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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와 그 의미/김미선.전남대

< 목 차 >

Ⅰ. 머리말

Ⅱ.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 양상

1. 실기 속 여성 포로 형상화

2. 설화・소설 속 여성 포로 형상화

Ⅲ.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가 갖는 의미

1. 비극적 상황의 사실적 기록

2. 고난 극복 이야기로 치유와 회복

Ⅳ. 맺음말

<국문초록>

본 논문에서는 실기(實記), 설화,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자 하였다.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는 5편이 현전하며, 실기 속 여성 포로 형상화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포로가 된 여성 가족의 자결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였다.

둘째, 포로가 되어 낯선 일본 땅에서, 힘들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여성 노비들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설화 <홍도>와 소설 <최척전>은 여성 포로가 주인공이다.

이들 작품에서 주인공 홍도・옥영은 ‘절개를 지키며 죽겠다는 전통적인 사고관’과 ‘의지를 가지고 귀환을 위해 노력하 는 진취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춘 여성으로 그려졌다.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를 볼 수 있는 문학작품이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기의 사실적 기록을 통해 여성 포로들의 비극적 상황이 후 대에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또 설화・소설 속 여성 포로의 고난 극복 이야기를 통해, 실제와 다른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 당대 사람들 의 염원을 볼 수 있었다.

주제어:임진왜란, 여성 포로, 포로실기, <홍도>, <최척전>

Ⅰ. 머리말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재난은 임진왜란이라 할 수 있다. 7년 동안 치러진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많은 사 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일본은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고, 9~14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낯선 일본 땅에서 삶을 마쳐 야 했다.1)

1) 임진왜란 포로의 숫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이견이 있으며, 필자는 민덕 기의 견해를 따랐다.(민덕기, <임진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임 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p.395)

그렇다면 임진왜란 포로들은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생활을 하였으며,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을까? 전쟁 속 더 큰 약자였던 여성 포로들은 어떻게 죽어갔고, 또 살아남았을까?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중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영광 사람인 강항(姜沆, 1567~1618), 나주 사람인 노인(魯認, 1566~ 1622), 함평의 한 일가인 정경득(鄭慶得, 1569~1630), 정희득(鄭希得, 1575~1640), 정호인(鄭好仁, 1579~?)은 자신들의 포로 경험을 구체적 으로 기록한 실기(實記)를 남겼다.

≪간양록(看羊錄)≫, ≪금계일기(錦 溪日記)≫, ≪만사록(萬死錄)≫,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유피 란기(丁酉避亂記)≫로, 이들의 포로실기는 남성 문인이 쓴 글이긴 하 지만 그 글 속에는 함께 잡힌 여성 가족 구성원과 일본에서 만난 여 성 포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실기를 통해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실제 상황을 볼 수 있다면, 후에 전해지는 설화, 창작되어진 소설을 통해서는 임진왜란기 여성 포 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설화를 모아 편찬한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임진 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홍도(紅桃)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조선 중기의 문신 조위한(趙緯韓, 1567~1649)이 창작한 소설 <최척전 (崔陟傳)>은 최척과 옥영 부부의 이야기로, 여성 포로인 옥영이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다.

임진왜란기 포로실기나 전쟁소설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지 만, 이런 문학작품을 통해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를 살펴본 연구는 이 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실기, 설화, 소설 등 문학작품에 임진왜 란기 여성 포로가 어떻게 형상화 되어 있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 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실기, 설화,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 피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전쟁문학・여성문학 연구에 기여 할 것이다. 임진왜란기 포로실기나 조선시대 전쟁소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작품을 종합적으로 살핀 연구는 물론, ≪간양록≫이나 <최척전> 같은 대표적인 개별 작품에 대한 연구도 다수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기 포로들의 생생한 삶, 포로들의 일본에 대한 시 선, 전쟁소설의 특징과 가치 등이 파악되었다. 하지만 ‘여성 포로’에 집중한 연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개별 작품에 대한 연구 중 소설 <최척전> 속 여성 주인공 옥영과 관련한 연구가 있다. 2)

옥영이 ‘여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연구로, 저자의 여성 인식, 당시의 여성 담론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서 사의 주요 동인인 ‘포로’라는 점에는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 성 포로’에 초점을 맞추어, 당시 실제 여성 포로와 소설 속 여성 포로 의 차이점, 여성 포로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을 살필 때, <최척전>에 대한 시야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전쟁 속 여성에 대한 연구는 일부 이루어졌 다. 임진왜란 중 죽어간 여성에 대한 기억 과정 연구, 임진왜란 배경 소설이나 임진왜란 한시 속 여성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3)

2) 김지혜, <전란 배경 고전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상처와 통합을 위한 서사 기법 -<최척전>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59, 영남대학교 민족문 화연구소, 2015. ; 신태수, <여성 인물형상을 통해 본 <崔陟傳>의 창작의 도>, ≪어문연구≫77, 어문연구학회, 2013. ; 엄태식, <<최척전>의 창작 배 경과 열녀 담론>,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24,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2. ; 현혜경, <<최척전> <옥랑자전>을 통해서 본 대조적인 여성이미지>, ≪이 화어문논집≫14,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어문학회, 1996 등.

3) 김영미, <조선시대 전쟁소설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기억과 침묵>, ≪인문 학연구≫61,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1. ; 장미경, <戰爭詩에 나타난 여성의 兩價性-임진왜란과 정유재란 詩材 한시를 대상으로->, ≪한국고 전여성문학연구≫11,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5. ; 정지영, <‘논개와 계월 향’의 죽음을 다시 기억하기>, ≪한국여성학≫23, 한국여성학회, 2007. ; 정출헌, <임진왜란의 상처와 여성의 죽음에 대한 기억-동래부의 金蟾과 愛香, 그리고 용궁현의 두 婦女子를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1,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0. ; 탁원정, <<이한림전>에 나타난 임진왜란 속 여성의 고난과 그 의미>,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41, 한국고전여성 문학회, 2020 등.

여기에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를 살핀 본 연구가 더해 진다면, 임진왜란 속 여성들을 폭 넓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 양상

1. 실기 속 여성 포로 형상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이송되었다가 억류 후 귀환한 일을 기록한 실기는 5편만이 현전하며, 모두 남성 문인에 의해 작성 되었다.

