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회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
연산군은 1506년
“이제부터 사관은 시정(時政)만 기록할 뿐 임금의 일은 기록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진 2세는 (황제란) 눈과 귀가 좋아하는 바를 하고 마음과 뜻이 즐거운 것을 다한다’고 했다. 군주인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고 큰소리 쳤다.
폭군의 전형적인 모델(?)인다.
‘주지육림’이란 술로 연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호사스러운 술잔치를 이르는 말
중국 역사에서는 폭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군주가 3명 있다.
여인(말희·달기)에게 잘 보이려고 폭정을 휘두른
하나라 걸왕(기원전 1652?~1600?)과
상나라 주왕(기원전 1075~1046),
백성의 언로를 막은 주나라 여왕(기원전 877~842) 등이다.
걸왕은 부인(말희)을 위해 으리으리한 궁전을 건조하여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고, 궁전 뒤뜰에 술을 채운 연못(주지·酒池)을 만들어 배를 띄워 남녀가 즐겼다.
<<회남자>> ‘본경훈’·<<신서>> ‘자사’ 등).
주지육림의 효시다. 국고가 탕진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상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도 오십보백보다.
애첩 달기의 비위를 맞추려고 주지육림을 만들어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놀게 한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주왕과 달기는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댔다.
주왕이 자행한 이 형벌을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 한다.
주왕은 신하이자 서형(庶兄)인 비간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끔직한 일을 저지른다.
“성인의 심장엔 구멍이 일곱개가 뚫렸다는데 한번 보자”면서
심장을 해부하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또 주왕은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사기 ‘은본기’>>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회
순자(荀子:전국시대 사상가.성악설)
「‘군주민수 君舟民水’」
순자는
'君舟民水군주민수'를 주창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순자(苟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君者舟也 . 庶人者水也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통치자는 배이고. 백성은 물입니다."
水則載舟 .水則覆舟
<수즉재주. 수즉복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물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합니다."
君以此思危
<군이차사위>
"통치자는 이런 위기를 염두에 두고서"
則危將焉而不至矣
<즉위장언이부지의>
"위기를 자초해서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고심해야 합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여차하면 그 강물은 배를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의 힘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전복시키기도한다.
물을 닮은 백성의 힘은 언제라도 세상을 변화시킨다.
'君舟民水군주민수'라는 역사적인 사자성어가 여기에서 출현한 것이다
순리에 역행하고,
진실이 왜곡되고,
그래서 나라가 혼라하게 되면, 결국 백성들이 정권을 뒤집어 엎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계 역사에서 보아왔다.
통치자는 늘
"물의 힘과 대중의 뜻을 늘 염두에 두며" 정치를 해야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회
백성의 입을 틀어막으면…
주나라 여왕(厲王)은 어떤가. 간신(영이공)을 중용하자 백성들이 여왕을 비방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무당을 불러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다.
여왕은 무당의 고발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공포정치를 펼치자 언로가 막힌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교환했다.
여왕이 기뻐하며 재상 소공에게 자랑했다.
“내가 비방을 없앴소. 이제 아무도 날 비방하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소공은 기가 막히다는 듯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억지로 말을 막다뇨.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막아놓은 둑이 터지면 피해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공은
“백성은 속으로 생각한 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라면서 “그들의 입을 막는다면 찬동하는 자가 몇이겠냐”고 비판했다.
소공은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는 것처럼 백성들의 언로도 활짝 뚫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소공은 백성의 여론이란
‘즉흥’이 아니라 ‘심사숙고 후에 발현되는 것’으로 분석했다.
또 그런 여론을 막는 것은 둑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렇게 쌓은 둑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경고했다.
이미 2800년 전에….
그러나 폭군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841년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國人暴動),
여왕은 도주했다.
이때 소공과 주공 등 두 재상이 14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사기. ‘주본기’>>
이것을 공화정의 시초로 본다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회
여인을 웃게 하려고…
혼군(암군)도 보인다.
주나라 유왕이 대표적이다.
유왕은 포나라에서 바친 미녀(포사)를 총애했다.
포사는 잘 웃지 않는 여인이었다.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썼다.
