 주목한다)을 찾으려는 시도와는 반대로, 헤이키는 “전기에는 형식(form)보다는 주제 내용(subject matter)이 더 중요하며, ‘장르’는 학자들의 손아귀를 쉽게 빠져나간다”라고 말한다.9)
고대의 전기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작업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점을 명시하기 위해 헤이키를 위시한 서양 고전학자들의 시각을 열거하겠다.
우선 그리스-로마 시대의 저술가들은 전기 작품에 관한 일반론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10)
또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Parallel Lives)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도 그 속에 들어있는 ‘생애’들 사이에는 문학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의 생애를 기술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은 많은 사색을 담은 긴 서문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의 생애를 그린 그의 작품과 차이가 있다.
비교-대조(synkrisis) 작업 역시 작품마다 일관성이 없다.
헤이키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문학적 성격이 일정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 동시에 ‘일관된 관심사’를 드러낸다는 면을 주목한 뒤, “성향만 있을 뿐 (문학적 양식의) 규범은 없다”(there are habits, but no rules)라는 경구적 표현으로 자신의 관찰을 요약한다.11)
그는 고대 전기에는 식별할 수 있는 문학적 규칙과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정경 복음서를 전기라고 주장한 버리지(What Are the Gospels?)와 프릭켄슈미트(Dirk Frickenschmidt)의 연구(Evangelium als Biographie)12) 가 “부주의한 전제”(the unguarded assumption)에 기반해 있다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13)
8) De Temmerman, “Writing (About) Ancient Lives,” 8.
9) Hägg, Art of Biography, 3.
10) Hägg, Art of Biography, 152.
11) Hägg, Art of Biography, 281.
12) Dirk Frickenschmidt, Evangelium als Biographie: Die vier Evangelien im Rahmen antiker Erzählkunst (Tübingen: Francke, 1997).
13) Hägg, Art of Biography, 154.
그러므로 복음서 연구자는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양산된 역사 서술 및 ‘전기’에 대한 권위자 중 한 명인 펠링(Christopher Pelling)의 제언을 경청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진 특징을 지닌 단일한 ‘전기 장르’를 상정하기보다는 다양한 형식, 스타일, 길이, (역사적) 진실성을 지닌 작품들을 포용하면서 여러 문학 전통이 중첩된 복잡한 그림을 생각해야 한다.”14)
14) C. Pelling, “Biography, Greek,”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4th ed., ed. by Simon Hornblower et 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232. 마가복음 연구자 중에서 비교 작업의 본질과 마가복음의 문학적 형태를 깊이 연구하고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낸 학자로는 Cilliers Breytenbach,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The Yardstick for Comparing the Gospels with Ancient Text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as Episodic Narrative, Novum Testamentum Supplements 182 (Leiden: Brill, 2021), 179-200.
마가복음을 고대 전기라는 장르로 보고 거기에서 해석을 시작하는 작업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떠안고 불안하게 출발하는 것과 같다.
물론 본드 역시 장르 규정, 특히 전기라는 장르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장르는 매우 창의적인 활동의 일부로서 유동적이고 유연하며 불안정하 고 개방적이다. … 전기는 진지하고 교육적인 것부터 억지스럽고 상상력 이 풍부한 것까지 그 범위가 매우 다양했다. 대부분은 찬사(encomium)와 역사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지만, 비극, 소설, 시, 편지 등 다른 장르의 특징을 아주 쉽게 통합하는 예도 많았다”(34).
그러고는 이렇게 약속한다.
여기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이 내러티브를 미리 정해진 전기의 틀에 꿰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기라는 장르가 지나치게 가변적이어서 그러한 시도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는 이 이야기가 전기라는 장르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broad expectations of the genre)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에 더 관 심이 많다. 전기로서 접근한 독자들은 어떤 점이 평범하고, 어떤 점이 이 상하게 느껴졌을까? 그리고 일반적인 기대에서 벗어난 마가의 몇 가지 일탈 행동(deviations)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224)
여기에서 본드는 마가복음이 전기라는 장르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 와 어긋나는 지점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차이점보다는 유사성에 압도적 관심을 기울인다.
마가의 몇몇 ‘일탈 행동’을 전기(로 간주되는) 작품의 실례를 들어 사실상 일탈 행동이 아님을 강변한다든지(예를 들어 예수의 출생과 유년기 보도의 부재), 아니면 마가복음 저자가 의도적으로 ‘전기 장르’를 의식하고 그 관습적 관행을 전복하려 했다는 식의 설명을 하면서 여전히 ‘전기’라는 ‘자장’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든다.
또한 본드가 전기라는 장르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general expectations)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문제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본드는 전기라는 장르를 특정하는 최소한의 공통 요소(문학적 특징과 규칙)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논의를 전개한다.15)
15) “그럼에도 여전히 고대의 전기는 …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전통적이 고 고도의 조직화한 제약 내에서 작동했다”(34).
예를 들어 본드는 자신의 저서의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제시하며 마가복음을 전기로 확신 있게 간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가가 역사나 신학 논문이나 서신을 쓴 것이 아니라 전기를 썼다는 것 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장르 분류는 마가의 작품의 저술과 목적에 관해 어떤 단서를 제공해 주는가?
본서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질문들을 다룰 것이다(85).
다음 장은 현대의 장르 이론을 개괄하고 본드(와 버리지)의 장르 이해가 최근의 논의에 뒤처져 있음을 지적한 뒤, 본드의 비교 작업에 엄밀성이 모자랐음을 보일 것이다.
나. 최근 현대 문학계의 장르 이론으로 평가한 본드의 관점의 한계
이 장에서는 현대의 장르 이론 논의에 비추어 본드의 논증에서 전제의 문제점, 그리고 본드가 궁극적으로 의존하는 버리지의 논지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밝힌다.
현대 문학계의 장르 이해는 ‘분류’(classification)라는 기존 방법론의 근간에 비판적으로 저항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있다.
