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인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의 힌두국수주의와 반민주적 정치 행태의 대두에 대해 반지성주의를 틀로 삼은 분석이 대두되지는 않고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 집 권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논의와는 사뭇 다른 양상인데, 표면적인 정치적 현 상들의 강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정치지형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 다르게 전개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다면적인 다층성을 지닌 인도 사회는 식민시기부 터 서구의 “종교” 개념에 맞게 전통을 재구성하여 “힌두교”를 만들어 내는 일에 주력하였 지만, 서구의 “종교”에 해당하는 사회적 규범체계를 가리키는 “dharma”로서의 종교의 틀 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종교집단주의(communalism)의 위험을 도외시하는 허 구적 이중구조의 종교관이 만들어졌고, 이는 허구적인 ‘인도식 세속주의’의 구축으로 이 어지고 말았다. 독립시기 정치엘리트들의 경제적 실패와 세속국가 구축의 실패는 힌두 국수주의(hindutva)의 흐름이 “만달 대 만디르”(Mandal vs. Mandir) 정치 구도 안에서 만디르정치로 구심력을 얻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제 힌두국수주의는 자유시장경제 이 데올로기의 추동력을 얻어 강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인도의 반지성주의적 현상들은 세속주의와 종교집단주의 간의 긴장관계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는데, 근대에 재구성된 힌두교가 채택한 종교관이 개인적인 체험과 해석의 궁극적 권위를 인정하는 방향을 향 했다는 사실이, 미국의 최근 정치상황 분석에서 대두되는 핵심적 분석틀로서 ‘반지성주 의’의 맥락과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만들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주제어 반지성주의, 힌두국수주의, 힌두교, 인도, 종교집단주의
1. 미국의 반지성주의, 인도의 반지성주의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로 대표되는 정치적인 흐름들이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1963년 저술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다시금 대중들의 관심 속으로 끌어냈고, 전 세계적인 권위주의 정권들의 등장 흐름 속에서 이 문제는 상당한 정도 의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1)
1)호프스태터의 분석과 뒤이은 여러 논의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않겠다. 다 만 “반지성주의”를 지성적인 작업이나 노력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지성”을 근거 로 권위를 주장하는 집단에 대한 반발이라고 필자는 반지성주의의 핵심 맥락을 이해하 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저술은 다음과 같은 한국어 번역본이 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 (2017), 유강은 역, 『미국의 반지성주의』, 파주: 교유서가.
이 상황에서 인도의 정치상황도 크게 예외 적이지는 않게 보인다.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이끄는 인도국 민당(Bharatiya Janata Party: BJP)이 집권하면서 이루어진 변화들은 그간의 다 중적인 다양성을 끌어안은 채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를 자부하는 인도에 서 지금까지 보기 드문 권위주의적이자 비민주적인 정권의 양태들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힌두근본주의(hindutva)를 주장하는 흐름 속에 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골적인 소수자의 배제와 억압은 많은 우려와 비판을 낳고 있지만, 수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도 국내의 정 치지형은 이러한 우경화에 가속도를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모디 정부의 언론조작이나 상징정치가 가진 힘으 로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거나, 인도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치의식이 집단 주의(communalism)를 활용한 우민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등 의 피상적인 설명이나 표면적인 이해 이상의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한 상황 이다. 이 상황에 대해 우선 인도가 1947년 독립된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사회·경제적인 문제상황을 맞게 되었는지 밝히고, 이를 근거로 인 도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신흥)중산층이 왜 힌두근본주의를 정치적 정체성의 내용으로 채택하게 되었는지를 기존 학계의 다양한 분석들을 반 영해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현재 인도가 맞고 있는 위기가 네루(Jawaharlal Nehru) 등 독립전 후 시기 정치엘리트들이 구성했던 독립된 근대국가로서의 인도를 구성하 는, 공식적으로 표명되지 않은 양대 원칙, 즉 세속주의와 합의기반 정치의 위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런데 세속주의의 위기는 실제로 19세기 이래 로 인도가 서구에서 차용하고 내재화했던 다양한 “힌두교”의 재구성 과정 에서 구축된 유산들이 불러낸 위기로서의 측면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여 기에는 종교를 이해하는 이중구조와 이와 맞물려 있는 개인적 체험의 절대 화가 문제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보인다. 개인의 체험을 통한 확신 이 객관적으로 그 타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논리적 구조 가 보다 보편적인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기반을 만들어 내지 못하 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이 현재 인도가 맞고 있는 정치적 갈등양 상의 유일하거나 혹은 주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최소한 인도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표면상으로는 미국의 우파 유권자들의 성향과 너무나 유사한 행태들이 왜 근본적인 논리의 구조에서 다른지를 설 명하는 근거가 되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서 호프스태터가 분석한 방식으 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복음주의에 근거한 지적 경향성을 근저에 지닌 미국 의 반지성주의와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된 인도의 반지성주의적 흐름은 구조 적으로 다른 문제를 안은 채 근대 시기에 구축되고 재구성된 힌두교의 성 격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왜 인도의 정치 상황이 “반지성주의” 담론의 틀 안에서 분석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필자가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양한 외적 변수에 의해 규정된 채로 출발한 근대국가 인도가 정체성 정립을 위해 노력해 온 과정에서 구축된 “힌두교” 가 갖게 된 특징들이 독립시기 이후 구축된 세속주의적 지향성의 이중구조 를 낳았고 이것이 뿌리가 되어 현재 BJP의 주도로 자유시장주의와 결합된 힌두국수주의의 흐름을 만드는 현실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래에서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맥락 안에서 인도의 반지성주의는 종교집단주 의(communalism)와 맞물려 자라난 문제임이 밝혀질 것이고, 이를 통해 현재 인도 사회에서 제시되는 반지성주의적 현상들의 맥락은 세속주의와 종교 집단주의의 긴장관계 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현재 비등하는 반지성주의적 성향은 종교집단주의와 결합된 자유시장주의 의 추동력이 보태어진 결과라는 것도 논하게 될 것이다.
2. “인도”의 다층성 “힌두”의 다양성과 모호성
흔히 “힌두교”로 번역되는 “Hinduism”이라는 말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 용될 수 있는지도 논란거리인데, “힌두”라는 말이 가진 역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인도”라는 말의 역사와 얽혀 있다. “인도”라고 불리던 문화적 단 위가 겪어 온 역사적 우여곡절이 “힌두”라는 말에도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독립국가 인도(Republic of India, Hindī: Bhārat Gaṇarājya)를 가리키는 이 름은 고전라틴어 “India”에서 왔다. 당시 “아시아”라는 말이 그렇듯이 이 말 은 남아시아라기보다는 남아시아 방향의 어떤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가리 키는 이름이었다.2)
2 )Wilhelm Halbfass (1988), India and Europe: An essay in Understanding,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의 제1장 참조. 본 장의 논의 내용 중 일부는 필자가 별도의 학술발표 및 출간물의 내용에서 포함시킨 것들과 중복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인도 원어 의 표기 중 고전어의 맥락이 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한해서 원어의 로마자표기를 충 실하게 했고, 현대어의 맥락이 강한 경우 관행적인 표기를 따른다.
그리고 이 라틴어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Indos”(Ἰνδός)에 서 나온 코이네 “India”(Ἰνδία)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 기원은 고대 페르시아 어 “Hindush”이다. 이 말은 인더스강을 가리키는 쌍쓰끄리땀의 “Sindhu”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 “Indoi”(Ἰνδοί)는 인더스강 지역의 거주민 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 근원은 페르시아어에서 쌍쓰끄리땀의 “Sindhu”에 해당하는 말인 “Hindu”를 인더스강 지역과 그 지역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데에서 비롯되었다.3) “힌두”에 상응하는 “인도”를 가리키는 말로는 인도인들이 요즘 일반적 으로 사용하는 “Bhārat”이라는 용어도 있다. 힌디(Hindī)와 인도 북부어에 서 주로 사용하는 “Bhārat”이라는 용어는 『릭베다』(Ṛgveda)에 부족의 이름으 로 언급된 바 있지만, 연관된 전설적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대서사시 『마 하바라따』(Mahābhārata)와 뿌라나(Purāṇa) 텍스트들이다.4) 대부분의 전설은 인도, 즉 그 당시에 인도 사람들이 알고 있던 대륙 전체를 정복한 “Bharata” 왕/황제의 나라가 “Bhārata”라는 서술이다. 이 용어를 사람들은 주로 북인 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는데, 1950년 헌법 공포시에 “Bhārata-varṣa” 라는 형태로 다른 varṣa(나라/대륙)들과 구분되는 나라로서 인도를 가리키 는 공식 명칭으로 채택된다. 이는 1946년 12월 최초 소집된 이후 파키스탄 분할독립을 거치면서 1949년 11월 헌법을 통과시킬 때까지 활동했던 제헌 회의(Constituent Assembly)의 기나긴 논의들을 거쳐 근대국가로서의 “인도” 를 만들어 가는 방향성을 정했던 당시 인도 정치엘리트들의 의사결정을 반 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India, that is Bharat, shall be a Union of States.”라 는 구절로 인도의 헌법은 시작된다.5)
3) 중국에서 사용하던 용어 “천축”(天竺, 예로 『往五天竺國傳』)도 페르시아어의 음차였다.
4) Upinder Singh (2009), A History of Ancient and Medieval India: From the Stone Age to the 12th Century, Delhi: Pearson India Education.
5) 자세한 맥락은 Catherine Clémentin-Ojha (2014), “‘India, that is Bharat…’: One Country, Two Names,” South Asia Multidisciplinary Academic Journal (10), pp. 1-21 참조.