어느 날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큰 북을 치자 제후들이 ‘변란이 일어난 줄 알고’
허겁지겁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포사가 “이게 뭐냐”고 투덜거리면서 돌아가는 제후들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드디어 포사가 웃었어!”
크게 기뻐한 유왕은 이후 오로지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올리고,
큰 북을 여러차례 쳤다.
처음에는 달려오던 제후들은
‘양치기 왕’의 봉화 놀이를 믿지 않았다.
그 사이 유왕은 포사의 말만 듣고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들을 벌주었다.
그러자 관리들이 포사의 말만 듣고 아부했다.
어느 날 주나라에서 내부 반란세력과 결탁한 오랑캐(견융) 군대가 쳐들어왔다.
유왕이 봉화를 올렸지만 어떤 제후도 오지 않았다.
유왕은 죽임을 당했고(기원전 771),
그의 뒤를 이은 평왕(기원전 770~720)은 기원전 770년 낙읍(낙양)으로 천도했다.
<<사기> ‘주본기’·>>
주나라는 서주→동주시대로 바뀌었다.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해짐에 따라 춘추전국 시대가 개막한 시기이기도 했다.
진(秦) 2세 호해(기원전 210~207)
역시 혼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환관 조고(기원전 258~207)에게 국정을 맡긴 것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아방궁 공사를 만류하는 대신들에게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황제가 됐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일축했다.
<사기>의 편찬자인 사마천은 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혀를 찼다.(<사기> ‘진시황본기’)
진(晋) 혜제(290~307)도 도긴개긴이었다.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자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거냐(何不食肉糜)”(<진서> ‘혜제기’)고 고개를 갸웃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용군’의 대명사도 있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영제(168~189)가 거기에 속할 것이다.
당시 ‘10여 명의 환관’(십상시)이 국정을 농락하고 있던 시대였다.
십상시는 진나라 환관 조고처럼 12살에 등극한 황제를
주색에 빠뜨리면서 마음껏 국정을 주물렀다.
그런데 당시 ‘십상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영제는
유력한 환관이던 장양(?~198)과 조충(?~198)을
‘나의 아버지 장상시, 나의 어머니 조상시’라 추켜세웠다.
<<후한서> ‘환자열전’>>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회
폭군 연산군,
삼 정승의 경고 메시지~~
순자의 ‘혁명론’
이 무시무시한 고사를 감히 연산군에게 인용한 ‘간 큰’ 신료들이 있었다.
한치형(1434~1502)·성준(1436~1504)·이극균(1437~1504) 등 3정승이다.
3정승은 연산군에게 시폐 10조목을 올렸다
.(1502년 3월25일)
말하자면 임금의 잘못된 정치,
즉 ‘실정(失政)’ 10가지를 뽑아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이들은 이때 ‘감히’ 순자의 혁명론을 인용한다.
“임금이 가볍고 백성이 중합니다.
옛사람(순자)이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舟)라고 한 것은
물이 배를 뜨게 할 수도,
뒤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두려운 것은 백성(可畏非民)’이라 했습니다.
민심이 이반하면 그 나라는 임금의 나라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미 무오사화(1498)의 쓴맛을 본 때였다.
그럼에도 3정승은 목숨을 걸고 ‘임금 당신이 잘못하면 백성이 당신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간했던 것이다.
그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해(1502) 죽은 한치형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관을 쪼개 시체를 자름)됐다.
성준과 이극균 역시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이중 이극균은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가루네어 뿌림)’의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임금이 부도하면 쫓겨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친 3정승의 기개가 존경스럽다.
연산군은 간신인 유자광(1439~1512)과 임사홍(1445~1506)을 믿어 난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 8월14일
“이제부터 사관은 시정(時政)만 기록할 뿐 임금의 일은 기록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진2세 호해를 소환했다.
“‘진 2세는 (황제란) 눈과 귀가 좋아하는 바를 하고 마음과 뜻이 즐거운 것을 다한다’고 했다. 모두들 잘못된 말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진 2세 호해가 누구인가.
아방궁 건축 등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군주가 멋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잔말이 많냐’고 일축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호해를 롤모델로 삼은 것이다.
하기야 갑자사화(1504)를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연산군이 아닌가.
그렇다면 연산군은 ‘임금 마음대로 살겠다’고 했고,
간신 유자광과 임사홍을 믿고 난행을 저질렀으니 ‘혼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폭군’이라고 해도 된다.
