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소설사에서 17세기는 전환기로 인식되곤 한다. 그만큼 이 시기 이후로 그 이전 시기의 작품들과 질적인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그 렇다면 17세기에 새롭게 부각된 소설 내적인 변화는 무엇일까?
본고는 17세기 이 후로 상인이나 상업 행위, 또는 상거래 풍속을 담아낸 일련의 작품들이 현저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되, 17~18세기 고소설 작품 중에 소위 ‘상업소 설’ 혹은 ‘상인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2)와 함께 이러한 작품들이 주로 관심 갖고 형상화한 주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구해 보고자 한다.
1) 흔히 17세기의 소설사적 특징으로 「홍길동전」으로 대표되는 국문소설의 등장, 전기소설의 질적인 변화, 임ㆍ병 양란 체험 후의 현실자각과 이로 인한 사실적 서술 위주의 역사소설의 등장, 비판적 성격이 강한 몽유록계 소설의 출현, 번역소설의 유행, 김만중ㆍ조성기의 걸출한 소설 등장, 소현 성록 같은 장편소설의 등장 등을 들 수 있다.
2) 현전하는 야담 중에 변화하던 상거래문화 및 화폐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듯이, 소설 작품 중에서도 그러한 변화상 내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 물 론 ‘상인’소설 또는 ‘상업’소설이라 부를 만큼, 상업 또는 상거래 문화 전반을 주된 서사축으로 삼 아 창작된 작품이 다수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부분적이나마 소재 측면에서라도 상업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 17세기 이후에 비로소 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 작품은 뒤 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물론 일부 연구자들이 이와 관련해 이미 선행 연구에서 경제담론을 통해 향 유층의 경제관념과 문학적 형상화 문제를 고찰하거나3) 소설의 생산ㆍ유통ㆍ소비 라는 경제 활동적 측면에서 소설사회사적 의미를 짚어낸 것이 다수 존재한다. 4)
3) 신선희, 고소설에 나타난 부의 구현양상과 그 의미,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1); 박일용, 「<왕경룡전>계 애정소설의 흐름과 사회적 성격」, 조선시대의 애정소설(집문당, 2000); 임형택, 「 화폐에 대한 실학의 두 시각과 소설」, 민족문학사연구, 18집(민족문학사학회, 2001) 등.
4) 한국고소설연구회(편), 고소설의 저작과 전파(아세아문화사, 1993); 조동일,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지식산업사, 2001); 이윤석ㆍ大谷森繁ㆍ정명기(편저), 세책 고소설 연구(혜안, 2003); 이민희, 16~19세기 서적중개상과 소설ㆍ서적 유통관계 연구(역락, 2007) 등.
그 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대개 17세기 이후의 경제생활과 상업, 돈, 치부(致富) 등 경 제생활 전반과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를 개별 작품에서 미시적으로 찾아내려 한 것으로, 통시적, 거시적 시각에서 사회상의 변화와 연관 지어 그 윤곽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통시적 관점에서 화폐경제 생활이나 상거래 문화를 살피기 위한 방법 중 하나 로는 작품에 등장하는 상인, 또는 상거래, 화폐경제의 존재양태를 유형화하는 것 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소설에서 당시 경제사회 현실과 세태를 그대로 포착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라기보다 이전과는 다른 관심사의 표출과 그것의 구 체적 표현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의 시대적 함의와 문학적 의미가 어떠한지 재음 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17세기 이후 소설 작품에서 화폐경제 를 바라보는 긍정적ㆍ부정적 시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화폐경제의 사 회상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 살펴보려 한다. 그리하여 이들 소설 향유 독 자들이 특히나 도시에 거주하던 도시인의 화폐경제적 삶의 특성을 일정부분 담아 내고 있는 바, 그 소설사회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생각해보려고 한 다.
그 과정에서 상인소설 혹은 상업소설로서의 논의가 가능한 지의 문제도 간단 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II. 화폐경제를 보는 긍정적ㆍ부정적 시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후 17세기 조선사회는 현실 자각과 새로운 세계 인식의 욕구로 새로운 인간형과 사건을 다룬 서사물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시기 등장한 소설 중 몇 작품에서는 그 이전 시기와 달리 생활상의 핍진한 서 술이 현저해진 것을 목도하게 된다. 특별히 상업 또는 상거래에 대한 사대부(지식 인)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해 낼 수 있는데 그 초기적 면모를 「최척전」에 서 찾아볼 수 있다. 최척전에서 주인공 최척은 그의 아내 옥영과 전쟁으로 헤어 진 후 중국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중국인 친구 송우와 의기투합해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宋佑라는 사람이 있었는데…경전과 역사에 해박했고, 공을 세워 명성 떨 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저술을 업으로 삼았다.…송우가 최척을 친근하 게 字로 부르며 말했다.…“남은 생이 얼마나 된다고 불로장생의 약을 먹고 굶 주림을 참으려 괴로움을 자초하면서 산도깨비의 이웃이 된단 말인가? 나와 함께 배 타고 오ㆍ월 땅을 오가면서 비단이나 차를 매매하며 남은 생을 즐기 는 게 세상사에 통달한 사람의 할 일 아니겠나?” 최척이 홀연 깨닫고 마침내 송우와 함께 길을 떠났다. 경자년(1600) 봄이었다. 최척은 송우를 따라 한마 을의 장사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장사하러 갔다. 5)
5) 박희병(標點ㆍ校釋), 「崔陟傳」, 韓國漢文小說 校合句解(소명출판, 2005), 434쪽. “適有宋佑者,… 博通經史, 不屑功名, 以著書爲業,…字陟而謂曰: ‘…餘生幾何, 而何乃服食忍飢, 自苦如此, 而與山鬼 爲隣乎? 子須從我而歸, 浮扁舟適吳,越, 販繪賣茶, 以娛餘年, 不亦達人之事乎?’ 陟洒然而悟, 遂與同 歸. 歲庚子春, 陟隨佑, 與同里商舶, 往賈於安南.”
송우라는 중국인은 원래 학문에 힘쓰던 위인이었는데, 지기(知己)로 지내던 최 척이 떠나가려 하자 최척에게 함께 장사할 것을 제안한다. 중국에서는 ‘가난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상인이 되라’는 말도 있듯이, 과거에 낙방해 벼슬길이 막힌 지 식인의 경우,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상인으로 나서는 일이 빈번했다. 6) 그러니 사실
6) 박제가(저)/안대회(역), 북학의(돌베개, 2003), 97쪽. “중국 사람은 가난하면 장사를 한다. 그렇더라 도 사람만 현명하면 원래 가진 풍류나 명망, 절개는 여전하게 대접받는다. 따라서 유생이 거리낌 없이 서사를 출입하기도 하고, 재상조차도 직접 隆福寺 앞 시장으로 가서 골동품을 사기도 한다.”
송우의 제안은 중국 지식인 입장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사농공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조선에서 온 선비 최척이 선뜻 장사에 뛰어 들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7) 상업은 조선에서 농업이나 공업보다도 훨씬 더 천 시 받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작품에서 친구 송우의 말을 들은 최척은 “홀연 깨닫고(陟洒然而悟)” 함 께 장삿길을 떠났다고 했다.
7) 최척의 신분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지극히 평범한 인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의 양반인 것으로 보인다.
8) 상업은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힘써 노동의 대가로 만들어낸 물건에 이익을 붙여 파는 일이었 기에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업은 상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에 상업을 천시했던 것이다.
