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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스데반의 변론에서 모세 이야기의 의미(행 7:1-43)/박영진.안양大

  초록

스데반 연설은 자신에 대한 고소에 변론하는 것이다(6:13-14; 7:1).

그런데 그의 연 설, 특히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는 자신의 고소에 대한 변론과 맞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이 모세 이야기가 스데반의 변론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문 분석을 통해 스데반의 의도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는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7:2-43에 나타난 스데반의 아브라함, 요셉, 모세 이야기는 모세의 이야기로서 묶을 수 있는데, 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스데반은 모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에, 특별히 약속과 성취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 다.

그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묘사된다. 모세는 기사와 표적으로 형제들 을 구원을 했지만 그의 형제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이런 모세의 이야기는 37절의 갑작스러운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과 “속량하는 자”라는 칭호,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 모세의 모습을 통하여 모세와 예수를 연결한다.

그러기에 위의 모세에 대한 설명은 곧 예수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예수에 대한 변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 게 스데반이 예수를 변증한 것은 스데반에 대한 고소가 사실은 예수에 대한 고소였기 때문이다(행 6:14).

그러기에 예수를 변론함으로써 스데반은 자신에 대한 고소를 무력 화한다. 스데반의 변론은 문맥에서는 자신의 고소에 대한 변론이지만, 동시에 예수에 608❙신약논단 제31권 제4호∙2024년 겨울 대한 증언을 담고 있다.

이런 증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하고자 했던 예수에 대한 증언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사도행전의 목적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주제어 스데반의 변론, 사도행전 7장, 모세와 같은 선지자, 약속과 성취, 하나님의 주도성, 예수에 대한 상반된 평가

 

 

I.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연설(7:2-53)은 자신이 당한 고소 에 대한 변론이다(7:1).

그 고소 내용은 그가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거 슬려 말한다는 것이었다(6:13).

그러나 그의 변론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 모세 이야기는 이와 무관하게 보인다.1)

그것은 그의 모세 이야 기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을 잠깐 언급하지만(38절), 주요 핵심은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구원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2)

 

     1) 이런 문제의식을 갖은 대표적인 학자가 M. Dibelius이다. 그의 입장과 그를 따르는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황욱연, “사도행전 6:1-8:4의 ‘갈등’ 모티프 이해,” 신약논단 25/4 (2018), 986-87; Hans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A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ans. by James Limburg et al. ed. by Eldon Jay Epp with Christopher R. Matthew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57; John J.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Acts 7:2-53),” Biblica 70/2 (1989), 184-92; I. Howard Marshall, 사도행전, 왕인성 역 (서울: CLC, 2016), 212.

     2) 스데반이 모세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F. J. Foakes-Jackson은 이 모세 이야기는 하나님은 특정한 한 곳, 곧 성전에 계시지 않고 메소보다미아, 애굽 등 여러 곳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있다고 본다. F. J. Foakes-Jackson, “Stephen’s Speech in Acts,” JBL 49/3 (1930), 283; 김정훈, “스데반의 설교와 신학,” 기독신학저널 2 (2002), 61; 윤철 원, “스데반의 연설에 대한 내러티브 비평적 독서,” 神學과 宣敎 32 (2006), 5-8. 그에 반해 John J. Kilgallen은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 것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모세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모세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제시하고자 그런 것이라고 본다.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76-77.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모세의 이야기가 어떤 점에서 자신을 향한 고소에 대한 변론이 되는지 의문이다.

아울러 모세 이야기 안에서도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데반이 모세의 행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문맥과 상관없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을 언급한다 는 점인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스럽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세밀한 본문 분석을 통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스데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스데반의 변론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스데반 변론의 배경인 고소 내용과 스데반 변론의 구성, 그리고 그 속에 모세 이야기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살펴본 후(II장), 본문 분석을 통해 스데반이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 기에서 부각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III장).

이를 토대로 스데반의 이야기 속에 모세와 예수의 연관성이 부각되어 있다 는 점을 확인하고(IV장), 이를 통해 모세 이야기 속에서 스데반이 예 수에 대해 어떤 변증을 하고 있는지를(V장)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고찰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 것은 모세를 통해 예수를 변호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은 예수에 대한 고소였기 때문이다(행 6:14).

이 논문은 본문을 중심으로 이런 논지를 밝히고자 한다.

 

II. 스데반 변론의 배경과 구성, 모세 이야기의 범위

 

1. 스데반 변론의 배경으로서 고소

 

7:2-53에 나타난 스데반의 연설은 스데반에 대한 고소(6:13-14. 참조 6:11)를 확인하는 대제사장의 질문(7:1)에3) 대한 답변이다.

따라서 이 는 스데반 자신의 고소에 대한 변론으로 볼 수 있다.4)

스데반에 대한 고소 내용은 두 번에(행 6:11과 6:13-14) 걸쳐 나타난 다.5)

그것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인데(6:11), 좀 더 구체적 으로 율법과 “이 거룩한 곳” 곧 성전을6) 거스른다는 것이다(6:13).

 

       3) Craig S. Keener, Acts: An Exegetical Commentary, vol. 2 (Grand Rapids: Baker Academic, c2012), 1328.

       4)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스데반의 연설을 스데반의 변론으로 칭한다. Michael R. Whitenton, “Rewriting Abraham and Joseph: Stephen’s Speech (Acts 7:2-16) and Jewish Exegetical Traditions,” Novum Testamentum 54/2 (2012), 161; Foakes-Jackson, “Stephen’s Speech in Acts,” 283; Jürgen Roloff, Die Apostelgeschichte, 19. Aufl.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c2010), 119; Eckhard J. Schnabel,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정현 옮김, 존더반 신약주석 (서울 : 디모데, 2018), 370. 스데반의 연설 을 변론이 아니라 고소로 보는 이도 있다. Brian N. Peterson, “Stephen’s Speech as a Modified Prophetic Rîḇ Formula,”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7/2 (2014), 359. 스데반의 연설의 결론을 7:51-53으로 보고, 특히 7:52-53에 주목한 다면,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도 모세에게 불복종한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주목한다면 이 모세의 이야기는 소극적인 변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중 들과 유대인들을 향한 스데반의 고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모세의 이야기 대부분 이나 그 밖의 스데반의 연설을 이것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고소당한 스데반이 역으로 청중들과 유대인들을 고소하고 있다는 것은 모세 이야기의 중요 한 특성을 보여주지만, 전체를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5) James P. Sweeney, “Stephen’s Speech (Acts 7:2-53): Is It as ‘Anti-Temple’ as Is Frequently Alleged?,” Trinity Journal 23/2 (2002), 192. 그에 반해 Kilgallen이 스데반에 대한 고소를 세 가지로 정리하는데(6:11, 13, 14), 그것은 점점 더 구체화된다고 본다.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84; Joseph A.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New York: Doubleday, c1998), 358-59.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으나, 틀에 있어서 는 6:14은 6:13에 대한 부연이기에 이 둘은 하나로 보는 것이, 그래서 전체적으로 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이 거룩한 곳은 성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14절의 설명에서 “이 거룩한 곳”은 헐리게 되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스데반의 변론에서 성전에 대한 변론이 나오는 것도(44-50절) 이를 뒷받침한다.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59.

 

그 러면서 고소인들은 스데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7) 스데반의 잘못은 자신이 직접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헐고 율법 규례를 고치겠다고8) 한 예수의 말을 전했다 는 것이다(6:14).

즉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거스른 것은 그런 내용의 예수 말을 전했다는 데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스 데반에 대한 고소이지만, 실제로는 예수에 대한 고소이다.

