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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깨달음 담론구성의 첫 관문- ‘본각本覺/참됨/온전함’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 -/ 박태원.울산大

 1- 목 차 -

    1. 깨달음 담론의 의미와 전망 - 통섭通 攝적 깨달음 담론의 구성을 위하여

    2. 깨달음 담론과 본각本覺

    3. ‘참됨/온전함’에 대한 두 가지 사유 방식

    4. ‘참됨/온전함’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사유방식

     5. 󰡔대승기신론󰡕과 원효의 본각

    6. 깨달음 독법의 새로운 모색 

 

1. 깨달음 담론의 의미와 전망

  - 통섭通攝적 깨달음 담론의 구성을 위하여-

 

불교경론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출/재가 학인들에게 ‘깨달음’은 당연 한 궁극 관심사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 문제가, 불교에서는 시작부터, 한국불교에서는 한반도 전래 이래 불교 학인들의 일반적 관심사였을 것 으로 여겨질 것이다.

특히 원효나 지눌, 선어록들을 직접 읽으면서 공부 해 가는 학인들은 ‘깨달음’이 언제나 한국불교의 ‘일반적 관심사’였을 것 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 문제가 한국불교계의 ‘일반적 관심 사’로 등장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한국불교의 거의 모든 시기에 걸쳐 ‘깨달음’은 극히 소수 학인들의 특수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불자들에게 불교는, 통속적 인과응보론에 의한 윤리적 인생관을 수립하 는 종교적 장치이거나, 세속적 욕구와 염원을 성취해 가는 종교적 방식이 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소수의 특수한 관심사였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은 ‘깨달음’이 불교인들의 ‘일반적 관심사’가 되었다.

아직도 전통방식으 로 불교를 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이제는 ‘불교는 깨달아 부 처가 되는 종교’이다.

다만 자신이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뿐, ‘깨 달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정도의 인식은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다.

깨달음이 ‘소수의 특수한 관심사’ 로부터 ‘다수의 일반적 관심사’로 전환된 것은, 길게 잡아야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인식의 극적 반전’이다.

이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 데 에는 성철(1912-1993) 스님의 역할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봉암사 결사의 주도(1947), 백일법문(1967), 󰡔한국불교의 법맥󰡕(1976)과 󰡔선문정로󰡕(1981) 를 통한 돈오점수 비판, 그리고 돈점논쟁의 학문적 검토 착수(1990) 등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한국불교의 일반적 관심사로 부상하게 되 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눌(1158-1210)의 돈오점수 사상에 대한 성철의 강력한 비판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눌의 돈오점수와 성철의 돈오돈수 사이의 차이와 긴장을 어떤 의미로 읽어내고 어떻게 평 가하던지 간에1), 돈오점수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불교계 뿐 아니라 한국 종교와 지성계로 하여금 ‘깨달음 담론’을 주목하게 하였다.

 

     1) 필자는 이 문제를 돈점담론의 체계 속에서 정리한 바 있다. 󰡔돈점 진리담론󰡕(서울: 세창출판사, 2016).

 

성철의 사상 을 ‘깨달음 지상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한국불교계에 불교 본연의 가치와 생명력 및 궁극목표를 ‘깨달음’으로 압축시켜 일반적 관심사로 부 각시킨 것도 그의 ‘깨달음 지상주의’의 공이 컸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철은 그가 마주한 현실과 언어조건 속에서 최선의 역할을 하였고 극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간화선 지상주의’니 ‘깨달음 만능주의’니 하 는 잣대로 성철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 그에 역할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전통적 언어와 방식에 담아내는 돈오와 점수, 간화선, 깨달음, 수행 등에 관한 그의 관점은, 현재적 관심과 조건들을 반영하면서 다양 하게 음미해야 한다.

그에 대한 평가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진행해 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철을 평가할 때는 그가 소화한 언어와 마주한 조건들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공정할 수 있다.

‘간화선 지상주의’나 ‘깨달음 만능주의’라는 비판 잣대를 적용할 때는 특 히 그러하다.

성철의 ‘깨달음 지상주의’와 ‘간화선 지상주의’가 깨달음 담 론의 극단적 유형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성철의 과제였다기보다는 지 금의 학인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반영하고 균형 잡혔으며 보편적 호소력을 갖춘 ‘깨달음 담론’의 필요성, 그 요청에 응하 여 그러한 깨달음 담론을 구성해 갈 수 있는 학문적/현실적 조건들은, 지금 여기의 학인들에게 비로소 주어진 것이며 새로운 시절인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깨달음 담론의 구성’은 적절하고 긴요하며 각별 한 의미를 갖는다.

‘깨달음’이라는 말의 정의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필자는 이 말을 일단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이라 하겠 다.

이때 ‘향상’은 ‘참됨/온전함을 조건으로 삼아 발생하는 이로움의 증가’ 를 의미한다. 2)

 

    2) 필자는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침’」(󰡔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 9서울: 운주사, 2014)이라는 글에서 ‘깨달음의 의미’와 관련한 전반적 생각을 정리한 바 있다. 이 글은 그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가는 것이기도 하다.

 

부적절하거나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수정하거 나 보안할 수 있는, 성찰적 탐구를 위한 잠정적이고 작업가설적 설정이 다.

이러한 정의를 채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이다.

 첫째로, 이러한 정의를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깨달음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을 ‘깨달음’ 이라는 개념으로 묶는다면, ‘더 나은 삶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에 대한 통찰과 제안들의 범주는 다양하며, 따라서 그 범주 유형들의 수만큼 이나 깨달음은 많고도 다양하다.

  둘째로,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통해 ‘깨달음의 다양성’을 포섭하는 동시에, 다양한 깨달음 담론 범주들의 개별적 차이와 특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함이 다.

그리하여 다양한 깨달음 담론 범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이해 하는 길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을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두 길을 동시에 보고자 함이다.

깨달음에 대한 ‘다양성 이해의 길’과 ‘차이 이해의 길’을 동시에 열 때라야, 불교의 깨달음 담론이 불교 고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는 동시에 개방적이고 통섭적通攝的 담론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세상에는 무수한 문제들이 있고, 각 문제들을 발생시킨 조건인과의 계열은 나름대로의 고유성이 있다.

또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해법들 도 나름대로 구성한 조건인과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문제들과 그 해법들에 내재하는 이러한 조건인과 계열의 범주적 차이와 특징을 식 별하기 위해서는, 그 범주적 특징을 한정시킬 수 있는 언어적 장치를 마 련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현상은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인지하 는 연기적 사유방식에 상응하는 언어용법이 된다.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을 깨달음이라 할 때,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해당하는 깨달음이 다양하여 그 깨달음들의 범주적 차이와 특징을 언어 로 지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말 앞에 그 범주 를 한정시켜 주는 조건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예컨대 ‘사회학적 깨달음’ ‘경제학적 깨달음’ ‘정치학적 깨달음’ ‘의학적 깨달음’ ‘과학적 깨달음’이라 는 식이다.

다양한 조건 수식어가 가능하다는 것은 깨달음, 즉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이 다양하고 다층적이라는 현 실을 증언해 준다.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에 대한 통찰과 제 안들이 다양하긴 하지만, 이들이 상호 격리된 차이인 것만은 아니다.

겹 치는 부분과 다른 부분, 공유지대와 비非공유지대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부합한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 담론은 다양한 깨달음 들 각자의 고유성을 충분히 인지하는 동시에, 그 상호 겹침과 상호 작용 의 관계지형도 배제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깨달음’은 불교만의 전유물 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가 깨달음을 언급할 때는 어디까지나 ‘불교 적 깨달음’을 거점 및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불교적 깨달음’을 거론하면서 ‘사회학적 깨달음’이나 ‘정치/경제적 깨달음’ 등을 원칙 없이 뒤섞어 버리거나, 다른 범주로 이전 내지 치환시켜 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할 무지이다.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을 폐쇄적 범주로 취급하면서 다른 깨달음 범주들을 배제하거나, 그들과의 만남과 상호작용을 외면하는 것도, 치유해야 할 무지이다.

불교의 깨달음 담론은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 건들’에 대한 ‘불교적 통찰과 제안에 관한 성찰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깨달음 담론은 ‘불교적 깨달음’의 고유성을 견실하 게 확보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불교적 깨달음의 고유성을 제대로 확 보해 가려면, 여타의 깨달음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며 또 상호작용 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건들’이라는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깨달음들은 상호 통섭적 일 때 서로를 살리고 키워준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불교 구도자들에게 특히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구도의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직면해야 할, 근원적 이고도 궁극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성철 스님이 촉발시킨 돈점논쟁 이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현대 한국불교계의 지속적 화두로 작동하고 있다.

필자가 보건대, 한국사 회에서 체계적이고 풍부한 불교지식이 대중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환경 이 갖추어진 이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크게 네 유형의 담 론거리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현재까지 한국불교계의 깨 달음 담론은 크게 네 가지 담론거리를 산출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선종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지속적 논란거리였던 돈점론頓漸 論이 성철스님의 문제제기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재점화한 ‘돈점 담론’ 3)이 다.

 

    3) 필자의 󰡔돈점 진리담론󰡕(사을: 세창출판사, 2017)은 이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둘째는, ‘깨달음과 세속사회의 접점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과 성찰인데, ‘깨달음의 사회화 담론’이라 부를 수 있겠다.

민중불교론, 참여불교론, 사회참여론, 비판불교론 등이 이 담론 범주에 해당한다.

  셋째는, ‘깨달음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를 묻는 것인데, ‘깨달음의 방법론 담론’이라 불러 보겠다.

참선을 깨달음 의 중요한 방법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非불교적 선정주의’로 비판하거 나 선종의 깨달음관을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말로 비판하는 ‘선禪 비판 담론’, 지적知的 이해가 곧 깨달음이며 또한 깨닫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이해불교론’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넷째는, 깨달음과 연관 된 전통교학들 가운데 비非불교 내지 사이비 불교로 의심할 수 있는 교학 들에 대한 문제제기들인데, ‘정체성 담론’이라 부를 수 있겠다.

‘여래장사상 비非불교론’이 대표적인데, 근대 불교학 이후 이 정체성 담론의 적용 대상은 주로 대승교학과 선종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교학 형성과정에 서 등장한 ‘아비달마의 존재론에 대한 대승의 비판담론’도 이 정체성 담 론의 전형이며, 그 철학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이 네 가지는 별개의 독자적 담론이 아니다.

초점이나 특징의 차이에 도 불구하고, 이들 네 가지 담론은 내면적으로 상호 깊숙이 연관되어 있 다.

어느 하나를 다루다 보면 필연적으로 다른 세 담론들의 영역으로 들 어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네 가지 담론은 서로 꼬여 하나의 줄을 구 성하는 네 가닥 끈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 기 위해서는 다른 세 가지와 상호작용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네 가 지 담론을 다룰 때에는, 각자의 초점이나 내용이 차별화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으로 취급해야 하지만, 내적으로 연관되어있다는 점에서는 언제든 지 다른 담론들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담론을 상호 개방시켜야 한다.

필자가 향후 연작으로 다루어보려는 ‘깨달음 담론의 구성’은, 기존에 부각된 이 네 가지 담론들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는 새로운 초점과 특징을 지닌 새로운 담론 유형도 추가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 볼 것이다.

성찰해 가는 과정에서는 기존의 네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도 있고, 상호 연관되는 영역을 다룰 수도 있다.

모든 유형의 깨달음 담론이 상호작용하면서 깊이를 더 해가고 향상해 가는 ‘통섭적通攝的 깨달음 담론의 구성’ -이것이 필자의 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깨달음 담론의 구성’을 성공시키기 위한 학문적 조건 하나가 있다.

‘불교철학의 형성’이 그것이다.

‘불교에 관한 학적 탐구의 모든 유 형’을 불교학이라 부르기 때문에, 불교학을 구성하는 개별학문 유형은 다 양하다.

교학, 철학, 문학, 역사학, 문헌학, 종교학, 심리학, 고고학, 음악, 미술, 조형예술 등에서의 탐구와 불교가 종합되어 불교학을 구성한다.

특 히 교학은 불교학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교학이 없으면 여타의 탐구가 그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현행 불교학도 교학을 축으 로 다양한 외연을 구성하고 있다, 아예 불교학과 교학이 동의어로 인식되 기도 한다.

하지만 교학 탐구의 방법론과 내용은 이제 자기 진화가 절박 해 보인다.

현재 학인들 사이에서 널리 채택되고 있는 ‘교학 탐구로서의 불교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형성된 역사와 계보, 속성과 장단점, 전망 등 을 본격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새로운 전망을 확보하려는 성찰의 지속적 축적과 담론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는 교학탐 구의 방법론적 제안의 하나로, 필자가 평소 생각해 온 ‘불교철학’의 개념 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해 본다.

불교의 모든 교학은 ‘붓다 법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학들’이다.

‘다양하다’는 것 ‘붓다 법설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뜻이고, ‘해석학’이라는 것은 ‘붓다 법설에 대한 나름의 이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간에서의 해석학은 철저히 ‘지적 이해의 개방적 선택’에 관한 문제이지만, 불교 전 통에서의 해석학이 보여주는 ‘이해의 개방적 선택’은 단지 ‘지적 범주의 성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론이라는 특유의 조건이 가세한다.

불교적 관점으로 볼 때, ‘이해’를 발생시키는 조건은 논리적/이지적 성찰 에 국한되지 않는다.

행위나 마음 국면의 변화와 관련된 경험들도 이해 를 변화시키거나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특히 정학定學으로 분류되는 선禪 수행은 매우 중요한 ‘이해나 관점 발생의 조건’이다.

필자가 ‘교학은 해석학이다’라고 말할 때의 ‘해석학’이라는 말은 이러한 불교적 고유성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붓다 그분의 통찰과 성취가 지닌 문제해결력, 그 사용 가치를 탐구한다.

교학은 우리 이전에 수행해 온 탐구들의 궤적이다.

‘교 학은 해석학이며 다양하다’는 것은 각 교학의 사용가치에 대한 평가 작업 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붓다 법설에 대한 우리의 이해 가 서로 다르고, 그 다른 이해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항상 성찰해야 하는 것처럼, 과거의 서로 다른 교학들에 대해서도 어느 것이 더 좋고 타당한 것인지 평가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런 평가가 가능하려면, 붓다 법설에 대한 평가자 ‘자신의 이해와 관점’이 먼 저 명료해져야 한다.

이때 사용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이해와 관점의 형 성 및 성찰력’은이 삼학三學에 대한 실증적 실존실험이 수반되어야 그 필 요한 수준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교학적 탐구는 ‘가치평가적 태도’를 보여주는가?

대부 분의 경우에 그렇지 않아 보인다.

