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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11)/받은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1회

임꺽정 일당이 관군의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 나가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협력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백성은 물론 아전. 역리까지 나서서 정보와 도주로와 은신처를 제공하니 쉽게 잡힐 리가 만무했다.

당시 황해도 일대 수령들 가운데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일가친척들이 많았다.
이들에 대한 반감은 역으로 임꺽정을 의로운 도적으로 만들었다,

실제의 임꺽정은 민가를 불태우거나 사람의 배를 가르는 등 잔인한 면모를 갖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성에게는 참혹한 현실을 위로할 판타지가 필요했고 졸지에 ’의적 임꺽정‘이 그 들 요구에 딱 들어 맞았다,

「 재상들의 황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깍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
기한(飢寒:굶주림과 추위)이 절박하여 잠시라도 연명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그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중략)....... 모이면 도적이고 훝어지면 백성인 것이다.」
<명종실록 16년(1561년 10월 6일>

<명종실록>의 사관들은 사평을 통해 난의 원인을 진단했다.
사관들이 볼 때 임꺽정 일당중 핵심은 고작 8~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려 도적떼에 목숨을 의탁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죄인은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과 훈구파였다.
진정한 도적은 임꺽정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였다.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라는 말은 그래서  울림이 큰 외침이었다.

“물 뿌리고 비질할 줄도 모르면서 천상의 이치라니......”

남명 조식은 이처럼 나라가 망조를 보이던 때 조정에 출사하는 대신 산중의 처사(處士)로
살아갔다.
물론 남명이 아예 과거시험을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을묘사직소‘에서 언급 했듯이 세차례 과거를 본 겨험이 있다. 중종 29년(1534년)에도 문과에 응시했다. 그해 시험문제 가운데 하나가 <사경>, ’소고‘편의 ’민암‘이라는 글귀였다

그 주석에  다음과 같은 풀이가 잇다.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엎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백성보다 험한 것이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2회

남명 조식은 이에 호응한듯한 시가를 한 편 남겼다.

「“백성이 불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 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어버리기 한다. (중략)
하늘이 보고 들으심이 바로 이 백성에게 있다.
하늘은 백성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니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와 같다.
(중략) 비록 그 험함이 백성에게 있다지만 어찌 임금의 덕에서 말미암지 않겠는가?
(중략) 나로 말미암아 편안하기도 하고 나로 말미암아 위태롭기도 하니
백성을 험하다 말하지 마라 !
백성은 험하지 않느리라.”」
<조식 ’남명집‘ 민암부>

이 무렵 조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처가 근처에서 지은 산해정( 현재 김해)에서 학문을 닦고 있었다. 당시 그는 조정에 출사해 경륜을 펼치느냐, 처사로 남아 지조를 지키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나랏일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백성이 점점 사지로 몰리는 상황에서 결국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관료로서 출세보다는 자기수양과 후배양성이 백성에게 보탬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는 산해정에 이어 고향의 뇌룡정( 현재 합천)과 지리산아레 산천재(현재 산청)로 거처를 옮겨 다니며 평생 구도에 던념을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참된 선비의 길을 갔다.


「“청컨대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소리가 안 난다네
나도 어찌 하면 저 두륜산 천왕봉 처럼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조식 ’남명집‘>

자기수양에 임하는 남명의 자세는 이와 같았다.
종은 본래 울림을 통해 사람을 감동시키는 물건이다.
천 석들이 종은 남명 조식이 추구한 거대한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곡식  천석이 들어가는 큰 종은 웬만해서는 소리를 낼 수가 없다, 하지만 한 번 소리를 내면 맑고 울림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그는 망조가 든 나라에 이런 울림을 주려고 했다.
그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자기수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3회
그는 마치 천둥 번개에도 끄덕없이 의연히 서 있는 지리산 천왕봉처럼 이를 위해 조식은 늘 허리춤에 조그마한 방울을 달고 다녔다.

성성자(惺惺者)라고 이름을 붙인 그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낼 때 마다 정신을 일깨우며 느슨해지기 쉬운 수양의 끈을 다 잡았다.

산중의 처사가  어지러운 세상에 울림을 주는 방법 가운데는 후학 양성만한 것도 없다,
조식의 문하에는
곽재우 등 기라성 같은 학자와 문신들이 모여 들었다.
조식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은 실천적인 자기 수양이었다.

