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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9)/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회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소환~

그는  단순한 책사로 조선을 개국한 것이 아니라
군주(이성계)를 이용해서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살해 된 후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부음기사’에 담긴  내용을 보자

 첫째)
「“(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둘째)

「“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
(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
(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위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내용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주살)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부음기사)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는 있지만 말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회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첫번째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첫 번쩨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중국 ‘초한지’의 영화.소설에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현재 까지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 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사기. ‘유후세가’>>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회

<조선왕조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이방원(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 이방원 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초상지풍필언    草上之風必偃 
   수지풍중초부립 誰知風中草復立

    ( 풀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눕는다. 누가 알랴 바람속에서도 풀이 다시 일어나는 걸) 
          -논어 안연-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고려말 부원파(원나라 세력)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해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1384)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회

정도전의 머리에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제나라 선왕 왈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맹자 답하기기를
「“기록에 있습니다.”」라고 하자

제나라 선왕 왈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라고 되 물었다

맹자 답하기기를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왈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
<<조선경국전>>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떠났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회

나주에서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정도전은 유배생활 초기 소재동 농부 황연의 집 한 칸에 세들어 살았다가 이후 뒤쪽 백룡산 아래에 자그마한 초가를 지어 3년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도전은 백성들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했으며 농민들의 인심에 감동받아 ‘소재동기’를 남긴다.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은 이후 ‘백성이 먼저’라는 민본 사상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
<<고려사절요>>

 유배지(회진현 거평부곡: 현재 나주 운봉리 백동마을)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은 원래 ‘백성은 풀잎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쓰러지는’는 나약한 존재이며, 다라서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의 만만치 않은 힘을 깨달았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해 버린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회

그래서 였을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고려 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
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 같은 것이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7회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 ‘치사하게’ 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여기서 말하는
‘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만기친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
<<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8회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참 재주도 좋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요동정벌의 야망~~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
<<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9회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도전은 한양도성을 설계했고, 한양을 구획하고 거리와 마을의 이름까지 지었다.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
<<삼봉집>>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
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0회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1회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가장 백미는
당연히 「‘재상론’」 즉,

「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王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과연 그 당시에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다니....

「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
(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
(人主之職 在論一相)”」
<<조선경국전>>

여기서도 핵심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
<<조선경국전>>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조선경국전>>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2회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 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 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
<<조선경국전>>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고 했다.
<<재상지직·宰相之職>>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
<<경제문감>>


정도전,
이성계의 한계 보완하며 전폭적 지원받았다.
참모가 보스에 무조건 순종하면 폐단 생겨긴다고 했다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가 재상의 역할과 권한을 강조한 부분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정도전이 저술한 [경제문감(經濟文鑑)] 중
‘상업(相業, 재상의 업무)’이라는 글을 보자.

여기서 정도전은 임금과 재상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임금이 재상을 논함에 있어, 자신의 뜻에 맞추는 것만을 구하고 자기를 바루어 주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사랑스러운 것만을 취하고 두려워할 만한 것을 취하지 않으면
그 임금은 직분을 잃은 것이다.

또한 의당 임금을 바르게 해야 할 재상이, 옳은 것으로 그른 것을 바꾸는 일을 임무로 삼지 않고 임금의 뜻만을 좇아 화합하고 순종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륜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일로 마음을 삼지 않고 몸이나 용납되어 은총을 굳히는 일만으로 술수를 삼는다면 그 재상은 직분을 잃은 것이다.” 』

임금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발탁해야 하며,

재상도 부귀나 은총을 구하지 말고 오로지 임금을 올바르게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3회


재상은 왕의 방종을 견제하는 존재~~

그런데 재상의 직분이 이것뿐이라면 굳이 재상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임금을 바르게 하는 소임은 간언을 담당하는 부처나 관리들이 담당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재상의 직을 설치하는 것은 무엇보다 임금의 한계 때문이다.

요순(堯舜)임금의 시대라면 나라 안에서 가장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현명한 사람이 왕이 되었겠지만,

세습 군주제 하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무릇 임금 중에는 우매한 사람도 있고 현명한 사람도 있으며 강건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는 등 한결같지가 않다.

그러므로 총재(재상)는 임금의 장점을 북돋워주고 단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임금이 옳은 일을 하면 받들어 실행하고 그른 일을 하면 막아야 한다.

임금으로 하여금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가장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경국전>

세습을 통해 왕위를 잇는 사람들이 모두 제대로 된 자질을 갖출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대신 신하 중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아 임금의 한계를 보완하게 한다는 것이다.

재상은 왕의 방종을 견제하고 판단실수를 예방하며 과오를 바로잡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것을 제도화하고자 했는데,

임금의 능력에 따라 재상의 역할을 이랬다 저랬다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성군이 나오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복권당첨처럼

그것을 기다리기보다는 아예 훌륭한 이를 재상으로 뽑아 그가 국정을 담당하도록 하는 구조를 정착 시킴으로써 정치를 예측가능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4회  

그렇다면 임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통치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임금은 재상에게 권위와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적임자를 찾아 재상으로 발탁하고, 재상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고 지원하며, 재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등의 역할을 하면 된다.