이때부터 인도의 공식 이름은 “Bhārata Gaṇarājya”가 되었다. 이와 다르게 “힌두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인도를 규정해 온 용 어는 “Hindustan”이다. “Hindustan”은 중세 페르시아어이고 “힌두의 땅” 을 의미한다. 이 말은 무갈제국 시대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인 도”, “북인도”, “남아시아”, “무갈제국의 영토”라는 의미로 영국인들까지 18~19세기에 널리 사용하는 용어였다. 현재는 “Pakistan”과 대조되는 의미 로 사용되는 말이 되어서, 파키스탄에서 인도를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India”로 점차 대체되는데, “India”가 종교적인 함축이 없고 식민 통치 영역의 경계설정에 필요한 만큼의 모호성을 지닌, 그리고 특히 유럽중 심의 용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6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단위에서의 “인도”를 말할 때는 현재의 독립국가 인도라기보다는 인도를 아우르는 남아시아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은 데, “남아시아”(Southasia)라는 용어는 영국에서 사용되던 “인도아대륙”(Indian subcontinent)에 대한 중립적인 용어로 1960년대 이후에 일반화된 용어다.7 특히나 동아시아(East Asia)에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할 때 자주 등장하는 데, 이 말은 인도 외의 주변국들에 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담는다는 말이다.8 “인도”를 가리키는 이름을 어떻게 선택하는지는 곧바로 인도는 물론 인도 를 포함하는 남아시아의 단위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대한 화자의 입장을 밝히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화적 단위로서의 “힌두”라거나 종교적 단위로서의 “힌두교”의 의미와 경계를 설정하는 태도 와 직접 연관된다. 네루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인도”를 가리키는 이름들 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 시대에는 인도를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지 칭할지에 따라 “Bharat”, “India”, “Al-Hind”, “Hindustan” 등 용어를 선택해 서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9
6) Ian J. Barrow (2003), “From Hindustan to India: Naming Change in Changing Names,” South Asia: Journal of South Asian Studies 26(1), pp. 37-49.
7) 영국 캠브리지대학에 The Centre for South Asian Studies가 설립된 것이 1964년이다.
8)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SAARC)의 이름이 “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인 이유도 이 맥락에 닿아 있다. Sugata Bose and Ayesha Jalal (2004), Modern South Asia: History, Culture, Political Economy. 2nd edition. New York/London: Routledge, p. 3[초판 1997,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9) Sharma 2002 참조.
다시 말해서, 역사·문화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인도를 구획해서 부를지에 대해 다양한 기준들이 있었고, 이 다양한 구 분들에 일반인들이 익숙했다는 말이다. “인도”의 의미가 여럿이었다는 멀지 않은 과거는, 지금도 인도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암시해 주 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독립국 인도를 지금의 국경선을 경계로 하는 단위 로 상정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실체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현 실에서 괴리된 태도임이 분명하다.
또한 네루의 경우에서 보이듯 ‘인도’를 ‘힌두(교)’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당시 정치엘 리트들의 관행적 태도였다는 것을 함축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인도”라고 부르는 독립국가 인도는 연방(federation)이 아니라 주들의 연합(Union)이다. 다시 말해서 각 주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고 국가 내부에 설정된 정치적인 단위가 주들이다. 이 주들의 경 계선을 설정한 기준은 언어였다. 이러한 설정은 영국 식민통치권력이 아니 라 인도인 정치엘리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10) 식민시기 독립지향의 정치 활동을 하면서 같은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단위를 지역 단위로 묶어 대중 을 동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11)
10) 강성용(2020), 「쌍쓰끄리땀과 암벧까르(Ambedkar)의 소환 그리고 고대사 재구성과 인 도 현대 정치의 규정요소로서의 언어」, 『아시아리뷰』 10(2), pp. 165-194.
11) 언어에 따른 주 경계 설정은 심대한 정치적 함축을 갖게 되는데 그에 대해서는 강성용 (2020), pp. 169-170 참조.
그리고 이렇게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국가”로 구성된 인도는, 그 정체성 구축의 문제 혹은 국민형성의 문제를 안은 채로 구성된 국가다. 근 대국가로서의 인도가 성립되고 경계가 정해진 것은 식민시기의 역사에 따 른 결과이고, 종교에 따른 분할독립이 이루어지면서 역사적인 인도의 일부 가 독립국이 되어 주변국으로 새로 등장하게 된 것도 영국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보니, 인도가 역사 안에서 구축해 온 정체성의 단위가 지리적이거 나 정치적인 경계와의 불일치하는 일이 많은 상태가 고착화되었다. 이에 따른 다층적인 문제에 인도가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12)
12)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인도의 일부였거나 인도문화권에 속했던 주변국들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거나 인도 내에서 이 문제가 일으키는 파장에 직접 연관되는 경우가 많아서, 외교적인 측면에서 인도는 주변국과의 관계설정에서 지역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인구의 79.8%를 차 지하는(2011년 센서스 기준) 힌두교의 다수독재 정치 풍토의 고착화가 목격되 는 현실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선 인도가 독립 이후 1991년 경제위기를 맞 아 개방경제체제로 전환되기까지 구조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안게 된 맥 락과 종교적 아젠다 설정에 정치지형이 지배되는 과정을 아래에서 짧게 설 명하고자 한다.
3. 경제와 재정의 악순환구조
독립 이후 네루를 중심으로 한 집권층은 명목상으로는 사회주의와 자 본주의를 결합시킨 혼합경제(Mixed Economy) 노선을 천명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 경제노선을 선택한 셈이었다. 양쪽의 장점을 취하겠다는 의도였 지만, 결과적으로 단점만 결합시키게 되었다. 자국산업의 육성을 위해 높은 관세로 수입장벽을 세우고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육성정책을 추진했지만 성과는 부진했다. 특히 국민 대다수의 생존기반인 농업과 농촌을 위한 토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실책이 컸다. 강력한 토지개혁이 불발되 자, 농촌사회의 생존압력이 높아졌고 동시에 낙후된 농촌을 전근대적 씨족 사회의 유산과 카스트 질서 안에 가두어 인도 사회의 저변을 전근대에 묶 어 두고 말았다.13)
13) 여기에서는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가 진정한 인도는 인도의 마을이고 마을 공동체야 말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할 기본 단위라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설파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Tom Brass (2000), Peasants, Populism and Postmodernism: The Return of the Agrarian Myth. London/ Portland, OR: Frank Cass은 다소 과장되거나 성급한 일반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양태가 인도만의 현상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농촌의 생활안정화에 실패하자 생존을 위해 도시지역으로 유입된 과도한 노동예비군들은 한정된 일자리에 대한 저임금노동을 제 공하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제조업을 운영하던 사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고, 일상적 저임금 지불 관행이 불법인지 라 공식적인 고용의 형태를 피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했다. 사업주 입장 에서는 그것이 세금과 노동법 면에서 유리한 선택이었고, 제조업이 영세 자 영업 형태로 남아 규모의 경제나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 다.14) 1901년부터 2020년까지 인도의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서 17%까지 늘어났지만,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서 60% 를 넘어서도록 늘어났다.15) 제조업 분야 노동자들이 숙련노동자가 되어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것이 다시 높은 임금을 가능하게 하고 국가에게 조세 수입의 근거가 되는 구조가 창출되지 못했다.16) 제조업 육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실패하자 세수부족이 일상화되었고, 무역적자가 겹친 쌍둥이적자가 상시화되었다.17)
14) 이러한 구조가 네루식 사회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만 유지된 것이 아니라 1991년 경제 자유화 이후로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데이터는 이러한 상황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5) RBI: Reserve Bank of India, Handbook of Statistics on the Indian Economy 2020-21. . 심지어 20세기 초 뭄바이 와 꼴까따에서는 제조업 노동자 비중이 상당했지만, 21세기 초에는 30% 미만으로 줄 어들기도 했다[Tumbe, Chinmay (2016), “Urbanization, Demographic Transition and the Growth of Cities in India, 1870-2020,” International Growth Center Working Paper (C-35205-INC-1), p. 4].
16) T. K. Arun (2020), “How India Can Fix Its Problem of Not Collecting Enough Taxes [EconomyPolicy],” The Economic Times January 22; Shoaib Daniyal (2019), “Hard Times. It’s Not Only You: Falling Tax Revenues Mean Modi Government Is Feeling the Slowdown Pinch Too,” Scroll.in, December 02.
17) Rathin Roy (2014), Twin-Twin Deficit. National Institute of Public Finance and Policy (NIPFP) One Pager, May.
이는 곧바로 재원부족으로 인한 기반시설 투자 부족으로 이어졌다. 전기와 상하수도와 교통 등등의 기반시설이 부족하게 되자, 제조업 육성은 더욱 불가능해지는 악순환이 고착되었다.18) 1947년 독립 이후 1950~1960년대의 태동기를 지나 인도의 제조업은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허가권통치(Licence Raj/Permit Raj) 19)의 지배를 받 았다.
산업 정책에서 허가권통치는 어떤 주체가 어떤 생산품을 1년 동안 얼 마나 생산할지에 대해서 국가의 허가에 따르는 체제였다. 겉으로는 사기업이 생산 주체인 시장경제의 장점을 국가주도 계획경제와 융합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달랐다. 허가받은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업 체나 공장이 있다면 이는 국가경제의 혼란을 야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가혹 한 처벌이 내려졌다. 그래서 생산성향상이나 기술개발 혹은 경영합리화 같 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성공 여부는 허가의 할당량을 더 많이 받아 내는 일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가장 합리적인 투자는 정치인과 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더 많은 할당량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국가주도의 통제가 가진 비효율성을 따지는 것은 차치하고, 구조적으로 부정부패의 틀이 고착화되 었고 일상화되었다. 모든 권력이 허가권자에게 집중되었고, 허가권은 곧 경 제적 이득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정책결정 주체들의 주도로 허가 취득의 과 정은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게 되었다.20) 1947년부터 1990년까지 ‘힌두성장률’이 자리를 지킨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21)
18) Ajit Ranade (2016), “Stagnant Manufacturing, Raising the Share of Manufacturing in GDP: This Is a Hard Nut to Crack, But Crack It We Must,” Mint., July 13.
19) “British Raj”(영국통치)에 빗대어 라자고빨라차리(Chakravarti Rajagopalachari)가 널리 퍼뜨린 용어이다. 라자고빨라차리는 이 허가권통치에 반대해서 자치당(Swatantra Party) 을 만들기도 했다.
20) 사기업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부 부처 80군데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 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21)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인당 GDP 성장률이 연간 1.3% 정도에 묶여 있는 상황을 조소하는 표현이 바로 “힌두성장률”(Hindu rate of growth)이다.