과연 이때 최척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일 까? 앞뒤 문맥과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송우의 말을 듣고 그동안 자신이 그동안 추구해온 가치관과 유교적 신념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자각과 함께 살기 위해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현실 인정의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최척이 처한 상 황이 전란의 와중에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떠도는 신세라는 점, 그래서 그가 처한 극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여러 문학적 장치로 그런 심적 변화를 설정한 것이라 는 점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령 ‘가족과 훗날 만나기 위해’서나 ‘살기 위해’서건 장삿길에 뛰어들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 그 자체가, 현 실자각을 작품 속에 서술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의 소설 작품에서는 쉽 게 발견되지 않는 캐릭터의 변화이기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일시적이 었지만, 최척은 ‘생업’을 위해 상업 활동을 시작했으며, 타의에 의한 소극적 행위 였다 할지라도 최척이 중국을 거점으로 월남까지 장사하러 다녔다는 서사적 설정 자체가 의미심장하며 이를 읽는 독자 역시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임에 틀림없 다. 이는 상업행위를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핍이 있는 현실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으로 상거래와 현실적 삶을 소설에서도 적극 차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9)
9) 체험담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최척의 삶을 입전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 기록자의 의식 속에 내재한 현실반영 인식태도는 적어도 17세기 이전 시기의 그것과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최척처럼 글 읽던 선비가 상인이나 경제활동의 주체로 나서는 일은 17세기 이후로 몰락양반이 늘어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10)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업과 상인을 폄하하거나 천시하는 의식은 18세기에 들어서도 크게 달 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11)되는 「숙향전」(하 버드대 엔칭도서관 소장본)에는 마고할미가 숙향을 찾아온 이선에게 시험 삼아 거 짓말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마고할미는 숙향이가 병신이고, 상인의 딸이라는 이유를 대며 만나지 못하게 한다. 12) 당시 병신이나 상인은 그 자체로 사회에서 통 념상 가장 멸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던 부류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가 하면 「왕 경룡전(王慶龍傳)」13)에는 작품 곳곳에서 철저히 돈에 따라 인간관계를 맺고 끊으 려는 속물적 인간상과 물질 만능주의 세태가 잘 드러나 있다. 14) 주인공 왕경룡이 돈이 다 떨어졌을 때 기생어미는 더 이상 그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해 왕경룡과 연인 사이가 된 기생 옥단에게 그를 버릴 것을 서슴없이 요구한다. 15)
10) 조선사회에서 상인의 상행위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16세기부터였다. 임란 전부터 사회 경제적으로 상인층이 성장하고 지방 장시와 관청수공업이 발달하고, 군역의 포납화(布納化)와 양 역화, 공물의 방납 등이 성행해 사회운영에 심각한 변동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백승철, 「17 세기 국가주도의 상업론과 상업정책」, 오영교(편), 조선후기 체제변동과 속대전(혜안, 2005), 345~353쪽. 오히려 17세기는 전란의 후유증으로 그러한 사회경제 변동이 더욱 가속화되고, 본격 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한 작품들이 전란 후 속속 등장하면서 상업이나 상 인을 소재로 하는 것이 대단히 낯선 현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1) 조희웅, 「국문본 고전소설 형성연대 고구」, 국민대 논문집, 12집(1978), 29~31쪽.
12) 이상택ㆍ박희병ㆍ임치균ㆍ송성욱(엮음), 「숙향전」, 고전소설의 기초연구(태학사, 2001), 118쪽.
13) 중국의 警世通言 제 24권에 있는 「玉堂春落難逢夫」를 개작한 소설인데, 번안의 차원을 넘어 개 작의 완성도가 탁월하기에 국내 소설의 범주에서 다룰 만하다.
14) 박일용, 「<왕경룡전>계 애정소설의 흐름과 사회적 성격」, 조선시대의 애정소설(집문당, 2000), 302~348쪽에서 이에 관해 자세히 다룬 바 있다. 그밖에 정학성, 「≪신독재수택본 전기집≫의 17 세기 소설집으로서의 성격과 위상」, 고소설 연구, 13집(한국고소설학회, 2002), 5~31쪽을 참고할 만하다. 「왕경룡전」은 늦어도 인조 연간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간호윤, 先賢遺音(이회, 2003), 33~34쪽 참조.
15) 정학성, 「왕경룡전」, 역주 17세기 한문소설집(삼경문화사, 2000), 129~130쪽. “경룡의 돈주머니 는 바닥이 나서 어느 물건이고 댈 수가 없어, 도리어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기생어미 가 하루는 옥단에게 몰래 말하기를, ‘왕 공자의 재산이 이미 바닥이 나 이로울 것이 더 없겠다. 네가 잠시 피해 있으면 왕공자는 반드시 떠날 것이다. 네가 어찌 가난한 사내만을 지키면서 비싼 몸값을 허비해서야 되겠느냐’라고 했다.”
작품에서 기생 어미는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인간관계를 끊는 전형적인 속물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중국소설의 번안물이라 하나 서사상 나타나는 물질관과 기방문화는 이미 조선 독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윤색된 것이다. 이는 화폐경제 사회의 가치관 문제와 함께 상행위, 사채, 뇌물, 인신매매 등 개인적 물욕을 추구하는 군상을 잘 그려낸 낙천등운(落泉登雲)이 역시 번안소설임 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상층 독자층을 확보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
16) 낙천등운의 창작시기를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이 상층 여성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이유는 시정 세태소설로서 돈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가 부정적 관점에서 핍진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렇듯 험악한 세태의 시련 속에서도 남녀주인공과 이들을 도와주는 보조인물들이 힘 을 합쳐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극명히 그려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한양은 이미 화폐가 경제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 된 도시였다. 청부(淸富)를 가장 이상적인 부의 형태로 인식했던 사대부나 고위 관 료들까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고17) 특히 부자 상인들과 고위 관료층이 결탁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현상이 18세기 초 이후로 빈번해졌다.
17)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태학사, 2007), 192쪽.
오죽하면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이 “재상 명관으로 여항 사람들과 결탁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 관계가 친척보다도 밀접하다”18)고까지 했을까.
18) 李宜顯, 陶谷集(28), 「雜著」. “余因此思之, 今之爲宰相名官者, 閭巷間以富名者, 無不相結欵密, 殆 踰於族戚.”
「사씨남정기」만 보더라도 악인 동청이 죽었을 때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재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 재물을 취하고자 이를 빼돌리려는 부정적 인물들의 작태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그려놓고 있다. 쇽졀업시 장안 거리의 요참고 그 가산을 젹몰니 황금이 사만 량이오 기여 금쥬보는 불가승슈러라 (중략) 몸의 가진 바 경뵈만코 진의 영거야 온 거시 십만산이라 냥인(=교씨와 냉진, 인용자 주)이 쾌활야 보화를 싯고 가더니 한 곳의 니르러 쥬졈의 드러 냥인이 술을 진야 구러져 더니19)
19) 김만중, 謝氏南征記사씨남정긔(영창서관, 1925), 67쪽.
냉진이 상황이 불리함을 알고 동청을 배반해 참소하고 동청의 가산과 재물을 모두 취하자 교씨 또한 냉진의 재물 많음을 알고 다시 냉진과 사통하게 되는 과정 을 서술한 대목 중 일부다. 이런 서술은 이전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단순히 관념적, 또는 관습적 표현의 결과가 아니다. 20)
20)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시기는 은화 사용과 더불어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시작한 때였다. 참고로 현 전 홍길동전의 창작시기 문제는 논외로 하고, 17세기 초 창작물로서의 홍길동전에서는 도적 들이 해인사 재물을 약탈하고자 할 때 화폐가 아니라 백미 20석을 보내 시주하는 척 하면서 절 을 점령한다. 또한 율도국에 들어갈 때 임금께 간청해 쌀 일천 석을 얻어 가지고 간다. 이처럼 홍길동전에서 쌀이 화폐를 대신해 물건 값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서술해 놓은 것과 분명 대비되는 것이다.
