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사도행전에서 ‘땅’은 물리적, 정치적, 수사적, 신학적 의미를 표현한다.
그 중에서도 신학적인 의미로서 ‘땅’은, 한편으로는 ‘하늘’에 맞서 그 뜻을 거스르는 영역이고, 그래 서 역설적으로 하늘로부터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땅’에서 구원 계시가 수용되 고 구원 역사가 펼쳐지며, ‘온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구원의 복을 누리도록, 사도들은 ‘땅끝’으로 보내졌다.
특히, 1:8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적 확장의 방식으로 사도행전 전체의 구도를 제시했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정작 사도행전 서사가 진행 되면서 예루살렘은 고정된 중심으로 그 지위를 견지하지 못하며, 오히려 중심은 사도들 의 증언 활동을 따라 서진(西進)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곳들 이 중심으로 변환되며, 이때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땅끝’과 중심의 이러한 전위에는 생태평화적 함의가 담겨 있다.
복음의 증언을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의 복을 누림으로써 인류의 편만하고 평등한 삶이 약속되는 것이다.
그 구원은 도시 중심, 인간 중심이 아닌 ‘땅’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태적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주제어 사도행전, 땅끝, 중심, 상징적 지도, 생태평화
I.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의 선교적 주제를 틀짓는 선언(programmatic statement)으로 서 1:8의 중요성은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에게 하나의 공리(公理)로 받 아들여져 왔다.
성령의 권능은 복음의 증언을 지리적으로 확장해 나 가는 원심력이며, 복음의 증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땅끝’을 향해 동심 원을 그려간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땅끝’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이 연구의 최종 목표이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첫째, 사도행전에서 ‘땅’이 언급된 구절들을 전반적으 로 검토하고, 특히 신학적 의미들을 짚어본다.
둘째, ‘땅끝’의 상대 개 념으로서 예루살렘 중심성을 ‘상징적 지도’(symbolic cartography)의 관 점에서 설명하고, 그것이 사도행전 서사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검 토한다.
셋째, 사도행전에서 중심과 ‘땅끝’의 역학은 고정되어 있기보 다 유동적이며 심지어 그 둘이 전위(轉位)될 수 있음을 밝힌다.
마지막 으로, 새롭게 읽어낸 사도행전의 ‘땅끝’ 개념으로부터 생태적 함의를 이끌어 낸다.
II. 사도행전에서 ‘땅’의 다의성
신약성서 전체에서 명사 ‘땅’(ἡ γῆ)은 250회, 형용사형(ἐπίγειος)은 7 회 나온다.1)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가 표현되는데, 실바(M. Silva)는 대략 네 가지로 신약에서 ‘땅’의 의미를 범주화했다.2)
1) 마태복음 43회, 마가복음 19회, 누가복음 25회, 요한복음 13회, 사도행전 33회, 바 울서신 14회, 히브리서 11회, 야고보서 5회, 베드로후서 3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서 최다로 82회 사용되었다.
2) Moisés Silva, s.v. “γῆ,”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Zondervan, 2014), 567-68.
첫째, 물 리적 의미로서 ‘흙’, ‘땅바닥’ 또는 ‘육지’를 뜻한다.
둘째, 정치적 의미 로서 특정 민족 집단이나 나라, 도시 등이 점유하는 영역(territory)을 의미한다.
셋째, 수사적 의미로서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땅과 바다’ 라는 관용구를 통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를 지칭하는 제유법적 심상으로 쓰인다.
넷째, 신학적 의미로서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거나 거스르는 속성을 지닌 것(형용사 ἐπίγειος, ‘땅에 속한’은 항상 그런 의 미이다)을 표현한다.
이 네 가지 의미는 모두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된 다. 여기에 더해서 누가는 다른 신약 저자들이 다루지 않은 ‘땅’의 신 학적 의미를 사도행전의 주제를 전달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1. 물리적 의미: 지표면
사람이 발을 딛고 선 바닥이라는 의미로 ‘땅’이라고 쓰는 경우다.
스데반이 연설 중 모세에 관해 말할 때, 시내산 광야에서 그가 선 곳 이 “거룩한 땅”이라는 주의 말씀(출 3:6)을 인용하는 대목이 있다(행 7:33).
여기서 ‘땅’은 ‘지점’, ‘바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일상적인 의미이다.
비슷한 용례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밝은 빛을 보 고 ‘땅바닥’에 엎드러졌다는 묘사 속에도 나온다(행 9:4, 8; 26:14). 또, 나중에 바울이 미결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해상 여행 도중, 그 가 탄 배가 난파되었다가 겨우 멜리데 섬에 도달하는 장면에서 ‘뭍’ 또는 ‘육지’라는 의미로 명사 γῆ가 사용되었다(행 27:39, 43, 44).
2. 정치적 의미: 영토, 영역
민족이나 나라 이름 뒤에 ‘땅’을 붙여 나라의 영토 혹은 민족이 차 지하고 살아오던 지역을 나타내는 경우다. “갈대아 사람의 땅”(행 7:4), “미디안 땅”(행 7:29), “애굽 땅”(행 7:36, 40; 13:17) 등이며, 그럴 때 γῆ는 χώρα(‘지방’, ‘지역’)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이다.
3. 수사적 의미: ‘하늘’(그리고 ‘바다’)과 함께 피조 세계 전체를 통칭
이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용례는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땅 과 바다”라는 관용구이다.
이때 ‘하늘’과 ‘땅’은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 되어 있지 않고 둘이 묶여서 하나의 배경 혹은 무대를 이룬다.3)
기본 적으로 이 관용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칭한다(골 1:16; 계 10:6; 14: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온 피조 세계에 미치며(마 28:18),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도 그러하다(엡 3:14).
구원의 한 양상에 서 하나님은 온 피조세계를 심판하시고(벧후 3:7; 계 20:11), 또 다른 양상에서 그것을 새롭게 하신다(벧후 3:13; 계 21:1).
그 관용구 외에도 “하늘은 …, 땅은 …”처럼 대구 형식의 서술을 통해 총체성, 전체성을 표현하기도 한다.4)
3)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땅이 한쪽 경계, 하늘이 다른 쪽 경계로서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일종의 양단법(兩端法, merism)이다.
4) “하늘과 땅” 관용구도 그렇지만 이런 대구 표현 역시 거의 모든 신약 저자들에게 두루 사용되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구절들 외에도 공관복음(마 5:34-35; 막 13:27), 바울(고전 8:5; 엡 1:10; 빌 2:10; 골 1:20), 히브리서와 공동서신(히 1:10; 약 5:12; 벧후 3:5; 3:10), 계시록(계 5:3; 13)에도 용례들이 관찰된다.
사도행전에도 이런 수사적 의미의 ‘땅’의 용례가 나온다.
먼저, 피조 세계를 통칭하는 관용구 속에 나오는 경우다.