즉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것은 예수이고, 스데반은 그런 예수의 모독을 전함으 로써 간접적으로 모독했다고 고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소의 대 상은 일차적으로 스데반이지만 실제로는 나사렛 예수이고, 그 고소의 내용은 성전과 율법에 대한 모독이었다.9)

 

     7) 13절에서 그렇게 고소하는 이유를 14절에서 접속사 γάρ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박성호, “스데반 이야기로 재구성해본 헬라파의 신학: 스데반에 대한 고발과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 신학과 세계 103 (2022), 79-80.

    8) 많은 경우 스데반의 고소를 율법과 성전에 대한 비판으로 본다. Ben Witherington III도 여기서 비판이 율법과 성전에 대한 두 가지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6:14을 왜 덧붙였는지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Ben Witherington III,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c1998), 258.

    9) Kilgallen은 이 주제가 고소와 연설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85-89.

 

이러한 점에서 7장에서 제 시되고 있는 스데반의 변론은 자신에 대한 변론이지만 그것은 예수에 대한 변론과도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2. 스데반 변론의 구성과 모세 이야기의 범위

 

이 스데반의 변론은 크게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2-8절), 요셉의 이 야기(9-16절), 모세의 이야기(17-43절), 성전에 대한 이야기(44-50절),10)  그리고 율법과 관련한 청중들에 대한 비판(51-53절)으로11) 나눠볼 수 있다.12)

 

      10) 44-47절은 앞의 이야기와 함께 연결되어 앞의 모세 이야기가 솔로몬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로 볼 수 있지만 44-47절은 39-43절과 구분된다. 그에 반하 여 이어지는 48-50절과는 연결되어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48-50절에 나 오는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곧 이것은 스데반과 예수에 대한 고소 내용이었던 성전 비판에 대한 변론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곧이어 살펴볼 예정이다. 각주 20 참조.

      11) 이 단락을 앞 단락과 구분 짓는 것은 화제가 과거의 이야기에서 현재의 이야기로, 그리고 제3자의 이야기에서 청중들에게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즉 이제 까지 독자와 상관없어 보이는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독자들을 대상으로, 특별히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그런 점에서 이 단락은 스데반 변론의 결론부이면서, 앞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런 데 이 단락에서 독자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에 초점이 모아져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단락은 율법과 관련한 변론으로 볼 수 있다.

     12) 그런데 이 스데반의 변론의 구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먼저는 두 부분으로 나눠 보는 입장인데, 김득중은 스데반의 설교를 크게 1-34절과 35-53절 로 구분하고, 전반부는 이방 땅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후반부는 손으로 지은 성전 에 대한 공격을 담고 있다고 본다. 김득중, “스데반과 빌립,” 신학과 세계 53 (2005), 47-48. Luke T. Johnson은 1-16절을 족장들에게 준 약속, 17-53절은 선지자 모세라는 제목을 달아 둘로 나눈다. Luke T.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2), 114-37. 다음으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입장도 있는데, Gerd Lüdemann은 2-38절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까지의 이스라엘의 역 사, 39-50절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서 우상숭배와 성전 건축, 51-53절은 이스라 엘의 죄로 본다. Gerd Lüdemann, 사도행전: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재구성, 김충 연 역 (서울: 솔로몬, 2014), 135. 그리고 이 변론을 5부로 구성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먼저 Sweeny는 2-36절 이스라엘 역사 개관, 37-38절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약속, 39-43절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빠짐, 44-50절 핵심적 이슈 (성전 고소 자체), 51-53절 청중에게 적용으로 나눠 본다. Sweeney, “Stephen’s Speech,” 194. Witherington도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보는데, 그것은 2a절 도입 부(exordium), 2b-34절 이야기(narratio), 35절 전이부, 36-50절 논증(argumentatio), 51-53절 마무리(peroratio)이다. Witherington, The Acts of the Apostles, 260-61. Hans Conzelmann은 스데반의 연설이 다음과 같이 5단락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2-8절 아브라함의 이야기, 9-16절 요셉의 이야기, 17-43절 모세 이야기, 51-53절 요약이면 서 적용. 그는 44-50절에 대해서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는데, 내용상 성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1-58. F. F. Bruce는 더 세분하여 일곱 단락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그것은 2-8절 족장시대, 9-19절 이집트에서 이스 라엘, 20-29절 모세의 출생과 청년기, 30-34절 모세의 소명, 35-43절 광야 여정, 44-50절 장막과 성전, 51-53절 청중에 적용으로 나누어진다. F. 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0), 190-209. 마지막으로 Joseph A. Fitzmyer도 크게는 결론까지 해서 여섯 부분으로 보는데, 그런데 그 사이 사이에 전이부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2a절 도입부, 2b-8a절 1부 아브라함 이야기, 8b절 전이부, 9-16절 2부 요셉 이야기, 17-19 절 전이부, 20-38절 3부 모세 이야기, 39-40  절 전이부, 41-43절 4부 이스라엘 첫 번째 타락, 44-50절 5부 이스라엘 두 번째 타락, 51-53절 결론으로 구성된다고 본 다.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65. Darrell L. Bock도 여섯 부분으로 나누는 데, 2a절 도입부, 2b-8절 아브라함 이야기, 9-16절 요셉 이야기, 17-43절 모세 이야 기, 44-50절 성전 이야기, 51-53절은 적용으로 보았다. Darrell L. Bock, Act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276. 이런 구성들을 보면 대체로 2-16절을 아브라함 과 요셉의 이야기로 보고, 51-53절은 결론부로 본다. 차이점은 모세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이다. 즉 모세의 이야기의 시작은 17절로 보는데 모세의 이야 기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세 이야기의 끝과 관련해서는 좀 크게는 53절까지로 보는 입장도 있고(Johnson), 아니면 36절까지(Sweeny), 또는 38 절까지(Lüdemann과 Fitzmyer), 그리고 43절까지 보는 입장(Conzelmann과 Bruce) 도 있다.  

 

이 구성과 관련하여 먼저 검토해 볼 점은 모세의 이야기가 어디까 지인가 하는 점이다.

38절은 모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38절 까지는 모세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46절은 다윗의 이야기이 므로 46절 이하는 확실히 모세의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문제는 39-45절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39-45절은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13)

그런 점에서 앞선 모세의 이야기와 뒤 에 나오는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와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 만 같은 조상들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39-43절은 모세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14)

왜냐하면 뒤에 모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살 펴보겠지만 모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모세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들의 대조적인 반응인데(9, 35절 등),15) 39-43절도 모세 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3) 39-43절은 모세에 대한 조상들의 불복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44-45절은 증거 장막과 조상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14) 39-43절을 나누어서 30-40절을 출애굽, 41-50을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는 약속의 성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연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성 취: 사도행전 7장을 중심으로,” 교회와 문화 22 (2009), 120-21. 하지만 이것은 본문 구조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41-43절은 39-40절에 보이는 이스라엘 이 모세에게 불순종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5) 다음의 항목을 참조할 것. III. 2. 나, III. 6. 라, III. 7. 라. 

 

그 중에 39-41절은 36-38절에 나타난 모세 사역에 대한 조상들의 불순종하는 반응이고,16) 42-43절은 이런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인데, 이는 간접적으로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39-43절 이 앞 단락에 속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리스어 문장 구성이 다.

39절은 관계대명사로(ᾧ) 시작하는데, 이것은 38절 중간에 나오는 관계대명사(ὅς)와 함께 38절을 여는 지시대명사(οὗτος), 곧 모세를 꾸민 다.17)

그래서 39절은 38절에 대한 반응임을 뒷받침한다.

그러한 반응 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41절까지 이어지고, 이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42-43절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모세 이야기는 38절에서 끝 나지 않고 39절을 거쳐서 43절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 절하다.