실제로 이 불합리한 체 제에 대한 수정은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허가권통 치의 관행에 공식적인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1991년 인도의 국가부도 사태였다.22) 그 이후로 본격적인 자유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경제 전반의 효율성과 발전의 성과는 달라졌지만,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는 못한 면이 있었다. 예로 1979년부터 2014년까지 GDP에서 차지하는 제 조업분야의 비중은 25%로 고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23) 악순환의 상황이 바뀌지 않으니, 기반시설 구축에 투자할 재원이 없는 상황에도 변화가 없 었다. 비효율적 경제체제 속에서 각자도생의 노력은 집단이기주의와 맞물려 내각제 정치체제에서 법률의 과잉생산을 불러왔다. 법률 규정으로만 보자 면 국가는 일상의 모든 것에 개입하는 ‘강한 국가’로 자리 잡았지만, 동시에 국가행정의 실행력의 부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약한 국가’로서의 모순 적인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부정부패가 끼어들어 사회적 의사결정 과 정은 더욱더 왜곡되었다.24)
22)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의 저격 때문에 동정표를 얻어 집권한 라집 간디(Rajiv Gandhi) 집권기(1984~1989년)부터 사회주의 지향의 정책에 대한 변화의 흐름들이 있었 지만, 나라씽하 라오(P. V. Narasimha Rao) 수상 집권기(1991~1996)에 이르러 허가권통 치가 공식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까지 누적시키던 인도의 비효율적 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소련의 붕괴를 맞으면서 숨통이 막히는 상황에 직면했고, 1990 년 말 인도의 외환보유고는 3개월 수입분 이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과, 정부의 재정 적자에 의한 디폴트를 선언해야 하는 상황에 치닫고 있었다. 결국 IMF의 긴급 자금지원 을 얻기 위해 국가의 금보유고를 영국과 스위스로 항공편을 통해 내보내야 했다. 세계은 행(World Bank)이 대출을 지원하는 조건 중 하나가 인도경제의 자유화와 구조개혁이었 고, 이에 따라 외국기업의 진출을 자유화하기에 이른다. 공공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이 시 장주도로 공식 전환되는 시점을 1991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구축된 개방경 제에 대한 인도인들의 심정적인 반감은 지금도 일상 속에 남아 수많은 비공식적 장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23) Kinjal Shukla et al. (2017), “Studying ‘Make in India’ from the Lens of Labour Reforms,” Management and Labour Studies 42(1), p. 3. 근거는 재정부(Ministry of Finance) 2014 자료. 제조업 정체의 이유를 과도한 조세부담, 기반시설 미비, 자본조달의 어려움, 숙련 노동의 부재, 연구개발 투자 부재 등등으로 꼽을 수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함께 얽혀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 사태를 심각하게 만든다.
24) 예를 들어 인도의 노동법을 보자. 인도는 노동법으로서 중앙정부 권한 아래 있는 44개 법 률과 주정부 권한 아래 있는 100개의 법률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노동법들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는 거의 7~8%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법의 적용을 받자면 공식적인 고용관계를 가진 노동자여야 하는데 92~93%의 노동자는 비공식노동 에 종사하기 때문이다[Shukla et al. (2017), p. 5]. 따라서 노동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법률의 홍수와 맞물리는 집행력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일상적으로는 집행되지 못하는 노동법이지만, 필요한 경우라면 누구라도 강력한 노동법에 근거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이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외 국기업이 인도에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투자를 망설이게 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많은 사안이 사법부의 판단으로 회귀되었고 결국 정치의 사법화 내지는 사법부의 정치화가 이 루어졌다. 그 자체로도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사법부 조직은 정치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면서 다시 사회적 갈등조정의 비용을 증가시켰다. 대다수의 도시 서민들은 “비공식”(informal)이라고 쓰고 “무허가”라고 읽는 주택단지에서 부족한 전기와 상하수도 공급의 문제를 여러 통로를 통 해 해결해 가면서 산다. 무허가 주택단지에도 여러 편차가 있다. 주거지역 외의 농지에 조성된 주택단지에 사는 사람들부터 국유지에 불법 단지를 조 성해서 사는 사람들이나 슬럼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그 형태는 무척 다양 하다. 그래서 이들은 필요한 상하수도를 얻어 내거나, 정부의 철거결정을 피하거나 혹은 막아 내려고 나름의 조직과 정치적 대리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25)
25) 델리개발청(Delhi Developement Authority: DDA)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세한 것은 Asher Ghertner (2011), “Gentrifying the State, Gentrifying Participation: Elite Governance Programs in Delhi.” International Journal of Urban and Regional Research 35(3), pp. 504-532 참조.
바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해서 정치인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뇌물을 제공하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상당한 조직과 자금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로 성장했다. 이런 사람들에 의지해서 모든 문 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사회운동가이고 서민의 대 변인이며 지역사회의 유지인데,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조직폭력 배이고 범죄자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표현이 모두 맞다고 해야 한다.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INC)의 장기집권과 독주가 이어지던 시대 에는 이들 지역유지들이 해당 지역구의 정치인에 결탁해서 끈끈한 보호자와 추종자(patron-client)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이 부정부패의 체계 적인 매개고리를 형성하면서 지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카스트기반 지역정당들이 득세하면서 INC의 낡 은 지배체제가 와해되기에 이르렀고, 각 정당들은 정치인들 간의 협상을 통 한 지분 나누기보다 대중에게 어필하는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양 상이 고착되었다. 전통적인 보호자와 추종자 관계가 와해되고 나서 새로 구 축된 정치구도 안에서 이 범죄자 겸 지역유지들은 직접출마의 길을 택하 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은 지역기반을 갖춘 이들이다 보니 당선의 가능 성이 높은 것이 당연하고, 각 정당들이 이들을 공천하는 일도 늘어났다. 게 다가 1991년 경제자유화 조치를 통해 정치권력을 분점할 수 있는 사람들 은 국가가 독점하던 다양한 분야의 사업들(토지, 에너지, 미디어, 통신 관련 사 업)에서 지분을 확대하고 막대한 이윤을 거둘 가능성이 늘어났다. 범죄자 그리고 중범죄자의 정치진출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매번 선거마다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26)
BJP의 정치기반인 민족자조봉사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 RSS)이 실제로 장시간에 걸친 지역 현장의 사회사업과 사회활동을 수행한 풀뿌리 조직을 근거로 영향력을 키워 왔다는 사실을 상 기하면, 이러한 지역구 현장에서의 장악력을 가진 이들이 가진 잠재력은 결 코 무시할 것이 아니다.27)
26) 2003년 대법원의 결정으로 국회와 주의회 출마자는 기소 중인 형사사건과 전과 기록을 포함한 정보를 선관위에 제출하고 이 정보가 공개되도록 제도화되었다.
27) RSS에 대해서는 Walter Andersen and Shridhar D. Damle (2019), Messengers of Hindu Nationalism How the RSS Reshaped India. London: Hurst and Co. 참조.
“정치의 범죄화”(criminalization of politics)로 불리는 일이 이제 인도 정치권의 일상이 되고 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중산층이 주도한 생활기반시설의 배타적 이용이 정치의 범죄화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모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 을 들여야 하는 고비용 구조를 고착시켰다. 이 고비용 구조가 국가의 기반시설 구축사업 추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28)
28) 강성용(2022), 「제8장 인도 스마트시티미션의 가능성과 한계: 신흥중산층을 통해 본 사회·정치적 맥락」, 『남아시아의 스마트시티: 구조와 방향』, 손정렬 외, 과천시: 진인진, pp. 317-379에서는 ‘생활공간의 재편’이라는 맥락에서 연관된 상황을 서술한 바 있다.
4. “만달 대 만디르”(Mandal vs. Mandir) 정치 구도
허가권을 쥐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하게 보이는 국가권력이, 동시에 가장 기초적인 생활기반시설, 상하수도와 위생시설 그리고 전기나 주택과 교통과 치안시설마저 제공하지 못하는 취약한 국가권력이라는 이율배반적 인 상황이 인도에 고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종교와 카스트 혹은 직 업군이나 지역 등등 집단 단위의 각자도생 경쟁 구도를 고착시켰고, 독립시기 인도 지배층들이 가장 우려했던 종교집단주의(communalism)를 강화시켰 다.
독립시기에는 인도 독립을 이끌었던 INC를 중심으로 한 주도세력의 권 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황이 당분간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경제의 실패는 물론이고 만연한 부정부패의 체계적 안착을 낳은 INC의 실패는 유 권자들에게 도덕적인 대의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각자도생의 투표성향이 구체화되도록 만들었다. 소선거구제이면서 최다득표자가 당선되는 방식의 선거제도가 유지되는 하에서 모든 선거구에 서 각 선거구의 표를 결집시킬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은 바로 현장의 선거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지배적 카스트(dominant caste) 29) 집단을 표밭(vote bank) 으로 일구어 내는 것이었다.
29) “지배적 카스트”라는 말은 상위 카스트나 권위를 지닌 기득권 카스트가 아니고 수적으로 해당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켜 나 가는 카스트를 말한다.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면서 결국 사회·문화적 권위를 가진 집단이 아니라 가장 많은 표를 가진 집단이 득세하는 상황이 물밑으로 전개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INC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개별 선거구마다 다수를 차지하는 카스트들을 기반으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카스트기반 지역정당들이 대두되고 이들이 선거에서 승 리를 이어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INC를 고정축으로 두고, 각 지 역 정당들이 중앙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하는 체제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카스트의 정치화가 구체화된 것이다. INC나 BJP와 같은 중앙 정당들은 이 들 지역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표밭을 관리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 었다. 카스트기반 지역정당들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장 많은 유권자를 보유하고서도 지배층의 권위에 눌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집단들이었는데 이들을 크게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을 “여타후진계층”(Other Backward Classes: OBC)이라고 할 수 있다.30)
30) 이 용어는 인도 정부가 사용하는 공식 용어인데, 실제로 OBC는 “Other Backward Caste” (여타낙후카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실질적인 의미는 이미 인도 대 법원에서도 확인해 준 바이다. 흔히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고 불리는 천민들은 SC(Scheduled Caste)로 그리고 인도 밀림지역 등에 원시부족의 형태로 거주하는 사람들 은 ST(Scheduled Tribe)로 인도 헌법에서 보호된다. 전체 인구에서 SC는 16.6% 그리고 ST는 8.6%를 차지하는 것으로 2011년 센서스는 파악한다. 1950년 헌법에서 SC는 1,108개 카스트를, ST는 744개 부족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은 할당제와 역차별 정책의 대상이 었다. 그런데 교육이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SC와 ST가 아닌 여타 카스트들을 따로 분류해서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여기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OBC 를 구성한다. OBC의 총 규모가 인구의 52%에 달한다(Mandal Commission report, 1980) 거나 41%라는 추정(National Sample Survey Organisation, 2006)이 있지만 정확하게 조 사되고 파악된 적이 전혀 없다. OBC는 대부분 슈드라(Śūdra)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ST는 종종 “원주민/선주민”(Ādivāsi)이라고 부르는데, 힌두전통 사회체계에 편입되 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모든 그룹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일반”(general)이라 고 한다.