이이의 분류법에 따르면 혼군(암군)과 용군은 지도자의 무능에 강조점을 둔다면,
폭군은 독선과 불통에 따른 폭정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물론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에서는 셋다 오십보백보다.
혼군(암군)이든 용군이든 폭군이든
잘못된 정치는 곧 백성의 저항을 부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회
서라벌에 붙은 대자보~~
888년(진성여왕2년)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 때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등장한 대자보를 소개하고 있다.
「 ‘진성여왕과 신라는 망하라 ’」 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이 때 소판(각간) 위홍 등 3~4명의 총신과
여왕의 유모인 부호 부인 등이 국정를 농단하고 있었다.
“이름없는 자가 당대의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길목에 내걸었다.”
888년(진성여왕 2년) ,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에서 당시의 정치를 비난하는 벽보(榜·대자보)가 붙었다.
그것도 조정의 길목,
번화가에 붙은 비방문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나라 사람들이 비방문을 길 위에 던졌다(書投路上)”고 했다.
<삼국사기>는 “벽보(혹은 대자보)를 붙였다”고 했지만,
<삼국유사>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 것이다.
어찌됐든 글 내용은 알쏭달송했다.
다라니(밀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려는 주문 같은 것)의
은어로 쓰여 있었다.
「“나무망국찰니나제(南無亡國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윤사바아(鳧伊娑婆訶)”」
<<삼국유사 ‘기이편·진성여왕 거타지조’>>
진성여왕(재위 887∼897년)은
“당장 비방문을 써서 내다 건(뿌린) 자를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때 어떤 자가 “범인은 분명 기용되지 못한 문인일 것”이라면서
대야주(지금의 합천)에서 은둔 중인 왕거인이라는 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왕의 특명에 따라 긴급체포된 왕거인은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이 됐다.
그러자 무죄를 주장하던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하다”면서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연단(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鄒衍)의 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불우함 그들과 같으니,
황천(皇天)은 어이해서 아무런 상서로움도 없는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회
연단은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마지막 태자인 단(丹)을 가리킨다.
자객 형가를 시켜 진왕(진시황)을 죽이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앙앙불락한 진나라가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 왕은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바쳤다.
또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인 추연(기원전 305~240)은
주변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억울했던 그가
하늘을 우러러 곡을 하자 초여름인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왕거인은 결국 연나라 태자 단과 추연처럼 억울한 지경에 빠졌음을 읊은 것이다.
왕거인이 감옥에서 벽서를 걸자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벼락이 내리치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진성여왕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하게 된다.
하늘이 두려웠던 것일까?
“신라는 곧 망한다”는 대자보
유학파 최치원을 등용하는 수습책도 무용지물
결국은.......자진사퇴
「 “신라여 망하라! 여왕이야 망하라!”」
그렇다면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붙었다(혹은 뿌려졌다)는
그 수수께끼 같은 벽보(혹은 전단)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관작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우삼아간은 진성여왕의 측근에 있는 3~4명의 총신이고,
부이는 부호를 가리킨다.”」
<<<삼국유사>>>
‘나무(南無)’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나무망국’은 나라가 망하기를 절대적으로 바란다는 뜻이다.
맨 마지막의 ‘사바하(娑婆訶)’는 앞의 주문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불교용어이다.
‘소판’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정부(혹은 남편)인 위홍의 관작(신라 17관등 중 세번째)이다. ‘부이’는 진성여왕의 유모를 가리킨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당대 신라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애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자보(혹은 전단)는
「 ‘신라여! 여왕이여! 위홍과 부호 등이여! 망하리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회
대자보에 깃든 망조~
신라 진성여왕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진성여왕대부터 망조가 든다.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처럼 몇몇 총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지방에서는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성여왕은 대자보 사건 이후
894년
당나라 유학파 최치원(857~?)이 건의한 시무 10조를 받아들이는 등 안간힘을 쓴다. 최치원은 아찬(6등급)에 기용된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몸부림은 끝내 수포로 돌아간다.
아마도 기득권층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최치원은 곧 외직(태수)으로 밀려났다.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몸부림은 수포로 돌아가면서
신라는 급격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변화를 이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라는 이후 급속도로 망국의 길로 빠진다.