물질을 중시하던 당대 분위기를 인식하면서
이를 비판적 시각에서 당시 돈과 재물에 탐닉하던 부정적 인간상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세기 말 열렬한 소설독자였던 유만주 가 자신의 일기인 흠영 1786년 1월 8일조에서 사씨남정기를 읽고 “슬픔과 기 쁨, 괴로움과 즐거움을 이리저리 밀고 당기고 더하고 빼고 하니 비록 참인 것 같 으나 거짓이고, 거짓인 것 같으나 또한 참되다”21)고 말한 것도 교씨와 동청, 냉진 등 부정적 인물을 부각시켜 화폐경제 시대에 물질과 돈에 노예가 된 탐욕스런 인 간형을 현실감 있게 형상화한 작품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21) 유만주, 欽英 6(서울대규장각, 1997), 1786년 1월 8일조, “夜續聽南征內文, 悲歡苦樂, 推遷乘 除, 雖眞亦假, 雖假亦眞.”
상인, 또는 상거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18세기 실학자들의 작품에서 오히려 더 날카롭게 드러난다. 비록 풍자적 의미가 강하지만. 박지원(1737~1805)은 「양반 전」에서 “(양반은) 손에 돈을 집지 말아야 하고 쌀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手毋執 錢, 不問米價]”라고 했다. 22) 당시 사대부들은 직접 상거래를 하지 않고 종을 보내 물건을 매매하는 것이 관례였음을 보여준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후, 그의 친 구들에게 선비가 스스로 장터에 나가 물건을 비교한 뒤 장사꾼들과 물건 값을 흥 정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는 심회를 적어놓기도 했다. 23)
22)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 양반의 허례의식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타 당할 것이다.
23) 허경진, 사대부 소대헌ㆍ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2003), 103쪽에서 재인용. “학사 승귀가 시장에서 손수 여우털로 만든 외투를 하나 골라서 길이와 품을 맞춰보기도 하고 입으로 털을 훅 불어보기도 한 다음, 손수 돈을 꺼내서 사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대부나 지식인들이 비록 가난할지언정 직접 상거래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풍조가 감지된다. 18세기 후반에 성행하던 상업과 신분적 제약, 그리고 생 계유지를 위한 상업적 행위에 대해 자기 고민과 내적 갈등에서 자유로웠던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한문단편 중에는 돈(화폐)과 화폐경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지만 않음 또한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화폐경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세태를 감계 하려는 교훈적 목적에서 돈의 긍정적 기능을 피력하거나 올바른 물질관을 제시한 작품들도 나타나고 있다. 연암의 「열녀함약박씨전」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과부 로서의 그녀의 고단했던 삶을 들려주면서 문양과 글자가 닳아 없어진 ‘돈’의 내력 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24)
24) 朴趾源, 燕巖集(1), 「烈女咸陽朴氏傳」. “吾有以示若.” 出懷中銅錢一枚曰: “此有輪郭乎”…母垂淚曰: “此汝母忍死符也. 十年手摸, 磨之盡矣.…思想生於幽獨, 傷悲因於思想, 寡婦者, 幽獨之處而傷悲之至 也. 血氣有時而旺, 則寧或寡婦而無情哉.”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왜 하필 돈을 굴려 고독을 이기려 했다고 했을까? 그것은 당시에 돈 한 푼 없이 과부로서 지내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만큼 ‘돈’을 매개로 한 유혹 또한 적지 않았음을 의미하 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돈을 좇기보다 돈을 제어해 평상심을 얻으려 한 데서 교 훈을 삼고자 한 것이다. 과부로 살아가기 어려운 시기에 ‘죽음을 참아 낸 부적’과도 같은 물건으로 돈은 그 시대 여성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서광문자전후(書廣文者傳後)」에서도 한때 조직폭력배로서 수만 냥의 재산을 모 았었지만 나이 들어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어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가는 표철주(表 鐵柱) 25)란 인물과 거지 광문이 대화하는 내용이 나온다. “자네도 이제 늙었으니 어떻게 먹고 사나?” 했더니 “집안이 가난해서 집 주름 노릇을 한다네.” 하였다. 광문이 “자네도 이젠 다 되었구먼. 아아, 예전엔 자네 집 재산이 수만 냥이라고 해서, 자네를 황금투구라고 불렀지. 지금 그 투구는 어디 있나?” 했더니 그가 “이제는 나도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다네” 하였다. 26)
25) 조직폭력배 집단인 검계(劍契)의 일원. 집주름(부동산 중개업자)을 하며 활동했던 이로, 호는 망동 (望同)이다.
26) 朴趾源, 燕巖集(8), 「書廣文者傳後」. “汝今老矣. 何能自食?.” 曰: “家貧爲舍儈.” 文曰, “汝今免矣. 嗟呼. 昔汝家貲鉅萬, 時號汝黃金兜, 今兜安在?” 曰: “今而後吾知世情矣.”
광문이나 표철주가 현재 빈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수 만 냥의 부를 가졌던 표 철주가 이제는 상인으로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갈 뿐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세 상 물정을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인생이 원래 그러하다’는 사실, 즉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소유한다는 건 잠시일 뿐, 세상의 인기나 명성 도 한낮 연기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연암은 방향 없이 돈만 쫓으려는 세태를 경계하고 유교적 윤리관의 재무장을 주문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에는―16세기 작품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화폐경제 사회의 면모와 상업관의 실제적 모습을 묘사, 또는 서술해 놓은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 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한문단편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 반영적이며,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진 형태로 형상화되어 나타나 고 있다고 할 것이다.
III. 17~18세기 고소설에 나타난 화폐경제의 사회상
1. 화폐의 사용과 매점매석
그렇다면 17~18세기 소설에서 주로 발견되는 화폐경제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주된 양상을 본고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현물거래 가 아닌 화폐를 사용한 거래가 소설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창작된 작품에서는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데, 그 이유 는 은화가 주요 결제수단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 은이 물품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 되기 시작한 임란 직후부터이기 때문이다. 오희문의 쇄미록만 보아도 거기에 매 년 물품 거래 내역과 지불수단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1598년 이후부터 기존의 결제수단이던 면포나 쌀 대신 은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7) 신 흠(申欽, 1566~1628) 또한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주둔한 이후로 은화가 대대적 으로 유통되기 시작해 은값이 폭등하고 사재기가 일어났다고 했다. 28) 그러나 처음 부터 은과 은화가 서울ㆍ경기를 벗어나 지방에서도 널리 유통된 것은 아니었다.
27) 명나라 지원군이 1592년 말에 조선에 들어와 모든 물자를 은으로 조달하고 있었지만, 시중에서 은이 사용되게 된 것은 5년 정도가 지나서야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이정수ㆍ김 희호, 조선의 화폐와 화폐량(경북대학교출판부, 2006), 117쪽 참조.
28) 申欽, 「山中獨言」, 象村稿 卷之五十三. “至壬辰倭警, 中國以銀頒賜我國, 軍糧軍賞, 亦皆用銀, 以 此銀貨大行.…市井買賣之徒, 不畜他貨, 唯用銀爲高下.…而銀價翔貴, 閭閻間廢居子母者, 仍以牟大 利.…可見其世變之易流而難遏也
서울과 평안도 등 상업이 발달한 일부 지역에서만 국지적으로 은화가 사용되었는 데, 1678년에 상평통보가 발행된 이후로 점차 동전이 은전을 누르고 상거래의 주 요 결제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29) 더욱이 17세기 이후로 장시가 전국적으로 세워지게 되자, 상평통보와 같은 동전 의 통용 범위는 계속 확대되어 1720~30년대에 북으로는 회령, 서쪽으로는 의주, 남으로는 동래와 제주도에서 사용할 정도가 되었다. 30) 「허생전」에서 허생이 제주 도로 건너 가 그곳에서 생산되는 말총을 모두 사서 매점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 나도 바로 휴대와 운반이 쉬운 화폐를 사용한 덕분이었다. 물건이 아닌 화폐가 결 제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도시에서는 18세기 초에 이미 동전이 교환을 위한 필수적인 매개물이 되 었는데, 이러한 사정이 소설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31)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18세기 서울에서 생활 할 때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지낸 날이 드물었다고 했다. 32) 그런가 하면 남공철 (南公轍, 1760~1840)은 “서울에선 돈으로 살아가고 지방에선 곡식으로 살아간다” 고까지 했다. 33)
29) 은화는 17세기 후반에 서울 등 상업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중심적인 화폐로 기능했으나, 일반 농 촌에서는 널리 유통되지 못했다. 은화 유통은 17세기 후반에 가장 활발했지만, 18세기 들어 점차 위축되다가 중반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이후로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이 감소되고,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동전 사용이 대거 늘어났게 되었기 때문이다.
