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임진왜란기 포로 체험 문학과 가족애/장경남.숭실대

<국문초록>

이 논문은 임진왜란 포로 체험 문학 가운데 실기, 전, 소설을 중심으

로 가족간의 이산과 재회의 양상을 살펴보고, 가족 이산의 고통이 가족애를 통

해 극복되고 있음을 밝힌 글이다.

임진왜란기 포로 체험 실기는 강항의 간양록 , 노인의 금계일기 , 정경득의

만사록 , 정호인의 정유피란기 , 정희득의 월봉해상록 이 있다. 이들 기록

의 중심 내용은 가족의 이산과 재회의 과정이다. 가족의 이산과 재회를 다룬

전 문학은, 허목이 동래의 노파를 입전한 <동래구>가 있고, 소설로는 조위한

의 <최척전>을 거론할 수 있다.

포로 생활의 고난이 여실히 서술된 것은 월봉해상록 을 비롯한 실기이다. 실기

에는 포로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서술되어 있는데,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가족 이산과 그에 따른 고통, 귀환의지 등이다. 가족이산의 고통은 효성, 부부애,

부자애 등과 같은 가족애로 극복되고 있다. 작가의 내면화된 가족애는 꿈을 통

해 드러났다. 꿈은 귀환의지의 현몽이다. 따라서 가족애는 이산된 가족과 재회

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동래구>는 동래 노파의 기이한 행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어머니와 형제에

대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기이한 행적 서술 이면에 가족애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최척전>은 후반부가 가족 서사로 볼 수 있는 바, 가족의 이산과 재회

가 기본 서사이다. 여기서도 가족 이산을 극복하고 가족이 재회할 수 있는 원동

력으로 가족애가 자리하고 있다. 최척 부부의 부부애, 최척과 옥영, 그리고 홍도

의 효성 등은 개인보다는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가족애이다.

핵심어|임진왜란, 월봉해상록, 동래구, 최척전, 가족 이산, 효성, 부부애, 부자애, 가족애

Ⅰ. 머리말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명 피해 가운데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

포로문제였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은 대대적으로 조선인을 잡아갔다.

일본은 전쟁 전에 이미 전략적인 차원에서 포로부라는 특수부대를 조

직해 놓았다. 개전과 동시에 낙후된 그들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인

쇄공ㆍ도공 등의 장인과 학자ㆍ관료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해갔기 때문

에 그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포로의 숫자를 10만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40만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인조 21년까지 40여 년

간의 정치적 교섭을 통해 본국으로 쇄환된 자는 1만명 미달의 미미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

 

   

1) 이원순, 임진ㆍ정유재란시의 조선부로노예 문제 , 조선시대사론집 , 느티나무,

1993.

 

전후에도 포로 쇄환의 문제를 놓고 조정 내에서 정치적인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쇄환문제는 양국의 주

요한 정치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포로 중 일부를 풀어주었고, 조선에서도 통신사 겸 포로

쇄환사를 일본에 보내 다수의 포로를 귀환시켰다.

포로 문제는 문학적 소재로도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우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자신의 포로체험을 일기 형식의 글로 남겨 포로의

실상을 알게 해 주었다. 이들 일기에는 당시의 전쟁 상황이나 일본의

실상, 그리고 조선 포로들의 생활상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들의 기록은 일기 외에도 여러 형식의 글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실기

( )로 분류한다.

포로 실기는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잡혔다가 풀려난 작자들이 쓴 것

으로 강항( 1567~1618)의 간양록 , 노인( 1566~

1622)의 금계일기 , 정경득( 1569~1630)의 만사록 , 정호인( 1579~?)의 정유피란기

, 정희득(1573~1640)의 월봉해상록 등이 있다.

강항의 간양록 은 자신의 체험을 조정에 보고하려는 보고적 성격이 강한 글이다.

노인의 금계일기 는 작자가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명나라로 도

피한 뒤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만사록 , 정유피란

기 , 월봉해상록 의 저자는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함께 포로 생

활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내용 면

에서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2)

 

     2) 정경득의 만사록 , 정호인의 정유피란기 , 정희득의 월봉해상록 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정경득, 정희득, 정호인은 집안 사람으로 같은 날 함께 끌려가 같

은 곳에서 기거했기 때문에 서로의 일록에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이 세 작품의

일기 내용 중 중복되지 않는 부분은 월봉해상록 1일, 만사록 28일, 정유피

란기 33일이고, 나머지 224일이 공통되는 날이다.(이을호, 정유피란기 해제 ,

호남문화연구 제5집, 호남문화연구소, 1973.) 이것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기

따로 기록했는데, 어느 하나를 두고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채연은 이들

의 영향 관계를 두루 살피고는 정씨 형제가 강항의 간양록 을 참고했고, 정희

득의 월봉해상록 이 바탕글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이채연, 임진왜란 포

로 실기 연구 , 박이정, 1995, 88~93쪽.)

포로 체험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어서 이를 소재로 한 글은 실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 )과 야담을 통해서도 서술되었으며, 허구적 상상력

을 본질로 하는 소설을 통해서도 형상화되었다.

포로 체험을 수용한 전은 일반적인 전의 기본 특성인 인물의 포폄이

라는 목적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포로 체험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입전된 것이기에 인물의 품성을 따지기보다는 기구한 삶의 역정을 드

러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포로 체험의 내용 자체를 초점화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이수광(1563~1629)의 지봉집

, 안정복( 1712~1791)의 목천현지,정사신

( 1558~1619))의 매창집 에 수록되어 있는 <조완벽전>,

3) 그리고 채제공( 1720~1799)이 지은 것으로 번암

집 에 수록된 <신기금전>ㆍ<백의사전>,

임상원(1638~1697)이 입전하여 그의 염헌집 에 수록

된 <동래양부하전>, 허목( , 1595∼1682)이 지은 것

으로 미수기언 에 수록된 <동래구> 등이 있다.