905년(효공왕 9년)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도선 선사는 공공연하게
“신라의 운수는 이제 끝”이라고 주장했다.
궁예는 미륵이 나타나 새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미륵사상을 퍼뜨렸다.
결국 서라벌 조정의 길목에 걸린(혹은 뿌려진) 대자보(혹은 전단)는
신라 망국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대자보(전단) 이후 4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여왕의 자진사퇴
897년
국정능력을 상실한 진성여왕은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난 것은
모두 내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양위할 것이다.”이라고 자책하면서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태자 요(효공왕)에게 흔쾌히 왕위를 물려주었다.
재위 11년 만이다
진성여왕은 역사적으로 ‘음란한 여왕’이자 ‘측근 정치의 전형’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회
대자보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된다.
“여주(女主·문정왕후)가 정치를 농단하고 있다!”
1547년(명종 2년) 9월18일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은 어떤가.
이 때 붙은 벽보의 글씨는 매우 선동적인 붉은 글씨였다.
「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女主執政于上)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중추월 그믐날’ .”」
이 무슨 벽보인가?
여기서 ‘여주’는 다름아닌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일컫는다.
문정왕후는 오빠인 윤원형(즉 명종의 외숙)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1545년)
윤임(죽은 인종의 외숙) 일파를 숙청했다.
벽서에 언급된 ‘이기’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괘서는 바로 이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벽서는 오히려 윤원형 일파에게 ‘정적 몰이’의 명분을 주었다.
「 “괘서(대자보)가 나도는 것은 여전히 불온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로써 윤원형 일파는 을사사화 때 쫓아내거나 죽이지 못한 반대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것을 “정미사화”, 혹은 “벽서의 옥”이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벽서 역시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결국 의적(?)임꺽정이 출현한 것이다.
벽서가 붙은 지 12년이 지난 1559~62년,
즉 3년 동안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었다.
1559년 3월27일
다름아닌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의 실권자가 모여 도적떼를 없앨 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요원의 들불처럼 퍼지는 도적을 막지 못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회
<명종실록>을 쓴 사관이 핵심을 찔렀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요즘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다.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사관은
「 “중앙 조정과 지방 수령이 깨끗하면 칼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덧붙였다.
사관의 이말은 무슨 의미인가?
큰 도적은 임꺽정이나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외면한채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데만 골몰한 ‘여주(女主) 세력’,
즉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라는 것이다
12년 전 대자보가 붙은 이유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대자보 베껴가는 백성들~~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는 숙종 때는 어떤 일이 있었나.
“1684년 이후 무뢰배가 서로 모여 살주계를 만들었다.
계의 책자에
「”‘양반을 살육할 것“」
「 “부녀자를 겁탈할 것”」
「 ”재물을 약탈할 것“」이라는
약조가 있었다.
어떤 검계는 ”장차 난리가 나면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고 공언하기도 했다.<<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
숙종의 46년 재위동안 잦은 환국정치와
노·소론의 갈등 등이 염증을 불렀다.
백성들 사이에서 바야흐로 천민층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는 시기였다.
신분제가 동요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결코 태평한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익명의 대자보가 6번이나 붙었다.
1679년(숙종 5년) 우의정 오시수의 상언(백성이 임금에 글을 올리는 일)이 당대의 상황을 일러준다.
「“인심이 깨끗하지 못해 차마 듣지도 못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로 여러 신하의 죄목을 꾸미고 익명서를 만들어 민가나 관아의 담장에 붙이거나 널리 퍼뜨리고, 백성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다투어 적는 것이 마치 과거장의 문제를 베끼듯 합니다.”」
<<비변사등록>>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회
대자보 붙이면 교수형~~
그러자 이번엔 아주 촘촘한 처벌규정을 만들었다.
그것이 이른바 ‘익명서정죄사목’이다.
<<비변사등록>>
우선 익명서를 투서한 자는 ‘대명률’(명나라 형법서)에 따라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만약 방을 붙인 것이 대로변이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관청이면 수직자가,
개인집이면 집주인이 즉시 불살라야 했다.
만약 그렇게 처리하지 않은 자는
유배 3000리와 전가족 변방 부처의 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자보와 전단은 줄지 않았다.
