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Descartes) 는 ‘사유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즉 사유가 존재의 전제조건이므로 사유와 실체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존재의 지속성은 이성에 기초하는 인식의 연장으로 보장된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순수한 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현대의 정치가나 종교가들은 혼란한 현실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현실은 사회과학적 이성이나 종교적인 신념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현실을 포착하여 상징의 체계로 변환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문학 예술의 상징적 텍스트를 분석하는 현대의 방법론들은 예술적 언어를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열중한다. 그 결과 인간의 실존적 삶이 거세된 기계적 결과물들만 양산되고 있다. 그러나 상상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는 예술 세계는 인간의 행복이나 조화의 원리를 모색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장자(莊子)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미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적 현실 인식은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상상의 세계 안에서 현실을 해체하지만 항상 현실 세계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학적 장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종교적 성격을 지닌 복잡한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하므로,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 다면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 거리만큼 시간적으로 다른 시대를 경험한 장자와 셰익스피어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고전을 해석하는 행위는 언제나 현재적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은 고전의 텍스트로 우리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이 교차하는 지점이 어디이고, 이들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두 사람은 동일하게 현실의 가려진 내면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꿈의 형식을 사용한다. 장자는 장자에서 ‘나비의 꿈’ 을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마법의 꿈’을 사용하여 기존의 질서를 해체한다. 그런데 해체되어 드러난 현실도 고정되지 않는다. 장자는 작은 물고기가 거대한 새로 변화하는 과정을,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동물로 변화하는 모습을 통하여 초월적 변화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렇게 변화한 현실은 이전의 차원을 넘어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현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주어진 현실을 해체하여 다시 통합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진실한 삶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장자와 셰익스피어가 돌아가는 곳이 자연이고, 여기서 이들은 해체된 현실을 재통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자연이라는 개념도 문화적이다. 인간의 문명이 남긴 부정적 결과에 대한 비판적 근거의 원천이 ‘자연’인데 그러한 비판의 입장에 따라 자연의 성격이 다르게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적 배경과 역사가 다른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적 관점을 비교하면서 자연에 토대를 두는 새로운 통합의 예술적 원리를 모색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지난 20세기의 말미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목격한 것처럼, 극도로 파편화된 삶을 인류가 지속할 수는 없으므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무의미한 예술적 영역에서 현실적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Ⅱ. 해체된 현실
서양 예술의 전통은 현실을 보다 더 정확하게 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자연으로서의 현실 그 자체를 예술로 재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차용된 방법이 모방이다. 이러한 서양의 리얼리즘 전통은 그 자체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예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재현의 정확성에 전념하던 전통주의 교사들이 발견한 사실은, 자기 제자들의 난관이 자연을 복사하는 능력의 결핍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볼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이라는 사실이었다”(곰브리치 30). 다시 말해서, 자연을 모방하려면 우선 자연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술적 행위자는 표현하는 양식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꿈의 형식을 사용한다. 장자는 꿈속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셰익스피어는 마법에 걸린 연인들의 사랑을 달밤의 꿈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현실 세계를 해체하여 꿈의 세계로 환원하면서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일차적으로 감각적 자료에 의존한다. 여러 감각을 통하여 유입되는 정보는 이성적 통제 구조 안에서 통합되어 하나의 상으로 저장된다. 이들 감각들 중에서 시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삼차원의 세계는 시각적 감각이 우선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각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시각을 통하여 유입되는 물리적 신호는 내면에 저장된 지식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때문에, 외부 세계는 시각을 통과하는 모습 그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처럼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시 비춰볼 수 있는 이중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연극적 환영을, 장자는 인식론적 환영을 거울처럼 사용하고 있다. 장자의 ‘나비의 꿈’은 삼차원으로 고착된 시각을 초월하여 변화하는 현실의 실상을 볼 수 있게 한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 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 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 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昔者莊周夢為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籧籧然周也.不 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1)
1) 장자, 장자, 오강남 풀이 (서울: 현암사, 1999), 134쪽. 원문과 번역문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한다.