     3) 이채연에 의하면, 지봉집 과 목천현지 에 실린 것은 내용면에서 거의 일치하

고, 매창집 의 것은 지봉집 에 비해 내용면에서 적은 분량이나 내용은 유사하

다고 한다. 이수광의 <조완벽전>을 정사신이 참조하여 자기 나름대로 첨삭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광수의 전이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보았다.(이채

연, 앞의 책, 162쪽)

포로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은 조위한( , 1567~1649)의<최척전>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조위한이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지은 소설이다.

우리 고소설사에서 작자와 창작연대가 밝혀진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음에 비해, 이 작품은 작자와 창작연대가 분명하게 알려

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는데, 전란 체험을 소설화했다는 데 주목하여 주로 사실과 허구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의 성격과 주제, 그리고 소설사적 위상을 밝히는 노력이 계속되었다.4)

   

  4) 김기동, 불교소설 최척전 소고 , 불교학보 11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74;

소재영, 기우록 논고 , 김성배교수회갑논문집 , 간행위원회, 1977

강진옥, 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 , 이화어문논집 8집, 이화여대

한국어문학연구소, 1986;

박일용, 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 , 고전문학연구 5집, 한국고전문학연구회, 1990;

박희병, 최척전 , 한국고전소설작품론 , 집문당, 1991;

민영대, 조위한과 최척전 , 아세아

문화사, 1993;

정명기, 최척전 , 고전소설연구 , 일지사, 1993.

   

연구자들은 이 소설의 성격을 불교소설,역사소설이면서 전란소설이기 때문에 사실주의적 소설, 포로소설, 실사

계소설, 애정소설 등으로 파악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를 드러냈다.

포로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에 대한 그간의 논의는 다양

하게 이루어져 왔다. 소재영은 <최척전>을 논하면서 피로문학의 유형 설정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간양록 , 금계일기 등과 같은 실기와 소설의 상관관계를 언급하기도 해 포로 체험의 문학연구에 기틀을 닦아 놓았다.5)

이후로 포로 체험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실기문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황패강, 이채연, 장경남의 연구가 그것이다.6)

이들의 연구는 실기의 문학성 규명과 그 의미의 탐색, 그리고

여타 문학과의 관련양상을 밝히는 데까지 나아가 실기문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갈래로 자리매김하는 성과를 얻었다.

포로 체험의 전에 관한 연구는 송철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7)

그는 포로 체험을 한 인물뿐만 아니라 임병 양란과 관련된 명장, 의병, 열녀,

효자 등을 입전한 인물전에 대해 연구하는 자리에서 포로전에 대한 논

의를 펼쳤다.

포로 체험의 모티브가 서사의 핵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고

소설의 하위 유형으로 포로소설의 유형 설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

어 주목을 끈다. 김진규의 논의가 그것인데, <최척전>, <김영철전>,

<이한림전>, <유록의 한>, <남윤전>과 같은 소설은 여타 유형과 다

른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로소설로 명명하고 연

구를 진행하였다.8)

5) 소재영, 임병양란과 문학의식 , 한국연구원, 1980.

6) 황패강, 임진왜란 실기문학 , 일지사, 1992;이채연, 임진왜란 포로 실기 연

구 , 박이정, 1995;장경남, 임진왜란 실기문학 연구 , 숭실대 박사학위논문,

1997.

7) 송철호, 임병양란 인물전 연구 ,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1995.

8) 김진규, 조선조 포로소설 연구 , 동의대 박사학위논문, 2003.

이로써 포로 체험의 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가 실로 다방면에서 이루

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각 갈래별로 그 존

재 양상과 문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고

에서는 포로 체험의 서사문학 가운데 각 유형별로 대표적인 작품을 택

하여 그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가족의 이산과 재회’의 문제를 거론하

기로 한다.

포로 체험을 형상화한 문학 작품의 대부분은 가족 이산의 고통과 재

회를 다루고 있다. 전쟁이 어떻게 가족을 파괴하며, 가족과 분리된 고

통의 무게가 어떠한가를 곡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

는 포로 체험을 형상화한 실기, 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을 선정하여

가족간의 이산과 재회의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포로 실기는 모두 가

족의 이산과 재회가 작품 구성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데, 월봉해상록

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전 작품 가운데는 <동래구>가 유일하게

가족의 이산과 재회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최척전>이 가족

의 이산과 재회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쟁에 의한 가족 이산과 재회에 있어 주요하게 작동하는 것은 ‘가

족애’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다루려는 작품에서도 가족애는 고난을

극복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각 유형별 작품을 통해 가족

애의 양상과 의미를 밝혀보기로 한다.

Ⅱ. 포로 체험의 기록과 가족애의 서술: 월봉해상록

 

포로 실기는 작자가 피랍되어 귀향할 때까지의 일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일기이지만 포로 체험의 다양한 양상

은 일기 외의 기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일기는 날짜별 기록임

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서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공통된 서술 구조

는 ‘피란-피랍-포로 생활-탈출-고난-귀향’으로 되어 있다. 이 구

조 속에 가족의 이산과 재회가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포로 실기에는 포로들의 생활상이 여러 모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일본으로 잡혀갔던 포로들의 생활상을 통해 그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괴산( )을 만났다. 그는 괴산( ) 사람이기 때문에 괴산이라 부르

며, 임진년에 잡혀 올 때는 나이 8세였는데 이제는 이미 14세가 되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양반집 아들’이라 하며 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따라서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다리 위에서 하천주( )를 만났다. 아

파성 아래 길다란 강이 있고, 강 위에 홍예다리가 있는데, 다리 위에서는

매양 열 사람을 만나면, 8~9명은 우리나라 사람이다. 하군은 진주( )

