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생존경쟁, 헤켈의 진화론과 라첼의 레벤스라움
III. 메이지 시대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의 일본 유입과 형성 과정: 칠박사 사건 이전 시대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IV. 칠박사 집단의 개전론에 투영된 영토 팽창 논리
V. 맺음말
I.머리말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1903년 6월 24일,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학부 교수 도미즈 히론도(戸水寛人), 오노즈카 기헤이지(小野塚喜平次), 다카하시 사쿠에(高橋作衛), 가나이 노부루 (金井延), 도미이 마사아키라(富井政章), 데라오 도루(寺尾亨)와 가쿠슈인대학 (學習院大學) 교수 나카무라 신고(中村進午)는 지난 6월 10일 정부에 제출했던 대러시아 정책에 대한 건의서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 게재하 였다.
이들 중 도미즈를 필두로 한 급진파의 여론몰이로 인해 1903년 10월 개 전론이 주류가 됨으로써, 소위 ‘칠박사 사건(七博士事件)’은 러일전쟁 발발에 큰 역할을 하였다.1
현재까지 이 사건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학자의 정치적 자율성, 이들의 여론전 이 전쟁 개시에 끼친 영향, 그리고 사건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오고 있다.2
한편으로 이들이 주장한 개전론의 내용에 대해서는 박양신(朴羊信)이 잘 정리해놓았다.
그는 칠박사 집단이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과 경제 확장을 위해 전쟁을 주장했으며, 전쟁을 선악의 가치 판단이 아닌 나라의 발전과 일본의 자 위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했다고 설명하였다.3
1 宮武実知子, 2007, 「「帝大七博士事件」をめぐる輿論と世論: メディアと学者の相 利共生の事例として」, 『マス·コミュニケーション研究』 70, 177~173쪽; 前原淳史, 2018, 「「七博士事件」の再検討: 「金井延日記」を中心として」, 『社会科学』 48(2), 278~279쪽.
2 宮武実知子, 2007, 위의 글; 前原淳史, 2018, 위의 글.
3 朴羊信, 1998, 「「七博士」と日露開戰論」, 『北大法学論集』 48(5), 964~970, 973~976쪽.
이는 동시대 일본 지식인의 대외 관과 러일전쟁의 상관성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러한 사고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어디서 끌어왔는지 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박양신은 영국에서 유학한 다카하시가 국 제법 이론과 마한(Alfred Mahan)의 해양력에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하였으나, 이들이 주장한 전쟁을 통한 영토 팽창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론과 유사한지는 제 시하지 않았다.4
칠박사 사건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천황과 도쿄대 1』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전쟁 도중 바이칼 박사로 불렸던 이 사건의 주동자인 도미즈의 팽창론이 라첼(Friedrich Ratzel)의 ‘레벤스라움 (Lebensraum)’과 흡사하다고 제시하였다.5
그러나 그는 도미즈의 주장이 어떻 게 구체적으로 레벤스라움 개념과 유사한지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은 시도하지 않았다. 라첼은 다윈(Charels Darwin)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 을 주장한 헤켈(Ernst Haeckel)의 제자로 진화론의 영역을 지리학으로 확장시 킨 인물이었다.
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 6 을 “공간을 위한 투쟁” 으로 정의하였다.
4 朴羊信, 1998, 위의 글, 978~979쪽.
5 다치바다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2008, 『천황과 도쿄대』 1, 청어람미디어, 364쪽.
6 영어 ‘struggle for existence’와 독일어 ‘Kampf ums Dasein’의 올바른 번역어는 ‘생존투쟁’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이를 ‘生存競爭’이라 번역했기 때문에 이 글 에서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생존경쟁’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그리고 생존경쟁을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 승리한 집단이 레벤 스라움(생활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개념을 국제정치학 에 적용한다면 레벤스라움은 생존을 위해 팽창하는 국가가 타국과의 전쟁을 통 해 확보한 영토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벤스라움은 일본에서 ‘생존권(生 存圈)’이라고 번역되어왔다.
그런데 칠박사 집단의 건의서와 이들이 전쟁 전과 도중에 발표한 글에는 ‘생존’이라는 단어는 발견되지만 ‘생존권’이란 단어는 발 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점, 그리고 독일 유학파인 오노즈카가 1903년에 출간한 『정치학대강(政治学大 綱)』의 참고문헌에 라첼의 『정치지리학(Politische Geographie)』이 수록되어 있 는 점을 고려할 때,7 라첼의 이론을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있다.8
7 小野塚喜平次, 1903a, 『政治学大綱』 上, 東京: 博文館.
8 藏原惟昶 編, 1903, 「滿州問題エ關する七博士の意見書」, 『日露開戰論纂』, 東 京: 東京國文社.
비록 생존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일본이 생존을 위해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라첼의 레벤스라움 개념과 매우 유 사하다.
이 이유는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라첼은 레벤스라움이라는 단어를 1897년에 발표한 「레벤스라움에 대 하여: 생물지리학적 스케치(“Ueber den Lebensraum. Eine biogeographische Skizze”)」에서 처음으로 제시하였지만 이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은 『레벤 스라움: 생물지리학적 연구( Der Lebensraum: Eine biographische Studie)』가 출간된 1901년이었다.
오노즈카가 1901년에 귀국했기 때문에 이 책을 입수하 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프랑스법 전공자였던 도미이를 제외한 다른 박사들 역시 오노즈카와 마찬가지로 라첼이 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식민지 확보를 통한 과잉 인구 의 해결을 역설하기 시작한 1880년대 중반 이후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따라서 이들 역시 라첼의 이론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오노즈카를 제외한 다른 박사들이 라첼에 대해 몰랐을지라도 이들 역 시 당시 독일 정부가 추진한 세계정책(Weltpolitik), 그리고 독일인들의 식민지 획득과 지리적 팽창에 대한 열망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칠 박사 집단이 제시한 러일전쟁 개전 논리에 내포된 독일식 집단주의적 사회진화 론의 측면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처음 접한 곳은 독일이 아니라 일 본이었다.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진화론은 개인 간의 자 유 경쟁과 국가 간섭의 최소화를 강조한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이론이 아 닌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를 통해 유입된 헤켈의 진화론이었다.
따라서 일본 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는 칠박사 집단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 회진화론의 기본 원리가 어떻게 일본에 유입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내 연구자들은 가토의 국가주의적 진화론에 대한 헤켈의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해 간접 인용에 그침으로써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이 일본 에서 어떻게 메이지 시대 권위주의적 정부 체제의 확립과 팽창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은 부족한 실정이다.9
9 김도형, 2014,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진화론수용 이해-「疑堂備忘」 독해를 중심으로」, 『日本思想』 27.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헤켈을 중심으로 하여 다윈 진화론의 독일 유입 과 정과 라첼의 레벤스라움이 내포한 사회진화론적 함의를 논의할 것이다.
그다음 으로 일본에 진화론을 최초로 소개한 에드워드 모스(Edward Morse)의 이론과 가토가 제시한 사화진화론의 특징, 그리고 그의 이론이 반영하는 시대적 상황과 의 연관성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첼의 영토 팽창 이론과 칠박사 집단 이 제시한 개전 논리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박양 신이 주장한 것처럼 일본 사회진화론자들의 이론에 나타나는 비윤리적 측면, 일 본 사회에 국민의 통합과 계층의 위계화를 강조한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의 확 산 과정, 칠박사의 전쟁론에 내포된 국가의 생존을 위한 영토 팽창에 대한 이해 와 함께 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전쟁을 생존 수단으로 간주했는지에 대 한 원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II.생존경쟁, 헤켈의 진화론과 라첼의 레벤스라움
1844년 바덴 대공국의 수도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난 라첼은 하이델베르크대학, 예나대학, 베를린대학에서 동물학을 수학한 후 1868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시기 라첼은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예나대학 시절 스 승 중 한 명인 헤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어떻게 무기체가 유기체로 진화하는지 에 대해 연구하였다.10
그리고 그는 1870년대에 진화론을 지리학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윈과 헤켈이 주장한 진화론, 그중에서도 ‘생존경쟁’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실제 이 개념을 최초로 구체화한 사람은 다윈이 아닌 맬서스(Thomas Malthus)였다. 맬서스는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 서 기독교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이 자연계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닌 다른 유 기체와 같은 자연 법칙에 따라 생존하는 존재로 규정하였다.11
한편으로 맬서스 는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거부하였다.
그에 따르면 동물과 식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후손들을 증가시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12
맬서스는 지구는 늘어나는 개체군에게 무한한 공간과 자원, 그중 특히 식량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 였다.
따라서 그는 식물과 동물의 경우 자원의 한계에 의해 약한 개체군이 제거 됨으로써 적정수를 유지하며, 인간의 경우 질병, 전쟁, 기아 등을 통해 인구의 균형이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13
10 F. Ratzel, 1869, Sein und Werden der organischen Welt: Eine populdre Schipfungsgeschichte, Leipzig: Gebhardt und Reisland, pp. 83~89.
11 김호연, 2009, 『우생학, 유전자 정치의 역사』, 아침이슬, 46~47쪽.
12 T. Malthus, 1993(1802),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2nd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 18.
