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고통의 재현 (불)가능성
Ⅲ.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
Ⅳ. 경험의 물신화 혹은 이론의 부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이 글은 김훈의 흑산에 드러나는 ‘언어’의 의미를 ‘실재’ 1)의 문제와 관련하여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흑산에서는 두 가지 언어가 대립한 다.
하나는 권력자인 대비2)의 공허한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받는 자들의 인간 경험(주로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언어다.
1) ‘실재(the real, reality)’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존재다. 이 글에서는 ‘실재’를 언어, 인간 경험과 관련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실재는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할 때 불완 전하게 재현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근본 영역이다. 경험적으로는 인간 개인의 강렬 한 고통처럼 언어로는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의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차원 을 말한다.
2) ‘대비’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말한다. 정조 사후 즉위한 순조의 나이가 11세 에 불과했기에 정순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흑산에 서 긍정되는 언어는 후자인데 이는 주로 백성들의 통곡에 가까운 언어, 사실을 단순명료하게 표현한 언어, 사물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정약전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다.
이들은 모두 실재에 가까운 언어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흑산에서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문제는 중요한 테마다.
이는 특히 등장인물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 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소설에서는 한편으로 등장인물들 의 생각을 통해 인간의 개인적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설에서는 분명히 ‘언어를 통해’ 여러 인물들의 고통이 재현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인간의 고통, 나아가 세계 (자연)의 실재와 관련하여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사이를 오가는 흑산 에서의 언어(화) 문제를 고찰할 것이다.
흑산은 정조 사후 1801년경 벌어진 신유박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다.
신유박해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대규모 천주교 박해이며, 박해의 결과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 사를 거부하고 임금과 어버이를 모시지 않는 극악무도한 ‘사학죄인(邪 學罪人)’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박해의 명목상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 시 기 득세했던 남인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노론 강경 세력이 박해를 주도 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이유 또한 강했다.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에 는 “집권 세력의 정적 제거라는 측면 외에, 중세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며 동요하는 민중에 대한 적극적 탄압이라는 측면”3)도 있기에 박해의 의미 는 정치적, 역사적 문제와 관련하여 복잡하다 할 만하다.
3) 변주승,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한국사상사학 제16권, 한국사상사학회, 2001, 115쪽.
흑산은 정씨 집안 사형제4) 중 둘째인 정약전과 첫째 정약현의 사 위인 황사영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면서 전개된다.
신유박해 시기 정약 전은 배교(背敎)는 하였으나 죄의 엄중함 때문에 목숨만은 건진 상태로 머나먼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도망다니다 붙잡혀 결국 죽음에 이른다.
흑산은 정약전 이 흑산으로 귀양을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결국 흑산에서의 삶을 ‘인정’하고 흑산에 정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중심서사에 황사영이 어 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정씨 집안의 사위가 되는 과정, 신을 믿게 되고 세례를 받는 과정, 박해를 피해 배론의 토굴에 은거하는 과정, 결 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밀서(백서)가 발각되고 참형에 이르는 과정 등이 또 다른 중요한 서사로 겹친다.
흑산에는 정약전과 황사영 외에도 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인 물들은 하나같이 고통을 경험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말 하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생과 사를 오가는 고통을 겪 다가 죽음에 이르거나, 정약전처럼 일부는 고통을 간직한 상태로 삶을 지속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흑산은 박해받는 인물들이 보여주 는 처절한 고통의 기록(언어화)인 셈이다.
흑산에 대한 연구는 소설이 발표된 2011년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 의 시간이 지났으나, 그리 많지 않다.
흑산에 나타난 바다의 의미를 탐구한 연구5), 흑산이 글쓰기 전략을 통해 “권력과 이념의 폭력성”6) 을 드러내고 있다는 연구가 있고, 소설에 드러나는 ‘배교’의 문제에 관심 을 기울인 작업 정도가 있다.7)
4) 정씨 집안 사형제는 나이 순서로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다.
5) 김주언, 「김훈 소설에서 바다의 의미- 흑산을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제18권 제2호, 한국문학과 종교학회, 2013.
6) 이근세, 「이념의 문제와 글쓰기 전략-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우리어문연구 제49권, 우리어문학회, 2014, 507쪽.
7) 윤인선, 「조선 후기 천주교 배교에 관한 재현적 글쓰기 연구- 김훈의 <흑산>을 중심 으로」, 기호학연구 제54권, 한국기호학회, 2018; 정경화, 「한일 천주교 박해의 특징 과 인간의 선택 문제에 관한 캐릭터별 양상- 김훈 흑산과 엔도 슈사쿠 침묵을 중심으로」, 한국문화기술 제36권,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24.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소설에서 유토피아적 공간의 가능성을 고찰한 연구8)를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 글 에서 ‘권력의 언어’와 ‘민중의 비언어’를 대비시킨 점, 정약전이 “자산어 보로 자연을 번역하는 일은 낯섦을 창출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 히는 유토피아적 수행”9)이라고 언급한 점 등은 흑산에 드러나는 언 어 문제에서도 핵심적인 것이기에 참조할 필요가 있다.
8) 우현주, 「유토피아 공간의 (불)가능성: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인문학 연구 제40권,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3.
9) 우현주, 「유토피아 공간의 (불)가능성: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인문학 연구 제40권,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3, 216쪽.
다만 지금까지 의 연구에서 -흑산에서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실재’와 관련하여 소설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이 깊이 있게 탐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글 에서는 흑산에 드러나는 언어의 문제, 경험의 언어화 문제를 ‘실재’와 의 관련하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고자 한다.
경험의 언어화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특히 소설에 드러 나는 고통, 경험, 언어, 실재로서의 사물 등에 주목하였다.
소설에서 개 인적 고통의 문제, 경험의 언어화 문제 등은 반복되어 나오는 내용이며 전체 소설의 구도와도 연결되는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읽기 (close reading)’가 필요하다.