버리지와 본드의 장르 이해는 기본적으로 분류라는 학술적 작업 방법론에 기초한다. 버리지는 저자와 독자가 공유했을 법한 문학 장르에 대한 일련의 기대치(set of expectations), 그리고 패턴과 관습을 장르 이해의 핵심으로 간주한다.16)
하지만 딩클러(Michal Beth Dinkler)가 정확히 짚었듯이, 장르에 대한 현대의 이해는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소통”이라는 기능에 더 집중한다.17)
16) Burridge, What Are The Gospels, 26.
17) Michal Dinkler, “What Is a Genre?: Contemporary Genre Theory and the Gospels,” Modern and Ancient Literary Criticism of the Gospels: Continuing the Debate on Gospel Genre(s), ed. by Robert Matthew Calhoun et al. (Tübingen: Mohr Siebeck, 2020), 80.
장르를 식별하는 데 이바지하는 ‘정적인’ 특징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두고 문제의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장르를 분류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보면, 청자/독자 및 사회문화적 환경과 읽기, 낭독, 연행의 계기(occasion, exigency)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정경) 복음서의 장르는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정경) 복음서가 하나의 장르로서 어떻게 (독자와) 소통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작품 이해에 더 적절함을 알 수 있다.18)
낭독자 혹은 연행자(performer)의 제스처, 표정, 성량 조절 등이 청자 혹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청자/독자가 특정 작품을 접하는 장소와 계기 등이 작품에 대한 기대와 이해에 큰 영향을 끼친다.
플롯을 지닌 내러티브라는 형식 자체가 독자/청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역시 궁극적으로 한 지점을 가리키며 진행되다가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19)
본드의 장르 이해는 너무 정적(static)이어서 저자와 텍스트, 그리고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적 상황과 그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상황적, 수사적 요소들을 온전히 고려하지 못하며, 장르가 사회적으로 (재) 창조되고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문학 작품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돕고 조율하느냐는 문제와 장르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장르를 대학교나 정부 같은 ‘기관’(institution)으로 보고 그 기관 안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때로는 의도적으로 사회적 기대치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면서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과 기능을 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교수) 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특정한 때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문학적 특질과 모티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하나의 장르로 묶어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20)
18) Dinkler, “What Is a Genre,” 80.
19) Dinkler, “What Is a Genre,” 92-95.
20) René Wellek and Austin Warren, Theory of Literatur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mpany, 1943), 226.
특정 ‘기관’ 안에서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행동을 수행하고 기관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며 자신을 표현하다가도, 그 기관을 변혁시키거나 심지어 같은 종류이지만 새로운 특성을 지닌 또 다른 기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렇듯 장르는 늘 크고 작은 변화를 겪는 기관처럼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며, 사회적 기대 및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네 정경 복음서의 수용사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문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이를 “예수의 생애에 관한 특정한 기억과 기술(description)”이라는 하나의 ‘기관,’ 즉 ‘장르’로 이해했다.
이는 네 복음서가 초기 그리스도교 내에서 전례나 교육, 변증 활동 같은 의사소통의 특정 방법이자 방식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특정 장르에 ‘속한’ 어떤 문학적 특질을 상정하기보다, 장르를 역동적이고 대화적 특성이 있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문학적 요소를 끌어와 사용하고 수용하는 동시에 그 문학적 요소에 변화를 가하면서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으로 보면, 작품의 이해와 수용을 좀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21)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작품이 보이는 놀랄만한 유연성과 창조성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다시 논할 것이다.
현대 문학 이론의 장르 이해 동향을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버리지와 본드가 ‘분류’와 범주라는 틀에서 장르를 이해하기 위해 의지하는 가족 유사성 이론의 오용 사례만으로도 문제의 심각성을 즉각 파악할 수 있다.
‘가족 유사성’(Familienähnlichkeit, family resemblance)이라는 개념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 이해에서 유래했다.22)
버리지는 다양한 문학 작품 사이에 공통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가져온다.23)
21) 이러한 점에서 나의 주장은 Dinkler, “What Is a Genre,” 90과 일치한다.
22)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by G. E. M. Anscombe et al., rev. 4th ed. (Malden: Wiley-Blackwell, 2009), 36.
23) Burridge, What Are The Gospels?, 38-43, 47, 54. 또한 J. M. Smith, Why βίος?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ospel Genre and Implied Audiences, LNTS 518 (London: Bloomsbury T&T Clark, 2015),
본드 역시 버리지의 논점을 되풀이하면서 이 언어철학 개념의 응용을 당연시한다(77).
하지만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을 문학 장르 이해에 적용하려는 시도에는 극복하기 힘든 단점이 있 다.
딩클러는 다음과 같이 적확하게 지적한다.
가족 유사성 이론이 지닌 유연성은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접근법에 대한 주요 비판은, 논리적 극단으로 밀어붙일 경우 “가족 유사성 이론은 그 어떤 것이든 닮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정경 복음서의 이야 기 진행(narration)을 비교할 때, 위에서 언급한 누가복음의 일인칭 프롤로그는 무시하고, 네 복음서 모두 대부분 3인칭 내레이션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성이 있다며 쉽사리 비슷한 점만 강조할 수 있다. … 이러한 관점은 텍스트 간의 유사성을 과대평가하고 차이점을 간과함으로 써 쉽게 왜곡될 수 있다.24)
24) Dinkler, “What Is a Genre,” 86. Dinkler는 여기에서 J. Swales, Genre Analysis: English in Academic and Research Sett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51의 문장을 인용한다. 592❙신약논단 제30권 제4호∙2023년 겨울
유사성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고대의 전기적 작품들을 하나의 ‘장르’ 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 큰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본드가 ‘일반적인 구분’(generic identification)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서양 고전학자가 지적하듯이, 고대 전기 문학을 특징짓는 대표적이고 일반적 특성(generic features)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르를 구별 짓는 ‘두드러진 특성’과 ‘중요하지 않은 특성’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 버리지나 본드 둘 다 명료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본드는 차이점의 중요성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비교 작업에서 강조점이 놓여야 하는 것은, 스미스(Jonathan Z. Smith)가 누차 지적했듯이, 바로 차이점이다.