이들을 선동해서 동원하고 정치 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묶어내는 데에는 기존 정당의 의사결정 체계라거나 대의적인 의사결정체계는 경쟁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 졌고, 표를 가진 대중들에게 직접 “서민”임을 자부하며 호소하고 포퓰리즘 에 입각한 구호와 정책을 제공하는, 개인으로서의 정치적 지도자의 개인 역량에 정치적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 자가 되기 위해서는 유권자와 같은 집단에 속하고 그들과 같이 느끼며 생 각하노라 하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를 강화시켰으며 현재 인도의 정치를 지배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모디는 대중매체를 활용한 상징정치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31)
그 부작용이 바로 공식 의사결정구조의 무력화 현상이다.32) OBC는 어림잡아 인도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집단이다. 결국 이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선거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관철 시킬 수 있는 상황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흔히 달릳(Dalit)이나 아디바씨 (Adivasi)로 분류되는 최하층민들의 경우에는 일상생활 안에서 물리적인 접 촉이 거부되거나, 쓰레기나 배설물 혹은 시체를 다루는 직업 등 직업상 터부시 되는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고, 거주지가 분리되어 있는 집단들이어 서 다양한 사회적 종교적 차별이 일상에서 관찰가능하며, 규모가 작아 다른 집단들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달릳과 아디바씨를 대상으로 한 할당제가 정치적으로 문제된 예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민주주 의 정치제도에서 유권자수로 압도적인 위치에 있는 OBC의 경우에는 다른 위상을 갖는다.33)
31) Nagesh Prabhu (2020), Middle Class, Media and Modi: The Making of a New Electoral Politics, New Delhi: SAGE.
32) 이 문제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 특히나 심각하게 대두된 바 있다. 모디 총리를 중심 으로 한 총리실의 ‘실세’들이 현안의 공적 책임을 지는 조직이나 담당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문제들이 종종 노출되었다.
33) 한국의 독자들은 많은 경우 네 계급으로 사회집단을 구분하는 종교적인 명목상의 구분인 바르나(varṇa)와 카스트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OBC에 대한 오해를 갖는 경우 가 많다. 바르나의 맨 하층에 있는 슈드라(śūdra)를 “다른 상층 바르나들을 위해 일하는 계급”이라는 의미로 힌두고전에 따라 이해하고 “노예, 하인”이라고 번역하다 보니 한국에 서는 “śūdra”를 노예무역시기의 흑인 노예나 한국 전통사회에서의 노비처럼 생각하는 경 향이 있다. 실제로 어떤 직업과 어떤 집단이 슈드라(śūdra)에 속하는지 자체가 고대부터 불분명했고, 대부분의 슈드라에 속하는 카스트들은 농부와 수공업자들이다. 모두들 기피하는 전쟁에 동원되는 슈드라들도 많다 보니 전사로서의 전문성을 지닌 경우도 많아서, 고중세 인도에서는 건국을 하고 왕이 된 슈드라 출신 왕도 흔했다.
그리고 이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진전된 토지개혁 그리고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해 추진된 녹색혁명 정책이나 국가의 보조금지급 정 책의 수혜자들도 있어서, 지주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 난 소규모 혹은 중규모 자영농의 위치까지 발전한 집단을 구성하는 경우들 이 있었다. 또한 이들 중의 일부는 카스트 질서가 느슨한 도시지역에서 자 영업자로 성공하거나 혹은 전통 카스트사회에서 세습되던 직업을 기반으 로 그 직업에 해당하는 분야를 해당 지역에서 독점하는 독점 공급자의 위 치에 이르는 경우들도 많았다. 이러한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기적으 로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들의 정치세력화가 눈에 두드러진 사회적 논쟁거리로 공식화된 것은 1990년에 들어서의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1990 년에만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정치세력화가 1990년에 구 체적인 정치세력화로 표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말은 OBC들의 “소리없는 혁명”34)이 인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변화는 인도의 사회·정치지형을 결정하는 최대 변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선거제도 안에서는 OBC를 이길 수 없게 된 기존의 기득권 집단은 이제 OBC에 대한 상층 카스트가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카스트와 무관한 모습으로 인도사회에서의 위치를 재설정하게 된다.35)
34) Christophe Jaffrelot (2003), India’s Silent Revolution: The Rise of the Low Castes in North Indian Politics, New Delhi: Permanent Black.
35) 정채성(2014), 「인도 신중간계급의 사회경제적 성격 및 기타후진카스트 집단과의 관계 연구」, 『인도연구』 19(1), pp. 69-108.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인도 정치의 큰 틀은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흥중산층과 OBC 의 시소게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흥중산층이 ‘신흥’인 이유는 1991년 경제자유화조치와 맞물려 위상이 강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OBC에 대응하면서 새로 구축된 기존의 카스트 체제에 따른 권위가 아닌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권위로 무장한 기득권층이기 때문이기도 하 다. 그래서 ‘신흥중산층’은 실제로 인도에서 ‘신흥부유층’과 동의어의 어감을 갖는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대변하는 표어적인 표현이 “만달 대 만디르”(Mandal vs. Mandir)이다. 1979년 1월 데싸이(Morarji Desai) 총리 집권기에 카스트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할당제시행 검토를 위해 후진성(backwardness)을 정해진 11개 지표에 따라 검토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 위원회의 의장을 맡은 사람이 만달(B. P. Mandal) 이어서 통상적으로 이 위원회를 “만달위원회”라고 부른다. 만달위원회는 1980년 12월 30일에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공무원직과 공립대학 정원의 27%를 OBC 에게 할당할 것을 권장한다. 그렇게 한다면 기존의 할당에 보태어 결국 공무원 정원과 공립대학 입학 정원의 49.5%가 할당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 었다.
1990년에 당시 수상이었던 씽(V. P. Singh)은 이 할당제를 제도화하려고 시도했는데, 엄청난 저항과 반대운동에 봉착했다.36)
36) 한국의 독자들이 실감하기 어려울 만큼 저항이 강했는데, “고스와미”(Rajiv Goswami)라 는 1990년 당시 델리의 대학생이 9월 19일에 분신을 시도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많은 학생 들이 인도 전역에서 분신 시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주도의 경제이고 그 효율성이 극도로 낮은 사회에서 공무원직은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 는 직업 중 하나였다. 그리고 공무원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변호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업에 진출해서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루자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대학입시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할당제를 통해 합격자가 정해지게 된다면, 보다 나은 교육을 받고 좋은 성적을 얻는 상층 카스트의 학생들은 상대적인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1991년 이 후 본격화된 민간부문 주도의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본격화하기 전에는 공무원직과 대입정원의 확보는 대가족 위주로 경제생활을 유지해 가던 인도의 일반인들에게 가족 전체의 미래와 존립이 걸린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만달위원회의 권고대로 일반적인 할당제가 인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관철되지는 못했다. 산발적으로 할당비율을 조정해 가면서 주정부 단위의 할당제 시행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모든 움직임들은 OBC와 만달을 인도 정치권 최대의 쟁점으로 남겨 두게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OBC가 지닌 표의 힘이 확인되고 나서 기존의 OBC가 아닌 기득권층은 카스트 단위와는 무관한 경제적 계층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다시 단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인도의 (신 흥) 중산층’이다. 이들은 이제 카스트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실력과 능력이 기준이 되는 ‘공정’을 내세우고 자유시장경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주장하 는 집단으로 대거 등장하였는데, 시골지역 출신의 일부 부유한 OBC들도 여기에 가세할 수 있는, 도시지역 거주자이며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 루어진 나름대로의 차별성을 가진 집단을 구성해 낸다. 이 신흥 중산층은 인도 언론시장의 최대 소비자 집단이고 고학력층이며 언론을 장악하고 있 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인 제도와 선거경쟁을 통한 OBC와 정면 대결은 피하는 방식의 기득권유지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주로 교육이라는 실질적인 장벽을 높이는 방식으로 중산층 지위를 대물림해서 재생산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인도의 입시교육과 교육시장의 경쟁이 한국의 경우에 비해 결코 경쟁의 강도가 약하지 않은 구도가 이루어 지는 맥락이다.
인도의 신흥 중산층은 카스트가 아닌 보다 보편적인 정체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인도사회의 이념적 주도권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 면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새롭게 힘을 얻게 된 것이 바로 힌두민족주의 혹은 힌두근본주의(hindutva)이다. 소수자인 무슬림들을 타자화하고 배제시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을 택해서, 카스트와 무관하게 모든 힌두들(만)을 ‘진정한 인도인’으로 만들어 내는 흐름이 강해진 것은 극우 힌두극단주의자들의 노력이나, BJP와 같은 정당의 우민화 정책이나, 모디 총리를 중심으로 한 대중매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에 그치지 않는, 보다 깊은 사회적 흐름에 올라탄 강력한 추동력을 가진 경향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누구나 도시지역 거주 고소득자가 되면 중산층에 편입되고 기득권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진입장벽은 사회적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들에게만 계층 재생산을 가능하게 만 들어 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배제된 OBC의 좌절감과 적대감은 무 슬림을 향한 적개심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게 되었다.37)
이제 독립시기 INC 를 이끌던 정치엘리트들의 세속주의와 정당 내의 대의정치 제도를 존중하던 관행은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터진 사건이 바로 라마사원을 둘러싼 극렬한 대립이었다. 1980년대부터 힌두민족주의 조직 연합체인 민족자조봉사단연합(Sangh Parivar) 38)에 속하는 세계힌두평의회(The Vishwa Hindu Parishad: VHP)가 라마 (Rāma)가 출생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아요댜(Ayodhya)에 라마사원을 건립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한다.
37) Rajeev Ranjan Kumar and Muhammad Rizwan (2021), “Hindutva Philosophy Reinforcement by the RSS/BJP against Minorities and the Economic Performance of Narendra Modi’s Government in India,” International Journal on Minority and Group Rights 28, pp. 351-366은 실제 최근의 경제 통계는 BJP가 경제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 하고 있으며, BJP/RSS의 정치적 지향이 경제개발이 아니라 무슬림의 배제와 하층민의 적대정책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38) RSS를 중심으로 구성된 연계 단체들의 연합이다.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자리는 “바브르의 모스크”(Babri Masjid)라는 이슬람사원이 세워져 있는 자리였고, 이 이 슬람사원이 라마신을 모욕하기 위한 모슬렘 권력자들이 만행을 저지른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 실제로 힌두교 사원이 존재한 적이 있는지 여 부에 대해 끊임없는 역사논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했 다는 주장과 반박이 이어졌고 소송에 소송이 줄을 이었다.
