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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누가-행전에 나타난 ‘돌아옴’의 이중적 의미/박명철.한국침례신학大

 

I. 서론

예언자가 고대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돌아옴’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신학적으로 유의미하다.

 첫째, 새 이스라엘이 펼쳐질 때 이스라엘 백성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온다.1)

회개치 않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마음이 부여되고,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죄로부터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게 된다(사 49:5-6; 59:20-21; 렘 24:6-7; 겔 34-39장; 슥 8:2-3; 10:6).2)

  둘째,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유배지에서 고국으로 돌아온다.3)

유배 중이던 그들이 고국으로 귀환할 때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축복의 장소로 변모되고(렘 31:10-14), 열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칭송하게 된다(겔 36:22-24).4)

 

      1) G. Johannes Botterweck et al.,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vol. 14, trans. by Douglas W. Stott (Grand Rapids: Eerdmans, 2004), 484-509.

      2) Botterweck, Theologisches Wörterbuch, 491, 496, 504-505; 소형근, “너는 돌아와 다시 야웨의 말씀을 청종하고(신 30:8),” 구약논단 17/4 (2011), 115-20.

      3) Botterweck, Theologisches Wörterbuch, 491.

     4) Willem A. VanGemere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vol. 4 (Grand Rapids: Zondervan, 1997), 58. 

 

이처럼 예언서에 기술된 이스라엘 백성의 ‘돌아옴’은 회개와 귀환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닌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은 대부분 회개의 의미로 정의된다.

예언서에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이 존재함에도 게르하르트 킷텔(Gerhard Kittel), 게오르크 베르트람(Georg Bertram)은 그들의 신약어휘사전에서 누가-행전에 사용된 ἀποστρέφω, ἐπιστρέφω(‘돌아오다’)의 신학적 의미를 회개로만 명시한다.5)

킷텔은 누가-행전의 ‘돌아옴’을 변절한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개를 뜻한다고 간주했다(눅 1:16-17; 행 3:19, 26; 9:35; 11:21; 14:15; 겔 18:21, 24).6)

베르트람은 ‘돌아옴’이 회개를 표현하는 전문용어인 μετανοέω와 같이 나타나고(행 3:19; 26:18-20), 이방인의 종교적 개종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행 9:35; 11:21; 15:19), 누가-행전의 ‘돌아옴’은 회개를 의미한다고 결론지었다.7)

이와 같은 ‘돌아옴’의 사전적 정의와 결을 같이 하여 누가-행전의 ‘돌아옴’은 주로 회개의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8)

  

     5) LXX에서 다수의 ἀποστρέφω, ἐπιστρέφω가 귀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37:7; 49:6; 51:11; 렘 29:10; 30:3, 10, 18; 31:8, 16, 17, 21, 23; 32:44; 33:7; 겔 34:16; 39:27; 욜 3:1; 슥 10:9-10). Gerhard Friedrich et al.,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vol. 7,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2013), 723-24; Gerhard Kittel, 신약성서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86), 1212.

    6) Kittel, 신약성서 신학사전, 1212-14.

    7) Friedrich, Theologisches Wörterbuch, 727-28.

    8) 대표적인 학자로는 David Ravens, Darrell L. Bock, Eckhard J. Schnabel, Guy D. Nave Jr., Joel B. Green, John Nolland, Robert C. Tannehill 등이 있다. 이들의 견해 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박명철, “누가행전에 나타난 ‘돌아옴’의 회 개적 의미: 사회적, 제의적, 종교적 회개,” 신약논단 29/2 (2022), 76-80.

 

그러나 ‘돌아옴’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누가-행전의 ‘돌아옴’은 회개적 의미뿐만 아니라 귀환적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추론케 한다.

     1) 구약에서 bwv(‘돌아오다’)는 회개적 의미와 귀환적 의미가 모두 내포된 용어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몰란(David S. Morlan)은 누가-행전에 끼친 신명기의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누가-행전의 ‘돌아옴’은 신명기에 기술된 bwv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신 30:1-10).9)

     

    9) David S. Morlan은

       1) 누가복음의 많은 부분에서 신명기가 직, 간접적으로 인용되 었고(눅 1:6, 신 5:33; 눅 2:41, 신 16:1-8; 눅 4:8, 신 6:13; 눅 4:12, 신 6:16; 눅 6:1, 신 23:25; 눅 6:30, 신 15:7, 8, 10; 눅 9:41, 신 32:5; 눅 10:27, 신 6:5; 눅 11:42, 신 6:5; 눅 15:12, 신 21:17; 눅 18:20, 신 5:16-20; 눅 20:28, 신 25:5; 눅 22:7, 신 16:5-8; 눅 24:27, 신 18:15),

      2) 눅 10:27과 11:42에 인용된 신 6:5의 주제가 신명기 30장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누가는 ‘돌아옴’을 신명기 30장의 관점에서 회개의 의 미로 기술했다고 보았다. David S. Morlan, Conversion in Luke and Paul (London: Bloomsbury Publishing, 2013), 56-58. 

 

그는 신명기 30장의 ‘돌아옴’이 회개의 문맥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누가 역시 ‘돌아옴’을 회개의 측면에서 기술했다고 주장한다.10) 그러나 오딜 하네스 스텍(Odil Hannes Steck)이 지적하였듯이 신명기 30장의 ‘돌아옴’은 신명기 27-30장에 나타난 SER(Sin-Exile-Repentance/Return) 패턴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11)

돌아옴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1) 죄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서

     2) 포로된 삶을 영위해야 했지만

     3) 그들은 회개함으로 하나님에게 돌아오며

     4) 동시에 유배 생할에서 해방되어 귀환하기 때문이다.12)

 

        10) Morlan, Conversion in Luke, 56-58.

        11) Odil Hannes Steck, Israel und das gewaltsame Geschick der Propheten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67), 110-28, 146-84; Nicholas G. Piotrowski, “The Concept of Exile in Late Second Temple Judaism,” CBR 15/2 (2017), 215-16에서 재인용.

        12) Duane L. Christensen은 신 30:1-6을 다음과 같은 교차 대구로 분석했다.

              A. 열국 가운데서 이 말씀(네 마음에 ‘돌아옴’)이 기억나거든(신 30:1) B. 그리고 네 온 마음으로 네 하나님 야웨께로 돌아오거든(신 30:2) X. 야웨께서 네 운명을 회복시킬 것이다; 유배지에서 귀환시킬 것이다(신 30:3a) B′. 야웨께서 너를 모든 민족들로부터 돌아오게 하고 모으실 것이다(신 30:3b) A′. 야웨께서 너를 네 열조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신 30:4-5) 위의 교차 대구에서 알 수 있듯이 신명기 30장에서는 회개를 의미하는 ‘돌아옴’과 포로 생활에서 귀환을 뜻하는 ‘돌아옴’이 병행을 이룬다. Duane L. Christensen, Deuteronomy 21:10-34:12 (Dallas: Thomas Nelson Publishers, 2002), 736.

 

그러므로 신명기에서 ‘돌아옴’의 배경이 되는 bwv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뿐만 아니라 그들의 귀환을 일컫는 어휘로도 사용되었다.  2)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탕자의 여정에는 회개뿐만 아니라 귀환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눅 15:11-24).

몰란은 탕자의 ‘돌아옴’을 탕자가 죄를 뉘우치는 영적 회심으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이국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물리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3)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회개뿐만 아니라 귀환의 측면에서 타지에서 포로처럼 방황하는 탕자가 본향으로 돌아오는 귀환으로 이해했다.14)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는 본 비유를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가 포로에서 귀환하기 위한 선결 조건임을 드러내는 가르침으로 보았다.15)

 

      13) Morlan, Conversion in Luke, 56.

      14) Nicholas Thomas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254-55.