30) 국사편찬위원회(편),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두산동아, 2006), 77쪽.
31) 소설에서 은전, 또는 동전 따위의 화폐가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로 작품의 창작 시기와 현실 반영 여부를 간접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32) 정수환, 「18세기 이재 황윤석의 화폐경제생활」, 고문서연구, 20집(한국고문서학회, 2002), 179쪽.
33) 南公轍, 金陵集(10). 「擬上宰相書」. “生民之業, 京師以錢, 八路以穀.”
이처럼 화폐가 일상생활에서 주요한 생활수단, 매매수단으로 자리 잡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허생전」이다. 「허생전」을 상거래 활동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허생이 종로판에서 최고 부자인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린다.
2. 만 냥으로 과일(대추ㆍ밤ㆍ감자ㆍ석류ㆍ귤ㆍ유자 등)을 매점매석하여 열 배, 즉 10만 냥의 이익을 남긴다. 제주도에 가서 말총을 구입해 역시 열 배의 이익을 남긴다.
3.변산에 사는 수천의 도둑들에게 빈 섬에 가 살 것을 제안하고, 허생이 배에다 30만 냥을 싣고 나타난다. 천 명의 도둑을 상대로 한 명 당 100냥을 주며 아내 한 명과 소 한 마리씩을 데리고 오게 한다. 이때 허생은 2천 명(1천 쌍)이 1년 동안 먹을 양식을 혼자 장만하고 기다린다.
4.섬에 들어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은 후 3년 간 먹을 식량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 싣고 31만호가 있는 장기도로 가서 곡식을 팔고 은 100만 냥을 거둬들인다.
5. 도둑 부부들이 섬에서 계속 살기를 권면하고 허생은 은 50만 냥을 바다 속에 버리고 배를 모두 불살라 버린다.
6. 조선에 돌아와 전국을 다니며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다.
7.남은 10만 냥을 가지고 변씨에게 가 빌렸던 돈을 되갚는다.
8. 변씨가 은을 몽땅 가지고 허생을 찾아가 돈의 증식을 부탁하나 거절당한다.
9.몇 해가 지나 둘의 정이 두터워졌을 때, 변씨가 허생에게 어떻게 5년 동안 100만 냥을 벌었는지 자본 증식의 노하우를 물어 보자 허생은 비로소 그 이치를 말해준다.
내용인즉슨, 허생이 변 부자로부터 신용에 의한 무담보 무상대출을 받아 매점매 석의 방법으로 목돈을 만들고, 무인도에다 일종의 인적, 물적 투자를 해 무주택자 들에게 무상으로 정착,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까지 쳐서 빌린 돈 의 10배를 부자에게 되돌려주자 오히려 부자는 허생에게 투자 및 재산 증식 노하 우를 묻게 되고, 이에 허생은 재테크 및 투자ㆍ자금 운영에 관해 조언을 해주고 나라경제를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허생이 5년 동안 벌어들인 100만 냥은 당시 조선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 큼 상당한 액수였다. 34) 18세기 초ㆍ중반 조선에서의 동전 유통량이 500만 냥 정 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35)
34) 당시 은화 1냥은 동전 4냥에 해당했다. 보통 동전인 상평통보 1개를 한 닙[一葉] 또는 한 푼[一文] 으로 불렀다. 10푼이 곧 1錢이었으며, 10전이 1兩에 해당한다.
35) 1678~1697년간 관에서 주조한 동전은 약 450만 냥이었으며, 18세기 초ㆍ중반에는 약 500만 냥의 동전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편), 앞의 책, 76쪽 참조.
나랏돈의 1/5을 개인이 소유한 셈이 된다. 그런데 연암은 「허생전」에서 단순히 돈의 운용방법을 제시하거나 조선후기의 경직된 경제 체계를 비판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변씨가 놀라 “그대의 얼굴빛이 전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만 냥을 잃 어버린 모양이지?” 하자, 허생이 웃으면서 “재물 때문에 얼굴빛이 윤택해지는 것은 그대들이나 하는 일이지 만 냥이 어찌 도를 살찌게 하겠는가?” 하였다. 10만 냥을 변씨에게 주면서 “내가 한때의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글 읽기를 마 치지 못했으니, 그대에게 빌린 만 냥이 부끄러울 뿐일세.” 하자, 변씨가 크게 놀라서 일어나 절하였다. 10만 냥을 사양하고 1/10의 이자만 받으려고 하였 다. 허생이 크게 노하여 “그대가 어찌 나를 장사치로 대우한단 말인가?” 고는 소매를 떨치며 가 버렸다. 36)
36) 朴趾源, 熱河日記(10), 「許生傳」. “卞氏驚曰: ‘子之容色不少瘳, 得無敗萬金乎.’ 許生笑曰: ‘以財粹面, 君輩事耳, 萬金何肥於道哉.’ 於是以銀十萬, 付卞氏曰: ‘吾不耐一朝之饑, 未意讀書, 慙君萬金,’ 卞氏 大驚起輩辭謝, 願受什一之利, 許生大怒曰 : ‘君何以賈竪視我’, 拂衣而去.”
밑줄 친 부분에서 연암의 경제관 내지 재물관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돈이 도 를 살찌게 하지 못한다.”는 언명은 유교적 도가 상업적 재물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부의 소유 여부보다 도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의미한다. “빌린 만 냥이 부끄럽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시 고리대업이 흔히 있던 것임을 보여줌 과 동시에 고리대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양반으로서 생계유지에 대한 문제를 신 경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또한 당시 채무를 변제하고자 할 경우 빌린 돈의 1/10을 이자로 받던 관행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허 생전」에서는 허생이 자신이 돈을 불릴 수 있었던 노하우, 즉 매점매석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나라 안에서도 두루 다니지 못하지. 그래서 온갖 물건이 이 안에서 생겼다가 이 안에서 사라지게 되지. 대 체로 천 냥은 적은 재물이어서 물건을 마음껏 다 살 수는 없겠지만, 이를 열로 쪼갠다면 백 냥 짜리가 열이 될 테니 열 가지 물건을 사기에 넉넉하지. 물건이 가벼우면 돌려 빼기가 쉽기 때문에 한 가지 물건이 비록 밑졌다 하더라도 아 홉 가지 물건은 이문이 남는 법이야. 그런데 이건 보통 이문을 남기는 방법이 고, 작은 장사치들이나 쓰는 방법이지. 37)
37) 위의 책, “朝鮮, 舟不通外國, 車不行域中. 故, 百物生于其中, 消于其中, 夫千金小財也. 未足以盡物, 然析而十之, 百金十亦足以致十物, 物輕則易轉. 故, 一貨雖絀, 九貨伸之, 此常利之道, 小人之賈也.”