역사 재구성운 동이 정치의 한 복판에서 전개되었다. 1989년 11월 VHP는 바브리 모스크 (Babri Masjid) 인근에서 라마사원 정초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 12월 6일 VHP와 BJP가 15만 명의 자원자들(kar sevak)을 동원하자, 바브리 모스크에서 폭력적인 충돌이 벌어졌고 이들은 치안유지 인력들을 제압하고 이슬람 사원을 파괴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인도 전역에서 힌두와 무슬림 집단 간 충 돌(intercommunal riot)이 벌어졌다. 이 충돌에서 죽은 사람만 최소 2,000명으로 파악된다. 이슬람사원이 파괴되던 다음 날 파키스탄에서는 30개의 힌두교사원이 공격받아 파괴되거나 방화되었다고 알려진다. 방글라데시에서도 힌두사원이 공격받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이 복잡다단한 사건은 인도사회 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건드린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수많은 논쟁과 대립과 폭력이 오갔고, 결국 2019년 대법원은 ‘아요댜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결정은 해당 부지를 라마사원 건립을 위해 인도정부가 설립하는 신탁기금에 넘겨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슬람사원 재건을 위해 5에이커의 별도 부지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2020년 2월 5일 모디 정부는 라마사원 건립계획을 승인했다고 의회에서 천명했다. OBC들을 향한 정책과 정치적 지향을 “만달”이라고 부르고, 이에 반하여 힌두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책 과 정치적 지향을 “만디르”39)라고 부른다.
39) 원래 “사원”을 뜻하는 힌디 단어인데, 라마 사원을 짓기 위해 힌두 극우단체가 벌인 아요 댜에서의 무슬림 사원 파괴와 연관된 흐름을 부르는 이름이다.
라마사원을 부르는 이름을 “람만디르”(Ram Mandir)라고 한다. 그래서 만달 대 만디르(Mandal vs. Mandir)로 1990년 이후 인도의 정치지형을 압축해서 부를 수 있다.
결국 선거에서 표 결집의 힘을 가진 OBC와 여타 다른 모든 사회적 역량에서 기득권을 지닌 신흥중산층의 대립구도가 인도 정치구도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스트정치(만달)와 힌두근본주의정치(만디르)의 대립구도는 인도의 정치지형을 크게 바꾸었다. 이 두 진영 모두가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소속감을 공유하는 한 정치 지도자가 대다수의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나갔다. 독립과 함게 인도식 ‘세속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된 인도의 근대화가 경제적 실패를 낳고 말았고, 이 때문에 경제결정론에 입각한 단순화된 시도를 통한 봉건 잔재 청산이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인도는 근 대국가로서의 정체성 구축에 실패한 셈이고 이것은 위험한 정치적 진공을 만들어 냈다. 이 진공을 채워 넣는 정치적 시도들이 카스트정치(만달)와 힌 두근본주의정치(만디르)의 대립구도를 통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맥락에서 아요댜 사태로 대표되는 흐름이 바로 후자이고, 이 흐름은 기존의 전통사회 내의 기득권자들을 OBC와의 대칭점을 이루는 신흥중산층이자 자유시장경 제와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주체로 묶어냈다. 바로 이 맥락을 설명하기 위 해 앞선 다양한 주제들이 언급되고 설명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 해야 하는 것은 정체성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가 힌두근본주의정치(만디르) 흐름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의정치적 의사결정 구조를 무시하고 지도자 개인의 포퓰리스트적인 호소와 정서적 구호를 통해 정치력을 유지했던 전형적인 시도가 이미 INC의 권력유지가 한계점에 도달했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집권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인디라 간디가 1971년 내세운 선거구호 “빈곤 추방”(garibi hatao, 가난을 없애자!) 구호는 시골지역의 지배적 카스트들이 고향지역의 선거구를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이주민으로서 중산층에 편입된 채로, 고향의 세력과 연계되어 있으면서 고향의 지배적 카스트가 아닌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에 맞서기 위한 대응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략은 지배적 카스트들과는 다른 입장에 있던 달릳과 아디 바씨로 대표되는 극빈층들은 물론이고 도시빈민층을 규합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카스트정치에 기반한 만달정치에 맞서기 위해 인디라 간디가 구사했던 포퓰리즘 전략은 지금의 BJP가 구사하고 여타 지역정당들이 구사하는 포퓰리즘 전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BJP의 포퓰리즘이 코로나-19 2차 대유행을 맞아 중산층의 분노를 샀으니, 중산층이 이제 BJP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분석은, 포퓰리스트 정치가 논리적으 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극우 만디르 정치와 연계되어 있다는 표면의 현상만을 주목하는 단순논리에 불과하다.40)
40)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INC를 내부에서 붕괴시킨 인디라 간디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데 이에 대한 최근 연구가 Christophe Jaffrelot and Pratinav Anil (2021), India’s First Dictatorship: The Emergency, 1975-77, London: Hurst & Company이다.
‘만달 대 만디르’ 구도 자체가 포퓰리즘에 입각한 정체성 정치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경제의 효율화와 시장논리의 관철은 모든 것이 국가의 배분에 달려 있 던 상황에 변화를 가져왔고 인도사회의 불평등을 경제적으로 강화시켰지 만, 만달 대 만디르 구조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침 만달정치가 구체 화될 즈음 인도는 경제개방의 흐름에 휩쓸리게 되었다. 결국 민간부문의 더 좋은 일자리와 민간부문의 더 경쟁력 있는 기업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 면서 공무원직과 대학정원 할당이 크게 중요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고 말 았다.41) 결국 만달정치는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이기보다는 오직 정치적인 아젠다였던 셈이다.42)중산층이라고 불리는 기득권자들이 여론형성의 주도 세력이며 월등한 교육과 문해력을 지닌 집단으로서 언론을 장악하고 힌두 국수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이루어진 만디르정치는 1990년대 만달과 만디르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았고 결국 1999년 BJP의 집권 이후 인도의 정 치적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모디 총리로 대표되는 이 정치집단 은 경제적 자유화와 힌두국수주의가 결합된 인도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이 흐름이 2022년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43)
41) 만달정책의 의도가 농촌사회의 인력을 유동화시켜 부가가치 창출이 용이한 산업분야에 유입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힌두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점차 세력을 넓혀 가는 정치집단에 대항하기 위한 INC의 정치적 판단이었다는 평가도 항상 함께한다.
42) Christophe Jaffrelot (2006), “The Impact of Affirmative Action in India: More Political than Socioeconomic.” India Review 5(2) 173-189.; Leela Fernandes (2006), India’s New Middle Class: Democratic Politics in an Era of Economic Reform, Minneapolis/Lond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43) 만디르정치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될 만한 사건이 2002년 구자랃학살(Gujarat pogrom)사 건이다. 현재 BJP의 리더이자 총리인 모디가 당시 구자랃 주지사였다.
5. 인도의 “종교”와 “세속주의” 개념
권위주의 정부의 등장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 왔지만, 인도 에서 현재의 정치·사회적 흐름을 반지성주의로 분석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 거나 제한적이다. “Love Jihad”과 같은 이슬람과 파키스탄 관련 음모론이 넘 쳐나고, 이익집단 단위의 갈라치기 정치에 몰입하는 집권당이 있고44) 전문 가 집단의 의견이나 객관적인 자료들을 무시하는 지적인 풍토가 역사 재구 성이나 소수자 차별 등등의 문제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상황은 일견 “반 지성주의” 풍토가 지배적인 사회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는데 말이다. 언론 의 보도나 학적 논쟁의 면에서 반지성주의가 언급될 때에는 대부분 극우편 향의 BJP정부가 힌두근본주의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테러를 직·간 접적으로 조장한다거나, 혹은 비판적 지식인 집단이 주류를 이루는 대학에 예산삭감 등의 불이익을 주는 행위, 학술연구 지원활동을 제한하는 행위 등 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담고 있다.45)
44) BJP가 OBC들의 절대 다수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헤게모니를 장악한 중산층을 근거로 선거에 승리하면서 집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각 OBC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 상충을 통한 정치적 분열을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주 정부 단위에서 공식적으로 센서스에서 카스트 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조사를 통해 미래의 정책을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설계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2021 센서스에 카스트 조사를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중앙 정부의 입장을 만드는 원인이다. Love Jihad과 그 맥락에 대해서는 Christophe Jaffrelot (2019), “The Fate of Secularism in India.” Milan Vaishnav ed. The BJP in Power: Indian Democracy and Religious Nationalism. Washington DC: Carnegie Endowment, p. 55 참 조. 이와 연관된 가장 최근의 큰 변화는 바로 경제적 취약계층(Economically Weaker Section: EWS)으로 할당제를 확대한 2019년의 103차 개헌의 내용이다. 최근 2022년 11월 7일 대법원의 3 : 2 판결로 이 개헌은 합헌판정을 얻었고 이를 통해 할당제가 경제적 기준을 근거로 재조직되는 변화가 공식화되었다. 45) 인도의 The Economic Times는 2016년 3월 15일자 기사로 “BJP the most ‘anti-intellectual’ party: Ramchandra Guha”를 게재하면서 저명 역사학자인 구하(Ramachandra Guha)의 Penguin Spring Fever festival에서 이루어진 강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해당 강연 의 내용을 보다 충실하게 전하고 있는 보도는 잡지 Outlook에 실린 기사(https://www. outlookindia.com/newswire/story/modi-govt-most-anti-intellectual-dispensationramchandra-guha/927836, 접속일: 2021.11.30.)를 보라.