자세한 읽기를 통해 경험의 언어화를 통해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자체로 갖 는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흑산은 인간의 경험, 특히 인간 개인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 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내장한 채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소설이 다.
그렇지만 소설은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인 의 경험을 물신화하고, 이론을 거부하는 문제도 드러낸다.
세계(자연)의 본모습에 다가서는 언어의 가능성은, 소설에서 인간 경험의 투명한 언 어화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처럼 서술된다.
그러나 철저한 경험주 의(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소설에서는 ‘경험의 언어화를 통해 실재에 다가가기’가 왜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지도 숨겨진 형태 로 드러난다.
이 문제는 본론 마지막 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Ⅱ. 고통의 재현 (불)가능성
흑산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의 고통이 재현된다.
소설의 주요 인물이 라 할 수 있는 정약전, 황사영뿐만 아니라 ‘사학죄인’으로 불리는 백성들 까지 모두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면서 형벌의 대상이 된다.
소설 속 인 물들은 매를 못 이겨 심문하는 자가 원하는 답을 하기도 하고 거짓 증언 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흑 산 전체가 소설 속 인물들이 감당해야 하는, 혹은 감당하기에는 버거 운 고통의 기록인 셈이다.
서울에서 의금부 형틀에 묶여서 심문을 받을 때 곤장 삼십 대 중에서 마지막 몇 대가 엉치뼈를 때렸다.
그때, 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척추 를 따라서 뇌 속을 치받쳤다.
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 다시 벼락쳤 다.
이 세상과 돌이킬 수 없는 작별로 돌아서는 고통이었다.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
고통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면서 닥쳐 왔다.
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 명을 증거하고 있었다.10)
10)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10쪽. (이후 본문 해당 부분에 쪽수만 표기)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정약전은 의금부에서 심문받을 때의 기억을 떠 올린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의 고통은 ‘벼락’처럼 몸 에 새겨지며, 정약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무엇보다 하나의 단락에 ‘고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될 만큼, ‘고통’은 정약전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지배하는 주된 어휘가 된다.
소설에서 정약전이 매 맞는 고통을 떠올리는 장면은, 이후 일반 백성 들의 ‘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것은 주로 관아에 매 를 맞으러 가기 전, 매를 맞고 난 후 백성들이 취하는 매 대처법에 관한 내용을 담는다.
매 맞는 고통은 정약전 개인의 문제에서 시작해 일반 백성들의 ‘신체적’ 고통으로 확대된다.
이후 흑산의 전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정조 사후, 1801년경 백성들은 끊임없는 수탈과 지방관 리들의 폭정, 가난과 배고픔 등에 ‘고통’받는 것으로 나온다.
“함경도, 평 안도의 산악 오지와 경상도의 역참 마을과 전라도 나주목에 딸린 먼 섬 의 백성들(까지) 신음과 원성을 글로 적어서 관아에 올”리지만, 백성들 의 ‘신음과 원성’을 담은 고통의 목소리는 “천한 글”이 되어 “지방 향청의 관아에 쌓”(24∼25쪽)이고 만다.
이처럼 흑산의 주요 인물들과 ‘사학죄인’들,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소설 전반(全般)에 드러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고통’이 소설의 중요한 테마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인물들의 고 통이 ‘언어화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 형틀에 묶이는 순간까지도 매를 알 수는 없었다.
매는 곤장이 몸을 때 려야만 무엇인지를 겨우 알 수 있는데, 그 앎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책은 읽은 자로부터 전해 들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가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 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12∼13쪽)
(나) 함께묶여서 매를 맞을 때 형제들은 서로 매맞는 소리와 신음을 들었 지만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중략)
나란히 묶여서 매를 맞을 때 도 매는 혼자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매는 공유되지 않았고 소통되지 않았 다.
모든매는 각자의 매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매는 더욱 육신에 사무쳤다. (17∼18쪽)
위의 인용문에서 ‘매’를 ‘고통’으로, ‘매를 맞다’를 ‘고통을 받다’라는 말 로 바꾸어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 통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에서처럼 고통은 지극히 ‘개 인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흑산에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는 것이며 언어화되는 순간 ‘실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개인적’ 체험에 관한 것으로 드러난다.
고통에 관한 고전적인 논의에서 스캐리(Elaine Scarry)는 고통이 “무엇 을 ‘향한’ 것이거나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며) 홀로 존재한다.”11)고 말 한다.
인간은 그냥 감정이나 지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를 향한 증오’, ‘∼을 보기’, ‘∼를 향한 허기’처럼 대상을 갖는 감정 상태, 지각 상태, 신 체 상태를 보이는데 육체적 고통은 그러한 지시 내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캐리에 따르면 “대상(object)을 갖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육 체적 고통은 다른 어떤 현상보다도 더 언어로 대상화(objectification)되는 데 저항한다.”12)
11)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역, 오월의 봄, 2018, 262쪽.
12)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역, 오월의 봄, 2018, 10쪽.
육체적 고통이 언어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고통 을 타락한 권력이 자기 식으로, 혹은 자기 식의 언어로 전유(appropriation) 할 수도 있다는 논의로 스캐리는 나아간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개인의 – 실재 차원에서의- 고통을 자신만의 언어로 전유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문 제, 재현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기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흑산에 이에 대한 성찰, 반성적 사유가 담겨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고통의 공유 불가능성”, “고통이 언어에 저항한 다는 점”13)을 줄곧 강조하는 스캐리의 논의가 흑산에 드러나는 고통 의 문제, 고통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고통이 언어화될 수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태도일 수 있다.
매를 맞고 주리를 틀리고 참형에 처해지는 개인적인 고통을 제3 자가 어떤 식으로 언어화한다고 해도, 그 고통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캐리가 경계한 것처럼 개인의 고통을 누군 가가 전유하여 표현하는 것은 고통에 또 다른 고통을 더하는 폭력일 수 도 있다.