산헤드린 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후 돌아온 사도들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기 도를 올리면서,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르고 이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이”라고 덧붙인다(행 4:24).
창조주 하나님 신앙을 전제하는 관용구로서 ‘땅’은 피조물이 존재하는 터, 바 탕이라는 뜻이다.
거의 같은 문구가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 앞에서 행한 설교에도 등장한다(행 14:15).
‘땅’과 ‘하늘’은 대구 문장을 통해서도 비슷한 수사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오순절 설교 중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으로부터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행 2:19)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여기에서 땅은 하늘과 함께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 내시는 무대로서 피조 세계 전체를 제유한다.5)
5) 이 때 (누가의) 베드로는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욜 2:30상반절)라는 구약(칠십인역) 본문을 그대로 따오지 않고, 약간 수정했다. “하늘과 땅”을 “하늘 에서는… 땅에서는…”으로 바꾼 것이다. D. G. Peterson은 이 변형을 통해 신학적 전망이 추가되었다고 본다. ‘하늘에서의 기사’는 ‘주님의 날’에 임할 우주적 징조를 뜻하고, ‘땅에서의 징조’는 메시아의 성육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공적 사역 중 행하신 초자연적 일들,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피터슨의 주석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땅’ 은 여전히 특정 지점이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 역사 속의 시공간 전체를 제유한다. D. G. Peterson, The Acts of the Apostles (Grand Rapids: Eerdmans, 2009), 143.
또, 욥바에서 베드로가 본 환상에서 사각형 모양의 ‘한 그릇’이 내려왔다.
그 안에는 “땅에 있 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하늘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행 10:11-12).
이 구절에서 ‘땅’은 ‘하늘’과 함께 생물들의 거주 공간으로 상정된다.
스데반 설교에 인용된 이사야 66:1,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 은 나의 발등상”이라는 표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데반이 주장한 바는, 하나님의 임재가 세계 전체에 미치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일개 건축물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스데반처럼 바울도 “우주와 그 가운 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17:24)라고 설파했다.
바울의 루스드라 설교에서처럼, ‘땅’이 하늘, 바다와 함께 묶여서 눈 에 보이는 온 세상을 제유한다는 발상은 유대-기독교적 창조신앙을 가지지 않더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자연신학적’ 모티프이다.
그럼 에도 사도행전을 포함한 신약성서 전반에서 ‘땅’이 ‘하늘’과 짝을 이루 어 거명될 때, 그 아래에 깔린 전제는 창세기 1장에 근거한 창조신앙 이다.
그런 점에서 이 용례도 부분적으로 신학적이다. 하지만 이어서 살펴볼 다른 용례들은 좀 더 날카롭고 정교한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 기 때문에 별도의 범주로 취급할 것이다.
4. 신학적 의미: 하늘을 거스르면서도 하늘을 향해 열린 구원의 공간
다른 신약 저자들처럼 누가도 제2성전기 유다이즘에서 물려받은 묵시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하늘 vs. 땅’ 이원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땅’은 ‘하늘’에 맞서고 거스르는 대적이다.
먼저 ‘하 늘’에 관한 묵시적 관점이 누가-행전 여러 곳에 표출되어 있다.
‘하늘’ 에는 하나님이 계시고(눅 11:13; 15:7, 18, 21; 18:13; 19:38) 천사들도 있 으며(눅 2:15; 22:43; 21:26),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과 환상, 능력이 나온다(눅 3:21-22; 9:54; 20:4).6)
6) 하늘과 분리된 공간, 하늘의 뜻을 대적하는 공간으로서의 ‘땅’의 의미가 가장 뚜렷 이 드러난 곳은 요한복음과 계시록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늘로부터’ 혹은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를 배척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땅에서 났 고,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요 3:31). 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 들”(계 3:10, 6:10, 8:13, 11:10, 13:8, 12, 14; 14:6; 17:2, 8)은 일관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맞서는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Studies on the Book of Revelation (Edinburgh: T&T Clark, 1993), 241. 비슷한 관점이 신약 다른 곳에서도 관찰된다. 땅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잠정적이고 필멸하 게 될 불완전한 것들의 영역이고(히 8:4-5; 고전 15:47),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세력의 본거지이다(골 3:2, 5).
‘하늘’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영생 과 지복을 누리게 될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다(눅 6:23; 10:20; 12:33).
사도행전에 ‘하늘’과 그 동계어는 총 29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회는 물리적 하늘로 ‘공중’이나 ‘대기권’을 의미하고, 나머지 19회 용례들은 신학적 의미에서 거룩하고 신적인 영역을 가리킨다.7)
7) 행 1:10, 11(세 번); 2:2, 34; 3:21; 7:42, 55, 56; 9:3; 10:11, 16; 11:5, 9, 10; 22:6, 13, 19.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에 상대되는, 속되고 악하며 약한 영역 이 ‘땅’이다.
가. 하늘과 맞서 하늘을 거스르는 ‘땅’
‘땅’에 대한 가장 부정적인 심상이 사도행전의 두 구절에 표현되어 있다.
먼저, 사도들은 시 2편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빗 대 이렇게 표현한다: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 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 였는고 땅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 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행 4:26).
여기서 “땅의 군왕들”은 요한계시록의 “땅의 임금들”(계 1:5; 6:15; 17:2; 19:19)처럼 하나님을 적 극적으로 거스르는 정치 세력을 가리킨다.
유사한 의미의 ‘땅’이 ‘일곱’의 한 사람 빌립이 에디오피아에서 온 관리를 만나 전도하는 장면에 나온다.
그 관리는 마침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읽고 있었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 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 다”(행 8:33; 사 53:8).
(누가의) 빌립의 관점을 따라, 이 구절을 메시아 적 예언이라고 본다면, “땅”은 예수의 생명이 빼앗긴 공간, 하나님을 거스르는 유대인들의 공간, 그리고 그들과 공모한 유다의 마음 속에 역사했던(눅 22:3; 요 13:27) 사탄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사실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를 예언한 구절을 꼽으라면 ‘주의 종’의 대속적 죽음 을 예언하는 4-6절이나 10-12절이 훨씬 더 명확하다.
그런데도 이 내시 는 굳이 8절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메시아의 죽음이 ‘땅’에서, 혹은 ‘땅’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각하였다.
이 두 구절에서 ‘땅’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를 거스르는 세력의 본 거지다.
둘 다 누가 자신의 서술이 아니라 구약성서의 인용이지만, 인 용에는 원문 저자의 의도만이 아니라 인용자의 의도도 들어간다.
인용을 통해 누가는 묵시적 세계관에 따른 ‘땅’에 대한 부정적 신학을 더욱 권위 있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나. 하늘의 계시를 받는 ‘땅’
사도행전의 ‘땅’이 영원히 하늘의 대척점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 다.