바로 태조 이성계가 모범 사례를 보여주는데,
그는 정도전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의 전권을 부여하다시피 했고,
사병혁파 등 개혁의 과정에서 발생한 반발을 왕의 권위로 제압하며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정도전이 짧은 시간 동안 새 왕조의 기틀을 상당 부분 잡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태조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도전의 모델, 즉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재상이 임금의 위임을 받아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형태는 현실에서 중대한 위험 요인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속성상 이를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재상의 업무가 임금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재상의 역할이 강화될수록 임금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두개의 태양)

재상에게 권한을 주어 국정을 담당하게 하다가도 하루아침에 해임하거나 숙청하는 일이 잦았던 것은 그래서이다.

정도전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재상이 오로지 지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그 사귐이 굳어져 풀어지지 않으며, 또한 임금의 마음을 열어야만 자신을 보전함에 탈이 없게 된다”고 했다.

또한, 정자(程子, 정이천)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 된 도리는 마땅히 그 빛나고 아름다운 것을 속에 머금고 드러내지 않으며, 착한 것이 있으면 임금에게 돌려야 바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이나 화려한 영광을 누리려 하지 말고 공을 세우면 모두 임금의 것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임금 역시 재상을 믿고 임무를 맡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다치지 않고 몸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다.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경제문감>>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5회


정도전의 천려일실(千慮一失)~~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現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너무 방심했던 것일까~

당시의 <조선왕실록>은 정도전이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전 서울대 교수( 2023년 사망,원로 사학자)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松亭一醉竟成空)”
<<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 새없이 움직이던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정도전과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정도전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을 보면
조선개국을 반대하고 오하려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던 정몽주를 충신,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역적으로 그리는 부분이 꽤나 많이 나오는 등  정도전은 조선역사에 그렇게 역적으로 그려진다.

조선 건국에 큰 공헌을 한 정도전은 오히려 역적으로 평가받고 있고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가 조선의 충신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이 왕위에 오르도록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 주살했기 때문에 이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선 그를 역적으로 몰아 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후 ‘배반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고려의 영원한 충신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참고문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준태의 보수와 참모’ 등 다수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6회

태종임금 때

《조운선(漕運船: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침몰하면서 1000여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쌀 1만석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거센 풍랑 때인데도 운항을 강행했고,
화물 또한 과적 상태였던 것이었다.》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임금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무리한 운항이 참사의 원인~~

이보다 240여 년 전인 1414년(태종 14년),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으로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침수한 쌀·콩 5800석이 수장됐다.

“7월에는 웬만하면 배를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공문을 전라 수군절제사에 보내
‘7월 그믐에 조운을 실어 8월 초에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수군 절제사 정간이다.
정간은 이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다 참사를 빚었다.”
<<<태종실록>>

무슨 말인가.
원래 태풍이 불어닥치는 7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 게 상식이다.
보통은 4월 쯤에 실어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 당시 상례였다

그런데 호조가 그같은 절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7월 말~8월 초에 현물세금을 실러 올려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기상상태를 파악해야 할 전라 수군절제사가 호조의 지시대로 배를 띄웠다가
참변을 불었다는 것이다.

재변은 사람이 부르는 것~~
비슷한 참사가 1620년(광해군 12년) 8월6일 또 일어났다.

이날 사간원은 해운판관(충청·전라의 조운업무 담당 정5품 관직) 조길 등의 파직을 요구했다.

「“‘4월 출항, 5월 한강도착’이 조운의 관행입니다.
그런데 해운판관 조길은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거센 풍랑이 이는
7월 출항을 강행했습니다.
정식 조운선을 버리고,
개인 배에 사사롭게 모은 베(布)를 가득 싣고
강화도에 이르러 1만석을 실은 배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80여 명이 빠져죽었습니다. 이 자를 파직하시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는 이밖에도 선박사고의 기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회  

그런데 사고의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인재(人災)인 것을 알 수 있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심심찮게 대형참사가 발생했다.
조선시대 임금들과 신하들은 모든 침몰사고의 책임을 임금에게 돌렸다.


1633년(인조 11년),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린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災不虛生 由人所召>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하늘이 높고 높아 위에 있지만 감동이 있으면 통한다.
관리들은 고식적인 것을 따르지 말고 각각 자신의 직무에
근실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라.”》
<<인조실록>>

“모든 사고의 책임은 군주에게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고 자탄한
태종 임금이다‘“
<<태종실록>>

1403년(태종 3년) 5월5일,
큰 재난이 일어났다. 경상도의 조운선(각 지방에서 거둔 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
34척의 배가 한가운데서 침몰한 것이다,

참변을 보고받은 임금은 죽은 이가 몇 명이고,
잃은 쌀은 또 얼마인 지를 물었다.
하지만 정확한 피해상황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대강이라도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그러자….

“예. 쌀은 1만 여석 되는 것 같고, 사람은 1000여 명 쯤 됩니다.”

