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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흐름을 위한 기도-요한복음 17장을 중심으로/정복희.연세大

I. 서론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터넷이 열어놓은 사이버 세상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들과 지식, 그리고 사물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에 따른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나타낸다.

이러한 초연결 사회의 사이버 공간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네트워킹과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능과 단절을 경험하게 하는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연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 대한 경험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초연결 사회에서 교회와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믿는 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믿는 자들은 어떻게 초연결 사회에서 무능과 단절이 아닌 다양한 네트워킹을 만들고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7장은 세상이라는 공간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서, 이 기도에서 예수는 세상으로 보냄받은 제자들이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1) 세상과 소통하면서 세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세상과 구분되어 아버지-예수 안에서 소통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는 박경미의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에 사용한 용어로 요한공동체의 삶과 투쟁을 표현한 용어이다. 박경미는 요한이 사용한 은유와 상 징, 오해, 아이러니 등은 요한의 이원론적 신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 다. 박경미,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9.

 

요한복음 17장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와 달리 예수의 떠남을 앞두고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에서 예수는 자신의 보냄받음과 제자들의 보냄에 관해 말하면서 아버지께 제자들을 보전하고 지켜주시기를 간구한다.

예수는 자신을 보냄받은 자로 말하면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 하지만 지금까지 요한복음 17장의 연구는 예수의 보냄을 선교나 교회의 연합으로 해석함으로써2) 보냄의 의미에 집중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2) Mary L. Coloe, “John 17:1-26: The Missionary Prayer of Jesus,” ABR 66 (2018), 11-12. Mary L. Coloe는 요한복음 17장은 제자들의 미래 선교를 위한 기초를 설립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보냄과 보냄받음에 집중하면서,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냄과 보냄받음을 고찰하여 17장에 나타나는 “세상으로 보냄”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먼저, 17 장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세상의 의미를 공간적 개념을 사용하여 해석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요한복음 속 세상의 다중적인 의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요한복음의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했던 이전의 연구와 달리 ‘세상’의 다중적인 의미를 밝히고, 요한복음 17 장의 예수의 기도에 언급된 보냄과 보냄받음의 의미를 세상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본 논문은 17장의 땅과 세상은 보냄받은 예수와 제자들이 그들의 치열한 삶을 유지하는 실존 공간이며, 아버지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세상은 하늘과 대조되는 지리적 공간인 반면, 보냄받은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보냄과 하나님-예수 안에서 거룩을 경험하는 거룩한 공간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 안에서 그들의 중심공간이자 거룩한 공간인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면서 주변공간이자 지리적 공간인 세상으로 거룩을 흐르게 함을 위해 보냄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보냄받은 공간으로서 아버지-예수 안에서 경험한 연합과 거룩을 흐르게 하는 “흐름의 공간”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보냄과 보냄받음을 흐름으로 해석하여 요한복음 17장은 “흐름을 위한 기도” 임을 주장한다.

본 논문은 공간 개념을 사용하여 요한복음 속 “세상”의 다양한 의미를 해석하고 17장의 보냄을 세상과의 관계에서 해석하여 세상의 다중 의미를 밝힌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17장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또한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흐름과 흐름의 공간으로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과의 소통과 네트워킹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실존 공간으로서 세상

 

요한복음 17장은 예수의 희생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 3)로 자주 언급되어 왔지만4) 학자들 사이에서 17장을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여러 이견이 있다.5)

 

    3) 전통적으로 키트래우스(David Chyträus, 1531-1600)가 17:19의 “저희를 위하여 내 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를 희생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해석하여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로 명명하였다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C. K. Barrett는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명명한 것은 키트래우스보다 이전, 알렉산드리아 의 대주교였던 시릴(Cyril)이라고 주장한다. C. K. Barrett, 요한복음 2, 한국신학 연구소 번역실 역, 국제성서주석 32/2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362.

    4) Ramsey Michaels는 17:19의 성별은 희생제물로서 예수의 순교에 대한 의미를 포함 한다고 주장한다. J. Ramsey Michaels, 요한복음, 권대영, 조호용 역, NICNT (서 울: 부흥과 개혁사, 2022), 1072-73. 이와 달리 Coloe는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 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Mary L. Coloe, John 11-21, Wisdom Commentary 44B (Vollrhrbillr: Liturgical Press, 2021), 446. 이러한 논쟁에 대해서는 R. E. Brown, 요한복음 II, 최흥진 역, AB (서울: CLC, 2013), 1436-42; D. A. Carson, 요한복 음, 박문재 역 (서울: 솔로몬, 2017), 2026-27; 김문현, “요한복음 17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신약연구 10/4 (2011), 825-26을 참조하라.

    5) 17:19의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를 예수의 희생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이견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5)가 예수의 영광과 십자가 사건의 이중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6)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7)

하지만 17장에는 예수가 이 땅에서 이룬 하나님의 영광과,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제자들의 보호와 하나됨을 간구하는 내용이 더 많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17장을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본문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8)

17장에서 예수는 자신의 희생보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한다.