차이점이 새로운 시각과 조망을 선사한다.
이는 비교 작업 자체의 본질에 대한 고찰로 우리를 인도한다.
유사점과 차이점을 논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행해지는 비교라는 작업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고찰과 연결된다.
다음 장에서는 종교학계에서 비교 작업의 중요성과 본질을 정교하고 심도 있게 고찰한 스미스의 통찰을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본드의 비교 작업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2. 비교 작업의 본질과 본드의 논증의 문제
버리지와 본드의 βίος 장르 이해는 유형 분류(typological classification) 에 기초하며, 이에 따른 문학 작품 사이의 비교를 주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분류라는 작업 자체가 원래 생물학에서 유래한 학술 방법론이므로 인문학에서는 오로지 느슨한 개념의 틀로만 사용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이를 망각하고 마치 대상의 분류가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논증을 펴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문학에서 비교 작업과 분류는 학자들의 자의적 자료 선택에서 출발하며, 비교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오로지 연구하는 학자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는 종교학자 스미스의 날카로운 지적을 신약학자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25)
무엇보다 비교 작업에서 유사성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대상이고,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단순하게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어떤 사안에서 X는 W가 Z에 유사한 것보다 Y에 더 유사하다”(“X resembles Y more than W resembles Z with respect to …”) 라는 식의 정확성을 요구한다.26)
비교를 위해 대상을 선택하는 작업 역시 인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27)
25) J. Z. Smith, Drudgery Divine: On the Comparison of Early Christianities and the Religions of Late Antiqu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115: “the enterprise of comparison … brings differences together solely within the space of the scholar’s mind. It is the individual scholar, for his or her own good theoretical reasons, who imagines their cohabitation, without even requiring that they be consenting adults.” Dinkler 역시 Smith의 비교 이론을 장르 이해 작업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Dinkler, “What Is a Genre,” 88.
26) Smith, Drudgery Divine, 51의 표현을 내가 확장한 것이다.
27) Dinkler, “What Is a Genre,” 79. Dinkler 역시 Smith의 비교 이론에 의존한다.
비교 작업의 주목적은 비교 대상 사이의 유의미한 어긋남, 즉 차이점에 주목하며 기존의 범주를 교정하고 연구 대상을 재기술(redescription)하는 데 있다.28)
28) Smith, Drudgery Divine, 52.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먼저 스미스가 비교라는 작업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비교는 지식을 얻기 위해 수행되는 (학문적으로) 조율된 과장 행위다.
비 교는 차이 안에 있는 특정한 특징들을 끄집어내어 그 특징들이 지적으로 중요한 것일 수 있다면서 힘주어 돋보이게 한다.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 “비슷하다”는 수사적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말이다.
비교는 우리의 (즉, 학 자들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을 우리의 데이터 자료로 다 시 보고 개정하는(re-vision) 수단을 제공한다.”
스미스의 말에서 귀 기울여야 할 요점은 비교 행위가 학자들이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수행하는 임의적이고 인공적인 작업이라는 점(이는 애초 비교 대상을 선정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비교 자체를 수행한 후에 기존 범주 안에서 유의미한 어긋남 또는 차이점을 관찰한 후 기존 범주를 교정하는 것까지 아울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버리지가 다섯 개의 작품을 ‘고대 전기’의 대표적 예로 선정하고 복음서와 비교한 작업의 본질이 상당 부분 버리지 자신의 ‘임의적’ (혹은 무엇인가를 미리 전제하고 난) 선택이라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보게 해준다.
또한 고대 전기 문학과 복음서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에도 주목하여 복음서를 전기로 보는 시각을 유의미하게 교정해야 한다는 점도 일러준다.
앞서 나는 버리지와 본드의 장르 이해는 기본적으로 유형론적 분류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종교학에서 분류와 범주 구분이라는 학술적 작업에 대해서도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는말을 했다.
많은 종교학자는 일반화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 의 연구 대상을 마치 실체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 다. 이러한 경향은 해당 자료에 이미 더 크고 포괄적인 범주의 일부임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 임을 나타내는 용어’(native terminology)를 고집함으로써 해당 자료의 절 대적인 특수성을 강조하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 들의 연구는 고유명사와 관련하여 프레게(G. Frege) 이래로 제기되어 온 표기와 의미의 관계, 즉 대상에 대한 명명(naming)이 가리키는 것인지 함 의하는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난제와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 다.29)
이렇게 말하면서 스미스는 에밀 뒤르켐의 경구와도 같은 글을 인용한다.
“유사함을 느끼는 것과 속(屬, genus, 같은 특성으로 한데 묶이는 집합)은 서로 별개다(autre chose est le sentiment des ressemblances, autre chose la notion de genre).”30)
29) J. Z. Smith, “Classification,” Guide to the Study of Religion, ed. by Willi Braun and Russell McCutcheon (London: Continuum, 2000), 36.
30) Émile, Durkheim, 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 (Paris: F. Alcan, 1912),
그리스-로마 문학 작품 중 일부를 ‘전기’라는 범주로 한데 묶는 행위는 위에서 자세히 짚어본 대로 결코 쉽지 않다.
이는 현존 자료에 인위적 압력을 가하는 일이고, 작업의 초기 단계부터 선택과 배제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차적 성찰(secondorder reflection)이다.
이러한 이론적 문제점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없이 마가복음을 전기로 해석하는 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기 쉽다. 비교를 통해 유사성과 차이점을 찾으려는 시도의 장단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프랑스 자연사 학자 피에르 블롱(Pierre Blon)의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 그는 새와 인간의 뼈를 두 발로 서있는 자세로 묘사했다.31)
그림 : 생략(첨부 논문파일참조)
31) Pierre Blon, 1555년. https://en.m.wikipedia.org/wiki/File:BelonBirdSkel.jpg, 2023. 11. 30 접속. 나는 Blon의 그림을 이창익, “종교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조너선 스미스 의 종교 이론,” 종교문화비평 (2018), 222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새의 뼈를 인위적으로 과장하여 인간의 뼈 구조를 따라 배열하면 이전에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새와 인간의 뼈에서 동일한 기능을 하는 것들(예를 들어 이빨, 발가락 등)이 무엇인지 가늠할 여지가 생기고 새의 해골 구조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왜곡과 과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손과 새의 날개는 엄연히 다르다.
