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중국 고전⋅문학의 읽기론 -‘융합’과 ‘텍스트’의 갈림길에서-/류준필.서울대

목 차〉

1. 들어가며 : ‘융합 vs 텍스트’

2.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1) : 지각의 활성화 양상

3.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2) : 겹쳐읽기와 다시읽기

4.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3) : 읽기의 매체적 변환

5. 나가며 : 다시 ‘융합 vs 텍스트’

1. 들어가며 : ‘융합 vs 텍스트’

‘융합 vs 텍스트’라는 주어진 주제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얼핏 보면 ‘융합’ 과 ‘텍스트’라는 두 용어는 문학을 향하는 시선이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를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재적 특성에 초점을 두는 것과 외적 관계에 더 주목하는 것을 나누는 듯도 하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융합은 방법에, 텍스트는 대상에 가까운 의미를 함축하므 로 두 개념이 양립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이처럼 양립불가능이 아니라면 다른 하나의 배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텍스트를 선택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텍스트를 선택하는 데서 논의의 시작 지점을 찾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융합은 말 그대 로 이미 주어진 경계를 허물겠다는 입장처럼 이해된다.

이 입장은 두 가지 위치를 전제하는 듯하다. 경계가 제거된 이후의 상황을 가정하는 위치―초월적 위치이거나, 경계를 지워가는 과정 속의 위치―과정적 위치.

텍스트를 선택하는 위치가 이미 주어진 기존의 경계 내부에 자리하는 것이라면, 융합은 사후에 도달하게 되는 지금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위치이거나 경 계 너머로 이행해 가는 과정적 위치라는 뜻이다. 경계 속에 규정된 기존의 영역을 넘어 융합 의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융합의 사후적 결과보다는 텍스트를 출발점으로 삼아융합적 가능성을 경험하는 과정적 위치가 온당해 보인다. 이것이 앞서 말한 텍스트를 선택한 다른 이유이다. 뿐만 아니다. 문학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영역과 문학이 서로 결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융합이고 그러한 융합이 실제 가능하다면, 그때의 문학은 지금껏 익숙했던 문학은 아닐 것이 다.

융합의 과정 속에서 문학 경계 내부를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은 각기 다른 속성으로 구분 되어 해체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 내부에 존재했던 관습적 경계들 역시 임의적인 것으로 판명되어 문학 외적인 경계와 마찬가지로 융합의 경로를 걸을 듯하다. 융합 이 타당하고 정당한 경로라면 기존의 문학 내적 경계 또한 융합의 과정을 거치거나 적어도 해체되는 양상을 보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융합 vs 텍스트’라는 구도가 제기하는 가장 뚜려한 효과는, 융합의 압력이 가해질 때 기존의 문학 혹은 문학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어떤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지 탐문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텍스 트를 출발점으로 선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1) 이러한 이유에서 선택한 ‘텍스트’라는 논의의 출발점에는, 그 개념적 구도의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융합 vs 텍스트’이 함축하고 있는 문학의 위상 하락이 배경으로 전제되어 있다. 문 학은 언어로 표현된 예술의 일종이라는 상투적 정의를 환기하면,

20세기 이래로 문학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언어(말/글)’에 초점을 두고 수행되어 왔다. 문학의 위상이 높았던 시절에는 이 ‘언어’가 다른 비언어적 표현 수단 혹은 매체보다 범용성이 높았다 할 수 있다. 오늘날 문 학의 위상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매체적 위상 하락에서 연유한다. 자위하자면 이것은 문학의 잘못이 아니다. 20세기 대중매체의 시대에 접어든 이래 매체의 기술적 발달은 주도적 매체를 구성하는 하위 매체로 언어의 위상을 격하시켜 왔다. 라디오→ T.V(영화)→인터넷(컴퓨터)→스마트폰 등으로의 변화는 자연어보다 인공어/기계어의 비중을 확 장시켰고 비언어적 매체가 언어를 대신하는 역할을 증진시켰다. 언어가 주변화되는 상황에서 문학의 위상 하락은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일이다. 예상컨대 이후로도 언어-매체의 상대적 우위성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어-매체적 우위성에 입각해 만들어져온 많은 텍스트들도 이제는 다른 매체의 지배적 제약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변용되고 있다. 다양한 매 체에 적합한 콘텐츠 형태를 갖추어야만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2)

1) 비교문명론적 시야에서 중국문학의 융(복)합 연구를 논한 오태석, 〈현대자연과학과 융복합적 중국학 연 구〉, 《중국학보》74집, 2015; 〈0과 1의 해석학: 수학, 디지털 및 양자정보, 그리고 주역과 노장〉, 《중국문학》 97집, 2018 등이 참조가 된다.

2) 매체와 문자(언어) 사이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서는,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래 다양한 논의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박영욱,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 향연, 2008; 유현주, 〈현대 매체이론에 서 문자의 개념과 역할〉, 《인문학연구》 97집, 2013 참조.

따라서 텍스 트에 초점을 둔 논의를 펴기 위해서는 언어의 매체적 성격 혹은 텍스트와 매체의 관련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흔히 쓰이는 ‘텍스트’와 ‘작품’의 의미를 먼저 규정하고자 한다. 여기 서 말하는 텍스트는 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 즉 지각을 통해 주관의 임의성을 넘어 객 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으로 보고자 한다. 달리 말해 지각적으로 인지 가능한 객관적 인 속성들로 이루어진 개별적 존재들의 집합이 텍스트라는 뜻이다. 한편, 텍스트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작품은, “텍스트가 가지지 않는 전체적인 속성들을 가지면서” 작가의 의도나 수용 자의 “비평과 해석이 귀속되는 개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요컨대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전체 를 상정하며 그 전체성과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지거나 수용되는 것을 지시한다. 따라서 작품 은 텍스트와 개념적으로 구별되며, 그 구별의 핵심에는 “텍스트에는 귀속되지 않으면서 작품 에는 귀속되는” 문화적 미적 속성이 자리한다.3) 지각 가능한 물리적 속성의 연쇄 혹은 집합으로 이해되는 텍스트는 그 물리적 특성을 지 각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다양한 매체와 결합해서 존재한다. 예컨대 문자로 씌어진 어떤 개 별적인 문학 작품을 텍스트적 차원에서 지각하려면 먹(혹은 잉크), 종이 등의 매체들을 필요 로 하며 노래나 구연 등 음성적으로 실현되는 경우라도 인간의 신체(성대)와 공기 등을 매체 로 활용한다. 따라서 텍스트적 지각은 매체와 결합된 상태로 시작되어서 때론 그 결합을 유 지한 채로 때로는 매체의 특성을 탈각시키는 방식으로 인지된다. 여기서 매체의 이중적 특성―매체의 비매개와 중층매개라는 서로 모순되는 원리를 환기활 필요가 생긴다. 즉 매개의 이중논리란 “미디어의 두 가지 특질 즉 실재적인 것의 투명한 표상 과 그리고 미디어 자체의 불투명성”을 말한다.4) 언어가 있는 곳에 반드시 사실이 있다. 적극적으로 사실을 추구하며 책을 읽을 경우 우리 는 사실에만 맞닥뜨리는 게 아니다. 소극적으로도 언어에 대해서 반드시 사실에 맞닥뜨린다. 전철 안에서 옆에 있는 승객이 읽고 있는 주간지의 활자는 이쪽에서 꼭 획득하려 한 사실이 아님에도 우리를 잡아 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그 자체다. 외적 사실로 치자면 특히 그 시각적 영상이다. 언어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옆 사람이 들고 있는 주간지의 표제를 읽으면, 아카키 산에서 젊 은이 몇 명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표제의 언어는 기억되지 않는다. (…) 어째서 사실만 기억되고 언어는 기억되지 않을까.5)

3) 작품과 텍스트의 개념적 구별에 대해서는, 신운화,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적 다원론에 관한 연구〉, 서울대 학교 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6-12쪽을 따르면서 조금 수정하였다.

4) 제이 데이비드 볼터⋅리처드 그루신, 이재현 옮김, 《재매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20-61쪽에서 설명한 ‘비매개’. ‘하이퍼매개’, ‘재매개’ 등에 대한 논의에 의거하였다. 직접 인용 대목은 21쪽. 다만, 매체의 매개 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필자는 ‘중층매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로 한다. 즉 매체의 재매개는 ‘비매개’와 ‘중층매개’라는 이중적 원리를 내포한다고 본다.

5) 요시카와 고지로, 조영렬 역, 《독서의 학》, 글항아리, 2014, 15-16쪽.

가령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체로서의 언어적 성격이다. 인용문에서 “사 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바에 대비되는 것은, 그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인 언어가 사실을 전 달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존재를 퇴각시키는 현상이다. 이것이 비매개화 작용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비매개화는 매체의 매개적 특성이 소거/망각되는 효과를 말한다. 이러한 비매개화 는 매체의 표상(현실)이 가장 사실적일 때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달리 말해 매체가 ‘시 각⋅청각⋅후각⋅촉각’ 등 지각적 표상의 중층적 매개를 증강시킬수록 비매개화의 효과는 강 화된다. 그러므로 언어의 매개된 표상이 진실/사실에 근접할 정도로 다양한 층위에서 중층/다 중 매개가 이루어질 때 언어의 비매개성이 최고조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의 매체적 성격을 비매개와 중층매개의 이중적 원리로 이해한다면, 문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은 문학 언어와 다른 매체와의 외적 관계를 따지는 작업 못지않게 문학 텍스트를 구성하는 언어-매체 내부의 중층매개적 양상을 파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층매개라는 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매체의 주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다양한 층위 의 정보를 분리/재결합하는 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층매개의 심화를 통해 비 매개의 실감을 강화하거나 때론 비매개의 환상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왔 다.6)

가령 매체란 정보를 저장⋅전달⋅재현하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1800년대 전 후의 낭만주의 문학을 문자 독점의 시대로 규정하는 키틀러에 따르면, 20세기 초 아날로그 기술 매체 즉 축음기⋅영화⋅타자기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안 문자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음향⋅광학⋅텍스트 관련 정보를 분리해서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청각 데이터 의 경우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잡다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소리들도 포착하며, 영화는 문학 의 읽기 과정에서 체험되던 의식 내부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영하였으며, 타자기의 등장은 지각적으로 분절된 철자의 불연속적 전개를 통해 개별화된 주체를 보통명사=익명화된 존재로 전이시키는 효과를 낳기 시작하였다.7)

6) 제이 데이비드 볼터⋅리처드 그루신, 앞의 책, 34-52쪽; 페터 뷔르거, 최성만 옮김, 《아방가르드의 이론》, 지만지, 2009, 141-143쪽; 천현순, 《매체, 지각을 흔들다》, 그린비, 2012, 134-154쪽; 마츠다 유키마사, 송태 욱 옮김, 《눈의 황홀》, 바다출판사, 2015, 175-197쪽 등 참조.

7)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옮김, 《기록시스템 1800⋅1900》, 문학동네, 2015의 2부에서 그 기본 문제를 펼쳐 보였고, 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축음기, 영화, 타자기》, 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더 본격 적으로 다루고 있다. 키틀러 저술의 의의에 대해서는,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박배영 외 옮김, 《문학이론 입 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이경진, 〈키틀러의 반해석학적 문학사〉, 《독어독문학》제149집, 2019 참조.

이렇게 분리 가능하게 된 다양한 층위의 지각적 정보들은 한편으로 문자의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기존의 문자/언어 텍스트에 음 향⋅광학⋅기록의 다양한 층위들이 복합적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음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학 언어의 매체적 성격에 주목한다는 것은, 언어-매체가 새롭게 등장한 매체 들에 의해 기존의 우월한 지위를 차츰 박탈당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언어-매체에 중층매개된 다양한 지각적 요소들의 존재 양상을 해명하는 작업을 적극적인 과제로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제를 수용하는 입장에 서서 세 가지 측면에서 관련 논의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첫째, 동일한 중국 고전 텍스트 내부에서 언어-매체가 중층매개화를 심화하는 양상을 지각의 활성화 사례를 통해 확인하고,

둘째, 서로 다른 텍스트와의 관련성이라는 관점에서 중층매개 화가 구현되는 양상에 대해 논의한 다음,

셋째, 특정 텍스트를 이질적인 매체로 전환하는 방 식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 모두는 문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문제와 관련이 깊다.

그런 점에 서 위의 세 가지 측면은 읽기의 방법이자 읽기의 능력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므로, 일종의 문학의 읽기론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2.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

(1) : 지각의 활성화 양상

텍스트 읽기라 함은 단적으로 독자의 읽기 혹은 읽기의 독자 문제이지만, 개념적 규정에 의거한 이론적 논의를 관건으로 삼지는 않으려 한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읽기의 과정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현상들에 더 주목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이른바 수용미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볼프강 이저의 논의는 출발점으로 삼아 경청할 만하다. 이저가 “독서의 현상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한 말에 따르면, 읽기의 과정에서 문학 텍스트는 결코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되 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령 책과 같은 지각객체물이 전체로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텍스트는 다만 읽기의 진행단계들 속에서 하나의 객체물로 추론되므로, 독자는 시점적 점 point으로서 그 대상영역을 지나다닐 뿐이다. 이처럼 독자가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점으로서 텍스트 안에 들어선다면 텍스트는 그 독자에게 각각의 단계로서만 현존하고, 결론적으로 텍 스트의 대상성은 읽기 과정의 단계들 속에서 조우하는 형식들과는 동일하지 않으며 그 전체 는 단지 종합으로서만 획득된다. 이러한 독자의 시점을 두고 이저는 “소요하는 시점” 혹은 “편력하는 관점”이라고 한다.8)

8) Wolfgang Iser, 이유선 옮김, 《독서 행위》, 신원문화사, 187-201쪽 참조. 이 번역에서는 “편력하는 관점”이라 고 하고, 프로인드, 신명아 옮김, 《독자로 돌아가기》, 인간사랑, 2005, 225-244쪽에서는 “逍遙하는 독자”라 고 번역되었다. “이동 시점”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이저의 이론적 전체 입장과는 별개로, 제한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특정 시점에 기 반한 읽기의 현상학은 무엇보다 소우주적 전체로서의 작품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듯하다. 이러한 약간의 해방감에 힘입는다면, 단편적인 기사들로 점철되어 있는 수천 년 전의 중국 고전의 갈피갈피에 씌어진 기록들 및 작품으로서의 경계가 다소 불투명한 (문학으로 보 이는) 기사들에 접근하기가 쉬워 보인다. 특히 선진시대에 속하는 많은 중국의 고전 및 문학들은 후대에 독립된 하나의 서적으로 묶여지기는 해도 단일한 전체성보다는 파편적인 부분들의 집합에 가깝다. 단적으로 《論語》와 《孟子》와 같은 서적들은 개별적으로 독립 가능한 부분들의 비연속적 결합체로 존재한다.