그에 반해 44-45절은 같은 조상들의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핵 심은 증거 장막이다.

이것이 핵심이라는 것은 44절이 증거장막(ἡ σκηνὴ τοῦ μαρτυρίου)에 대한 언급에서 시작되었고,18) 45절은 이 증거장막 성 전을 설명하는 관계대명사절(ἥν)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증거장막은 이어지는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문제로 이어진 다(7:46-47).19)

 

    16) 모세에 대한 조상들의 이런 불순종은 모세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중요 주제다(행 7:23-29, 35).

    17) Bock, Acts, 297.

    18) 우리 번역은 조상들이 증거의 장막보다 먼저 나오지만, 그리스어 문장에서는 증거 의 장막이라는 단어로 이 문장은 시작한다.   

    19)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65.

  

그런 점에서 44절 이하는 성전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44-45절이 46절과 연결된다는 것은 45절이 다윗에 대한 언급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즉 스데반은 45절을 46절과 연 결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이야기는 43절까지이고, 44 절 이후는 성전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는 구분이라고 볼 수 있다.20)

 

      20) 그러기에 39-43절을 44-50절과 함께 묶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아 보인다. Lüdemann,  사도행전, 135. 그에 반해 44-45절은 48절까지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44-45절은 다윗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설명이고 46-47절은 다윗 이후의 하나 님의 처소의 문제이고, 48절은 이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스데반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모세 이야기는 43절에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점은 모세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아브라함과 요셉 의 이야기는 모세와 다른 인물들을 다루고 있어서, 각각 독립적인 이 야기처럼 보이지만, 문맥을 살펴볼 때, 아브라함과 요셉의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의 배경으로서 모세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와 모세 이야기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보여준 다.

그것은 스데반이 모세 이야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 신 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함(17절)으로써 이러한 관계를 의도적으 로 부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6절에서 종으로서 사백 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리라는 예언은 19, 34절에 같은 동사(“괴롭게 하다”[κακόω])를 사 용함으로써 이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7절에서 심판 하시겠다는 약속은 36절의 기사와 표적을 통해 역시 실현된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모세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것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스데반이 소개하는 것 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도 모세의 이야기와 깊은 관련 이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라는 예언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그 땅에서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의 배경이 된 것(7절)처럼, 실제로 이 요셉의 이야기는 모세를 통한 구원 이야기 의 배경이 된다(17-18절).

그런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도 모세 이야기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는 다 모세 이야 기의 중요한 배경으로 제시된 것이며, 그래서 모세 이야기는 17절이 아니라 2절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변론에서 모세의 이야기는 2절에서 시작하여 43절에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적합하 다.

이 모세의 이야기에 성전과 관련된 변론(44-50절), 율법과 관련한 변론(51-53절)이 합쳐져서 스데반의 변론을 구성하고 있다.

 

III. 모세 이야기 속에 부각된 메시지들

 

2-43절까지 모세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상대하시는 대상을 중심으 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와(2-8절) 요셉의 이야기(9-16절), 그리고 모세의 이야기로(17-43절) 이루어져 있다.

모세의 이야기는(17-43절) 다시 모 세의 나이를 중심(23, 30절)으로 모세의 출생과 성장(17-22절), 동족 간 의 분쟁에 개입(23-29절), 모세를 통한 구원(30-43절)으로 이루어져 있 다.

이 모세를 통한 구원은(30-43절)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30-34절) 과 모세를 보내시는 하나님(35-43절)으로 나눠볼 수 있고,21) 모세를 보 내심(35-43절)은 모세가 가서 행한 구원 사역과(35-38절) 이 모세를 거 절하는 백성들의 반응(39-4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21)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은 34절에서는 보내시겠다는(ἀποστείλω) 계획을 말씀하신 반면에 35절은 보내셨다는(ἀπέσταλκεν)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34절과 35절을 기준으로 나눠서 34절까지는 모세를 파송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고, 35절 이하는 그 계획대로 파송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담고 있는 것으 로 단락을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이런 틀을 중 심으로 각 단락에서 스데반이 부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 고자 한다.

 

1.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7:2-8): 하나님 주도성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과정(2-4절)과 그 땅을 아브라함이 아니라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5-7절)으로 나눠볼 수  있고, 마지막 할례 언약으로 마무리되는데(8절), 이 과정에서 눈에 띄 는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주체가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 브라함에게 메소보다미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명령하실 뿐 아 니라(2-3절), 실제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신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4절).

또한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5절), 그 약속을 실현하실 분 도 역시 하나님으로 나온다(7절).22)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명령과 실행, 그리고 약속과 그 약속의 실현까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 루어지는 것임을 스데반은 강조하고 있다.23)

 

    22) 이것은 창 15:14(LXX)를 인용한 것으로, 이 문장에서 대명사 ἐγώ가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시겠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23) 하나님의 주도성은 이 단락에 나오는 문장들의 주어가 7:4a,6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라는 데서 확인된다. 그만큼 이 문장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이주를 하나님께서 옮기신 것으로 표현함으 로써 스데반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보여주고자 한다(4절). Ju-Won Kim, “Explicit Quotations from Genesis within the Context of Stephen’s Speech in Acts,” Neotestamentica 412 (2007), 353.

 

2. 요셉을 통한 애굽으로 이주(7:9-16)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이어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는 요셉이 애굽으 로 팔려가서(9절), 애굽의 통치자가 되고(10절), 그래서 야곱의 자손이 애굽으로 옮겨가게 된 과정을(11-15절)24)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야곱 이 세겜에서 장사된 이야기(16절)로 마무리한다.

 

    24) 이 단락을 다시 흉년(11절) 야곱의 아들들 애굽으로 보냄(12절) 요셉과 형제들 과 바로가 서로 알게 됨(13절)  요셉의 이주 초청(14절)  야곱의 이주(15절)로 세 분할 수 있다. 

 

가. 하나님의 주도성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주도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요셉의 이야기의 핵심은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내용(11-15절)인 데,25)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요셉이 애굽의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25) 이것은 구성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애굽으로 옮기게 된 이야기 가 8절 중에서 5절을 차지한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이 자손이 애굽 에 내려가게 된 이야기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셉이 통치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환난 에서 건져내시고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기(10절) 때문에 가 능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4절) 야곱의 가족 이 애굽으로 이주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나. 하나님과 형제들의 대조적인 모습

 

이와 함께 요셉의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형제들은 요셉을 팔았 으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셔 그를 통치자로 세우셨다는(9-10절),26) 즉, 요셉에 대한 형제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으로 대우하는 모습이다.27)

 

    26) 이 점은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부각되는 점이다. 요셉이 통치자가 되어 그의 형제 와 가족을 구원한 것처럼, 모세도 그의 형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 였다(35절).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81.

    27) Marshall, 사도행전, 221-22; 김영호, “스데반 설교에 나타나는 기독론적 대조공 식,” 신학정론 34/1 (2016), 249. 

 

이 점은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부각되는 모습이다(35절).

 

3. 모세의 출생과 성장(7:17-22)

 

이 단락은 모세의 출생(17-21절)과 성장(22절)으로 나눠볼 수 있다.

 

가. 약속의 성취로서 모세의 출생

 

이 단락에서 스데반이 강조하는 것은 모세의 출생을 하나님의 약속 (7절)의 성취로 설명한다는 것이다(17절).28)

이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 시켜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괴롭게 하다”(κακόω)라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6, 19절) 모세의 출생 상황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 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29)

 

    28)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3; Sweeney, “Stephen’s Speech,” 195; Schnabel,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393; 이한수,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설교의 의의,” 신약 논단 78/2 (2011), 42.

    29) E. Haenchen, 사도행전(1), 국제성서주석 33-1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426. 