즉 인도에서 반지성주의를 논할 때에는 제도권 연구자들을 향한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범위가 한정되어 언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BJP로 대표되는 정치세력화된 힌두극단 주의가 인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루어질 때에는 “포퓰리즘, 극단주의” 라는 개념이나 아니면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고 보인다. 그리고 이 많은 꼬리표 옆에는 거의 항상 “극우”라는 작은 표식 이 함께 붙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대표적인 예로 사회주의적 지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네루대학(Jawaharlal Nehru University)과 BJP 정부 간의 대립과 긴장관계를 꼽을 수 있다. 최근 2020년 11월에는 모디 총리가 네루대학 캠 퍼스 안에 비베까난다(Swami Vivekananda)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 로 BJP의 사무총장 라비(C. T. Ravi) 등이 나서서 네루대학의 이름을 “Swami Vivekananda”로 고칠 것을 제안하고 여러 정치인들이 이를 공론화했다. 즉 시 야당이자 간디-네루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INC 측의 반대 성명이 있었 지만, 이런 작은 에피소드들이 모두 네루 주도의 세속주의에 대한 힌두국수 주의자들의 반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인다. 특정한 정치적 흐름을 어떤 개념의 틀에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은 실제 로 해당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그에 대해 반작 용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어서 분명하게 이에 대한 분석과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그리고 필자가 판단하기에, 힌두근본주 의까지를 포괄하는 “종교”에 대한 담론이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질 때에, 호 프스태터(R. Hofstadter)가 미국 반지성주의의 뿌리를 프로테스탄트적 복음 주의에서 찾았던 것과는 크게 다른 “종교” 혹은 “종교”에 대한 담론이 인도 에 구축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외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네 루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사용되는 현실에 대한 불 편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종교”라는 말은 모든 정확한 의미(만약 있었다고 한다면!)를 잃어버렸고 혼란만 야기하며 끝없는 논쟁과 논거들만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말 자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46)
하지만 네루는 곧바로 종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를 표명하고 있다: (종교는) 개인의 내적 발전으로 이루어지는데, 좋다고 간주되는 특정한 방향으로 그 개인의 의식이 진화에 가는 것이다. 무엇이 그 방향인지는 다 시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한, 종교는 이 내적 성장 을 강조하는 것이고 외적인 변화는 이 내적 발전의 투사로 간주한다.47)
이 두 인용구에서 표명되는 입장은 네루가 종교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 해하고, “종교”라는 개념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48) 이 두 가지 의미가 혼동되면서 사용되어야 하는 용어인 “종교”라는 말에 대해 네루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한 것이다.
46) S. Gopal and U. Iyengar (eds.) (2003), The Essential Writings of Jawaharlal Nehru, Vol 1,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p. 135 [Rajeev Bhargava (2018), “Nehru against Nehruvians: On Religion and Secularism,” Smita Tewari Jassal and Halil Turnan, eds., New Perspectives on India and Turkey: Connections and Debate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p. 113에서 재인용]: The word ‘religion’ has lost all precise significance (if it ever had it!) and only causes confusion and gives rise to interminable debate and argument. It would be far better if it was dropped from use altogether.
47) Gopal and Iyengar (2003), p. 135 [Bhargava (2018), p. 114에서 재인용]: (Religion [sic]) consists of the inner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the evolution of his consciousness in a certain direction which is considered good. What that direction is will again be a matter of debate. But as far as I understand it, religion lays stress on this inner development and considers outward change as the projection of this inward development.
48) Bhargava (2018), p. 116.
네루가 생각했던 종교에 대해 두 형태를 구분하자면 하나는 ‘궁극적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적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9) ‘궁극적 종교’는 인 간이 인간다운 삶에서는 피할 수 없는 도덕성과 사회성의 근원이자 진정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며, ‘관습적 종교’는 개별적인 사회집단들이 각자의 전통에 따라 행하는 종교적 관습의 총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네루도 간디와 마찬가지로 ‘궁극적 종교’가 진정한 종교라고 생각 했고,50) 인간적인 삶은 물론이고 정치라는 사회활동이 이것 없이 불가능하 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관습적 종교’는 개별 집단들이 공유하는 전통에 따라 제도화된 종교를 의미하는바,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활동이 개입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궁극적 종교’가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실체성을 가진 것인지, 그리고 이 두 차원의 종교가 갖는 간극에 대해 진지한 고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51) 이 말은 “종교” 개념에 대응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세속적”(secular)이라는 개념도 네루에게는 마찬가지 논리에서 사용하기 불편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동시에 “세속주의”도 “종교”와 마찬가지의 이중구조를 가진 개념으로 이해되었 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만든다.52)
49) Rajeev Bhargava (2018), p. 116에서는 “religion A”와 “religion B”라는 용어로 중립적 표 현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서술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이해하는 바대로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라는 용어로 구분하고자 한다.
50) Bhargava (2018), p. 116.
51) 기리[Saroj Giri (2010), “Hegemonic Secularism, Dominant Communalism: Imagining Social Transformation in India,” Rethinking Marxism 22(1), p. 135]의 아래 경고는 이 두 종교 형태의 간극이 갖는 사회적 위험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The “inner spiritual domain,” ..., might then be the basis of anticolonial nationalism, but it would itself be the constitutive outside of colonial state power, a moment in the latter’s reproduction.
52)네루의 다음 언급에 주목할 만하다: “The word ‘secular’ is perhaps not a happy one. And yet for want of a better term, we use it and call our state a secular state” [Gopal and Iyengar (2003), p. 192. Bhargava (2018), p. 116에서 재인용].
네루를 중심으로 한 정치 엘리트들이 독립 전후 가장 첨예한 문제로 항 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문제가 바로 종교집단주의(communalism)의 문제였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이들이 채택한 노선이 세속주의였지만 이때의 “세 속주의”는 네루가 “종교”를 이중구조의 틀에서 다루듯 이중구조를 가진 인 도만의 세속주의였다. 다시 말해서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의 개입을 차단한 다는 전통적인 세속주의가 아니라, 모든 종교를 차별 없이 공평하게 지원 한다는 의미를 가진 인도식 세속주의가 자리 잡게 된 맥락이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루가 1961년에 밝힌 그의 세속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자면 이 렇다: 우리는 인도에서의 세속주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힌디어로 “세속 적”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좋은 단어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종교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 의미는 국가가 모든 신앙들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그것들에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53)
53) Sarvepalli Gopal (ed.) (1980), Jawaharlal Nehru: An Anthology,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p. 330 [Jaffrelot (2019), p. 52 재인용]: We talk about a secular state in India. It is perhaps not very easy even to find a good word in Hindi for ‘secular.’ Some people think it means something opposed to religion. That obviously is not correct. What it means is that it is a state which honors all faiths equally and gives them equal opportunities.
그러다 보니 네루도 암벧까르(B. R. Ambedkar)도 헌법에 “세속적”이라 고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헌법 25~28조에 규정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규정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나중에 1976년에 이루어진 42차 헌법개정에 가서야 헌법 서문에 인도가 세속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들의 배후에는 근현대 인도의 역사 안에서 “종교”(religion) 의 개념이 수용되고 이와 연관된 다른 개념들의 재구성이 이루어진 독특한 맥락이 자리 잡고 있다. 유럽에서 19세기에는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등장하면서 정치지형이 재구성되었고,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추동되 었으며 사상 면에서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지배하고 있었다. “근대”라고 부 를 수 있는 구성요소들이 구체화된 것이다. 이 와중에 새롭게 정의되고 정 립된 것이 바로 “종교” 개념이다. “종교”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 신학전통 내에서 설명의 도구로 등장한 범주이고 “신비주의”(mysticism)와 마찬가지 로 문화적으로 특정한 맥락과 시대성을 갖는 사회적 구성물이다.54) 이렇게 근대적인 “종교” 개념을 관철시킨 대표적인 사례로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에서 활동하던 베르나르(Jean Frederic Bernard)가 텍스트를 작성하고 출간과 정을 이끌었으며, 피카르(Bernard Picart)가 판화를 작성해서 만든 방대한 양 의 책 Ceremonies et Coutumes Religieuses de tous les Peuples du Monde55)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만든 두 사람 모두 프랑스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한 난민이자 신교도였다. 이 책에서 베르나르는 종교에 대한 미몽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각자가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 장했고,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형태의 근원적인 종교(natural religion) 56)가 존 재한다고 생각했다.57) 이렇게 자연종교 혹은 합리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들을 이해하고 다루는 일에 적용되는 흐름은 점차 강화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 “영성”(spirituality) 58) 개념을 동원한 종교 에 대한 이해가 대두되면서 인도의 종교들까지를 아우르는 흐름을 형성하 게 된다. 그리고 인도의 자기이해도 이와 맞물려 큰 영향을 받게 된다.
54) Richard King (1999a), Orientalism and Religion: Postcolonial Theory, India and ‘The Mystic East,’ London/New York: Routledge, p. 40.
55) 영어판 Religious Ceremonies of the World는 1733~37년에 출간되었다.
56) 자연현상에 대한 숭배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종교”가 아니고 사상사의 흐름 안에서 신의 계시와 무관하게 이성과 논리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의 “자연종교”를 말한다.
57) Lynn Hunt et al. (2010), The Book That Changed Europe: Picard and Bernard’s Religious Ceremonies of the World,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58) 이 개념이 초기 기독교 그리고 로마시대 기독교 교회에서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논의거리는 아니다.
기독교 전통 안에서 영성(spirituality)을 이해하던 흐름과는 다르게 19세기에 들 어서면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을 중심으로 한 초절주의/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에서 드러나고 신지협회(Theosophical Society)를 중심으로 한 신지주의(Theosophy)의 흐름에서 구체화된 것은 19세기의 정신지형안 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종교전통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 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개념은 쌍쓰끄리땀에도 상응하는 개념이 없는 이질적인 개념이었고 이것을 통해 식민지가 된 아시아의 종교들 이 유럽의 종교들과 조우하는 틀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유니테리언교리(Unitarianism)가 전해지고 이것이 자극이 되어 로이(Ram Mohan Roy)의 브라흐모 사마즈(Brahmo Samaj) 운동이 구체화되고 개혁힌두교(neo-Hinduism)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흐름이 인도 내에서 대중화된 이후 비베까난다(Swami Vivekananda)의 신베단따(neoVedānta)를 통해 서구로 재유입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59) 이러 한 흐름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세속주의를 논할 때 유럽의 국민국 가를 배경으로 논의되는 세속주의에 대한 이해를 인도 상황에 투사하지 말 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종교 상황은 구체적인 공동체 단위와 얽혀 있 는 종교(communalized religion)이고 이러한 사정은 종교를 사적 영역으로 자 리매김할 때 유럽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맥락이 발생한다는 뜻이 다.60)
59) King (1999a).
60)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인도의 세속주의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아니라, 정치가 모든 종교를 동일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해되고 또 그렇게 명문화되었다.
세속주의는 계몽주의 담론 이후로 구축된 공적 영역(public)과 사적 영 역(private)의 구분과도 맞물린 흐름에 닿아 있고, 근대기에 종교가 공적영역 이 아닌 사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맥락이기도 하다. 이렇게 과학 과 이성이 지배하는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으로 종교를 자리매김하는 일에서, 종교를 비이성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일에 자주 동원된 개념이 “신비적”(mystical)이다.61) 그리고 이렇게 신비체험의 영역으로 밀려난 힌두와 불교전통은 합리성이 지배하는 공적 영역에서의 발언권을 잃게 된다(King 1999a: 28ff.). 이러한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기독교의 모델에 상응하는 힌 두교가 구성될 필요가 절실했다. 개별 공동체 단위의 다양한 종교적 관습 들이 혼재하는 인도의 현실 속에서 통일된 “교리를 담은” 힌두교가 정립되 어 제시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비베까난다인데, 이 인물 이 일원론적 베단따(Advaita-Vedānta)를 중심으로 한 교리와 세계관이 중심 이 되는 힌두교를 구성해 냈다.62)이러한 맥락에서 구성된 힌두교는 몇 가지 구성 원칙에 따라 서구의 “종교”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면모를 보이는데, 그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킹(Richard King)이 “경전 편향”(Literary bia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63)
61) King (1999a), p. 25.