문학적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莊子》는 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서적은 문 학과 비문학의 경계가 모호한 채로 서로 이질적인 글쓰기 양식들이 혼재되어 있어 사정은 더 복잡하다.

《春秋左氏傳》과 《史記》와 같은 역사 서사들에서도 명확한 체제와 구획을 통해 개 별 작품의 경계가 한정되지 않는다. 통상 ‘문학’으로 인정되는 서적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특 별히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이러한 형편을 감안할 때 일정의 크기와 부피감을 갖춘 독립된 작품이라는 관점보다는 구 체적인 읽기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읽기의 경험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어도 중국 고전 및 문학의 영역에 유익하리라 판단된다.

이런 맥락에서 명확한 범위 확정이 어려운 ‘작 품’이라는 개념보다는 개별화된 지각적 경험을 촉발하는 읽기의 과정을 ‘텍스트’라는 용어로 서 포괄하고자 한다.

선진시기 중국 고전 중에서 《춘추좌씨전》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인바, 이 시기 중국의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서적이면서, 특히 《춘추좌씨전》은 《사기》에 비견될만큼 지각의 활성화를 촉진하는 읽기의 경험을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대표적인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예시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춘추좌씨전》을 통해 확인되는 양상들이 《춘추좌씨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李斯의 〈諫逐客書〉를 이어서 검토해 보 고자 한다.

감각의 斷續, 시선의 차단과 회복 : 《春秋左氏傳》 桓公 18年(B.C.694)과 莊公 8年 (B.C.686)조에 걸쳐 기록된 魯 桓公과 齊 襄公의 죽음 기사를 떠올려 보자.

환공 18년에 제 양공이 공자 팽생을 시켜 술에 취한 환공을 죽게 한다. 이에 노나라 측에 서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운 처지임을 감안하여 대신 노 환공을 죽인 팽생이라도 처형 하라고 요청하자, 제나라 쪽에서 공자 팽생을 제거한다.9)

9) 번역문만 보인다. “18년 봄에 환공이 外出을 계획하고서 드디어 姜氏와 함께 齊나라로 가려 하자, 申繻가 말하기를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어, 서로 冒瀆하지 않는 것을 禮가 있다고 하니, 이를 어기면 반드시 敗亡합니다.”라고 하였다. 桓公은 齊侯와 濼에서 회합하고서 드디어 文姜과 함께 齊나 라로 갔다. 齊侯가 문강과 姦淫하자 桓公이 文姜을 꾸짖으니 文姜이 이를 齊侯에게 告해 바쳤다. 여름 4월 병자일에 齊侯는 宴會를 열어 桓公을 접대하고서, 公子 彭生을 시켜 환공을 수레에 태우게 하였는데, 환공 이 수레 안에서 薨하였다. 魯人이 齊나라에 告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齊君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편 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齊나라로 가서 옛 友好를 重修하셨는데, 회합의 禮가 끝났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 으셨습니다. 죄를 돌린 곳이 없어서, 諸侯 사이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 彭生을 죽여 이런 소문 이 사그라지게 하소서.”라고 하니 齊人이 팽생을 죽였다.” 이하 《春秋左氏傳》의 인용은, 정태현 역주, 《譯 註 春秋左氏傳》1∼8, 전통문화연구회, 2013에 따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결국 제 양공 도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관련 기사는 이렇다.

겨울 12월에 齊侯가 姑棼에서 遊覽하고서 드디어 貝丘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돼지 한 마리 를 보았다. 從者가 “公子 彭生입니다.”라고 하니, 襄公은 화를 내며 “팽생이 감히 나타나는가.”라고 하고서 활을 쏘니, 그 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울었다. 이를 본 齊侯는 겁이 나서 수 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뒤에 齊侯는 徒人 費에게 신발 을 찾아오도록 하였으나 찾아오지 못하자, 齊侯는 그에게 피가 흐르도록 채찍질을 하였다. 費 가 도망해 나오다가 宮門에서 반란군을 만났다. 반란군이 그를 위협해 結縛하려 하자, 費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대들을 막겠는가.”라고 하고서 옷을 벗어 피가 흐르는 등을 보이니 역 적들이 費를 信任하였다. 費가 먼저 宮으로 들어가기를 요청하여 襄公을 숨겨 놓고 나와서 반란군과 싸우다가 ①宮門 안에서 죽고, ②石之紛如는 섬돌 밑에서 죽었다. 반란군이 마침내 宮中으로 들어가서 ③龍床에 앉아 있는 孟陽을 죽이고서 “이 자는 임금이 아니다. 용모가 같 지 않다.”고 하고는 다시 찾다가 문 밑으로 나와 있는 ④襄公의 발을 보고는 드디어 襄公을 弑害하고 公孫無知를 임금으로 세웠다.10) 오늘날이라면 판타지 장르로 각색해도 좋을 내용이다. 죽은 팽생이 다시 살아난 듯하고 이 기사에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④ 대목을 읽어보면 아무래도 잃어버린 신발 이 양공이 숨어 있는 곳 부근에 놓여져 있었을 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자 팽생이 그랬 을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11) 위의 인용문은 반란 세력에게 살해당하는 제 양공의 최후를 그 린 장면이지만, 徒人 費를 위시한 인물들은 이 장면에서 갑자기 등장한다. 費, 石之紛如, 孟陽 은 모두 다 같은 신분으로 보이는데 주군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서술 이 다분히 연극적이어서 생동감이 있을뿐더러, 특히 ①∼③ 대목은 전체 서술과는 독립적으 로 매우 독특하다. 費, 石之紛如, 孟陽의 죽음을 그린 ①∼③은 매우 시각적이다. 실제 서술자의 의도가 어떠 했든지 간에, 문자 기록이라는 매체의 제약을 감안해서 읽을 때 ①門中 ②階下 ③牀의 시신 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속적이다. 오늘날 영상물로 제작한다면, 반란군의 동선을 카메라가 뒤 따라 가면서 세 인물의 시신을 차례차례 보여주는 방식으로 연출되어야 어울릴 듯하다. 즉 저항하며 싸우는 장면이 아니라 싸움의 결과로서 그 셋의 시신이 보여지는 방식(혹은 ①門中 에서만 짧은 저항 장면을 보이거나)을 말한다. 카메라가 반란군보다 조금 뒤처져 따라가기 때 문에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칼소리 등 싸우는 소리는 들리는 게 자연스럽겠다. ‘소요하는 시점’의 독자에게라면, 위 기사에서 특히 ①∼③(혹은④도 포함)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면 처럼 전경화될 수 있다.12)

10) 해당 기사의 원문은 이렇다. “冬十二月, 齊侯游于姑棼, 遂田于貝丘, 見大豕, 從者曰公子彭生也. 公怒曰 彭生 敢見? 射之, 豕人立而啼, 公懼, 隊于車, 傷足喪屨. 反, 誅屨於徒人費, 弗得, 鞭之見血. 走出, 遇賊于門, 劫而 束之, 費曰 我奚御哉? 袒而示之背, 信之, 費請先入, 伏公而出, 鬪死于門中, 石之紛如, 死于階下, 遂入, 殺孟 陽于牀, 曰 非君也! 不類. 見公之足于戶下, 遂弑之而立無知.” 《春秋左氏傳》莊公 八年.

11) 이 기사의 판타지 문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통문화연구회가 제공하는 춘추좌씨전선독 강의 동영상(강사: 이라나)과 王崇任, 〈 《左傳》文學專題硏究〉, 陝西師範大學 박사학위논문, 2012, 188-189쪽 참조.

12) ①∼③의 장면을 이동의 단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텍스트에서 양공의 왕위에 이르는 공간은 세 단 계로 구분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가 있는 자리에 도달하는 경로가 세 단계라는 실제 공간의 구성을 반영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 장면을 연극적으로 구현하는 무대 공간을 세 층 위로 나눈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읽기가 일리 있게 받아들여진다면 제 양공의 최후와 관련된 기사 전체라기보다는 그 일부를 구성하는 작은 부분에만 유효하다. 이 기사를 독립된 하나의 서사 작품으로 설정 할 경우, ①∼③의 서술은 작품의 전체적 의미와 무관할 수는 없겠지만 지각의 작용 즉 텍스 트적 층위와 훨씬 관련이 깊다고 해야겠다. 감각의 치환, 시각의 청각적 전환 : 앞서 시각적 차단과 회복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지 각적 활성화에 기여하는 양상을 간략하게 확인하였다면, 이어서 시각과 청각을 중심으로 감 각을 치환하는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楚子가 巢車에 올라 晉나라 군대를 조망하니, 子重이 太宰 伯州犂를 보내어 왕을 뒤에서 모시게 하였다. 왕이 말했다. “晉軍의 兵車가 혹은 좌로 혹은 우로 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軍吏를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晉軍의 軍吏가 모두 中軍으로 모였다.” “함께 모의하려는 것입니다.” “장막을 치는구나” “이는 先君의 신주 앞에서 경건히 길흉을 점치기 위함입니다.” “장막을 걷는구나.” “명령을 발표하려는 것입니다.” “매우 시끄럽게 떠들고, 또 먼지가 인다.” “우물을 메우고 부뚜막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고서 행열을 펼치려는 것입니다.” “모두 兵車에 올랐는데, 車左와 車右는 무기를 들고 兵車에서 내리고 있다.” “이는 誓命을 듣기 위함입니다.” “저들이 전투를 하려는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兵車에 올랐다가 車左와 車右가 모두 兵車에서 내리는구나.” “전투에 앞서 신명께 기도하기 위함입니다.”13)

13) “楚子登巢車以望晉軍, 子重使大宰伯州犁侍于王後, 王曰, 騁而左右, 何也? 曰, 召軍吏也. 皆聚於中軍矣. 曰, 合謀也. 張幕矣. 曰, 虔卜於先君也. 徹幕矣. 曰, 將發命也. 甚囂且塵上矣. 曰, 將塞井夷灶而為行也. 皆乘矣, 左右執兵而下矣. 曰, 聽誓也. 戰乎? 曰, 未可知也. 乘而左右皆下矣. 曰, 戰禱也.” 《春秋左氏傳》 成公 16년.

《춘추좌씨전》에서 ‘언릉의 전투’로 널리 알려진 기사의 한 대목이다. 언릉의 전투를 앞둔 晉나라 군대의 진영을 묘사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기원전 6세기에 있었던 상황이다. 초왕이 묻고 진나라 출신 백주리가 답하는 대화 형식이다. 원문에서 초왕의 진술은 상황의 단순 서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듯 어조사 矣로 종결되고 백주리의 답변은 판단을 뜻하는 也를 반복하면서 종결되고 있다. 도입부에 잠시 등장한 서술자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등장인 물의 문답으로 묘사와 설명을 대신한다. 이러한 서술이 의도한 효과는 전달의 직접성에 있다. 서술자의 매개 없이 등장인물이 직접 설명하는 효과를 낳아, 독자로 하여금 현재 벌어지는 현장에 참여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이라면 실황 중계에 해당될 듯한 이 장면에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일반적으로 시 각적으로 드러내야 할 장면을 청각 즉 등장인물의 목소리로 전환시켜 표현하였다는 사실이 다. 실황 중계 방송이라고 해도, T.V.라기보다는 라디오 방식에 가깝다. 묘사를 통해 시각적으 로 직접 보여주는 서술자의 설명에 의지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간접화함으로써 호기심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높이는 효과를 거둔다. 시각적 감각의 영역을 제한하고 청각을 전면화하는 방식으로 독자의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이 장면이 실제 언릉 전투의 전개 과정 에서 서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각의 층위에서, 전달 및 표현 매체 로서 문자에 부가된 제약을 예민하게 간파하고 그 제약을 넘어서기 위한 수법이 《춘추좌씨 전》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음은 분명히 확인된다. 감각의 집중화, 시각의 초점화 : 널리 알려졌듯이, 《춘추좌씨전》 선공 12년의 邲 전투 에서 방비를 허술히 하던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주하는 장면 서술은, 특정 지점을 초점화하는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초나라 군대가) 드디어 급히 진군하니 兵車는 치달리고 병졸은 뛰어가서 틈을 타 晉軍을 공격하였다. 晉 桓子는 어찌할 바를 몰라 軍中에서 북을 치며 말하기를, “먼저 황하를 건너가 는 자에게는 賞이 있을 것이다.”고 하니, 中軍과 下軍이 먼저 배에 오르려고 다투는 바람에 배 안에는 잘린 손가락이 양 손으로 움켜쥘 정도였다.14)

14) “遂疾進師, 車馳卒奔, 乘晉軍. 桓子不知所為, 鼓於軍中, 曰, 先濟者有賞, 中軍下軍爭舟, 舟中之指可掬也.” 《춘추좌씨전》 宣公 12년.

초나라 군대가 진군해 오자 진나라는 군대를 퇴각시킨다. 이때 내린 명령이 황하를 건너 퇴각한 병사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후퇴한 군대를 포상한다는 다소 역설적인 명령 이 초래한 결과는 다소 놀랍다. 포상의 유혹에 이끌려 아군을 해치는 해위가 자행되었기 때 문이다. 위 인용문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듯이, 밑줄 친 부분은 어지러운 현장을 아주 짧은 구절의 강렬한 시각적 효과로 담아냈다. 앞서 언릉 전투에서 진나라 군진의 파노라마적 광경 을 대화로 전환시켜 부감의 효과를 창출하였다면, 여기서는 잘린 손가락을 카메라가 초점화 하여 차츰차츰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지금까지 언급한 《춘추좌씨전》의 세 가지 사례는 이 장면을 담고 있는 기본 서사에서 텍스트적 층위의 지각적 효과에 호소한다. 이에 따라 제 양공의 살해나 전쟁의 전개 과정이라 는 기본 서사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독자화되는 경향이 강화된다. 즉 편력하고 소요하는 독자의 시점에서 보자면, 지각적 반응에 호소하는 듯한 대목들은 읽기의 과정에서 그 장면만 이 서사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을 높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독자의 읽 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두루 공감할 만한 일반적인 읽기 경험인지도 모른다. 시 작품 전체라기보다도 특정한 시 구절, 전체 서사가 아니라 특정한 지각에 호소하는 장면이 남지 않는가. 이처럼 텍스트의 층위는 작품 의미의 구조적 층위에 복무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독자화하여 그로부터 이탈하기도 한다. 그 관건은 지각적 측면에의 호소를 얼마나 활성화하 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감각의 층위로 한정하자면 시각이나 청각 등 특정 감각의 효과를 극도로 증대시키는 방략을 취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각의 전면성을 두루 포괄할 수 없는 문 자(언어) 매체적 문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마련된 방략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것은, 보여줄 수 없고 들려줄 수 없으며 만지도록 할 수도 없다는 문자/언어 매체의 근 본적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언어 매체의 한계 내에서 지각의 전체 성을 환기하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새겨 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키틀러의 말처럼 매체 의 발달이 시각⋅청각⋅후각⋅촉각 등 여러 가지 감각을 분리⋅저장⋅결합⋅유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면, 문자 텍스트 속에서 지각적 층위들을 분리⋅저장⋅결합⋅유통하는 매체로의 전 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지각적 층위를 활성화 하는 과정이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을 따른다면 좋은 작품이란 결국 텍스트적 층위(지각)와 작품의 층위(의미) 사이 에 존재하는 상보적 균형과 대립적 긴장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감각적 지각의 활성화를 통해 의미를 보충하거나 의미의 상대적 추상성에 맞서 지각적 구체성을 전면화하는 작품에서 의의 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李斯의 〈諫逐客書〉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진왕의 축객령에 반발하여 항의하고 설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泰山은 不辭土壤이라 故로 能成其 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라 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는 不卻衆庶라 故로 能明其德이니이다”라 는 유명한 구절에서 그 주제적 의미를 단적으로 표한다. 이 주장을 펴는 가운데 먼저 진나라 의 부강을 이끈 역대 임금들이 다른 제후국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한 사례를 제시한 다음, 직접 (훗날의) 진시황을 겨냥하여 변설을 펼칠 때 지각적 층위의 활성화 방식을 전형적 으로 보여준다.

