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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 -이문구의 관촌수필- /차승기.조선大

 Ⅰ. 머리말

 Ⅱ. 관계적 세계와 돌봄의 감각

 Ⅲ. 정치적 공간 -아버지의 두 얼굴

 Ⅳ. ‘도련님’의 기억과 말들

 Ⅴ. 미래를 위한 윤리 -맺음말을 대신하여

 

 

Ⅰ. 머리말

 

이문구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열여덟 살 무 렵에 고향인 관촌(冠村)을 떠났다.

그리고 1970년대 초, 13년만에 고향을 찾아 스스로 “실향민이 돼버리고 말았다”1)는 것을 절감하면서 관촌수 필의 첫 단편 <일락서산>을 쓴다.

 

    1) 이문구, <일락서산>,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24, 13쪽. 이하 관촌수필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기. 

 

그가 떠나 있던 13년 동안 정부 주도 로 ‘공업화’와 ‘농촌근대화’가 진행되었고, ‘관촌’ 부락 역시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실향민’이 된 것이 ‘근대적 변화’ 때문 만은 아니다. 

4백여 년의 풍상을 견뎌온 왕소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외 양간만 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뻔질러 서” 있고(11), “알아볼 만한 얼굴은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15) 곳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어쩌면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 그는 고향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그의 가문, 가족, 그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남로당 보령군 총책을 맡을 만큼 영향력 있는 좌익 인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좌익 활동에 참여했 던 두 형이 모두 참혹하게 학살당하고, 그 충격에 기력이 쇠진한 할아버 지까지 세상을 떠난 것이 이문구의 열 살 무렵인 1950년 겨울이었다.

이 와중에 말 그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풍족한 살림이 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산 이씨의 명문 양반가라는 권위가 현실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던 고향에서 이 급전직하의 ‘붕괴’가 어린 이문구에게 주 었을 충격의 크기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후 ‘빨갱이 집안’ 으로 낙인찍힌 채 생계를 떠맡아야 했던 어머니마저 일찍 사별(1956년) 한 후 외톨이가 된 이문구는 열여덟 무렵 가산을 정리해 서울로 떠났다.

이렇듯 그가 실제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59년이지만 한국전쟁이 발발 한 해 이미 그의 고향은 파괴되었다.

남과 북으로 전선(前線)이 이동하 는 데 따라 그 뒤에서 잔혹한 학살과 보복학살이 행해진 ‘섬멸전’의 양 상은 관촌에서도 재연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토착 좌익 인사들에 대 한 예비검속과 불법 처형이 자행되었고, 북한군이 점령한 후에는 ‘악덕’ 지주, 경찰, 우익 인사 등에 대한 ‘인민재판’과 처형이, ‘9․28 서울 수복’을 기점으로 북한군이 퇴각한 후에는 다시 좌익과 ‘부역자’ 및 그 가족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2)

한국전쟁은 국가주의와 정치적 이념의 기 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내전’ 상황에서 이웃이 괴물이 될 수 있음을 폭로했고 기존의 모든 공동체에 봉합될 수 없는 적대와 원한의 상흔을 남 겼다.

학살과 보복 학살의 연쇄에 휘말리며 이 잔혹한 시간을 몸소 겪은 이문구에게 고향 관촌은 “부모형제를 잡아먹은 원수와 다름없는 저주의 땅”이자 “자다가도 몸서리쳐지는 징그러운 바닥”이었다.3)

한국전쟁의 겨울을 지난 후 그에게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관촌수필은 바로 그 고향을, 그것도 바로 ‘그 사건’의 시간 을 전후한 관촌을 떠올린다.

심지어 대단히 정겹고 그리운 세계로서. 그 가 저 ‘저주의 땅’, ‘징그러운 바닥’에서 ‘충만한 기억’을 길어 올릴 수 있 었던 것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 터 아련한 추억을 분리시킬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인가.

이 기억의 서술은 유년의 감각에 새겨진 원체험을 복원하려는 시도인 가, 아니면 그 ‘사건’의 순간을 낭만적 조화의 꿈 아래 봉인해 버리려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인가.

그는 그 시절을 대면할 수 있었기에 쓴 것인가, 대면할 수 없어서 쓴 것인가.

이 글은 이같은 질문에서 출발해, 관촌수 필에서 이문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그의 기억의 윤리 성을 탐문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문구의 문학, 특히 관촌수필은 당대의 평단에서도 문 학사에서도 다양하게 주목받아 왔지만, 그 독해의 방향은 대체로 세 가 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의 독창적 활용을 포함해 이문구 의 독특한 문체와 서술양식에 집중한 해석들이 있다.4)

 

        2) 한국전쟁 직후 보령을 포함하는 충남 서부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된 수백 명의 예비검속과 학살에 대해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상반기 조 사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09, 235-326쪽 참조. 또한 9․28 수복 후 보령 지역에서 ‘부역혐의자’에 대해 행해진 학살에 대해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10, 762-768쪽 참조.

        3) 이문구, 「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 글로 벗을 모은다, 랜덤하우스중앙, 2005, 52쪽.

        4) 임우기, 「‘매개’의 문법에서 ‘교감’의 문법으로」, 문예중앙1993. 여름호; 전정구, 「이문구 소설의 문체 연구 - 「관촌수필(冠村隨泌)」과 「우리 동네」를 중심으로」, 현대문 학이론연구 제9권, 현대문학이론학회, 1998, 253-277쪽;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한수영, 「말을 찾아서」, 문학동네, 2000. 가을호; 구자황 엮 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최시한, 「이문구 소설의 서술 구조 – 연작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40권,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08, 57-84쪽; 구자황, 「이문구 소설의 이야기성에 관한 두 가지 고찰」, 한국문학연구 제58권,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18, 137-163쪽 등. 

 

그리고

  둘째로  사회-역사적 접근. 한국전쟁에서 농촌 근대화까지 이문구의 ‘관촌’이 휘 말려 들어간 사회적․역사적 격변에 상응한 문학적 실천으로 관촌수필 을 읽는 해석들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상처를 허구적으로 치유하고 생 동하는 민중을 형상화한 측면에 주목한 연구들도 포함된다.5)

  셋째는 관 촌수필의 ‘반근대적’ 의의에 대한 주목. 특히 근대 소설의 개념으로 포획 할 수 없는 ‘이야기성’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연구들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6)7)

 

      5) 김우창, 「근대화 속의 농촌」, 세계의 문학1981. 겨울호;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김인환, 「사실의 힘」, 관촌수필, 나남, 1999);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황종연, 「도시화ㆍ산업화 시대의 방외인」, 작 가세계, 1992. 겨울호;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김윤식, 「모란꽃 무늬와 물빛 무늬」, 한국문학, 2000; 구자황 엮음, 관촌 가는 길, 랜덤하우 스코리아, 2006; 오창은, 「민중성 발견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힘」, 교양학연 구 제18호, 다빈치미래교양연구소, 2022; 유영주, 「정체성보다 인접성」, 겨울 공화 국의 작가들, 소명출판, 2023 등.

     6) 진정석, 「이야기체 소설의 가능성」, 1970년대 문학 연구, 문학사와비평연구회 엮 음, 예하, 1994;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고인환,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 경희대 박사논문, 2003 등.

     7) 기존 연구사를 이렇게 세 갈래로 유형화한 것은 장연진, 「이문구 문학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2018. 참조. 한편, 위의 세 유형 중 첫 번째에 가깝기는 하지만, 1960-70년대 언어적ㆍ제도적 조건 아래에서의 문학어의 재편 과정을 고찰하는 광범한 기획의 일환으로 이문구의 ‘방 언’을 ‘언어의 탈영토화’의 맥락에서 다시 읽고자 한 유승환의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유승환, 「사투리는 어떻게 문학어가 되는가」, 구보학보 제18호, 구보학회, 2018, 377-422쪽 참조.