여성이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실 기의 특성상,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실제 모습을 다른 글보다 자세 히 담고 있다. 5편의 포로실기를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 작품명 (저자)

요 약

간양록 (강항) - 1597년 9월 23일 피랍, 1600년 4월 2일 일본 출발.

- <적중봉소(賊中封疏)>,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고부인 격(告俘人檄)>, <예승정원계사

(詣承政院啓辭)>, <섭난사적 (涉亂事迹)> 등 다섯 편의 글로 이루어짐.

금계일기 (노인) - 1597년 8월 피랍, 1599년 3월 17일 일본 출발.

- 1599년 2월 21일~6월 27일 부분만 현전함.

- 일본에서 중국으로 탈출, 이후 조선으로 돌아옴.

만사록 (정경득) - 1597년 9월 27일 피랍, 1598년 11월 22일 일본 출발, 대마 도에서 6개월 가량 억류 후

월봉해상록 (정희득) 1599년 6월 17일 대마도 출발.

정유피란기 (정호인) - 정경득・정희득은 형제이고, 정호인은 친척으로 이들은 함께 피란을 떠났다가 포로가 됨.

저자들은 모두 호남 사람으로, 1597년 재침입이 일어나고 남원성이 함락되었을 때 포로가 되었다.

다른 저자들은 일가족이 함께 배로 피 란을 떠났다가 피랍이 되었기 때문에 가족 중에 여성이 있었고, 이들 에 대한 기록이 실기에 있다. 하지만 노인은 의병으로 있다가 혼자 사로잡혔고, ≪금계일기≫가 중국으로의 탈출을 준비하고, 탈출에 성공 한 후 중국에서 머무를 때의 일을 기록한 부분만 현전하기 때문에 여 성 포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금계일 기≫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간양록≫은 다섯 편의 글로 이루 어져 있으며, 이중 본인의 경험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술한 부분이 <섭난사적>이다.

이 부분에 여성 포로에 대한 기록도 있기 때문에 ≪간 양록≫에서는 이 <섭난사적>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정경득・정희득・정호인은 한 집안 사람으로 함께 배로 피란을 떠났 고, 억류 생활 후 함께 돌아왔다. 이들의 실기는 일기 부분이 핵심인 데 그 일기의 내용이 중복되는 것이 많다. 특히 정경득과 정희득의 실 기에는 글자 하나하나가 똑같은 부분이 많아 어느 하나가 모본일 것 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초기에 정희득 실기가 모본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월봉해상록≫을 중심으로 많은 연 구가 이루어졌다.4)

이후 정경득 실기가 모본일 수 있다는 견해가 나 오고 있다. 5)

4) 이을호, <丁酉避亂記 解題>, ≪호남학≫5,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1973. ; 이채연, ≪壬辰倭亂 捕虜實記 硏究≫, 박이정, 1995. ; 김미선, ≪호남의 포로실기 문학≫, 경인문화사, 2014.

5) 정경득 저/신해진 역주, ≪호산만사록≫, 보고사, 2015. ; 조용호, <丁酉再 亂 포로 실기 속 한시에 투영된 화자 의식>, ≪한국고전연구≫45, 한국고 전연구학회, 2019.

누구 한 사람이 먼저 썼고 이를 다른 한 사람이 보고 정 리했을 수 있고, 후손들이 간행을 준비하면서 다른 실기를 보고 추가 했을 수 있으며, 아예 처음부터 저자들이 공동으로 작성했을 수도 있 다.

본 논문에서는 ‘여성 포로’를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세 작품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여성 포로 형상화를 살펴보았다. 여성 포 로에 대한 서술도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각 작품에만 있는 개성적 인 서술이 있었으며, 다른 어떤 기록보다 여성 포로에 대한 서술이 직 접적이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들 실기 속 여성 포로 형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포로가 된 여성 가족의 자결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였다.

강항의 첩은 굶어서 죽으며, 정경득・정희 득・정호인의 어머니, 아내 등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실기 속에는 이들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여성 가족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튿날에 한 척의 적의 배가 옆을 스쳐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 히 ‘영광(靈光)사람 영광 사람’ 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씨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愛生)의 어미였다. 배를 따로 탄 이후로 벌써 귀신이 되었으리라고들 말하였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이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부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왜노(倭 奴)가 아무리 때려도 그치지 않더니 필경에는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구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滄海茫茫月欲沈 한 바다 아득아득 달조차 지려는데

淚和涼露濕羅衿 눈물이 이슬과 함께 옷섶을 적시누나

盈盈一水相思恨 넘실넘실한 이 수면 상사한들 어찌하리

牛女應知此夜心 견우 직녀 응당 이 밤 심정 알거로세6)

6) 강항 저/신호열 역, ≪간양록≫, 한국고전종합DB.

위는 ≪간양록≫의 <섭난사적>에서 강항 첩인 애생 어미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이다.

피랍 당시 관료의 신분이었던 강항은 일본에 억류되 어 있는 동안 적국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나라에 도움이 되고 자 하였다.

≪간양록≫ 중 <적중봉소>는 일본에 대한 정보와 나라를 위한 계책을 쓴 상소문이고, <적중문견록>은 일본의 관직, 8도 66주 각 지역, 조선을 침략했던 장수들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담은 것 이다.

이렇듯 관료로서 나라를 위한 노력을 글로 반영한 강항이지만, <섭난사적>에서는 개인적인 가족의 일을 기록하며 위와 같이 첩의 죽음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왜적에게 피랍될 때 강항의 어린 아들과 첩의 딸인 애생이 죽었고, 이후 왜적들에 의해 가족들이 다른 배로 나뉘어 태워지면서 애생 어 미와 헤어졌다.