62) Yelle 2013이 이러한 측면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적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작에 서 유럽의 전통과 인도를 향한 개입을 단선적으로 파악하고 인도의 반작용과 되먹임의 과정에 대한 단순화가 문제점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이러한 “Protestant literalism”의 성격과 맥락을 역사적인 과정 안에서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은 분명하다.
63) King (1999a), p. 43.
즉 모든 종교는 근본 경전을 상정하고 그 텍스트와 해석에 따라 종교에 관한 모든 궁극적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는 편향을 말한다. 유럽의 역사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18세기 이래의 인쇄본 텍스트 의 대량생산 및 대량유통과 맞물려 유럽은 문해율의 증가를 경험하게 되고, 종교적 진리에 대한 개인들의 직접적인 접근/이해를 조장하고 강조하게 된 다. 결국 종교는 텍스트에 근거한 진리를 개인이 확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된다. 이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독점권과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바로 미국적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되는 셈이다. 종교개혁의 흐 름과 맞물려 세속적인 인본주의 흐름은 과학적 성취에 기반한 이성에 대한 확신을 근거로 중세 말기 이후로 대두되던 대학교육 체계를 제도화된 기반 으로 삼아 종교학을 신학과는 별개의 학문으로 정착시키고 종교를 세속적인 이성이 논하고 접근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낸다. 이 근저에는 계몽사 상의 개인적 이성에 대한 확신이 함께하고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아 주체로 서의 개인의 권리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정치화되어 제도의 영역 안에 자리 잡는다. 이 맥락에서 세속주의는 유럽 안에서 종종 기존의 제도화된 기독교 회에 대한 비판과 거부를 담고 있게 된다. 자연과학적 모델에 따른 연구 태 도가 세상의 모든 진리를 이해하고 밝혀내는 궁극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인정되면서, 진보에 대한 확신과 기존 제도권 종교에 대한 거부가 함께 맞 물려 세속주의의 강화를 통해 종교에 대한 태도에까지 연구주체의 개인적 인 지향이나 태도와는 독립된 종교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만들 어진다.64) 그 근저에는 17세기부터 유럽에서 왕권의 정당성을 신이 부여한 특권 으로 정당화하던 논리가 흔들리는 내부로부터의 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 다. 그 해결 방식은 결국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단위의 지리적 범위 안에 공생하는,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정치적 권력의 단위와 동일 한 외연을 갖는 것이었다. 이것이 민족(nation)이 국가(nation)가 되는 과정이 었다고 할 수 있다.65) 이러한 일체감을 가진 집단이 종교적 다수자들의 일 체성에 근거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 구축된 논리가 세 속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간디도 네루도 이렇게 세속주의가 맞서야 하는 다 수종교집단의 지배에 대한 반대의 맥락을 고려하거나 받아들인 적이 없다. 무슨 말이냐면 인도는 “인도”라는 단위에서의 국민형성(nation-building)의 과정을 거쳐본 일이 없었으니 특정한 방식으로 국민형성의 과정이 이루어 지는 것에 대한 반대 논리를 만들어 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66)
64) King (1999a), p. 47.
65)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군주의 주권을 원칙적으로 확인하고 국가 단위에서 종교를 정할 수 있게 된 사실이 국민국가 형성의 신호탄으로 간주되는 맥락이 이것이다.
66) 이런 맥락에서 인도의 세속주의가 결국은 집단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허구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기리[Giri (2010), p. 136]의 비판은 날카로운 면이 있다: After 1947, however, communalism as the form of the social order under modernity undergoes a shift with the adoption of democracy and secularism as the legitimizing principle of the modern Indian state. The adoption of secularism as the official, constitutional principle of the state, without transforming the social order whose form was communal, meant that now secularism became a stand-in for communalism which is active as the underside of secular democracy. Right since its inception under Nehru, secularism has presupposed and was engendered by an already existing, immanent communalism in society.
『인도 의 발견』(The Discovery of India)에서 밝히듯, 인도는 무의식적인 다원주의 사 회를 긴 역사 안에서 구성해 왔고, 이것이 인도의 훌륭한 전통이라고 네루 는 생각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세속주의를 만들고 관철시킬 이유가 없었 던 것이다. 따라서 간디와 네루는 (세속주의가 아니라!) 세속화(secularization) 면에서는 이견이 없었으며, 수많은 정치 연설과 저작에서 “composite culture”나 “unity in diversity”라는 표현을 수없이 사용했다. 그래서 20세 기 들어서서 강화되던 힌두-무슬림 충돌도 비전형적인 이상현상이라 생각 했고, 세속주의는 그가 믿던 과학주의나 합리주의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지 지 않았다.67)
67) 이 맥락 안에는 물론 당시의 지식인들이 견지하던 세속주의에 해당하는 관념이 구체적 이지 않았던 사정도 함께한다. 하지만 그 관념이 구체적이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그 내 용과 지향점은 분명했다. 킹(King 1999a:51)의 아래 표현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This model of secularism, taken from contemporary Indian politics and influenced by Indian reformers such as Mohandas Gandhi and Swami Vivekananda, bases itself upon the principle of Sarva Dharma Sambhava (often loosely translated as ‘let all religions prosper’), entailing a kind of ‘non-specific religiosity’. This position amounts to a refusal to endorse any particular religious perspective, while leaving open the very real possibility of the truth of any (or all) of them. 이러한 형태의 불분명한 세속주의의 맹점 중 하나는 특정한 종교적 편향을 감추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킹도 지적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네루가 사회주의와 함께 견지하고 있었던 경제결정론이다.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모든 구시대의 사회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네루는 가지고 있었다.
6. 인도의 반지성주의
“영성”(spiriuality) 개념이 앞서 설명한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면 이 개념 이 “세속”(secular) 개념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에서의 근대가 구축되어 가던 과정에서 기존 종교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한 개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극단주의와 세속주의를 결합시켰던 베산트(Annie Besant)의 경우나 신지협회(Theosophical Society)를 이끌었던 블라밧스키(Blavatsky)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들이 생각하던 “영성” 개념은 지금의 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되는 과학적 방법론과 대치되는 위치에 있는 개인적 체험의 영역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2차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 개념이 다르게 맥락화되어, 기존 종교교단과는 분리된 방식의 종교문화에 연관되는 것으로 “영성”이 이해되면서 영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의 영역으로 환원되고 만다.
근대 식민시기의 맥락 안에서 보자면 인도의 영성을 주장하는 흐름은 그 당시에 결코 과학적이거나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활동을 과학적으로 추구하는 방식 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의 실험방식이 받아들여지 듯이 영성에 대한 실험과 객관적인 확인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당시 지성계에 공유되고 있었다.68)
68) 바이어[Karl Baier (2019), “Swami Vivekananda: Reform Hinduism, Nationalism and Scientistic Yoga,” Interdisciplinary Journal for Religion and Transformation in Contemporary Society 5, pp. 244-245]는 이 현상을 “The Scientistic Turn of Modern Experiential Religiosity”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이어[Baier (2019), p. 245]는 이 맥락에서 인도의 종 교전통들이 서구에서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사정도 언급하고 있다. 킹[King (1999a), p. 46]의 같은 맥락에 대한 다음 설명도 주목할 만하다: The consequence of this is that the natural sciences have come to be seen by many as the paradigmatic model for the pursuit of all forms of knowledge including, what is sometimes explicitly called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It is important to bear this, and the scientistic presuppositions underlying it, in mind when considering current methodologies for the study of mysticism and indeed of religion as a whole.
이렇게 우리가 아는 힌두교는 근대 식민시기에 이르러 구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과학과 세속주의의 흐름안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종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힌두교” 만들기가 서구의 주도로(만) 일방적으로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인도의 전통 지식인들 그리고 근대 지성인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노력이 함께 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이다.69) 지금 우리가 “힌두교”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정합적인 교리체계를 갖춘 종교는 식민시기 서구의 영향을 받아 인도의 지식인들과 서구의 지적 흐름들이 교차하면서 구성해낸 산물이다. 그런데 이때의 맥락 안에서 “힌두교”를 재구성하던 서구인/인도인 주체들은 그 시대의 요청에 부합하는 종교, 영성을 주장하고 이것을 담지하는 것이 힌두교라고 제시해 냈다.70)
69) 인도의 전통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참여했고 어떤 시기 어떤 지역에서 어떤 구체적인 흐 름들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대목들이지만 벵갈지역의 예를 다룬 Pennington 2005와 같은 연구들이 상당수 누적되어 있다. 서구주도로(만) 힌두교가 재구성되었다는 오해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는 Richard King (1999b), Orientalism and the Modern Myth of “Hinduism,” Numen 46(2), pp. 146-185를 보라.
70) 바이어[Baier (2019), p. 246]는 비베까난다를 과학주의적 지향을 가진 근대적 체험형 종교(modern experiential religiosity oriented on scientism)의 선구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바로 이 맥락에서 아래 비베까난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Baier (2019), p. 246 재인 용]: There are certain religious facts which, as in external science, have to be perceived, and upon them religion will be built. Of course, the extreme claim that you must believe every dogma of a religion is degrading to the human mind. The man who asks you to believe everything, degrades himself, and, if you believe, degrades you too. The sages of the world have only the right to tell us that they have analysed their minds and have found these facts, and if we do the same we shall also believe, and not before. That is all that there is in religion. (VCW II, p. 163)
비베까난다는 자신의 스승 라마끄리스나의 딴뜨라적 요소를 서구 그리고 근대화된 인도 대중이 수용가능한 방식으로 말끔하게 포장하는 일에 성공했고, 종교적 진리에 대한 주장들이 사실적이고 감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재현가능한 성격의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으며, 영적인 수행(spiritual practice)이 진리를 검증하는 실험이 되도록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의 방식은 자연과학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었다.71) 이 맥락에서 우리는 비로소 간디가 자신의 자서전 제목으로 상정한 『자서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를 이해할 수 있다.72)
71) Baier (2019), p. 249: Religious truth claims are thus seen as factual knowledge, founded on reproducible perceptions. Spiritual practices are cast as experiments, serving to verify asserted truths. The relevant guidance to practices are understood as akin to experimental setups which in turn lead to demonstrable results.
