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생태위기에대한기독교신학적깨달음을담은1967년린화이트 (Lynn White Jr.)의기념비적논문에서우리는오늘날환경훼손과생태파 괴가인간이저지른죄(sin)라서인간이라면막중한죄의식(guilt)을감 당해야만한다는주장을만난다.1)
1)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New Series Vol. 155, No. 3767 (1967), 1206.
그로부터한세대쯤흐른1990년대 중반, 마조리수하키(Marjorie H. Suchocki)는기독교역사에서말하는 전통적인죄개념이대체로하나님에대한반역(rebellion against God) 을가리키지만, 자신은죄를‘피조세계에대한반역의폭력’(the violence of rebellion against creation)으로 개념 정의한다고 주장하였다.2)
수하키이후, 기독교신학이환경훼손과생태파괴를논의할때에는 죄개념을거론하는경향이잦아졌다.
이때거론되는죄의의미는창조 세계를잘다스리라(관리하라)는하나님의명령에대한위반뿐아니라, 창조세계에대한폭력행위를일컫는다. 3)
한마디로요약하면‘생태학적 죄’다.
한편영국의변호사이자환경운동가인폴리히긴스(Polly Higgins) 는최근‘생태살해’(ecocide)라는용어를주창하면서,4) 환경훼손및생 태파괴행위를국제형사재판소에서다룰국제적범죄로도입하자고나 섰다.5)
‘생태살해’라는용어는‘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말살)를연 상케한다. ‘생태살해’는환경훼손과생태파괴를범죄(crime)로기소및 재판할것을전제하며,6) 정죄와처벌이라는어감을덧댄다.
2) 마조리 H. 수하키/김희헌 옮김, 뺷폭력에로의 타락: 원죄에 대한 관계론적 신학의 새로운 이해뺸 (서울: 동연출판사, 2011), 33.
3) 전현식, “인간실존, 초월그리고죄에대한생태학적재구성: 라인홀드니버와마조리 수하키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2-1 (2004), 152.
5) 김재윤, “국제범죄로서 ‘생태살해(ecocide) 죄’의 도입에 대한 검토,” 「형사정책」 제34권 제1호/통권 제69호 (2022), 143.
6) 카를 야스퍼스는 죄 개념을 다음의 넷으로 구분했다. 범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죄, 이렇게네가지다. 이중에서‘범죄’는그의정의에따르면“명확한법률 을위반한, 객관적으로증명가능한행위”를가리킨다. 카를야스퍼스/이재승옮김, 뺷죄의 문제뺸 (서울: 도서출판 앨피, 2014), 85.
참고로, 법 률의면에서범죄와죄의철학적이고윤리적인차이를드러내는것은 이 논문이 추구하는 주된 초점이 아님을 밝혀둔다.
이 논문은 범죄자 (criminal)와죄인(sinner)에게서공히발견되는죄의식(guilt)에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책임의식과 비교한다.
이논문은정치이론가한나아렌트(Hannah Arendt)의정치이론에 제시된바를따라죄의식과책임의식가운데우리에게지금필요한것이 책임의식이라는점을부각하고자한다.
이를위하여아렌트가제기한 유죄개념과책임개념사이에놓인미세하지만유의미하고유력한차이 를지적할것이다.
관련하여이논문은생태파괴행위를죄(범죄)로파악 하는일, 즉‘생태학적죄’로판단및정죄하는입장에대하여조금거리를 두고자한다.
그입장이품은인문학적, 신학적의도를모르기때문이 아니다.
그입장이치명적오류를내포하기때문도아니다.
이논문은 그입장이기독교인과비기독교인이한데어우러져집합적환경활동을 전지구적으로진행해야할필요가있는기후위기시대, 광범위한대중적 환경활동(기후위기대응행위)을자칫위축케하는부작용을낳을수 있음에 주목한다.
비근한예로환경교육장면에서죄의식강조에집착할경우그의도 가전달되기보다는꾸중듣는느낌을강화할우려가있으며, 한편으론 ‘기후우울증’을방치하여자포자기와무력감을파생할가능성이높다. 7)
7) 한재각엮음, 뺷(기후위기비상행동을위한긴급메시지) 1.5: 그레타툰베리와함께뺸 (대구: 한티재, 2019), 12.
‘나는기후위기를해소하는데일익을담당하지못하고있다’는자각과 반성을 넘어 ‘더 열심히 실천하지 않는 내가 죄인이다’, ‘1.5도 상승을 막지못하는건내탓이오’, ‘나는백해무익하다’로나아갈수있다는것이다.
기후위기에대한대중적, 시민적공감대가점차넓어지는오늘날, 지구환경과생태계의회복을도모하는과감한실천을위해서는전지구적인사회적합의가필요할뿐아니라국제정치적이고외교적인대규모 공조가요청된다.
사회적합의와국제정치적, 외교적공조는각개인의 인간관계를초월해작동하지만, 서로다른사회및정치체에속해있는 개별개인들의의견, 반응과완전히무관하게진행될수없다.
이러한 때에유죄를명시하고죄의식을부추김으로써정죄하는분위기를빚어 내어분위기가침체되도록방치하기보다는, 책임의식공유를격려하는 편이 더 실질적이고 더 진취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생태위기, 즉기후위기가날마다긴장감을높여가는엄혹한시대다. 이러한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그럴듯한신학을주장하며논리적설교 를 발언하는 사람이 되는 일 못지않게, 실제로 말씀을 따라 현실에서 책임있게행동하는사람이되는일또한긴요하다고본다.
다시말해 기독교인들하나하나가성경이경계한내용, 즉“자기얼굴을거울속으 로들여다보기만하는사람”에머무르지않아야하는것이다(약1:23).
II. 논문의 구성
이어지는III장에서는‘생태학적죄’의의미가구체적으로어떤내용 을포함하는지들여다볼것이다.
