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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야기

종교영화에 나타난 인간 존재론과 구원-박찬욱 <박쥐>와 김기덕<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중심으로-/오현화(한림대)外

Ⅰ. 서론

Ⅱ. 욕망하는 존재와 인간 구원의 (불)가능성 : <박쥐>

1. 목마른 존재로의 전락 혹은 부활

2. 두 개의 구원 : 실패한 구원과 암시된 구원

Ⅲ. 업보(業報)의 순환과 자기 성찰적 구원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1. 얽힌 욕망의 고리와 업보의 순환

2. 고행과 성찰을 통한 자기 구원

3. 기능적 사고 단계의 문화모형과 그 특징

Ⅳ.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소재적, 주제적 유사성을 보이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

울 그리고 봄>(2003)과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를 비교:분석하였다. 두

영화에서 종교적 사제의 파계가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와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 즉 육체적 욕망에 굴복

하는 영화 속 사제는 욕망과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보편적 인간에 대한 상징이

다. 특히 본고는 영화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난 ‘종교적 상상력’에 주목하였고, 이

를 통해 두 종교영화에 나타난 인간 존재론과 구원의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개별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해법을 가늠해볼 뿐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 각각을

대표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론과 구원론의 차이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기독

교적 상상력에 기반한 <박쥐>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갈증에 비유하며, 인

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적인 구원의 길을 암

시한다.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불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인간

이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 욕망하는 존재로

인간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공통점을 보이지만, 구원에 대해서는 상이

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각 영화가 기반으로 한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

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박쥐>가 초월적 신을 소거한 인간적 구원이 불가능함

을 보여주는 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자기 성찰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차이를 보인다.

주제어: <박쥐>(박찬욱, 2009),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김기덕,

2003), 욕망, 죄, 업, 구원, 존재론, 기독교, 불교, 종교영화

I. 서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과 박찬욱 감독

의 <박쥐>(2009)는 스토리 전개와 주제적인 측면에서 흥미로운 유사성

을 보인다. 인물과 스토리 전개에 있어 두 영화는 각각 가톨릭 신부와 불

교 승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이들의 세속화 과정을 보여준

다. 종교 사제의 파계가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에서 파계라는 소재는 단순한 흥미거리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

면 사제의 세속화 과정을 통해 두 영화가 성찰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 존

재와 구원1)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두 사제

는 특수한 개인을 표상하기보다는 욕망과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보편

적 인간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존재론을 성찰하는 두 영화가 종교적 상

상력에 기대어 인간의 존재와 구원을 탐문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부

를 주인공으로 한 <박쥐>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불교의 승려를 주인공

으로 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하 <봄 여름>)은 불교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한다. 종교는 인

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에서 시작되며, 최종 관심사는

구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쥐>는 기독교적 상상력에 기반

하여 갈증으로 은유된 인간의 한계와 구원의 지난함으로 보여주며, <봄

여름>은 불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인간이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 욕망하는 존재로 인간을 정의한다는 점에

서 두 영화는 공통점을 보이지만, 구원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를 제시

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즉 <박쥐>가 초월적 신을 소거한 인간적 구

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반면, <봄 여름>은 자기 성찰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1) 본고에서 ‘구원’은 기독교적 의미로 제한되지 않으며, ‘초월’이나 ‘해탈’ 등과 같이 인식적, 종교

적 방법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제 행위를 의미한다.

본고에서는 소재적, 주제적 유사성을 보이는 <박쥐>와 <봄 여름>

두 영화가 인간 존재와 구원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살펴보

면서, 덧붙여 영화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난 ‘종교적 상상력’에 주목하고

자 한다. 여기서 종교적 상상력은 단순히 가톨릭 신부와 불교 승려를 주

인공으로 설정하고, 종교적 제의를 직접적으로 활용 : 전유했다는 표피

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와 구원의 문제는 모든 종교의

핵심 교리이다. 두 영화가 존재와 구원이라는 종교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쥐>와 <봄 여름>은 종교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구

현한 영화이며, 넓은 의미의 ‘종교영화’2)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고의 작업은 종교적 상상력을 중심에 두고 두 영화에 나타난 인간 존재론

과 구원의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개별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해법

을 가늠해볼 뿐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 각각을 대표하는 기독교와 불교

의 인간론과 구원론의 차이를 확인하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II. 욕망하는 존재와 기독교적 구원의 전유 : <박쥐>

1. 목마른 존재로의 전락 혹은 부활

<박쥐>는 고딕소설 이래로 서구 공포물에서 확실한 계보를 형성해

온 흡혈귀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이다.3) ‘타자성’ 혹은 ‘이질

3) 김일영, 「불확실성과 “중간자(in-between)”에 대한 공포: 전환기시대의 고딕 『드라큘라』」,

『근대영미소설』 13호 3권(2009), 60쪽.

흡혈귀가 등장하는 고딕소설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고찰한 논문에서 김일영은 브램 스토커의 『드

라큘라』를 “단순히 공포를 유발하는 대중문학이 아니라, 전환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그린 문학”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드라큘라’가

유발하는 공포와 두려움은 이분법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중간자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온 드라큘라를 전유하면서도 가톨릭 사제를 뱀

파이어로 선택했다는 데에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이 존재한다. 사제인 현

신부를 중심에 놓고 보면, <박쥐>의 중심적 사건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

던 숭고한 신분의 사제가 인간의 피로 연명해야 하는 뱀파이어로 변신한

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강조되듯이, 현신부는 죽어가는 병자들

의 고통에 안타까워하는 자비로운 인물이었다. 그가 엠마누엘 연구소로

떠났던 것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험에 참가

중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가 수혈을 받아 뱀파이어로 부활하

게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이나 이타적 사랑에 집중하던 사제에서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뱀파이어로의 변신은 존재론적 전락이라고 부를 만한 것

이다.

