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해방 직후 진보적 지식인 소설의 두 가지 양상-「해방전후」와 「도정」을 중심으로/권성우.숙명여대

목 차

Ⅰ.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문제성과그 소설적 형상화

Ⅱ. 자기 합리화와 자기반성,자부심과 양심 사이

Ⅲ. 진보적 이념(사회주의)을 둘러싼 고뇌와 환멸

Ⅳ. 진보적 이념에 대한 긍정과 전망의 확보

Ⅴ. 평가의 운명과 문학적 파장

Ⅵ. 결론

【국문초록】

이 논문은 해방직후 진보적 문인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3호에 발표되었던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을 구체적으로 비교하기 위한 의도로 작성되었다. 이 두 작품은 진보적 지식인의 내면과 고뇌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점차 진보적 이념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획득해가는 주인공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공통점이 존재한다. 동시에 이 두 편의 소설이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이 주관하는 ‘해방문학상’의 수상후보로 거명되었다가, 결국 「해방전후」가 수상작으로 선정된 사실은 이 작품들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상징하고 있다.

일제 말의 행적에 대한 자기반성을 각기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이 두 편의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전후」가 대체로 자신의 일제에 대한 협력과 소극적 저항을 자기 합리화하고 있음에 반해 「도정」은 시종일관 철저하고 발본적인 자기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두 작품 모두 해방 직후에 분출된 진보적 이념과 조직에 대해 진지한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소중한 공통점에 해당된다.

두 작품 모두 진보적 이념에 대한 선입견과 환멸을 극복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적 조직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담보하고 있거니와, 사상적 갱신과 전환의 자연스러움, 진보적 이념에 대한 고뇌의 진정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해방전후」보다는 「도정」이 한층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전후」가 결국 ‘해방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현저히 정치에 규정받

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 직후 문학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주제어 : 진보, 자기성찰, 양심, 고뇌, 환멸, 평가

Ⅰ.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문제성과 그 소설적 형상화

이 글은 194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8.15해방을 거쳐 1940년대 후반에이르는 5~6년간의 시기를 온몸으로 고민한 진보적 지식인을 다룬 두 편의소설에 대한 탐구와 비교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체로 1942~3년에서 1947~8년에 이르는 이 시기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시기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일제말의 친일협력과 저항, 급작스러운 해방, 좌우익의 분열과 분단 등의 한국현대사를 근원적으로 규정한 문제적인 사건들이 바로 이즈음에 대거 발생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해석학적 아젠다이다. 일제에 대한 협력과 저항, 해방의 정치적 성격, 분단의 원인 등을 둘러싼 학문적 논점은 여전히 우리 지식인사회와 학계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자 그 불씨가 좀처럼 꺼지지 않는 첨예하고 민감한 논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94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말에 이르는, 철저한 억압과 검열/감동적인 해방과 주체적인 가능성이 교차했던 이 문제적인 시기에 작가들은 어떠한 고민을 하고 당대 현실에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했는가? 이른바 해방공간이라는 긴박한 역사철학적 정국에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어떠한소설미학과 내면풍경을 보여주었는가?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밀도 깊은 문학적 형상화를 보여준 한 편의 중편소설과 한 편의 단편소설에 대해서 집중 분석하고자 한다.

이태준(李泰俊, 1904~?)의 「해방전후(解放前後)」와 지하련(池河連, 1912~1960)의 「도정(道程)」이 바로 그 소설들이다.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문장가인 이태준은 일제말의 고민과모색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등의 진보적인 문학단체에적극적으로 참여하거니와, 문학 창간호(1946.7.15.)에 발표된 「해방전후」는 이태준의 일제 말과 해방직후 체험을 수기 형식으로 형상화한 문제작이다.

지하련은 식민지 말기의 촉망받던 여성소설가이자 비평가 임화(林和,1908~1953)의 아내였다. 그녀의 인생은 임화의 비극적인 인생행로와 포개지면서 비극으로 마감되었지만, 「해방전후」와 함께 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대표작 「도정」은 해방직후에 발표된 소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수작이다.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면밀한 비교를 통해 그 차이와 공통점, 현실인식, 두 작품을 둘러싼 선택과 배제의 정치학 등에 대해 탐구할 가치가 있는 작품에 해당된다.

우선 이 두 작품이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이 간행하던 기관지 문학 창간호에 동시에 수록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태준과 지하련은 각기 한 편의 소설작품을 통해 당시 진보적 민족문학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작품 내적인 측면에서 보면, 두 소설의 주인공 ‘현’과 ‘석재’가 여러 가지주저와 회의, 고민과 환멸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자기 합리화 및 자기 성찰을 통해 진보적인 방향성에 도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두 작품이 일제말의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자기반성 내지 자기모멸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될 대목이다.

같은 문학잡지 창간호에 나란히 수록된 「해방전후」와 「도정」이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이 주관하는

제 1회 해방기념조선문학상1)의 소설분야 최종수상작 후보로 나란히 선정되었다가 결국 「해방전후」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점도 이 두 작품의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표상하고 있다.

1) 문학 3호 3쪽에 있는 목차에는 해방문학상(解放文學賞)으로 표기되어 있거니와,

앞으로 이 상을 ‘해방문학상’으로 명기하기로 한다.

아울러 한 작품은 남성 작가에 의해 자전적 수기에 가까운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 다른 한 작품은 여성 작가에 의해 남성 주인공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는 점은 두 작품을 둘러싼 흥미로운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해방전후」와 「도정」의 유의미한 공통점과 차이를감안해 볼 때, 이 두 소설에 대해 비교 검토하는 작업은 각별히 의미 있는작업이 되리라고 판단된다.2)

2) 두 편의 소설을 비교 검토한 논문은 아직 없다. 「해방전후」와 「도정」에 대한 최근의주목할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을 들 수 있다. 구재진, 「‘해방전후’의 기억과 망각-탈식민적 상황에서의 서사전략」, 한중인문학연구 17호, 2006, 오태영, 「해방기 기억의 정치학-해방기 기억서사 연구」, 한국문학연구 39집,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2010, 최용석, 「이태준의 <해방전후>에 나타난 글쓰기 전략 고찰」, 현대소설연구 24권, 2004, 박지영, 「혁명가를 바라보는 여성작가의 시선」, 반교어문연구 30집, 2011,손유경, 「해방기 진보의 개념과 감각-지하련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49집,2013.

이 글은 「해방전후」와 「도정」의 주인공의 현실인식과 세계관을 중심으로

첫째, 주인공이 보여준 식민지 말기의 대응방식과 태도,

둘째 해방 직후에 분출한 진보적 이념에 대한 고뇌와 환멸,

셋째 자기 갱신을 통한 새로운 전망에 대한 모색,

넷째 ‘해방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선택과 배제의 정치학 등의 네 가지 주제에 대해서 탐구하게 될 것이다.