모든 유형의 교학에 대해 등가치적으 로 접근하여 각 교학의 문헌/언어/이론에 대한 전문소양을 확보하는 것을 교학연구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치중립적 학 문관이 수립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막스 베버 류類의 ‘직업으로 서의 학문’처럼 가치중립을 요구하는 학문관은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조 건들의 산물이고, 이러한 학문관이 불교학을 장악한 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세계/역사를 보던 기독 교 중심의 관점이 지닌 무지가 폭로되자, 다양성과 다원성을 수용하기 위한 가치중립의 태도가 요구되었고, 이러한 문화 상대주의적 개안은 급 기야 ‘다양한 것들은 나름대로 다 맞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확산시켰 다. 이러한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전개는 ‘가치중립’ ‘다양성’ ‘상대주 의’를 함께 묶는 학문관을 수립하여 인문학이나 종교학의 방법론을 장악 하였고, 근대 이후 ‘학문으로서의 불교학’은 그 연장선에서 성립된 것이 다.

현재의 ‘학문 불교학’이 가치중립을 마치 학문의 정도인 것처럼 여기 는 것은, 불교문화권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능동적 성찰의 자생적 산물이 아니다.

불교문화권의 역사적, 학문적 맥락과는 전혀 이질적인 맥락에서 형성된 것을 하등의 자기준거적 성찰과 평가도 없이 받아들여 몸에 걸친 것이다.

이식된 ‘학문 불교학’이 요구하는 방법론과 그 성과가 무가치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중립적 태도가 산출한 문헌학과 언어학, 교학의 탐구 성과는 매우 유용하다.

가치평가를 가급적 유보하려는 ‘학문 불교 학’이 비록 서구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불교를 위해서는 시의적절 한 측면이 있다.

이 ‘학문 불교학’은 전통교학을 ‘다양한 해석학들’로 간 주하여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 성과 역시 매우 유용하다.

다양한 교학들을 각자의 맥락에서 선입견 없이 이 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 불교학’ 의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학문 불교학’ 자신의 속성과 한계를 넘어설 수있는 기반을 구축해 주었다.

가치판단에 소극적인 근대적 ‘학문 불교학’ 의 성과물들로 인해, 오히려 교학에 대한 ‘가치평가적 탐구’를 가능케 하 는 정밀하고 심층적인 조건들이 확보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문 불교학’ 의 언어학/문헌학/교학 탐구 방법론은 여전히 유용하다.

그러나 근대적 ‘학문 불교학’의 방법론과 내용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동시에 절박하다. 새로운 전망과 출구가 마련되어야 ‘학문 불교학’의 유용성도 빛을 발할 수 있다.

필자는 새로운 교학/해석학이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교학들은 각자 이전 교학의 해석학적 성과를 취사선택 하면서 거듭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갔다.

그 결과 붓다 법설을 이해하는 풍요로운 해석학적 자산이 마련되었다.

어느 경우도 이전까지의 교학/해 석학을 완료형으로 간주하지 않는 ‘열린 해석학’을 추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근대 이후 ‘학문 불교학’이 정착되면서, 이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열린 해석학의 숨결이 잦아들어 버린 것 같다.

이제 불교학은 이전 교학들의 체계적 분석과 이해가 본업이 되어 버렸다.

기존 해석학 들의 사용가치를 평가하고 취사선택하며 사용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이해를 추가해 보려는 ‘해석학의 능동적 구성’에 학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문 불교학’이 지닌 가치중립 속성에 수반되는 자연스러 운 현상이기도 하다.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방법론적 원칙으로 삼아 불교를 탐구할 때는,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 된다.

이미 성립한 문헌과 교학 에 대한 가치중립적 이해가 ‘학문 불교학’의 본령이 되고 만다.

그 결과 는 ‘불교의 박물화’이다.

불교의 모든 것은 관람을 위해 전시된 유물이 되고, 학인들은 그 유물의 형성과 양식, 특징을 연구하여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박물관 학예사가 된다.

관람객들은 과거 유물의 화려한 광휘에 감탄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사용가 치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존과 관람의 대상인 유물은 현재의 생활 기물 器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학문 불교학’이 추구하는 가 치중립적 이해는 흡사 박물관의 유물 연구를 닮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현행 ‘학문 불교학’을 ‘박물관 불교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4)

 

     4) 박태원, 「깨달음 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불교평론󰡕 66, 2016) 

 

‘학문 불교학/박물관 불교학’은 과거를 잘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 현재의 사용가치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이해와 설명이 교학의 언어와 논리 범주에 갇히는 경우, 불교학은 학문이라는 명찰을 단 ‘폐쇄적이고 자위적인 언어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현재의 시선을 담은 현재의 언어가 되기 어렵다.

사용가치를 탐구하지 않고 이 해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현재적 관심과 무관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무릇 모든 현재적 관심은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용가치를 확보하려고 할 때라야 과거 문헌과 교 학에 대한 이해는 현재와 접속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용가치를 만들어내 려면 ‘이해’에 그치지 않고 ‘평가’에 나서야만 한다.

가치중립적 태도를 적 극적으로 선호하는 ‘학문 불교학’에서의 평가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꾸 미는 장식품일 수는 있어도 현재와 미래의 구성력이 되기는 어렵다.

‘가 치를 탐구하지 않는 이해’, 혹은 ‘가치평가를 하지 않으려는 이해’가 과연 제대로 된 이해일까?

문제해결의 진리를 탐구하는 담론에서는, 가치평가 와 분리된 이해는 충분하거나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니다.

‘불교에서의 이 해’는 특히 그러하다. 고苦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이해이기 때문에 가치 평가와 무관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가치를 평가하거나 탐 구하지 않으려는 불교학 방법론과 태도에 안주한다면, 불교학 탐구는 현재를 안을 수 없고 현재언어에 접속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붓다와의 새 로운 대화도 불가능하다.

그저 기존의 교학/해석학들이 제시한 이해에 기대어 붓다와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전통 교학/해석학이 그처 럼 완결적일 수 있는 것일까?

이미 정답이라 할 만한 붓다 해석학들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 고르거나 종합하여 잘 이해하기만 하면 것일까?

또 불교학자들은, 어떤 교학이든 그에 대한 문헌/언어/이론의 전문적 소 양만 갖추면 충분한 것일까?

학인으로서의 본분과 역할을 제대로 한 것 일까?

필자가 보기에 현행 불교학은 일종의 해석학적 맴돌이 현상에 빠져 있다.

어느 교학을 연구하든 그 교학의 해석학적 체계와 질서 안에서 맴 돈다.

그 교학의 문헌과 용어, 논리 안에서 뱅뱅 돈다.

언어와 논리의 범 주가 대부분 과거에 갇혀 있다.

그러다보니 비非불교언어권 사람들에게 는 불교학 논문과 저술들이 마치 외계어처럼 생경하다.

교학에 대한 연 구자의 이해를 ‘현재인들의 보편지성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에 담아내 는 경우가 드물다.

전통교학의 논리와 언어 범주를 공유하는 소수의 학 인들이 자신들만의 폐쇄적 언어게임을 벌이고 있다.

게임 밖의 사람들 로서는 도무지 무슨 게임인지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게임에 참여한 선 수들이 구사하는 기량의 수준이, 다시 말해 용어와 이론에 대한 소화력 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기술평가 자체가 어 려운 방식의 게임을 벌이는 경우가 흔하다.

선수 자신이 자신의 기량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아도 굴러가는 게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선수 자신도 자신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어렵다.

한문 텍스트의 용어와 이론을 구사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특히 이런 현상이 빈발한다.

심오한 뜻을 펼치고 있는 듯 보이게 하는 ‘전문 한문용어의 수사학적 배 열’로 글을 채우는 선수들이 자주 목격된다.

그런 글일수록 글쓴이의 이해를 분명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글쓴이 자신은, 자신의 이해가 보편 적 지식언어 지형 속에서 어떤 좌표를 점하는 것인지를 알고나 있는 것 인지 궁금하다. 이런 현상이 방치되고 또 반복될 수 있는 이유는, 구사하는 용어와 이론에 대한 선수 자신의 이해를 면밀히 점검할 수 있는 기회와 방식이, 그 선수들이 펼치는 글쓰기 방식과 언어게임 안에서 적절히 제공되지 않 기 때문이다.

현재 통용되는 ‘학문 불교학’의 논문형 글쓰기 방식에서는, 용어/이론의 이해내용에 대한 점검을 건너뛰어도 얼마든지 논증형식을 구성할 수 있다.

또 용어/이론에 대한 이해 자체가 사실은 막연하거나 타당하지 않거나 정리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위 소지자이고 전공자이니 나도 잘 알고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부실한 상호 인증으 로 자기들만의 언어게임을 유지해 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 다.

필자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하는 말이다.

언어게임의 선수들이 자신의 이해를 소통 가능한 언어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은, 언어와 지식의 권력적 속성에 대한 유혹 때문 일 수도 있다.

언어와 지식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발생지이고 획득 도 구이며 운영수단이다.

그래서 언어와 지식에 진입하는 길이 좁을수록 소 수자들이 독점적 권력 지대를 확보하기가 쉽다.

진입이 어려운 언어와 지식일수록 그 운용자들은 특권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특히 불교학처럼 고전어를 다루어야 하는 학인들에게는 원전 언어의 의미로 진입할 수 있 는 길이 좁을수록 배타적 이익이 보호된다.

구사하는 용어와 이론이 난 해할수록, 명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권위의 이익은 크게 누릴 수 있다.

혹 언어/지식의 이러한 매혹적 권력이, 이해를 분명히 하고 명 확히 표현하여 쉽게 소통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언어와 지식의 역사 속에서는 ‘배타 지향’과 ‘공유 지향’의 두 상이한 태도가 얽혀 있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변해가는 것이 시대의 추세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도 한글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며 선구적이다.

한글만큼 탈脫 권력적인 언어를 찾기는 어렵다.

필자는 한글을 사용하는 인연을 크나큰 복으로 여긴다.

선수들끼리만 공유하는 언어게임이 폐쇄적으로 가동되는 상황에서 는, 전문성과 대중성이 접점 없이 이반되어 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다.

전문성을 확보했다는 학인들은 현재어에 접속할 능력이 없어 학문이 라는 명분으로 자위적 폐쇄성에 빠져들고, 대중성 확보에 성공했다는 학 인들은 현재적 언어와 세련된 응용기술을 보여주지만 그 호소력과 영향 력이 곧 한계에 봉착한다.

전문지성과 대중지성이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를 끊임없이 향상시키는 접속지대의 확보가 절실하다.

전통교학을 형성한 생명력은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성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태도’는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완결시켜 머무르려는 태도로는 역동적 현실에서의 더 좋은 사용가치를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성찰하려는 태도’는 이전의 것을 이해한 후 현재 시점에 서서 새로움을 추가해 보려는, ‘과거의 이해와 현재의 새 로운 구성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성찰’ 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현재어’에 담아내려는 ’해석학적 능동성과 현재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성찰‘이 활기차게 작 동할 때, 교학은 새로움을 추가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전통 교학의 저 풍요로운 다양성은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학문 불교학/박물관 불교학’은 전통교학에 갇혔 을 뿐 아니라 전통교학의 생명력도 상실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 방법론과 태도에서는 더 이상 붓다와의 새로운 만남이 불가능하다.

붓다의 통찰과 성취에 대해, 아직 놓치고 있을지 모르는 지평, 엉뚱하게 읽고 있는 해석학적 오독의 발견과 치유 가능성, 붓다에 기대어 지속적으 로 넓혀 가는 새로운 통찰과 전망 등이, 모두 묻혀 버린다.

거칠게 말하 자면, 이대로라면 ‘불교라는 고목古木을 불교학이 고사목枯死木으로 만들 어 버릴 수 있다.’

필자는 그 유력한 출구 하나가 불교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전통교학 이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성찰’로써 보여준 ‘개방성과 역동성 및 현재 성’을 계승하는 길, 붓다를 더욱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 붓다의 성취에 대한 해석학적 오염과 일탈을 치유하는 길, 붓다와 손잡고 삶과 세상의 더 높고 더 넓은 길을 만들어 가는 길.-이 모든 길에 들어서는 문이 불 교철학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불교철학’은 현재의 ‘학문 불교학/박물관 불교학’에서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본다.

교학이론을 다 룬다고 해서 불교철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학이론에 대한 충분 한 탐구와 이해 없이는 불교철학도 불가능하다.)

또 서구의 사변과 개념을 차용한다고 해서 불교철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남의 다리 긁는 격 이 된다.

‘불교철학’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필자에게 불교철학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춘 불교학 탐구를 의미한 다.

  첫째, 모든 전통교학을 나름대로의 해석학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그 에 대한 이해에 머물지 않고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 사용가치 평가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관점과 이론 및 자신이 주목하는 사용가치를 ‘소통 가능한 현재어’로 정밀하게 밝혀야 한다.

현 재어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개념과 용어에 의한 표현이다.

   셋째, 이를 위해서는 전통교학의 용어와 이론 형식을 그 대로 차용하면서 재배치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전통교학의 논리와 언 어 범주에 갇히지 말고, 그리하여 동어반복적인 순환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묶으면 이렇게 된다, ‘모든 해석학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용가치를 탐구하려는 태도로써’ ‘사용가치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소통 가능한 현재어에 담아내는 것’-그것이 불교철학이 갖추어야 할 기초조건들이다.

불교철학의 이러한 자격조건들은 의지만으로 갖추어지지 않는다. 화 두처럼 늘 염두에 두고, 그런 조건들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꾸준히 계발해야 한다. 어느 정도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성공적인 작품 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불교철학의 ‘모든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는 못해도, 거듭 시도하며 사례들을 축적시켜 가야 한다. 불교철 학의 조건들을 확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축적되고 또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점차 불교철학의 정체성과 내용이 뚜렷해질 것이다. 현재 ‘학 문 불교학’의 교학적 탐구 가운데 불교철학의 조건을 갖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불교철학 범주에 근접하거나 진입하는 사례들 도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로 보인다. 그런 학인들의 역량이 불교철학 형 성에 결집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교한 접속어와 탁월한 조어력을 지닌 한글과 한국어는, 명확하고 풍요로운 의미 생산력과 표현 /전달력을 지니고 있어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고 담아내기에 매우 수승한 언어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어의 주체들은 불교철학 형성에 적합한 잠재 력을 지니고 있다. (불교학 연구자들이 대학에 자리 잡고자 할 때도 ‘불교철학 적 연구성과’가 매우 유리하다. 종립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의 경우에는 특히 그 렇다. 일반대학의 교양과정이나 철학과에서 불교 전공자를 채용하고자 할 경우, ‘교학 강의능력’이 아닌 ‘불교철학 강의능력’을 주목하게 된다. 학생들의 다양한 지적 조건들에 맞추어 불교사상을 현재어로 풀어서 강의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지식범주들과 소통 가능한 연구와 강의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연 구와 강의를 희망하는 학인들은 이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깨달음 담론구성의 첫 관문 21

 

2. 깨달음 담론과 본각本覺

 

이 글에서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은 ‘본각本覺과 깨달음 담론’의 문제 이다.

필자가 무엇보다 먼저 본각의 문제를 선택한 것에는 네 가지 이유 가 있다.

  첫째, 본각은 앞서 언급한 깨달음의 네 가지 담론들 모두와 직 결된다.

