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Ⅱ.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 원인(原因)
Ⅲ.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1861)과 대한해협
Ⅳ.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과 러시아 봉쇄
Ⅴ. 결론
◀ 국문 초록 ▶
본 논문의 목적은 19세기 유럽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충돌해온 패권국 영국과 도 전국 러시아가 어떠한 이유에서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장하여 캄차카반도, 대마도, 거문 도에서 해상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충돌의 근원적 원인을 지정학적 관점으로 분석함으로써 한반도와 대한해협의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을 고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먼저 패권경쟁의 주체인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특성을 살펴본 뒤, 동아시아 지역과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한 지정학적 충돌 상황을 고찰함으로써 동아 시아로 이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의 영향과 결과를 분석하였다.
한반도 인근에서 발생한 그레이트 게임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력이라고 할 수 없는 패권국 영국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팽창을 시도하던 도전국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선택한 예방전쟁이었다.
또한 한반도 주변 해상 지배권은 양국에 있어 태평양을 지배하 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 이익이었다.
주제어 : 대마도, 거문도, 대한해협, 그레이트 게임, 지정학
Ⅰ. 서 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력을 신장시켜 팽창하고 있던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 했 던 패권국 영국의 지정학적 대결은 크게 발칸지역,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세 지역에서 지속 되어 왔다.
러시아는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아 유럽의 크림반도,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동아시아의 캄차카반도까지 적극적 으로 영토적 확장을 시도하였고, 영국은 이러한 러시아의 팽창을 자국의 식민지와 거점들 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일찍이 맥킨더(Halford J. Mackinder)가 “모든 역사적 교훈이 국가가 위치한 지리적 여건과 공간에 기초하며 이로 인한 물질적 생산력과 전략적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각기 다른 세력들의 충돌과 전쟁이 발생한다”1)라고 주장한 것처럼,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충돌은 이미 예견되고 예정된 것이었다.
하트랜드(heart land)에 기반을 둔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보 유할 수 있었고 이후 크림전쟁 이전까지 유럽 내에서 강대국으로서 영향력을 견지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유럽열강과 달리 러시아는 경제, 기술 분 야에서 확연히 뒤처져 있었고,2) 군사력은 영국을 포함한 열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 였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 동아시아 지역까지 러시아가 시도한 팽창정책은 주도적이기보 다는 수동적인 측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해양으로 팽창하기 위해 출구를 찾아 진출하고자 했지만 대부분의 시도들은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러시아는 또다시 다른 출구를 찾아 팽창의 방향을 전환해야만 했다.3)
1) Halford J. Mackinder,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Washington, DC: National Defense University Press, 1996), p.1.
2) 폴 케네디 교수는 1830년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영국의 절반 수준이었고, 19세기 초 러시아의 철 생산이 2배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영국은 30배나 증가했음을 명기하며 러시아의 더딘 성장을 지적했다.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서울: 한국경제신문사, 1996), pp.240-244.
3)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서울: 지식산업사, 2001), p.19. 강정일 19세기 한반도 주변에서 전개된 그레이트 게임
특히 19세기 러시아의 중앙아 시아 진출은 영국으로 하여금 식민지 인도와 러시아의 국경이 직접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 다는 깊은 우려를 유발함으로써 영국과 러시아는 기존에 충돌하던 발칸지역뿐만 아니라 중 앙아시아에서도 충돌하게 된다.
그 결과 영국은 인도를 기반으로 한 아시아로의 진출을 지 속 추진하여, 해로를 장악하고 해상권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패권국의 지휘를 유지하게 되었고, 반면 매번 영국과 유럽 열강들에 의해 팽창이 좌절된 러시아는 또 다른 해양의 출 구인 동아시아로 팽창의 방향을 선회해야만 했다.
결국 러시아와 영국은 다시금 동아시아 지역의 재해권을 두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19세기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두고 아 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s)의 전장은 결국에는 한반도 인근 해 역까지 확대되었다.
유럽지역에서의 패권경쟁의 범위가 동아시아로 확대되어 한반도 주변 이 범 세계적인 충돌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러시아와 영국의 충돌에 관해 분석한 연구들은 다수가 있 다.4)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당시 사건의 흐름과 환경, 그리고 대응 과 같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사건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세부적으로 분석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을 한 시점과 관점에서 근인(近因: immediate cause)을 분석하기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국가의 특징과 정책 방향 등을 분석하 여 설명하는 것이 더욱 유용할 수 있다.
즉, 당시 충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러시 아가 왜 그러한 정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국가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근 원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으며, 왜 굳이 멀리 지리적으로 떨어진 한반도 인근에서 충돌했어 야만 했는지’에 대해 일정한 분석의 틀을 적용하여 좀 더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분석의 도구로서 지정학적 관점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 의 경쟁 구조를 형성하게 만든 근원과 구조의 변화에 대해 ‘지정학적 충돌의 원인 → 지정 학적 가치 → 충돌의 결과’의 틀로서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지정학은 국가 간의 관 계와 현상을 설명할 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지정학적 대립을 기준으로 핵심지역이나 공 간을 차지하거나 상대방의 점령을 방지하는 국가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근원적인 정책변화 요인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5)
4) 최근에 발표된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한동훈, “거문도사건(1885)을 둘러싼 영·러의 대립 양상과 러시아의 대응,” 『군사연구』, 제154권, 2022, pp.162-190; 전홍찬, “거문도 사건(1885-1887)에 대한 재조명 : ‘펜제 사태 연관 론’ 재검토,” 『21세기정치학회보 』, 제33권, 4호, 2023, pp.1-25.; 최덕규, “러시아 해군상 쉐스타코프와 거문도 사건(1885-1887),” 『서양사학연구』37권, 2015, pp.59-89 등이 있다.
5) Daniel Deudney, “Geopolitics and Change," New Thinking in International Relations Theory, Michael W. Doyle and G. John Ikenberry, eds., (Colorado: Westview Press, 1997), p.92.
본 논문의 목적은 19세기 유럽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충돌해온 패권국 영국과 도 전국 러시아가 어떠한 이유에서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장하여, 캄차카반도, 대마도, 거문도 에서 해상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충돌의 근원적 원인을 지정학적 관점으로 분석함으로써 한반도와 대한해협의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을 고증하는 데 있다.
[그림 1] 19세기 영국-러시아의 동아시아 충돌지역 * 출처 : 직접 작성.:생략 (첨부 논문 파일 참조)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서론에 이어 2장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 원인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국가별 특성을 먼저 분석하였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 초기의 상황을 1854년 영국의 캄차카반도 페트로파블롭스크(Petropavlovsk) 공격을 중심으로 살 펴보았다.