Ⅱ. 자기 합리화와 자기반성, 자부심과 양심 사이

「해방전후」와 「도정」은 시대적 배경의 측면에서 보면, 해방 직전의 시점으로 시작하여 중간에 해방이 되는 장면에 이어 해방 직후의 사상적 고민을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이 두 편의 작품은 ‘해방’이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정치적․역사적 지평이 열린 상황에서 과거에 수행되었던 자신의 행동과 입장에 대한 자기비판을 감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점은 통상적인 의미의 진보적 지식인과 구별되는 해방 직후 진보적 지식인 소설의 특성으로 세심

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해방직후」는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1943년 무렵부터 1945년 해방 직후까지의 편력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작품 제목에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점으로 판단하건대, 이 소설의 주인공 ‘현’의 모습은 실제 이태준의 투영에 가깝다.

주인공 현이 파출소 순사로부터 ‘시달서’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는 이태준의 일제 말 행적에 대한 자기 성찰과 모종의 자부심이 복합적으로 드러나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현은 그 자신에 과거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현은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도 아니었다. 시골 청년들이 어떤 사건으로 잡히어서 가택수색을 당할 때, 그의 저서가 한두 가지 나온다든지,편지 왕래한 것이 한두 장 불거진다든지, 서울 가서 누구를 만나보았느냐는 심문에 현의 이름이 끌려든다든지 해서, 청년들에게 제법 무슨 사상 지도나 하고 있지 않나 하는 혐의로 가끔 오너라가너라 하기 시작한 것이 인젠 저들의 수첩에 준요시찰인(準要視察人) 정도로는 오른 모양인데 구금을 할 정도라 당장 데려갈 것이지 호출장이니 시달서니가 아닐 것은 짐작하면서도 번번이 불안스러웠고 더욱 이번에는 은근히 마음 쓰이는 것이 없지도 않았다.3)

3) 이태준, 「해방전후」, 20세기 한국소설, 창비, 2005, 102~103쪽. (「해방전후」와 「도정」은 해방 후에 창립된 진보적인 문학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인 문학 창간호(1946.7.15)에 수록되었다. 이 글에서는 원문과의 대조를 거쳐, 여러 판본 중에서 원문에 충실한 창비 판본을 활용하여 인용하기로 한다. 창비 판본에 의하면 이 두 소설이 수록된 문학 창간호가 1946년 8월에 발간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다. 문학 창간호 판권란을 보면 1946년 7월 10일 인쇄, 1946년 7월 15일 발행으로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다. 조선문학가동맹, 문학 1호(창간호), 1946.7.15., 197면.

위의 예문을 통해 전달받을 수 있는 정보는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주인공 현은 확고한 입장이나 신념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 둘째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모종의 감시와 시찰을 받았던 문제적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해방 전후」의 식민지 말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현’의내면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일제에 저항하는 강력한 투사가 되지 못한 것에대한 부끄러움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작가에 비해서는 일제의 강요에 그 나름대로 저항했다는 자부심, 이 두 가지 감정이 묘하게 착종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다음 두 대목을 보자.

이 한 걸음 한 걸음 절박해오는 민족의 최후에 있어 좀더 보람 있는 저지름을 하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으나 그 자신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버린 성격의 껍데기는 여간 힘으로는 저 자신이 깨트리고 솟아날 수가 없었다.4)

소위 시국물(時局物)이나 일문(日文)에의 전향이라면 차라리 붓을 꺽어버리려는 현으로는 이미 생계에 꿀리는 지 오래며 앞으로 쳐다볼 것은 집밖에없는데 집을 건드릴 바에는 곶감 꼬치로 없애기보다 시골로 가 다만 몇 마지기라도 땅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상책이긴 하다.5)

먼저 앞의 예문은 개인적으로는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의 저항을 시도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용기도 없었다는 의미이며 두 번째 예문은 일제의 국책문학에 편승하는 비굴한 글쓰기를 할 바에야 아예 붓을 꺽고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첫 번째 예문에는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이, 두 번째 예문에는 문사의 자존심이 역력히 드러나

있거니와, 이와 같은 주인공의 착종된 심리는

“문인 시국강연회 때 혼자 조선말로 했고 그나마 마지못해 춘향전 한 구절만 읽은 것이 군에서 말썽이 되니 이것으로라도 얼른 한 가지 성의를 보여야 좋으리라는

대동아전기의 번역을 현은 더 망설이지 못하고 맡은 것이다.”6)

4)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03면.

5)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04면.

6)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06면.

라는 고백에서도 유사한형태로 개진된다. 시국 강연회 때 일본어로 말한 다른 문인들, 말하자면 당시 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문인들과는 달리 자신은 그 당시 혼자만 조선말로 했다는 모종의 자부심이 앞부분에 강조되어 있다.7)

7) 이러한 사실은 해방 직후 1946년 2월 8~9일 이틀간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상허가 「국어재건과 문학가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사실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다. 이태준은 이 연설에서 “문학이 없이 언어는 있되 언어 없이문학은 있을 수 없다. 조선문학이 없이 조선어는 있을 수 있되 조선어 없이 조선문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제국은 조선문화면에 있어 소극적이긴 하나 가장 조선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문화행동이었던 조선문학을 금하기 전에 앞질러 조선어를 금한 것이요 일석이조 정책으로 조선작가로 하여금 일본어로 쓰도록 유도한 것이

다. 이 음모를 의식했든 의식 못했든 간에 한두 작가씩 고독해 가는 조선어를 버리고일본어에 붓끝을 모으던 경향은 우리 조선작가로서 모어에 대한 잔인성과 예술가적자존심의 결핍을 폭로했던 것이다. 8․15 이전 일본과 조선의 경우에 있어 조선작가로 조선어를 버림은 조선문단을 버림이었고 조선작가로 조선문학을 버림은 그냥 붓을 꺾는 침묵이 아니라 일본어에로 전향함은 조선문화의 부정이요 따라 조선민족의 부정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거니와, 이는 일제말의 시국강연에서 이태준이 유독 조선어연설을 고집한 사실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이 해방직후에 표출된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될 점은 1944년 중반 무렵에는 이태준 역시 일본어로 기행문과 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이태준, 「국어재건과 문학가의 사명」, 건설기의 조선문학, 백양당,

1946, 171~172면.

“현은 얼만 앙탈해보았으나 나타난 이상 끝까지 뻗대지 못하고 이튿날 대회 회장으로 따라나왔다.”고 시국 강연회에 어쩔 수없이 참석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대목역시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자신은 적극적으로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앙탈(저항)을 거쳐

소극적으로 참석했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이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현의 이 자부심이 대동아전기의 번역이라는 시국협력을 슬그머니 정당화해주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태준은 대동아전기를 번역하여 1943년 인문사에서 이 책이 이무영의 번역과 더불어 간행된 바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현은 대동아전기를 번역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비감 어리게 토로하고 있다.