수하키의논의에서출발해‘생태학적 죄’가겨냥하는인간중심성을남성중심성으로좁혀논의하는에코페미 니즘까지살펴본다. 그리고‘생태학적죄’가기독교전통이강조해온 전통적죄의의미에서얼마나멀고얼마나가까운지에대해서도짚어볼 것이다.
다음으로이논문의IV장에서는‘생태학적죄’와인간중심성의관계 를네가지지점으로구분하여해석한다.
첫째, ‘생태학적죄’가지향하는 바를따라인간중심에서생태중심으로전환하자는아이디어가자칫 인간중심의반대극인‘인간혐오’로달려가는부작용을파생할수있다는 점을지적한다. 환경친화적녹색운동의시작지점에서부터그러한부류 가출현했었음을우리는기억한다. 곧채식주의자들과이른바흙사랑주 의자들이나치즘의깃발아래모여있었던독일의녹색운동이다.
둘째, 유죄를은총의언어로개념정의하는지점을고찰한다. 죄가있음을수긍 하는것은사실상은총을받는첫번째단계일수있다. 그러나죄가있음 을긍정할때모든사람이은총의단계로자동으로들어서지않는다는 한계가있다.
다음으로
셋째, 투투주교가주도했던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발견되는용서의의미를분석한다.
여기서용 서는잘못한자의새출발을신뢰하는믿음에그뿌리를두는활동으로 드러난다.
끝으로
넷째, 아렌트가‘제2의탄생’의의미로정의한‘용서’의의미 가무엇인지, 그것이여러인간집단의친환경실천활동에어떻게연결될 수 있는지를 규명한다.
아렌트가 정의한 용서의 의미에 따르면, 누가 누구를용서한다는것은일방적인것도아니고, 딱히도덕적인것이거나 숭고한미덕도아니다. 용서는언제나상호적이다.
그리고그같은상호 용서가인간사회에서정치행위(여기서는‘환경친화적실천활동’)를 일상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
이논문은V장에이르러, 아렌트가대조한‘집합적유죄’와‘집합적 책임’의의미를제시한다.
유죄와책임의의미를정치적차원, 즉인간다운삶차원에서대조하는작업은사실상필요한작업임에도아렌트이전 엔그지점에크게관심갖는논자가없었던듯하다.
아렌트는‘죄가있다’ 와‘책임이있다’를섬세하게구별한다.
통상적으로별차이가없다고 지나칠 만큼 유사해 보이는 두 개념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논문은그같은아렌트의입장을따라, ‘죄가있다’는관점은종종정죄와 처벌을유입하지만, ‘책임이있다’는입장은책임의식을환기하면서해 결을 위한 다양한 행위를 산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결론적으로이논문의마지막장에서는작금의생태위기및기후 위기에대하여책임의식을공유하는가운데시작되는화해행위의한 사례로, 짐안탈(Jim Antal) 목사가제안한“진실과화해의대화”(truth and reconciliation conversation)를예시한다.8)
8) 짐안탈/한성수옮김, 기후교회, 왜& 어떻게 (고양: 생태문명연구소, 2019), 155-157.
생태위기및기후위기 시대는‘여럿이함께’ 집합적으로활동하는일이긴요한시대다. 이러한 때에교회는자신이잘할수있(어야하)는화해및용서를다각도로연구 하고실천할필요가있다.
만일교회가더많은사람이환경활동대오에 들어서도록일한다면, 또전지구적조직으로서기독교조직(교회, 교단, 교회연합체나교회연맹체등) 안팎의사람들을따끔하게정죄하기보다 그사람들의마음속에‘집합적책임’ 의식을싹틔울수있다면, 지속가능 한환경활동이훨씬더활발해질수있다고이논문의저자는확신한다.
III. ‘생태학적 죄’ 관련 선행연구
1960년대 중후반, 화이트는 환경오염과 생태파괴에 대하여 거의 최초로기독교적죄의식을일깨우는글을발표하였다. 우선그는세상 가장인간중심주의적인종교로기독교를지목하였다.9)
화이트는현대 의무제한적과학기술발달과그에따른생태계파괴가자연에대한인간 의초월성과정당한지배권이라는기독교교리의구현으로설명될수 있다고보면서, 기독교가“거대한죄”(a huge burden of guilt)를지었다 고 천명하였다.10)
화이트는 신학자가 아니라 서양 중세사를 연구한 역사학자였고, 그의글이신학적해석학을엄격히적용한글이아니어서다소간저항과 반발을불러일으키긴했지만,11) 이후성경, 기독교, 생태환경을종합적 으로다루는대부분의성실한신학연구자들에게화이트가제기했던 문제의식이계속해서영향을미친게사실이다. 12)
9)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1967), 1205
10) Ibid., 1206.
11) Bert S. Hall, “Lynn Townsend White Jr., 1907-1987,” Technology and Culture; Jan 1, 1989, 30; Periodicals Archive Online ⓒ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3), 198.
12) 성영곤, “생태위기의역사적 근원에 대한 재고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 1907-1987)의 중세 기술관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서양중세사연구」 Vol. 19 (2007), 4.
그중한가지가인간이 피조물로서자연과공유하는내용보다인간이하나님과공유하는초월 적, 영적인것에대한내용을기독교가더강조해왔다는지점이다.
즉, 기독교가인간을여타피조물에서분리하고상승시켜, 인간중심적으로 자연을대상화한끝에결국자연을지배하게되었다는논리다.
이는화이 트이후대부분의생태신학연구자들이자기들의논리에신학적설득력 을 더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적 입장이 되었다.13)
1990년대 중후반에는 수하키가 뺷폭력에로의 타락뺸(The Fall to Violence)에서, 기독교의 전통적 죄 개념과는 다른, 이른바 ‘생태학적 죄’로갈무리될수있는개념을제시하였다.
그는“피조세계의안녕에 대한직접적인죄,” 즉피조세계에대한침해가하나님께대한죄라는 입장을표방한다. 이때“포괄적인안녕이죄를측량하는규범”이된다. 14)
이 같은 수하키의 ‘생태학적 죄’ 개념에 동의하는 전현식은 수하키의 죄개념을라인홀드니버(Reinhold Niebuhr)의죄개념과대조한다.