‘땅’이 하늘의 계시를 받고, 구원 역사의 무대로서 하나님의 자비 와 능력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역동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이야말로 사 도행전의 저술 목적, 그 주제 의식에 바로 잇닿아 있다.
‘땅’의 기본 (default) 상태는 무지와 불신, 부정(不淨)과 죄악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도들을 ‘땅’에 보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구원하고자 하신다.
무 엇보다 증인으로 활약해야 할 사도 자신들이 먼저 ‘땅’에 부여되는 천 상적 계시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첫 번째 사례는 오순절 날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 여 명의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한 사건이다.
성령이 움직인 방향은 의 심할 바 없이 “하늘로부터” 땅으로였다.
처음에는 바람 같은 소리, 그 리고 이어서 “불꽃처럼 나뉜 혀들”이 각 사람 위에 보였다(행 2:1-3).
베드로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 에서는 징조를”(행 2:19) 베푼 결과라고 이해했다.
말하자면, 하늘의 능력이 땅에 동조된(synchronized) 것이다.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은 체 험은 제자들에게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승천 사건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하늘로’ 올려지심을 보았다.
그들이 하늘을 주 시하고 있을 때 천사는 그들에게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일러준다(행 1:11).8)
8) 행 1:11이 오순절 사건의 예언은 아닐 것이다. C. K. Barrett,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Edinburgh: T&T Clark, 2004), 84.하지만, 예수는 ‘하늘’로 떠났고 제자들은 ‘땅’에 남겨져 하늘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꼈을 상황에서, 오순절 체험이 예수와의 재접속을 체감하게 한 사건이라는 정도의 의미 부여는 가능하다. 누가의 지리적 상상력에 있어서 승천사건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M. Sleeman, Geography and the Ascension Narrative in Ac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The Ascension and Spatial Theory,” Ascent into Heaven in Luke-Acts: New Explorations of Luke’s Narrative Hinge, ed. by David K. Bryan and David W. Pao (Minneapolis: Fortress, 2016), 157-73.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격했던 스데반 역시 그 하늘에서 예수를 본다(행 7:56).
이렇게 사도행전에서 하늘은 수시로 열리고 닫히면서 땅에 있는 제자들을 깨우치고 활력을 주어 증인으로 만들어 갔다.
또 다른 사례가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제공된다.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 또는 보자기 같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네 궤를 매어 땅 에 드리웠다.”
그렇게 하늘과 땅은 만나 접촉했다.
그 그릇에 들어있 던 부정한 각종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 왔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로 베 드로를 깨우친다.
같은 장면과 소리가 세 번 반복된 후 그릇은 하늘로 올라갔다(행 10:11-16).
이 환상으로 촉발된 베드로의 여정은 끝내 로 마 사람 고넬료의 가정에 구원을 가져왔고 사도행전이 그리는 전체 구원 역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시청각 교육을 통해 하나님은 베드로의 ‘땅’스러운 마음을 ‘하늘’의 뜻에 부합하도록 바꾸신 사건이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주인공 바울도 하늘 계시를 받아 ‘땅’의 무지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메섹에서 그가 경험했던 계시 사건이 기록된 세 본문 모두 그가 빛을 보았고, 그 빛은 “하늘로부터” 둘러 비추었으며(행 9:3; 22:6; 26:13) 그때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다”(행 9:4; 22:7; 26:14)고 표현한다.
이어서 그는 “땅에서 일어나”(9:8)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아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땅’은 변화와 계몽의 가능성을 품은 역동적 공 간이다.
성령의 부어짐을 첫번째로 경험했던 사람들, 그리고 사도행 전의 사실상의 두 주인공인 베드로와 바울은 전형적인 인간이자 유대 인으로서 ‘땅’의 한계와 무지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 늘로부터의 소리, 빛, 능력을 접하고 하늘과 통(通)하는 경험을 한다.
하늘이 내려 준 계시를 통해 깨우침을 받고 그들은 ‘하늘화’된 존재로 서 복음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다.
다. 선교의 대상인 ‘땅’
‘땅’ 개념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신약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는 또 하 나의 독특한 지점은 인문지리적 차원에 선교적, 종말론적 차원을 가 미한 것이다.
다음 네 구절을 보자.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ἕως ἐσχάτου τῆς γῆς)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πᾶσαι αἱ πατριαὶ τῆς γῆς) 너의 씨로 말미암아(ἐν τῷ σπέρματί σου) 복을 받 으리라 하셨으니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 아 너로 땅끝까지(ἕως ἐσχάτου τῆς γῆς)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ἐπὶ παντὸς π ροσώπου τῆς γῆς)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ὁρο- θεσία)를 한정하셨으니
이 네 구절을 함께 읽으며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드러난다.
두 구절, 3:25와 13:47은 각각 창세기 12:3하반절과 이사야 49:6을 인용하 고 있다(고딕체 부분).
나머지 두 구절에 성서 인용은 포착되지 않는 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1:8이 13:47에 기대고 있고, 17:26이 3:25 을 되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1:8과 13:47을 같이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 정황상 1:8 의 “너희”는 13:47의 “우리”와 같은 대상이 아니다.
전자는 열둘(정확 히는 열하나)을 한정해서 지칭하고, 후자는 바나바와 바울을 지칭한 다.
하지만 두 그룹 모두 동일한 예언에 기반한 동일한 사명을 받았 다.
즉,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 지역으로, “땅끝까지” 하나님의 빛 을 증언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사명이다.
실상 사도행전 12장까지 베 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 둘의 사역은 예루살렘과 유대 중심이었고, 기 껏해야 사마리아에 빌립이 먼저 전한 복음을 확증하는 정도였다.
본 격적인 ‘땅끝’으로의 증언은 열 둘을 통해서가 아닌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13:47을 통해 1:8이 한 번 더 확언되고, 비로소 역사의 현장에 현실화, 구체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누가 선교 신학의 중요한 한 모티프인 ‘땅끝’이 13:47에 인용된 이사야 의 예언에 기원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즉, 1:8이 부활 예수의 말씀 (ipssissima verba)이든 아니면 누가 혹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착 상이든, 그 뿌리는 이사야 49:6일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두 구절, 3:25과 17:26도 내적 의미의 지평을 공유하고 있다.
3:25에 인용된 구절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약속이다.
전후 문맥을 볼 때, 베드로는 솔로몬 주랑에 모인 유대인들 에게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청중에 게 언약백성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 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말씀을 인용한다.9)
그런데 여기 인용된 내용은 언약 전체가 아니라 후반부이다.
정작 유대인들에게 더 중요했을 언약의 전반부큰 민족을 이룸과 가나안 땅 점유에 대한 약속를 배 제한 채, 베드로는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 매개 가 “너의 씨(σπέρμα σου)”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 는 선민의 특별하고 우선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만민이 함께 누리는 복을 설파했고, 이것은 정확히 17:26에 이어진다.