하지만 ‘욕망’을 문제의 중심에 놓게 된다면, 현신부의 존재론적 변모

는 몰락이 아닌 부활로 해석가능하다.4) 현신부는 흡혈귀가 되고부터 인

간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 즉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존

재가 된다. 그렇다면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현신부는 숭고한 성직자의

신분을 잃은 대신, ‘욕망하는 인간’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욕망하

는 존재’라는 속성은 현신부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라여사, 강우, 태주, 환경 과장, 경비 과장)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질이며, <박쥐>에서 이와 같은 인간 욕망은 영화의 영어 제목인 ‘갈

증’(Thirst)으로 표상된다. <박쥐>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목마름

(갈증)에 비유한 기독교적 인간관을 떠올리게 하는데, 다양한 기독교적

모티프를 활용한 이 영화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4) 이상민, 「<박쥐>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서강인문논총』 25집(2009); 조미영, 「영화 <박

쥐>에 나타난 자기희생과 욕망」, 『문학과 종교』 15권 2호(2010) 참고.

위 두 편의 선행연구에서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욕망’을 문제삼는데, 이는 <박쥐>의 독해에서

‘욕망’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할 수 있다.5) 그러므로 ‘행복 한복집’에 모여 마작과 보드카를 즐기는 이

들의 모임 이름이 ‘오아시스’(oasis)인 것은 상징적인 동시에 역설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오아시스라는 이름은 회합에 모이는 이들이 목마른

존재이며, 이 갈증이 결코 해소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1,생략] 6)

5) <박쥐>에서 기독교적 모티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게 된 최

초의 여성 이브에 대한 태주의 패러디(“나는 부끄럼 타는 여자가 아니에요.”), ‘이브 바이러스’라

는 명칭, 피를 마시는 행위, 에덴 동산의 패러디로 보이는 ‘행복고전의상실’ 등이 갖는 기독교적

의미를 간과한다면 영화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쥐>가 제시하

는 인간관이 기독교적 인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예수는 사마리아 여

인과의 문답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갈증’에 비유한 바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고 말하는데, 이는 생명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한계(갈증)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6) 오른쪽 사진은 수요일마다 행복한복집에 모여 마작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아시스’라는 명

칭은 이들의 모임이 목마른 자들의 회합임을 보여준다. 왼쪽 사진은 환자의 피를 마시는 현신부

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람들을 구원하려던 현신부의 애초 기획이 실패했음을, 그가 사람들

의 피에 의존해 사는 흡혈귀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박쥐>에 제시된 인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사제에서

뱀파이어로 존재론적 전락을 경험하는 현신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냐하면 인간 존재의 정의와 그 존재론적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현신부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뱀파이어가 되기 전과 뱀파이

어가 된 이후의 현신부의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이 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7) 현신부의 외적인 욕망(죄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친구의 아내에 대한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를 살해하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현신부의 욕망과 관련하여 더 주목

해볼 부분은, 현신부가 태주로부터 시험을 받는 장면과 뱀파이어로 변하

기 전부터 현신부가 품고 있던 욕망이다. 현신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태주는 현신부에게 세 가지 제안을 하는데, 이는 예수가 광야에

서의 40일 금식 직후 마귀에게 받았던 유혹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이다.

현신부는 ‘동전을 구부리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남편을 동전처

럼 만들어 달라’는 태주의 유혹을 받는다.8) 예수가 마귀의 유혹을 단호

히 물리친 것과 달리, 현신부는 모든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죄를 범하

게 된다.

그런데 간음이나 살인뿐만 아니라, 동전을 구부리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가 왜 죄인 것일까? 이는 기독교 교리에서 중시되는 죄의 핵

심이 “죄의 사악한 자기 중심성”에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9) 즉 외적으

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혹은 어떤 행위를 했는가보다 행위의 동기

7) 조미영, 같은 논문, 151-154쪽.

조미영은 <박쥐>가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왜 그것이 잘못 되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

고 있다고 지적하며, 현신부의 근원적인 욕망이 신이 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결국 죄로 귀결된

다고 지적한 바 있다.

8) 이 셋은 예수가 받았던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엎드려 경

배하라’는 유혹에 대한 세 가지 패러디이다. 태주가 ‘남편을 동전처럼 만들어 달라’는 유혹을 직

접 하지는 않지만 현신부는 자신이 이와 같은 제안을 함으로써 세 번째 유혹을 스스로 완성한다.

에 존재하는 ‘자기 중심성’의 유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받았던

시험, 현신부가 받았던 유혹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 유혹들이 ‘너의 욕망

에 굴복하라’, ‘네 자신이 주인이 되라’는 요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기

독교의 교리에서 볼 때,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전능’을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 자체가 이미 죄인 것이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기

적을 행사하기를 거부했던 예수와 달리, 현신부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태주의 요청에 응하여 동전을 구부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태주를 구한다는 명분 하에 친구인 강우를 죽인다. 하지만 간음이나 살

인이라는 명목 상의 죄보다 더 큰 죄악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적

을 행사하는 현신부의 자기 중심성에서 찾아야 한다.

즉 현신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능력을 사용한 때부터 하나님의 전능

에 도전하는 죄를 이미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적인 사실

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의 죄가 뱀파이어로 변한 이후 현신

부에게 발현된 성향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뱀파이어로 변

하기 전에도 현신부에게는 죄의 자기 중심적 성향이 내재해 있었다.10)

그는 무기력한 기도보다는 차라리 과학이나 기적을 신뢰하는 경향을 보

이며, 기적이나 과학의 힘으로 고통에 처한 환자들을 구원하기를 간절

히 소망한다. 하지만 환자들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소

9)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서울: IVP, 1988), 122-123쪽.

