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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신라의 성기 숭배와 지증왕의 음경/구사회.선문대

1. 머리말

2. 신라의 성기 숭배

3. 지증왕의 관련 설화와 성기 숭배

4. 맺음말 - 문화사적 의미를 대신하여 -

<국문초록>

이 논문은 신라시대의 성기 숭배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삼국유사 기이 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관련 설화를 분석하였다. 한국인들은 문명 이전부터 생식기를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해온 것을 유적이나 유물, 또는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한반도에는 지금도 청동기시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나 농경의기 등에 성기신앙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 다. 문헌 자료에서도 고구려의 국중대회에서 남근을 모셨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성기신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고 판 단된다.

삼국시대에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분에서 나온 교합하는 토 우나 안압지에서 나온 목제 남근과 같은 유물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본 다. 문헌 자료에서도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이 신라사회에 서 얼마나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삼국유사 기이 편의 <수로부인>조에 수록된 향가 작품인 <헌화가>야말로 성기신앙에서 비롯된 노래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화랑세기 에 나오는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에서부터 ‘색공’이나 ‘마복자’ 제도를 인간의 몸과 성 을 중시하는 신라인의 문화적 가치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것의 이면에 는 신라인의 성숭배와 관련된 성기신앙이 자리를 잡고서 직간접적으로 작동된 것으로 보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성기 관련 설화도 신라 인들 사이에서 내려온 성기 숭배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한 자 다섯 치나 되 는 왕의 옥경은 왕의 비범함과 권위를 상징하며,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생각하고 받아 들인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짐작된다. 왕비로 간택된 처녀의 큰 똥도 성적 매개물로 파악하였다. 여기 지증왕의 성기 관련설화는 당시 신라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성기 숭배라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주제어: 성기신앙, 구지가, 헌화가, 화랑세기, 똥, 삼국유사, 색공, 마복자.

1. 머리말

인간은 문명 이전부터 생식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고 숭배해온 것 으로 알려졌다. 이는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인 현상이었다. 남녀 교합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고 그것은 당시의 지 적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었다. 인류가 생식기를 숭배 대 상으로 삼은 것은 생물학적 토대보다는 그것을 생명력의 원천으로 신성시 하면서 상징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식기는 다산과 풍요를 가 져다주는 영험한 신물로 숭배되거나 하나의 상징 체계로 자리를 잡았다. 성기 숭배와 관련된 선사 유적은 지금도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 다. 구석기 유적인 스페인의 알타미라나 빌렌도로푸의 비너스상에서, 신 석기 유물인 지중해나 도나우 강 유역의 토우에서처럼 성 숭배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굳이 다른 나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 리나라에서도 기원전 7세기경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나 기원전 4세기경의 남해 양아리 암각화에서 성기 숭배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 라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농경문 청동의기에서도 돌출된 남성 성기를 통 해 풍작을 기원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성기 숭배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은 국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인들의 성기 숭배는 무속이나 풍수, 또는 음양이나 남아선호사상 등 과 결합되고 내재화되면서 문화적으로도 다양하고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성기 숭배에 대한 유물과 문헌 자료를 본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 는 것은 신라시대부터이다. 신라시대 돌출된 남근이나 여성의 가슴과 성 기를 강조한 토우가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심지어 출산하는 여성 토우를 비롯하여 남녀가 성교하는 토우도 많다. 때로는 남근이 발기했을 때의 모 습을 형상화한 남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유물이나 문헌 자료 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보다 신라사회에서 성기 숭배와 관련된 풍습이나 민속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