즉, “땅 위의 모든 족속”에 미치는 하나님의 복을 통해 “온 땅에 살게 하신 인류의 모든 족속”이 보편 은총의 수혜자가 된다.10)
9) 창 12:2-3에 처음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주어질 때 ‘큰 민족을 이룸(=이름의 창대 함)’과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복의 근원됨’이라는 두 가지 약속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복의 매개 혹은 중개자로서 “너의 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게다가 가나안 점유 약속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별도로 주어졌다(창 12:7).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기 서사를 통해 최소 다섯 번 반복 언급되면서 그 구성 요소에 있어서 약간씩 달라진다.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은 13:15-16에서 처음으 로 묶여서 나타나고, 15장에서 그 둘은 순차적으로 하나씩 언급된다(15:4-5의 자손 약속, 15:7의 땅 약속). 17:4-8에서는 다시 자손 약속과 땅 약속이 합쳐진다. ‘아케 다’ 사건의 결론으로 주어진 22:17-18에는 자손 약속에 이어, 12장 이후 나오지 않았던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선언이 등장한다. 마지 막으로 26:3-4, 이삭에게 선언된 언약에는 자손, 땅, 그리고 ‘씨’를 통한 천하 만민 의 복, 이 세 가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합된다. 따라서, 행 3:25에 인용된 구절은 12장, 15장, 17장이 아니라 22장 혹은 26장으로부터 온 것이다.
10) 신학적 관점에서 행 3:25의 ‘복’(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행 17:26의 보편 은총은 성질상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근원은 같다. 많은 주석가가 지적하듯이, 17:26은 창 1-5장, 11:1-9과 같은 원역사로부터 인유되었다(Fitzmyer, Acts, 608-609). 아브라함 언약 속 “땅의 모든 족속” 역시 원역사를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다. 따라 서 바울의 자연 신학적 통찰과 베드로의 언약 신학적 통찰은 창세기 원역사를 공통 원천으로 삼아 만날 수 있다.
아브라함 언약의 “너희 씨”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정하신 사람”(17:31)으로 변환된다.
이렇게 3:25과 17:26은 구속사적 전망을 공유하며, 유대인의 구원과 ‘모 든 족속’의 구원이 구분되면서도 연결된다.
이상 네 구절에서 ‘땅’은 인문적이고 사회적이다.
인문적 의미의 ‘땅’은 특정 민족이나 나라가 점유하는 정치적 의미의 ‘땅’과 어떤 면에서는 겹친다.
둘 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하지만 위 네 구절에서 ‘땅’은 거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에 더해서 그 사 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복의 대상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함께 지닌 다.
인간이 거주하는 곳,11)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내려지고, 그들이 복음의 증언을 들어서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땅’ 이다.
11) 그래서 이 네 구절에서 땅은 사실상 ‘인간 거주 지역’(ἡ οἰκουμένη, 행 11:28; 17:6, 31; 19:27; 24:5), 또는 “온 세상”(κόσμος; 요 3:16-17; 12:47; 딤전 1:15)과 동의어이 다. Hermann Sasse, s.v. “γῆ, Ἐπίγειος,” TDNT I: 679-81.
또, 하나님이 그의 증인들을 보내셔서 구원할 땅은 어떤 특정한 땅, 몇몇 땅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과 ‘땅끝’ 사이에 있는 “온 땅”이다.
그런 보편성이 네 구절 모두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땅끝까지”(1:8; 13:47), “땅 위의 모든 족속”(3:25), “모든 족속… 온 땅”(17:26).
하나님 의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제한이나 차별이 없다면(행 10:34-35), 선교 는 편만하고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미 복음을 들 은 곳으로부터 듣지 못한 것으로 누군가 보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땅’의 보편성은 선교의 당위를 산출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땅’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를 고찰 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중에서도 신학적인 의미를 예루살렘과 ‘땅 끝’에 관한 사도행전의 선교 담론에 적용해 볼 것이다.
III. 예루살렘 그리고 ‘땅끝’: 사도행전의 상징적 지도
1.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상징적 지도
평소 우리가 접해 온 지도들은 실측과 계산을 통해 지면의 모양, 크 기, 해수면 기준 고도, 그리고 식생의 분포 등을 점, 선, 색깔로 표현해놓은 그림이다.
그런 지도를 통해 우리는 객관적인 자연 그대로의 ‘땅’ 의 모습과 상태를 본다. 반면, ‘상징적 지도’(symbolic cartography) 또는 ‘정신적 지도’(mental map)는 서사 속에 담긴 인간 사회의 특정한 양상 을 이차원의 공간 위에 구상적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12)
12) Mikeal C. Parsons, “The Place of Jerusalem on the Lukan Landscape: An Exercise in Symbolic Cartography,” Literary Studies in Luke-Acts: Essays in Honor of Joseph B. Tyson, ed. by Richard P. Thompson and Thomas E. Phillips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98), 155-71. Parsons는 1세기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상징적 지도’를 누가가 알고 있었지만, 그 지도에 함의된 예루살렘의 중심성을 맹종하는 대신 그것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본다.
상징적 지도 를 통해 저자는 그가 주창하는 세계관, 그가 이해하는 개인과 집단들 의 속성, 가치, 관계들을 표현한다.
가. 상징적 지도의 중심에 놓인 예루살렘
상징적 지도는 지명과 민족명으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서사를 펼 쳐 나가면서 누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거주 지 역을 지칭하기 지명과 민족명을 사용한다.
사도행전에 총 71개의 지 명 또는 민족명이 나오고, 때때로 ‘민족목록’(table of nations)이 등장한 다.13)
13) 민족목록은 여러 유대 문헌에 그 선례가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0장, 역대상 1:1-2:2, 희년서 8-9장, 쿰란 문서 중 창세기 외전,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122-47 등에서도 민족 목록이 발견된다. P. S. Alexander, “Geography and the Bible (Early Jewish),” ABD 2:984; J. M. Scott, “Luke’s Geographical Horizon,” The Book of Acts in Its Greco-Roman Setting, ed. by D. W. J. Gill and C. Gempf (Grand Rapids: Eerdmans, 1994), 525-26.
첫번째 민족목록은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 림 사건을 접하고 나서 자신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밝히는 대목에 나온다(행 2:9-11):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 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 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 과 아라비아인들이라.”
구레네와 리비야를 같은 지역으로 본다면 유 대를 포함해 총 열다섯 개의 지명이 여기 들어 있다.
누가가 이 목록 을 통해 독자들의 머릿속에 그려내고자 했던 상징적 지도는 어떠했을 까?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리처드 보컴은 스트라보(64/63 BCE-c. 24 CE)가 그의 지리에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세계 지도 위에 사도행전 2:9-11의 민족목록을 적용하여 아래와 같은 그림 을 얻었다.14)
그림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14) R. Bauckham, “James and the Jerusalem Church,” The Book of Acts in Its Palestinian Setting (Grand Rapids: Eerdmans, 1995), 420.