스토트(J. R. W. Stott)는 모든 죄가 “예수님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부르신 그

것을 어기는 것이며, 이는 단지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

나님이 창조주요 주님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10) 조미영, 같은 논문, 154-165쪽.

현신부의 욕망을 라캉의 ‘대타자의 욕망’으로 보는 조미영의 논의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

만, 그에게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지적, 뱀파이어를 욕망의 결과물로 보는 견해에는

타당한 점이 있다.

망, 특히 가학으로 가득 찬 기도문에는 현신부의 ‘구원망상’이 투사되어

있으며, 그렇다면 자신이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환자를 구하려

는 욕망 이면(裏面)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타인을 구원하려는 욕망

과 자신이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처럼 교착되어 있음을 상기한

다면, 현신부의 욕망(죄)이 단지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 발현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렇듯 뱀파이어로 변하기 이전부터 현신부에게 죄의 성향이 존재했음

에도 불구하고, 현신부는 자신이 죄를 범한 이유가 철저히 외적인 것임

을 강변한다. 그가 뱀파이어로 변한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려는 것, 또한

잘못된 수혈로 인해 자신이 뱀파이어가 됐음을 강조하는 것은, 죄의 책

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논리에 따른다면, 그가 뱀파이어가 된

것은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자신의 선택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다는 논리, 즉 욕망

하는 존재, 죄를 짓는 존재로 전락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

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 논리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의 주장

이 결국 악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논리에 은연 중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뱀파이어나 수혈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죄악은 정체불명의

피와 동일시되며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형성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죄의

경향이 현신부에게 존재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뱀파이어=악

(惡)’↔‘신부=선(善)’이라는 이분법은 정확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박

쥐>에서 인간 존재는 뱀파이어인 동시에 신부인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사제인 동시에 뱀파이어의 운명을 가진 현신부는 인간 존재의

운명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의 존재가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거나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 존재론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정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내적 갈등을 생생하게 표현한 구절로 잘 알려진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 존재를 ‘곤고한 사람’으로 규정하며, ‘두 개의

자아’, ‘두 개의 율법’, ‘두 개의 부르짖음’, ‘두 개의 종노릇’으로 인해

갈등하는 인간의 ‘이중적 실상’을 묘사한다.11) 여기서 인간 존재를 곤고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바울이 지목한 것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죄라

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

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

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

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12)(로마서 7장 17절-25절, 강

조—인용자)

창세기에 등장한 뱀의 표상에서 확인되듯, 전통적으로 악이나 사탄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

11) 존 스토트, 정옥배 역, 『로마서 강해』(서울: IVP, 1996), 245-279쪽 참고.

로마서 7장의 해석은 존 스토트의 견해를 참고한 것이다.

12) 한국찬송가공회, 『성경전서』(서울: 대한성서공회, 2008), 248쪽.

개역판, 개역개정판 성경의 본문에는 마침표나 쉼표 등의 구두점이 없으나, 위 인용에서는 의

미의 전달을 위해 구두점을 표시하였다.

은 악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이유가 죄에 있는

데, 그 죄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 달리 말하면 선과 악이 ‘함께’ 존

재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견해에 따른다면, 뱀파이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수혈

로 상징되는 외적인 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혈이

나 나쁜 피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죄와 악을 배태한 존재이며 자기 내부

의 죄성으로 인해 타락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박

쥐>는 현신부로 대표되는 목마른 인간들을 통해 인간이 ‘욕망하는 존

재’이며, ‘갈증’으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

을 역설한다.

2. 두 개의 구원 : 실패한 구원과 암시된 구원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며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박쥐>가

제시한 인간관 역시 이러한 일반론적 인간에 대한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

는다. 하지만 <박쥐>는 이러한 단순한 인간론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

지 않고, 존재론적 한계를 죄, 그리고 구원과 연관시킨다. 이렇듯 사유

의 폭이 확장되는 이유는 영화에 다층적으로 작용하는 기독교적 상상력

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즉 <박쥐>는 기독교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죄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구원의 문제

에 천착하도록 인도한다. 그런데 <박쥐>에 제시된 인간 존재론이 기독

교적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박쥐>의 구원에 대한

입장은 기독교 신학과 다소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쥐>가 구원에 대해 기독교적 교리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 영화가 반신학적인 텍스트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냐하면 <박쥐>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구원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13) 다시 말하

면 <박쥐>가 초월자나 절대자를 등장시켜 인간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현신부의 실패가 오히려 신적인 차원의 구원 가능성을 개방한다

는 것이다. 현신부의 여정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모색한 기획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인 힘으로 자기 자

신 및 타인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기획은 전도(顚倒)의 양상을

띠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첫째는 희생의

피가 욕망의 피로 바뀌는 것이고, 둘째는 구원의 주체와 그 대상 사이의

뒤바뀜이다. 결국 현신부의 도발적 기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실패는 구원의 길이 차단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학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강조한다.