 

이렇게 기왕의 해석들을 거칠게 유형화할 수 있지만, 당연히 이 각각의 방향들은 내적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한다.

그의  문체에는 그의 세계관이 용해되어 있고, 그의 윤리학은 그의 경험과 분 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문구의 개인사적 경험과 글쓰기의 상관관계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 경향 중 사회-역사적 접근과 상통하지만, 그 상관관 계로부터 독특한 윤리적 입장을 읽어내고자 하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 다.

단적으로, 이 글은 이문구의 기억의 윤리를 탐구하고자 한다.

관촌 수필이 “개인의 비밀스러운 가족사를 공개함으로써 ‘피해자로서의 자 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스스로를 발견하는 …… ‘고백의 정치성’”8)을 띤 작업이라면,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시간-공간’을 기억하는 방식 이다.

 

    8) 오창은, 「민중성 발견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힘」, 교양학연구 제18호, 다빈 치미래교양연구소, 2022, 360쪽. 

 

문체와 서술 형식에 남다른 감각과 의식을 가진 이문구였던 만큼, 그가 기억하는 대상과 기억하는 방식은 그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 못지 않게 그가 지향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문구는 ‘과거’를, 그리고 ‘자신’ 을 드러내기 위해 기억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그리고 ‘타자’를 위해 기 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불러오는 ‘그때’의 ‘관촌’은 그리움의 대상 이기도 하지만 또한 소진되지 않는 잠재적 역량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 문이다.

 

Ⅱ. 관계적 세계와 돌봄의 감각

 

<일락서산>에서 이문구는 13년만에 찾은 고향이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10)을 확인하고는 스스로 “실향 민”(13)이라 느낀다.

400여 년의 풍상을 견뎌온 왕소나무도 사라지고 알 아볼 얼굴 하나 눈에 띄지 않았기에, “18년 동안이나 산 토박이가 …(중략)… 나그네 같은 서툰 몸짓밖에 취할 수 없”었던(15) 것이다.

그러나 불현듯 본인의 가묘(假墓)를 바라보던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10) 할아버지의 환영을 본 후, 이문구는 칠성바위 언저리에서 소꿉장난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으레 할아버지와 옹점이가 나타나곤 했던 어린 시 절 어느 해 질 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른바 ‘농촌 근대화’의 바람이 마을을 “서울 교외의 외진 동네와 다르지 않은”(16) 곳으로 뒤바꿔 놓은 탓에 그는 현재의 관촌에서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칠성바위 근 처에 이르러서야 겨우 과거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의 고향의 “타락”(12) 또는 “퇴락”(13)을 접하면서 ‘실향민’이 된 것 같다고 쓰고 있지만, 사실 그는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 고향을 잃 어버렸다.

이미 고향을 잃었기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에게 고향이란, 전설을 간직한 왕소나무와 칠성바위, 할아버지와 가족 들, 그리고 옹점이, 대복이 등을 비롯해 그를 둘러싼 울타리 같은 존재 들 전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기 이문구 일가가 겪은 참화와 함께 고향 도 파괴되었다.

단순한 파산이나 몰락이 아니라 절멸적 폭력과 적대가 낳은 결과였기 때문에, 이 파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이때 이후로 그에게 고향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과 가장 기억하고 싶 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모순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급속한 근대적 변화 의 와중에 ‘고향’이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이 된 옛터”(29)로 물러나는 것 은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문구의 고향상실은 흔한 ‘모더니티 경험’과 다르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사적인 전형성을 갖 는다.

고향의 파괴와 함께 사라진 것, 그래서 그가 기억으로부터 건져 올리 고자 하는 것, 그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라진 ‘왕소나무’가 상 징하듯, 할아버지가 지켜온 한산 이씨 양반 가문의 명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철로와 신작로가 위협해도 4백여 년을 버텨왔던 왕소나무는 가문의 조상 토정 이지함이 꽂은 지팡이에서 자라났다는 전설을 뒤 로 한 채 끝내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이문구에게 “족보만은 잘 간수해 야”(42) 한다는 유언을 남길 만큼 가문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명문거족 의 권세는 시대와 함께 사라졌지만, 그 도덕적․문화적 권위는 적어도 할 아버지의 말년까지 관촌 부락에 남아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앞뒤가 웂어졌더래두 가릴 게라면 가려야 쓰는 게여. 생 치(生雉)는 양반 반찬이구 비닭이는 상것들이나 입에 대는 벱이니라.” (25)

상주 목사의 아들이자 강릉 부사의 손자로서 “구십 평생 망건이나 탕 건은 물론 오뉴월 삼복에도 버선 한번을 벗지 않”은(42) 할아버지의 양 반 의식에서는 “안팎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였으므로 하대(下待)해야 마땅”(30)했다.

그 지시에 따라 이문구 역시 어려서부터 맏형 또래의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반말로 대했고, 또 그런 관행이 용인 되기도 했던 것이 20세기 중반까지의 관촌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일찍이 근대 전환기 문명개화를 부르 짖었던 ‘청년 선각자들’이 저주했던 고루하고 불합리한 관계들, 신분적 위계의 도덕 질서를 자연화한 정체(停滯) 사회, 나아가 사분오열의 ‘망 국’의 정치를 내포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 세계는 명문거족의 계보를 잇 는 할아버지에게 체화된 유교적 관습과 신분제적 의식으로 명맥을 유지 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저 관념적으로나 존재하는 상태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박적인 지속력을 갖는 아집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 세계’라는 것이 식민지 상태에서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형성되기도 했고, 또한 과거의 신분 질서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한 질서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할아버지가 준수하는 명분과 도리의 원칙을 단순히 고리타분한 봉건의식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다.

할아버지가 서 있는 곳은 ‘전통적인’ 관계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분 질서는 이미 주어져 있는 관계에 의해 개인의 삶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혁파해야 할 제도였지만, 관계적 존재로서의 의식이 모조리 신분 의식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사구일생(四俱一生)’ 또는 ‘사귀일성(四歸一成)’9)의 뜻을 되새기며 자신 의 묫자리에 있는 사물들이 자신과 한 몸이라 여기는 정신은, 근대의 ‘탈마법화’하는 힘이 무기력하게 만든 생태적 상상력10)을 되살리기도 한다.

왕소나무와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고향은, 무력화된 채 잔존하고 있는 낡은 불합리성 속에 관계적 힘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그런데 고향의 파괴는, 이 ‘시대착오적인’ 아집과 함께 생명과 존재에 대한 통찰 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고향의 파괴로 인해 사라진 두 번째 요소는, 고향의 진짜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말과 감정이 형성해 온 돌봄의 감각이다.

‘관촌’에 는 <행운유수>의 옹점이, <녹수청산>의 대복이, <공산토월>의 석공 신 현석, <관산추정>의 복산 아버지 유천만 등, 이문구와 그의 가족이 돌봄 과 의리와 관여(關與)의 품속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

유난 히 학질에 자주 걸리던 이문구를 위해 정성껏 ‘이방’ 11)을 해주던 옹점이 와 대복이, 돼지를 거세하거나 개를 잡는 등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동네 초상집 뒤치다꺼리부터 남의 집 짓기나 이엉 얹 는 일까지 힘들고 번거로운 일마다 손을 빌려준 유천만, 아버지를 존경 하고 따랐다는 이유로 말 못 할 고초를 겪은 후에도 어머니 사망 후 수 의(壽衣)를 입히고 유택(幽宅)을 돌볼 때까지 이문구의 집안을 살펴 준 석공 등, 이들은 모두를 위한 필수노동 및 돌봄노동을 담당하며 공동체 를 지탱해 온 당사자들이었다.