      15) O. Palmer Robertson은 예언서에서 죄는 이스라엘이 포로된 삶을 영위하게 된 주 된 이유이기 때문에 그들이 포로에서 귀환하기 위한 조건을 죄 용서로 보았다(렘 33:8; 50:20; 겔 36:33; 미 7:15; 18-20; 단 9:2, 4-19). O. Palmer Robertson, 선지자와 그리스도, 한정건 역 (서울: 개혁주의 신학사, 2007), 504-507; Craig A. Evans, “Jesus & the Continuing Exile of Israel,” Jesus & The Restoration of Israel, ed. by Carey C. Newma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9), 98. 

 

이처럼 탕자의 ‘돌아옴’에 회개와 귀환이 중첩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돌아옴’을 이중적 의미로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은 ‘남은 자의 돌아옴’을 의미하기 때문에 ‘돌아옴’은 귀환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데이비드 세콤베(David Seccombe)는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유대인을 요엘이 예견한 ‘남은 자’로 보았다(행 2:21; 욜 2:32).16)

 

     16) David Seccombe,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ed. by I. Howard Marshall, 복음의 증거: 사도행전 신학, 류근상 역 (고양: 크리스챤 출판사, 2004), 433-35.

 

요엘 2:32은 심판 때에 구원받게 될 ‘남은 자’가 있음을 보이는 구절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유대인이 구원받음을 요엘서 2장을 통해 입증했다는 것은 그들이 요엘이 말한 ‘남은 자’였음을 의미한다.17)

또한 제레미 오텐(Jeremy D. Otten)은 침례자 요한의 사역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온 유대인을 ‘남은 자’로 간주했다(눅 1:16-17).18)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심판받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룩한 씨인 ‘남은 자’를 보존하는데, 요한의 촉구를 통해 돌아온 유대인을 남겨진 거룩한 씨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사 6:9-13 ).19)

세콤베와 오텐의 주장대로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을 ‘남은 자’로 본다면, 누가-행전에 기술된 주의 백성의 ‘돌아옴’은 ‘남은 자의 돌아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남은 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에게 ‘돌아온’ 자로 지칭됨으로써(행 15:17, 19), 그들의 ‘돌아옴’이 ‘남은 자의 돌아옴’으로 명시된다.

예언서는 ‘남은 자의 돌아옴’을 회개와 귀환적 의미가 모두 내포된 용어로 사용한다(사 7:3; 10:21).20)

예컨대 이사야의 아들 bWvy" ra'v.(‘스알야숩’)은 ra'v.(‘남은 자’)와 bWv(‘돌아오다’)의 합성어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죄로부터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뿐만 아니라 그들이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이다(사 7:3).21)

또한 bWvy" ra'v.은 심리적 측면에서 ‘남은 자’가 그들의 죄 된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개와, 물리적 관점에서 포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귀환이라는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사 10:21).22)

 

    17) Seccombe,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434.

    18) Jeremy D. Otten, “I Alone am Left: Elijah and the Remnant in Luke-Acts” (PhD thesis: Wheaton College, 2017), 138-43.

    19) Otten, “I Alone am Left,” 138-39.

    20) 예언서에서 ‘남은 자의 돌아옴’은 히브리어로 bWvy" ra'vW.과 bWvy" ra'v.으로 기술된 다(사 7:3; 10:21).

    21) Patricia K. Tull, Walter Brueggemann, Otto Kaiser는 이사야가 스알야숩을 아하스에 게 데려간 이유를 비록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유배 생활을 영위하지만, 미래에 ‘남은 자’가 생존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위로 이해했다. Patricia K. Tull, Isaiah 1-39 (Macon: Smyth & Helwys Publishing Inc, 2010), 159-62; Walter Brueggemann, Isaiah 1-39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65; Otto Kaiser, Isaiah 1-12 (London: SCM Press, 1983), 146.

     22) 이사야 10장의 bWvy" ra'v.을 Kaiser, 김회권은 회개의 측면에서 이해한 반면, John A. Braun, Bryan E. Beyer, 김창대는 포로된 자의 귀환을 뜻한다고 보았다. John D. W. Watts는 이중적 차원에서 회개와 귀환의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말한 다. Kaiser, Isaiah 1-12, 241; 김회권, 이사야 1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287; John A. Braun, Isaiah 1-39 (Milwaukee: Northwestern Publishing House, 2000), 143-45; Bryan E. Beyer, 이사야서의 역사적 신학적 강해, 곽철호, 류근상 공역 (고양: 크리스챤 출판사, 2009), 160-61; 김창대, 이사야서의 해석과 신학 (서 울: CLC, 2019), 136; John D. W. Watts, Isaiah 1-33 (Waco: Word Books Publishers, 2005), 153-54. 

 

이처럼 ‘돌아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누가-행전의 ‘돌아옴’ 은 회개뿐만 아니라 귀환의 측면에서 해석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필자는 ‘돌아옴’의 과정을 살펴볼 때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과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에 나타난 일련의 절차가 상이하기 때문에 누가-행전의 ‘돌아옴’에는 회개적 의미와 더불어 귀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은 행위의 변화의 관점에서 범죄한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개적 의미로 간주될 수 있지만, 영역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포로된 주의 백성이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귀환의 과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돌아옴’의 과정에 대해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에 회개적 의미뿐만 아니라 귀환적 의미도 함의되어 있음을 입증해 보이도록 하겠다.

 

 

II. 본론

 

1. ‘돌아옴’의 시발점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의 과정 중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돌아옴’의 시발점이다.

‘돌아옴’이 물리적 혹은 신학적으로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정의처럼, ‘돌아옴’의 과정에는 방향이 전환되기 이전의 상태 즉, ‘돌아옴’의 시작점이 존재한다.23)

대럴 벅(Darrell L. Bock)은 ‘돌아옴’을 죄악된 행동으로부터의 방향의 역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회개로 보았다.24)

가이 네이브 주니어(Guy D. Nave Jr.)는 누가-행전에서 μετανοέω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회개라면, ‘돌아옴’은 행위의 전환을 통해 외적으로 죄를 범하는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했다.25)

실제로 누가-행전에서 ‘돌아옴’의 출발점은 죄로 명시되고(눅 17:4; 22:32; 행 3:19; 28:27), ‘돌아옴’ 이전 주의 백성은 사회적 죄(눅 1:16; 3:8-14), 제의적 죄(행 3:19; 26:20), 종교적 죄 가운데 거했던 자로 명시된다(행 9:35; 11:21; 14:15; 15:19).26)

 

      23) ἐπιστρέφω는 누군가가 어떤 대상 또는 장소를 향해 방향을 돌린다는 물리적 방향 전환이라는 의미부터(마 12:44; 24:18; 막 5:30; 8:33; 13:16; 요 21:20; 행 9:40), 잘못 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돌린다는 윤리적, 종교적 회개까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갈 4:9; 약 5:20). Walter Bauer, 바우어 헬라어 사전, 이정의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7), 573-74.

     24) Darrell L. Bock, A Theology of Luke and Acts (Grand Rapids: Zondervan, 2012), 265-66.

     25) Guy D. Nave Jr., The role and function of repentance in Luke-Acts (Leiden: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2), 220-24.

    26) 누가-행전의 ἐπιστρέφω가 예언서에 나타난 bwv와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사회적 죄로부터의 돌아옴, 제의적 죄로부터의 돌아옴, 종교적 죄로부터의 돌아옴을 의미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박명철, “‘돌아옴’의 회개적 의미,” 76-105. 

 

그러므로 회개의 관점에서 ‘돌아옴’의 시발점은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행전에서 ‘돌아옴’ 이전에 주의 백성이 직면했던 또 다른 상태는 포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본모(本貌)는 죄인이었지만, 동시에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에게 억압당하는 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눅 4:5-6; 6:18; 13:16; 행 5:16; 10:38). 누가-행전에서 주의 백성이 여전히 유배 중이었느냐는 주장은 스룹바벨 성전의 진위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다.27)

 

     27)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발판이자 하나님이 거할 처소로써 유대인이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경험하는 대표적인 장소였다(왕상 8:13; 시 132:14; 렘 2:1; 겔 43:7). 그러나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결과 하나님은 성전에서 떠났고,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파괴된다(렘 7:4; 겔 10장). 그러나 주의 백성이 귀환할 때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고,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장소로 변모되며, 유대인은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께서 이스 라엘과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된다(겔 37:26-27; 43:1-5; 48:35). Ralph W. Klein, Israel in Exil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9), 3, 92-95; Peter R. Ackroyd, Exile and Restoration: A Study of Hebrew Thought of the Sixth Century B.C.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8), 30-31, 46-47, 111-12. 