그렇지만 흑산에서는 고통이 언어화될 수 없다는 인식이 드러남에 도, 다양한 형태로 고통이 표현(언어화)된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 어화하는 일종의 아이러니(irony)한 상황이 소설에 드러나는 셈이다.
언 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는 작가의 숙명이라든가, 글쓰기의 한계/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낯설지 않다. “비록 불완전하게라도 고통에 음성 을 부여함으로써 작가들은 고통과 우리의 난해한 관계를 변화시키고 개 선시키기 위해 투쟁”14)한다.
13)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역, 오월의 봄, 2018, 8-9쪽.
14) 데이비드 B 모리스, 「고통에 대하여」, 사회적 고통, 안종설 역, 그린비, 2002, 232쪽.
흑산의 작가 역시 개인의 고통을 언어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도, ‘언어’를 통해 개인의 고통에 ‘다가가 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흑산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어떤 언어’인가의 문제다.
개인의 고통, 혹은 실재적인 차원을 ‘있 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만 소설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흑산에서 ‘고통’은 비록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이야기되지만, 그러 한 고통이 ‘대규모’로 재현됨으로써 고통이 결국 개별적인 문제에 그칠 수 없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흑산에는 조선 후기 고통받는 수많은 백 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특정 장면에서 등장할 때 서사가 ‘지연’된다 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소설에 거지 여자아이, 마노리, 육손이, 창 대, 아리, 강사녀, 순매, 길갈녀, 박한녀 등이 등장할 때 이들은 ‘이야기 (소설) 속의 작은 이야기’에서 하나의 주인공이 된다.
그들의 고통스러 운 삶의 이력은 적지 않은 분량으로 소개되며 전체 서사는 진행을 멈춘 다.
이러한 서사의 지연을 통해 독자는 ‘천한’ 인물들의 삶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면서 인물들 하나하나의 고통이 개인적 인 문제이면서, 결국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역사적·사회적 문 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흑산에서 고통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드러나면서도 위에서 본 것처럼 그러한 고통이 수많은 인물들의 차원에서 ‘대규모’로 드러남으 로써 그러한 고통은 조선 후기를 힘겹게 살아간 백성들의 문제, ‘사회적’ 인 고통이 된다.
흑산에서 언어의 문제가 실재와의 관계에서 한계와 가능성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고통의 문제 역시 개인적 차원의 문제와 사회적 차원의 문제 사이를 오간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 성 등과는 달리 흑산에서는 ‘억압받는’ 자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특 정 장면에서 부각되면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이력이 드러난다.
작 가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고통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이면서 또한 ‘수많은’ 인물들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문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 할 수밖에 없는 문제임이 드러난다.
이는 이전 김훈의 역사소설들과는 구분되는 흑산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Ⅲ.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
흑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언어가 선명하게 대비된다.
‘언어’를 통해 ‘실재’를 완전히 포착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실재에 다가서는 언어가 있고 실재와는 거리가 먼 공허한 기호들도 있다.
소설에서는 수 차례 ‘어린 임금을 대신한 윤음(綸音)’, ‘대비 자신의 자교(慈敎)’가 대비 의 언어로 길게 소개되는데, 이는 실재와는 거리가 먼 언어로 표현된다.
(가)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바람 속에서 서리를 맞으며 잠드는 너희 들을 덮어주지 못하니, 내 따스한 잠자리의 아픔이 너희들의 추위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제 나라의 가난이 조이는 듯하여 솜옷을 지어 보내지 못하고 묵은 종이를 거두어 보낸다.
(중략)
내 간절한 뜻으로 너희들의 몸을 가려라.
임금의 뜻으로 몸을 덮으면 추위도 견딜 만하지 않겠느냐. (25∼26쪽)
(나) 내 몸속에 아픔과 슬픔이 들끓어 몸을 뒤척이니 너희감사와 수령들 은 힘써 나의 뜻에 부합하라.
백성들이 개돼지의 길로 들어서고 있으니 내 어찌 거듭 말하고 또 말하지 않겠는가. 날랜 기발을 전국에 보내서 내 슬픈 뜻을 알려라. 방울 세 개를 매달고 밤을 새워달려가라. (126쪽)
(다) 아, 저먹을 것 없는 백성들은 어찌 수습할 것인지, 나는 잠들지 못한 다.
나는 백성을 어린 자식처럼 품어서 젖을 물리려는데, 백성들은 눈을 감 고 기어서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중략)
아, 너희팔도의 감사와 유수와 현령들아, 너희 여러 진보(鎭堡)의 장수와 만호들아, 너희들은 나의 마음을 너희들의 마음으로 삼아서 백성을 살펴 나의 목마름을 축여다오.
(중략) 내 마음이 간절하니, 빠른 파발을 보내라.
방울 세 개를 단 기발을 보내서, 지나 는 고을마다 방울 소리로 내 마음을 알려라.
어찌길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 느냐. (207∼210쪽)
대비의 자교는 대비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나, 대비가 따스한 잠자리에서 느끼는 아픔은 백성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고 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표현된다.
대비의 공허한 말은 ‘말 방울 세 개’ 가 내는 소리와 함께 긴급하고 공포스러운 권력의 기호가 된다.
“문장이 다급하고 모서리가 거칠다고 신료들이 간”하지만, 대비는 오히려 “세상 에 말을 내리면 세상은 말을 따라오는 것”(120쪽)이라고 믿는다.
특히 “대비는 자신의 말의 간절함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고 백성을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신료들은 그렇게 느꼈다.”는 대목에 이르면 대비의 내용 없는 말은 냉소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흑산에서 대비의 언어는 실재와는 거리가 먼 공허한 언어로 드러 나지만, 이러한 대비의 언어는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의 언어이기도 하 다.15)
15) 내용 없는 말이 ‘현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칼의 노래부터 남한 산성에 이르기까지 김훈 역사소설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기표들의 놀이’를 통해 권력은 지배 질서에 부합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해 가면서 지배 구조를 강화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사영은 대비의 필사본 자교를 보고는 ‘절벽’을 느끼면서
“이 세 상에 말을 붙이고 세상과 말을 섞는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256쪽)이라고 느낀다.