장자가 꿈속에서 마주한 자신의 존재는 날아다니는 나비이다. 꿈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장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의 경계선이 해체되어 무한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들어가고, 그 하나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존재의 정체성이 각기 분명하면서 동시에 다른 정체성으로 자유롭게 출입하는 관계, 즉 차이와 동일성이 병존하는 세계이다. 이것이 가능한 세계가 꿈속의 우주이다. 이런 세계는 만물이 상호 침투하고, 상호 의존하며, 상호 합일하는 상반상생의 원리에 따라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의 왕 오베론(Oberon)이 사용하는 마법의 약은 시각을 통하여 꿈의 세계로 곧장 진입하게 만든다.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마즙은 이성적 질서를 유지하는 인간과 요정의 의식을 혼돈의 상태로 만든다.
오베론.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넌 큰 실수를 했어. 사랑의 마즙을 진정한 사랑의 눈에 넣었어. 너의 실수로 분명 사태가 벌어질 거야 거짓 사랑이 진실하게는커녕, 진실한 사랑이 변심하게 만들었어. 퍼크. 그렇다면 운명의 여신이 관리하겠지요. 세상에는 진실을 지키는 자 한 명에, 맹세에 거짓 맹세를 더하는 자 백만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Oberon. What hast thou done? Thou hast mistaken quite, And laid the love juice on some true love’s sight. Of thy misprision must perforce ensue Some true love turned, and not a false turned true. Puck. Then fate o’errules, that, one man holding troth, A million fail, confounding oath on oath.2)
장자가 존재 일반으로서의 자연을 변화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셰익스피어는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 대상의 외양과 실제, 형이상학적 질서와 무질서, 존재의 시간과 공간적 변화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의 변화는 시간적으로 낮과 밤, 공간적으로 도시와 숲이라는 이원적 구조 안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등장하 는 연인들은, 요정과 인간 세상의 지배 권력, 귀족계층, 하층민, 신화속의 인물들인데,
2) William Shakespeare, The Complete Pelican Shakespeare, Eds. Stephen Orgel and A. R. Braunmuller (Harmondsworth: Penguin Books, 2002), 3.2.88-93. 이후 셰익스피어의 작품 인용은 여기서 하고 끝에 (막.장.행)으로 표기한다.
이들은 서로 유사하면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이러한 구분이나 분별이 근원적으로 소멸하는 상태를 우리는 장자의 꿈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 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임금은 뭐고 마소 치는 사람은 뭔가? 정말 꼭 막혀도 한참일세. 공자도 자네도 다 꿈을 꾸고 있으며 내가 공자나 자네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꿈일세. 이런 말이 괴상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들릴 테지만 만세(萬世) 후 에라도 이 뜻을 아는 큰 성인을 만난다면, 그 긴 시간도 아침저녁 하루해에 불 과한 것처럼 짧게 여겨질 것일세. 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 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 亦夢也.是其言也,其名為弔詭.萬世之後而一遍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장자가 말하는 꿈은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존재의 의미를 우주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개념이므로 세속적 가치 기준을 모두 소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도 다를 바가 없다. 태풍(The Tempest)에서 프로스페로(Prospero)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꿈속의 환상과 같다고 한다.
“저 구름 위에 솟은 탑도 호사스런 궁전도, 장엄한 신전도, 이 거대한 지구도, 그래, 세상의 온갖 것이 마침내 녹아서, 사라져 버린 저 환상처럼, 흔적도 없는 거야. 우리 인간은 꿈속을 걷는 것 같아서, 이 허망한 인생은 긴 잠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4.1.152-58)
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맥베스(Macbeth)는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긴다.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의 배역을 불안하게 연기하다가 사라지는 배우라는 것이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배우, 그 시간 그 무대에서 웃고 울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 인생은 소동과 광란의 천치가 지껄이는 소리”(5.5.24-27)
에 불과하므로, 인생으로서의 연극은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해체된 현실이다.