위는 그 뒤 강항이 탄 배가 애생 어미가 탄 배와 스쳐 지나갔던 일과 애생 어미의 죽음을 기록한 것이다. 남자들은 왜적이 묶어 두었기 때문에 강항은 애생 어미와 직접 대화하지 못했다. 강항 은 일본으로 끌려가던 중에는 당연히 글을 쓰지 못하였고, 일본에 있 는 동안 포로 경험에 대한 글을 작성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수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묶여 있는 중에 영광 사람을 외치는 목소리, 형수님과 첩의 대화, 하소연하는 슬픈 목소리를 들은 것을 묘사하고, 훗날 들은 첩의 죽음 소식까지 기록하여 임진왜란 당시 첩이었던 한 여성 포로 의 구체적인 일화와 죽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강항은 첩을 생각하며 시를 지어, 눈물 흘리며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출하였다.

정경득・정희득・정호인은 한 배로 피란을 떠났으며, 왜적에게 피랍 된 직후 여성 가족 여러 명이 한꺼번에 자결하는 상황을 보게 되었다.

1597년 9월 27일,7) 정경득・정희득의 어머니・아내들・누이동생, 정호인 의 할머니・어머니・아내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8)

7) 정호인의 ≪정유피란기≫에는 1597년 9월 26일에 자결을 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피랍 및 일본 이송 상황에서는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훗날 쓰 면서 날짜에 착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호인은 9월 26일에 정경득・ 정희득의 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을 왜적이 놓아 보내 주었다고도 기록하 고 있는데, 정경득과 정희득 실기에서는 9월 29일에 놓아 보낸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아버지와 친 자식을 놓아 보낸 날은 정경득・정희득이 더 정 확히 기억할 것으로 판단되어, 정호인의 날짜 기록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결 날짜도 정경득과 정희득의 실기에 나온 9월 27일로 판단하였다.

8) 정경득・정희득・정호인의 여성 가족 7명 외에 일가의 여인 1명이 함께 자 결했다.

정호인의 당숙이 자결한 아내에 대해 정호인에게 언급하는 것을 ≪정유피란기≫ 1598년 6월 23일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정유피 란기≫ 번역에서는 각주로 당숙이 鄭燈이라고 하였다.(정호인 저/이현석 외 역, ≪정유피란기≫,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진주정씨월봉공종중회, 1986, p.43)

배가 칠산(七山) 바다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적의 배를 만났 다. 뱃사공이 놀라서 고함을 지르자, 배 안의 사람들이 갈팡질팡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님께서 아내 박씨 와 제수 이씨 및 시집 가지 않은 누이동생에게 이르기를, “왜적들 이 이렇게 들이닥쳤으니 그 화가 장차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아, 우리 네 부녀자들이 스스로 처신해야 할 도리는 한번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터, 장차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리라.” 하시니, 아내가 대답하기를, “집에 있으면서 난리 초에 지아비와 함께 죽기를 약속한 적이 있으니, 저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고는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없이 늙으신 어버 이에게 영결을 고하고 나서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당신은 신중히 몸가 짐을 바르게 가져 동생과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기필코 살아서 돌 아가기를 꾀하세요. 이야말로 대장부가 할 일이니, 간절히 빌고 또 비나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앞을 다투어 바다에 몸을 던지니, 배 에 같이 탔던 여러 부녀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왜적들이 배 안에 포박지어 두었기 때문에 죽으려고 해 도 죽지 못하니 망극하기 그지없어 통곡하고 통곡하였다. 9)

9) 정경득 저/신해진 역주, 앞의 책, p.35. 앞서 언급했듯이 세 사람의 글에 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며, 특히 정경득・정희득은 글자 하나하나까지 같 은 경우가 있다. 정경득・정희득의 여성 포로에 대한 서술 부분 중 어머니 처럼 두 사람 모두와 같은 관계인 여성에 대해 서술한 경우 형인 정경득 의 실기를 인용하였다. 정희득의 아내, 정희득 아내의 여종처럼 정희득과 더 가까운 관계의 여성에 대해 서술한 경우 정희득의 실기를 인용하였다.

위는 정경득 ≪만사록≫의 기록이다. 왜적에게 사로잡힌 후 왜적들 은 힘이 센 남자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먼저 묶어 두었던 것 으로 보인다.

정경득・정희득・정호인은 모두 묶인 상태였으며 어머니, 아내 등이 자결하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강항처럼 피랍 및 일본 이송 때는 글을 쓸 수 없었고, 일본에 머무르 면서 이날을 기억하며 글을 썼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성 가족들의 마지막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직접 본 당시의 여성 포로 자결 상황이 위와 같이 생생하게 묘사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에서 억류생활 후 고향 함평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실기 속에서 자결 한 여성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였다.

한 채소밭에 마늘이 싱싱하게 푸른 것을 보니 마치 봄철 같았 는지라, 동생에게 말하기를, “이 나물은 곧 어머님이 즐기던 것이 다.” 하고는,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는 생각에 원통히 울었고 오 장이 분연히 무너졌는데, 증자(曾子)가 차마 대추를 먹지 못한 듯 이 할 뿐이라. 10)

꿈에 죽은 아내를 보았다. 슬픈 회포를 하소연하며 밥 한끼를 권하는 것이 완연히 평일과 같았다. 깨고 나니 비창(悲愴)한 심회 견딜 길 없다. 11)

밤 꿈에 죽은 아내가 처가에 다녀오자고 하기에 내가 뒤따라 처가에 이르렀다가 꿈을 깼다. 망연 통곡했다. 12)

밤 꿈에 할머니께서 백발을 빗으로 빗고 계시기에 내가 곁에서 빗겨드리다가 꿈을 깼다. 꿈 깬 후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13)

10) 위의 책, p.47.

11) 정희득 저/이상형・김달진 역, ≪해상록≫, 한국고전종합DB.

12) 정호인 저/이현석 외 역, 앞의 책, p.27.

13) 위의 책, p.27.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정경득 ≪만사록≫ 1597년 12월 18일 일기 의 전문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정희득 ≪월봉해상록≫ 1598년 1월 28일 일기의 전문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인용문은 정호인 ≪정유피 란기≫의 1598년 2월 20일과 1598년 2월 21일 일기의 전문이다. 생 일이나 세상을 떠난 날과 같이 특별한 날에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정경득・정희득・정호인은 여성 가족들의 생일, 제삿날에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서술한다.14)

그리고 위의 인용 문과 같이 어머니가 좋아했던 것을 보았을 때, 꿈에서 아내와 할머니 를 만났을 때도 그리움을 표출하였다. 꿈속에서 아내가 밥을 권하고, 아내를 따라 처가에 가고, 할머니 머리를 빗겨드리는 등 일상의 소소 한 것을 행하다가 그게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슬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포로가 되어 낯선 일본 땅에서, 힘들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여 종들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조선은 남성, 양반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여성 노비는 매우 낮은 신분으로, 그들도 포로로 끌려갔으나 기록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정씨 일가, 특히 정희득의 글을 통해 포로가 된 여종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가 한 곳에 이르러 예양(禮陽)을 만났다.