1) 성기 숭배에 대한 용어로 김태곤은 ‘성기신앙’을, 장장식은 성에 관한 신앙 행위인 ‘성신앙’과 성기를 신앙의 직접적 모티브로 삼거나 성행위를 직접적인 신앙 관념으로 수용하는 ‘성기신앙’로 구분하였다. 반면에 이종철은 ‘남녀 성기 및 성행위의 상징과 관련된 주술종교적 행위와 그 믿음의 체계’를 가리키는 ‘성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하 고 있다. ‘성숭배’는 성기 상징체계와 같은 직접적인 신앙 대상물을 숭배하는 것을 포 함하여 성교 모의를 통해 생산력을 기원하는 믿음을 상징하는 형상화한 자료들까지 아우르고 있다(이종철, 한국의 성 숭배 문화(서울: 민속원, 2003), 20~24쪽). 이 논 문에서는 성(sex)과 성기에 대한 숭배나 그것의 신앙 체계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각각 ‘성숭배’와 ‘성기 숭배’를, 때로는 성기에 대한 구체적 신앙에 대해서는 ‘성기신 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지증왕과 관련하여 신라사회에서의 성기 숭배가 어떠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 면, 지증왕은 음경이 한자 다섯 치(40센티 내외)나 되어서 짝을 찾기 어 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국왕은 북만큼 많은 똥을 쌌던 7척 5촌(220센티 정도)의 여자를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는 다소 황당한 기록이 남아 있 다. 이 논문에서는 신라시대에서의 성기 숭배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지증왕의 관련 설화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신라의 성기 숭배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천 년 가까이 존속하다가 고려에 복속되었다. 이후로 다시 천 년 이상이 지났다. 이 시점에서 신라 시대의 성기 숭배에 대한 전모를 확인한다는 것은 난해한 작업이다. 이런저런 역 사적 편린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신라시대의 성기 숭배가 어떠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기 숭배와 관련된 신라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헌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내어 분석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라시대의 성기숭배와 관련된 단서이자 물증이다. 반면에 후자는 성기 숭배가 신라인들 사이에서 어떻 게 내면화되며 정신세계로 자리를 잡아갔는지를 보여준다.

2.1. 유적과 유물

한국인의 성기 숭배는 선사 시대에도 존재하였겠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이다. 이를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에 만 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암각화에는 사람들의 사냥이나 고래잡이의 모 습이 들어 있고, 그 외에도 물고기, 사슴이나 멧돼지, 또는 호랑이나 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것에는 동물들의 교미하는 모습이나 성 기를 드러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인의 성기 신앙을 추측할 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다른 유물도 있다. 1989년에 발굴된 여수시 오림동의 지석묘를 들 수 있다. 이곳 고인돌에 는 사람 형상과 함께 돌칼이나 돌화살촉 등이 새겨져 있는데, 돌칼은 남 녀의 성기가 결합된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2)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충남 대전에서 나온 농경 의기도 이 시기의 성기 숭배를 추측할 수 있는 유물이다. 이 농경 의기에는 당시의 농경 생활과 함께 남근을 드러내놓고 일하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기 숭배와 관련된 삼국시대 초기의 유적으로는 경남 김해 부원동과 충남 부여의 논티에서 나온 농경 유적을 들 수 있다. 김해에서는 삼국시 대 초기에 사용되었던 생활 용품과 함께 남근이 발굴되었다. 부여에서는 다량의 농경 기구가 나왔는데 항아리에서 남근 형태의 손잡이가 있었다. 이것들은 신라 이전인 신석기나 청동기, 철기 시대에 존재했던 우리 한국 인의 성기 숭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적이나 유물들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성기 숭배는 경주 금령총에서 나왔던 배를 본떠 만든 모양의 토기에서 남근을 드러내놓고 노를 젓는 토우를 들 수 있다. 그리 고 5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인 남녀 토우에서 보이 는 과장된 성기나 성적 교합의 모습에서도 고대 신라의 성기 숭배를 확 인할 수 있다. 1973년 경주 미추왕릉 30호분에서 나온 목이 긴 항아리 1 점에는 힘찬 남근을 강조하거나 남녀가 성교하는 토우가 있었다. 그 중에 는 여자가 엎드려 엉덩이를 벌리고 있는데 그 앞에는 묵직한 남근을 음 부에 삽입하려는 모습의 토우도 있었다. 어떤 것은 여성 음부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어놓고 출산하는 임산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도 있었다. 1976년에는 삼국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안압지에서 목제 남근 2점이 발굴되었다. 길이는 각각 13.5㎝, 17.5㎝, 직경 4.3㎝~3㎝이 고 남근의 기부는 3㎝이고, 두부로 가면서 점차 굵어져 4.5㎝인데, 정교 한 솜씨로 사실감 있는 형상화가 돋보인다. 3)

2)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서울: 여성신문사, 1998), 50~51쪽.

3) 이종철, 앞의 책, 2003, 66~67쪽.