① 今陛下, 致昆山之玉, 有隨和之寶, 垂明月之珠, 服太阿之劍, 乘纖離之馬, 建翠鳳之旗, 樹靈 鼉之鼓, 此數寶者, 秦不生一焉, 而陛下說之, 何也? ② 必秦國之所生然後可, 則是夜光之璧, 不飾朝廷, 犀象之器, 不爲玩好, 鄭衛之女, 不充後宮, 而駿良駃騠, 不實外廐, 江南金錫, 不爲用, 西蜀丹靑, 不爲采. 중국 고전⋅문학의 읽기론 155 ③ 所以飾後宮充下陳, 娛心意說耳目者, 必出於秦然後可, 則是宛珠之簪, 傅璣之珥, 阿縞之衣, 錦繡之飾, 不進於前, 而隨俗雅化, 佳冶窈窕趙女, 不立於側也.15)

이사는 진시황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귀중한 보배들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구절은 구조적 으로 반복되기에 각각의 취지는 동일하지만 “致昆山之玉, 有隨和之寶, 垂明月之珠, 服太阿之 劍, 乘纖離之馬, 建翠鳳之旗, 樹靈鼉之鼓”에서처럼 보배의 명칭은 일반화되지 않고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나열되며 또 그 명사에 호응하는 서술어의 글자 또한 구별해 쓴다. 이것은 진시 황의 주변에서 지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물건들인바, 그 하나하나가 시각적으로 현전하는 효 과를 의도한다. 이어 ②에서도 마찬가지로 서술어의 구조는 반복되지만 ‘璧, 器, 女, 駃騠, 金錫, 丹靑’ 등 은 개별화되어 지각의 층위로 현전시킨다. 다만 이 현전은 ①의 경우는 달리 부정어 不에 의 해 지각적 소유 상태에서 하나하나 암전되어 사라지게 한다. ③도 동일한바, 즉 눈앞에 떠오 르게 한 다음 하나하나 지워나감으로써 현존을 부재로 바꾼다. 페이드아웃 같은 효과이고, 현 대의 테크놀로지라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하여 제시할 만한 대목이겠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위의 인용문에 이어 이사는 시각적 지각을 다시 청각적 지각 영역으로 전환시켜 진 나라의 음악을 문제 삼고 역시 현전시켰다가 지각 영역 너머로 사라지게 만든다. 천하를 통일해서 자신의 소유로 하겠다는 진시황의 욕망을 자극해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 을 지각적으로 개별화하여 현전시킨 다음 하나씩 제거해 간다. 그리고 나서 “泰山, 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 不擇細流, 故能就其深”이라는 비유를 통해 추상적 의미로 귀결함으로써 축 객령의 철회를 유도한 것이다. 정말 이사의 간언이 진시황의 마음을 바뀌게 한 결과를 초래 한 것이라면 그 관건처는 지각적 층위에서 구체적 현전과 암전에 있을 것이며, 바로 이러한 특성이 〈간축객서〉를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하겠다.

3.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2) : 겹쳐 읽기와 다시 읽기

풀레는 읽기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삼는 과정이라고 한다. 독자인 나 는 다른 사람의 생각들을 생각하고 따라서 나 자신의 생각이 아닌 생각들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독자는 읽기의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그 존재가 실제의 나 자신은 아니다. 읽기가 진행되는 동안 일시적이나마 나 자신을 망각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소 외되어서 동일시해야 할 ‘생각하는 주체’가 설정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16)

15) 《史記》〈李斯列傳〉에서 인용. 이하 《史記》의 인용은 《武英殿二十四史》本(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의 전자판)을 따른다.

16) Georges Poulet, 「Phenoenology of reading」, New Literary History, 1, 1969, pp.55-59; 볼프강 이저, 앞의 책, 252-255쪽; 프로인드, 앞의 책, 228-232쪽.

현실적 독자와 읽는 주체를 구분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풀레의 주장은 참조할 가치가 있어 보이지 만, 지나치게 의식 중심적 제안이라 매체와의 연관이 깊은 텍스트의 물질성을 소홀히 할 개 연성이 높아 보이기도 한다. 앞서의 논의에서처럼 지각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텍스트적 층위는 작품 해석의 의미보다는 파편적이고 부분적이다. 또 그런 만큼이나 독자적이어서 작품 전체로부터 분리 경향이 내포 되어 있다. 실제 읽기의 경험적 현상을 돌이켜 볼 때, 지각적 활성화에 기여하는 텍스트의 부 분들은 상호 간의 유사성 혹은 친연성을 통해 결합 작용을 일으키곤 한다. 가령 19세기말 메 이지 시대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가 18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코트Walter Scott의 《아이 반호우 Ivanhoe》 29장의 서술에서 《춘추좌씨전》 ‘언릉 전투’의 대화 장면과 동일한 기법을 발 견하는 것이 그렇다. 레베카가 성벽 사이로 전투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 정황을 아이반호우에 게 설명하는 장면인데, 아이반호우가 묻고 레베카가 대답하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서 술 시점의 선택에 따라 발생하는 거리의 문제를 다루면서이기는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아이반호우》와 《춘추좌씨전》의 근본적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17) 실제 나쓰메 소세키 자신 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장면을 마련하기도 하였거니와,18) 다만 전투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활용하였다.

17) 河目漱石, 《文學論》(《漱石全集》9권), 岩波書店, 1977, 395-398쪽.

18) 오현수, 〈나쓰메 소세키와 《춘추좌전》〉, 《일본언어문화》 2집, 393-395쪽.

이윽고 시간이 다 됐는지, 강의는 뚝 그쳤다. 다른 교실의 수업도 모두 한꺼번에 끝났다. 그러자 이때까지 실내에 가두어졌던 8백 명의 軍勢는 함성을 지르며 건물을 뛰쳐나왔다. 그 기세라는 것은, 한 자만큼의 벌집을 때려 떨어뜨린 것만 같다. (…) 먼저 벌의 군세 배치부터 설명하겠다. 이런 전쟁에 군세 배치고 뭐고 있겠느냐고 하는 건 잘못된 말이다. (…) 조금 시 적인 야만인이 되면,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유해를 질질 끌고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나 돌았 다든가, 연나라 사람 張飛가 장판교에다 일장팔척의 뱀 모양을 한 창칼을 비껴들고, 조조의 군세 백만 명을 노려보았다든가 호들갑스러운 일만을 연상한다. (…) 左氏가 鄢陵의 싸움을 기술함에서도 먼저 적군의 陣勢부터 말하고 있다. 고래로 서술에 능한 자는 모두 이 필법을 사용함이 통칙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볼 때 내가 군세 배치를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래서 우선 벌의 군세 배치는 여차한가 보자 있자니까, 네모꼴 격자 울타리 바깥쪽에 종렬 을 형성한 一隊가 있다. (…) 이로부터 뒤는 縱隊가 총동원되어 돌격의 함성을 지른다. 종대를 조금 우측으로 떨어져서 운동장 방면에는 砲臺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여 진지를 치고 있다. 와룡굴을 향해 한 장군이 커다란 절굿공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 이와 마주보고 대여섯 칸 간격을 두고 또 하나가 섰고, 절굿공이 뒤에 또 하나, 이건 와룡굴에다 얼굴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이렇게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 포수다. 어떤 사람의 설에 의하면 이것은 베이스볼 연습이지, 결코 전투 준비는 아니라고 한다.19)

 

19) 나스메 소세키, 유유정 옮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사, 2008, 325-327쪽.

인용문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춘추좌씨전》에서 시각을 청각적 대화로 치환함으로써 군대 의 형세를 묘사하던 방식을 빌어오되 교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적용하고 있다. 이 러한 나쓰메 소세키의 특수한 사례는 독자가 읽기 과정에서 경험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원 용할 수도 있다. 그 선후를 따질 필요 없이 《아이반호우》의 특정 대목을 읽고 있는 독자 나 쓰메 소세키는 실제로 《춘추좌씨전》의 언릉 전투 장면을 겹쳐 읽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풀레가 말하는 의식 중심적인 읽기의 주체는 책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명한 의식처 럼 보이지만, 실제 읽기의 현상은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작품들이 서로 포개어지고 견주어지 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즉 나쓰메 소세키는 《아이반호우》를 읽을 때 《춘추좌씨전》을 겹쳐 읽 었으며, 그 후의 다른 누군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을 때 《아이반호우》 혹은 《춘추 좌씨전》을 겹쳐 읽는 것이다. 이 겹쳐 읽기의 현상 속에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텍스트화=매체적 변용이 가능한 다양한 경험 양식들이 겹쳐져 들어온다. 언젠가 읽은 작품의 특정 대목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본 시 각적 풍경에다가 들어본 적 있는 음악도 텍스트적 현전의 형식으로 중첩될 수 있다. 즉 지각적 활성화를 촉진하는 텍스적 층위는 텍스트 외부의 지각적 양태들을 동시적으로 활성화하는 작용 을 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이편이 읽기의 현상학에 경험적으로 더 근접하지 않을까 한다. 텍스트 층위의 지각적 활성화는 작품 전체의 의미로 수렴될 수도 있지만 해당 작품 너머 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각적 층위의 텍스트들과 새롭게 배열되거나 결합할 수도 있다. 가령 인구에 회자되어온 〈항우본기〉의 거록 전투 장면을 떠올려 보자.20)

20) 청의 문인 鄭板橋는 그 아우에게 보내는 글에서 〈항우본기〉의 정독을 권하였고 조선의 문장가 崔岦은 그 글을 만 번 이상 읽었다고 할 정도다. 특히 정판교는 〈항우본기〉 중에서도 鉅鹿之戰과 鴻門之宴 그리고 垓下之會 대목이 으뜸이라고 하였다.(鄭板橋, 「濰縣署中寄舍弟墨第一書」; 黃德吉, 〈書金柏谷得臣讀數記後〉, 《下廬先生文集》 卷11, 447쪽앞) 이 세 대목은 각각 항우가 제후의 상장군으로 등극하여 실질적으로 천하 의 으뜸으로 군림하게 된 계기, 유방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항우와 대면하는 극적 장면, 그리고 항우의 최후를 대표한다. 〈항우본기〉에서 형상화한 항우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천하를 잃은 영웅으로 이해해 봄 직하다. 해하에서 쫓겨 달아나는 항우는 인원 수의 감소라는 구체화 방식 즉 숫자를 차츰 덜어내는 감산법에 의거해 있다. 강동자제 8천을 이끌고 중원으로 나 선 항우가 사면초가의 장면 이후로 800명→300명→28명→7명으로 줄어들고 급기야 오강에서 자신이 탄 말을 타인에게 건네주며 혼자인 채로 자살한다. 그리고 죽은 시신마저 포상을 바라는 적군에 의해 잘려진다.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서 황하를 건너온 다음 진행된 거록 전투와 관련하여 정작 전투 자체에 대한 서술은 소략하다. 破斧沈舟로 전의를 불태운 데 이어 전개된 전투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당시 초의 군대는 제후들 군대 중에서 으뜸이었다. 거록을 구하려고 온 제후군이 열을 넘 었으나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초의 군대가 진을 공격할 때 장수들은 모두 군영에서 내려다 볼 뿐이었다. 초의 전사들은 1당 10이 아닌 전사가 없었다. 초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 르면 하늘을 울렸고, 제후군은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우는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렀다. 그들이 전차를 세워 만든 轅門으로 들어오는데 무릎을 꿇 고 기이서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었고, 감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항우는 이렇 게 해서 처음으로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군은 모두 그에게 속하게 되었다.21)

21) “當是時, 楚兵冠諸侯. 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 於是已破秦軍, 項羽召見諸侯將, 入轅門, 無不膝行而前, 莫敢仰視. 項羽 由是始爲諸侯上將軍, 諸侯皆屬焉.” 《史記》〈項羽本紀〉.

이 장면이 독특한 점은 정작 적군과의 전투에 초점을 두지 않고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제 후들의 연합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려움에 떠는 적군을 보여줌으로써 항우 의 위용을 드러내기보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제후군이 항우 부대의 전투력에 경이로워 하는 반응을 통해 역으로 항우의 위용을 부각하고 있다. 오늘날의 말로 달리 표현하자면, 정작 항 우 부대가 전투하는 장면은 카메라 바깥에 두고 같은 편의 벤치나 덕 아웃에 있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경이로운 항우의 위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와 유사하 게 느껴진다. 항우 부대의 함성에 두려워 떠는 것은 진나라 병사가 아니라 제후 연합군이다. 이것은 전투가 끝나고 항우에게 복종하는 제후군의 모습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항우본기〉의 이 장면이 《춘추좌씨전》과 겹쳐 읽혀지는 것은 독자의 시선이 텍스트 내부 로 내재화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실황 방송과 같은 언릉 전투 장면처럼 〈항우본기〉에서 항우 부대의 위용이 제후군의 시선에 의탁됨으로써 언어-매체의 비매개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비매개 효과는 서술자 목소리의 매개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중층매개를 통해 서 이루어진다. 〈항우본기〉의 거록 전투 장면을 이렇게 읽는 게 허용된다면, 언릉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의 진용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간접화된 방식으로 들려준 《춘추좌씨전》의 경 우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효과를 창출한다. 부감하는 자의 청각적 목소리를 통해서인 지 제후군의 시각적 모습을 통해서인지에 따라 분명히 서로 차이가 생겨나기는 하지만 정보 를 전달하는 지각의 변용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질적이다. 이에 따라 〈항우본기〉의 거록 전투 장면을 읽으면서 《춘추좌씨전》을 겹쳐 읽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된다. 이 둘 다 지각적 층위에 강력하게 호소함으로써 각각 독자적인 장면 처럼 분리되어, 읽기 과정 속에서는, 〈항우본기〉나 《춘추좌씨전》의 전체 서사적 맥락에서 벗 어나 서로 가까이 접근하거나 포개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상의 단편적 사례를 거쳐서나마 읽기에 대한 규정이 시도될 필요가 있겠다. 읽기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작업을 읽기의 현 상학이라고 부른다면, 읽기의 현상학에서 모든 읽기는 겹쳐읽기이고, 모든 읽기는 늘 다시읽 기이다. 처음으로 읽는 텍스트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읽었거나 경험된 텍스트들이 다시 읽혀지는 방식으로 읽기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홑겹의 단성이 아니라 여러 겹 의 다성적 울림[響]이고 단층의 시각적 장면이 아니라 복합적 영상들이다.