예수는 자신을 보낸 아버지에게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실 것과(17:1-8), 세상으로 보낸 제자들을 보전하고 지켜주실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고(17:9-19), 제자들로 말미암아 믿게 될 자들이 온전히 하나되어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기를 기도한다(17:20-26).9)

 

    6) Richard Bauckham은 요한복음에서 수난-영광 내지 비하-승귀가 이중의 의미를 지 닌다고 주장한다. Richard Bauckham,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요한복음의 주요 주 제들에 대한 심층 분석, 문우일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1), 145.

   7) 학자들은 17장에 다양한 명칭을 붙이기도 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예수의 기도”, “고별기도”와 같은 일반적인 제목을 붙인다.     8) 요한복음 저자는 ‘보내다’의 의미로 ἀποστέλλω와 πέμπω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ἀποστέλλω와 πέμπω 두 용어 모두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가 예수를 보냄 혹은 예 수가 제자들을 보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런데 17장에서는 πέμπω 동사가 언급되지 않고 ἀποστέλλω로만 나타난다(17:3, 8, 18, 21, 23, 25).

    9) 17장의 구조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전통적으로 해당 본문을 세 부분-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17:1-8), 제자들을 위한 기도(17:9-19), 미래 그리스도 인들을 위한 기도(17:20-26)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George R. Beasley-Murray, 요 한복음, 이덕신 역, WBC 36 (서울: 솔로몬, 2001), 556-63; 최흥진, “요한 공동체와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을 중심으로,” 신약논단 10/3 (2003), 658-63; Coloe, “John 17:1-26,” 3-4를 참조하라. 이와 달리 Rudolf Bultmann은 17장 은 12:20-33에 대한 확장이며, 13:1이 17장의 서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17:1-26을 13:1 다음에 위치시킨다. Rudolf Bultmann, The Gospel of John, trans. by G. R. Beasley-Murray, ed. by R. W. N. Hoare and J. K. Riches (Oregon: Wipf & Stock, 2014), 486-523 참조. 이에 대해 Jerome H. Neyrey는 이러한 구분은 예수 의 기도를 하나의 청원기도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Jerome H. Neyrey, The Gospel of Joh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278. Thomas W. Hudgins는 17장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 구조 대신 명령법과 ἵνα 가정법을 중심으로 주요 동사를 중심으로 구조를 분석하여 대안적인 새로운 구조를 제안한다. Thomas W. Hudgins, “An Application of Discourse Analysis Methodology in the Exegesis of John 17,” Eleutheria 2/1 (2012), 24-57.

 

이런 내용을 고려  하면 17장의 주요 주제는 예수의 희생이라기보다는 ‘보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것은 17장에서 ‘보내다(ἀποστέλλω)’라는 용어가 6번(17:3, 8, 18, 21, 23, 25)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예수의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낸 것도 알지 못한다(17:25).

세상은 의로우신 아버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을 미워한다(1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17:4) 고 말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7:15).

예수는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을 세상에 보낸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고(17:18),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낸 것과 예수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기를 간구한다(17:23).

그렇다면 17장의 예수의 보냄받음과 제자들을 보냄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는 것이 17장의 보냄의 의미를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복음 속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요한복음 속 세상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카슨(D. A. Carson)은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중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배척을 위한 복선이며 세상은 결국에는 어둠으로 규정되고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라고 주장한다.10)

하지만 카슨의 이러한 주장과 달리 요한복음 속 세상은 적대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아버지가 “세상으로부터(ἐκ τοῦ κόσμου)” 택한 자들이라고 하여 제자들이 이 전에 세상에 있었던 것으로 표현하면서도(17:6), 제자들이 “세상 안에”(ἐν τῳ κόσμῳ) 있다고 말하고(17:11), 예수 자신 역시 “세상 안에(ἐν τῳ κόσμῳ)” 있는(17:13)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이원론적이라고 보기 어렵다.11)

말리나(Bruce J. Malina)는 요한복음의 세상은 물리적 세상으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인간, 요한공동체의 적으로서 유대인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12)

말리나의 이러한 주장은 요한복음의 세상을 긍정적, 부정적, 그리고 중립적으로 구분했던 이전의 주장들13)을 넘어 세상을 다면적으로 해석했다는 장점이 있다.

 

     10) Carson, 요한복음, 211-12. 김선정 역시 브라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고별담화에 나타난 세상은 여전히 선포 대상으로 언급되지만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에 대해 “예수(또는 요한공동체)의 적대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김선정, “고별연설(요 13:31-16:33)에 반영된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회당의 갈등 상 황,” 신학논단 88 (2017), 13.

     11) 요한복음의 ‘세상’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정복희, “요한복음 6장에 나 타난 식사 기독론의 기능,” 신약논단 26/1 (2019), 131-32를 참고하라.

     12) Bruce. J. Malina는 현재의 독자에게 세상은 온 세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요한의 독자들은 그들의 인종적 전망에서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유대인으로 이해했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 Bruce J. Malina, Social-Science Commentary in the Gospel of Joh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8), 245.