 

먼저, 스룹바벨 성전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참된 장소로 인식한 학자들은 B.C. 538년 이스라엘의 역사적 귀환 이후 세워진 제2성전을 통해 유배 생활이 종결되었다고 보았다.

그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누가-행전에 나타난 제2성전을 참된 성전으로 인식했다.

  1) 휴 윌리엄슨(Hugh G. M. Williamson)은 예언자가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귀환이 스룹바벨 성전의 재건과 함께 성취되었다고 말한다(사 44:28; 45:1, 13; 스 1:1).28)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기물과 함께 귀환하여 하나님이 거하는 영광스런 성전을 세울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사 44:28-45:13; 52:11-12), 이스라엘의 역사적 귀환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스 1:1-4, 7-8; 5:14).29)

 

        28) 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aco: Word Books Publishers, 1985), 8-11.

        29) Williamson, Ezra, Nehemiah, 8-11.

 

만약 역사적 귀환 이후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이 예언자가 고대했던 진정한 성전이라면, 포로에서 귀환한 주의 백성은 유배 생활에서 해방된 삶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2) 제2성전기 유대인은 스룹바벨 성전을 하나님이 거주하는 진정한 성전으로 인식했다.

모리스 케이시(Maurice Casey)는 제2성전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지이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장소였으며, 유대인은 매일 두 차례 치러지는 dymit'(‘타미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스룹바벨 성전을 예언자가 고대했던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간주했다.30)

 

    30) Casey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귀환했다는 것을 그들이 죄 사함을 받은 증거로 간주했다. Maurice Casey, “Where Wright is Wrong: A Critical Review of N. T. Wright’s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JSNT 69 (1998), 99-100. 

 

조셉 그린(Joseph Greene)은 제2성전기 문헌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참된 성전으로 명시되고(Sir. 50.1; 2 Mac. 2.5-18; 14.35-36; 3 Mac. 2.16), 요세푸스 문헌에 기록된 성전 파괴 직전의 징조들 예컨대, 지진, 강렬한 빛, 하나님의 떠남을 알리는 음성 등은 성전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였음을 반증한다고 말한다(J.W. 6.290-309; Tacitus, Hist. 5.13).31)

 

       31) Joseph Greene, “Did God Dwell in the Second Temple?,” JETS 61/4 (2018), 771. 

 

실제로 누가-행전에서 제2성전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긍정적인 장소로 명시된다.

  1) 성전은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고, 하나님이 활동하는 장소로 나타난다(눅 1:8-22; 2:22-49).32)

 

      32) Greene, “Did God Dwell in the Second Temple?,” 771. 

 

  2) 성전은 가르침의 중심지이고(눅 19:47; 20:1; 21:37, 38; 22: 53; 행 5:20-25, 42), 기도하는 장소이며(눅 19:46; 24:53; 행 3:1; 22:17), 각종 경건한 의식이 치러지는 곳으로 표현된다(눅 2:37; 18:10; 19:46; 행 3:1-10; 21:26).33)

 

    33) Joel B. Green, “The Demise of the Temple as ‘Culture Center’ in Luke-Acts,” RB 101/4 (1994), 511.     

 

  3) 마가복음과 비교해 보았을 때 누가는 성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축소한다.34)

예컨대 누가복음에는 성전시대의 종결을 뜻하는 ‘무화과나무 저주 비유’가 삭제되었고(막 11:11), 성전에 대한 예수의 비판 강도도 약화된다(막 11:15-17; 눅 19:45-46).35)

 

      34) Cyprian Robert Hutcheon, “‘God is with US’: The Temple in Luke-Acts,” SVTQ 44/1 (2000), 15.

      35) Hutcheon, “God is with US,” 15.

 

이처럼 누가-행전에서 제2성전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로 기술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귀환을 통해 그들의 유배가 종결되었음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스룹바벨 성전의 진위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예언서에 기술된 귀환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백성은 여전히 유배 중이라고 보았다.

에드 패리시 샌더스(Ed Parish Sanders)는 예언자가 소망했던 영광스러운 성전과 제2성전의 모습 간의 괴리로 인해 스룹바벨 성전의 진정성을 부인했다.36)

 

    36)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77-81. 

 

예컨대, 예언자가 예견했던 성전은 이방인이 예배하기 위해 방문하는 만국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부가 성전에 흡수되어야 했지만 제2성전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사 49:5; 56:1-8; 60:3-7, 10-14; 66:18-24; 미 4장).37)

 

    37) John Bright는 세 가지 이유에서 예언서에 기술된 귀환이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1) 예언서에서 귀환한 유대인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질병이 사라진 유 토피아를 경험하는 반면, 역사적으로 귀환한 그들은 연이은 흉년과 빈곤을 맞이한 다(학 1:9-11; 2:15-19).

     2) 귀환 이후 나타날 웅장한 성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통치하 심이 만방에 드러나야 했으나, 현실은 이방인의 방해로 인한 성전공사의 지연과 초라한 규모의 스룹바벨 성전이었다(학 2:3).

     3)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은 이방인 이 예물과 함께 방문하는 만국의 중심지로 변모되어야 했으나, 역사적 귀환 이후 의 이스라엘은 바사 제국의 속주에 불과했다(사 2:2). George Eldon Ladd는 귀환 이후의 이스라엘은 여전히 강대국(마케도니아, 셀류쿠스 왕조, 로마)에게 억압받 았고 이방인에게 조롱당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귀환이 예언자들이 소망 했던 참된 귀환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George W. E. Nickelsburg는 다수의 유대인 이 아직 귀향하지 않은 채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이방 문화에 동화되는 삶을 영위 했기 때문에 예언서에 기술된 주의 백성의 귀환이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 다. John Bright, The Kingdom of God: the Biblical Concept and Its Meaning for the Church (New York: Abingdon-Cokesbury Press, 1946), 158-62; George Eldon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Eschatology of Biblical Re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96), 76-77; George W. E. Nickelsburg, Jewish Literature Between the Bible and the Mishnah: A Historical and Literary Introduction (London: SCM Press, 1981), 17; Sanders, Jesus and Judaism, 77-81. 

 

또한 그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성전기 문헌에서 여전히 귀환과 성전 재건에 대한 소망이 발견된다는 것은 스룹바벨 성전이 참된 성전이 아님을 반증한다고 말한다(Tob. 14.5; Jub. 1.15-17; 1 En. 24-25장; 2QTem. 29.8-10).38)

 

      38) 장계은은 다수의 제2성전기 문헌에서 스룹바벨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부재한 부 정적인 장소로 명시된다고 말한다(CD 1.3; 3.10; 4.18; 5.6; 6.11-20; 1QpHab. 12.8-9; Jub. 1.11-13; Tob. 14.5; Ben Sira 36.1-22; 2 Bar. 32.2-5; 1En. 89.73-74; T. Lev. 14-17; 4 Ezra 10.7, 20-23, 45; Sib. Or. 4.115-18; Pss. Sol. 17.21-34). Kei-Eun Chang, “The Temple and the Davidic Messiah in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and Other Related Texts,” 신약논단 86 (2016), 165-71; Sanders, Jesus and Judaism, 80-86. 

 

누가-행전에 나타난 제2성전은 세 가지 측면에서  주의 백성의 귀환 시 세워질 영광스러운 성전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 티모 에스콜라(Timo Eskola)는 스데반의 설교를 근거로 하나님이 스룹바벨 성전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백성은 여전히 유배 중이라고 간주했다(행 7:48-50).39)

유대인은 제2성전을 하나님이 거주하는 거룩한 장소로 간주했지만(행 6:13-14), 스데반은 인간의 손으로 건축한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다고 발언함으로써 스룹바벨 성전의 진정성을 부인했다(행 7:48-50; 사 66:1-2).40)

 

      39) Timo Eskola, 신약성서의 내러티브 신학: 유배와 회복의 메타내러티브 탐구, 김학철 외 공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1), 460-66.

