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국의 ‘동양’ 담론과 이효석의 ‘서구’ 표상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일제 말기 동양주
의 담론은 서구적 근대가 한계를 맞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일본 제
국의 통치를 받는 동양의 정신이라는 것을 골자로 한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
로 출발한 일본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의 식민지 경쟁을 위해 근대 서구의
파산을 선고하고, 자신이 그를 대체할 수 있음을 선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서구와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이분법을 전복시켜 역으로 동
양정신의 우월을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 서구와 동양이라는 범주는
다분히 제국과 마주한 문인들의 정신지와 심상지리를 표현한다.
본고는 그동안 엑조티즘적인 서양 취미 혹은 대동아 공영권의 전제가 되는
제국주의적 인식론으로 여겨온 이효석의 ‘서구’라는 표상을 재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일제 말기 이효석 문학론에서의 서구 표상은 당대 동양
에 대한 강한 대타 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면밀하게 독해하기가 어렵
다. 이효석의 서구 표상은 전통적으로 대체로 지식인적 딜레탕티즘이나 시대
와 무관한 순수예술주의라는 혐의로 독해왔으나, 최근에는 그의 서구 표상을
보다 능동적인 작가의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독법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 지향적 면모를 ‘엑조티즘’으로 읽어온 용례를 비판하며 서구 지향적 보
편성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이효석의 서구 표상의 정치성을 찾는 독법의 시초
가 되었다.1) 이효석은 서구 문학을 인유하면서 ‘구라파주의’라는 표상을 통
해 “도도한 보편주의”2)를 내세운다. 다만 이효석의 서구 표상을 통해 드러내
고자 하는 것을 파편적인 욕망의 동일시로 한정할 때, 그의 서구 표상은 다만
실체 없는 욕망이고 허상의 욕망에 불과하게 된다.3) 그러나 본고는 이효석이
서구 표상을 사용하는 이유가 서구적 풍경과 식료품에 대한 기호, 혹은 현실
도피의 차원이 아니라 동양주의 및 전체주의와의 대타적인 의식을 전제로 서
구표상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예술지상주의를 거쳐 개체주의를 주장
하는 소재로서 사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1) 김주리, 이효석 문학의 서구지향성이 갖는 의미 고찰 , 민족문학사연구 24, 2004.
2) 김재영, ‘구라파주의’의 형식으로서의 소설:이효석 작품에 나타난 서양 문화의 인유
에 대하여 , 현대문학의 연구 46, 2012, 322면.
3) 이효석이 빵, 포도주, 버터, 우유, 햄, 서구 음악 등 실체가 없는 부분대상을 향한
욕망만을 보여주고, 이는 허구에 대한 욕망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김주리, 앞
의 글, 396면.
한편 그의 서구 표상이 근대적 인식론에 대한 지향을 통해 제국주의적 시
선과 공모에 있다는 연구 역시 최근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4) 그의 서구 표상
을 통한 보편주의, 세계주의를 식민지인의 열등감을 드러내고 제국의 시선에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벽공무한이 ‘왕도낙토’인
만주의 서구적 파편들을 소비하며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을 관광한다는 이경
훈의 입장을 필두로 한다.5) 같은 맥락에서 이효석의 심미주의적 의식을 신념
없이 눈치만 살피는 것으로 보고, 그의 국민문학론이 대동아를 묶는 오리엔
탈리즘과 총후문학을 부정하지 않고 이를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가교로서
이용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체제의 권내에 있다고 부정 평가한다.6) 토속적인
향토적 작품에도 역시 제국주의가 미개와 야만으로 식민지를 규정하듯이 이
국적이고 에로틱한 색채를 부여했다는 시선을 문제 삼기도 했다.7) 특히 일제
말기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주로 화분의 영훈, 벽공무한의
천일마와 하얼빈 관련 수필을 대상 텍스트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벽공무한
만 하더라도 하얼빈 장면 이후의 타자들의 소통과 상호애도, 조선의 여성 댄
디라는 미학적 여성 주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8) 상기의 독법이
4) 문선엽, 이효석 소설의 근대성 연구: 식민지 현실과 근대문학론을 중심으로 , 서강
대 석사논문, 2003 ; 이세주, 식민지 근대와 이효석 문학 , 연세대 석사논문, 2006.
5) 이경훈, 식민지와 관광지 , 사이間SAI 6, 2009.
6) 엄경희, 이효석 평론에 나타난 문학 정체성 ,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38, 2008, 411
~412면, 414면.
7) 김양선, 세계성, 민족성, 지방성: 일제 말기 로컬 상상력의 층위 , 한국근대문학연
구25, 2012, 13면. 신형기, 이효석과 발견된 향토-분열된 기억을 향하여 , 민족
이야기를 넘어서, 삼인, 2003.
8) 이효석 후기소설에서 백화점과 쇼핑, 예술을 향유하는 여성인물은 부정적이고 속물
적이라는 당대 남성 지식인의 인식과 달리, 남성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예술을 향
유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여성 댄디로 구현된다. 여성 댄디는 남성적 응시에 의해
존재하는 신여성이나 모던걸과 달리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직업을 가진 미적 주체
다. (Peng Hsio-yen, Dandyism and Transcultural Modernity, Routledge, 2010, p.15 ;
김건형,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개체성의 미학 연구 , 서울대 석사논문, 2014, 4.1장
; 김미현, 이효석 문학에 나타난 문화번역과 경계사유:벽공무한을 중심으로 ,
한국학연구 36, 2015.)
작품의 일부 장면(하얼빈에서 서구문물에 대한 경도나 러시아 여성 나아자에
대한 시선)에 국한되어 이효석의 전체적 작가의식보다는 소재주의 혹은 역사
주의적으로 독해한 혐의를 시사한다.
반대로 이효석의 일본어 글쓰기와 국민문학론을 세밀하게 다루면서 길항
에 주목하는 독법이 있다. 이효석의 서구 표상은 국민문학과 반대되는 세계
문학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국민문학을 일본문학으로 획일화
하는 담론을 경계하면서 국민문학을 세계문학과 대응시켜 제국의 층위까지
상대화시킨다고 지적하거나9) 국민문학에서 국책을 제거하여 식민지인으로
서는 될 수 없었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옹호했다고 평가
한다.10) 그가 구미주의와 개인주의를 강조한 이유를 동아와 동양을 강조하는
제국의 전체주의에 저항하기 위함이라고 분석한다.11) 이러한 연구들은 국민
문학론에 대응해 이효석이 내세운 개인에 대한 관심을 섬세하게 읽는 장점이
있다.
본고는 이러한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효석의 서구 표상이 보다 의식
적인 문학론의 발현임을 논하고자 한다. 당대 동양주의와 그 주변의 서구 표
상과 대조를 통해 이효석의 특유의 미학적 사유를 읽고, 이를 파편화된 서구
이미지들의 나열이 아닌 이효석의 통합적인 의식을 찾는 출입구로 독해하고
자 한다. 서구 표상을 통해 드러내는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미의식은 다시 댄
디적 주체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
제말기 이효석의 도시 소설 속 인물들의 개체적인 삶은 도시문화를 향유하면
서 비로소 탄생한다. 도시공간의 근대성과 대중을 관찰하는 ‘산책자’의 유동
적이고 거리를 두는 냉철한 시선과는 달리, 도시문화의 일부가 되어 자유를
찾는 댄디(Dandy)적 개체다. 이효석의 댄디는 경성역을 고현학적으로 관찰하
9) 오태영, 지방문학, 국민문학, 세계문학 ,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8, 2013, 504~606면.
10) 김형수, 이효석, ‘비협력’과 ‘주저하는 협력’ 사이의 문학 , 인문학논총, 2005, 49면.
11) 김재용, 일제말 이효석 문학과 우회적 저항 , 한국근대문학연구 24, 2011, 302면.
거나, 미쯔비시 앞에서 근대의 초극을 갈구하지 않는다. 댄디는 자본주의의
소외를 비판하거나 그 속물성을 포착하는 것보다는 도시가 제공하는 미학적
인 경험을 전유하고 그를 통해 개체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본고는 일제 말기
에 서구 표상을 재현한 이효석의 평론을 중심으로 그가 주창하는 미학적 문
학론과 댄디적 주체론을 살펴보고 그 연속선상에서 문학과 국민성 의 정치
성을 독해한다.
2. ‘구라파주의’의 내용 : 생활을 예술화 하는 주체
이효석은 꾸준히 미학적 태도를 강조하면서, 조선의 척박한 미적 환경에
비해서 서구, 특히 유럽(구라파)의 일상의 미학화를 부러워하는 글을 남겼다.
역사보다는 차라리 지리를 생각함이 미의 관찰을 도울 것 같다. 지리적으
로 살펴볼 때 아무래도 미의 부여가 – 미 조건의 분배가 균등하지 못함은
웬일일까?
우리는 우리의 주위와 생활 속에 얼마나의 미를 보고 가졌는가. 미의 인
식은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고만 뻗대지 말라. 미를 받아들임은 마음이나 객
물 자체의 미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위를 살필 때 아무리 옹호의
정을 가지고 보려 하여도 아름다운 것이 흔하지는 못하다. (중략) 그 모든
아름다운 것은 외래의 것이요, 이곳의 것은 아닌 것이다. 이곳의 것으로 참
으로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있고 풍윤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수목이나 자
연의 풍물을 제외하고 인간적으로, 가령 서반구의 아름다운 것을 당할만한
무엇이 이땅에 있는가. (7권, 141~142면)
이효석은 화춘의장(花春意匠) 12)에서 자신을 둘러싼 조선의 환경이 아무
래도 아름답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지리’적인 이유에서 찾고 있다. 즉
12) 조선일보, 1937.5.4~8. 이하에서는 독해의 편의를 위해 전집을 인용하고 서지를 병
기함. (이효석, 새롭게 완성된 이효석 전집 1-8, 이나미 편, 창미사, 2004.)
서구와 동양의 대비를 통해서 아름다움이 편중되어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아무리 미가 마음과 자세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조선이라는 ‘객물’ 자
체가 너무도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그리
워한다. “아름다운 모든 것이 외래적”이라는 태도는 이효석 연구의 상당수가
이효석이 조선의 현실과 실체를 핍진하게 묘사하지 못했고, 제국주의적 가치
관을 내면화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러한 이효석의 미학적 동서 이분법은 그의 수필과 소설
전반에 걸쳐 꾸준히 발견되는 문제의식이다. 통상 말하는 조선적 향토성을
그린 소설군을 발표하던 시기에도 그의 수필은 계속해서 서구표상을 통해 미
학적 태도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13) 따라서 그의 서구라는 표상에 내
재한 미학의 층위를 보다 면밀히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효석의 서구 표상은 특수하게 선별된 층위와 기준을 가진다. 김기림이
서구를 미국과 유럽을 세분하여 포드주의적 근대와 이를 초극할 지성으로 양
분했듯이14), 이효석 역시 서구를 다시 미국과 유럽으로 구분하는 용례를 보
여준다.