‘철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굴욕만으로 살아온 인생 사십, 사랑의 열락도 청춘의 영광도 예술의 명예도 우리에겐 없었다. 일본의 패전기라면 몰라 일본에 유리한 전기(戰記)를 내 손으로 주무르는 건 무엇 때문가?’ 현은 정말 살고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 살아 견디어내고 싶었다.8)

“정말 살고 싶었”기에 대동아전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현의 협력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해방전후」에서 묘사된 현의 소극적인 협력은 이태준의 전반적인 일제 협력에 비추어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 현과 비교하여 실제 이태준은 일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왔다는 점이다.9) 가령 이태준은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의 일원으로 1944년 목포를 방문하여 「목포 조선 현지기행」(1944.6)10)이라는 기행문 형식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나는

이번 문인보국회의 일원으로서 총력연맹(總力聯盟)의 지시를 받아 이런나무들이 환생하는 목포조선철공회사의 조선현지를 구경하게 된 것이다.

일행은 다만 운보 김기창 화백과 동반일 뿐”11)이라는 구절에서 이 여행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글은 명백히 일제에 대한 협력의 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다.

8)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07면.

9) 이태준과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정종현, 「제국/민족 담론의 경계와 식민지적 주체」,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2004.8, 99~100면. 하정일, 「친일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이태준을 중심으로」, 이태준 문학의 재인식,소명출판, 2004.

10) 이 기행문은 소설화되어 나중에 「第一號船の揷話」(國民總力, 1944.9.1)라는 일문소설로 발표되었다.

11) 이태준, 「목포 조선 현지기행」, 무서록, 깊은샘, 1994, 295면.

이태준은 경성역에서 기차로 목포에 도착하여 선박 수리공장과 조선장(造船場)을 둘러본다. 군함을 만드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던 이태준은 “내는 파도와 암초와 싸워야 하는 바다의 투우, 더구나 대동아해에 나가선 적탄과도 싸워내야 할 전선(戰船)이기도한 것이다.

체력으로 억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또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물리학적인 민감이 필요한 과학 형태에 우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종이 여일하게 한 사람의 정신과 기술이 최대한도로 집중되지 않고는 절대로 탄생할 수 없는 일종 생물이었다”12)고 전함에 대한 애정과 감탄을 그대로 표출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이러한 발언을 하는 이태준의 입지는 그대로 일제 군국주의의 시선과 연동되어 있다. 실제로 이태준은 ‘조선문인협회’(문인보국회)와 ‘황군위문작가단’ 같은 친일 단체의 활동에 협력해 1942년 일제가 주는 ‘조선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해방전후」는 일제말의 이태준의 행적과 연관하여 과거의 주체를 자기 합리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존재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1945년 8월 15일이라는 시간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역사철학적 공간을 창출하였거니와, 이런 상황 속에서 「해방전후」에서 묘사된 주체의 모습은, 일면 자기 성찰적인 대목이 존재한다는 점을감안해도, 대체로 저항의 의지는 확대시키고 협력의 장면은 축소시킨 모습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사건과 기억을 은폐하고 망

각하고자 하는 이태준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13)

12) 위의 글, 299면.

13) 이태준이 일제말의 친일 행적을 축소하는 행위에 대한 지적은 구재진의 「‘해방전후’의 기억과 망각- 탈식민적 상황에서의 서사전략」(한중인문학연구 17호, 2006)과 오태영의 「해방기 기억의 정치학-해방기 기억서사 연구」(한국문학연구 39집, 동국대한국문학연구소, 2010)에서도 이루어진 바 있다.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적에서 더 나아가, 이태준의 행동이 해방이후에 이태준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포지션과 연관되며, 이러한 정치적 입지에서 연유한 모종의 자부심과 자기성찰 사이의 줄타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기억의 주관성과 망각의 정치학은, 작가 이태준이 새로운 역사적 정황에 자신을 급속

하게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변별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연유한다. 말하자면 현이 지니고 있는 일제 말 협력의 콤플렉스는 해방 이후에 그가 획득한 정치적 진보성에 의해 은폐되면서,자연스럽게 현재 현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련의 「도정」의 주인공 ‘석재’가 자신의 일제 말 행적을 되새기는 태도는 「해방전후」의 현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르다. 석재는 “이 가방으로 대학을 나왔고, 바로 이 속에 비밀한 출판물을 넣고는 서울을 문턱같이다닌 적이 있지 않았더냐고”14)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일제의 입장에서는 불온한 사상을 지닌 진보적인 인텔리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독백하고 있다.

돌아다보면, 지난 육 년 동안을 아무리 ‘보석’으로 나왔다 치고라도, 어쩌면

산 사람으로 그렇게도 죽은 듯 잠잠할 수가 있었던가 싶고, 또 이리 되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떤 알 수 없는 염증을 느낀다기보다도 참 용케도 흉물을 피우

고 긴 동안을 살아왔다 싶어, 먼저 고소가 날 지경이다.15)

14) 지하련, 「도정」, 20세기 한국소설 13권, 창비, 2005, 141면.

15)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41면.

이 장면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 해방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는 점을감안하면, 석재의 이와 같은 언급은 해방 직전의 시점에서 피력된 것임을인식할 수 있다. 위의 예문에는 감옥에서 나온 후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조용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철저한 냉소가 노골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석재의 진단에 의하면 그 자신은 당시 시국에 대한 어떤 저항도 없이 살아온 ‘흉물’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석재는 또한 친구 ‘기철’과의 술자리를 회상하게 된다.두 사람의 대화 중간에 기철은 석재의 푸념을 듣고 아래와 같이 말하거니와,이 대목은 석재를 바라보는 기철의 관점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글쎄 들어보게나. 자네가 어느 놈의 벼슬을 해먹어 배반자란 말인가? 나처럼

투기장에 놀았단 말인가? 노변에서 술을 팔었으니 파렴치한이란 말인가? 아무

튼 어느 모로 보나 자네면은 과히 추하게 살아온 편은 아니니 안심허게나”16)

이후에 기철은 석재의 자기반성과 자기냉소를 ‘결벽증’과 ‘신경쇠약’의 소산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소설 전반부를 통해 석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감옥에서 나온 후 너무 조용히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지극히 성찰적이며 자학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아래 예문은 이러한

태도의 한 정점에 해당한다.