목록을 따라 순서대로 짚어 가려면 ‘땅’의 동쪽 끝에서 시작해야 한 다.
네 민족이 차례로 거명되고 나면 다섯 번째로 유대에 도달한다.
유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서 다섯 민족 이름을 짚 으면서 한 바퀴를 돈다.
그러고 나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 민족을 거 명하고 서쪽(로마)을 돌아 다시 유대 바로 아래 아라비아에서 마무리 된다.
자연스럽게 열다섯 민족 한 가운데에 유대가 위치한다(위 지도 상 5번).
유대 혹은 예루살렘(시온)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세계 전체를 구상 하는 개념을 누가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더 오래된 선례들이 후기 예 언서와 제2성전기 유대 전통에서 발견된다(겔 38:10-12; 1에녹 26:1; 희년서 8:12).
유대인들보다 먼저 그리스인들은 델피의 ‘배꼽’(ὀμφαλός) 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상상했었다.15)
그리스적 발상이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유대 전통 내에 도 예루살렘 중심의 세계인식을 자극하는 신학적 자양분은 충분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시온 중심의 다윗 왕조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디아스포라가 확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을 어머니 도시(μητρό- πολις)로 동경하는 분위기도 관찰된다.16)
15) Pindar, Pythian Odes 4.131, 6:3
16) Philo, Legatio ad Gaium 1:281.
나. 사도행전 서사에 표출된 예루살렘 중심성
누가는 아마도 동시대 유다이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세상 한 가운 데 두는 상징적 지도를 습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도가 1세기 유대인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들은 전부 유대인이었다)의 삶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끼쳤을까?
수백 년간 외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다윗 왕조 때와 같은 시온주의적 이상을 정치, 사회적 현실로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상업적으로도 예루살렘은 유대 제1의 도시가 아니었을 것이다(로마 총독 정부는 가이사랴에 세 워졌다).
결국 예루살렘 중심성의 실질적 효과는 종교적인 양상에 국 한되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전 중심성이다.
성전이 없었다면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 으로 간주될 수 없었을 것이다.
66년 유대전쟁 발발 전까지 3대 순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를 비롯한 주요 절기에 유대 전역과 갈 릴리, 그리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야웨 앞에 얼 굴을 보이기”(출 23:17)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 와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에 따르면, 부활 예수는 제자들 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된 것을 기다리라고 단단히 명하셨 고(눅 24:49; 행 1:4), 그 명령을 따라 제자들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3).
이후에 성령 강림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했을 때 그들은 “날마다 …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행 2:46).
물론 사도행 전에는 날카로운 반-성전적 비판도 두드러진다(“손으로 지은 곳에 계 시지 않는다”, 행 7:48; 17:24).17)
17) N. H. Taylor는 누가가 70년의 성전 파괴 이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난 상황에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세기 말의 관점에서 30-40년대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를 재구성하면서 누가는 성전이 파괴될 운명이었고 실제 로 파괴되기 오래전부터 그것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음을 넌지시 내비친다는 것이 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 독자들에게 성전을 재건할 시도를 하지 말고 그리스 도 안에 확립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면하고자 했다. N. H. Taylor, “The Jerusalem Temple in Luke-Acts,” HTS Teologiese Studies / Theological Studies 60 (2009), 459-85.
그렇다고 성전의 가치와 의미를 누가 가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가 고 있던 에디오피아 관원의 회심 사건이나, 바울이 자신의 신앙생활 을 회고하면서 언급한 성전에서의 환상 사건 등을 통해 사도행전 서 사 속에 성전의 가치와 의미가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종말론적 대망이다.
포로기 이후 유다이즘에는 종말론적 완 성의 종착지이며 목적지로서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흩어진 언약 백성이 결집하는 것은 물론(사 11:12; 43:5-6), 사방에서 이 방 민족들까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라는(사 2:2; 49:12; 60:3-16; 슥 8:20-23; 토빗 13:11-13) 기대였다.
예루살렘 에 형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이런 예언들을 진지하게 묵상했을 까?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성령 강림을 설명하기 위 해 베드로가 인용한 성서 구절이 강한 종말론적, 보편적 색깔을 띠는 요엘의 예언이었다는 점(행 2:17), 그리고 그 설교에서 베드로는 이미 “모든 먼 데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대상으로 고려했다는 점(행 2:39) 에서 그렇다.
셋째, 신학적 지도력이다.
기원전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제의나 절기, 율법 준수에 관해서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지도하는 독 특한 권위를 행사했다.
예를 들어, 제2마카비서 1:1-2:18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이집트 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초막절 준수에 대해 권면하 는 내용의 편지가 나온다.
유사한 상황에 대한 증거들이 엘레판틴에 서 출토된 파피루스, 그리고 탈무드 여러 곳에도 있다.18)
18) 구체적인 문헌 증거들은 Bauckham, “James and the Jerusalem Church,” 423-24를 참조할 것.
또,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함으로써(행 28:21) 로마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서신을 통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지도와 권면을 받는 시스템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 다.
사마리아와 안디옥에 이방인 회심자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을 지도할 만한 사람들을 보냈다(행 8:14 이하; 11:22, 27).
또, 중요한 신학적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이방지역의 지도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했고, 거기서 내려진 결정을 문서화해서 이 방인 교회들에게 회람시켰다(행 15장).
이처럼 예루살렘 중심성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 직접적 인 영향을 주었다.
고대인들이 오늘날과 같은 사실적인 지도를 얻을 수 없었다고 해서 아무 지도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종 교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경험과 인식을 투영한 그들 나름의 ‘땅’ 혹은 ‘세상’의 형국을 그려나갔다.
그런 상징적 지도의 맥 락에서 우리는 이제 중심과 ‘땅끝’에 관한 사도행전의 서사를 다시 읽 어볼 것이다.
2.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적 확장
사도행전 1:8은 2:5-11과 또 다른 차원의 상징적 지도를 반영한다.
후자가 유다이즘의 세계 인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라면, 전자는 예루살렘을 단지 유대인들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체 기 독교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사도적 선교관을 반영한다.
사도행전의 첫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 구절은 주석가들에 의해 사도행전 서사 전체를 틀짓는(programmatic) 진술이라고 여겨져 왔다.19)
여기에는 동심원적 (concentric) 구조가 작동하는데,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것을 둘러 싼 큰 원을 ‘온 유대’라고 한다면, 그 바깥에 사마리아, 그리고 그 바깥 에 가장 큰 원인 ‘땅끝’이 그려진다.20)
19) Barrett, Acts, 80; Peterson, Acts, 112-13; Johnson, Acts, 11.