요컨대 안전한 자금운용의 방법으로 분산 투자를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 데, 소액 투자자들의 소극적 이윤 추구의 장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천 냥을 가지 고는 물건을 매점매석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뒤에서 “대체로 만 냥만 가지면 한 가지 물건은 넉넉히 다 살 수 있으므로, 수레에 실린 것이라면 수레를 모조리 도 거리하고, 배에 실린 것이라면 배를 온통 도거리하며, 한 고을에 가득 찬 것이라면 그 고을을 통틀어서 살 수 있다네”38)라고 것과 상통한다. 즉 당시 독과점에 의한 이윤 창출은 주로 거금을 소유하고 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었던 상식적 상술과 같았다. 39) 문제는 이러한 독과점 내지 독점거래가 결국 나라경제를 악화시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연암 역시 돈이 있다고 해서 자기 이익만을 쫓아 물건을 매석 하는 일은 경계 나라를 병들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 박아 말했다. 결국 연암이 말하려고 했던 문제의 본질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허생의 말에 고 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38) 위의 책, “夫萬金足以盡物. 故, 在車專車, 在船專船, 在邑專邑.”
39) 물건 사재기나 매점매석의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려는 방식은 재리(財利)에 밝은 사람이라면 일 반적으로 생각하거나 추구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소대헌(1682~1764)은 상업에 직접 관 여하지 않았지만,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살았으므로 물건을 사고파는 상거래를 자주 했다. 어느 날 청지기에게 시켜 보리 수십 가마를 사들였는데, 청지기가 날이 가물어 흉년이 들면 그 댁이 소유 한 보리 값이 올라갈 것이라며 소문을 내자, 불러다가 꾸짖고 벌을 내렸다고 한다. 허경진, 사대 부 소대헌ㆍ호연재 부부의 한 평생(푸른역사, 2003), 103쪽 참조. 그런가 하면 중국의 소설 금 병매에서도 주인공 서문경(西門慶)이 죽은 후 회계를 맡은 한도국(韓道國)이 흉년이 들어 면포 가격이 폭등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아두었던 포목을 대량으로 판매해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그 려진다. 이런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후기에 私商이 성장하면서 난전상업이 활발해지 자, 정부단속이 없는 상태에서 사상들이 생산지에 진출하거나 교통의 요지를 장악해 유통을 제어 함으로써 가격을 임의로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만 냥을 버는 재주가 나한테 있지만,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법으로 나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만 냥을 얻은 후에는 그의 복에 의지해 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내가 만약 사사롭게 일을 시작했다면 그 성패는 알 수 없었 을 것이다. 40)
40) 朴趾源, 앞의 책. “吾自料吾才足以致百萬, 然命則在天, 吾何能知之. 故, 能用我者有福者也.…若吾 私自與則成敗亦未可知也.”
사사로이 욕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장사를 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는 것이 요체라 할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사 용해 얼마나 도에 맞게 바르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데 그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허생 역시 매점매석이 기본적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써먹을 수 있는 상거래 방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방법이 성공하느냐 하 는 문제는 하늘의 뜻, 즉 도리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결 국, 부의 축적으로 일반 양반들보다 생활면에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상인의 출현과 그 과정에서 팽배해져 가는 지나친 물질 추구의 사회적 행태를 연암은 소 설이란 문학양식에서 마음껏 펼쳐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2. 납속책과 신분해방 문제
소설 속에 투영된 화폐경제 사회의 또 다른 단면으로는 신분해방을 위한 속량 (贖良)과 납속책(納贖策)을 들 수 있다. 임란 이전부터 납속은 존재했지만 공식적 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란 후 이것이 제도적으로 실시됨으로써 서얼 계층이 나 향리들도 이제는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게 되었다. 41)
41) 納贖策은 조선시대 군량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한다거나 흉년ㆍ기근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 적으로 백성들에게 곡물과 돈을 받고 품계나 관직 등을 수여하거나 노비신분을 해방시켜 주거나 양인에게 군역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는 등 일종의 특권을 부여해 주던 정책을 말한다
18 세기 영조 대에는 납속책의 일환으로 서얼허통첩(庶孼許通帖)이 발행됨으로써 서얼 도 널리 문무 과거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돈이나 물건으로 신 분 상승이 가능하게 되고, 천인도 돈만 있으면 양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홍길동전」이 17세기 초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신분제 의 변화가 아직 견고했기 때문이었음을 방증한다. 특별히 17세기 중엽 이후로 돈을 어느 정도 소유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신분제가 크게 요동하면서 노비나 양인이 각종 역과 과도한 세금징수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는 일이 속출했다.
그 결과 이들의 신분을 돈으로 대납해 그 역을 모면케 하거나 신분을 바꿔주는 일까지 성행하게 되 었다. 이처럼 돈으로 신분을 사거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 려 한 시기가 17세기 이후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척전」의 경우, 최척과 옥영이 극적으로 만난 후 최척의 친구인 송우가 옥영의 일본인 주인 돈우에게 옥영의 몸값으로 ‘백금 3정’을 제시하는 대목 이 나온다. 42)
42) 박희병 標點ㆍ校釋, 「崔陟傳」, 韓國漢文小說 校合句解(소명출판, 2005), 436쪽. “鶴川請於頓于, 欲以白金三錠買歸.”
여기서 ‘백금’은 은을 의미하며, 정(錠)은 흔히 화폐로 사용된 은의 단위로, 1정이면 은화로 약 50냥 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몸값으로 내놓은 ‘백금 3정’은 은화로 약 150냥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그때는 노비를 매매할 수 있었던 만큼, 작품에서 제시된 몸값은 당시의 매매 값을 현실적으로 반영해 놓은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영철전」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품에서는 말년에 김영철이 평생 군역을 져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조선에 돌아온 김영철이 경진년(1640)에 다 시 종군하게 돼 임경업의 명을 받고 밀서를 명나라 장수에게 전하자, 명나라 장수 는 그에게 은 30냥과 베 20필을 선물로 준다. 43)
3) 홍세태(저)/박희병ㆍ정길수(편역), 「김영철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돌베개, 2007), 84쪽. 이후 명나라 군이 후금의 홍타이지 군대에 패하고 조선에서는 축하 인사차 김영철을 홍타이지에게 보 내자, 홍타이지는 영철에게 비단 10필과 몽고말 1필을 하사한다. 이때 영철은 아라나의 말을 훔 쳤던 죗값을 갚는 의미로 하사받은 말 1필을 아라나에게 주자, 이 소식을 들은 홍타이지는 다시 노새 한 마리를 영철에게 주었다. 그러자 영철은 자신이 타던 말을 역시 중국에 남겨 둔 아들 득 건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다음해(1641)에 영철 은 예전에 자신을 포로로 잡고 있었던 후금 장수 아라나에게 다시 붙잡히고 만다. 이때 그는 호조 군수물자인 잎담배 200근을 대신 물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 다. 44)
44) 위의 책, 87쪽.
문제는 봉황성으로 돌아온 영철에게 조선정부는 잎담배가 호조의 군수물자 이기에 이를 개인적으로 갚아야 한다는 데 있다. 영철이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유림이 영철에게 말했다. “금주에서 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내놓은 잎담배는 호조의 군수물자니, 네가 갚도록 해라.” 영철이 집으로 돌아와 몇 달이 지나자, 호조에서 관향사에게 공문을 보내 영철에게 은 200냥을 받아 내라고 독촉했다. 영철은 노새를 팔고 가산을 모두 털었지만 겨우 그 절반밖에 낼 수 없었다. 나머지 100냥을 마련할 길이 없어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시 부족했다. 45)
45) 박희병 標點ㆍ校釋, 「金英哲傳」, 韓國漢文小說 校合句解(소명출판, 2005), 548쪽. “英哲歸到鳳 凰城. 琳謂英哲曰: “金州贖汝南草, 戶曹軍需物也. 汝其還之.” 英哲還家數月, 戶曹牒管餉使, 督英哲銀二百兩. 英哲鬻靑騾, 傾其家藏, 僅納其半, 而餘無以辨, 賴親族力助, 以足其數.”