 

    9) ‘여럿이 합쳐져 비로소 하나를 이룬다’ 또는 ‘서로 달라 보여도 결국 하나다’라는 의미로서, 존재자에서 자율적․ 독립적 실체성보다 상보적․ 관계적 작용성을 통찰하 는 관점을 나타낸다: 「관촌수필 어휘 풀이」,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24, 464쪽 참조.

   10) 황종연은 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귀속감”이라 표현한 바 있다: 황종연, 「도시화․산업화 시대의 방외인」, 관촌가는 길, 구자황 엮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176쪽.

   11) ‘질병이나 재액을 막거나 없애기 위해 하는 미신적 행위’를 지칭하는 방언적 표현이 다: 「관촌수필 어휘 풀이」,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24, 473쪽 참조. 이문구는 어린 시절 종종 앓곤 했는데, 예컨대 배탈이 나면 3년 묵은 간장 세 수저를 먹이고, 허벅지에 멍울이 생기면 간장으로 먹을 갈아 멍울 선 곳에 글자를 써주고, 안질에 걸리면 집 안 어딘가에 함부로 박은 못이 있지 않은가 살폈던 할아버지의 ‘비방(祕 方)’이 전형적인 ‘이방’이다. 옹점이와 대복이는 어린 이문구의 학질을 떨어뜨리기 위해 처음 푼 아침밥을 뒷간에 놓아두었다 먹게 한다든가, 일종의 연극적 상황을 만들고 명주실과 베틀을 넣어 놓은 장독 안에 침을 뱉게 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관계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저 옹점이들은 말과 몸과 감정으로 그 관계를 두텁게 만들며 관계의 깊 이와 넓이를 결정한 존재들이다.12)

 

    12) 관촌수필을 관통하는 ‘민중성’을 돌봄과 상호돌봄의 차원에서 해석한 선행 연구로 는 오창은, 「민중성 발견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힘: 이문구의 관촌수필」, 교양학연구 제18호, 다빈치미래교양연구소, 2022, 351-389쪽 참조.

 

특히 “어른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고 아이들에게는 남달리 인정이 많 았”던(20) 옹점이는 ‘하녀’의 지위에 있었으나, 공동체의 ‘살림’을 살리는 데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오종종하거나 소갈머리 오죽잖은 짓을 가장 싫어했고, 남의 억울 한 일에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뒵들어 싸워주며, 부지런하려 들기로 도 남보다 뒤처짐이 없었던 것이다.

대소간에 대사가 있을 때마다 그녀가 징발됐던 것도 남의 집 뒷수쇄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이니, 온갖 일의 들 무새요 안머슴이었던 것이다. (102)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웬만한 글은 국한문 가리지 않고 해득해낼 만큼”(95) 영민한 동시에 “동네에 떠들어온 모든 비렁뱅이와 동냥중, 그 리고 나병환자들한테 인기가 있”을(19) 정도로 마음이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았던 옹점은, 집안 살림의 보조적 역할을 훨씬 초과하는 역량을 발 휘하며 공동체를 움직이게 하는 필수불가결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아갔 다.

옹점이 결혼과 함께 출가하게 되자 공동체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기 게 되었고, 어머니는 허전함을 넘어 “하루아침에 손발을 잃고” “똑 반병 신 된 것 같”은(125) 고통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결혼한 후에도 한국 전쟁으로 풍비박산이 된 집을 자주 찾아와 홀로된 어머니를 위로하고 집안일을 보살펴 준 옹점이야말로 의지처(依支處)로서의 ‘고향’의 수호 자였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이문구에게 무작정 자기 편을 들어주는 누이이자 유모이자 보 호자, 그리고 공동체 그 자체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본질적인 ‘말’의 활 력의 소유자13)인 옹점이가 떠난 후 그의 ‘고향’을 보호하던 울타리가 회 복할 수 없게 허물어졌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14)

 

     13) 한수영은 옹점이를 “관촌수필 전체를 들어 거의 유일하게 ‘말’을 중심으로 형상된 인물”이라 평한다: 한수영, 「말을 찾아서」,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6, 275쪽. 한수영은 이문구를 “‘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라 규정 하지만 우리 동네가 “말을 하는 ‘발화자’에게 그 소유권이 귀속되지 않고, 발화자 가 청자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중층적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보 여”주는 ‘대화’의 이데올로기적 수행 기능을 잘 드러내는 데 반해, 1인칭 서술자의 회고적 서술에 의존하는 관촌수필은 “이른바 ‘내면화된 언어’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수영, 「말을 찾아서」,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 우스코리아, 2006, 255-256쪽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점이만은 ‘말’의 대화성 속 에서 형성된 인물로 평가한다.

    14) 시집간 후 한국전쟁에서 남편이 전사한 후 가혹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옹점은 견 디다 못해 친정으로 돌아온 후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지내게 된다: 이문구, 「행운유수」,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24, 130-131쪽 참조.

 

Ⅲ. 정치적 공간 -아버지의 두 얼굴

 

고향의 파괴와 함께 사라진 세 번째 요소는, 다름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지하활동이 상징했던, 그리고 그들의 참혹한 죽음과 함께 폐색되 어버린 정치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선과 염전을 소유하고 이재(理 財)에 밝았던 아버지는 일제 말기, 이문구가 태어나던 무렵부터 모종의 계기로 “무산 계급의 옹호와 인민 대중의 사회적인 위치를 쟁취”(47)하 기 위한 삶을 선택했다.

그가 강연회를 열고 열변을 토하며 농민과 노동 자들의 감동과 지지를 얻어냈던 ‘한내천 모래사장’, ‘쇠전이나 싸전 마 당’, 나아가 누추한 행색의 많은 ‘동지’들이 찾아왔던 ‘사랑의 윗방’ 등은 ‘사농공상’의 낡은 봉건사상을 배척하고 말-행위-존재를 나눠왔던 기존 의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치적 행위들이 싹트는 장소들이다.

정치 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 도를 변경하는 활동”이라면, 그럼으로써 “보일 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라면,15) “검버 섯 속에 고색이 찌들어가는 시대의 고아 이조옹(李朝翁)들의 집산 장”(48)인 할아버지의 사랑방에 고로(故老)의 행색보다 훨씬 더 누추한 농꾼들을 끌어들인 아버지의 행위는 해방기 한반도 도처에 형성되던 정 치적 공간의 존재를 암시한다.

 

    1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63쪽. 

 

이 장소들은 어린 이문구에게는 어쩌면 식별되기 어려운 곳이었을 터인데, 한편 관촌수필을 쓰고 있는 1970 년대의 이문구에게는 다른 이유로 서술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했을 것이 다.

할아버지가 대표하는 관계의 세계, 옹점이들이 환기시키는 돌봄의 감각과 달리, 관촌수필에서 거의 공백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정치 적 공간이며, 이 공간이야말로 이문구의 관촌에서 가장 먼저 뿌리 깊게 파괴된 요소, 이문구가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공간의 파괴가 뿌리 깊은 이유는, 이처럼 육친의 참화라는 트 라우마적 사건이 수반되었기 때문이고, 관촌이 살육과 보복이라는 적대 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존’ 이후로 도 ― 이른바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 오랜 시간 동안 존재 자체를 부 정당하는 경험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문구가 ‘실향민’이 되어 서울 에서 행상, 잡역부 등을 전전하던 시기에 1960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록에서 “4․19 체험에 관해 있음직한 언급이 빠진”16)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6) 황종연, 「도시화․산업화 시대의 방외인」, 관촌가는 길, 구자황 엮음, 랜덤하우스코 리아, 2006, 164쪽. 