조식이 수양의 척도로 삼은 것은 경敬과 의義는 ‘깨어있는 지성’으로서
‘행동하는 양심’을 추구하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16세기 중반 무렵 조선의 선비들은 ‘출처出處’, 즉 벼슬길을 찾아 나설 것이야? 물러나 앉아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 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기묘사회(1519년), 을사사화(1545년)의 여파로 외척들과 훈구파가 득세한 조정은 올바른 도가 행해지기 어려운 실정 이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은 향촌에서 학문에 몰두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조선 성리학은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서경덕. 노수신.조식 등 뛰어난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학자들이 학설을 냈는데 점차 논의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4회  

이황은 남송의  주자朱子를 삶의 모델로 삼고 사려깊은 행보를 이어 간다.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산을  높이고”

「“내가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깨우쳐 줄 만한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그래서 수년간을 헤매면서도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 헛되이 마음과 생각만  써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탐구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고 밤새도록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도 잠을 잦디 않다가 결국에는 마음의 병을 얻어 여러 해 동안이나 학문을 중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 만약 내가 참된 스승과 벗을 얻어 미로에서 길을 지시 받았더라면 어찌 이처럼 심력만 허비하고 늙도록 아무 소득이 없느 지경에 까지 이르렀겠는가.“」 

<이황 ‘퇴계집’ 언행록>

퇴계 이황은 오늘날의 안동에서 7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기록에는 부친 이식의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종 1품)으로 나오는데 이는  후일 이황이 사림의 종주로 떠오르면서 추증된 것이다.

이식은 이황이 태어나던 해(1501년)에 뒤늦게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모친 박씨는 직접 농사와 양잠을 하며 어렵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이황은 집안 형편상 공부 환경은 어려웠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이왕이 성리학에 눈을 뜬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때부터 였으며 20대 이후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을 했고 그는 서른 살 이 되던 중종 19년(15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황의 벼슬살이는 겉으론 순탄해 보였지만 속내는 고뇌의 연속이었다.
기묘사화(1519년) 이후 조정과 성비의 풍속은 날이 갈수록 문란해 졌고
남명 조식이 올린 ‘을묘사직소“에서 개탄한 명종 대의 타락상도 이미 이때부터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관료들은 주색에 빠져 재물과 세력을 늘리는데 혈안이 돼 있었고
유생들은 날마다 농담으로 소일하며 예법과 도학을 비웃었다.

퇴계는 홍문관 수찬( 정 6품)등을 역임 했음나 중종 말년에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지자 성묘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3년).

1545년 명종 즉위 이후 이황은  홍문관부재학(정3품).공조참판(종2품) 등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관직을 사퇴하거나 아예 응하지 않았다.

그 횟수만 무려 20여회에 이르렀다,
그 나마 풍기 군수로 짧게 재임하며(1548-1549) 소수사원 사액을 청원한 일이 눈에 뛰는 업적인데 이 자리마저 1년여 만에 그만두고 고향땅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퇴계는 이 무렵 을사사화(1545) 이후 외척과 훈구파의 득세 때문에 벼슬살이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5회

이황이  후일 고봉 기대승에게 자기가 벼슬에서 물러나려 한 속내를  밝혔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뒀으면서도 과거를 보고 아니다 싶으면 물러날 계획이었으나 뜻데로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며 기대승으로 하여금 이황 자신의 경험을 경계로 삼도록 했다.


퇴계 이황은 학문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기대승. 율곡 이이 등 젊음 선비들을 중심으로 주자학 그룹이 형성된 것도 이 무렵이다.

「“선생은 집에 있을 때도 반드시 의관을 바로하고 책상에 마주 앉아 글을 읽거나 향불을 피운 채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연세가 점점 많아지고 병은 깊어 갔지만 학문을 진전 시키기 위해 더욱 힘쓰고 도를 지키는데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후학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정성을 다 했다. 몸에 병이 들어도 강론을 빼먹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 제자에게도 이름 대신 ‘너’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다.
선비를 맞이하거나 전송할 적에는 반드시 섬돌 아래로 내려와서 하였다.

멀리서  찾아오면 비록 거친 밥에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함께 숟가락을 떴다. 후학에게 스승의 도를 자처하지 않고 시종일관 친구처럼 대했다.
학문 뿐 아니라 인격까지 두루 갖춘 스승이었다 “」
<김성일 ‘학봉집’ 퇴계선생 편>

선조 2년(1569년)3월 4일 밤.

임금이 야대(청夜對廳.왕이 특정한 신하를 청해 만나던 장소)으로 이황을 불러 들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충언을 듣고자 함이었다.

“경이 아직 치사(致仕: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 할 때가 아닌데 어째서 갑자기 귀향하고자 하는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18세의 어린 왕은 만류하며 이유를 물었다.
이황은 자신을 낮추며 답하였다.

“ 소신은 가끔 경연에서 ‘현실에 맞지 않고 실상이 없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신이 늙고 둔하여 실무에 남보다 뒤 떨어지는데도 헛이름을 얻어 세상을 속였으며 위로는 임금까지 속이게 되었습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6회

이황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이황이 신진사림( 율곡 이이 기대승,...등)의 정신적 스승이자 최대 후원자로 떠오르면서 그를 폄하하는 의견 또한 적지않게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현실에 맞지  않고 실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현실개혁 보다는 도덕정치를 우선시 하는 이황의 정치관을 겨냥한 것이다.
이황은 비판을 받아 들이면서도 소신은 굽히지 않았다.
임금과의 독대에서도 자신이 믿는 치도(治道: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간곡히 아뢰었다.