13 T. R. Malthus, 1993(1802), 위의 책, pp. 14~17.
한편으로 맬서스는 인간 사회가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 부족에 빠졌을 때 이주를 통해 다른 집단과의 전쟁을 통한 생존경쟁을 벌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강한 집단이 새로운 공간 을 확보하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법칙으로 본 것이다.14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1838년 10월에 접하였는데 맬서스의 생존경 쟁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15 다윈은 맬서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자연계의 일원이라고 보고, 맬서스가 인간 사회에 한정해 설명했던 생존경쟁을 자연계 전체에 적용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생존 경쟁에 의한 종의 자연선택 과정을 『종의 기원(On the Origins of Species)』 제 3장 「Struggle for Existence」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이 장에서 맬서스를 언급하며 모든 유기체는 물리적 생활 조건 내에서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생존경쟁이 일어날 수밖 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윈은 생존경쟁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특히 동 일한 식량을 두고 경쟁하는 생물종 간에서, 또 종 내 개체군 사이에서 강하게 일 어난다고 하였다.
그는 종들의 개체군 증가를 저지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는 불분 명하다고 서술하였으나, 기후 변화를 포함한 생활 조건의 변화가 가장 큰 역할 을 한다고 추측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존에 더욱 유리한 종 이나 개체군이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는다고 제시하였으며, 자연 상태에서 생 물종은 수많은 변이를 일으키고, 그중 생존경쟁에 유리하게 개량된 변이가 유전 되면서 종의 진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하였다.16
14 T. R. Malthus, 1993(1802), 위의 책, pp. 25~27.
15 N. Barlow ed., 1958,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New York: W·W·Norton & Company·INC, p. 120.
16 C. Darwin, 1859, On the Origins of Species, London: John Murray, Albermale Street, pp. 63~79, 433.
하지만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은 맬서스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맬서스 는 과잉 인구에 의해 발생하는 생존경쟁을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전쟁과 기아 의 원인으로 판단하였다.
또 타 집단과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집단도 역시 기 하급수적인 인구의 증가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다윈은 생 존경쟁에 의해 자연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종들이 가지고 있는 생존에 불리한 형질들이 제거된다고 추측하였다.
영국에서 다윈의 이론에 대한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던 1860년대, 독일의 일부 젊은 지식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열렬히 수용하였다.
당시 독일의 다윈 추종자들은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통일과 구체제의 개혁을 위해 발발한 1848년 혁명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귀족층과 교 회의 반대로 실패한 이후인 반동의 시대에 청소년기를 거친 인물들이었다.
혁명 의 실패를 경험한 이들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계몽주의의 기 본 원칙을 거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에 개입하 고 있던 교회, 그중에서도 특히 통일에 반대하던 가톨릭에 대해 부정적이 었다.17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중 일부는 인간이 기독교의 신이 창조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동물과 같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존재라는 다윈의 진화론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학자가 바로 1834년 2월 프로 이센의 포츠담에서 태어난 헤켈이었다.
독일 통일을 지지하던 상층 중간계급 자유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헤켈은 1850년대 중반 과학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의 반과학적인 종교관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으며, 1860년대 초반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였다.18
17 W. Smith, 1991, Politics and the Science of Culture in German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 91~94.
18 R. Richards, 2008, The Tragic Sense of Life: Ernst Haeckel and the Struggle over Evolutionary Thought,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44~49.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인간계에 적용 하는 것에 주저했던 반면 헤켈은 1863년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에 의해 사회 가 ‘진보(progress)’하여 ‘시민사회’에 도달하는 것이 자연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는 점이다.19
19 R. Weikart, 1993, “The Origin of Social Darwinism in Germany, 1859 - 1895”,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 54(3), p. 473.
그는 인간 사회 역시 자연 법칙에 의해 운영되므로 자연계에서 단 순한 하등 생명체가 복잡한 고등 생명체로 진화하듯 인간 사회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진화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정점이 시민사회라 주장하 였는데 이는 바로 그의 정치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헤켈의 진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생물학적·자연과학적 배경 지 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의 정치적 입장과 연결되는 분야만 검토해 보겠다.
인간 사회의 진화와 관련한 헤켈의 진화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1867년에 창당한 독일국가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지지자였음을 알 필요가 있다.20
당시 국가의 통합과 자유를 강조했던 독일국가자유당은 크게 두 가지 분파로 구성되었다.
그중 우파는 자유와 문화적 진보를 위한 선결 조건이 국가의 권위주의적인 권력이라 주장하였으며, 좌파는 시민의 자유와 의회 권력 이라 판단하였다.21
그중 헤켈은 우파로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권 위주의적인 통치와 민족(volk)의 통합을 지지하였다.
헤켈은 무자비한 “생존을 위한 경쟁”이 자연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소수의 선택된 개체만 이 경쟁을 성공적으로 견뎌낼 수 있고, 대다수의 경쟁자 들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받고 멸망할 것이라 주장하였다.22
20 R. Weikart, 1993, 위의 글, p. 473.
21 P. Otto, 2014, Bismarck and the Development of Germany, Volume II.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167.
22 E. Haeckel, 1908(1878), Freie Wissenschaft und freie Lehre Eine Entgegnung auf Rudolf Virchow’s Munchener Rede uber “Die Freiheit der Wissenschaft im modernen Staat”, Leipzig: Alfred Kröner Verlag, p. 67.
그런데 그는 종 내 또는 집단 내에서 각각의 개체가 벌이고 있는 생존경쟁에 의해 어떻게 부적응한 개체가 제거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은 산업혁명에 의 한 도시화가 진전되고 계급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계급 분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노동의 분화(Arbeitsteilung)를 진화의 추동력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노동의 분화가 집단 내 계급의 분화를 수반하는데 계급 간의 협력이 하등한 낮 은 단계에서 고등한 높은 단계로 진화하는 데 필수적이며, 이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생물계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포의 경우 진 화 과정에서 핵, 체, 막으로 분화되는데 각각의 구성체는 각자 다른 역할을 하지 만 세포의 생존을 위해 유기적으로 연관된다.
따라서 생명체가 진화할수록 각자 의 역할을 하는 구성체의 분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생물이 진화할수록 기능적 으로 분화된 노동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집중화된다는 것이다.23
헤켈은 인간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불평등한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유기체 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였다.
그는 세포를 질서 있는 문화국가에서 법을 준수 하는 시민들로 비유하고, 시민사회는 분업을 통해 진보한다고 판단하였다. 식 물의 경우 세포가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물의 경우 세포가 위계 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 헤켈은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였다.
즉, “조직 (tissues)”에서 형성된 “기관(organs)”은 국가의 “부서(departments)” 및 “기관 (institutions)”과 같고, “중앙정부(central government)”의 “통치(rule)”는 “뇌 의 신경 중심 권력(the power of the brain as nerve centre)”과 비교할 수 있다 고 강조하였다.24
헤켈은 기본적으로 높은 문화에 도달한 국가가 “aristokratische”25에 의 해 운영된다고 주장하였다.
23 E. Haeckel, trans by E. Lankerster, 1880(1868), The History of Creation (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 Vol. I, York: D. Appleton and Company, pp. 187~188, 284.
24 P. Weindling, 1981, “Theories of the Cell State in Imperial Germany”, In C. Webster(ed.), Biology, Medicine and Society 1840-194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119.
25 E. Haeckel, 1908(1878), 앞의 책 p. 68.
이 단어는 “귀족제”로 번역되나 혈통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 그는 당 시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토지귀족이었던 융커(Junker)를 증오하였다.
헤켈은 1866년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를 채택한 융커 출신 비스마르크를 맹비난하였지만, 민족주의의 고양, 중간계급 이익의 보장, 권위주의적인 국가 운영을 추구하던 비스마르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 었다.26
또한 그는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닌 사회를 노동의 분화가 고도화된 산업사회 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곧 산업사회를 지도하는 계층이 과학자, 기술자, 지식인 과 같은 상층 중간계급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헤켈은 이들의 능력이 산업사회 라고 적합한 유전형질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곧 유전적으로 선택 된 엘리트들이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7
헤켈은 각 개인은 불평등한 존재이며 시민사회 모든 구성원의 권리, 의무, 재산, 권력이 동등하지 않은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각 구성원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 해 자신의 지위에 따라 국가라는 유기체의 운영을 위한 역할을 기능적으로 담당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28
따라서 헤켈은 계몽주의의 자유의지(free will)와 민 주주의를 거부하였으며, 공동체의 유대와 사회를 위한 개인의 의무를 강조하 였다.
이 지점에서 헤켈의 진화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자유방임과 개인의 경쟁을 강조한 스펜서는 극빈층을 생존경쟁에서 실패한 집 단으로 간주하여 이들에 대한 구제에 반대하였다.
반면 헤켈은 국가가 가난한 계급을 지원하여 이들의 생활조건 개선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9
26 R. Richards, 2008, 앞의 책, pp. 176~177.
27 E. Haeckel, trans by J, McCabe, 1904, Wonders of Life: A Popular Story of Biological Philosophy(Die Lebenswunder), London: Haper & Brothers Publisher, p. 425.