그러나 연극과 인생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상상으로 채워서 허상과 실상을 일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가가는 현실도 또 다른 허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런 점은 ‘본 그림자’와 ‘엷은 그림자’에 대한 장자의 설명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망량(罔兩, 엷은 그림자)이 영(景, 본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 게 줏대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오?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소?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罔兩間景;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無特操與?景日;吾有待而然者邪?吾 所待,又有待而然者那?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132)
우리가 추구하는 실상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은 현실을 철저하게 해체하여 모든 인식의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변증법적 미학은 진정한 자유에 대한 희구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꿈과 연극이라는 미학적 장치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이나 제도를 구속과 통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꿈은 정신현상학적으로 현실이면서 실재이므로, 꿈의 세계가 이성적 판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하여 비현실이고 존재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요컨대 꿈의 영역은 이성적 경계를 넘어서고, 꿈과 현실은 지배와 종속과 같은 일방적 관계로 전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꿈은 현실의 반영이면서 또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꿈과 현실은, 서로 상반되는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므로, 우리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초월하게 만든다.
Ⅲ. 초월적 변화
엘리자베스(Elizabeth) 시대의 연극은 배경이 없는 극장에서 상연되기 때문에, 현대의 영화 시나리오나 텔레비전 드라마 작가들과는 달리, 사실적인 묘사보다 상징적 성격이 강한 언어를 사용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사유를 촉발하는 이미지는 주로 꿈과 관련이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꿈과 같은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 직조공 보텀(Bottom)은 요정과 사랑에 빠진 마법의 꿈에서 깨어나면서, 자신이 경험한 그 세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보텀. 참으로 이상도 하지. 꿈을 꾸었는데, 사람의 지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 는 꿈이거든. 당나귀처럼 어리석은 인간이면, 이 꿈을 해몽하려고 하겠 지. 아무래도 뭔가—내가 다른 무엇이 됐던 것 같은데 말해줄 사람은 없겠지—그래 뭘 썼던 게 맞아—그렇지만 그렇다고 말하는 그 놈은 형 편없는 광대일 거야. 사람이 눈으로 들은 적 없고, 귀로 본 일이 없고, 손으로 맛볼 수 없고, 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통지할 엄두 도 못 낼, 그런 꿈을 내가 꾸었단 말이야! Bottom. I have had a most rare vision. I have had a dream, past the wit of man to say what dream it was. Man is but an ass if he go about to expound this dream. Methought I was—there is no man can tell what. Methought I was, and methought I had—But man is but a patched fool if he will offer to say what methought I had. The eye of man hath not heard, the ear of man hath not seen, man’s hand is not able to taste, his tongue to conceive, nor his heart to report, what my dream was. (4.1.203-12)
보텀 자신이 ‘보텀의 꿈’(Bottom’s Dream)으로 명명한 이 꿈은 인간의 모든 감각과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경험하는 꿈의 세계는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는 이원적인 구조로 구성되고, 꿈속의 장자와 나비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해체할 수 없는 상호 의존과 상호 침투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존재의 이중성은 이성이 지닌 한계에서 나온다. 인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판단이라는 믿음 그 자체가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허미아(Hermia)를 사랑하던 라이잰더(Lysander)는 마법에 걸려 헬레나(Helena)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라이잰더. 남자의 의지는 이성이 지배하는 법이오, 내 이성이 판단하기를 당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자라는 만물은 때가 되어야 무르익듯이, 지금까지는 어려서 이성으로 성숙하지 않았어요. 이제 분별심의 높이에 도달하여, 이성이 내 의지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Lysander. The will of man is by his reason swayed, And reason says you are the worthier maid. Things growing are not ripe until their season: So I, being young, till now ripe not to reason. And touching now the point of human skill, Reason becomes the marshal to my will. (2.2.115-20)