1978년과 1996년도에는 7 세기 말엽이나 8세기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황룡사지 유 적층에서 발기된 귀두나 요도를 정교하게 조각한 남근석 2점이 나왔다. 팽창하여 발기된 귀두 아래 중앙에는 요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정교한 솜씨로 용두를 힘 있게 받쳐서 조각하였다. 4)

4) 이 중에서 하나는 실물처럼 사실적으로, 다른 하나는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이 종철, 앞의 책, 2003, 67쪽).

이들 유물들은 신라인들이 가지고 놀던 玩物이라기보다는 성기신앙의 유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생명력의 원천으로 믿었던 생식기가 지닌 다산과 풍요의 상징적 코드가 내재화된 것들이다. 물론 이 들 유물들은 신라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국인들 사이 에 자리를 잡고 내려온 성기신앙의 산물이었다.

2.2 문헌 자료

유적과 유물이 성기 숭배에 대한 유형적 물증이라면, 문헌 자료는 그것 의 문화적 내용물이다. 이 땅에 있었던 이른 시기의 성기 숭배에 대한 문 헌은 국내보다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의 국중 대회에서는 나무로 만든 수신(隧神)을 모셔놓았다고 한다. 5) 그런 데 여기에서 ‘수’가 목제 남근이라는 것이다. 6) 신당서에 기록된 주몽 사당의 기록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성에 주몽 사당이 있었다.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 었다. 망령스럽게 전연(前燕)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한다. 바야흐 로 포위되어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부신(婦臣)으로 삼았다. 말로 미혹 되어 주몽은 기뻐하여 성이 완전할 것이라고 기뻐하였다. 7)

5) 三國志 東夷傳 , <高句麗條>.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 祭之, 置木隧於神坐”

6) 양주동, 국문학논고(서울: 을유문화사, 1952), 182쪽.

7) 新唐書, 列傳東夷 , <高句麗條>. “城有朱蒙祠, 祠有鎖甲銛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飾 美女以婦神. 誣言, 朱蒙悅城必完”

여기에서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鎖甲銛矛)’은 주몽사당의 성신체 이며 주몽사당에 바쳐진 치장한 미녀, 곧 부신이라는 용어도 성기신앙과 관련이 깊다. 8) 삼한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그곳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9) 여기에서 “蘇塗는 수터, 곧 수컷의 터”로서 立大木을 목제 남근의 상징물로 보았다. 10) 그렇다면 문헌상에서 신라의 성기 숭배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신라에 서 성기 숭배와 관련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삼국유사 기이 편의 <지철로왕조>에 기록된 지증왕의 관련 설화이다. 지증왕의 관련 설 화는 신라의 중고기인 5~6세기의 성기 숭배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 다. 11) 왕의 음경이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배필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위해 문화인 류학적 도움도 필요하고 컨텍스트적 맥락에서의 분석도 필요할 것이다. 신라의 성기 숭배와 관련된 7세기 전반의 기록으로는 선덕여왕 재위 기간(632~647)에 일어났던 옥문지(玉門池)의 여근곡(女根谷) 관련 설화를 들 수 있다. 12)

8) 장장식, 민간신앙으로 본 성 , 한국의 민속과 성(서울: 지식산업사, 1997), 126쪽.

9) 三國志 東夷傳 , <韓>. “又諸國, 各有別邑,國, 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懸鈴鼓, 事鬼 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10) 양주동, 앞의 책, 1952, 같은 쪽.

11) 성기 숭배와 관련된 지증왕의 관련 설화는 항목을 따로 마련하여 분석할 것이다.

12) 三國遺事 紀異 제1, <善德王 知幾三事>.