13) 가령 비교적 이른 시기의 수필 북위42도 , 매일신보, 1933.6.3.에서도 발자크의 육체
적 열정에 미치지 못하는 조선 문학의 빈혈증을 한탄한다. 당대 계급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육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육체문학을 간과하면 그
의 서구표상의 함의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14) 김기림은 東洋의 美德(문장, 1939.9.)에서 동양인들과 달리 서구인들은 여유가
없어서 문화가 결핍되어 있다며 당대 서구 사회가 가진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적 문
화를 비판한다. 다만 서구에 빗대 동양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미국적
포드주의와 나머지 서구의 과학 정신을 구분한다. “米國式 삐지네스씨스템은 말
하자면 思想의 侵入을 巧妙하게 除外해버린 當選스케듈이다. -드氏가 무서
워하는것도 事實 思想의 誕生이었다.” 개인에게서 사상을 앗아가는 포드주의와 스
케줄 관리,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서양적 행복”의 외장
을 사용했다. 이러한 미국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김기림은 동양적인 ‘명상’과
“게으른 시간”을 통해 “사상의 침입”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젊은 동양적 명상’
이라는 동양주의적인 외장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지성을 강조하는 자신의 신념을
끼워 넣고 있다.
미국! 구라파의 예술가들 그 가운데서 특히 영화배우들은 본국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으면 반드시 미국으로 뽑히어 가는 것이 오늘에 와서는 한
풍속이 되었다. 신대륙의 시원한 공기 속에 활개를 펴고 젊은 문명의 혜택
에 고전이상의 매력을 느끼면서 아울러 돈벌이도 되는–일거양득의 이익이
긴 하다. (중략) 나는 반드시 그대들의 미국행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아니
나, 다만 구라파인은 구라파인으로서의 자랑과 절도가 있을 것이니 그대들
이 어느 정도까지 그 자랑과 절도를 각각 굳게 가지고 있느냐는 것을 물어
보고 싶을 뿐이다. 영화 감상인으로서의 솔직한 고백을 하면 나는 미국 영
화보다는 구라파에서 제작되는 영화를 한층 높게 평가하는 자이며, (중략)
그대가 그것을 한 곳에 ‘미국’에 물든 흔적이 있는 것이며 나더러 말하라면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7권, 209~210면)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15)는 프랑스 배우가 미국 헐리우드로 옮
겨가서 영화의 질이 떨어지고 상업용의 ‘망칙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서
“그 무례한 자태 속에 나는 ‘미국’이라는 것을 백 마디의 설명 이상으로 느
끼”고 있어 불쾌하다고 하면서 미국의 속물적 영화 산업에서 여성을 시각적
으로 대상화하는 포르노그래피와 유럽적인 영화의 미학을 구분하고자 한다.
그가 추구하는 서구는 미국이 아닌 유럽으로 “파리의 감상의 예술적 표현”이
며, 우수에 찬 감성이다. 자신을 “구라파인으로서의 자랑과 절도”를 아는 관
객으로 자처하면서 서구표상을 구분하길 요구한다. 미국적 “돈벌이”라는 자
본주의적 발달과 대타적인 유럽 특유의 미학적 태도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동일시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서구와 미를 연관 짓는 이유를 비교적 소상히 밝
히고 있는 화춘의장 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대목은 화분(인문사,
1939)에서 영훈이 구라파주의를 주장하며 예술/아름다움과 서구를 연계시키
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15)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 조광, 1938.9.
서양의 미에 비하여 우리의 것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편견도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나 생활의 미에 있어서 이곳의 것이 그곳의 것에
비길 바 못 된다고 말하여도 그것은 반드시 독단과 편기(偏嗜)에서 나오는
말만이 아닐 듯하다. 생활의 미를 말할 때에 나는 반드시 그곳의 문명과 발
달된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원형 그것, 바탕 그것이 이미 충분
히 아름다운 것이며,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한 큰 득권을 운명적으로 당초
부터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중략)
색채만을 말하더라도 그들은 생활의 제반양식에 자연색을 대담하게 모방
하여 생활을 미화하니, 일례를 들어 각인각색의 다채의 의상은 그대로가 바
로 화단의 미를 옮긴 것이 아닐까. 나아가 그들의 예술에 대하여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바탕이 빈한한 우리의 길은 될 수 있는 대로 미의 창조에 힘씀에 있다.
자연에 대한 미의식을 황성히 배양하고 자연물의 형상, 색조, 의장을 생활양
식에 알뜰히 이용하며 나아가 독창적 발명을 더하여 생활을 재건함에 있다.
적어도 초옥의 토벽에는 칡넝쿨을 캐어다 올리고 의상에 일층의 생채를 이
용할만한 대담성과 비약이야말로 소원의 것이다. (7권, 142~143면)
그는 당대 조선이 생활 속에서 미적 감동을 제대로 느끼지 않고 있다고 비
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가 서구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은 이러한 생활 속
에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조선과 달리, 서구인들은 생활의
제반양식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이효석이 유럽에서도 특정한 미학적 태도가 계급적 아비투스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세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한계는 노정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점은 서구를 통해 표상하는 것은
“문명과 자본주의적 발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의 창조에 힘씀”과 미
학적 생활상이라는 것이다. 이효석에게 ‘구라파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생활
과 예술이 하나로 합일된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6)
16) 이효석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구라파주의가 역(逆)-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문화와
개체성에 대한 미학적 태도임을 강변해왔다. “구라파에 대한 애착을 나는 구라파 사
람이 동양에 대해서 품는 것과 같은 그런 단지 이국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보다도
한층 높이 자유에 대한 갈망의 발로라고 해석해왔다. 문화의 유산의 넉넉한 저축에
서 오는 풍족하고 관대한 풍습이야말로 가장 그리운 것의 하나이다.” 여수 , 동아
일보, 1939.11.29~12.28. (2권, 318면)
그러나 이효석이 비단 아름다움을 서구적인 내용으로 한정하는 것은 아니
다. 사실은 미학주의적 태도가 당대에 부재함을 문제시 하는 것이지 조선 혹
은 민족이 본질적으로 아름답지 않다는 식으로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아니
다. 서구적 예술만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태도와 미학적 주체를
갖추었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따라서 인용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이효석
이 관찰한 이웃 노인이 나름의 아름다움을 창안한 화단을 가꾸는 모습이다.
“괴롭게 노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진하게 장난하고 예술하고 있는” 노
인의 모습을 통해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근로와 예술을 동시에 가진 생활-
생활의 미화-노동의 예술화”17)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한다.
17) 이상 6권, 144면.
이효석 자신 역시노인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삶의 모습을 본받았다고 밝힌다.
이어지는 화춘의장 의 결말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고고학에 조예가 있는 친구와 함께 평양
모란대의 뒷산에서 장수왕 대의 도읍의 흔적과 고구려의 기와를 발견하고,
그 무늬를 찬탄하며 우리의 조상은 예술을 삶 속에서 향유했음을 깨달으며
끝맺는다.
화춘의장 은 이효석이 서구와 미를 연관 짓는 이유가 생활과 노동을 예술
화하는 미학적 주체를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려준다. 그에게 서구 표상이란
‘예술과 생활의 일치’를 의미하는 예술지상주의를 의미하는 기호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버터, 우유, 커피, 아스파라거스 등과 같은 미감을 자극한
다는 특성을 가진 식료품, 기호품을 의식적으로 향유하는 주인공들의 미학주
의적 태도로 제시한다. 그 식품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아직은 당대 조선
과 낯선 기호품을 의식적으로 고수하며 속중들과 다른 삶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일제 말기에 전쟁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꽃과 식물이 가득
한 정원을 직접 자신이 가꾸고자 노력하고, 책상에 골동품 화병을 두려는 그
의 수필들은 이효석 자신도 아름다움과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했
음을 의미한다.18) 아름다움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삶이어야 긍정
될 수 있는 것이다. 고고한 예술의 입장에서 생활을 경멸하는 취미로서의 미
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예술이 합일될 수 있는 길을 모두 긍정한다. 조선의
초옥 역시 칡넝쿨과 같은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일상 속으로 끌어들일 여지
가 충분하다.
특히 이효석은 생활 속의 아름다움 중에서 꽃과 화단, 수풀과 같은 자연적
인 아름다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도시적이고 서구적인 미학 속에 살더라도
자연과의 연관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 후반기
에 꽃을 쌀 종이 값이 오른 것을 한탄하고, 꽃을 많이 기를 수 있는 정원을
가진 지인을 부러워하기도 한다.19) 전운이 감도는 경성에 필요한 것이 무엇
이냐는 설문에도 그는 서슴없이 수목을 더 심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
다.20) 그에게 예술은 인간이 생활 속에서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
에 자연과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방공호가 더 필
요한 일제말기의 경성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그의 요구는 제국의 시책과
필연적인 간극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야과찬(野果讚)–하얼빈의 가구채원(街區菜園) 21)에서 하얼빈은
비단 서구 표상과 음악, 예술의 도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회와 전원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낙원이기도 하다.
18) 소요(逍遙) , 삼천리, 1941.12.; 고도기(古陶器) , 조선일보, 1939.11.7.
19) 화초 , 인문평론, 1940.1.8.
20) 서울개조안 , 삼천리, 1940.10.
21) 매일신보, 1939.10.15.
생활과 수목의 일원화요, 도회와 전원의 합주여서 한 폭의 아름다운 낙원
의 느낌이었다. 그 천년대계의 도시의 건설을 계획한 사람들의 유구한 심정
은 상줄 만하다. 사람은 쇠와 돌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초목과 친
하고 자연과 가급적 벗하는 곳에만 생활의 진진한 재미도 있고 예술화도 있
는 것이며, 인위와 인공만의 세상은 순일한 사람의 천성을 해함이 크다. 수
목 흔한 도회라는 것이 인간생활의 한 이상이요, 원이 아니면 안된다. (7권,
267면)
몇 십 년 동안 다시는 구경도 못했던 그 돌배를 그 도회의 복판에서 발
견할 줄이야 뉘 알았으랴. 대도회의 복판 서구의 치장을 베풀고 근대 음악
이 흐르는 한 간 방 속에서 그것을 찾아낼 줄야 뉘 알았으랴. 그리운 조그
만 노란 열매를 손에 들고 어릴 때의 추억을 불러내고 고향의 야미에 잠긴
것이 별것이 아닌 참으로 그 낯선 도회에서였던 것이다. (7권, 268면)
이효석은 하얼빈의 정원과 공원에 감탄하면서, 도시와 전원, 생활과 수목
의 일원화를 이상적인 미학적 공간이라고 극찬한다. 도시의 일상 속에서 자
연을 통해 미학적 감성을 일깨우며 “생활의 진진한 재미”와 “예술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 역시 인간에게 예술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
고, 하나의 예술적 경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 서구, 음악, 전
원, 자연이 모두 하나로 묶이는 하얼빈은 “한 폭의 아름다운 낙원”이 된다.