라이잰더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분별심에 따른 판단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라이잰더의 이성처럼, 잠에서 깨어나면서 당나귀 머리의 보텀을 사랑하게 된 티타니아(Titania)의 이성도 길을 잃었다. 티타니아에게 보텀은 이렇게 말한다. “부인께선 이성을 상실한 것 같군요. 하기야, 사실은, 요즈음 세상에 이성과 사랑이 함께할 이유가 없지요. 더구나 유감스럽게도 이 이성과 사랑 양편을 의좋게 해줄 선량한 이웃도 없는 세상이지만요”(3.1.137-41).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아닌 동물의 형상을 한 보텀이 가장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성은 감성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감성과 이성의 관계는 상호 침투적이기 때문에 고정된 관념으로서의 두 개념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처럼 이성과 감성은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는 이중성을 띤 관념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쉽게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 테세우스. 연인이나 광인들은 머릿속이 들끓어, 냉정한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어. 광인이나 연인이나 시인은 모두 온통 상상력으로 꽉 찬 사람들이야. Theseus. Lovers and madmen have such seething brains, Such shaping fantasies, that apprehend More than cool reason ever comprehends. The lunatic, the lover, and the poet Are of imagination all compact. (5.1.4-8)
상상의 세계는 무질서의 질서, 즉 혼돈의 세계이기 때문에 차원의 변화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고정된 관념은 증발하고 가치의 기준은 소멸한다. 그래서 마법에 김 창 호 9 걸린 후 잠에서 깨어나 첫눈에 마주친 보텀을 사랑한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도 당나귀를 사랑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오베론. 내 어여쁜 여왕 티타니아, 이제 깨어나오. 티나니아. 오베론님, 참 이상한 꿈도 다 있어요! 제가 당나귀와 사랑에 빠졌어요. 오베론. 저기 당신의 사랑이 누워 있지 않소. 티나니아. 어떻게 이런 일이? 혐오스러운 저 몰골을 내가 사랑하다니! Oberon. Now, my Titania, wake you, my sweet queen. Titania. My Oberon, what visions have I seen! Methought I was enamour’d of an ass. Oberon. There lies your love. Titania. How came these things to pass? O, how mine eyes do loathe his visage now! (4.1.74-78)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던 당나귀가 지금은 지독하게 역겨운 모습으로 보인다. 이제 다른 연인들과 함께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예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였다. 오베론이 티타니아, 라이젠더, 드미트리우스(Demetrius)에게 사용한 “마술적 장치는 자연에 대한 단순한 보충적 보조물이 아니라, 이 극의 ‘실제적인’ 결론에 대한 구조적 보조물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인물들이 ‘실제로’ 서로 사랑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왜냐하면 누구든 결국에는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으므로—그들의 환상이 서로 맞물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진실로 서로 사랑하고 또 그 환상이 서로 내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면, 이것을 두고 아마 우리는 진리나 현실에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할 것이다”(이글턴 41).
만약 인식의 대상에 대한 환상과 그 대상이 환상의 주체에 대하여 지니는 환상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완벽하게 일치하는 예를 찾는다면, 아마 그것은 장자와 나비 사이에 존재하는 환상일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환상이 서로 만나는 지점은 이전의 영역을 초월하는 곳에 있다. “중국에서는 미적 감상을 통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객체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 서구에서는 주객의 교류과정에서 주체가 자신과 대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주객이 모두 경험하지 못했던 경계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장파 507). 이러한 변화에서 심미적 체험은 시작된다.
변화무상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대상에서 우리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심미적 경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데, 장자는 이런 변화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 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 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 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 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千 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兩冥.南冥者,天地也. (26)
‘곤’은 작은 물고기 또는 그 알을 뜻하는데, 이렇게 작은 존재가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는 큰 물고기에서 다시 큰 새가 되어 구만 리나 되는 하늘에 오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자는 자유로운 존재로의 변화 과정과 그 가능성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체험은 내면적 인식의 변화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달리 외부의 인위적 환경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 있는 장자의 꿈이고, 후자는 집단적면서 객관적인 관점에서 펼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다. 장자는 체험의 주체가 인식의 변화 과정을 통하여 대상에 대한 초월적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셰익스피어는 대상의 변화 과정을 체험의 주체에게 보여줌으로써 초월적 경험의 장을 마련한다. 이와 같이 장자의 꿈과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해체되어 초월적으로 변화한 현실은 이제 이성적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 자유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인위적인 질서로 들어서는 통합의 길이다.