 

고향이라는 장소와 혈육과 정치가 동시에 파괴되 고 봉인되는 이 충격적인 경험은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고, 관촌 수필에서도 작동했을 트라우마와 검열의 이중필터는 이 장소-혈육-정 치의 연결체에 대한 상상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파괴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문구가 13년만에 관촌을 찾았 을 때도 고향을 떠난 근본적인 원인들과 대면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낯설어진 고향에서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 초점화 된 1인칭 서술로 친밀한 관계들을 회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아버지와 형들의 존재는 희미하기 때문이다.

형들은 특히 그러해서, “약 관에 요절한 그 형”(222)은 석공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공산토월> 에서 중학 시절, 대복이와 함께 밤새 참게잡이를 했다는 작은 에피소드 에나 잠시 등장할 뿐이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심신(心身)의 통치자”(46)였다고 고백하는 관촌 수필의 이문구에게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매양 엇먹고 섞갈리는”(57) 대척점에 있어서,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고색창연했던 가훈들”과 정반 대되는 풍물을 받아들였고 일가의 행랑살이를 했던 이들이나 가난한 농 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릴 만큼 넉넉한 “도량과 포용력”을 갖췄으면서도 “자식들에 대한 훈육만은 서슬이 퍼렇게 냉엄했다.”(58)

어린 이문구는 이런 아버지를 어려워하기보다도 차라리 두려워했고, 또 두려워하면서 도 애정을 갈구했다.

그러나 그 갈구하던 것은 끝내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한 달 내내 식사를 배달했 음에도 불구하고 이문구가 기대한 “그동안 애썼다는 말 한마디”(59)를 들을 수 없었고, 드물게 서예를 가르쳐줄 때도 어린 이문구가 주눅이 들 어 실수하자 “원, 아이 손마디가 이렇게 무뎌서야…… 천상 연장 들고 생일이나 헐 손이구나……”(61)라며 핀잔을 줘, 이 아들은 “남다른 재주 를 못 타고난 자신이 죽고 싶도록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다.”(61)

이같은 아버지가 석공의 결혼 전야 잔치에서 술과 노래와 춤에 도취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아들로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누구 음성이었을까, 생전 처음 들어 본 그 구성진 가락은.

 

석탄백탄이 타 는데, 연기만 펑펑 나는데에…… 이 내 가슴 타는데, 연기가 하나도 안 나는 데…… 나는 키가 모자라 사람 다리만 빽빽한 쪽마루에 비비대고 올라가 넘 어다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놀라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한 손으로 주안상 가장자리를 두들겨 가며 앉아서 노래하는 어른, 코와 눈이 그렇게 크고 음 성 또한 굵직한 신사, 그이는 아버지였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숨조차 제 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홀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여 얼마를 두고 뚫 어지게 바라보았으나 분명 아버지였다. …(중략)… 아버지가 노래를 마치 자 요란스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신서방이 두 손에 술잔을 받쳐 드니 석공은 주전자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술잔을 받아 들자 신서방은 일어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 나는 그때 또 한번크게 놀라고 말았다. 다시 한번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이니 그것은 아버지가 일어서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 거였다. …(중략)… 그 흥겨움에 감싸여 흐른 밤은 얼마나 되었 을까. 모든 사람들의 배웅을 뒤에 두고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아버지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나는 이만큼 뒤처져걷고 있 었는데, 그림자가 너무 길다고 느껴져불현듯 하늘을 우러르니, 달은 어느덧 자리를 거의 다 내놓아 겨우 앞치마만한 하늘을 두른 채왕소나무 가지 틈에 머물고 있었으며, 뒷동산 솔수펑이의 부엉이만이 잠 못 들어 투덜대 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랑 앞에 이르도록헛기침 한번 없이 여전 근엄하였 고, 나는 버긋하게 지쳐 놓은 대문을 돌쩌귀 소리 안 나도록 조용히 여닫으 며 들어가 이내 곤한 잠에 떨어져버렸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요 위가 질펀하니 한강이었고 아랫도리가 걸레처럼 척척했으나 부끄러워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235-237)

 

관촌수필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서술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결혼을 앞둔 석공의 집 마당은 아들에게 차가울 정도로 엄격했던 아버 지가 “평생에 단 한 번 객스럽게 놀아보신 장소”(220)였다.

석공은 일가 행랑살이를 했던 이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가치관에서는 그 집에 들어 간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아버지는 스스럼 없이 그들 과 함께 잔치를 즐기다 못해 흥겨운 분위기를 주도하기까지 한 것이다.

잔치집에서 돌아오는 달밤의 시적 묘사 속에서 아버지는 길어진 그림자 만큼 거리를 둔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근엄한 권위와 분방한 도 취 사이의 낙차를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아들은 잠자리에서 실수를 하 고 만다.

이 에피소드는 1970년대의 검열 체제 아래에서 학살된 아버지, 또는 파괴된 ‘정치적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암시를 품 고 있다.

이문구의 아버지가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고 한국전쟁 발발 후 “타계”(245)했음은 관촌수필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서술된 바가 없다.

다만, 열정적인 강연으로 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는 점, 종종 예비검속으로 경찰서에 구금되곤 했다는 점, 그리고 “나무장수 창호, 대 장간 풀무쟁이 장지랄, 뱃사공 하다가 장터에서 새우젓 도가를 하는 마 씨, 염간으로 늙은 쌍례 아버지, 목수 정당나귀, 땜장이 황가, 매갈잇간 말몰이 최, 말감고 전가……”(48) 등 하위계층에 속하는 이웃들을 할아 버지의 사랑방에 들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공간 의 ‘침범’이 암시하는 바 역시 주목해 마땅하지만, 석공의 집 마당에서 술과 노래와 춤으로 도취된 아버지를 어린 이문구가 목격하는 장면은, 신체와 장소의 재배치로서의 정치적 공간의 출현을 서술자의 강렬한 감 정적 동요를 통해 인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아들에게는 엄격하고 두렵기만 했던 아버지와 가난한 이웃의 풍습에 녹아들어 그들과 흔쾌히 일체화되려 한 아버지 사이의 낙차는, 어린 이 문구가 불안정하게 유지하고 있던 경외(敬畏)의 거리를 아득할 정도로 벌려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잠자리에서의 실수는, 어린 아들이 이 낙차에서 영원한 ‘분리’를 예감했다는 징후일 터다.

그리고 이렇게 아 버지와의 분리를 예감하는 감정적 동요가 행간에서 지시하고 있는 것 은, 고향이 파괴되기 전에 왕성하게 생성되고 있던 ‘정치적 공간’들이다.

주지하다시피, 해방과 분단 직후 탄압과 금지와 검열 속에서도 도처의 ‘거리’에서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있었고, 그 공간은 일시적이나마 기존 의 권력적 위계가 해체된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냈다.17)

 

     17) ‘거리’로 표상되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공간은 “자생적이며 카니발적인” 성격과 “동 원”의 성격을 모두 포함한다: 천정환,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의 생산」, 상허학 보 제26호, 상허학회, 2009, 60쪽 이하 참조.