이 새의 해골 그림을 ‘있는 그대로의’ 새의 해골 사진과 비교하면 왜곡의 정도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나는 본드의 책에 있는 칭찬할 만한 통찰들과 관찰은 위의 그림 같이 일종의 과장을 통해 얻은 유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설득력이 약한 주장들은 엑스레이처럼 비교적 ‘왜곡 없는 새의 해골 사진’즉 고대 전기 문학을 특징짓는 경계선이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어긋남’은 범주의 교정을 요청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복음이 고대 역사 서술과 어느 면에서 유사하고 무엇이 다른지, 어느 정도의 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비극이나 소설 등 다른 문학적 요소를 담고 있지는 않은지, 다양한 측면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작업이다.
3. 그리스-로마 시대 전기적 문학의 유연성과 다양성
고전 시기 문학 이론은 ‘정적’인 ‘정의’(definition)를 포함했지만 실제로는 장르가 늘 규범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파렐(Joseph Farrell)이 정확히 기술하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경계 를 시험하고 심지어 위반하는 것이 단지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서 필연적 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났고, 이전에 볼 수 없던 모험적 시도가 나타 나는데, 이는 시인의 기술에서 중요한 측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32) 애트리지(Harold Attridge)는 파렐의 관찰에 동의하며 “장르의 휘어짐” (genre-bending)이라는 매우 유용한 이미지를 소개한다. 헬레니즘과 로마 문학의 세계에서 … 장르는 흔히 혼합되거나, 내가 제 안한 표현을 쓰자면, “(틀이) 휘어졌다(bent).” 장르의 휘어짐은 창의적인 32) Joseph Farrell, “Classical Genre in Theory and Practice,” New Literary History 34 (2003), 388. 김선용 _마가복음은 βίος인가?❙597 문학가들이라면 늘 행하는 작업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1세기 그리스 어와 라틴어 문학 작가들은 확실히 그러한 방식으로 집필했다.33) 장르적 특징의 혼합을 보여주는 구체적 예로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그 안에 창의적으로 (저자가) 만들어 낸 연설을 담은 투키디데스(기원전 455-400)의 작업”을 들 수 있다.34) 오니(David Aune)가 갈라디아서의 수사학적 장르 문제를 두고 제시한 의견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의 에클레시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여러 수사학 장르의 혼합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35) 갈라디아서에는 보통 수사적 연설에 들어가지 않는 ‘권면’(exhortation)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 서신은 수사적 연설의 특징과 도덕 권면 문학의 혼합물로 볼 수도 있다. 마가복음의 문학적 장르를 βίος로 국한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문학 작품 경계의 유연성과 다양한 수용이라는 당대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여 균형을 잃을 수 있다. 따라서 스웨인(S. Swain)의 제안처럼, ‘the biographic’이라는 문학적 특성(trait)을 이론적 범주로 상정하고 그것이 현대 학자들의 고안품임을 잊지 않으며, 특정 작품을 biography라고 단정하기보다 전기적 요소를 포함한 것(a biographical work)으로 바라보는 것이 현존 자료를 더 존중하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36) 33) H. Attridge, “Genre,” How John Works: Storytelling in the Fourth Gospel, ed. by Douglas Estes and Ruth Sheridan (Atlanta: SBL Press, 2016), 13. Attridge의 매우 중요한 소논문을 참고하라. H. Attridge, “Genre Bending in the Fourth Gospel,” JBL 131 (2002), 3-21. 34) Attridge, “Genre,” 13. 35) David Aune, “Review of Galatians: A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Churches of Galatia, by Hans Dieter Betz,” RelSRev 7 (1981), 323-28. 36) 참고. Simon Swain, “Biography and Biographic in the Literature of the Roman Empire,” Portraits, ed. by Edwards and Swain, 1. 598❙신약논단 제30권 제4호∙2023년 겨울 4. 논증에 사용된 논리 및 마가복음 본문 해석의 문제점 본드는 마가가 종종 βίος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대답을 제시한다. 문제는 본드의 이러한 응수가 증명도 반박도 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본드는 마가복음에 서문이 없는 것이나 마가복음 저자가 자신을 ‘나’라고 명시적으로 가리키며 글을 진행하는 βίος 의 특징에서 벗어나는 것을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해석한다(222). 많은 학자가 마가복음의 언어와 문체에서 칠십인역의 영향을 감지하지만, 마가복음에 서문이 없거나 저자 자신을 일인칭으로 드러내지 않는 문학적 관습을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본드의 주장은 증명도 반박도 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한 논증으로 볼 수 없다. 본드는 마가복음을 전기로 볼 때 얻는 가장 큰 해석적 통찰이 ‘예수(의 삶의 방식)를 닮기’라는 주제의 두드러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고대 전기 문학으로 간주되는 몇 작품은 단순히 해당 인물을 본받으라는 권면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종종 더 복잡한 사회정치적 의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타키투스가 아그리콜라의 생애에 관해 쓴 이유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의 명예를 높이고(honori) 여러 세대에 걸쳐 그가 기억되게 하는 것이었다(아그리콜라, 3.3,37) 46.3-4). 그런데 누군가의 덕과 위업을 기리며 기록하는 일이 도덕적 본보기로 모방해야 할 대상으로 그 인물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것과 반드시 동치는 아니다. 본받음은 기념과 칭송이라는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행위의 ‘부분집합’이다. 버리지가 전기 문학으로 간주한 크세노폰의 아게실라오스를 보37) hic interim liber honori Agricolae soceri mei destinatus, professione pietatis aut laudatus erit aut excusatus. 김선용 _마가복음은 βίος인가?❙599 면, 아게실라오스는 모방할 만한(μιμούμενος) 모범(παράδειγμα, 10.2)적 인물이지만, 이는 그의 덕을 기념하고 기억한다는 더 큰 목적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ὡς ἂν ὁ ἔπαινος εὐμνημονεστέρως ἔχῃ, 11.1). 