전 현식의논의에서는우선, 인간이자연을수직방향으로초월해하나님을 향할수있다고보는니버의 전통적죄 개념이비판받는다.15)
전통적 죄개념의입장에서인간을보면, 인간은자연을초월해계시는하나님께 가닿을수있는능력을갖춘존재로자연위에올라서있는우월한존재다.
이때 인간이란, 에코페미니즘의 주된 논지 중 하나이기도 한데, 전체 인간종족에서 ‘여성’을 대체로 제외한 ‘남성’을 특정한다.16)
13) 생태여성신학자들도 대체로 이 같은 생태신학적 전략을 공유한다.
14) 마조리H. 수하키/김희헌 옮김, 뺷폭력에로의 타락: 원죄에 대한관계론적신학의 새로운 이해뺸 (2011), 117.
15) 전현식, “인간실존, 초월 그리고 죄에 대한 생태학적 재구성: 라인홀드 니버와 마조리 수하키를 중심으로,” (2004), 163. 16) 전현식, “에코페미니즘 신학과 생태학적 영성,” 「한국조직신학논총」 7 (2002), 322-323.
‘생태학적 죄’ 개념으로 오늘의 생태 위기 및 기후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면, 물질적· 자연적차원과인문학적· 신학적차원을진지하게 통합(융합)하여다루는효과를볼수있다. 그런반면‘생태학적죄’ 개념 을전격적으로활용하는논의는, 이용주의비판적입장이보여주듯, 얼 핏성서적· 신학적인간이해의전통적논의들로부터“너무손쉽게결별” 하는것같은인상을주는게사실이다. 17)
이용주는“자연과인간의유사 성과차이에대한 신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생태주의 인간관 전략이인간과자연의차이를제거하고자연에대한인간의유사성내지 는의존성을강조하는경향을지녔다고요약한다. 18)
그러면서그는인간 중심주의가시급히지양되기는해야하지만, 인간과자연의동일시에 대한성급한요구가하나님형상을따라지어진인간의인격적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의 조직신학이다.19)
실제로‘생태학적죄’를강조하는전략은전통적신학적논의들로부 터“너무손쉽게결별”하는것같은인상이없지않다.
그런데다‘생태학적 죄’를부각하는입장이전통적죄개념을비판함에도불구하고, 전통적 죄 개념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난점도 있다.
예를 들어, 판넨베르크는죄를 “생명의 원천을 혼란케 하는 것이며 오류에 빠져들게하는것”으로보며, 인간이이웃및하나님과분리되어스스로 자기를확장하는것을죄로이해하였다.20)
17) 이용주, “자연과인간의유사성과차이에대한신학적고찰,” 「한국조직신학논총」 55 (2019), 149.
18) 앞의 논문, 146.
19) 앞의 논문, 152.
20) 볼프하트 판넨베르크/정용섭 옮김, 뺷사도신경 해설뺸 (서울: 한들출판사, 2009), 205-207.
판넨베르크에따르면, 인간의 자기확장, 다시말해인간중심성이곧죄다. ‘생태학적죄’가지목하는 인간중심성은 전통적 신학의 경지에서 볼 때도 이미 죄였다.
또, 조직신학자틸리히(Paul Tillich)는자기에게자기자신을판단하 도록요구하여결국자기가자기자신에맞서는상황에서인간이죄에 대한불안을느낀다고설명했다.
틸리히는바로그불안의정체를자기소 외와 자기 비난의 불안으로 일컬으며, 이를 죄에 대한 감정에 연결한 다. 21)
틸리히의죄개념및죄감정은인간이인간자신에게맞서는상황, 즉인간의자기중심성에잇대어있다.
따라서화이트와수하키등이논의 했던내용을따라인간중심성을부추긴주범으로기독교를지목할수 있지만, 심지어그와는정반대로판넨베르크와틸리히의예에서확인되 듯, 뭇인간들을향해인간중심성(죄)에서탈피하도록오랜세월엄격하 게 선포해 온 신앙체계로서 기독교를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한걸음더나아가면, ‘생태학적죄’ 개념이전통적죄개념의 핵심메시지를오히려제대로계승한다고평가할수있다.
실제로 수하키의‘생태학적죄’ 개념을 수용하는 연구자들중에서도 수하키가 추구하는 것이“유일신론적죄이해즉, 하나님에대한반역이 죄라는것”이라는 점을 조명하는 이가있다. 22)
21)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Yale University Press (2000), 51-52.
22) 김영선,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죄 이해,” 「한국개혁신학」 36 (2012), 229.
‘생태학적죄’와전통적죄개념사이에근원 적, 본질적차이가존재하는가에대하여‘그렇다’라고확정하기어렵다.
수하키는“하나님의은총에의해서, 죄에도불구하고, 모두가잘되고, 모두가잘되며, 사물의모든방식이잘되는것이가능하다”는문장으로 폭력에로의 타락을 끝맺는다.23)
참고로기독교환경보호단체“아로샤”(A Rocha) 국제본부의신학 감독데이브부클리스(Dave Bookless)는전통적죄개념과‘생태학적 죄’ 개념의 통합 혹은 통섭을 도모한다.
그는 먼저 인류가 “지구를 잘 돌보라맡겨주신하나님의신임을깨뜨렸다”고지적한다.
여기에인류 가이기적이고경솔한삶의방식으로하나님앞, 창조세계그리고우리 이웃에게죄를지었다는해석을덧붙인다. 24)
그렇지만그는자연재해가 전지구적으로공평하게일어나지않는다는점을주의깊게살피면서, 환경오염과생태파괴로인한자연재해를거기사는사람들이지은죄의 인과응보로단정짓거나, 그사람들이지은죄의직간접적결과물로이해 하는 일에 대하여 경계하는 입장을 취한다.25)
23) 마조리H. 수하키/김희헌 옮김, 폭력에로의 타락: 원죄에 대한관계론적신학의 새로운 이해 (2011), 271.