흑산에서 황사영은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 려지는 인물이기에 황사영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대비의 언어는 더욱 부정적인 의미로 드러난다.
대비의 언어와 반대편에 서 있는 언어는 백성들이 관찰사 앞으로 올 린 ‘소장’, 천주교 신자인 소작농 아내 오동희가 쓴 ‘기도문’과 같은 것들 이다.
정약전은 백성들의 소장을 “문장이 아니라 통곡”(29쪽)이라고 표 현하며, 황사영은 오동희가 쓴 기도문을 “언문으로 우는 울음”(106쪽)이 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정약전이나 황사영은 백성들의 비통한 언어에 서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는, 실재를 담아내는 언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흑산에서 억압받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담아 적은 글은 ‘문 장이 아니라 통곡’, ‘언문으로 우는 울음’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의성 어’에 가깝다.
그것은 글로 쓴 절규이자 비명이며,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몸부림이다.
대비의 언어와는 달리 억압받는 백성들의 언어 는 풍부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표현된다.
기표(signifie)와 기의(signifiant) 는 단순히 자의적(arbitrary)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며, 둘의 관계는 필 연적(necessary)일 수 있다.16)
벤야민(W. Benjamin)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을 본다.
“소리로 말한 것과 의미된 것 사이의 결합뿐만 아니라 글로 씌어 진 것과 의미된 것 사이의 결합, 그리고 글로 씌어진 것과 소리로 말한 것 사이의 결합도 이루어내는 것이 비감각적 유사성”17)이다.
16) 소쉬르(F. Saussure)의 입장에서 기표와 기의의 필연적 관계를 논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기호의 자의성’은 소쉬르 언어학에서 일반 원리의 ‘제1 원칙’ 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필연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은 일종의 ‘규약’이다. 심지어 기표와 기의의 필연적 관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의성어조차도 예외는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성어는 그 수효가 극소수일 뿐만 아니라, 그 선택도 이미 어느 정도 자의적인바, 이는 이들이 어떤 소리들을 비슷하게, 그러니까 벌써 반쯤은 규약에 따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 반언어학 강의, 최승언 역, 민음사, 1990, 87쪽)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 대한 소쉬르 의 입장은 벤야민의 언어철학적 입장과는 상반된다고 볼 수 있다.
17)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 자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10, 215쪽.
벤야민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세계(자연)와 유사한 것을 모방하고 생산해내는 최 고의 능력을 지닌 존재였으나, 이런 미메시스적 능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쇠퇴한다.
다만 벤야민은 “예전에 투시력(Hellsicht)의 토대였 던 미메시스 능력은 수천 년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언어와 문자 속으로 옮아갔고, 이 언어와 문자 속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의 완전한 서 고를 만들게 되었다”고 가정한 후, “언어는 미메시스 능력의 최고의 사 용 단계를 나타내고, 그 안으로 이전에 유사성을 지각하는 능력들이 남 김없이 들어간 매체가 되었을 것”18)이라고 말한다.
미메시스적인 것이 언어에서 자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메시스적인 것은 ‘기호적인 것(전달자)’을 통해 드러 날 수밖에 없다.
“언어의 모든 미메시스적인 것은 흡사 불꽃이 그런 것 처럼 일종의 전달자에게서만 현상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데, 이 전달자 가 기호적인 것”19)이다.
18) 발터 벤야민, 「유사성론」,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10, 206쪽.
19)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 자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10, 215쪽.
그렇기에 미메시스적인 것은 기호적인 것 속에 서 ‘섬광’처럼 번득이며 지나간다.
그것은 흑산에서의 ‘언문으로 우는 울음’처럼 어느 순간 실재를 담아내는 것처럼 ‘보이는(번득이는)’ 언어, 기표와 기의가 ‘필연적’인 관계로 결합한 언어일 수 있다.
흑산에서 기표와 기의의 일치 가능성, 실재에 접근하는 언어의 가 능성이 모색되고 있다는 것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마노리(馬路利)는 평안도 정주 역참의 마부였다.
공무로 오가는 지방관 들의 고삐를 잡았고 풀을 베어서 말을 먹이고 씻기고 빗기고 이를 잡아주었 다.
마노리가 다가오면 마구간의 말들은 대가리를 내밀고 콧바람을 불었 다. 마노리는 얼굴이 길고 큰눈이 깊어서 말상이었다. 큰키에 뼈마디가 굵 었고 허리가 구부정해서, 네손발로 엎드리면 말처럼 보였다. 말을 끌고 길 을 걸어간다고 해서, 동네노인들이 그의 이름을 마노리라고 지어주었다. 마노리는 그 이름이 싫지 않았다.
(중략)
마노리는 길걷기가 단잠처럼 편안 했다. 마노리에게 걸음걸이는 힘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마노리는 숨을 쉬 듯이 걸었다. 말 탄 사람이 지치고 말이 주저앉는 저녁 무렵에도 고삐를 쥐 고 걷는 마노리는 힘이 남아 있었다.
(중략)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을 마노리는 길에서 알았다. (38∼41쪽)
마노리는 이름 그대로 ‘말의 길을 아는’ 자이다. 그의 ‘이름’은 마노리 라는 인간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황사영이 마노리를 처음 만나 는 장면에서 부각되는 것도 기표와 기의의 필연적 관련성이다.
“황사영 의 눈에 마노리는 말의 골격을 갖춘 인간처럼 보”인다. 마노리는 “인간 과 말의 구별을 넘어서는 강렬한 생명”이며, “콧구멍을 벌름거려서 십여 리 밖의 물과 먹이풀의 냄새를 맡는 말의 힘을”(165쪽)품어낸다.