하나의 단일한 소우주처럼 작품의 완결성이 전제되고 그 전제 위에서 작품의 의미가 해석 된다는 익숙한 관행이 여전히 무의미할 수는 없겠지만, 때론 혹은 아주 자주 작품은 그 하부 를 구성하는 일부만이 분리되어 독자화되고 작품 전체의 의미와는 방향을 달리 하는 결합의 연쇄들을 파생시키곤 한다.22)

실제로 읽기의 과정에서 겹쳐읽기야말로 본령에 해당하는 듯하 다. 기실 읽기의 깊이와 넓이를 규정하는 관건은 겹쳐 읽는 능력과 안목에 달려 있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결국 읽기의 능력이란 얼마나 많이 다른 것을 읽었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그 능 력이 바로 다르게 읽기의 차이를 생성하는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혹 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보다는 무엇과 함께 읽을 것인가라고 묻는 편이 온당해 보인다. 《춘추좌씨전》의 한 대목이 《사기》의 한 대목과 겹쳐 읽혀지는 사례에 이어 이번에는 《사기》의 한 대목이 한국과 일본 문학과도 겹쳐 읽혀질 수 있는 사례를 보도록 하자. 《춘추 좌씨전》에 대한 논의와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시 감각의 운용 방식이 잘 드러나는 예시 라 할 수 있는 《사기》〈孔子世家〉의 한 장면부터 제시한다. 衛 靈公에게 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사방의 군자들이 우리 군주 와 형제처럼 지내고 싶어 꼭 우리 小君을 만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을 들어 서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 부인은 휘장 안에서 답례를 했는데 허리에 찬 패물과 옥구슬 등 이 소리를 냈다. 공자가 “내가 처음에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답례로 만났을 뿐이다.”라고 했 다. 자로가 언짢아했다. 공자는 “내 말이 진심이 아니라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맹서했다. 위에서 한 달 남짓 머무르고 있을 때 영공이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는 환관 雍渠를 옆에 시위로 태우고 외출했는데, 공자를 뒤차에 태우고 손을 흔 들고 뽐을 내며 저잣거리를 지나갔다. 공자가 “내가 덕 좋아하기를 색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에 실망을 느끼고 위를 떠나 曹로 갔다.23)

22) 이런 입장에서라면 작가의 위상 또한 달리 규정할 수 있다. 읽기의 현상학을 다양하게 극단적으로 탐색해 간다면 작가는 쓰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읽기의 주체라는 측면을 더 강조해야 할 수도 있겠다. 특정한 방식 으로 쓰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읽었는가라는 물음이 더 본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쓰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읽기 위해서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23) “靈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 ‘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爲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 孔子辭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拜, 環佩玉聲璆然. 孔子曰: ‘吾鄉爲弗見, 見 之禮答焉.’ 子路不說, 孔子矢之曰: ‘予所不者, 天厭之!天厭之!’ 居衛月餘, 靈公與夫人同車, 宦者雍參乘, 出, 使孔子爲次乘, 招搖市過之. 孔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於是醜之,去衛, 過曹.” 《史記》〈孔子世家〉.

《사기》에서 공자가 위나라 靈公의 부인 南子를 만나는 장면을 서술한 대목이다. 밑줄 친 부분이 공자와 남자의 조우 장면이다. 당시 행실이 음란하다고 하여 소문이 좋지 않는 남자 였기에 제자 자로가 마뜩찮게 여겼다. 이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은 묘하다.

남자와 만날 때 공자는 직접 남자와 대면하지 않은 듯이 적었다. 남자의 자리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을 뿐만 아 니라 공자 또한 절을 하되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다는 언급이 없다. 이렇게 시각을 차단하는 대신 청각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보이지 않는 남자를 청각적으로 듣는다. 시각의 차단은 다른 감각 특히 청각의 전면화를 수반한다. 장신구들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를 묘사한다. 고개 숙인 채 시선을 들지 않은 공자의 위치에서 들리는 값비싼 장신구 소리는 남자 또한 몸을 숙여 예 를 갖추었다는 반증이다. 휘장은 계속 드리워져 있었을 테고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 왔을 것 이다. 이로 인해 공자가 위 영공을 비난하고 떠나면서 남긴 말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에 드 리운 혐의가 걷힌다. 시각을 차단시킨 효과라 하겠다. 이에 공주는 보석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었다. 그의 집에 이르러 눈먼 노모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여쭈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체취를 맡아보니 향내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매끄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 다. 누구의 꾐에 빠져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산 속에 느 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공주가 그 집을 나 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 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하기에 마땅한 행 동이 아니니, 필시 너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24)

24)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 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 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삼국사기》에 수록된 유명한 〈溫達〉의 도입부다. 공자와 남자의 만남에서 시각이 차단됨 으로써 청각이 전면화되듯이, 온달과 결혼하기 위해 궁을 나온 공주 또한 눈 먼 온달의 노모 를 만난다. 시각이 차단된 조건에서 체취의 후각과 손의 촉각이 전면화하고 그래서 “천하의 귀인”으로 귀결된다. 일상적으로 맡을 수 없는 향기에다 만져 느껴보기 힘든 감촉으로 드러난 다. 일반 하층민에게 고귀한 신분의 귀인이란 아마 ‘볼 수 없는’ 존재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볼 수 없는 대상을 볼 수 없는 대상으로 드러내려면 시각의 차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 로 볼 수 없는 존재의 현존은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감각의 치환을 통해 지각의 활성화를 촉진하고 언어-매체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앞서의 사례와도 연결된다. 겐지가 몰락한 귀족의 자제인 여인 스에쓰무하나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사람들과 별로 사귀지도 않으시기에, 무슨 볼일이 있는 저녁 등에 가리개 너 머로나 말씀을 드린답니다.” 칠현금을 벗삼아 지낸다고 한다. 겐지가 그 여인의 집을 방문하 여 여인을 직접 만나지는 못한 채 칠현금 연주 소리만 듣고 나왔다. 시간이 흘러 겐지의 호 기심은 깊어져, 겐지는 여인의 존재를 일러준 사람―命婦에게 계속 만남을 독촉한다. 명부는 “발 너머로 말씀을 나누신 뒤에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그대로 끝내 버리면 되고, 또 그럴 만한 인연이 있어 잠깐이나마 겐지님께서 드나든다 하시더라도 비난하실 만한 사람도 없”다 고 설득한다. 대답을 올리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여도 된다면 허락하겠다고 하고 그 사이에 문을 닫아둔 채로 만난다. 거듭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조용 하고, 裛衣香이 무척이나 정다운 향기를 풍긴다. 참다못한 겐지가 약속을 어기며 중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만 얼굴을 보지는 못한 채로 다시 물러난다. 다시 눈 오는 저녁에 스에 쓰무하나를 만나러 간 겐지는 역시 여인의 모습을 보지는 못하고 대신 시종들이 무척이나 남 루한 차림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겐지가 눈 덮인 풍경이 라도 보러 나오라고 강권하자 결국 스에쓰무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앉은키가 크고 등이 휘고 굽은 듯 보이시니, 역시나 하면서도 가슴이 미어졌다. 이어서 특히 보기 싫다고 생 각된 것은 코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보현보살의 탈것―코끼리처럼 여겨진다. 질릴 만큼 높고 길게 뻗어 있는 데다 코끝이 조금 처지고 불그스름한 게 특히 보기 싫다. 얼굴빛 은 흰 눈도 무색할 만큼 희고 푸른빛이 도는 데다, 이마는 더할 나위 없이 넓은 데다 하관이 긴 얼굴 생김새 또한 전체적으로 놀랄 만큼 기다란 듯하다.”25)

25) 무라사카시키부, 이미숙 주해, 《겐지 모노가타리 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377-404쪽의 내용을 발 췌하며 요약하였다.

한국의 사례에 이어 일본 고전문학을 대표할 만한 《겐지 모노가타리》 〈스에쓰무하나[末摘 花]〉의 내용을 간추렸다. 주인공 겐지가 퇴락해 가고 있는 집안의 여인인 스에쓰무하나의 얼 굴을 직접 보기까지의 과정이다. 스에쓰무하나는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외부 사람들과 는 면대하는 것은 물론 발을 치고 대화하는 것조차도 꺼리면서 지내는 여인이다. 스에쓰무하 나의 집을 몰래 찾아들어가 처음에는 칠현금 연주 소리만 듣고 돌아온 겐지가 그 다음에는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말을 건넨다. 이 대목에서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척”과 “裛衣香” 의 “무척이나 정다운 향기”가 차단된 시각을 대신해 전면화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자연스럽 다. 비록 시각의 차단이라는 제한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중층매개의 효과를 낳아 비 매개의 투명성을 의도한다. 잔뜩 호기심에 충만해 있다가 결국에는 스에쓰무하나의 외모에 겐지가 실망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꽤 긴 분량에 걸쳐 시각적 대면이 유예되는 동안 에 이 효과는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처럼 〈공자세가〉, 〈온달〉, 〈스에쓰무하나〉를 겹쳐 읽는 과정에서 표현 기법의 유 사성이 확인되는바, 이 유사성을 영향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 는다. 오히려 경험적 세계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삶의 기저 감각이 서로 근접해 있었다고 보 아야 할 듯하다. 이 세 텍스트가 공유하는 유사한 특징은, 서술 대상이 되는 존재가 모두 지체 높은 여성이라는 공통점에서 연유한다. 각각 왕의 부인, 공주, 귀족 집안의 딸로 설정된 등장인물들은 신분상 높은 지위에 해당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직접 시각적 외양 묘사를 하곤 하지만 시각의 차단은 그들이 신분상 실제로 ‘직접 보기 힘든’ 대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시각의 차단 효과야말로 훨씬 현실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그랬을 법하고, 따라서 현실감에 더 핍진하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이것은 비매 개의 투명성을 훨씬 효과적으로 구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과 같은 해석 또한 충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헤이완 왕조의 귀족 사이에서는 이것이 실로 보통이었다. 여자는 글자 그대로 ‘깊은 방의 佳人’이어서, 붉은 휘장이 쳐진 방 깊숙이에 드리우고, 게다가 당시 채광이 나쁜 집안에서는 낮이라 해도 어두컴컴한데, 하물며 등불을 켠 어두운 밤이라면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코를 마 주하더라도 쉽사리 분간되지 않았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 여자는 실로 저 늘 어두운 밤에 깊숙이 숨어서, 낮 동안은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이 없고, 다만 ‘꿈일 뿐인’ 세계에서만 환영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월광처럼 희뿌옇고, 벌레소리처럼 가늘고, 풀잎의 이슬처럼 여리 고, 요컨대 암흑의 자연계가 만들어낸 처절한 도깨비나 요괴의 하나이다.26) 약 100여 년 전의 상황을 기준으로 일본의 작가가 서술한 내용이라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다소 거북스런 표현이나 얼마간의 수사적 과장도 눈에 띄지만, 그 요점만 놓고 보자면 오랜 과거에 신분이 고귀한 여인을 형상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오늘날 시점에서 간과하기 쉬운 바 를 일깨우는 듯하다. 먼저 인용문의 작가는 칠흑 같은 밤길을 걸었던 경험을 설명한다. “집 안에선 한 점의 불빛도 소곤대는 사람의 목소리도 새 나가지 않고, 기척 없는 폐허 같은 벽 이 어둠 속에 묵연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 벽과 벽 사이의 구부러진 좁은 길을 나는 처음에 아무 느낌 없이 걸었”다. “어디까지 가도 어둠이 너무 짙고 너무 고요해서, 곧 알지 못할 두 려움을 느끼고, 뭔가에 쫓기다시피 달려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이어서 고전문학 속 의 여성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27)

26) 다니자키 준이치로, 〈연애와 색정〉(1931), 고운기 옮김, 《그늘에 대하여》, 눌와, 2005, 127-131쪽. 27) “요즘 사람은 《겐지 모노가타리》이하 옛 소설에 나타나는 부인의 성격이 여기든 저기든 하나같아서 부인의 개성 때문에 사랑한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여자의 얼굴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것도 아 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은 항상 같은 달인 것처럼, ‘여자’도 영원히 단 하나의 ‘여자’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를 듣고, 옷 냄새를 맡고, 머리카락에 대고, 요염한 촉감을 손으로 더듬어 느끼고, 그래도 밤이 밝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바의 그런 것들을 여자라고 생각하였으리라.”(같은 글, 131쪽)

이 말을 경청한다면, 고전문학에서는 경우 에 따라 오늘날에 익숙한 시각적 형상을 통해 등장인물의 개성이 획득되기보다 시각이 차단 된 상태에서 활성화되는 여타의 감각들을 통해 개성화의 구현 정도가 훨씬 증대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또한 언어-매체의 비매개=중층매개적 효과와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작가야말로 겹쳐 읽고 다시 읽는 제일의 독자이다. 실상 자신이 쓰면서 동시에 가장 먼저 읽는 첫 독자라는 상식에 따르더라도 그렇고 이미 씌어진 자신의 작품을 늘 염두에 두 면서 다음 작품을 쓴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물론 이럴 경우 작가에게 겹쳐읽기란 직접적으로 겹쳐지지 않는 텍스트를 창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유사하거나 동일하지 않은 텍 스트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한 사람의 시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대부분 의 뛰어난 작가들에게 두루 해당되는 사실이겠지만 특히 杜甫(712-770)가 그런 측면에서는 널 리 알려져 있다.28)

28) 이영주, 《두시의 장법과 격률》, 명문당, 2019, 490-538쪽에서 ‘이제연작시’라는 제목으로 고찰한 내용도 참 조할 수 있겠다.

앞서의 논의를 이어서 지각의 운용 방식을 다루어가기 위해 ‘밤’이라는 특 정한 주제로 한정해 보자. 또 관련 작품이 방대하므로 시체 또한 율시로 제한하기로 한다.