20) 갈릴리가 누락된 이유에 관해서는 대체로 당시 속주 ‘유대’와 구분하지 않고 유대 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남북 왕국의 구도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생략했다고 보기도 한다. David W.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Tübingen: Mohr Siebeck, 2000), 95.
단수 형태인 ‘땅끝’의 구체적인 지시 대상에 관해서는 로마, 스페인, 이디오피아 등이 거론되어 왔 고,21) 어떤 한 지점이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의 가장 바깥쪽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22)
21) 주석가들에 의해 제출된 다양한 견해와 논거들을 보려면 Joseph A.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206-207를 참조할 것. 그중 독특한 한 견해로서, Schwartz는 1:8의 ‘땅’을 ‘에레쯔 이스라엘’로 한정짓고, 사도행전의 전반부(12장까 지)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열둘의 사역이 팔레스타인 내에서 이루어짐으로써 1:8을 성취했다고 결론내린다. Daniel R. Schwartz, “The End of the γῆ,” JBL 105 (1986), 669-76. 또 Scott은 창세기 10장의 민족 목록이 여전히 여기에 작동한다고 보면서 선교의 대상이 셈의 자손들(행 2:1-8:25)에서 함의 자손들(8:26-40), 그리고 야벳의 자손들(9:1-28:31)로 확대되어 간다고 제안한다. James M. Scott, “Luke’s Geographical Horizon,” The Book of Acts in Its Greco-Roman Setting, ed. by D. W. J. Gill and C. Gempf (Grand Rapids: Eerdmans; 1994), 530-41.
22) 오늘날 우리가 가진 세계 지도에서는 어디가 ‘땅끝’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땅’은 접시 모양으로 되어 있고 바다가 둘레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땅끝’을 지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Alexander, “Geography and the Bible (Early Jewish),” 977-88.
그렇다면 교회가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는 관점은 누가-행전의 실제 서사와 얼마나 잘 조화될까?
우리는 두 가지 논점으로 나누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검토할 것이다.
하나는 신 학적인 차원에서의 중심성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운동의 차원에서 중심성이다.
가. 신학적 차원에서의 예루살렘 중심성
적어도 누가의 서사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신학적으로 기독교 신앙 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시아 예수의 정체성이 다른 어느 장소 보다 예루살렘에서 정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메시아 사 역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곳,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곳, 그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 수천 명 이 예수를 믿고 공동체를 이룬 곳, 그곳은 예루살렘이었다.
갈릴리가 아니었다.
갈릴리는 예수의 고향이며 거기에서도 공적 사역이 펼쳐졌 지만 그 비중과 가치는 제한적이다.
누가복음 3장에서 시작한 갈릴리 서사는 9장 중간에 이미 끝난다(눅 9:50).
심지어 갈릴리에서 가르치실 때도 청중 가운데 예루살렘서 온 이들이 있었다(눅 5:17; 6:17).
이후 유난히 긴 여정 단락(눅 9:51-19:10)을 통해 누가는 종착점 예루살렘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은다.23)
23) 사도행전 10장에는, 예루살렘을 예수의 수난과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공적 사역 전체의 무대로 설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고넬료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통해 보내진 말씀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되었”(행 10:36-37)으며, 예수께서 치유와 축귀를 포함해서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한다(행 10:38-39).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의 예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눅 1-2장) 예루살렘에서 끝난다(눅 24장).
누가의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 집”(눅 2:49)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없이는 예수도 없다.
그의 삶과 인격, 가르침과 죽 음, 부활, 승천은 예루살렘의 성서적, 신학적 의미를 배경으로 삼을 때 만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누가-행전에서 예루살렘은 기 독교 신앙의 신학적 원천이다.
나. 선교적 차원에서 예루살렘 중심성
예루살렘은 선교 운동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며 전체 선교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인가?
선교의 최초 단계에서는 그러했 다.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성령의 대중적 임재가 일어났고, 그 에너 지가 8,120명 이상 규모의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그다음 단계에서도 결과적으로 그러했다.
신자 대부분이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쫓겨 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성령의 권능으로 그들은 사마리아와 유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다만, 여기에서도 몇 가지 사소하지만 분명 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예루살렘이 시작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순차적인 확장의 구도에 따라 예루살렘 다음 단계는 ‘온 유대’이어야 하는데, 정작 8장에서 우리가 먼저 읽는 것은 사마리아의 복음화이다.
그 주인공은 사도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즉, 1:8에 나오는 약속의 직 접적 수령자가 아닌빌립이다.
더구나 사마리아 복음화에 이어 빌립 은 “땅끝”,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관을 회심시킨다.
그러고 나서 9장에 이르러서야 베드로가 유대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며 치유 기적을 포 함한 증언 활동을 하게 되고, 비유대인임이 명백한 가이사랴의 고넬 료에게도 전도한다.24)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발원한 선교의 원심 력이 가까운 곳부터 차례대로 퍼져나가지 않았고, 인종적으로도 “땅 끝”은 1:8에서 계획된 것보다 훨씬 더 일찍 도달되었다.
이처럼 순차 적이고 단계적인 복음의 확장이라는 개념은 사도행전의 실제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땅끝”으로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고 여겨지는 13장 이후 이야기는 어떤가?
12장까지의 서사와 달리, 13장 이후 예루살렘은 선 교 운동의 중심성을 갑자기 잃어버린다.
이방 세계로의 선교 활동의 교두보가 안디옥이었고 한 차례씩 선교 여정이 끝나 선교사들이 돌아 온 곳도 안디옥이었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었던 바 나바는 예루살렘에서 보내졌지만 사도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었다.25)
24)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가(8:4-13) 베드로의 유대 사역(9:32 이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는 그것을 먼저 기록했다. 만약 누가 가 1:8을 사도행전 전체 서사의 구성 원리로 삼았다면(대부분 주석가가 그렇게 생각한다), 왜 굳이 사마리아 선교를 ‘온 유대’에서의 선교보다 먼저 서술했는지는 여전히 설명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25) 14:4, 14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사도들’이라고 지칭하기는 하지만 1장에서 맛디아 에게 ‘사도의 직무’를 맡기기 위해 일정한 자격 조건을 걸고 엄정한 절차를 거쳐 선출했던 것을 생각하면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 두 용례를 통해 누가가 두 사람을 사도의 반열에 명확히 올렸다는 견해(Peterson, Acts, 404-405)도 있지만 더 많은 주석가들이 이 두 용례가 그런 누가의 의도를 반영하는지에 대해 회의적 이다(Barrett, Acts, 671-72).
전체적으로 13장부터 19장까지 이어지는 이방인 선교의 서사에서 예 루살렘 교회가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어떻게 기여했는지 불분명하다.
낙오자 마가 요한의 예루살렘 귀환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사도 회의 참석을 위해 선교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나, 그것은 특정 지역(안디옥)에서 발생한 특정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일회성 방문이 었다.