「 “ 옛사람의 말에 ‘태평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평평한 세상에는 걱정거리에 대한 방비가ㅣ 없게 마련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고 여러 신하드 f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걱정거리에 대한 방비가 없으면 임금은 반드시 교만한 마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학문 공부를 잠깐이라도 중단하지 않아야 이러한 사사로운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는 공부는 성현들이 남긴 글에 밝혀져 있으니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간다(克己復禮)’는 가르침 등이 그 것입니다,

<이황 ‘퇴계집’ 언행록>

이황은 밝은 임금이 세상을 다스려도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 화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대목은 향후 조선이 겪게 될 시행착오 즉, 당쟁과 전란을 예고한 것이기에 더욱 각별하다 할 것이다.

‘밝은 임금이 위태롭다’는 무슨 뜻인가?
밝은 임금의 자신만만한  뛰어난 자질은 교만을 부르기 십상이다. 이황은 선조의 성정에서 이미 그런 징후를 읽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옛글에 대한 이해가 빨라 신하들이 임금을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장성하면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고 혼자의 지혜로 국사를 주무를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이황의 우려는 나중에 현실이 되었다.
후일 교만에 빠진 선조는 이이의 충정어린 개혁안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편을
갈라 신하들이 서로  다투는 붕당정치를 이용했다. 이황은 어떻게 해서든 어린 임금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 태평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남쪽과 북쪽에는 분쟁의 조짐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고 나라의 곳간은 비었습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갑자기 전쟁이라ㅣ도 터지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후ᅟᅳᇀ어질 형세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방비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황 ‘퇴계집’ 언행록>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47회

이황은 옹이 교만에 빠지면 난리가 일어날 거라고 간곡히 조언은 했다.

마치 23년 후 일어날 임진진왜란을 미리 예감한 듯한  발언이다.

그렇다면 퇴계 이황은
구체적인 개혁보다는 왕이 교만, 즉, 독단이나 편벽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결국 임금이 독단으로 국사를 주무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재상론과 엇비슷하다.

이를 위해 언로를 활성화 하고 권력화하고 이념화하여 군왕을 도덕정치로 견인하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에 맞지 않고 실상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황은 원론만 주구장창 읊어대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황은
임금을 견인할 수 있을 만큼
“활기차고 힘있고 신성불가침인 언로”를 강조했다,

특히 이황은 언로가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하들이  외정(조정의 업무)은 물론 내정(궁중의 일)까지도 간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신하가 언로를 권력화 하여 임금과 전면적으로 시비를 다투는 군신공치(君臣共治:군왕과 신하가 협의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의미했다.

궁중의 일은 군왕 고유의 영역이라 하여 신하들은 일체 언급하지 않음이 관습인데
이황은 이 분야도 신하들이 관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은 전통적으로 신하들이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월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황은 사후에
문묘종사(도학의 우수한 인재를 공자 사당에 모심)의 영광을 누리고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는다.

‘이황의 도덕’은 마침내 ‘조선의 도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도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8회

남명조식은 이렇게 말을 남겼다.

1570년
이황이 세상을 떠 난 직후의 일화다.

“내 비석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했다는 이황의 유언을 전해 듣고
조식은 이렇게 푸념했다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초야에 묻혀 사는 사림)라니 평생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황이 세상을 헛된 이름을 다 누리고선 처사의 절개까지 훔치려 한다는 일각의  인식을 들어 낸다.
남명 조식의 눈에 이황은 표리가 부동인 인물로 보였을까?

이황은 선조에게 작별을 고하는 자리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필담을 주고 받으면서 신뢰를 쌓아온 기대승을 천거했다. 

하지만 그가 귀향한 후 신진사림을 이끌고 정국을 주도한 사람은 그가추천한 기대승이 아니라 율곡 이이였다.

주역에 정통한 이황은 죽기전 어느날 제자 이 덕홍에게  걱정을 털어 놓는다
‘요새’ 효상(주역의 괘로서 변화의 형상을 뜻함)이 매우 우려스럽다.

“선생님은 이미 산림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다는 말씀입니까?”
“내 한 몸이야 상관 없지만 저 사람의 위태함이나 나라의 쇠잔함 이라면 어쩌겠느냐?”


퇴계 이황이 언로를 새로이 열어 조선을 ‘ 도덕의 나라’로 이끌었다면
율곡 이이( 1536-1584)
는 신진 사림으로 도덕정치의 실상을 보여 줬다,

율곡이이와 그의 시대 역시 들뜬 논의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 쳤다.

이 시점에서 이미 붕당의 등장은 진즉부터 예고 되어 있었다.

이준경은
죽기전에 올리는 유차(遺箚:유서 형식의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붕당정치의 폐단을 경고했다.