제목 연도 형식 첫연 비고 月夜 756 5율 今夜鄜州月 闺中只独看 月 757 5율 天上秋期近 人間月影淸 月 一百五日夜對月 757 5율 无家对寒食 有泪如金波 月 月夜憶舍弟 759 5율 戍鼓断人行 秋边一雁声 邨夜 760 5율 萧萧风色暮 江头人不行 春夜喜雨 761 5율 好雨知时节 当春乃发生 雨 客亭 762 5율 秋窗犹曙色 落木更天风 客夜 762 5율 客睡何曾著 秋天不肯明 倦夜 764 5율 竹凉侵卧内 野月满庭隅 將曉(一) 765 5율 石城除击柝 铁锁欲开关 曉 將曉(二) 765 5율 军吏回官烛 舟人自楚歌 曉 旅夜書懷 765 5율 细草微风岸 危樯独夜舟 中宵 766 5율 西阁百寻馀 中宵步绮疏 江月 766 5율 江月光于水 高楼思杀人 月(江) 中夜 766 5율 中夜江山静 危楼望北辰 夜宿西阁晓呈元二十一曹长 766 5율 城暗更筹急 楼高雨雪微 月圓 766 5율 孤月当楼满 寒江动夜扉 月 閣夜 766 7율 岁暮阴阳催短景 天涯霜雪霁寒宵 宿江邊閣 766 5율 暝色延山径 高斋次水门 宿 西閣夜 766 5율 恍惚寒山暮 逶迤白雾昏 夜 766 7율 露下天高秋水清 空山独夜旅魂惊 不寐 766 5율 瞿塘夜水黑 城内改更筹 夜(二) 767 5율 城郭悲笳暮 村墟過翼稀 夜 767 5율 绝岸风威动 寒房烛影微 夜雨 767 5율 小雨夜复密 回风吹早月 766 5율 四更山吐月 残夜水明楼 月(一) 767 5율 断续巫山雨 天河此夜新 月 月(二) 767 5율 并照巫山出 新窥楚水清 月(三) 767 5율 万里瞿塘峡 春来六上弦 十七夜對月 767 5율 秋月仍圆夜 江村独老身 月 八月十五月夜(一) 767 5율 满月飞明镜 归心折大刀 月 八月十五月夜(二) 767 5율 稍下巫山峡 犹衔白帝城 月 夜(一) 767 5율 向夜月休弦 灯花半委眠秋 雨 十六夜翫月 767 5율 旧挹金波爽 皆传玉露秋 春夜峽州田侍御长史津亭留宴 768 5율 北斗三更席 西江万里船 江邊星月(一) 768 5율 骤雨清秋夜 金波耿玉绳 江邊星月(二) 768 5율 江月辞风缆 江星别雾船

위의 표에서처럼,29) 필자가 임의로 확인해 본 바로는 두보 율시 중에서 표제어에 “夜” 혹 은 “月”이 들어간 작품을 대략 간추리면 약 35∼40편 정도로 짐작된다. 밤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율시 작품은 2편 남짓의 7율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5언체 형식으로 씌어졌고 두보 가 세상을 뜬 해가 770년이므로 특히 두보 만년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떠도는 노년 이라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많아서였겠지 싶다. 虁州 시기 초기에 “雨”를 표제로 한 작품들을 시체를 달리해 가며 연속해서 지었듯이, 자세한 분석을 할 상황이 아니고 치밀하게 뽑은 결 과가 아니지만, 밤과 달을 시적 배경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창작함으로써 관련 주제와 심경을 깊이 탐구해 들어간 것은 넉넉히 짐작된다. 이 중에는 〈月夜〉, 〈春夜喜雨〉, 〈月夜憶舍弟〉, 〈旅夜書懷〉 등 두보의 대표작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30)

29) 이 표는 仇兆鰲, 《杜詩詳注》1-5, 中華書局, 1999의 제목을 보며 필자가 뽑은 것이다. 급하게 눈에 띄는 대 로 뽑은 것이라 빠뜨린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창작연대는 이영주⋅강성위⋅홍상훈, 《杜律分韻 완역 杜 甫律詩》, 명문당, 2006을 따랐다. 이들 시에 대한 독자적인 고찰은 따로 준비할 예정이다.

30) 두보의 시는 仇兆鰲, 《杜詩詳注》에 의거한다. 이하 개별 작품의 출처 표시도 생략한다.

장안을 그리며 장강 부근을 떠도는 두보는 현실적으로도 늘 자신이 이미 쓴 시를 떠올리 며 새로이 쓰는 시와 겹쳐 읽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새로 쓴 시라도 늘 다시 읽게 되었을 것 이다. 달리 말해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를 텍스트화해야 하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그 텍스트 들을 늘 겹쳐 읽는 독자로서, 두보에게 밤은 동일한 밤이면서 동시에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는 다른 밤들이었을 것이다. 달빛 비치는 밤에 감응하다가 봄비 내려 반가운 밤에도 마음 을 기울였다. 또 아우를 떠올리는 밤도 있고 배 타고 떠돌다 보낸 밤도 있다.

〈客夜〉에서는 초라한 나그네 신세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주렴을 걷어 올리고 기우는 달빛 을 ‘보고’ 멀리 강물 소리를 ‘듣는다’.(卷簾殘月影, 高枕遠江聲) 〈客亭〉에 와서는 꼬박 새운 밤 의 끝자락에서, 창에 비치는 새벽빛을 ‘보고’ 또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런 밤들에 이어지는 〈倦夜〉의 밤은, 앞의 네 행에서 이렇게 그려진다. “竹凉侵卧内, 野月满庭隅. 重露成涓滴, 稀星 乍有無.” 비약(초월) 및 방관자적 자세와 더불어 치밀함이야말로 두보의 진면목이라 한 요시 카와 고지로31)가 주목한 작품이 바로 이 〈倦夜〉이다. 대나무가 발산하는 시원함이 침실 안까지 들어오고 황야의 달은 좁은 내 집의 뜰 구석구석 까지 가득 차 넘치고 있다는 것이 제1연인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다음 연입니다. ‘겹겹 이 슬은 물방울을 이루고, 드문 별은 문득 있다가 없어지네.’ ‘重露成涓滴’ 다섯 자는 표면만 본 다면 ‘겹겹 이슬은, 이룬다, 물방울을’이라는 구절이지만, 의미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침실 의 창 안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댓잎 하나하나, 그 표면 여기저기에 겹쳐 있던 이슬이 시간의 추이 속에서 점점 흐르고 뭉쳐서, 댓잎 끝에서 물방울을 이루어 땅에 떨어질 듯 말 듯 달빛 을 머금은 채 매달려 있다는 미세하기 그지없는 풍경입니다. 달밤이기 때문에 드문드문 보이 는 별빛이 영어로 말하면 suddenly appear,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disappear, 사라진다는 말도 세밀한 풍경입니다만, 상구의 重露成涓滴은 특히 섬세한 시선입니다.32)

31) 훗날의 일이지만, 기주에서 지어진 〈寫懷〉 즉 회포를 적은 오언고시의 “夜深坐南軒/明月照我膝”라는 구절 에 대해, 요시카와 고지로는 “남쪽 베란다에서 의자에 걸터 앉은 두보는 자기 무릎 위로 쏟아지는 달빛에 줄곧 눈길을 주고 있는 섬세한 시선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에 비하면 두보 이전 시대의 “밝은 달은 아직 세밀하지 못한, 거친 달빛이라고” 하면서 말이다.(요시카와 고지로, 조영렬 옮김, 《杜甫 시절을 슬퍼 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뿌리와이파리, 2009, 17쪽)

32) 요시카와 고지로, 위의 책, 18-19쪽.

이러한 풀이를 존중한다면, 두보의 세심한 관찰력은 “重露成涓滴”뿐만 아니라 나머지 일곱 구절에도 공히 배분될 필요가 있다. 〈倦夜〉의 뒤 4행 “어둠 속에 나는 반딧불은 제 몸만 비추 고, 물에서 묵는 새는 서로 소리쳐 부른다. 세상사 온통 전란 속이지, 맑은 이 밤 지나감에 괜시리 구슬프다.”(暗飛螢自照, 水宿鳥相呼. 萬事干戈裏, 空悲清夜徂)에도 그런 관찰력이 투사 되어 있을 것이다. 〈倦夜〉라는 제목의 倦에는 얼마간의 피로감과 지루함이 묻어 있다. 쉽사리 잠 들지 못하 는 밤이라 시간은 더디 간다. 왜 이리 잠이 안 오지라는 의문은 침실까지 스며든 ‘서늘한 대 나무 기운’(竹凉)에서 답을 찾는다. 자연스레 대나무 있는 곳으로 시선이 향하자 들판 높이 뜬 달이 뜰 귀퉁이에 가득한 게 보인다.(野月满庭隅) 대나무가 있는 곳이라 귀퉁이일 테고 혹 은 나무나 지붕처럼 그림자지지 않은 채 달빛이 곧장 비추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어 요시카 와 고지로가 상찬한 “重露成涓滴, 稀星乍有無” 구절로 옮겨가는데, 그 사이에는 뜰로 나간 두 보의 움직임이 내포되어 있다. 고개 숙여 이슬을 고개 들어 별을 ‘본다’. 달이 있어 희미한 반딧불도 언뜻 ‘보이고’ 저 너 머 물가에서 짝을 찾는 새 소리도 ‘들린다’. 밤을 구성하는 존재들이 달빛 받아 하나같이 깨 끗하다.(淸夜) 두보는 竹, 月, 露, 星, 螢, 鳥 등의 물상들 하나하나에 오래 머물렀을 것이고 그 과정은 두보의 이동 동선을 함축한다. 달빛 덕택에 집 너머 물가까지 보이니, 두보의 발걸음 이 그쪽을 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갑자기 암전. 두보의 시선 이동에 따라 차츰차츰 확장되던 공간은 세상 전체로 확장되지 못한 채 어두워진다. 전란의 소용돌이. 그래서 清夜의 맑음이 더 슬픈 것이고 괜스레(空) 구슬퍼진다. 이렇게 읽어가자면 왜 이 밤 두보가 잠 들지 못한 채 더디 가는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 알 게 된다. 막연한 슬픔 탓인지 잠이 오지 않던 두보 자신이 서늘한 대나무 밤 기운 탓인가 자 문하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倦夜〉에 스며든 피로감은 깨끗한 밤 풍경의 물상을 자 세히 들여다보며 조금씩 첫 자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동선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특히 경 련의 “暗飛螢自照, 水宿鳥相呼”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보이는’ 반딧불이와, 보이지는 않아도 ‘들리는’ 새 울음소리의 인접 관계를 통해 공간적 확장 가능성을 함축함으로써, ‘보이는’ 이곳 의 淸夜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전란이라는 더 큰 구조적 대비를 예비하고 있다. 짧은 하룻 밤과 긴 전란이라는 시간의 長短, ‘보이는’ 지금 여기 맑은 하룻밤의 환함(小)과 ‘보이지 않 는’ 저 너머 세상의 어둠(大) 사이의 대비. 이후로도 두보의 ‘밤’은 계속 탐색되어 마치 연작시인양 말년까지 이어진다. 두보를 읽는 훗날의 독자들이 두보의 밤을 겹쳐 읽고 다시 읽듯이, 아마 누구보다도 두보 자신이야말로 거듭 겹쳐 읽고 다시 읽는 최고의 독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밤의 시편들에서 밤의 시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로 등장하는 달이 두보의 시에서 때로 그 스스로가 독자화되어 한편의 시를 만 들어내기도 한다. 밤을 배경으로 한다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표제어에 月이 노출된 두보의 작품들은 대개 시각적 대상을 서술하면서 개인의 내적 소회를 읊조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 대부분 5언 형식을 취하고서, 어떤 달도 같은 달이 아니라는 듯이 거듭해서 지어 졌다. 훗날 소동파가 〈倦夜〉의 “暗飛螢自照, 水宿鳥相呼”과 더불어 두보 시구의 富健을 보여 준다고 평가한 “四更山吐月, 殘夜水明樓”이라는 구절이 담긴 〈月〉을 살펴보기로 하자. 四更山吐月 4경에 산이 달을 내뱉자 殘夜水明樓 기우는 밤 물빛에 누각이 환하다 塵匣元開鏡 먼지 덮인 상자에서 막 꺼낸 거울 風簾自上鉤 절로 올라간 창문 주렴의 고리 兔應疑鶴髮 토끼는 제 머리 백발이라 의아해하고 蟾亦戀貂裘 두꺼비 역시나 담비 가죽 옷 그리울 테지 斟酌姮娥寡 헤아리자니 항아도 혼자일 텐데 天寒耐九秋 차가운 이 가을을 어찌 견딜지 중국 고전⋅문학의 읽기론 167 소동파는 특히 수련의 두 구절이 뛰어나다며 “一更山吐月”에서 “五更山吐月”에까지 이르 는 다섯 수의 〈江月〉 연작시를 짓기도 하였다. 소동파가 말하는 두보의 富健이란 아마 四更 山吐月의 吐가 환기하듯이, 새벽에 갑작스레 산에서 튀어나온 달의 느닷없는 출현의 감흥 때 문일 것이다. 달빛에 반사되어 누각이 환해질 정도라 한다. 그때까지 시인은 또 잠들지 못해 서성이며 倦夜를 보내고 있었을 테다. 어둠 속에서 조명이 켜지듯 등장한 느닷없는 출현 탓 인지 달은 밤의 일부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이제부터 시인은 그 예민한 관찰력을 달에다가 집중한다. 거울과 고리의 비유에 이어, 달 표면의 토끼와 두꺼비 형상 혹은 달의 전설을 불러 오더니 급기야는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항아가 호출된다. 757년의 〈月夜〉에서는 반란군에 구금된 두보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같은 해의 〈月〉은 전란에의 탄식을 달에다가 담았고, 767년 기주에서 지은 〈月〉에서는 장안을 그리는 심정을 담았다. 공간적 거리를 소거하는 달의 편재성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깔려 있다. 그리움 과 탄식의 대상을 달리하면서, 月을 표제어로 쓴 작품은 계속 지어졌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 한 〈月〉은 개인적 심정의 직접적 표출은 최대한 억제하면서 달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물 론 달 자체가 시인의 처지와 동질적이라는 유비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노년의 두보는 여전히 떠돌고 있다. 또 다시 날은 차가워지고 한 해가 저문다. 그런데도 이 유랑은 쉬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잠 못 드는 밤에 환한 달빛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 달에게 시인이 느끼는 동질감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인 자신의 처지만큼이나 달도 오래 되어 늙은 달이고, 반대로 이토록 오랜 달만큼이나 나 자신도 늙었다는 자각에서 연유한다. 언제 적 토끼이며 두꺼비인가. 토끼도 백발이 되었을 테고 두꺼비도 추워지는 날씨에 따뜻한 옷이라도 찾을 테지. 그러고 보니 달에는 항아도 불사약을 훔쳐 남편에게서 달아나 혼자 산 다지. 혼자인 채로 不死라니. 그러한 불사는 복일까 벌일까. 이쯤되면 만당 李商隱의 〈嫦娥〉 가 두보의 〈月〉에 연원을 두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 雲母屛風燭影深 운모 병풍에 촛불 그림자는 깊어지고 長河漸落曉星沉 은하수 차츰 떨어져 샛별도 가라앉고 嫦娥應悔偷靈藥 항아는 필시 후회하는 게지 불사약 훔친 일 碧海靑天夜夜心 푸른 바다 하늘에 밤이면 밤마다 비추는 마음 두보의 〈月〉에서처럼 이상은의 〈상아〉에서도 시인은 긴 밤을 혼자인 채로 보낸다. 1-2구에 서는 촛불 심지처럼 깊어가는 밤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상은의 여타 시들처럼 시적 의미 는 불확정적이지만 불확정적인 상태에서나마 혼자인 채로 있는 나가 혼자가 아니었던 기억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연심이랄까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고 해야겠다. 이 그리움은 혹은 그것 과 유사한 어떤 마음은 매일 밤 떠오르는 달처럼 밤 깊도록 생겨난다. 이런 마음이 달에 산 다는 항아의 마음과 겹쳐진다. 불사약을 훔쳐 달아나 혼자인 채로 영원을 사는 항아처럼, 나 168 中國文學 第100輯 또한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혼자인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외로움의 존재 이다. 이쯤해서 이런 반문이 생겨날 법하다. 항아가 불로장생의 영원을 얻기 위해 어쩌면 혼자가 아닐 수 있음을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인지도 모르듯이, 내가 겪는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리움 혹은 상실의 고통은 애초 그런 대상을 가질 수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움을 낳 는 사랑의 경험과 기억을 얻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고통이 이 밤의 외로움이라면, 사랑과 외로움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처럼 보인다. 그 사랑을 안고 외로움을 살 것인지, 애초에 사랑 을 만들지 않아 끝없는 외로움 또한 생겨나지 않게 할 것인지. 두보의 〈月〉에서 언급한 것처 럼, 혼자인 채로 끝이 없다면 그러한 사랑은 복일까 벌일까. 이상은의 ‘항아’가 묻는 듯하다. 이렇게 李商隱의 〈嫦娥〉를 읽는다는 것은 두보의 〈月〉을 겹쳐 읽기가 된다.