이러한 관찰은 일방적으로 ‘본받음’만을 강조하는 본드의 논지를 보완해 주며, 최근 복음서 연구에서 주목받는 사회적 기억 이론을 문헌학적 입장에서 수용할 공간을 열어준다.38) 물론 기억과 본받음을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기억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감안하면, 기억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모방하거나 본받는 것과 온전히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본드의 주장에는 기억의 사회적 역할, 특히 공동체의 현 상황에 어느 면으로든 건설적 이바지를 하는 방향으로 과거를 선택해 소구한다는 사회적 기억 이론이 들어설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지적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본드가 도덕적 삶의 권유와 위인 모방을 강조한 나머지 사안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각 저자의 인간론 혹은 인간관, 그리고 작품에 내재하는 도덕관을 살피는 것이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한 분석보다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소크라테스는 에바고라스(4, 76, 80-81 등)에서 훌륭한 사람을 ‘모방’하라며 교육적 권면을 강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39) 하지만 이소크라테스 특유의 수사학적 철학은 ‘교육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품성에 방점을 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수사학은 품성에서 우러나는 말과 생각을 다듬는 기능을 할 뿐이다. 이소크라테스는 타고난 본성38) 사회적 기억 이론과 복음서 연구 현황의 개괄적 리뷰는 Chris Keith, “Social Memory Theory and Gospels Research: The first Decade (Part One),” Early Christianity 6 (2015), 354-37; idem, “Social Memory Theory and Gospels Research: The First Decade (Part Two),” Early Christianity 6 (2015), 517-42를 보라. 39) 가령 Frickenschmidt, Evangelium als Biographie, 108-109. 600❙신약논단 제30권 제4호∙2023년 겨울 과 천부적인 재능이 수사학 교육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한다고 생각한다. 성실한 연습과 교육은 조금 더 성숙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의 소피스트를 반박하며를 보자.40) 따지고 보면 교육이란 그들이 어떻게 하다 보니 얻게 되는 것들을 훨씬 더 체계적인 데서부터 취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타고 난 본성이 그만 못한 사람들을 훌륭한 논쟁가나 연설문 작성가로 완전하 게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14). 그 누구라도 제가 정의로움(δικαιοσύνη)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생 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저는 미덕에 비추어 본성을 잘못 타고난 사람들 안에 절제나 정의를 형성시킬 수 있는 그런 식의 기술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입니다(21). 이소크라테스처럼 ‘타고난 자질’을 강조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궁극적인 삶의 방식의 변화, 품성의 급진적 변화라는 의미에서 ‘본받음’을 강권하기는 쉽지 않다(물론 노력을 통해 발전과 성숙을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긴 하지만 말이다). 네포스는 아티쿠스의 추기에서 “각자의 품행이 대체로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suos cuique mores plerumque conciliare fortunam)”라고 말한다(19.1-2). 아티쿠스 본문은 아티쿠스의 남다른 관대함, 공정함, 검소, 구제 활동 등을 다채롭게 묘사한다. 하지만 아티쿠스의 ‘덕’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독자를 덕스러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티쿠스의 훌륭한 품성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기록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작품 어디에서도 아티쿠스의 남다른 성품을 최대한 닮으라는 명시적 권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라면 마가복음 저자의 인간관과 윤리적 시각을 먼저 40) 번역은 김헌, 위대한 연설: 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을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 (서울: 인물과 사상사, 2008), 166, 168에서 가져왔다. 김선용 _마가복음은 βίος인가?❙601 따져봐야 한다. 과연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 추종자들이 예수의 태도와 행동을 ‘제대로’ 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예수를 ‘제대로’ 본받는 것(예를 들어 로마의 엘리트적 덕성과 능력을 뿜어내면서도 이를 절제하고 궁극적으로 가치의 전복을 하는 것)이 과연 마가복음 내러티브의 중추일까? 41)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마가의 내러티브적 기독론 이해에 달려있다. 마가의 내러티브적 기독론은 예수의 신비한 정체성과 난해한 가르침에 대한 한 걸음 더 들어간 이해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는 신비로운 역설 이해를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특이한 방식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 서사의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42)
41) Bond는 이런 질문에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영웅이 그 뒤를 따를 인물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중요한 것은 독자가 영웅의 인격과 삶의 방식 을 배워 그것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다”(101). 하지만 이는 미흡한 변론이다. 마가 복음에서 예수를 본보기로 삼는 일은 Bond 자신이 인정하듯이 기존 가치체계를 전복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급진적 제자도를 포함한다.
42) 대표적인 연구로는 R. Hays, 복음서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 이영욱 역 (서울: 감은사, 2022), 208-12, 648.
아래에서 다시 언급할 사안인데, 마가복음은 이스라엘 경전과의 섬세한 상호 작용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를 통해 신비한 방식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이것이 그의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추진력이자 방향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큰 얼개 안에서 단일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 본받기’는 이스라엘의 경전과 연속선상에 있는 특별한 인물인 예수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더 커다란 주제의 하위 모티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다른 면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마가복음 전반부를 채우고 있는 기적과 논쟁 해석에서도 본드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 작품 전반부에 나오는 기적들은 예수가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 곧 무시할 수 없는 강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 초반 장들에서 그 는 자신의 절제력(sōphrosynē)과 타인에 대한 애정(philanthrōpia)을 끊임없 이 드러내는 명예롭고 심지어 엘리트적인 남성으로 묘사된다.