3장에서는 1861년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 상황을 통해 해양국가로서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던 영국과 일본의 저지 과정에 관해 고찰하였으며, 4장에서는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러시아의 대응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평가하였다.
마지막으 로 5장 결론에서는 동아시아로 이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의 영향과 결과에 대 해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연구자료는 연구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역사서를 포함한 문헌연구방법을 적 용하였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서 과거의 외교사 문건을 참고했으며, 러시 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대한반도 정책에 관한 영문자료는 말로제모프(Andrew Malozemoff) 와 달린(David J. Dallin), 렌슨(G. A. Lensen) 등의 저서를 활용하였다.
국문 자료는 강 성학, 김용구, 최문형 등의 저서와 각 시기별로 연구되어 있는 논문들을 활용하였다.
Ⅱ.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 원인(原因)
1.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특성
국가의 특성은 대부분 삶의 기반인 자연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생활양식에 의해 결정 되며, 이는 국민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가체제와 정책에 영향을 준다.6)
즉, 지리적 요소에 입각한 국가들의 이원론적 특징은 육지의 ‘고체’의 성질과 해양의 ‘액체’의 성질에서 비롯 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특성에 따라 해양국가와 대륙국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해양국가는 바다라는 자연적 방벽을 보유하였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영토의 근본적 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양국가는 영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조밀하고 생활공 간과 자원 등이 부족한 환경적인 문제들을 안고 생활해야 하며, 이러한 지리적 한계와 자원 의 부족은 해양국가로 하여금 늘 바다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개방 적인 성향을 가지게 한다.
해양국가는 바다를 통해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다른 지역으로 의 접근이 용이할수록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는 성향은 더욱 커질 수 있다.7)
또한 해양국가 는 자신들이 보유한 자원만으로 부강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디든지 활용이 가능한 대륙 의 생산력에 의존하게 되었다.8)
해양국가는 해협, 섬, 정박지 등 바다가 제공할 수 있는 제 한된 수단들을 통해 해외로 진출하려는 욕구가 크게 나타났으며, 영토의 팽창을 통한 안전 의 확보보다는 주요 거점들의 선점을 통해 교역 중점을 두고, 안정적인 자원의 확보와 해상 무역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거나 통제하며 살아왔다.9)
해양국가에게 있어 해양력의 핵심은 해안 근거지의 생산 능력과 안정성 정도에 달려있으며, 역사적으로 해양국가에게 결정적으 로 중요한 문제는 해안 기지의 안전성과 생산성이었다.10)
해양국가의 대표적인 예는 영국이라 할 수 있다.
섬나라 영국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뚜렷 하게 해양국가의 특징을 지닌 유럽국가 답지 않은 국가로서 이들의 전략적 이익은 전통적 으로 중부유럽의 열강들, 더 나아가 유럽의 대륙적 성향과 배치되어 왔다.11)
6) Preston E. James and Geoffrey W. Martin, All Possible Worlds: A History of Geographical Ideas, Second Edition (New York: John Wiley & Sons, 1981), p.194. https://www.journals.uchicago.edu/doi/epdf/10.1086/509964 (접속일: 2023.12.5.).
7) A. T. Mahan,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49), p.35. https://archive.org/details/in.ernet.dli.2015.49912/page/n33/mode/2up(접속일: 2024.3.8.).
8) Ibid., pp.25-26. 9) 필립 모로 드파르쥐 지음, 이대희·최연구 譯, 『지정학 입문: 공간과 권력의 정치학』(서울: 새물결, 1997), p.25.
10) 위의 책, p.28; p.99.
11) 알렉산더 두긴, 이원복 편역『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서울: 화랑대연구소, 2000), p.86.
예로부터 영국은 대륙의 이해(利害)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는 국가로서, 내륙의 유럽국가들과는 다른 행보를 이어왔다.
영국은 바다를 동경하고 바다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용을 완성시켰다.
영국은 17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상업과 자본주 의를 바탕으로 급속히 해양으로 진출하였으며, 대륙의 영토를 점령하기보다는 바다의 주요 거점 즉, 도버해협, 지브롤터(Gibraltar), 수에즈운하, 아덴, 호르무즈 해협, 싱가포르, 홍콩 등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바다를 제패해 나갔다.12)
이를 통해 영국은 거대한 상업 식 민제국을 건설하였고, 자유와 개방적 성향을 지닌 서방의 문명을 세계로 전파하는 데 선구 자적인 역할을 하였다.13)
해양국가와 상반되는 고체의 특징을 지닌 대륙국가는 영토의 팽창과 바다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생활권(Lebensraum)을 주장한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는 ‘대륙국가가 생활권을 넓히기 위해 해양으로 팽창하고자 하는 욕구는 어떠한 국가정책의 동인보다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해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상실한 국가이거나 또 는 해양으로의 출구를 모색하고자 하는 국가의 열망은 국가의 사명과 같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국가이익으로 나타난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14)
이러한 팽창의 욕구는 강대국 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일수록 국가성장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대륙의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 더 광활하고 개방적인 해양으로의 진출을 추진한다.
비록 약소국가들은 해안에서 해양국가들의 저항에 부딪혀 팽창에 대한 도전을 멈출지 몰라 도15) 패권에 도전하는 대륙의 강대국들은 바다를 만날 때까지 진출한 후에도 바다를 건너 반대편 해안까지 진출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강대국들의 이러한 의지와 능력은 패 권국가도 쉽게 차단하기 어려운 것이다.16)
12) 해양국가의 거점 장악에 관해서 마한은 “스페인이 지브롤터(Gibraltar)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해양국가로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며, 이탈리아 또한 주요 거점인 말타(Malta)와 코르시카(Corsica)를 영국과 프랑스 에 빼앗김으로써 해양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거점을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A. T. Mahan,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p.32.
13)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The Struggle for Power and Peace, Brief edition (New York: McGraw-Hill Co., 1993), p.144.
14) Karl Haushofer, “Why Geopolitik?,” Toal, Gerard, et al., eds., The Geopolitics Reader (New york: Routledge, 2005), pp.33-35.