 

하위계층 이웃 이 할아버지의 사랑방 문턱을 넘고 아버지가 석공의 집 마당에서 노래 와 춤을 함께한 행위들은 ‘치안 질서’의 위계를 해체하며 정치적 공간을 생성해가는 수행적 성격을 갖는다.

다만 어린 이문구의 “황홀”과 “의심” 이 뒤섞인 시선에는, 저 정치적 공간의 참혹한 미래를 아는 어른 이문구 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기도 하다.

관촌수필의 연작들이 발표되고 있던 1970년대 초반에 ‘유신헌법’이 반포되고 폭압적인 반공독재체제가 강화되어 갔지만,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등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완화’의 세계적인 흐름도 공존하 고 있었다.

이 모순적인 틈새에서 글쓰기의 영역을 넓혀가던 작가들은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봉인되었던 과거를 다시 불러오는 작업을 수행하 곤 했다.

단적인 예로, 김원일은 1973년 발표한 <어둠의 혼>에서 학살당 한 ‘빨갱이 아버지’의 ‘처참한 얼굴’을 묘사할 수 있었다.18)

<어둠의 혼> 은 당시 이문구가 책임을 지고 있던 월간문학을 통해 발표되었고, 아 버지와 석공의 이야기를 담은 이문구의 <공산토월>이 문학과 지성을 통해 발표된 것도 1973년이었다.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로 유사 한 고초를 겪었던 김원일이 그랬듯이, 어쩌면 이문구 역시 아버지, 그리 고 형들의 죽음을 소설적으로 재현하자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초점화 된 인물도 <어둠의 혼>의 ‘갑해’처럼 정치적 이념의 세계를 모르는 어린 이문구였기 때문에, 그 죽음의 정치적 성격을 중화시켜 그저 참혹하거 나 허무한 죽음 그 자체로 대상화할 수 있는 장치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터였다.

그러나 이문구는 아버지와 형들의 참화를 묘사하지 않거 나 하지 못했다.

‘소설적 상상’을 통해 극화된 장면을 만들기보다는 ‘수필적 회고’를 통해 저 ‘객스러운’ 모습의 기억만을 남기고 서사에서 사라 지게 했다.

김원일이 ‘빨갱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의 삶을 실체화함으 로써 스스로의 삶을 구원하고자 했다면,19) 이문구는 다른 기억법을 가 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빨갱이의 자식’으로서 부정당해 온 자기를 상상적으로 재정립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20)

 

  18) 물론 <어둠의 혼>의 에피소드는 허구이다. 남로당 간부였던 김원일의 실제 아버지 는 월북했다.

  19) 이선미, 「냉전과 소설의 형식, ‘(경남)진영’의 장소성과 사회주의자 서사 (1)」, 한국 문학논총 제87호, 한국문학회, 2021, 369-372쪽 참조.

   20) 비록 첫 장편 장한몽에는, 한국전쟁기에 “개죽음”을 당한 아버지와 잔혹하게 고문사한 형을 둔 김상배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의 기억은 아버지와 형의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계기를 찾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이문구, 장한몽 하, 랜덤 하우스중앙, 2004, 127-160쪽 참조.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한수영 역시 이문구가 아버지-아들 관계 재정립을 통해 주체를 재건하려 시도하지 않았음을 주목한 바 있다. 그는 이문구가 (바흐친적 의미 의) ‘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였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념의 언어에 친숙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곧장 ‘아비 찾기’의 문학사적 계보로 편입시 키는 근대문학사의 오랜 ‘관행’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한수영, 한 수영, 「말을 찾아서」, 관촌가는 길, 구자황 엮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275쪽.

 

Ⅳ. ‘도련님’의 기억과 말들

 

이문구는, 고향을 “저주의 땅”으로 뒤바꿔버린 학살과 보복, 원한과 적 대, 그리고 낙인과 혐오의 사건들과 고통스럽게 대결하기보다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

고향의 파괴와 함께 사라진 세 가지 요소 중 ‘돌봄의 감각’을 가장 적극적으로 되살리려 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문구에게 돌봄이란 자기를 둘러 싸고 있던 사람들, 말, 감정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다름 아니며, 관촌수 필은 그 “불가피한 의존(inevitable dependencies)”21)의 세계를 재구성함 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1) 에바 페더 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역, 박영사, 2016, 81쪽. 마사 파인만(Martha A. Fineman)이 제안한 이 용어는 특히 유아, 환자, 장애인, 허약한 노 인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개별자’들이 본질적으로 의존적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관촌수필에서 초점화된 ‘어린’ 이문구는 이같은 의존적 관계성이 전제된 서술자라고 할 수 있다.

 

의지처로서 고향의 수호자이자 돌봄의 수행자로서 옹점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지만, 관촌수필의 어린 이문구가 사람들을 기억하고 공동 체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해 보다 주목해야 할 인물들은 오히려 대복이 와 유천만이다.

이들에 대한 기억은 유난히 ‘자기중심적’으로 구축되는 경 향이 엿보이는데, 이 기억 주체의 자리를 이 글에서는 ‘도련님’의 위치라 고 명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도련님’은 일차적으로 ‘양반집 도련님’, 즉 마 을의 상층계급의 자제로서 나이와 상관없이 이웃 주민들의 삼가는 태도  ― 물론 이 태도에는 복잡한 배타성의 감정도 함축되어 있다 ― 에 매개된 특별한 위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도련님’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보고 아끼며 함께 키워가는 공동체의 미래의 대표자로서의 의미 를 강하게 내포한다.

근대적 ‘아동’ 개념에서는 찾기 어려운, 공동체의 친 밀한 개입과 관대한 존중이 ‘도련님’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련 님’의 존재에는 계급적 ‘거리감’과 공동체 모두의 아이로서의 ‘귀속감’이라 는 모순적 감각이 함께 뒤섞여 작동하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22)

 

    22)말할 필요도 없이 ‘도련님’은 철저하게 남아중심의 신분사회의 산물로서 특권화되어 있다.

‘아기씨’라는 말로 상층계급의 남아, 여아를 모두 존중하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담장 바깥에서 남아와 여아의 위상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가부장적 전통 공동체에서 ‘도련님’이 갖는 대표성은 자명했다. 

 

범바위 뒤 모시밭 곁 초가집의 외아들 대복이는 어린 이문구보다 여 남은 살 더 먹었지만 “듬직하고 아쉬웠던 친구”(136)였고, “대복이 뒤만 따라다니면 모든 것을 맘대로 해도 겁날 게 없었”다.(137)

 

“길에서 비를 만나면 제 옷을 벗어 내게 덮씌워 주었고, 밤마실 이슬 길에 달이 거울 같아도 제가 좋아 나를 업고 오며 가지 않았던가.”(137)

 

뿐만 아니라 대 복이의 어머니에게도 그녀를 “대복 어메”라고 부르던 어린 이문구는 ‘도 련님’이었다.

어른 눈치를 봐야 하는 자기 집을 피해 “놀이터나 마찬가 지”(136)였던 대복이네서 맘껏 놀다 지쳐 잠들었던 어린 이문구가 소변 을 보러 일어나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자고 만 것으로 착각하고는 자신을 깨우지 않은 대복 어머니에게 잔뜩 성질을 부려도, 대복 어머니는 금세 웃음을 머금고 업어 줄 테니 참으라며 수제비 한 그릇을 떠놓아 준다.

할아버지와 함께 명문거족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적 어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집안이 풍비박산되기 전까지는, 대복이네에 그치지 않고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어린 이문구는 ‘도련님’이었고, 그 자 신도 ‘도련님’의 위치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복이가 실상은 마을에서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 없는 애”(148) 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받곤 했다.