24) 데이브 부클리스/문세원 옮김, 나의 지구를 부탁해 (서울: 앵커출판&미디어, 2022), 81.
25) 앞의 책, 79.
IV. ‘생태학적 죄’와 인간중심성
1. 극에서 극으로, 인간중심에서 인간 혐오로
‘생태학적 죄’는 무엇보다 인간중심성(anthropocentrism)을 재고 하도록유도하는효력을발휘한다.
“피조세계의안녕에대한직접적인 죄”를지적하는수하키에따르면, 생태계에서는인간중심이아니라‘상 호의존성’이중요한데,26) 그상호의존성침해가곧죄다.
그러나혹시라 도 상호의존성이 인간 비하, 인간 혐오, 인간의 주변화를 유도한다면 우리는주의해야한다. 더글러스와조너선무(Douglas J. & Jonathan A. Moo) 부자는생태환경과관련하여인간이자신을지나치게높이우러르 거나(인간은우월하다), 지나치게낮게바라보는것(인간은하찮다)이 어떻게우리를성경적인간관에서일탈하게하는지따져볼것을권한 다. 27)
26) 마조리H. 수하키/김희헌 옮김, 뺷폭력에로의 타락: 원죄에 대한관계론적신학의 새로운 이해뺸 (2011), 77.
27) 더글러스& 조너선무/송동민옮김, 뺷창조세계돌봄: 성경이말하는창조세계와 인간의 관계뺸 (서울: 죠이선교회, 2022), 147.
실제로‘생태학적죄’가지적하는‘인간중심’의의미와취지에대하 여우리는대단히조심스럽게접근하여야한다.
극에서극으로치닫지 않도록주의해야하는것이다.
인간중심성을탈피하기위해그반대편 (인간은 하찮다)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공교롭게도, 인간을하찮게보며나아가은근히혐오하는 기색은녹색운동에서일어나기쉬운경향중하나였다.
그역사적실례로 나치즘이횡행하기전독일에서발흥해 나치치하에서 한차례 흥왕기를 누렸던 독일녹색운동을들수있다.
우주의어마어마한깊이와넓이, 압도적으로강력한자연의힘에비하여인간이얼마나하찮은지일깨우 며 ‘생태주의’(ecology)라는 용어를 시작한 사람 에른스트 헥켈(Ernst Haeckel)은북구게르만계의인종적우월성을믿고, 아주강력하게인종 혼합을반대하는등열정적으로인종적우생학을지원했으며, 초창기 독일녹색운동을견인한사람중하나였다.28)
28) 자넷빌& 피터슈타우든마이어/김상영옮김,뺷에코파시즘: 독일경험으로부터의 교훈뺸 (서울: 책으로만나는세상, 2003), 24-25.
그뿐아니다.
과학기술을 혐오하던끝에과학기술전문가들을선별해연쇄폭탄테러를자행해수 많은인명을다치게하거나숨지게했던미국의‘유나바머’(Unabomber, 본명Ted Kaczynski)가급진적환경운동가들에게선풍적인기를끌었던 배경에도 당대 미국 녹색운동의 은근한 인간 혐오 정서가 있었다.
인간중심을 배격하자는 대의명분을 절대적 원칙인 양 앞세울 때 우리는인간적이고인위적인모든것을배격하는지점으로나아가기 쉽다. 인간중심에 대항하는 가장 ‘선명한’ 대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사유구조를문제삼을때빠지기쉬운함정은인간중심사유 구조에대항하기위해생태중심사유구조를100% 흡수해, 기존사유 구조를산산조각내는일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과생태(자연)의 서열화 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서열의 위아래를 교체하는 방식이다.
2. 유죄, 은총의 언어
환경파괴와생태오염을자아내는근본적요인으로인간중심성의 착오와폐해를다루면서‘생태학적죄’를거론하면, 마치충격요법을사 용하는것과같은효과를볼수있다.
바람직한반응으로는, 1990년대 가톨릭에서시작했던‘내탓이오’ 운동과같은자백과회개의물결을들 수있다.
그러나죄가있다는지적을당하고진심으로반성하는사람들은 극소수다. 더구나죄를지적한사람이용서를누락하면반성하는사람의 숫자는더줄어든다.
변명, 거짓말, 자기방어가속출한다. 거기에그치지 않는다. 어떤 취약한 사람의 경우, 자칫 자기비하와 자포자기에 빠질 위험마저 있다.
특히 주로 대중 강연과 대중 행사 차원에서 진행되는 오늘날의대규모환경교육, 생태교육의장면에서용서가누락되면, 환경 생태교육과환경문제해결방안자체에대한회피, 자책, 혹은피로감을 빚어낼 수도 있다.29)
‘생태학적죄’를언급하며경계한수하키도결론부에용서를배치하 였다(제9장‘용서와변혁’). 수하키에따르면용서는폭력의순환을깨뜨 리는“직접적인개입”이다. 30)
그런데그개입의힘은피조세계를보호하 고자나서는인간들사이에서발생한다.
이때용서의의미는기독교전통 이가리키는회개나회심, 하나님께서행하시는‘죄사함’(구원)의의미라 기보다는, 물론그것도포함하지만, 공동체안에서인간들끼리주고받는 것다시말해생태환경이슈의구체적해결로나아가는과정에서일깨워 지는실질적책임문제를다루는실천적활동으로제시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개입이굳이없이도나타날수있는인간의행동으로제시되는 것이다. 이는용서가인간적폭력의사슬을끊을수있다는단호한표현에 서도 드러난다.31)
29) 생태환경주제의대중강연에강사로나설때면간혹마주치는질문이있다. “지구 의생물다양성차원에서볼때인간의‘생물량’이제일큰게문제라고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산아제한을 해서라도 인구수를 줄이는 게 급선무 아닐까 요?”라는 질문이다. 얼핏 논리적으로 들리지만, 인간 혐오 정서가 깔려있는 듯 보인다.