 

나. 말과 일에 능한 자.

 

아울러 성장한 모세를 “말과 일에 능하더라”(δυνατὸς ἐν λόγοις καὶ ἔργοις αὐτοῦ)고 묘사한 것(22절)은 모세의 구원 사역에 그대로 드러난 다.

35-38절에 나타난 모세의 사역은 먼저 일에 능한 자로서 모세가 행한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고(36절) 말에 능한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 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달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38절).

그런 점에 서 이 수식은 스데반이 모세의 사역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자

 

다음으로 모세는 태어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ἀστεῖος)고 설명하고 있다(20절).

출애굽기 2:2(LXX)과 비교할 때, 스데반은 이 형 용사에 “하나님이 보시기에(τῷ θεῷ)”라는 단어를 첨가했음을 알 수 있 다.

그렇게 해서 모세를 하나님과 깊이 연결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30)

 

    30)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75;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3; Witherington, The Acts of the Apostles, 269-98; BDAG, “ἀστεῖος.” 행 13:22에서도 다윗과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ἀνὴρ κατὰ τὴν καρδίαν μου)이라는 것이다. 그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외모와 관련 하여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BDAG, “ἀστεῖος.”

이 사전은  이런 해석의 여지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스데반이 특별히 모세의 외모에 대한 칭찬을 최상급으로 묘사하는 것은 문맥상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과 모세의 행동이나 의식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문맥을 볼 때 그의 사역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은 이어지는 모세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묘 사되고 있다는 점이다(25절, 34절과 36절).

그것은 모세의 모습이나 의 식이 하나님의 모습이나 의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나타나는데, 그것 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는 모습(23절과 34절 비교)이나 하나님께 서 자신을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자의식(25절)과 실제로 보내시는 하 나님의 모습(34-35절 비교)에서 확인된다.

 

4. 동족을 돕다가 배척당하는 모세(7:23-29)

 

모세 생애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의 일 로,31) 그것은 동족을 돕는 것과(23-25절), 동족에게 배척을 당하는 것 (26-2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31) 모세의 생애는 탄생과 성장, 미디안으로 도주, 하나님의 소명과 출애굽으로 나눠지 는데, 그것은 그의 나이를 40으로 나눠 소개되고 있다(23, 30절).   

 

가. 하나님의 대리인

 

이 단락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이 대리인으로서 모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출애 굽 이야기와 조금 다른 부분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자신의 형 제 이스라엘을 돌볼 생각이 났다는 것(23절)과,32) 애굽 사람을 죽인 다음에 모세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행동이었음 을(25절)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33)

 

    32)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형제들을 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출 2:11).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6.

   33) 출애굽기에는 죽인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의도는 나와 있지 않다(출 2:12-13). Witherington, The Acts of the Apostles, 269;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6. 

 

즉 출애굽기와 달리 스데반은 모세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23절과 34절) 하나님의 대리인(25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34)

 

    34) 스데반은 25절에서 모세의 의도를 적어줌으로써, 모세가 하나님의 임명된 구원자 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Sweeney, “Stephen’s Speech,” 195. 그런 점에서 여기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은 34절 이후에 본격적으로 실현될 하나님 의 구원 행위를 강하게 암시한다.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3;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76-77. 

 

나. 동족의 배척과 그로 인한 도주

 

다음으로 이에 대한 동족의 반응(26-29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자 신이 구해준 동족에게 배척당하는 모습을 부각하고 있다.

이 배척을 스데반은 모세를 거절한 것으로 묘사한다(35절, ἠρνήσαντο).

이런 거절 은 이어지는 미디안 도주의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 더욱 부각되어 있 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것도, 바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 쳤다고 설명하는 출애굽기(2:15)와 달리, 이 거절하는 말 때문이었다 고(29절, “이 말 때문에”[ἐν τῷ λόγῳ τούτῳ]) 스데반은 설명한다.35)

 

    35) 즉 동족의 거절은 모세를 미디안으로 도주하게 할 정도였다.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3. 이런 모세의 모습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냈지 만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모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39-43절, 특히 39절, ἀπώσαντο는 27절에 나온 동사와 같다). 

 

5.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7:30-34)

 

가. 하나님의 주도성

 

이 단락에서 모든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주도성이 가장 잘 드 러난다. 모세를 통한 구원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찾아오셔서 시작되었다(30절).36)

 

     36)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백성을 향한 모세의 탄식과 간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모세를 설득하신 것을 보여주는 출애굽기(출 3:1-14)처럼, 본문도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의 구 원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세를 파송하신 것도 누구의 간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스라 엘의 고난을 보고 들으시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오셔서 하 신 일이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내려오신 하나님이 자신의 구 원 사역의 도구로 모세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모든 구 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37)

 

     37)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모세의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 기에 모세에 대한 거절은(39-41절) 곧 하나님에 대한 거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42-43절의 인용구). Witherington, Acts of the Apostles, 270. 

 

나. 약속의 성취

 

이 단락은 무엇보다 모세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32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 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것에서 암시된다(32절).38)

 

    38) 이런 칭호는 출애굽의 상황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출 3:6, 15, 16; 4:5 등. 사실 출애굽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 신 것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약속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창 50:24; 출 2:24; 6:8; 33:1; 레 26:42; 신 1:8; 6:10; 9:5; 30:20; 34:4 등. 이것은 이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모세를 통한 구원은 앞의 아브라함의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7절). 

 

왜냐하면 특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5-7절에 나온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 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나온 ‘괴롭게 하다’라는 동사(6절)가 19절에 이어 34절에서 나타나(34절, κάκωσιν), 6절의 예언이 34절에서 실현되 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모세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 약속의 성 취라는 것을 이 단락에서 확인시켜 준다.

 

 

6. 모세를 보내시는 하나님(7:35-43)

 

이 단락의 전반부(35-38절)에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역 이 나오고, 후반부(39-43절)에는 이에 대한 조상들의 불순종하는 반응 이 나타난다.

구원하는 사역은 다시 파송(35절)과 그에 따른 모세의 일에 능한 모습(36절)과 말에 능한 모습(38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 하나님의 주도성

 

이 단락에는39) 모세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주도성이 30-34절 단락만 큼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절이 지시대명사 “이 사람”(οὗτος)으 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성을 읽을 수 있다(35, 36, 37, 38 절).40)

 

     39) 35-38절은 각 절이 모세의 신분, 모세의 표적, 모세의 예언, 모세의 말씀 전달자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40) 35절만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어서 목적격이 사용되었다. 

 

즉 이 대명사를 통해 모세를 34절에서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자 와 연결하여 35절 이하의 모세 사역은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대리인으 로서 사역이고, 그래서 모세를 통한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임을 암시하여 하나님의 주도성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

 

이 단락에서 묘사된 모세의 사역은 22절에 암시된 대로 말과 일에 능한 자의 모습이다.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모세가 행한 기 사와 표적(36절)은 일에 능한 자의 모습이고, 천사와 함께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을 전해준 것(38절)은 말에 능한 자의 모습이다.

 

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

 

이 단락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모세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예언하는 것을 스데반이 소개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을 담고 있는 37절의 문 장 구성은 37절이 38절과 39절과 대등한 문장임을 보여준다.

사실 37 절의 출처가 되는 신명기 18:15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37절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 사역을 묘사하는 38절과 묶을 수 있다.