     13) Robert Kysar는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용어는 일관성을 가진 것이 아니며, 이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긍정적이고 중립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불신앙의 영역,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 는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Robert Kysar, 요한복음서 연구: 그 독자성을 중심으로, 나채윤 역 (서울: 성지출판사, 2002), 128-31. 김동수 는 요한복음의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으로 중립적인 의미와 하나님의 사 랑과 구원의 대상으로 긍정적인 의미와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소외되고 아들 예수 와 반목하고 제자들을 미워하는 실체로서 부정적인 의미가 혼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 김동수, 요한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3), 238-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나는 인종적인 전망에서 요한복음의 세상을 해석함으로써 요한복음의 세상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를 인종적 해석으로 제한하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17:9)의 ‘세상’은 말리나의 주장대로 인종적 전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17:13)에서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를 위함이 아니요”(17:15)의 ‘세상’에 대한 해석에 말리나의 주장을 적용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요한복음 속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인 해석을 극복하기 위해 임진수는 기독론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임진수는 세상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14)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외형적으로 이원론적인 불일치를 보여주지만, 이러한 불일치는 요한의 기독론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주장한다.15)

이러한 주장은 세상을 기독론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세상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통해 해석했다는 장점이 있다.16)

 

      14) 임진수, “요한복음의 세상(κόσμος),” 신학과 세계 47 (2003), 173.

      15) 임진수, “요한복음의 세상,” 193. 임진수는 요 3:16; 4:42; 6:33, 51, 8-11을 토대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세상’의 의미를 고찰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임진수, “요한복 음의 세상,” 173-94를 보라.

      16) 정복희 역시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복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 맺기는 사랑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관계 맺기는 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정복희, “식사 에서의 정체성과 요한공동체의 정체성 구성,” 대학과 선교 33 (2017), 334-36. 

 

하지만 임진수의 주장은 요한복음에 언급된 일반적인 의미의 “세상”에 대한 접근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 중에서(ἐκ τοῦ κόσμου)” 아버지가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말한다(17:6).

이것은 제자들이 아버지가 그들을 예수에게 다 주시기 전에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한 예수는 내가 “세상에서”(ἐν τῳ κόσμῳ, 17:13)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세상에서”를 인종적 혹은 중립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생활 공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냈다는 것은 아버지가 세상의 공간에 살던 제자들을 택해서 아들에게 주었고, 아들은 그들을 다시 그들의 공간인 세상으로 보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아버지로부터 택함받기 이전에 제자들이 살던 공간인 동시에 보냄받은 제자들이 그들의 치열할 삶을 유지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실존 공간17)이다.

 

     17) “실존 공간”이라는 용어는 사회지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한 문화 집단의 구성 원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공간으로, 개인의 자각 공간의 의미들을 합친 것이 아니 라 한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문화의 의미이다. 사회지리학자 Edward Relph는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공간의 요소들을 알고 정교한 생각이나 사전 계획이 필요하지 않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을 “실존 공간” 혹은 생활공간(lived space)이라고 설명한다. Edward Relph, 장소와 장소 상실, 김덕현 외 역 (서울: 논형, 2017), 50. 

 

공간은 공간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다른 의미를 제공한다.

아버지와 예수를 경험한 제자들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세상은 동일한 생활 공간으로서 실존 공간이지만, 그들에게 세상은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은 제자들에게 여전히 실존 공간으로 존재하지만 아버지의 선택과 예수의 보냄에 의해 제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존 공간으로서 세상은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예수와 제자들이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거주 공간이며, 공간에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땅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17:4)은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예수의 세상에서의 치열한 삶과 자신의 사역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로 말미암아 믿게 된 사람들은 실존 공간인 세상 안에서 세상의 통치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의 의식주를 세상에 의존한다. 세상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 공간으로서 실존 공간이다. 실존 공간은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경험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다시 만들어진다.18)

실존 공간은 그 공간을 경험하는 자들에 의해 다르게 경험되고 다른 의미와 인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세상이 실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형태의 경험을 제공하고 다른 의미를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18) Relph, 장소와 장소 상실, 47-50 참조. 

 

III. 지리적 공간과 거룩한 공간으로서 세상

 

1. 지리적 공간으로서 세상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땅에서(ἐπί τῆς γῆς)” 이루었다고 말한다(17:4).

예수가 언급한 ‘땅(γῆ)’은 요한복음에서 13번 언급되는데19) , 개역개정에서 “육지”(21:8, 9, 11)로 번역된 세 번을 포함하여20) 3:22와 6:21에서는 지방이나 영토를 가리키는 지리적 의미로 해석된다.

 

    19) 3:22, 31(3번); 6:21; 8:6, 8; 12:24, 32; 17:4; 21:8, 9, 11.

    20) 요한복음 21:8, 10, 11에서 ‘땅’은 ‘육지’로 물리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 되었다. 요한복음 1-20장과 21장의 통일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지 만, 요한복음 21장이 주요 사본들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포함한다. 

