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말하지 않는 것 -기지촌 성판매생활의 고통
Ⅲ. 말하는 것(1) -미군과의 관계 및 여성들 관계의 역동
Ⅳ. 말하는 것(2) -현재의 일상 속 개성
Ⅴ. 결론
I. 서론
2022년 9월 미군 기지촌 성판매여성에 대한 국가 배상을 인정하는 대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2014년 117명의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 상청구소송을 시작한 지 8년 만이었다.
대법원은 국가가 기지촌을 조성 하고 관리, 운영해왔으며 성매매를 조장, 정당화했다는 책임을 묻고 여 성들의 인권침해를 인정했다.1)
1)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소송 대리인단이 밝 힌 소송의 협력 주체들은 하주희,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을 돌아보며」, 페미니즘연구 제23권 제1호, 한국여성연구소, 2023, 84쪽 참고.
1960,70년대 절정을 맞았던 기지촌 섹스 관광 산업은 외화 획득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추진된 무공해 산업으로, 젊은 하층 계급 여성들이 섹스산업의 자원으로 동원되어 착취된 지 60 여 년 만에 법적 판결이 나온 것이다.
1992년 케네스 리 마클 사건(‘윤금이 사건’)이후 공론화되기 시작한 기 지촌 문제에 대해서 법적 판결이 어렵게 도출될 때까지 당사자 여성들 도 직접 발화해왔다.
대표적으로 2005년 최초의 증언록인 김연자의 에세이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전까지 악을 쓰다가 나왔으며, 2013년에는 본격적인 증언록이라 할 수 있는 김정자의 미군 위안부 기 지촌의 숨겨진 진실이 출간되었다.2)
그리고 본 연구 대상인 영미 지 니 윤선(2020)은 단행본으로는 세 번째로 출간된 것으로 새로운 시도 가 눈에 띄는 구술 증언집이다.3)
책의 제목에는 앞선 기념비적 저작들 처럼 ‘아메리카타운 왕언니’라든가, ‘미군 위안부’처럼 미군 기지촌 성판 매여성들을 명시하지 않고 인터뷰한 여성 세 명의 가명, ‘영미’, ‘지니’, ‘윤선’을 내걸었다.
“양공주, 민족의 딸, 국가폭력 피해자를 넘어서”라는 책의 부제는 선 행 증언집과의 차별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기지촌의 성판매여성들은 변화를 거듭했던 한미관계에서 미군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이 지속되 어온 사실을4) 폭로하는 존재들로, 미군의 위락 공간으로 개발된 기지촌 공식경제뿐만 아니라 비공식경제(‘PX경제’)의 주요 주체들이다.5)
2) 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김정자 증언,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한울, 2013.
3)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저자들은 “구술집”이라 명명하나 본고에서 증언집이라 하는 까닭은 구술생애사와 달리 진실성을 다투는 구술증언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브루스 커밍스, 「조용한, 그러나 끔찍한 한-미 관계 속의 성적 종속」, 그들만의 세상, 산드라 스터드반트·브렌다 스톨츠퍼스 편저, 김윤아 옮김, 잉걸, 2003, 206쪽.
5) 권창규, 「1960,70년대 남한 기지사회의 일상경제」, 현대문학의연구 제81호, 한국문 학연구학회, 2023, 217-260쪽.
여성 들은 다른 성판매여성들과 달리 양공주라 불리며 질시와 폄하를 동시에 받았으며, 민족 차원에서 발견되거나 도덕적 차원에서 필요에 따라 호 명되는 존재였다.
영미 지니 윤선은 양공주에 담긴 사회적 편견이나 민족주의적 한계를 넘어 ‘국가폭력 피해자’라는 진전된 여성주의 발견의 일단에 대해 일정한 비판의식을 지닌다.
기지촌 여성의 말하기는 입법· 사법 운동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오면서 기지촌 여성 전체를 대변해야 한 다든가, 정의로워야 한다든가, 피해자다움에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6)
본 연구는 기지촌 여성 증언사의 맥락에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 의 시도를 주목, 평가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지촌 성매매시장과 시장의 핵심 행위자인 여성들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미군 기지촌에 대한 연구는 군사정치학, 여성학, 사회학, 역사학, 문학·문화 연구 등속의 분야에서 민족주의적 한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며 기지촌 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으나 여성 당사자의 발화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 으로 부족했다.
이나영은 기지촌 여성의 발화에 대해 선구적으로 주목 하고 개별 사례 연구를 진행한 바 있으나, 시장에 출간된 증언집에 대해 서조차 연구 성과는 미흡했다.7)
6)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5쪽(서문). 이하 본문에 서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기함.
7) 이나영, 「기지촌 여성의 경험과 윤리적 재현의 불/가능성」, 여성학논집 제28권 제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1, 79-120쪽. 김연자의 에세이에 대한 연 구는 없으며, 김정자의 증언록에 대한 연구로는 김은경, 권창규가 있다. 김은경, 「미 군 ‘위안부’의 약물 중독과 우울, 그리고 자살」, 역사문제연구 제24권 제2호, 역사 문제연구소, 2018, 129-166쪽; 권창규, 「‘미군 위안부’ 생존자의 역사 쓰기」, 사이間 SAI 제36호,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4, 179-208쪽. 이외 문학 텍스트와 함께 다루 거나 참고한 논의가 있다(차미령, 「여성 서사 속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기억과 재 현」, 인문학연구 제58호,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9, 7-43쪽; 윤수종, 「한국의 위안부」, 뉴래디컬리뷰 제85호, 도서출판b, 2020, 163-215쪽 등).
더욱이 근래 출간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선행 증언집 읽기를 토대로 하여 기지촌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본 증언 집을 평가하고 나아가 기지촌 및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
증언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공동 작업으로 사회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집합적 목소리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8) 특히 여성들의 말하기는 1990년대 들어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가능해진 것으 로, 남성 민족국가의 공식 역사에서 주변화된 역사 쓰기라는 쟁투의 의 미를 지닌다.
일반적인 구술생애사와 달리 구술 증언은 진실성을 주장 하는 정치적 욕망의 서사의 성격을 지니며 책임을 묻는 법적 청원으로 이어진다.9)
90년대 들어 여성주의 생애사 구술이 늘어난 가운데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의 경험이 기록되어 증언을 통해서야 가능했던 대안 역사 쓰기가 선구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다.10)
8)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사회와역사 제60권, 한국사회사학회, 2001, 62쪽 (Beverley 재인용).
9) 김수진, 「트라우마의 재현과 구술사」, 여성학논집 제30권 제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3, 52쪽.
10) 윤택림, 「여성은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여성학논집 제27권 제2호, 이화여자대학 교 한국여성연구원, 2010, 83쪽 참조.
미군 ‘위안부’로 공식 명명되었 던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의 말하기 역시 국민국가의 공식 역사에서 누락 되어야 했던 것으로, 피해 여성의 삶의 경험을 역사화할 사료로서 의미 가 있다.