     40) Eskola, 신약성서의 내러티브 신학, 463-65.

 

   2) 에반스는 이스라엘의 귀환 시 세워질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변모되어야 했지만(사 56:7), 누가복음에 기술된 제2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닌 ‘강도의 소굴’로 명명된다(눅 19:45-46).41)

그러므로 예수가 강도의 소굴인 성전을 정화했다는 것은 제2성전이 귀환 이후 세워질 참된 성전이 아니었음을 함의한다. 이에 에스콜라는 예수가 성전 정화 시 축출했던 자들은 대부분 속죄 예식인 dymit'와 연관되기 때문에(눅 19:45), 케이시의 견해와는 달리 스룹바벨 성전에서 속죄의 효력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42)

 

       41) Evans, “Jesus & the Continuing Exile of Israel,” 95-97.

      42) Eskola, 신약성서의 내러티브 신학, 130-31; Casey, “Where Wright is Wrong,” 99-100. 

 

   3) 키프리언 로버트 허천(Cyprian Robert Hutcheon)은 구름 영광론의 관점에서 예수의 성전 출현이 하나님의 영광이 부재했던 제2성전에 그의 영광이 거주하게 됨을 상징한다고 보았다.43)

성막과 제1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했던 구름이 충만했던 반면(출 40:34-35; 왕상 8:10-14; 대하 5:13-14), 제2성전 재건 시 구름이 부재했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스 6:13-18).44)

누가-행전에서 예수는 구름으로 뒤덮인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눅 9:32, 34; 행 1:9).45)

그러므로 예수의 성전 출현은 하나님의 현현이 부재했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게 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겔 43:1-5).46)

 

      43) Hutcheon, “God is with Us,” 29-33.

     44) Greene, “Did God Dwell in the Second Temple?,” 767.

     45) Hutcheon, “God is with Us,” 30-31.

     46) Andrés García Serrano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 후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다 는 것은 성전이 예수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장소로 변모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눅 19:45-47). Andrés García Serrano, “The Jerusalem Temple According to Luke,” EB 71/1 (2013), 41; Hutcheon, “God is with Us,” 30-31. 

 

따라서 구름 영광론의 관점에서 예수의 출현 이전의 스룹바벨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제2성전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예언서에서 말하는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은 이미 성취된 사건이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좌정하는 참된 성전을 재건했기 때문에 그들의 유배 생활은 종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귀환은 예언자가 고대했던 귀환이 아니다.

귀환 이후 세워질 영광스러운 성전의 등장은 미래적 사건이기 때문에 주의 백성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유배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누가-행전에 나타난 주의 백성은 여전히 유배 중이었다고 본다.

 

  첫째, 누가-행전에서 유배와 연관된 용어가 많이 발견된다.

 

마태복음의 경우 포로된 삶을 암시하는 어휘는 예수의 족보에 한정되어 나타난다(마 1:1-17).

족보에 기술된 μετοικεσία(‘이주’), Βαβυλών(‘바벨론’), Χριστός(‘메시아’)는 바벨론 유수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메시아 예수를 통해 유배 생활이 종결될 것임을 추론케 하기 때문이다.47)

그러나 누가-행전에 사용된 어휘는 주의 백성이 유배 중이었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먼저, 사복음서 기자 가운데 누가만이 주의 백성을 포로로 명시한다(눅 4:17-21).

나사렛 선언에서 예수는 주의 백성을 포로된 자로 명명하는데, αἰχμάλωτος(‘포로’)는 전쟁에서 사로잡힌 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LXX에서 강대국에게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왕상 8:46, 50; 왕하 24:14; 대하 6:36, 38; 30:9; 더 2:6; 사 5:13; 14:2; 49:24; 겔 12:4; 암 7:11, 17; 나 3:10).48)

 

      47) Bitrus A. Sarma, Hermeneutics of Mission in Matthew: Israel and the Nations in the Interpretative Framework of Matthew’s Gospel (Carlisle: Langham Monographs, 2015), 93; Wayne Baxter, “Healing and the ‘Son of David’: Matthew’s Warrant,” NT 48/1 (2006), 37-38; Evans, “Jesus & the Continuing Exile of Israel,” 99.

     48) 누가-행전에서 αἰχμάλωτος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부채로 고통 받는 노예였다는 주장이다(John H. Yoder, 김득중).

나사렛 선언에 인용된 이사야 58장과 61장에서 포로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부채로 인해 노예로 억압받는 자를 자유롭게 하는 희년을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레 25:8-12; 신 15:1-7). 이 주장 의 두 가지 약점은 첫째, 이사야 61장은 정치적 관점에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 이 해방되길 고대하는 장이지, 경제적 측면에서 부채로 고통받는 동족의 빚 탕감 을 소망하는 장이 아니다. 둘째, 예수의 사역 목적이 부채로 억압받는 노예를 자유 케 하는 것이었다면 예수의 주된 사역의 대상은 헤롯 일가와 대제사장과 같은 엘리트층이어야 했다. 예레미야 34장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희년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동족을 노비로 삼을 수 있는 권력층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 이다(렘 34:8-16).

      2) 죄에 사로잡힌 죄의 포로라는 입장이다(Joel B. Green, John T. Carroll). 누가-행전에서 ἄφεσις(‘자유, 용서’)는 죄와 결합하여 죄 용서를 의미하 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눅 1:77; 3:3; 24:47; 행 2:38; 5:31; 10:43; 13:38; 26:18), 포로의 ἄφεσις는 죄 용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행전에서 죄는 인간을 억압하는 대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의 백성을 죄의 αἰχμάλωτος로 간 주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예컨대 로마서의 경우 바울은 αἰχμάλωτος의 동사형 인 αἰχμαλωτίζω를 사용함으로 죄에 사로잡힌 인류의 비참한 상황을 드러낸다(롬 7:23; 참조. 롬 3:9; 5:12; 6:17-18; 7:11). 그러나 누가는 죄를 어떤 세력으로서 주의 백성을 압제하는 대상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αἰχμάλωτος를 죄로부터 억압당 하는 포로로 해석하는 것은 한계를 지닌다.       3) 사탄에게 억압받는 포로라는 관점 이다(David E. Garland). 누가-행전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존재로 과거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억압했듯이 사탄이 주의 백성을 압제한 다는 주장이다(눅 13:16; 행 10:36-38). Gerhard Kittel et al.,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vol. 1,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2013), 195-96; John H. Yoder, The Politics of Jesus (Grand Rapids: Eerdmans, 1985), 66-68; Joel B. Green, The Gospel of Luke (Grand Rapids: Eerdmans, 1997), 211-13; Luke Timothy Johnson, The Gospel of Luke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1), 79; 김득중, 누가복음 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260; John T. Carroll, Luk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2), 111; David E. Garland, Luke (Grand Rapids: Zondervan, 2012), 198-99;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96), 92, 402, 419-20, 422, 425-26.

 

실제로 예수는 포로로 압제당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유사하게 사탄에게 고통당하는 주의 백성을 그 억압에서 해방시킨다(눅 4:31-37, 38-40; 5:12-26; 6:6-11; 8:26-39).49)

그러므로 누가-행전에서 주의 백성이 αἰχμάλωτος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유배 중임을 보이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누가는 주의 백성이 포로처럼 고통당하고 있음을 δέω, δεσμός, καταδυναστεύω, ἐνοχλέω, ὀχλέω 등의 어휘를 통해 드러낸다(눅 6:18; 13:16; 행 5:16; 10:38). δέω, δεσμός는 ‘결박’ 또는 ‘감금’을 의미하는 용어로 LXX에서 δέω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왕이 결박당했음을 드러내거나(왕하 25:7; 대하 33:11; 36:6; 렘 40:1; 52:11), 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혀 유배 가게 됨을 명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사 22:3; 42:7).50)

 

       49)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8), 218-19.