「“붕당의 사론(사사로운 논의)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잘못한 과실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서로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단속한다든가 독서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면서 고담대언: 고상한 이야기와 큰소리)으로 친구나 사귀는 자를 훌륭하게 여김으로써 마침내  허위의 풍조가 생겨 났습니다.군자는 함께 어울려도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은 저희무리와 함께 하도록 버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일은 바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보신 바 이런 폐단을 제거하는데 힘써야 하실 때입니다.“」
  <선조실록 5년 1572년 7월7일>
이준경의 유차를 접한 율곡이는 분노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즉각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이준경의 말이 “음해하는 표본”이라고 공격을 했다.

여기에는 붕당정치에 대한 그이 소신도 한 몫을 했다.

「“신이 생각건데 신하의 악은 사당(사사로운 당) 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임금이 몾시 미워하는 것도 그 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데는 반드시 이것을  효시
로 삼으니 그 저 임금이 살피지 못할 까 염려될 뿐입니다.......(중략).......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선비는 도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붕당을 짓기 때문에 당이 성할수록 임금도 더욱 성스럽고 나라도 더욱 편안해집니다.
임금은 오히려 그러한 당이 적을까 염려할지언정 어찌 그 무리지어 모여드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이이 성학집 ‘위징편>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49회

율곡 이이는 붕당을 군자당과 사당으로 구분하고 사당은 경계해야하지만 군자당은  권장해야한다고 주장을 한 인물이다.
이는 주자의 견해에 기초한 이론이었다.

주자는 붕당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자의 당이라면 임금도 그 당의 일원이 되게 이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조선판 붕당 정치판은  율곡이이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율곡이이는
신의겸. 정철. 윤두수. 송익필 등 일부 동료들과 함께 사적으로 조정의 대소사를 주물렀다,
이런 작풍은 소위 ‘사랑방 공론’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반대 세력을 오히려 키워나갔다.

신진 사림 내부에서 조차도 소외된 사림이 생겨나기 마련이며 그들이 점차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조선당쟁사의 공식적인  출발점인 ‘동서분당’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임금인 선조와 관계도 문제였다.
율곡이이는 기본적으로  똑똑한 인물이었다.
선조역시 나름 명석하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불이다.
그런데 이이가 자꾸 임금을 훈계하려 드니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경연강의>을 저술한  김우옹은 이에 대해
“말이 지나치게 통쾌하고 강력했으며 건의나 조치가 너무 성급하였다”:라고 평을 했다.

그럼 율곡이이는
‘도덕의 조선’을 어떻게 이끌어 갈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가?

그는 무엇보다  능력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그는 능력만 있다면 신분은 개의치 않았다.

하는 선조가 대신들에게 이조의 관직임용에 관한 의견으루 구했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보직으로 가장 관심이 많은 보직이었다.

문제는 임용후보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이조에 연소한 사람을 등용해서는 아니 됩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조의 관원은 인재만을 택해야 하니 나이가 젊더라도 쓸만한 재주가 있으면 임용을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선비의 습관이 바르지 않다면 조정에서 어진 스승을 뽑아 교화하고 中正)한 데로 돌어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이 율곡전>

이이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미천한 신분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특히 서얼들에 대해 전향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양반가의 흔외 자식인 서얼은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뜻을 펼 수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0회

율곡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서얼을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김훈도나 이훈도 같은 이가 있어도 쓰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이이 율곡전. 어록편>

이이는 비록 서얼들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럼 없이 교류를 했다.
송익필은 서얼인 아버지가 주인을 역모로 고변한 덕분에 양반 신분을 얻은 인물이다.
그런데 후일 그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지면서 옛 주인 일가에 쫒기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율곡이이는 어려서부터 송익필과 학문을 교류한 터라 불우한 벗을 감싸며  죽을 때 까지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여기서 송익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후일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기회가 있길 기대한다.

능력위주의 용인술외에도 시무책도 이이가 강조한 대목이다.
시무책(時務策)이란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룰 일에 대한 계책을 말한다.
연산군부터 명종 임금 대 까지 임금의 폭정과 외척과 훈구새력의 전횡이 이어지면서 조선땅에서 백성의 신음 소리가 끓이질  않았다.

이이는 ‘교주고슬 膠柱鼓瑟(기러기 발을 아교로 붙이고 거문고를 연주함)을 인용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러기발은 거문고 줄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것이 부러졌는데 아교풀로 붙이고 연주하면 제대로 소리를 낼 수가 없다

「“ 백성들의 시급한 폐단을 구제하려면 낡은 법을 경장(更張: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안(貢案: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하던 부책)은 폐왕조( 연산군 재위기) 때 제정된 것이니 법도를 지키지 않고 포악하게 다스리던 임금이 한 짓이라 참으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전히께서 낡은 법규를 그대로 지키고 경장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좋은 정치를 할 희망이 없습니다”」
<이이 ’율곡전‘ 어록편>

위글은 선조7년(1574년)2월. 경연자리에서 율곡 아이가  임금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1회


그는 향촌의 풍습을 교화하는 ’향약鄕約‘ 보다 백성의 고통을 줄이는데 ’구폐(救弊:폐해를 바로잡음)가 먼저라고 간곡히 진언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대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공안(貢案)’ 의 개정이었다.