본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 깨달음 담론을 채우 는 내용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돈점 담론’, ‘깨달음의 방법론 담론’, ‘불교 정체성 담론’, ‘깨달음의 사회화 담론’은 본각에 대한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구성된다.

  둘째, 본각은 유식/여래장/불성/화엄 계통 대승교학의 핵심 개념이나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본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들 대승교학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

그리고 이 평가는 ‘불교 정체성 담론’과 직결된다.

  셋째, 본각은 원효사상에서도 핵 심부를 차지한다.

󰡔대승기신론󰡕은 본각·시각·불각의 관계구조를 통해 대승불교의 깨달음사상을 종합하고 있으며, 원효는 이 󰡔대승기신론󰡕의 깨달음사상을 근거지로 삼아 통섭적通攝的 불교철학을 수립하고 있다.

원효의 일심一心사상도 그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일심철학을 비롯한 원 효철학의 이해와 평가는 본각 문제와 맞물려 있다.

  넷째, 붓다의 깨달음 법설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를 근원적이고도 전반적으로 재성찰하기 위 해서도 본각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교학, 즉 불교해석학의 체계는, 그 이론의 다양성만큼이나 깨달음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이 존재한다.

그러 나 배열된 다양한 차이를 관통하는 유사 내지 동일한 관점도 목격된다. ‘모든’ 교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교학들이 깨달음에 관한 관점 의 출발선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이 공통점이 반드시 붓다의 깨달음 법설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지 는 않는다.

해석학적 변질 내지 일탈 가능성을 짚어보아야 할 대목이 있 다고 생각한다.

본각은 이 문제를 성찰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개념적 관문이다.

사실 필자가 이 글에서 제기하고 싶은 논점도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본각이라는 용어는 원효가 불교철학 이해의 근거지로 삼은 것으로 보 이는 󰡔대승기신론󰡕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 록 용어는 다를지라도 본각과 관련 있는 다양한 개념들이 󰡔대승기신론󰡕 이전에 등장하여 여러 교학이론들과 결합되어 왔다.

불성, 여래장, 자성 청정심, 제9식, 진여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용어들이 󰡔대승기신론󰡕이나 원효가 구사하는 본각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려워 도, 적어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본각과 관련된 개념과 사 유방식의 계보는 그 범주나 층이 광범위하고 또 깊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본각 개념을 읽는 사유방식에 따라 ‘불교 정체성 담론’과 ‘깨달음의 방법론 담론’이 근원에서부터 출렁일 수 있다는 점을 특히 주 목하고 있다.

달리 말해, 본각 개념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붓다의 깨달 음 법설에 대한 해석학적 연속과 불연속이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본각 문제는 필자가 전망하는 ‘통섭적 깨달음 담론의 구성’에서 그 핵심부에 위치한다.

본각에 대한 근대 불교학 이전의 이해들에는 두 가 지 상이한 사유방식이 혼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본각이라 부 르는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이미 인간 내면이나 존재의 이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유방식으로서, 형이상학적 유형이다.

다른 하나 는, 본각이라 부르는 ‘참됨/온전함’, 달리 말해 ‘온전한 경험지평’ 혹은 ‘궁 극적 이로움을 누리는 경험지평’은, 아직 경험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존 재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부터 확보하는 능력에 의해 비로소 경험하게 되고 또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 보는 사유방식으로서, 경험주의적 유형이 다.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의 내면적/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을 주장하는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불교에 서는 양자가 혼재하는데 비해, 근대 불교학 이후의 본각 이해는 형이상학 적 사유방식이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인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본각이라 할 ‘불변의 참된 것 /온전한 것’은 내면에 이미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언어와 분별망상 에 가려 드러나지 않다가 언어를 초월하고 분별의 베일을 거두면 환하 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인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존 재나 삶의 ‘참됨/온전함’은, 비록 ‘본래 그러한 것’(本然)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음이나 인간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인간의 지각은 아직 한 번도 그 본래의 참됨/온전함에 눈뜨거나 그것을 경험으로 간직해 본 적이 없 다.

그 ‘참됨/온전함’은, 마음이나 내면에 이미 있지만 가려져 있던 것을 마치 보물 캐내듯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인지 능력의 전의轉依적 향상을 통해 비로소 그 지평에 눈떠 경험으로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됨/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한 마음/인지 능력의 향상은, 언어와 사유의 퇴행적 폐기가 아니라 ‘언어와 사유’ 능력의 전진적 차원 향상에 의해 이 루어진다.

근대 불교학 이전, 본각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교학과 수행의 관점들 속에는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이 혼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후자의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이 더 타당하며, 붓다의 깨달음 법설에도 상응한다 고 생각한다.

‘불교적 깨달음’은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에 의해 그 적절한 내용이 확보될 수 있다.

󰡔대승기신론󰡕이나 원효가 구사하는 본각의 언 어, 선종의 돈오견성의 언어도, 후자의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불성佛性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본래 부처’ 해석학도 마찬가지이다.

교학과 수행, 선종의 언어에 대한 통념적 해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는 이러한 관점과 문제제기가 매우 낯설거나 불편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문제가 ‘깨달음 담론구성’의 원점에서 충분히 성찰되지 않으면 모든 ‘불교 적 깨달음 담론’이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친김에 더 강하 게 표현하자면, ‘불변의 참됨/온전함/완전성의 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전형적인 우파니샤드적 관점이며, 붓다가 결별했던 인도 전통개념 체계로의 복귀이다.

그래서 붓다 법설로부터의 근 원적 일탈이라 본다.

그리고 이 일탈이 불교 생명력 훼손의 원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을 피력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3. ‘참됨/온전함’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

 

앞서 필자는 깨달음을 ‘개인과 사회의 향상에 대한 전망과 그 구현조 건들’이며, ‘향상’은 ‘참됨/온전함을 조건으로 삼아 발생하는 이로움의 증 가’를 의미한다고 정의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가 유효한 깨달음의 유형은 다양하며, 불교의 ‘깨달음 담론’은 ‘불교적 깨달음’을 초점으로 삼 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불교적 깨달음’은 ‘불교적 사유방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 담론은 ‘무엇이 불교적 사유방식인가?’라 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또한 ‘불교적 사유방식의 내용과 기준’은 주 제나 문제에 따라 다채롭게 거론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다양한 내용은 ‘상호 충돌하지 않는 결합성’, 다시 말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감안하는 동시에 이 글의 논점을 다루기 위해, 필자 는 ‘참됨/온전함’을 보는 사유방식의 문제를 ‘붓다 이전 인도전통 시선과의 대비’를 통해 ‘무엇이 참됨/온전함에 대한 불교적 사유방식인가?’를 생 각해 보고자 한다.

이때 ‘붓다 이전 인도전통 시선’은 우파니샤드의 관점 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구체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경험주의 적 사유방식’의 대비이다. 모든 철학적 성찰은 두 가지 충동에서 촉발된다고 본다.

하나는 무지 와 관련된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과 관련된 충동이다.

전자는 이해 와 설명을 방해하는 지적 혼란을 해소하려는 지적 충동이고, 후자는 실존 의 불안과 고통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려는 충동이다.

이 두 가지 충동 은 사실상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다만 초점이나 비중의 차이 는 다양하게 목격된다.

인도전통의 철학에서는 이 두 가지 충동을 결합 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돋보인다는 점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수행법을 고안하여 실천하는 수행문화까지 이에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늘 불안하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는 것을 ‘인지’하기에, 인간의 불안은 관념적으로 증폭되고 장기 기억을 통해 오래 지속된다.

개념적으로 경험하는 능력과 재인지하는 능력을 장 착한 이래, 인간은 삶의 불안과 고통을 본능적 방식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인지능력이 얹어놓은 불안과 고통의 하중은 그대로 안고 살기에는 너무도 버거워졌다.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해야만 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재앙의 문이었던 인지능력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잘만 하 면 재앙의 문이 축복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 었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인지경험을 발생시키는 핵심조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원하는 대로 있어주지 않고 변한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대로 차지하거나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욕/지배욕 충족의 좌절’을 끊임없이 반 복적으로 확인하고 기억하며 또 예상해야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심층 의 지속적 불안/고통이다.

특히 쉼 없는 변화는 모든 불안/고통의 심층요 인으로 작용한다.

많은 경우, 변화가 소유욕/지배욕 좌절의 원인이 된다. ‘인지 인간’은 자신의 인지능력을 총동원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개 념적 분석과 논리적 판단, 평가와 예측 등 인지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방 법과 수단을 동원해 본다.

신체수명이나 물질 존속기간을 늘려 변화의 위협에 대처해 보고, 생산능력을 높이고 생산물의 양과 질을 풍요롭게 하여 소유 갈증에 대응해 보기도 하며, 권력을 쥐어 지배욕을 충족시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와 문명의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도 끝내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

경험세계에서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욕/지배욕 충 족의 좌절’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은 경험세계의 속성상 불가능하 다.

영원히 살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다.

끝내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그릇이다.

일상인들은 적절히 타협하고 적당히 체념한다.

영원할 수도 없고 원 하는 대로 차지하거나 마음대로 지배할 수도 없다는 현실이 불안하고 달 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음을 수용한다.

변화의 불안과 동요, 소유/지배 좌절의 고통과 체념적으로 동거한다.

그러나 이런 일상인의 삶에 끝내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변화의 불안을 완벽하게 해소하고, 완전 한 소유와 지배를 성취하려는 희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해법 마련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인간 특유의 인지능력뿐이다.

어쨌거나 이 능력을 활용하여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럴 때 선택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경험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설정하여 탈출구를 마련해 보는 것이다.

이른 바 ‘형이상학적 해법’이다.

다른 하나는 인지능력을 더욱 진화시켜 경험세계를 만나는 새로운 능력을 갖추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형이상학적 해법에 대비 시켜 ‘경험적 해법’이라 불러보자.

변화하는 현상들과 만나면서도 변화를 불안으로 겪지 않는 능력, 소유하고 사용하면서도 ‘소유의 영속과 소유물 의 극대화’ 충동에 시달리지 않는 능력, 지배를 통해 자기를 확인하려 하 지 않는 능력을 계발하여, 그 능력의 주체로서 경험세계와 새롭게 만나려 는 방식이다.

필자가 보건대, ‘경험세계와 인지능력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원초적/ 근원적 불화와 균열’(필자는 이것이 중생의 현실세계를 고苦라고 판단한 붓다 의 문제의식이었다고 본다)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선택한 길 은 대부분 ‘형이상학적 해법’이었다.

철학의 이름이든 종교의 이름이든, 동서양 불문하고 대부분의 선택은 다양한 유형의 ‘형이상학적 해법’이었 다.

고苦의 ‘근원적’ 문제 상황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경험적 해 법’을 추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성공하기 어려운 해법이라 여겨진 것 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해법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 고 마침내 성공한 사례도 목격된다.

필자의 눈에는 세 사람 정도가 들어 온다.

붓다와 노자 그리고 장자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수준의 성취와 정밀한 성찰적 사유, 정교한 논리와 언어의 구사를 모두 보여준 인물은 단연 붓다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견식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붓다 이전 인도전통 철학/종교체 계에서는 이른바 형이상학적 해법이 그 어느 전통보다도 발달하여 압도 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붓다는 그 인도전통의 철학/종교적 관행 과 주류에서 완벽하게 탈출하는 경험적 해법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나도 상반되는 장면이라 이를 부자연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그리 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붓다의 해법을 기존 인도전통 해법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거나 결부시키려는 노력도 등장한다. 예컨대 붓다의 선법禪法과 선정禪定을 기존의 인도 명상전통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거나 뒤섞어 버 리는 태도가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두 해법의 이질성을 직 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대조적 장면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경험적 해법과는 전혀 상반된 형이상학 적 해법이 기존에 거세게 작동하고 있었기에, 경험적 해법을 추구하는 붓다로서는 선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그 전통해법에 대한 비판 적 성찰과 대안의 선택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필자가 보건대, 삶과 세계 에 대한 붓다의 성찰방식과 문제해법은 인도전통 선행 체계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선행 체계의 개념들과 용어를 차용할 뿐, 그 개념과 용 어들로써 개진하는 내용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붓다의 직제자들 가운데 서도, 붓다의 언어를 이전의 전통 개념체계에 의거하여 이해함으로써 붓 다의 의중을 제대로 읽기는커녕 오해를 하는 경우도 상당했을 것이라 본다.

학문적/철학적 소양을 지닌 엘리트 제자들의 경우, 그들의 지적 소양은 대부분 이전의 전통 개념체계에서 확보된 것이다. 전통 용어를 차용하지만 전혀 새로운 내용을 펼치는 붓다의 언어를, 전통 개념체계 속에서 지적 능력을 키운 사람들이 기존 개념체계의 틀에 갇히지 않고 소화해 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에게 전승된 초기불전의 언어를 고스란히 붓다의 육성으로 간주하는 태 도는 조심해야 한다. 니까야/아함이 붓다의 육성을 원형대로 담고 있다 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이다.

특히 ‘초기주석서나 교학들이 제시하는 붓 다 법설에 대한 이해’는 항상 그 타당성을 신중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 다.

그러나 모든 불교 문헌들 가운데 니까야/아함에 붓다의 육성과 체취 가 가장 짙게 배어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붓다와의 대화를 시도할 때는 언제나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까를 고 민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기억과 암송, 전승과 기록의 어간에서 발생한 ‘해석학적 굴절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구어에서 출발한 경우, 그 전승에는 전승자의 ‘이해’가 쉽게 개입한다.

문어의 전승이라고 해서 ‘해석학적 선택에 따른 이해 굴절’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어에 서 출발한 전승과정에서는 이런 문제가 특히 현저하다.

모든 언어체계의 전승은 일종의 해석학적 굴절에 노출되어 있으며, 모든 해석학적 선택은 ‘이해’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이해능력은 ‘텅 빈 능력’이 아니다.

이해 능력을 가동하는 것은 결코 백지에 그림 그리는 일이 아니다.

이해능력 은 이 능력의 내용을 결정하는 조건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며, 그 조건 들은 이해 주체가 이해능력을 가동할 때 이미 자리 잡고 있다.

그 조건들 은 타고난 유전적, 기질적 조건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습득한 지적 기 반일 수도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와 관련된 정서적 경향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미 있는 그 조건들 때문에 이해능력이 구체적 힘을 발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해’에는 반드시 이해를 가능케 하는 ‘선행적 체계’가 작동하기 마련 이다.

이해의 선행체계와 관련해서는 특히 선행하는 ‘개념질서’를 주목하 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이해’라는 경험은 언제나, 언어에 의해 가 능하게 되는 ‘개념적 분류와 대비’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능력은 ‘세계의 차이들을 개념들로써 분류하고 대비하는 방 식’, 즉 ‘개념의 질서나 체계’에 의해 구체적 이해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어떤 이해능력도 이미 특정한 유형의 ‘개념의 질서/체계’를 안고 있다.

그 리고 인간의 이해라는 것은 많은 경우 그 ‘선행하는 개념의 질서/체계’에 의해 발생한다.