당연히 예 수의 권위와 큰 인기는 반대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논쟁을 좋아하는 남성들의 공적 세계에서 예수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다 계속해서 수모를 당한다(461).
마가복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적 이야기와 논쟁 사화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 뒤 본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전기가 진행됨에 따라 마가복음의 예수는 당대의 명예와 영광에 대해 매우 전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 비록 그는 큰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고 겸손과 절제를 보여준다”(461).
본드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저자가 기적과 논쟁 사화를 나열한 주요 목적은, 예수가 엘리트 남성으로서 커다란 명예를 누릴 수 있음에도 그러한 명예 이해를 전복시킨 인물이기에, 마가복음을 접한 예수 추종자들에게 “명예와 존경에 대한 당대의 관념을 거부”하도록 장려하고 “서로에게 노예처럼 행동하며” “겸손과 절제”를 행하여 “마침내 굴욕적인 죽음”으로 초대하는 데 있다(461-62).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의 기적 사화와 논쟁 사화가 마가의 내러티브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정말 그러한지를 되묻게 된다.
마가복음 저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예수를 유독 내러티브 전반부에서는 로마의 엘리트 남성의 덕이 충만한 강력하고 매력적 인물로 제시한 이유가 무엇인가?
즉, 명예로운 예수의 삶과 수치스러운 그의 죽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마가복음 연구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이 질문을 본드는 말끔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설득력 약한 견해를 또 하나 인용한다.
복음서 전반부는 여러 가지 덕목을 지닌 예수를 소개한다. 제자들은 예 수처럼 위대한 능력은 없었지만, 환자들과 귀신 들린 자를 향한 예수의 연민을 본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부와 사치의 삶을 포기하고 스승처럼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에 비해 논쟁 능력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의 본보기는 그들이 반대자들을 마주할 때 그들에 게 용기를 줄 수 있다(293-94).
기적과 논쟁 사화의 요지를 위와 같이 이해하는 마가복음 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본드의 ‘전기적 마가 읽기’는 마가복음의 중핵인 예수 정체성의 신비43) 혹은 아이러니생전 강력한 힘을 보이고 출중한 덕을 드러낸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가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려 처형당함 라는 주요 모티프를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 콜린스(Adela Yabro Collins)는 “버리지가 복음서를 비오스들(bioi)로 정의한 것은 그가 그 외의 어떤 대안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44) 바르고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마가복음의 주 관심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가의 관심사는 일반적으로 예수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지에 있다기보다는 예수가 어떤 종류의 메시아, 선지자, 혹은 신적 매개자였는가에 있었다.”45)
게다가 콜린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가 지적했듯이, ‘전기적 읽기’는 이스라엘의 경전이 마가복음의 구성과 주제에 끼친 심원한 영향을 고스란히 표현하지 못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본드의 해석은 마가복음의 강조점이 예수의 활동 자체에 있지 않고 이스라엘의 경전의 빛에서 바라본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 있다는 점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다.46)
43) 이 모티프는 Hays가 마가복음 해석할 때 핵심으로 보는 주제다. Hays, 복음서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 167-82. 44) Adela Yarbro Collins, “Genre and the Gospels,” JR 75 (1995), 241.
45)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43.
46) Collins, Mark, 33, 43. 놀랍게도 Bond는 “성경이나 예수 자신이 여러 차례 예언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지만(200), 이 중요한 주제를 심도 있게 전개 하지 않는다.
본드의 논증에서 억지스러운 측면은 마가복음에서 꽤 입체적 인물로 그려지는 제자 그룹을 예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위한 주변 인물이자 비일관적 인물로 납작하게 이해하는 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보조 인물들 간에는 통일성, 발전, 심지어 일관성이 거의 없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행동하는 경 향이 있으며, 그들의 내면의 삶이나 희망,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354).
마가의 관심은 온통 예수에게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인물들은 예 수의 에토스와 미덕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만 존재한다 (357).
정말 그런가?
마가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에 대한 태너힐(Robert Tannehill)의 고전적 연구47)나 맬번(Elizabeth Struthers Malbon)의 꼼꼼한 연구48)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듯이, 예수를 둘러싼 인물들은 전혀 밋밋하지 않으며 인물 사이의 역동성 역시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빈약하지 않다.
맬번의 말처럼,
“마가복음 속 인물들(인물묘사)의 풍부함은 이러한 인물들 사이의 상호 작용, 비교, 대조에 있으며,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청자/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 있다.”49)
47) Robert Tannehill, “The Disciples in Mark: The Function of a Narrative Role,” The Interpretation of Mark, ed. by W. R. Telford (Edinburgh: T&T Clark, 1995), 179-80.
48) Elizabeth Struthers Malbon, In the Company of Jesus: Characters in Mark’s Gospe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0).
49) Malbon, Characters in Mark’s Gospel, x. 저자의 강조.
마가복음이 제자들의 실패를 빈번히 묘사한다는 사실에 대한 본드의 설명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제자들의 특정 모습들을 ‘피해야 할 예시’로 제시하는 것이 예수를 본받는 것과 양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마가복음 원청중의 모습 재구성에 대한 본드의 지나친 자신감을 들 수 있다.
마가복음의 급작스러운 결말에 대한 본드의 해석을 인용한다.
이 이상한 장면은 마가복음의 청중에게 직접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가장 이해가 잘 된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청중들도 빈 무덤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그들 역시 두렵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모른다.
마가가 그들에게 던지는 도전은 개인적으로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믿고 따라 야 하며, 이제는 자기 삶이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이 중단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 이야기는 모든 신자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 곧 세례와 함께 시작되며, 마가교회의 많은 신자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 었음에도 두려움과 불확실성 및 박해의 위협에 너무 위축되어 공개적으 로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던 지점에서 끝이 난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사 람들에게 힘을 주고, 예수의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로 제 시하며, 세상에서 계속 사명을 이어가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기록된 것으 로 추정된다(291-92).