하지만 스데반의 문장 구성에서 37절은 36절이나 38절과 대등하게 “이 사람”(οὗτος)라 는 지시대명사로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스데반은 38절과 대등한 사 역으로 37절을 소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은 이 모세의 예 언을 모세의 일과 말에 능한 사역만큼이나 중요한 사역으로 부각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청중은 모세의 이 예언을 모세의 표적이나 율법만 큼이나 중요하게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문장 구성상 예언한 사람이 ‘모세’(ὁ Μωϋσῆς)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예언을 주목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즉 대등한 지시대명사를 사용한 문장 구성을 통해 이 예언을 강조한 스데반이, 이 예언의 주체가 청중 들이 그렇게 존중하는, 즉 예수와 스데반을 고소할 정도로 존중하는 모세라고 부각함으로써 다시 한번 이 예언을 부각한다.

이런 문장 구 성들을 고려할 때, 이 예언은 이 모세의 이야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예언의 대상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다.

즉 모세와 비견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선지자는 모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말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일차적으로는 모세의 후계자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스데반이 변론하는 신약시대에 이 예언은 종말론적 구원자에 대한 희망을 담은 예언이었다.

그 희망은 사마리아인들의 종말론적인 희망이었고,41) 동시에 쿰란 문서에서도 확인되는 종말론적인 희망이었다.42)

 

     41) 사마리아인들의 성경인 사마리아 오경에서는 신 18:15 이하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 에 대한 약속이 출 20장의 십계명 구절 다음에 나온다. 그만큼 사마리아인들에게  중요한 구절임을, 그들의 메시아 희망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종말 의 구원자로 기대했던 타헤브도 신 18:15 이하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와 깊은 연관 이 있다. 조석민, “사마리아 종교의 타헤브(Taheb),” Canon&Culture 3/2 (2009), 134-37.

    42)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1QS 9.11; 4Q175 5-8. 

 

또한 마카베오서에서도 확인되고,43) 그 리고 요세푸스의 글을 보면 그 당시에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 들이 이 희망에 근거해서 자신의 메시아 됨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으 로 보인다.44)

이런 종말론적 희망을 초대교회는 예수에게 적용하였다.

그 신앙을 베드로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 3:22).

그런 점에서 스데반은 이 예언을 통해 예수와 모세를 연결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45)

 

     43)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1마카 4:46; 14:41.

     44)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Josephus, A. J. 20. 97ff, 169ff. 이와 관련해서는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관계,” Canon&Culture 5/2 (2011), 257.

     45) 이에 대해서는 IV. 1. 가. 항목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라. 동족의 배척과 하나님의 인정

 

이 단락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모세의 구원 사역만큼이나 비중 있게 그 모세에 대한 조상들의 배척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39-43절).

그래서 이런 구도를 통하여 스데반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임명하셔서 보내신 자로서 사역을 했는데(35-38절), 그러 나 그런 그를 조상들은 배척했다는 것(39-41절)을, 그리고 그랬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거절을 자신에 대한 거절로 이해하시고 그들을 외면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42-43절).

이는 모세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그를 거절하는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 동족들의 상반된 태도는 이 미 형제들은 팔았지만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그를 애굽의 통치자로 세웠던 요셉의 경우(9-10절)와 형제들은 모세를 관리와 재판관으로 거 절했지만(27, 35절), 하나님은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세우셨다는 구절 들(35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대조적 인 태도는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에서 강조하려는 주제임을 알 수 있다.

 

7. 정리

 

이제까지 살펴본 모세의 이야기에서 스데반이 강조한 특성들을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하나님의 주도성

모세의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모 든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먼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시고 그것을 이행하시는 분도,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실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셨 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으로 이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신 분이 하나님이시 고, 그러기에 이주 자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의 출생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도구 역할을 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모세를 부르시고 보내신 단락에서 는 등장에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칭호, 그리고 이스라엘의 괴로움을 보시고 구원하러 내려오셨다는 표현과 이를 위해 모세를 파 송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도성을 잘 보여주고(34절), 그 파송에 따라 벌어지는 모세의 사역은 모두 지시대명사 “οὗτος”를 사용 하여 설명함(35, 36, 37, 38절 모두 이 지시대명사로 시작)으로써 모세 의 모든 사역이 34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 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스데반은 이 모세를 통한 구원 사역(30-38절) 에서 하나님의 주도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스 데반을 통한 모세의 이야기는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그 약 속에서부터 그 진행, 그리고 그 성취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었음을 보여준다.46)

 

   46) Sweeney, “Stephen’s Speech,” 195.

 

이 과정에서 모세는 철저히 이스 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고,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다는 것 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모세의 정당성이 보증되는 것이고, 이런 모세 에 대한 불복종이나 거절은 곧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이요, 거절임을 알 수 있다(42-43절).

 

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모세

 

이런 주도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 로 그려지고 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과 모세의 공통된 모습들에서도 확인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괴로 움을 당한 것을 보고 들으신 것처럼(34절), 모세도 자신의 형제 이스 라엘을 돌볼 생각이 났고(23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괴로움을 보시고 행동하신 것(34-38절)처럼 모세도 형제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 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 압제 받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24절).

그런 점에서 모세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 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런 대리인의 모습은 25절에 나타난 모세 의 자의식에서 드러나 있고, 모세의 사역을 담고 있는 35-38절에서 각 절이 모두 지시대명사로 시작함으로써 모세의 사역을 바로 앞의 하나 님의 파송(34절)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를  통해 스데반은 모세 사역의 정당성을 부각하고 있다.

 

다. 약속의 성취로서 모세의 이야기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모세의 이야기(2-43절)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아브라함 이야기(2-8절)와 그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요셉과 모세의 이 야기(9-43절)로 나눠볼 수 있다.

약속의 성취는 다시 성취된 내용에 따 라,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라는 예언의 성취(9-16절), “괴롭게 하 리라”라는 예언의 성취(17-29절), 심판하여 나오게 하신다는 약속의 성취(30-43절)로 이루어져 있다.47)

이와 같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스 데반은 모세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로 설명 하고 있다.48)

이런 구도를 잘 확인해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 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는 모습(32절)이다.49)

 

     47) Keener, Acts, 1358; 양나단, “스데반 설교의 목적: 변론방식을 중심으로,” 신학지평 33 (2021), 312.

    48)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35.

    49) Keener, Acts, 1358. 

 

라. 동족의 배척과 하나님의 인정

 

모세의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에서 모세 에 대한 형제들의 대우와 하나님의 대우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는 점이다.50)

 

    50) 김영호, “스데반 설교에 나타나는 기독론적 대조공식,” 249-50. 

 

먼저 요셉의 이야기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았 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셔서 그를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다 (9-10절). 자신들을 돕는 모세를 형제들은 관리와 재판관으로서 거절 했지만(27, 35절) 하나님은 모세를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35 절).

이러한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모세에 대한 동족들의 배척은 39- 41절에서 잘 드러난다.51)

 

    51) 사실 요셉의 경우나(9-10절), 나이 40세 때 모세의 경우는(23-29절) 모두 다 39-41절 에 나타난 조상들의 배척을 말하고자 스데반이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76; 이한수,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설교의 의의,” 45.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거절한것은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오히려 외면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다(42-43절).

이와 같이 요셉은, 특히 모 세는 형제들로부터는 배척당했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형제들을 구원하는 자로 세우셨고,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 구원을 이 루셨다. 그리고 그런 모세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예고하셨다.

 

마. 말과 일에 능한 자로서 모세

 

모세의 성장과 관련하여 모세를 말과 일에 능한 자로 묘사한 것은 (22절) 실제의 사역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스데반이 36절과 38절을 통해 모세의 구원 사역을 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IV. 모세와 예수의 관계

 

스데반이 지금 유대인들의 고소에 자신을 변론하면서 모세의 이야 기를 이렇게 길게 말한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모세의 사역 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의 이야 기를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스데반이 모세 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를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이 모세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예수를 연결하려는 스데반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모세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명시적 근거들

 

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7:37)

 

무엇보다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를 염두에 두었다 는 것은 37절에 나타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모세의 예언은 모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 맥과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면서 지시대명사를 통해서, 그리고 예언 하는 자가 모세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예언을 부각하고 있다.