28 E. Haeckel, 1908(1878), 앞의 책, pp. 68~70.
29 E. Haeckel, trans by J, McCabe, 1904, 앞의 책, p. 117.
이는 헤켈이 서양 인종이 공유하는 유전적 우월성에 의해 서구사회가 분업화에 바탕을 둔 고도화된 산업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30
인 구 증가, 산업 발달, 노동의 분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상층 중간계급과 같은 인종에 속한다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들도 사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31 유전적으로 이들보다 뛰어난 계층이 운영하 는 국가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헤켈이 제시한 생존경쟁의 사례는 사회 집단 내가 아닌 집단 간의 대결 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생존경쟁의 과정과 관련해 ‘더욱 발전하고 규모가 큰 집단이 더 뒤처지고 더 작은 집단을 희생시키면서 더 많이 퍼지게 되는 긍정적 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강자에 의한 약자의 소멸을 합리화하 였다.32
그는 생존경쟁을 벌이는 집단을 크게 인종과 국가로 구분하였다.
그는 신생대 제3기 말에 존재했을, 직립보행하는 “사람 같은 유인원(men-like ape, Pithecanthropi)”을 인간의 공통 조상으로 가정하였다.33
그리고 사람 같은 유 인원에서 “원시인간(primitive man)”이 출현하였으며, 이 집단이 다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인간 “종(species)”으로 분화하고, 이 과정에서 생존경쟁에 실패한 수많은 인간 종이 멸종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당시 가장 우수 한 인종인 코카서스인과의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흑인(negros), 호주 원주민 등 의 “야만인(savage)”이 멸종해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34
30 E. Haeckel, trans by J, McCabe, 1904, 위의 책, p. 60.
31 E. Haeckel, trans by J, McCabe, 1904, 위의 책, p. 425,
32 E. Haeckel, trans by E. Lankerster, 1887(1868), The History of Creation (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 Vol. II, York: D. Appleton and Company, p. 324.
33 E. Haeckel, trans by E. Lankerster, 1887(1868), 위의 책, pp. 292~294.
34 E. Haeckel, trans by E. Lankerster, 1887(1868), 위의 책, pp. 321~325.
헤켈은 국가라는 정치체를 문명사회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노동의 분화 단 계가 높고 중앙 집권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영국과 독일을 당대 가장 발전 한 국가로 분류하였다.35
헤켈은 영국인이 인종적으로 독일인과 비슷하며 이 두 나라는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영국을 호의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헤켈은 영국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식민지 획득과 팽창을 방해 하고 있다는 이유로 영국을 독일의 생존경쟁 대상으로 간주하였다.36
제국주의 자였던 헤켈은 1890년대 독일의 팽창을 본격적으로 부르짖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대에는 독일이 새로운 레벤스라움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37
즉, 산업의 발전에 의한 무역의 확대와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독일제국의 해결책이 바로 레벤스라움의 확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레벤스라움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개념화한 사람은 헤켈이 아니라 그 의 제자 라첼이었다.
그런데 레벤스라움의 기본 개념은 그가 이 단어를 처음 사 용한 1897년 이전에 발표한 저작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1882년 출간한 『인류지리학(Anthropogeographie)』에서 라첼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토지가 부 족해지고 이에 따라 강한 민족이 팽창하여 약한 민족을 정복하게 되는 것을 자 연법칙이라 주장하며, 독일이 식민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38
35 E. Haeckel, trans by E. Lankerster, 1887(1868), 위의 책, p. 281.
36 D. Gasman, 1971, The Scientific Origins of National Socialism: Social Darwinism in Ernst Haeckel and the German Monist League, London: Macdonald & Co. LTD, pp. 127~129; E. Haeckel, 1925(1890), “Algerische Errinerungen”, Teneriffa bis zum Sinai, Leipzig: Kroner, pp. 84~85.
37 D. Gasman, 1971, 앞의 책, p. 131.
38 F. Ratzel, 1882, Anthropogeographie, Stuttgart: Verlag Von J. Engelhorn, pp. 166~167.
라첼이 레벤스라움의 확장을 주장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정치 적 성향과 당시 독일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아프리카의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될 예정이었던 베를린 회담(The Berlin Conference, 1884년 11월 15일~1885년 2월 26일) 직전인 1884년 9월 16일, 뮌헨에서 독일국가자유당의 창당기념식이 열렸다.
당원이던 라첼은 『국가불평론자들을 반대하며(Wider die Reichs Nörgler)』라는 연설문을 공개하 였다.
라첼은 이 연설문에서 독일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 좁은 영토로 인한 자원 부족의 해결, 산업 발전에 의한 무역 확대를 위해 식민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 였다.39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840년에서 통일 되기 직전인 1871년까지의 독일 내 각 국가의 인구 자연증가율은 평균 약 10퍼 센트였으며, 1871년 이후 14년 동안에는 독일의 인구가 약 300퍼센트 증가하 였다.
당시 독일의 경우 공업이 급격하게 발전하고 수많은 농민이 유입됨에 따 라 산업도시는 과밀화되고 있던 반면, 농촌의 경제 성장은 정체되고 있었다.40
게다가 1873년에 시작한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의 여파로 공산품과 농산 물의 가격이 하락하고 이에 따라 실업률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독일인 이 일자리와 농지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고 있었다.41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880년대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개척을 시도했으며 라첼은 바로 이 정책을 지지 한 것이었다.
이후 라첼은 독일의 식민지 개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레벤스라움의 이론적인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류지리학이 생물지리학과 동일 선상에서 출발한다고 정의함으로써 ‘공간을 위한 경쟁’을 자연 법칙으로 간주하 였다.42
39 F. Ratzel, 1884, Wider die Reichs Nörgler , München: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40 J. Reulecke, 1977, “Population Growth and Urbanization in Germany in the 19th Century”, Urbanism Past & Present, No. 4, pp. 22~23.
41 W. Smith, 1974, “The Ideology of German Colonialism, 1840~1906”,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46(4), pp. 641~645.
42 F. Ratzel, 1901, Der Lebensraum: Eine biographische Studie, Tübingen: H. Laupp, p. 1.
그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한 공간이 필요한데 여기서 공간 이란 식량을 제공하는 토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후환경의 변화와 함께 라첼 은 서식밀도의 증가를 레벤스라움의 팽창 이유로 제시하였다.
즉, 개체수가 공 간이 부양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 종의 일부는 협소한 공간에 적응하기 보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 하고, 이에 따라 기존에 살고 있던 비슷한 자원을 이용하는 종과 대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벤스라움이 더욱 넓게 확장될수 록 생물의 경우 이용 가능한 자원이 증가함에 따른 다양한 조건에 적응하기 마 련이고, 이에 개체수가 증가하여 다른 종을 압도하게 되어 생존 확률이 높아 진다는 것이 라첼이 제시한 이론이었다.
그는 패배한 종은 서식지의 한계로 인 해 결국 퇴화되고 멸종한다고 주장하였다.43
따라서 라첼은 맬서스와는 다르게 개체수의 과잉을 종의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레벤스라움: 생물지리학적 연구』 출간 이전 라첼은 오노즈카가 인용한 『정 치지리학』에서 “동식물계의 생존경쟁이 항상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처럼 국가 간 투쟁도 대부분은 영토를 둘러싼 투쟁일 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44
그 는 국가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초과 인구를 인구가 희박한 인근 지역으 로 보내게 되고 이로 인해 전쟁이 발생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라첼은 국가 간의 전쟁을 영토, 즉 레벤스라움을 확장하는 본질적인 수단으로 보고, 전쟁을 과잉 인구 해소와 국가의 생존을 위한 방어 수단으로 생각하였다.45
그런데 당 시 유럽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의 강대국의 역사적인 전쟁을 통 해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과잉 인구의 해소를 위해 유럽 내에서의 전쟁을 통한 레벤스라움의 확보보다는 해외 식민지의 개척을 통한 영 토 확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46
43 F. Ratzel, 1901, 위의 책.
44 F. Ratzel, 1903, Politische Geographie 2nd edition, Berlin: Druck und Verlag von R. Oldenbourg, p. 381.
45 F. Ratzel, 1897, “Ueber den Lebensraum. Eine biogeographische Skizze”, Die Umschau 21(1), pp. 363~367; 1903, 위의 책, pp. 93~94, 100, 141.
46 F. Ratzel, 1903, 위의 책, pp. 246~251.
라첼은 서구 열강의 해외 식민지 개척을 “문화민족(Kulturvölker)”이 “자연 민족(Naturvölker)”을 정복하는 과정이라고 합리화하였다.
그는 토지의 가치에 대한 인식, 기술적 발전 수준과 이를 다룰 수 있는 문화적인 능력이 이 두 민족 을 가르는 핵심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자연민족의 경우 이 수준이 낮거나 또는 인구 감소로 인해 이것이 퇴화되었다고 제시하였다.47
그는 문화민족인 유럽인 이 자연민족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정복함으로써 원주민들이 비옥한 토 지에서 밀려난 결과 이들 집단의 인구가 급감했다고 판단하였다.
즉, 원주민 집 단은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존재라는 것이다.48
47 A. Stoginnos, 2019, The Genesis of Geopolitics and Friedrich Ratzel, Cham: Springer, p. 203.
48 F. Ratzel, 1901, 앞의 책, pp. 54~56
그리고 퇴화된 종의 멸종이 자연 법칙에 따른 것이듯, 이들의 소멸도 당연하다는 것이 라첼의 생각이었다.