태종은
“이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고 장탄식했다.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고,
풍랑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우면 안되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태종은 그러면서
“사람들이 죽은 것이 너무도 불쌍하다”고 애통해 했다.

“쌀은 비록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이 참사의 원인을 보면 기가 막힌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자.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회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상소문을 살펴보면
이 배는 자질이 부족한 선장이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운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깨알지시를 내리는 대신 ‘내탓이오’만 외치고 있다.

군주를 추궁한 조선의 신하들

신하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재변이 일어나면
‘재변의 책임은 군왕이므로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라’고 다그쳤다.

왕조시대인 데도 군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한 것이다.
1632~33년 사이에 잇달아 재변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변고’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1632년(인조 10년) 3월5일, 국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이 올린 상소문을 보자

“재앙은 괜히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재앙을 초래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災不虛生 必有所召)
예부터 명철한 임금은 하늘의 경고를 맞아 경계하고 덕을 닦는 도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홍문관이 내민 비판의 칼날은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임금을 겨눈다.

“지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어서 심한 재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초심이 위축된 것입니까. 예전의 폐단에 사로잡힌 것입니까. 혹 편파적인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것은 아닙니까.”

간담이 서늘한  상소문이다.

이토록 임금을 다그친단 말인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회

“임금이 부덕한 탓”

1633년(인조 11년) 대사헌 강석기는 인조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최근의 재앙은 진실로 전에 없는 변고입니다. 무엇이 하늘의 마음을 거슬렀는지….
삼가 전하의 덕과 정치가 부족하고 잘못된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10년 동안 불행히도 위기가 계속되어 경악할만한 변고가 다달이 생기더니 급기야….”

강석기의 상소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지금 정책의 일관성도 없어 정책의 80~90%가 시행과 중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법도가 없어지고,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많습니다. 인사도 마찬가집니다. 아래에는 백성을 구제해 갈 사람이 없고 위에는 마음을 다해 믿고 맡기는 실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며 앉아서 그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꼴입니다. 인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의 원망을 격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초래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강석기는 한없이 임금을 질타하면서도 마지막으로는 임금의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재변은 도리어 전하에게는 기회입니다. 하늘이 전하를 완전히 끊어버리셨다면 절대 이런 경고를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하늘에 응답하는 방도는 ‘수성(修省)’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몸을 닦아 풍화를 돈독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요. 그러면 재앙을 상서로 만들 수 있으며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변은 임금이 부덕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게 강석기의 주장이다.
그러니 임금이 반성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여에서는 국왕을 죽였다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지자 <명종실록>의 기자가 쓴 논평을 보자.

“운석이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 기상이변이 이어지자 찬선 송준길이 한 말도 비슷하다.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재변(災變)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인재(人災)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재변의 책임은 군왕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오죽했으면
“부여에서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 했을까.
<<삼국지> ‘위서·동이전’>>

조선이라는 거울로 들여다본
우리 시대 이야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에 대한 우리 지도자는 어떠했는가?
결국 한 분은 탄핵의 강을 건넜고
또 한 분은 건내고 있는 중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비가 오지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같았다.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이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회

<율곡 이이 의  동호문답>

혼군, 폭군, 용군~~

역사적으로 잘못된 정치를 펼친 군주를 지칭할 때,
혼군(昏君·혹은 암군), 용군(庸君), 혹은 폭군(暴君)이라는 용어를 쓴다.

율곡 이이가 1569년 독서휴가 중 문답체로 선조임금에게 올린
‘동호문답’에서 그 의미를 명쾌하게 구분해놓았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어떤 이가 혼군(昏君·혹은 암군·暗君)이고,
또 어떤 이가 용군(庸君),
또 어떤 이가 폭군(暴君)인가.

잘못된 정치로 악명을 떨친 군주에 관한 평가도 구분된다.

율곡 이이(1536~1584)가 1569년(선조 2년) 독서휴가(사가독서·賜暇讀書) 도중 임금(선조)에게 지어 올린 글(‘동호문답’)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동호독서당’(현재 서울 옥수동)에서 왕도 정치의 경륜을 문답체로 서술해 올렸다고 해서 붙인 글제목이다.

‘동호문답’에서 율곡  이이는
‘잘하는 정치’와
‘문란한 정리’를 각 두가지로 구분했다.

「“임금의 재지(才智·재주와 지혜)가 출중…하거나,
재지는 부족해도 어진 이에게 정사를 맡기면 잘하는 정치다.
그러나 신하를 믿지 않거나, 간신의 말을 믿어 귀와 눈이 가려지면
문란한 정치다.”」
율곡 이이는 문란한 정치를 편 군주를 세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백성의 힘을 빼앗고…
충언(忠言)을 물리치고…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는 폭군(暴君)이다.

선정의 뜻은 있지만 간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관리들은 재주가 없어서 패망하게 되는 자는
혼군(昏君)이다.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
정사가 떨치지 못하여 구태만 되풀이하면서
날로 쇠약해지는 자는 용군(庸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