여성들의 존재가 주로 엘리트에 의해 재현되면서 계급적, 민족 주의적 한계를 지니기 쉬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성 당사자의 발화 에 귀를 기울일 일차적인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구술사 연구의 성과를 참고하고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계승 하여 진행한다.
연구를 진행하는 데는 증언 형식에 주목하여 증언자와 기록자, 나아가 독자의 상호작용을 고려할 것이다. 증언집이 어디까지 나 기록자의 취지에 따라 재현된 증언, 곧 엘리트가 전하는 서발턴의 목 소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할 것이다.
특히 기록자와의 관계에서 여성들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독자는 어떻게 전제 되며 어떻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관계의 역동성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기존에 출간된 기지촌 성판매여성의 증언록 과 자료집은 본 연구를 진행하는 데 기본적인 참고자료로 삼고 기지촌 의 현실에 밀착한 소설문학도 필요에 따라 참조한다.11)
II. 말하지 않는 것 - 기지촌 성판매생활의 고통 생애 이야기
생산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자서전적 서술, 구술 모음 집, 특정 사례 연구로서의 학문적 분석, 인터뷰나 대화 모델 형식의 출 판물이 있다.12)
최초의 증언록인 김연자의 에세이(아메리카타운 왕언 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가 자서전적 서술에 해당한다면, 김정 자의 증언록(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과 영미 지니 윤선 은 대화 모델로 출판된 증언집에 속한다.
10년 넘게 자서전을 준비하면 서 김연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쉽게 왜곡되는 “우리 삶에 대한 얘기를 우리 목소리로 알리는 것”13)에 일차적 의의를 둔 바 있다.
11) 두 증언 자료집을 참고한다. 이하영·후루아시 아야·홍주연·김은주·유인경, 햇 살사회복지회 기획,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I, 햇살사회복지회, 2011; 김정민·유인경·홍주연, 햇살사회복지회 기획,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 IV, 햇살사회복지회, 2013. 소설로는 1990년대 들어 기지촌 문제를 종합적으로 접근 했다는 평가를 받는 안일순의 <뺏벌>(1995), 복거일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1994) 등을 참조한다.
12) 윤택림, 「여성은 스스로 말할 수 있는가」, 여성학논집 제27권 제2호, 이화여자대학 교 한국여성연구원, 2010, 91쪽.
13) 김연자,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256쪽.
본격적인 증 언록을 펴낸 김정자의 경우는 현장 답사를 통한 고통스러운 증언여행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성판매여성의 관점에서 기지촌 성매매 시장의 대안 역사 쓰기를 감행한 바 있다.
증언록 모두 당사자의 구술 증언 투쟁 을 통한 법적 청원을 비롯해 사회적 반향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선행 증언록과 대조적으로 영미 지니 윤선에는 ‘이모, 책 하나 만들 지 않을래요’(20, 209)라는 기록자의 가벼운 제안이 눈에 띈다. 당사자 증언에 대한 책임감이나 역사의식과 같은 진지한 증언 동기는 전제되어 있지 않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증언하겠다는 쪽이 아니라 기록자의 제안에 응하는 형식이며, 이야깃거리도 과거사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터뷰 당시 진행 중이었던 국가 배상 소송에 대해서도 여성들의 의견은 갈린다.
이를테면 윤선은 국가의 책임을 말하지만, 지니는 ‘배상이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14)라는 식이다.
입지전적 운동가나 증언 투쟁가인 김 연자, 김정자와 비교하자면 영미 지니 윤선의 발화 주체는 ‘보통’의 기 지촌 노인들에 가깝다. 이들은 모두 10대 초중반에 기지촌 성판매 생활 을 시작하여 최소 20년 이상 이어왔으나 성판매생활을 청산하는 결정적 전기가 없이 나이가 들면서 시장에서 퇴출된 후 기지촌 클럽에서 서빙 일을 이어왔던 다수의 기지촌 여성 유형에 속한다.
증언이 기록, 전달되는 맥락에는 기록자와 증언자, 독자가 이루는 역 동적인 관계가 있다.
기록자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면담을 계획, 실 시하고 편집하며, 증언자는 어디까지나 기록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화하 며, 기록자와 증언자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독자를 전제한다.
영미 지 니 윤선에는 증언자들의 이력 소개가 없이 기록자의 이력만 제시돼 있 어 독자들이 선입견을 가질만한 여지를 없애고자 하는 의도가 읽힌다.
여성들과 기록자의 대화 흐름은 산만하며, 대화의 편집 방식도 통일되 어 있지 않으므로 여성들의 이력을 파악하고 대화 내용을 따라가는 것 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넘겨진다.
14)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204쪽.
영미, 지니, 윤선은 모두 경기도 평택 안정리에 거주 중인 전직 기지촌 여성들로 연령은 70대로 추정된다.
인류학, 법학 전공의 연구자 및 활동가 2인과 영상작가 1인으로 구성된 기록자들은 평택의 기지촌여성지원단체인 햇살사회복지회에서 여성들 을 만났다.15)
증언집 서문에는 기획 취지가 밝혀져 있다.
기록자들은 입법·사법 운동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왔던 기지촌 성판매여성의 말하기를 일정하 게 비판하면서 기지촌의 목소리가 기지촌 여성 전체를 대변하지 않고 도, 피해자답거나 정의롭지 않고도 들릴 수 있다고(9) 말한다.
물론 기 지촌 성매매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의심, 비난이나 오해에 대항하여 피 해 당사자의 말하기를 강조했던 노력이 있었지만(9) 피해자의 말이 절 대적 규범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다.(7)
즉 사회 통념에 대항하 여 여성들의 말하기에 과도한 믿음을 부과했던 경향이 있었다면, 기록 자들은 피해자의 말을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도 아니고 절대적인 규범 도 아닌 그 사이의 자리에 놓”(8)고자 한다.
증언집 각 장의 제목은 ‘영미 의 의견’, ‘지니의 의견’, ‘윤선의 의견’으로 매겨져 있어 피해자의 목소리 를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여러 의견들 중 하나로 제시하고자 하는(9) 취 지를 보여준다.16)
15) 전민주는 증언자 중 1인과 이전에 작업한 적이 있으며, 각 장의 끝에는 전민주의 영상 작업(QR코드)이 첨부돼 있다.
16) 증언집의 면담은 2017,18년에 진행된 것으로, 기지촌 성판매여성에 대한 사법운동이 어렵게 진행되던 동시기에 진행된 면담 작업에 대해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 이경 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21쪽, 193-194쪽.
그렇다면 기획 취지에 따른 면담 형식은 실제로 어떻게 꾸려졌는가. 먼저 일상의 공간에서 면담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일반 적으로 증언 생애사 채록이 특정한 단체나 시설,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 지는데 반해 영미 지니 윤선의 면담 공간은 여성들이 거주하는 집이 다.
구술자와 기록자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쟁점이 ‘누가 누구를 어디서 만나는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17) 본 증언집의 공간적 배경인 일상 공간은 특징적이다.