의 이름난 족벌인데, 왜인의 외양간 시중과 꼴 머슴을 살고 있다. 우리나

라 사람들은 달밤이면 다리 위에 모여, 혹 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며,

혹은 회포도 말하고 한숨지어 울부짖기도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진

다.9)

   9) 정희득, 월봉해상록 (무술년 3월 4일 조), 국역 해행총재 Ⅷ , 민족문화추진회,

1989, 238쪽. 앞으로 이 작품의 인용은 이 책으로 하고, 인용문 뒤에 해당 날짜

만 기입하기로 한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 에 서술된 내용이다. 포로들의 생활상을 단적

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괴산에 살다가 잡혀온 사람이기에 괴산이라고

부르는 소년을 만나 서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에 대한 그리움 때문으로 여길 수 있다. 이는 달밤에 다리 위에 모여

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며, 회포도 말하고, 울부짖다가 밤이 깊어

서야 헤어진다는 서술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타국에

서 고국 사람들끼리 만나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나누는 이야기는 물론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

아니었을까. 임진왜란으로 인한 가족 이산의 고통은 이렇게 실기를 통

해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포로 체험 문학에서는 가족의 이산과 재회를 어떻게 서술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포로 실기에는 저작자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일기 형식의 글로 쓴 것이기에 아주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가족 이산의 정황과 그로 인한 고통이 서술되어 있다. 포

로가 되면서 가족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

어 있다.

27일. 배가 칠산( )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적선을 만났다. 사

공의 놀란 고함 소리에 온 배에 탔던 사람이 창황실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드디어 어머님ㆍ형수님ㆍ누이동생과 더불어, 앞을 다투

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우리 형제는 적도( )가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으니, 망극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법포( )

에서 피란하던 배가 당초에는 바둑판 벌여 있듯 했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만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쳐, 간장이

찢어질 듯하였다. 왜장의 이름은 삼소칠랑( )이며, 바로 왜국

남해도( ) 아파수( ) 봉수하 가정( )의 별장이라

하였다. 이날 갑자기 해천( )이 참담하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광

풍이 크게 불고 폭우가 쏟아지며 물결이 공중에 솟구쳤다.

29일. 적이 우리 배를 끌고 다경포( )에 이르더니, 부친과 두 아이

는 늙고 어리다 하여 놓아 보냈다. 부친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조심

하여 함부로 죽지 말고 생환하여,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다시 보도

록 하는 것이 효자이니라.” 하시었다. 부자가 서로 떠나자니 정경이

망극할 뿐이었다. 우리 형제와 자평 형제, 그리고 정호인( ) 형

제만이 배 위에 있었다.(정유년 9월)

왜적을 피해 온 가족이 배에 올라 피란하였다가 이산을 하게 된 경

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적선을 만나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어머니, 형수님, 누이동생은 바다에 몸을 던졌고, 작자의 형제는 배 안

에 묶여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칠 뿐이다.

“간장이 찢어질 듯하였다.”는 서술에서는 당시에 작자가 겪었을 비참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다음날 다행히도 부친과 두 아이는 풀려났다.

부친은 작자에게 죽지 말고 생환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다시 만나는

것이 효자의 행위라고 강조하였다. 이 말은 작자가 포로 생활을 하는

내내 머리 속을 맴도는 말이었고, 꿈속에서 아버지를 뵐 때마다 듣던

소리였다. 가족 이산의 고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족 이산의 고통은 실기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포로 실기의

작자는 포로 생활 내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정황을 여실히 드러

냈다.

14일. 밤에 주수가 우리를 맞이하여 대접이 간곡했다. 내가 글을

써 보이기를, “어여쁘다 초생달아, 응당 고향에도 비치겠지.” 했더니,

주수가 가엾게 여겼다.

15일. 햅쌀을 보고 문득 객지의 세월 가는 것에 놀랐다. 고향 생각 갑절

이나 더하고, 비감한 눈물이 가슴속을 적셨다.

16일. 가정이 떡과 햅쌀을 보내오니, 아이들이 다투어 먹었다. 내

가 말하기를, “이 애들아 배 채우는 것만 다행으로 알지 마라.” 하고,

홀로 하늘을 쳐다보니 이 마음 두고두고 부끄럽다.

19일. 왜인 전칠의 집에서 쌍륙놀이를 보았다. 쌍륙은 우리

나라와 같으나 조금 달랐다. 내가 글을 써 보이기를, “하늘은 길고 바

다는 멀어 바라보는 눈이 마르려 한다. 어젯밤 꿈에 어린 자식이 문

에서 기다리더니 깨고 나니 슬픈 회포를 견딜 수 없었소.” 하였더니,

전칠이 민망스럽게 여겼다.

23일. 꿈에 기아(를 보고, 시름없이 일어나 앉았다. 가엾다, 제 아

비라고 부를 사람 없거늘, 어디서 또 엄마라고 불러 볼 것인가. 그 고

단함을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24일. 하루거리를 얻었다. 생각건대, 학질 귀신이 내 구차스레 살려는

것이 미워 나를 빨리 죽게 한다면 다행이라 싶었다. 낯을 가리고 끙

끙 앓으며 오직 빨리 죽기만 바랐다.(무술년 6월)

정희득의 월봉해상록 가운데 무술년(1598) 6월의 일기 일부이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사가 절절하게 잘 드러나 있다.

초승달을 본 후에 고향에도 떠 있을 초승달을 떠올리며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고, 햅쌀이 나온 것을 보고 고향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린다. 고

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은 꿈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꿈속에서나마

가족을 만나 위안이 될 것 같지만 꿈을 깨고 나면 그뿐이다. 슬픔은 더

욱 깊어져 어쩔 줄 몰라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행위로 드러났다.