즉 예수의 보혈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의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을 상징한다는 것이다.(존 스토트 1988:229-

277)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다”(존 스토트

1988:230)는 전제로부터 기독교의 구원은 출발한다. 특히 구원과 관련

하여 신약과 구약은 공통적으로 ‘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유대 제

사의식에 대한 자세한 규례를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는 “내가 이 피를 너

13) 물론 영화에 초월적 신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박쥐>에 나타난 구원의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현신부의 실패한 도정이 전적

인 구원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 구원 자체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여기에는 오히려 인간이 아닌 신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레위기

17장 11절)라고 말하는데, 구약에서는 인간의 속죄를 위해 희생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가 필수적으로 요청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더 이상 동물을 통한 희생제의가 필

요치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속죄가 가

능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히브리서 9장 28절) 된 그리스도의 희생이 수많은 동물의 피를 대신

하게 된 것이다. 신약 성서가 그리스도의 희생이 고귀한 것임을 드러내

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피’를 동반한 것임을 강조한다.(존 스토트

1988:244) 베드로는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

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

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장 18절-19절)고 말하는데, 존 스토

트는 여기서 ‘피’가 ‘생명’보다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존 스

토트 1988:245) 구원을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즉 구원자인 예수

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피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기독교적 모

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박쥐>에 피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

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쥐>에 등장하는 피는 성서에 등장하

는 피와 등가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성경에서의 피가 인간 구원을 위해

흘려지는 희생의 피라면, 영화에서의 피는 뱀파이어의 생명 연장을 위

해 바쳐지는 피이다. <박쥐>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인

‘피’를 전유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구원에 대한 영화적 입장이 애매해지

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희생의 상징인 피

를 흘림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완성한다. 하지만 현신부에게 피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생명의 피를 의미한다. 영화는 희생과 죽음의 피가,

욕망과 생명의 피로 전도되는 과정을 통해 현신부가 처한 위기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현신부의 인간적 기획이 실패임을 강우의 아내인 태주

를 통해 증명한다. 태주는 현신부에게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는 현신부

가 차지하고자 한 여성일 뿐만 아니라, 현신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죄를

범하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특히 그녀가 현신부에게

던진 유혹이 사탄이 예수에게 했던 유혹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그녀에

게 할당된 배역이 악(evil)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현신

부는 태주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라거나, 자기 내부의 죄성을 상징한

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에게 태주는 오히려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며, 이 오인과 자기기만으로부터 현신부의 실패는 시작

된다.

구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신부가 모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의 행적이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현신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다. 그리고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예수를 성공적으로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피흘림으로 메시야의 사명을 완수한 예수와 정반

대로, 남의 피를 마셔 생명을 이어가는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그의 계획

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흘려야 하는 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전도는 그가

실패한 구원자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한다. 현신부가 태주를 구원하는 일

에 열정적인 것도 자신의 기획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이

다. 태주를 구원하려는 현신부의 시도는 두 가지의 행위로 구체화된다.

강우를 살해함으로써 태주를 폭력적인 가정으로부터 구하고자 한 것이

첫 번째 시도이고, 죽은 태주를 뱀파이어로 부활시킨 것이 두 번째 시도

이다. 하지만 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은 태주를 구원하려던 현신부

의 노력이 실패하였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기독교 교리는 인간에 의한 구원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구

원은 십자가와 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

다. 즉 욕망과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존재론적 한계를 깨닫고 자기

를 부인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생생하게 묘사했듯이, 인간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 인간 내부에서의 투

쟁이 계속된다는 데에 인간의 곤고함이 있다. 순교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신부는 태주와 함께 죽는다. 이는 태주로 상

징되는 악이 인간 내부의 죄성임과,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인간이

죄악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초월적인 신의 개입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신부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구원이 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III. 업보(業報)의 순환과 자기 성찰적 구원 : <봄 여

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1. 얽힌 욕망의 고리와 업보의 순환 : 봄, 여름,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서사의 치밀한 주조보다는 상징적인 미장센을

통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영화 역시 봄, 여름, 가

을, 겨울이 보여주는 산사의 풍경과 인간사의 결합을 통해 그가 말하고

자 하는 바를 직조해 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은

종교가 지닌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를 보편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

에서 기독교적 원죄의식14)이나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업보15)로도 분석이

가능하다. 이 영화 역시 <박쥐>와 동일하게 종교영화에서 보여지는 구

원과 죄의식이라는 보편적 메시지를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욕망과 구원

의 형상화 방식에 있어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 한 <박쥐>와는 상이한

차이를 보인다. <봄 여름>에서 구현하는 불교적 인간관과 구원의 양상

을 살펴보는 것은, 각기 다른 종교영화 속 구원의 양상을 파악하는 작업

인 동시에 종교영화 일반에 나타나는 구원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기존 연구들이 <봄 여름>이 불교적 세계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는 데는 공통적 의견을 보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영화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하고, 종교적 상상력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분석은

미흡한 실정이다. 이글은 영화의 서사 구축 방식이 불교적 세계관과 긴

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는데 주력할 것이다.

영화는 산속 호수 한 가운데 섬처럼 부유하는 사찰의 사계절을 인간의

일생에 대비하여 카오스(혼돈)와 코스모스(질서)가 반복되는 종교적 시

간이 지닌 제의적 의미를 재현하고 있다. 종교적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세속적인 시간과 달리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재생된다.16) 영화 속 서로

14) 이동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김기덕 영화에 관한 세 개의 반문􄫼인간조건에 대

한 기독교적 성찰」, 『씨네21』(2003. 10. 1) ; 황영미,「정죄를 넘어선 구원의 서사」, 『영화비

평현실』2(2004), 참고.

이동진과 황영미는 영화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없는 어린아이의 악행을 업

의 시작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인간이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관시

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15) 조정래,「물을 건너는 세 가지 과정」,『영화비평현실』2(2004) ; 박종천, 「영화가 종교를 만났을

때 -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44(2006) ; 이효인,

「불교영화 <만다라>, <화엄경>,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불교성 연구」, 『영화연구』

35(2008), 참고.

불교영화의 외피를 취하고 있는 <봄 여름>은 영화가 구축하는 종교적 상상력으로 인해 불교적

세계관에 기대어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봄 여름>이 ‘업과 윤

회의 고집멸도’를 형상화하기 위해 범계를 둘러싼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밝히

고 있으며, 인간의 보편적 삶이 지닌 종교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의례적 영화

체험이라는 상상적 경험을 가능케 한 영화라고 보고 있다.