예양은 전부터 처가 에 있던 여종인데, 육지에서 왜놈에게 잡혔다 한다.

헝클어진 머리 와 수척한 몰골이 금방 알아보기 어려웠다.

상란(喪亂) 이야기를 하자니, 두 눈에 문득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 다. 15)

14) ≪월봉해상록≫ 권2에는 어머니에 대한 시 <꿈에 어머니를 뵙고 깨어나 [夜夢歸覲北堂, 覺卽記之]>, <어머님 생신에 제사를 마치고[母親晬辰, 奠 罷有感]>, 아내에 대한 시 <망처의 생일에[亡妻生日有感]> <망처가 내게 밥을 주는 꿈을 꾸고 3수[夢見亡妻, 食我以飯, 覺卽悲感. 三首]>, <꿈에 망처를 보고 베개 위에서 4수[夢見亡妻, 枕上有感. 四首> 등이 수록되어 있어, 시를 통한 그리움 표출도 볼 수 있다.

15) 정희득 저/이상형・김달진 역, 앞의 책. 1

위는 정희득 ≪월봉해상록≫ 1597년 10월 3일 일기의 전문이다.

이 날의 일기는 처가의 여종인 예양을 만난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 다.

≪월봉해상록≫ 권1에는 일기가, 권2에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권2의 시 중 예양에 대해 읊은 것이 있다.

아래는 <어떤 곳에서 예양을 만나[到一處遇禮陽]>라는 시로, 예양을 만나 아내 생각에 눈물 짓 고 난리 중 험한 모습에 마음 아파하며 잘 있으라 인사하고 있다.

蓬頭隻影彼伊誰 쑥대머리 외로운 그림자 저 누구인가

知是幽閨舊侍兒 알겠거니 안방에서 옛날 부리던 아이인 것을

相逢但問人何處 서로 만나 묻는 말 그 사람 어디 있나

不忍言來淚却垂 차마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리네

心摧面改瘦崢嶸 마음 상하고 얼굴 변해 험상궂게 여위어

相見惟應識舊聲 서로 만나 알아볼 건 옛날 음성뿐

北窖腥膻丞相淚 북교의 더러운 비린내는 승상의 눈물이요

順殿風雨綠荷情 순전의 바람 비는 푸른 연의 마음이다

爲言喪亂腸愈裂 난리를 이야기하매 오장 더욱 찢어지고

欲問存亡語未成 존망을 물으려다 미처 말을 못 잇네

今汝好歸須好在 너는 이제 잘 돌아가 부디 잘 있으라

嗟吾方擬一捐生 슬프다 나는 이제 삶을 한번 버리려네16)

예양은 일본으로 이송되던 중 이렇게 스쳐지나가며 만났다면, 일본 에 억류 중이던 때에는 줄비라는 여종이 편지를 보내왔다.

아래는 정 희득 ≪월봉해상록≫ 1598년 2월 25일 일기의 후반부이다.

이날 작은 여종의 편지를 보았다. 그 이름은 줄비(乼非)인데, 죽 은 아내가 부리던 몸종이었다. 진해(珍海)에 있을 때, 헤어져 있는 곳을 몰랐더니, 이제 그 편지를 보건대 ‘쌀을 얻어 제물을 마련하 고 제상을 차려 놓고 통곡했다.’ 하니,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이 그 아니 기특한가? 편지를 다 보기도 전에 불현듯 눈물이 흘렀다. 17)

16) 위의 책.

17) 위의 책.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줄비는 정희득 아내가 부리던 몸종으로, 포로 로 일본에 있다가 정희득 가족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편지 중 제상을 차려 통곡했다는 것은 정희득 아내 자결을 알고 이를 슬퍼한 것으로 보인다.

정희득 아내는 자결을 하였지만, 여종인 줄비 는 포로로서 일본에서 살아가고, 그곳에서도 주인을 기억하고 기리고 있다. ≪월봉해상록≫ 권2의 시 중에 <소비(小婢)의 글을 보고[見小婢 書有感]>라는 시가 있는데, 이름은 안 나오지만 줄비에 대한 시임을 알 수 있다.

편지를 받았고, 제사지낸다는 내용이 시에 담겨 있기 때 문이다.

임진왜란기에 왜적의 편에 붙어 조선인에게 악랄하게 대하는 부왜(附倭)들이 있었는데,18) 그와 반대로 일본 포로생활 중에도 주인 을 위해 통곡하고 편지까지 보내는 여종의 모습을 이렇듯 정희득의 실기를 통해 볼 수 있다.

정씨 일가의 실기에서는 다른 여종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598년 2월 10일 일기에 의하면 종들이 먼저 일본에 와 있다가 정씨 일가가 일본에 온 후 쑥을 캐고 땔나무도 하면서 정씨 일가의 시중을 들었다.

또 1598년 8월 13일에는 여종 줏비를 만나 슬피 우는데, 이 후 줏비는 정씨 일가와 함께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떠나던 날 작별할 때에 줏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배에 올랐지만, 덕룡(德龍)・여금(女今)・줏비(㗟非) 등을 남겨두고 작별하였다.

왜인의 무리 및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경꾼이 담장처 럼 둘러섰는데, 여종들이 뱃전을 두들기고 통곡하면서 작별하니, 보는 이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안타까워했다. 19)

18) 부왜에 대해서는 민덕기의 논문을 참조하였다.(민덕기, <임진왜란기 ‘附 倭’ 정보와 조선 조정의 대응-‘附賊’ 용례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 구≫47, 한일관계사학회, 2014, pp.35-66)

19) 정경득 저/신해진 역주, 앞의 책, p.141.