백제 군사 500명이 여자의 음부 형국인 옥문지에 숨어 있 다가 남근으로 상징되는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발각되어 몰살을 당했 다고 한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인데, 남근인 백제군이 여근 인 옥문지에 들어갔기 때문에 당했다는 것이다. 여근곡 설화에서는 남근 과 여근이 생산과 풍요를 가져오기보다는 여근이 남근에 대해 상극적으 로 작용하는 특징이 있다. 이어서 8세기 전반 신라의 성기 신앙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록으로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조 를 들 수 있다.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 릉태수로 부임하면서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었다.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 고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더니 사람들에게 꽃을 꺾어다 주기를 원했지만 너무 높고 험해서 아무도 나서 지를 못했다. 그런데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늙은이 하나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다가 바치며 향가 <헌화가>를 불렀다고 한다. 순정공 일 행은 다시 길을 가다가 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이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모를 때에 다시 한 노인이 나타나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치면서 <해가>라는 노래를 부르게 해서 수로부인을 구출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조 에 실려 있는 기술문과 노래를 둘 러싸고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었다. 이를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으 로, 13) 또는 사랑의 노래로, 14) 때로는 주사적인 노래나15) 기우제에서 불렀 던 노래나16) 복합적인 성격의 노래로 보았다. 17) 그런데 필자는 <헌화 가>의 가사 중에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높게 하시고(紫布岩乎过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에서의 ‘자줏빛 바위’가 언어학적으로 ‘자지바위’, 즉 남근석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 18)

13) 김종우, 향가문학연구(서울: 반도출판사, 1983), 28쪽. 김운학, 신라불교문학연구(서울: 현암사, 1983), 243쪽. 김광순, 헌화가 , 향가문학론(서울: 새문사, 1989), 273~276쪽.

14) 윤영옥신라가요의 연구(대구: 형성출판사, 1980), 176쪽.

15) 임기중, 신라가요와 기술물의 연구(서울: 이우출판사, 1981), 327쪽.

16) 김문태, 헌화가 해가와 제의문맥 , 고전시가의 이념과 표상(임하 최진원 박사 정 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1), 95쪽; 여기현, 수로부인 이야기의 제의적 연구 , 성균 관대 석사학위 논문, 1985, 60쪽; 현승환, 헌화가 배경설화의 기자의례 성격 , 한국 시가연구 12집(한국시가학회, 2002), 27~53쪽; 신현규, 수로부인조 ‘수로’의 정체와 제의성 연구 , 어문론집 32집(중앙어문학회, 2004), 13~14쪽.

17) 홍기삼, 수로부인 , 향가설화문학(서울: 민음사, 1997), 109~164쪽.

18) 구사회, <헌화가>의 ‘자포암호(紫布岩乎)’와 성기 신앙 , 국제어문 38집(국제어문학 회, 2006), 201~223쪽.

다시 말해 <헌화가>는 사랑의 노래나 불교가요가 아니라, 남근석 아래에서 굿을 행하며 아들 낳기를 기원하 는 노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로부인조 에 나오는 <헌화가>와 그것 을 둘러싸고 있는 기술물이 성기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할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용왕에게 납치되었을 때에 불렀던 <해가>도 같은 성격의 노래로 여겨지며 그것에는 성기 신앙이 내재되어 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龜乎龜乎出水路 남의 아내 뺏어간 죄 얼마나 크랴. 掠人婦女罪何極 네 만약 거역하여 내놓지 않으면 汝若悖逆不出獻 그물을 넣어 잡아서 구워 먹으리. 入網捕掠燔之喫19) 거북아, 거북아 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 首其現也 만약 내놓지 않으면 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 燔灼而喫也20) 위에서 <해가>를 <구지가>와 비교해보면, <해가>가 성덕왕(702~ 737) 재위 시절에 처음 불렀던 노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 , <해가>.

20)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 , <구지가>.

<해 가>보다 700여 년이나 앞선 시기인 서기 42년에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 로왕을 맞이하며 <구지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위에서 <해가>는 <구지가>와 내용도 비슷하고 구조도 같다. 먼저 <해가>의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龜乎龜乎出水路)’는 <구지가> 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龜何龜何 首其現也)’의 반복이고 호칭만 ‘머리(首)’가 ‘수로(水路)’로 바뀔 뿐이다. <해가>의 ‘네 만약 거역하여 내놓지 않으면(汝若悖逆不出獻)/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入網捕掠燔之 喫)’도 <구지가>의 ‘내어 놓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서 먹으리.(燔灼而喫 也)’의 반복과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해가>는 <구지가>와 상통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노래에서 <구지가>에서 머리는 우두머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남근[龜頭]을 상징하기도 한다. 21) 정리하자면 이렇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탄생하기 훨씬 이전 부터 ‘거북아~’로 호칭하는 남근의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주술가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노래가 가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맞이하면서 불렀고, 이후로도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노래에서 거북의 목은 남근 숭배의 한 상징(Phallic symbol)이고, ‘구워서 먹으리(燔 灼而喫也)’에서 ‘燔灼’의 도구인 ‘불’이 다름 아닌, 원시인들의 격렬한 욕정 이 깃든 여자 성기의 은유라는 점이다. 22) 그리고 <구지가>로부터 700 년이 지난 8세기 전반에 수로부인이 용왕에게 납치되자 <해가>로 다시 불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주술가요는 가요의 저변에 성기 숭배가 자 리를 잡고 있었고, 다시 말해서 한국의 성기 숭배는 오래된 신앙적 형태 를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23) 신라의 성기 숭배와 관련하여 화랑세기의 기록을 조심스럽게 거론할 수 있다. 12세 풍월주 보리공(菩利公) 조에 보리공이 하종공을 따라 신궁 에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交神像에 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24)