옹점이도 대복이가 “순전 도둑늠”(148)이니 함께 어울리다가는 순사에게 같이 붙잡혀갈 거라 경 고했고, 대복이가 어린 이문구를 귀여워하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도 대복이를 닮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어린 이문구가 대복이를 좋 아하며 그를 따라 못된 장난을 치기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이든 잘 줍고 잘 잡는 능력에 손재주까지 좋았던 대복이가 어린 이문구를 특별히 아끼 고 귀하게 여기며 자신이 구한 진기한 것들을 기꺼이 나눠주었기 때문이 다.

외지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리며 갈취를 일삼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 에게는 구제불능의 “개잡늠” 취급을 받았지만, 어린 이문구는 “반대로 날이 더하고 달이 갈수록 대복이가 점점 더 좋아져 가기만 했다.” (156)

그러나 미군들이 대천에 해수욕장을 만들 무렵 미군의 물건을 훔치 다 잡힌 이후부터 점차 언행이 거칠어지고 도둑질도 과감해진 대복이는 급기야 절도죄로 공주형무소에 수감되는 처지가 되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는 전황의 변화에 따라 인민군 과 국방군 쪽에 번갈아 빌붙으며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참봉집 손녀인 순심이를 강간하려다 붙잡혀서는 양반에게 인민의 원한을 갚으 려 했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더할 바 없이 혐오스러운 인간 이 되어 갔지만, 어린 이문구는 대복이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국방군이 마을에 들어온 후 대복이가 갑자기 참봉집의 머슴이 되 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 일이 과거 인민군 치하에서 부 역행위를 하다 집 안에 굴을 파고 숨어 생활하고 있는 순심이와 들키지 않고 함께 있기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대복이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마침내 대복이가 군대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출정하는 어느 봄날 대복이의 아이를 임신한 순심이는 굴 밖으로 나와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떠나는 사람, 집 안에 숨어서 멀리 뒷모습만이라도 바 라보고”(190) 있었고, 우연히 그녀를 목격한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해 결 국 순심이는 잡혀가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순심이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간 대복이의 행동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린 이문구의 눈에는 순정적인 것처럼 비친다.

이렇듯 대복이에 대한 이문구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다.

어 린 이문구는, 설사 많은 이들의 공분과 비난을 살 만한 인물일지라도, 자신에게 특별히 이익과 만족을 선사하는 대복이를 좋아한다.

훨씬 나 이가 많은 대복이가 막내 동생 같은 ‘도련님’ 이문구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만큼은 거짓이 없었다는 점에서, 어린 이문구의 좁은 시선이 대복 이가 가진 가장 ‘선한 것’에만 편파적으로 집중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대복이의 악과 파렴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도 <녹수청산>의 서술을 통해서다.

 

“밤도적 늠이 세상 뒤바뀡께낮도적 늠 되더랑께……” 시달리다 못해 그렇게 막말하는 소리도 나는 들었다. “사람 되어본다는 풍신아 아주 버린늠 되엿뻐리니……” “그 자슥웂어지는 것 보구 싶어서라두 한 번 더 뒤집히야 허여……” 오죽 보기 싫었으면 그런 위험한 말까지 입 밖에 냈을까. “제깟늠이 그러다 말지 워쩔라데유, 시국도 어채피몇 조금 안 가 엎어질 텐디……” “그 눙깔핏발 서 가지구 미친 가이마냥쏘댕기는 거 보슈, 조심휴, 입바른 소리 허다 말버릇 고치게 되지 말구……” (171-172, 강조는 인용자)

 

인민군 덕에 감옥에서 풀려난 대복이가 남으로 진군하는 인민군 부 대들의 식량 조달을 돕기 위해 집집마다 공출을 강요하며 닥달하자 마 을 사람들이 뒤에서 불만을 터뜨리며 말하는 대목이다.

<녹수청산>은 대복이를 ‘편애’하는 어린 이문구에 초점화되어 있지만, 서술자는 마을 사람들이 대복이에 대해 하는 비난의 말들도 듣고 있는 것이다.

관촌 수필은 ‘수필적’ 회고가 갖는 주관주의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주위를 사람들의 말들로 둘러싼다.

이같은 구조는 공동체를 기억하는 이문구 특유의 방법에 해당한다.

이문구 특유의 기억법과 관련해 또 한 사람의 인물을 살펴보자. 그

는 이문구보다 두 살 많은 친구 복산이의 아버지 유천만으로서, 그는 대복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의 평판과 어린 이문구의 시점 사이의 차 이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문구 일갓집의 행랑살이를 했던 인물인 탓 에 어린 이문구는 그를 ‘유 서방’이라고 아랫사람 대하듯 불렀는데, 그는 심지어 대복이조차 함부로 말할 만큼 마을에서 무시받고 천대받는 사람 이었다.

그러나 역시 어린 이문구는 다르게 기억한다.

 

“으른들은 복산 아배를 사람것으로 쳐주지도 안잖데? 그이는 사람것이 아니여. 그이마냥드럽구 추접스럽구 우스운 이가 또 있데?” 그날도 대복이는 거듭 잡도리하듯 말했다. 언제나 늘 그 타령이던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가 추접스런 사내로 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대복이나 옹점이가 척진 듯이 징그러워했으면 나도 덩달아 그렇게 여겼어야 마땅하련만, 복산 아버지를 보는 눈만은 그네들과 등진 셈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300)

 

대복이나 옹점이도 천대하는 복산이 아버지를 어린 이문구가 좋아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는 일제 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병을 얻어 돌아 온 후 기력이 없다며 일다운 일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도 공동 체에서 한 사람의 ‘사내’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마을에서 소, 돼지 등 동물을 잡거나 짝짓기 하는 일 등은 그가 도맡아서 처리했다. 더욱이 거의 품삯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네 초상집에서 밤샘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상가(喪家)의 일 을 제 일처럼 도왔고, 이사 가는 집이 있으면 이삿짐을 날라주고, 이엉 얹는 집이나 새로 짓는 집이 있으면 하찮은 일이라도 도우러 갔던 이였 다.

잔병치레가 심했던 어린 이문구는 그가 해주는 이방을 특히 재미있 어 했고, 또 효험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복산이 아버지 유천만은 사람들이 꺼리거나 기피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특히 가축을 도살하고 개 흘레를 붙이는 등 동물의 생명 에 개입하면서 공동체의 필수노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 신분제 사회가 백정을 경계에 배치시켰던 것과 유사하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천대하면서 생명을 빼앗고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한 ‘죄책’을 그에게 전가한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어린 이문구는 그를 좋아한다.

어쩌면 유천만이 돼지를 잡은 후 그의 아들인 복산이가 “손 벌리는 아이가 많아도 정해놓고 나를 주곤 했”던(315) 돼 지 오줌보 축구공 때문일까.

‘수필적 회고’를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촌수필에서의 기억이 주 관적일 것은 당연하지만, 대복이와 유천만에 대한 서술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도련님’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 또는 공동체의 영역에서의 그들의 사회적․도덕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이 배려받고 보살핌받았던 시간 속에서 그들과 세 계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쌓아 갔던 ‘남자 아이’[男兒]의 기억이다.