 

그 외(8:6, 8; 9:6; 12:24)는 물질적인 의미로21) 공간의 개념이나 공간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22)

반면, 3:31(3번)과 12:32의 경우, “땅”은 공간에 대한 개념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3:31에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와 병행을 이루고, “땅에 있는 이”는 “땅에 존재하는”과 병행을 이룬다. 여기서 “땅”은 ‘위’ 또는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23)

 

     21) 6:21에서 “땅”은 뭍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8:6, 8과 12:24에서는 물질적 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2) 공간이나 공간에 대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땅’은 본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 이 없으므로 더 이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23) 3:31과 8:23은 예수의 기원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3:31에서 예수는 자신의 기원을 하늘로 말하면서 하늘을 땅과 대조하는 반면, 8:23에서 예수는 자신의 기원을 ‘위’라고 말하고 이와 대조되는 ‘아래’와 ‘세 상’을 병행시킨다. 이런 면에서 3:31의 ‘땅’은 8:23의 ‘아래’와 ‘이 세상’과 동일시된 다. 이 두 구절에서 인칭과 수의 차이는 3:31은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3인칭 단수)를 향한 것이라면, 8:23은 ‘너희’ 유대인을 향하기(2인칭 복수)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로서 아들(3:34-35)과 동격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하늘’과 ‘위’는 예수의 기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가 있었던 공간으로서 ‘하늘’을 나타낸다면, 땅은 ‘하늘’ 또는 ‘위’와 대조되는 ‘아래’로서 세상을 나타낸다.

예수는 위에서 났으며(8:23), 하늘에서 내려와서(3:13, 31; 6:38, 50, 51, 58) 하늘의 일을 말하였다(3:12).

그러므로 ‘하늘’과 ‘위’는 예수가 세상으로 보냄받기 전에 있었던 거룩한 공간이다.

반면, ‘땅’은 ‘하늘’이나 ‘위’와 대조되는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사람들은 땅을 하늘과 다른 공간으로 인식한다.

이런 점에서 “땅에 속한 이”에게 땅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공간은 아니다.

“땅에 있는 이”에게 땅은 그들의 삶을 유지하고, 세상의 통치자들의 영향을 받는 공간으로서 세상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하늘이 거룩한 공간이라면, 땅은 거룩한 공간과 대비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여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고(3:16)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에 생명을 주셨다(6:33).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예수뿐만 아니라(7:7) 제자들(15:18, 19; 17:14)과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15:23).

더 나아가 세상은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자각하지 못하고, 세상 안에 있는 예수를 알지도 못한다(1:10; 14:17; 17:25). 그러므로 세상은 거룩한 공간인 하늘과 대비되는 지리적 공간24) 이다.

세상이 지리적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이 중립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고 세상에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고 창조한 의미로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25)

하늘에 속한 이는 예수와 동격이라면, 땅은 “땅에 있는 이”와 동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동일시된다.

세상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과 구별 되는 곳이며,26)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과업이나 세상의 통치 안에서 세상을 인식한다.

 

    24) Yi-Fu Tuan은 “지리적 거리”를 설명하면서 “지리적”이라는 용어를 친밀감과 연결 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멀어진다’는 심리적 부재에 대한 공간적 거리를 나타낸 다. Yi-Fu Tuan, 공간과 장소, 구동회, 심승희 역 (서울: 도서출판 대윤, 2011), 86-87. Relph는 공간은 공간에 대한 경험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고 주장한다. 예 를 들어 “우리들에게 나무와 바위이지만 원주민에게 조상과 영혼으로 경험되는 신화적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주민이 경험하는 실존 공간은 ‘신 성하고’ 상징적인 ‘신성공간’이라면, 세계를 신성하게 경험하는 것이 흔하지 않은 자들에게 실존 공간은 ‘지리적 공간’이다. Relph, 장소와 장소 상실, 52-53.

     25) Relph에 의하면 지리적 공간은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고”, “인간의 과업이 나 생활 경험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Relph, 장소와 장소 상실, 55.

     26) 박경미,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333. 

 

이런 의미에서 3:31에서 “땅에서 난 이”는 하늘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로서 세상에 속한 자들을 나타낸다.

12:32의 ‘땅’은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던 생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실존 공간이다.

그런데 12:32에서 “땅에서 들리다”는 땅에 대한 다른 의미로서 무의식적으로 예수의 하강과 상승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땅에서 들리다(ὑψωθῶ ἐκ τῆς γῆς)”에 사용된 ‘들리다’는 요한복음에서 5회 사용되는데(3:14[2번]; 8:28; 12:32, 34) 모두 예수의 상승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예수는 ‘위’와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땅에 속하지 않지만 자기의 곳으로 왔다(1:11).

그러므로 ‘들리다’는 예수의 십자가를 암시하는 동시에, 예수가 본래 속하였던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와 함께, 예수가 내려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27)

 

    27) 박경미는 요한에게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은 뗄 수 없는 하나이며, 이러한 인식이 ‘들리다’라는 말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한다. 박경미, 예 수 없이 예수와 함께, 399.

 

여기서 땅은 하늘을 떠나온 예수가 아버지의 사역을 이루는 ‘자기의 곳’으로서 실존 공간인 세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들리다’는 땅이 예수가 속한 본래의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이 예수의 사역에서 구분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땅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자이다.

이런 이유로, 땅은 예수의 실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지리적 공간인 세상에 속하지 않고 거룩한 공간인 하늘에 속한다.

“땅에 있는 이” 역시 땅을 그들의 실존 공간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들은 땅에 속한 자들이므로 거룩한 공간인 하늘과 자신들을 구분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평화와 일치하고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지리적 공간이다. 

 

2. 거룩한 공간으로서 세상

 

요한복음 17장에는 세상의 악에 대한 언급(17:14)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17:25)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내심도 나타난다(17:4, 6, 11, 18, 21, 23).