“…… 난 너무 오랜 동안을 나만을 위해 살어왔어. 숨어다니고 감옥엘 가고

그것 다 꼭 바로 말하면 날 위해서였거든.…… 이십대엔 스스로 절 어떤 비범한

특수인간으로 설정하고 싶어서였고, 삼십대에 와서는 모든 신망을 한 몸에 모

은 가장 양심적인 인간으로 자처하고 싶어서였고…… 그러다가 그만 이젠 제

구멍에 빠져 헤어나질 못허는 시늉이거든.”17)

위의 예문에서 주인공 석재는 식민지시대에 이루어진 자신의 진보적 운동

과 저항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단행하고 있다. 「해방전후」의 ‘현’과는

달리, 그에게는 과거 자신의 행태에 대한 그 어떤 자부심과 일말의 떳떳함도

없으며, 과거에 감옥에 갔다 왔으며 투쟁했다는 사실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도취감과 선민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석재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

는 태도는 자신의 저항과 투쟁이 단지 공명심과 선민의식에 불과했다는 사

실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다. 자신의 감옥행과 저항이 결국 인정에 대한 욕

망18)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토로하는 이 대목은 해방이후의 자기비판의 문

제에 결부되면서 대단히 중요한 지성사적 맥락을 간취하고 있다.

16)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42면.

17)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43면.

18) 석재의 이러한 고백은 일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진보적 행위조차도 인정에 대한 욕망

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논리를 빌자면 ‘인정투쟁’이야말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을 일깨운다. 즉 “인간은 타인의인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의 인정을 받고 타인을 인정하는 지속적인 상호인정을 통하여 긍정적 자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 외역, 사월의 책, 2011.

「도정」의주인공이 이처럼 자신의 지난 날 투쟁의 한계에 대해 겸허하게 비판할 수있었던 것은 ‘해방’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주체의 근본적 갱신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도정」의 주인공 석재의 양심적 면모는 「해방전후」의‘현’의 자기 합리화와 현저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런 측면에서 「도정」은 해방직후 진보적 지식인의 양심적인 자기 성찰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작가의 캐릭터와 기질, 자기 성찰을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와 더불어 이 작품 발표를 둘러싸고 두 작가가 놓여 있었던 정황과 위상의 차이도 그 차이를 낳은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19)

19)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과거의 기억은 현재적 시점에 의해 재구성된다. 「해방전후」가 발표된 해방직후의 시점에서 이태준은 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전 문화부장을 맡은 상태였으며 현대일보 주간에 취임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의 편집인과 발행인이 이태준이었다. 이런 과도한 정치적 맥락이 그에게 개입하고 있었을 때, 해방 이전에 대한 기억은, 지금-현재의 정치적 입장에 의해 무의식적 차원에서 재배치되어 선별적으로 기억되고 소환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해방전후」에서 나타난 자기 합리화의 본질이다. 이에 비해 별다른 정치적 하중이 없었던 여성작가 지하련은,그의 남편이 임화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태준에 비해 한층 자유로운 존재였다.

Ⅲ. 진보적 이념(사회주의)을 둘러싼 고뇌와 환멸

「해방전후」와 「도정」은 해방 직후에 전개된 새로운 ‘정치의 시대’에 따라 다시 귀환한 진보적 이념(마르크스주의, 공산당, 진보적 문학조직)을 둘러싼 고뇌와 참여, 혹은 환멸과 불신의 풍속도를 그 어떤 소설보다도 생생하고 밀도 깊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사회사적․문학사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소설이다.우선 「해방전후」의 경우, 주인공 현이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서 목도한현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현은 서울 정황에 불쾌하였다. 총독부와 일본 군대가 여전히 조선민족을 명명하고 앉았는 것과 해외에서 임시정부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혹은 오늘저녁에 들어온다 하는 이때 그새를 못 참아 건국에 독단적인 계획들을 발전시키며 있는 것과, 문화면에 있어서도, 현 자신은 그저 꿈인가 생시인가도 구별되지 않는 이 현혹한 찰나에, 또 문화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지방으로부터 모이기전에, 무슨 이권이나처럼 재빨리 간판부터 내걸고 서두르는 것들이 도시불순하고 경망해보였던 것이다. (중략) 현이 더욱 걱정되는 것은, 벌써부터 기치를 올리고 부서를 짜고 덤비는 축들이, 전날 좌익 작가들의 대부분임을 알게될 때, 문단 그 사회보다도 나라 전체에 좌익이 발호할 수 있는 때요, 좌익이제멋대로 발호하는 날은 민족상쟁 자멸의 파탄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위험성이었다.20)

20) 이태준, 「해방 전후」, 앞의 책, 128면.

과거에 “계급보다 민족의 비애에 더 솔직했던” 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좌익 작가들에 대한 불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으며 해방 정국에 대한 신속한 대응보다는 신중하고 정확한 현실 파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결국 현은 직접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21)에 찾아가 좌익 작가와 평론가들이 기초한 선언문을 직접 검토하게 되거니와, 그 과정에서 좌익 문인들에대한 선입견이 바뀌게 된다.

21) 실제로 이태준은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창립된 조선문학건설본부는 음악, 영화, 미술 분야의 조직과 연합하여 8월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발족하게 되는 것이다. 1945년 12월 13일 조선공산당의 통합 요구에 따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문학분과는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되었다가 1946년 2월 8일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은 “‘이들에게 이만큼 조선 사정에 진실한정신적 준비가 있었던가?’ 그들의 태도와 주장에 알고 보니 한 군데도 이의(異議)를 품을 데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그 선언문에 기꺼이 서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좌익 문인들에 대한 현의 편견이 실제 선언문의 내용에 의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부분은 새로운 정치적 입장으로 정향된 이태준의 이념적 회로에 의해 소설적 육체가

다소 급작스러운 단절을 노정하는 대목에 해당된다. 그 동안 현이 진보적인 문인이나 이념에 대해서 지녀왔던 불안이 충분한 설명과 인과적 스토리 없이 잡자기 해소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하나의 계기가 현이 지니고 있던 모든 불안을 완벽하게 해소시켜 주지는 못한다. 현은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로!”같은 프로퍼갠더 문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 우리의 이 시대, 이 처지에서 ‘인민에게’란 말이 그다지 새롭거나 위험스럽게 들릴 것도 아무 것도 아닌 줄 알면서도, 현은 역시 조심스러웠고, 또 현을 진실로 아끼는 친구나 선배의 대부분이, 현이 이들의 진영 속에 섞인 것을 은근히 염려하는 것이었다.”고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는다.