선행하는 개념의 질서/체계는 이해의 발생에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강력하게 개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개념의 질서/체계’는 반드시 논리나 지식들로써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차이들에 대한 개념 적 분류에는 기본적으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구분하는 느낌이 개입한다. 

따라서 이해를 발생시키는 ‘개념의 질서/체계’ 구성에는 언어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가 모두 참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해가 언제나 그 선행적 개념질서/개념체계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결 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선행 개념질서와 체계에 기대어 있지만, 인 간은 그 이해에 전혀 새로운 내용을 능동적으로 부가하는 모습을 보여준 다.

또 어떤 개념의 질서/체계가 동일하게 전승되지도 않는다.

새로운 환 경적 요인이나 정신적 자각, 성찰과 결단 등에 의해 내용이 바뀌기도 한 다.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전해 새로운 개념질서로 바뀔 수도 있다.

이해를 발생시키는 개념의 질서/체계는 이처럼 역동적으로 형성되 는 것이며, 언제나 변화에 열려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역동적 개방성에 새로운 차원의 선택지를 추가한다.

그러나 어떤 이해와 관련하여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이해에는 선행하는 어떤 ‘개념의 질서/체계’가 어 떤 방식으로든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이해’를 다룰 때는 언제나, 그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선행 개념질서와 체계 가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이해의 내용’을 발생시킨 ‘선행하는 조건 인과들’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붓다의 연기 법설이 요청하는 사 유법이기도 하다.

이 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 버리면,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이해나 타인들의 이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더 나은 이해’ 로 나아가기도 어렵다.

붓다 언어의 전승과정을 다룰 때에도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붓다 직제자들의 이해력은 대부분 선행하는 인도 전통개념의 질서/체계에 기 대어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붓다의 법설은 그 전통개념의 질서/체계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기존의 개념 체계로는 포착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개념체계를 벗어나는 붓다의 법설’ 과 ‘선행 개념체계에 기대어 있는 제자들의 이해’ 사이에서는, 일종의 ‘해 석학적 균열’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선행 개념체계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붓다의 법설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력을 계발함으로써, 그 해석학 적 균열을 해소시킬 수 있었던 뛰어난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력을 형성시킨 기존의 개념체계에 수동적으로 기대어 붓다의 언어를 이해했을 제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붓다 법설 에 대한 ‘이해의 굴절과 제한 및 변형’이 어떤 식으로든 발생했을 것이다.

붓다의 법설과 대화했던 직제자들 및 후대 학인들의 이해를 다룰 때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해능력 형성의 이러한 조건인과(緣起)를 고려할 때, 현재 문자로 기 록되어 전하는 니까야/아함의 내용에는 크게 두 층의 ‘해석학적 굴절에 따른 변형’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는, 붓다의 법설을 기억하여 암 송으로 결집했던 붓다 직제자들의 이해력에 의한 변형이다.

기억자들의 탁월한 근기와 수승한 기억력의 가능성을 십분 고려한다 해도, 각자의 이해력에 내재한 개념체계의 영향에서 발생한 이런저런 해석학적 변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우리의 경험에도 부합한다.

이해력과 기억력이 신뢰할만한 수준의 제자들에게 강의 내용을 복기하게 했을 경 우에, 우리는 당혹스러운 정도의 차이를 예상보다도 많이 확인한다.

화자 話者와 청자聽者 사이에서 발생하는 해석학적 굴절은 어떤 경우에도 항 상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굴절 현상은 붓 다의 입멸 직후에 이루어진 결집結集이라는 ‘기억의 협업적 복원과 상호 검토’로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현존 니까야/아함도 붓다의 법설을 둘러싼 제자들 사이의 이해 차이와 관련된 문제들이 거론 되는 사례들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그 결집 내용이 즉시 문자화 되지 않고 장기간 암송으로 전승되는 과정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굴절과 변형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해석학적 굴절에 따른 변형’이 반영되었을

  두 번째 층은, 니까야/아함 의 내용에 대한 학인들의 이해를 조직화하는 ‘교학 형성과정’이다.

특히 인도의 전통적 개념체계 속에서 이해력의 토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의 니까야/아함 이해가 ‘초기교학 형성과정’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주목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아미담마 교학의 형성과정이다.

필자가 보건대, 아비 담마 교학은 이후 대승교학의 주제 범주마저 결정해 버린 불교 해석학의 원형 프레임이다.

대승교학이 아비담마 교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지만, 그 비판과정은 결국 아비담마 교학이 설정한 주제와 해석학을 둘러싼 것이었기 때문에, 아비담마 교학이 구성한 해석학의 기 본 범주와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시아 불교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의 프레임 이탈현상은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니까야/아함의 붓다 법설에 대한 최초기의 체계적 해석학인 아비담마 교학은 이후의 불교해석학의 기본 틀을 제공한 셈이다.

(우리는 이제 이 틀 자체의 적절성 여하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성찰해야 한다. 그래야 붓 다와의 대화가 실질적으로 재개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최초기의 교학 구성 에 참여한 사람들의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인도의 전통 개념체계 속에서 이해능력을 형성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비담마 교학을 성찰할 때, 인도의 전통적 개념질서/체계에 의거하여 수립한 학인 들의 이해력이 붓다 법설에 대한 이해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신중하 게 살펴야 한다.

아비담마 교학을 구성한 학인들은. 비록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고 또 의식한 것은 아닐지라도, 기존의 개념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방식과 내용으로써 붓다의 새로운 개념질서/체계를 이해하는 경우 가 꽤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였을 해석학적 굴 절 현상은 교학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비담마 교학을 보면서 갸우뚱거리게 되는 대목을 이런 추정의 근거로 삼는다.

붓다 법설 에 대한 최초기의 교학 구성에 반영되었을 해석학적 굴절 현상은, 그 굴 절된 이해가 논리적 정밀성과 정합성을 지닌 이론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부터 해석학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붓다 법설에 대한 이해의 적통嫡統 자격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불교 연구자나 아비담마 연구자 들은 주석서나 논서, 아비담마 교학에 반영되었을지 모르는 해석학적 굴 절의 가능성과 그 구체적 내용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붓다와의 대화가 견실하고 풍부해진다.

니까야/아함이 붓다의 육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라는 것 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시 말해 이들 텍스트 성립과 전승과정에 개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추가 와 변형, 굴절의 요소들을 과장되게 고려한 나머지, 니까야/아함과 붓다 육성의 상응에 대해 지나친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렇다면 남는 과제는 분명하다.

니까야/아함을 통해 붓다와 대화하려는 학인들은 나름대로의 튼실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을 중심으로 붓다 의 언어를 선별적으로 채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흔히 채택되는 문헌비판의 방법과 기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학적 기준으로 판별한 이른 시기의 문헌이라고 해서 붓다의 육성이라 확정할 수 없 고,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문헌이라 해서 붓다의 육성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통상의 문헌비판 방법론이 확보한 성과를 참고하면서 나름의 ‘해석학적 기준’을 수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까 야/아함에 기록되어 전하는 내용 가운데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는 법설들을 선별적으로 채집하려고 할 경우, 정합성의 내용과 기준 선 등을 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인들 각자의 이해에 달려있기 때문이 다.

그 해석학적 기준의 타당성 정도는 일차적으로 학인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설득력의 정도와 상응할 것이지만, 다수의 해석학적 승인이 그 타당성을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니다.

다수가 아직 미처 소화해내지 못하 는 소수자의 탁월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견실한 해 석학적 안목을 수립하려고 애쓰고, 그 산물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내놓는 것-우리가 요구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일 게다.

붓다 법설에 대한 해석학적 굴절 가능성을 장황하게 짚어본 것은, 붓다의 ‘경험적 해법’이 지니는 의미와 내용을 불교 전통에서, 그리고 현 재의 불교인들까지, 과연 얼마나 적절하고 충분하게 포착하고 있는가를 묻고 싶어서이다.

달리 말해, 불교 내부에도 알게 모르게 인도전통의 ‘형 이상학적 사유방식과 그 해법’이 불교의 옷을 걸치고 자리 잡아 온 것은 아닌가, 또 현재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성 찰하고 싶어서이다.

이 질문과 그에 대한 성찰은 ‘깨달음 담론의 구성’에 매우 중요하다. 학인들이나 연구자들은 붓다의 해법이 기존의 인도 전 통해법과 어떻게 다른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아직 붓다의 해법과 기존의 인도 전통해 법의 차이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본다. 아니, 붓다와의 대화 자체도 아직 많이 미진하다고 본다.

붓다 법설에 대한 이해를 담은 기존의 교학 과 수행론의 의미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 대목이 많다고 본다. 전통언어와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재배치하거나 교학적 의미를 짚 는 것에 그치는 방식의 불교학으로는, 또 사용가치의 탐구와 평가에 관 심이 없는 ‘박물관 불교학/학문 불교학’으로는, 이런 문제들이 계속 방치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붓다 그분이 성취한 해법과 그 해법이 안내하는 지평에 대해 우리는 아직 너무 작고 좁게 알고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 져간다. 

이 글의 초점으로 되돌아가자. 이 글에서 필자의 관심은, ‘참됨/온전 함을 보는 사유방식’의 문제를 ‘붓다 이전 인도전통 시선과의 대비’를 통 해 ‘무엇이 참됨/온전함에 대한 불교적 사유방식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이라 하였다.

그리고 ‘붓다 이전 인도전통 시선’은 우파니샤드의 관점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였다.

참됨/온전함에 대한 사유방식을 주목하는 것 은, 그것이 ‘경험세계와 인지능력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원초적/근원적 불 화와 균열’, 다시 말해 고苦의 ‘근원적’ 문제 상황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해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해법이든 경험적 해법 이든, 그 궁극적 해법을 추구한 사람들은 공히 자신들의 해법을 ‘참됨/온 전함을 성취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붓다 이전 인도 전통해법과 붓다 해법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좌표들 가운데, ‘참됨/온전함 을 보는 사유방식의 차이’라는 좌표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근원적 지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각’은 ‘참됨/온전함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의미와 내용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각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은 곧 ‘참됨/온전함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하나는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이미 인간 내면이나 존재의 이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유방식이고 형이상학적 해법을 추구한다.

  다른 하나는 ‘참됨/온전함’의 경험지평은 이제부 터 확보하는 새로운 능력에 의해 비로소 경험하게 되고 또 존재하게 되 는 것이라 보는 사유방식이며 경험적 해법을 추구한다.

‘불변의 참된 것/ 온전한 것’의 내면적/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 및 그 해법과,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을 주장하는 경 험적 사유방식 및 그 해법의 차이인 것이다.

 

앞서 거론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면,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은 내면에 이미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그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언어와 생각(혹은 분별망상)에 가려 드러나지 않다가 언어를 초월하고 생각(혹은 분별)의 베일을 거두면 환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 後顯을 주장하는 경험적 사유방식은, 존재나 삶의 ‘참됨/온전함’은, 비록 ‘본래 그러한 것’(本然)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어도, 그것은 마음이나 존재의 현상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됨/온전함’은, 마음이나 내면에 이미 있지 만 가려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인지 능력의 새로운 향상을 통해 비로소 눈떠 경험 안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됨/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한 마음/인지 능력의 향상은, 언어와 사유의 퇴행적 폐기가 아니라 ‘언어와 사유’ 능력의 전진적 차원 향상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시선이다.

 

 

4. ‘참됨/온전함’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사유방식

 

우파니샤드 문헌의 형성은 붓다의 등장 훨씬 이전부터 이후에까지 광 범위한 기간에 걸쳐 있지만, 그 문헌들을 관통하는 사유방식은 일관되고 뚜렷하다.

그리고 붓다는 우파니샤드의 사유방식과 주장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동시에 우파니샤드적 사유방식의 극복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 하였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붓다의 무아 통찰을 거론할 때 흔 히 하는 것처럼, 아뜨만을 ‘불변의 독자적 실체’ 정도로 언급하는 존재론 적 방식으로는, 붓다의 무아 통찰에 접근해 가는데 매우 부족하다.

또한 붓다 이전의 요가 수행과 붓다의 선禪, 붓다의 연기적 세계관과 우파니샤드적 세계관, 붓다 이전의 해탈과 붓다의 해탈이 어떻게 다른지를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도, 이런 정도의 아뜨만 개념으로는 심히 부족하다.

‘붓다 의 해탈/깨달음’ 및 ‘해탈/깨달음의 구현방법’과 관련한 모든 것을 붓다 이전 인도전통의 그것과 대비시켜 그 차이를 명확히 포착하려면, 아뜨만/ 브라흐만을 설정하는 사유의 내용과 그 의미를 원점에서부터 거듭 성찰 해야 한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포착해 내지 못한다면, 붓다/불교와 우파 니샤드적 인도 전통사상은 혼란스럽게 뒤섞여 버릴 가능성에 늘 노출될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인도 전통과 붓다의 불교를 묶은 후 인도문화를 동경하고 찬탄하는 태도에 동참하지 않는다.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인도 친화적일 것이라는 시선을 필자는 사양한다.

붓다는 인도의 전통개념들 을 원점에서부터 해체하고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연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붓다에게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었던 인도 전통개념 체계는, 붓다의 통찰에 깊이 동감하는 필자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근저에서부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극복되어야 할 문젯거리로 보인다.

우파니샤드 언어들에 대한 신비주의적 호기심과 동경, 종교의 옷을 입은 우파니샤드 기원의 형이상학적 개념체계, 그 개념체계에 포획된 인도인들의 실존에 대해, 필자는 냉정한 입장이다.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갠지스 강물에 몸을 씻으면서 죄업이 소멸된다고 믿는 것을 ‘깊은 신앙심’이라 말하거나 ‘성스러움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면모’라고 찬탄할 생 각이 필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강물 목욕과 죄업 소멸의 인과관계를 믿게 하는 무지의 개념체계가 더 눈에 잡히기 때문이다.

태생적 신분차별에 순응하는 것을 ‘초현세적 심성’이라 분식할 생각도 없고, 온갖 신들 앞에 머리 조아리며 세속 복락과 성공을 기원하는 삶의 양식과 문화를 ‘풍요로운 종교적 삶’이라고 상찬할 수 있는 아량도 필자에게는 없다.

불합리한 개념체계의 산물인 가난과 폭력적 핍박, 자각과 노력으로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 실존의 차별과 고통을, 삶의 운명적 고통으로 간주하게 하고 또 그에 순응하는 신념체계.

그 부당하게 구성한 현실의 고통을 근거로 윤회를 말하고 해탈을 꿈꾸게 하는 허위.-이런 문화체계를 ‘삶에 대한 깊은 종교적 감성이나 통찰’이라고 꾸며줄 생각은 전혀 없다.

‘삶과 세상의 조건인과적/연기적 합리화’를 거부하는 주술적 사유, 그 사유가 종교나 문화의 옷을 입고 현실과 제도를 장악해 가는 무지의 기만, 이에 대한 붓다의 명증한 성찰과 비판 및 치유의 길.-필자는 이 붓다의 길에 깊이 공감할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경험을 ‘재인지’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이 인지적 인간에게, 모든 경험은 ‘원하는 대로 있어주지 않고 변하는 것’이 며, 또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 없고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으로 거듭 거듭 재인지된다.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은 경험세 계와 인지능력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근원적 불화와 균열이다.