이와 유사하게 17장에서 예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17:9)고 말하면서도 세상이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낸 것을 믿게 되고(17:21), 예수를 사랑하심같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되기를 간구한다(17:23).

그렇다면 예수의 기도에서 세상은 제외되었는가?

비슬리-머리(George R. Beasley-Murray)는 17:9는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므로 간접적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28)

이와 달리 카슨은 예수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택함받은 사람들만(그들을 통해 믿게 되는 제자들을 포함하여)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들만이 “아버지의 것”이며 세상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29)

하지만 세상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카슨의 주장과 달리, 예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17:9)도 기도에서 세상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17:9)을 자신의 기도에서 세상을 제외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수는 17장에서 세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세상의 구원을 여전히 염두에 두고 있다.30)

 

      28) Beasley-Murray, 요한복음, 567.

      29) Carson, 요한복음, 1041. 따옴표를 통한 강조는 원저자의 것이다.

      30) 김문현 역시 17:9에서 예수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간접적으로 이 세상을 향한 기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문현, “요한복음 17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846.

   

이것은 17:21과 17:23에 사용된 ἵνα 구절에서 제자들의 연합의 목적이 세상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31)

그러므로 예수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세상을 기도에서 배제한 것이 아니라,32) 제자들을 위해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33)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았고,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영광)롭게 하였다(17:4).

그리고 지금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되기를 간구한다(17:5).

그런데, 17:4에는 “내가 영화롭게 하였다(ἐδόξασα)”는 부정과거 시제와, “내가 마쳤다(τελειώσας)” 는 부정과거 분사가 사용되어 마치 예수의 행동이 완료된 것처럼 묘사되었다.

반면 17:5에는 명령형과 함께 “지금(νῦν)”이 사용되어 현재를 묘사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때문에 17:4는 이미 예수가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과거를, 17:5는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될 미래를 대비시킨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영화롭게 하다’는 동사는 하나님 또는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십자가 수난 모두를 포함하는 이중 의미(12:13, 28; 13:32)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34) 17:4-5를 과거와 미래의 대비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31) 17:21, 23에서 ἵνα가 가정법과 함께 사용되어 목적을 나타낸다.

    32) Michaels는 17:9는 예수가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예수의 선교가 끝나고 제자들의 선교가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Michaels, 요한 복음, 1062.

    33) Marianus Pale Hera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이상적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Marianus Pale Hera,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John 17 (Tübingen: Mohr Siebeck, 2013), 140.

    34) Bauckham 역시 요한은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동사를 하나님의 영광(명예)과 영광 (찬란함)을 드러내는 일로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런 중첩적인 의미를 담아 십자가와 들림을 정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Bauckham,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120. 

 

오히려 17:4-5에서 예수는 세상에서 그가 이룬 것을 근거로 아버지께 간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17:5에서 예수가 요청하는 영화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하였던 영화이므로, 17:4에서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은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를 이 세상에서 드러내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7:5의 “지금도 아버지와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는 이 영화에 대한 연속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17:5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통해 예수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은 예수의 전체 사역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는 또한 세상 중에 예수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말한다(17:6). 이를 통해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35)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17:6)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다(17:4)”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17:4에서는 아버지의 일을 이룬 곳이 땅으로서 세상이라고 하지만, 17:6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대상을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17:6)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17:6에 의하면 예수 사역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예수의 직접적인 사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17:4-5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아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

이와 달리 제자들은 예수에 의해 보냄을 받는다(17:18).36)

 

    35) Hera,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John 17, 140.

    36) Van der Merwe는 17:18의 병행은 신적이며 계시적-구원의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한 다. Dirk G. van der Merwe, D. G. “Imitatio Christ in the fourth Gospel,” Verbum et Ecclesia 22/1 (2001), 140.

 

 

그리고 예수와 달리,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것처럼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사역을 완성하지도 않으며 예수가 이룬 구원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37)

 

    37) Dirk G. van der Merwe, “Conceptualizing holiness in the Gospel of John: The En Route to and Character of Holiness (part 2),” HTS Teologiese Studies/Theological Studies 73/3 (2017), 4.

 

이런 점에서 예수의 보냄받음과 제자들의 보냄받음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예수의 보냄받음과 제자들의 보냄받음은 더 많은 부분에서 병행을 이룬다.

예수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것처럼(7:28; 8:42), 제자들도 스스로가 아니라 예수에 의해 보냄받는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냄 같이(καθώς) 그들을 세상에 보냈고(17:18),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되기를 기도한다(17:11, 22).

예수는 아버지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받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예수에 의해 세상으로 보냄받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7:14).

이처럼 방법과 대상에서 분명한 일치를 보이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아들을 보내는 것과 예수가 제자들을 보낸 것은 분명히 연속성이 있다.

예수는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아들을 보낸 것을 믿고(17:21), 아버지가 예수를 사랑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기를 간구한다(17:23).

이를 통해 예수는 아버지-아들의 하나됨과 제자들의 하나됨(17:11, 21, 22, 23)을 병행시키고,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를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와 병행시킨다(17:14).