또한 하얼빈에서 그는 별것 아닌 야생의 돌배를 거리에서 찾아내는데, 미학
적인 공간에 배치하면 “산속이나 들에 지천으로 열리는 야생의 돌배”도 “진
귀한 생각이 나서 맛은 어찌됐든 나는 그날 밤의 그 야과를 한없이 그리운
것”(7권, 267면)으로 추억할 수 있다. 자연적 대상 역시 본래적인 맛의 한계에
도 불구하고 미학화를 통해 진귀하고 그리운 것으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다.
미학적 공간인 하얼빈이 서구, 도시의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
활이 합일되었기에 아름답다는 점은, 그동안 상이하게 읽어온 이효석의 공간
들(혹은 시기들)을 유기적으로 볼 필요를 제기한다. 이효석의 서구-도시와
향토-전원이라는 공간은 표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으로 같은 미
학주의적 의식과 주체를 구현하는 것이다.
3. 서구의 ‘육체문학-개체’와 동양의 ‘정신문학복종’이라는 대립항
이효석 역시 김기림처럼 동양주의에 맞서 오히려 당대 조선에 필요한 것은
서구적인 사유라고 본다. 김기림은 동양주의에 대항해 서구라는 ‘지성’을 옹
호하고 지키려하지만22), 오히려 이효석은 현대인이 지성의 과잉이라며 지성
을 버리자고 한다. 서구와 동양에 관한 이분법 자체는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의미가 정 반대다.
현대인의 지의 과잉은 행복을 가져온 한편에 확실히 불행을 낳게 되었다.
비극이 예지의 결핍에서 온 것은 과거의 일이요, 현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예지의 과잉에 불행과 비극은 기인되었다고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예지의
과잉은 시심(詩心)의 상실을 유래하고 시심이 상실된 곳에 공리(功利)와 간
파와 산문의 비애가 생기는 것이니 자해를 낳는 것은 참으로 과지(過智)인
것이다.23) (7권, 124면)
오히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시심(詩心)이라고 하는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다. 지성으로 문학작품을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해석하는 것, 즉 지나
치게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면서 이를 ‘산문의 비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22) 동양 에 관한 단장 (문장, 1941.4.)은 서구의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비판이라고 본다. “우리는 서양적인 근대문화가 다음 문화
에 남겨줄 가장 중요한 유산의 하나는 과학적 정신=태도=방법 이 아닌가 생각한
다. 과학문명이 아니다. 과학하는 정신, 과학하는 태도, 과학하는 방법이다.”라며 당
대의 동양주의 담론이 비과학적으로 동양문화에 몰입하고 관념적으로 우월성을 주
장하는 것을 “감상주의”로 보고 이를 경솔하다고 경고한다. 오히려 “서구”라는 (물
질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정신을 고수하자는 주장이다.
23) 사온사상(四溫肆想) , 조선일보, 1937.2.19.
이렇게 지성이 부정되는 만큼, 이효석에게 서구는 지성의 기호가 아니다.
이효석이 생각하는 서구라는 표상을 잘 보여주는 서구 정신과 동방 정취 의
부제는 “육체 문학의 전통에 대하여”이다.24)
24) 조선일보, 1938.7.31~8.2.
이효석이 사용하는 서구문학과
서구문화 개념은 스스로 그 기원을 그리스적인 정신으로 잡고 있다. 그는 그
리스 신화와 올림픽 경기를 예로 들며 인간의 육체와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
이 서구문학의 꾸준한 특징이라고 본다.
인간적 육체, 구체를 전제로 하는 이 희랍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전
통해 온 것이 두말할 것 없이 서구의 근본정신이며 문화와 문학의 표식인
것이다. (중략) 문예부흥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헬레니즘 환원 운동, 휴머니
즘 복귀운동이었다. 종교적 압박에서 벗어나 인간적 정신을 부활시키고 자
유와 개성의 자각을 촉진시키려고 함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육체
적 해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 중요하고 일의적인 전제 위에 설 때
에 비로소 참된 인간성의 해방이 있는 것이다. (6권, 236~237면)
요컨대 서구문학이란 헬레니즘에서 비롯해서 면면히 흘러내려오는 육체
문학, 혹은 체취문학의 위대한 계열인 것이다. 정신이란 서구인에 있어서는
육체 만에서 오는 섭섭한 부족감을 위안시키기 위해서 발명한 한 가닥의 감
상에 불과하다. 육체의 예상과 전제가 없이는 그들의 문화와 문학의 이해를
정확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6권, 239면)
그래서 이효석은 이상주의적 요구, 관념적인 사상 등은 단순히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고, 서구문학의 본질은 “육체문학”이고 “체취문학”이라고 한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리스 비극과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단테
이후의 르네상스 문학,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 낭만주의 등의 문학사를 개괄
하며 모두 참된 인간성, 즉 구체적인 인간의 육체성을 구현하려는 움직임으
로 정리한다. 따라서 이효석에게 자연주의는 참된 육체문학의 본격적 시작이
며, “기두(旗頭)에 한 덩어리의 빵을 꽂고 그것의 갈망과 복지를 노래한” 사
회주의 문학 역시 “육체를 위한 문제”로 본다. 1차 대전 이후의 조이스와 헉
슬리와 같은 현대적 경향이 반낭만주의와 반감상주의를 내세우지만 이 역시
과학적 인간관에 입각한 철저한 물질주의로서 정신화, 감정화에 반대하는,
“부질없는 정신의 면을 떠나서 한층 직접적으로 육체의 규명에 접근하자는
노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주화와 균형의 완전한 형식미와 침착하고 정확한 감각의 전제와 토대 외
에 개인의 자유와 안정의 절대경(絶對境)- 희랍인의 소위 신적 원형인 이
데아의 세계가 선다. 플라톤 이후부터 이미 희랍인의 문화의 이상이요, 생활
의 도표인 이 이상주의적 내적 요구는 참으로 단지 막연하고 거대한 것이
아닌 실제적 인간적 형식과 육체적 구체 위에 서는 것이다. (6권, 235면)
그가 말하는 ‘서구의 육체문학’은 그리스적 이상적인 개인을 그리기 위해
“완전한 형식미”와 “감각의 전제”라는 미학적 토대를 가진 “개인의 자유와
안정”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학은 “막연하고 거대한” 주의나 사상이
라기보다는 실생활의 “실제적 인간적 형식과 육체”라는 구체적인 삶의 미학
이다. 그가 관념적이라고 판단한 일군의 문학은, 가령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나 입센은 이상주의적 ‘반동적 각성’이며 “육체의 소리 위에 끼얹은 고명”에
불과하다고 취급된다. 그에게 “휴머니즘 운동의 반복도 지성의 변호도 결국
은 육체로 통하는 문호”인 것이다. 이효석에게 서구-육체문학은 “육체적 해
방”을 위한 것이며 다시 “자유와 개성”과 “참된 인간성의 해방”으로 환유되
는 기호이다. 서구라는 표상을 통해 주장하는 육체문학론을 통해 이효석은
문학의 목적을 “개인의 자유와 안정의 절대경”으로, 즉 개체의 자유로 본다.
서구정신과 동방정취 에서는 구체적으로 ‘동방’ 정취가 무엇인지 설명하
고 있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육체가 아닌 정신을 지향하는 관념적인 문학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11
을 동방 정취로 추측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동양에 대한 이효석의 규정은
1942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문학과 국민성 25)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학과
국민성 이 국민문학의 제창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한 개의 문학적 각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글임을 전제로 한다면, 이효석이 국민문학론을 <매일신보>
에 내세우고 스스로 국민문학에 앞장서겠다는 다짐을 보여주는 글로 읽을 여
지가 있다. 그런데 이효석의 대표적인 국민문학론으로, 대일협력적 텍스트로
해석되는 이 유명한 글이 하필이면 첫 문장부터 “서구의 신화에서는 제신(諸
神)의 신격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지위와 매력을 숭찬하고 소중히 여긴다”며
“철저한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의 서구를 고창하며 시작하는 것은 범상치 않
다. 이 글은 위에서 다룬 서구정신과 동방정취 과 ‘육체문학’을 언급하며 독
자가 연속선상에서 읽기를 요구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구문학은 육
체문학으로 “형이하의 안일과 유락을 변호하려고 정신은 발동하는 것”을 목
표로 하고 이는 곧 “개체와 인문의 옹호”26)를 의미한다. 지금 여기의 가장 현
실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서구의 육체문학인 것이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의미화를 전제하고 서구-육체문학의 대항으로서 동양의 정신
문학을 세우고 있다.
25) 매일신보, 1942.3.3~6.
26) 문학과 국민성 , 6권, 258면.