그 후 현은 종로에서 좌익단체가 주최하는 데모 대열을 조우한다. 붉은 적기(소련의 국기)를 앞세우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는 대열이 지나가자 4층 건물에서 소련 국기를 행렬위에 뿌리는 것을 보고 현은 “침착합시다”고 말하지만, 상대방은 “침작할 필요가 어디 있소?”라고 응수한다. 신중한 현과 열정적인 상대방의 이 짧은 대화는 당시 현이 놓여있던 심적 상태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현의 불안과 불편한 심리는 그 다음날 ‘문협’(조선문화건설협의회) 회관 건물 옥상에서부터 드리워져 있는 커다란 광목천에 “조선인민공화국 절대지지”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는 것을 목도하고 절정에 달한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문학건설본부’ 서기장22)에게 현은 “이건 독재요. 이러고 문화전선의 통일 운운은 거짓말이요. 나는 그 사람들 말 더 믿구 싶지않소. 인전 물러가니 그리 아시오.”라고 말하거니와, 이 대목은 적어도 이당시까지는 주인공의 현실 인식이 추상적이며 막연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점, 그가 ‘인민공화국’으로 상징되는 정치진영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이 소설의 핵심적인 위기이자 주인공 현이 마주친 근본적인 실존의 위기에 해당된다.

「해방전후」의 주인공 현이 해방직후에 조우한 진보적 이념을 대하는 감정이 불안이나 주저라면 「도정」의 주인공 석재에게 있어서 공산당이나 진보적 사회주의자를 대하는 마음은 어떤 끈끈한 ‘숙명’과 ‘환멸’에 가깝다.

그는 기차로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공산당’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거니와, 그 과정에서 공산당에 대한 석재의 회상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눈을 감았다. 순간, 머릿속에 도깨비처럼 불끈 솟는 ‘괴물’이 있다. ‘공산당’이었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다음 순간 괴물은, 하늘에, 땅에, 강물에, 그대로맴을 도는가하니, 원간 찰거머리처럼 뇌리에 엉겨붙어 도시 떨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긴 동안을 그는 이 괴물로 하여 괴로웠고, 노여웠는지도 모른다. (중략) 그러나 귀 막고 눈 감고 그대로 절망하면 그뿐이라도 결심할 때에도,결코 이 괴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괴물은 칠같이 어두운 밤에서도 환히밝은 단 하나의 ‘옳은 것’을 지니고 있다.23)

22) 당시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서기장은 비평가 이원조였다.

23)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54면.

이 구절이 전하는 정보는 복합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우선 석재에게공산당은 괴물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런데 그 괴물은 축자적 의미에서의 괴물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삶 내내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숙명적인 존재로 해석된다. 그 괴물로 인해 그는 오랜 시간동안 괴롭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했던 것이다.

요컨대 석재에게 공산당은 결코 탈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주의 조직에 관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석재에게 공산당은 괴물

로 비유되지만, 동시에 “어두운 밤에서도 환히 밝은 단 하나의 ‘옳은 것’을지니고 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절대적이며 긍정적인 표상으로도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괴물’로 상징되는 공산당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끝내 공산당을 떠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나온 동지 ‘민택’을 만나면서 석재는‘공산당’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조금 후 두 사람은 신길정서 서울로 나가는 전차에 올랐다. ‘공산당’으로 가

는 길이었다. 철교를 지나고 경성역을 돌아 차츰 목적한 지점이 가까워올수록

그는 모르는 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하면 일찍이 그 청춘과 더불어 ‘당’

의 이름을 배울 때, 그것은 실로 엄숙한 두려운 것이었다.24)

24)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60면.

한때 공산당하면 괴물을 떠올렸던 석재는 이제 공산당 건물이 가까워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는데, 이 부분이 소설적 전환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공산당 건물의 층계를 오르며 주변에서 마주친 미더운 동지들을 목격한 석재의 심경은 소설 속에서

“그는 온몸이 화끈하며 가슴이 뻐근하였다. 얼마나 윽박질리고, 밟히던 지난날이었던가? ‘당’이라니 어느 한 장사가 있어입밖엔들 냄직한 말이었던가?”, “이렇게 백주 장안 네거리에서 ‘당’을 들고외우 뛰고 모로 뛰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 이런 세상도 있는가.”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 대목은 공산당 활동이 공개화 되면서 자유로운 정치적 주장이 발화되던 해방 직후의 정치적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석재는 새롭게 주어진 이념적 자유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동시에 그 새로운 자유는 엄숙한 역사적 희생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이념적 환경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930년대 중반이후에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면서 공산당은 비합법적 조직을 통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이후 희망과 저항의 거점을 잃어버린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말부터 대거 전향을 시도하기도 했다.25)

25) 이에 대해서는 홍종욱의 「중일전쟁기(1937~1941)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논문, 2000)를 참조할 것.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적어도 미군정이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시하고 삼엄한 검열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적극적으로 분출하였던 것이다.

「도정」의 서사는 공산당에 대한 석재의 복잡한 심경을 한 축으로 하면서,또 다른 한축에 공산당 간부에 오른 기회주의자 기철에 대한 석재의 태도를 절묘하게 배치하고 있다.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이 다시 재건되었다는 소식에 석재는 놀라지만, 자신을 ‘결벽증이란 병’에 걸렸다고 매도하기도 했던 친구 ‘기철’이 공산당 최고 간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근본적인 환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석재의 시점에 포착된 기철의 행태는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문득 기철이 눈앞에 나타난다. 장대한 체구에 패기만만한 얼굴이다. 돈이제일일 땐 돈을 모으려 정열을 쏟고, 권력이 제일일 땐 권력을 잡으려 수단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다. 어느 사회에 던져두어도 이런 사람이 불행할 리는 없다.그러나 여기 한 개의 비밀이 있다. 이런 사람이 영예로워지면 질수록 흉악해지는 비밀이었다. 대체나 ‘겉’이 그렇게 충실하고야 ‘속(良心)’이 있을 리가 없고,속이 없는 사람이란 외곽이 화려하면 할수록 내부가 부패하는 법이었다.26)

26)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55면

「도정」의 앞부분, 즉 일제 말의 석재의 행적을 묘사하던 대목에 등장했던 기철은 근본적으로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기회주의자로 묘사된다. 석재는기철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결국 일종의 질투심에서 연유했을 수도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석재는 “얼굴이 후끈 달아옴을 깨달았다. 조금전 기철이 최고간부라는 데 앙앙하던 마음속엔 ‘그럼 내라도 될 수 있다’는 엄폐된 자기 감정이 숨어 있지 않았던가?”고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조직의공식적인 대의와 석재의 인정에 대한 욕망이 길항하면서 심각한 갈등과 번

민을 유발하는 대목이다. 진보적인 지식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인정에 대한욕망’과 환멸의 정서가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는 점, 아울러 주인공 석재가 그러한 자신의 욕망과 정서를 꿰뚫어보는 자기 성찰적 존재라는 점에「도정」의 커다란 의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석재는 허준의 「잔등」과 「속 습작실에서」의 주인공과 더불어 해방 직후 발표된 수많은 소설의 캐릭터 중에서 보기 드문 균형 감각과 성찰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유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을 거친 연후에도 기철을 바라보는 석재의 태도에는커다란 변함이 없다.