위는 정경득 ≪만사록≫ 1599년 11월 22일 일기의 전반부이다.

노 비들의 이름이 명확히 기록되고, 조선으로 떠날 때 이들을 데려가지 못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정경득, 정희득, 정호인 등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여종인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뱃전을 두 들기고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월봉해상록≫ 권2에 줏비와의 만남 에 대한 시 <계집종 줏비(㗟非)를 만나[遇婢子㗟非]>가 수록되어 있으 며, 위 이별 상황에 대한 시 <덕룡・여금・줏비 등과 이별하다[別德龍女 今㗟比等]>도 수록되어 있다.

정경득, 정희득 등은 이러한 여종들의 이름과 일본에서의 모습을 실기 속에 남겨, 여종인 포로들의 모습을 후대에 볼 수 있게 하였다.

2. 설화・소설 속 여성 포로 형상화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는 남성이 쓴 5편만이 현전하며, 실 기 속 서술을 통해 여성 포로의 모습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설화・ 소설의 경우에도 여성이 편찬하거나 창작한 작품은 없지만, 여성 포로 가 주인공인 작품이 있어, 이를 통해 여성 포로 형상화를 보고자 한 다.

유몽인이 설화를 모아 편찬한 ≪어우야담≫에 여성 포로 ‘홍도’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으며, 20) 조위한이 창작한 소설 <최척전>은 여성 포로 옥영이 주인공이다.

유몽인은 1623년에 사망하였으며, 이야기 중 1618년에 정생이 전쟁 에 참여하고 1년 후에 홍도가 조선으로 향하는 내용이 나오므로 <홍 도>는 1620~1623년에 전해지던 설화라고 볼 수 있다.

<최척전>은 말 미에 1621년에 이 글을 쓴다고 나와 있어 <홍도>와 비슷한 시기에 창 작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21)

20) ≪어우야담≫에 이야기 제목이 없으며, 신익철 등의 번역에서는 ‘홍도 가 족의 인생유전’이라고 하였고,(유몽인 저/신익철 외 역, ≪어우야담≫, 돌 베개, 2006, p.37), 선행 연구에서는 ‘홍도’라 명명하기도 하였다.(엄태식, 앞의 논문, 2012) 본 논문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부각되고 쉽게 읽히는 ‘홍도’로 작품명을 기재하였다.

21) 엄태식은 소설의 마지막 문구도 허구라고 볼 수 있다 하였으며, 이민성의 <제최척전>을 근거로 하여 조위한이 1622~1623년에 <최척전>을 창작했 다고 추정하였다.(엄태식, 앞의 논문, pp.103-106)

남원이라는 배경, 비슷한 이야기 구조, 비슷한 이름 등으로 볼 때 두 작품에 영향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 되며, 설화를 보고 소설을 창작했는지, 소설의 내용이 사람들의 입에 서 입으로 전해졌는지 등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견이 있다. 22)

22) <최척전>에 대한 연구는 많으며, 두 작품의 관계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견해를 엄태식이 정리한 바 있다.(위의 논문, pp.83-84)

본 논문 에서는 영향 관계를 살피지 않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20년이 지난 후 설화와 소설 속에 여성 포로가 어떻게 형상화되는지에 초점을 맞 추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표 2>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가 주인공인 설화・소설

작품 설화 <홍도> 소설 <최척전>

주인공 홍도, 정생 옥영, 최척

이야기 전개 - 주인공 소개, 결혼, 첫째 아 들 몽석 출산. - 주인공 소개, 만남과 결혼, 첫째 아들 몽석 출산, 행복한 결혼 생활.

- 1597년에 피란 중 부부 헤어 짐, 정생은 명나라 - 1597년에 피란 중 부부 헤어 짐, 최척은 명나라로,

군대 따라 감. 옥영은 포로로 일본 감.

- 중국 절강에서 부부 재회.

- 1600년 봄, 최척과 옥영 베트 남에서 재회.

- 홍도가 포로 된 후의 상황 설명. - 중국에서 생활, 둘째 아들 몽 선 출생, 몽선과

홍도 결혼.

- 중국 절강에서 둘째 아들 몽 현 출산, 아들 결혼. - 1619년 최척 전쟁 참여, 잡혔 다가 첫째

아들 몽석 만나고 함께 탈출.

- 1618년 정생 전쟁 참여, 패 전. - 최척과 몽석 조선으로 가던 중 홍도의 아버지인

진위경 만남, 함께 남원 집으로 귀환

-정생 조선으로 가던 중 몽현 의 장인인 - 옥영이 아들 몽선과 며느리 홍도 데리고 조선행.

중국인 의원 만남. -. 남원에서 온 가족 재회, 절에 가서 불공 드림.

 

- 정생 남원 집으로 귀환, 첫째 아들 몽석 만남.

- 홍도가 둘째 아들 몽현 내외 와 조선행.

- 남원에서 온 가족 재회.

 

 

실기 속 여성 포로는 양반의 경우 자결을 하고, 노비의 경우 조선 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성이라 해 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드물었다.

현실은 이러했지만 설화와 소설 속 여성 포로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 일본・중국이라는 넓은 공간을 거쳐 결국 살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홍도・옥영은 ‘절개를 지키며 죽겠다는 전통적인 사고관’과 ‘의지를 가지고 귀환을 위해 노력하는 진취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춘 여성으로 그려졌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여성에게 ‘열(烈)’을 강조하였 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 중기 양반 여성에게 ‘절개’는 죽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23)

23) 이와 관련 강명관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편을 분석하면서 “죽 음으로 열녀가 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또 자살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여성이 열녀 이데올로기에 감염되는 정도가 선조조에 와서 매우 심 화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 민속원, 2016, p.309)

정씨 일가의 여성 가족들이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 든 것이 한 예라 할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 이라서 비교적 내용이 적은 <홍도>에서 주인공 홍도는 배를 통해 귀 환하던 중 한 차례 자살을 시도하지만, 내용이 풍부한 <최척전>의 주 인공 옥영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다.