30) 마조리H. 수하키/김희헌 옮김, 뺷폭력에로의 타락: 원죄에 대한관계론적신학의 새로운 이해뺸 (2011), 240.
31) 앞의 책, 241.
수하키는용서를폭력에대한대안적응답이자, “피해자(들)와침해 자(들)의안녕을바라는것”으로정의하되, 그것이인간의정서(emotion) 가아닌지성(intellect)의차원에서일어나는것으로보았다.32)
정서와 지성모두인간의속성이라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
수하키에따르면 ‘생태학적죄’와그에따르는용서는신적차원이아니라, 인간적차원에 서일어나는일로제시된다.
바로이대목에서‘생태학적죄’ 개념을통해 인간중심성을비판한논자가‘어째서다시금인간중심적해결방안을 내놓을까?’라는비판이가능하다.
관련하여“유죄가은총의언어”라는 수하키의말(wording)에대해서도, 자칫은총을인간사회안에서인간 끼리주고받는양해나혜택으로축소시킬위험마저있음을지적할수 있다.
물론수하키는, 인간이스스로죄에가담하고있다고느끼는유죄 체험자체가역설적으로죄에완전히몰입하는것을예방해서마침내 용서받는체험으로나아간다고보기에, 33) 인간들은결국각자자기자신 으로부터뿐만아니라하나님으로부터의용서를필요로하는존재로밝 혀진다. 34)
‘생태학적죄’를저지른죄인들이“하나님자신인위대한변화 에로초대받게” 되는까닭이다. 35)
사실바로이의미에서수하키가유죄 를“은총의언어”라고말한것이다. 36)
32) 앞의 책, 238-239.
33) 앞의 책, 270.
34) 앞의 책, 260.
35) 앞의 책, 263.
36) 앞의 책, 270.
이는향유부은여인을두고예수님 이하신말씀(특히‘누가복음’)을연상케한다. “이여자는그많은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그가많이사랑하였기때문이다.
용서받는것이적 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눅 7:47).
그렇지만우리현실에서‘생태학적죄’는대번에‘처벌, 책망, 비난’을 연상케한다.
유죄를은총의언어, 은총의계기로순순히납득하는사례 는흔치않다. 향유부은여인도예수님을제외하면제자들과당대모든 이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고, 비난을 받았다.
유죄가 용서와 화해로, 유죄가은총으로나아가는것을자연스러운이행과정이라말하기까다 롭다.
3. 믿음, 잘못한 사람의 새출발에 관하여
자연스럽고빈번하지는않았으나인류역사에서‘용서’가갈등을 화해로이끄는계기로작동한사례가없지는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의“진실과화해위원회”가그것이다.
당시위원회를이끌었던데즈먼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죄못지않게용서를강조한사람이다.
투투 주교에따르면용서는“잘못한사람이새출발을해서이전과다른길을 갈수있다는믿음을선언하는것”이다.
그는잘못한사람이변화할수 있다는믿음에서용서가나올수있다고강조하였다. 37)
용서가혹시상황 을악화시킬수있는위험한시도가될지라도용서에그만한가치가있으 니 우리는 용서하여야 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38)
37) 데즈먼드투투/홍종락옮김, 뺷용서없이미래없다뺸 (서울: 홍성사, 2009), 321-322.
38) 앞의 책, 319.
투투주교에게용서는, 앞서수하키에게서도그랬듯, 죄를전제한 다음에진실과화해를원하는인간(들)이구축하는활동의하나다.
그러 나앞에서언급했듯, 우리현실에서특정죄목을지목한다음, 이에대한 해결방안의하나로용서를제시할경우, 개인차원에서는예기치않은 부작용을목도하게되는경우가훨씬더많다.
비근한예로피해당사자가 죄의결과로사망했을경우용서를누가할수있는가, 범죄가해자는 용서를누구에게구해야하는가하는질문이불거질수있다. 39)
또범죄 피해당사자의아무런개입이나참여없이하나님께서이미용서하셨다 고범죄가해자가스스로확신하는게과연정의로운가하는문제가대두 되면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40)
특히‘생태학적죄’를강조할때는다음과같은부작용을낳을우려가 있어주의가필요하다.
예컨대‘생태학적죄’가상대적으로무겁다고판 단받는이들(각종제조업및산업시설의CEO들, 축산업및관련산업 종사자들) 중어떤이들이죄인으로지목당하는것을회피하려고‘그린 워싱’(greenwashing: 위장 환경주의)을 시도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 다.41)
그들에게‘생태학적죄’를철저하게묻고따지는과정이뒤따를 수있는데, 이때십중팔구해당업계종사자들을공개적으로저격하는 언사가튀어나오게마련이다.42)
39) 시몬 비젠탈/박중서 옮김, 뺷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뺸 (파주: 뜨인돌출판, 2019). 40) 영화 <밀양>의 줄거리를 떠올려보라.
41) 2021년경, 아모레퍼시픽 자회사 이니스프리에서 출시한 ‘그린티 씨드 세럼 페이 퍼보틀’를두고일어났던그린워싱논란은좋은사례다. 종이용기를사용한친환 경제품으로홍보됐지만내부에플라스틱용기가감춰져있다는사실이알려지면 서 파장이 일었다.
42) 2011년현대자동차가하이브리드자동차를새로개발해서, 환경친화적자동차를 강조하는 광고를 제작해방영하기시작했다.
한농부가 젖소의 엉덩이에서 어마 어마한 방귀냄새를 맡고서 인상을 찌푸리는 장면 위로 “젖소보다도 적은 CO2 배출량”이라는재미있는문구가나타난다.이광고를본전국의축산낙농업자들 은깜짝놀라, 집단행동(이른바‘상경투쟁’)에돌입했다.“자동차산업보다축산업 에서온실가스배출량이더많다?!”라는주제에대해서는기후학자들과환경활동 가들사이에아직도갑론을박이치열하다.한편이사태의결과는어떻게되었을 까? 광고가 조기종영되었다.