21) 김태식, 紫色, 間色에서 絶大의 색깔로-地上의 天皇을 표방한 始祖들- , 인문사회연 구 18호(선문대학교 인문사회과학, 2016), 113쪽.

22) 정병욱, 한국시가문학사(上) , 한국문화사대계(Ⅴ)(서울: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67), 764~776쪽. 23) 오늘날에도 전승되는 수로왕 관련의 성기 설화가 있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성기가 얼 마나 컸던지 낙동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허황후도 키가 커서 낙동 강 앞의 섬을 건너가는데 겨우 속곳 밑이 조금 젖었다고 한다. (정상복 류종목 편, 경 상남도 거제군편 , 한국구비문학대계(8-2)(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33~34쪽).

24) 이종욱, 화랑세기(서울: 소나무, 1999), 134쪽.

여기 교신상은 법흥과 옥진의 교합을 만들어놓은 형상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 다면 이는 당시 화랑도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성숭배 내지 성기신 아의 단면을 추측할 수 있는 언급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화랑세기에는 ‘색공(色供)’이나 ‘마복자(摩腹子)’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색공이란 남편 을 둔 아녀자가 왕과 귀족에게 성적으로 수청을 드는 것을 말한다. 마복 자란 아랫사람의 임신한 여자가 권력자의 남자에게 가서 보호를 받으면 서 성관계를 맺고 태어난 아이를 뜻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해당 권 력자의 친자식은 아니더라도 친자 이상의 보호와 후원을 받으며 사회적 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는 정조와 정절을 중시하는 유교 이념이나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오 늘날의 윤리 규범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신라 시대에는 그 들만의 가치 체계나 규범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색공이나 마복자의 관 습이 당대 사회와 문화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색공이나 마복자는 정치적인 권력 관계망보다는 인간의 몸과 성을 중시 하는 신라인의 문화적 가치 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중국의 유교적 윤리 규범이 이 땅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이전부터 자리를 잡았던 다산과 풍요의 성기신앙이 내재적으로 작동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 마디로 화랑세기에서 보이는 색공이나 마복자의 관습은 신라인의 성숭배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3. 지증왕의 관련 설화와 성기 숭배

3.1. 자료의 검토

신라 제22대 지증왕의 국가 경영에 관한 면모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편의 <智證麻立干>조와 삼국유사 기이 제1편의 <智哲老王>조에 수록되어 있다. 왕의 성기 숭배와 관련된 해당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고 삼국유사의 그것에 수록되어 있다. 지증왕의 관련 설화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삼국유사 기이 제1편의 <智哲老王>條를 삼국사기의 <지증마립간>조를 통해 견주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삼 국유사 기이 편의 <智哲老王>조는 아래와 같다. 25)