공안은 공납에 쓰이는 장부로서 고을별로 징수할 공물이 명시돼 있었다.
연산군 7년(1501년)에 제정된 공안이 백성의 부담을 크게 늘려 놓앗는데 이것이 70여 년이 지난 뒤까지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이는 백성의 고통을 야기하는 징원지를 꿰뚫어 본 것이다.,
그는 공납(貢納)뿐 아니라  군역과 사노비 문제도 거침없이 치고 들어갔다.

「“군액(軍額)을 감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풀어준다면 그들이 생업에 종사해 번성할 길을
찾을 것입니다.,백성이 점차 생업을 회복한 연휴에 다시 옛 군액을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이 율곡집 ‘어록편’>

군액이란 군인의 숫자를 말한다. 당시 군사를 소집하는 사자들이 상부의 눈치를 살피며 일이 많아서 실상과도 맞지 않고 백성의 원성을 많이 샀다.
이에 이이는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군액을 줄이자고 건으ㅏ한 것이다.

또한 그는 ‘사천(私賤)’ 즉, 사노비도 부모 중 한쪽의 신분만  대물림하는 방안을 주장햇다.

사노비 증가 추세에 제동을 걸어 양민 인구를 일정하게 유지 하고자 하는 고육책이었다.
양민은 세금을 내고 군역을 제공하기 때문에 양민 수를 늘리면 경제와 국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민의 사노비화를 통제하는 것은 조선의 미래와 직결된 중요한 정책이었다.

「“나라에서 사천(私賤)에 대하여  법을 만들 때에 유독 치우치개 하여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고 또 아버지도 따르게 했습니다.
그 폐단으로 양민이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고 군인의 숫자가 날로  적어졌습니다”」
< 이이 ‘율곡전’ 어록편>


「“붕당을 짓기에 나라도 더욱 편안해 진다”」

이이의 능력위주 용인술과 시무책은 ‘도덕의 나라’로 거듭난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고 민생을 돌본다는 의미에서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주장이 신진사림 내부와 시대부 계층의 반발를 부르는 원치 않은 결과로 치달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2회

이이가  견지한 눙력 본위의 용인술은 덕을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공납,군역,사노비 등 사회경제 문제를 파고든 시무책이었다,

이는 신진 사림의 지지층인 향촌 사대부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동했다,공남과 군역의 폐단을 바로 잡으면 사대부들의 특권이 축소되고 부담이 커진다.소중한 재산인 사노비를 줄이는 것은 더더욱 받아 들일 수  없었다,
향촌 사대부들은 점차 이이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라와 백성만 바라보고 일하겠다는 이이의 뜻은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른 반대 세력의 봉착에 직면하고 오히려 그들 반대 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를 꿰뚫어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선조 임금이다.

선조는 즉위 후 젊은 임금으로서 자신의 세상을 열어 보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드세진 사림의 기를 누를 필요가 있었는 바  율곡 이이의 반대파를 부추키는 분열책으로 그들 세력을 약화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이 일파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반대파를 등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해에 일어난 신진사림의 동서분당은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동서분당은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반목하면서 두 사람을 각각 지지한 사림이 동서로 갈리는 것을 일컫는다.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거주하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이라 불렀고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거주하는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을 서인으로 분류했으며 이것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유래도 보는 것이 조선 당쟁사의 통설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동서분당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일면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있는 바 바로 선조의 ‘분열책’ 이다.

율곡 이이가 신진사림의 세력화를 주도하고 경세의 뜻을 펴는데 적지않은 힘을 실어 줬다.
그런데 이는 선조의 반대파 입장에서 보면 이이가 외척( 이이가 명종임금 妃인 인순왕후의 동생)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고 있다고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3회

대비 인순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이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자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그들은 ‘외척청산’을 명분으로 힘을 합쳐 조정을 장악했다,

권력구도의 변화에 따른 정치의 비정한 단면이 동서분당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동서분당으로 이이는 동인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탄핵 상소가 끓이질 않았다,

동인은 서인을 ‘심의겸의 당’으로 몰아 붙였다.외척 심의겸 사사로이 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혔고 이이가 그 앞장이 노릇을 햇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준경의 유처( 유사 형식의 상소문)가 그 근원지 였다,

이이는 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동인은 대부분 연소한 신진이므로 배척해서 뜻을 저지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선배인 서인쪽에서 감사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이는 나중에 동서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사로운 붕당이  발생한데는 자신의 책임도 컸기 때문이다.