숙종 때는 1675~1720년 사이에 6차례나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이는 숙종시대가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1679년(숙종 5년)에는
「“누구 누구가 나라에 원한을 갖고 날짜를 정해 난을 일으킨다”」는
익명서까지 대궐문에 붙었다.
1711년(숙종 37년)에는
대청외교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숭명배청의 의리를 내세워 빨리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영은문에 걸렸다.
대자보는 명나라 태조 때 편찬된 <홍무정운>의 자체를 그대로 따랐다.
범인을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조정은 대대적인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죄로
포도대장 유취상과 종사관을 투옥시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범인을 무리하게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사건이 잇따르는 등 후유증까지 낳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1714년(숙종 40년)에도
「 “도둑이 숭례문에 익명서를 건 사건이 있는데 말이 지극히 부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숭례문 괘서사건’이다.
대자보가 동시다발적으로 걸린 까닭~~
영조는 손자인 정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52년 간의 장기집권이었던 탓도 있지만,
영조임금이 자신의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 때문에
민심의 이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종독살설은 결국 1728년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비화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2회
그 해(1728년) 1월,
서소문에 괘서(掛書)가 붙었다.
지경연사 김동필이 영조에게 고하는 장면을 보자
「“1월 11일 서소문에 괘서가 붙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주의 괘서와 같다고 합니다. 전주 괘서는 호남 사람들이 다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남원 시장에도 흉서가 걸렸는데 서소문에도 걸렸으니….”」
그러자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소문 괘서는 모두 한사람의 소행인듯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이 시기에 한성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도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과 함께
창의문(종로구) 밖에 적병이 출몰했다는 유언비어까지….
이 때문에 한성 인근의 백성들은 물론 남산 아래 사대부들까지 가족을 이끌고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때문에 나루터 길이 막히고
경기도 일대 안성과 용인 등은 마을이 텅 빌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영조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4개 읍의 수령을 급히 무신으로 교체했을까.
그러나 영조는 전주와 남원에 이어 서울 서소문에까지 걸린 괘서의 범인 색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선왕(숙종) 때 연은문에 흉서가 걸렸는데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혹시 사소한 원한을 갚으려고 무고하는 경우도 있고 죄없는 사람이 걸려들기도 하니….”」
<<영조실록>>
영조는 이른바 비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난 뒤 다시 한성부의 종가에서 또 한차례의 대자보가 걸렸다.
이때부터 공개수사로 바꿨다.
「“어떤 요망한 사람이 이 윤기(倫紀)없는 요악한 말을 지어내어 민중을 미혹시킬 계획을 하는데 부도(不道)할 뿐 아니라 곧 난민(亂民)이니….”」
<<영조실록 1728년 2월 19일>>
이 대자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경종 독살설과 관련,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공개수사를 통해 범인색출작전을 펼친 지 불과 25일 뒤(3월15일)에 무신난이 발생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3회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부도지언(不道之言)’~~
무신란이 무엇인가.
경종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탄(坦)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한 거병이었다.
무신난에는 영남에서만 7만명,
전국적으로는 20만명이 가세하는 등 엄청난 기세를 탔다.
이 때 난을 이끈 이인좌가
「“(반란군의)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다”
<<당의통략>>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3월26일 체포된 이인좌 등의 진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거병에 앞서 서소문·종가·남원· 전주에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난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에게 혼선을 빚게 하려고 전국 각지에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과연 대자보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망측했기에 영조 시대의 각 문헌은
그저 ‘부도지언(不道之言)’이라는 표현만 썼을까.
심지어 영조는 사관에게 특별히
“괘서의 내용을 절대 기록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린다.
아마도 ‘영조 당신은 이복형(경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된 자야!’라고 외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다!”~~
그로부터 27년이나 흐른
1755년(영조 31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급히 장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 대자보가 붙은 것이다.
<영조실록>은 그것을 ‘흉서(凶書)’라 했다.
대대적인 범인 색출에 나섰다.
가뜩이나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신축년(1721년·노론 4대신 등 노론이 쫓겨난 사건)과
임인년(1722년·목호룡 고변사건) 때의 잔당과 무신년(1728년·이인좌의 난)의 잔적들로서 번성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원망함이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났는데, 이 때 흉서가 걸렸다.”」
흉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흉(凶)했다.