현실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이 서사적 상황과 서술 속에 절절이 드러나 있다. 그 런데 이처럼 지방 관아에서 나라를 위해 종군했다가 포로가 된 김영철에게서 오히 려 구해 준 대가를 악착같이 받아내려 한 이유 역시 현실적이다. 거기에는 당시 지방사회의 현실, 곧 전란 직후의 함경도, 평안도 등 사행길 주변 지역의 열악한 재정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김영철의 기구한 삶은 전쟁으로 인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선 당대의 불합리한 부역제도에 기인한 측면 또한 적지 않다.
이 중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하층민의 삶과 17세기의 경제 사회상을 「김 영철전」에서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화폐경제 사회의 모순적 단면을 서사적으로 탄탄히 얽어내고 있는 「김영철전」이야말로 부분적이나 상업소설적 요소를 배태하 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밖에 돈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해 준 이야기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유우춘전(柳遇春傳)」에 보면, 유우춘이라는 이의 형제를 유득공의 종씨 금대거사 라는 이가 5천 錢을 내서 그의 두 아우를 속량시켜 주었다고 했다. 46) 5천 전은 곧 동전 5백 냥으로, 은화로는 약 125냥 정도였다.
46) 이우성ㆍ임형택(공역), 「柳遇春」, 이조한문단편집(中)(일조각, 1978), 413~414쪽. “吾(=居士, 인 용자)裏足踔二千里, 得五千錢, 歸李將軍家, 贖此二弟.”
「옥갑야화」에 소개된 이야기 중 역관 홍순언이 창관(娼館)의 여인을 은 2천 냥에 속량해 주었다는 것도 이와 유사 한 이야기이다. 「낙천등운」에서는 돈을 벌 목적으로 창모가 여자를 사서 창녀로 만들고, 또 세도가 집안에 비싼 값을 받고 시집보내는 작태가 노골적이고 구체적 으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돈, 또는 거기에 준하는 물품으로 신분을 사거나 군역의 의무를 대신 지거나 각종 세금을 내거나 하는 일이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각종 청탁성 뇌물로 사용하는가 하면, 김영철처럼 속죄금의 명목으로, 또는 운반 과정에서의 간편함 때문에 화폐가 빈번하게 사용되 었다.
그런 경제생활의 단면이 여러 소설작품에 다양한 시각으로, 그리고 사실적 으로 일련의 경향성을 띠고 나타난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단순히 소재로 화폐를 언급한 것도 있지만, 「김영철전」ㆍ「허생전」 등 일부 소설에서는 작품 전반의 서사구조나 주제의식이 화폐경제의 제 문제를 총체 적이기까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업소설적 성격을 띤 작품으로 적극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3. 고리대금업의 성행과 폐단
상거래가 발달하고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사회현상 중 하나가 고리 대금업의 성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치부담을 자극해 돈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삶이 피폐해진 인간 군상들도 다소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간상을 소 설로 담아낸 것 중 하나가 「왕경룡전」이다.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가 고리 대금업을 하며 살던 위공(魏公)이 아들 왕경룡에게 예전에 동시(東市)의 부유한 상 인에게 빌려 준 은 수 만 냥을 받아 가지고 오라고 시킨다. 47)
47) 정학성 역, 앞의 책, 189쪽. “魏公曾有貸銀數萬於東市富商, 商適興販江南不返. 故, 魏公將行留景龍 語曰: ‘銀兩數萬, 家之重貨, 不可使一蒼頭責其徵還, 汝其取來.’”
그런데 거금을 받아 가지고 오던 왕경룡이 기방에 들어가게 되면서 돈에 눈이 먼 기생어미를 비롯한 속물적 인물들과 관계하면서 여러 화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 진다. 화폐경제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주된 서사축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고리대금업의 구체적 모습은 한문단편에서 오히려 더 사실적이고 다양하게 나 타난다. 예컨대, 이조한문단편집(上)에서는 부자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 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날 법한 사건을 소재로 삼아 다룬 이야기가 여럿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본다.
선대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자가 된 어떤 서울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고 식리 만 일삼다가 직접 상업에 투자할 심산으로 강경에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상 거래의 경험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데다 도무지 분위기에 정신을 잃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절뚝발이 거간꾼을 만난 그는 생면부지의 그 거간꾼에게 10만 전을 주어버리고 그냥 서울로 돌아갔다. 거간꾼은 그 돈으로 엽연초를 대량 구입하여 이듬해 담배가 품귀할 때 한꺼번에 처분하여 10배의 이익을 보았다. 거간꾼은 서울 부자에게 원금을 돌려주고 많은 이자를 함께 주려 했 으나, 서울 부자는 “본전을 잃지 않고 일가족의 명을 구제했으니, 나의 소득 또한 적은 적이 아니라. 하필 분수 밖의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으리오”하고 본전만을 받았다.<강경(江景)>48)
48) 이우성ㆍ임형택(편역), 이조한문단편집(上)(일조각, 1973), 50~53쪽; 심경호, 「한문단편에 반영된 객주의 상업활동」, 우전 신호열선생 고희기념논총(창작과비평사, 1983), 395쪽 요약문을 재 인용.
여기서 절뚝발이 거간꾼은 허생이 매점매석을 통해 단기간에 큰 이득을 얻은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부자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을 가지 고 식리(殖利)만 챙기다가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직접 돈을 굴려보려고 실물경제 현장으로 뛰어들었는데, 감각이 없어 거간꾼에게 그냥 십만 전을 맡기고 돌아서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후에 거간꾼이 성공해 이자까지 되돌려주려 하자 빌려 준 돈만 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거간꾼과 부자 사이의 기본적 인관관계 가 철저히 신용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서로가 윈-윈(win-win) 전략을 맺기라도 한 듯, ‘돈이 없는’ ‘불구자’ 거간꾼은 부자로부터 돈을 받아 이를 증식 시켜 부를 창출해 내는 반면, ‘돈은 많지만’ ‘상술이 부족한’ 부자는 거간꾼의 도 움으로 자신의 재산을 유지, 증가시켜 나가게 되었다는 데 있다. 즉 한문단편에서 고리대금을 다루고 있는 요체는 상거래 주체간의 신용 문제와 인간관계에 방점이 놓여 있다. 작가의 관심은 화폐경제 사회에서 요청되는 일종의 도덕적 모럴을 제 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상인층의 시민적 의식의 층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광문자전」에 등장하는 ‘돈놀이 꾼’은 아예 전문적 고리대금업자라 할 만하다.
이때 돈놀이꾼들은 대체로 머리 장식품이나 구슬 비취옥 따위 또는 옷ㆍ그릇ㆍ 집ㆍ농장ㆍ종 등의 문서를 전당 잡고서 밑천을 계산해서 빌려주었다. 그러나 광문은 남의 빚을 보증서면서도 전당 잡을 물건이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 천 냥도 대번에 승낙했다. 49)
49) 朴趾源, 燕巖集(8), 「廣文者傳」. “時殖錢者, 大較典當首飾璣翠衣件器什宮室田僮奴之簿書, 參伍本 幣以得當. 然文爲人保債不問, 當一諾千金.”