따라 서 라첼은 해외 식민지에서 이주민과 원주민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본국 이주민의 대체 과정으로 판단하였다.
문화민족의 인구폭발에 의한 식 민지의 건설, 그리고 이주민들의 자연적인 인구 증가는 결국 식민제국의 팽창과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레벤스라움의 확보에 대한 논의는 경쟁 대상인 협상국과의 전쟁에 서 패배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파리강화회담(Paris Peace Conference, 1919~1920)에서 해외 식민지뿐만 아니라 서프로이센과 포젠을 포 함한 13퍼센트의 영토를 상실한 독일인들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결 국 이는 레벤스라움의 확대를 선언한 나치가 1933년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칠박사 집단 중 영토팽창론자들이 제시한 러시아와의 대결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의 급증하는 인구에 대한 해결이었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지 시대 독일식 사회진화론의 일본 유입 과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III.메이지 시대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의 일본 유입과 형 성 과정: 칠박사 사건 이전 시대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서구 국가가 독일이라면 그 외 지역에 서는 일본이었다.
1800년대 중반 일본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상황을 맞이하였다.
일본의 막부 정부는 1853년 페리 제독의 무 력시위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개항 후 일본 정부는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 약을 맺었다.
이후 일본은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과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 争)에서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서양 세력의 위력을 경험하였다.
마침내 1868년 국가의 생존을 위해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기치로 내 세운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다윈의 이론을 일본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은 미국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회원인 미국의 진화론자 모스였다.
1877년 6월, 문부 성(文部省)은 연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패류 전문가 모스를 도쿄대학(東京大 學)의 초대 동물학 담당 교수로 임명하였다.
이는 미시간대학에서 개최된 모스 의 특별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은 후 귀국해 도쿄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도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의 소개 덕분이었다.
이 특별 강연에서 모스는 다윈 의 진화론을 소개하였다.
모스는 도쿄에서 학교라는 울타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877년 10월 그는 도쿄대학에서 진화론에 대한 특별 강연을 세 차례 실시했는데, 당시 강연에 참 석한 교수들과 그들의 부인, 학생 500~600명의 열띤 참여에 깊은 감명을 받 았다.49
49 E. Morse, 1979, Japan Day by Day, Vol. 1, New York,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p. 138.
이후에도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 塾)을 포함한 도쿄 내 각지에서 명사들과 지식인들을 상대로 진화론에 대한 강 연을 실시하였다.50
강연에서 그는 동물이든 인류든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경 쟁에서 승리한 개체나 종이 살아남는다고 설명하였다.51
그리고 원숭이와 공통 조상에서 번영한 인류가 다시 인종으로 분기되는데, 유전에 의해 짐승처럼 싸우 는 하등한 인종은 전쟁에 유리한 형질을 가진 인종에 의해 패배한다는 인종주의 적 진화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모스는 전쟁에 유리한 인종을 같은 정부 아래에 서 같은 목표를 위해 단합하는 집단으로 정의함으로써 구성원의 단결이 집단적 생존경쟁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52
따라서 모스가 일본에 전파한 다윈의 진화론은 헤켈의 진화론과 매우 흡사하다.
모스는 다윈의 이론인 ‘생존 경쟁’이 일본에서 널리 확산되도록 했으며,53 메이지 시대 인종주의적이고 집단 주의적인 사회진화론이 지식인 사회에 널리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0 S. Cross, 1995, “Prestige and Comport: The Development of Social Darwinism in Early Meiji Japan, and the Role of Edward, Sylvester Morse”, Annals of Science 53, p. 338.
51 エトワルト·モールス 口述, 石川千代松 筆記, 1967(1883), 「動物進化論」, 明治文 化硏究會 編輯, 『明治文化全集』 27(科學篇), 東京: 日本評論社, 329~331쪽.
52 エトワルト·モールス 口述, 石川千代松 筆記, 1967(1883), 위의 글, 35~357쪽.
53 矢田部良吉, 1967(1883), 「緖言」, エトワルト·モールス 口述, 石川千代松 筆記, 「動物進化論」, 明治文化硏究會 編輯, 『明治文化全集』 27(科學篇), 東京: 日 本評論社, 321쪽.
모스가 일본에 다윈의 진화론을 소개했으나 당시 일본인들의 지적 환경에서 는 이 이론을 직접 생물학에 적용할 수 없었다. 실제 일본 과학계에서 진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모스의 제자인 이시카와 지요마쓰(石川千代松)가 독일 유 학에서 돌아온 1889년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1880년대 초반 일본 사회를 고민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스펜서 의 사회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생존경쟁에 대한 스펜서식 표 현인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로운 개인들 의 경쟁을 통해 사회가 사회 발전한다는 스펜서의 ‘산업사회(industrial society)’ 이론에 주목하였다.54
이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1874년 이타 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주도한 「민선의원설립건백서(民撰議院設立建白 書)」가 제출된 이후, 일본에서는 입헌군주제 설립을 위한 자유민권운동이 활발 하게 전개되었다.55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도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당시 정부를 주도하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 루(井上馨)는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이토는 독일식과 영국식 중 어느 것이 적합한지 정확한 노선을 정하지 않았으 나, 후쿠자와와 친밀하게 지낸 오쿠마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지지하였다.
1881년 3월 오쿠마는 이토나 이노우에와 상의하지 않고 아리스가와노미야 다 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에 보낸 의견서에서 헌법을 제정한 뒤 1883년 초에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한 국회를 개설하자고 건의하였다.
이토는 이러한 급진적인 헌법 구상에 반발하며 격노하였으며, 이노우에는 후쿠자와로 상징되는 정부를 향한 여론전을 주도하던 도시민권파(都市民權派)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였다.
결국 1881년 10월 12일 메이지 천황이 1890년 국회를 개 설하기로 발표한 직후 오쿠마의 사직과 함께 도시민권파와 연결된 정부 관료들 이 해임되었다.56
54 D. Howland, 2000, “Society Reified: Herbert Spencer and Political Theory in Early Meiji Japan”,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42(1), p. 70.
55 이태진, 2022,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파시즘』, ㈜사회평론아카데미, 67~72쪽.
56 松沢裕作, 2016, 『自由民権運動: 「デモクラシー」の夢と挫折』, 東京: 岩波書店, 131~137쪽.
소위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전후로, 자유민권론을 지 지하던 지식인들은 게이오의숙을 중심으로 스펜서의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받아 들였다.
이들은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보다는 그가 제안한 ‘군사사회(militant society)’에서 ‘산업사회’로의 진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스펜서는 권위주의 적인 중앙집권적인 정부, 개인에 대한 통제, 엄격한 사회계층화로 특징되는 ‘군 사사회’에서 평등한 도덕적인 개인의 자발적 협동에 의해 운영되는 ‘산업사회’ 로 발전하는 것을 ‘일반적인 법칙(universal law)’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자 유민권론자들은 당시 일본 사회를 전제적인 ‘군사사회’로 정의하고 이를 민주적 인 ‘산업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스펜서의 진화론을 무기로 정부와 투쟁한 것이 었다.57
이런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서 가토의 ‘사상적 전향’ 사건이 일어났다.
가토는 1873년 결성된 일본 최초의 계몽 학술단체인 메이로쿠샤(明六社)에서 후쿠자와 등과 함께 활동하였지만 1882년 10월에 출간한 『인권신설(人權新 說)』에서 천부인권이란 없고 권리라는 것은 치열한 권력경쟁에서 승리한 자들 이 획득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유민권론자들을 공격하였다.
이 책에서 가 토는 집단주의적·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국가의 성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 였다.
국가가 생기기 전 인간 사회에서는 생명을 빼앗는 가혹한 ‘우승열패(優勝 劣敗)’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제 권력을 가진 최대 우승자가 등장하여 국 가를 창설했을 때, 우승열패를 제한하고 사회와 개인의 안전을 위해 국민에게 권리를 부여하여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가토가 1877년 12월 30일 작성하기 시작한 연구 노트 「의당비망(疑堂備 忘)」 1에는 생존경쟁이라는 단어와 다윈, 헤켈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58
57 山下重一, 1975, 「明治初期におけるスペンサーの受容」, 『年報政治学』 26.
58 加藤弘之, 1990a, 「疑堂備忘一」, 上田勝美·福嶋寬隆·吉田曠二 共編, 『加藤 弘之文書 1』, 京都: 同朋舍, 188쪽.
도쿄 대학의 총리였던 가토는 모스와 친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모스는 당시 일본 지 식인들의 학문, 특히 생물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은 관계로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간략한 형태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어 구사자였던 가토는 다윈의 진화론을 『종의 기원』이 아닌 1868년에 출간된 헤켈의 저작 『자연창조 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를 통해 받아들였다.
「의당비망」을 검토하면 가토가 ‘선택설(Selektionstheorie)’, ‘생존경쟁(Kampf ums Dasein)’, ‘자 연선택(Natürliche Zuchtwahl)’, ‘적응(Anpassung)’ 등 다윈이 제시한 기본적인 개념과 ‘유전(Vererbung)’, ‘인위적 선택(Künstliche Zuchtwahl)’, 생명체와 인 류의 진화과정 등 헤켈이 강조한 개념을 『자연창조사』를 통해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9
모스와 헤켈을 통해 진화론에 접근한 가토는 이제 다윈이 피하고자 했던 생존경쟁의 인간사회에 대한 적용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집단의 생존을 위해 유전적으로 선택된 엘리트들이 사회를 주도해야 한다는 헤켈의 주장은 가토에게 집단 내부의 생존경쟁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 었다.