       50) Gerhard Kittel et al.,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vol. 2,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2013), 43, 60-61. 342❙신약논단 제31권 제3호∙2024년 가을 

    

또한 δεσμός는 강대국에게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나타내거나(사 42:7; 렘 34:2; 37:8; 나 1:13), 그들의 유배 생활을 상징하는 용어로 기술되었다(겔 4:8).

그러므로 누가-행전에서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에게 억압당하는 처지가 δέω, δεσμός를 통해 표출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포로처럼 사탄에게 억압당하는 삶을 살았음을 추론케 한다(눅 13:16).

καταδυναστεύω(‘압제하다’)는 LXX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동족을 억압할 때 사용되지만(렘 22:3; 겔 7:6; 22:29; 암 8:4), 애굽이나 바벨론에게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기술된다(출 6:7; 렘 28:64).51)

 

    51) Bauer, 바우어 헬라어 사전, 782.

 

따라서 예수가 마귀에게 압제당하는 주의 백성을 구원했다는 것은 그들이 포로처럼 억압받는 삶을 영위했음을 의미한다(행 10:38). 비록 ἐνοχλέω와 ὀχλέω는 LXX에서 유배 생활과 접점을 찾기 어렵지만, 주의 백성이 사탄의 세력에게 고난받고(ἐνοχλέω),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ὀχλέω), 그들이 사탄에게 고통받는 삶을 살았음을 잠작케 한다(눅 6:18; 행 5:16).

 

   둘째, 묵시문학의 관점에서 누가-행전에 나타난 주의 백성의 처지는 유배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묵시문학의 주요 특징인 이원론과 결정론은 유대인의 포로개념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52)

우주가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에 의해 양분되어 사탄이 현세대를 억압하고 있다는 이원론과 종말에 하나님이 사탄을 패퇴시킴으로써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이스라엘이 펼쳐진다는 결정론은 역사적 귀환 이후에도 여전히 고통받는 주의 백성의 처지를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53)

예컨대 다니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받는 원인을 악한 우주적 세력 때문이라 보았고, 종국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말미암아 그들이 참된 자유를 향유할 것이라 여겼다(단 7:11; 9:25; 10:1-12:4).54)

 

      52) Leon Morris, Apocalyptic (Grand Rapids: Eerdmans, 1972), 45-50, 65-66.

      53) Morris, Apocalyptic, 45-50, 65-66.

     54) 묵시문학에서 주의 백성을 억압하는 원천적 세력은 사탄으로 나타난다(단 10:13; Jub. 10.11; 1 En. 15.9-12; T. Sim. 5.3; T. Lev. 19.1; T. Jud. 20.1-2; T. Iss. 6.1-2; T. Nap. 2.6; 1QS 3.23-24). 예컨대 사탄은 바벨론과 두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 히고(사 14장; 겔 28장), 바로와 에돔, 모압, 로마 등과 연합하여 주의 백성을 박해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1QM 1.2; Sib. Or. 5.137-154). 왕대일, 묵시문학과 종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372-78, 398-99; John J.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An Introduction to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2), 80, 141-42, 153-54.

 

사해문헌 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에게 억압당하는 포로로 묘사되지만, 종국에 메시아가 그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함으로써 그들에게 종말론적 안식을 선사한다(CD 1.3-11; 4Q521 2.2; 11Q13 4-6, 9-25).55)

이와 같은 이원론과 결정론은 누가-행전에도 반영된다.

누가-행전에서 현계(顯界)는 사탄이 지배하는 장소로(눅 4:5-6), 주의 백성을 압제하는 존재는 강대국이 아닌 사탄으로 명시된다(눅 11:14-23. 24-26).56)

 

      55) 12족장 유언서에서 사탄은 과거 애굽이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것과 같이 주의 백성 을 포로로 압제하는 존재이지만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사탄을 패배시킴으로써 사탄의 포로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T. Dan. 1.7; 3.5; 4.7; 5.5-6; T. Lev. 3.3).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74-75; Hartmut Stegemann, Library of Qumran, on the Essenes, Qumran, John the Baptist, and Jesus (Grand Rapids: Eerdmans, 1998), 119-20.

    56) Garland는 만국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는 사탄의 발언에 예수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탄의 세력이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음을 예수가 암묵적으로 인정 한 것이라 보았다(눅 4:5-6). 라이트는 바알세불 논쟁, 일곱 귀신 축출 기사에서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진정한 원수는 로마가 아닌 사탄이라고 말한다(눅 11:14-23, 24-26). Susan R. Garrett은 사도행전에서 주의 백성이 마술을 통해 사탄에게 예속 된 존재로 묘사된다고 주장한다(행 8:9-23; 13:6-12). Garland, Luke, 181-82;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451-59; Susan R. Garrett, The Demise of the Devil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9), 61-87.

 

또한 결정론의 측면에서 하나님이 사탄을 패퇴함으로써 주의 백성은 사탄의 압제에서 해방된다(눅 1:71, 74; 10:17-20; 행 2:35; 13:10).57)

 

     57) 학자들은 70인 제자의 선교여행 결과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세 가지 관점 에서 이해했다(눅 10:18).

      1) 현재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James R. Edwards는 제자들 이 축귀를 통해 귀신을 내쫓음으로 사탄을 몰락시켰기 때문에 현재 사탄의 세력이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눅 10:9, 11).

      2) 미래적 종말론의 측면에서 Simon Gathercole은 사도행전에서 사탄은 여전히 제자들의 선교사역을 방해하는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짐으로서 완전히 몰락하는 것을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보았다.

      3) 중간자적 입장에서 Garland와 Green은 사탄의 최종적 패배는 미래에 발생할 사건이지만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를 통해 이미 실현된 것으로 간주했다.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Grand Rapids: Eerdmans, 2015), 311-12; Simon Gathercole, “Jesus’ Eschatological Vision of the Fall of Satan: Luke 10, 18 Reconsidered,” ZNW 94/3 (2003), 143-63; Garland, Luke, 428-29; Green, The Gospel of Luke, 418-20.

 

이처럼 묵시문학의 이원론과 결정론은 주의 백성의 처지를 사탄에게 억압받는 포로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주후 1세기 유대인의 포로개념을 정치적 관점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행전에 나타난 주의 백성은 묵시적 측면에서 유배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비록 학자들 간에 제2성전의 진정성을 두고 의견 대립이 있지만, 누가-행전에서 주의 백성은 포로로 명시되고(눅 4:18), 그들이 포로처럼 억압받고 있음이 강조되며(눅 6:18; 13:16; 행 5:16; 10:38), 우주적 차원에서 사탄의 포로로 나타난다(눅 1:71, 74; 4:5-6; 10:17-18; 행 13:10).

따라서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은 그 시발점이 포로였다고 할 수 있다(행 26:18).

 

2. ‘돌아옴’의 전환 도구

 

‘돌아옴’은 방향의 전환을 통해 이전의 방향에서 돌이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돌아옴’에는 전환의 과정이 존재한다.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의 선회과정을 살펴보면 각각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과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을 가능케 하는 전환 수단이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누가-행전에서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 을 촉발시킨 요인은 침례자 요한과 제자들이 수행한 설교 혹은 선지자적 촉구로 볼 수 있다(눅 1:17; 3:3-14; 행 3:19; 4:4; 14:21; 26:17-20).

예언서에서 죄에서 돌이키길 요청하는 선지자적 촉구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의 방향에서 회귀시키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사 45:22; 55:7; 렘 3:7, 12; 4:1; 5:3; 겔 14:6; 18:21; 호 14:1).58)

 

     58) 박명철, “‘돌아옴’의 회개적 의미,” 80-81. 