흑산에서 기표와 기의, 말과 사물, 언어와 실재가 필연적으로 결합 할 가능성은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모색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글쓰기’의 문제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사안이 된다.
작가가 흑산 에서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상적인 글, 즉 실재에 최대한 다가갈 수 있는 언어(글)는 무엇인가로 나아간다.
북경에서 반입된 기하원본이라는 서양 수리서를 정약전은 약종에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두 개의 점을 잇는 직선은 유일무이하다. 직선 밖 의 한 점을 지나서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유일무이하다.”
정약종은 이 단 순하고 명료한 언어에 기뻐했다.
언어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감추어진 모습이었다. (200∼201쪽)
정약전의 회상 장면에 나오는 위의 내용은 흑산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는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하원본에 나오 는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야말로, “존재하는 것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는 ‘실재’에 가까운 언어이다.
그렇기에 정약종은 이 “단순명료한 발견들”에서 “실체를 본 자의 확신”(201쪽)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맥 락에서 정약전은
“섬의 계곡에 참게가 있다. 내 고향 두물머리의 강가에 서도 볼 수 있었다. 다리에 털이 있다. 가을에 강물을 따라서 내려갔다 가 봄이 오면 거슬러 올라와서 논두렁에 새끼를 깐다.”(131쪽)
와 같은 ‘참게’에 대한 글을 써놓고는 이 글을 “난생처음 쓰는 글처럼” 느끼며, “쉬운 글”이면서 “글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가까”(130∼131쪽)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소설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선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배제’한다.
정조 사후의 혼란한 시기, 신유박해의 참상 속에서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정조 치세 기간 승승장 구하던 정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사학죄인으로 몰린 정약종과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목숨을 잃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의 뜻을 밝 혔음에도 오지로 귀양을 가게 된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죽어간 정약 종의 삶에, 혹은 배교 후 ‘현실’의 삶을 택한 정약용에 초점을 맞추어 소 설이 ‘생산’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흑산은 –수많은 인물 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등장함에도- 결국 정약전의 흑산도 행으 로 시작해 정약전이 흑산도에 남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그리고 흑산도 귀양살이의 중심에 글쓰기 행위로서의 자산어보 집필이 있다.
말하자면 정약전이 흑산에서 하는 글쓰기는 작가가 ‘선택’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 핵심 사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전은 물고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물고기가 사는 꼴을 적은 글”이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337쪽)이기를 바란 다.
정약전이 의미를 두는 언어는 결국 단순명료한 언어, 자연에 가까운 언어, 경험에 입각한 언어이며 이것은 ‘실재’를 담는 언어의 문제와 연결 된다.
흑산에서 모색되고 있는 것은 현실의 지배적인 언어와 대비되는 ‘다른 언어’의 가능성이다.
그 다른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일치, 말과 사 물의 일치를 ‘꿈꾸는’ 언어이고 실재에 가까워지는 ‘현실’ 너머의 언어이 다.
소설에서 그러한 언어의 가능성은 백성들의 의성어를 닮은 언어, 기 하원본의 단순명료한 언어, 자산어보의 자연에 근접한 언어 등으로 표현된다.
형식적으로는 단순명료하면서, 내용적으로는 개인의 경험에 입각하여 최대한 대상(자연)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언어야말로 소설에 서 긍정되는 ‘실재’에 접근하는 언어다.
Ⅳ. 경험의 물신화 혹은 이론의 부정
흑산에서 실재에 다가가고자 하는 언어의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음 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볼 것은 이러한 ‘모색’에 내재된 경 험의 물신화 문제, 이론의 부정과 관련된 문제다.
소설에서는 개인의 경 험을 통한 세계 이해, 개인 경험의 언어화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경험을 투명하게 언어화하는 것이 곧 실재에 다 가가는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 의 경험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이론적인 것이 거부되고 주관적 경 험만이 중시되는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먼저 흑산에서 ‘경험’을 통한 ‘세계 이해’라는 관점이 지속적으로 드 러나며, 이러한 시각이 소설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창대는 정약전이 물고 기에 대한 책을 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창대를 처음 만났을 때 정약전은 창대에게서 조카사위 황사영의 모습을 본다.
“사람 은 피가 섞이지 않아도 닮을 수가 있”다는 것, “맑음의 바탕은 같은 것”(112∼113쪽)이라는 사실을 정약전은 깨닫는다.
정약전의 시선 속에 서 창대는 시종일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창대가 ‘경험을 통해 아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창대는 “섬에서 태 어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고요히 들여다보아서 사물의 속을 아는 자”(185쪽)이다.
창대가 ‘사물의 속을 아는 자’일 수 있는 이유 는 책을 통해 이론을 습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고요히 들여다보면서 ‘관찰’하고 ‘경험’하는 태도와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방점은 이 론의 습득이 아닌 창대의 ‘경험’과 ‘지각’에 찍혀 있다.
정약전이 물고기 가 어떤 냄새를 맡느냐고 질문했을 때 창대는 “물고기가 맡은 냄새를 사람이 맡은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요.”(342쪽)라고 답한다.
경 험을 중시하는 자에게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정약현과 그의 사위 황사영에 대한 서술에서도 ‘경험’을 통한 ‘자연(세 계)’ 이해가 강조된다.
정약현은 어린 진사 사위 황사영이 “경서가 아니 라 사물에 접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득의 인간”(65쪽)이기를 원하며, 황 사영은 신과 세계의 섭리를 깨닫는 순간을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이해했고, 몸으로 받”(70쪽)는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소설에서 줄곧 ‘맑고 순수한’ 인물로 표현되는 황사영은 백지 (tabula rasa) 상태의 인간이 자연(세계, 신)을 경험함으로써 ‘자득’의 인 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 험에 그 바탕을 가지며, 모든 지식은 이 경험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생겨 난다.”20)는 경험주의의 철칙은 황사영에게도 적용된다.