‘돈놀이꾼’은 구슬이나 머리장식품, 살림도구, 심지어 집과 노비문서 등을 전당 잡고 밑천을 빌려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거지의 우두머리였던 광문이 ‘약방 부자’ 집에 기거하며 심부름을 해주다가 주인과 다른 부자들과 상인들로부터 신뢰를 얻 게 되자, 광문에게는 전당품목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것도 천 냥이나 되는 돈 을 조건 없이 빌려줬다고 했다. 물건을 전당잡히고 돈(화폐)을 대출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화폐와 물건이 주종관계에 있으며, 화폐가 일상생활에서 요긴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 돈놀이꾼이 상대를 보고 담보 없이 신용 대출을 해 주기도 했다는 데 있다. 변 부자가 허생에게 만 냥을 신용으로 빌려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듯 「광문자전」에서 확인되는 전당업과 고리대금업, 그리고 신용에 의한 상 거래 문화는 18세기에 일상적인 것이자 관행적인 것임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는 비록 적실한 자료는 없지만, 세책업의 형성, 발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 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세책업자는 세책본 소설을 빌려주고자 할 때 먼저 전당을 잡고, 책을 빌려주었다가 대출자가 책을 반납할 때 비로소 대여료 를 받는 방식을 취했다.
전당품을 잡고 책을 대여해 주는 형태는 세책업이 발달한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외국과 달리 전 당을 잡고 돈(고리대금) 대신 책을 대여해 주는 형태의 세책업이 성행한 것은 아 무래도 전당업과 고리대금업이 발달하면서 이를 세책점에서 벤치마킹한 결과가 아 닌가 싶다.
시기적으로도 18세기 중반에 세책업이 성행한 반면, 전당업이나 고리 대금업은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성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전당업과 고리대금업을 겸한 상업의 성행과 세책업의 발달 간의 개연성만큼은 열어둘 필요 가 있을 것이다.
IV. 17~18세기 화폐경제와 소설 향유의 주체로서의 도시인
이상 17~18세기 여러 소설 작품에서 화폐경제 사회의 몇 가지 단면들, 즉 매점 매석이나 고리대금업, 납속책, 화폐를 이용한 상거래, 그리고 긍정적, 부정적 상업 관 등의 노출과 그 현실 반영적 요소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성장에 따른, 소설의 세태묘사와 현실반 영은 결국 소설 향유의 주체, 즉 소설 작가와 독자, 분배자의 취향과 관심사, 그리 고 사회 구성원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폐경제 사회상을 담보한 소설 작품을 향유하는 주체, 즉 소설 속 사건과 등장인물의 행동 및 성격을 공감하거나 때로는 배척할 수 있는, 그리고 상품가치 를 지닌 소설을 향유할 수 있었던 독자는 과연 누구들이었을까? 주지하듯이 중농주의를 내세우던 조선에서 근대 이전에 창작된 소설 작품들 중 농민(소작농)과 농촌, 또는 토지문제를 다룬 소설은 전무하다. 반면 상층(왕실과 사대부가) 남성과 여성이나 여항인(중인, 서리, 상인 등), 또는 특수계층(기생, 무 인, 도인, 천민 등)의 인물을 주인공 또는 보조인물로 한 일군의 소설들(한문소설 과 국문소설 모두 포함)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이것은 소설의 성격 및 장르적 특 성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발달 및 화폐경제의 융성, 부 의 축적과 유흥 등 사회경제 환경의 변화를 생활 속에서 느끼며 그 자장 안에서 생활하던 주체들이 소설 향유의 중심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구성원의 계층과 직업이 다양 화되었는데, 이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드러내 보이고 경제사회의 주체로 급성장한 이들은 ‘위항인(委巷人)’ 또는 ‘시정인(市井人)’으로 불렸던 ‘여항인(閭巷人)’이라 할 것이다. 50) 기존 연구자들은 이러한 여항인을 대체 로 신분 및 직업적 동질성에 기초한 집단, 즉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을 중심으로 한 중간 계층이라고 규정해 왔다. 51) 그러나 여항인이 신분적ㆍ직업적 규정으로 제 한된다면 18세기 후반 서울의 도시화를 배경으로 나타난 도시문화의 한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층은 조선 전기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50) 일반적으로 ‘여항’의 의미는 도시 지역 중에서도 궁궐이나 관가가 아닌 일반 민간인들이 살아가는 동네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여항인이라면 양반 사대부층이 아닌 중인 이하 하급 관리나 상인, 평ㆍ천민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여항인의 주축은 신분적으로 사대부에서 한격 떨 어지는 넓은 의미의 중인 계층이라 할 것이다. 중인계층이나 시정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려주 는 자료는 없지만, 정조는 중인으로 의원ㆍ역관ㆍ창재(唱才)ㆍ사자관(寫字官)ㆍ화원(畵員)ㆍ녹사 (綠事) 등을 꼽았으며 중인과 비슷한 부류인 市井을 掖屬ㆍ曹吏ㆍ시전상인[廛民]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正祖, 弘齋全書(49), 「名分」. “中人而有裨校, 計士ㆍ醫員ㆍ譯官ㆍ日官ㆍ律官ㆍ唱才ㆍ賞 歧ㆍ寫字官ㆍ畫員ㆍ錄事之稱. 市井而有掖屬, 曹吏ㆍ廛民之名, 此中人市井之名分也.”
51)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여항인 또는 여항지사(委巷之士)를 사대부 계층이 아닌 중인층으로 설정하는 데 견해를 같이 한다. 그러나 구자균[조선평민문학사(민학사, 1974), 195쪽]이 위항인을 서얼층 에 포함시킨 데 반해 허경진[조선위항문학사(태학사, 1997), 39~43쪽]은 서얼층을 제외한 중인 층(지배층에서 제외된 하층민)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강명관[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7, 50~51쪽]은 이러한 중간 계층이라는 신분적 규정을 넘어서서 이들은 경아 전과 기술직 중인이라는 직업적 동질성을 지닌 부류로 이해하면서 중간 계급이라는 계급의식의 동질성까지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는 직업적ㆍ신분적 규정에 덧붙여 상업 도시화한 서울을 배경 으로 성장한 도시인이라는 요소를, 오히려 가장 핵심적 요소로 지적해야 할 것이 다. 52)
52) 여항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도시민으로서 규정했음은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예를 들어, 風謠續選을 편찬한 張混(1759~1828)은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平生志」에서 여덟 가지의 깨끗 한 복[淸福八品]으로 “태평시대에 서울에 살며 의관의 대열에 끼어 문자를 알고 샘물 흐르는 경 승지에서 화목을 가꾸고 마음의 친구를 사귀며 좋은 책을 수장하고 있는 것”(“一曰生太平, 二曰 居京都, 三曰幸列衣冠, 四曰粗解文字, 五曰泉壑一區, 六曰花木千株, 七曰得心交, 八曰蓄好書.” 而 已广集(14), 「雜著」)”이라고 했다. 여기서 도시민으로서의 의식이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태평 시대에 서울에 거주하며 책을 읽는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창작과 유통, 독서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서울에 살면서 도시 적 의식, 도시생활의 습속 내지 생리에 적응하며 살아가던 구성원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주적 경제를 토대로 한 은일적 삶을 추구하기보다 도시적 부와 현실적 삶을 지향하는 의식이 강하다. 사대부들도 서울에 살면서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도시구성원으로서의 의식과 삶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생활의 일환 으로 소설 또한 향유했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현실적 삶과 상업경제의 논리를 기 본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의식은 기존의 양반 문화와는 다른, 17세기 이후 상업 화되어 가던 도시 서울이 배출해 낸 도시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이자 표현방식의 하 나였다고 하겠다. 이들 도시인은 소비의 주체뿐만 아니라 생산과 유통의 주체이기도 했다. 17세기 이래 서울에 누대로 거주하면서 서울의 상업적 번성을 체득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 고 권력까지 장악한 경화사족(한양이나 그 근교에서 거주하는 양반 집단)들은 종 전에 권력을 이용한 토지겸병이 아니라 상업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통해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이때 경화사족의 겸인(傔人)ㆍ차인(差人) 또는 호조 등의 재 정아문의 서리 등으로 행세하던 이들 역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53) 권력 과 부를 차지한 경화사족이 18세기에 중국소설을 즐겨 읽었듯이 신흥 갑부로 성 장한 중인ㆍ상인들이 소설 향유층의 주축으로 나서게 되었다. 도시인이 추구하는 가치도 사대부들이 지녔던 성리학적 가치와 질적으로 달랐 다. 54)
53) 유봉학, 「日錄 <公私記攷>에 나타난 19세기 書吏의 생활」, 규장각, 13집(서울대학교규장각, 1990).