 

죄에서 돌아오길 원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선지자를 통해 전달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돌이키려는 선지자들의 노력은 실패로 귀결되지만, 누가-행전에서 침례자 요한과 제자들의 선포는 주의 백성이 죄로부터 하나님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범죄한 주의 백성을 돌아오게 할 소명을 받았던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촉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회귀시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한다(눅 1:17; 3:3-14).59)

 

    59) Bock, A Theology of Luke and Acts, 262-63.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은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그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행 3:19; 4:4).60)

 

    60) 김성규는 베드로의 설교에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적 촉구에 해당하는 심판, 정죄, 인내하심, 회개라는 어휘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선지자적 촉구 로 보았다(렘 3:12-13; 행 3:11-26). 김성규,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회개 권고(행 3:16-26),” 신약논단 20/4 (2013), 989-92. 

 

바울은 선교여행 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오라 선포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그의 사명을 완수한다(행 14:21; 26:17-20).61)

 

    61) Dale C. Allison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소명을 위임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바울과 에스겔은

     1) 하늘의 빛을 보고 땅에 엎드러졌고(행 26:13-14; 겔 1:1, 28),

     2) 그들은 모두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없었으며(행 22:11; 겔 1:26-28),

     3) 주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고(행 26:14; 겔 2:2),

     4)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말한 후 거룩한 임무를 부여했으며(행 26:16-17; 겔 2:2-3),

     5) 위임 직후 그들은 도시(들판)로 가서 사역을 수행한다(행 9:1-9; 겔 3:22). Dale C. Allison, “Acts 9:1-9, 22:6-11; Paul and Ezekiel,” JBL 135/4 (2016), 812-19.

 

이처럼 누가-행전에서 회개적 의미로 사용된 ‘돌아옴’의 전환 수단에는 선지자적 촉구 혹은 설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에서 주의 백성이 유배 생활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을 가능케 하는 주요 도구는 ‘주의 손’으로 명시된다(행 11:21).

‘주의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1) 조셉 피츠마이어(Joseph A. Fitzmyer)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은 그의 도우심을 뜻하기 때문에 ‘주의 손’은 하나님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았다(대상 4:10; 28:19; 사 66:2).62)

   2) 크레이그 키너(Craig S. Keener)와 김경진은 고넬료의 가문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이 전달되기 때문에 ‘주의 손’을 부가적인 선물(Second Blessing)로 간주했다(행 11:15-17).63)

   3) 에크하르트 슈나벨(Eckhard J. Schnabel), 루크 존슨(Luke T. Johnson)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 이적과 기사가 동반되기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한 ‘주의 손’을 기적과 이사로 이해했다(행 2:43; 4:30; 5:12; 6:8).64)

그러나 필자는 ‘주의 손’을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은 출애굽과 연관된 표현으로,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을 바로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의미한다(출 3:19; 13:3, 14, 16; 14:31; 신 3:24; 4:34; 5:15; 6:21; 7:8; 9:26; 11:2; 26:8).65)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가능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손’이 애굽의 세력을 패퇴시켰기 때문이다(출 3:20; 15:6).66)

 

      62) Joseph A. Fitzmyer, 사도행전 주해, 박미경 역 (왜관: 분도출판사, 2015), 772-73.

     63) Craig S. Keener, Acts 3:1-14:28 (Grand Rapids: Baker Publishing Group, 2012), 1842- 43; 김경진, 사도행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63-64.

     64) Eckhard J. Schnabel, Acts (Grand Rapids: Zondervan, 2012), 520-21; Luke Timothy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2), 85.

      65)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손’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원동력 으로(출 3:20; 6:1; 7:4-5; 13:3, 9, 14, 16; 15:6; 신 4:34; 5:15; 7:19; 9:26; 11:2; 26:8; 렘 33:21; 단 9:15-16), 이스라엘 백성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통해 바로의 권세가 ‘하나님의 손’에 패퇴당하는 것을 목도한다(출 3:20; 15:6). Gerald A. Klingbeil, “The Finger of God in the Old Testament,” ZAW 112/3 (2000), 411-14; Gerhard Friedrich et al., 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vol. 9,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2013), 427.

     66) Klingbeil, “The Finger of God,” 411-14.

 

예언서에서 포로된 주의 백성이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유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하나님의 손’으로 명시된다(사 11:15-16; 렘 51:25-32; 습 2:13).

‘하나님의 손’은 앗수르와 바벨론 을 격퇴하고, 광야와 유브라데 강 가운데 길을 내어 유배 중인 주의 백성을 귀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유배 중인 주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힘으로 볼 수 있다.

누가-행전에서 ‘주의 손’은 사탄의 억압에서 주의 백성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권세로 표현된다.

 1) 바알세불 논쟁에서 ‘하나님의 손’은 사탄의 세력을 축출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난다(눅 11:20).67)

사탄의 권세는 질병을 통해 주의 백성을 압제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손’ 을 힘입어 사탄에게 억압받는 주의 백성을 구원한다(눅 11:14).

마치 바벨론에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기 위해 바벨론의 세력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듯이(사 49:24-25), 예수는 사탄의 권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고통당하는 자를 해방할 수 있었다(눅 11:21-22).68)

 

      67) 비록 ‘손’이 χείρ가 아닌 δάκτυλος(‘손가락’)로 기술되지만,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손’과 마찬가지로 원수를 패퇴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 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손’을 나타내는 환유법으로 볼 수 있다(출 8:19). Faith Elizabeth Lund, “Out of Egypt: The Exodus Motif in the New Testament” (PhD thesis: Assemblies of God Theological Seminary, 2018), 105-106.

     68) Susan R. Garrett, “Exodus from Bondage: Luke 9:31 and Acts 12:1-24,” CBQ 52 (1990), 662-63. 

 

 2) 바울의 사역에서 주의 백성이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주의 손’으로 나타난다(행 26:18; 13:11-12).

바울이 복음 전파를 통해 구브로의 총독을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마귀의 자식이자 거짓 마술사였던 엘루마는 이를 방해한다(행 13:6-8).

그럼에도 총독이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이 요술사의 권세를 물리쳤듯이(출 8:18), ‘주의 손’이 사탄의 앞잡이였던 엘루마의 방해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행 13:9-12).

그러므로 ‘주의 손’은 사탄의 포로였던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 돌아오는 과정에 있어 핵심적인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포로된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귀과정에서 ‘하나님의 손’이 주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행 11:21).

흥미롭게도 누가-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두 양상(樣相)은 ‘돌아옴’의 전환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먼저, 예언의 영인 성령은 회개를 의미하는 ‘돌아옴’의 선회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과거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할 수 있었던 것처럼(겔 2:2; 호 9:7), 성령은 예언의 영으로서 제자들이 선포할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한다(눅 1:67-69; 행 2:16-18).69)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제자들의 예언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의 백성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눅 4:14-15; 행 1:8).70)

그러므로 예언의 영인 성령은 범죄한 주의 백성이 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그 방향을 선회하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주의 백성이 귀환하는 과정에서는 권능의 영인 성령이 깊이 있게 관여된다.71)

 

     69)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tness: The Spirit in Luke-Acts (New York: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6), 104-257.

    70) Otten, “I Alone am Left,” 134.

    71) Max Turner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성령을 권능의 영으로 간주했다.

      1)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예언의 영 못지않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능력의 영으로 명시된 다(눅 3:21-22, 사 42:1; 눅 4:18-21, 사 61:1-2; 눅 24:49, 사 32:15).

      2) 누가는 비유대 주의적 측면에서 성령을 권능과도 연관시킨다(눅 1:35; 4:14, 18; 행 10:38). Max Turn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Luke-Acts,” WW 23/2 (2003), 149-53.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포로된 주의 백성을 해방하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구원한다(눅 4:18; 행 10:38).

제자들 역시 성령의 권능으로 이사와 기적을 행한 결과 주의 백성을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한다(행 8:13; 9:32-35). 그러므로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에서 권능의 영인 성령은 포로된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회귀하는 과정에서 주된 도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3. ‘돌아옴’의 종착점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의 종착지는 하나님(주)이다(눅 1:16; 행 9:35; 11:21; 14:15; 15:3, 9; 26:18, 20).

학자들은 주의 백성이 ‘돌아옴’의 목적지인 하나님에게 도달한 것을 다음의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1)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는다(행 3:19; 26:18).72)

 

     72) Marshall, 사도행전 신학, 171-73. 