16) M. 엘리아데, 이은봉 역,『성과속』(서울: 한길사, 2000), 89-99쪽 참고.

종교적 시간은 순환적, 가역적, 회복 가능한 시간으로, 의례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

종의 신화적 영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제의를 통해 태초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의 재현과 달리,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무한히 회복하고 반복 가능한 시간이다. 인간은 주

기적으로 회귀하여 동일한 성스러운 시간을 재현하고 신을 모방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된다.

다른 동자승이 똑같은 악업을 반복하는 것은 “동일한 개인이 과거에도

나타났고 현재에도 나타나고 미래에도 주기 회귀 때마다 나타나는”(M.

엘리아데 2000:118) 종교적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종교적 시간을 체험토록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각기 다른 4명의 배우가

주인공의 어린 시절, 소년, 청년, 장년 시절의 역할을 한다. 또한 보라색

머플러를 두른 여인이 두고 간 아이의 동자승 역을 주인공의 동자승 시절

역을 담당했던 배우가 반복한다. 이는 세상 모든 존재가 인드라망17) 구조

처럼 서로 복잡하고 겹겹이 얽혀 있어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

된다는 불교의 연기법에 기인한 의도적 장치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

루는 영화에서 대개는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을 구분하여, 유소년 배

우와 성인 배우 2명을 기용하곤 한다. 청장년 시절 시간의 흐름이 가져

다주는 미묘한 변화는 성인배우의 분장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통상적이

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동일 인물을 각기 다른 4명의 배우를 기용하

고 있으며, 다른 인물임에도 동일 배우를 등장시키고 있다. 동일자가 서

로 다른 타자처럼 얽혀 있고, 서로 다른 타자가 동일자로 보여지는 것은

영화 속 죄(업)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보편적 업보에 관한 것임을 드러낸다.

17)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불교의 이해와 신행』(서울: 조계종출판사, 2009), 37쪽.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 구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 박힌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의 영상이 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저 구슬은 이 구슬에,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 너의 구슬은 나의 구슬에,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에, 정신의 구슬은 물

질의 구슬에,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

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중중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사진2,생략]18)

영화는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쌓게 되는 업과 자기 성찰을 통한 불

교적 구원의 문제를 반복되는 사계의 시간적 흐름 속에 배치시켜 구현하

고 있다. 봄과 여름, 그리고 다시 돌아온 봄의 장을 통해 주인공과 여인

이 두고 간 동자승의 살생과 애욕을 통해 윤회하는 인간의 악업을 형상화

하고 있다. 주인공의 욕망과 악업은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시간 구

성에서 점점 더 확장되는 추세를 보인다. 봄의 장에서 미물(물고기, 개

구리, 뱀)들에게 돌을 매달아 살생의 업을 지은 동자승은, 여름의 장에

와서 요양 차 사찰에 들린 소녀와의 섹스로, 급기야 가을의 장에 와서는

외도를 저지른 아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악업이 쌓이게 된 근본 원인

은 그가 어린 시절 미물들에게 했던 살생의 업으로 인한 것이다. 불교에

서 업(業;karma)은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vipaka)는

‘이숙(異熟)’, ‘성숙함’을 의미한다. ‘업’과 ‘보’는 인간의 의지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들 사이에는 직접

적인 인과관계가 수반된다. 즉 업인(業因)이 선이면, 과보(果報)도 선,

악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교양교재편찬위원회

18) 왼쪽은 주인공의 동자승 시절이며, 오른쪽은 보라색 머플러의 여인이 두고 간 동자승이다. 김

기덕은 서로 다른 동자승에 동일 배우를 출연시키는 방식 등을 통해, 재생 반복하는 종교적 시

간을 재현하고 불교적 세계관을 의도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종교적 상상력을 구축하고 있다.

2002:91)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는 그

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교양교재편찬위원회

2002:97) 동자승이 저지른 살생은 업보의 시작이며, 이후 그가 경험하

게 되는 애욕과 살인, 파계와 고행의 삶에 인과율로 작용한다. 노승은

동자승이 미물들에게 행했던 살생을 보고 그들처럼 동자승에게 돌을 매

달아 벌을 준다. 노승이 동자승에게 “평생 그 돌을 가슴에 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영화 속 돌덩이는 죄의 시작이자 악업을 씻고 자기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행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자

신의 업을 씻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 장년의 주인공이 부처를 들고, 등에

돌을 매달고 높은 산으로 오르는 수행 과정 중에 어린 시절 그가 행했던

악업이 중첩되어 보여주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봄의 장에서 보라색 머플러의 여인이 두고 온 동자승의 살생이 반복되는

것은 윤회를 통한 업보와 욕망, 구원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계속 순환되는 불교의 업보와 윤회를 통한 종교적 시간

을 구축하기 위해 감독은 필연적으로 사계절의 반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는 뱀이나 수탉과 같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동자승과 소년의 심리

를 반영한다. 뱀은 사계절 모두에 등장하며, 주인공의 업보와 구원의 문

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봄의 장의 뱀은 동자승의 장난으로 돌덩

이를 몸에 매단 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피를 내뿜고 죽어간다. 동자승

은 자신이 저지른 살생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버린 뱀을 보고 오열 한

다. 이때 동자승의 오열은 죄의식에 기반 한 후회의 감정 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최초의 목격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봄과 여름의 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저지른 업보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

움을 내비치지 않는다.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지 못하고, 미물을 괴롭히

는 것이 놀이가 아니라 살생의 업이 된다는 것을 동자승은 알지 못한다.