가토는 『인권신설』에서 헤켈과 유사하게 ‘능력과 재능, 도덕성, 품행, 학 예, 재산, 농업, 공업, 상업 등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정신적 우수한 상등평민’ 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0
그리고 헤켈이 이 들이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를 유전적인 요소로 판단한 것처럼 가토는 상등 평민이 “우수한 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사회를 주도할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 였다.61
59 加藤弘之, 1990b, 「疑堂備忘二」, 上田勝美·福嶋寬隆·吉田曠二 共編, 『加藤 弘之文書 1』, 京都: 同朋舍.
60 加藤弘之, 1882, 『人權新說』, 東京: 谷山楼, 37~40쪽.
61 加藤弘之, 1882, 위의 책, 39쪽.
헤켈은 당시 사민주의자들의 급부상에 반발하여 자연계의 불평등성을 당대 독일 사회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토는 당시 사회적으로 소외되 어가던 전직 사무라이, 대기업 보호에 불만을 품은 소규모 상인 및 산업가, 과중 한 세금으로 고통받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 하급 무사 계층, 소작농,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던 자유민권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인권신설』을 발표한 것이었다.
『인권신설』이 출간된 후 야노 후미오(矢野文雄),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 바바 다쓰이(馬場辰猪)와 같은 자유민권론자뿐만 아니라 1876년 가이세이학교 (開成學校)에서 일본 최초로 스펜서를 강의했던 도야마도 가토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가토는 이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1883년 1월 『인권신설』 제3판을 출간하였다.62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점점 자유민권론자들에게 불리하게 진행 되었다.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느낀 토지소유주와 산업가들의 이탈, 대정부 투쟁의 과격화, 빈농층과 도시 하층민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 속에 서, 1884년 10월 31일 지치부(秩父)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군 을 동원하여 이 봉기를 강경 진압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자유민권운동은 종언을 맞았다.63
무력을 동원한 정부의 힘이 점점 강화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경쟁 을 통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라는 민권론자들의 유토피아적 진화론은 일 본에서 힘을 잃게 되었다.
일본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된 1882년 3월 이토가 헌법 제정을 위한 조사 차 유럽으로 파견되기 직전 정부 수뇌부는 독일 헌법을 기반으로 일본 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889년 2월 11일 천황 주권과 신민의 권리와 의 무가 명시된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이 공포되어 권위주의적 정부 운영에 대한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헌법과 동시에 공포된 「중의회선 거법(衆議院議員選挙法)」은 선거권을 토지세나 소득세를 15엔 이상 납부하는 25세 이상 성인 남성(당시 전체 인구 중 1.1%)으로 제한함으로써 하층 중간계급 과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64
62 『인권신설』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가토의 대응에 대해서는 김도형, 2015, 앞의 글, 550~566쪽 참조.
63 松沢裕作, 2016, 앞의 책, 191~199쪽; M. Nagai, 1954, “Herbert Spencer in Early Meiji Japan”, The Far Eastern Quarterly, 14(1), pp. 59~60.
64 清水唯一朗, 2013, 「日本の選挙制度―その創始と経路―」, 『選挙研究』 29(2), 12쪽.
가토는 1893년 출간한 『강자의 권리의 경쟁(强者の權利の競爭)』에서 권리 (사권과 공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 즉 ‘강자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유럽의 사례를 들어 메이지 헌법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즉, 유럽에서는 절대군주제에서 입 헌제로 이행하였는데, 이를 추진한 동력은 지능과 부의 발전으로 ‘자유권(강자의 권리)’을 획득한 피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대체로 그가 『인권신 설』과 그 이후 발표한 글들을 구체화하여 소수 엘리트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일 본식 입헌군주제를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65
소수로 구성된 지도층의 국정 주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토는 이 책 에서 국가유기체설을 도입하였다.
헤켈과 마찬가지로 가토는 국민을 세포로 간 주했는데 ‘사회 생물, 즉 국가의 주된 목적은 국가 전체와 그 세포가 되는 각 개 인의 유지와 진보’라 주장하며 국가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가토는 같은 해 출간한 『도덕법률진화의 이(道徳法律進化の理)』의 증보개정판 에서 삼단계의 유기체설을 구체화하였다. 이 책에서 가토는 그의 이론이 헤켈의 제자인 헤르트비히(Oscar Hertwig)66에 기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첫 번째 단계의 유기체를 단세포 생물이나 세포로 규정하고, 세포의 집 합체인 생명체를 “이기심”을 지닌 두 번째 단계의 유기체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의 유기체가 생존경쟁에 의해 고등 생물, 즉 인간으로 진화하였으 며, 세 번째 단계의 유기체인 사회는 인간의 생존경쟁 과정에서 생성된다고 하 였다.
사회를 국가로 인식한 가토는 ‘국가라는 세 번째 단계의 유기체는 반드시 이 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유지와 발전을 꾀하기 위해 그 세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 서 타국과 경쟁하고(공격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이를 통해 타국을 자신의 생존 필 요에 맞추려는 것이 당연하다’67고 주장하며 국가 내 생존경쟁에서 국가 간의 생존경쟁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였다.
65 가토의 천황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시한 입헌군주론에 대해서는 박삼헌, 2010,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후기사상-입헌적 족부통치론을 중심으로-」, 『사총』 70 참조.
66 加藤弘之, 1893b, 『道徳法律進化の理』, 増補改定版, 東京: 博文館, 2쪽.
67 加藤弘之, 1893b, 위의 책, 246쪽.
이 지점에서 가토는 두 번째 단계의 유기체인 국민에게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을 요구하였다.
즉, ‘이타적 행동에 의해 국민의 일치와 협력이 견고할 때 국가적 사회의 강력한 이기심이 생기고, 이 사 회는 타국과의 경쟁에서 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만, 국민의 일치와 협력이 약할 때는 도저히 국가가 이기적 정신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패배할 수밖 에 없다’68는 것이었다.
이 시기 가토는 우승열패의 개념을 주변국과의 관계로 확장하여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유기체설을 주장한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메이지 유신은 바로 서구 열강 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의 방어, 즉 생존을 위해 일어난 것이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인접국인 청의 군비 확장과 러시아의 동진에 위협의식을 느끼고 있 었다.
1880년대 일본 정부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 두 나라와 충돌할 것을 예상 하고 있었다.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는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 계획을 발표하자 1890년 12월 6일 제국의회에서 국가의 독립과 방위가 일 본의 ‘주권선’(국경)에만 그치지 않고 ‘이익선’(조선)의 확보에 있다고 연설하 였다.
이는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일본이 군사적인 수단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종주권, 즉 한반도라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9
이에 일본 정부의 전략은 일종의 공세적 방어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강자의 권리의 경쟁』이 출간된 1893년은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청의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던 시점이 었다.
일본이 무력을 통해 국가 간의 생존경쟁에 참여를 시도한 시기에, 가토는 이에 대한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이었다.
실제 가토는 청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이 청군에 연승하고 있는 원인으로 일 본 사회의 집단적인 통합, 도덕적·진화적 우월성 등을 제시하였다.70
68 加藤弘之, 1893b, 위의 책, 246~247쪽.
69 이승환, 2022, 「19세기 말,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과 국방전략에 대한 고찰: 야마 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구상을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13(1), 1929~1931쪽.
70 자세한 내용은 김도형, 2018, 「가토 히로유키의 진화론과 전쟁인식-청일·러일전 쟁 관련 저술분석을 중심으로-」, 『日本思想』 35, 16~19쪽 참조.
『도덕법률진화의 이』에서 가토는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도덕이 충만한 문명 국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헤켈과 유사하게 문명국이 국가 간의 경쟁에서 실패한 미개 사회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71
그런데 이 책에는 중국도 문명국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지중해인을 제외하고는 몽골인종만 “실제 역사(actual history)”를 가지고 있으며 “문명(civilization)”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 『자연창조사』의 내용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72
하지만 청일전쟁 기간 도중 보여준 청나라 군대의 졸전을 보며 가토는 스스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미개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 그리고 그 미개국에 종속된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우승열 패라는 진화의 과정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의 상황은 가토의 예측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1893년 가토는 유럽 열강들이 이제 하나의 유기체, 즉 세계국가로 통합되어간다는 비현 실적인 진화 과정을 제시하였다.73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 럽 열강이 도덕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인데 이들이 동일한 도덕적 목표를 지향하 고, 그로 인해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기 때문에 하나의 유기체, 즉 세계국가로 통 합되어간다고 판단한 점에 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이 세계국가에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요동반도 확보 를 저지하였다.
특히 1896년 동청철도(東淸鐵道)에 대한 부설권을 획득한 러시 아는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만주를 점령하 였다.
1890년대 후반 일본 정부의 목표는 대한제국을 러시아와 분할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방어를 위해 러시아에게 만주와 한반도를 교환하자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까지 노리던 러시아의 거부로 실패하고 만다.