역시 워낙 참담한 표현이어서 자세히 쓸 수는 없다고 했다.
내용 가운데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有奸臣滿朝 民陷塗炭)”」는 구절이 들어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4회
장계를 받아본 영조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황건적 같은 무리구나.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의 잔당이다.
그러나 과인은 무신년 때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일이 다반사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어찌보면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영조의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대적인 수사 끝에 이번에는
흉서를 내건 일당이 붙잡혔다.
주범은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지는 무신난(이인좌의 난) 때 제주도를 거쳐 나주로 유배됐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대역죄의 형벌로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집을 헐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파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이 나주괘서 사건으로 죽은 이가 41명, 유배 20명 등 모두 65명이 엄벌을 받았다.
이렇듯 나름 치세에 선전했다는 평을 듣는 영조지만
이복형 독살설 때문에 재위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당대의 민심은 분명했던 것 같다.
‘당신은 이복형을 죽이고 임금이 된 사람이야’라는
손가락질이 받았던 것이다.
재위기간 내내 무려 15번이나 흉악한 대자보가 붙을만큼….
“나의 거병을 따르라!”~~
1801년(순조 1년)
경상도 하동·의령·창원에서 민란을 선동하는 대자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장력이나 무예, 힘이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고 실농한 사람들은 나의 거병을 따르라. 재상이 될만한 자는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만한 자는 장수를 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부림을 얻을 것이요, 꾀 있는 자는 가까이 할 것이다. 가난한 자는 풍요로움을 얻을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줄 것이다.”」
<<승정원일기. 1801년 12월 26일>>
하얀 무명에 한자로 쓴 대자보의 밑에는
「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십쟁일구’의 뜻이 무엇인지?
설왕설래했다.
수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5회
「‘십쟁일구(十爭一口)’」에서 ‘爭’의 윗부분에 있는
‘爪(조)’는 글씨를 보면 ‘月(월)’자와 비슷하고,
밑의 ‘尹(윤)’은 ‘甲(갑)’으로 보인다는 것.
또 ‘一’은 ‘口’와 합치면 ‘日(일)’이 된다는 것.
따라서 ‘시월갑일(十月甲日)에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10월 갑자일인 21일에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또 대자보 가운데는
「‘일인지구(一人之口)
이과지비(二戈之卑)
사두지자(四頭之字)
일자지열(一目之烈)
인물사원(人勿思遠)
삼칠가려(三七可慮)’」라는
파자와 함께 「‘힘있는 자는 뒤를 따르고 힘없는 자는 산속으로 들어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잇달아 대자보를 내건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유랑하던 지식인들이었다.
대자보(전단)의 본질~~
「‘진선(進善)의 정(旌)’」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요 임금이 길가에 기(旗)를 세워놓고,
임금에게 교훈이 될만한 말(선언·善言)을 드릴 자가 있으면
그 깃발 아래 서게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옛날 주나라 여왕은 비방하는 자를 감시했고,
그들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그러자 점차 비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나눴다.
그러자 여왕은 재상 소공을 불러 자랑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6회
“그것보시오.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감히 말하지 않게 되었소. 어떻소.”
그러자 소공은 손사래를 쳤디.
「“아닙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어떻습니까. 둑이 터지는 것처럼 엄청난 피해자가 나올 것입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이 말하게 해야 합니다.”」
소공은
“정치를 잘하고 못함이 다 백성들의 말에 반영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무릇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
<<기원전 841년)>> 이후
두 재상인 소공과 주공이 14년간이나 정무를 공동으로 맡았다.
그것을 역사는 「‘공화(共和)의 시초’」라 일컫는다.
앞서 거론한 대자보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의 시사점은 무엇인가!!
바로 대자보(혹은 전단)는 민심이 이반되고,
정치가 어지러울 때 혹은 망조가 들 때 어김없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자보의 출발은
「‘백성과의 불통’」이다.
역사적으로 대자보와 같은 벽서는 언로가 불통일 때,
정치가 어지러울 때 죽음을 무릅 쓴 백성들이 내걸었다.