증언자 세 명 모두가 기지촌의 단칸방에 거주 하고 있으므로, 넓지 않은 여성들의 일상 공간에서 텔레비전을 켜둔 채 로 요구르트를 나눠 먹고, 때로는 잠옷을 나누어 입고 뒹굴거리며 기록 자와 여성은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눈다.18)
영상 작 업을 이유로 카메라가 설치된 제약이 있긴 하지만19) 사적인 공간이 주 는 편안함과 산만함이 있다.
일상 공간에서의 면담이라는 점에 이어서 두 번째로 꼽을만한 특징은 면담 내용이 과거의 기지촌 생활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록자 들은 의도적으로 화제의 자유를 열어둔다.
‘햇살(햇살사회복지회)에서 했던 것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20)
17) 이나영, 「‘과정’으로서의 구술사, 긴장과 도전의 여정」, 한국여성학 제28권 제3호, 한국여성학회, 2012, 195쪽.
18) 잠옷을 나눠 입은 장면이 전민주의 영상작업물에 나온다.
19) 면담 및 영상 촬영 작업은 얼굴과 이름을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여성들과의 합의를 필요로 했다.
20) “우리는, 여태껏 이모한테 했던 그런 질문들 있잖아. 방송국이든, 햇살이든, 아님 변호사들이든, 여하튼, 그 질문과는 또 좀 다를 것 같아.”: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15쪽.
“그러니까 기지촌, 위안부, 이런 게 주 가 되는 게 아니라 이모 말대로, 안정리 어디에 살고 있는 지니…”(118)
를 기대하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록자들은 요청한다.
“이모가 얘길 하면서 불편할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으면, 안 해도 돼요. (웃으며) 깔끔하게, 하기 싫은 얘기는 안 해도 돼, 응.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면 되고.”(116)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했을 때 여성들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며, 하기 싫은 이야기는 어떤 형태로 제시되는가.
이 물음은 증언집을 논의하는 데 핵심이 될 것이다.
햇살사회복지회든 어디든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증언은 과거 성판매 생활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기억은 개인의 고통에 사회적 낙인이 더해져 있으므로 여성들 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그래 서 화제의 자유를 열어둔 증언록 영미 지니 윤선에서 성판매생활을 중심으로 한 과거사는 축약되어 제시되거나 불쑥 삽입되고 감정적 언사 를 통해 처리된다.
구체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짧게 제 시되거나 감정적인 언사로 표현되는 것이다.
(가) “옛날 이야기- 그거 말로 허자면 그거 뭐뭐… 어떻게 다 해? 하나하나 대강대강 찝어서 이야기하는 거지, 사연이야 많지! 자살도 시도 많이 했 고,”(47)
(나) “어떻게 살기는 뭐! 죽지 못허니까 살았지!”(72)
(다) “아이구야, 옛날 생각허면 무섭다 무서워. 끔찍혀.”(198)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 다 하겠느냐’(가)는 영미의 말은 자신의 인생 사를 한바탕 축약본으로 늘어놓은 끝에 덧붙인 것이다.
‘옛날 생각하면 무섭다, 끔찍하다’(다)는 지니의 말 역시 과거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대 신 과거의 경험에 대한 자신의 감정(무섭다, 끔찍하다)을 전한다.
지니 는 지금도 미군과 ‘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머리를 빠개갖고 기억을 지워 주면 좋겠다’(201)고 호소하기도 한다.21)
21) “꿈에도 막 미국 사람하고 허-.(웃음) 거, 꿈을 다 꾼다니까, 내가. 이젠… 싫어. 죽으 라 해도. 그래도 싫지 그런 거는. 가끔 그런 꿈꾸면은, 자지러지게 놀라.”: 이경빈· 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98쪽.
하지만 ‘죽지 못해 살았다’(나)는 판단이나 ‘자살 시도도 많이 했다’.
현재 한동네 살면서 인사 를 잘 하고 다닌다는 옛 포주는 전직 육군 대위로 여성들이 팁 받은 돈을 내놓지 않으면 고무호스로 때렸으며, 지니는 포주 아들의 폭행으로 반신마비가 될뻔한 상 황을 겪은 후 15년간 일했던 포주집에서 나왔으나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가)는 극단적인 과거사가 독자에게 가 닿기는 쉽지 않다.
기지촌 성매 매 시장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없다면 여성들이 토로하는 극단적 생애 사나 격렬한 감정적 표현은 독자에게 이해되기 어렵다.
여성들의 이야 기 속에 축약되거나 생략되어 불충분한 부분, 혹은 머뭇거려진 부분에 대한 지식이 독자에게 추가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미 지니 윤선 은 기존의 증언 및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해서야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 다.
더욱이 윤리적 타락을 경계하거나 민족의 예속 상태를 증명하는 존 재로 여성들이 흔히 호출되는 사회 통념을 감안할 때 여성들의 불충분 한 토로는 전달되기 어렵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전달되려면, 여성들이 성판매 시장으로 편입된 사회경제적 배경부터 시작해서 포주 주인과 여성 노예의 구조와 그 배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기지촌 성판매의 배경을 보면 미군정 초기에는 전쟁과부이거나 고아들이 많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빈곤 가정 출신이거나 부모가 없어서 형제 자매를 책임져야 하거나 병들고 일자리가 없는 부모를 돌봐야 하는 형 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희생자들이거 나 학대하는 남자친구나 남편의 희생자가 많았다.
또한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웨이트리스나 가게 점원과 같은 임시직 노동자를 거친 이들도 많았다.22)
22) 여지연,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임옥희 옮김, 삼인, 2007, 59쪽.
즉 국가 만들기의 전쟁 이후 분단된 한반도에서 상시화되었 던 노동 탄압과 인권 유린의 현실 속에서 기지촌 성판매 여성들은 계급 과 젠더, 섹슈얼리티의 면에서 중층 소외된 존재들이었다.
기지촌 노동 환경에 대한 일정한 지식도 요구된다. 그래야 왜 여성들 이 죽지 못해 살았다거나 끔찍하다고 회고하는지 독자들은 얼마간 공감 할 수 있다.
남한의 기지촌 경제는 아시아 국가들의 섹스관광산업이 확대된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정작 여성들은 전근대 노예 노동을 강 요받았다. 빚을 핵심으로 하는 포주와의 관계에서 감시와 폭행의 인권 유린이 일상화된 노동 현장이 단적인 예다.
포주와의 일대일 관계가 아 니라 포주 주인과 여성 노예의 관계를 뒷받침하고 강화하는 정치경제 적, 사회문화적 배경이 작용했으므로, 여성들에게는 기지촌 성판매 생 활이 벗어날 수 없는 ‘뻘’로 여겨졌다.23)
23) 노예 노동의 구조에 대해서는 권창규, 「‘미군 위안부’ 생존자의 역사 쓰기」, 사이間 SAI 제36호,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4, 179-208쪽; “한 번 발을 디디면 나갈 수 없는 뻘” 안일순, 뺏벌 상, 공간미디어, 1995, 43쪽.