일본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러시아 에게 대항하고자 일본의 지도층은 일본의 이익선인 조선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군을 만주에서 축출하기 위한 외교 정책으로 전환하였다.74
결국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는 결국 개별 국가 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 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 과정 속에 일본이 급부상하였다.
이제 문명국의 협력 을 통한 세계제국의 건설이라는 가토식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은 일본 사회에서 비현실적인 이론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 가토가 제시한 국 가유기체설은 더욱 맹위를 떨쳐갔다.
1880년대 중반 자유민권운동이 실패하자 대다수의 일본 지식인은 우승열패를 강조하는 가토의 집단주의적 진화론을 수 용하였다.75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국가유기체설은 사무라이의 ‘무사 도(武士道)’ 개념과 결합하였다.
즉, 사회구성원으로서 개인은 선과 악 같은 보 편적인 윤리를 따르는 존재가 아닌 천황과 국가의 생존을 위해 충성, 복종, 희생 하는 존재라는 사고가 일본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76
74 조명철, 2002, 「근대 일본의 대외정책과 동아시아: 의화단사건과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일본의 외교전략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29, 51~56쪽.
75 이성철, 2024,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변형」, 『사회사상과 문화』 27(1), 196쪽.
76 H. Unoura, 1999, “Samurai Darwinism: Hiroyuki Katô and the reception of Darwin’s theory in modern Japan from the 1880s to the 1900s”, History and Anthropology, 11(2-3), pp. 245~247.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엘리트 양성소인 도쿄제국대학에서는 도미즈로 대표되는 개전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칠박사 중 도미즈, 도미 이, 가나이, 테라오, 나카무라 등 다섯 명은 이미 1900년 당시 총리 야마가타 에게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대항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이들의 사고는 도미즈가 1901년 3월 『윤리계(倫理 界)』에 게재한 「침략주의와 도덕(侵略主義と道德)」이라는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침략주의, 영토확장주의, 적국박멸책 등은 모두 필요한 것 이며, 이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조상에 대한 불효이며, 황실에 대한 불충이며,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부도덕한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도덕가에게 묻는다면, 타국을 점령하는 등의 행위는 상당히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로서는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 것이 매우 부도덕한-부도덕의 극치라고 생각한다.77
이러한 도미즈의 주장은 가토가 소개한 ‘국가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 이 곧 자연법칙’이라는 헤켈식 진화론과 무사도가 결합한 사고에 기반을 둔 것 으로 보인다.
또한 도미즈는 당시 일본 정부의 외교 원칙인 일본의 생존을 위한 방어적 무력 사용을 넘어 침략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도미즈가 영토, 곧 일본의 공간 확보를 강조했는지 알아볼 필요 가 있다.
첫째, 그는 넓은 영토를 강국의 기본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둘째, 그는 일본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 때문에 넓은 영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78
메이 지 유신 이후 일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인구통계 는 높은 출산율과 사망률을 보여주고 있는데 출산율이 사망률보다 약 10퍼센트 이상 높았다.79
비록 당시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은 증가 하고 있었지만, 인구 증가와 함께 쌀 소비량도 증가했다.
이로 인해 1890년대 일본의 쌀 자급률은 10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 였다.
이에 이미 1892년 대장성(大蔵省)은 쌀 생산의 증가 이상으로 인구가 증 가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80
77 戸水寛人, 1901, 「侵略主義と道德」, 『倫理界』, 2, 6쪽.
78 戸水寛人, 1901, 위의 글, 3쪽.
79 岡崎陽一, 1986, 「明治大正期における日本人口とその動態」, 『人口問題硏究』 178, 1~2, 7쪽.
80 日本 農林水産省 홈페이지, 「その1:お米の自給率」, https://www.maff.go.jp/ j/zyukyu/zikyu_ritu/ohanasi01/01-03.html(검색일: 2024년 9월 8일).
결국 당시 일본은 소위 ‘맬서스의 덫’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이 문제는 가토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3월에 출간한 『200년 후의 우리(二百年後の吾人)』에서 맬서스를 언급하며 일 본의 인구 증가를 우려하였다.81
그런데 문명국의 협력을 통한 세계 단일 제국 의 출현을 예측했던 가토는 아시아의 일부 문명국과 유럽의 문명 인종이 인구의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야만 인종이 생존경쟁에 서 패배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82
따라서 이 지점에서 가토는 일 본의 식민지 확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에서 목축과 농경에 적합한 토지의 면적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국 문명국의 인종도 약 200년 후에는 맬서스의 덫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예측함으로써 공간의 확장, 즉 식민 지 확보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맬서스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83
도미즈의 경우 200년 후의 미래보다는 당시의 현실이 더 큰 문제였던 것으 로 보인다.
가토와 마찬가지로 강국이 소국을 병합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판 단한 그는 지금 당장 영토를 확장하여 인구를 이주시키지 못한다면 일본이 20세기에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였다.84
81 加藤弘之, 1894, 『二百年後の吾人』, 東京: 哲學書院, 43~44쪽.
82 加藤弘之, 1894, 위의 책, 53~56쪽.
83 加藤弘之, 1894, 위의 책, 59, 83~85쪽.
84 戸水寛人, 1901, 앞의 글, 3쪽.
따라서 도미즈는 당시 일본을 위협하고 있던, 자신이 강국으로 정의한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일본의 방어뿐만 아니라 당장의 생존을 위해 영토, 즉 식민지 확보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라는 서구 열강과의 생존경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정당화할 새로운 형태 의 이론이 일본의 사회진화론자들에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정치학을 연구하며 라첼의 이론을 접한 오노즈카가 1901년 가을 귀국한 후 도쿄제국대학 초대 정치학 담당 교수 로 임명되었다.
유학 전 만민평등주의와 박애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오노즈카는 당시 열강들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유럽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만국평등 주의를 거부하고 애국주의자로 변모하였다.85
일본이 러시아와 첨예하게 대립 하고 있던 1903년 5월, 오노즈카는 대학 내에서 전쟁 개전의 여론을 주도하던 도미즈 그룹에 합류한 후 그들과 함께 건의서를 작성하고 이를 정부에 제출함으 로써 소위 ‘칠박사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IV.칠박사 집단의 개전론에 투영된 영토 팽창 논리
칠박사 집단이 개전 건의서를 내각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郎)에게 제출한 1903년 6월 10일은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해 4월 ‘만주철군협정(滿洲撤軍協定)’에서 약속한 2차 철군 시기를 어긴 러시 아는 용암포를 점령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열린 각료 회의에서 일본 정부 는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고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보장받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채택하였다.86
이러한 상황에서 칠박사 집단은 그들의 건의서를 6월 24일 공개하였다.87
85 南原繁·蠟山政道·矢部貞治, 1963, 『小野塚喜平次-人と業績-』, 東京: 岩波 書店, 64쪽.
86 홍용덕, 2023, 위의 책, 353쪽.
87 花見朔巳, 1939, 앞의 책, 120~121쪽.
칠박사는 건의서에서 이익선에 기반을 둔 만한교환론에 반대하였다.
즉, ‘조 선을 지키고자 한다면 만주가 러시아에 넘어가는 막아야 하며 만약 러시아가 만 주를 차지한다면 일본의 방어가 위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전쟁을 통한 국경선의 확대가 국가의 방어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라는 라첼의 생 각과 매우 흡사하다.
이후 이들은 만주 문제에 대한 의견 교환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도미즈의 과격한 전쟁론에 대해 반대하던 오노즈카와 도미이가 이탈하였다.
오노즈카는 『정치학대강』에서 ‘외교정책은 평화적이어야 하며, 군부의 선동이 외교 당국자 를 압박할 때 당국자는 전체적인 상황을 계산하여 소신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평화주의에 의해 타국의 강압적 행동이 강화될 수 있으므로 전쟁은 마지 막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8
도미즈의 과격한 주장에 반대한 오노즈카와 도미이를 제외한 나머지 5인에 더해, 새롭게 가세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교수 다케베 돈고(雄邨遯吾)와 제국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은행에 재직하고 있던 문학사 와타나베 지하루(渡 邊千春)는 1903년 9월 그들의 의견을 정리한 논문을 모아 『일로개전논찬(日露 開戰論纂)』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과격 주전론자들의 주장은 라첼의 영 토 팽창 이론과 매우 비슷하다.
가나이는 이 책에서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백하였다.89
실제 이 책의 저자들의 성향을 분류하면 도미즈, 데라오, 다케베, 나카무라를 포 함하는 과격파와 가나이, 다카하시, 와타나베를 포함하는 온건파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과격파에 대해 살펴보면, 데라오는 대외 팽창을 통한 국가의 ‘생존’을 직접 언급했다.
그는 ‘일본인이 작은 섬에서 생존하기만 한다면 발전이 없다’라 고 주장하며 일본이 멸망할지라도 강대국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만주를 획 득하여 경제적 이득과 국운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90
88 小野塚喜平次, 1903b, 『政治学大綱』 下, 東京: 博文館, 103~104쪽.
89 金井延, 1903, 「法學博士 金井延君論文」, 藏原惟昶 編, 『日露開戰論纂』, 東 京: 東京國文社, 34~35쪽.