이러한 병행과 연속은 예수에 의해 제자들이 보냄받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예수는 제자들의 보냄받음은 제자들의 인식이나 지각, 그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냄에 근거하며,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보내심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말하여 자신의 사역이 직접적으로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세상이 자신의 사역에서 제외되거나 소외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세상에서 이루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제자들을 보낸 목적은 세상에서 그들의 하나됨을 통해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를 보낸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이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냄으로써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예수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행했던 일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호하였던 일이 지속되기를 간구한다(17:11-12).

이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던 자신의 역할이 제자들을 통해 이어지기를 간구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동일시되었으며(출 9:16; 20:24; 23:21; 레 19:12; 신 5:11; 삼상 24:21 등),38)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유사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었다(사 52:6).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켰다는 것은(17:12) 아버지가 예수에게 그의 이름을 주었고 예수가 아버지의 이름을 공유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39)

그러나 예수의 떠남으로 이러한 제자들에 대한 보호는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한다(17:11).40)

   

    38) 출 33:17은 이름을 안다는 것을 그를 아는 것으로 여긴다.또한 삼상 25:25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의 성품과 일치시킨다.

    39) Neyrey, The Gospel of John, 287.

    40) Coloe, John 11-21, 462. Malina는 유사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 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Malina, Social-Science Commentary in the Gospel of John, 247.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 없이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세상 안에 여전히 실존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상에 있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시기를 기도하지 않는다(71:15).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17:15)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구분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실존 공간으로 그들의 거주 공간이다.

때문에 예수는 자신의 떠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은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구한다(17:13).

예수는 제자들의 보호를 간구하면서 아버지를 “거룩하신 아버지” 라고 칭하여 거룩이 아버지에게 속한 것임을 드러낸다(10:36 ff). 그러면서도 예수는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였다”(17:19)고 말하여 아버지의 거룩을 예수가 공유하였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은 제자들로 하여금 거룩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17:19).

비슬리-머리는 “그들을 위하여” 거룩하게 하는 것(17:19)은 예수의 헌신으로 종말론적인 희생을 의미하는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다른 출애굽의 유월절 성취로서 희생제사적인 문맥에서 구약성서의 ‘성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1)

비슬리-머리와 달리 클로에는 17:1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언급이며 제자들을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2)

 

     41) Beasley-Murray, 요한복음, 570.

     42) Coloe, “John 17:1-26,” 8-9. Coloe는 17장에서 예수는 제사장이나 희생자가 아니라 승리자라고 주장한다. Coloe, “John 17:1-26,” 9. 

 

17:19b에서 예수가 “그들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였다는 것을 비슬리-머리의 주장처럼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가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였다는 것을 예수의 희생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7:19에서 예수는 자신의 거룩은 그들이 진리 안에서 거룩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 17:17에서는 아버지의 말씀(ὁ λόγος)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비슬리-머리의 주장과 달리 17:19의 그들을 위한 예수의 거룩은 희생 제사적 의미보다 제자들이 “진리 안에” 실존하기를 간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고 14:6에서 예수가 자신을 진리이며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라고 말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는 결국 믿는 자들이 말씀과 진리로 오신 예수 안에 거하기를 간구한 것으로 해석된다.43)

그러므로 거룩함은 예수 안에,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44)

 

     43) 박영진 역시 요 17:17-19의 거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상호내주의 긴밀한 교제 속으로 제자들이 동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영진, “요한복음 17:17-19에 나타 난 거룩(ἁγιάζω)의 의미,” 신약연구 13/3 (2014), 471-500.

     44) Van der Merwe는 거룩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같이 신성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행위 라고 말한다. Van der Merwe, “Conceptualizing Holiness in the Gospel of John (part 1),” 5. 

 

예수는 제자들의 거룩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다고 말한다(17:17-18). 예수에 의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주신 자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고(17:6),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다(17:7).

하지만 17장의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것과 달리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자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베드로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의미를 알지 못했고(13:7), 도마는 예수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14:4-5).

빌립 역시 오랫동안 예수와 함께 하였음에도 예수를 보낸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14:7-8).

제자들은 자주 예수를 오해하였고, 예수가 무형의 성전인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2:21-22), 예수가 잡혔을 때 예수와 함께하지 않고 흩어졌다(cf. 16:31-32).

베드로는 예수가 잡혀가던 밤에 예수를 부인하였고, 자신의 제자직까지 부인하였다(18:15-18, 25-27).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고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로 자주 등장한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고(17:8, 14),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낸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냈다(17:18).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오해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보냄받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보냄은 그들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냄받은 제자들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예수에 의한 보냄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져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다.

여기서 καθώς(“~처럼, ~같이”)는 제자들의 보냄이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46)

 

    45) Hera 역시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과 예수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Pale Hera,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John 17, 142.

   46) Van der Merwe는 καθώς가 요한복음에서 주로 비교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언어 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신학적 병행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Van der Merwe, “Imitatio Christ in the Fourth Gospel,” 139 각주 10을 보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준 것처럼 아들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17:2).

아들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같이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간구하고(17:11, 22),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있는 것 같이 제자들도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기를 간구한다(17:21).

그러므로 제자들의 보냄받음은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은 아들의 보냄받음을 잇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공간으로서 아버지-예수 안에서 경험한 거룩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반 데어 메르웨(Dirk G. van der Merwe)는 제자들의 하나됨을 세 단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거룩의 모범(the example)으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합이고,

 둘째는 거룩(연합)을 위한 (하나됨의) 근거로서 예수와 제자들의 연합이며,

 세 번째는 거룩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서 제자들 사이의 연합이다.47)

 

     47) Van der Merwe, “Conceptualizing Holiness in the Gospel of John (part 1),” 5. 