특히 본격적인 증언록을 펴낸 김정자는 1960, 70년대 무공해 관광산업으로 추진된 기지촌 섹스관광의 첨단에서 주어졌던 여성들의 노동 환경이 포주에게 속박된 전근대 노예 구조임을 고통스럽게 증언한 바 있다.
영미 지니 윤선에서 시도된 차 별화된 기획은 그간 어렵게 이루어져온 구술 증언을 비롯한 창작·연구 성과에 빚지고 있다.
III. 말하는 것(1) -미군과의 관계 및 여성들 관계의 역동
화제의 자유가 열려 있으므로 고통스러운 과거가 축약, 생략되는 한 계가 있는 반면, 기지촌 성매매 시장에 대해 새롭게 알려주는 바도 있 다.
당사자 여성의 역사적 증언 투쟁이 성매매산업의 구조를 규명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면, 영미 지니 윤선은 열린 증언 형식을 통해 의도 치 않게 과거의 성판매 생활사에 대해 보강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미군 기지촌의 성판매여성들은 인종과 민족을 비롯해 계급, 젠더와 섹 슈얼리티에서 중층 소외된 양상을 보이지만 전형적 양상 이외에도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지니의 경우 기지촌에 유입된 배경부터 차별성을 보인다.
15세 때부터 파주 포주집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몇 번 집에 붙들려왔 다가 3년 간 미국에서의 결혼생활을 거쳐 40대 중반까지 성판매생활을 했던 지니 이력의 처음에는 미국 영화가 있었다.
지니는 서울의 상층 계 급 출신으로 1960년대 초 10대 초반에 미국 영화에 빠져서 미국 사람이 좋았다. 조조할인가로 15원이면 저녁 때까지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볼 수 있었다.
“뭐 클리프 리차드 나오는 거, 엘비스 프레쓰리 나오는 거, 그런 영화를 많이 보니 너-무 미국 사람이 좋은 거여!”(123)
지니는 친구와 함께 미군 부대 근처에 가보았으며, 삼각지 기지촌의 언니들이 호화로운 불빛 에 ‘헬로’하는 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124)
이미 1930년대 세계 영화의 중 심지로 부상했던 할리우드는 미국식 생활양식을 전시했고 전후 극빈국의 10대 소녀는 영화를 통해 미국의 풍요를 소비하고 욕망했다.
물론 지니의 경우처럼 아메리칸드림으로 기지촌에 유입된 여성들은 흔 치 않다.
기지촌 여성들이 가난하거나 학력이 낮고 성폭력에 노출된 경우 가 절대 다수였다는 통계적 사실은 변함없지만 지니도 한 가지 사례로 포 함된다.
지니의 사연은 그가 상층 계급에 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만,24) 동시에 전후의 절대 빈곤의 시대 상황에서 더욱 강력하게 작동했던 미국 선망을 배경으로 한다.
24)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우리는 자발적이었다(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20쪽)는 지니의 말은 선택지가 있었으나 가출했던 과거에 대한 자가 비판의 성격을 지닌다. 단, 지니도 사회적 억압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한 다: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97쪽.
그러니까 지니 개성의 배경에는 상층 계급 출신이라는 드문 이력이 있지만, 그를 기지촌에 유인했던 강력한 동인이 었던 아메리칸드림은 당대 사회인식을 반영한 집단 소산인 것이다.
지니의 미국 생활 역시 통상적인 미국(인) 인식에서 비껴나 있다.
지니 는 20세 때 이태원 미 팔군 클럽에서 만난 미군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 후 1970년대 초 3년 간 미국에서 생활한 바 있는데, 미국은 영화 속 풍요와 달랐다.
“어… 이게 미국인가 하고. 첫날 가서 얼마나 눈물 흘렸는지 몰라, 달을 쳐다보고 진짜. 화장실도 없고, 샤워(할 데)도 없고.”(117)
자 신이 살았던 서울의 삼층집을 생각하고 도미하기 전에 피엑스에서 빨간 장미가 그려진 실내화를 사갖고 갔는데, 결혼한 인디언 혼혈 미군이 사 는 버지니아는 집이 그냥 흙바닥이어서 실내화가 필요 없더란다.
미군과 결혼해 도미하는 것은 기지촌 여성들의 소망 중 하나였지만, 미국 생활을 경험한 지니는 일갈한다.
“군대 나온 애들 다- 그-지(거지) 여. 하나같이 집안이 다 그지들이여.”(116)
지니의 진단은 틀리지 않다.
1973년 미국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고 많은 유색 인종의 하층 계급이 군인에 지원했으며, 해외 미군기지 중에서도 남한은 열악한 곳 으로 꼽혔다.
이후 1980년대가 되자 기지촌 주민들에게도 미군은 가난 하게 비쳤다.25)
25)“1980년대로 접어들자 마을(기지촌을 가리킴)에선 미군들이 가난해졌다는 얘기가 점점 자주 들렸다.” 복거일,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문학과지성사, 1994, 337쪽. 26) 여지연,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17쪽.
지니는 실제 경험을 통해 미군 환상을 깬 선례에 속한 다.
희망 없는 버지니아의 시골에서 아들을 데리고 도망나온 지니의 경 우는 비극적인 말로가 절대 다수였던, 초기 미국 이민의 주체였던 ‘전쟁 신부’들의 역사26)에 포함된다.
지니에게 미군과 미국이 환상이자 빈곤 속에 존재하는 경우라면, 미 군과의 다른 관계 맺기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영미에게 미군은 흔한 표상으로 경험되지 않았다.
영미에게 미군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가부 장제에 대한 소극적 대항을 보장하는 매개체도 아니고, 신식민적 기지 촌의 약자인 성판매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군 범죄자와 같은 흔한 이미 지도 아니다.
‘먹고살고자 성판매를 했다’는 많은 여성들처럼 영미에게 미군은 생계 수단의 의미였으며, 나아가 그는 미군을 잘 활용했다.
“나는 클럽 가가지고, 한 달 안에 살림 들어가버려! 그렇게 살림을 허자는 놈이 많았어. 먼저돈 주는 놈이 나하고 사는 거야. (웃음)”
(77)
미군도 영미를 고르지만 영미도 미군을 고른다.
클럽에서 미군을 만 나면 지갑에 돈이 있는지 빠르게 파악한 후 홀랑 ‘뱃겨 먹어버린다’는 영미의 경험담은 웃음을 자아낸다.
미군과 동거에 들어가게 되면 처음 에는 한 달 생활비로 100불, 그 다음에는 200불을 받아내고 자신의 돈은 쓰지 않았단다.(77)
영미의 무용담 속에서 부자 나라 미국의 남성 군인 과 극빈국이었던 한국의 가난한 여성 사이에는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 지 않는다.
자신이 지닌 육체자본을 바탕으로 영미는 미군을 이용하여 생계 수단의 효율을 꾀했다.