이 겹쳐 읽기 는 제한 없이 다양한 새로운 증식을 낳을 수 있다.

가령 1300년을 전후하여 유럽 이탈리아의 단테가 지은 《신곡》의 지옥편 5곡, 형수와 시동생 관계인데도 사랑에 빠져 결국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 프란체스카와 파울로 이야기를 겹쳐 읽을 수도 있다. 이들은 육욕을 이기지 못 한 벌로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다. 단테가 그 사연을 직접 듣고 싶어 지옥에 있는 인물을 부 르자 프란체스카가 단테에게 와서 자신이 왜 지옥에 있는지 일러준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결코 놓아주지 않으니 이이에 대한 차오르는 기쁨으로 나를 사로잡았어요. 보다시피, 이이는 내 곁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어요.33) 프란체스카의 진술이다. 불륜의 사랑이어서 지옥에 떨어졌지만 이 둘은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지옥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연정을 품은 단테이기에 이 대목은 복합적인 울림을 준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혹은 진실한 사랑이고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설령 지옥과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괜찮은가.34)

33)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옮김, 《신곡⋅지옥편》, 민음사, 2007, 55쪽.

34)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비평적 논평은, 위의 책, 363-364쪽 참조.

아마 단테의 반문일 것이다. 단테 《신곡》의 유명한 이 대목은, 어떤 작품이 먼저 지어졌든 실제 그 영향 관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李商隱의 〈嫦娥〉나 두보의 〈月〉과 겹쳐 읽혀진다. 읽기의 현상학에서는, 李商隱의 〈嫦娥〉가 두보의 〈月〉을 환기하는 한편으로 단테의 《신곡》과도 겹쳐질 수 있다. 앞서 보았듯 이 《춘추좌씨전》이 18세기 유럽의 《아이반호우》와 겹쳐 읽히고 《사기》와 《겐지 모노가타리》 가 동시적으로 읽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무한히 증식될 수 있고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존재하고 있 는지도 모른다. 만약 문학사의 전개를 읽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한다면, 두보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특정 시기에 한정되지 않고 그 존재 시점부터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지속한 다. 두보가 시인들의 시인인 이상 대부분 후대 시인들은 늘 두보를 읽었기 때문이다. 두보만 이 아니라 《춘추좌씨전》과 《사기》도 마찬가지이다. 겹쳐읽기의 시각을 견지하면 작가란 쓰는 자라기보다는 읽는 자에 특히 ‘잘’ 읽는 자에 훨씬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를 향하는 질문은, 무엇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기에 이렇게 쓰게 되고 이렇게 쓸 수 있었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 까 싶다. 이러한 접근법은 무한 연쇄를 낳을 것이다. 특히 간간이 강조해 왔던 것처럼 감각적 지각의 층위를 통해 지각의 분할 가능성이 확인 된다면 전체로서의 작품보다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위의 부분들이 얼마든지 분리되고 독자화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매체친화적 읽기 방식이 중요해진다. 오늘날 매체의 발달은 감각적 정보를 분리-저장-결합하는 경로를 강화하고 있다. 하나의 영상 매체에 음향을 입힐 수도 있 고 소거할 수도 있으며,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특정 음향만 남기고 다른 음향은 배제할 수도 있다. 영상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적으로 보여줄 수도 있으며 편집 등을 통해 배열과 결합을 임의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다. 기실 이미 살펴왔듯이 문자 텍스트로서의 문학 작품 속에는 다양한 지각적 층위들이 복합 적으로 얽혀 들어있다. 그러한 특성을 잘 포착해서 활성화시키는 능력이, 읽기의 기본 자질이 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통해 결국 문자라는 매체적 한계에 내재된 한계초월적 특성들 을 포착함으로써 새로운 매체로 전환할 수 있도록 재구성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금껏 중층 매개와 비매개 혹은 비매개로서의 중층매개적 효과 등을 지루하게 반복하면서 강조해 온 이유 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읽기는 겹쳐읽기이자 다시읽기이며 궁극적으로는 다시-쓰기 혹은 달리-쓰기가 된다. 그러므로 읽기는 다른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4. 텍스트 읽기의 현상학 (3) : 읽기의 매체적 변환

지금껏 반복해온 바 중층매개와 비매개의 투명성이 언어-매체 텍스트 속에서 두루 확 인되므로, 읽기의 능력이란 매체적 변용 능력이라는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신라 말의 문인 최치원의 작품 〈旅遊唐城贈先王樂官〉을 보인다. 人事盛還衰 성했다 쇠했다 사람 일이라 浮生實可悲 허망한 사람살이 실로 서글퍼 誰知天上曲 누가 알았을까 천상의 곡조를 來向海邊吹 바닷가로 와서 연주할 줄을 水殿看花處 물가 궁전에서 꽃구경하던 그곳 風欞對月時 바람 난간에서 달을 보던 그때 攀髥今已矣 하늘 가신 임금님 이젠 좇을 수 없어 與爾淚雙垂 그대와 함께 두 줄기 눈물만 흘려35) 이 시는 세상을 떠난 선왕의 재위 시절에 함께 임금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 최치원은 하정사로 임명받아 당으로 가기 위해 당성 부근을 지나다가 헌강왕 시절의 樂官을 만났다.36) 회고조의 시로서 음악 즉 청각에 호소하는 인상이 강하다. 흔히 확인되듯이 음악은 기억을 환기하는 좋은 소재이다. 선왕 시절 악관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경련의 장 면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물론 세상을 떠나버린 왕이므로 악관의 음악은 회복 불 가능한 시절의 회상일 뿐이다. 제재의 유사성으로 인해서 이 시를 읽으며 杜甫의 〈江南逢李 龜年〉를 같이 읽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岐王宅裏尋常見 기왕의 댁에서 그대 보기는 늘상의 일 崔九堂前幾度聞 최구의 집에서 노래 듣기는 몇 번이었나 正是江南好風景 강남 땅 풍경 좋은 바로 이런 곳에서 落花時節又逢君 꽃 지는 이 시절에 또 그대를 만났다37)

35) 崔致遠, 《孤雲集》(한국문집총간), 151쪽.

36) 이황진, 〈최치원의 귀국 후 한시 작품 연구〉, 《한국민족문화》 51, 2014, 276쪽.

37) 仇兆鰲, 《杜詩詳注》5, 2060쪽. 이 시의 頓挫와 자구의 鍛鍊에 대해서는, 이영주, 《두시의 장법과 격률》, 110-111쪽 및 329쪽 참조.

이 시에서 두보도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주제 즉 회귀 불가능한 시간을 다루면서 기억을 환기하는 시적 동력으로 노래(음악)를 활용한다. 그렇지만 최치원의 경우는 확실히 “天上曲” 이 들리지만, 두보의 〈江南逢李龜年〉에서는 노래가 들리는지 불확실하다. ‘음악→기억→시각 적 장면화’라는 연쇄가 작동하는 것은 분명한데, 현재든 기억의 회상 속에서든 두보의 귀에 이귀년의 노랫소리가 들렸는지는 모호하다. 읽기 능력의 매체적 변용 혹은 전환이라고 한 앞 서의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할 듯하다. 언어-매체로서 문학 언어의 중 층매개와 비매개화 효과를 줄곧 검토해온 마당인지라, 이제 문학 텍스트 읽기는 문자 매체를 넘어서는 매체화 가능성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자면 〈江南逢李龜年〉에서는 노랫가락의 청각적 음향이 들리지 않았다고 해석한 다. 1-2구의 “岐王의 宅”과 “崔九의 堂”이 시각적 장면화의 공간이지만 두보는 “尋常”과 “幾 度”라는 빈도수로 갑작스레 포착한다.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다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제시되 기는 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도록 해석하는 편이 온당하다. 하지만 잦았던 만남과 구경 장 면은 거듭거듭 제시되어야 하고 대신 ‘오디오’는 꺼진 영상이 겹쳐지는 편이 적절하겠다. 3-4 구에서 제시된 “江南好風景”과 “落花時節”이라는 표현을 감안할 때, 강남 땅 풍경 좋은 봄날 에 꽃잎이 날리듯 지고 그 위로 옛날 노래하는 모습이 다양하게 오버랩되는 영상이라면 〈江 南逢李龜年〉에 더 핍진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又”가 주제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또 다시” 만났지만 “또 다시” 만날 수는 없으리라는 확신 어린 예감이다. 이제 문학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의 중심에는 매체 변환의 지침이 될 만한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익숙한 읽기의 관행은 주로 문자적 읽기의 틀 내부에 머문 감이 없지 않다. 어찌 보면 그만큼 문자 매체적 경계 내부에 머물더라도 문학이 충분히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유통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문학 읽 기와 매체(성)와의 관련성이란, 텍스트 내적 제재의 매체적 측면과, 텍스트의 유통 환경 속에 서 드러나는 매체적 변환 측면을 아우른다. 이 두 측면 사이에 걸쳐 있는 영역이 문학의 텍 스트적 층위이다. 〈江南逢李龜年〉이나 〈旅遊唐城贈先王樂官〉에서 보이듯, 청각⋅시각으로 촉 발되는 감성 혹은 감각의 배치⋅분할과 관련되기도 하고, 표현 매체의 물질적 특성과 연관될 수도 있다.38)

竹凉侵卧内, 野月满庭隅. 重露成涓滴, 稀星乍有無. 暗飛螢自照, 水宿鳥相呼. 萬事干戈裏, 空悲清夜徂. 두보의 〈倦夜〉를 다시 보자.

앞서 읽어 보았듯이 두보는 ‘竹, 月, 露, 星, 螢, 鳥’ 등 ‘맑은 밤’을 구성하는 물상들 하나하나에 오래 머물렀고 1-6구에 펼쳐 놓은 그 과정은 두보의 눈과 발이 이동하는 동선을 함축한다. 차츰 확장되던 공간이 마지막 미련에 이르러 갑작스런 암전 마냥 세상 전체로 확장되지 못한 채 어두워졌다고 하였다. 寫景에 중점을 둔 선경후정의 구 성으로 회화적 이미지가 지배적인데, 과거에 널리 행해진 바처럼 詩意圖라는 시각적 매체로 의 전환이 가능한 방식으로 읽어보자.39) 이러한 매체 변용적 읽기를 시도할 때 특히 두 가지 측면이 문제적이다.

38) 사진⋅그림⋅영상 등이 기억의 일상적 저장체로 활용되는 오늘날의 ‘시각-청각’의 배분 관계와는 달리, 시 각적 매체의 기억 매개 기능이 상대적으로 드문 시대의 ‘시각-청각’ 배분 관계를 구별해야 하는 문제이기 도 하다. 특히 송대 이후 인쇄 매체의 보급이 급속도로 신장되고, 이에 따라 문자는 물론 글씨와 그림 등 예술적 표현 매체가 2차원 평면의 종이를 기반으로 하는 조건 속에서, 작가와 독자들이 詩書畵에 두루 관 여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문학의 텍스트적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섬세하게 고려할 필요 가 있다.

39) 두보 시의도에 대해서는, 殷春梅, 〈現存有關杜甫的古代書畵作品目錄〉, 《杜甫硏究學刊》, 제2기, 2006, 74-80 쪽; 조인희, 〈조선후기의 두보 시의도〉, 《미술사학》28집, 2014 등 참조.