72) 우선 간디는 인도의 전통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의 실천”을 의미하는 말로 “satyāgraha”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가 조금이라도 쌍쓰끄리땀 전통의 교육을 받았더라면 당연히 이 에 해당하는 정확한 용어, “vrata”를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간디가 “truth(satya)” 개념을 사용하는 이면에는 베다전통 이래의 “satya”가 갖는 독특한 함축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간디가 자이나전통을 비롯한 다양한 인도 전통들에 익숙했던 데에서 나오는 무의식적 반영이라고 보인다. 자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satya”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강성용(2015), 「인도철학에서의 ‘진리’ 개념에 대하여 II: ‘satyam eva jayate’와 ‘satya’ 개념」, 『인문학연구』 101호, pp. 13-21을 보라. 간디는 스스로 에머슨 (Emerson), 쏘로(Thoreau), 러스킨(John Ruskin)을 자신의 스승(guru)라고 언급한 적이 있고, 톨스토이(Tolstoy) 등 많은 서구 지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영향하에서 간디가 스스로 이해하는 나름의 힌두교를 만들어 낸 것은 그 시대 인도 지성인의 예외적이기보다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시기 당시 힌두교의 종교적 현실은 구체적인 집단들이 공유하 는 특정한 패턴의 종교적 활동, 종교의식과 특정한 상징과 특정한 사회적 규범체계(dharma)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습적 종교’의 현실 안 에서 근대 인도의 지식인들은 ‘궁극적 종교’로서의 힌두교를 구성해 낸 것 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궁극적 종교’로서의 힌두교는 일상에서 관습 화된 실행되는(practised) 종교와의 간극을 쉽사리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궁극적 종교’에서는 이미 그 정의상(per definitio) 개별 현실 종교에 대한 개 입이나 차별이 의미가 없으니 세속주의가 문제될 수가 없고, ‘관습적 종교’ 의 차원에서는 그것들이 원래부터 모두 개별 집단의(communal)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으니 다양성과 다원성은 그 안에 전제되어 있는 셈이어서 세속주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맥락이 바로 인도의 독특한, 그리고 왜곡된 세속주의가 자리 잡게 된 맥락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런데 이 두 층위(만)을 현실로 상정한 채—일반적으로는 ‘궁극적 종교’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극단적 반대에 있는 현실인 ‘관습적 종교’와의 대조를 통해 중간적 형태들의 의미를 무시하는 방식이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종 교의 현실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종교지형도 바뀌는 것 이 당연하다. 근대 식민시기에 구축된 “힌두교”는 이제 다양한 방식으로 인 도인들의 일상 안에 자리잡게 되었고, 인도인들의 자기이해를 구축하는 당 연한 부분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념적 지향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궁 극적 종교’의 내용들이 ‘관습적 종교’의 교리로 재구성되면서 ‘관습적 종 교’의 다양한 행태들이 특정한 교리 혹은 신념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 로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73)
예를 들어, 2021년 코로나-19 대폭발의 계기가 된 쿰브멜라(Kumbh Mela)의 경우만 해도 식민시기에 시작 된 순례의식의 지역 토착화가 구현된 경우인데, 이제는 전체 인도의 국가적 정체성 혹은 최소한 힌두 공동체 전체의 세계관과 지향점을 반영하는 종교 행사로 자리잡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74)
73)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양극구도 안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간디와 네루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INC 안에서도 지금의 힌두극단주의 흐름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지적은 타 당하다. Manu Bhagavan (2008), “The Hindutva Underground: Hindu Nationalism and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in Late Colonial and Early Post-Colonial India,”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43(37), pp. 39-48 참조. 그리고 INC 안에서도 힌두민족주의(Hindu nationalism) 흐름은 지도부에 속하는 인물들의 소신 때문에 제기되기 어려웠지만, INC 의 하부 지역단위 조직에서는 힌두민족주의 경향도 다분히 존재하고 있었고 힌두전통주의(Hindu traditionalism)의 흐름은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74) 강성용(2011), 「고행전통은 쿰바멜라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였나?」, 강성용 외 11인 저, 『문명 밖으로: 주류 문명에 대한 저항 또는 거부, 문명공동연구(Studia Humanitatis) 2권』, 한길사, pp. 77-96..
이러한 변화가 큰 흐름을 이루면 서 이제는 “힌두교”가 포교가 가능한 종교로 탈바꿈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 다. 이 모든 변화를 단지 힌두극단주의 흐름의 여파로 돌리는 것은 일면적인 해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재 미국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라고 볼 만한 많은 변화들이 인도의 정치권에서도 발견되고 있지만 그것을 반지성주의적 흐름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분명하게 근거가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왜 “반지성주 의”라는 분석틀이 인도에서 혹은 인도의 종교 관련 담론에서 찾아보기 힘 든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구조적 요인 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재구성된 힌두교가 제시한, 개인적인 체험과 개인 적 해석의 궁극적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간디의 수많은 언급들은 자기 자신이 개인적인 체험들을 통해 자신의 올바름을 스스로 확 인해 가고 있노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확인의 과정에서 별도의 검증 가능한 권위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권위는 그가 생각하는 방식 으로 이해되는 여러 힌두교의 텍스트들이거나 전승의 내용일 뿐, 특정한 텍 스트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전문가적 해석이 필요한 방식의 권위의 개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경향성은 분명하게 비베까난다의 경우에도 잘 보이 는데, 힌두 전통에서 당연시되는 스승(guru)의 가르침과 전승 내용에 대한 암송과 체득이 종교적 성취의 전제조건도 아닐뿐더러, 각 개인의 체험이 함 축하는 바나 혹은 체험에 대한 각 개인의 해석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할 수 있는 그 어떤 권위도 상정하지 않는다.75)
75) 바이어[Baier (2019), p. 251]의 다음 분석을 보라: Nonetheless, the experiential orientation of his understanding of religion leads him to clearly downplay the importance of religious scriptures and their study. Herein resides one of the main differences to traditional Vedānta, where one cannot attain the liberating knowledge of brahman without guidance through the revelatory scriptures.
그렇다면 각자가 체험한 바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이해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에 대 한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답은 없다. 간디의 경우 그가 남아프리카 에서 활동할 당시 심한 인종주의적 편향을 보였다는 사실은, 그 시대적 배 경에서 설명이나 납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애덤스가 본격적으로 다룬 젊은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활용해서 본인의 성욕과 관련한 수행자로서의 삶(brahmacāra)의 유지와 진전에 대한 확인을 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76) 현대적 기준으로 보자면 미성년자까지 대상으로 삼은 심각한 성범죄가 될 것이지만, 당시의 남성중심 사회의 가부장적 태도로 치부하기에도 어려움이 많다.
인도의 종교전통안에서도 설명하거나 용납 받기에 불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간디 자신이 스스로 자부하는 수행자(brahmacārin)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금기가 성 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나친 자기확신이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 받은 일탈이라고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마찬가지 상황은 비 베까난다에게서도 벌어진다. 누군가 종교적인 성취를 했다고 느낀다면, 그 느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다 그 주관적 느낌만큼의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출가한 승려가 저지를 수 있는, 살인죄와 같은 수위의 심각한 범죄행위는 바로 깨닫지 않은 승려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스스로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확신한다면, 과연 이에 대한 검증은 어떻게 이룰 것인가? 비베까난다도 명확한 답 을 제시한 바가 없다.
다만 그는 아마도 경험적이고 관습적으로 그의 스승 라마끄리스나가 그러했듯이 사회적인 합의가 주어지리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77)
76) Jad Adams (2010), Gandhi: Naked Ambition, London: Quercus.
77) 이 맥락에서 바이어[Baier (2019), p. 252]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인도 근현대에 구축된 “힌두교”는 근본경전을 상정하고 이에 대한 해석의 권위자를 구하는 방식을 구축하지 않은 까닭에, 해석적 권위자에 대한 반지성주의의 태도를 갖는 흐름이 만들어질 요인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문제를 다른 위치로 밀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어서, 반지성주의 대신 자의적 자기확신의 문제를 고스란 히 안게 되었다. 개인의 사회생활이 ‘관습적 종교’의 차원에서 제어될 때에 는 해당 집단이 공유하는 사회·종교적 규범체계(dharma)가 작동하겠지만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는 단위에서 작동하는 규범체계가 어떻게 구축될 것 인지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지 않다.78)
78) 기리[Giri (2010), p. 132]의 지적은 필자가 말한 힌두교의 두 상이한 층위와 연관된 문제 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인도의 정치지형이 종교집단 주의(communalism)의 충돌로 풍파를 겪을 때 과연 인도의 전통은 이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다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러한 맥락에서 역할이 요구되는 ‘인도식 세속주의’는 네루가 이해한 “종교” 의 이중구조에 상응하는 이중구조를 가진 것이어서 사회적 필요가 제기될 때 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우리라 필자는 판단한다. 이 마비된 ‘인 도식 세속주의’를 밀어제치고 등장한 힌두국수주의는 무력한 ‘인도식 세속 주의’의 허구성을 비웃는 것과 그 허구적 구조를 만든 사람들이 실패한 경 제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을 동시에 해 왔고, 이를 통해 자유시 장경제 이데올로기의 추동력에 올라타고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주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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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construction of ‘Hinduism’ and Indian Secularism Limitation of the Anti-Intellectualism Frame in the Analysis of the Indian Political Landscape
Kang, Sung Yong(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analysis of growing anti-democratic Hindutva ideology in India, the conceptual frame of anti-intellectualism is seldom applied. An attempt is made in this paper to clarify factors that differentiate Indian social contexts from those of the United States. Since the British colonial period, Indian intellectuals have focused on reconstructing their religious traditions in accordance with the Western concept of ‘religion’ to create Hinduism. They could not, however, escape the traditional conceptual frame of ‘dharma.’ As a result, the dual-structured concept of ‘religion’ has appeared to dissimulate the danger of communalism. This leads to a peculiar ‘Indian secularism.’ The emergence of hindutva framed in the Mandir politics against Mandal politics could not be encountered by the hollowed secularism in India. The anti-intellectual stance does not seem to be required in the reconstructed Hinduism, since the validation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and its interpretation were not precluded.
Keywords Anti-intellectualism, Hindutva, Hinduism, India, Communalism
원고 접수일: 2022년 10월 14일, 심사 완료일: 2022년 11월 3일, 게재 확정일: 2022년 11월 8일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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