더군다나 학질이 난 후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스러워 차라리 죽

어버렸으면 하고 한탄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가족 이산의 고통과 이로 인한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하루

빨리 왜국을 벗어나 귀국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켜 귀환 의지로

나타난다.

마침 의승( )으로 장연( )이라 부르는 자가 곁에 있다가, 글을 써

보이며 위로해 말하기를, “입은 옷이 얇아 딱하지만 이곳은 기후가 따뜻

하니 견딜 수 있을 것이오.” 하기에, 내가 답을 써 보이기를, “맘은 오직

환국하는 데 있을 뿐이니, 춥거나 더운 것은 상관하지 않소.” 하였더니

(……)(무술년 1월 3일).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하는 일은 오로지 귀환하는 일 외

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이 아무리 위로를 해도

마음속에 가득 찬 생각은 오직 귀환할 생각뿐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일념 물과 같이 도도해서”(1599년 1월 3일), “방금 옷을 벗어 가지고라

도 배를 사서 바다를 건너려고 낮밤으로 계획을 짜고”(1598년 12월 28

일) 했던 것이다. 귀환 의지는 작품 곳곳에 보이는 전한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지 19년 만에 귀국한 소

무에 관한 고사10)를 인용한 데서도 엿볼 수 있는데, 결국은 고향

에 돌아간 소무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귀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과연 아낄 만한 선비인가를 시험해 보는 데도, 억

지로 응하게 된다.

내 어찌 차마 이런 경우에 시를 지으리오마는, 돌아가 부친을 뵈옵기

는 오직 이 한 길이 있을 뿐이라 강작하여 잽싸게 지었더니, 그 중이 매

우 기뻐하여 제법 아까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무술년 2월 19일)

일본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사람 중에 글 잘하는 선비들은 그래도 후

하게 대접을 해 주었다. 그래서 그 재능을 시험하였는데, 작자는 오직

돌아갈 마음으로 시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괴롭지만 글품을 팔아서라

도 귀환하려고 하는 의지를 잘 보여준다.11)

10) 월봉해상록 에는 소무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히 나온다. 작품 곳곳에서 ‘

[양을 지킴]’, ‘ [눈을 씹음]’, ‘ [눈을 먹고 쥐를 잡아 먹음]’, ‘

[기러기 발에 부쳤던 편지]’, ‘ ’, ‘ [양을 치던 큰 못]’ 등의 숙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소무의 사적 속에서 나온 말이다.

11) 글씨 품을 팔아서 귀환을 도모하는 예는 강항의 간양록 에도 보인다.

“내가 왜의 땅에 들어온 후로 뼈라도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찍이 한 순간도 풀어진

적이 없었다. 왜국의 풍습은 돈만 있으면 귀신이라도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드디

어 를 따라 글씨 품을 팔아서 은전을 얻고는, 남몰래 임진년에 포로

된 사람 신계리ㆍ임대흥 등과 함께 서로 결탁하였다.”

귀환 의지의 바탕에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아내에 대한 부부애,

그리고 아들에 대한 부자애가 자리하고 있다. 정희득의 경우 타국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헤어

질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낸다. 왜적에게 잡혔

다가 풀려나는 아버지가 “조심하여 함부로 죽지 말고 생환하여,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다시 보도록 하는 것이 효자이니라.”라고 당부한 말

은 작자에게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1일. 내가 자평에게 이르기를, “모진 바람에 꿋꿋한 풀이 되자고 자네와

서로 격려했었지, 천지간에 죄 많은 내가 아직도 죽지 않으니, 어찌하

여 모진 목숨이 이토록 길던가?” 했다. 실로 한번 죽으면 이 한을 잊을

수 있었건만, 당초에 작별할 때 부친이 당부하시기를 ‘조심하여 함부

로 죽지 말고 돌아와 늙은 아비와 만나게 해다오.’ 하신 말씀이, 아직

도 분명히 귓가에 있기로 모질게 참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왜놈은 포

로를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어도 형제와 처자를 서로 갈라놓지는 않았

다. 그래서 나는 자평과 서로 헤어질까 두려워, 늘 자평을 일러 내 아

우라 하였다.(무술년 2월)

부친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여 귀향하는 것이 바로 부

친에 대한 효이다. 이는 작자로 하여금 고난의 삶을 극복하게 했던 주

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아내와의 부부애도 고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아내는 정절을

지켜 바다에 몸을 던지기 전에

“당신은 조심조심 몸을 아껴 형제분 함

께 아버님을 모시고 꼭 생환하도록 하시오. 이것이 바로 장부의 할 일

입니다. 간절히 비옵니다.”(정유년 9월 27일)

라는 부탁을 남겼다. 작자는 꿈속에서 죽은 아내와 만나곤 했다.

아내는 꿈속에 수없이 등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포로 생활의 고통을 잊게 하는 요인이었다.

정희득이 남긴 시 가운데에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것이 많다.

다음의 <망처가 내게 밥을 주는 꿈을 꾸고, 3수>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슬픈 마음 하소연하며 밥을 주어 먹었나니

당신의 넋도 먼 나그네의 주림을 알았구려

꿈속에서 끝없는 한 다 말하려 하였는데

슬프다 너 새벽 닭아 왜 잠을 깨우는가

또 꿈속의 말과 웃음 평시와 다름없어

마음속 무한한 슬픔 낱낱이 털어 놓네

한바탕 부부의 즐거움 일으켜 놀다가

깨어나니 외로운 베갯머리 눈물이 흥건

또 나그네로 병이 많아 못내 가슴 아픈데

영결한 그 음용 잠깐인들 잊을손가

생전의 한무덤 약속 이루지 못했거니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당신 얼굴 대하리 12)

12) 정희득, 앞의 책, 342쪽

사별한 아내와 꿈 속에서 만나 한을 풀려고 하였으나 새벽닭에 의해

잠이 깨어 슬퍼하는 모습이나, 부부의 즐거움을 일으켜 놀았으나 꿈

속의 일일뿐이라고 토로하는 부분에서는 작자의 애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잠시도 아내의 목소리와 얼굴을 잊을 수 없다는 작자

의 심회를 통해 부부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아내가 정절을 지키려

고 죽어서 영영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한편으

로는 진한 부부애가 고난 극복의 원동력이 됨을 알 수 있다.