25) 참고로 숫자는 필자가 논의의 편의를 위해 붙인 것이다. 신라의 성기 숭배와 지증왕의 음경 121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고,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시호가 여기 에서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하는 것도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에 왕위에 올랐 다.(혹은 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3년이다). 왕은 음경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로 배필을 얻기 어려워서 시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어 구하였다. 시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니 두 마리 개가 북만큼 큰 똥 덩어리의 양쪽 끝을 다투며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자는 동네 사람을 방문하였는데, 한 소녀가, “이것은 모량부 상공(相公)의 따님이 여기에서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 싼 것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신장이 일곱 자 다섯 치였다. 이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더니 왕이 수레를 보내서 맞 이하여 궁중으로 들게 하여 황후로 삼으니 뭇 신하들이 모두 하례하 였다. 또한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溟州)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 틀을 가면 우릉도(羽陵島, 지금의 羽陵)가 있는데, 둘레가 2만 6,730보 이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이 그 물이 깊다는 것을 믿고 교만하여 신하 되기를 거절하였다. 왕이 이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의 위에 싣고서 위협하여,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 다. 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종에게 상을 주어 고을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26) 삼국유사 기이 제1편의 <智哲老王>조는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 져 있다. 첫째 단락에 해당하는 예문 은 신라 제22대 지증왕에 대한 소 개로 이름과 시호 등을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지증마립간> 조에 기술되어 있는 부분과27) 비견된다. 지증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삼 국사기가 보다 구체적이지만 삼국유사의 예문 도 그것에 못지않게 사실적이고 실증적으로 서술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는 ‘智證’이란 시호를 처음 사용했다든가, 마립간이 우리말로서 왕을 뜻한 다는 삼국사기에 없는 정보도 있다. 문제는 본고에서의 분석 대상인 예문 이다.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길어서 배필을 찾지 못하였다든가, 북만큼 큰 똥을 싼 여자를 찾아서 왕 비로 삼았다는 다소 황당한 기술물이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분석을 해봐야겠지만, 여기에 대응하는 삼국사기의 해 당 기록은 다음 부문이다.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전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 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가 64세였다. 28)

26) 三國遺事 紀異 卷1, <智哲老王>條. “第二十二, 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 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 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 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周迴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 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27) 三國史記, 新羅本紀 제4편, <智證麻立干>條.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 度路, 又云智哲老. 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炤知王之再從弟也. 母金氏鳥生夫人, 訥祇王 之女. 妃朴氏延帝夫人, 登欣伊湌女 ......”

28) 三國史記, 新羅本紀 제4편, <智證麻立干>條. “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여기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의 풍채와 담력, 왕위 계승의 까닭을 사 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에서는 설화적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증왕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한 자 다섯 치나 된다는 음 경에서 찾고 있고, 짝이 되는 여자도 일곱 치 다섯 자나 되는 키와 북처 럼 많이 눈다는 똥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역사보다 설화에 서나 적합한 방식이다. 그렇지만 여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해당 기록은 둘 다 예사롭지 않았던 왕의 인물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예문 은 신라 지증왕 치적의 하나인 울릉도 정복에 대한 기사이다. 삼 국사기에서도 지증왕 13년 6월에 우산국 사람들이 지형적으로 험준한 것을 믿고 신라에 귀복지 않자 이사부가 징벌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지명과 정복자의 이름이 삼국사기와 다르게 기록되 어 있지만 서사 맥락은 거의 같다. 당시 우산국은 신라의 통치 바깥에 독 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듯한데, 이사부(삼국유사에서는 박이 종)가 목제 사자로 섬사람들을 굴복시켰다는 내용이다. 신라 지증왕에 대한 이들 두 기록을 살펴보자면, 삼국사기가 삼국 유사보다 정보량이 훨씬 많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유사에 없는 국명 유래, 상복법, 축성, 주군현 제도의 정비 등의 여러 기사가 수록되어 있 다. 반면에 세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는 삼국유사에서는 예문 와 예문 이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지증왕의 성기 관련 설화에 해당하는 예문 가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어서 주목된 다. 물론, 예문 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증왕의 체격과 담력이 뛰어났다는 기록에 대응되는 설화적 기술물이다. 따라서 지증왕의 성기 숭배와 관련된 삼국유사의 예문 는 따로 장을 마련하 여 문학적 검토와 함께 문화인류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3.2. 관련 설화와 성기 숭배