 

이러한 세 단계의 상호작용은 더 나아가 제자들이 서로 하나되어 “우리”(아버지와 예수) 안에 있게 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며, 진리로 거룩함을 얻는 것과 별개가 아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하나되어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거룩에 대한 경험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의식주를 세상에 의존하면서도 아버지-예수 안에서 거룩한 아버지의 보호와 거룩을 경험하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아버지-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다.

이런 뜻에서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거룩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거룩에 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의 실존 공간이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택함을 받아 세상으로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물리적 공간 이상이다.

제자들에게 세상은 보냄받은 공간으로 아버지-예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의 거룩과 하나됨을 이루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세상 통치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예수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세상 안에서 아버지-예수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세상을 거룩한 공간으로 경험한다.

이처럼 예수를 알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은 지리적 공간이었다면 아버지-예수 안에서 세상은 거룩과 하나됨을 경험하는 거룩한 공간이 된다.

 

IV. 흐름을 위한 공간으로서 세상

 

17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영화롭게 하고(17:4-5), 서로 안에 상호거주함에도 불구하고 더 자주 아버지는 주는 자로 예수는 받는 자로 언급된다.48)

아버지는 아들에게 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고(17:2), 아버지에게 속했던 아버지의 말씀(17:8, 14)과 영광(17:22, 24)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람들(17:6, 7, 9, 24)과, 아버지의 이름(17:11, 12)을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은 그러한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예수에게 준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며(17:7), 예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예수의 것이다(17:10).

이러한 아버지와 예수의 주고받는 관계는 예수-제자들 관계로 이어진다.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생과 말씀과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자였던 것처럼 예수로부터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신 것들을 받는다.49)

 

    48) Hera,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John 17, 141.

    49) Hear는 이러한 주고받는 아버지-예수와의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저자 요한은 제자 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Hear,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141- 42. 

 

주고받음의 관계에는 보냄과 보냄받음 관계 역시 포함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으로 보냈으며, 보냄받은 아들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냈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들을 제자들에게 준다(17:5).

제자들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로부터 받은 것들을 그들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다시 준다.

그러므로 아버지-예수 안에서 제자들은 주고받는 경험을 하며, 그들에게 주시는 아버지를 경험함으로써 그들의 보냄받음에 대한 중심을 경험한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아버지-예수 안에서 그들의 중심 공간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들은 세상의 통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세상 안에 거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심 공간은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예수 안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주변공간이 된다.50)

 

       50) ‘중심-주변’, ‘내부-외부’는 사회지리학에서 사용하는 공간에 대한 은유이다. 사회지 리학에서 이러한 ‘중심-주변’, ‘내부-외부’는 상호 배타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동시적인 점유를 포함한다. Gill Valentine, 사회지리학, 박경환 역 (서울: 도서출판 논형, 2009), 17.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인물 가운데는 니고데모는 유대 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유대교 사회에서는 중심에 위치하지만, 요한 저자는 니고데 모를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19:39)로 묘사하여 주변에 위치한 자로 묘사한다. 

 

보냄받은 자들로서 제자들은 중심 공간에서 경험하고 받은 것들을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 공간으로 보낸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아버지가 예수를 보냈다는 것을 증언하고(17:25), 예수가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 것처럼 예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예수에게 영광을 돌린다(17:10).

제자들의 보냄받음은 그들의 중심 공간에서 경험한 거룩과 연합을 주변 공간인 세상으로 보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을 고정된 하나의 표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 경험한다.

예수는 보냄받은 제자들이 아버지 안에 거할 수 있게 하는 중재자인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공간이며 제자들이 아버지의 거룩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물론 아버지와 예수, 예수와 제자들의 존재론적 차이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버지- 예수의 관계는 제자들이 예수 안에 거함으로써 아버지 안에 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제자들은 상호거주를 통해 예수가 준 아버지의 영광과 생명을 경험하고, 보냄받은 자들로서 그들이 받은 것들을 믿는 자들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보낸다.

예수는 세상에서 그들을 데려가시기를 기도하지 않고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한다(17:15).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요청한다(17:11).

그들이 세상 안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들이 나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 주시기를 아버지께 간구하면서 그들이 세상이라는 주변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아들의 중심 공간에 속한다는 것(17:17)과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17:11, 12).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면서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 역시 하나가 되어 세상이 예수를 믿게 되기를 기도한다(17:20-26).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할 것이라고 하여(17:26)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 예수의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나 믿는 자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어 흐르게 하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에 의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17:10).

예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냄에 의해 왔기 때문에(7:28)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로부터 듣는 대로 심판하며,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행한다(5:30).

예수는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참되다(7:18).

또한 예수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일을 한다(14:10). 그러므로 예수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것을 말함으로써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었던 말씀을 증언하고 예수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낸다.

세상으로 보냄받은 제자들은 예수가 아버지의 일을 세상에서 이루고 아버지를 나타냈던 것처럼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아버지를 나타낸다.