육체문학에 대해서 정신문학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본다. (중략) 육체 전제
의 상념에서 떠나서 단순히 인간 정신의 고도의 고양(高揚)을 동기로 한 문
학 –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정신문학의 용어는 반드시 묘망(渺茫)하고 모
호한 것만도 아닐 듯 싶다. 정신주의 문학에서는 개체의 애정을 떠나서 정
신만의 환희와 쾌락의 숭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중략) 사람에게는 지배의
본능이 있는 동시에 확실히 복종의 천성이 있는 것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건없이 머리를 숙이고 어른의 말을 흔연히 쫓고 커다한 권능에 두말없이
복종하는 인간성의 일면이란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다. 지배의 의욕을 즐겨
함에 반해서 이런 면의 인간 진실의 개척은 종래의 문학에서는 드물게 보아
오는 터이다. 여기에 작가의 구미는 바짝 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지
상적인 행복을 버리고 개(個)를 몰각하고 오로지 정신적 연마에 살려고 한
엘리사의 정신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는 것은 시의(時宜)를 얻는 가당한 일
인 듯 하다. 국민문학의 정신과 주제의 일단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방면에서
그 실마리를 잡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국민문학의 새삼스런 제창
의 동기와 원인을 살핀다면 이런 높은 정신생활의 면에 주의를 보내 봄도
일책인 것이다. (6권, 258~259면)
이효석은 국민문학, 즉 동양주의를 ‘정신문학’이라고 위치시키고 있다. 이
효석이 긍정하고 지지하는 서구의 육체문학이 개체성과 개인의 자유를 의미
한다면, 제국이 요구하는 동양의 정신문학은 반대로 “지배의 본능”과 “복종
의 천성”을 다루고 “커다란 권능에 두말없이 복종”한다. “지상적인 행복을 버
리고 개”체를 몰각하고,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 연마”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
리한다. 즉 당대의 동양주의가 요구하고 있는 문학의 성격을 ‘지배’와 ‘복종’
이라고 정리하고 이를 ‘개(個)의 지상적 행복’을 다룬 서구적 문학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동양주의의 국민문학을 기존의 자신의 육체
문학론과 배척되는 ‘정신문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는
그런 정신문학 역시 필요하다고 긍정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효석이 꾸준히
주장해온 서구-육체문학론에서 ‘정신’은 “육체의 소리 위에 끼얹은 고명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며 “육체 만에서 오는 섭섭한 부족감을 위안시키기 위해
서 발명한 한 가닥의 감상에 불과하다.”27) 서구-육체에 대해 동양(국민문학)
-정신은 대척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가 국민문학이 있어‘도’ ‘가당’할 ‘듯 하
다’라는 식의 어중간한 부분 긍정으로 서술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
다. 이러한 ‘서구-육체문학-개인’와 ‘동양-정신문학-복종’이라는 대립항
은 이효석 특유의 예술지상주의적 사상과 곧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작가론
27) 서구 정신과 동방 정취 . 6권, 238~239면.
적으로 주요한 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국민문학을 상대화 시키는 “문학적 진실”
이효석에게 예술과 결합한 개인의 ‘인생’/‘삶’/‘생활’의 개념이 초중반에는
계급 문학의 이념이나 관념과 대립항을 이루었다면28) 일제 말기로 갈수록
군국주의, 전쟁과 대립항을 이루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생활과 화
단 29)은 신문의 표지가 “흥분된 문자”와 “위대한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상
황이지만 자신은 “난중(亂中)의 서국(西國)의 생활”을 상상하며 어지러운 수
도의 골목에서 일어나는 카르멘과 같은 생활과 연애를 꿈꾸며, 생활이 사람
의 최대의 관심사라고 강조한다. 이 전란의 와중에 가을 화단을 정돈하는 것
이 최근의 관심사라고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과 대조되는 이효석 특유
의 ‘생활’은 단순히 물질적인 ‘생계’가 아니라 앞서 살펴본 예술지상주의적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쟁과의 미학적 ‘거리두기’라는 태도, 전쟁을 인식하되 오히려 그
대척점에 선 미학적인 삶에 대해 말하기는 그의 자전적 삶의 방식일 뿐만 아
니라 이 시기 문학론의 내용이기도 하다.
(가) 싸움이 났다고 어중이떠중이 싸움이야기를 쓰기에 급급한 것같이 흉
측한 꼴이 있는가. 각자의 길과 종목과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각자의 길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심화시켜 갈 때만 문단은 성해지고 살쪄 간다. 전쟁 소
설 좋고 세태 소설 좋고 예술 소설 좋고 기록 소설 또한 좋다. 즐기는 종목
과 장기를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문단과 문학을 소중히 하는 소치인
것이다. 참으로 유위한 작가는 쇠북소리에 놀라지 않고 유행인 전장 행을
28) 주리야 에서 주리야가 시장을 보러 가는 장면에서 ‘생활’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대
목이 대표적이다.
29) 조선일보, 1936.8.26.
사양하고 도리어 거리의 한 기적에 머무를는지 모른다. (6권, 247면)
(나) 문학의 지성이 아니라 문학의 심미역(審美役)(문학의 지성은 곧 심미
역으로도 통하거니와)이야말로 환멸에서 인간을 구해내는 높은 방법인 것이
다. 인간이 아무리 천하고 추잡해도 문학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마력
을 가졌다. (중략) 이 문학 본래의 효용과 임무의 견지에서 볼 때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다양하고 진폭은 될 수 있는 대로 넓음이 마땅하다. 문학의
내용과 방법의 세계가 넓을수록 실인간에 주는 재미도 풍부할 것이니까 말
이다. 주조는 시대마다 다른 것이기는 하나 한 시대의 문학으로서 한 주조
의 문학만을 허용한다는 것은 너무도 고루한 것이다. (중략) 메주 내나는 문
학이니 버터 내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 속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 내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
듯, 한편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으로서 버터 내나
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메주문학을 쓰던 버터문
학을 쓰던 같은 구역 같은 언어의 세계에서라면 피차에 다분의 유통되는 요
소가 있을 것도 사실이다. 종교문학 물론 좋으며, 애욕문학 또한 좋고, 자연
문학 또한 필요한 것이다. 국민문학이 나올 추세라면 그 탄생이 물론 기쁜
일이다. 건망증에 걸려 한 가지 제목에만 오물하다 문학의 다양한 품질과
향기를 힐난함은 과분한 욕심이요, 쓸데없는 명예욕이다. (6권, 251-252면)
인용된 두 글은 이효석이 1939년, 1940년에 당대 문단과 출판계 등을 향해
당부하는 내용의 글이다. 이효석은 문학이 “싸움이야기” 혹은 “메주문학”이
라는 한 가지 담론이나 주제론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그 진폭을 넓히고,
광범위해야 한다는 소견을 꾸준히 개진하고 있다. (가)는 문학의 진폭을 넓힌
뒤에 “유행인 전장 행”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신병 훈련소 방문기 등은 “쇠북
소리에 놀라”는 것에 불과하니, “거리의 한 기적에 머무”는 “참으로 유위한
작가”가 되자고 당부한다. 전장으로 나가지 않고 거리에 머물러야 유위한 작
가라는 말은 앞서 살펴본 “난중의 서국의 생활”, 전쟁과 대척하는 미학적 ‘생
활’을 그리는 예술지상주의적 삶의 태도에 대한 고수(固守)를 상기시킨다. 그
는 국민문학론이라는 제국의 담론이 추구하는 실질적인 내용과는 ‘거리두기’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15
를 하고 있다.
(나) 역시 국민문학으로 제한되지 않는 문학적 다양성과 상대주의를 옹호
하고 있다. 인용의 첫 부분은 문학의 미학적 속성을 강조하고 이를 문학의 본
질로 강조하는 이효석 문학론의 핵심으로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이효석은
문학의 본질적 속성인 심미역을 강조하고 이를 문학의 지성으로 본다. 이어
문학의 본질적 목적을 위해서는 소재와 진폭에 제한을 두는 것을 “고루”하고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메주 문학”이라는 조선
적 향토성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인의 취향으로서 버터 내나는 문학이 우러
남도 이 또한 당연”하다며 이효석 특유의 ‘서구-육체-개인’의 문학을 고수
하겠다는 다짐도 보여준다. 조선적 향토성을 재현하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
에 국한되지 않는 “버터문학” 역시 필요하며, 이를 통한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는 현대인의 취향”을 강조한다. 이 버터문학론은 이효석 특유의 미학
주의를 통해 전쟁과 거리를 둔 개체의 미학적 생활을 담은 풀잎 (춘추,
1942.1), 일요일 (삼천리, 1942.1), 소요 (삼천리, 1941.12) 등으로 이어
진다.
(가)와 (나) 모두 여러 가지 소설의 장르를 나열하는 과정에 “전쟁 소설”과
“국민문학”을 일반적인 문학 장르의 하위범주로 집어넣는다. 일제말기 국민
문학의 지위를 애써 문학사의 한 변이형으로 낮춰 그 특권적 지위를 무화시
키려는 시도다. 그러자 굳이 다른 문학보다 우월하거나 강박적으로 제한할
이유가 사라진다. 다양한 장르 속의 일부로 국민문학이 나올 추세는 짐짓 인
정하겠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문학의 다양성을 훼손하면 “건망증에 걸려”
“과분한 욕심”을 부리는 “쓸데없는 명예욕”이라는 비판을 덧붙인다. 국민문
학론이 다른 문학을 ‘힐난’함은 “문학의 심미역(審美役)”이라는 문학 자체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 반대한다.
이처럼 이효석은 국민문학을 언급할 때, 독특한 전략을 사용한다.
① 다양한 장르 속의 대등한 하위범주로 위치시키면서 특권(특수성)을 무
화/비판하고,
②국민문학의 강박과 대조되는 긍정적 사례로서 자신의 육체문학, 버터문
학의 미학주의를 주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①‘범주의 확장/해체’와 이어지는
②‘미학주의적 문학으로 대체’하는 독특한 언술 방식의 구조는 그의 국민문
학론에서도 반복되며 다분히 의도적인 틈새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30) 이효석
은 1940년대에 매일신보에 기고한 일련의 ‘국민문학론’과 일본어 창작을 통
해 대일협력의 혐의를 받고 있지만 그가 국민문학론을 언급하는 이 독특한
언술방식은 거리두기의 자세를 느끼게 한다. 특히 국민문학의 범주를 확장시
켜 ‘세계(서구)’, ‘생활’이라는 요소를 그 틈새에 접속시키고, 조선적 향토성
을 세분화하고 선택하고 있음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효석은 문학과 국민성 에서도 우선 국민문학을 다른 하위 범주들과 대
등한 지위로 낮추며 범주의 확장/해체 전략을 채택하고 있어 흥미롭다.