그래 서 스데반이 문맥에 맞지 않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왜 이렇게 부각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당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종말 론적 희망이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그 희망은 신약성서에 서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사마리아인 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자신과 연결시켰는데(요 4:25-26), 사마리아인 들이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구원자는 37절에 대한 설명에서 밝힌대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다(참조 요 4:19).52)

그 외에도 오병이어 표적을 보고 무리가 한 “그 선지자”에 대한 고백(요 6:14)과53) 생수에 대한 약 속에 보인 무리의 반응으로서 “그 선지자”에 대한 고백(요 7:40)도54) 그 당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인 선지자는 모세가 했던 표적을 행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55)

 

      52) 요 4:19과 종말론적인 선지자에 대해서는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 자의 관계,” 258.

      53) 요 6:14과 종말론적인 선지자에 대해서는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 자의 관계,” 258-59

      54) 요 7:40과 종말론적인 선지자에 대해서는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 자의 관계,” 259.

     55)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관계,” 259-16. 

 

그리고 이 무리의 고백은  기자의 고백으로 볼 수 있다.56)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기독론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과 긴밀하게 연결된 누가복음에서 선지자 로서, 특별히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로서 예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 고(눅 24:19. 참조 눅 4:24; 7:16; 13:33),57) 무엇보다 스데반의 변론이 들 어있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는 모세가 예언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묘 사되고 있다(3:22-23).58)

그러므로 37절에서 언급된 모세와 같은 선지 자는 신약성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모세의 입을 통해서 언급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예수를 염두에 둔 것이다.59)

그렇다면 스데반이 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칭호에 표현된 대로 모세가 이 종말론적 구원자 를 자신과 같은 선지자로 부름으로써 예수를 자신과 연결하고 있고, 이를 통해 스데반은 예수를 모세와 비견되는 존재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60)

모세와 예수를 연결하는 모습은 모세의 이야기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 있는데,61) 37절에서 스데반이 이 칭호를 통해 모세와 예수를 명시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이제까지 모세와 예수의 관계를 암시했던 것들이 사실은 스데반의 의도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 는 것이다.

 

     56) 이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고백은 표적을 매개로 요한복음의 기독론인 그리스도 고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선지자 고백도 그리스도 고백과 함 께 기자의 기독론으로 보여진다. 박영진,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관 계,” 253-61.           57) “말과 일에 능한”이라는 표현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모세에게 적용된 표현이 었다. 그런 점에서 이 표현을 통해서도 모세와 예수의 깊은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보완적 근거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58) Sweeney, “Stephen’s Speech,” 196.

    59)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202; Marshall, 사도행전, 230.

    60) 스데반은 이를 자신의 표현 속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즉 스데반은 “이 사람”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문맥상 모세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 사람을 꾸미는 말 을 “말한 자(ὁ εἴπας)”라고 표현하지 않고, “말한 모세(ὁ Μωϋσῆς ὁ εἴπας)”라고 모세를 추가로 이름을 밝힘으로써,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에서 비교의 대상 이 모세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61) 이 점은 IV.2 단락에서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37절은 스데반의 변론에 나타난 모세 이야기의 의미를 예수와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핵심 열쇠라고 볼 수 있다.62)

 

나. 속량하는 자

 

스데반이 모세를 예수와 연결하고자 한다는 또 다른 중요한 증거는 스데반이 모세에게 붙여준 “속량하는 자(λυτρωτής)”라는 칭호이다.

스 데반은 35절에서 형제들이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임명하셨다고 양자를 대조하는데, 그런데 그 칭호가 일부분이 바뀌어 있다. 즉 스데 반은 동족들이 언급한 관리와 재판장이라는 모세의 신분(27, 35절)을 하나님이 세운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바꾸었다(35절). 스데반이 변경 해 새롭게 모세에게 준 속량하는 자라는 칭호는 모세에게 적용된 적 이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모세의 사역과는 무관하게 보인다.63)

왜냐 하면 모세는 자신이나 자신의 무엇인가를 대신 지불하고 이스라엘 백 성을 구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세에게 어울리지 않는 칭호를 일부러 변경하여 모세에게 덧붙인 것은 스데반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속량하는 자는 예수의 사역을 가리키 는 중요한 개념이다.

속량하는 자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이 구절 하나뿐이지만 이와 유사한 단어들은 신약성서에 여러 번 나오는데 모 두 다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먼저 대속물이라는 단 어(λύτρον)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마 20:28; 막 10:45), ‘속량하다’라는 동사(λυτρόω) 예수의 행적과 관련해서 사용 되었다(눅 24:21; 딛 2:14; 벧전 1:18-19).64)

 

    62) Peterson, “Stephen’s Speech,” 363.

    63)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9. 

    64) Lüdemann, 사도행전, 137.   

 

그리고 속량이라는 명사도(λύτρωσις)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눅 1:68; 2:38; 히 9:12).65)

이 명사에서 파생한 또 다른 명사(ἀπολύτρωσις)도 속량이라는 의미로 서, 역시 예수의 사역과 연관된다(눅 21:28; 롬 3:24; 8:23; 고전 1:30; 엡 1:7, 14; 4:30; 골 1:14; 히 9:15).66)

무엇보다 사도행전에서 이사야 53장 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해석한 것(행 8:29-35)은 초대교회가 예수를 속 량하는 자로 이해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모세 를 속량하는 자로 묘사한 것은 예수의 사역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67)

 

     65) 비록 눅 1:68은 하나님의 속량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수를 통한 속량이기에 이 속량도 예수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66) 눅 21:28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 때 일어날 속량을 가리키고 있다. 롬 8:23도 미래의 속량을 가리킨다. 엡 1:14과 4:30도 참조. 다만 히 11:35만 믿음의 선진들이 현재의 고문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킨다.

     67) 참조. 행 5:31.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54; Marshall, 사도행전, 230;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9; Haenchen, 사도행전, 429; 조재천, “스데반 의 연설(행 7:2-53)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기능,” 신약논단 20/4 (2013), 1038.

 

즉 스데반은 예수에게 어울리는 칭호를 어색하게 모세에 게 붙여줌으로써 모세를 예수와 연결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모세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암시적 근거들

 

이런 중요한 근거들 말고도 무엇보다 앞에서 살펴본 모세의 이야기 에서 스데반이 특별히 부각한 모세의 모습들이 사실은 예수의 모습과 매우 유사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모습들이 스데반이 모 세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 약속과 성취

 

먼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라는 틀 속에서 모세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틀은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는 중요한 틀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사역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고전 15:3-8).

그러기에 신약성서는 예수의 사역을 설명할 때 종종 구약성서를 인용 하여 그에 대한 성취로 설명한다.

이 점은 예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 곳곳에서 확인된다.

특별히 사도행전과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는 누가복음에서 이 점이 부각되어 있다.

먼저 누가복음 서문에서 기자는 예수의 사건을 구약성서에서 약속한 것의 성취된 사건으로 본 다(눅 1:1).68)

무엇보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소개한 나 사렛 회당 설교에서 자신이 사역은 이사야서 61:1-2의 약속에 대한 성 취로 설명하고 있다(눅 4:18-21).

또한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에서 약속한 것의 성취로 설명하셨다 (눅 24:25-27).69)

 

    68) I. Howard Marshall, 누가복음(I), 국제성서주석 31-1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 34.