정약현이 황사 영을 향해 “자네가 이 마을 강을 알아볼 줄 내 알았네. 마음이 깨어 있지 않으면 경서가 다 쓰레기일세.”(68쪽)라고 말할 때 강조되는 것은 외부 사물, 경험, 마음의 작용이다.
“감각 대상으로서 외부의 물질적 사물과 내성 대상으로서 내부의 우리 마음의 작용, 이것만이 우리의 모든 관념 이 시작되는 기원”21)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이론적, 실천적 원리(본유관념) 같은 것은 경험주의자에게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외부 사물을 통한 경험과 지성에 영향을 주는 마음의 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20) 존 로크, 인간지성론 1, 추영현 역, 동서문화사, 2017, 114쪽.
21) 존 로크, 인간지성론 1, 추영현 역, 동서문화사, 2017, 115쪽.
흑산에서 긍정되는 것도 이러한 경험주의다.
흑산의 ‘종교’ 문제 역시 경험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황사영이나 정약종에게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 것과 신의 섭리(존재)를 깨닫는 것은 다르지 않다.
종교적 체험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 지만, 개인 자체의 입장에서 이는 증명할 수 있는 일이고 분명한 ‘경험’ 일 수 있다.
결국 황사영은 “말과 글로 엮인 생각의 구조를 버(리고), 말 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인의예지를 떠”나지만, 세상(자연)이 경험을 통해 주는 깨달음이 “천주의 증명이며, 그 증명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드러 나는 것이 천주의 권능”(92∼93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산과 강에서 두루 천주를 느”낀다.
흑산에서 이처럼 세상을 통한 경험이 강조되면서, ‘책’과 ‘경서’ 등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된다.
정약전, 창대, 정약현, 황사영 등에게 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서’는 인간이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 을 주기보다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매를 맞고 고통을 경험하는 순간처럼 어쩌면 인간의 생사와 관련된 중요한 일에서 책이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학에도 근사록에도 매의 고통은 나와 있지 않”(12쪽)다.
이런 맥락에서 정약전이 물고기에 대한 책을 쓰고자 할 때 도 ‘이론적’인 것은 ‘자연의 본모습’을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정약전이 참게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난생처음 쓰는 글인 것 처럼 느끼는 이유는, 이 ‘쉬운 글’이야말로 이론적인 것을 배제하고 철저 하게 경험에 입각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언어가 도달해야 할 지향점이 제시되면서 경험은 물신화되 고 이론은 부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약전의 글쓰기는 단지 정약전 개인이 추구하는 글쓰기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흑산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 모두 경험을 중시하면서, 이러한 경험 이 깨달음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경험을 담은 언어 가 자연(세상)과 닮은 언어이기를 바라면서 실재를 상상하고 ‘현실’과불화한다.
말하자면 황사영이나 정약현 등은 종교적 삶이든 자연을 통 해 배우는 삶이든, 삶에서 ‘정약전의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앞서 ‘고통’의 문제에서 언급한 것처 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한 경험의 문제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축 소시킬 우려가 있다.
아울러 개인적 경험만을 중시할 경우 그러한 경험 이 가져올 오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감각은 언제나 오류에 빠질 수 있으며, 사물에 대한 지각과 기억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흑산에도 이러한 경험주의의 문제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경험의 물신화 문제와 관련하여 흑산」에서 이론을 배제한 글쓰기, 즉 경험을 통한 언어화(글쓰기)가 마치 투명한 과정처럼 서술된다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흑산의 논리대로라면 정약전이나 창대처럼 사물을 들여 다보고 경험하면 사물을 닮은 글, 실재에 다가가는 글을 ‘쉽고’, ‘단순명 료하게’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백성’들의 통곡과 울음 처럼 고통스러운 체험은 의성어를 닮은 언어 표현과 곧바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경험을 자연에 가깝게 언어화하는 과정 이 투명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경험의 언어화를 ‘누 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고통, 실 재, 언어 등 흑산의 주요 테마와 연결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우선 경험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에 어떤 형태로든 ‘이론적’ 작업이 개입되어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언어화 (글쓰기)라는 실천 속에는 이론적 작업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이는 ‘목적론적 정립’의 문제와 연결된다.
마르크스(K. Marx)는 인 간의 노동을 말하면서 왜 인간의 노동이 거미와 꿀벌의 작업과 다른지 설명한다.
“거미는 직물업자의 작업과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고, 또 꿀벌 은 자신의 집을 지음으로써 수많은 인간 건축가를 무색하게 만”들지만, 사전에 미리 그것을 자신의 머릿속 에서 짓고 있”기 때문이다.22)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동과정이 끝날 때 에는, 처음에 이미 노동자의 표상 속에, 따라서 이미 관념적으로 존재하 고 있던 결과가 나온다.”23)
즉 경험과 그것의 언어화 사이에는 어떤 형 태로든 이론적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사물을 닮은 글을 쓰려고 해도 이미 거기에는 ‘사회적 존재’로 서의 인간만이 갖는 목적론적 정립 과정이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목적론적 정립’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관념’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루카치(G. Lukács) 식으 로 보자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현실에 ‘규정’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유기적 자 연과 –생물학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같으면서도- 다른 이유는 인간은 ‘목 적론적 정립’과 그것의 현실화를 통해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데 있 다.
인간의 의식 행위(목적론적 정립)는 현실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 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루카치는 목적론적 정립이 “사회적 존재를 모든 자연존재와 구별시키는 특별한 근본범주”24)라고 강조하는데,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목적론적 정립의 행위는 실질적으로 현실화됨으로써만 참 된 목적론적 행위가 된다.”25)는 사실이다.