15) Andreas Dorpalen, ed., The World of General Haushofer: Geopolitics in Action. (N.Y: Kenniskat Press, 1996), pp.125-129. 지상전력은 바다를 뛰어 넘어 충분히 투사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바다의 장벽으로 인해 공격하는 병력의 수가 제한되고 상륙작전을 위해서 동원되는 화력 또한 제한적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육군의 투사력을 막는 바다의 성격을 미어샤이머는 ‘바다의 차단성’이라고 했다. John J. Mearsheimer,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New york : Norton, 2001), p.114; 미어 샤이머는 바다의 차단성과 더불어 국가의 지리적 위치를 국제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되살림으로써 국제정치에서 지정학의 의미를 되살렸다고 평가된다. Glenn H. Snyder, "Mearsheimer's World-Offensive Realism and the Struggle for Security," International Security, Vol.27, No.1, summer, 2002, p.152.
대륙국가의 대표적 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일 것이다.
러 시아는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무역로 개척과 새로운 영토 획득을 위한 전진기지로 부동항을 획득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빙하장벽과 남쪽 강대국들의 견제 때문에 지중해와 인도양 그리고 태평양 으로의 출구를 쉽게 획득하지 못했다.
태평양으로의 출구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 의 해 저지당했고,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의 진출은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의 저지로 번번 이 실패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대서양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발트해 지역에서는 발틱 3국 을 포함하여 북유럽 국가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여 왔으며, 흑해의 입구이자 에게해로 통하 는 지중해의 관문, 다르다넬스 해협(the Dardanelles strait)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폭 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터키와 해상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 아는 지속적으로 해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며 출구를 모색했고,17) 1856년 크림전쟁으로 인해 지중해로의 진출이 좌절된 직후 러시아의 관심은 동아시아로 전환되었다.
16) Andreas Dorpalen, ed., The World of General Haushofer: Geopolitics in Action., pp.125-129; 전웅 편역, 『지정학과 해양세력이론』(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9), p.43.
17) 러시아는 남부와 서부 국경선이 해안선이 될 때에 비로소 대륙건설이 완료된다. 알렉산더 두긴, 이원복 편역『러 시아의 지정학적 미래』, p.33.
<표 1>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특징 출처: 직접작성.:생략(별첨논문파일참조)
2. 충돌의 시작: 영국의 페트로파블롭스크(Petropavlovsk) 공격
1840년 6월, 영국군이 중국본토를 공격함으로써 열강들에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천자의 나라’가 무너지면서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유교권 국제정치질서 또한 붕괴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 군함은 빈번하게 동아시아 해역에 출현하여 영향력을 넓혀 갔고, 러시 아는 ‘영국이 아무르강마저 점령하여 동아시아 전체를 선점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서 아무르강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와 교섭을 추진하였다.18)
영국이 아무르강을 선점할 경우, 러시아의 캄차카반도가 봉쇄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로의 팽창정책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9)
아무르강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오호 츠크와 캄차카 지역이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로서는 동아시아로의 팽창정책 을 유지하고 영토를 보전하려면 아무르강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항해권을 보장받아야만 했 다.
실제로 당시 트랜스바이칼리아(Transbaikalia)와 캄차카 사이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아무르강을 이용하는 수로가 유일한 것으로 러시아에 있어 아무르강 일대는 사활적인 이익이 었다.
영국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는 1847년 무라비요프(Nikolay Muravyov)20)를 동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아시아 지역을 개발하게 하였다.
1847 년 9월 7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동부 시베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무라비요프는 1849년 네 벨스코이(Gennadi Nevelskoy)의 도움을 받아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1850년에 아무르강 하류 부근인 니콜라엽스크(Никола́евск)에 초소를 설치하고 아무르강 연안을 러시아령 으로 선포하였으며, 1853년에는 사할린 지역에 최초의 러시아 전투초소를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에 의한 합병을 공식화하였다.21)
18) 만일 영국이 아무르강의 지리적 가치를 정확히 파악한다면 사할린 및 아무르강 침공을 반드시 강행할 것이라고 러시아인들은 판단하였다. 민경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극동 진출 배경에 관한 연구,” 『史叢』, Vol. 49, 1999, p.55.
19) 최문형,『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서울: 지식산업사, 2007), p.63.
20) 총독의 관할 지역은 캄차카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그가 근무한 14년 동안 청국 땅과 북태평양의 여러 무인도를 점취했다. David J. Dallin, The Rise of Russia in Asia (Yale Univ. Press., 1949), p.17. https://archive.org/details/dli.pahar.2912/page/n3/mode/2up(접속일: 2024.2.5.).
21) 홍웅호, “청일전쟁 이전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大東文化硏究』, Vol.61, 2008, p.98.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은 청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던 영국에 있어서는 큰 도전이자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 가 이러한 도전은 머지않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이권 경쟁으로 이어 질 것이 자명한 것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인도까지도 영향을 받 을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러한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구도는 크림전쟁 중이던 1854년에 머나먼 동아시아 캄차 카반도로 이어졌다.
발칸에서의 상황이 러시아 육군에 의해 교착상태에 빠지자 영국은 현상타파를 위해 러시아에 대한 공격 방향을 동아시아로 전환하여, 1854년 8월 29일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기습 공격하였다.
영국으로서는 우선 청국에서 태평양으로 이 어지는 해로상의 상선들을 남하하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했다.
따라서 동북아 시아 내 상존하는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동북쪽에 위치한 근거지부 터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영국이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공격한 주된 이유였다.22)
페트로파블롭스크는 태평양에서 북극해로 통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베링 해 협에 위치하였으며,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태 평양 연안에서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해군기지가 페트로파블롭스크였던 것이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동원해 러시아 육군과의 지루한 대결을 피하고 사태를 신속하게 매듭짓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목표는 청나라,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 리아의 해상항로를 러시아 해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그 방법으로 가능한 한 조속히 오호츠크해 연안과 캄차카반도 일대에 분산된 러시아의 근거지를 파괴하여, 러 시아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23)
이에 대해 러시아는 1854년 8월 중순까지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준비 를 완료하였다.
러시아 함대사령관 쟈보이카(Zavoika) 소장은 마리인스크(Мариинск),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 아얀(Аян), 페트로파블롭스크 등 네 개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놓았으며,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사전에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였 다.
8월 30일, 영국 피크(Pique)호의 발포로 페트로파블롭스크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하지 만 4개월 동안 남아메리카를 돌아온 영국과 프랑스 장병들의 피로는 축적되어 사기는 저하 된 상태였으며, 게다가 영국군의 수장인 프라이스 사령관이 자결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 하는 등 정상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4)
22) 최문형,『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79.
23) John J. Stephan, “The Crime War in the Far East,” Modern Asia Studies, Vol.3, No.3, 1969, p.257. https://www.jstor.org/stable/311951(접속일: 2024.1.23.).