    69)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예수의 부활 을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설명함으로써 예수의 사건을 약속의 성취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단락에서 이런 약속의 성취가 중요한 주제라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에 대한 두 제자의 반응에서(눅 24:32) 더욱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의 부활을 몸으로 보여주신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사건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 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를 확증시켜주셨다(눅 24:44-46).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의 죽 음과 부활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증언에서도 부각되어 있다.

그중 에서 하나의 예를 든다면,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행한 한 변론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성취로 보았다 (행 2:25-28, 34-35. 참조 3:22-23; 4:25-26; 8:32-33; 13:33-35 등). 

 

나. 동족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대우

 

앞에서 살펴본 대로 모세의 이야기에서 부각된 것은 동족들과 하나 님의 대조적인 대우였다.

요셉을 형제들은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 은 그와 함께 계셔 그를 통치자로 세우셨고(9-10절), 모세를 동족들은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삼으셨다(35절).

모세의 사역에 조상들은 불순종했지만(39-41절), 하나님은 그런 조상들을 책 망하셨다(42-43절).

이런 동족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대우는 사도행 전에서 예수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설명 방식 이다.

즉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행 2:23-24, 36; 3:13-15; 4:10-11[참조. 시 118:22]; 10:39-40; 13:27- 31 등).70)

이것은 특별히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의 중요한 틀이 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음에 넘겼지만 (행 2:23),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살리실 뿐만 아니라(행 2:24-32), 그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고(행 2:33),71) 그래서 모든 원수로 예수의 발등상이 되게 하셨고(행 2:35), 그 결과 사람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언한다(행 2:36).

즉 예수를 온 세상 의 통치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에서 요셉의 모습(9-10절)이나 모세의 모습(35, 39-43절)은72)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 시킨다.

 

     70) 김영호, “스데반 설교에 나타나는 기독론적 대조공식,” 243-46.

     71) 33절의 “τῇ δεξιᾷ οὖν τοῦ θεοῦ”를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은 수단의 여격을 보아 “오른손으로”로 번역했지만, 이는 장소의 여격으로, 즉 “오른편으로”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259. 번역본들을 보면 대체로 영역 (英譯)들은 장소로 보았고(참조 NASB, NRSV, NIV, ESV, 공동번역). 그에 반해 독 일어 번역본들은 수단의 여격으로 보았다(루터번역, 엘버펠더번역, 통일번역). 이 를 장소로 보면, 이 표현은 보좌 우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이 이어지는 근거 구절로 제시된 2:34-35과도 잘 어울린다.

      72) Schnabel,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400. 

 

모세가 40이 되어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모습(27-28절)도 예수의 모습이 반영한다.

이 동족들의 태도를 스데반은 35절에서 거 절한 것으로(ἠρνήσαντο) 설명하는데, 이 동사는 예수의 동족들이 예수 를 배척할 때 사용되던 단어이다(행 3:13, 14).73)

 

      73)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9. Keener는 이 배척받은 것이 모세와 예수를 연결하는 가장 핵심적인 면으로 보았다. Keener, Acts, 1402-1403. 

 

이와 같이 모세에 대 한 동족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대우는 사도행전에서 부각되어 있는 예수에 대한 동족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대우를 연상시킴으로써 모 세와 예수를 연결한다.

 

다. 말과 일에 능한 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모세의 성장에 대한 묘사에서 모세는 “말과 일 에 능한 자”(δυνατὸς ἐν λόγοις καὶ ἔργοις αὐτοῦ)로 묘사되고 있다(22절).

그것은 실제로 모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36, 38절).

이와 같이 말과 일에 능한 자로서 모세에 대한 설명은 예수의 모습을 강하게 암시한 다.

왜냐하면 말과 일에 능하다는 것은 사도행전을 쓴 기자가 기록한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수식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προφήτης δυνατὸς ἐν ἔργῳ καὶ λόγῳ)로 소개하는 데서 확인된다(눅 24:19).74)

그런 점에서 말과 일에 능한 자라는 묘사(22절)는 누가복음 24:19을 매개로 모세를 예수와 연결한다.75)

특별히 36절에서 모세의 일에 능한 모습을 “기사 와 표적”(τέρατα καὶ σημεῖα)으로 요약하는데, 이 어구는 구약에서 출 애굽 때 모세를 통하여 일어난 일들을 총칭하는 어구이면서(참조 신 4:34; 6:22; 7:19; 렘 32:20, 21 등), 동시에 신약, 무엇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사역을 요약하는 어구이다(τέρασιν καὶ σημείοις, 행 2:22).76)

 

   74)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376;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126; Haenchen, 사도행전, 427, 각주 13.

   75) Lüdemann, 사도행전, 136; Schnabel,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395.

   76) 사도행전에서 이 어구는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역을 요약하는 어구로 자주 등장한다(행 2:43; 4:30; 5:12; 6:8; 14:3; 15:12). 그런데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행 4:32) 그들의 행적은 예수 의 대리인으로서 한 행적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는 곧 예수의 표적과 기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모세의 행적으로서 표적과 기사는 예수의 행적을 강하 게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7)

 

    77)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201. 이외에도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 다른 아이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겨우 모세만 살아난 모습도 예수의 유아기 때의 상황을 암시한 다(마 2:16-18).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 왕이 어린아이를 죽였던 것처럼 예수가 태어날 때도 헤롯왕은 두 살 아래의 모든 아이를 다 죽였다(마 2:16). 태어날 때의 이런 유사한 상황은 모세의 모습을 통해 예수의 삶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3. 정리

 

이상의 근거들을 볼 때에 스데반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이 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세를 예수와 연결함으로써 사실은 예수의 이 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78)

 

     78) Kilgallen은 다른 각도에서 모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셉과 모세와 예수의 연관 성을 제시한다.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86-87. 특히 요셉과 형제들의 관계를 예수와 동족들과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Jürgen Roloff도 다른 면에서 이런 관계를 긍정한다. Roloff, Die Apostelgeschichte, 119. 

 

V. 모세의 이야기를 통한 예수에 대한 변증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 는 것이라면 그러면 스데반은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을 모세의 이야기에서 스데반이 부각한 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다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주도성

 

스데반은 모세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역사였다는 것 을 부각함으로써,79) 예수를 통한 구원도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였다 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79) III. 7. 가를 참조 바람.

 

모세를 통한 구원 사역은 하나님 께서 약속하시고 직접 그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모세의 사역과 예수 사역의 유사점은 청중들이 그렇게 추종하는(6:11, 14) 모세의 사역이 하나님 의 약속의 성취였기에 그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청중들 이 대적하는 예수의 사역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기에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모세와 같이 예수도 그들이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예수의 신분

 

모세 이야기에 나타난 모세의 여러 가지 신분은 사실 예수의 신분 을 변론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세처럼(35절. 참조 10절) 예수는 통치자이시고(행 2:34-36), 속량하는 자이시다(행 8:29-35).

그리고 예수 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제시함으로써(37절) 한편으론 예수를 자신 과 같은 자로 연결하는 효과가 있으면서 동시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인 희망이었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예 수와 연결함으로써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종말론적 구원자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묘사함으로써(34-35절),80) 모 세의 기사와 표적을, 다른 한편으로 모세의 말씀을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 변호한 것처럼, 예수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예수의 기사 와 표적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 변호하고 그리하 여 예수를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80) 참조 III. 7. 나. 

 

3. 동족의 배척과 하나님의 인정

 

또한 모세의 이야기에서 부각되었던 동족의 배척과 하나님의 인정 이라는 모세에 대한 대조적인 대우는 사도들이 강조했던 예수에 대한 대조적인 대우와 일치한다.81)

그래서 사도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스데 반도 동족인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 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으로 그 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82)

 

    81) 요셉에 대한 대조적인 대우도(9-10절) 그런 점에서 예수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Roloff, Die Apostelgeschichte, 121.