 

2) 종교적 측면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우상 숭배자에서 하나님 예배자로 변모된다(행 14:15; 15:20).73)

사도행전에서 이방인의 본모(本貌)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으나(행 14:15, 21; 15:19-20), 그들이 종교적 회개를 통해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하나님만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다.74)

 

    73) 박명철, “‘돌아옴’의 회개적 의미,” 100-102.

    74) 박명철, “‘돌아옴’의 회개적 의미,” 100-102.

 

3) 행위의 관점에서 죄로부터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눅 1:16; 3:3-14).75)

돌아오기 이전의 유대인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에게 ‘돌아온’ 그들은 의식(衣食)을 배분함으로써 그들이 회개했음을 증명한다.76)

 

     75) Bock, A Theology of Luke and Acts, 266.

     76) 박명철, “‘돌아옴’의 회개적 의미,” 82-89.

 

4) 관계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행 26:18).77)

주의 백성은 율법 준수라는 옛 시대의 관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행 26:18).78)

 

    77) Robert C. Tannehill, The Shape of Luke’s Story (Eugene: Cascade Books, 2005), 85; Craig S. Keener, Acts 24:1-28:31 (Grand Rapids: Baker Publishing Group, 2015), 3526.

    78) VanGemeren, Dictionary of Old Testament, 53-57; Keener, Acts 24:1-28:31, 3526. 

 

이처럼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에서 주의 백성이 ‘돌아옴’의 종착지인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것은 그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예배자로 변화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의 백성이 ‘돌아옴’의 목적지인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기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회개보다는 귀환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행 26:18).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이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을 의미하는지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을 뜻하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견해는 양분된다.

먼저,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으로 보는 학자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의 백성이 회개한 결과 기업을 소유하게 된 것으로 이해했다.79)

 

     79) 다수의 성경 번역본은 바울의 소명에 나타난 τοῦ λαβεῖν을 목적 혹은 결과를 나타 내는 부정사로 간주하여 ‘돌아옴’과 기업을 상속받는 것과의 관계를 목적 혹은 결과의 측면에서 해석한다(KJV, ESV, NIV, NRSV, ISV, GNT 등). 

 

  1) 사도행전에서 사탄의 권세는 죄로 표출되기 때문에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것은 죄로부터 하나님에게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80)

예컨대 사탄의 권세는 마술을 통해 역사되기 때문에(행 13:10; 19:13-19),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것은 마술 추종과 같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온 것을 함의한다.81)

 

    80) David G. Peterson, The Acts of the Apostles (Grand Rapids: Eerdmans, 2009), 669; Carl R. Holladay, Act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6), 476-77; Johnson, Acts, 437.

    81) Peterson, Acts, 669; Holladay, Acts, 476-77; Johnson, Acts, 437. 

 

2) 바울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본모는 죄로 말미암아 흑암에 거하는 자로 비유되고(엡 5:8; 골 1:12- 14; 살전 1:9-10),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들은 빛의 자녀 혹은 빛 가운데 거하게 된 것으로 표현된다(빌 2:15; 골 1:12; 살전 5:5).82)

 

    82) Frederick F. Bruce, The Book of the Acts (Grand Rapids: Eerdmans, 1988), 466-67; Johnson, Luke, 437. 

 

그러므로 흑암인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빛 되신 하나님에게 돌아온 것은 회개의 관점에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83)

 

    83) 사도행전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돌아옴과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돌아 옴은 병렬 관계로 기술된다(행 26:18).

 

따라서 ‘돌아온’ 주의 백성이 기업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것은 주의 백성이 회개한 결과 기업을 얻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반해 귀환의 측면에서 ‘돌아옴’을 이해한 학자들은 주의 백성이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기업을 유업으로 상속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칼 홀러데이(Carl R. Holladay), 키너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에 새 출애굽적 모티브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84)

 

     84) Craig S. Keener, Ac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586; Holladay, Acts, 476. 

 

   1) 누가는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과 어둠에서 빛으로의 ‘돌아옴’을 동일한 맥락에서 기술한다(행 26:18).

어둠에서 빛으로의 ‘돌아옴’은 새 출애굽을 상기시키는 표현으로, 이사야는 열강의 포로였던 이스라엘의 처지를 ‘흑암과 감옥에 갇힌 죄수’로 비유한 반면, 새 출애굽을 통해 포로된 주의 백성이 자유케 된 것을 ‘흑암에서 빛을 보고 어둠에서 해방된 것’으로 기술한다(사 9:1-2; 42:6-7).

   2) 사탄의 권세는 주의 백성에 대한 사탄의 지배권을 의미한다(눅 4:6; 고후 4:4; 엡 2:2; 요일 5:19; 1QM 17.5-6). 사탄의 권세 하에 있는 주의 백성을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권세보다 강한 힘이 요구된다(눅 11:20).

그러므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로의 ‘돌아옴’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사탄의 세력에서 주의 백성이 돌아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이 기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새 출애굽을 통해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된 주의 백성이 기업을 소유하게 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필자는 구약에서 기업과 ‘돌아옴’ 간의 관계가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보다는 귀환의 측면에서 명시되기 때문에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에게로의 ‘돌아옴’은 귀환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본다.

학자들은 구약에 기술된 기업의 용례를 출애굽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라이트는 비록 신약에서 기업은 지리적 개념의 땅이 아닌 갱신된 우주적 세상을 의미하지만, 기업을 출애굽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용어로 보았다.85)

그는 애굽의 종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된 삶에서 해방된 결과 기업을 유업으로 받은 것처럼(창 15:13-14), 죄의 종 된 주의 백성 역시 포로된 삶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업이 상속된 것이라 말한다(롬 4:13-14; 6:6-7).86)

 

    85) N. T. Wright, “New Exodus, New Inheritance,” Romans and The People of God: Essays in Honor of Gordon D. Fee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ed. by Sven K. Soderlund (Grand Rapids: Eerdmans, 1999), 30-31.

    86) Wright, “New Exodus, New Inheritance,” 29-30. 

 

사도행전에서 주의 백성이 죄의 포로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기업을 포로 생활의 종결과 연결한 그의 주장은 옳다고 본다.

수잔 가렛(Susan R. Garrett)은 두 가지 이유에서 사도행전에 기술된 기업을 출애굽의 측면에서 이해했다.87)

 

        87) Garrett, “Exodus from Bondage,” 661. 

 

 1) LXX에서 κλῆρος(κλη- ρονομία)의 주된 용례는 애굽에서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정착할 ‘가나안 땅’으로 명시된다(출 6:8; 15:17; 민 33:53; 34:2; 36:2; 신 2:12; 12:9; 19:14; 수 1:15; 11:23).88)

 

       88) Garrett, “Exodus from Bondage,” 661. 

 

  2)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시몬에게 언급했던 οὐκ ἔστιν σοι μερὶς οὐδὲ κλῆρος ἐν τῷ λόγῳ τούτῳ 는 출애굽 과정에서 레위인에게 받을 분깃이 없음을 전달하는 모세를 상기시킨다(행 8:21).89)

그러므로 그녀는 모세의 출애굽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450년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처럼(행 7:5; 13:17-19), 그리스도의 새로운 출애굽으로 말미암아 유배에서 해방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았다고 말한다(행26:18).90)

 

    89) Garrett, “Exodus from Bondage,” 661. 

     90) Garrett, “Exodus from Bondage,” 661, 670. 

 

데이비드 파오(David W. Pao)는 사도행전에 사용된 기업을 출애굽기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의 관점에서도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행 20:32; 26:18).91)

 

    91) David W.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6), 174-76. 

 

그는 출애굽의 여정 즉,

  1)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2) 하나님이 권능으로 구원받아,

  3)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삼은 것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과정에도 반영되었다고 말한다(창 15:7; 출 6:8; 15:17; 수 11:23).92)

 

    92)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175. 