어떻게 본드는 마가복음이 의도한 청중의 감정과 상황“두려움과 불확실성 및 박해의 위협”에 대해 이렇게 확언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에서 마가복음의 상당히 독특한 결말이 청중에게 힘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본드는 그 근거를 마가복음의 집필 목적, 즉 “예수의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에서 찾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질문에 수긍할 만한 답변이 되지는 않아 보인다.
특히 마커스(Joel Marcus)가 말한 성례전과 이 복음서 사용의 긴밀한 연관성을 고려하면,50) 독자/청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목숨을 걸 결단을 새롭게 처음으로 했을 거라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독자/청자(“마가교회”)를 본드처럼 특정하는 것은 사실 마가복음을 전기로 읽는 시도와 상충한다.51)
50) Joel Marcus, Mark 1-8: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27 (New York: Doubleday, 2000), 68.
51) Richard A. Burridge, “About People, by People, for People: Gospel Genre and Audiences,” The Gospel for All Christians: Rethinking the Gospel Audiences, ed. by Richard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8), 113-46; 권영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스-로마 전기 장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서울: 감은사, 2023), 37-41, 261-70.
버리지는 전기 장르 자체가 상당히 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드가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전기적’ 요소로 해석하는 데서 빚어진 문제점 중 하나다.
마가복음의 반복적 연행이나 낭독에서 이러한 강조점이나 주제의 단초를 찾는 것은 연행자나 낭독자의 명시적 제스처나 성량 조절 등이 없이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청중/독자가 어떠한 연행 장소(performance arena)에 있었는지 역시 ‘소통의 방식’으로서의 장르를 생성하고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렇듯 본드가 마가복음서의 구술적 특징과 연행(performance)적 측면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점은 문제다.
한편, 본드는 양식비평 이후 널리 받아들여진 구전과 기록의 순서를 거꾸로 보는 대담한 가설을 주장한다.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일 화, 예수의 기민한 재치와 적을 제압하는 기술을 보여주는 일화, 금식, 안식일 준수, 납세, 소외당한 자들과의 관계, 관대한 기부의 필요성 등 당대의 다양한 상황에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일화들을 제공한다. … 흥미롭게도 이 사실은 구전을 통한 페리코페의 유통이 마가복음이 기록 되기 이전의 구전 시대의 특징이기보다는 마가가 문학적으로 전승을 알 맞은 크기의 일화로 만든 결과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양식비평 가들의 추론과는 정반대로, 이 기억에 남을 일화들은 주로 익명의 그리 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서 구두로 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마가가 기록 한 텍스트 때문에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201-202).
구술성과 퍼포먼스 비평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학자 중에 본드의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술과 기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드의 주장은 외경복음서 형성에 있어서 이차적 구전성(secondary orality)을 논할 때에나 말할 수 있는 것이며,52) 입증이나 반박을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양식비평에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Sitz im Leben에 호소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지적한 본드의 문제점들은 켈버(Werner H. Kelber)가 버리지를 향해 쏜 세 가지 비판의 화살에 정확히 맞는 표적이기도 하다.
먼저, 장르가 가진 유연성은 장르를 해석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려는 시도에 경종을 울린다.
둘째, 복음서의 내러티브적 특성은 장르 분석에 앞선다.
셋째, 구전성 자체가 본문의 불안정성 및 다양성을 함의한다는 사실이 장르 이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53)
이 단락을 마무리하며 지적할 점을 하나 더 보탠다.
본드는 아이소포스의 일생이나 루키아노스의 데모낙스를 자주 마가복음과 비교하며 마가복음을 새롭게 조명하려 한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54)는 점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52) 참조. Hans-Josef Klauck, Apocryphal Gospels: An Introduction, trans. by Brian McNeil (London: T&T Clark, 2003), 25, 58, 121-22.
53) Werner H. Kelber, “On ‘Mastering the Genre,’” Modern and Ancient Literary Criticism of the Gospels, ed. by Calhoun et al., 57-76.
54) Temmerman, “Writing (About) Ancient Lives,” 8.
이는 마가복음과의 근본적 차이일 뿐만 아니라 본드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마가복음의 주된 집필 목적, 곧 후대의 독자/청자들이 예수를 본받게 하는 데 있었다는 논지 일부를 상당히 약화시킨다.
III. 결어: 마가복음의 문학적 특징 연구에 대한 제안
이제 마가복음의 문학적 특징을 더 유연하고 적실하게 파악하기 위한 제안으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본드의 논제는 과장되고 치우친 면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하는 케리그마에 예수의 생애(행적과 가르침)를 더한 이유 중 하나를 신선하게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본드의 통찰은 전기라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도 마가복음에 λόγος προτρεπτικός(또는 간단히 protrepsis나 protreptic으로 부르기도 함)적 요소가 있다는 설명을 통해 더 폭넓게 아우를 수 있다. λόγος προτρεπτικός는 고대 철학자들이 한 철학 체계가 다른 철학 체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에 귀의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쓴 글을 통칭하는 용어다.
플라톤주의자 라리사의 필론(Philo of Larissa)은 λόγος προτρεπτικός의 특징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προτρεπτικός λόγος 의) 한 부분은 그 (철학)의 큰 장점을 보여주고, 다른 부분은 그 철학을 파괴하거나 잘못 표현하거나 비난하려는 사람들을 반박한다.”55)
스타워스(Stanley Stowers)는 이러한 문학 작품들이 지닌 집필 의도를 “독자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 개종하도록 촉구하거나, 특정 학파에 가입하거나, 일련의 가르침을 독자의 삶에서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요약한다.56)
“일련의 가르침을 독자의 삶에 있어서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작업은 다양한 수준에서 진행되는데 그중에는 “높은 수준의 학문(혹은 수련)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도 포함된다.57)
55) Stobaeus 2.7.2: τούτου δ ʼ ὁ μὲν ἐνδείκνυται τὸ μεγαλωφελὲς αὐτῆς, ὃ δὲ τοὺς ἀνασκευάζοντας ἢ κατηγοροῦντας ἢ πως ἄλλως κακοηθιζομένους <εἰς> τὴν φιλοσο- φίαν ἀπελέγκει
56) Stanley Stowers, Letter Writing in Greco-Roman Antiquit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113. λόγος προτρεπτικός의 일반적 특징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보라. David E. Aune, “Romans as a Logos Protreptikos,” The Romans Debate, rev. ed. (Peabody: Hendrickson, 1991), 278-96.