여름의 장에서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소년에게 소녀에 대한 애욕

은 인간 본연의 욕망일 뿐,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과는 무관한 문제이

다. 아직 동자승에게 자신의 악업에 대한 죄의식을 인식하기에는 계절의

순환에서 이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동자승의 오열과 뱀의 죽음은 인간

의 악업이 시작됨을 알리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인간 본연의 욕망에 다

름 아니다.

여름의 장에서 소년은 산 속에서 뱀들이 서로 얽혀 교미하는 장면을 호

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소년은 지병을 치유하기 위해 사찰을 찾아

온 소녀에게 난생 처음 욕정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서 공간을 구획하

는 것은 문이다. 문을 둘러싼 벽이나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문

에 의해서 속세와 사찰을, 법당과 승당(스님들의 거주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속세와 승당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욕망과 그로 인해

악업이 자행되는 공간인 반면, 사찰과 법당은 자기구원과 해탈, 열반의

공간이다. 구획된 이들 공간은 문은 존재하지만 각각의 공간을 구획하는

경계는 없다. 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노승은 문을 통해 법당

과 승당을 오가고, 문을 통해 사찰과 속세를 왕래한다. 문을 통해서만이

왕래가 가능하다는 것은 속세와 종교적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공간을 가로막는 벽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문을 통하지 않고도 법당과 승당을, 속세와 사찰을 넘

나들 수 있다. 주인공과 노승의 이동은 구획된 공간의 문을 통해서만 엄

격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름의 장에서 소년은 노승이 문 앞에서 자

는 바람에 법당에서 잠든 소녀를 보기 위해 법당으로 가는 문을 통한 이

동이 여의치 않자, 문을 통하지 않고 바로 그녀에게 간다. 처음으로 승당

과 법당을 구획하던 공간은 와해되고, 소년으로 인해 법당은 육욕의 공

간으로 변모한다. 이제 비가시적인 경계를 통해 엄격하게 구획되던 종교

적 공간은 더 이상 소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악업을 쌓는 속세의 공간만이 공존할 뿐이다.

경쟁심이 강하고 투쟁적이며, 강한 생식본능을 지닌 수탉은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물처럼 보이지만, 소년의 애욕으로 경계가 와해된 사찰

에서 연신 모이를 쪼아대는 수탉의 탐욕은 소년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다. 관계 후 잠들어 있는 소년과 소녀를 태운 배를 사찰로 끌

어오기 위해 수탉을 이용하는 것도 소년을 사찰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소녀에 대한 애욕뿐임을 증명한다. 노승의 꾸짖음도 소녀의 하산도

소년의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찰 밖 산속에서 소녀와 관

계를 가질 때, 노승은 붓에 물로 묻혀 불경을 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물

로 쓴 글은 붓을 떼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는 가을의 장에서 고

양이의 꼬리를 붓 삼아 반야심경을 써서 청년의 고행을 씻어주는 것에 반

해, 아직 소년에게 깨달음을 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소녀가 떠나자 소년은 수탉과 돌부처를 훔쳐 사찰을 떠나버린다. 경계

를 와해시켰던 수탉과 소년이 사찰을 떠남으로써 다시 공간은 구획되고,

사찰은 종교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소년의 파계와 돌부처가 사

라져버린 텅 빈 법당에서 예불을 올리는 노승의 모습은 사찰이 아직 완전

한 종교적 공간으로 회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돌부처와 파계한 사제

가 돌아와야만 온전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

화는 사찰 밖 산 속에 버려진 수탉을 보여줌으로써 소년이 돌부처만을 가

지고 속세로 나갔음을 알려준다. 이는 소년이 업보로 인해 사찰을 떠나

게 됐지만 여전히 사제로서의 연을 끊지 못하고 있으며, 다시 사찰로 돌

아올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2. 고행과 성찰을 통한 자기 구원 :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가을의 장에서 마을로 시주를 나간 노승은 주머니에 고양이 한 마리를

사찰에 데려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전파된 삼국시대 경전을 보호

하기 위해 중국에서 고양이를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불심이 강했던 세

조를 자객으로부터 구해준 고양이 전설19)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불교에

서 고양이는 보호, 구원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양이는 부처를

모셔놓았던 법당 주변을 보호하듯 배회하면서 마치 소년의 파계로 벌어

진 틈새를 메우는 행위를 한다. 수탉 대신 사찰에 기거하게 된 고양이는

사찰이 다시금 완전한 종교적 공간으로 회복 가능함을 보여준다. 살인피

의자 제보 기사에 실린 청년이 소년임을 알아 본 노승은 그가 다시 돌아

올 것을 대비하듯 낡은 승복을 손질한다.

외도한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 중 사찰에 돌아온 청년은 최초로 죄의식

으로 인한 후회와 자책을 보이기 시작한다. 청년은 아내를 죽인 자신의

칼로 머리를 밀고, 閉(폐)자를 쓴 화선지로 눈, 코, 입을 막고 죽음을 기

도한다. 단절의 뜻인 閉자로 얼굴을 가린 것은 속세와의 연을 끊고자하

는 청년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閉자로 얼굴을 막는 청년에 이어 노

승에 의해 다시 한 번 재현되는데, 청년의 그것과는 상이한 맥락에서 이

해될 수 있다. 노승은 閉자를 눈과 코, 입, 귀를 막음으로써, 속세와의

완전한 단절과 소신공양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반면, 청년은

19) 최정희, 『한국불교전설 99』(서울: 우리출판사,1996), 391-394쪽 참고.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그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

당으로 들어갔다. 막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

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

왔다. 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

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

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

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

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즉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으로,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

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

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세조와 고양이 편>

눈, 코, 입에만 閉자를 막고, 귀를 가리지 않았다. 이는 이중적인 해석

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귀를 막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속세에 대한 욕