Ⅳ. 자연적 통합
모든 존재를 포섭하는 질서를 우주라고 할 때, 우주는 자연과 동일한 개념이 된다. 자연으로 귀속하는 우주적 질서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자연의 자율적 존재 양식에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우주의 질서로서 자연은 물리적 행위뿐만 아니라 상상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의 원천이 된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인 문화도 자연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물질적 제조물이 아닌 언어로 구성된 상상적 산물이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이중적으로 자연적 존재의 차원과 언어적 의미의 차원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존재에 대한 언어의 열등성 때문에, 현실 장악력에서 존재의 물리적 실천력이 언어의 마술적 구속력을 압도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의 차원으로 진입하면, 존재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언어적 기준은 모두 소멸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 여기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지인데, 장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 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有)’이 있으면 ‘없음(無)’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有) 이전의 그 없음(無)’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또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 러한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긴다. 있음과 없음 중에 어느 쪽이 정말 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뭔가 말했지만 이렇게 말한 것이 정말로 뭔가 말한 것인지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也者.有有也者,有無也者,有未始有無 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今我則 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 (98)
자연의 질서가 궁극적으로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의 징후를 통하여 자연의 구성 원리나 존재의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셰익스피어가 그리는 마법의 세계에서, 요정들의 불화가 인간 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혼란에 빠진 인간들의 갈등을 통하여 요정의 세계가 다시 질서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자연과 요정과 인간의 관계는 마치 “거울속의 거울처럼 메타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요정과 인간 사이의 장벽에는 틈이 있으나, 자연은 이들을 넘어서는 영역”(Grady 59)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와 셰익스피어에서 ‘꿈속의 꿈’이나 ‘연극속의 연극’은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거울속의 거울’처럼 효과적이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직공들이 만드는 연극 「피라무스와 티스베」(Pyramus and Thisbe)는 연극속의 연극이 지만, 실제로 배우들이 관객에게 보여주는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관객들에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텀. 내가 서사(序詞)를 하지. 서사에서 칼은 쓰되 상처는 안 나기 때문에, 피라무스는 사실 안 죽습니다 하고 말하고. 더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 렇게 말하지. 나 피라무스는 실제 피라무스가 아니고, 직조공 보텀입니 다. 이러면 이제 귀부인들이 안 무서워할 거야. Bottom. Write me a prologue, and let the prologue seem to say, we will do no harm with our swords, and that Pyramus is not killed indeed; and for the more better assurance, tell them that I Pyramus am not Pyramus, but Bottom the weaver. This will put them out of fear. (3.1.16-20)
그들이 보여주는 ‘연극이 실제와 유사하여 관객들이 현실과 환영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보텀의 제안은, “극적 환상에 대한 대립적 입장(antithesis of the dramatic illusion)을 취하는 것”(Kiernan 110)이다. 즉,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공연은 현대 연극에서 사용하는 서사극적 기법을 사용하는 하층민들의 연출이다. 환영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하층민 직공들의 모습은 아테네 궁중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예컨대, 귀족들에게 달빛은 변절과 부정을 상징하지만, 직공들은 이 달을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라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로 생각한다. 더욱이 한바탕 벌어진 궁중 귀족들의 놀이인 한여름 밤의 꿈의 끝맺음말을 노예인 퍼크(Puck)가 관중들에게 하고 있다.