‘정죄(condemnation)의말투’는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환경운동가가 왜 비행기를 자주 타느냐, 환경운동가가왜아이폰을쓰느냐는인신공격성반격이조롱투로쏟아 져나올 수 있다.
추가로, 예기치않은부작용마저나타날수있다.
‘생태학적죄’가 상대적으로가볍다할수있는사람(일반소비자, 유-청소년)들이죄의식 에짓눌리거나기후우울증을겪거나, 재활용분리배출에과도하게집착 하다 자기 분노 또는 대상불명의 원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부작용상황을목도했다면우리는과연누구를용서해야할까?
누구 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4. 용서, 제2의 탄생
아렌트의정치이론체계에서용서는죄와연결되지않는다.
용서는 공적영역에서새행위가시작되는계기일뿐이다. 아렌트의용서에는 크나큰종교적사랑을실천해야한다는부담이없다.
용서는행위의‘돌 이킬수없음, 환원불가능성’(irreversibility)이라는속성때문에불가피 하게요청되는인간의일상적, 정치적활동이다. 죄가있든없든공적 영역에서한번나타난어떤인간들의모든과거행위는돌이킬수없기에 용서가필요하다.
만일그러한의미의용서가없다면인간은누구도다음 행위를이어갈엄두를낼수없으며, 정치적삶을살수없으리라는게 아렌트의 기본 전제다. 용서받는 게 없다면, 우리가 한 일의 결과들부터 풀려나지 못한다 면… 우리는 영원히 그 결과들의 피해자로 남을 것이다.43)
아렌트에게 있어 행위는 인간의 모든 정치적 삶, 공적 삶 자체다.
그리고정치적삶(공적삶)으로서행위는새로운시작이다.
이때행위는 “선수를치다(to take an initiative), 시작하다(to begin), 어떤것을움직이 게하다(to set something into motion)”의의미다.44)
인간은자기만이 수행할수있는언어와행위를통해자율적으로공적영역에참여하는데, 이참여충동은인간이“태어나세상에존재하게되는그시작의순간에 발생”한다. 45)
갓난아기의모습으로본의아니게이세상에탄생한시점 부터 인간은 참여 충동을 느낀다. 행위하고 싶어한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의 탄생을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몸의 탄생과 구별해“제2의탄생”(a second birth)으로호명한다음, 46) 그것이인간의 시작 능력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43)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237.
44) Ibid., 177.
45) Ibid., 237. 46) Ibid., 176.
시작 능력으로서 행위는 탄생성 (natality) 의 다른이름이다.
아렌트에따르면, 인간세계에서행위의끝없 는연쇄가일어나며인류역사가오래도록이어올수있었던이유는인간 사회에새사람들이끝없이태어났다는사실, 곧탄생성에근거한다.47)
47)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II. Willing (New York: A Harvest Book Harcourt Inc., 1978), 217.
새사람들이끝없이태어났다는아렌트의표현은, 갓난아기들이끝없이 태어났다는뜻이기도하고이미태어난사람들이새행위를지속가능하 게전개해왔다는뜻이기도하다.
새행위가지속가능하려면‘죄에대한 용서’라기보다는‘탄생성을지향하는용서’가항상실행될필요가있다. 용서는탄생성에복무하는활동이다.
내가내앞의사람이행한어떤 행위(들)의여러반향과파장을용서하는순간, 내앞의사람은과거의 과오를털어버리고새행위를시작할용기와의지를낼수있다.
그런 의미에서아렌트는나사렛예수의말“일흔번씩일곱번이라도용서하 라”(마18:21-35)는말씀을대단히정치적인격언의하나로강조한다.
아렌트에따르면용서는인간의행위전반에‘빈번히’ 적용가능한, 말하 자면 보편의 일상적 활동 중 하나로서 정치적 행위다.
다음 장에서는 ‘생태학적죄’를정죄하듯거론하지않아도실행력을발휘케하는아렌트 의정치적용서에관련하여우리가활용하면좋을용어하나를소개하고 자 한다.
'집합적 책임’이다.
V. ‘집합적 유죄’와 ‘집합적 책임’ 사이에서
1. 유죄와 책임
‘집합적책임’은“집합적책임”(Collective Responsibility, 1968년발 표)이라는제목의논문에서아렌트가논의한개념이다.
‘집합적책임’은 ‘집합적유죄’와동일한뜻이아니다.
‘집합적유죄’ 여부가재판정에서 판단될때는, 마피아같은조직폭력단범죄는물론이거니와독일나치 친위대원들이저지른정치폭력및전쟁범죄라할지라도, 해당범죄에 참여한특정개인의특정행동이그범죄에얼마나깊이연루되어있는가, 직접적인가간접적인가, 자발적인가비자발적인가를판단근거로삼는 다.
만일어떤범죄에서모든사람이똑같은분량으로유죄를자백한다 면, 정작죄과를물어야할사람이누구인지공정하게분간하려할때 오히려 혼란이초래될수있다.48)
48) Hannah Arendt, Responsibility and Judgment (New York: Shokcken Books, 2003), 147-148.
예를들어한 도시에서중학생들이 집단성폭행범죄를저질렀을때그도시의학부모위원회전원이기자회 견을열어“성폭행가해자로아이들을키운우리지역모든부모가죄인 입니다”라고자백하고나선다면, 실제로어떤부모의어떤문제적언행 이자녀교육에서문제를일으키는지점인지공정하게탐색하거나지적 하기어렵게된다.
또부모가행하는자녀교육이외의사회문화적요인들 에 대해 검토하는 확장성이 짐짓 제한될 수도 있다.
따라서우리는유죄여부와책임소재를잘분간하여야하는데, 우리는현실에서이를어느정도잘해내고있다.