첫째, 최척과 혼인 전에 어 머니가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려 할 때 목을 매어 죽을 뻔 하고, 둘째, 1597년 왜적 돈우에게 잡힌 후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셋째, 재회 한 최척이 1619년 다시 전장에 나가게 될 때 칼로 목을 그으려 하고, 넷째, 명나라 군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척이 죽었다고 생각해 굶어 죽으려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배로 귀환 중 섬에 있다가 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긴 후 모든 걸 포기하고 절벽 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하였다.

제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서 서방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가져 왔는데, 뜻밖에도 늙어 가는 나이에 또다시 이별 을 하게 되었군요.

여기서 요양까지는 수만 리 거리라 살아서 돌아오기 쉽지 않을 테니 어찌 훗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겠 어요? 보잘것없는 제 한 목숨, 서방님과 헤어지는 마당에 자결하 여 한편으로는 저에게 연연하는 서방님의 마음을 끊고, 한편으로 는 밤낮으로 느낄 제 고통을 없애 버리고자 합니다. 24)

이때 항주에 있던 옥영은 출정한 명나라 군대가 전멸했다는 소 식을 들었다.

최척이 싸움터에서 횡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 밤 낮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더니 마침내 죽기로 작정하고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25)

24) 박희병・정길수 편역, <최척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베개, 2010, pp.46-47.

25) 위의 책, p.54.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1619년 최척이 명나라 군대를 따라 누루하 치를 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날 때 자살을 시도하며 한 말이다. 아내인 옥영과 남편인 최척은 결코 동등한 위치가 아니며, 남편은 ‘은혜’를 주는 인물이고, 자신의 목숨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용문은 최척이 참여했던 명나라 군대의 패전 소식을 듣고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 슬퍼하는 부분이다.

밤낮으로 울더니 죽기로 작정하고 물 한 방울 먹지 않는 모습은, 남편 이 죽자 따라 죽었다는 조선시대 열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옥영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지만 주위의 만류로 성공하지 못하 거나 꿈에 장륙불이 나타나 희망을 주자 죽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이 러한 전통적인 사고관에 침잠되어 수동적으로만 있지 않고, 반대로 문 제를 해결하고 귀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진취적인 면모도 갖 는다.

<최척전>의 옥영은 왜적 돈우에게 잡힐 때 남장을 한 상황이었다.

이후 자신은 약골이라서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끝내 자신을 남자라고 속여 여인이라서 겪게 될지 모르는 위험에서자신을 지켰다.

그리고 재회해서 함께 중국에서 살았던 최척이 다시 전장에 나간 후 돌아오지 못하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1년이 지나자 홍도는 가산을 되팔아 작은 배를 세 내어 아들 몽현과 그의 아내를 데리고 중국, 왜, 조선의 세 가지 복식으로 옷 을 지어 절강을 떠났다.

중국인을 만나면 중국인이라 하고, 왜인을 만나면 왜인이라 하면서, 한 달 25일쯤 지나서 제주의 추자도 밖 먼바다의 가가도(可佳島)에 정박했다. 26)

남편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자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조선으로 향하는 것은 <홍도>에서도 나온다. 위는 <홍도>의 일부분으로 배를 이용한 준비와 출항이 짧게 기술되어 있다.

가산을 팔아 아들과 며느 리를 데리고 떠나는 추진력이 있으며, 여러 나라 복식을 준비하여 위 험을 대비하는 판단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척전>에서는 준비 과 정, 항해 과정이 자세하여 옥영의 진취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물길에 여러 어려움이 있다지만 내겐 경험이 많단다.

일본에 있 던 시절 배를 집 삼아 봄이면 복건성・광동성 일대에서, 가을에는 유구에서 장사를 했어.

거센 바람, 거친 파도를 헤치고 다녀 밤하 늘의 별을 보고 조수(潮水)를 점치는 데 익숙하지.

그러니 바람과 파도의 험난함은 내가 감당할 수 있고, 항해의 온갖 위험도 이겨 낼 수 있단다. 혹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있다 한들 해 결할 방도가 왜 없겠니?27)

26) 유몽인 저/신익철 외 역, 앞의 책, p.40.

27) 박희병・정길수 편역, 앞의 책, p.57.

옥영이 배를 빌려 조선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아들 몽선은 바람과 파도의 위험, 해적선의 위험 등이 있다며 반대하였다.

이 때 옥영은 위의 인용문과 같이 자신이 항해 경험이 많아 이겨낼 있다고 말하며 아들을 설득한다. 어머니로서 자식에서 무조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 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항해 경험과 능력이 있음을 언급하는 점이 주목된다. 수동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이 아니라 능력 있고 자신감 있는 진취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 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이어진다.

옥영은 즉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옷을 만들고 날마다 아들 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의 말을 가르쳤다.

그러고는 몽선에게 다음 과 같이 일렀다.

“항해는 오로지 돛대와 노에 의지하는 것이니, 반 드시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 하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나 침반이다. 좋은 날을 가려 배를 띄울 테니 내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해라.”28)

28) 위의 책, p.57.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옥영은 조선과 일본 옷을 준비하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 말을 가르쳐 조선인이나 일본인을 만났을 때를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배를 견고하게 만들고 나침반을 준비 하게 하고, 출항할 날의 날씨도 미리 고려하여 준비성이 철저하고 능 력 있는 여성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옥영은 세 나라의 언어를 알고, 항해에 대한 경험과 능력이 있으며, 출항을 반대하는 아들을 설득하여 이끌고 나가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홍도와 옥영이 절개를 지키며 죽겠다는 전통적인 사고관을 가진 여 성으로만 머물렀다면, <홍도>와 <최척전>의 행복한 결말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의지를 가지고 귀환을 위해 노력하는 진취적인 면모를 가졌기에, 결국 고향 남원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기쁨의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면모로 인해 임진왜란기 포로였던 홍도와 옥영 은, 포로로 잡혔으나 살아남은 여성,29) 먼 길을 돌았으나 결국 고국으로 돌아온 여성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29) 이와 관련 이종필은 옥영이 전란의 와중에도 ‘살아남았던 여성’으로 새롭게 형상화되었다고 하였다.(이종필, ≪조선 중기의 전쟁과 고소설의 기억≫, 소명출판, 2017, p.78)