24) 이에 대한 원인으로서 경성제대 교수 오쿠다이라 다케히코(奧平武彦)는 노령이었던 제독이 중대한 공격을 두고 정신착란에 빠져 일어난 일이라고 추정하였고, 스테판은 함대의 페트로파블롭스크 도착지연에 따른 작전 실패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최문형,『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84; John J. Stephan, “The Crime War in the Far East,” Modern Asia Studies, pp.263-265.
결국 영국-프랑스 연합군 은 상륙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9월 7일,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단념한 채 아바차(Avacha) 만에서 퇴각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동북아 거점인 페트로파블 롭스크의 공격에 실패한 영국은 이듬해인 1855년 3월 31일 다시금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미 철수한 뒤였으며, 영국-프랑스 해군의 해상 봉쇄계획 또한 사할린을 반도(半島)라고 오인한 연합군의 지리적 오판으로 인해 러시아 함대와 조우하고도 공격하지 못한 채 철수해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25)
1854년과 1855년 두 차례에 걸친 영국의 페트로파블롭스크 공격은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동아시아 내륙으로 철수하게끔 유도하였다.
그러나 영국군 내부에는 온전히 섬멸하지 못한 잠재적 적(敵)인 러시아에 대한 ‘더 깊은 공 포심(deep-seated fears)’이 확산되고 있었고, 이같은 두려움은 후에 제2차 아편전쟁의 동 인으로 나타나게 된다.26)
페트로파블롭스크 공격의 실패는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범위를 발칸으로부터 동아시아 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러시아군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대결 무대를 세바스토폴(Sebastopol)에서 동아시아와 오호츠크해, 동해로 넓혀 놓았다.27)
25) John J. Stephan, “The Crime War in the Far East,” pp.269-270.
26) 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p.93-95.
27) John J. Stephan, “The Crime War in the Far East,” p.257. 강정일 19세기 한반도 주변에서 전개된 그레이트 게임 65
당시 영국의 입장에 서는 동아시아에서 팽창하는 러시아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보다 먼저 동아시아의 중심인 청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자국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길밖에 없었다.
영국은 크림전쟁 이후 적극적인 동아시아 정책을 펼쳤으며, 러시아 또한 지정학적 장애물인 청국의 빗장이 풀리자,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Ⅲ.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1861)과 대한해협
1.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 원인
크림전쟁의 패배로 유럽 내에서 팽창이 저지된 러시아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관심을 전환 한 후 활발한 외교활동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청국과 러시아는 1858년에 아이훈 조약을, 1860년에는 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연해주라는 태평양지역의 교두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기후와 불모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러시아의 이주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원거리에 위치한 본토와 연결될 수 있는 부동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러시아는 186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고, 1872년에는 태평양함 대의 제1의 해군항으로 정하였으나 지리적 한계와 기후로 인해 그 역할은 제한되었다.
이 러한 사정으로 인해 러시아는 연해주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부동항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고, 태평양 연안의 타국 영토를 탐사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러시아는 러 ‧ 청조약 으로 인해 아무르강과 한반도 사이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28)
초기 러시아는 사할린과 대한해협 방향으로 해양진출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사할린은 국 경선이 정해진 후에도 일본과 분할하지 않고 양국이 공유하여 왕래가 자유로이 보장되었으 나, 1860년대 이후 러시아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1855년 시모다(Shimoda)조약으로 얻은 쿠릴열도(Kuril Islands) 를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남사할린과 교환함으로써 사할린 전체를 확보하여 전진기지로 이 용하려 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사할린 교환 이외에도 대한해협의 출구인 대마도(対馬島)를 점령하여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획 또한 수립하고 있었다.29)
남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교환은 러시아와 일본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계약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대륙으로의 진출을 도모할 수 있는 남사할린을 내어주고 도서로 이루어진 쿠릴 열도를 얻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환조건이었고, 러시아 또한 본래 자국의 영토 였던 남사할린이 아무르 지역의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30) 기대했던 만큼 해상로 로서의 활용도뿐만 아니라 경제․군사적 가치 또한 떨어진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함으로써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교환 계획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31)
당시 러시아 군부는 연해주를 기점으로 태평양으로 팽창할 수 있는 진출로의 거점을 확 보하는 것이 이후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자국의 지 리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러시아가 우선적으로 선점하고 확보해야 할 지역은 대한해 협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32)
28) 최문형,『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124.
29) David J. Dallin, The Rise of Russia in Asia, pp.26-27.
30) 김태항, “러·일영토분쟁의 연원-러시아 측의 시각을 중심으로,” 『중소연구』, 통권 85호, 2000, p.83.
31) 베니우코프(Veniukov) 대령은 보고서를 통해 “사할린에는 안전한 대피호가 될 만한 항구가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결핍으로 경제적 가치도 없다. 따라서 사할린은 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경우에도, 외적에 대해 공 격을 가하게 될 경우에도, 그리고 순양함의 발진기지로서도 거의 한결같이 쓸모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George A. Lensen, The Russian Push toward Japan: Russo-Japanese Relations, 1697-1875 (Princeton, 1957), pp.447-448. https://archive.org/details/russianpushtowar0000geor/page/n5/mode/2up(접속 일: 2024.2.18.); 韓國史硏究協議會, 『韓露關係 100年史』(서울: 韓國史硏究協議會, 1984), p.53.
32) Российскийй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рхив Военно-морского Флота, Фонд 410 Опись 2 Дело 2385 Листы 2; 홍웅호, “청일전쟁 이전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pp.106-107에서 재인용.
하지만 대마도 점령 계획은 본국의 재가를 얻지 못한 채 계류되다 계획이 작성된 지 2년이 지난 1861년 3월 13일에야 대마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대마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계획으로만 남아있던 대마도 점령계획이 시행될 수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국군함이 대마도 해안의 정찰을 완료했다는 군부의 보고가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영국이 대마도를 점거하려 할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영국이 지정학적 요충지인 대마도를 자국보다 먼저 선점함으로써 발칸지역에서처럼 해양으로의 진출이 좌절될 수 있다는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33)
영국의 대마도 점령 움직임이 보고되자 러시아는 즉각적으로 일본 정부 에 이를 통보하고 영국의 대마도 점령에 대비하여 일본에게 전투물자와 무기를 원조하겠다 는 제의까지 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해양국가로서 가치를 공유하고 있던 일본은 러시아의 제의를 거절하였고, 이에 영국이 대마도를 선점하기 전에 러시아가 먼저 대마도를 점령하 게 된 것이다.34)
33) George A. Lensen, The Russian Push toward Japan: Russo-Japanese Relations, 1697-1875, pp.448-450.