신진 사림의 지도자로서 이이는 늘 올비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동분서주 햇다. 하지만 국정은 당위성만으로 굴러가지는 않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소통의 부재가 분열의 정치를 불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임금의 소통은 어땠을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내보여 뜻을 알게 하소서”

「“소신이 병으로 오래 물러나 있다가 오늘 옥음(玉音:임금의 목소리)을 들어보니 낭랑하지 않습니다.무슨 까닭입니까?
듣건데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는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하신다 합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더 힘을 쓰실 것이요, 듣기 싫어하지는 않으셔야 합니다”」
<선조실록 6년(1763년월21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4회

이이는 임금 앞이라고 돌려 말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여색을 밝힌 탓이라며 왕의 사생활을 비판했다.
김우옹(1540~1603.선조의 심학(心學) ‘과외교사’ 의 <경연강의>에 따르면
그 때 왕의 안색이 상당히 거슬러 하는 듯 보였다고 했다.
20대에 접어들어 한창 혈기 왕성한 선조였다.

은밀한 잠자리의 일을 꼬치꼬치 따지는 신하가 곱게 보일리 없는 건 당연하다.

보다 못한 김우옹이 이이에게 충고를 건넸다.

「“말을 음식에 비유하면 비위가 약하여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것과 같소.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됨을 누가 모르겠소. 다만 지금은 비위에 대한 약을 써서
원기를 돕고 음식이 생각나도록 하는 게 먼저요, 무조건 밥이나 고기를 가져다 강권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말이오”」

일방적으로 임금을 훈계하려 드는  율곡의 소통방식에 문제를 제기 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비위가 약한 사람은 삼키지 못한다.
신하가 만고의 진리를 간해도 임금이 교만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도리어 불신만 쌓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의 충고에도 이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럴수록 더욱 과감하게  임금에게 간하는 것이 절의를 위해 죽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생각을 한 인물이다.

「“아무쪼록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히 내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이 지향하는 바를 알게 해야 합니다. 요순(堯舜: 요임금.순임금)이 천하를 폭력으로 통솔하니  백성이 그대로 따랐고 걸주(桀紂: 중국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아울러 이르는 말. 천하의 폭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천하를 폭력으로 다스리니 백성이 또한 그대로 따랐습니다
지금은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핮 않기 때문에 전하께서  요순이 되실지? 걸주가 되실지?
알기 어렵습니다,
정치의 효과가 나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조실록 14년 (1681) 2월10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5회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선조임금의 ‘원칙없이 즉흥적으로 처결함’을 의미한다.

이 무렵 선조는 진언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훌러 버리기 일쑤였다.

이를 테면 비리가 적발된 재상을 탄핵을 해도 “사사로운 청탁은 시류가 그러하니 어 쩔 수 없다.” 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재상의 은밀한 일 들추어 공격한다”고 나무라기 까지 했다.
이쯤 되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소통이 사실상 막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언로는 열려 있었지만 불통으로 일체 작동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태평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긴다.”던   퇴계 이황의 예고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선조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국정을 독단에 편벽되게 처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비판적인 언로는 붕당 간의 정쟁을 이용해 무력화 시켰다.

선조는 정여립의 난을 빌미로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의 씨를 말리는가 하면 얼마 후에는
세자책봉 건의를 트집 잡아 서인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식으로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그것이 왕권을 강화하는 길이라고 선조 임금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언로는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이이는 결론에 집착하고 소통을 소홀히 하는 병폐를 지니고 있었다.

잘 난 사람이 대게 그렇듯이 타인을 굽어보았기 때문이다.
율곡의 소통 실패는 도덕정치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바야흐로 당쟁과 전란의 소용돌이가 ‘도덕의 나라’ 조선을 덮쳐 로고 있었다.

임금앞에서 과감히 간하는 ‘어진’인물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선조 8년(1575년) 율곡 이이가 임금을 위해 지어 바친 제왕학 교과서다.

도입부인  ‘통설’편에서 율곡은 성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신이 생각건대 성현의 학문은 ‘수기치인 修己治人’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이 성학집 ‘통설’편>

이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성리학의 본령이라고 생각했다. 성현의 모든 말씀은 결국 자신을 닦아 사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귀결된다.

성리학적 지배질서  즉 ‘도덕의 나라’는 ‘수기치인’을 빼놓고 논 할 수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6회

하지만 율곡의 ‘수기치인’은 퇴계의 그것과는 달랐다.
이이가 추구하는 시무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이는 공납과 군역을 줄여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이 훨싼 많았다.

이이는 사회 경제문제에 무관심 했던 퇴계 이황과는 대조적이다.

이로 인해 율곡이이는 이황과 달리 이해관계가 있는 사대부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이이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학문적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이 ‘수기’ (자신을 닦음)에 방점을 찍었다면 
율곡 이이는 ‘치인’(사람을 다스림)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이 때문에 율곡이이의 학문은 ‘위인지학爲人之學 : 남을 위한 학문)
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본질을 밝히는 학문)을 숭상하던  당시 선비들의 학풍을 감안하면
폄하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도덕정치는 학문적 정통성 위에 존립한다.