이 원초적 이고도 반복적인 문제에 대해, 망각이나 완화 등 일상적 방식으로 대응하 는 미봉책에 불만을 느껴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해결을 추구하려는 사람 들은 어떤 해법을 선택할 수 있을까?

경험세계의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대로 있어주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원하는 대로 차지하거나 부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삶의 고통에 예민한 성 찰적 영성들에게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간절히 해결하고 싶지만 도무지 마땅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이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 는 출구는 무엇일까?

두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 는 경험적 해법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 해법이다.

경험적 해법은, ‘감관의 지각경험에 근거한 인지경험’ 안에서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경험적 해법으로는 두 가지가 선택되곤 한다.

  하나 는 이성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방식이다.

이성적 방식은, ‘모든 경험 현상은 변하는 것’이라는 이해를 수립하고 수용함으로써 ‘불변에 대한 기대’와 ‘변화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윤리적 방식은, 원하는 욕구를 줄여 ‘원하는 것’과 ‘차지하는 것/지배하는 것’의 간극을 줄 이는 것이다.

이른 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길이다.

무상관無常觀과 무아 관無我觀, 즉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실존의 근원적 불 안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이해방식 수행은 이성적 방식, 계학戒 學이라는 행위방식 수행은 윤리적 방식의 모범적 전형이다.

욕망의 제어 와 축소를 주장하는 모든 유형의 윤리와 종교의 금욕주의적 방식은 윤리 적 방식에 속한다.

필자의 생각에, 경험적 해법은 대개 이 두 가지 유형 에 포섭된다.

그런데 붓다가 열어준 길은 이 두 가지를 안으면서도 새로 운 지평으로 안내하는 제3의 경험적 해법이다.

이 해법은 ‘이성적 방식으 로서의 무상관無常觀/무아관無我觀’이나 ‘윤리적 방식으로서의 계학’만으 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 길이다.

이 점은 기존의 교학이나 현행 불교 학에서 아직 충분히 거론되거나 탐구되지 않은 지대라고 생각한다.

밑그 림을 충분히 그리면서 거론해야 하는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 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해법은, ‘감관의 지각경험을 근거로 갖지 않는 인지적 상상’ 속에서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철학과 신앙종교가 선택 한 해법이다.

이 해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 ‘원하는 대로 차지하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설정함으로써 ‘변화로 인한 상실’와 ‘소유/ 지배 욕망의 좌절’에서 탈출하고자 시도한다.

감관의 지각경험을 근거로 갖는 모든 인지경험은 ‘변화’와 ‘제한’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아예 ‘변화 와 제한 범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탈주는 애 초부터 지각경험적 근거를 가질 수 없는 ‘몽상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몽상적 설정과 상상으로써 지각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서는 ‘신비주의적/주술적 몽환’ 아니면 ‘종교적 신앙’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경험적 해법과 형이상학적 해법의 차이를 정의하기 위해서, 필자는 ‘감 관의 지각경험에 근거한 인지경험’과 ‘감관의 지각경험을 근거로 갖지 않는 인지적 상상’이라는 기준을 설정하였다. 그런데 이 기준의 의미 및 그것과 붓다 경험주의와의 관련을 명확히 하려면, ‘지각경험과 인지경험’의 차이를 ‘언어 및 개념’과 관련시켜 거론해야 한다. 이에 대한 필자 나름의 정리된 소견이 있지만, 글의 초점에 집중하기 위해 자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넘긴다.)

 

수많은 우파니샤드 문헌들을 일관하는 사유방식은 아뜨만과 브라흐 만에 관한 주장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아뜨만/브라흐만 개념에 부여된 대표적 속성들을 주목하는 것이 우파니샤드 사유방식의 특징과 의미를 확인하는데 요긴하다.

우파니샤드에서 목격되는 아뜨만/브라흐만 의 속성은 형이상학적 해법의 전형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철학적 수사와 종교적 평가로 장식할지라도, 아뜨만/브라흐만에 관한 언어의 핵심은, 인 도전통이 선택한 ‘고통으로부터의 형이상학적 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 라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붓다는 근원적으로 인도전통과 결별 하고 있다.

철학과 종교를 하나로 묶어 고통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 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붓다의 경험적 해법과 인도전통의 형이 상학적 해법은 애초에 섞일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길의 초입부터 갈라 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이다.

붓다의 길을 인도전통의 형이상학이 걷 는 ‘신비주의적/주술적/몽환적/신앙종교적’ 길과 뒤섞어 버리는 순간, 우 리는 붓다의 손을 놓게 된다.

인도전통의 형이상학적 해법을 ‘신비주의적’ 이라 부른 것은 신비체험을 통해 ‘경험 불가능한 것과의 합일’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이고, ‘주술적’이라 부른 것은 ‘경험 불가능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주술과 같은 비합리적 방법을 내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몽환적’이라 부른 것은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고, ‘신앙종교적’이라 부른 것은 전능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신들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붓다의 길에 서는 이러한 의미의 ‘신비주의/주술/몽환/신앙종교’가 뿌리 채 뽑혀 버린 다.

그런 점에서 붓다의 길은 근원과 지말 모두에서 분명 반反인도적이 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동서를 막론하여 모든 유형의 형이상학적 해법을 결연히 외면하는 길이다.

게다가 붓다의 경험적 해법은 이전의 경험적 해법에서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이며 완전하게 해결하려는 형이상학적 해법이 요구 하는 조건은 명백하다.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영원불변’과 ‘마음대로 차지 하고 부릴 수 있는 전능한 힘’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변화의 풍랑에도 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불변의 성채城砦’,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마음대로 차지하고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전능의 권좌權座’를 확보하면 된다.

그런 데 경험세계 속에서는 이러한 성채와 권좌를 확보할 수가 없다.

본래 존 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 의 좌절’에서 발생하는 경험세계의 고통을 완전하게 해결하기 위해, 경험 세계 속에서는 목격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확보해야 한다는 딜레 마에 봉착한다.

이 모순적 난관을 돌파해야 출구가 확보된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묘수가 하나 있긴 하다.

인간이 지니게 된 ‘개념적 사고 능력’이라는 독특한 면모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경험세계에서 동일성과 전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성이 확보되 려면 변화가 거부되어야 하는데, ‘지각경험을 반영하는 경험세계’에서 변 화의 예외는 없다.

또 전능성이 존재하려면 모든 현상을 마음대로 주재主 宰하는 일점一點 권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권능자는 세계 안에 본래 없다.

그러한 동일성과 전능성은 오직 개념과 언어 관념에서만 확보될 뿐이다.

경험세계에서 운명으로 겪는 ‘변화의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원불변의 성채’와 ‘전능의 권좌’를 확보하려던 사람들이라면, 개념 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현실의 경험세 계에서는 ‘불변과 전능’이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는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변의 성채’와 ‘전능의 권좌’를 확보하기 위 한 ‘형이상학적 해법’이 출발한다.

형이상학적 해법은 ‘지각경험에 의거한 경험을 반영하는 해법’이 아니라, ‘오직 개념에서의 해법’이고 ‘오직 언어 적인 해법’이다.

‘불변의 영원’이나 ‘전능의 주재主宰’는 개념과 언어 관념 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과정의 언제부턴가 인간은 언어라는 기호를 활용한 개념적 사고 를 할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그런데 개념적 사고의 구조적 특징은 ‘상반되는 이항異項들의 상호의존성’이다.

모든 개념은 그 개념과 반대되 는 개념과 짝지어 존립한다.

단독 절대적으로 존립하는 ‘순수 독자적 개 념’은 없다.

‘남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반대개념과 짝지어 있다.

‘여성’이 없는 ‘남성’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남성’ 이라는 개념은 ‘여성’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여성’이라는 개념 역시 ‘남 성’에 의존한다.

‘남성’ 개념은 ‘여성’ 개념을 조건으로 삼고, ‘여성’ 개념은 ‘남성’ 개념을 조건으로 삼는다.

‘반대되는 개념의 상호 조건성’이 개념적 사고의 보편구조이다.

‘있음’과 ‘없음’도 그러하고, ‘밝음’과 ‘어둠’도 마찬 가지이다.

경험세계에서 엄습해 오는 불안과 고통으로부터의 출구를 형 이상학적으로 모색하려는 사람들은, 개념적 사고의 이러한 구조적 속성 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변화한다’라는 개념에 기대어 성립하는 ‘불변’이 라는 개념, ‘불완전하다’라는 개념에 짝지어 있는 ‘전능의 완전함’이라는 개념 속에서는 ‘불변과 전능’의 기대가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속속들이 언어적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개념과 무관한 인간의 경험은 사실상 비非인간적 현상이다.

우리는 ‘변화’를 ‘직 접 지각한다’고 여긴다.

‘변화에 대한 지각’은 감관이 경험하는 1차적 지 각경험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지각경 험이 아니라 인지경험이다.

언어에 의해 ‘동일 범주의 것’으로 분류했던 개념단위의 내용은, 시간 경과 후 현재의 것과 과거의 것을 비교했을 때 양자 간에 차이가 목격된다.

그리고 이 차이가 ‘변화’라는 인지적 경험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우리는 ‘몸은 변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한다.

그 리고 ‘변화하는 몸 그 자체’에 대한 경험이 바로 그 이해의 근거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인지적 이해’의 근거는, 변화 현상 자체에 대 한 직접 지각경험이 아니라, ‘동일 대상에 대해 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의 시간적 대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일한 개념으로 지칭하는 대상이, 시 간에 따라 그 지시내용에 차이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차이를 근거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며 ‘변화’라는 이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 각하면, ‘변화’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나 이해’는, ‘현상 자체’에서 발생하 는 것이 아니라, ‘개념/언어가 개입된 현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아 야 한다.

결국 ‘변화’에 대한 경험도 ‘개념적’이라 보아야 한다.

아무런 개념적 매개 없이 직접 지각되는 변화는 인간에게 ‘변화’로서 지각되지도 인지되 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개념과 무관한 ‘변화’는 ‘변화’가 아니라 그저 현 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단순현상은 인간에게 의미가 없다.

또한 인간 은 변화하는 현상을 ‘변화에 대한 인지적 지각’ 이전의 ‘현상 자체’로 경험 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본래 그러하다.

만약 ‘인지적 지각 경험’ 이전의 ‘현상 자체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동식물 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퇴행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지각/인지적 퇴 행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굳이 추구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 은 어느 수준에서든 언어/개념과 무관할 수가 없다.

 

붓다가 해탈의 첫 관문으로 삼은 고통(苦) 판단도 지각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경험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우리 인간들, 그리고 붓다에게 도, ‘문제 설정과 그 해결은 인지경험 범주의 현상에 초점 맞추어져 있 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어/개념과 연루되어 있는 인지경험에서 발생하 는 문제를 어느 수준, 어떤 차원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가 하 는 것이, 인간의 과제이고 붓다의 관심사’였다.

기존의 불교 인식논리학 에서 설정하는 ‘실재에 대한 직접지각’이 만약 ‘언어/개념이 배제된 국면 에 대한 상상’(필자는 상상이라고 본다)이라면, 그리고 인지화 이전의 ‘뜨 거움’ ‘차가움’과 같은 1차 지각을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직접지각’ 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라면, 그런 관점은 붓다의 법설과 상응할 수 없는 일탈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런 인식론적 기초 위에서 깨달음을 전망하 고 수행론을 수립하려 한다면, 붓다의 법설과도 맞지 않고 인식론적으로 도 맞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성공할 수도 없는 ‘깨달음 형이상학’에 불과 하다고 생각한다.

붓다 법설의 ‘있는 그대로’에 대한 해석학적 오독誤讀 이라고 본다.

인지경험은 언어/개념과 연관되어 있고 어떤 경우에도 언어/개념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인지경험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문제도 언 어/개념을 삭제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해탈이나 깨달음을 궁극과제로 삼는 불교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붓다의 법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언어/개념 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후학들의 교학에서 흔히 목격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성찰하다 보면, 언어와 실재, 깨달음 및 수행론과 관련된 기존의 불교해석학(교학) 가운데, 핵심부의 상당 부분은 그 전제부터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과격한 문제제기이지만, 필자는 그런 지점 까지 열어놓고 탐구해야 붓다와의 새로운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붓다의 법설을 해석하는 기존의 교학 전통 안에서는

<‘언어 이전의 완전한 실재’나 ‘언어적 경험 이전의 순수 경험’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 적으로 선재先在하다>고 설정한 후, 그에 의거하여 교학이나 수행론을 구 성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원점에서부터 비판적으로 성찰되어야 붓다와 제대로 만날 수 있다고 본 다.

(이 문제는 불교의 교학과 수행론을 재성찰하며 붓다와 대화해 가는 여정에 서 원점지대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에 관한 필자의 견해와 자세한 논의는 깨달 음 담론구성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거론할 것이다.)

 

논의가 잠시 곁길로 흘렀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간다. 앞서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1.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에서 발생하는 고통 은,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영원불변’과 ‘마음대로 차지하고 부릴 수 있는 전능한 힘’을 확보할 수 있다면 완전하게 해결된다.

그러나 ‘불변의 성채’ 와 ‘전능의 권좌’는 현실 경험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으므로 확보할 수가 없다.

‘불변의 영원’이나 ‘전능의 주재능력’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은 개념/ 언어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형이상학적 해법이 다.

형이상학적 해법은 ‘지각경험에 의거한 경험을 반영하는 해법’이 아 니라, ‘오직 개념에서의 해법’이고 ‘오직 언어적인 해법’이다.

 

   2. 형이상학적 해법은, ‘감관의 지각경험을 근거로 갖지 않는 인지적 상상’ 속에서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비주의적/주술적/몽환적 /신앙종교적’ 면모를 지니게 된다.

신비체험을 통해 ‘경험 불가능한 것과 의 합일’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신비주의적 면모’를, ‘경 험 불가능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주술과 같은 비합리적 방법을 내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술적 면모’를, 꿈처럼 현실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몽환적 면모’를, 전능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 기 위해서는 주재능력을 지닌 신들에 대한 신앙을 요구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종교적 면모’를 지니게 된다.

 

   3. 우파니샤드에서 목격되는 아뜨만/브라흐만의 속성은 이러한 형이 상학적 해법의 전형이다. 아뜨만/브라흐만에 관한 주장은 철저히 언어/ 개념적 설정으로서, 이것은 인도전통이 선택한 ‘고통으로부터의 형이상 학적 출구’이다.

 

‘아뜨만/브라흐만과 관련한 우파니샤드의 주장들’은 이러한 관점을 지 지하는 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변화로 인한 상실’로부터 구원받기 위 한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해법이 구사하는 언어전략을 보자.

변화에 위협받지 않는 ‘불멸의 성채’에 거주하는 자가 되려면 그 성채가 ‘본래부 터 이미 완전한 존재’ 5)이고 ‘영원하고 불멸하는 존재’ 6)이며 ‘동일성을 유 지하는 존재’ 7)여야 한다.