목적론적 행위가 ‘실질적으로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수하게 심리적 상태, 표상으로 머물며, 실질적 현실과 기껏해야 모사의 관계만 가질 뿐인 소망”26)이 될 뿐이다.
22) 칼 마르크스, 자본 Ⅰ-1, 김영민 역, 이론과 실천, 1997, 228쪽.
23) 칼 마르크스, 자본 Ⅰ-1, 김영민 역, 이론과 실천, 1997, 228쪽.
24) 게오르그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4, 이종철·정대성 역, 아카넷, 2018, 29쪽.
25) 게오르그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4, 이종철·정대성 역, 아카넷, 2018, 10쪽.
26) 게오르그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4, 이종철·정대성 역, 아카넷, 2018, 10쪽.
왜곡되지 않은 경험, 섬세한 지각을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한들 이것이 곧 사물을 닮은 글로 생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에 다가가는 글을 쓴다고 하는 것에는 오히려 대단히 복잡한 이론적 작업, 목적론적 정립의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자산어보의 글쓰기 과정이 그러하 고 나아가 흑산이라는 소설이 ‘생산’되는 과정이 그러하다.
경험을 통 해 자연을 닮은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실은 목적론적 정립 이라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배제하고는 설명될 수 도, 수행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경험의 언어화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두 번째 문제 역 시 논의가 필요하다.
소설에서 ‘사학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받는 개인적 고통은 결국 고문 끝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황사영이나 정약종이나 오동희나 강사녀나 김개동 등 모두에게 별 차이가 없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형벌(고통)은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을 차별하지 않 고 가해지는 것으로 소설에 묘사된다.
그렇다고 현실을 지배하는 계급 성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학죄인들’ 중에도 양반이 있고 천 민이 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목소리, 문자)라도 가지지만, 그러한 언어조차 갖지 못한 ‘목소리’ 없는 사학죄인도 부지기수일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흑산에서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고 ‘현실 언어의 세계 너머’를 꿈꾸는 이들은 모두 황사영이나 정약종 나아가 정약전과 같은 ‘지식인 양반’들이다.
사물의 세계를 고요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글로 옮길 재주도 있지만 개인의 경 험을 자산어보라는 책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창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약전이다.
흑산에서는 이러한 계급성의 문제가 ‘사학죄인’에게 가해지는 ‘전반 적인’ 고통이라는 맥락 속에 숨어 이야기되지 않는다.
개인의 경험을 ‘글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자를 자유 롭게 읽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더군다나 언문이 아닌 한자를 활용하여 인간의 경험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자산어보(玆山魚譜)는 한자(漢字)로 쓰였고, 한자는 어디까지나 양반 의 언어, 특권층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27)
27)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 사회에서 양반과 중인 대부분은 한자와 한글을 모두 쓸 수 있는 이중 문해자였고, 평민은 50% 이상, 천민도 적지 않은 비율로 한글(언문) 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종배, 「조선 후기의 계층별 문해 인구의 규모와 문해율 추정 방법에 대한 시론적 고찰」, 한국교육사학 제46권 제1호, 한국 교육사학회, 2024, 46-47쪽) 조선 후기 평민과 천민의 문해율이 높다는 것은 일반적 인 예상을 뛰어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언문을 어느 정도라도 안다는 것과 자신의 경험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가 된다.
여기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앞서 실재에 가까운 언어라고 말한 ‘백성’들이 쓴 ‘문장이 아니라 통곡’, ‘언문으로 우는 울음’ 과 같은 것들이다.
‘문장이 아니라 통곡’으로 이야기되는 관찰사 앞으로 보내는 ‘백성’들의 소장을 쓴 사람은 실은 ‘서당 접장’이다.
또한 ‘언문으 로 우는 울음’으로 표현되는 기도문을 쓴 이는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 다.
‘백성’들의 울음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로 경험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서당 접장’이나 ‘오동희’와 같은 특별한 한 인간이다.
실재 에 가깝게 경험을 언어화하는 일은 ‘백성’이라고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특수한 개인들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흑산에서는 이처럼 경험을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결국 특수한 개 인의 몫, 나아가 지식인 양반의 일이라는 것이 은폐된 방식으로 드러난 다.
소설에서 개인의 투명한 경험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 은 그렇기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의미 있는 행위면서도, 그 자체에 모 순을 내포한 작업임이 ‘동시에’ 드러난다.
Ⅴ. 맺음말
흑산은 인간 개인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하는 소설이다.
흑산에서는 한 편으로 고통이 언어화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 많은 인물들의 고통이 재현된다.
결국 개인적 고통을 ‘언어화할 수 없음 에도 언어화’하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소설에 드러나는 셈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고통, 실재적인 차원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에도, 최대한 그러한 고통 내지 실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방법)는 어떤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소설에서는 대비의 권 력 언어와 상반되는 언어의 형태를 통해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의 가능 성이 모색된다.
그리고 이때 긍정적으로 이야기되는 언어는 ‘문장이 아 니라 통곡’, ‘언문으로 우는 울음’ 등으로 표현된 ‘백성’들의 언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언어, 기하원본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 정약전의 자연에 가까운 언어와 같은 것들이다.
이를 종합하면 개인의 경험에 입 각하여 최대한 대상(자연, 세계)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언어야말로 ‘실재’ 에 근접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재에 가까운 언어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은 물 신화되고, 이론은 부정된다.
소설에서 세계의 본모습에 다가가는 언어 는, 인간 경험의 투명한 표현(실천)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서술 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철저한 경험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험의 언어 화를 통한 실재에 다가가기’가 왜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지도 드러난다.
경험은 투명하게 언어화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형태로 든 언어화(글쓰기)는 철저하게 목적론적 정립을 통한 ‘이론적’ 작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들의 의성어에 가까운 언어, 기하원 본의 언어, 정약전의 언어 등을 모두 ‘경험에 입각한 사물(실재)에 가까운 언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동일한 의미로 일반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문제에 내재되어 있는 ‘이론적’ 작업의 문제, 계급성의 문제, 특수한 개인의 문제 등 수많은 ‘차 이’와 개별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에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도구)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문제도 피해 갈 수 없다.