망과 집착이 그를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며, 동시에 타자의

목소리(노승의 가르침)를 통해 청년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閉자로 얼굴을 막고도 번뇌를 떨치지 못한 청년은 여전히 ‘무명(無

明;avidya)’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무명은 진리에 눈뜨

지 못하고 사물에 통달하지 못해서 사물과 현상의 도리를 확실하게 이해

할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아야하

는 지혜가 ‘명(明;vidya)’인데, vidya는 밝음,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바꿔 놓는 결정

적인 계기가 된다.(교양교재편찬위원회 2002:80) 세속적 욕망과 집착

은 실체가 아닌 허상에 불과한데도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인간

이 무명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명을 통해 자기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여 번뇌를 극복하고, 고행을 통해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

음을 강조한다. 영화는 가을과 겨울의 장에서 명의 깨달음이 주는 불교

의 자기 성찰적 구원의 방식을 형상화한다.

업보로 인해 번뇌와 고통에 시달리는 청년을 구원하기 위한 첫 번째 시

도는 고양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고양이는 과거 청년이 가져가 버린 부

처의 보전적 의미를 대신한다. 부처를 대신한 고양이와 노승의 가르침으

로 청년은 구원을 위한 고행의 길에 들어선다. 물로 불경을 써내려가던

여름과 달리 노승은 고양이의 꼬리에 먹물을 묻혀 반야심경을 써내려간

다. 노승은 청년에게 자신이 쓴 글을 모두 다 파서 마음 속 분노를 지우

라고 종용한다. 반야심경을 파내려가는 행위는 청년의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을 치유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첫 번째 단계로 가슴 속의 분노를

도려내는 자기 고행의 모습이다. 영화 속 모든 죄의 시작은 주인공의 손

에서 시작되었다. 미물들을 괴롭히던 것도 그의 손이었으며, 소녀가 사

찰에 온 첫날 배에 태우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아주던 것도 그의 손이었

다. 아내를 살해한 것도 칼을 쥔 그의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을 통해 주

인공은 자신이 지은 악업을 봉합하고 절대자가 아닌 자기 성찰을 통한 구

원을 가능케 한다. 자신으로 인해 죽어버린 물고기를 묻어주고, 아내를

죽인 손으로 반야심경을 새기고, 교도소 복역 후 다시 돌아온 사내가 얼

음으로 부처를 조각하는 것도 그의 손이다. 주인공의 손은 죄를 비추는

과정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손의 중의적 의미는 결

국 악업도 구원도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박쥐>와 <봄 여름>이 구현하는 인간 존재론과

구원의 문제가 만나는 지점인 동시에 대별되는 대목이다. 죄의 ‘자기 중

심성’ 관점에서 본다면 두 영화는 모두 욕망과 죄가 자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현신부의 자기 구원 기획이 실패로 끝난 반면 청

년은 자기 구원을 성공적으로 이룬다.

겨울의 장에서 보라색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묘령의 여인이 아이를 안

고 사내를 찾아온다. 여름의 장에서 소년이 소녀를 보기위해 문을 통하

지 않고 법당으로 건너간 것과 달리, 사내는 머플러 속 여인의 얼굴을 보

기위해 문을 통해 법당으로 가나, 그녀에게 손이 잡혀 포기한다. 그 여인

은 사내가 속세에서 맺은 마지막 인연일 가능성이 높으며, 여전히 사내

에게 남아있는 욕망의 잔여물이다. 소년과 달리 문을 통해 법당으로 간

사내의 행위는 반야심경을 새기고, 얼음부처를 조각하는 등의 자기 수행

을 통해 구원을 위한 깨달음에 조금씩 근접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

인은 야밤에 몰래 사찰을 빠져나가려다 사내가 파 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

져 죽는다. 다음날 아침 사내가 조각한 얼음 부처가 녹아내리면서 이마

에 넣어놓은 노승의 사리는 물에 흘러 내려가 버린다. 아이의 울음소리

에 잠이 깬 사내는 자신이 파 놓은 물구덩이에 빠져 동사한 여인의 시체

를 건져낸다. 전날 밤 보지 못했던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자, 여인의 얼굴

은 어느새 부처의 얼굴로 변해있다. 사내와의 마지막 연을 지닌 여인의

죽음, 그리고 부처의 모습으로의 현현은 사내가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떨쳐내 버렸음을 의미한다. 노승의 사리, 부처로 현현한 묘령의 여인으

로 이어지는 깨달음의 사슬은 사내를 다시 사제의 삶으로 안내한다. 사

내는 무술연마와 어릴 적 자신이 행했던 악업으로 인해 얻은 마음의 죄인

돌을 허리에 매고 반가사유상을 들고 산을 오르는 고행을 시작한다. 다

시 봄이 되고 노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내는 여인이 두고 간 아이를 돌

본다. 노승과 사내, 동자승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는 업보와 자기 구원

의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기존의 사찰과 달리 영화 속 사찰은 호수 위에 부유하고 있다. 유동적

인 물 위의 사찰은 순환:반복하는 윤회를 통한 악업의 생성과 소멸을 가

능케 한다. 장년의 사내가 무술 연마와 수행을 통해 자기 구원을 완성하

는 겨울의 장만이 유일하게 물이 얼어 사찰은 고정되어 있다. 얼음이 녹

아야만 흐르는 물이 될 수 있으며, 구원을 통한 재생과 부활이 가능한 부

유하는 유동적인 사찰이 될 수 있다. 가을의 장에서 노승이 입적한 이후

사찰은 사방이 얼어붙어 모든 것이 고착화된다. 사찰을 녹이기 위한 사

내의 움직임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먼저 사내는 얼어버린 배의 얼음

을 깨고 노승의 사리를 건져내, 붉은 종이에 말아 얼음 부처 이마의 눈에

끼워 넣는다. 부처의 이마의 눈은 세상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인 ‘명’을

의미한다. 입적한 노승의 사리가 부처의 눈을 대신하고 있음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이 초월적 신에 의한 죄 사함에 있지 않고, 자기 성찰