3차원 공간에서 이루어진 감각적 지각의 경험을 2차원 평면에 옮겨 놓는다는 일반론적인 고려가 하나이고, 시인의 이동 동선에 함축된 ‘시간’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다. 특 히 후자는 〈倦夜〉에서 더 고려되어야 할 관건처이다. 重露成涓滴 구절에 대한 요시카와 고지로의 분석을 수용한다면, 치밀하고 세심한 관찰은 중요한 논의거리이다. 잎새 위에 액체로 변한 물 기운이 여기저기 생겨나 있고 그것들이 모여 이슬방울이 되는 과정에는 시간의 경과가 들어 있다. 자세히 보면서 꽤 오래 보았을 것이 다. 더군다나 涓滴 즉 이슬방울에 아주 작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그 관찰은 더 미세해진다. 이 구절은 독자에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 은 늘 벌어지는 지각 활동이지만 정작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3차원 공간의 사물을 2차원 평면으로 매체 이동시키려 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림으로 그 리기 위해서 본다면 달리 보게 되고 혹은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야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일 이 생겨난다.40) 이것은 문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일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重露成涓滴라는 다섯 글 자의 문자 텍스트로 매체 전환되도록 하기 위해서 시인에게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 묻 게 한다. 그 과정의 추체험이 설령 불가능에 가깝다 하더라도 重露成涓滴라는 표현이 가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았고 또 씌어진 다음에는 그 이슬방울이 배경에 묻히지 않고 개별적 사 물로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重露成涓滴의 다섯 글자 문자 매체로 수렴 가능한 방식의 ‘보 기’가 쌍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重露成涓滴에서 정작 읽어야 할 것은, 시각적 관찰을 문자 매체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벌어졌으리라 짐작되는 현상들이다. 읽기 위해서는, 시인에게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야 한다. 화가의 관찰은 시인의 관찰을 읽는 데 좋은 참조가 된다. 겹쳐읽기는 읽기의 현상이지만 작가에게도 해당된다고 이미 언급하였듯이, 본다는 것도 겹쳐 보기로 이해됨 직하다. 〈권야〉가 창작되는 그 순간의 관찰만으로 重露成涓滴을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기억과 함께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보고 반복해서 보았을 것이다. 무수한 〈권야〉의 밤이 있었을 것이고 무수히 이슬을 보았을 것이다.41)

40) “자연은 끝이 없습니다. 당신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내 눈에 는 산울타리가 그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것으로만 보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콘서티나처럼 펼쳐지는 작 은 일본산 스케치북에 그 울타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J-P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멈춰’라고 말 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풀들을 그렸습니다. 그 스케치북을 한 시간 반 만에 다 채웠습니다. 그 후에 울타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풀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풀을 사진으로만 찍는다면, 당신은 드로잉할 때만큼 풀을 유심히 보지 않을 겁니다.” 마틴 게이퍼드, 주은정 옮김, 《다시, 그림이다》, 디자인하우스, 2012, 32쪽에 나오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의 말이다.

41)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 다음과 같이 결심해보세요. ‘오늘 아침 거기로 가 서 이러이러한 것을 볼 거야’하고요. 만약 당신이 이를 계속해나간다면, 특히 바라보는 대상이 멀리 떨어 져 있지 않다면 이 방법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5분전의 기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해 집니다.” 마틴 게이퍼드, 위의 책, 102-105쪽.

〈권야〉에서 밤의 물상은 ‘竹, 月, 露, 星, 螢, 鳥’로 대표되고 각각이 한 구절마다의 중심 대상이다. 그럼 이 여섯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회화적 화면은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 여기서 시인의 시선이 대상을 좇아 달리 움직이고 장소의 이동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 “竹凉”에서 凉이라는 말이 부여하는 촉각적 심상이라든지 “鳥相呼”의 呼로 인한 청각적 음향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 놓더라도,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2차원 화면에 시간을 기입하 는 것이 진지하게 고려할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과거의 회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여섯 대 상을 한 폭의 동일 화면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담을 때 개별적 대상마다 할당되어 야 하는 시선의 독자성, 대상이 위치하는 공간의 개별성이 모호해지곤 한다. 하나의 방법은, 그림을 6개로 나누어 그려서 붙이는 방식이다. 圖卷 형태의 두루마리에 각 각 그린 그림을 이어 그려놓음으로써 선형적 시간처럼 눈에 보이기 하는 것이다. 두보 시구 의 순서대로 그림을 그리고 차례차례 보도록 해 놓는 것을 말한다.42) 이런 방식으로 보면 ‘竹, 月, 露, 星, 螢, 鳥’ 그림 각각을 바라보는 시점이 구분되어 〈권야〉의 시상 전개에 따라 시간적 흐름을 체험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포토꼴라쥬처럼 6개의 그림을 이어 붙여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겠다.43) 6개의 물상을 하나의 화면 내에 적절히 포치하되 그 각각을 보는 시점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않고 6개 대상마다 보는 시점이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어느 방식을 선택하든 시점을 다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원근법적으로 하나의 시점에 의지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원근법적 시각에 의지할 때 생기는 외부소실점은 보는 자를 보는 대상의 바깥으로 밀어내 는 효과를 만들어, 풍경 안에 머물지 않고 풍경 너머에 있도록 한다. 가령 그랜드캐니언 같은 거대한 풍경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다. 어떤 사진도 그 실물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데, 사진 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즉 하나의 시점에서 셔터를 한 번 눌러서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보고 공간으로 지각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다.44)

42) “1981년 중국에 갔을 때 동양 미술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극동 지역 미술 큐레이터를 알게 되었습니다. 1986년에 그는 내게 멋진 두루마리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 위층 방의 바닥에는 약 27.4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때 그레이브스와 함께 있었는 데, 우리는 무릎을 꿇은 채 그 그림을 서너 시간 동안 보았습니다. (…) 1770년에 제작된 그 작품은 보는 이는 황제의 행렬과 함께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게 됩니다. 실제로 그 안에는 3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른 특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그 그림은 책으로 복제할 수 없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 을 펼쳐가면서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 그 두루마리 전체를 펼칠 수는 없습니다. 계속 돌려가며 봐 야 합니다. 따라서 양 측면에 경계선이 없습니다. 아래 쪽 경계선은 보는 사람이고 위쪽 경계선은 하늘이 됩니다. (…) 사실 필립 하스와 함께 1987년에 그 두루마리 그림에 대한 영상을 만들었고, 그 영상은 카메 라가 움직이면서 보는 이의 시점이 끊임없이 변하는 일종의 두루마리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 영상의 러닝타임은 45분 정도로 카메라는 쉬지 않고 계속 움직입니다.”(178-180쪽)

43) “사람들은 원근법이 카메라에 내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경험상 두세 장의 사진을 함께 놓고 보면 원근법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작품은 일본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1983년 2월 교토 료안지 사우너의 젠 가든을 걸으며’를 만들었지요. 주위를 빙 돌면서 각기 다른 위 치에서 사진을 찍어 작품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었습니다. (…) 그 작품을 완성했을 때 매우 흥분했습니다. 서구의 원근법이 제거된 사진을 만들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 렸습니다. (…) 초기 회화 작품 중 상당수는 평행투시법으로 제작했습니다. 이는 하나의 소실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평행 투시법이 일본과 중국의 것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57쪽)

44) 142-143쪽.

 

이렇게 보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시점은 결국 시간의 문제가 된다. 송대 이후 본격적으로 흥기 한 산수화도 규모에서는 그랜드캐니언 못지않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산수화에서 는 소실점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보는 이가 거기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보는 이가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 에서는 소거된 시간 즉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45) 잠시 두보의 사례를 중심으로 텍스트 읽기가 어떠한 매체 변환적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가늠해 보았다. 이러한 매체 변용 능력은 송대 이후의 텍스트를 읽을 때 더 절실해 진다. 산수화를 위시하여 회화의 흥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에 따라 본다는 것의 문제가 심각하게 탐색되었을 것이고, 글씨 및 그림과 관련된 다양한 매 체의 활용이 전면화됨으로써 지각 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으리라는 추측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가령 산수화 시대의 본격적 도래를 알리는 곽희가 자신의 화론 《林泉高致》에서 산수를 그 리는 법은 구체적 물상을 그리는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한 진술을 상기해보자. 꽃을 위에서 보 면 전후좌우의 형상을 다 볼 수 있고 달밤에 대나무를 벽에다가 비추어 보면 그 뚜렷한 형태 를 볼 수 있듯이, 산수라고 다른 이치가 있을 리 없다고 하였다. 작고 구체적인 대상이든 너 무 커서 한 시선에 잡아내기 어려운 대상이든 본다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뜻인 듯하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고 어느 時點에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니, 그 모두를 두루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46) 저 유명한 三遠論―산 아래에서 산마루를 쳐다보는 高遠, 산 앞에서 산 뒤를 엿보는 深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을 平遠―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47)

45) 180쪽.

46)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러하고, 멀리 몇 리쯤 떨어져서 보면 이러하고, 멀리 십여 리쯤 떨어져 보면 이 러이러하다.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달라지므로 ‘산 모양은 걸음걸음에 따라 옮겨진다’고 한다. 산은 정면 에서 보면 이러하고, 측면에서 보면 또한 이러하고, 뒷면에서 보면 이러하여서 볼 때마다 달라지므로 ‘산 의 모습은 면마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산에 수십 수백의 형상을 겸하고 있으니, 다 알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산은 봄여름에 보면 이러하고, 가을 겨울에 보면 이러하니, 이른바 ‘사철의 경 치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산은 아침에 보면 이러하고, 저녁에 보면 이러하며, 흐린 때나 개인 때에 보면 이러하니, ‘아침저녁으로 변하여 모습이 같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산에 수십 수백 개의 산의 의태를 겸비하였으니, 궁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山近看如此, 遠數裏看又如此, 遠十數裏看又如此, 每遠 每異, 所謂 “山形步步移”也。山正面如此, 側面又如此, 背面又如此, 每看每異, 所謂 “山形面面看”也。如此是 一山而兼數十百山之形狀, 可得不悉乎!山春夏看如此, 秋冬看又如此, 所謂 “四時之景不同”也。山朝看如此, 暮 看又如此, 陰睛看又如此, 所謂 “朝暮之變態不同”也。如此是一山而兼數十百山之意態, 可得不究乎!) 劉劍華, 김대원 옮김, 《역대화론유편⋅산수1》, 2010, 소명출판, 243쪽.

47) “산에는 삼원법이 있다. 산 아래에서 산마루를 쳐다보는 것을 ‘高遠’이라 한다. 산 앞에서 산 뒤를 엿보는 것을 ‘深遠’이라 한다.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을 ‘平遠’이라 한다. 고원의 색은 맑고 밝다. 심 원의 색은 무겁고 어둡다. 평원의 색은 밝은 곳도 있고 흐린 곳도 있다. 고원의 형세는 우뚝하게 솟았다.심원의 의취는 겹겹으로 쌓였다. 평원의 의취는 화창하면서 아득히 멀리 펼쳐진 것이다.”(山有三遠: 自山 下而仰山顛, 謂之高遠;自山前而窺山後, 謂之深遠;自近山而望遠山, 謂之平遠。高遠之色清明, 深遠之色重 晦;平遠之色有明有晦;高遠之勢突兀, 深遠之意重疊, 平遠之意沖融而縹縹緲緲。其人物之在三遠也, 高遠者 明了, 深遠者細碎, 平遠者沖淡。明了者不短, 細碎者不長, 沖淡者不大, 此三遠也.) 같은 책, 260쪽.

수직으로 높이 솟 은 高遠의 산수 그림에는 낮은 시선이 향하는 곳에 조그마한 사람이 등장하고 수평으로 멀리 뻗은 平遠의 가까운 시선 쪽에는 자그마한 배 한 척이 흔히 떠 있다. 산의 높이를 우러르는 시선이나 수평선 아득히 향하는 시야에는 동시적으로 포착하기 힘든 존재이다. 원근법적 단 일 시선이 아니라 다중적 시선이 한 화면에 동시적으로 투사된 결과일 것이다. 풍경 바깥으 로 밀어내지 않고 풍경 안에다 사람을 두고자 하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 심오한 산수화의 세계를 쉽사리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꽃과 대나무처럼 가까이서 관찰 할 수 있는 대상이든 산수처럼 큰 풍경이든 모두 2차원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임은 분명해 보인다. 13세기 남송의 화가 馬麟의 작품으로 알려진 〈暗香疏影圖〉이다. 매화와 대나무가 화면 상 단에 그려져 있고 화면 하단에는 돌과 함께 옅게 매화, 나뭇가지, 대나무 그림자 그려져 있 다. 3차원 물상을 2차원 평면에다 담으면서 동시에 또 다시 물에 비친 그림자 즉 2차원적 형 상도 함께 담고 있다. 곽희의 언급을 다시 한 번 환기해 보자. 꽃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한 그루의 꽃을 깊은 구덩이 속에 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꽃의 사면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 그리기를 배우는 사람은 대나무 한 가지를 가져다가 달밤에 하얀 벽에 그림자를 비추어 보면, 대나무의 참다운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산수를 배 우는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48)

곽희에 따르면 화가는 꽃의 사면을 다 보고 대나무의 형태를 정확히 보려 하는 자이다. 3 차원 형상을 종이 위에 혹은 비단 위에 그리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을 수밖에 없 다. 그런데 마린의 그림처럼 물 위에 비치는 그림자를 함께 그린다면 물 위의 그림자는 적어 도 상단에 그려진 형상의 이면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이란 비록 2차원 평면으로 매 체 변환된 지각적 형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하는 무엇을 보이게 한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는 없을까. 이 그림은 마치 무엇이 보이는가 어떻게 보이는 가를 통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하다.

柳條百尺拂銀塘 백 척 버들가지 맑은 못 위를 스치네 且莫深青只淺黃 짙은 청색 말고 연한 황색으로만 남기를 未必柳條能蘸水 버들가지라고 물에 굳이 잠겨야 할까 水中柳影引他長 물속 버들 그림자가 길게 잡아당기더라도

남송의 시인 楊萬里의 〈新柳〉49)이다.

48) “學畫花者, 以一株花置深坑中, 臨其上而瞰之, 則花之四面得矣。學畫竹者, 取一枝竹, 因月夜照其影於素壁之 上, 則竹之真形出矣。學畫山水者何以異此?”(241쪽)

49) 楊萬里, 〈新柳〉, 陳衍 편, 《宋詩精華錄》, 巴蜀書社, 1992, 495쪽. 이하 인용하는 송시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 으로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버들가지 길게 늘어진 채 물 위를 쓸 듯 스치는 광 경이다. 이 시는 마린의 〈암향소영도〉를 시라는 문자 매체를 통해 그린 그림처럼 읽힌다. 물 위에 비친 버들 그림자의 평면이 수직으로 늘어뜨린 버들가지를 잡아당긴다 함은, 3차원이 2 차원 그림으로 매체 전환이 일어나려는 긴장을 포착한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新柳〉를 짓는 양만리의 눈에 보인 것은 어쩌면 이미 그림으로 전환된 이후의 현실일 수도 있다. 현실을 그림 처럼 보고 그렇게 보여진 그림을 보면서 시가 지어진 것이라면, 남송 시대 어느 시점 이전부터 독특한 감각적 지각 체계가 이미 구성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사한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閉轎那知山色濃 가마 문을 닫고서야 산빛 짙은지 어이 알랴 山花影落水田中 산 꽃 그림자 무논 속에 떨어졌네 水中細數千紅紫 울긋불긋 물속의 꽃 자세히 헤아려 보니 點對山花一一同 산에 핀 꽃들이랑 하나하나 똑같구나

양만리의 시 〈水中山花影〉이다. 물에 비친 꽃들이나 산에 핀 꽃들을 하나하나 일대일 대 응시켜 본다. 그랬더니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꼭 그대로라 한다. 어느 쪽이 현실일까. 원래의 산꽃이든 물에 비친 꽃이든 모두 자연 세계의 형상이지만, 달리 보면 물에 비친 산꽃 그림자 는 한편으로 회화적으로 변용된 텍스트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자연에 내재된 텍스트로 받 아들인다면, 자연 세계 또한 잠재적 텍스트를 자연의 일부로서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碧酒時傾一兩杯 맑은 술 한두 잔 기울이는데 船門才閉又還開 선창 문 닫혔다 다시 열리고 好山萬皺無人見 멋진 산 만 겹 주름 보여주는 이 없어 都被斜陽拈出來 비끼는 석양 빛이 죄다 들어 올리네50)

사담을 배로 지나며 지은 세 수의 연작시 〈舟過謝譚〉 가운데 셋째 수이다. 배에서 한잔 두잔 마신 술 탓일 수도 있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출렁이는 물결에 선창 문이 열렸다 닫혔 다 한다. 이제 배 바깥의 풍경은 선창 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보인다. 그 시각적 프레임은 이 젤이어도 좋고 족자여도 상관없겠다. 층층이 겹겹으로 산수화처럼 산 풍경이 펼쳐지고, 저녁 석 양빛 때문에 주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선창 문을 프레임 삼아 보이는 것은 산수화 그 림이고 이 시는 이미 그림으로 바뀐 이후의 풍경에 촉발되어 지어졌다. 프레임의 틀 즉 그림으 로 지각되는 현실만이 시가 될 수 있다면, 그럼 이러한 시는 화제시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일까.