내 욕망의 심연에 대한 성찰이 기회주의자에 대한 용서로 비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석재는 “어제까지 고루 거각에서 별별 짓을다 하던 사람도 오늘 이 말 한마디만 쓰고 손을 잡고 보면 그만 피차간 ‘일등 공산주의자’가 되고 마는 판이니”라면서 착잡한 마음을 독백의 형태로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석재의 내면은 공산당을 너무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기철’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괴물 같기도 했던 공산당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지니면서도,동시에 공산당 간부이자 동지라고 볼 수 있는 기철을 불신하는 석재의 복잡한 마음은 아래에 이렇게 개진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된 ‘당’이든 당은 당인 거다. 그는 일찍이 이 당의 이름 아래충성되기를 맹세하였던 것이고…… 또 ‘당’이 어리면 힘을 다하여 키워야 하고,

가사 당이 잘못을 범할 때라도 당과 함께 싸우다 죽을지언정 당을 버리진 못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이러하기에 이것을 꼬집어 이제 그로서 ‘당’을 비난할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었다. 잠깐 그대로 앉아 있노라니 별안간, 기철이란 ‘인간’에 대한 어떤 불신과 염증이 훅 끼쳐온다.27)

27)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63면.

한 개인에 대한 판단과 당에 대한 입장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 즉 기철에 대한 개인적 불신과 염증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을 비난하거나 불신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철에 대한 불신과 염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석재의 입장이다. 어쨌든 석재는 공산당의 최고 간부인 기철에 대한 불신과 염증에도 불구하고 당에 대한 항심(恒心)과 신뢰를 유지하고 있다. 공적인 대의와 개인적인 욕망(감정) 사이의 갈등에 대한 고민을 통과하는 과정은 곧 석재에게 조금씩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길에 나서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Ⅳ. 진보적 이념(공산주의)에 대한 긍정과 전망의 확보

「해방전후」와 「도정」의 후반부와 결말 부분은 갈등과 고민을 극복하는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전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전통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다만 그 긍정적인 전망으로 가는 통로가 단순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대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두 작품은 풍부한 소설적 육체를 지니고 있다.

조급한 사회주의적 열정에 대해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해방전후」의 현은 “조선인민공화국 절대지지”를 내건 광목천 사건에 대한 당시 문학건설본부 서기장의 진정성 있는 해명과 고뇌를 접하면서, 아울러 같은 고향의 김직원과 해후하면서 점차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는 차

차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김직원의 “현공, 그간 많이 변허셨다구요?”, “어쩌자구 우리 현공은 공산당으로 가셨소?” 등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감사헙니다. 또 변했단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변했느니, 안변했느니

하미만치 해방 전에 내가 제법 무슨 뚜렷한 태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구요, 원인

은 해방 전에 내 친구가 대부분이 소극적인 처세가들인 때문입니다. 나는 해방

후에도 의연히 처세만 하고 일하지 않는 덴 반댑니다.”28)

28)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40면.

이 대목은 일제 말이나 해방직후에 고민하고 주저하던 태도에서 탈피하여 이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과정을 통해 진보적 방향으로 스스로를 정향해나가는 현의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은 당시 불거졌던 임시정부 세력과 국내 세력과의 갈등의 구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거니와, 이 구절은 앞으로 현이 취하게 될 정치적 입장을 뚜렷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저는 그분들의 풍상을 굳이 헐하게 알려는 것도 아닙니다. 지역은 해외든

해내든,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꾸준히 싸워온 이면 모도가 다같이 우리 민족의

공경을 받어 옳을 것이고, 풍상이라 혈투라 하나, 제 생각엔 실상 악형에 피가

흐르고, 추위에 손발이 얼어빠지고 한 것은 오히려 해내에서 유치장으로 감방

으로 끌려다니며 싸워온 분들이 몇 배 더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적 고초

뿐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수하는 가지가지 유인과 협박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해내에서 열 번을 찍히어도 넘어가지 않고 싸워낸 투사라면 나는

그런 어른이 제일 용타고 생각합니다.”29)

29)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41면.

당시 국내에서 투쟁하던 박헌영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 세력들은 김구를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계열의 임시정부 세력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의 측면에서 근본적인 인식차를 드러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의 이와 같은 관점은 이제 그가 고민과 주저, 불안의 단계를 넘어서 사회주의적 입장에 대한긍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음을 표상하고 있다. 이런 현의 발언에 대해 김직원은 “현공은 그저 공산파만 두둔하시는군!”라고 받고 있거니와, 이에 대해서 현은 “이번에 공산당이 무산계급 혁명으로가 아니라 민족의 자본주

의적 민주혁명으로 이내 노선을 밝혀논 것은 무엇보다 현명했고”라고 응수하고 있다. 이전에는 ‘인민’이나 ‘소련기’, ‘적기가’,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표현에도 불안감을 표시하며 전전긍긍하던 현은 이제 당시 공산당의 행보를 사뭇 긍정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주인공이 지닌 세계관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세부적 요인에 대한 묘사는 소설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거니와, 바로 이 점이 「해방전후」의 중요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전후」의 마지막 대목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종결된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

우고 회관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

문학자대회’ 준비로 바쁘고들 있었다.30)

30) 이태준, 「해방전후」, 앞의 책, 146면.

조선문학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 일하는 친구(동지)에 대한 연대의 마음이 ‘봄바람’이라는 희망이 상징과 더불어 역력히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다.

「해방전후」는 식민지 말기에는 소극적으로 협력을 했으며 투철한 사회의식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한 문인이 해방직후의 혼돈과 방황을 거치며 진보적 신념을 신뢰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드문 지식인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사상적 변화에 대한 소설적육체와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점, 일제 말기의 행적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노정된다는 점을 그 한계로 들 수 있다.

「도정」의 후반부는 주인공 석재가 친구 기철에 대한 환멸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투쟁에 대한 의욕을 선보이는 것으로 종결된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 석재는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소시민’과 싸우자! 싸움이

끝나는 날 나는 죽고, 나는 다시 탄생할 것이다. 나는 지금 영등포로 간다.

그렇다! 나의 묘지가 이곳이라면 나의 고향도 이곳이 될 것이다…….”라고독백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공산당’으로 인한 상처와 기회주의자에 대한 환멸의 감정을 극복하고, 아울러 자신의 소부르주아 근성을 철저하게 반성하면서 새로운 투쟁에 나선 해방직후 진보적 지식인의 비장한 내면을 인상

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이런 석재의 면모는 「해방전후」의 현과 비할 때, 애초부터 그가 오랜 세월 공산주의자로 지내왔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또한 석재의 이러한 역정은 그가 철저한 자기 성찰을 전개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라

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음 예문이 이러한 석재의 양심과 자기 성찰적 면모를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 난 겁쟁이다. 그러나 본시 용기라는 말은 무서운 것 이 있기 때문에,

즉 그 무서운 것을 이기는 데로부터 생긴 말이라면, 또 달리는 가장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도 이제부터 이기면 되잖나?…… 앞으로도 무서운 것은 얼마든

지 있을 것이고, 나는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31)

31) 지하련, 「도정」, 앞의 책, 159면.