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승의 소신공양이 이루어졌던 배에서 빠져나온 뱀의 움직임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 얼어붙은 사찰에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건

사내가 파 놓은 물구덩이 사이로 흐르는 물과 사찰 곳곳에서 포착되는 뱀

의 움직임이다. 봄과 여름의 장에 등장한 뱀의 움직임이 생존과 애욕의

움직임이라면, 가을과 겨울의 장의 뱀은 깨달음과 자기 구원을 위한 재

생과 부활의 움직임이다. 가을의 장에서 노승이 입적한 이후 배에서 뱀

한 마리가 유유히 빠져나와 사찰로 건너간다. 사내가 사찰에 돌아와 발

견한 스님의 옷가지 위에 꿈틀거리는 뱀은 그대로 노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수행에 정진하는 장년의 사내가 기거하는 곳곳에서도 뱀의 움직임

은 포착된다. 사내가 묘령의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법당으로 건

너갔을 때에도, 뱀은 승당 한 켠에서 재생을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보인

다. 뱀은 자기 창조(단성 생식)가 가능하며,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 것

은 생명과 부활을 상징한다. 우주론에서 뱀은 만물이 나와서 다시 회귀

하는 태고의 미분화한 혼돈을 의미하기도 한다.(진 쿠퍼 2000:306-

307) 허물을 벗고 끊임없는 재생하는 뱀은 이 영화에서 악업의 윤회를

통해 인간사의 번뇌와 고통을 경험하고, 수행을 통해 자기 구원에 이르

는 주인공의 삶과 동일시될 수 있다. 또한 청년에게 가르침을 주고 입

적한 노승에게도, 부처로 현현한 보라색 머플러의 여인에게도, 그 여

인이 남기고 간 아이가 경험하게 될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뱀의 유연

한 몸통과 불꽃같은 혀는 물과 불의 대극을 상징(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2002:97쪽)한다. 뱀의 혀로 얼음을 녹이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재생과

부활을 알리듯 사내의 고행은 다시 봄의 장이 시작됨을 알리고, 사찰은

다시금 물 위에 부유한다. 영화는 뱀과 사내의 고행을 대비시켜 얼어붙

은 물을 녹여 다시금 봄이 오는 순환의 고리를 연상시키며, 죽음과 재생,

악업과 구원을 반복하는 불교의 종교관을 드러낸다.

IV. 결론

이 논문은 종교 사제의 세속화를 중요한 모티프로 삼은 <박쥐>와

<봄 여름>에 나타난 인간관과 구원의 문제를 비교:분석하려는 목적에

서 서술되었다. 두 영화는 서양 기독교와 동양 불교의 종교적 모티프를

활용하며,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두 영화가 조명한 인간 존재론은 상이한 지점을

가지면서도 인간이란 ‘욕망하는 존재’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구

원에 대해서 다소 다른 해답을 제시하는데 이는 두 영화가 기반으로 삼

은 종교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 문화와 기독

교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전유한 <박쥐>는 초월적 그리스도의 보

혈이 갖는 상징성을 수용하면서도, 인간적 구원을 시도하는 주인공의 모

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박쥐>는 기독교적 구원을 주제화하지

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초월자에 의한 구원만이 가능하다는 기독교 신학

과 배리되지는 않는다.

<박쥐>가 다양한 기독교적 메타포를 활용:전유함으로써, 인간의 존

재론과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했다면, <봄 여름>은 순환하는 사

계절의 시간 흐름을 통해 회귀 반복하는 종교적 시간을 형상화함으로써,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업보와 자기 성찰을 통한 불교의 구원관을 병

치시켜 재현하고 있다. 영화는 욕망하는 개인의 문제를 동일자와 타자가

복잡하게 얽힌 윤회 구조를 통해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확장시켜 전개하

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죄의 ‘자기 중심성’과 자기 성찰을 통한 구원이 시

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영화의 보편적 구원의 의미를 독해할 수 있지

만, <박쥐>가 인간적 구원의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

가 보여주는 구원의 의미는 상이하다. 구원에 실패한 현신부와 달리 <봄

여름>의 노승과 주인공은 자기 구원에 성공한다. 두 영화는 자기 구원의

성공 여부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적 구원관의 차이점을 확인시켜

준다. 두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 존재와 구원에 대한 종교적 상상력

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이한 종교 체험을 가능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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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Human Ontology and Salvation

in the Religious Film

Oh Hyun hwa · Jeong Jae rim

This treatise tries to compare and analyze the view of salvation, of human

that appear to religion film such as Thirst and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 Such analysis expects to make clear difference of occidental

world view and oriental world view as well as give help to understand religious

imagination that show to these movie. There are many part that Kim

Ki-Duk’s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2003) and Park Chan

Wook’s Thirst(2009) are resemblant in story progress and subject. Two

films describe that human is existence of desire in common, but show different

aspect about salvation. This is caused in difference of religion that

two films make to base. Christian is relieved by God that is Absolute, but

Buddhism accomplishes salvation through own reminding. This difference

connects with world view of occidental, and oriental beside different cognitions

between two religion.

Key words: Thirst(Park Chan Wook, 2009),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Kim Ki-Duk, 2003), desire, sin, karma, salvation,

ontology, christianity, buddhist, religious film

 

접수일자 : 2011년 3월 10일  심사완료 : 2011년 4월 10일  게재확정 : 2011년 4월 20일

서강인문논총제30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