.어린 아들에게 느끼는 아버지의 정도 고난 극복의 계기가 되고 있다.

10일. 밤에 꿈속에서 기아( )를 보았다. 이날이 바로 이 아이의 생일

이기에 연연한 심정이 평시보다 갑절이더니, 꿈 가운데 서로 보았으

니 실로 부자간의 인정이 저절로 이렇게 감응된 듯하다.(무술년 11월)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지내고 있는 어린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은 꿈 속에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왜적에게서 풀려난 두 아이와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에서 꿈 속에 보이는 아이들과 부친

은 작자에게 더없는 죄스러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월봉해상록 에 드러난 작자의 효성, 부부애, 부자애는 모두 가족애

로 수렴된다. 한 가족 모두가 왜적을 피해 피란선에 올랐다가 이산을

겪은 작자의 처지에서 보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가족애가 포로 생활의 고난을 이겨내고

귀환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에서의 간절한 소망인 귀환의지는 꿈을 통해 바로 나타나고 있

다. 이는 포로 체험을 기록한 실기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요소이다. 바

로 작가의 내면화된 가족애가 꿈을 통해 현몽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인의 금계일기 에 “밤꿈에 부친께서 나를 훈계하기를, ‘너는 모름지

기 걱정하지 말라. 어렵지 않게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꿈을 깨

고는 조금 스스로 위안할 수 있었다.”13)라는 서술은 이를 방증한다.14)

월봉해상록 은 포로 체험자의 실체험을 서술한 실기이다. 포로 체

험자의 가족애는 피랍된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에 대한 그리움으로

드러났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

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 노인, 금계일기 , 국역 해행총재 Ⅸ , 민족문화추진회, 1989, 16쪽.

14) 금계일기 에는 20여 개 처에 고향을 그리는 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Ⅲ. 기이한 행적 서술과 가족애의 구현:<동래구>

<동래구>는 표제에는 전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으나 글의 구성방

식으로 보아 전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은 동래의 사창이었던 한 노파가

왜국에 잡혀가 10여 년을 지낸 후에 사행을 따라 나왔으나 늙은

어머니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찾

아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작자는 작품 말미에

“아, 여자로서 능히 바다를 건너 만리 타국의 험난한 바닷길에서 모녀

가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자고로 남자도 하지

못할 일을 능히 해서 세상에 뛰어난 절행( )을 세워 오랑캐를 감화

시켰으니 아, 어질도다.”15)

라고 하였다. 노파의 절행으로 오랑캐를 감화시켜 귀국할 수 있었던 점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기와는 달리 전에서는 가족 이산의 과정이 요약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작자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이 아니라 체험자의 진술을 듣고

서술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이한 체험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전이 지

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래구>에 서술된 가족 이산에 대해 보기로 하자. 동래 노파는 본

래 동래의 사창이었다. 노파는 임진왜란 당시 30여 세의 나이로 왜국

에 잡혀가 10여 년을 지내다가 1606년 쇄환사와 함께 귀국하였

다. 이 작품의 서두는 노파의 출신과 피랍된 사실, 그리고 쇄환사를 따

라 귀국한 사실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행적 서술을

통해 가족 이산이 제시된다.

.노파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에 서로 간 곳을 몰랐다. 돌아

와서 그 어머니의 소재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난리에 잡혀가서 돌아

오지 않았다.” 하였다. 원래 모녀가 같이 왜국에 있으면서도 10년 동안을

서로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16)

노파와 늙은 어머니는 난리 중에 헤어졌다. 노파는 왜국에서 10여

년을 지내다가 돌아와서야 어머니도 왜적에게 잡혀갔음을 알았다. 전

쟁으로 인해 똑같이 포로의 신세가 되어 타국에 살고 있었으나 알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노파는 다시 어머니를 찾으러 왜국으로 건너

간다.

노파가 어머니를 찾는 과정 또한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다. 헤어진

어머니를 찾으러 왜국으로 다시 들어간 노파는 “거리에서 걸식하는 등

왜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전국을 누벼서 어머니를 찾았다.”17) 노

파가 어머니와 재회한 사실은 이렇게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어서

이 사연이 전국에 퍼졌고, 이 사연을 들은 왜의 추장은 어머니와 함께

송환하도록 허락을 하였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노파는 어머니를 모시

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재산도 직업도 없어서 살아갈 길이 없자 언니와

함께 함안 방목리에 거주하였다고 했다. 노파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노파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가능했다. 작자는 노파의 효성을 예사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노파를 입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효성이 지극한 노파는 어머니를 천

수까지 누리게 했다. 작품에서는 다시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작고하

자 자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자매가 의지하며

사는 모습은 조금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15) , 권22, “

16) , 권22, “

.”

17) , 권22, “ .”

18) , 권22, “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날마다 품팔이를 해서 생활을 하였다.

무릇 옷 한 가지, 음식 한 가지가 생기면 언니에게 먼저 주고 자신은 뒤

에 가졌다.18)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던 마음은 그대로 언니에게로 향하고

있다. 품팔이를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언니를 위하는 일화를

통해서 작자는 노파의 행적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효성이나 언니를 먼저 위하는 자매애는 바로 가족애가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는 논평을 통해서 남자도 하지 못할 일을 능히 해낸

노파의 절행을 칭찬하고 있다. 이 작품의 입전 의도는 여기에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노파의 절행은 가족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기이한 행적 서술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실천한 가족애가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

다. 이로써 이 작품을 가족애의 구현체로 볼 수 있다.