34) 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124.
35) George A. Lensen, The Russian Push toward Japan: Russo-Japanese Relations, 1697-1875, p.448.
유럽의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대치하였던 영국과 러시아가 이제는 동아시 아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대한해협의 대마도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2. 대마도와 대한해협의 지정학적 가치
대마도가 위치한 대한해협은 한반도와 일본 큐슈(九州)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넓은 해협 으로, 태평양 진출의 전진기지로 최적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진출하 여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35)
이에 러시아 군부는 대한해 협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소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대한해협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해협이 해양국가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감으로써 러시아가 태평양 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해상로와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러시아가 이제껏 동아시아와 태 평양지역에서 해군력 증강을 위해 시도하였던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 황이었다. 또한 러시아 군부가 대마도에 주목한 이유는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할 수 있는 핵 심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는 러시아 국경과 상하이로부터 725~805km, 나가사키로부터 242km, 부산에서 49.5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어 동아시아 전체의 중앙공간 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한반도, 태평양으로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대마도는 러시아 함대들이 해로상 중간 기착지로서 활용할 수도 있을 만 큼 휴식과 정비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 러시아 해군에게는 최적의 기항지였다.
이 러한 이유로 러시아 군부는 영국이 대마도를 장악하기 전에 러시아가 선제적으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지정학적 가치를 지닌 대마도와 대한해협은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유럽 열강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고 특히, 중국과 인도에 큰 영향력을 가 지고 있었던 영국에게 이 지역은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봉쇄 해야 하는 전략적 거점 같은 공간이었다.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은 자국을 봉쇄하려는 영국 의 선점을 막음으로써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영토의 일부를 점령당한 일본으로서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마도 점령으로 인해 일본 내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더 증폭되었고, 영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은 강경하게 러시아에 대 응할 수 있었다.
3. 결과: 해양국가 영국과 일본의 저지
러시아가 대마도를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 영사 고쉬케비치(Goshkevich)에게 항 의하는 한편 대마도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에 도움을 청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36)
주일 영국 총영사 엘콕 경(Sir Rutherford Alcock)과 아시아 함대 사령관 호프 경(Sir John Hope)은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와 회담을 한 후, 영국의 힘으로 사건을 해 결하고자 2척의 군함을 대동하고 대마도로 출항하였다.
1861년 8월 27일, 대마도에 도착 한 영국은 진형이 갖추어진 러시아 함대를 보고, 장기 점령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의중을 간 파하였다.
엘콕 경은 러시아에게 엄중하게 항의하는 한편 영국군함에게 전투태세 준비를 명령하였다.
이 같은 영국의 대응에 대마도 점령을 계획하고 실행한 당사자인 리하체프 (Likhachev) 제독도 어쩔 수 없이 대마도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를 장악하여 대 한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 했던 러시아는 9월 19일, 주력함인 포사드니크 (Possadnick)호를 철수시킴으로써 일본 영토 내에서 부동항을 얻으려 했던 야심 찬 계획 을 포기해야만 했다.
러시아는 대마도 점령 실패의 교훈을 통해, 일본의 부동항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같은 해양국가인 영국과의 대결 또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37)
36) Ibid, pp.448-450.
37) 韓國史硏究協議會, 『韓露關係 100年史』, p.56.
대마도 점령 사건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러시아를 자 국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사할린을 두고 분쟁이 끊 이질 않았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공러의식(恐露意識)’은 급속히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공포심은 거대한 영토를 가진 인접국 러시아의 이미지에서 오 는 것일 수 있겠지만 러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어 일 본에게 인식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38)
그러나 사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1860년부터 1870년대까지 러시아는 대외정책의 중심을 동아시아가 아닌 중앙아시아에 두고, 한창 팽창정책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 로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39)
Ⅳ.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과 러시아 봉쇄
1. 영국의 거문도 점령 과정과 원인
19세기 러시아의 팽창은 영국의 지정학적 이익과 충돌하는 것이기에 영국은 러시아를 봉쇄하고 전쟁을 대비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하는 러시아를 저지 할 만한 명분은 충분하지 않았다.
동유럽 지역은 러시아-터키전쟁 이후 베를린 회의로 인 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명분이 마련되었고, 중앙아시아 지역 또한 영국의 식민지인 인 도의 방위에 직결된다는 이유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지만 동아시 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청국으로부터 조차를 받은 홍콩이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 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명분은 없었다.
특히 러시아와 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청국이 중립을 선언하게 되면 청국 내 위치한 항구들의 사용이 어 렵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40)
38) 최문형,『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120.
39) 로스뚜노프외 전사연구소 편, 김종헌 옮김, 『러일전쟁사』(서울: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p.7.
40) Rose Rouise Greaves, Persia and Defense of India, 1884-1892 : A Study in the Foreign Policy of the Third Marquis of Salisbury (London: University of London, 1959), p.228. https://ia801400.us.archive.org/8/items/in.ernet.dli.2015.185439/2015.185439.Persia-And-The-Def ence-Of-India-1884---1892_text.pdf(접속일: 2024.2.6.);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러일전 쟁의 외교와 군사전략』(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p.123.
당시 유럽의 안보환경도 불투명하여 영국의 함선들은 흑해 로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터키와의 관계 또한 악화된 상태였다.
더욱이 독일이 중심이 된 3제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행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1884년 러시아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발생한 갑신정변41)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조·러밀약’ 체결(1885.3.5.)을 통해 조선이 러시아에 게 원산에 위치한 영흥만(일명 포트 라자레프)의 조차를 허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을 위시한 해양국가들은 이를 직접적인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결국 1885년 4월 15일, 영 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기 위해 한반도의 거문도를 불법점령하게 되었다.42)
거 문도 점령을 위한 영국의 첫 행보는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국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영 국은 거문도의 불법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가 거문도를 탈취하려 했으며, 영국함 대는 이 같은 러시아의 침략적 조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행동하고 있을 뿐”이라고 청국관리 들에게 영국의 정당함을 주장함과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공러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43)
다행히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런던 주재 청국공사 증기택(曾紀澤)이 영국의 제의를 받 아들이면서 1885년 4월 15일, 영국 해군성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공격을 위한 거점이자 요 충지인 거문도를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무단 점령할 수 있었다.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 이유에 대해 학계에서는 ‘조 ‧ 러밀약으로 인해 러시아의 한반도 내 부동항 획득 가능성이 제기되자 영국이 거문도를 선점하였다’는 보편적인 주장인 ‘조 ‧ 러밀약 원인론’과 이와는 반대로 ‘조 ‧ 러밀약의 영향과 관계없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충돌할 위기에 봉착하자 이를 타개하고 러시아의 관심을 동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는 ‘판데(Panjdeh)사태 연관론’으로 나뉘어 주장하고 있다.44)
41)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조선의 개화정책 추진, 반청 외교 등을 목표로, 1884년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청 나라의 군사 개입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대 한 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어, 고종은 러시아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밀약’을 추진하게 된다. 갑신정 변은 청으로부터 조선의 주권 독립과 근대적 독립국가를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 될 수 있으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42) George A. Lensen, The Russian Push toward Japan: Russo-Japanese Relations, 1697-1875, p.55 ; 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p.197.