예를들어나치의전쟁범죄를 수십년이지난지금까지도독일국민모두가대체로사죄하며나서지만, 그것을우리는‘집합적유죄’가아닌다른것, 즉‘집합적책임’의의미로 받아들인다.
우리는독일인모두를전쟁범죄자로함부로간주하지않는 다.
왜냐하면유죄-무죄의면에서볼때는독일인전반의행위는독일 나치의범죄행위와분간되기때문이다.
물론당대에전체주의적동조행 위와부화뇌동이있었지만, 이에대해주의깊은논의가뒤따를필요가 있다.
그 논의의 과정에서 우리는 확대 일반화나 성급한 일반화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한다.
아렌트의설명에따르면‘집합적유죄’와다른‘집합적책임’의성립 조건은두가지다.
첫째, 내가직접하지않은어떤일로문책을당한다.
둘째, 내가자발적으로해체할수없는어떤집단에내가속해있다.49)
49) Ibid., 149.
작금의기후위기를당면문제로받게된모든인류는지구상어느곳에 살든지, 이 두 성립 조건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첫째조건의경우, 온실가스배출주범인기계산업, 낙농축산, 화력 발전그리고제조업을전부내가주도적으로전개하는것은아니라서 내가책임지는게어색하다.
그러나웬일인지모든산업생산의소비자로 서내게도공동책임이있는것만같다는느낌이든다.
동조행위같기도 하고, 부화뇌동같기도하나, ‘나’라는개인이인간다운삶을영위하기 위해불가피하게그구조에들어서있다는해명도가능하기에책임소재 와 범위가 애매모호하다.
다음으로둘째조건, 나는인류라는공동체에속해살아가는데이 공동체는내가자발적으로해체할수없다.
인류구성원으로태어났으니 나는인류안에살면서이인류에몰아닥치는위기징후와시나리오를 다른인간동료들과함께겪어야한다. 50)
50) 이인미,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 한나 아렌트, 성난 개인들의 시대에서 인간성 회복의 정치로(서울: 위즈덤하우스, 2023), 243.
그렇기에생태위기, 기후위기 에관한한“우리는모두유죄입니다”가아니라“우리모두에게책임이 있습니다”로신중히바꾸어야할필요가있다.
산업선진국들이환경오 염과탄소배출에서죄를더지은게엄연한사실이지만, 개발도상국에 사는어떤사람이일어나서“우리나라는탄소배출을많이하지않았고, 생태파괴의죄를짓지않았으니, 탄소중립을하지않아도된다”라고손 을털고물러설순없는것이다.
하나의대기층을공유하는공동운명체이 기때문에, 80억인류에속하는하나하나의인간들은그누구도공동책임 에서벗어날수없다.
사정이이러하기에‘생태학적죄’ 명목으로유죄-무 죄를다투는일보다‘집합적책임’을이해하고공유하는일이더적절하 다고볼수있다.
‘집합적책임’을공유할때아렌트가제시한정치적차원 에서의 용서가 보다 수월해진다.
2. 정죄와 책임
짐안탈목사는자신의저서뺷기후교회, 왜& 어떻게뺸에서‘진실과 화해의대화’(truth and reconciliation conversation)를시작하자고제안 했다.51)
51) 짐 안탈/한성수 옮김, 뺷기후교회, 왜 & 어떻게뺸 (2019), 155-157.
안탈 목사의 ‘진실과 화해의 대화’가 제시되기까지는 특별한 사연이있다.
2014년담임목회자들만참석하는자리에서한목회자가 질문을했다.
자신의교회근처에‘엑슨모빌’(Exxon Mobile)이라는대기 업이새로운세계본부건물을짓고있는데, 머지않아교회헌금의80~90 퍼센트가그기업에서나올것이라고기대한다면서, 이에대하여안탈 목사에게논평을부탁했을때였다.
‘엑슨모빌’ 회사는석유와천연가스 시추및판매를주력으로하는초대형기업이며, 탄소배출주범중하나 다.
안탈목사는그자리에서‘진실과화해의대화’를제안하였다.
민감한 주제를화두로삼아진실되게대화하는것만으로도우리는서로를이해 할수있다.
이때상대방을어떻게든내편으로끌어들이는게목적이 아니어야한다. 비난, 조롱, 정죄를자제한채한자리에모이는행위부터 실행해야하는것이다.
‘진실과화해의대화’는대화에참여하려는사람 들이서로를정죄하지않고서로를동료로신뢰하고존중할때시작될 수있다.
탄소배출로돈버는기업들이환경단체들의목소리를듣고변화 할 리가 없지,라고 지레 단정짓고 배척하기만 해서는 ‘진실과 화해의 대화’가 열릴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이웃 인간들을 믿는다면, 꼭그믿음의분량만큼수많은다양한사람들과생태훼손과환경파괴에 대한 책임의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진실과 화해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어야할것이다.
교회가‘생태학적죄’를포함해남들을향해“네가죄를 지었잖아!”라고지적하는목소리의톤을센스있게조절해야한다.
지적 질만하는집단에게귀를기울이는사람은그리많지않다.
점점더 감소된다.
교회의대사회적영향력이줄어든다고탄식하기만해서는안된다.
말하는사람이날카롭게정죄하고비난하기보다, 오늘의사태에함께 책임을공유하자제안할때사람들은그말을경청할마음을먹는다.52)
52) 조지마셜/이은경옮김, 기후변화의심리학: 우리는왜기후변화를외면하는가(서울: 갈마바람, 2018), 170-176.
VI. 맺음말
이 논문은 생태 위기와 기후 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생태학적 죄’ 개념을가져오는생태신학전략에대하여비판적으로살펴보았다.
단 이론신학적비판이라기보다는실천신학적, 정치신학적파장에대한비 판적고찰에좀더집중하였다.
이는‘생태학적죄’가비논리적이라거나 비신학적이라고말하는게아니다. ‘생태학적죄’라는용어가상대방에 게정죄와처벌의의미로전달될수있음을염두에두고서, ‘생태학적 죄’를이야기할때‘용서’를병행하여언급하자는것이이논문의기본 관점이다.