朝來庭樹有鳴禽 아침 무렵 뜰 나무에서 새 울더니 紅綠扶春上遠林 울긋불긋 봄을 데리고 먼 숲을 올라간다 忽有好詩生眼底 눈 앞에서 좋은 싯구 홀연 떠올랐다가 安排句法已難尋 구법 따져 맞추다 보니 하마 찾을 수가 없네51)

양만리보다 한 세대 앞선 陳與義(1090-1139)의 〈春日〉 첫 수이다. 진여의는 誠齋體로 불리 는 양만리의 스타일을 앞서 보인 시인으로 인정받아 왔다. 이 시도 성재체를 미리 열어 놓았 다 한다. 봄날 뜰에서 듣던 새소리 멀리 산에서도 들리는 듯하여 산을 바라본다. 산의 아랫자 락부터 꽃들이 울긋불긋 피기 시작했다. 멋진 풍경이라는 생각에 시를 지으려다 이내 그만 두고 만다. 이를 두고, 시적 감흥의 감각적 직접성과 詩作의 인위적 작위성이 서로 어긋하는 순간을 포착한 사례로 읽을 수도 있다. 시작은 늘 지연된다. 지연될수록 감흥의 대상과 순간 으로부터 멀어지고 지연된 시간 끝에 지어진 시는 결국 선행하는 대상에 대한 후행적 모방일 뿐이다. 1∼2구에서처럼 어우러진 봄 풍경의 아름다움이 시각적으로 먼저 보이되 혹여 이미 그려진 그림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시는 늘 그림보다 늦다. 시 텍스트에 선행하여 텍스트로서 의 풍경이 미리 존재한다.

憶看梅雪縞中庭 눈 맞아 뜨락에 흰 매화 보았건만 轉眼桃梢無數青 어느샌가 복숭아 가지 끝이 온통 푸르다 萬事一身雙鬢髮 온갖 일 매인 이 몸은 양 귓가 허연 채로 竹床攲卧數窗櫺 대나무 침상 비껴 누워 격자 창살 헤아린다52)

50) 위의 책, 512쪽.

51) 위의 책, 393쪽.

52) 같은 책, 394쪽.

〈春日〉의 두 번째 수이다. 흐르는 세월에 늙어가는 시인이 무료한 듯 하는 일이란 격자 창살을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이다. 권태로이 헤아리는 격자 창의 형태가 세상을 보는 프레임 이라면 무엇인가 선행하는 텍스트를 사후적으로 뒤따르는 시를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바라보 거나 패턴화된 무늬를 새겨 넣는 행위가 우선시되는 것처럼도 읽힌다. 비록 단지 시 몇 편만을 읽으며 논의해 왔지만 송대 이후 특히 남송 시기에 접어들면서부 터 자주 목도되는 듯한 이러한 경향을 극단화한다면, 시인들 눈에 보인 것 혹은 시인들이 보 려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것은 마치 3차원적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옮겨놓으려고 하는 회화적 시선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렇게 본 대상을 다시 시로 표현한 것이라면 여기엔 독특한 형태의 매체적 변용이 개재된다. 이를 감안할 때 시 텍스트 읽기는 그 반대 방향으로의 매체적 변환을 감당해야 한다. 시 텍스트와 회화적 텍스트가 어떤 관련을 이루며 존재하는지 그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여기서 섣불리 추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중층매개화 효과를 통해 언어-매체의 비개매적 투명 성을 지향하는 방향과는 달리, 비매개적 지향을 지연 혹은 유보하는 단편적 양상을 확인한 정도이다. 추후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겠거니와, 적어도 종이와 인쇄 매체가 대량으로 퍼지고 이와 더불어 문인들 사이에 글씨와 그림이 일반화되는 문화적 전변 과정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본다는 것을 둘러싸고 새로운 문화적 체제가 형성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지각 체계의 변화라는 훨씬 거시적인 시야를 통해 접근해야 하는 과 제라고 판단된다.

5. 나가며 : 다시 ‘융합 vs 텍스트’

몇 가지 단편적인 편린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급한 마음에 이 이면에 작용하는 지각 체계가 있다면 그 궁극적 방향은 어떤 것일까 물어볼 수는 있을 듯하다.

餘生欲老海南村 해남도 마을에서 남은 인생 보내려는데 帝遣巫陽招我魂 상제가 무양을 보내 내 혼을 부르신다 杳杳天低鶻沒處 아득아득 하늘 밑자락 송골매 사라지는 곳 青山一髮是中原 푸른 산이 한 줄 머리카락 되는 저곳이 중원이구나53)

53) 蘇軾, 《蘇軾詩集合注(5)》, 上海古籍出版社, 2216쪽. 중국 고전⋅문학의 읽기론 179

죽음이 임박한 만년의 소동파가, 저 남단 해남도 귀양길을 벗어나 육지로 들어가는 경로 에서 남긴 〈澄邁驛通潮閣〉이라는 시다. 그 두 번째 수에서 위와 같이 읊었다. 특히 이 시 4구는 유명하다. 푸른 산들은 나란히 땅에 붙은 듯이 아득하다. 그 형상이 소동파에게는 “青山一 髮”의 線으로 보인다. 또 저 하늘 밑자락 너머로 날아가는 송골매가 사라지는 형상은 點이다. 하늘 나는 새는 點이 되어 사라지고 땅 끝 푸른 산은 線이 되어 버리다. 그 배경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의 면으로 펼쳐진다. 3차원의 현실이 2차원 평면으로 압착되는 형상이다. 이 순간의 세계는 점과 선으로만 그려진다. 그림이라면 기하학적 추상에 근접할 듯하다.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임박한 위대한 문인이 읊조린 개인적 소회일 뿐이라 한다면 그 또 한 온당한 평가이지만, 역시 호기심에 쫓기는 급한 마음에 송시적 회화성에 내포된 한 가지 극단적 방향성을 위의 시를 통해 짐작하자면, 송시적 회화성은 섬세한 묘사의 풍경화와는 지 향이 다르다. 경물과 풍경의 구체성이 점차로 희석되다가 경물과 풍경을 담은 전체 공간의 테두리가 추상으로 포착된다. 그것은 극단화된 기하학적 표상처럼 보인다. 이것은 회화적 풍 경을 시적 제재로서 표현한다기보다 시 자체가 혹은 시를 만드는 문학 언어 자체가 매개적 성격을 포기하며 매체화되는 효과에 가깝다. 이런 추론에 이르기까지 앞서 논의해 온 과정이 부분적이나마 인정된다면, ‘융합 vs 텍스 트’라는 주어진 과제와 관련하여 융합은 텍스트 내재적이라는 입장을 선택적으로 제안할 수 있을 듯하다. 이미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비매개와 중층매개의 이중원리라는 시각에서 언어-매 체의 복합성을 거듭 거론해 왔거니와, 이것은 지각의 전면성을 포괄하기 힘든 언어-매체적 한 계를 자각함으로써 모색된 다양한 방략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관련된 여러 양상에는 세계를 기하학적 추상으로 형상화하는 지향성까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 텍스트는 어쩌면 그 발생에서부터 융합적 경향을 내재화하고 있었는지 도 모르며, ‘융합 vs 텍스트’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어-매체인 문학 텍스트가 부여받은 본령이다. 다만 문학 텍스트는 그 융합적 가능성을 ‘읽기’를 통해 실현한 다는 사실은 다시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텍스트를 출발점으로 선택하는 한 융합이 방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기가 방법이 된다는 뜻이다. 읽기란 혹은 잘 읽는다는 것은, 문자/언어 매체의 근본적 한계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텍스트에 잠재된 지각의 전 체성을 환기하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확인하는 능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매체의 발달 에 따라 여러 가지 감각의 분리⋅저장⋅결합⋅유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라면, 문학의 문자 텍 스트 속에서 다른 매체로의 전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지각적 층위를 활성화하는 과정과 능력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위상을 하락시 키는 조건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읽기 능력을 배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어쩌면 지 금이야말로 문학 텍스트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인지도 모른다.

【 參考文獻 】

《春秋左氏傳》(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https://ctext.org)의 전자판) 《史記》(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https://ctext.org)의 전자판) 《三國史記》(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崔致遠, 《孤雲集》(한국문집총간본) 仇兆鰲, 《杜詩詳注》1∼5, 中華書局, 1999. 陳衍, 《宋詩精華錄》, 巴蜀書社, 1992. 蘇軾, 《蘇軾詩集合注》1∼6, 上海古籍出版社, 2001.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박배영 외 옮김, 《문학이론 입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마틴 게이퍼드, 주은정 옮김, 《다시, 그림이다》, 디자인하우스, 2012. 나스메 소세키, 유유정 옮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사, 2008.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운기 옮김, 《그늘에 대하여》, 눌와, 2005.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옮김, 《신곡⋅지옥편》, 민음사, 2007. 마츠다 유키마사, 송태욱 옮김, 《눈의 황홀》, 바다출판사, 2015. 무라사카시키부, 이미숙 주해, 《겐지모노가타리 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박영욱,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 향연, 2008. 제이 데이비드 볼터⋅리처드 그루신, 이재현 옮김, 《재매개》,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페터 뷔르거, 최성만 옮김, 《아방가르드의 이론》, 지만지, 2009. 신운화,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적 다원론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오태석, 〈현대자연과학과 융복합적 중국학 연구〉, 《중국학보》74집, 2015. , 〈0과 1의 해석학: 수학, 디지털 및 양자정보, 그리고 주역과 노장〉, 《중국문학》97 집, 2018. 오현수, 〈나쓰메 소세키와 《춘추좌전》〉, 《일본언어문화》 2집, 2003. 요시카와 고지로, 조영렬 옮김, 《杜甫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뿌리와이파리, 2009. 요시카와 고지로, 조영렬 역, 《독서의 학》, 글항아리, 2014. 劉劍華, 김대원 옮김, 《역대화론유편⋅산수1》, 소명출판, 2010. 유현주, 〈현대 매체이론에서 문자의 개념과 역할〉, 《인문학연구》 97집, 2013. 이경진, 〈키틀러의 반해석학적 문학사〉, 《독어독문학》제149집, 2019. 이영주, 《두시의 장법과 격률》, 명문당, 2019. 이영주⋅강성위⋅홍상훈, 《杜律分韻 완역 杜甫律詩》, 명문당, 2006. 볼프강 이저, 이유선 옮김, 《독서 행위》, 신원문화사, 1993. 이황진, 〈최치원의 귀국 후 한시 작품 연구〉, 《한국민족문화》51, 2014. 정태현 역주, 《譯註 春秋左氏傳》1∼8, 전통문화연구회, 2013. 조인희, 〈조선후기의 두보 시의도〉, 《미술사학》28집, 2014. 중국 고전⋅문학의 읽기론 181 천현순, 《매체, 지각을 흔들다》, 그린비, 2012.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옮김, 《기록시스템 1800⋅1900》, 문학동네, 2015. 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축음기, 영화, 타자기》, 문학과지성사, 2019. 프로인드, 신명아 옮김, 《독자로 돌아가기》, 인간사랑, 2005. 殷春梅, 〈現存有關杜甫的古代書畵作品目錄〉, 《杜甫硏究學刊》제2기, 2006. 夏目漱石, 《文學論》(《漱石全集》9권), 岩波書店, 1977. Georges Poulet, 「Phenoenology of reading」, New Literary History, 1, 1969. 1

【 中文摘要 】

中國 古典⋅文學的 ‘閱讀論’ 在 ‘融合’與 ‘Text(文本)’的岐路 On the Reading of Chinese Literary Text

柳浚弼 Ryu, Junpil

關於現有的 ‘融合 vs Text(文本)’的課題, 本論文的立場是選擇以Text為出發點, 以融合存在於 Text的內部來進行研究的。從非媒介和重層媒介的二重原理的視角, 提出言語-媒體的複合性, 通過 言語-媒體的複合性說明了認識到言語-媒體很難包括感知的全面性的局限性, 所以一直在探索文學 文本多樣性的方略。 文學文本在原本融合傾向於內在化的立場上看, ‘融合 vs 文本’或許沒有逾越同語反覆。這是作 為言語-媒體的文學文本所賦與得本領。只是文學文本的融合的可能性要通過 ‘閱讀’來實現。不是 以選擇文本為出發點的融合作為方法而是以閱讀為方法的意思。閱讀或是好的閱讀, 是指不忽視文 字或言語媒體根本上的局限性, 另一方面要有可以確認文學文本潛在的多樣性的可能性的能力。 隨著媒體的發達, 如果各種感知的分離⋅儲存⋅組合⋅流通可能的話, 那麼要有可以確定存在於 文學的文字文本可以轉換為其他媒體的可能性。因此閱讀不得不含蓄那種把知覺的層位活性化的過 程和能力。那些使文化地位下降的因素才是反向的提供給閱讀能力增進的機會。可能因為是這樣, 現在或許可能才是文學文本最可以好好閱讀的最佳時刻。

關鍵詞: 融合, 文本(text), 閱讀, 感知, 媒介化, 觀看

Keyword : convergence, literary text, reading, perception, mediation, seeing

투 고 일 : 2019. 07. 09. 심 사 일 : 2019. 07. 22.∼08. 07. 게재확정일 : 2019. 08. 12.

 

KCI_FI002496896.pdf
1.6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