소설에서 ‘백성’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은 대부분 누군가가 ‘대신’ 말한 것이다.
독 자는 그 ‘대신’ 말해진 언어 속에서 수많은 백성들의 진짜 목소리(고통) 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흑산에서는 이처럼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이 드러 난다.
작가는 이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이야 기를 만든다.
결국 작가는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언어라는 도구 로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와 맞설 수밖에 없다.
흑산의 작가는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를 통해 ‘현실’의 언어 너머를 꿈꾸면서 세계와 맞선다.
‘경험의 언어화를 통해 실재에 다가가기’가 그 자체로 모순을 내장하고 있음을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언어와 맞서는 싸움의 의미가 퇴색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언어를 상상하면서 ‘현실’의 지배적인 언어를 바꾸는 일은, 곧 세계를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 이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2. 논문과 단행본
김주언, 「김훈 소설에서 바다의 의미- 흑산을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제18권 제2호, 한국문학과 종교학회, 2013, 43-63쪽. 박종배, 「조선 후기 계층별 문해 인구의 규모와 문해율 추정 방법에 대한 시론적 고찰」, 한국교육사학 제46권 제1호, 한국교육사학회, 2024, 27-51쪽. 변주승,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한국사상사학 제16권, 한국사상사학회, 2001, 91-116쪽. 우현주, 「유토피아 공간의 (불)가능성: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제40 권,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3, 197-219쪽. 윤인선, 「조선 후기 천주교 배교에 관한 재현적 글쓰기 연구-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기호학연구 제54권, 한국기호학회, 2018, 147-175쪽. 이근세, 「이념의 문제와 글쓰기 전략-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 우리어문연구 제49 권, 우리어문학회, 2014, 483-511쪽. 정경화, 「한일 천주교 박해의 특징과 인간의 선택 문제에 관한 캐릭터별 양상- 김훈 흑 산과 엔도 슈사쿠 침묵을 중심으로」, 한국문화기술 제36권,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24, 3-23쪽. 게오르크 루카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4, 이종철·정대성 역, 아카넷, 2018. 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 출판 길, 2010. 아서 클라인만·비나 다스 외, 사회적 고통, 안종설 역, 그린비, 2002.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역, 오월의 봄, 2018. 존 로크, 인간지성론 1, 추영현 역, 동서문화사, 2017. 칼 마르크스, 자본 Ⅰ-1, 김영민 역, 이론과 실천, 1997.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최승언 역, 민음사, 1990.
❚국문요약
실재에 접근하는 언어, 그 가능성과 한계 -김훈의 흑산을 중심으로김원규 이 글은 김훈의 흑산에 드러나는 ‘언어’의 의미를 ‘실재’와 관련하여 분 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소설에 나오는 대비되는 두 언어, 즉 권 력자의 공허한 언어와 억압받는 자들의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를 중심으 로, 소설에 드러나는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이 글에서는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언어를 분석한다. 소설에서는 인간의 개인적 고통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식 으로 이야기되면서도, 동시에 고통은 언어를 통해 재현된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는 아이러니,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숙명이 여기에 드러나는 셈이다. 흑산에서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는 백성들의 고통을 표현한 경험의 언 어로 나타난다. 이 언어는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는 언어로, 정약전의 ‘경 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와도 연결된다. 그런데 이처럼 경험을 통한 언어 화, 실재에 다가가는 언어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소설에서는 개인의 경험 을 물신화하고 이론을 부정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 글은 흑산에 드러나는 언어와 실재의 의미에 주목함으로써 소설의 핵심 테마와 관련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인간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문제를 살핌으로써 소설 언어 자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했다는 데에도 연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어 : 언어, 실재, 고통, 아이러니, 경험(주의)
❚Abstract
Language Approaching Reality, Its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Focusing on Kim Hoon’s Heuksan
Kim, Won-kyu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meaning of ‘language’ in Kim Hoon’s Heuksan in relation to ‘reality.’ The focus is on two contrasting forms of language presented in the novel: the empty language of the powerful and the language of the oppressed that approaches reality. Through this, the study examines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language depicted in the novel. To achieve this, the paper first analyzes the language used to represent the suffering of the characters. While the novel suggests that individual human suffering cannot be fully expressed in language, it simultaneously portrays suffering through language. The irony of verbalizing the ineffable is revealed here, along with the fate of the writer who has no choice but to verbalize the ineffable. In Heuksan, the language that approaches reality is expressed as the language of experience, which conveys the suffering of the common people. This language aligns signs with their meanings and is connected to Jeong Yak-jeon’s writing, which is based on his experiences. However, in the process of exploring a language that approaches reality through experience, the novel also raises issues of fetishizing personal experience and rejecting theoretical approaches.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lies in its in-depth analysis of the themes of language and reality as presented in Heuksan. Additionally, by examining the problem of articulating human suffering, the research also contributes to an exploration of both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language in novels.
Key-Words : Language, Reality, Suffering, Irony, Experience(Empiricism)
2024년 9월 8일 접수 2024년 9월 27일 심사 2024년 10월 6일 게재확정
현대문학의 연구 84권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들-기지촌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을 중심으로-/ 권창규.조선大 (0) | 2025.02.13 |
---|---|
드라마 <나의 아저씨>, 상호적 환상 횡단의 가능성/한귀은.경상국립大 (0) | 2025.02.13 |
이선영의 비평론 연구 –포스트 리얼리즘의 선구-/오문석.조선大 (0) | 2025.02.13 |
김사량의 태백산맥이 보이는 친일문학적 성격/박상준.포스텍 (0) | 2025.02.13 |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 -이문구의 관촌수필- /차승기.조선大 (0) | 202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