예문 를 요약하자면, 신라 지증왕은 옥경이 너무 커서 짝을 찾지 못 하다가 북처럼 큰 똥을 눈 일곱 자 다섯 치의 큰 여자를 맞이하여 어렵게 배필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지증왕의 왕비를 맞이한 내력을 밝히는 기술물이다. 이야기의 서사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왕의 음경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였다. ② 짝을 얻기 어려워 시자를 삼도(三道)에 보냈다. ③ 모량부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북과 같은 큰 똥 덩어리를 발견했다. ④ 똥 덩어리의 주인공인 모량부 상공의 딸을 찾으니 신장이 일곱 자 다 섯 치였다. ⑤ 왕은 수레를 보내 처녀를 궁중으로 맞이하여 황후로 삼았다. ⑥ 모든 신하가 하례하였다. 지문 ①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통해서 지증왕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 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성기가 한 자 다섯 치(오늘 날 40센티 내외)나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까지 비범함을 드러내고자 하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유적과 유물의 성기가 생명력이 충만한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있었지만, 후대 문헌을 찾 아보면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는 않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의 여근곡 설화도 그렇고, 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8치나 되는 큰 옥경도 해석 여부에 따라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대 이래로 남근은 대체적으로 긍정적 의미로 나타 났고, 특히 왕의 옥경은 비범함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수로왕이 큰 성기로 낙동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는 설화는 그 가 예사롭지 않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왕의 권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조현설은 지증왕의 거대한 남근을 강력한 왕권과 같은 권력 담론으로 해석하기 한다. 29) 필자가 보기에 여기 지증왕의 옥경은 긍정적 인 의미로써 당시 신라인들이 생각하고 받아들인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 을 담고 있다고 보는데, 그 중에서도 성기에 대한 숭배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지문 ②에서 왕은 신라 곳곳에 시자를 보내 자신의 배필을 찾고 있다. 여기에서는 힘과 권위를 지닌 지증왕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문 ③ 에서는 앞서 비범함과 권위를 지닌 국왕이 자신의 배필을 하필 누군가 나무 아래에 싸놓은 큰 똥 덩어리에서 찾고 있다. 여기 똥 덩어리는 국왕 의 짝으로 걸맞을 배우자의 분신이자 성적 매개물이다. 물론, 여기에서 똥은 불결하거나 좋지 않은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함을 전제로 하고 있는 상서로운 존재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동서양에서 똥은 더럽다기보다 는 신성시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 똥에 는 정령이 있다고 믿거나 점을 치기도 하였다. 30) 더 나아가 똥이나 오줌 과 같은 배설물이나 그러한 배설 기능은 성(性)과 동일시하거나 밀접하게 여기는 역사성을 갖고 있었다. 31)

29) 조현설은 권력 담론의 근거로써 왕의 업적을 들었다. 지증왕은 60세에 왕위에 등극하 여 국호를 신라로 정하였고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순장법을 폐지 시켰다든가 우경법을 시행하였고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는 등의 국가 체제의 정비 에 치적을 쌓았기 때문이다(조현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서울: 한겨레출판, 2006), 151~152쪽).

30) 존 그레고리 버크 (성귀수 옮김), 신성한 똥(서울: 까치글방, 2002), 167~169쪽. 랠프 A 레윈 (강현석 옮김), 똥(서울: 이소출판사, 2002), 233~239쪽. 마르탱 모네스티에 (임헌 옮김), 똥오줌의 역사(서울: 문학동네, 2005), 375~388쪽.

31) 존 그레고리 버크, 위의 책, 9~12쪽.

시자는 모량부 동로수 아래에 북처럼 큰 똥 덩어리를 배설한 여자야말 로 옥경이 한 자 다섯 치나 되는 국왕과 짝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북처럼 큰 똥을 쌌다는 것은 성적 궁합 이외에도 많은 자손의 출산을 통해서 나라의 풍요로움을 가져올 여자라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 이다. 여기 큰 똥 덩어리는 다산과 풍요의 등가적 상징물이다. 농경사회 에서 많은 자손의 출산은 노동력과 생산력을 높이고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농경국가였던 신라 사회에 전승되며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 기 신앙의 한 측면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지문 ④에서는 마침내 똥 덩어리의 주인공인 모량부 상공의 딸을 찾아 냈는데,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된다는 것은 처녀도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여자가 절대적 권위를 지닌 국왕에 걸맞은 배필로 부합할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김수로왕의 배필이었던 허 황후가 낙동강 앞의 섬을 건너가는데 신장이 얼마나 컸던지 겨우 속곳 밑이 조금 젖었을 뿐이라는 설화와 비슷한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 자가 보기에, 삼국유사에 수록된 옥경이 큰 지증왕과 키가 큰 처녀의 설화나 오늘날에 전승되는 거대한 남근을 지닌 김수로왕과 키가 컸다는 허황후의 설화는 동일한 성기숭배 모티브를 갖고 있다. 이것은 신라 이전 부터 내려오던 성기 숭배의 모티브가 설화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지증왕은 능력도 예사롭지 않았고 옥경도 컸을 것이다. 이것은 이 야기로 유포되어 전승되면서 민중적 상상력이 더해졌고 일연의 삼국유 사에 수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지문 ⑤와 ⑥에서는 기이한 결연을 통해 맺어진 왕과 황후의 결합은 장차 나라가 풍요롭고 번영할 것임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한 마디 로 삼국유사 기이 제1편의 <智哲老王>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결혼 이야기는 언뜻 보면 왕이 성기가 너무 커서 합궁할 여자를 어렵게 찾았 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의 이면에는 당시 신라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 던 성기 숭배라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4. 맺음말 - 문화사적 의미를 대신하여 -