백성이 목숨을 걸고 익명서를 걸거나 뿌릴 때의 시대는 혼란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언제나 상기해야 할 ‘금과옥조’는 바로 “군주민수 君舟民水” 바로 이것이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순자> ‘왕제’편>>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시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가 바로
‘군주민수(君舟民水)’다 .
당시에도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돼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는데.....
이번에도 트럼프가 미대선에서 재선에 성공,동맹국 무시 정책. 고관세 정책 등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인데
공교롭게도 ‘윤’탄핵을 눈앞에 두고 ‘윤’이 업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또 다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이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군주민수(君舟民水)’의 사자성어가
떠오르고.
‘역천자망(逆天者亡)’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하기 마련이다’는 사자성어가 떠 오른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혼용무도(昏庸無道)’를 다시금 생각 해 보면서 ‘군주’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도를 행하지 않음이 모든 국민의 허탈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나라가 혼돈에 빠지고 국민의 자괴심이 커지는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탄핵정국이 지나가면 새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선택의 시간이 온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7회
조선 11대 임금 중종은 기존 세력인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초야에 처사로 지내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사림(士林) 조광조를 기용하였으나
조광조가 훈구세력의 견제를 넘어 오히여 훈구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자 양 세력이 견제와 균형을 원했던 중종은 자신이 기용한 조광조를 죽임으로서 사림은 또다시 초야에 묻히게 된다.
1547년(명종 2년) 9월18일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대자보)사건~
「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女主執政于上) .....”」 살펴 본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공식적인 대자보가 아닌 조선욍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을 통해 이후 조선 성리학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 대비(大妃)는 한낱 궁중의 과부일뿐”」
“慈殿下過深宮之一寡婦”
연산군 부터 명종때 까지 이어진 조선의 4대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는 사림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전회위복이라고 해야할까?
덕분에 선비들은 향촌과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에 힘썼고 그 성과는 고수란히 조선 성리학의 황금기를 여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도학의 거벽이었다.
조식은 특히 당대의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관념적인 이기론(理氣論)을 배격하고 실천적인 심성 수양을 주창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수양하는 척도로 ‘경敬’과 ‘의義’을 내세웠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선비답지 않게 칼을 차고 다니며
그것을 경의검(敬義劒)이라고 불렀다.
칼의 표면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겼다.
‘안으로 밝히는 것이 경敬이요, 밖으로 끊는 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일까?
조식이 구도의 길을 걸을 무렵 조선은 문정왕후의 치마폭 아레 흔들리고 있었다.
외척들과 훈구파의 가렴주구(苛斂誅求: 기혹하게 세금거두고
백성재물을 갈취)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절규가 강산을 뒤덮고 있었다.
조식은 비록 처사(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삶)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민초의 고통과 신음을 애달파 한 인물이다.
친구 성운이 쓴 조식의 묘비문에는
그가 달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퍼 노래를 부르고 마친 뒤에는
눈물을 흘렀다고 적혀있다.
백성의 처지에 대한 그의 공감은 임금을 향한 직설적인 충고로 이어졌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8회
「“이미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 버렸고 민심도 이반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100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 버린 큰 나무가 있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저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가 오랩니다...
(중략) .....
자전(어머니)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한낱 깊숙한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사이실 뿐이나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을 어찌 감당하시렴니까?” 」
<조식‘남명집’ 을묘사직상소>
이 글이 조선역사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다.
명종 10년( 1555년) 임금이 올곧은 선비라 하여 특별히 단성현감 직을 재수하자 조식은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며 작심한 듯 거론한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망했고 민심이 이반되었다면서 왕의
어머니이자 실질적인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겨냥한 것이다.
대비를 한낱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린 것이다.
대비면 대비답게 국사는 접고 내명부나 돌보라는 것이다.
문정왕후와 그 외척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지 않고는 내 뱉을 수 없는 발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敬과 의義의 표출인것이었다,
안으로 밝히는 것은 마음이요, 밖으로 끊은 것은 사욕이다
선비의 마음은 백성의 고통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는가르친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준 사람이다.
조식은 ’깨어있는 지성‘으로서 ’행동하는 양심‘을 추구했다.