또 감관의 지각적 근거를 지닌 모든 경험은 변 하는 것이므로, 불멸의 성채에 거주하는 자는 ‘모든 경험을 아는 이면의 존재’ 8), ‘이면에서 경험을 만들어 내는 존재’ 9), ‘감관지각을 가능케 하는 존재’ 10) ‘가장 심층의 존재’ 11), ‘모든 것의 관망자’ 12)의 지위에 있으면서 경험의 변화에 무관할 수 있어야 한다.

 

     5) 이샤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 이재숙 옮김(서울: 한길사, 1997). 이하 우파니샤드 인용은 이 책에 의거한다), p.55; 아이따레야 우파니샤드, pp.498-499 등.

     6)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469; 까타 우파니샤드, p.139 등.

     7)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3.

     8) 쁘라샤나 우파니샤드, p.168.

     9) 까타 우파니샤드, p.136.

    10) 까타 우파니샤드, p.126; 께나 우파니샤드, pp.76-77 등.

    11)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4. 

    12)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4. 

 

또한 사람들이 변화를 확인할 수 없는 지위에 위치시켜야 ‘불변의 존재’라는 주장이 먹힐 수 있으므로, ‘극 미/극대/최고最古의 존재’ 13), ‘초감각/불가사의의 순수의식’ 14), ‘순수한 지 고至高의 존재’ 15), ‘언어 이전의 비非언어적 존재’ 16), ‘사유의 대상이 아닌 존재’ 17), ‘무한한 존재’ 18), ‘유일한 초월자’ 19)여야 한다.

이러한 속성을 지 닌 존재라면 변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영원불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뜨만/브라흐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에서 벗어나려는 우파니샤드의 해법도 일관된 형이상학적 전략을 구사한다.

가지고 싶은 대로 차지하고, 하고 싶은 대 로 할 수 있으려면, 전능의 힘이 있어야 한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자’ 20), ‘창조자’ 21), ‘주재主宰하는 자’ 22), ‘주인’ 23), ‘모든 것의 원인’ 24), ‘편재遍在하 는 자’ 25), ‘모든 것을 발생시키고 모든 것이 내재하며 모든 것이 그곳으로 돌아가는 근원존재’ 26)여야 한다.

 

    13)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5.

    14)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5.

    15)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5.

    16) 께나 우파니샤드, p.75; 까타 우파니샤드, p.123.

    17)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5.

    18)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p.392-394.

    19) 까타 우파니샤드, p.130, pp.136-138.

    20)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467, pp.469-470. .

    21) 아이따레야 우파니샤드, pp.498-499.

    22)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p.469-470.

    23)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469.

    24) 아이따레야 우파니샤드, pp.498-499.

    25)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467, pp.469-470; 이샤 우파니샤드, pp.61-62.

    26)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5. 

 

이런 속성들을 소유한 존재라면 ‘전능의 주재능력’을 지니고 ‘마음대로 차지하고 부릴 수 있는 전능의 권좌’를 차 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뜨만/브라흐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아뜨만/브라흐만에 ‘부여하는’, 정확하게는 말하자면 ‘기대하는’, 이 영원불멸과 전지전능의 면모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려는 인간의 갈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다툼과 불안’ 대신 ‘평화와 평 온’, ‘고통과 슬픔’ 대신 ‘기쁨과 환희’, ‘유한한 것’이 아닌 ‘무한한 것’을, 마음껏 차지하여 영원히 누리고 싶은 세속적 염원의 노골적 투영이다.

그래서 아뜨만/브라흐만은 ‘영원한 평화, 영원한 기쁨, 최고의 환희를 누리는 존재(sat)이고 의식(cit)이며, 둘이 아닌 존재, 무한한 존재’여야 한다.

 

“영원하지 못한 사물 가운데 유일하게 영원하며, 의식 있는 것들 가 운데 그 의식의 근원이 되며, 여럿 중에 하나이고, 홀로 여럿의 욕망을 채워주는 이가 있도다. 현명한 자는 그 아뜨만을 깨닫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리라. 그러나 그 외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하리라. 온 세상에 유일 한 모든 사물 속에 든 아뜨만은 하나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내도다. 현명 한 자는 그 아뜨만을 깨닫게 되어 영원한 기쁨을 얻으리라. 그러나 그 외 다른 자들은 그렇지 못하리라. ‘그는 바로 이렇다’ 하고 현자들은 깨 닫지만 아뜨만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단지 최고의 환희라 할 뿐이로다.” 27)

 

       27) 까타 우파니샤드, pp.137-138.

 

“브라흐만에 집중하라. 존재하는 아뜨만이며, 의식이며, 환희이며, 둘 도 아닌 그 브라흐만에, 존재(sat)이며, 의식(cit)이며, 환희(ānanda)이며, 둘이 아닌 그 브라흐만에 집중하라.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28)

“야쟈발끼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바로 그이다.’ ‘그대는 브라흐만의 머무르는 자리이다.’ ‘내가 브라흐만이다.’ 등의 위대한 구절들에 명상하 라. ‘그’라고 한 것은 초월적인 존재나, 전지全知의 속성과 환영력(幻影力, māyā)을 가진 자, 참(sat), 의식(cit), 환희(ānanda)로 된 자, 세상의 근원인 자를 말함이라. 또한 그 존재가 바로 내부의 감각들에 감화되고, 자각의 식을 갖게 되는 ‘그대’라고 불린 자이다. ‘그’와 ‘그대’라고 불린 지고의 아 뜨만과 개체 아뜨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환영력과 무지를 버리고 나면 아뜨만과 다르지 않은 브라흐만이 된다.” 29)

 

      28) 와즈라수찌 우파니샤드, p.860.

     29) 빠잉갈라 우파니샤드, pp.884-885. 

 

“즐거움이란 무한함에 있는 것이다. 유한한 것에는 즐거움이 없다. 무 한한 것만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무한함이란 무엇인지 알 아야 한다. 무한함이란 누가 누구를 보지 않고, 누가 누구를 듣지 않고, 누가 누구를 알지도 않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다. 유한함은 누가 누구를 보고, 듣고, 아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다. 무한함은 불멸이며 유한함은 죽음이다. 그의 무한함은 아래요, 위요, 뒤요, 앞이요, 남쪽이요, 북쪽이 다. 그는 모든 것이다. 자각의식을 통해서 사람은 “나는 ’아래‘이다. 나는 ’위‘이다. 나는 ’서쪽‘이다. 나는 ’동쪽‘이다. 나는 ’남쪽‘이다. 나는 ’북쪽‘이 다. 나는 이 모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 무한함은 아뜨만이다. 이 아뜨만이 아래, 위, 뒤, 앞, 서쪽, 동쪽, 남쪽, 북쪽. 아뜨만이 이 모든 것이 다. 이 아뜨만이 보고, 마음으로 성찰하고, 진정 아는 자이다. 이것을 아 는 자는 아뜨만 안에서 유희를 누리고, 아뜨만 안에서 희열을 느끼고, 아 뜨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아뜨만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아뜨만 안에서 스스로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세상에서의 모든 움 직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통 치자 아래로 간다. 결국 파멸로 이르는 세계로 가게 된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뜻으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30)

 

     30)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p.392-394. 

 

이처럼 아뜨만/브라흐만에게 부여하는 속성은 인간의 세속적 염원을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채워보려는 시도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의 도와 목적이 노골적으로 천명되고 있다.

아뜨만/브라흐만을 알게 된 자 가 확보하게 되는 능력과 이익은,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질병이나 슬픔, 걱정도 없이 완전한 건강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얻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는 삶’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있다. <깨달은 자에게는 죽음도 질병도 슬픔조차도 없다.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그는 하나가 된다. 그는 세 개가 되기도 하고, 다섯이 되기도 하 고, 일곱이 되기도 하고, 아홉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열하나가 되기 도 하고, 백 열개가 되기도 하고, 혹은 천이십 개가 되기도 한다. 음식이 깨끗하고 성스러우면 소화기관이 깨끗해지고, 소화기관이 깨끗하면 기억 력이 좋게 되고, 기억력이 좋게 되면 가슴속 모든 매듭이 풀어진다.>” 31)

 

     30)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p.392-394. 

 

“다시 제자들이 <이 육신의 브라흐만의 자리에 담긴 대공大空 속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고 모든 생물과 모든 욕망들도 들어 있다고 하셨31)  습니다. 그러면 이 육신이 노쇠하면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면, 스승은 이렇게 답한다. <이 육신의 노쇠함에도 그 브라흐 만은 노쇠하지 않는다. 육신이 무기에 상처를 입고 죽음을 당해도 그 브 라흐만(의 자리)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이 브라흐만은 참이요, 이 안에 모든 욕망들이 담겨 있다. 이 아뜨만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없고, 노쇠함 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고, 걱정이 없고, 갈증이 없으며, 참 욕망 이요, 참 의지이다. 백성들이 그 왕의 명령을 받들 듯, 그는 그 안에 담긴 어떤 것을 원하든 그 어떤 자리 땅을 원하든, 그 원함대로 그것을 모두 취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행함으로써 얻은 것은 모두 (저 세상에 갈 때) 사라지는 것처럼, 아그니 제례 등을 통해 지은 선업도 그 업보로 받을 것을 받으면 사라진다. 이 행함이 우선되는 인간의 세상에서 아뜨만과 그 참 욕망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은, 어느 세상에서도 그 원하 는 대로 얻는 자가 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아뜨만과 참 욕망을 알고 세상을 뜨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얻으리라. 그러한 자 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조상들의 세계에 가기를 원하면, 그러한 뜻만으로 조상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조상들의 세계에 있는 것을 모두 얻으니, 그 들은 그들이 원하는 조상들 세계의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되리라. -어 머니의 세계에/형제들의 세계에/자매들의 세계에/동료들의 세계에/향기 와 화환이 있는 세계에/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 세계에/음악의 세계에/ 여자들의 세계에/-그가 어떤 세계를 원하든지, 그가 어떤 것을 원하 든지, 그러한 뜻만으로 그것들이 그에게 나타나니, 그는 원하는 것을 얻 어 풍족한 자 되리라. 그 아뜨만은 세상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세상들 을 잘 보존하게 하는 다리(橋)와 같다. 이 다리와 같은 아뜨만은 낮과 밤 이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아뜨만은 나이도, 죽음도, 슬픔도, 선과 악도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아뜨만이 죄악이란 조금도 없는 브라흐 만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리와 같은 이 아뜨만에 다다르면 장 님은 눈을 뜨고, 상처 입은 자는 상처가 나을 것이며, 환자는 병을 고친 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어두운 밤도 낮이 된다. 이 브라흐만의 세계는 항상 빛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욕의 실천으로, 경전과 스승 의 말씀으로 브라흐만의 세계를 알게 된 사람은, 반드시 그 브라흐만의 세계를 가게 된다. 모든 세상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는 풍요로운 자 가 될 것이다.” 32)

“아뜨만이란 무엇인가. 조물주 쁘라자빠띠가 말했다. “어떠한 죄악도, 늙음도, 죽음도, 슬픔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는 그 아뜨만은 참 욕망을 가졌으며 참 의지를 가졌으니, 그것이 그대들이 알아야 할 것, 그대들이 찾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뜨만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은 모든 세계를 얻고 모든 욕망을 이루리라.” 33)

“브라흐만의 지혜를 아는 자는 ‘브라흐만은 있다’고 한다. 고행을 통 해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은 ‘고행이 브라흐만에게로 이르는 문’ 이라고 한다. 또한 브라흐만에 몰두하여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는 자들은 ‘오움’이 브라흐만의 ‘위대함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혜와 고행과 명상으로 브라흐만을 알 수 있다.깨달은 자는 신들보다 높은, 지고의 위 치에 있는 브라흐만조차 초월한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서 브라흐만을 구한 자는 스러지지 않는 환희를 가지리오, 영원함을 얻으리오, 질병에서 자유롭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 ‘수레에 탄 자’는 그 안에 앉아 있으면서, 그를 지배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렇게 해서 저 아뜨만과 결합 하는 것이다.” 34)

 

     32)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p.396-402.

     33)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p.405. 

    34)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777.

 

아뜨만/브라흐만은 이처럼 지각경험적 근거를 갖지 않는 형이상학적 설정이기 때문에, 아뜨만/브라흐만을 알고 만나 하나가 되는 방법도 이 러한 형이상학적 구조에 상응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우파니샤드에서 보이는 아뜨만/브라흐만의 체득 방법으로는 ‘지식과 이해’ 35) ‘감각 제어 -고행, 금욕, 요가’ 36) ‘집중과 삼매’ 37) ‘요가삼매와 망아忘我’ 38) ‘비의秘義 적 방법-오움(Oṃ, auṃ) 수행’ 39)이 있다.

 

      35) 까이왈리야 우파니샤드, p.901, p.906; 까타 우파니샤드, pp.119-121.

      36) 까타 우파니샤드, p.125, pp.144 –146; 쁘라샤나 우파니샤드, p.156; 문다까 우파니 샤드, p.202.

      37) 빠잉갈라 우파니샤드, pp.883-885.

      38) 까타 우파니샤드, p.144;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795, pp.797-798; 빠잉갈라 우파니 샤드, p.893.

      39) 만두끼야 우파니샤드, pp.214-219; 쁘라샤나 우파니샤드, p.169, p.172; 까타 우파 니샤드, p.114; 문다까 우파니샤드, pp.196-197;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777, pp.797-799, p.801. 

 

‘변화로 인한 상실의 불안과 고 통’ 및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로 인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해법이 마련한 수행론이다.

그러므로 이들 수행법은 경험세계의 속성인 ‘변화와 욕구충족의 제한성’과, 아뜨만/브라흐만에 부여한 속성인 ‘영원불 멸과 무제한의 전능’이 대비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변화와 욕구충 족의 제한성’을 뒤로 하고 ‘영원불멸과 무제한의 전능’으로 향하는 ‘상반 적 대비구조’로써 읽으면, 이 수행론을 관통하는 일관된 발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지식과 이해’는, 아뜨만/브라흐만에 부여된 ‘불별의 영원성’과 ‘전능의 주재력’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 논리/이론적 정합성에 대한 이해를 수립하려는 노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뜨만/브라흐만을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해법은 오로지 ‘개념적인 해법이고 언어적인 출구’이다.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은 이처럼 오직 개념/언어적 설정일 뿐이기에, 자기주장 의 내용을 담은 ‘지식’과 그 지식의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이해’가 전면적 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경험적 근거에 의해 검증할 수 있는 지식이나 이해들은 언제든지 부당한 내용을 수정하면서 진화해야 살아남는다. 더 견실한 근거와 내용으로 자신을 보완한 지식이나 이해일수록 신뢰도가 높아지고, 높아진 신뢰도만큼이나 수용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험적 주장들은 항상 수정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 수정과 보완 에 열려 있을수록 그 지식과 이론의 생존력은 커진다. 이에 비해 형이상 학적 주장은 처음부터 무흠결의 완전성을 유지해야 한다. 애초부터 경험 적 검증이 불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지식이나 이해가 검증 을 통한 수정이나 보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형이상학적 전 제에 조금이라도 내용수정이 발생하면 그 주장의 전체체계가 무너진다.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이나 정합성은 갖출 수 있어도, 자기수정을 허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지식/이 론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주장이 요구하는 지식이나 이해는, 견실한 경험적 논거들을 요구하는 ‘넓고 깊고 역동적으로 형성되는 합리적 성찰’이 아니 라, 수정이나 변화를 거절하는 ‘폐쇄적으로 완결된 내용과 논리’에 대한 지적 수용일 뿐이다. ‘아뜨만/브라흐만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그런 것이 다. 이때의 지식이나 이해는, 자기수정에 열린 합리적 태도와 성찰적 능 력의 계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지적知的 수행론은, 합리적이거나 성찰적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 다. 무릇 합리나 성찰은 변화하기 마련인 경험적 근거에 개방적이어야 생명력을 지닌다. 우파니샤드의 수행론은 변화하는 모든 지각경험적 근 거를 뛰어넘으려는 형이상학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합리와 성 깨달음 담론구성의 첫 관문 55 찰의 개방적 역동성을 외면한다. 감각의 제어를 특징으로 삼는 ‘고행이나 금욕에 의거한 요가 수행’도 합리적 전통의 윤리적 노력과는 그 맥락이 다르다.