43) Andrew Malozemoff,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 With Special Emphasis on the Causes of the Russo-Japanese War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p.57. 각주 90번.
44) 조 ‧ 러밀약 원인론에 관해서는 전홍찬(2023), 김원수의 논문, 조 ‧ 러밀약과 관계없는 판데사태 연관론 등의 주장 은 김용구의 책과 한동훈(2023), 김영정, 최덕규(2015)의 논문 등을 참고할 것. 김원수,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과 한러관계의 지정학,” 『서양사학연구』, 제 30집, 2014, pp.43-69.; 김용구,『거문도와 블라디보 스토크: 19세기 한반도의 파행적 세계화 과정』(서울: 서강대학교 출판부, 2009); Young-Chung Kim, “Great Britain and Korea 1883-1887,” Indiana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1964.
두 주 장 모두 거문도 사건의 발생과 대응, 조 ‧ 러밀약의 인지 시점, 아프가니스탄 문제해결과 거 문도 철수 시점 등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사실은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 한반도 인근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 요충지를 두고 발생한 영국과 러시아의 충돌은 거문도 점령(1885) 이전에도 꾸준 히 지속되어 왔으며 영국의 크림전쟁 간 동아시아 캄차카반도 공격(1854), 러시아의 대마 도 점령(1861)에 대한 영국의 저지 등 <표 2>와 같이 지속적인 지정학적 충돌로 설명할 수 있다.
즉, 19세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사건의 원 인(遠因) 또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해양국가 영국과 대륙국가 러시아가 패권을 두고 범 세계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여 대립을 지속하다가 한 반도 인근 연안에서 여러 차례 충돌한 사건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표 2> 1854-1885년 영국과 러시아 주요 사건 일지 : * 출처: 직접 작성.: 생략(첨부 논문파일참조)
2. 거문도의 지정학적 가치와 중요성
지정학적으로 거문도는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태평양으로 향하는 해로상에 위치 한 관문이자, 유사시 대만해협을 통해 외해로 출항하는 전함을 제어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 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주변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며 블라디보스토크을 출발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항로는 두 가지로, 사할린과 러시아 대륙사이의 타타르 해협과 사할린과 훗카이도 사이 라페루즈 해협(또는 소야 해협, 宗谷海峡)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 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동절기인 4개월 동안 결빙되어 해상교통로로서 제 역할을 원활히 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인도 총독 블랙우드(D.A. Blackwood)는 거문도 점령을 “개의 목을 조름으로써 개가 물고 있는 뼈다귀를 떨어뜨리도록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였 다.45)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전통적인 전략으로 러시아를 봉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서 러시아의 변수만큼 중요한 동인은 경제적 이익이었다.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 후 청국을 개방시킴으로써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청국 의 반발에 의해 여의치 않았고, 1860년 애로우호 사건을 빌미로 북경조약을 맺음으로써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과열된 경쟁으 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경제공항에 봉착하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새로운 시 장의 개척을 위해 다시금 경쟁에 돌입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제공항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 기 시작한 지역이 동아시아였고, 청국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할 동기를 새로이 가지게 되었다.46)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거문도는 영국에게 있어 동아시아의 시장을 활용할 수 있는 교두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거문도는 블라디보 스토크에 위치한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견제하면서 청국, 일본, 조선의 동아시아 시장과 생 산품 공급지인 홍콩과 싱가포르의 중간 기착지로서 상품창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제·군사 적 요충지였다.
3개의 조그만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거문도는 섬 사이의 바다가 넓고 잔잔 하여 천연적인 항구로 적합했다.
거문도는 한반도 남단의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 한 면적 12㎢의 다도해 최남단 작은 섬으로, 대한해협 중간에 위치한다.
거문도는 대한해 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경유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대한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이 가능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거문도는 한반도의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여 동해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 하는 러시아 함대와 서해의 여순과 대련에서 남하하는 위협까지 동시에 차단할 수 있는 전 략적 요충지이자 군사적 거점이었다.47)
더욱이 거문도는 부산으로부터 197km, 대마도에 서는 168km, 나가사키에서는 257㎞, 상하이에서는 482㎞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경제적 으로도 영국의 동아시아 거점지인 홍콩의 단점을 보완하고, 중국과 일본, 한반도의 주요 항 구들과 적은 비용으로 교역할 수 있는 상업적 거점으로도 활용이 가능하였다48).
45) Rose Louise Greaves, Persia and the Defense of India, 1884-1892: A Study in the Foreign Policy of the Third Marquis of Salisbury (London: University of Lomdon, 1959), p.228.
46) 한편 포트 해밀턴 점령과 관계가 있던 1877년부터 1887년 사이를 보면 중국을 오가는 수출입 외국선박의 절대 다수가 아직은 영국 상인들이 소유로 되어 있었다. 王紹坊 저, 한인희 옮김, 『중국외교사: 1840-1911』(서울: 지 영사, 1996), p.185.
47) 김원수,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과 한러관계의 지정학,” p.50.
48) 홍콩은 남쪽에 위치하여 있어 동북아시아에서의 전략적인 활동을 하는 데 제한이 있었고. 특히, 태풍이 오면 이 동이 더욱 곤란해졌다. Extract from Report of Royal Commission on Defence of British Possessions, 20 May 1885, F. O. 405/35, Inclosure, No.29.
거문도는 영국에게 있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한반도와 대한해협에 대한 영향력 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는 동아시아 정책의 새로운 근거지였던 것이다.