그의 문하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이 대거 배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곽재우, 김면,정인홍 등 대표적인 의병들이 조식의 제자였다.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
남명 조식이 말한 경의(敬義)의 뜻을 체감하려면 먼저
그 시절 백성들이 처한 현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을묘사직소‘에는 그 낯 뜨거운 실상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 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러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안의 신하는 후원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는 듯하고 궁궐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 뛰듯 합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조식 남명집 ’을묘사직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9회
그의 말처럼 당시 조선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연이은 사화로 사림은 쑥대밭이 되었다. 선비의 기개가 꺾이자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관료들은 탐욕에 물들었다, 외척들과 훈구파는 조정을 자기사람들로 채우며 재물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지방관들은 백성을 쥐어짜서 윗 사람들에게 상납하고 자신들의 사욕을 채웠으며 이를 견제해야 할 언론과 낭관들은 무력감에 본분을 잊고 주색으로 소일을 할 뿐 이었다.
이러니 나라가 망할 조짐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백성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장수의 자격에 합당한 지휘관이 없고 성에 군졸도 없어서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했는지 왕의 신령한 위험이 떨치지 못하여 마치 절하듯 했습니다.”」
<조식 남명집 ’을묘사직소‘>
조정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민심이 흩어지는 판국에 나라의 안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명종 10년(1555) 5월,
대마도의 왜구가 배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 연안인 달랑포(해남 해안마을)에 쳐 들어왔다 .
순식간에 10여곳의 진이 함락되고 병졸들은 살해당했다.
이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규군이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병마절도사 장군을 잃고 병사들이 궤멸되었다,
결국 중앙에서 편성한 정예군이 내려가 물리치기는 햇으나 나라의 위신은 말이 아니었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전조라고 일컬어지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다.
나라가 망조를 보이고 가렴주구가 끝없이 이어지자 몇 명의 뜻있는 신하들이 무너진 국정의 실태를 고하며 국정 쇄신을 촉구했다.
명종 12년(1557년)
단양군수 황준량이 올린 ’민폐십조‘도 그 중 하나다
단양고을은 예로부터 척박한 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부세(賦稅:공납.군포 등)가 가혹하여 농민들이 대거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고을은 폐허로 변했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친척과 이웃의 세금을 모두 짊어지게 되어 커다란 고통과 신음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0회
단양군수 황준량은
이것이 비단 단양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조선 전역 360여 개 고을의 사정이 단양군과 다르지 않았다니 민생이 이미 파탄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공납의 폐단이 신각했는데 공남품을 대신 납부해 주고 두세배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방납(防納)이 백성을 사지로 몰고 있었다.
유랑길에 나선 백성들도 도을에 암은 사람들도 벼랑 끝에 서 것처럼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준량은 그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집도 없이 떠도는 백성이 궁벽한 골짜기에 이르러 원망에 차서 울부짓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쳤는데도 위로 통할 수가 없으니 하늘이 감시를 소홀히 하면 반드시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형세가 흙더미와 같아서 허물어지려 하는데 개미구멍을 막지 않았다가 이로 인해 말 할 수 없는 화란禍亂을 미리 방비하지 못하게 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명종실록 12년(1557)5월7일>
단양군수 황준량의 우려와 경고는 임꺽정(~1562)의 난으로 현실화 되었다.
임꺽정이 <조선실록>에 등장 한 것은
명종 임금 14년(1559)3월27일 이었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삼정승이 모여 황해도를 누비는 도적떼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였는데 그 도적떼의 수장이 바로 임꺽정이었다.
백정출신인 임꺽정은 황해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다가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자 평안도 ,강원도,경기도 등지로 무대를 넓혀 나갔다.
그들은 사대부와 토호의 집을 터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관청까지 습격하여 조장의 우환으로 떠 올랐다.
임꺽정과 그의 무리가 토포사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에게 붙잡혀 퍼형된 것은 명종 17년(1562년) 1월이다.
단순한 도적떼라면 조정에서 강력한 착결의지를 보였는데도 3년이나 활동을 이어 갔을 리 다.
그들의 활동은 농민.상인. 대장장이.노비 등 다양한 신분의 백성이 참여하여 흉년과 전염병으로 들판에 시체가 가득한데 살기위해 무슨 짓인들 못했겠는가?
임금과 조정에 등을 돌린 민심은 그렇게 임꺽정에게 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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