자신의 정치적 자신이 사라질 수 있음에도 그는 왜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안았을까?

「생업이 없으면 도덕도 없다」
「”임금이 있으려면 먼저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으려면  먼저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임금이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하지만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은 먹을 양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이 그들의 하늘, 즉 먹을 것을 잃으면 나라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이 성학집 ‘위정’ 편>

백성에게 먹을 것이 하늘이다.
그것을 잃으면 임금도 나라도 없다.
이이가 ‘불변의 진리’라고 못박은 대목이다.
전 후 맥락을 살펴 보면
‘백성의 먹을  것은 ‘생업’을 의미한다.
율곡은 백성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교화의 전제조건 이라고 봤다.
그는 맹자와 주자를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7회

군주는 어진 신하를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임금은 도를 닦고 길러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신하는 대소사를 챙기며 편안하게 하는 것이

이이가 생각한 ‘수기치안‘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였다.
그는 도덕정치의 성패가 어진 인물을  등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봤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치는 인재를  얻는데 달려 있으니 어진 사람을 기용하지
않고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야 정치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직책은 오직 어진 이를 알아보고 그 어진이에게  맡기는 것을 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어진이를 쓰고 소안배를 내치면 민심을 얻고 그 반대로 하면 민심은 떠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지도자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이야기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리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어진 인물과 소인배를 판별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뮨이다.  
이를 참작해 이이는 조언을 곁들인 것이다,

「”옛날 송나라 효종이 ’절의를 위하여 죽는 선비를 얻기 어렵다‘ 고 탄식을 하니
장남현이 말하기를 ’절의를 위하여 죽는 선비는 마땅히 임금앞에 과감히 간(諫)하는 사람중에서 구해야 합니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간략하고도 적절하니 임금께서는 알아두지 않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이 성학집 ‘위징편’>

임금 앞에서 과감히 간하는 선비!
율곡 이이는 이러한 인물을 놓치면 안된다고 했다.
율곡 자신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과감하게 간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조임금은 아랫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도덕의 나라’에서 비판적인 언로가 왜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군주였다.
교만과 편견.사욕이 임금의 귀를 꽉 막았던 것이다.

날마다 새로이 언로를 열라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8회

선조16년(1583년) 2월 ,

병조판서 이이가 와병중에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터지기 9년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나라가 태평함)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합니다.
안팍이 텅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해도 온 나라가 놀라 슬렁입니다. 혹시 큰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스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하나도 믿을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폐하게 되어 있습니다.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하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선조실록 16년 1583년 2월15일>

흔히들 율곡 이이하면 ’십만 양병설‘을 떠 올리자만 이는 그의 사후에 제자 김장생 등이 지어낸 신화(神話)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다.

실제로 이이가 임금에게 고한 것은 위 상소에 나오는 다음 조목들이다.

첫째)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를 임명할 것
둘째)
군인과 백성을 기를 것
셋째)
재회와 식량을 비축할 것
넷째)
변방의 감영과 병영을 튼툰하 할 것,
다섯째)
전쟁에 스일 말을 준비할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이다

율곡이이는 그렇게 나라를 걱정하다가 1년 후 세상을 하직 했다.

그리고 선조 25년(1592년) 왜적 16만 대군이 조선땅을 침범했다.
개전 20일만에 도성 한양이 함락당하고  선조는 피난 길에 올랐다.
그러부터 7년간 조선은 왜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신세가 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59회


다행히 바다를 지킨 이순신 ,그리고 의병들 덕으로 왜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전란의 피해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도덕정치는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그 댓가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병자호란까지 터지며 조선의 왕권은 비참하게 추락햇다.
자연스레  임금과 붕당이 결탁해 나라를 다스리는 기형적인 군신공치(君臣共治)가 등장하게 된다.

조선 중기 이래 붕당정치의 양대축은 서인과 남인었다.

서인은 율곡 이이학파, 남인은 퇴계 이황 학파에 그 뿌리를 둔다,
이들은 도덕정치 근간인 학문과 정통성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퇴계학파는 이이가 이(理)를 잘 몰라 기(氣)에 집착했다며 깍아 내렸고
율곡 이이학파는 이황이 첩을 둔 일이나 을사사화에 관여한 허물을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종주인 이황과 이이는 연령차이는 있지만 서로를 아끼는 사이였다.
이황은 이이와 다불어 주자학의 학설을 논하고 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 한 바 있다.

이이 역시 이황의 허물은 덕을 이루기 전의 일이라면서 감싸고 그이에 대한 추숭사업을 지원했다.

이황과 이이는 이처럼 상대방을 존중하고 화합했지만  그 후예들은 이 아름다운 미덕을 계승하지 못했다.