3. 결과: 대륙국가 러시아와 중국의 저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당시 조선은 정부유사당상(政府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협 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Möllendorff)를 거문도로 파견하여 관측선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의 영국 함장인 맥클리어(Maclear) 대령에게 매우 강경하게 항 의하였다.49)
그러나 맥클리어 대령은 “나는 다만 상관의 명령을 따를 뿐이고, 자세한 것은 일본에 있는 도웰(William Dowell) 중장에게 문의하시오”라고 변명하였다.50)
결국 4월 18일,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는 나가사키에서 정박 중이었던 도웰 함대사령관을 만나 거문도 점령에 대한 항의 문서를 전달했고, 도웰은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오코너((Nicholas Roderick O’Conor)을 통해 조선 정부가 거문도 점령에 대해 항의한 사실을 영국 정부에 게 보고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단순한 문제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 공략을 비롯한 러시아의 견제에 있음을 인식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에 의한 거문도 점 령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단순한 사건이 아닌,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충돌 을 준비되지 않고 취약했던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하여 러시아의 국익을 위협하고 침해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1855년 크림전쟁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해군 전력으로 캄차카반도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롭스크항을 공격하였으며, 러시아-터키전쟁(1877-1878) 시에도 러시아와 대립하여 전쟁 위기 직전에 이를 정도로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하 였다.
당시 영국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적 목표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청국과 일본의 항구를 발판으로 러시아 극동함대의 주항인 블라디 보스토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51)
49)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구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회,『구한국외교문서 영안 1-2』(서울: 高麗大學校 出版部, 1968), p.1, pp. 215-216.
50) 김종헌, “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했나?,” 「내일을 여는 역사」, Vol. 26, 2006, p.147.
51) 강성학,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러일전쟁의 외교와 군사전략』, p.184.
러시아 정부는 거문도 점령 사건이 발생하자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Карл Вебер) 에게 4월 25일 비밀훈령을 하달하여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응할 것을 지시하였다.
러시 아는 블라디보스토크항에 기뢰를 설치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외교적으로 영국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러시아 언론 또한 일제히 영국을 비난하며 한반도 내 부동 항 한 곳을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유력 매체「루스키 베 스트니크(Русский вестник)」는 러시아가 영국에 강력히 대응해야 하며 “러시아가 흑 해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해에서도 저지당하지 않으려면 결단력 있는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 다.
한반도가 어느 특정 열강의 손에 들어간다면 이는 러시아에 지속적인 위협이 될 것”이 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52)
러시아는 영국이 거문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경우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이제까지 동아 시아에 투자한 노력과 비용을 한 번에 잃을 수 있으며, 만주와 연해주 또한 열강들의 지속 적인 위협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중앙아시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전쟁 위기는 1885년 5월 2일을 기점 으로 벗어나기는 하였지만 거문도와 관련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85년 5월 18 일 주청 러시아 공사는 ‘청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승인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의 항구 중 한 곳을 점유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며 청국을 압박하였다.
같은 날, 도쿄에 주재하던 다 비도프는 영국의 거문도 점유를 막기 위해 다시 한번 스페이에르(A.N. Sheire)를 조선에 파견하여 ‘거문도를 영국에 매각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53) 러시아가 군사 고문단 을 조선에 파견할 준비를 완료했음을 조선 정부에 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4)
그러나 러시 아의 군사 고문단 파견은 김윤식을 포함한 조선의 수구파에 의해 저지되었다.
스페이에르 는 군사 고문단 파견은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영국의 거문도 점유 문제에 대해서 강경한 입 장을 전하였다.
러시아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할 의도가 없다.
하지만 영국이 거문도를 점 유할 경우, 러시아는 조선의 항구 중 한 곳을 점유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 어 러시아는 영국에 거문도를 판매하거나 자발적으로 양도함으로써 조선 정부가 입게 될 치명적인 피해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 경고했다.55)
52) Цит. по: Русский вестник, 1885, T. 177, Июнь; Б. Д. Пак. Россия и Корея, Москва, ИВ РАН. (2004), С. 153;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러시아와 한국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0), p.297.
53)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3), p.321.
54) Докладная записка Н. К. Гирса от 10 (22) мая 1885 г.//АВПРИ, Фонд “СПб. Главный архив, 1-9”, Опись 8, 1885-1888 гг, Дело 7, Лист 8; Б. Д. Пак, Россия и Корея, С. 153; 박 보리스 드미 트리예비치, 러시아와 한국, p.298.
55) А. Л. Нарочницкий, Колониальная политика капиталистических держав на Дальнем В остоке, С. 385; Б. Д. Пак. Россия и Корея, С. 158;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러시아와 한국, p.307.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조선과 러시아 간의 교섭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 또한 거문도 철군에 관한 교섭을 청국에게 위임한 상태였으므로 러시아는 청국과 합 의하기로 하였다.
당시 청국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러시아의 견제로 받아들였고 이를 통 해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 었다.
청국의 이홍장은 1886년 9월 주청 대리공사인 러시아 라디젠스키(Ladygensky)와 천진에서 교섭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라디젠스키는 조선의 현상유지와 영토보전를 요구 하였으며, 영국이 거문도로부터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원산항을 포함한 한반도 내 어떠한 부동항도 점령치 않겠다고 이홍장에게 제의하였다.
9월 31일, 라데젠스키는 이홍장에게 3 개의 조항으로 작성된 협약의 초안을 제시하였으나56), 청국은 조선이 자국의 종속국임을 보장받길 원했다.
결국, 양국은 ‘조선의 영토 보전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즉, ‘러시아는 조선에서 보호 통치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청국도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 라는 정도에서 구두 협약의 형식으로 교섭을 종결지었다.57)
56) 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청국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조약에 보장되어 있는 것처 럼 국제관계에서 조선의 지위를 인정한다. ② 조선의 영토보전을 존중한다. ③ 조선의 정치체제는 오직 러청의 협의를 통해서만 변경될 수 있다. Andrew Malozemoff,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 With Special Emphasis on the Causes of the Russo-Japanese War, p.32.
57) Michael J. Seth,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 p.225.; 김용구, 세계외교사, p.322.
일명 ‘이홍장-라디젠스키 협정’ 이 마무리되자 이홍장은 11월 19일 청국 주재 영국 공사 윌샴 경(Sir John Walsham)에게 영국의 전제조건이었던 거문도의 ‘양도불허’가 합의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고, 영국 은 청국의 약속을 확인한 뒤 1887년 2월 27일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Ⅴ. 결 론
19세기 당시의 패권국가이자 해양국가인 영국은 세계 각지의 주요 거점들을 선점하여 안정적인 자원의 확보와 해상무역을 공고히 구축하기 위해 해안 기지와 교역의 안정성이 필요하였고, 도전국의 위치에 있었던 러시아는 폐쇄적인 대륙의 영역을 벗어나 국가 성장 의 활로를 마련하고 영토적 팽창을 위해 해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유럽과 중앙아시 아를 넘어 동아시아의 대마도와 거문도에서 발생한 그레이트 게임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 력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해양국가 영국과 대륙국가 러시아의 범(凡)세계적 대결이 유럽이 아닌 한반도 인근의 제해권을 놓고 전개된 새로운 현상이었다.