다만듣는이들을기분좋게해주자는이야기가아니다.
기독교적 사랑으로죄인을껴안자는이야기도아니고, 과거행위를덮어놓고승인 하자는이야기도아니다.
생태위기및기후위기를실질적으로해결하는 것이우리기독교인들이추진하는기독교적환경활동의목표가되어야 하지, 누군가를정죄하고처벌하는느낌을강화해기독교적환경활동 대열을소위순수한환경활동가들로만채우는것이목표여서는안됨을 환기하기위해서였다. 모쪼록길게내다보고전진해야하는환경활동 대오에서누군가홀로낙심하지않도록, 누군가홀로분노하지않도록, 누군가홀로후퇴하지않도록, 정죄보다는용서를강조하면서죄의식보 다는책임의식을 공유하자고 손 내밀며, “기후 정치에 다같이 참여하 자!”고 말 건네는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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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생태학적 죄’와 ‘집합적 책임’의 신학적 의도와 반향에 대한 연구 이 논문의 목적은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대조한 책임의식과 죄의식 개념을 들여다보며, 이를 오늘날 생태환경 실천 활동에 적용하여 각각 의 신학적 효력과 현실적 ・ 정치적 파장을 분석하는 것이다.
책임의식과 죄의식 개념을 대조하는 이유는 죄의식의 강조가 쉽게 정죄 및 처벌 등 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죄, 처벌 등의 개념이 자아내는 분위기 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 지구적 생태환경 실천 활동을 본의 아니 게 위축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 논문 저자의 관측이다.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의 급증과 함께 최근 등장한 ‘생태학적 죄’라는 용 어는 인간중심성을 날카롭게 일깨운다.
그것은 신학적 차원에서 엄격한 반성적 성찰을 촉진하는 전략적 개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 문은 ‘생태학적 죄’ 개념을 사용하는 생태신학적 전략이 타인을 정죄하 는 일종의 지적질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인간중 심의 반대극(인간 혐오)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것이 거 론될 때 반드시 용서나 화해 등의 개념과 함께 언급되어야 한다고 주장 한다.
관련하여 이 논문은 아렌트가 역설하는 용서의 의미를 고찰한다.
아렌 트에 따르면 용서는 지속가능한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활동이다.
그것이 끝없는 행위, 끝없는 ‘제2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아렌 트의 정치이론 체계 안에서 용서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활동이라기보 다는, 일상적이며 정치적인 활동으로 제시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 이 저지른 잘못은 그것이 ‘죄’라서 용서가 필요한 게 아니라 ‘환원불가능 성’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아렌트의 용서는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의미의 죄 개념과 비교적 느슨하게 연결된다.
관련하여 오해를 불식코자 밝히는 것이지만, 이 논문은 생태 위기 및 기 후 위기에 대한 죄의식이 불필요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죄를 강조하 지 않으면 죄의식을 간과하는 것이다’라는 선명하되 극단적인 논리, 혹 은 ‘모 아니면 도’라는 양자택일식의 논의를 다만 우회했을 따름이다.
요 컨대‘생태학적죄’를아예말하지말자는게아니라잘말하자는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종교적 성숙함이나 도덕적 고귀함을 겸허히 접어 두고, 용서 행위를 일상적 수준에서 다루며 정치적 삶으로 빈번히 실천 할수록, 우리가 ‘집합적 책임’을 의식하며 전개하는 생태환경 실천 활동 이 지속가능성을 풍부하게 담보할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주제어 ‖ 생태학적 죄, 집합적 책임, 용서, 지속가능성, 환원불가능성
Abstract
A Study of the Theological Intentions and Repercussions of Ecological Sin and Collective Responsibility
Lee, In-mee. (Th.D. Research Professor of 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Theology Sungkonghoe University Seoul, Korea)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oncepts of responsibility and guilt contrasted by political theorist Hannah Arendt and to apply them to contemporary christian ecological environmental practices to assess their practical and political theological implications. The reason we need to contrast the concepts of responsibility and guilt that humans feel is because ‘emphasizing guilt’ can lead to blame, condemnation, punishment in everyday life. The author argues that the climate created by concepts such as guilt, blame, condemnation, and punishment can, although not always, inadvertently hinder sustainable ecological environmental activities that should be implemented globally. The term ‘ecological sin,’ which has emerged recently as interest in the ecological theology has grown, is reminiscent of anthropocentrism. But from a theological perspective, it functions as a preliminary term for rigorous reflection and thorough rebuke. The author argues that we must be careful that eco-theological strategies utilizing the concepts of ‘ecological sin’ or ‘ecocide’ do not degenerate into criticism that strongly condemns others, and that we must be careful not to fall into misanthropy, the opposite concept of anthropocentrism. Therefore, when discussing it, it should be mentioned together with concepts such as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This paper analyzes forgiveness as a ‘political action,’ an activity that begins with the belief that the wrongdoer can start anew. As Arendt puts it, forgiveness means making possible continuous political action. Forgiveness, according to Arendt, is an activity that enables endless action and endless ‘a second birth’ and is therefore an essential activity in human history. Simply put, forgiveness is not a religious or ethical activity, but an everyday and political one. It is therefore loosely related to guilt. In conclusion, this paper predicts that as more people recognize and share a sense of responsibility rather than guilt for the ecological and climate crises, and as we address and practice forgiveness in our everyday lives, our practical, political, and global ecological activities will become more sustainable. So we can act sustainably without necessarily claiming to be religious or moral, or condemning one another(Roman 4:3).
Keywords ‖ Ecological sin, Collective Responsibility, Forgiveness, Sustainability, Irreversibility ∙
투고접수일: 2024년 11월 01일 ∙ 심사(수정)일: 2024년 11월 16일 ∙ 게재확정일: 2024년 11월 26일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7집(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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