바울의 예루살렘 귀환은 어떤가?
안디옥을 중심으로 ‘땅끝’을 향해 계속 나아갔던 바울은 지중해 서안 지역의 선교사역을 마칠 즈음 돌 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로 “작정한다”(행 19:21).
만약 바울이 로마 를 다음 선교지(혹은 로마서에 의하면 스페인 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왜 예루살렘에 먼저 가고자 했을까?
예루살렘 귀 환의 목적은 사도행전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26)
26) 고후 8-9장이나 롬 15장에서 바울이 밝히는 대로 구제헌금의 전달이 예루살렘 귀환의 주된 목적이었을까? 사도행전에서 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딱 하나, “구제할 것”(ἐλεημοσύνας ποιήσων, 24:17)이다. 상당한 위험을 감수할 만큼 구제헌금의 전달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랬다 하더라도 구제헌금을 꼭 바울이 전해줘야 했을까? 그랬다면 누가는 왜 그토록 중요한 일에 대해 그토록 함구하는가? 유사한 의문들이 존슨에 의해 제기되었고(L. T.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2], 413-14), 태너힐(R. C. Tannehill, Narrative Unity of Luke-Acts: a Literary Interpreta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2:300) 은 “구제할 것”을 바울이 이방 세계에서 모금해 온 연보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동료 그리스도 인들은 거듭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다(21:4, 10-12).
하지만 누가 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어떤 강박(“성령에 매여”, 20:22)을 느끼고 있었다.
21-26장에 서술된 예루살렘 서사가 사도행전 전체의 신학적 주제에 일정하게 기여하더라도 거기에서 예루살렘 중심성을 정당화하거나 확인해 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율법에 열성을 가진” 신자들이 할례와 율법 준수 문제로 또다시 바울 사역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있었고(21:20-21), 교회 밖 유대인들은 여느 이방 지역 주민들 못지않게 바울에게 적대적, 폭력적이었다.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면서 했던 연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신탁이 나온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 리라”(22:18-21).
서사적 맥락에서 바울은 이 신탁을 십수 년 전에 들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유효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귀환 때문에 바울이 도달하게 된 마지막 ‘땅’은 로마 였다.
섭리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바울은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 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행 27:24)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가 사마리아와 ‘온 유대’로 복음이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듯,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땅끝’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서 일어난 박해의 결과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말과 예루살렘이 선교를 추동하는 구심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선교가 힘을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사도행전에 명확하 게 천명된 원리에 따르면, 선교의 에너지는 박해라는 외적 환경이 아 니라 ‘성령의 권능’으로부터 온다.
종합하자면, 예루살렘은 복음의 동심원적 확장의 진원지가 아니었 다.
12장까지의 서사에서 1:8의 프로그램은 기껏해야 대략적으로만 작 동한다.
13장 이후 ‘땅끝’으로의 선교 단계에서 예루살렘은 거의 아무 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예루살렘이 선교의 구심점이라는 인식을 바 나바나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 않으며, 13장 이후에 있어서 저 자 누가 역시 그러한 인식을 내보이지 않는다.
다. ‘땅끝’과 중심의 전위(轉位)
예루살렘이 중심이 아니라면, 예루살렘에서 더 먼 곳, 가장 먼 곳이 ‘땅끝’이라는 전제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누가가 의도한 ‘땅끝’은 엄밀 한 의미의 지리적 확장, 혹은 동심원적 확장의 가장 먼 곳일까?
1:8의 ‘땅끝’은 어쩌면 특정한 지점 혹은 방향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문화적 상황으로 보자면 루스드라나 빌립보나 아덴 이나 모두 철저히 헬라화되고 이교적인, 비슷한 정도로 ‘땅끝’이다.
인 문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은 분명 ‘지점’이나 ‘위치’보다는 ‘사람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즉, ‘땅끝 지점’이라기보다 ‘땅끝 사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디오피아 출신의 내관, 로마 출신의 고넬료,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바울, 구레네 출신의 바나바, 루스드라 출신의 디모데, 알렉산 드리아 출신의 아볼로, 이들 모두는 ‘땅끝’의 취지에 부합한다.
실제로 바울의 세 차례 전도 여행 경로를 지도에 그려 보면 왜 그 런 경로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신학적으로나 그외 다른 관점으로도 합 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13장 이후 서사에서, 복음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길을 따라27) 이동하며 전해지지만, 그 선의 방향은 예측 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28)
27) 사도행전에서는 지리적 이동과 여행은 서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덕희는 ‘길의 공간’(hodological space)이 단순히 플롯의 배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주제 의식인 구원론과 제자도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즉, 예수를 메시아 로 믿는 신앙 자체를 ‘길’이라고 표현한다든지(행 19:9, 23; 22:4; 24:14, 22), 복음서 에서 유난히 긴 ‘여정 단락’을 통해 길을 가면서 잃은 자를 찾는 자비의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을 서술하는 것 등이다. D. H. Jung, “Hodological Space in the Acts Narrative,” Expository Times 134 (2023), 527-38.
28) 대표적인 사례가 ‘아시아’ 선교이다. 바울은 1차 전도 지역인 길리기아, 루가오니 아, 비시디아를 거쳐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를 다음 선교 대상으로 의도하 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복음의 확장’ 경로였다. 하지만, 성령이 그 길을 막았고, 그 다음 대안 경로(비두니아를 포함한 북쪽 지역) 역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16:6-7). 환상을 통해 성령이 이끄신 경로는 발칸 반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정 말미에 에베소에 잠깐 들를 수 있었고, 그 다음 여정에서 비로소 본격적인 아시아 선교를 이룰 수 있었다. 비두니아와 그 너머 북쪽 지역의 복음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이 없으며, 발칸반도의 서쪽 지역 선교에 대해서도(롬 15:19) 누가는 아무것도 기 록하지 않았다.
바울과 그 일행이 선교 여정을 기획하는 방식의 또 하나의 특이점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혹은 이전에 갔던 곳을 다시 돌아보는 ‘심방’(尋訪, ἐπικέπτεσθαι, 행 15:36) 여정이 많다는 것이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 지역으로 나아가 는 것만큼이나,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의 공동체를 든든히 하고 교회가 세워진 도시 주변으로 복음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일이 중요했다.
다시 말해서, ‘땅끝’이었던 곳에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지 면, 그곳은 점점 중심으로 변해가고 주변 ‘땅끝’으로 그 영향권을 확대 해 나가는 것이다(행 19:10에 나타난 에베소와 아시아의 예).
‘땅끝’의 중심으로의 전위는 교회의 직제와 권위의 변화로도 설명 할 수 있다.
본래 예루살렘은 사도적 권위의 원천이었다.
스데반의 순 교 이후 모두가 흩어질 때도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었다(행 8:1).