또한 당시 크림반도를 포함 한 유럽 전역에서 러시아와 충돌하고 있었던 패권국 영국이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팽창을 시도하던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취한 예방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마도와 거문도 사건은 당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한반도 주변의 해상 지배권이 영국과 러시아에게 얼마나 민감한 사안이었으며, 또한 유럽과 원거리에 위치한 지정학적 공간에서의 충돌이 얼마나 첨예한 국제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단 적인 사례였다.
매킨더의 이론에 따르면 한반도와 인근 해역은 연변의 초승달지대(inner crescent)의 공간 즉, 스파이크만의 림랜드(rimland) 지역으로서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지역을 지배하고 유라시아 지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고 지목한 요 충지이다.
따라서 <표 3>과 같이 지정학적 가치를 지닌 한반도 인근 해역은 영국과 러시아 에게 어느 일방이 단독으로 점령해서는 안 되는 핵심적 이익이었던 것이다.
<표 3> 한반도 인근 영국과 러시아의 핵심 이익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동아시아로 이어진 그레이트 게임은 당사국인 영국과 러시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 마도와 거문도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 특히, 한반도나 일본 방향으 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열강으로서 동아시아 문제에 주도권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관여할 기회를 상실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러시아 또한 두 사건을 겪으 면서 태평양으로 상시 진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부동항을 구비하지 못한 채 동아시아 지 역의 해상 어디에서든 영국에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영국함대와 청국의 북양함대보다 열세한 자국 해군의 현실을 직시하고 동북아지역에서의 전력차를 극 복하기 위해 해군을 축소시키는 반면 새로운 지상전력에 의존하는 방어정책을 채택하였 다.58)
58) Andrew Malozemoff,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 With Special Emphasis on the Causes of the Russo-Japanese War, pp.33-34.
이러한 결정은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 중국에도 영향을 미쳐, 이 두 사건을 거치면 서 일본은 영국과 밀월관계를 형성하며 국력을 신장시켜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으 며, 청국은 외세의 간섭을 피해 한반도의 국내 ‧ 외적 문제에 주도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입 지를 공고히 하면서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를 넘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전쟁의 주체 또한 변모하였지만 21세기 현재 크림 반도에서는 지정학적 충돌이 다시금 발생하여 1854년의 크림전쟁과 같은 러시아-우크라이 나 전쟁이 진행 중이다.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종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러시아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간의 첨예한 지정학적 대결이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의 변화는 유동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크림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지정학적 대결은 한정된 역내지역을 벗어나 가치공유를 바탕으로 한 양 진영 간의 연대와 결속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인도․태평양지역과 유럽 국가 간의 안보 연대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으며, 반대편에선 북한을 포함한 친(親)러시아 국가 간의 협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 실이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북한과 러시아의 밀월관계는 최근 더욱 공 고해지고 있다.
양국은 2024년 6월 19일 북․러정상회담 이후 ‘유사시 자동군사개입 조항’ 내용이 포함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북 ‧ 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 맹관계를 복원하였고,59) 북한은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하는 등 러시아 편에 서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가하고 있다.
59) 조약 제4조에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 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1996년 폐기 되었던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조·소 동맹조약)’의 ‘유사시 자동군사개입 조항’과 유사 수준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이렇듯 지정학적 충돌이라 할 수 있는 러 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치를 공유한 진영 간의 충돌로 확장되면서 군사영역을 포함한 복합적 안보위협이 범(凡)세계적 차원으로 파급되어지고 있다.
더구나 북한이 러시아-우크 라이나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그 전장의 범위가 우리나라와 인근 지역까지 확대되어 한반도 의 안보 위기 또한 국제질서의 양극화 속에서 점증되고 있는 상황이다.
강대국들의 국가이익과 이해관계가 중첩되어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남한과 북한이 분단 되어 반목하고 대치하는 충돌의 공간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주변국인 한·미·일과 북·중·러 또한 미중 패권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이원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경쟁과 대립 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더욱이 한반도 인근 지역은 중국과 대만의 대립, 중국해를 둘러싼 인근 국가 간의 첨예한 해상·영토분쟁 등 끊이지 않는 충돌로 인해 군사적 위험이 상존하 는 불안정한 환경에 처해 있다.
이에 우리는 앞서 살펴본 과거 역사의 사례를 거울삼아 우 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과 장소에서 발생한 분쟁의 불씨가 언제든 한반도 인근 지역까 지 옮겨올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한반도는 역사적·지정학적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분쟁의 공간으로 유지되어 왔음을 반 드시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경험들을 과거에 발생한 사건으로만 인식하지 말고, 한반도 인근에서 언제든 다시 재현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여 한반도와 태평 양지역의 안보환경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대비해야 한다.
또한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 나 전쟁 참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연계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동시에, 한반 도의 지정학적 가치와 중요성을 부각하고 증대시켜 나감으로써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실질적인 국익으로 환원해 나갈 수 있는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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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Great Game around the Korean Peninsula in the 19th Century - Centered on the geopolitical conflict between Britain and Russia -
Kang, Jung-Il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Korea Military Academ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why the hegemonic power, Britain and the challenger, Russia who clashed in Europe and Central Asia in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expanded their front lines to East Asia and competed for maritime dominance around the Kamchatka Peninsula, Tsushima Island, and Geomun Island. Additionally this paper seeks to prove the strategic value and importance of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Korean Strait by analyzing the root cause of the conflict from a geopolitical perspective. According to the study, the Great Game, which occurred near the Korean Peninsula, was a preventive war chosen by Britain, the hegemonic power not traditionally associated with East Asia, to stop Russia, the challenger who was seeking a new breakthrough. The control of the seas around the Korean Peninsula was a key interest for both nations, as it was essential to securing dominance in the Pacific Ocean and achieving maritime hegemony.
Key Words: Tsushima, Geomun Island, Korean Strait, Great Game, Geopolitics
논 문 접 수 일: 2024.10.07 논 문 심 사 일: 2024.11.17 논 문 수정일: 2024.12.08 논문게재확정일: 2024.12.23
한국군사제16호(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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