‘도 련님’의 세계에서는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여도 주변 세계와의 우호적인 교감이 줄곧 지속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대복이가 “허물 않고 내 게 벗해 주기를 즐긴 것”(137),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해도 “제 막내동생 이라도 달래듯 고분고분 받아 주었던”(137) 것, 자기가 잡은 망둥이를 넉넉하게 나눠주었던 것, 복산이가 돼지 오줌보 축구공을 흔쾌히 양보  하곤 했던 것, 어린 이문구가 이런 ‘베풂’ 속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곧 그가 ‘도련님’의 위치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그리워하는 돌 봄의 감각이란 이렇듯 특별한 위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충만함의 감각 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방식의 ‘편향된’ 또는 ‘왜곡된’ ‘도련님’의 기억은 고통을 회피하 려는 전형적 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돌봄 속에 머무는 기억은, 곧 그 울타리가 파괴된 이후 나락으로 떨어지고 황폐해진 삶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작용 을 방증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을 파괴하게 만든 근본적인 고통의 기 억과 직면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반드시 해방적인 귀결을 보장해 주 는 것은 아니다.

반공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검열이 저 상처에 직면하는 일 자체를 방해하기도 했지만, 정작 실제적 고통과 마주하려는 강한 의 지가 원한과 분노의 파토스 속에서 대타적(對他的)인 주체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고통의 회피가 반드시 기만적 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배려와 돌봄의 관계가 주관적이고 제 한적인 것이었음을 떠올리는 또 다른 기억이 작동하기만 한다면 말이 다.

관촌수필의 이문구는 대복이를 좋아하면서도 대복이에 대한 사람 들의 부정적 평판을 듣고 있었듯이, 유천만을 좋아하면서도 그가 죽었 을 때 그의 장모가 나타나 속이 후련하다고 춤을 추며 울음 섞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기억한다. (323-325)

이렇듯 이문구는 고통의 기억과 맞서 싸우면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 하려 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관계에서 출발해 숨쉴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촌수필은 ‘뿌리’를 거슬러 올 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주변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기억하며 배려와 돌봄의 힘들이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적 세계를 재구성한다.

‘도련님’은 이런 힘들을 향유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돌봄의 수혜자로서 이 공동체를 이상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관촌수필은 그 세계를 둘러싸 고 있는 ‘다른 말들’을 저 주관적 세계와 함께 제시함으로써 결국 모든 인물들의 다른 얼굴들도 발견하도록 한다.

 

Ⅴ. 미래를 위한 윤리 - 맺음말을 대신하여

 

‘도련님’의 기억과 마을 사람들의 ‘말들’이 함께 직조해 간 관촌수필 은 그 생생한 말의 표정들 못지 않게 ‘삽화적(에피소드적) 구성’으로도 유명하다.

잘 짜인 플롯 안에서 서사의 발전을 경험하게 하는 근대문학 의 규범적 구성 모델을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관촌수필의 단편들은 단절적이고 분산적인 삽화들의 병렬적 구성 때문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 기도 했다.23)

 

    23) 백낙청, 「사회비평 이상의 것」, 창작과 비평 1979년 봄호, 349쪽; 김종철, 「작가의 진실성과 문학적 감동」, 한국문학의 현단계, 창작과비평사, 1982; 구자황 엮음, 관 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76쪽에서 재인용.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공산토월>의 도입부를 들 수 있다.

영화 <대부>가 잔혹한 장면들 때문에 상영 찬반의 논란을 불러일으 키고 있던 중, 이문구와 친분이 있던 한 신문 기자가 그에게 찬성론자 입장의 원고를 청탁했다. 그 이유는, 문화부 기자들 사이에서 “평소 성 질이 거칠고 냉정하다든가, 그리고 또…… 냉혹하고 잔인한 일에도 놀 라지 않고, 그리고 또…… 그런 난폭한 일도 경험했을 듯”한(196-197) 사 람으로 이문구가 꼽혔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이문구는 생각의 연쇄 끝에 자신이 좋아하고 또 자신을 좋아해 주는 시인 박용래와 임강빈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이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왕 꺼낸 말이매 매듭을 짓기 로 한다”(204)며 갑자기 서술자가 나타나 에피소드를 전환하고, <대부> 에 대한 신문 원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소년 살인강도 사건의 기사를 보고 “쌀밥과 콜라와 포도”(206)가 먹고 싶었다 는 소년수를 떠올리며 동정의 마음에 사로잡혔던 일화로 넘어간다.

이 문구는 자신의 <대부> 상영 찬성 원고료를 그 소년수에게 전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우연히 작가 한남철과의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 냈다가 살해당한 택시 기사의 억울함을 고려하지 않은 뒤틀린 동정심이 라고 비판받고는 자기 내부에 자신도 모르는 잔인함이 있을지 모른다고 반성한다.

타인이 바라보는 자기와 자신이 믿고 있는 자기 사이의 간극 에서 출발한 에피소드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지에 닿은 것처럼 보이지 만, 이야기는 다시 진실로 본성이 착하고 어진 사람이 드물다는 화제로 전환된 후, 마침내 석공 신현석에 대한 기억으로 넘어간다.

서술 층위와 사건 층위를 맘껏 오가며 산만하게 생각과 일화를 뒤섞 어 전개하는 관촌수필의 서술방식은 이미 많은 연구들에서 주목했듯 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전근대적 ‘이 야기체’의 전형적 특성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4)

 

     24) 오디세이아의 삽화적 구성과 관련해서는 에리히 아우얼바하, 미메시스 ― 고대․ 중세편, 김우창․유종호 역, 민음사, 1995, 11-35쪽 참조. 한편, 이문구는 한국전쟁 후 아직 ‘관촌’에서 어머니와 지내던 무렵부터 옛 이야기책 을 탐독했다고 기억한다. 특히 저녁마다 마을 아낙네들의 마을방이 된 집에서 어린 이문구가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었을 때의 경험을 인상적으로 기 록하고 있다. “이야기책과 고대소설을 먼저 지나고 현대소설로 접어든” 이문구의 독서 경험과 ‘낭독’ 경험이 이야기체에 대한 친숙한 감각을 형성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문구,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 엔터출판, 1997, 16쪽. 

 

하지만 중 요한 것은 전근대적 또는 전통적 이야기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같은 삽화적 구성이 갖는 효과일 것이다.

근대적 서사의 ‘플 롯’ 개념이 기본적으로 선형적 표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경험을 통해 성장 또는 몰락에 이르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면서 서사적 의미도 함께 완성되기 때문이다.

규범적 플롯 개념이 상정하고 있듯, 근대 소설은 서 사의 종결과 함께 이전까지의 사건들의 의미가 모조리 해명되는 가운데 주체성의 모델을 완수한다.

그러나 삽화적 구성은 ‘선형적 구성’과 달리 존재와 의식의 산만하고 단편적인 경험을 따라가며 엉성한 지도를 그린 다.

선형적 구성이 주체(subject)를 서술한다면, 삽화적 구성은 세계를 묘사한다.

선형적 구성이 주제(subject)의 실현을 목표로 진행한다면, 삽 화적 구성은 서술자나 인물이 활동할 환경을 디테일하게 조성한다.

이 삽화적 구성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방 향보다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복원하는 방향에 맞춰져 있는 이문구 의 기억법에 상응한다.

<공산토월>의 도입부 에피소드에서 작가 한남철이 날카롭게 비판했 듯이, 궁핍한 소년수에 대한 이문구의 동정은 살인사건의 실상 전체를 보지 못하고 주관적인 상상과 추정에 사로잡힌 착오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택시 기사가 살해당했고 그의 가족들이 어떤 고통과 곤란 속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인자인 소년에게 밥값을 보낼 수 있 는가.

그런데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런 동정의 마음이 어떻 게 떠오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문구 특유의 윤리의식을 엿볼 수 도 있다.