이 논문에서는 신라시대의 성기 숭배와 그것에 대한 삼국유사 기이 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관련 설화를 분석하였다. 먼저 신라시대의 성기 신앙을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은 신라보다 훨 씬 이전 시기부터 성기를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원천으로 인 식해왔다는 것을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 었다. 한반도에는 지금도 청동기시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나 농경의기 등 에 성기신앙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문헌 자료에서도 고구려의 국중 대회에서 남근을 모셨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성기신앙은 갑 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고 판단된다. 다만, 신라의 성기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떠했고 어떤 성격을 지니고 신라 인의 삶속에 용해되어 작용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국시대에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분에서 나온 교합하는 토우나 안압지에서 나온 목제 남근과 같은 유물을 통해서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문헌 자료에서도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이 신라사회에서 얼마나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삼국유사 기이 편의 <수로부 인>조에 수록된 향가 작품인 <헌화가>야말로 성기신앙에서 비롯된 노 래인 것으로 파악한 바 있었다. 왜냐하면 이 노래에 나오는 ‘자포암호’가 바로 남근석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본고에서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에서부터 ‘색공’이나 ‘마복자’ 제도를 인간의 몸과 성을 중시하는 신라인의 문화적 가치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이면에는 신라인 의 성숭배와 관련된 다산과 풍요의 성기신앙이 내재되어 직간접적으로 작동된 것으로 보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성기 관련 설화는 신라인들 사이에서 내려온 성기 숭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보 았다.

특히, 한 자 다섯 치나 되는 왕의 옥경은 왕의 비범함과 권위를 상 징하며,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생각하고 받아들인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 을 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왕비로 간택된 처녀의 큰 똥도 성적 매개물 로 파악하였다.

여기 지증왕의 성기 관련설화는 당시 신라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성기 숭배라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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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and legend on King Jijeung

Gu Sa Whae

The study examine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followed by the analysis on the legend on King Jijeung recorded on , Samgukyusa Giyi . Koreans have recognized sexual organ as the symbol of production and fertile and the source of life before the period of civilization.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did not appear suddenly, but was connected with such idea. Clay dolls from ancient tomb of Silla showing sexual intercourse and wooden penis give an idea of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Literature resources also allude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which demonstrates how deeply sexual organ worship was rooted in the Silla society. This study argues that a Hyangga work in at Samgukyusa Giyi is the song derived from sexual organ worship. And, Gyosinsang of Beopheung and Okjin in Hwarangsegi, 'Saekgong' and 'Mabokja' system were originated from cultural value system of Silla that weighed high on human body and sexual organ. At the backgroun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lied behind it. A legend on sexual organ of King Jijeung recorded in in Samgukyusa Giyi also shows inherite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In particular, Penise of King which was 1 Ja and 5 Chis symbolized outstanding dignity of King, which seems to contain universal awareness of Silla people on body. Huge dung of queen candidate was figured out as a sexual medium. Here, the legend on sexual organ of King Jijeung demonstrates cultural code of sexual organ worship at Silla of the time.

Key words:sexual organ worship, Gujiga, Hunwhaga, Hwarangsegi, dung, Samgukyusa , Saekgong(sexual provide), Mabokja.

접수일자: 2016년 06월 25일 심사완료: 2016년 07월 28일 게재확정: 2016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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