이처럼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들을 제자들의 보냄과 함께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보냄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세상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7장의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들을 세상으로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흘러가게 하기 위한 기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17장의 예수의 기도는 흐름을 위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위한 예수의 기도는 직접적으로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예수는 기도에서 세상을 제외하거나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제자들을 통해 세상 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생명이 흘러가기를 간구한다.

제자들은 중심 공간인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지만 세상과 구분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지리적 공간에서 거룩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을 떠나서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에게 실존 공간이다.

하지만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거룩한 공간이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과 영광과 거룩을 흘러가게 하는 흐름의 공간이다.

 

V. 결론

 

세상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택함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실존 공간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과 상관없는 거주 공간으로써 지리적 공간이라면,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아버지-예수 안에서 거룩과 하나됨을 경험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보냄받았다는 것은 그들의 실존 공간인 세상을 지리적 공간에서 거룩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냄받은 제자들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 안에서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과 영광과 거룩을 그들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준다.

이러한 주고받음, 보냄과 보냄받음을 통해 예수는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도록 간구한다.

그러므로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단순히 실존 공간이 아니라 보냄받은 공간으로서 거룩한 공간이며,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흘러가게 하는 흐름의 공간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실존 공간인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중심 공간이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예수 안에 속하는 자들로서 아버지의 거룩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떠났다고 해서 예수가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경험한다(17:12).

이처럼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다중적인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세상은 실존 공간이며, 예수로부터 보냄받은 공간으로 거룩한 공간이며 중심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것들을 세상으로 흘러가게 하는 흐름의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예수에게서 다시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기도하는 흐름을 위한 기도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를 ‘흐름의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세상을 고정적이고 부동적인 공간이 아니라 흐름을 위한 공 간, 즉 유동적인 공간으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는 세상을 하나의 표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 세상들로 이해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거나, 세상에 대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면서 아버지-예수 안에서 경험한 것을 흘러가게 하기를 요청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찬가지로 초연결 시대에 사는 믿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흐름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낯선 것에 뛰어들어 알 수 없고 불확실한 것에 대해 실험하는 것이다.51)

 

    51) “경험(experience)”은 어떤 사람이 겪어오거나 견뎌 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Tuan 은 “경험”을 “실험(experiment)”과 공통의 어원을 가진 것으로 새로운 것에 당당히 맞서는 것으로, “위험의 극복”으로, 그리고 능동적인 의미에서 낯선 것에 뛰어들 어 불확실한 것에 대해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Tuan, 공간과 장소, 25.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세상을 흐름의 공간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와 배움, 그리고 세상을 견디고 세상 안에서 겪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본 논문은 초연결 시대의 믿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세상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세상을 보냄받은 공간으로서 아버지-예수로부터 받은 것들을 흐르게 하는 흐름의 공간으로 경험하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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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세상은 예수에 의해 보냄받은 제자들이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땅으로서 ‘실존 공간’ 이다.

세상이 ‘실존 공간’이라는 것은 세상이 중립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공간을 경험하는 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되고 다른 의미를 갖게 하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장소로서 의미의 공간 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늘’ 또는 ‘위’와 대조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에게 거룩한 공간과 대비되는 ‘지리적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서 거룩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냄받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아버지-예수 로부터 보냄받은 공간인 동시에 아버지-예수 안에서 하나됨과 거룩을 경험하는 공간이 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중심공간과 거룩한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보냄받았다는 것은 중심공간인 아버지-아들 안에서 경험한 거룩과 하나됨을 주변공간인 세상으로 흐르게 하도록 요청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 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예수로부터 받은 것을 흘러가게 하는 ‘흐름의 공간’이다.

이처럼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는 초연결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세상을 고정된 하나의 표상이 아닌 다양한 의미를 가진 ‘흐름의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요청한다.

 

주제어  세상, 지리적 공간, 흐름의 공간, 예수의 기도, 거룩한 공간 

 

 

Abstract

A Prayer for Flow Focusing on John 17

Jeong, Bok Hee (United Graduate School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The world is an existential space where Jesus’ disciples live their daily lives, but this does not mean that it is neutral. Experiences of space give people different meanings and perceptions. Therefore, the world is neither negative nor positive, but a space with various meanings. To non-believers, the world is a space that contrasts heaven and above, so they perceive the world as a geographic space that stands in contrast with sacred space. They do not experience holiness in the world. To Jesus’ disciples, the world is a sacred space where they experience life, union, and holiness in the Father-Jesus. To them, dwelling in the Father-Jesus relationship is an experience of the central space, making the world a periphery space. Jesus’ disciples let the holiness, unity, and life they experience in the Father-Jesus flow into the periphery space of the world. In the Father-Jesus, the world changes from a geographic space to a sacred space. The disciples were asked to let the holiness and unity they experienced in the central space of the Father-Jesus flow into the periphery space of the world. Therefore, for the disciples, the world is a “space of flow” that allows what is received from the Father-Jesus to flow.

 

Keywords the world, geographical space, space of flow, Jesus’ prayer, sacred space

 

 

신약논단 제31권 제3호(2024년 가을)

투고일: 2024. 8. 20. 최종심사일: 2024. 8. 30. 게재확정일: 2024. 8. 30.

흐름을 위한 기도 - 요한복음 17장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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