국민문학이란 당초부터 언제든지 있어 온 것이니 오늘 이것이 새삼스럽
게 운위되는 데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한 까닭으로의 시대적이요, 역사적인
의의가 내재되었음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그 제기의 이유를 수긍할 수 있
다. 각오와 자랑이 평소엔들 없는 바 아니나 그것을 의식시키고 국민성의
교양을 꾀하는 곳에 시대적인 적극성이 엿보인다. 국민문학의 이해는 여기
에서부터 시작된다. (6권, 260면)
30) 정실비는 이효석 소설이 유행하는 지배담론의 핵심적 기호를 도입하지만 제재로만
활용하고, 그 이상의 주체 차원에서는 지배담론에서 생산하는 조선 표상과 대항적
관계를 형성한다며 이효석이 틈새를 만드는 전략에 주목한다. 가령 일본어 소설에
서 조선의 향토음식을 다양하게 거론하는 것이 일본 독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듯 보이지만, 이는 제재의 층위에서만 가능한 해석이다. 주제적으로 조선의 향토음
식, 항아리, 음악은 조선적인 것의 종속성이 아니라 유일성을 입증한다고 본다. (정
실비, 일제 말기 이효석 소설에 나타난 고향 표상의 변전(變轉) , 한국근대문학연
구 25, 2012, 59면) 본고 역시 이효석의 평문이 지배담론을 논박하기 위해서 유행
담론 속 개념들을 도입하지만 그 개념들의 의미를 모두 전유하고, 주제적으로 지배
담론과 정반대의 내용을 그 틈새에 기입하는 서술의 구체적인 전략에 주목했다.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17
이렇듯 국민문학의 용어는 방편적이요 기회적이어서 필요에 응해서 등장
하곤 하는 것이니, 이 시기에 이것이 운위되게 된 것도 역시 시대적인 필요
성의 편연(便然)임은 전술한 바와 같다. 우리는 이 시대성의 의의와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도 국민문학의 권주(圈疇)의 이해
를 지나치게 조급하고 협착하게 규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넓고 유구한 금
도(襟度)로서 그 이해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국민문학의 단 하나의 표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현재 각 작가가 힘
쓰고 있는 문학이라면 그 모두가 일종의 국민문학이어야 한다. 시국의 움직
임을 그리고 국책을 논한 문학도 좋은 것이요, 그 외 광범한 인간생활을 깊
이 밝히고 옳게 파악한 문학이라면 두말없이 국민문학의 칭호에 값가는 것
이다.
작가는 각각 자기 자신의 문학적 품질(稟質)과 소양에 사력을 다해서 의
거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문학의 우열은 단지 그가 진지하게 생
을 탐구 파악했나 못했나에 준해서 결정될 뿐이다. (중략) 생을 옳게 파악하
려면 진실을 보는 문이 맑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진실 외에는 작가의 임본
(臨本)이 없으며 진실을 그리는 외에 작가의 길은 없다. (중략) 작가가 보는
것은 인생적 진실이나 그것이 작가의 주관을 거쳐서 문학으로 나타날 때 문
학적 진실로 변한다. (6권, 261~262면)
더욱 한 걸음 뛰어서 우수한 문학이라면 그대로 바로 세계문학으로도 편
입되는 것이다. 문학 속에 세계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세계문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에 깊이 뿌리박은 국민성의 우수한 창조하면 그대로 세계문
학에 놀라운 플러스를 용이하게 되는 것이다. 폴란드 문학이나 핀란드 문학
이 세계문학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로서다. (6권, 265면)
이효석은 현재의 국민문학이라는 개념이 너무 상식적이므로 보완해야 한
다는 듯한 이야기를 하면서, 국민문학에 대한 “종래의 통념이 너무 단순하고
통속적”(6권, 261면)이므로 고도의 지성과 비판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 그런데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민문학이라는 개념이 너무 “방편적”이
고 “기회적이어서 필요에 응해서 등장”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권주(圈
疇)”가 한정되지 않도록 범주를 확장해야 한다. ‘국민문학’ 자체가 문학사적
내재적인 흐름에 따른 개념어가 아니기에 “오늘 이것이 새삼스럽게 운위되
는” 까닭은 정치적인 담론이 문학장에 개입한 결과임을 우선 언급하고 있다.
“국민성의 교양”을 강조하기 위해 제국이 “새삼스럽게” 요구하는 국민문학은
“시대적인 적극성” 때문임을 알아야하는데, “국민문학의 이해는 여기에서부
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민문학이 “시대적인 필요성의 편연”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으면
서도 이효석은 그 개념을 세계의 하위 범주인 개별국가로 확장시켜 “단 하나
의 표본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라며 모든 작가의 모든 작품, 모든 문학 장르
를 국민문학이라고 확장시킨다. 국민문학을 동양주의적인 ‘정신문학’으로 한
정하면 “조급하고 협착하게 규정”하는 것이니, “넓은 뜻으로 보면 모든 문학
을 다 각기 일종의 국민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며 그 범주를 국가 내의 모
든 문학으로 넓혀버린다. 이효석이 국민문학의 대항으로 세계문학을 배치함
으로써 자연스럽게 ‘국민’이 세계라는 범주의 하위 항목인 개별 국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사실상 문학 일반과 다를 바 없는 용법으로, 국책문학과
그 외의 문학을 대등한 하위범주로 묶어 규준으로서의 정치성, ‘국민’이 가진
배제하는 힘을 무화한다. 그가 국민문학을 세계문학의 단순한 하위관계인 개
별 국가 단위의 문학으로 단언하고, 국민문학은 폴란드, 핀란드 문학이나 다
를 바 없다는 식으로 예를 들어 상대화시켜버린다. 즉 이효석은 국민문학의
개념 자체를 오염시키고 교란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이효석의 국
민문학론에서 조선문학을 세계문학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지배 담론에 저
항하는 점에 주목한 연구자들31) 역시 이러한 규준으로서의 정치성의 무화에
31) 김재용, 앞의 글, 504면.
오태영은 최재서와 김종한의 국민문학에 대한 입장이 향토라는 로컬리티를 통해
조선의 독창성을 강조하거나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에서 벗
어나기 위한 노력이 전체주의적 담론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도 조선 문학에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려는 노력으로 본다. 이효석과 임화의 경우에는 지방에 종속되지 않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19
주목한 것이다. 그런데 무화시킨 틈새에 이효석이 기입하고자 하는 문학론에
대한 논의는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32)
이러한 국민문학의 범주의 확장/해체를 통해 만든 틈새에 이효석은 다시
자신만의 미학주의적 문학론을 개진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문학과
국민성 이 서구의 육체문학과 대립하는 ‘정신문학’을 동양주의의 핵심으로
설정한다는 점은 중요한 도입부이다. 개체의 지상적 행복을 몰각하고 정신적
연마를 강조하는 것이 동양주의의 정신문학이라면, 그러한 정신적 연마의 내
용을 보다 면밀하게 밝히는 것이 국민문학의 내용이 되기에 논리적으로 타당
할 것이다. 그러나 이효석은 동양적 정신문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탐구하
지 않고 넘어간다. “국민문학의 새삼스런 제창의 동기와 원인을 살핀다면 이
런 높은 정신생활의 면에 주의를 보내 봄도 일책인 것”이라며, 국책문학 제
창의 동기가 자연스러운 문학론이 아닌 ‘새삼스러운’ 일임을 간접적으로 시
사하고 넘어갈 따름이다.
오히려 그는 국책문학을 다른 문학과 대등한 지위로 낮춘 틈새에 하필이면
“광범한 인간생활을 깊이 밝히고 옳게 파악한 문학”을 강조한다. 이효석에게
‘인간’의 ‘생활’이라는 기표가 ‘서구-육체문학-개체’의 문학론으로 자연스
럽게 넘어간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역시 문학과 국민성 에서
도 개체의 삶과 육체의 감정과 구체적인 생활을 다루고자 한다. 인용문에서
문학의 우열은 작가가 (국민성을 잘 표현하느냐, 국책에 부응하느냐가 아니
라) “진지하게 생을 탐구 파악했나 못했나에 준해서 결정될 뿐”이며 이 생의
파악은 “인생의 진실”로만 판정한다고 한다. “인생의 진실”은 유일한 “작가
고 세계문학-조선문학 개념을 통해 제국의 로컬리티 담론의 종속을 전유한 노력으
로 보고 있다. (오태영, 앞의 글, 503~504면)
32) 김형수의 경우 구체적인 인간 생활을 반영하겠다는 이효석의 논지에서 조선인의
생활과 조선인의 특수성을 기입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나, 본고는 이효석이 국민
문학론의 틈새에 기입하고자 한 문학론을 이효석 특유의 미학적 사유와 그에 담긴
개체주의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김형수, 앞의 글, 33면)
의 길”이며 유일한 “작가의 임본(臨本)”이기까지 할 정도로 중요하다. 즉, 국
민문학을 대신할 자리에 이효석은 “인생의 진실”을 파악한 “문학적 진실”이
라는 나름의 문학관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진실”은 무엇인가?
문학과 국민성 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진실, 플로
베르와 모파상, 체홉과 로렌스의 진실 등을 언급하며 ‘진실’을 일종의 문학정
신으로 사용하는 용례를 보여준다. 이효석 문학론에서 ‘진실(Truth)’은 독특한
위치에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효석은 리얼리즘의 번역어로서 ‘사실’이 아니
라 ‘진실’주의를 고집했다. 졸업논문 존 밀링턴 싱그의 극 연구 (대중공론,
1930.3)는 희곡의 본질은 “진실과 환희”(reality and joy)라고 번역한다.33) 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가 사실(fact)이 아닌 진실(truth)을 예술의 목적
으로 추구했듯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문학의 목적임을 함의
한다.34) 현대적 단편소설의 상모-진실의 탐구와 시의 경지 (조선일보,
1938.4.7.~9)도 “진실 표현의 충동”이 고금의 소설가의 열광의 원인이라고 분
석한다. “과학자의 수리적 진실” 즉 사실(fact)보다 우월한 “소설가의 인생의
33) 이지은은 당대 계급문학측이 싱(John Millington Synge)은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
판과 반대로 이효석이 싱을 고평하기 위하여 ‘진실’로 번역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싱 원문의 “reality and joy”를 이효석이 “진실과 환희”로 번역하고 이는 다시 “reality
-진실-생활”로 해석된다는 분석은 탁월하다. 이지은, 이효석 소설의 신화적 상상
력 연구 , 서울대 석사논문, 2013, 2장 1절 참조.
34) 이효석의 졸업논문 및 평론은 오스카 와일드의 “진실Truth”과 “인생”이라는 주요
개념과 친연성을 보이며 그 예술지상주의적 문학론을 공유한다. “Of course the
aesthetic value of Shakespeare’s play does not, in the slightest degree, depend on thier
facts, but on thier Truth, and Truth is independent of facts always, inventing or
selecting them at pleasure.” (Oscar Wilde, “The Truth of Masks”, The Complete Works
of Oscar Wilde, Ed. Vyvyan Holand, New York : Harper Collins, 2008, p.1071. 강조는
인용자) 오스카 와일드는 거짓말의 쇠퇴(The decay of Lying) 를 비롯한 예술평론
에서 자연주의의 자연과 인생에 대한 반영론적 사실성에 반대하면서 “인생은 예술
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술을 모방한다는 일반적 원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예술가는 선행하는 사유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선취하게
된다. 이효석과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의 친연성에 대해서는 김건형, 앞의 글,
43~48면, 52~53면 참조.