Ⅲ.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가 갖는 의미

1. 비극적 상황의 사실적 기록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으며,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전쟁에서 누구든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여성에게 는 강간의 공포도 함께 닥쳐온다. 더구나 조선 중기, 절개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시기에 임진왜란을 맞이한 여성들은 왜적을 만났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다 사망한 여성들은 훗날 기록으로 남겨지고 칭송되었다. 대표적으로 1615년 간 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임진왜란 때 죽어간 많은 여성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30)

30) 강명관의 분석에 의하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 선조 이후의 열녀 553명 중 임진왜란을 직접 반영하고 있는 열녀는 441명이다. 그리고 441 명 중 죽음으로 인한 열녀가 아닌 경우는 4명에 불과하다.(강명관, 앞의 책, pp.306-316)

그런데 이러한 기록은 당시 상황을 요약적 으로 제시하고 열행을 강조하여, 당대 생생한 상황을 보는 데에는 한 계가 있다.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는 애초에 가족들의 열행을 드러내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 포로로 적국에 끌려갔던 자신의 비극적 경험을 글로 쓴 것으로, 여성 가족의 자결과 억류지에서 만난 여종들도 포로경험 중 일부로써 기록되었다. 또 자결한 여성 가족에 대한 꿈을 꾸고 눈물 흘리는 것도 글로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 상황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당시의 진실된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하였다. 정유란(1597) 때 가족을 데리고 칠산(七山) 바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났다. 어머니 이씨(李氏)와 아내 박씨(朴氏), 제수 (弟嫂) 이씨(李氏) 및 아직 출가하지 않은 누이 등이 모두 물에 뛰 어들어 죽어 아울러서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31)

31) 김동수 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343.

수많은 여성 포로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담긴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는 1800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의 <이역전절(異域全節)> 하위 ‘정경득’에 대한 기록 중 여성 가족의 자 결을 서술한 부분이다. 자결할 당시 상황이 요약적으로 제시되어, 구 체적인 상황은 알 수가 없다.

실기 속에는 왜적을 보고 뱃사공이 소리 를 지르는 상황, 자결하기 전 어머니와 아내가 남긴 말, 묶여 있는 상 태라 지켜만 봐야 했던 남자들 등이 담겨 있었다. <이역전절>의 첫 번째에는 ‘강항’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첩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실기 속에 첩이 탄 배가 스쳐지나가며 첩이 하소연한 상 황이 묘사되고, 첩이 굶어 죽었다는 서술과 그리움을 토로한 시가 있 어 당시 상황과 저자의 감정이 전해질 수 있었다. 실기 속에는 여성 가족들이 자결하는 비극적 상황이 생생하게 제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미미하다 할 수 있는 여종들의 이름, 그 들과의 만남, 이별까지 서술되어 있다. 정희득의 실기를 읽었다면 예 양, 줄비, 줏비 등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갔던 여종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옛 주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편지를 보내며, 주인이었던 양반들이 고국으로 떠나던 날 일본에 남겨져 뱃전을 두드리며 울었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기는 포로로 잡힌 여성들이 어떻게 죽어갔고, 또 살아갔는지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고난 극복 이야기로 치유와 회복

실제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는 왜적에게 잡힐 때 죽거나, 살았더라 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32) 당시 조선 사람 중에 임진왜란 중 가족을 잃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정씨 일가의 여성 가족들이 함께 자결한 것은 앞서 살폈으며, 강항의 가족들도 여 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강항은 피랍될 때 어린 아들 용과 딸 애생이 죽었고, 일본으로 이송 중 첩이 죽었다.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조 카가 배앓이를 하자 왜적은 바다에 던져 버렸고, 일본에 억류되어 있 을 때 두 명의 조카가 병사했다. 이렇게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 만, 이들은 결국 살아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는 전쟁 중 가족과 헤어 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을 것이다. 지금 돌아오지 않은 내 가족 이 죽지 않고 일본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는 희망, 그 가족이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이러한 희망이 반영된 문학 이 바로 설화 <홍도>와 소설 <최척전>이라 할 수 있다. 홍도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남원의 옛 터를 찾아가니 남편 과 아들 몽석, 몽현의 장인인 중국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다. 온 집안 식구가 다 온전할 뿐만 아니라 사돈까지도 아무 탈이 없었으 니, 그 즐거움이 흐뭇하게 무르녹았다. 33)

32) 임진왜란 포로 중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요네타니 히토시는 여 러 문헌 자료를 통해 6,323명을 확인하였고, 방기철은 6,000~9,000여 명 으로 추정하였다.(요네타니 히토시, <사로잡힌 조선인들-전후 조선인 포 로 송환에 대하여->,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p.89. ; 방기철, <睡隱 姜沆의 일본인식>, ≪한국사상과문화≫57, 한국사 상문화학회, 2011, p.187)

33) 유몽인 저/신익철 외 역, 앞의 책, p.40.

온 집안 사람이 저마다 자기 자식을 안고 부르짖으며 우니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웃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이상한 일로 여겼으나, 옥영과 홍도가 겪은 일의 전말을 듣고 나서는 모두 들 무릎을 치며 찬탄하더니 앞 다투어 이 이야기를 퍼뜨렸다. …… 그 뒤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 부모님을 봉양하고 아래로 아들과 며 느리를 거느리며 서문 밖의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34)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홍도>의 귀환 장면이고, 두 번째 인용문은 <최척전>의 마지막 부분이다. 온 가족이 살아서 만난 행복한 광경에 읽는 사람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이 이야기 를 퍼뜨리며 내 일처럼 행복해 하는 게 그려진다. 정경득・정희득은 1599년 7월 20일에 함평의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며, 세상을 떠난 어머니・아내・누이동생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게 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여성 가족은 살아 돌아오지 못해, 꿈에 그리던 귀환을 하였지만 행복할 수 없었다.

여성의 몸으로 홀로 사로잡혀 일 본으로 끌려갔던 홍도와 옥영이 자식과 며느리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와, 전쟁 속에서도 건강히 살아남은 온 가족을 만나는 그 행복한 설화・소설 속 결말과 실제는 차이가 크다. <홍도>는 설화로, 1620~1623년 즈음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행복한 결말을 가진 이야 기를 사람들이 주고받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 유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최척전>은 소설로, 저자인 조위한이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조위한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 은 사람으로 전쟁 중 어머니・딸・아내가 죽었다.