Ⅳ. 가족 이산의 고통을 극복한 가족애의 실현:<최척전>

<최척전>의 서사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보면, 최척과 옥영이

결연하는 데까지 이르는 서사가 전반부로 이는 애정전기의 틀을 유지

하고 있다. 정유재란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재회의 서사인 후반부는

전 시기의 애정전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

이 바로 이 작품의 후반부 서사이다. 분명히 전반부 서사는 남녀간의

결연을 축으로 하는 애정전기의 전통을 잇고 있다. 작품 서두는 재자

( ) 최척이 가인( ) 옥영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설

정했고, 결연 과정에서 장애를 만나지만 극복해 내고 사랑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어 애정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전

전기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가 작품 후반부에 개입한다. 전란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재회가 그것이다. 전란의 횡포로 인한 비극을 극

복하고 전란의 참상을 이겨낸 가족애를 작품 후반부의 서사 중심으로

놓고 있는 것이다.

정유년 8월에 왜구가 남원을 함락시키자 최척의 가족은 지리산 연곡

사로 피란을 갔다. 옥영은 남장을 하고 최척을 따랐다. 왜적은 연곡사

까지 약탈을 했고, 이 과정에서 최척의 가족은 이산의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온 가족을 잃고 상심에 빠져 지내던 최척은 여유문( )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여유문이 죽자 강호를 떠돌며 두루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그러던 중 주우( )를 만나 주우와 함께 배를 타고 여기

저기 장사를 다니다가 안남( )에 이르게 되었다.

최척이 안남에 이르러 아내를 만나게 된 데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이 큰 역할을 했다. 주우를 만나기 전에 최척은 여유문과 의형제를 맺

었고, 여유문은 자신의 누이를 최척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는데, 최척

이 완고하게 사양하였다.

저는 온 집안이 왜적에게 함몰되어 늙으신 아버지와 허약한 아내가 살

았는지 죽었는지 아직까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상복을

벗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놓고 아내를 얻어 편안한 생활

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19)

19) 조위한, <최척전>, 이상구 역주, 17세기 애정전기소설 , 월인, 1999, 207쪽.(이

하 작품 인용은 이 책에 의한다)

최척이 결혼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처지에 어찌 새로 아내를 얻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척의 가족애를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가족

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타국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갈 이유가 되

었던 것이다.

한편, 옥영은 왜병인 돈우( )에게 붙들렸는데, 돈우는 인자한 사람

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옥영의 영특함을 사랑하여 일

본의 집으로 데려가 보살폈다.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닐 때마다 옥영을

데리고 다녔고, 안남에 이르게 되었다.

날짜는 어느덧 4월 보름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물

은 비단결처럼 빛났으며, 바람이 불지 않아 물결 또한 잔잔하였다.(……)

이때 문득 일본인 배 안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는데, 그 소

리가 매우 구슬펐다. 최척은 홀로 선창에 기대어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즉시 행장에서 피리를 꺼내

몇 곡을 불어서 가슴속에 맺힌 회한을 풀었다. 때마침 바다와 하늘은 고

요하고 구름과 안개가 걷히니, 애절한 가락과 그윽한 흐느낌이 피리 소

리에 뒤섞이어 맑게 퍼져 나갔다.(……)잠시 후에 일본인 배 안에서 조선

말로 칠언절구를 읊었다.(……)시를 읊는 소리는 처절하여 마치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하였다. 시를 다 읊더니, 그 사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

다. 최척은 그 시를 듣고 크게 놀라서 피리를 땅에 떨어뜨린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20)

20) 조위한, <최척전>, 209~210쪽.

자신의 고단한 신세를 하소연하기 위해 부르던 피리와 시 구절은 최

척 부부가 상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 인용문의 낯선 타향에서 자신

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불었던 피리, 또는 시 구절은 포로 실기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달밤이면 다리 위에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휘파

람도 불며, 혹은 회포도 말하고 한숨지어 울부짖으며 하루하루를 보내

고 있다고 월봉해상록 에는 기록하였다. 또는 시를 주고 받으며 회포

를 풀기도 하고, 서신을 주고 받으며 위로를 하면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포로 실기에는 서술되어 있다.

최척은 배 안에서 들려왔던 시구가 바로 아내 옥영이 지은 것임을

알아차린다. “조금 전에 저 배 안에서 들려왔던 시구는 바로 내 아내가

손수 지은 것이라네. 다른 사람은 평생 저 시를 들어도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일세.”21)라고 한 최척의 진술을 통해 헤어지기 전에 최척 부부

의 애정은 아주 깊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깊은 부부애는 타국에

서 서로를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 옥영 또한 마찬가지이다. 옥

영이 들었던 피리 소리가 조선의 곡조인데다, 평소에 익히 들었던 것

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그래서 남편 생각에 감회가 일어 저절로 시를

읊게 되었던 것이다.”22) 이야말로 지음( )의 관계이다. 결국 부부애

는 헤어졌던 최척 부부가 재회할 수 있었던 동력으로 작동한 것이다.

재회한 최척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와 거처를 정하고 살아간다. 그러

나 친척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의 생활은 편치 않았다.

그래서 항상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생각에 눈물이 마른 적이 없었

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심에 쌓여 있었다. 최척은 머나먼 이국 땅에

서 더 이상 살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묵묵히 기도하였다.23)

항상 늙은 아버지와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의 행위는 고

향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이다. 늘 가족의 기억이 가득한 고향을 떠올

리는 최척의 모습을 통해 사무치는 가족애를 엿볼 수 있다.