경험적 근거에 열려 있는 합리적 전통에서는, 변화하고 유한한 감관적 욕망에 대한 금욕적 자기 통제력을 통해, 경험적 근거를 지닌 합리적 성찰과 삶의 주도력 및 경험의 질적 향상을 추구한다.

어떤 방식의 금욕적 노력일지라도, 불변의 공간이나 전능의 힘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우파니샤드의 금욕적 감각제어 수행노력은 ‘변하고 한정적인 감각경험’을 넘어 ‘불변의 완전함과 전능’을 지향한다.

모든 감관적 욕망은 ‘변하고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불변의 완전함과 전능’을 목표로 삼는 수행론에서는 경험적 욕망 이 근본적으로 절연絶緣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 수행론에서의 금욕수행 은 극단적 유형이 되기 쉽다.

‘욕망 제어’에 그치지 않고 ‘욕망 소거’를 지향하게 된다.

고행이 모범적 유형으로 일반화되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해법에서의 ‘집중과 삼매’도 경험주의적 전통 에서 지니는 의미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경험주의 전통의 수행론에서 ‘집중과 삼매’는 일반적으로, 목표달성을 위한 일정한 정신적 초점 유지와 안정을 ‘변하는 경험현상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한다.

이에 비해 우파니 샤드의 수행론은 ‘불별의 영원’과 ‘전능의 힘’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집중 과 삼매’는 경험현상과의 절연絶緣을 요구하는 것이다.

과연 경험현상과 격리된 집중이나 삼매가 가능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로 제쳐두더라도, 아뜨만/브라흐만을 겨냥하는 집중과 삼매의 의미는 그렇다고 보아야 한 다.

목표가 다르면 같은 수단이라도 의미와 내용이 달라진다. 집중과 삼 매의 의미나 수행자가 추구하는 내용은, 경험주의적 해법의 수행론과 형 이상학적 해법의 수행론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붓다의 무아 통찰, 그리고 무아를 체득적으로 확인하는 수행에서 등 장하는 삼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각적 근거를 지닌 경험현상과의 관계 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붓다의 무아 통찰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현상 범주를 떠나지 않는다.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요가삼매를 통한 망아忘我’ 역시 자아에 대한 환각을 벗어버리는 것이므로 붓다의 무아와 같은 것이 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요가삼매와 망아’는 어디까지나 아뜨만/브 라흐만의 ‘불변의 동일성’과 ‘만능의 주재력’을 만나기 위해 채택된 방법 이라는 점에서, 경험적 자아의 무아 지평에 관한 언어가 아니다.

경험적 자아 속에서는 ‘불변의 동일성’과 ‘전능의 주재력’이 목격되지도 확보되지 도 않기 때문에, 우파니샤드의 수행론은 어떻게든 경험적 자아를 떠나려 한다.

‘변화하는 경험적 자아’를 버리고 그 자리를 ‘불변의 형이상학적/개 념적 자아’로 채우려 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 수행론이 말하는 요가삼 매는 경험적 자아를 잊으려는 수행이고, 망아忘我는 경험적 자아의 삭제 를 염두에 둔 기호이다.

그런 삭제가 과연 가능한 것이며 의미 있는 것인 지는 불문하더라도 말이다.

우파니샤드 수행론의 현실적 중심은 비의秘義적 방법인 ‘오움(Oṃ, auṃ) 수행’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릇 합리성은, 지각적 근거를 가 진 경험을 통해 검증되는 이해와 법칙일 때 보편성을 지닐 수 있고 이로 운 문제해결력을 지닐 수 있다.

자연과학적 합리성이 그토록 탁월한 보 편적 호소력과 문제해결력을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합리 성도 검증가능성을 회피하지 않는 경험주의적 합리성이어야 건강한 보편 적 호소력과 이로운 문제해결력을 지닌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경험주의적 합리성은 지각적 근거를 지닌 경험을 중시하며 검증가능 성을 수용하기 때문에, 경험주의적 해법에서 제시하는 수행론은 합리성 을 벗어나지 않는다.

검증가능한 조건인과에 의거하고 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의 수행론은 일관되게 ‘합리적’이다.

선禪 수행이나 삼 매 현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 어떤 신비주의적 비약이나 주술적 비의秘義 가 없다.

다만 붓다 수행론의 ‘합리성’은 지적 사변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 ‘폭 넓고 층 깊은 합리성’을 보여준다.

(이 점은 이 글의 초점이 아니므 로 더 이상 거론하지는 않는다. 다만 깨달음 담론의 구성을 위해서는 붓다 수행 론이 지니는 합리성의 문제를 반드시 성찰해야 한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이에 비해 형이상학적 설정에 의거한 수행론은 합리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경험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합리성을 채택하면 형이상학적 전제 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의거한 수행론도 형식논리적 정합성 이나 일관성은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근거를 지닌 합리성, 검증에 열려있는 합리성에는 애초부터 막혀 있다.

그런데 수행론은 ‘경험적 체득 과 구현’을 목표로 하는 체계이다.

그렇다면 불변의 동일성이나 전능의 주재력 같은 ‘비경험적 목표’를 ‘경험세계’에서 체득하거나 구현할 수 있 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수행론인 셈이다.

그 원점에서부터 경 험적 범주를 일탈한 형이상학이, 경험범주를 벗어난 목표를 경험세계에 서 구현하려는 것.-이것은 근본적인 자기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니샤드는 수행론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의 형이상학적 해법이 단지 공상이 아니라고 설득하기 위해, 그들의 해법이 진리의 위상을 차지하고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수행론으로써 자신을 둘러싸는 전략을 취 한다.

일종의 위장막이고 속임수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적 구현’에 관한 주장을 퍼뜨리고 설득력을 확보하려는 기만적 위장전술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애초부터 경험적 근거가 없고 경험적 검증 가능성도 닫아버린 언어이기에, 경험적 합리성으로는 설득할 수가 없다.

그들의 합리주의적 전략은 단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에서 유효한 것이지 ‘실존적/경험적 합리성’에 호소할 수가 없다.

그들의 수행론은 근본적으로 ‘경험을 통한 조건인과의 합리성’을 끌어안을 수가 없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신뢰와 기대를 갖게 해야 한다. ‘합리적이지 않지만 호소력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합리적 설득력은 없어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무엇이 대안인가. 비의秘 義적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술이나 주문이 비의秘義적 방 법의 고전적 전범이다. 주문이나 주술은 합리적 설득력은 없어도 강력한 현실 호소력을 지니 고, 비의秘義적 장치는 현실과 비현실, 경험과 비경험을 비합리적/심정적 으로 결합시키는 고리가 된다.

주문이나 주술, 제의祭儀는 이러한 비의적 장치의 전형이다. 인간은 힘든 현실의 경험을 비약적으로 넘어설 수 있 는 방법에 언제나 끌린다.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합리적 방식보다는,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불합리한 비의秘義적 방식에 끌린다. 일종의 횡재 심리랄까, 현실을 단번에 넘어설 수 있는 비술秘術은 언제나 시선을 끄는 강한 유혹이다.

비의秘義적 도약에 대한 기대와 유혹은 언제나 강력 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의적 유혹에 휘말려 삶의 합리적 향상진화의 가능성을 탕진해 버렸던가.

이 비의적 유혹의 속성을 이용하여 허위의 권좌에 앉아 세상을 농락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이 소모적 탕진과 기만적 농간의 대열에 끼어보려고 줄서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뜨만/브라흐만은 ‘불변의 영원성과 전능의 힘에 대한 인간의 기대’ 가 투영되어 설정된 개념적 존재이다.

그리고 아뜨만/브라흐만은 그에게 부여된 ‘불변’과 ‘전능’의 속성으로 인해 애초부터 경험세계와의 연결고리 가 끊어져 있다.

그런데 아뜨만/브라흐만 같은 개념적 존재를 설정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사람들의 출발지는 어디까지나 ‘경험세계의 불안한 인간 실존’이다.

‘변화’와 ‘욕구의 한정적 충족’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인지적 불안과 불만 및 고통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보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해법을 선택한 사람들은, 아뜨만/브라 흐만 같은 개념적 존재가 삶과 세상의 진리이고 실재이며 이를 통해 삶 의 실존적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해야 한다. 여기에 근원적 딜레마가 있다.

경험세계의 운명과도 같은 속성인 ‘변화’와 ‘주재력의 제한’에서 발생 하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려면 ‘불변’과 ‘전능의 주재력’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불변’이나 ‘전능의 주재력’은 경험세계에서 목격되지 않으므로 경 험세계와의 고리가 끊긴 개념적 설정으로만 확보된다.

그러나 이 개념적 설정은 애초부터 경험세계와의 고리가 끊긴 것이므로 경험적 검증이나 구현이 불가능하다. ‘불변’이나 ‘전능의 주재력’을 부여한 개념적 존재를 수립한 이유는 ‘변화’와 ‘주재력의 제한’에서 발생하는 경험세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것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련한 해법은 경험 세계와의 고리가 근원에서부터 끊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기모순적 상황 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해법의 경험세계적 타당성을 주장해야 한다. 게다가 종교나 철학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진리’나 ‘깨달음’ 같은 궁극적 가치로 대접받길 원한다. 이 자기모순은 합리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 적 관련을 경험적 검증의 근거 위에서 주장하는 인과법칙의 승인범주에 서 처음부터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그렇다면 남 은 선택은 무엇일까?

형이상학에 기대고 있는 종교에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어라’는 명제를 만들어 퍼 뜨린다.

신앙심에 호소하는 신앙종교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데 수행론을 축적해 온 전통에서는 신앙 명제만으로 형이상학적 주장을 보 호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현실과 비현실, 경험과 비경험의 단절된 계곡을 이어놓을 수 있을까?

합리적 방식이 아예 불가능하다 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결국 비의秘義적 장치들이 지닌 마력적 호소 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아뜨만/브라흐만을 세운 우파니샤드 전통에서, 아뜨만/브라흐만과 만나는 수행방법으로서 ‘오움 수행’이라는 비의秘義적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움’ 이라는 소리가 아뜨만/브라흐만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이 구사하는 의미 부여의 해석학은, 필자가 보기에 애잔할 정도로 진지하다.

 

“오움, 이 오움이야말로 모든 것, 즉 과거에 있었으며 현재에 존재하 고 미래에도 존재할 모든 것이다. 이들 시간 이외의 모든 것, 그것들 또 한 오움이다. 이 모든 것은 브라흐만이며, 아뜨만이 바로 브라흐만이다. 이 아뜨만의 네 부분이 있으니, 깨어있는 상태에 머물며 외부세계를 분별 하는 자, 일곱 부분과 열아홉 개의 입을 가지며 물질세계를 먹고 사는 바이슈바나라가 그 첫 부분이다. 꿈꾸는 상태에 머물며 내적 세계를 분 별하는 자, 일곱 부분, 열아홉 개의 입을 가지며 덜 물질적인 세밀한 것들 을 먹고 사는 따이지사가 그 두 번째 부분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상태는 바로 아주 깊은 숙면 상태. 그 깊은 숙면 상태에 머물며 희열로 만들어져 있으며 희열만을 먹고 사는 ‘의식意識’이 라는 입을 가진 ‘쁘라쟈’가 그 세 번째 부분이다. 그(쁘라쟈)는 모두의 주 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자, 내부의 통치자이며 모두의 근원, 모두의 시초 이자 모든 생명체들의 종말이다. 내적인 것을 구별하는 지혜도 아니고, 외부의 물질세계를 구별하는 지혜도 아니고, 그 둘을 구별하는 것도 아니 며, 의식의 덩어리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의식이 아닌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잡을 수도 없고, 특징지을 수도 없으며, 상상해 볼 수도 없고,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고, 오직 하나 깨달음 담론구성의 첫 관문 61 의 핵심인 진리이며, 세상을 복되게 하는 그 어떤 것이며, 둘이 아닌 그 아뜨만을 성인들은 네 번째 ‘뚜리야’라고 말했나니, 그가 바로 아뜨만, 그 가 바로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존재로다. 바로 그 아뜨만의 글자로서의 모습이 ‘오움’이다. 아, 우, 머의 세 글자 로서 그는 서 있다. 그의 세 부분이 아, 우, 머, 세 글자들이니, 아, 우, 머는 그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이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 머 무는 그 바이슈바나라는 신들 중에 바쳐진 제물을 가장 먼저 먹고, 그것 을 다른 신들에게 전하며, 이것은 아, 우, 머의 첫 글자 ‘아’와 같이 맨 처음 나서니, 이들은 ‘처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도다. 꿈꾸는 상태 에 머무는 따이자사는 바이슈바나라와 쁘라쟈 사이에, 그리고 ‘우’는 ‘아’ 와 ‘머’ 사이에 위치하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일치되는 바가 있도다. 이러 한 지혜를 아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날로 늘 것이오, 세상사에 구별을 두지 않으며, 그 가문에는 브라흐만을 알지 못하는 자가 태어나지 않으리 라. 깊은 숙면 상태에 머무는 그 쁘라쟈는 오움의 세 번째 글자 ‘머’와 공통점이 있도다. 이 둘은 각기 앞의 두 가지를 서로 잘 모아 어울려 적 용시킨다는 점과 다른 것들이 이것에 와서 합쳐진다라는 점에서 일치한 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모아 어울려 적용하게 할 수 있으므로 ‘참 모습’을 알게 되며 세상의 근원에 와서 합쳐지리라. 글자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오움은 그 어떤 이름으로도 칭할 수 없는 ‘제4의 아뜨만’ 이다.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세상의 복 그리고 둘이 아닌 오로지 유일한 모습이며, 그러므로 오움은 그 자체가 아뜨만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 안의 아뜨만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 다시 세상에 태 어나지 않으리라.” 40)

 

   40) 만두끼야 우파니샤드, pp.214-219.