나아가 그는 동거했어도 정을 주지 않고 살았다.(93)
미군에게 매달렸던 여자들이 많았지만 미군은 ‘언젠가는 갈 애들’이므로 그는 매달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 여자는 돈밖에 모른 다’,(92) ‘냉정하다’, ‘차갑다’(96)는 이야기를 미군들에게 들었다.27)
영미의 무용담은 사회가 부과한 피해자의 전형을 배반한다.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의 위계 속에서 ‘상급’에 속했던 영미는28) 미군에 대한 새 로운 관계 맺기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영미는 미군과 거래, 타협하고 때로는 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해자 미군에게 피 해 입은 한국인 여성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그는 오히려 ‘미군은 안 무섭 다, 한국 남자가 무섭다’(98)고 한다.
영미의 말은 제국의 남성에게 피해 입은 약소국 여성이라는 민족주의적 관념을 단박에 깬다.
미군보다 한 국 남자가 더 무섭다는 말은 지니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로29)여 성들이 겪었던 이곳 사회의 가부장 폭력을 암시한다.
27) 동거 생활 중에 영미의 말을 따라 배운 미군은 “씨발로마!(씨발놈아!)”를 연발한다: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80쪽.
28) 영미는 미군과 결혼한 여성을 제외하고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즉 미군과 동거생활 을 이어가며 포주와의 관계를 별로 맺지 않았던 소수의 경우에 속한다.
29) “미국 사람들 매너 있고 신사답고 한데, 한국 남자들은 좀, 그런 스타일이 아니니 까.”: 이경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170쪽.
윤락녀라고 멸시 하고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가부장의 폭력 속에서 오히려 제국의 남 성 군인에게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30)
여성들의 이야기는 가부장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효과를 거두는데, 이 야기의 동기는 무엇인가.
여성들이 꺼려하는 이야기와 달리 하고픈 이 야기에서는 자기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회가 부과 하고 강요한 피해자의 전형을 배반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보다는 당 당함을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얼마간 담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의 욕망 은 피해자다움에 반기를 든 증언집의 기획 취지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 다.
스스로 당당하고 신나하는 이야기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인식을 유쾌하게 비껴간다.31)
미군과의 관계 양상과 함께 기지촌 경험담을 통해 가장 많이 보강되 는 부분은 바로 여성들 간의 관계다.
영미와 지니, 윤선의 이야기 속에 서 여성들은 피해자 일반으로 묶이지 않는다. 기지촌 성매매 시장에서 성구매자인 미군과의 관계, 매매 중개자이자 고용주인 ‘주인’ 포주와의 관계 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피해자 집단으로 묶이기 쉽지만, 증언집 속 에서 여성들은 한데 묶여있지 않으며, 오히려 위계 및 갈등 관계가 부각 되어 있다.32)
30) 소설 <뺏벌>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어울리는 미군을 가까운 동족으로 느끼는 이유는 “바깥 사회에서 보내는 모멸감과 증오심” 때문이다: 안일순, 뺏벌 하, 공간미디어, 1995, 165쪽.
31) 단,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영미 는 대찬 성격이지만 많은 기지촌 여성들처럼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사기를 당했다.
32) 김정자의 증언록에서 동료 여성들이 ‘언니들’로 호명되며 “내 반(쪽)”, “내 살”로 표현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자 증언,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김현선 엮음, 새움터 기획, 한울, 2013, 232쪽.
클럽에서 일한 경험이 많지 않았던 영미를 제외한 지니와 윤선은 ‘언 니들’의 텃세와 폭력을 공통으로 증언한다.
윤선은 언니들에게 왕따당했던 경험이 무서웠으며, 지니는 어린 나이에 언니들의 미움을 받았다.
‘옛날에는 언니들이 무서웠어, 막 팼다’(169).
십대 초반을 갓 넘긴 어린 나이로 미군에게 인기를 끌다보니까 다른 여성들이 시샘한 것인데, 이 는 어린 여자를 밝히는 ‘남성의 본능’이나 ‘여성의 질투 본능’과 같은 편견 으로 해명될 수 없다.
성을 판매하는 행위는 경력이 필요 없이 어린 나이 와 외모만이 유일한 자원이 되는 소외노동이라는 사실을, 지니의 경험은 일러준다.
경력은 필요 없이 무조건 어리고, ‘예쁜’ 외모만이 강조되는 노동 현장은 어떤 전문성도 노동의 지속가능성도 보장받기 어렵다.
지니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에 혼자 지내다가 ‘펨푸’가 있는 포주집으 로 들어가게 되는데 국제결혼을 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많 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펨푸집은 여성들이 직접 호객하는 대신 미군을 ‘물어오는’ 펨푸들이 있고 여성들은 방에 앉아 미군을 ‘받아내는’ 영업 구조다.
여성들이 호객에 나서지 않아도 됐으므로 펨푸집에는 미성년자 가 많았으며 하루에 20~40명씩이나 미군을 받았다는 회고도 있다.33)
33) 이하영 외,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I, 햇살사회복지회 기획, 98쪽. 지니 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양희숙 할머니의 진술이다.
하 지만 지니에게는 언니들에게 맞지 않고 의식주가 해결돼서 펨푸 있는 포주집이 오히려 편했다.
매일 약에 취해 미군을 받아내면서 팁은 모두 내놓아야 했던 지옥 같은 시절을 두고 지니가 편했다고 회고하는 데는 동료 여성들의 폭력도 이유가 됐다.
“안 좋아 여자들, 억셔.”(170)
라는 지니의 말은 여성들에 대한 일면적 인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사 일반의 이치를 가리킨다.
누구나 갈등하고 부대끼며 사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이며 ‘몸 파는’ 여성 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갈등이 인간사 일반의 충 돌로 해석되기는 부족한 것이, 전후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게 생겼 던,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기지촌 섹스시장은 가난한 여성들이 생존투쟁에 내몰린 현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가씨들’은 너무 많았다.
“아 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다니면 길에 전부 아가씨야.”34)
‘클럽’이나 ‘홀’로 명명됐지만 실제로는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성매매업소는 ‘기생 집’, ‘아가씨집’과 마찬가지로 갈 곳 없는 젊은 여성들이 몰렸던 곳 중 하나였다.
휴전의 상황에서 구조화된 전쟁 상태가 이어지면서 생존만이 유일한 가치가 된 생존주의의 정글에서 인권은 거론될 바가 아니었으 며,35) 염치도, 양심도, 인권도 사치가 되는 곳에서 인종과 계급, 성으로 중층 소외된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호 투쟁을 벌여야 했다.
덧붙여 여성들 간의 갈등이 사회의 위계를 답습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겠다.
‘검은 애 색시하고 백인 애 색시하고 사이가 아 주 안 좋았다’ 36)
는 증언은 인종갈등이 그대로 옮겨진 양상을 보여준다.
여성들의 증언에서 빠지지 않는 것으로 ‘검은 애들이 여자를 많이 팼 다’(99)는 것은 인종 차별을 겪는 미국의 유색 남성이 아시아의 가난한 유색 여성에게 분노를 돌린 결과다.