하지만 얼마 안 가 헤롯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야고보는 순교했 고, 베드로는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탈옥한 뒤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행 12:17).
이때 박해의 영향이 다른 사도들에게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베드로가 떠나면서 사도단의 대표 역할을 위 임한 대상은 다른 열 사도 중 누군가가 아니었다.
사도들이 남긴 공백 을 채운 것은 “야고보와 형제들”이었다.29)
29)예루살렘의 사도적 지도력이 야고보와 장로들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과 배경, 결과 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Bauckham, “James and the Jerusalem Church,” 417-41을 참 조하라.
그래서 누가는 헤롯의 박해 서사 전후로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조’ 사역에서 안디옥 교 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헌금을 보낸 대상들을 “장로들”이라고 언 급했는지 모른다(행 11:30; 21:18).
사도들은 움직이고 이동했다.
바울 은 교회를 세우고 떠나면서 “장로들”을 세웠다(행 14:23; 20:17).
예루 살렘 교회 일극 체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각 지역의 거점 도시 에 세워진 교회들이 소(小)중심이 되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다극 모델로 변환되었다.
누가의 서사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종말에 만민 이 모여들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슥 8:20-23) 그곳으로부터 만민을 향 해 흩어져 나갈 출발점이다.
그 흩어짐 역시 지속적, 반복적이기보다 일회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원심력’을 가진 중심이라고 말하기도 어 렵다.
3. 땅끝과 중심의 전위를 통해 생태평화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행전의 ‘땅’이 가지는 다의성을 살피고, 민족 목록과 1:8에 나타난 중심과 ‘땅끝’의 역학관계를 검토해 보았다.
이상 의 관찰로부터 두 가지 생태평화적 함의를 도출해 보자.
첫째, 오순절 방언 사건에 생태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신약성서 대부분에서 그렇듯, 사도행전에서 ‘땅’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인문 지리적이며 신학적이다.
저자 누가의 관심사는 사람의 생활과 생존이며,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그 구원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이다.
이 인문적, 인간중심적 서사에는 생태적 관심과 지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 다.
하지만 침묵과 공백이 아무것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사 의 소재로 등장한 인간 활동을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 그 속성과 작 동 원리를 추론하고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순절 날 모인 사람들의 ‘민족목록’(행 2:9-11)은 백 이십여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방언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기능을 했다.
모두 갈릴리 출신인 사람들이 열 다섯 개 민족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각 민 족의 독특한 문화와 관습,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다.
그 민족이 터하고 살고 있는 ‘땅’의 기후와 풍토, 식생과 생태 또한 그 민족의 민족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성령이 그날 제자들 위에 부어 준 선물은 단지 각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 활용될 언어 만이 아니라 각 민족의 ‘땅’에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용성과 용기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30)
30) 몇몇 선교학자들은 방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영감된 말씀’ 혹은 예언의 수단이었으며, 타문화권, 타언어권 선교를 위한 언어적 소양뿐 아니라 문화적 개 방성과 수용성을 자극하는 통찰을 제공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Richard Bliese, “Speaking in Tongues and the Mission of God ad gentes,”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20 (2011), 38-47; Jerry M. Ireland, “The Missionary Nature of Tongues in the Book of Acts,” PentecoStudies 18 (2019), 200-23.
둘째, 중심과 땅끝의 변증법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작용은 고넬료와 에디오피아 내시의 서사에 잘 드러난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으로 땅 끝 에디오피아의 관리가 찾아왔고, 그가 돌아가는 길에 광야에서 회 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중심으로의 순례는 무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빌립을 통해 땅끝에게 가장 필요했던 그것을 선물로 주셨다.
오늘날 생태 위기의 요인 중 하나는 집중화이다.
중심에 모든 자원과 인구가 집중되고 땅끝에는 인간 거주성이 무너져서 결과적으로 오이쿠메네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빈부, 도촌, 동서양의 양극화 는 곧 부자, 도시, 서양 중심의 일극체제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생태 평화의 한 양상으로서 인류의 편만하고 평등한 삶은 중요한 요소이 다.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 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신” 뜻은 곧 “사람으로 혹 하나 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하신 것이다(행 17: 26-27).
각자의 땅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인 것이다.
IV. 나가는 말
사도행전에서 ‘땅’은 물리적, 정치적, 수사적, 신학적 의미를 표현한 다.
그중에서도 신학적인 의미로서 ‘땅’은, 한편으로는 ‘하늘’에 맞서 그 뜻을 거스르는 영역이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늘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한 곳이다.
‘땅’에서 구원 계시가 수용되고 구원 역사가 펼쳐지며, ‘온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구원의 복을 누리도록, 사도들은 ‘땅끝’으 로 보내졌다.
특히, 1:8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적 확장의 방식으로 사도행전 전체의 구도를 제시했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정 작 사도행전 서사가 진행되면서 예루살렘은 고정된 중심으로 그 지위 를 견지하지 못하며, 오히려 중심은 사도들의 증언 활동을 따라 서진 (西進)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곳들이 중심으 로 변환되며, 이때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땅끝’과 중심의 이러한 전위에는 생태평화적 함의가 담겨 있다.
복음의 증언을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의 복을 누림으로써 인류의 편만하고 평등한 삶이 약속되는 것이다.
그 구원은 도시 중심, 인간 중심이 아닌 ‘땅’에 흩어 져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태적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 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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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ymbolic Geography in Acts and the Ecological Implication of “the Ends of the Earth”
Cho, Jaecheon (Jeonju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The “earth” or “land” (γῆ in Greek) in the Acts of the Apostles conveys physical, political, rhetorical, and theological meanings. Theologically, the earth acts against the heaven, but because it is so, it is in need of salvation granted from the heaven. By receiving the heavenly revelation, the earth has now been reconfigured into a place in which God’s salvation is played out. Apostles are sent to the ends of the earth so that all nations may be saved, as proclaimed in Acts 1:8. The ‘programmatic statement’ in 1:8 has been viewed as the key to the structure of the whole Acts narrative, according to which one shall see a concentric expansion of the Gospel with Jerusalem at the center. It turns out, however, that in the actual narrative of Acts the central status of Jerusalem is not so secure. A starting point it is, but as the missional narrative unfolds Jerusalem seems to fade away from the purview of the narrator and the center is constantly shifting westwards as the apostolic witness progresses. The inversion of the center and ‘the ends of the earth’ has a further implication for the ecological hope and promise. With the good news of salvation sent out and scattering towards and throughout the ends of the earth, God allows us to witness and confirm His grace and blessing among all nations as well as the ecological sphere that surrounds them.
Keywords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ends of the earth, center, symbolic geography, ecological peace
신약논단 제31권 제4호∙2024년 겨울
투고일: 2024. 11. 20. 최종심사일: 2024. 11. 30. 게재확정일: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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