석재는 한때 공산당을 ‘괴물’로 생각할 정도로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남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기회주의자인 친구로 인한 환멸의 감정으로 인해 당에대한 확신을 유보하지만, 결국에는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투쟁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석재의 면모를 끝내 이념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한 ‘주의자’로 폄하할 수도 있지만, 소설 내적인 차원에서 볼 때 석재의 이러한 자기 갱신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해방직후, 새로운 의지로 공산당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당원이자 소부르주아 지식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기대와 설렘, 두려움과 불신이라는 양가적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이념적 자유를 자신의 한계에 대한 가열한 성찰과 기회주의에 대한 단호한 비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도정」이 지닌 소설사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직후에 발표된 진보적 지식인 소설은 지하련의 「도정」에 이르러 한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전후」와 「도정」은 공히 희망적인 메시지로 소설이 종결되고 있으며, 두 소설의 주인공 역시 여러 가지 번민과 고뇌를 거쳐 새로운 긍정적인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두 소설의 주인공은 루카치의 개념을 따르자면, ‘긍정적인 인물 Positive hero’32)에 가깝다.

32) G. 루카치,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 조정환 역, 동녘, 1986, 286면.

또한 이 두 편의 소설은 진보적인 전망의 선취라는 원칙이 한 개인의 갈등이나 고민 등의 세부적인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 작품과 대별되는 ‘유기적 작품’에 해당된다.33)

33) 페터 뷔르거, 미학이론과 문예학 방법론, 김경연 역, 문학과지성사, 1987, 144면.

이 두 작품이 제 1회 ‘해방문학상’의 최종후보작이 되었으며, 그 중 한 작품이 수상작이 되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결말 부분에서 피력되는 긍정적인 전망의 확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Ⅴ. 평가의 운명과 문학적 파장

지금까지 이 글은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해방직후 진보적 지식인 소설이 보여준 자기 성찰과 고뇌의 풍경,새로운 갱신의 도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두 작품 모두 해방직후 발표된 소설들 중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생생한 내면을 풍부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작가의 삶을 배제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치열성, 사상적 갱신과 전환의

자연스러움, 진보적 이념에 대한 고뇌의 진정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해방전후」보다는 「도정」이 월등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해방문학상 수상작은 이태준의 「해방전후」로 결정되었는데, 그 결정서는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에 관한 결정서

1946년 7월 24일 조선문학가동맹 제 7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의 심사급(及) 권리를 위임받은 본심사위원회는 1946년 8월 5일에 개최된 제 1차심사위원회에서 시․소설․희곡․평론의 四분과 위원회를 구성한 이래, 동맹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이 제공한 작품목록급(及) 추가자료에 의하여 개별적 또는 총체적으로 신중한 심의를 거듭하여 오든 중 금일최종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결 정: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은 소설 「해방전후」(동맹중앙기관지문학 제1호 소재)의 작가 이태준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한다. 1946년12월 10일- 조선문학가동맹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심사위원회

위와 같은 결정에 따라 이태준은 ‘조선미술동맹’이 제작한 ‘受賞者浮彫肖像 靑銅賞牌’와 부상으로 5만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34) 이태준의 수상은 당시 심사위원의 구성이나 문단제도적인 측면, 이태준의 위상을 고려하면 예고된 결정에 가깝다.35) 이때 해방문학상의 후보작으로 추천된 작품들은 ‘시’ 분과에는 오장환 시집 병든 서울과 이용악의 시편 「오월에의노래」이며 ‘소설’ 분과에는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 ‘희곡’분과에는 함세덕의 「기미년 3월 1일」, 박영호의 「북위 삼십팔도」, 김남천의

「삼일운동」이다. 전체 분과 심사위원들의 토론에 의해 수상작이 결정되었으며, 당시 소설분과 심사위원은 이태준, 임화, 김남천, 안회남, 김기림의 다섯 명이었다.36)

34)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에 관한 부대결정」, 문학 3호, 1947.4, 52면. 당시 문학 창간호 가격이 50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5만 원의 현재적 가치는 1,500만 원정도로 추산된다.

35) 이태준이 심사위원 중에 가장 연장자였다는 사실, 그의 작가적 위상이나 정치적 위상(현대일보 주간 경력, ‘조선문학가 동맹’ 부위원장, 문학 창간호부터 6호까지의 편집인 및 발행인이 이태준이었다는 사실), 그의 월북(‘남조선탈출’)이 남아 있는 심사위원들에게 어떤 마음의 부담감을 줄 수 있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이태준이 수상자로 결정된 것으로 해석된다.

36) 이태준은 해방문학상 심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심사위원회에 이름만 걸었을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심사평에는 “일부위원의 남조선탈출을 불가피케 한 사정 등은 한층 더 구체적 일반심사 及 최종 그러나 연장케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명기되어있다. 「1946년도 문학상심사경과급(及) 결정이유」, 문학 3호, 1947.4, 54면.

해방문학상의 심사평이라고 할 수 있는 「1946년도 문학상심사경과 급(及) 결정이유」에서 심사위원들은 「해방전후」에 대해 평하면서

“구문단의 지도적 작가의 한사람이었던 작가자신이 새로 문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에

가담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서 체험한 바 제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이 작품에는 무엇보다 현대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의의를 갖는 주제를 주관적․객관적인 여러 가지 모순 가운데서 해명한 데서 금년도 소설 가운데서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37)고 고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정」은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가. 심사위원회는 「도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8.15 직후 국내에서 발흥한 민주주의운동에 있어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새로운 조선문학이 창조하여 나갈 인간의 형상의 한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심리묘사 및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 작자의 비범한 자질과 더불어 우리들 가운데 있는 소시민성의 음영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은 주목에 값하는 것이다. 그 음영을 과장함으로써 작가자신이 期하지 않고 소시민성에 대한 일종의 편애를 하였었다. 그리하여 주제의 시대성과 표현의 조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현실성이 감쇄되고 작품전체의 사실성 및 예술적 박력이 부족하여졌다.38)

37) 「1946년도 문학상심사경과급(及) 결정이유」, 문학 3호, 1947.4, 55면.

38) 「1946년도 문학상심사경과급(及) 결정이유」, 문학 3호, 1947.4, 56면.