이 밖에도 국제결혼을 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성판매여성과 기지촌 여성 주민의 갈등이 있었다.37)
국제결혼을 통한 사회적, 심리적 신분 상승에 인종주의 시각이 작동했 다면,38) 성판매여성과 기지촌 여성 주민의 갈등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차별이 있다.
34) 이하영 외,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I, 햇살사회복지회, 2011, 101쪽.
35)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6, 400쪽. 36) 김정민 외,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V, 햇살사회복지회, 2013, 53쪽.
37) 갈등 사례는 김연자,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99쪽 참고.
38) 미군과 결혼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면 사회의 멸시를 단박에 뒤집을 수 있었으므 로 여성들은 ‘여권이 나오기 전에는 창녀로 몰리지만 결혼하면 이제 나는 색시 안 한다’고 으스대며 다녔다: 이하영 외,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I, 햇살사 회복지회, 2011, 82쪽.
기지촌에 사는 주민들이나 성판매여성들이나 하층 계급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성 가부장에 소속되어 있느냐의 여부로 여성들은 구 획되고 분리되었다.39)
가부장제가 여성들 간의 구획과 분리를 필요로 하는 가운데 폭력은 동시에 재생산되었던 것이다.
IV. 말하는 것(2) -현재의 일상 속 개성
여성들의 증언은 예기치 않게 성매매 시장의 미시사를 보강하는 한편 현재의 개성을 단연 부각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안 해도 된다는 자유로운 증언 형식이므로 과거 기지촌 성판매 생활이 아닌 다른 이야 기가 섞여 들어간다. 정식 구술 증언에서는 요구되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을 것들이다.
구술증언이 역사 쓰기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일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유 면담의 형식은 여성들의 현재 모습과 함께 개성을 드러낸다.
영미, 지니, 윤선은 모두 기지촌의 단칸방에 거주하는 기초생활수급 자로 생활하고 있는데 영미는 옆방 거주자와 갈등하면서 괄괄한 성격을 보여준다.
옆방 거주자는 영미 방의 자물쇠를 따고 된장, 간장 등속을 훔쳐간다.
난방도 방음도 원활하지 않은 거주 불량의 상황에서 10년 넘 게 이어진 도둑질에 영미는 쌍욕을 퍼부으며 옆방 거주자와의 전투를 벼른다.40)
39) ‘일반 여성’과 ‘요보호여성’을 구분한 정부의 ‘부녀’정책에 따라 가부장에 소속되지 않은 여성들(하층 계급 여성 노동자들도 포함됨)은 분리, 관리됐다. 황정미, 「개발국 가의 여성정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01, 175쪽.
40) “딸년(옆방 사람을 가리킴)이 그렇게 도둑길(도둑질)한다니까, 딸년이? 애비가 해처 먹다가 뒤지니까 딸년이 그 지랄허고 해먹는 거야. 그 세상에 드-런 손”: 이경빈·이 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21쪽.
과거 미군과의 동거 생활에 대해서도 대찬 협상력을 과시했 던 영미는 ‘욕쟁이 할머니’의 괄괄하고 인정스러운 면모를 보이면서 피 해자의 이미지를 부순다.
영미의 반공 성향은 특징적으로,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어두는 생 활공간에서 면담이 진행되다보니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다. 탈북민을 도둑몰이하고 “하얀 대가리(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가리킴)”는 북한 에 퍼주니까 안 된다는 시각은 ‘태극기부대’ 노인들의 논리를 연상시킨 다.41)
영미가 지닌 냉전의 이분법적 태도는 어릴 적 부모가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했던 과거사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공산당에게 다 죽고 내가 이렇게 됐다’ 42)
는 영미의 인식은 전쟁고아가 된 여자 아이의 현실을 떠 올렸을 때 개연성이 있지만, 기지촌 성판매여성을 둘러싼 중층의 억압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미에게는 공산당이 원흉이므로 공산 당이 모든 고통과 억압의 구조를 가려버린다.
반공이데올로기에 묶여있는 영미의 한계는 전쟁을 겪으며 반공을 생 존의 차원에서 습득한 세대에게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것이나 기지촌 성 판매여성에게 적용된 반공 논리도 있다.
북한과 휴전 중이니 미군이 필 요하고 미군을 ‘위안’하는 성판매여성들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위안부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됐지만, 실제로는 안보와 국방의 외피를 쓴, 하층 계 급 여성들에 대한 섹슈얼리티 차별이었다.
영미가 겪었던 고난의 세월 은 안보와 교환된 섹스동맹43)을 배경으로 한다.
41) ‘자식들 죽어서 보상금 어마어마하게 받았다’(54)는 영미의 비방은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수구 언론과 정치의 행태를 답습한 것이다.
42) “북한 것들은 도덕(도둑)놈의 새끼들이야. 우리 부모도, 북한 것들한테 죽고.”: 이경 빈·이은진·전민주, 영미 지니 윤선, 서해문집, 2020, 62쪽.
43) 캐서린 H.S. 문, 동맹 속의 섹스, 이정주 역, 삼인, 2002, 188쪽 참고.
영미에게 공산당이 원흉이라면 윤선은 반복해서 계모를 탓한다.
계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으며(217, 219, 222)
학대 트라우마를 아직까지 떨치지 못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어렵다고 말한다.(210)
윤선은 과 거와 현재의 원인을 계모에게 모두 귀속시키는 것이다.
윤선의 증언에 는 학대당했던 과거의 경험과 그 경험을 해석하는 현재의 태도로서의 공고한 가족주의가 합쳐져 있다.
남성 가장을 정점으로 하는 정상가족 을 절대화, 신화화하는 가족주의 관점에서 정상가족에서 일탈한 형태는 자기 훼손과 타락의 예정된 운명처럼 여겨지기 쉽다.
성판매여성이었던 윤선은 가족 모델에 기반한 남성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젠더와 섹슈얼리 티의 차별을 겪었음에도 다시 가족주의로 귀속되는 한계를 보이는 것이 다.
계모로부터 학대받았던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는 피해자임을 시위한 다.
어린 시절에 겪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피해로 자신의 현재를 설명 하는 가족주의적 시각은 윤선이 스스로를 용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것이거나 성판매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선 택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모순투성이라는 생의 진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으며 전 직 성판매여성인 윤선과 영미도 단일하게 규정될 수 없다.
탈북민을 죄 다 ‘도덕놈(도둑놈)’으로 모는 영미는 누렁이 두 마리를 반려하며 길고 양이를 챙기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다.
윤선도 모순된 면모를 보인다.
‘마마상’은 전직 성판매여성으로 미군 클럽에서 서빙을 하는 나이든 여 성들을 일컫는데, 마마상 윤선은 클럽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에게 일종의 가해자의 면모를 지닌다.
증언자 셋 중에서 클럽의 서빙 생활을 가장 오랫동안 이어왔던 그는 뉴스에 보도되는 예멘 난민에게는 동정을 표하지만, 이주노동자로 입국해 성판매를 강요당하는 필리핀 여성들에 게는 적대적인 면모를 보인다.