퍼크. 그림자인 저희 배우들이 여러분을 언짢게 하였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만사형통입니다. 여기서 잠시 졸고 계시는데, 이들 환상이 나타나서 꾸민, 이 초라한 연극은, 단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Puck. If we shadows have offended, Think but this, and all is mended— That you have but slumbered here 김 창 호 13 While these visions did appear. And this weak and idle theme, No more yielding but a dream. (5.1.415-20)
퍼크의 에필로그는 극적 환상에 사로잡힌 관객들에게 두 가지를 일깨워준다. 한편으로 인생이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으니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환상과 현실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즉 “가시세계에 대해 우리가 갖는 상(像)을 결정하는 것은, 망막에 와 닿는 자극 패턴들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물의 ‘실제’ 모양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곰브리치 332)으로 외부의 현실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층민 직공들의 연극과 노예 퍼크의 마지막 대사를 통하여 셰익스피어는 낮은 신분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관념을 허물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귀족들과는 달리,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포정, 외발, 꼽추, 광인, 추남 등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는 스승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셰익스피어와 장자는 고착된 일반적 인식들을 해체하는데,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길은 인위적 구분을 초월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유지되는 기존의 질서는 조화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 질서를 해체하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려면 부조화의 바탕에서 조화의 원리를 찾아내어야 한다. 직공들이 젊은 연인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비극적인 사랑의 전설을 해체하여 희비극으로 만든 이 연극의 성격에 대하여 테세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테세우스. 즐거운 비극이라? 지루하면서 간결하다? 이건 뜨거운 얼음에 타오르는 눈이로군. 이 부조화의 조화를 어떻게 찾을까? Theseus. Merry and tragical? tedious and brief? That is hot ice and wondrous and strange snow. How shall we find the concord of this discord? (5.1.58-60)
그 조화의 원리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행세하는 공허한 언어를 해체하여 14 해체와 통합의 변증법: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 침묵의 언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시대상을 상실한 언어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침묵의 길을 테세우스의 입을 통하여 셰익스피어는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테세우스. 이 환영의 침묵을 내 마음으로 이미 느낄 수 있었소. 충성을 다하려는 두려움과 겸손의 마음에서 허황된 말과 당찬 능변의 요란한 혓바닥 그 이상을 나는 보았소. Theseus. Out of this silence yet I picked a welcome, And in the modesty o fearful duty I read as much as from the rattling tongue Of saucy and audacious eloquence. (5.1.100-03)
인간의 현실 세계는 문자화한 권력으로서의 언어가 지배하고 있다. 이 언어는 실체와 분리된 상태로 유통되기 때문에, 언어의 진실성은 양적 팽창에 반비례한다. 언어에 대한 장자의 입장도 셰익스피어와 다르지 않다. 장자의 ‘빈 배(虛舟)’는 언어적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 사 람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떠내려 오던 배에 사 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 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行舟而濟於河,有處船來觸舟,雖有惼心之人不怒.有一人在其上,則呼張歙之.一呼 而不間,再呼而不間,於是三呼邪,則必以惡聲隨之.向也不怒而今也怒,向也虛而今 也實.人能虛己以遊於世,其孰能害之? (388-89)
‘빈 배’가 다가와서 부딪치면 언어인 ‘배’는 지시하는 대상인 ‘배’와 일치하는 경우이고, ‘사람이 탄 배’가 와서 부딪칠 때는 ‘배’가 ‘사람’으로 대체되어 지시대상과 언어가 분 리되는 경우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화의 원인은 이미 상실한 자신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언어의 가식적 행위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지시대상과 분리된 언어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언어의 감옥에서 본능적 생존의 세계인 자연적 질서로 돌아가는 길이다.
여기서 본능은 충동적인 무질서가 아니라 생명의 지혜를 품고 있는 확고한 영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개념도 문화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적 방법론이 자연적 통합의 원리로 구성되고 여기서 우리가 소통의 현실적 원리를 찾는 것도 그리 무모한 일은 아닐 것이다.
Ⅴ. 결 론
셰익스피어와 장자의 꿈의 미학은 예술적 통합의 원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꿈의 구성 원리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 도입하는 반면에, 장자는 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존재의 근원적 원리를 도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구성론적 입장에서 세속적 미학, 장자는 과정론적 입장에서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예술 세계의 특성에서도 나타난다.
“동양의 예술가는 내면적 평화, 평정,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서양의 예술가들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불안감, 좌절감, 불만족, 냉소, 거부감, 배척감, 원망 등을 대중에게 보이는 데에 더욱 열중한다” (먼로 86).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이 대상으로 하는 외부 세계의 서로 다른 모습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적 인식의 차이에서도 기인한다. 현란한 세속적 언어로 구성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현실과 신념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반면에, 장자는 초월적 언어를 사용하여 내면의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인식론의 긴 여정에서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동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어둡고 절망적인 혼돈의 세계를 바라보고 인류 사회의 절망적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이거나 공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화를 통제와 억압으로 해결할 수 없 16 해체와 통합의 변증법: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 다는 사실을 장자와 셰익스피어는 잘 알고 있으므로, 이들의 미학적 장치는 놀이 정신에 토대를 둔다. 이 장치는 현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방식을 해체한다. 해체된 현실, 즉 예술 세계는 놀이 정신이 작동하는 원리에 따른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호이징하 316).