앞부분은 대체로 「도정」의 문학사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거니와, 대체로 「도정」의 문학적 미덕과 장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글이다. 그렇지만 뒷부분에 서술된 「도정」에 대한 비판적 지적, 특히 “작품전체의 사실성 및 예술적 박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나 “소시민성에 대한 일종의편애”라는 비판은 실상 이태준의 「해방전후」에 더 부합되는 지적에 가깝다.문학상 수상이 단지 해당 텍스트의 질적인 수준이나 문학적 가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해방전후」와 「도정」 중에서 전자가수상작이 된 것은 문단제도와 정치적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해방직후의 진보적 문학시스템 역시 연장자, 남성작가, 문단의 연공서열,작가의 정치적 위상 등을 포괄한 전통적인 인습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던것이다. 말하자면 해방직후의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진보적 문예조직에게 담보되었던 해석학적 관점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지닌 문학사적 파장과 맥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차원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이태준의 「해방전후」가 해방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문단제도적 차원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문제는 심사평에서 「도정」이 현실성과 예술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해 이태준의 「해방전후」가 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문단에서, 「도정」의 주인공 석재가 보여주었던 일제 말 행적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이 수행될 가능성을 축소시켰다는 점, 진보적인 이념과 예술성의 결합이 논의될 수 있는 문학적 여건이 현저히 사라지면서 정치 일변도의 상황이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 대목은 그 후에 전개되는시대가 양심이나 정직한 자기 성찰보다는 자기합리화와 기회주의가 창궐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기도 한다.

요컨대 이태준의 「해방전후」가 해방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던 것은 진보적인 맥락과는 다른 의미에서 대단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이 점은 현저히 정치에 규정받을 수밖에없었던 해방 직후 문학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Ⅵ. 결론

그들의 문학여정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에 발표했던 이태준과 지하련,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정치적인 조건 속에서 불안과 고뇌, 예술과 지성, 자기 합리화와 자기 성찰의 풍경을 표출하고자 했던 두 작가는 현대소설사에서 명멸한 어떤 작가보다도, 당대의 어떤 문인들 못지않게 숙명적인 정치적인 회오리에 휩쓸리게 된다.

이태준은 「해방전후」가 문학지에 발표되었던 시기(1946.7)를 전후하여 월북한 상태였고,39) 지하

련은 「도정」을 문학지에 발표한 뒤에 이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 1948년 말 창작집 도정이 발간되기 직전에 월북한다.40)

39) 이태준은 1946년 7월 말경 홍명희와 함께 월북하며, 1946년 10월에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 여행에 나선다.

40) 서정자 편, 지하련 전집, 푸른사상, 2004, 376면.

그 이후 전개된 이들의 험난한 인생여정은 그들이 「해방전후」와 「도정」에서 보여준 시대와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투철한 응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태준은 월북 직후인 1948년 북조선최고인민회의 표창장을 받기도 하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라는 지위에 오르기도 하지만 결국 1950년대 중반에 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숙청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된다. 지하련은 한국전쟁 때 만주에 피난 가 있다가 남편 임화가 북한정권에 의해 사형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뒤늦게 만주에서 접하는 비운에 처했거니와, 그 이후의 행방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그들의 인생에 실패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남긴 문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해방전후」와 「도정」이라는 해방직후에 발표된 두 편의 진보적 지식인 소설이 보여주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 이념에 대한 환멸과 경사 등의 풍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기 성찰이란 무엇인가? 진보적 이념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기비판의 진정성과 정치학의 차이는 다른 시기의 진보적 소설을 탐구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유의미한 준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에 정치가 호출될 때마다 우리는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지하련의 「도정」을 떠올리면서, 문학과

정치 사이에 놓여 있는 그 매력적이며 치명적인 심연에 대해 응시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서정자 편, 지하련 전집, 푸른사상, 2004.

이태준, 「해방전후」, 문학 창간호, 조선문학가동맹, 1946.7.

지하련, 「도정」, 문학 창간호, 조선문학가동맹, 1946.7.

조선문학가동맹, 건설기의 조선문학, 백양당, 1946.

조선문학가동맹, 문학 3호, 1947.4.

2. 논문 및 단행본

구재진, 「‘해방전후’의 기억과 망각- 탈식민적 상황에서의 서사전략」, 한중인문

학연구 17호, 2006.

김준현, 「해방 이후 문학장의 재편과 이태준」, 어문논집 64집, 2011.

박정선, 「임화와 마산」, 한국근대문학연구 26집, 2012.

박지영, 「혁명가를 바라보는 여성작가의 시선」, 반교어문연구 30집, 2011.

손유경, 「해방기 진보의 개념과 감각-지하련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연구 49

집, 2013.

오태영, 「해방기 기억의 정치학-해방기 기억서사 연구」, 한국문학연구 39집,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10.

정종현, 「제국/민족 담론의 경계와 식민지적 주체」, 상허학보 13집, 깊은샘,

2004.

최용석, 「이태준의 <해방전후>에 나타난 글쓰기 전략 고찰」, 현대소설연구 24

권, 2004.

하정일, 「친일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이태준을 중심으로」, 이태준 문학

의 재인식, 소명출판, 2004.

홍종욱, 「중일전쟁기(1937~1941)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서울대 국사

학과 석사논문, 2000.

황석영,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11) 지하련 ‘도정(道程)’ 下」, 경향신문,

2012.2.18.

게오르그 루카치,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 조정환 역, 동녘, 1986.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 외 역, 사월의 책, 2011.

페터 뷔르거, 미학이론과 문예학 방법론, 김경연 역, 문학과지성사, 1987.

<ABstract>

Two aspects of progressive intellectual novels after theliberation

Kwon, Seong-woo(Sookmyung Women’s University)

This paper is an attempt to compare two novels written immediately after

the liberation. These novels are Li, Taejun(李泰俊)’s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解放前後) and JI, Haryeon(池河連)‘s “The Distance”(道程). These

novels were listed in Literature(No.3) which had been a magazine of ’Korean

Writers Alliance’, a progressive literary organization. These two works showed

mentality and anguish of progressive intellectuals vividly.

Serious self-reflection on behaviors of colonial era was the important

similarity of these two novels. The main character of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rationalized his cooperation in colonial period. On the other hand,

the main character of “The Distance” showed intense self-examination.

These characters showed serious distress about progressive ideology in the

post-liberation. And through the process of overcoming prejudice and

disillusionment against the progressive ideology, the two works ultimately

secured positive outlook for progressive organization.

From the viewpoint of naturalness of ideological renewal and authenticity

of progressive idea, “The Distance” was considered as a better work than

“Before and After Liberation”. Nevertheless, the fact that “Before and After

Liberation” was finally presented ‘Liberation Literary Award’, represented the

fate, of the contemporary literature which was affected by political impact.

Key Words : progress, self-examination, conscience, anguish, disillusionment,

eval‎uation

2013년 9월 10일 투고 2013년10월 2일 심사완료 2013년 10월 21일 게재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