진실”을 강조하면서, 인생의 진실은 “거짓말”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물론 소설의 목표는 다만 진실의 전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의 표
현을 수단으로 궁극에 있어서는 미의식을 환기시켜 시의 경지에 도달함이
소설의 최고 표지요, 이상인 것이다. 최고 표지가 시의 경지인 점에 있어서
소설의 목표는 물론 시의 목표와 동일하다. 시는 직접적으로 ‘미’를 통해서
시에 도달함에 반하여 소설은 ‘진’을 통해서 시에 도달하려는 것 뿐이다. 소
설의 최고 목표를 일률로 ‘진’에만 두는 것은 참된 리얼리스트의 태도가 아
니며 예술의 본질의 인식을 스스로 그르치는 것이다. (6권, 234면)
소설의 목적을 “진실의 표현”으로 단언하면서, ‘인생의 참’으로서의 소설은
진실의 ‘전달’을 넘어 미의식, 미적인 경지를 ‘표현’하고 도달함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진실’은 다시 “시의 경지”에 도달함을 목적
으로 한다. 그래서 리얼리즘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미의식을 환기하는 ‘표현’이 “예술의 본질의 인식”이다. 미적 창조, 미적 표
현이 소설의 ‘진’이다. “인생의 진실”은 인생이 미적인 수준일 때를 그리는
소설의 목적인 것이다. 이처럼 ‘인생’, ‘진실’이라는 기호는 당대 문학의 소재
빈곤이나 문체, 구성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효석의 미학적
존재론과 직결된다. 이효석에게 ‘문학적 진실’이라는 문학의 미학화 뿐만 아
니라 ‘인생의 진실’, 삶 자체를 미학화 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문학과 국민성 에서 국책문학을 비워내고 마련한 “광범한 인간생활
을 깊이 밝히고 옳게 파악한 문학”의 자리는 사실 “인생의 진실”을 다루는
이효석 특유의 예술지상주의 문학론이자 주체론의 자리다.
인생의 진실을 주창하기 위해 이효석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신체도 미학
화 하는 주체인 ‘댄디’를 작품 곳곳에서 고평한 바 있다. 이러한 이효석 특유
의 예술지상주의적 문학관에 입각해서 문학과 국민성 의 후반부, 특히 문제
적인 지방/향토에 관한 대목을 살펴본다면, 조선 문학이 그 ‘진실’을 ‘표현’하
기 위해서, 조선적인 ‘사실’이 아닌 ‘진실’을 통해서 “미의식을 환기시켜 시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5. ‘향토’의 발명과 이에 맞선 댄디로서의 조선문학
이즈음 이효석은 동양주의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동양의 고유한 정신이나
국민성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한 바 있다. 조선적 성격의 반성 (동아일보,
1940.1.9)은 프랑스의 명랑함이나 독일의 견실함과 같이 통념적으로 알려진
국민성을 언급하고 조선적인 성격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이 예를 본받아 조선적 품성을 추상 명명한다면 대체 무엇이라고 함이
옳을까. 나는 장구한 시간을 두고 생각해 오나 아직 바른 명항(名項)을 얻지
못하고 있다. ‘온화’라고 불러 볼까 하다가도 일방적인 성격 같아서 지워 보
고 ‘우수’라고 해볼까 하다가 이 역 편벽된 품질인 듯해서 고쳐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고 또 굳이 명랑성이니 다혈성이니 견실성이니 적극성이니 하
고 터무니없이 들쳐 봄도 무의미한 일이다. 요컨대 이 모든 품성의 가지가
지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 경우를 따라서 그 표현적 주면이 다를 뿐이다.
이 외 백조의 미덕과 백목의 안덕을 본다고 해도 그 선악의 각 덕목에 스스
로 해당할 것이요, 다만 시대적 현실을 따라 미분(微分)의 표현의 차가 있을
뿐이다. (7권, 293~294면)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인 민족의 성격 도출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
달한다. 결국 개체들의 품격 도야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문예가들의 고찰반
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결론짓는다. 그에게 조선적 성격, 즉 국민
문학은 실체가 없는 “시대적 현실에 따라 미분”하여 강제한 특정한 목적의식
에 불과하다. 당대의 동양주의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동양의 정신, 조선적인
향토성이란 이효석에게 확고부동하거나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23
조선적 국민성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이 애초에 닿을 수 없는 무의미한 탐색
임을 시사했던 이효석이기에 문학과 국민성 에서도 시국이 요구하는 ‘조선
적인 것’과 ‘향토’ 역시 불가해한 것으로 드러난다. 앞서 살펴본 범주 해체의
전략은 ‘조선’과 ‘향토’를 논할 때, 다시 등장한다.
(가) 지방적 소재라고 해도 그 면은 광범해서 다취다양(多趣多樣)한 전
범위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족히 담당 지파(指破)할 바가 아니다. 현재의 모
든 작가를 요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다. (중략) 농촌과 민속을 그리는 기영
(箕永)과 동리(東里)들이 있으면 도회와 세태들을 그리는 진오(鎭午)와 만식
(萬植)들이 있는 것이요, (중략) 싱그만을 추려내라고 하고, 혹은 예이츠만을
내세우려고 함은 다만 비평가적 명목주의요, 편집자적 방편주의일 따름이다.
(6권, 263~264면)
(나) 지방색을 탐구해서 지방적인 대표작을 써야겠다는 성의의 나머지 누
구나가 일률로 향토적인 것, 지방적인 것 하고 눈알을 붉히는 것은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꽃신을 신고 긴 치마를 끄는 여인을 그리는 것, 물론 무관한
일이나 그가 치마 대신에 양장을 해도 역시 여인(麗人)이요, 지방적 현실이
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고, 아니 장차 그가 몬뻬를 입고, 게다를 신고 나서
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조선적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 표현을 거
부할 수 있단 말인가.
(다) 지방적인 것을 찾을 때, 작가들은 흔히 향토로 눈을 보내 즐겨서 원
시적인 것, 토속적인 것, 미속적(迷俗的)인 것을 숭상하고 샅샅이 들쳐 내왔
다. 애란을 그리려는 싱그가 아란도 주민의 원시생활을 들쳐 낸 것과 같은
태도였다. 물론 그런 방면도 한번은 응당 표현을 힘입어야 할 것은 사실이
나 그것을 능사로 삼음은 도리어 협착한 아량이다. 고도기(古陶器)와 무기
(舞妓)와 담뱃대를 문 상투쟁이의 모양을 색판으로 박은 그림엽서가 순전히
외지에서 온 관광객의 호기심에 영합하려는 목적에서 나온것이라면 부질없
는 토속적 문학의 숭상은 외지의 편집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심산의 소치로
추단받아도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라) 같은 향토면이라고 해도 한층 우아하고 목가적인 면도 많은 것이요,
또 향토면에 맞서서 도회면의 커다란 부문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구
의 대다할이 지방의 지방의 주민이라는 이유로 향토를 그린다는 것도 이부
당(理不當)한 일이다. 조선의 움직임은 오히려 도회에 있다. 이 면의 숭상이
없이는 주체적인 파악은 드디어 불능한 것이다. 개화면이라고 해도 좋고 세
계면이라고 해도 좋다. 세계적인 생활요소가 거기에서는 지방적인 것과 합
류 융합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 세계면의 표현이 없이는 언제까지나 향토를
원시의 미간지(未墾地) 속에 버려두고 박아두는 점밖에는 안된다. (6권,
264~265면)
(가)에서 이효석은 사실 ‘지방성’이 애초에 규정하기엔 “광범해서 다취다양
한 전 범위”를 다루는 말이라고 한다. ‘조선적 품성’과 마찬가지로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것이라며 지방성에 대한 규정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혹
은 거부하는 셈이다. 조선이라는 지방성을 그리기 위해서는 “현재의 모든 작
가를 요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말은 사실은 지방성을 규정한다는 것
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내비친다. 현존하는 모든 작가들이 나서야 비로소
조선의 지방성을 그릴 수 있고, “그것은 전부 조선의 면”이기 때문이다. 이어
특정 작가와 특정 경향만을 조선 문학의 대변자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행위는 “비평가”와 “편집자”라는 당대 제국 문단의 잘못된 주장이다.
(나)는 그러한 비평가와 편집자들의 지적 오만을 반증하는 사례다. 시책에 호
응하는 작가들이 조선에서 “일률로 향토적인 것”을 찾는 것이 사실은 “무의
미”한데, “조선적 현실”에는 이제 꽃신-양장-몬뻬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주의적인 문화의 혼용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에서 지방성으로서 향
토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조선을 찾는 셈이다.
지방성과 향토성을 마주한 이효석은 다시 이 개념을 (가)처럼 지나치게 넓
은 개념으로 무화시켜 범주로서의 정치적 기능을 제거해 버리고, (나)처럼 현
실과 무관한 독자적인 상상에 불과해 무의미하다고 단언해버린다. 지방성이
라는 범주를 다시 확장하고 해체해버린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논리적 대응 구
조가 반복된다. 마찬가지로 다시 (다)와 (라)에서 범주가 해체된 빈 자리에
이효석 특유의 문학미학을 개진하고 있다. ‘조선적인 것’을 미학적인 가치평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25
가에 따라 나눈 것이다.