“외국 아가씨들”은 “돈이라면 아주 맥을 못 추는 애들”(250)이고, 클럽 주인은 성판매를 시키지 않는데 필리핀 아가씨들이 몰래 성판매를 하고 나서 돈을 챙기고 입을 다문다.(251)
윤 선은 아동학대 피해자이자 클럽 여성들에게 따돌림당하고 포주의 노예 로 살았던 피해자였지만, 폭력 가해자의 위치를 학습한 것이다.
성판매 생활의 과거를 넘어 클럽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마마상 윤선 의 시각은 온당하지 않다.
기지촌 클럽을 비롯한 다종다기한 성매매사업장에서 일하는 아시아의 이주여성들은 예술 분야 비자로 입국하지만 성착취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기지촌여성지원단체인 두레방은 기지촌 성착취의 역사가 이주여성에게 똑같이 복제되는 현실 을 지적한다.44)
50여 년 전 여성들이 벗어나기 어려웠던 착취 구조가 ‘뻘’로 표현되었던 것이 2000년대 들어서는 “refuge of no escape(벗어날 수 없는 도피처)”45)라는 영어 문구로 교체된 것이다.
나아가 아시아 여 성 이주노동자들을 섹스산업에 수입하는 경제적 제국이자 군사적 식민 지인 이곳에서 한국 여성이 기지촌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피해자의 위치 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46) 윤선의 경우는 잘 보여준다.
증언자 여성들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지니는 과거의 균열 속에 있는 자이면서 중증 약물중독을 극복한 자이고 중독의 이력 탓에 건강 이 위태로워진 사람이다.
그는 전직 성판매여성이자 전직 술집 주인이 고, 미국 가서 잘 사는 누이동생으로 오빠에 의해 윤색된 사람이며, 실 제로는 연하 남성과 20년 이상 동거 중인 여성이다.
지니의 다단한 현재 는 정식 구술증언에는 담길 수 없는 것이지만,47) 새로운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은 일상의 현재를 담았으므로 개성이 부각되고 여성들이 지 닌 복합의 정체성들이 재현돼있다.
44) 앞 문장부터 참고함. 김은진 원장(두레방 상담소), “언니들과 함께 춤을: 대법원 판결 소감”, <두레방> 홈페이지, 2023.1.17. http://durebang.org/?p=8194 ; 백재희, 「외국 여 성의 한국 성산업 유입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0.
45) 김유니, 「대화: 기지촌에 대한 짧은 개인적 에세이」, 두레방 상담 사례집, 두레방, 2009, 31쪽.
46) 정희진, 「“시장-안보, 국가”시대와 한국의 기지촌 성산업」, 두레방 상담 사례집: 아 메리칸 앨리의 여성들, 두레방, 2009, 9-11쪽.
47) 지니의 사연은 햇살사회복지회에서 펴낸 구술증언 자료집에도 수록되어 있지만(구 체적인 사연이 모두 일치함: 이하영 외, 햇살 할머니들의 기억으로 말하기II, 햇살 사회복지회, 2011, 91-100쪽. ‘양희숙 할머니의 이야기’) 가족관계의 얽힘이나 동거 사실은 제시되지 않는다. 증언자로서 지니가 가족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은 이야 기를 자가검열한 결과일 수도 있고, 증언에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로 기록·편집 과 정에서 삭제된 것일 수도 있다.
영미 역시 전직 기지촌 성판매여성 이외에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될 것이다.
영미는 노인빈곤층, 욕쟁이 할머니, 극우반공주의자이면서 길고양이돌보미(‘캣맘’), 강아지 반려인, 그리고 괜찮은 연애 상담자이기도 하다.48)
여성들은 전직 기지촌 성판매여성이라는 하나의 규정이 아니라 복수 의 정체성들로 구성된다.49)
48) 연애 상담자로서의 면모는 기록자의 이별 사연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이다. 윤선 역시 전직 성판매여성 이외에 외로운 할머니, 깔끔한 노인, 규칙적인 생활자, 예의 있는 이웃, 학대와 따돌림의 피해자, 난민 동정자, 필리핀 여성에 우호적이지 않은 ‘마마상’과 같은 복수의 정체성을 지닌다.
49) 이나영, 「기지촌 여성의 경험과 윤리적 재현의 불/가능성」, 여성학논집 제28권 제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1, 111쪽 참고함.
그래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은 기지촌 역사 쓰기의 투쟁에 미달하는 반면 독자로 하여금 기지촌 성판매여성들 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역사투쟁이 어렵게 겨냥한 진실 중 하나 를 설득해낸다.
증언집 속 여성들은 이웃에서 마주칠만한 흔한 노인 군 상과 오버랩된다.
그래서 독자는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의 이야기가 특정 한 부류의 것이 아니라 이전 세대 삶의 궤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역사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V. 결론
본 연구는 2020년에 출간된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의 증언집, 영미 지 니 윤선을 주목, 평가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지촌 성매매시장과 그 핵심 행위자인 여성 주체들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하고자 했다.
성판매여성 들은 국가 차원에서 추진된 기지촌 섹스관광 산업에 동원된 핵심 자원 이자 기지촌 사회경제의 주요 행위자로, 여성 당사자의 말하기는 2000 년대 전후로 이루어져왔다.
여성들의 증언은 인종과 민족뿐만 아니라 계급과 성 차별로 인한 피해를 입증하고자 하는 역사 투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민족 가부장에 대항한다.
증언이 기록, 전달되는 맥락에는 기록자와 증언자, 독자의 역동적인 관계가 작용하는 바, 본 연구는 기존 증언 및 연구 성과 속에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의 역동을 파악하고자 했다.
기록자들은 사법, 입법 운 동에서 전개된 증언의 성과를 일정하게 의식하는 가운데 피해자다움50) 에 반기를 든다.
주체와 피해자로 나뉘는 이분법 하에서는 여성이 행위 자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피해가 곧 피해자화로 연결되며 주체의 대상화, 타자화를 동반한다.51)
여성들 의 고통과 상처가 개인 차원에서 나아가 구조적인 차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52) 입증하는 피해 입증 과정이 피해자를 소외하는 역설을 초래 하기 쉽다는 점에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이 지닌 문제의식은 의미 가 있다.
50) 피해자다움이란 피해자에게 주체성을 제거하여 피해를 문제화하는 과정에서 행위 성이나 협상력을 발휘하지 않는 자를 피해자로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민가영, 「피해 경험의 다층성과 피해자다움의 각본 수용에 관한 연구」, 여성학논집 제35권 제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8, 45쪽.
51)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146쪽.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므로 피해는 어디까지나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이며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23, 24쪽) 증언은 피해의 언어가 아니다. (양현아, 「증언과 역사쓰기」, 사회와역사 제60권, 한국사회사학회, 2001, 92쪽)
52)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 배상 소송을 제기한 주요 논지다: 하주희,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을 돌아보며」, 페미니즘연구 제23권 제1호, 한국여성연구소, 2023, 102쪽.