90 寺尾亨, 1903, 「法學博士 寺尾亨君論文」, 藏原惟昶 編, 『日露開戰論纂』, 東 京: 東京國文社, 20, 29~32쪽.
즉, 그에 게 영토 팽창은 강대국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며 러일전쟁은 일본의 모든 자 원을 동원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결전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전쟁을 원한 이유는 바로 영토의 확보 때문이었다.
과격파 중 나카무라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급증하는 일본의 인구 증가를 일본이 영토 를 확장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였다.
특히 다케베는 당시 일본의 인구와 식량의 증가율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메이지 23년을 중심으로 한 전후 5년간 평균 쌀 생산량은 3,860만 석, 보리 생산 량은 1,460만 석이었다.
메이지 31년을 중심으로 한 전후 5년간의 평균은 쌀이 3,960만 석, 보리가 1,910만 석이었다.
이 8년간 쌀은 연간 약 0.3%, 보리는 약 3% 증가한 것이다. … 즉, 매년 인구 1,000명당 2.3명에 해당하는 식량이 부족하 게 되는 결과가 된다. …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인구 증가가 앞으로도 현재와 같 은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91
위의 글을 보면 다케베가 주장한 일본이 식량 위기 상황에 빠진 이유의 근거 가 인구 급증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케베가 당시 서양 문명국의 인구 증가율 이 일본을 포함한 황인의 증가율에 비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지적한 사실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즉 ‘약 100년 후 백인의 인구가 20억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 는 데 비해 황인은 7~8억에 머무를 것’이라는 것이다.92
도미즈 역시 ‘19세기 초에 백인 인구가 1억 7,000만 명이었지만 20세기 초에 5억에 도달했으며 일 본의 인구 증가율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하였다.93
이 지점에서 다케베는 라첼과 마찬가지로 높은 인구 증가율을 국가의 팽창 을 위한 희망적인 요소로 판단하였다.94
91 雄邨遯吾, 1903, 앞의 글, 80쪽.
92 雄邨遯吾, 1903, 위의 글, 78쪽.
93 戸水寛人, 1903, 앞의 글, 7쪽.
94 雄邨遯吾, 1903, 앞의 글, 78쪽.
그는 서구 사회가 산업 발달로 인해 인 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본토와 식민지를 포함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인구 밀도가 일본의 수준에 도달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이들보다 더 산업을 발전 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영토를 확장시켜 인구를 증가 시키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성장을 위해서 한 반도와 만주를 일본의 식민 영토로 편입시키고 이를 방해하는 러시아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95
건의서 제출을 주도했던 도미즈는 더욱 노골적으로 과잉 인구 해소를 위한 식민지 확보를 강조하였다.
그는 급증하는 일본의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을 조선에 이주시켜야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 능하기 때문에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 정도의 일본인이 조선에 정착해야 하며, 이후 점차 증가하는 일본인을 수용하기 위해 만주도 점령해야 한다고 강 조하였다.96
이 논문을 발표할 당시 도미즈는 조선을 식민지화해야 한다고 판단 했지만 만주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토로 할 것인지 아니면 후대의 만주국과 같은 괴뢰국가를 설립해야 할지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만주의 비옥한 땅을 일본의 통제하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97
이러한 도미즈의 생각은 당시 일본 정 부의 기본 전략이었던 공세적 방어, 즉 만주의 중립지대화를 부정한 것이 었다.98
전쟁 도중 일본의 영토를 바이칼 호수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도미즈는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다.
이에 1905년 8월 문부성은 도미 즈에게 휴직 처분을 내림으로써 소위 ‘도미즈 사건(戸水事件)’이 발생하였다.99
95 雄邨遯吾, 1903, 위의 글, 80~89쪽.
96 戸水寛人, 1903, 앞의 글, 13쪽.
97 戸水寛人, 1903, 위의 글, 16~18쪽.
98 와다 하루키 지음, 이웅현 옮김, 2010,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한길사, 782~783쪽.
99 宮武実知子, 2007, 앞의 글, 166~167쪽.
반면에 온건론자 중 가나이는 과격 주전론자와는 다르게 만주를 확보하기 보다는 중국의 주권을 회복시켜 만주를 중국의 영역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즉,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자위권을 확보할 수 있 으며, 동시에 동양 전체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는 것이었다.100
그리고 와타나 베는 만주의 점령보다는 청의 주권 회복을 통한 완충 지대의 설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101
하지만 이 둘 역시 만주에서 전쟁을 통한 일본의 경제적 이익 추구에는 찬성하였다.102
그러나 다카하시는 개전론은 이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그 역시 다른 박 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생존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촉구하였다.
칠박사 의 개전론 중 자위권은 다카하시의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국제법 전공자 였던 다카하시는 국가의 자위권은 상대방의 명백한 과실이 인정될 경우에만 발 동해야 한다는 영국 유학 시절 은사 웨스트레이크(John Westlake)의 의견에 대 하여, 국제법상 한 나라의 행위가 정당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 가 많기 때문에 자위권에 그러한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였다.103
국가의 자위권을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경우 사용하는 폭력적 방법’ 이라 정의한 다카하시는 일본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러시아와의 개전을 정당화 하기 위해 ‘국제자위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는 자국에 직접적인 이해 가 없더라도 강대국 사이에 포위된 작은 국가가 한 강대국에 침공당하여 다른 강대국에 커다란 위험이 되는 경우 다른 강대국이 이에 개입할 수 있다고 판단 하였다.104
100 金井延, 1903, 앞의 글, 57쪽.
101 渡邊千春, 1903, 「文學史 渡邊千春君論文」, 藏原惟昶 編, 『日露開戰論纂』, 東京: 東京國文社, 117~118쪽.
102 金井延, 1903, 앞의 글, 58~60쪽; 渡邊千春, 1903, 위의 글, 118쪽.
103 朴羊信, 1998, 앞의 글, 978쪽.
104 高橋作衛, 1903, 「法學博士 高橋作衛君論文」, 藏原惟昶 編, 『日露開戰論纂』, 東京: 東京國文社, 123쪽.
즉, 러시아가 일본을 침공하지 않더라도 만주를 점령하고 조선에 군 대를 보내는 행위가 일본의 생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본은 외교적인 방법이 실패한 당시의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만 한다 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카하시는 다음과 같이 영토 팽창론자들을 비판하였다.
세상에서 대외 강경파로 불리는 논자 중 일부는 만주의 변환을 일본 국민의 증가 와 일본 영토의 협소함, 국운 발전의 필요에 기반을 두어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 가 있다. … 만약 일본 국민의 필요와 일본의 영토 협소함 때문에 만주의 땅을 강 탈하여 국운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왜 러시아가 그 영토를 확장하여 국운 을 발전시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105
즉, 다카하시는 일본의 경제적·영토적 생존권 확대를 목표로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참전의 명분을 앗아간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 정부가 영국과 미국 등 다른 강대국과 협상하여 국제 조약을 통해 만주를 중립지대, 즉 완충지화해야 하며 이후 일본군이 만주에서 철군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106
결국 다카하시는 이후 강경론자들과 결별하고 영토 팽창을 부르짖던 도미즈를 “천박하다”고까지 표현하며 비난하였다.107
이러한 상황에서 강경론자들과 결별한 후 침묵하던 오노즈카가 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1904년 8월 「국가팽창범위의 정치학적 연구(國家膨脹範圍ノ政治學 的研究)」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오노즈카는 다카 하시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최후 수단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논문에서 러일전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큰 사건의 발생을 기회로 팽창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전쟁을 지지하였다.108
105 高橋作衛, 1903, 위의 글, 120쪽.
106 高橋作衛, 1903, 위의 글, 143~145쪽, 155쪽.
107 다치바다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2008, 앞의 책, 379쪽.
108 小野塚喜平次, 1904, 「國家膨脹範圍ノ政治學的研究」, 『法學協會雑誌』, 1059쪽.
오노즈카는 이 논문에서 라첼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라첼의 주장과 유사한 내용을 많이 제시하였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인접국과의 생존경쟁에서의 성패 로 결정된다고 판단한 오노즈카는 라첼과 마찬가지로 국가 팽창의 최대 동기가 과잉 인구의 처리에 있다고 인식하였다.109
특히 라첼과 오노즈카의 가장 큰 공 통점은 국가 팽창의 촉진요인을 인구 과잉과 문화의 조합으로 인식했다는 것 이다.
오노즈카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강국이 어떤 방법으로 그 인접 지역에 있는 “열등한 약국”을 팽창 범위, 즉 식민지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이 논문에서 제시하였다.110
그 대상국이 어디인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열등국은 청과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노즈카는 라첼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사례를 들어 이주민들이 본국의 문화적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라첼은 미국에 거주하는 약 800만 명의 독일인이 더 이상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고 독일에 대한 기억을 잃 어버린 것을 걱정하며 이들이 고향의 문화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1
이와 마찬가지로 오노즈카는 미국으로 이주한 대다수의 독일인이 “언어, 사상, 감정에서 독일 민족과 분리되어 있다”라고 언급하였다.112
따라서 오노즈카가 열등국으로의 영토 팽창을 시도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 자연민족의 공간에 식 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본국인과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라첼의 이 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자연민족의 소멸을 예상한 라첼과 다르게 오노즈카는 식 민지민들을 보호해야 하며 그들을 문화민족으로 동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하 였다.113
109 小野塚喜平次, 1903a, 앞의 책, 158~163쪽; 小野塚喜平次, 1904, 위의 글, 1056쪽.