그러므로 인위적 규범으로 나누고 분할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은 놀이에서 추방된다. 놀이적 축제와 제의의 마당이 바로 그 현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태초에 세력을 떨치던 카오스의 회복, 곧 난장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 참으로 새로운 상황들에로 연결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제의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였다”(마르틴 114). 요컨대 ‘해체와 통합의 변증법’으로 작동하는 장자와 셰익스피어의 미학은 놀이적 제의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고통을 강요하는 사회적 제도의 폭력성을 거부감 없이 인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개인적 삶이 축제처럼 즐거우면서 유기체적 공동체의 상생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거부할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장자와 셰익스피어가 보여주는 초월적 축제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정체성이 드러나고, 제의적 통합에서 우리는 인간의 계급적 차이성이 아니라 본질적 동일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양방향으로 소통하기와 같은 것이다. 꿈과 현실이 상호 침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와 관객, 인간과 자연,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소멸하면서 세계의 모든 여성과 남성이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의 장에서 함께 춤을 추는 ‘나비의 꿈’ , 우리는 현실에서 실현하는 날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 용 문 헌
곰브리치, E. H. 예술과 환영: 회화적 표현의 심리학적 연구. 차미례 옮김. 서울: 열화당, 1992.
마르틴, 게르하르트. 축제와 일상. 김문환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먼
로, 토머스. 동양미학. 백기수 역. 서울: 열화당, 1991.
이글턴, 테리.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김창호 옮김. 서울: 민음사, 1996.
장자. 장자. 오강남 풀이. 서울: 현암사, 1999.
장파.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유중하 옮김. 서울: 푸른숲, 2009.
호이징하, J. 호모 루덴스. 김윤수 옮김. 서울: 까치, 1996.
Grady, Hugh. Shakespeare and Impure Aesthetics. Cambridge: Cambridge UP, 2009.
Kiernan, Pauline. Shakespeare’s Theory of Drama. Cambridge: Cambridge UP, 2000.
Shakespeare, William. The Complete Pelican Shakespeare. Eds. Stephen Orgel and A. R. Braunmuller. Harmondsworth: Peguin, 2002.
Abstract
Dialectic of Deconstruction and Synthesis: Aesthetics of Chuang Tzu and Shakespeare
Kim, Chang Ho
Chuang Tzu and Shakespeare see the world through dream. They think life is like a dream. As Shakespeare said that life is but a walking shadow, so Chuang Tzu thought we find that life is a dream when we wake up from a dream within a dream. They use dream as an aesthetic device for deconstruction of reality. Chuang Tzu dreamed a dream of butterfly, but he did not know whether he was Chuang Tzu who dreamed he was a butterfly or a butterfly who dreamed he was Chuang Tzu. In Shakespeare’s A Midsummer Night’s Dream King Oberon and Queen Titania of the fairy world are conflicting with each other and the natural world becomes disruptive, and young lovers are interrupted by magic. But at last they sort out their tangled situation. Across the world of dream did Chuang Tzu and Shakespeare venture to show that there’s nothing of no change. All the relationships of the lovers, the Mechanicals, and the fairies change and the border lines among them disappear. Bottom, used as a victim of Oberon’s revenge, has become a wiser man waking from his dream: “I have had a dream, past the wit of man to say what dreamit was.” The conflicts of all the lovers can be named as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which they have transcended the limits of the ordinary world. Nowthey have had new contacts with the natural world. The new world in the aesthetics of Chuang Tzu and Shakespeare may be that of interbeing, where our illusion and reality come near to the interralatedness of the fairies with human beings. That is a play and feast for the prohibition and elimination of discrimination and conflict.
Key words: Chuang Tzu, Shakespeare, A Midsummer Night’s Dream, dream, aesthetics, dialectic, change(metamorphosis), nature.
새한영어영문학 제53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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