피해자 규정에 반기를 들면서 여성들의 개별성에 주목했던 기획 취지 는 일상의 개방된 증언 형식과 맞물려있다.
공적 공간이나 시설이 아닌 증언자의 생활공간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화제를 한정하지 않았으므 로 과거의 기지촌 생활뿐만 아니라 과거 경험과 그다지 관계없는 내용을 포함한다.
즉 전직 기지촌 성판매여성이라는 보통명사, 집합명사가 아닌 ‘영미’, ‘지니’, ‘윤선’ 이라는 고유명사의 개체성이 부각되고, 이들이 지닌 한 가지 정체성이 아닌 여러 ‘정체성들’이 재현되는 것이다.
화제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여성들이 하게 되는 이야기와 하기 싫은 이야기 즉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여 본 연구는 여성들이 피해와 맺는 역동적인 관계53)를 논의했다.
53) 개인이 피해와 맺는 관계는 단일하기보다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민가영, 「피해 경험의 다층성과 피해자다움의 각본 수용에 관한 연구」, 여성학논집 제35권 제1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8, 45쪽.
먼저 기지촌 생활사가 보강 되는 측면을 살피면서 본 연구는 여성들이 전하는 미군과의 관계, 동료 여성들의 관계에 주목하여 피해자 일반으로 납작해지지 않는, 단일하지 않은 여성 정체성을 논의하고 역동적인 대응을 살폈다.
증언집에 담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기지촌 생활사를 보강하는 측면에 서 나아가서 진전된 여성주의 연구 및 운동이 쟁취하고자 했던 지점 중 하나를 설득해낸다.
바로 기지촌 여성의 역사가 특별한 부류의 이야기 가 아닌 이전 세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본 증언집은 피해의 역사를 구조화할수록 역설적으로 놓치기 쉬웠던 여성들의 개체 성과 행위성을 드러내면서 전직 기지촌 성판매여성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이웃에서 흔히 접할만한 여성 노인의 유형적 사례로 일상화되는 성과를 거둔다.
단, 여성들의 현재적 일상을 재현하는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의 성 과는 어디까지나 기존 증언 운동의 성과에 기반을 두고 파생될 수 있었 던 결과물임을 지적해둔다.
기존 연구와 운동이 진전시켜온 기지촌 성 매매산업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 위에서 기록자들의 문제의식은 발화될 수 있었다.
기록자뿐만이 아니라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기지촌 여성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사회 통념을 감안한다면, 기지촌 역사 쓰기의 투쟁 대신 일상사 기록에 할애된 본 증언록은 이전 세대를 기록 한 생애 구술사도 아니고, 기지촌 성매매 역사를 알리기에도 부족한 산 만한 이야기로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기지촌 역사에 대한 일정한 이해 를 토대로 해서야 여성들이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고 여성들이 말하 거나 말하지 않는 것을 둘러싼 다층적인 의미망이 열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증언을 둘러싼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물음이 남아있다. 상처와 고통에 대해 말한다는 것,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몸 파는 삶을 돌이키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54)는 고통의 무게뿐만 아니라 다면의 개체성까지 타자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의 영역에 포함 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
54) 김연자의 말이다: 이인미, 「[이 사람] ‘기어다니며’ 훈련받았어요 - <희망나눔센터> 김연자 전도사」, 새가정, 새가정사, 2006, 85쪽.
피해를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다움을 강 요하지 않고 주체의 행위성과 개체성을 놓치지 않는 일은 녹록하지 않 다.
증언자에 대한 이해가 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지배 역사의 연료로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타자와 조우할 수 있는 혁명을 꾀하 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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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과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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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들 -기지촌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을 중심으로권창규 본 연구는 미군 기지촌 역사에 대한 문학·문화연구로, 2020년에 출간된 영미 지니 윤선을 다룬다.
본 연구는 기지촌 증언사의 맥락에서 증언집 영미 지니 윤선을 주목, 평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군 기지촌의 섹스관 광산업과 그 핵심 행위자인 성판매여성들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데 목 적이 있다. 본 연구는 기록자와 증언자, 독자의 역동적인 관계에 주목했으 며, 특히 여성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여 여성들이 피해 와 맺는 역동적인 양상을 논의했다.
기지촌 성판매여성이 피해자 집단으 로 규정되는 데 반기를 든 영미 지니 윤선은 일상의 공간에서 자유 화제 로 대화하는 개방된 증언 형식을 취하면서 기지촌 미시사를 보강하는 예 기치 않은 성과와 더불어 여성들의 개성과 행위성을 설득해낸다.
여성들이 전직 기지촌 성판매여성이라는 집합명사가 아닌 복수의 정체 성으로 재현되면서 증언집은 여성들을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앞선 세대의 유형적 사례로 일상화하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진전된 여성 연구 및 운동 에서 피해의 역사를 구조화할수록 피해자다움이 부각되고 여성의 행위성 을 역설적으로 놓치기 쉬웠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당 증언집의 의미가 있 다.
단, 영미 지니 윤선의 성과는 어디까지나 기지촌 연구 및 증언 운동 이 축적해온 미군 기지촌 섹스산업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 서 파생될 수 있었던 것이며, 독자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핵심어 : 기지촌 섹스산업, 미군, 기지촌 성판매여성, 구술 증언, 고통, 피해자, 정체성
❚Abstract
What Former Sex Workers in US Military Base Towns Say and What Remains Unsaid
Kwon, Chang-gyu
This study is a literary and cultural study on the history of US military camp towns, and deals with Youngmi Genie Yoonseon published in 2020. This study focuses on and evaluates the testimony collection Youngmi Genie Yoonseon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testimonies of camp towns, and ultimately aims to strengthen the understanding of the sex tourism industry in US military camp towns and its key players, the sex workers. This study focuses on the dynamic relationship between the recorder, the witness, and the reader, and discusses the dynamic aspects of women’s relationship with victimization by focusing particularly on what the women say and do not say. Youngmi Genie Yoonseon, which rebels against the definition of camp town sex workers as a group of victims, takes an open testimony format in which conversations are held in free topics in everyday spaces, and achieves the unexpected result of reinforcing the microhistory of camp towns while persuading the individuality and agency of the women. As the women are represented as multiple identities rather than as a collective noun of former camp town sex workers, the testimony collection achieves the effect of normalizing the women as typical cases of the previous generation rather than as special beings. In particular, considering that the more the history of victimization is structured in advanced women’s studies and movements, the more the victimhood is highlighted and women’s agency is paradoxically overlooked, the more meaningful this collection of testimonies is. However, the achievements of Youngmi Genie Yoonseon can only be derived from the structural understanding of the US military camp town sex industry that has been accumulated through camp town studies and testimony movements, and can be conveyed to readers as well.
Key-Words : Camp Town Sex Industry, US Military, Camp Town Sex Workers, Oral Testimony, Suffering, Victims, Identity
2024년 9월 8일 접수 2024년 9월 27일 심사 2024년 10월 6일 게재 확정
현대문학의 연구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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