 

오죽이나 주려 허기졌기에 한 그릇쌀밥이 그토록 소원이었을까. 나는 느 닷없이 어렸을 적, 대문 앞에 서서 바가지에 얻어 가던 어린 거지와 추녀밑 에서 먹고 가던 늙은 비렁뱅이가 어릿거릴 적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차려 내다 주게 하던 어머니 얼굴이 불현듯떠오르고, 그것이 무슨 적선이나 보 시가 아닌데도, 반드시 소반에 받쳐서 내다 주도록 신칙하던 그 음성이 다 시금귓결에 맴돌고 있음을 들었다. (206)

 

배를 주린 이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해 겨울 육친의 참화를 겪고 그 자신도 학살의 위험으로 피난을 간 집에서 석 달가량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으로 이어진다.

먹는 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시절의 경험이 투영되 어 동정의 마음이 솟아올랐을 수도 있지만, 이문구의 동정의 궁극적 기 초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배를 주린 소년이 어디에서든 누군가에 게든 밥상을 받을 수 있었다면, 애당초 택시기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 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상상이다.

혹은 살인자 소년이 언젠가 형기 를 마치고 출소한 후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이다.

이 소년수를 둘러싼 동정과 상상은 관촌수필이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와 형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한 ‘저주의 땅’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문구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것 은 물론, 고향 자체가 극렬한 적대성 속에 파괴되어버린 마당에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이문구는 그 참화를 허구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고, 그 래서 고향을 가장 기억하기 싫은 곳으로 만든 적대성을 재연하지 않고, 보살핌의 환경에 둘러싸인 ‘도련님’의 기억을 따라 사랑스러운 사람들 을 떠올리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단, ‘도련님’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억은 반드시 그 주관성 바깥의 ‘말들’과 함께 제시되었다.

이문구의 기억은 ‘도련님’이었던 시절을 노스탤지어적으로 이상화하는 일이 아니라, 돌봄 과 의존의 관계 속에 보존된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한국전쟁이 파괴한 소중한 과거에 대한 회고 라기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한 상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이문구,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 엔터출판, 1997. ______, 장한몽 하, 랜덤하우스중앙, 2004. ______, 글로 벗을 모은다, 랜덤하우스중앙, 2005. ______,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202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 상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 사정리위원회, 200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10 상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 사정리위원회, 2010.

2. 논문과 단행본

고인환,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식민성 연구」, 경희대 박사논문, 2003. 구자황 엮음, 관촌가는 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______, 「이문구 소설의 이야기성에 관한 두 가지 고찰」, 한국문학연구 제58호,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18, 137-164쪽. 오창은, 「민중성 발견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힘」, 교양학연구 제18호, 다빈치미 래교양연구소, 2022, 351-389쪽. 유승환, 「사투리는 어떻게 문학어가 되는가」, 구보학보 제18호, 구보학회, 2018, 377-422쪽. 유영주, 이형진․ 정기인 옮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소명출판, 2023. 이선미, 「냉전과 소설의 형식, ‘(경남)진영’의 장소성과 사회주의자 서사 (1)」, 한국문학 논총 제87호, 한국문학회, 2021, 367-398쪽. 임우기, 「‘매개’의 문법에서 ‘교감’의 문법으로」, 문예중앙 1993. 여름호, 356-398쪽. 장연진, 「이문구 문학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2018. 전정구, 「이문구 소설의 문체 연구 - 「관촌수필(冠村隨泌)」과 「우리 동네」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제9권, 현대문학이론학회, 1998, 253-277쪽. 천정환,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의 생산」, 상허학보 제26호, 상허학회, 2009, 55-101쪽. 최시한, 「이문구 소설의 서술 구조 – 연작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 40권,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08, 57-84쪽. 에리히 아우얼바하, 미메시스 ― 고대․중세편, 김우창․유종호 역, 민음사, 1995. 에바 페더 커테이, 돌봄: 사랑의 노동, 김희강․나상원 역, 박영사, 201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국문요약

이 글은 관촌수필을 중심으로 이문구의 개인사적 경험과 글쓰기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며 그의 기억의 윤리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던 아버지와 형들이 참혹하 게 학살당하면서 명문 양반가였던 집안도 몰락했고 이문구 자신도 거의 고아처럼 고향을 떠나야 했다.

13년만에 고향을 다시 찾아 과거를 회고 하며 시작하는 관촌수필은 고향이 파괴되며 사라졌던 것들, 즉 할아 버지로 상징되는 ‘관계적 세계’, 옹점이, 대복이, 신석공, 유천만 등 고향 사람들과 말과 감정이 형성해 온 ‘돌봄의 감각’, 아버지와 형들의 지하활 동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공간’을 기억하려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특 히 ‘돌봄의 감각’을 가장 적극적으로 되살리려 하면서, 이문구는 고향을 ‘저주의 땅’으로 뒤바꿔버린 학살과 보복, 원한과 적대, 그리고 낙인과 혐오의 사건들을 고통스럽게 기억하며 대결하기보다는, 자기를 둘러싸 고 있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

그가 관촌수 필에서 재구성하려 한 세계는 단적으로 ‘도련님’의 세계라고 할 수 있 는 보살핌과 돌봄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돌봄 받는 ‘도련님’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지만, 관촌수필은 그 주관주의적 한계를 감추지 않고 그 주위를 사람들의 ‘말들’로 둘러싸며 균형을 유지 한다.

 이문구는 규범적인 ‘플롯’의 선을 따라 주체성의 서사를 형성하기보 다는, ‘삽화적 구성’을 통해 공동체적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 이 삽화 적 구성은,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 하기보 다는 자신이 숨쉴 주변 환경을 조성하려 하는 이문구의 기억의 방향에 상응한다.

핵심어 : 기억, 윤리, 관계적 세계, 돌봄의 감각, 정치적 공간, 도련님 

 

 

❚Abstract

How to Preserve the Memory of Community Lee Mun-ku’s Gwanchon Essays

Cha, Seung-ki

This article focuses on Gwanchon Essay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Lee Mun-ku’s personal history and his writing and to consider the ethics of his memory. During the Korean War, Lee’s father, who was the head of the Boryoung Branch of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and older brothers were brutally massacred, destroying his prestigious family and forcing him to leave his hometown almost as an orphan. Beginning with a return visit to his hometown after 13 years and reflecting on the past, Gwanchon Essays attempts to remember the things that were lost when his hometown was destroyed: the “relational world” symbolized by his grandfather; the “sense of caring” formed by words and emotions of the people of his hometown, such as Ongjeom, Daebok, Sin Sukgong, and Yoo Cheonman; and the “political space” symbolized by the underground activities of his father and older brothers. But most actively of all, he seeks to revive a sense of caring, and rather than painfully recalling and confronting the events of massacre and retribution, resentment and hostility, stigma and hatred that turned his homeland into a “cursed land,” he seeks to reconstruct that world by remembering the people who surrounded him. The world he tries to reconstruct in Gwanchon Essays is a world of care and nurturing, a world that can only be called the world of the ‘young master’. The memories of the ‘young master’ being cared for are basically subjective, but Gwanchon Essays does not hide its subjectivist limitations, but balances them by surrounding them with the ‘words’ of people. Rather than constructing a narrative of subjectivity along the lines of a normative ‘plot’, the text seeks to reconstruct a communal world through ‘episodic composition’. This episodic composition corresponds to the direction of the text’s memory, which seeks to create an environment in which to live and breathe, rather than to recover his identity through his father’s life and death.

 

Key-Words : Memory, Ethics, the Relational World, the Sense of Caring, the Political Space, Young Master

 

 

2024년 9월 8일 접수   2024년 9월 27일 심사    2024년 10월 6일 게재확정

현대문학의 연구 84권

KCI_FI00313508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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