21) 조위한, <최척전>, 210쪽.

22) 조위한, <최척전>, 211쪽.

23) 조위한, <최척전>, 213쪽.

최척 부부는 아들 몽선을 낳고 홍도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홍도의

아버지는 홍도가 젖을 떼기도 전에 조선에 출병하였다가 돌아오지 않

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홍도는 이모에게 의탁하고 있던 처지였

다. 홍도는 아버지가 타국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고 늘 슬퍼하며 자신

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나라에 한 번 가서 넋을

불러 놓고 통곡한 뒤, 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는 것”24)이

홍도의 소원이었다. 홍도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조선인 몽선이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청하여 몽선의 아내가 되었다. 아버지를 향한

홍도의 효심은 최척 부부에게 전달되었고, 이로 인해 아버지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24) 조위한, <최척전>, 213쪽.

장면은 바뀌어 무오년 명․청 교체기의 또 다른 전란이 작품의 배경

이 되었다. 최척은 서기로 차출되어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 명나라 군

사는 패했으나 최척은 조선인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고 피랍된다. 이때

몽석도 남원에서 무예를 익히다가 출전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포로가 되

어 최척과 같은 곳에 갇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부자는 극적으로 상봉

을 한다. 그리고 늙은 오랑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최척 부자의 탈출을 도와 준 늙은 오랑캐는 실기 저작자들의 탈

출을 도와준 중국인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행위를 통해 전장에서도

따뜻한 인간애가 발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척을 전장터로 보낸 옥영은 남편의 군대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남편은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아들 며느

리와 함께 뱃길로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그 형세로 보아 아버님을 찾아 반드

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내가 본국으로 찾아 가야겠다. 만약 네 아

버지가 전사하셨으면, 내가 몸소 창주로 가서 시신을 찾고 넋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 선산에 장사를 지내 외로운 혼백이나마 편케 해야겠

다.(……)지금까지 나는 이역 땅을 떠돌아 다녔으며, 죽을 날도 얼마 남

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가 없구나. 늙으신

시아버님과 홀어머니를 순식간에 이별하고 품속의 어린 아들마저 갑자

기 잃어버린 채, 아직까지 그들의 생사도 모르고 있다.25)

25) 조위한, <최척전>, 221쪽.

옥영이 아들 몽선에게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한 말이다. 남편,

시아버지, 홀어머니, 어린 아들에 대한 옥영의 사랑은 다름 아닌 가족

애이다. 고국에 있을 가족을 생각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절강에서 배를 띄워 서해로 나왔던 옥영 일행은 명나라

순찰선과 일본 상선 등을 만나 우여곡절을 겪다가 방향을 잃고 무인도

에서 표류하고, 급기야 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기는 등 천신만고 끝에

조선 배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와 온 가족이 재회하게 된다.

<최척전>의 후반부 서사인 가족의 이산과 재회에는 실기에 서술된

체험 상황이 투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는 전란의 참상 가운데

가족의 이산 문제를 다루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가족애를

설정한 것이다. 온 가족의 재회에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부부애, 부자

애가 작용하고 있다. 바로 가족애가 이산된 가족을 재회하게 한 원동

력이 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실기에서는 가족애의 재현으로 꿈이 설정되면서 고향

으로 향하는 추동력이 되는 데 비해, <최척전>에서는 이 기능을 장육

불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척전>에서 만복사의 장육불은 모두 다

섯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장남 몽석을 잉태할 때이고, 두 번째는 옥

영이 포로가 되어 선상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하려고 할 때,

세 번째는 절강에서 부부가 재회하여 둘째 아들 몽선을 낳을 때이고,

네 번째는 옥영이 명나라 군대로 출정했던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

고 나서 희망을 잃고 곡기를 끊어 죽으려 할 때이다.

마지막은 바다를 건너 돌아오던 일행이 도적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할 때 절벽에서 떨어

져 목숨을 버리려 할 때이다. 매번의 고비에서 장육불은 현몽하여 가

족의 회복과 재회를 돕는다.26)

26) 김현양은 <최척전>에서 가족 재회의 근원적인 추동력을 ‘장육불의 음조’와

‘인간애’로 보고 있다.(김현양, 한국 고전소설사의 거점 , 보고사, 2007, 85~

105쪽 참조.) 필자는 이 견해에 동조하면서 ‘가족애’를 추가하고자 하는 입장이

다.

<최척전>에서 수용한 가족 이산의 문제는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당시의 전쟁 체험 세대라면 누구나가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바

로 자신들의 문제였다. 이러한 점은 포로 실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실

기에서도 가족 이산의 슬픔이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구나가 공감하고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

는 문제가 바로 가족 이산이었기 때문에 다른 소재에 비해 보다 쉽게

소설로 수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27)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족적 가치질서는 가족 내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일반을 규정하는 근본적 가치 체계로서 작용해 왔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는 민족과 국가라는

공동체를중시하는 태도로 확장되어 나가는데,28) 바로 이러한 면모가 엄청난 전

란을 겪고도 조선조 사회가 지탱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가족 중시의 경향은 가족애로 치환할 수 있다.

가족 이산의 고통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이를 극복하는 계기는

.

27) 이채연, 앞의 책, 126쪽.

28) 김원식, 동아시아의 가족주의 전통과 민주주의 , 사회와 철학 5호, 사회와철

학연구회, 2003, 139~140쪽.