54) 17, 18세기를 동일하게 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넓게 보아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19세기와도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론하지 않기로 한다.
도시인 중에서도 여항인의 세계관은 한문 단편이나 한시 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이들의 작품 세계는 치부(致富), 남녀 간의 애정 갈등, 군도(群盜) 형태 의 민중 저항 등을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공간적 배경으로 서울을 상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상업 활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신분적 규범보다는 상업적 신용, 근면성 등의 가치가 더 중요한 것 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문학 속에는 경제인으로서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조 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인에는 상인, 기생, 노비, 중인, 한미한 양반도 포함된다. 「예덕선생전」에서 서울 근교에다 똥을 퍼 나르던 예덕선생도 서울에서 살며 생계를 유지해 나가던 도시의 구성원이었다.
그러한 도시민의 일상과 됨됨이를 포착해 소설로 만든 연암 역시 도시인의 일원이다. 소설의 존재 이면에는 당대인들이 말없이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있었던 공감지대가 작품 속에 무수히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 그래서 소설 이 당시에 비공식적 문학양식이었지만, 지속적으로 발달,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17세기에 그러한 현실인식과 사회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미흡하나마 표출되기 시작했고, 18세기에는 본격적으로, 그것도 구체적으로 소설 속에 반영된 채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7~18세기에 결제수단으로서의 화폐 사용의 일상화, 지방장시의 상설화는 소설 독자의 확대 및 작자ㆍ독자의 의식과 성향의 변화, 출판ㆍ인쇄ㆍ유통 방식과 환경 의 변화를 견인해냈고, 그 결과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한 소설 상품의 등장이 가능 하게 되었다. 이때 상품화폐 경제의 원리가 소설에 적용된 대표적 예가 바로 세책 본과 방각본 소설이었다. 이러한 소설은 도시에 살던 구성원으로서의 공감대를 지 녔던 다수의 사대부, 그리고 여항인층(중인, 서민)의 수요에 부응코자 나타난 산물 이다.
소설 독자의 주축인 도시인의 관심사 중 하나는 단연코 실물 경제와 매개된 현실생활이고, 그 생활 속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 모순적 경제생활 에 그 나름의 문제해결 욕구와 관련된다. 이 시기 소설의 유통이 특히나 상인, 역 관, 여항인 등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면을 보더라도 소설이 새로운 화폐경제 사회 구성원들의 습속과 생활모습을 담아내고,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전 개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관념적,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으로는 더 이상 현실의 결핍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도시인의 의식이 작가와 독자로 하여금 화계경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실적 모순과 폐단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구체적 예가 앞장에서 다룬 화폐 사용의 폐단, 납속책과 고리대금업, 상거래시의 신용문제 등이라 할 수 있다.
V. 결언
중국에서는 상인을 주인공으로 삼되 이러한 상인의 상업적 이익 추구 활동을 다룬 소설이 적지 않다. 55)
55) 중국에서는 이러한 소설을 특별히 ‘商賈小說’로 부르기도 한다. 邱紹雄, 中國商賈小說史(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4), 5쪽.
그 대표적 예로 금병매, 두붕한화(豆棚閑話), 삼언 이박에 실려 있는 여러 작품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중국에서도 상업적 활동을 내용으로 한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통 문인들 은 이익을 말하고 상업을 운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 폐경제 시대를 대표하는 장르로 단연 소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며 그만큼 소설 작 품 속에서 화폐경제의 다양한 측면이 감지된다고 하겠다.
17세기는 민족모순과 신분모순, 거기에 덧붙여 사회경제 모순의 문제를 안고 있 던 시기였다. 이때 상업의 발달과 소설 유통 및 독서의 발달이 상호 유기적으로 상승효과를 발휘해 소설 속에서 이런 모순과 사회현실을 투영해 내려는 시도로 나 타나게 되었다.
그러한 의식 이 소설을 상품화하고 현실성을 획득하게 만드는 중 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업과 화폐경제의 변화상을 소설이 담보하고 있 었다 하더라도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당대에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 고, 더구나 한문소설이 아닌 국문소설이 대세를 이루던 상황에서 거기엔 일정한 화폐경제 사회의 세계관을 제시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19세기에 활발히 나타난 판소리계소설 「흥부전」이나 유흥의 상업화 현상을 보여주는 세태소설 「이춘풍전」 등에서 당대의 화폐경제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이고도 비판적 인, 또는 생산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는 신소설을 거 쳐 일제 강점기에 카프문학으로 이어지는 소설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화폐경제 를 매개로 한 소설의 전통이 약화되어 버리거나 그 연속성을 찾기 어렵게 된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본고는, 비록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조신선전」 같은 작품을 상인소설로, 「왕경룡전」ㆍ「허생전」ㆍ「낙천등운」 등과 같은 작품들을 상업소설이라는 관점에서 살필 여지는 없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본 논의를 진전시키게 되었다. ‘상인’소설이 나 ‘상업’소설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거니와 그 개념부터 정립하는 일이 우선시되 며, 그보다 앞서 먼저 작품들의 실상을 전체적으로 일별해 나가는 일이 긴요하다고 판단된다.
본고는 다룬 범위가 넓은 데다 작품 속 제반 화폐경제 사회의 단면을 당 시 사회현실과 연관 지어 두루 다루려다 보니 작품에서의 현실과 실제 사회현실과의 간극과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여러 문제까지 꼼꼼히 살피지 못했다. 문제제기와 그 에 따른 해답 찾기를 위한 후속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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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민족모순과 신분모순에 더해 사회경제 모순의 문제를 보여주는 소설 작품 들이 17세기 이후로 등장했다. 특히 임병양란 이후 화폐경제 사회로 바뀌면 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져 「최척전」ㆍ「김영철전」ㆍ「왕경룡전」ㆍ「사씨남정기」ㆍ 「낙천등운」ㆍ「양반전」ㆍ「허생전」ㆍ「광문자전」 등 국ㆍ한문소설을 비롯해 여 러 한문단편이 대거 쏟아졌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화폐경제 시대의 사상이 라 할 실학 정신이 화폐경제 시대의 산물이라 할 소설 속에 직ㆍ간접적으로 표출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17~18세기 소설의 대종은 화폐 사용, 또는 이로 인한 사회적 병폐를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별히 17~18세기 소설 작품에 주로 그려진 화폐경제 사회상이란
첫째 매점매석,
둘째 고리대금업,
셋째 납속책 및 화폐를 이용한 각종 상거래 문화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서적중개상과 세책점을 이용한 상업적 유 통이 활발해지면서 도시인 취향이 강한 소설 향유주체가 급부상하게 된다. 이런 도시 소설 독자를 겨냥한 생산과 유통이 점차 그 기반을 형성해 나간 시기가 바로 17~18세기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 화폐경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 중 일부는 ‘상인’소설 또는 ‘상업’소설로 규정할 만한 소 지가 있어 보인다.
주제어(keyword):화폐경제(monetary economy), 매점매석(buying up-holding off selling), 고리대금업(usury), 납속책(ransom policy), 도시인(city dweller).
투고일:2009. 1. 12. 게재확정일: 2009. 2. 26.
정신문화연구 2009 봄호 제32권 제1호(통권 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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