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반도체, 전기차 및 배터리를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 공급망 강화 및 육성정책이 큰 화두로 자리했다. 첨단산업의 공급망 대응정책은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반도체, 배터리, 핵심광물, 의약품 등 4대 산업 공급망 분석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며 본격 촉발되었다.
이후 반도체는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을 통해, 전기차, 배터리, 핵심광물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미국내 공급망 강화가 진행되고 있다.
EU도 반도체법·배터리 규정, 그리고 그린딜 산업계획 안의 핵심원자재법(CRMA)을 통해 대응에 나섰다. 미국의 4대 산업 공급망 검토 중 의약품만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실제로 반도체나 배터리와 같은 대규모 재정집행을 수반하는 입법은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와 달리 의약품은 시장규모, 기술수준, 공급망 모두 주요 선진국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고, 가까운 미래에 선진국의 유사한 산업정책이 도입될 경우 우리 의약품 분야에 미칠 영향은 상대적으로 더 클 수 있다.
의약품 생산의 가치사슬은 ‘①중요 출발물질 및 중간체 → ②원료의약품(API) → ③완제의약품’의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의 제약회사는 의약품 가치사슬의 전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 원료물질을 수입해서 가공하는 형태로 가치사슬을 구축하고 있다.
원료의약품의 생산은 주로 중국과 인도에서, 연구개발 및 완제의약품의 생산은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되는 현재의 의약품 GVC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해 가치사슬 일부의 문제가 의약품 전체 공급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제약·바이오의약품 산업의 전략적 가치의 중요성은 크게 부각되었고, 필수 의료제품에 대한 주요국의 무역통제가 시행됨으로써 의약품 분야에서의 안보, 즉 ‘보건안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미국, EU 등 제약선진국은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도모하고 있어 소리 없는 의약품 패권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의약품 공급망 리스크 점검, ▲대중국 투자심사 강화, ▲민감 데이터 이전 규제 등을 목표로 제약·바이오 산업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의약품을 포함한 4대 산업 공급망 조사 행정명령(’21.2월)과 ‘국가 바이오기술 및 바이오제조 행정명령’(’22.9월), ‘미국인 민감정보 해외이전 규제 행정명령’(’24.2월)’, 바이오기술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 감시 기술대상 등재(’22.9월) 등 행정부 주도 정책 외에도, 연방의회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이 확인되었다.
최근(’24.9월) 하원은 ‘바이오안보법(Biosecure Act)’을 통과시켰는데, 동 법은 개인 건강 및 유전자 정보의 중국 바이오기업으로의 이전을 제한하고 있다. 아직 상원과 대통령 승인이 남아있으나 의회와 행정부 모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어, 최종 발효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전통적인 제약강국이자 세계 2대 의약품 시장인 유럽연합(EU)은 한동안 의약품 무역을 통한 외연 확대를 지향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럽 제약산업 전략’ 등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안전하고 다변화된 의약품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이 다수 발표되고 있다.
‘역내 의약품 공급 안정화를 위한 중장기 전략(’23.10월)’에 따라 ‘핵심 의약품 연합’이 결성(’24.1월)되었으며, ‘핵심의약품법’ 제정도 검토되고 있다. 올해 초(’24.3월) 바이오의약품 육성과 관련해 ‘바이오기술 및 바이오제조 정책방안’이 공개되었는데, 특히 ‘바이오기술법(Biotech Act)’ 제정을 직접 언급하고, 한국을 ‘국제 바이오기술 및 바이오제조 파트너십’의 대상으로 지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중국은 내수시장에 중점을 두던 의약품 정책을 고부가가치 원료와 바이오의약품 산업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상대적으로 뒤처진 바이오 부문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의약품 시장은 아직까지 중국과 인도의 저렴한 원료의약품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FDA 허가 기준 바이오시밀러 개수로는 세계 2위, 유럽 EMA 허가 기준으로는 세계 1위의 바이오시밀러 강국으로 성장하는 등 바이오시밀러 부문의 비약적 성장으로 선진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의 제약·바이오산업 관련 정책은 안정적 공급망 확보보다는 제약산업 육성 및 수출지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제약바이오산업 육성·지원 5개년 종합계획’과 함께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 ‘바이오헬스 산업 수출 활성화 전략 방안’, ‘바이오경제 2.0 추진 방향’ 등 바이오의약품 육성을 위한 전략이 제시되고 있다.
주요국의 의약품 공급망 재편은 한국에 기회요인이자 위기가 될 수도 있다. EU가 바이오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희망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바이오안보법을 제정해 중국 의약품 견제를 본격화하면 우리 제약업계에는 반사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향후 미국이 바이오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현지 진출 기업이 혜택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높은 국외 원료의약품 의존도는 우리 의약품 산업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그동안 미·중간 발생했던 첨단산업 공급망 경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중국이 원료의약품을 무기화하거나 미국의 탈중국 정책을 강화한다면 한국의 완제의약품 산업과 시장은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의약품 산업은 국민 안전 보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주요국이 부단히 육성하여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핵심 산업이다. 타 산업군에 비해 제약·바이오의약품에 대한 산업 및 공급망 정책이 다소 부족한 상황에서,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 재편 가능성에 대비해 ▲주요국의 정책 모니터링 강화, ▲국내 바이오 공급망 점검, ▲의약품 국제협력 체계 공고화 등의 측면에서 관련 정책을 검토하고 보완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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