조선적인 정체성이란 것이 특별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효석에게 상
상적인 향토를 발굴하는 특정한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다)는 당대의
제국 문단이 일률적으로 지방성을 찾겠다며 향토만으로 제한하는 점, 특히
그 향토의 재현이 “원시적인 것, 토속적인 것, 미속적(迷俗的)인 것을 숭상”
함과 동일하다고 비판한다. 현재의 조선이 반드시 그들이 그리는 것처럼 미
속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특히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토속적”으로 재현
되는 향토가 “관광객의 호기심에 영합하”고 “외지의 편집자의 비위”를 맞추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효석은 향토를 원시적, 토속적으로 그리는 것은 식민
지를 바라보는 제국의 시선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향토를 그린다고 해서 무조건 제국의 시선은 아니라는 반증이 가
능하다. 이효석은 이를 (라)에서 “한층 우아하고 목가적인” 향토면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즉, 향토 역시 충분히 예술적인 삶과 결부된 모
습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조선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
은 우아하고 목가적인 것, 예술적 생활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외지의
편집자의 비위”에 맞게 “원시의 미간지”로 재현하여 제국의 시선으로 식민지
의 열등함을 재확인하는 혐의가 있다고 본다.35) 특히 동양담론의 조선적 향
토성이 예술적인 삶의 국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
다. 반대로 향토의 “한층 우아하고 목가적인 면”을 본다면 이효석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는 미학적 향토의 구축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일본제국이 만들려는 ‘조선적인 것’-迷俗함과 이효석이 만들려는
35) 이효석의 영서 3부작이나 일제 말기 일본어 소설을 통해 조선적인 것, 향토와 농
촌의 서정을 서구적 시선을 내재화한 오리엔탈리즘으로 그린다는 연구자들의 견해
는 물론 근대적 시선이 가진 서구적 동일시의 폭력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물론 타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시선 자체에 대한 전폭적인 성찰을 소급하는 가혹
한 평가보다는 당대 이효석 나름의 미학주의적 의도가 이 근대적 미감과 시선을 전
유하는 과정이 보다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
‘조선적인 것’-우아함의 대결의 양상으로 볼 수 있다. 당대 일본제국의 문단
도 ‘조선적인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억압하려고 들었
으나, 그런 일본 문단의 오리엔탈리즘이 오히려 조선인들로 하여금 조선적인
것을 고민하게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36)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에 전통이
발명된다는 에릭 홉스봄의 논의를 전제로 한다면, 당시 제국이 자행하는 조
선의 전통에 대한 ‘발명’과 동시적인 척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조선적인 것
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 역시 높아졌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인들 역
시 다시 조선적인 전통이 무엇인지를 근대국가의 전통 발명과정 속에서 고민
하기 시작한 것이다.37) 장혁주 등의 작가가 곧바로 조선을 토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며 제국에 의해 전통/조선이 발명되는 과정을 보고 이
명명을 선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대 제국을 만들기 위해 조선적인 것/향토
를 열등한 식민지 지방으로 명명하려는 동양주의가 조선을 “미속적인 것을
숭상”하여 아름답지 않게 ‘발명’하기 이전에 이효석은 “우아하고 목가적인”
조선을, 주체적으로, 자신이 되고자 하는 미적 이상향을 포함하여 만들고자
한 것이다. 조선적인 것에 대한 미학적인 ‘발명’을 선취해야 했다.
이효석의 국민문학론은 동양주의를 통해 조선적인 것을 발명하려는 분위
기에 대한 응전이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지방성의 재현 방법을 원시적 토속
36) 김혜연,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시대인식 연구- 은은한 빛 이 제기하는 ‘조선적인
것’ , 한국문예창작 25, 2012, 264~265면.
37) 김혜연의 독법에 따르면 은은한 빛 의 주인공 욱이 제국에 의해 먼저 전통으로
발명되기 이전에,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포섭되기 이전에 고구려의 검을 확보하려
는 노력하는 모습은 그가 조선의 전통미를 자각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조선적인
것에 대한 욱의 미학화는 이효석이 나름의 ‘근대’-조선의 전통미를 창출하려는 노
력을 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욱의 미학화가 사실은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전통을 자
발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임을 추측하게 한다. (위의 글, 267면) 정실비
는 욱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해서 서양인의 집에서야 비로소 조선의 아름
다움을 알았다는 청년에게 분노하는 일화를 통해 조선적인 것의 유일성과 그 유일
성에 대한 자각이 ‘자생적’이어야 함을 이효석이 주장한다고 본다. (정실비, 앞의
글, 60면)
으로 열등하게 그리는 방식과 예술지상주의적인 생활을 가진 공간으로 미학
화 하는 방식으로 양분하는 그의 구분법을 세밀하게 독해해야 할 것이다. 토
속적 미속적인 향토를 대상화하는 시선이 제국주의적 혐의를 가지고 있음을,
“외지의 편집자의 비위”를 다분히 의식하고 이를 거슬러 가면서 향토의 “한
층 우아하고 목가적인” 미학을 재현하는 것이 이효석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도시와 전원, 생활과 수목의 일원화를 극찬했던 이효석의 자연
에 대한 관점이 향토에 대한 관점에 유비적으로 대응될 것이다. 하얼빈이 도
시이면서도 자연적 요소를 통해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효석이 재현하고자 하는 조선의 향토 역시 “우아하고 목가적인” ‘전원’으
로 예술지상주의적 삶을 구가하는 공간일 것이다.
이효석이 향토를 보는 제3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하면서 그것과 다른 자신
의 시선을 논한 것은 이러한 미적 자기 창조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
다. 이효석의 우아한 향토에 대한 발명이 가진 독특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그 발명이 타자의 응시를 응시한다는 지적과 그것이 특정한 방식의 (조선
문학의) 자기 미학화, 미학적 자기 창조라는 점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과 삶을 어떻게 미학화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효석의 댄디적 의식은
자신을 향한 ‘응시를 응시’하는 인물들을 창조한다.38) 이효석의 예술지상주
의적 주체는 자신을 미학적으로 제시하는 댄디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조
38) 김미현은 벽공무한의 녹성 음악원 설립 장면에서 ‘용모제일주의’를 개인예술이
아닌 “무대 위에 나서는” 집단예술의 성격을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자신
의 몸 역시 응시의 대상으로 만들고 다시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응시의 주체가 되
기도 하는 것이다. ‘응시를 응시’하면서 관객에 의해 대상화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
의 주도적 사유로 자신을 예술화하고자 하는 이 독특한 태도는 그들이 여성 댄디이
기에 가능한 것이다. (김미현, 앞의 글, 381~382면) 이러한 댄디적 자기 예술화는 당
연히 이효석 자신의 자전적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본고는 이효석 역시 국민문학론
에서 향토성을 미학화하여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이 ‘응시를 응시’하고 있
으며 그들의 대상화 이전에 먼저 조선을 미학화하는 주체성을 갖겠다는 의지를 표
현한다고 보았다.
선이 타자에게 응시될 모습 자체를 스스로 미학적으로 창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입장은, 이효석의 미학적 주체론, “인생의 진실”을 문
학 그 자체에도 확장한 셈이다. 타인의 응시를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아름답
게 가꾸고 창조하여 타인에게 미학적 효과를 제기하려는 이효석의 댄디적 주
체를 상기시킨다.
삶의 미학화를 실천하는 댄디즘은 단순한 멋과 유행을 따르는 모던걸/보이
와 구분되는 정신적 귀족주의의 상징으로, 모든 것을 평준화하는 민주주의라
는 ‘밀물’에 맞서는 저항의식과 ‘속중’들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통속적 세계
와의 통합이 아니라 미학적 분리를 통해 오히려 세계를 바꾸어 나가고 현실
에 대한 관심으로 현실을 위반하며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다. 미학적 주체가
수동적인 미적관조에 국한된다는 자유주의적인 ‘오해’를 불식시키는 상상력
의 세계변형과 미적 창조는 이효석 문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또한 현실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댄디 자신이 자신과의 관계 역시 정립해야 한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자신의 신체, 행위, 감정, 정열, 실존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댄디
는 ‘자신을 창조’하는 사람이다.39)
이에 따르면 이효석의 국민문학론 (다), (라)는 다분히 조선문학이 자신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에 가깝다. 조선적인 것/
문학 역시 (이효석 자신이 그러했듯이) 주체적으로 자신을 가꾸는 자발적인
댄디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효석은 조선/향토와 거리를 두고 대상
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동일시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는 이미
39) 미학적 태도를 통해 자신의 개체성을 실현하는 주체의 양상을 푸코는 ‘실존/존재의
미학(aesthetic of existence)’이라 한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에서 푸코는 현대성
(Modernity) 개념을 고정되고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성숙을 향한 ‘운동’으로 본다.
이에 따라 현대성을 일종의 ‘태도’로 고려하기를 제안한다. 푸코는 현실에 대한 댄
디의 영웅주의와 변형활동, 자아의 창조가 사회나 정치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
지 않았으며, 오직 예술에서만 생산가능하다고 본다. 에토스로서의 미적인 삶, 존재
의 미학화를 통해서만 자유를 향한 열망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김건형, 앞의
글, 17~18면 참조)
세계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조선의 도회에 주목하기를 주장한다. 비
록 인구의 대다수가 향토에 살더라도, 이효석이 긍정할 수 있는 조선적인 것,
아름다운 조선은 도회에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지의 편집자”의 응시
를 다분히 의식하면서도(응시를 응시), 그 시선에 당당할 정도로 미학적인 조
선, 이미 “개화면”과 “세계면”을 갖춘 미학적인 조선을 문학화하자는 것이다.
이효석에게 서구-도회적 삶의 양식이야말로 세계적 보편성과 조선성이 공
존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도시적 세계성에 대한 주목없이 조선을 파악한다는
것은 “원시의 미간지”로 보고 조선에 미학적 태도가 부재하다는 평가와 다름
없다. 이효석이 조선에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도시적 삶의 양식은 “세계
적 생활요소”를 품고 있으며, 이 세계 면이 표현되어야만 예술적인 취향과
감각의 도입이 가능해진다. 도시를 강조함으로써 조선을 예술지상주의적 공
간인 하얼빈과 서구와 대등한 미학으로 내세우고자 한다. 그래야만 조선이
제국과 관광객의 유흥거리인 “원시의 미간지 속에 버려두고 박아두”지 않고,
본격적으로 생활과 예술이 합치된 “우아하고 목가적인 면”으로 “세계적 생
활”로, 미학적인 조선으로 도약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조선에 대한 “주체
적인 파악”을 하는 길로 제시된다. “조선의 움직임은 오히려 도회에 있다”는
것은 조선문학이 자기 자신을 미학화 한 댄디로서 존재할 때, 동양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댄디 이효석의 기대감을 읽게 만든다.40)
그런 미학적인 조선이라면 외부인의 응시를 오히려 요구하고 이를 재응시
하며 자기를 다시 창조해 갈 것이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에 나타난 한복과
40) 이러한 맥락에서 이효석이 향토에 대한 서정적 재현을 중심으로 하던 경향에서 후
기의 도시소설로 옮겨간 한 맥락을 고찰해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추후 과제도 제
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서 삼부작으로 대표되는 향토를 다룬 서정적인 작품군이
서술자가 내재한 미학주의를 통해 향토적 소재의 서정을 전달한다면, 일요일 , 풀
잎 등의 후기 도시소설 계열에서는 주인공들이 직접 서구-미학이라는 기준으로
조선의 예술/공간을 직접 말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보다 적극적인 예술지상주의를
보이게 된다.