110 小野塚喜平次, 1904, 앞의 글, 1057쪽.
111 F. Ratzel, 1884, 앞의 책, p. 10.
112 小野塚喜平次, 1904, 앞의 글, 1056쪽.
113 小野塚喜平次, 1904, 위의 글, 1060쪽.
이는 독일과 일본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1880년대 이후 독일은 인구가 희박하고 유색인종이 거주하고 있던 남태평양의 섬들(독일 령 뉴기니)과 현재의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의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화하 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노리던 만주와 한반도는 높은 인구 밀도와 함께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인과 함께 몽골인종, 그리고 반개인(半開人)으로 분류되던 중국인과 한국인의 거주 지역이었다.
비록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인들은 타 동양인에 대해 인종적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노즈카가 염려하였듯이 반 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던 중국과 조선에서 억압 정책을 실시할 경우 이들의 반발 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114
이에 오노즈카는 식민지인의 문화적 발전과 진보를 위해 일본이 팽창한다는 논리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일의 경우 열강과의 협상, 또는 구입을 통해 식민지를 획득했던 반면 에 당시 일본은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 팽창을 시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노즈카는 이 논문에서 러시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 만, 일본의 식민지 획득 열망에 대한 서구의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 이 지역을 보 호국화하여 내정을 감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노즈카는 “그 팽창 범위 내의 인민은 문화적·경제적으로 진보의 이점을 누리고 … 조약 으로 팽창 국가의 지위와 권리를 명확히 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게 해야 한다”115라고 주장하며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국제법에 의 해 인정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오노즈카는 ‘약한 나라가 보호를 요청하지 않더라도 강국이 실력으 로 이를 인정시킨다’116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114 小野塚喜平次, 1904, 위의 글, 1060쪽.
115 小野塚喜平次, 1904, 위의 글, 1059~1060쪽.
116 小野塚喜平次, 1904, 위의 글, 1061쪽.
이는 결국 청과 대한제국 정부 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침공할 수 있다는 명분을 제시 한 것이었다.
즉, 일본도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무력을 통해 식민지를 확보해 야 함을 역설한 것이었다.
결국 유럽에서 공부했던 칠박사 집단은 건의서 제출 이후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도미이, 영토 확장과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에 의한 개전을 반대한 다카하시를 제외하고는 일본에서 인구가 늘어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인보다 열등한 인종이 살고 있는 만주와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대한 의견을 학자 의 권위에 입각해 제시한 것이었다.
V.맺음말
19세기 중반 소위 흑선(黒船)의 무력시위에 의해 개항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 로 상징되는 서구식 근대화의 추구를 통해 국가의 생존을 도모하였다.
이를 위 해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 정부는 독일제국의 정치체제를 모델로 삼아 막부시대 의 분산적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려 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본격적으로 수 용된 사회진화론은 시민들을 자유경쟁을 통한 민주주의적 사회발전을 제시했 던 영국의 스펜서식의 진화론이 아니라, 국민을 세포로 간주하고 엘리트의 사회 주도를 강조했던 헤켈의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 헤켈의 사회진화론을 일본에 본 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 바로 가토였다.
가토는 헤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저술 한 『인권신설』에서 스펜서식의 민주주의적 산업사회를 추구하던 자유민권론자 들의 의견을 반박하였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함으로 써 독일제국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기틀이 마련하였다.
헤켈의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의 문제점은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 로 생존경쟁에 처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이타성과 윤리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집단의 생존과 이익 추구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일본 의 대외 정책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1889년 메이지 헌법 발표 이후 일본은 주변국인 중국과 조선을 생존경쟁의 희생양, 즉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근대화 에 실패한 열등한 중국과 조선에 대한 이권 추구를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정당화 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시 근대화를 추구하던 일본은 1870~1880년대 독일과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함께 식량 부족이라는 맬서스의 덫에 갇히게 되었다.
따 라서 일본은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새로운 생활공간과 상품의 수출시장, 그리고 자원의 공급처인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만을 식민지화하였으며, 이후 동쪽으로 팽창하고 있던 러시아와 만주에서 충 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던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학자들이 모여 칠박사 집단을 구성하였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었던 이들 은 당대 독일의 팽창 논리, 그중에서도 인구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 식민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들은 동식물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법칙이라고 생각하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소멸을 정당화한 라첼의 이론과 유사한 개념을 제시하며 러일전쟁 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실은 러일전쟁을 통한 영토 팽창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강경론자 중 한 명인 다케베는 도야마의 제자로 스펜서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실제 당시 일본에서 대부분의 스펜서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추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에는 찬성하였다.
이 문제는 사실 일본에서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이 어떻게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무사도와 같은 일본 전통 사상, 그리고 유학(儒學)과 결합되는지 관련이 있는 사항이다.
일본식 사회진화론의 형성과 특징에 대한 주제는 추후 자세히 논의하겠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사실은 라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오노즈카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라첼의 영향을 받아 지정학(geopolitic)을 개념화한 스웨덴 의 지리학자 셸렌(Rudolf Kjellén)의 이론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의 제자인 국제정치학자 가미카와 히코마쓰(神川彦松)가 라첼과 셸렌 의 지정학을 바탕으로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하 였다.
이에 대한 문제도 추후 검토하겠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적자생존’의 가토식 표현인 ‘우승열패(優勝劣敗)’를 바탕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한일합방이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의 정착을 위해 설립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의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써 자국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문명국임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한 이후 일 본은 방어적 공세와 국제사회로의 편입에 의한 일본의 이익 추구가 아닌 무력행 사에 의한 영토 팽창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서구 열강과의 생존경 쟁의 장을 벌이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칠박사 사건으로 상 징되는 메이지 시대 비윤리적인 독일식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정착 화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까지 일본의 팽창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원 리로 작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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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19세기 맬서스와 다윈이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후 헤켈로 대표되는 독일의 진화론자들은 이 개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강자에 의한 약자의 정 복, 즉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헤켈의 제자 라첼은 국가가 발 전하기 위해서는 레벤스라움의 확보를 제시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에서 지정학은 사회진화론적 측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국가의 생존과 진화를 결합한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은 이미 1870년대 후반 헤켈의 영 향을 받은 가토 히로유키에 위해 정립되었으며 이는 결국 메이지 헌법 공포 이 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집단 간의 생존경쟁을 통해 식민지 확보를 개시하는 사상 적 기반이 되었다.
칠박사 사건의 참여자 중 대부분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던 188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당시 세계정책을 추구하며 식민지의 확보와 다른 서구 열강과의 경쟁에 돌입한 독일에서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접하였다. 특히 그들 중 오노즈카 기헤이지는 직접적으로 라첼의 영향을 받은 자였다.
당시 일본을 주도하던 도쿄제 국대학 법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칠박사 집단의 구성원 중 강경론자는 영토 팽창을 위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논리로 일본 정부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주도한 여론전은 결국 러일전쟁의 개전에 큰 영향을 끼침으로써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제어: 러일전쟁, 사회진화론, 생존경쟁, 레벤스라움, 헤켈, 라첼,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칠박 사사건, 도미즈 히론도(戸水寛人), 오노즈카 기헤이지(小野塚喜平次)
ABSTRACT
Struggle for Existence and Territorial Expansion: Examinations of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Russo-Japanese War Presented by the Seven Doctors Group
Park Haewoon
After Thomas Malthus and Charles Darwin introduced the concept of struggle for existence, German evolutionists represented by Ernst Haeckel applied this concept to human society, justifying the conquest of the weak by the strong, i.e., imperialist aggression. Haeckel’s student, Ratzel, proposed that for a nation to develop, it must secure Lebensraum (living space), which after World War I, gave geopolitics in Europe a socio-evolutionary aspect. In Japan, this notion of national survival and evolution, influenced by Haeckel, was established by Katō Hiroyuki in the late 1870s, which laid the ideological foundation for Japan to start acquiring colonies through intergroup struggle after the proclamation of the Meiji Constitution. During the late 1880s to the early 1900s, when Japanese militarism was intensifying, most of the participants in the Seven Doctors Incident were individuals who had studied in Germany, which was then pursuing the weltpolitik and entering into struggle for colonies with other Western powers. Notably, among them, Onotsuka Kiheiji was directly influenced by Ratzel. The group known as the Seven Doctors, primarily composed of professors from the Law School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pressured the Japanese government with the argument that Japan needed to wage war with Russia to secure its Lebensraum, i.e., territorial expansion. The public opinion campaign led by the hardliners among them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outbreak of the Russo-Japanese War, thus it was one of the triggers that accelerated the territorial expansion of the Japanese Empire.
Keywords: the Russo-Japanese War, social Darwinism, struggle for existence, Lebensraum, Ernst Haeckel, Friedrich Ratzel, Katō Hiroyuki, the Seven Doctors Incident, Tomizu Hirondo, Onozuka Kiheiji
투고: 2024년 10월 11일, 심사 완료: 2024년 11월 5일, 재심사 완료: 2024년 11월 29일, 게재 확정: 2024년 11월 29일
동북아역사논총 86호(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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