또 그의 아우 조찬한 은 피란 중 남원에서 유씨와 혼인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 유씨가 자결 을 하였다. 35)

34) 박희병・정길수 편역, 앞의 책, p.65.

35) 조위한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는 민영대와 엄태식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민영대, <趙緯韓의 삶과 그의 文學>, ≪한남어문학≫17・18, 한남대학교 한남어문학회 1992, pp.57-58. ; 민영대, ≪조위한의 삶과 문학≫, 국학자 료원, 2000, pp.103-104. ; 엄태식, 앞의 논문, pp.114-116)

유씨가 자결을 한 것은 옥영이 자결을 시도한 것과 겹쳐진다.

현실 속 유씨는 죽었지만 옥영의 여러 차례 자살 시도는 이루 어지지 않았고, 여러 고난을 이겨내고 옥영은 결국 가족들과 재회한 다.

살아서 만나 일상을 살기를 바랐던 간절한 염원이 이야기 속에서 나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복한 결말은 조위한과 조찬한에게는 위로가 되고,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회 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최척전>의 이본이 국문본을 포함해 10종이 넘게 전해지는데,36) 이는 조선 후기에 많이 읽혔다는 것을 의 미한다.

36) <최척전>의 이본을 연구한 지연숙은 <최척전>이본으로 한문본 5종, 국문 본 1종, 한문축약본 5종이 있다고 하였다.(지연숙, <<최척전> 이본의 두 계열과 善本>, ≪고소설연구≫17, 한국고소설학회, 2004, p.165)

<최척전>의 인기에는 ‘고난 극복’ 결말과 그로 인한 치유와 회복이 중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Ⅳ.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실기, 설화,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 였다. 그리하여 Ⅱ장에서는 ‘실제 경험을 기록한 실기’와 ‘허구적 이야 기인 설화・소설’로 나누어 여성 포로 형상화를 살피고, Ⅲ장에서는 임 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문학적 형상화가 갖는 의미를 ‘비극적 상황의 사실적 기록’과 ‘고난 극복 이야기로 치유와 회복’으로 정리하였다.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는 ≪간양록≫, ≪금계일기≫, ≪만사 록≫, ≪월봉해상록≫, ≪정유피란기≫ 등 5편이 현전한다. 모두 남성 문인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실기의 특성상 임진왜란기 여성 포로의 모습을 다른 글보다 자세히 담고 있었다. 이 러한 실기 속 여성 포로 형상화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포로가 된 여성 가족의 자결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그리 움을 표출하였다.

강항의 첩은 굶어서 죽으며, 정경득・정희득・정호인 의 어머니, 아내 등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실기 속에는 이들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여성 가족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둘째, 포로가 되어 낯선 일 본 땅에서, 힘들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여종들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조선시대 여성 노비는 매우 낮은 신분으로, 그들도 포로로 끌려갔으나 기록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정씨 일가, 특히 정희득의 글을 통해 포 로가 된 여종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몽인이 설화를 모아 편찬한 ≪어우야담≫에 수록된 <홍도>와 조 위한이 창작한 소설 <최척전>은 여성 포로 홍도와 옥영이 주인공이 다.

실기 속 여성 포로는 양반의 경우 자결을 하고, 노비의 경우 조선 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성이라 해 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드물었다.

현실은 이러했지만 설화와 소설 속 여성 포로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 일본・중국이라는 넓은 공간을 거쳐 결국 살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홍도・옥영은 ‘절개를 지키며 죽겠다는 전통적인 사고관’과 ‘의지를 가지고 귀환을 위해 노력하는 진취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춘 여성으로 그려졌다.

임진왜란기 해외체험 포로실기는 애초에 여성 가족들의 열행을 드 러내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 포로로 적국에 끌려갔던 자신의 비극적 경험을 글로 쓴 것으로, 여성 가족의 자결과 억류지에 서 만난 여종들도 포로경험 중 일부로써 기록되었다. 또 자결한 여성 가족에 대한 꿈을 꾸고 눈물 흘리는 것도 글로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 상황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당시의 진실된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하였다.

<홍도>는 설화로, 이러한 행복한 결말을 가진 이야기를 사람들이 주고받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최척전>은 소설로, 저자인 조위한이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조위한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 전 쟁 중 어머니・딸・아내가 죽었고, 아우 조찬한의 아내 유씨는 정유재란 때 자결을 하였다.

현실과 반대인 <최척전>의 행복한 결말은 조위한 과 조찬한에게는 위로가 되고,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전쟁으로 가족 을 잃은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기에 많은 여성이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포 로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부족하였다.

본 연구가 임진왜란기 여성 포 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전쟁문학・여성문학 연구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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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Literary Representation and its Significance of Women Captives During the Imjinwaeran Period

Kim, mi-sun (Chonnam Univ. Lecturer)

This paper examines how women captives during Imjinwaeran(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are portrayed in literary works such as factual records, folklore, and novels, and seeks to determine its significance. The overseas experience records of women captives during Imjinwaeran are present in five narratives, and the portrayal of women captives in these records can be categorized into two types. The first type meticulously describes the suicide of women captives' families and expresses their longing for them. The second type portrays the lives of female slaves who become captives in unfamiliar Japanese lands and continue to endure hardships. The folklore and the novel feature women captives as protagonists. In these works, the protagonists Hongdo and Okyeong are depicted as women who embody both a traditional mindset of “adhering to chastity and choosing death” and a progressive aspect of “exerting self-will to strive for a return”. There aren't many literary works that depict women captives during the Imjinwaeran period. However, through the factual records in the form of real accounts, the tragic situations of women captives could vividly be passed down to later generations. Furthermore, the stories of overcoming hardships by women captives in folklore and novels allowed us to glimpse the aspirations of people from that era who desired happier outcomes different from reality.

Key Words:Imjinwaeran, women captives, factual accounts of captives, ,

東亞人文學 第64輯

2023年 8月 15日 投稿 完了 2023年 9月 18日 審査 2023年 9月 23日까지 揭載判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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