57) Mark D. Jordan, “Ancient Philosophic Protreptic and the Problem of Persuasive Genres,” Rhetorica: A Journal of the History of Rhetoric 4 (1986), 309.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 (토라 재해석을 포함하여) 예수의 논쟁 사화 및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는 본문들을 λόγος προτρεπτικός적 요소로 보는 것은 어떨까?
다른 문학적 요소를 고려해 볼 가능성 역시 조심스럽게 타진할 수 있다.
마커스는 충분한 논증 없이 마가복음을 초기 그리스도교라는 “운동의 전기”(the biography of a movement)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58)
마커스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의 관점이 문헌학적으로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메시나의 디카에아르코스(Dicaearchus of Messina)는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자신이 쓴 그리스의 역사에 그리스의 생애(전기)(βίος Ἑλλάδος)라는 제목을 붙였고, 기원전 1세기에는 스토아 철학자였던 니사의 이아손(Jason of Nysa)의 “βίος Ἑλλάδος,” 바로(Varro)의 로마 민중의 생애(De vita populi romani) 등 ‘공동체의 생애’를 전기적으로 다룬 작품이 집필되었다.59)
이러한 선례는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의 전기’를 쓰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음을 일러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βίος라는 장르의 존재를 상정하기보다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전기적’ 특성(the biographic)을 말하는 것이 문학 작품에 인위적 범주를 뒤집어씌우는 일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비극적 요소들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에 대한 모티프, 역전(reversal)의 모티프, 감정적 묘사 등도 마가복음 주제인 ‘예수의 신비한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므로 마가복음을 ‘비극적’(tragic) 요소를 지닌 작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60)
58) Marcus, Mark 1-8, 66.
59) Temmerman, “Writing (About) Ancient Lives,” 3.
60) Je Jay, The Tragic in Mark: A Literary-historical Interpretation (Tübingen: Mohr Siebeck, 2014)을 보라.
서사비평을 통해 알게 된 생생한 인물 묘사, 그리고 인물 사이의 역동성, 활극적 요소 및 플롯의 중요성은 고대 소설의 주요 특징과 겹친다.61)
다른 한편으로는, 헹엘(Martin Hengel)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일반적인 전기들은 영생과 최후 심판에 있어서 결정적인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62)는 점을 존중하면 복음서를 ‘케리그마적 전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63)
결국 마가복음은 비극적, 전기적, 소설적, 케리그마적, 묵시문학적 요소64)들을 두루 아우른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선 마가복음을 ‘삽화적 내러티브’(episodic narrative)나65) ‘서사’(διήγησις) 같이 좀 더 넓은 범주로 파악한 뒤,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을 살피는 것이 균형 있는 해석을 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61) 다음의 연구를 참고하라. Mary Ann Tolbert, Sowing the Gospel: Mark’s World in Literary-historical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또한 Michael E. Vines, The Problem of the Markan Genre: The Gospel of Mark and the Jewish Novel (Atlanta: SBL Press, 2002)도 참조.
62) M. Hengel, The Four Gospels and the One Gospel of Jesus Christ: An Investigation of the Collection and Origin of the Canonical Gospels (London: SCM, 2000), 266, n. 368.
63) Hengel, The Four Gospels, 49. Udo Schnelle도 비슷한 의견이다. Udo Schnelle, The History and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Writings, trans. by M. Eugene Boring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8), 161.
64) Bond는 대담하게도 “마가의 짧은 이야기에는 사탄이 실제로 패배했다는 암시가 없다. … 그것은 모두 먼 미래이거나 적어도 마가의 서사 시간 저 너머에 있다” (249)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과 반-하나님 세력 사이의 우주적 전쟁이라는 묵시 문학적 요소를 지나치게 간과한 것이다.
65) Cillers Breytenbach,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as Episodic Narrative (Leiden: Brill, 2021).
문헌학적 시각을 넓히는 것이 마가복음의 문학적 특징과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는 더 나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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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s the Gospel of Mark a βίος? An Analysis and Critical Evaluation of Helen Bond’s The First Biography of Jesus
Kim, Seon Yong (Independent Researcher)
This study provides a critical analysis of the recent trend in scholarship that defines the Synoptic Gospels, particularly Mark’s Gospel, as a type of ancient biography and questions the validity of that theory. To ensure a clearly defined and timely discussion, the essay is constrained to the interpretation of Mark’s Gospel as a biography, presented by Helen K. Bond in her recent and influential work, The First Biography of Jesus: Genre and Meaning in Mark’s Gospel. Starting with the observation that Bond’s argumentative method lacks the current discussion about literary genre, the first section of this paper will deconstruct her arguments through contemporary genre theory and then demonstrate that the premise of her thesis that Mark’s Gospel is an ancient biography is invalid when taking into account the present state of classics scholarship on ancient biographies. The second part of the essay employs a comparative methodology drawn from contemporary religious studies, focusing specifically on Jonathan Z. Smith’s methodological reflections. Its aim is to critically assess Bond’s thesis, arguments, and their validity from a comparative viewpoint. Moreover, it scrutinizes the problems associated with the supporting arguments, underlying Bond’s interpretation of some of the themes and characters and motifs in Mark. The paper concludes that the problem of Mark’s genre can be better understood as an instance of genre blending in Greco-Roman literature, involving a blend of historical, apocalyptic, biographical, fictional, and tragic elements.
Keywords The Gospel of Mark, ancient biography, bios, genre, Helen Bond
신약논단 제30권 제4호∙2023년 겨울
(투고일: 23. 11. 9. 심사일: 23. 11. 27. 게재확정일: 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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