무엇보다도 가족애임을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기 포로 체험 문학에서 가족 이산과 재회를 다룬 문학 작품의 근간에

는 가족애가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Ⅴ. 맺음말

임진왜란기 포로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실기문학, 전,

소설 등으로 다양하다. 직접 포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포로 체

험을 실기를 통해 드러냈다. 강항의 간양록 , 노인의 금계일기 , 정

경득의 만사록 , 정호인의 정유피란기 , 정희득의 월봉해상록 이 그

것이다. 이들 작품은 피란에서 귀환할 때까지 겪은 일을 일기 형식이

나 보고문의 형식을 통해 기록으로 남겼는데, 기록의 중심 내용은 가

족의 이산과 재회의 과정이다. 가족의 이산과 재회를 다룬 전 문학으

로는 허목이 동래의 노파를 입전한 <동래구>가 있고, 소설로는 <최

척전>이 있다.

포로 생활의 고난이 여실히 서술된 것은 월봉해상록 을 비롯한 실

기이다. 실기에는 포로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서술되어 있는데,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가족 이산과 그에 따른 고통, 귀환하려는 의지 등

이다. 가족 이산의 고통은 효성, 부부애, 부자애 등과 같은 가족애로

극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내면화된 가족애가 꿈을 통해 드

러나고, 이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현몽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족애는 이산된 가족과 재회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하

고 있다.

<동래구>는 동래 노파의 기이한 행적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이한 행적의 이면에는 어머니와

형제에 대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인공의 기이

한 행적 서술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주인공이 실천

한 가족애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을 가족애의 구현체로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최척전>의 후반부는 가족 서사로 볼 수 있는 바, 가족의 이산과

재회가 기본 서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도 가족 이산을 극복하고 가

족이 재회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가족애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다.

최척 부부의 부부애, 최척과 옥영, 그리고 홍도의 효성 등은 개인보다

는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가족애이

다. 이 소설을 가족애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체험하면서 겪은 가족 이산의 문제는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당시의 전쟁 체험 세대라면 누구나가 느끼고 공감할 수 있

는 바로 자신들의 문제였다. 이러한 점은 포로 실기에서 가족 이산의

슬픔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을 겪으면서 느끼게 되었던 가족애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이후에 창작된 전이나 소설에서도 이는

다시 반복되어 다루어졌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

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애’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자료

, , 국역 해행총재 Ⅷ , 민족문화추진회, 1989.

, , 이현석 역,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1986.

, , 국역 해행총재 Ⅱ , 민족문화추진회, 1989.

, , 국역 해행총재 Ⅸ , 민족문화추진회, 1989.

, ,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1986.

조위한, <최척전>, 이상구 역주, 17세기 애정전기소설 , 월인, 1999.

허 목, 미수기언 , 민족문화추진회, 1986.

2. 논저

강진옥, 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 , 이화어문논집 8집,

이화여대 한국어문학연구소, 1986, 225~252쪽.

김기동, 불교소설 최척전 소고 , 불교학보 11집, 동국대 불교문화연

구소, 1974, 177~190쪽.

김원식, 동아시아의 가족주의 전통과 민주주의 , 사회와 철학 5호,

사회와철학연구회, 2003, 139~140쪽.

김진규, 조선조 포로소설 연구 , 동의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1~

173쪽.

김현양, 한국 고전소설사의 거점 , 보고사, 2007, 85~105쪽.

민영대, 조위한과 최척전 , 아세아문화사, 1993, 1~367쪽.

박일용, 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 , 고전

문학연구 5집, 한국고전문학연구회, 1990, 73~97쪽.

박희병, 최척전 , 한국고전소설작품론 , 집문당, 1991, 83~106쪽.

소재영, 임병양란과 문학의식 , 한국연구원, 1980, 267~285쪽.

송철호, 임병양란 인물전 연구 ,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1995, 1~99쪽.

, , 박이정, 1995, 1~334쪽.

장경남, 임진왜란의 문학적 형상화 , 아세아문화사, 2000, 1~459쪽.

정명기, 최척전 , 고전소설연구 , 일지사, 1993, 883~898쪽.

정환국, 17세기 애정류 연구 ,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

문, 2000, 1~249쪽.

, 과 , 일지사, 1992, 1~231쪽.

Abstract

The Literature of Prisoner of War Experience and

The Family's Love o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is paper cleared aspect of the family dispersion and meeting again that appear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prisoner of war experience literature.

As a result, I knew that pain of family dispersion is overcome through family's

love.

When it i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literary works that do prisoner

of war experience to main contents are Kanghang's <Kanyangrok>, Noin's

<Kemkyeilki>, Jeongkyungdeuk's <Mansarok>, Jeonghoin's <Jeongyupiranki>,

Jeonghuideuk's <Wolbonghaesangrok>, Heomok's <Dongraegu>, Jowihan's <Choecheokjeon>. Main contents of these works are family's dispersion and meeting again.

It is the silki literature including <Wolbonghaesangrok> that trouble of prisoner

of war life is described like truth. Various life of prisoner of wars was described

in the silki literature. Main contents family dispersion and accordingly suffering,

will to return be. Pain of family dispersion is overcome by family's love such

as filial piety, conjugal love, love between father and son etc.. Writer's internalized

family's love was detected through dream. Dream is vent of return will. Therefore,

family's love is operating by factor that can meet again with separated family.

<Dongraegu> is a work that show operate by power that Dongrae old woman's

filial piety, brotherhood can overcome trouble. Second half of <Choecheokjeon>

is family narration. Family narration makes family's dispersion and meeting again

main contents. This work is same with different work. Family's love is operating

by factor that can meet again with separated family. Is caused in conjugal love,

filial piety is attitude which taking a serious view family more than individual

seen in this work. This is family's love justly.

Key Word: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family's dispersion, conjugal love, filial

piety, love between father and son, family's love

투고일:2008. 4. 14. 심사완료일:2008. 5. 23. 게재확정일:2008. 6. 13.

한국문화연구14집

 

임진왜란기 포로 체험 문학과 가족애.pdf
1.0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