언로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소통‘이 이루어질 때 존재의의를 갖는다.

소통이 가로 막히면서 조선의 도덕정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언로가 열려 있어도 서로 귀를 막고 있으면 정치는 분열하고 민생은 고달픈 것이다,

언로에 죽은 성현의 말씀만 가득하고 살아 있는 백성의 마음이 흐르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16세기 들어 사대부들이 향촌의 지배자로 위상을 굳히면서 언로가 변질되었다.

사대부와 백성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언로는 민의를 왜곡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반쪽짜리‘도덕의 나라로 전략을 했다.

이황이 토대를 닦고 이이가 실현한 도덕정치의 ’완성판‘은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초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언로는 도덕과 현실을 아우르고 조율하는 것이다,
도덕론에 경도돠면 분열과 무능으로 이어진다.

사림처럼 깨끗할 런지는 몰라도 당쟁에 빠져 민생은 피폐하게 만든다.,
현실론으로 치우치면 탐욕과 부패를 낳는다.


훈구파처럼 유능할지는 몰라도 자신의 배만 불리다가 나라를 말아 먹는다.
결국 중용에 이르도록 날마다 언로를 새로이 여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 도덕과 현실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기치인‘의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떠 받치는 힘이었다.

마치
언로를 다시 열라’는
조선 중종 때의 조광조의 외침이 ‘도덕의 나라’ 조선을 거쳐 오늘 날 우리에게 메아리쳐 오고 있는 것 같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60회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을 대표하는 도학자다.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민간에 전승된 구비 설화을 통해  퇴계는 음담패설의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낮퇴계, 밤토끼’니 하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퇴계 선생은 심지어 “부부관계란 너무 점잖게 하면 안되는거야.
비바람 치듯 요란하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말을 했을까?
퇴계를 둘러싼 요절복통의 음담패설이 심심찮게 나오니  참으로 반전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퇴계 선생에게 이런 음담패설이 집중되는 것일까.

평소 “부부란 손님 대하듯 서로 공경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퇴계 선생은 왜 이렇게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됐을까?.

‘낮퇴계, 밤토끼’란 말이 있다. 퇴계 이황 선생 이야기이다. 물론 역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고 구비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퇴계가 낮에는 관을 쓰고 점잖게 제자들을 데리고 강학을 하는데 밤에는 부인에게 토끼 같이 굴었다. 그래서 낮퇴계, 밤토끼란 말이 생겼다.”

참 망측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낮에는 고고한 학자의 풍모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밤만 되면 토끼처럼 색(色)을 밝힌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런 설화도 있다.

“퇴계의 마누라는 못난 사람이었다, 모녀가 객담을 하는데 어머니가 딸에게 ‘퇴계 같은 분이 밤에 너에게 손을 대더냐”고 했더니 딸이
‘낮토끼이지 밤토끼인가’라 답했다. 딸은 어리석어 퇴계를 토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공자-주자-이자(퇴계)

퇴계 선생 부인의 정신이 좀 혼미한 탓에 ‘퇴계’를 ‘토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경우든 흔히 알려져 있는 퇴계 선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에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이 누구인가. 조선의 대표적인 도학자다. 도학자(道學者)란 무엇인가. 유교의 도덕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이른바 ‘존천리 멸인욕(存天理 滅人慾)’, 즉 하늘의 이치를 따르면서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 도덕과 윤리의 상징인물이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퇴계는 어릴 때부터 도학자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거나 다리를 꼬고 앉거나 기대거나 눕거나 엎드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자수어> ‘거가’)

퇴계는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이식·1436~1502)를 여의었다. 그때부터 어머니 박씨가 키웠는데, 꼿꼿한 선비기질을 어렸을 때부터 발휘했다.

그랬으니 성호 이익(1681~1763)은
“퇴계의 언행은 사문(斯文·유교에서 성인의 도)의 맥을 부지했다”고 추앙했다.

이익은 아예 퇴계를 ‘이자(李子)’라 숭모하면서 퇴계의 언행을 가려 뽑은 ‘이자수어(李子粹語)’라는 책을 펴냈다.

원래의 책이름은 <도동편(道東編)>이었는데 1753년 순암 안정복(1721~1791)이 교정을 보면서 책이름도 <이자수어>로 바꿨다. 이때 이익이 <이자수어>의 책머리에 쓴 서문이다

“주나라 쇠락 이후 공자가 태어났고, 1500년 후에 자주자(子朱子)가 나왔다. (주나라 이후) 2000년 후에는 퇴계 자이자(子李子)가 태어나서 육경(<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을 따르고 주자(朱子)에 기댔는데….
다행히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어찌 퇴계의 말을 말하고, 퇴계의 행실을 행하여 한가닥 사문(성인의 도)을 붙잡지 않겠는가.”

여기서 자주자(子朱子)나 자이자(子李子)의 자(子)는 주자와 이자(퇴계)의 극존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