    82) Sweeney, “Stephen’s Speech,” 210. 모세에 대한 동족들의 배척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그들의 배척이 모세를 통한 구원 이후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기 서 거절당한 것이 구원 후에 당하는 모습이라는 점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유대인들 의 반응과 연결할 수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그들의 증언의 대상인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이룬 후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룬 모세를 거절하는 조상들을 책망하신 것처럼(42-43절) 구원을 이루신 예수를 거절하는 청 중들, 곧 유대인들을 책망하신다는 것을 스데반은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 대조적인 유대인들의 태도는 그들이 조상들이 하나 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42-43절)처럼 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책 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아울러 담고 있다고 보인다.

 

4. 스데반의 변론에서 모세 이야기의 의미

 

이와 같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를 변론하는 것은 스데반의 변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7장에서 스데반에 대한 고소는 성전을 헐고 모세의 규례를 고치겠다는 예수의 말을 전했다는 것이었다(6:14). 그런 점에서 스데반에 대한 고소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고소이고, 구체적으로는 그가 성전을 헐고 모세가 준 율 법을 변경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소의 핵심은 예수이고, 그 꼬투 리가 성전과 율법이었다.

즉 고소인과 청중들에게 거슬린 것은 그가 예수를 전했다는 것이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특히 공 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전하는 것에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

그들이 죽인 예수를 제자들이 전함으로써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행 5:27-33).

청중들이 지금 스데반보다 예수에 대해 민 감하다는 것은 스데반이 예수를 의인으로 소개하고 그들이 그를 죽였 다고 이야기하자, 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52-54절), 또는 예수 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셨다고 증언하자 돌을 던지는 반응(55-58 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83)

 

     83) Kilgallen, “The Function of Stephen’s Speech,” 185. 

 

그래서 스데반의 변론은 52절(2-53절) 가 운데 42절(2-43절)을 모세를 통해 예수를 변론하는 데 쓰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데반은 예수를 고소하는 고소인들과 청중들을 향 하여 모세 이야기를 통해 예수와 모세를 연결함으로써 이 고소 분위 기를 완전히 역전시키고 있다.

스데반은 그들이 적대하는 예수를 그 들이 숭상하는 모세와 연결함으로써, 예수를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적대하고 고소하는 것은 모세를 적대하고 고소하는 것과 같고, 그래 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39-43절).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경고를 하고자 했다는 것은 실제로 스데반이 7:51-53에서 청중을 향하여 명시 적으로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통해 예수를 변론한 후, 예수를 고소하는 근거가 되었던 성전에 대한 비판에 대한 변론(44-50절)과 율법에 대한 비판에 대한 변 론(51-53절)을 덧붙이고 있다.

 

5. 결론

 

이 모든 것을 종합하자면,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의 사역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는 점을 부 각함으로써, 예수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종말론적인 구원자로서 속량하는 자임을 주 장하며, 그런 그를 배척한 유대인들, 특히 청중들을 강하게 책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변증하는 것 이다.

그런 점에서 스데반의 모세 이야기는 단순히 자신이 모세를 존 중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모세를 모독한다는 고소를 반박하는 소극적 인 변론이 아니라, 그들이 스데반을 고소하는 토대가 되는 예수를 고 소하는 것에 대해 예수를 적극적으로 변론하고자 모세를 인용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VI. 글을 맺으며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확인한 것은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통해 예수를 변호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스데반은 모세를 통한 구원은 하나 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특별히 약속과 성취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 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묘사되 고 있다.

그런 모세를 정작 자신의 동족들은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 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송하셨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배척한 동족들 을 책망하셨다.

이런 모세의 이야기는 37절의 갑작스러운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 한 예언을 통해 예수와 모세를 연결하고 있다.

모세와 예수의 연관성 은 이 예언 외에도 모세에게 속량하는 자라는 어색한 칭호나 약속과 성취의 틀, 동족들과 하나님의 대조적인 대우, 말과 일에 능통한 자라 는 묘사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연관성을 볼 때,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모세 와 같은 통치자요, 속량하는 자요, 종말의 구원자요, 무엇보다 하나님 의 대리인이고, 그래서 그의 행적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구원의 사 역이다.

그리고 모세가 동족들에게 거절당한 것처럼, 예수도 동족들 에게 거절당한 것이고, 그래서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받은 것처럼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책망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세의 이야기가(7:2-43) 스데반의 변론에서(7:2-53)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금의 고소의 핵심은 바로 예수에 대한 고소였기 때 문이다.

그래서 스데반은 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가지 각도에 서 모세와 예수를 연결하여 예수를 강력하게 변호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소개하는 이 모세 이야기는 신약성서에 암시적으로(요 4:19; 6:14; 7:40), 명시적으로(행 3:22) 소개되었던 종말론적 희망인 모 세와 같은 선지자를 예수와 연결하면서, 초대교회는 모세와 같은 선 지자로서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증언했는가를 헤아릴 수 있는 중요 한 토대를 제공한다.

즉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볼 때 모세와 예수를 단순히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예수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을 어떤 점에서 비교하고 연결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를 이 모세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모세의 이야기 에서 제시된 예수의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에 의한 예수에 대한 증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의 사역 을 약속의 성취로 본다거나 또는 동족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지만, 하 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그런 점에서 예수를 배척한 그들은 하 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스데반의 변론은 예수를 증언하 는(행 1:8) 사도행전의 메시지와도 잘 어울린다.

예를 들면 약속의 성 취에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2:25-32에, 동족의 배척과 하나님의 높이심 은 사도행전 2:36, 예수를 배척한 그들은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 아야 할 잘못이라는 것은 사도행전 2:38-38; 3:17-19 등에 나타난 메시 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예수에 대한 변론을 마친 스데반의 변론은 이어지는 7:44-53의 변론 에서 예수를 고소하는 꼬투리가 되었던 성전과 율법에 대한 고소에 변론함으로써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번에는 논문의 분량 상 스데반의 변론 중 일부인 모세의 이야기에 대해서 살펴보았지만, 다음에는 변론의 나머지 부분인 7:44-53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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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aning of the Story of Moses in the Stephen’s Defense (Acts 7:2-43)

Park, Youngjin (Anyang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The Stephen’s speech in Acts 7 serves as his defense (7:1) against the charges brought by the “false witnesses” (6:13, 14). However, his story of Moses (7:2-43) seems hardly to answer the high priest’s question (7:1), that is, the charges.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meaning of story of Moses in Stephen’s defense. The results are as follows. The story of Moses, which include the stories of Abraham and Joseph, illustrates that the salvation of Israel through Moses is driven by God himself, especially within the frame of promise and fulfillment. In this story Moses is depicted as the agent of God. Therefore, their rejection of Moses equates to the rejection of God, and God responds to this rejection with the rebuke. In this story Moses is identified with Jesus, for example, through the prophecy of Moses about a prophet like Moses, and the title, “redeemer,” as well as other descriptions of Moses in this story. Therefore, the story of Moses can be regarded as the story of Jesus, and so as the defense for Jesus. Stephen’s defense of Jesus is due to the charges against himself, which was actually based on the charge against Jesus (6:13-14). By defending Jesus Stephen is also defending himself. Additionally, this defense of Jesus aligns itself with the Christological witness in Acts.

 

Keywords Stephen’s defense, Acts 7, the prophet like Moses, promise and fulfillment, the sovereignty of God, the contradiction between God and Jew

 

신약논단 제31권 제4호∙2024년 겨울

투고일: 2024. 11. 22. 최종심사일: 2024. 12. 7. 게재확정일: 2024. 12. 8.

스데반의 변론에서 모세 이야기의 의미(행 71-4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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