한식의 미학화는 다분히 외부인의 응시를 의식한 댄디 조선의 자기 창조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41)
“욕심쟁이,-당신 참 미인이예요.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려요. 한복을 입
고 미국에 가면 얼마나 예쁠까. 다회에서도 야회에서도 틀림없이 인기가 있
을 거예요. 사교계에서 치고나가서 한국의 미를 크게 자랑하는 거예요.” /
“참, 말도 잘하셔. 추켜 주어도 속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예요. 나 여기와서 오래 되었지만 당신처럼 예쁜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어요.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까, 결국 동양적인 미-라기보
다 한국적인 미-부드럽고 품위가 있는 미, 그것이 당신이예요. 쭉 같은 배
를 타고 여행한다는 것은 지금부터 큰 즐거움의 하나.” 「푸른 탑」, 國民新
報, 1940.1.7~4.28. (4권, 390면)
“(한복과 꽃신이-인용자) 그렇게 좋다면 이번 미국 갈 때 잔뜩 해가지구
가면 어때? 역수입이 아니라 직수입이지. 저쪽 가서 대대적 선전을 해서 조
선 여성을 위해 기염을 토하구 오라구.” 「은은한 빛」, 文藝, 1940.7. (3권,
79면)
현의 요청으로라기보다도 자기가 좋아해서 무엇보다도 한복을 사랑했다.
가게나 아파트에서는 일본옷이나 양복으로 때우지마는 현과 둘이서 나들이
41) “유럽인들의 눈과 가치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이효석은 오리엔탈리즘에 호소하
는 것이 하나의 유력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유럽인들의 삶과 소재를 다루었을 때
그 어떤 유럽인들도 주목하지 않지만 가장 조선적인 향토색을 띤 작품을 창작하게
되면 일본인은 물론이고 유럽인들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효석은 “일
본어로 창작할 경우에는 서양인들의 시선에 독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조선적
향토색을 두드러지게 내세웠다. 조선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김재용, 앞의 글, 309~315면) 김재용은 이효석의 국민문학론
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다시 응시하는 이효석의 자의식을 잘 짚어내고 있다.
이효석이 특정한 독자의 시선을 유념에 두고 조선(문학)을 재현한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재응시’를 비단 오리엔탈리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효석이 초
기부터 고수해온 예술지상주의적 맥락에서 본다면, 일제말기에 들어 갑작스럽게 제
국주의에 동화된 것이 아닌 나름의 전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방식’의 향
토색인지에 대해서 이효석이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은 보다 주목되어야 한
다. 그가 조선문학에 예술지상주의적인 댄디적 주체되기를 요구한 점, 미학적 자기
창조를 선취하려는 노력이 상론되어야 할 것이다.
할 때에는 그 향토의 의상을 입는 경우가 많아 저고리 아래 치마 주름이 잘
게 접혀지고 그 치마폭 아래로 뻗은 다리 모양은 양복을 입었을 때보다도
더 화사했다. “세 종류의 복장 중에서 난 역시 이것이 제일 좋아요. 몸매의
이쁜 점이 구석구석 다 잘나타거든요.” 「엉겅퀴의 장」, 國民文學, 1941.11.
(3권, 171면)
소다수 대신에 화채를, 커피 대신으로는 수정과, 홍차에 필적할 음료로는
식혜, 보리수단자 등등으로. 이건 참 그럴듯한 착안이어서 다방은 전보다도
더욱 번창하고 풋내기 커피통(通)을 자랑삼던 패들도 속속 수정과당으로 전
향해 오는 격이었다. (3권, 99면)
“게다가 은실은 그만큼이나 이편에서 열을 올려도 끄떡도 않고 있겠다,
피아노를 하라고 해도 가야금에만 열중하고 후원회를 만들어서 외국에 보
내자고 해도 그리 즐겨하는 기색도 없이-” (3권, 105면)
다방은 한동안 불이 꺼진 듯이 쓸쓸했고 손님들도 훨씬 줄어들었지만 다
만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향토애의 선물, 화채나 수정과 같은 음료를 찾는
사람들은 의연히 매일 끊이지 않고 들려 은실의 여운은 마치 꽃향기나 음악
의 선율처럼 여기저기에 아련히 떠도는 것이었다. (3권, 106면) 「소복과 청
자」, 미상.
한복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한식의 맛을 서구 음식과 비교하면서 벽
공무한의 나아자와 일마는 국적을 넘는 쭉정이의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런
데 상기의 인용한 일본어 소설들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반복된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은 댄디 주인공들의 자기창조를 통해 조선을 미학화하고 이를 서
구 미학과 견주는 구도를 반복한다. 이 시기 일련의 일본어 소설 창작이 특정
한 미학주의적 목표 의식의 응전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보다는 하필
서구인에 의해 조선의 미학적 자기 창조를 인정받는다는 구도가 반복된다는
점은 이효석이 미학적 태도의 본고장으로서 서구를 표상한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일본-조선의 대립구조가 아니라 서구라는 제3의 미적 기준과 조선의
미를 직접 비교하면서 일본이라는 범주를 무화시키는 특유의 논술구조이기
도 하다.) 일본어 소설에서 한복과 꽃신을 비롯한 조선의 미를 서구에 ‘수출’
하겠다는 포부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은 이효석의 향토가 제국의 시선으
로 조선을 보는, 즉 은은한 빛 에서 “서양사람의 집에서 조선 식기를 역수
입한 청년”(3권, 77면)의 새삼스런 자기발견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식시킨다.
조선미가 충분히 미학적 태도로 창조한 결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서구를 비
교한 것이지, 서구 음식이나 서구의 의상에 대해서는 사실상 서술자도 굳이
묘사하지 않고 주인공도 미국인에게 묻지 않는다. 인용문에서 한복은 서구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가 한복을 위해 동원되는 셈이다. 이처럼 조
선의 자체적인 미학을 창조하는 댄디 주인공들은 스스로 타인(서구인)의 응
시에 조선미를 내세우려고 한다. 한복이라는 “향토의 의상”과 한식이라는
“향토애의 선물”은 이효석이 주장하는 “우아하고 목가적인 향토”를 직접 작
품으로 구현한 미학적 장면인 셈이다. 이를 통해 조선적인 것이 미속적인 발
명이 아니라 미학적 대상임을, 이를 조선의 댄디가 스스로 선취했고 세계적
미학에 의해 공증 받았음을 일본 독자에게 선포한다.
6. 나가며
본고는 당대의 동양주의 담론과 다른 이효석만의 서구 표상에 담긴 미학을
독해하고자 하였다. 동양주의에 대한 이효석의 대응 역시 이 서구라는 표상
을 통해서 타진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그의 서구 표상에서 육체문학론과
개체주의적 의식을 찾았다. 특히 이효석의 국민문학론으로 잘 알려진 문학
과 국민성 을 이효석 특유의 미학주의적 관점의 연장선에서 독해했다. 동양
주의를 비워내고, 세계문학으로 확장한 내부에 예술지상주의적인 자신의 문
학론을 개진하는 언술 구조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서구-육체문학은 일상의
예술화와 연계되어 예술지상주의적 의식을 담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파시즘
의 국책문학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효석은 ‘조선적인 것’이 제국주의적 오
동양주의 담론에 대응하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과 댄디로서의 조선문학․김건형 133
리엔탈리즘으로 해석된 ‘향토’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자기를 형상화하는 ‘전
원’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2016년 5월 31일에 접수되어, 2016년 6월 7일부터 6월 21일 사이에
이루어진 소정의 심사를 거쳐 2016년 6월 25일 편집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게재
가 확정되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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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외 논문 및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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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고는 이효석의 서구 표상을 파편화된 욕망이나 제국주의적 동일시가 아
닌 맥락에서 재독하기 위해 일제 말기 동양주의 담론과 응전 양상을 살펴보
고 당대 동양주의 및 모더니즘과 상이한 이효석만의 서구에 대한 의미화를
도출하려고 한다. 서구라는 표상을 문학적 생애 내내 강조했으며, 국민문학
론과의 자장이 문제적인 이효석의 경우 그 의미가 각별할 것이다. 그의 평론
은 서구 표상을 통해 그리스 헬레니즘적 ‘육체문학’과 “개인의 자유와 안정
의 절대경”을 문학의 원형으로 제시했다. 그가 꿈꾼 예술지상주의적 주체론
은 국민문학론에 순응하지 않고 국민문학의 범주를 해체시켜 틈새를 만들고,
개인의 삶을 미학화 하는 문학 고수하기로 연결된다. 그는 다시 조선적인 것,
향토성의 개념을 다시 불가해한 것으로, 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해체한
후, ‘조선적인 것’의 발명을 둘러싸고 제국의 명명과 대결한다. 이러한 맥락
에서 이효석에게 조선/향토는 단순히 거리와 대상화를 전제한 제국주의적 시
각이거나 열등한 형상화가 아니다. 조선(문학)은 스스로를 미학적으로 형상
화하는 미학적 주체가 되어야 했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은 조선이 스스로
댄디적 주체가 되어 전통/미를 창조했고 이를 세계적인 미학으로 공증 받았
음을 강조하는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주제어 : 이효석, 국민문학론, 문학과 국민성, 세계문학, 서구 표상, 동양주의,
육체문학, 향토, 댄디, 예술지상주의, 미학
• Abstract
Lee, Hyo-seok’s aestheticism of ‘Western’ and ‘Local’ as
response to Japanese orientalism
Kim, Keon-hyung(Korea Military Academy)
This article tries to examine Lee, Hyo-seok’s Inclination to Western aesthetics
not as a fragmented desire or imperialistic gaze, but as a response to the Greater
East Asia discussion in late Japanese Imperial period. I intend to explain that
Lee’s notion of ‘Western’ is different from the ones occuring in the Greater East
Asia discussion or Modernism. In all his literary work, Lee, Hyo-seok stressed
the symbolic significance of the notion of ‘Western’, a fact which is especially
important in light of its relation to the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 By means of
Western aesthetics, his critique proposes hellenistic “Literature of Body” and
“Absolute stage of singular freedom and stability” as a literary archetype. The
subject theory Lee endorses is inspired by the principle “art for art’s sake”, and
it deconstructs the category created by the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 In turn,
this makes room for a type of literature focusing on the aesthetics of the life of
an individual. Furthermore, he deconstructs the notions of ‘Joseon’ and ‘locality’
as something incomprehensible. Then, in the process of creating ‘Joseoness’, he
confronts the Imperial act of naming what counts as ‘Joseoness’. In this context,
Lee views Joseon/Locality not as a product of Imperial perspective or an
expression of its inferiority, both of which implicitly submit that these are
something to be objectified. Joseon (and korean literature) should be an aesthetical
subject that creates its own self. As such, Joseon should be Dandy to create its
own tradition and beauty.
•Keywords : Lee, Hyo-seok,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Literature and nationality, world literature, representation
of Western, Japanese orientalism, Literature of body,Locolity, Dandy,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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