 

이사야에서 역시

   1)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2)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방되어 귀환할 때,

   3)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사 49:8).93)

 

        93)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176.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돌아옴’의 결과 기업이 주어진다는 것은 귀환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필자는 파오의 견해에 동의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돌아옴’과 기업 간의 관계는 주의 백성의 귀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언서에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은 새 출애굽을 통해 포로된 삶에서 귀환한 이후 약속의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삼게 된다(사 49:8- 13; 57:13-14; 렘 3:18; 12:15; 렘 32장; 겔 47:13-23; 48장).94)

 

      94) 귀환과 기업 간의 관계는 제2성전기 문헌에서도 발견된다(Jub. 1.15-18; Pss. Sol. 17.21-28). 희년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종말의 때에 열국에 흩어진 주의 백성을 귀 환시킬 것이고, 그들은 변모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삼게 된다(Jub. 1.15-18, 20; 50.5; 사 65:17; 66:22). 또한 솔모몬의 시편에서 메시아의 역할은 포로된 주의 백성을 종말론적 기업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명시된다(Pss. Sol. 17.21-28). Miguel Gustavo Echevarria Jr., “The Future Inheritance of Land in the Pauline Epistles” (PhD thesi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14), 97-102.

 

예컨대 바벨론 유수 직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밭에 대한 기업 상속권을 취득함으로써(렘 32:8), 훗날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다시 기업으로 삼게 됨을 드러낸다(렘 32장).

또한 에스겔의 비전에서 과거 가나안 땅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그들의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것처럼(수 13:8-33), 미래의 이스라엘 땅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주의 백성에게 배분될 것임이 계시된다(겔 47:12-13; 48장).

그러므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이 기업을 유업으로 상속받는다는 것은 포로에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이 기업을 소유할 것이란 예언자의 기대를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의 백성이 ‘돌아옴’의 종착지인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기업을 얻게 된다는 것은 ‘돌아옴’을 귀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III. 결론

 

지금까지 ‘돌아옴’의 과정을 살펴본 결과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에는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회개와 귀환에 나타난 ‘돌아옴’의 일련의 과정을 고찰해 보면 ‘돌아옴’의 시발점과 전환 과정 그리고 종착점이 상이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여 비교하면,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돌아옴’의 시발점: 죄인 ⊃

   2) ‘돌아옴’의 전환 도구: 선지자적 촉구, 예언의 영

   3) ‘돌아옴’의 종착점: 하나님 (죄사함, 갱신된 관계 등) 

 

회개의 관점에서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기 이전의 상태는 죄인으로 명시된다(눅 3:8-14; 17:4; 22:32; 행 3:19; 9:35; 11:21; 14:15; 15:19; 26:20; 28:27).

그러므로 회개적 의미로 사용된 ‘돌아옴’의 출발점은 죄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죄의 방향으로 나아가던 주의 백성은 침례자 요한과 제자들의 선지자적 촉구 혹은 설교로 인해 그 방향이 전환된다(눅 1:17; 3:3-14; 행 3:11-26; 14:21; 26:17-20).

그들은 성령(예언의 영)의 영감으로 선포된 주의 말씀을 통해 죄의 방향에서 회귀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온다(눅 1:67-69; 행 2:16-18).

따라서 예언의 영을 통한 선지자적 촉구는 ‘돌아옴’의 전환을 가능케 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주의 백성이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돌아옴’의 종착지에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예배자로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눅 3:3-14; 행 3:19; 14:15; 15:20; 26:18).

이처럼 ‘돌아옴’은 죄를 범한 주의 백성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죄로부터 돌이켜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회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의 과정에는 회개적 의미의 ‘돌아옴’과는 또 다른 양상이 존재한다.

귀환적 의미의 ‘돌아옴’을 도식으로 나타내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돌아옴’의 시발점: 포로 ⊃

   2) ‘돌아옴’의 전환 도구: 하나님의 권능

   3) ‘돌아옴’의 종착점: 하나님(기업을 상속받음) 

 

누가-행전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기 이전의 주의 백성은 죄인임과 동시에 포로로 현시된다(눅 4:18; 행 26:18).

그들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사탄에게 억압받는 삶을 영위했기 때문이다(눅 4:5-6; 6:18; 13:16; 행 5:16; 10:38).

그러므로 귀환의 과정에서 ‘돌아옴’의 시발점은 사탄의 포로였다고 할 수 있다.

포로된 삶을 영위했던 주의 백성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에서 회귀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눅 11:20; 행 11:21; 13:6-8; 26:18).

예수와 제자들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주의 백성을 포로된 상태에서 전환시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한다.

따라서 사탄에게 압제받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반환점에서 ‘하나님의 손’을 통한 그의 권능은 ‘돌아옴’ 을 가능케 한 주요 도구로 명시된다.

주의 백성이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돌아옴’의 종착점인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주의 백성은 기업을 상속받게 된다(행 26:18). 이처럼 포로된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에게 돌아온 결과 기업을 소유하게 되는 ‘돌아옴’의 과정은 예언서에서 말하는 귀환의 패턴 즉, 포로된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유배에서 해방되어 귀환한 결과 기업을 상속받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에는 회개적 의미뿐만 아니라 귀환적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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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에 회개적 의미뿐만 아니라 귀환 적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예언서에서 ‘돌아옴’의 주된 용례는 죄로 부터 돌이켜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개이다.

누가-행전의 ‘돌아옴’ 역시 죄를 범한 주의 백성이 성령(예언의 영)으로 영감된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과정으로 나타 나기 때문에 회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언서에 나타난 ‘돌아옴’의 또 다른 중요한 용례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귀환이다.

그들의 귀환 과정을 살펴보면 세 가지 패턴이 나타난다.

  1)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 라엘 백성은 그들에게 억압받는 삶을 영위했다.

  2) 새 이스라엘이 펼쳐질 때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야기된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고국으로 귀환한다.

  3)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게 된 다.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 역시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1) 주의 백성은 처지 는 사탄에게 억압당하는 포로로 명시된다(눅 4:18; 6:18; 13:16; 행 5:16; 10:38; 26:18).

   2) 주의 백성은 사탄의 권세보다 우월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돌아온다(눅 11:20; 행 11:21; 13:6-8; 26:18).

   3) 하나 님에게 돌아온 주의 백성은 기업을 유업으로 얻게 된다(행 26:18).

따라서 누가-행전에 기술된 ‘돌아옴’은 귀환과 회개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누가, 회개, 유배, 귀환, 출애굽

 

Abstract

Double Meaning of the Term ‘Turn’ in Luke-Acts

Park Myong-Cheol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Seminary, Lecturer)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verify that the term ‘turn’ in Luke-Acts is used to refer to returning home as well as repentance. Abundant examples of bwv (‘turn’) in Prophets indicate repentance, which means turn from social, moral and religious sins to God. Similarly, the process of turn in Luke-Acts is shown that God’s people who committed sins turn from their sins by the mission speech inspired by holy spirit. So, we can say that the word ‘turn’ is used in Luke-Acts in terms of repentance. However, not a few examples of the term ‘turn’ in Prophets show that the word ‘turn’ means returning home from a place of exile. According to Prophets, the process of turn in terms of returning home has three patterns. 1) The Israelite was the oppressed during the Babylonian exile. 2) At the start of New Israel, the Israelite will be able to return home by New Exodus caused by God’s mighty power. 3) The returned Israelite will inherit the land under the reign of God. The process of turn in Luke-Acts also has similar patterns. 1) God’s people were oppressed by Satan (Lk 4:18; 6:18; 13:16; Ac 5:16; 10:38; 26:18). 2) God’s people can be returned from Satan’s influence to God’s reign by God’s supreme power (Lk 11:20; Ac 11:21;  13:6-8; 26:18). 3) Returned people by God will receive the inheritance (Ac 26:18). Thus the word ‘turn’ in Luke-Acts has double meaning; returning home as well as repentance.

 

Keywords Luke, turn, repentance, exile, exodus

 

 신약논단 제31권 제3호∙2024년

투고일: 2024. 8. 20. 최종심사일: 2024. 9. 5. 게재확정일: 2024. 9. 5.

누가-행전에 나타난 ‘돌아옴’의 이중적 의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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