 

“리그 베다를 통해 이 땅의 세상을 얻고, 야쥬르 베다를 통해 하늘과 땅 사이 세계를, 사마 베다를 통해 그 브라흐만 세계를 얻으니, 현인賢人 들은 ‘오움’을 통해서만이 이 세계들을 모두 얻을 수 있음을 안다. 물질과 영혼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평온한 그 브라흐만은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두려움도 없으며,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41)

“브라흐만을 알고자 한다면 이 ‘오움’이라는 글자의 소리 이상의 지름 길은 없도다. 이 소리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브라흐만 세상에서도 위대 한 자로 통하게 된다.” 42)

“오움의 소리는 활이요, 아뜨만은 화살이다. 그리고 불멸의 브라흐만 은 그 과녁이라 생각해보라. 자만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맞추리라. 그러 면 화살과 과녁이 하나가 되듯,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43)

“바퀴살들이 수레바퀴의 중심에 박힌 것처럼, 모든 기도氣道들이 일 제히 향하고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아뜨만은 여러 모습으로 생겨나 고 또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도다. 이 아뜨만을 ‘오움’으로 명상하라. 그 것은 그대가 어둠을 건너 저 다른 편으로 가게 하리라.” 44)

 

    41) 쁘라샤나 우파니샤드, p.172.

    42) 까타 우파니샤드, p.114.

    43) 문다까 우파니샤드, p.196.

    44) 문다까 우파니샤드, p.197. 

 

“브라흐만의 지혜를 아는 자는 ‘브라흐만은 있다’고 한다. 고행을 통 해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은 ‘고행이 브라흐만에게로 이르는 문’ 이라고 한다. 또한 브라흐만에 몰두하여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는 자들은 ‘오움’이 브라흐만의 ‘위대함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혜와 고행과 명상으로 브라흐만을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신들보다 높은, 지고의 위 치에 있는 브라흐만조차 초월한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서 브라흐만을 구한 자는 스러지지 않는 환희를 가지리오, 영원함을 얻으리오, 질병에서 자유롭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 ‘수레에 탄 자’는 그 안에 앉아 있으면서, 그를 지배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렇게 해서 저 아뜨만과 결합 하는 것이다.” 45)

“현자들이 말하였다. <명상의 대상은 두 브라흐만이니, ‘소리로 된 브 라흐만’과 ‘소리로 되지 않는 브라흐만’이다. 소리로 되지 않은 브라흐만 이 소리를 통해 드러나도다. 그 소리로 된 브라흐만이 ‘오움’이다. 그것 을 넘어서야 드디어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브라흐만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소리로 된 브라흐만의 여러 모습을 초월하여야, 지고 하고, 소리로 되어 있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은 그 브라흐만에 가서 하나 가 되는 것이다. 그것에 도달한 자들은 아무런 특성도 없게 되고, 여러 꽃들의 즙이 모여 같은 꿀이 되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도 아무런 구분이 없게 된다.>” 46)

 

     45)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777.

     46)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p.798-799. 

 

“또 다른 현자들이 말하기를, <수면 상태에서 그러하듯, 감각을 안으 로 모은 사람, 감각을 가지고 있으나 감각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오움’이라 불리는 그 존재. 이끄는 자이며, 광휘를 가진 자. 잠이 없는 자. 나이 없는 자. 죽음 없는 자. 슬픔 없는 자. 그를 보게 된다.> 또 다른현자들도 말하였나니, <“이처럼 그(수도자)가 숨과 ‘오움’ 그리고 이 다양 한 세상과 결합하므로, 또 세상들이 그와 결합하므로, 이것을 ‘요가’(결합) 라고 하도다. 숨과 마음의 하나 됨, 감각들의 하나 됨, 그 어떤 상태의 존재도 모두 사라지는 이 과정을 ‘요가’라고 부른다.>” 47)

 

    47)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p.801. 

 

5. 󰡔대승기신론󰡕과 원효의 본각

 

󰡔대승기신론󰡕은 선행하는 대승교학의 통찰들을 종합하기 위해 존재 나 주체 긍정형 기호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한다.

이러한 현상은 원효의 저술에서도 일관되게 목격된다.

대승교학, 특히 동아시아 대승교학의 두 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긍정형 기호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본각本覺, 진여眞如, 일심一心, 진심眞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원효의 저술에는 이 대승 교학의 긍정형 기호들이 종합적으로 등장한다.

원효시대에는 이 긍정형 기호들이 불교 이해와 서술을 위해 활발하게 유통된 것이 주요 배경이지 만, 원효가 사유의 기본 얼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대승기신론󰡕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대승기신론󰡕은 대승교학 에서 새롭게 채택한 긍정형 용어들을 거의 망라하면서 강요綱要적 불교 종합이론을 펼치고 있는데, ‘일심一心’ ‘심진여心眞如’ ‘여래장如來藏’ ‘진여 眞如’ ‘진여성眞如性’ ‘진여정법眞如淨法’ ‘진여법眞如法’ ‘진심眞心’ ‘불생불 멸不生不滅’ ‘심원心源’ ‘구경각究竟覺’ ‘본각本覺’ ‘진각眞覺’ ‘자성청정심自性 淸淨心’ ‘법신法身’ ‘여래법신如來法身’ ‘심체心體’ ‘자성自性’ 등의 용어가 모 두 채택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승기신론󰡕이나 원효사상, 그리고 이런 용어들을 구사하는 동아시아 대승교학과 선종의 불교적 정 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이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긍정형 기호 들의 의미와 텍스트에서의 용법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불교적 정체성 에 대한 판단이 크게 달라진다.

해석학적 선택에 따라서는 이런 용어들 이 불교의 내용을 깊고 풍부하게 할 수도 있고, 반反·비非 불교적 일탈 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원효의 경우라면 이 런 용어들이 불교적 정체성의 심화와 풍요에 기여했던 쪽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근거를 일부나마 확인하려고 한다.

󰡔대승기신론󰡕이 채택하고 있는 긍정형 기호들 가운데서도 본각은 특 히 돋보이는 개념이다.

다른 용어들은 선행 문헌들과 교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본각이라는 용어는 󰡔대승기신론󰡕에서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 이다.

깨달음에 관한 대승의 통찰을, 󰡔대승기신론󰡕은 본각本覺·시각始 覺·불각不覺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통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각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탐구하려면 이 세 개념의 통합적 구조를 모두 음미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불교적 깨달음 담론구성’의 선결과제, 즉 본각을 읽는 사유방식의 문제를 다루어보는 것이 초점이므로, 󰡔대승기신 론󰡕에서 등장하는 본각 개념과 그에 대한 원효의 관점을 이 초점에 제한 시켜 거론한다.

필자는 그간 본각을 ‘본래적 깨달음’ 혹은 ‘본연적 깨달음’으로 번역해 왔다.

그런데 번역어를 접하는 독자의 반응을 고려할 때,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이미 인간 내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유방식’과 더 쉽게 결합하는 것은 ‘본래적 깨달음’이라는 말로 보여, 이제는 ‘본연적 깨 달음’이라는 말을 번역어로 사용하고 있다.

‘본연적’이라는 말도 ‘참된 것/ 온전한 것의 내면적 선재先在’라는 사고방식과 결합할 수 있는 것이지만, ‘본래적’이라는 말보다는 그 정도가 덜 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본각을 ‘본연적 깨달음’이라는 말로 번역할 때는, ‘참된 것/온전한 것의 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사유방식의 표현이 아니라, ‘참됨/온전 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의 사유방식을 반영하려는 것이다.

‘본연本 然’이라는 개념의 구체적 내용도 이러한 사유방식의 연장선에서 부여하 려고 한다.

더 적절한 번역어를 찾으면 언제든지 수정할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본각本覺·시각始覺·불각不覺에 대한 이렇게 설명 한다.

 

“이른바 ‘깨달음의 면모’(覺義)란 ‘마음의 본연’(心體)이 ‘[근본무지에 따 라] 분별하는 생각’(念)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근본무지에 따라] 분별하 는 생각(念)을 떠난 지평’(離念相)은 허공세계처럼 모든 곳에 두루하여 ‘모 든 존재가 하나로 만나는 지평’(法界一相)이니, 이것이 바로 ‘진리와 같아 진 분’(如來)의 ‘평등해진 진리 [그 자체인] 몸’(平等法身)이다. 이 ‘진리 [그 자체인] 몸’(法身)을 조건으로 ‘본연적 깨달음’(本覺)이라 부르니, 어째서인 가? ‘본연적 깨달음의 면모’(本覺義)란 것은 ‘비로소 깨달아 가는 면모’(始 覺義)에 대응하여 설하는 것이니,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란 것은 바로 ‘본연적 깨달음’(本覺)과 같기 때문이다. ‘비로소 깨달아감의 면모’(始覺義) 란 것은, ‘본연적 깨달음’(本覺)을 조건으로 하여 ‘깨닫지 못함’(不覺)이 있 고 [다시 이] ‘깨닫지 못함’(不覺)을 조건으로 하여 ‘비로소 깨달아감’(始覺) 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48)

 

   48) 󰡔대승기신론󰡕(T32, 576b11~16):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 不徧,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 義說, 以始覺者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텍스트의 의미맥락을 무시하고 용어만을 본다면, 심체心體·법신法 身·본각本覺 등의 용어는 마치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불변의 본질 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독자적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의 언어용법에서 나타나는 ‘용어들의 상호관계’, 다 시 말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개념들의 상호 조건성’을 주목한다면, 이런 용어들이 실체적 존재를 지시하는 독자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본각과 시각 및 불각은 상호 조건적으로 성립하는 개념이어서 각 용어에 해당하는 독자적 본질을 지니는 것이 아 니다.

본각과 시각과 불각은 불변의 본질이나 독자적 실체를 지시하는 용어가 아니며, 그 기호에 담기는 내용과 의미는 어디까지나 상호 조건적 으로, 다시 말해 연기적으로 구성된다.

역동적으로. 본각이 ‘깨닫지 못함’(不覺)과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을 조건으로 삼 아야 성립하는 것이라면, 본각은 본래부터 이미 마음이나 내면에 독자적 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비로소 깨달 아감’(始覺)에 의해 ‘깨닫지 못함’(不覺)을 극복할 때라야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각은, 마음이나 존재 내면에 이미 선재先在하는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고 있는’(不覺) ‘지금 여기’에서, 자각과 노력을 통해 비로소 확보하게 되는 ‘비로소 깨달아감’ (始覺)을 조건으로 삼아,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후현적後顯的 ‘참됨/온전 함’인 것이다.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및 불각不覺이 상호 조건적으로 성립하는 개념 이므로 독자적 실체나 불변의 본질을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는 점을, 원효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요지(大意)는,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은 ‘깨닫지 68 불교철학❚제2집 못함’(不覺)[이라는 조건]에 기대어 있고 ‘깨닫지 못함’(不覺)은 ‘본연적 깨 달음’(本覺)[이라는 조건]에 기대어 있으며 ‘본연적 깨달음’(本覺)은 ‘비로 소 깨달아감’(始覺)[이라는 조건]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 이다. 이미 서로에 [조건으로서] 기대어 있기에 곧 [불변의 독자적] 본질/ 실체(自性)가 없으니, [불변의 독자적] 본질/실체(自性)가 없다는 것은 곧 [불변의 독자적 본질/실체로서의] 깨달음(覺)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변 의 독자적 본질/실체로서의] 깨달음(覺)이 있지 않다는 것은 서로가 [조건 으로] 기대어 있기 때문인데, 서로가 [조건으로] 기대어 이루어지니 곧 깨달음(覺)이 없지도 않다. 깨달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이라 말하 는 것이지, [불변의 독자적] 본질/실체(自性)가 있어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의 깨달음을 간략히 설명함’(略明二覺)을 여기에서 마친다.” 49)

 

    49) 󰡔기신론소󰡕(1-708): 此中大意, 欲明始覺待於不覺, 不覺待於本覺, 本覺待於始覺. 旣 互相待, 則無自性, 無自性者, 則非有覺. 非有覺者, 由互相待, 相待而成, 則非無覺. 非無覺故, 說名爲覺, 非有自性名爲覺也. 略明二覺竟在於前. 

 

“만약 그대가 ‘[본래 번뇌가 끊어져 있는] 본연적 깨달음이 있기 때문 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한다면, 끝내 [깨달아 비추는 작용으로 번뇌를 끊는]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 없을 것인데, 무엇에 의거하여 [현실적으 로 존재하는] 범부가 있는 것이겠는가? 그 범부에게도 끝내 ‘비로소 깨달 아감’(始覺)이 없다면 [범부에게는 비로소 깨달아감으로 회복해야 할] ‘본연 적 깨달음’(本覺)도 없을 것인데, 어떤 [있지도 않은] ‘본연적 깨달음’에 의 거하여 범부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이런 주장은,] [본래부터 번뇌가 끊어 져 있는] ‘본연적 깨달음’(本覺)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함’(不覺)은 본래 부터 없고, ‘깨닫지 못함’(不覺)이 없으므로 끝내 [깨달아 비추는 작용으로  번뇌를 끊는]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 없을 것이며, ‘비로소 깨달아감’ (始覺)이 없으므로 [비로소 깨달아감으로 회복해야 할] ‘본연적 깨달음’(本 覺)이 본래부터 없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본연적 깨 달음이 없다’[는 말에] 이른 것은 그 연원이 ‘본연적 깨달음이 있다’는 것 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본연적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비로소 깨달음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하고, ‘비로소 깨달아감이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함 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하며, ‘깨닫지 못함이 있다’는 것은 ‘본연적 깨달 음’(本覺)을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래 [󰡔대승기신론󰡕의] 문장에서 <‘본연적 깨달음의 면모’(本覺義)란 것은 ‘비로소 깨달아 가는 면모’(始覺 義)에 대응하여 설하는 것이니,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란 것은 바로 ‘본연적 깨달음’(本覺)과 같기 때문이다. ‘비로소 깨달아감의 면모’(始覺義) 란 것은, ‘본연적 깨달음’(本覺)을 조건으로 하여 ‘깨닫지 못함’(不覺)이 있 고 [다시 이] ‘깨닫지 못함’(不覺)을 조건으로 하여 ‘비로소 깨달아감’(始 覺)이 있다고 말한다>50)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거듭하여 바뀌어 가면서 서로 조건으로 삼음을 알아야 하니,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은 없 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51)

 

         50) 󰡔대승기신론󰡕(T32, 576b14~16).

         51) 󰡔별기󰡕(1-683b~684a): 若汝言由有本覺本來無凡, 則終無始覺, 望何有凡者? 他亦終無 始覺則無本覺, 依何本覺以說無凡? 當知由有本覺故本無不覺, 無不覺故終無始覺, 無 始覺故本無本覺. 至於無本覺者源由有本覺, 有本覺者由有始覺, 有始覺者由有不覺, 有不覺者由依本覺. 如下文云,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卽同本覺. 始覺義 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當知如是展轉相依, 卽顯諸法非無而非 有, 非有而非無也. 

 

위에 인용한 󰡔대승기신론󰡕의 내용 가운데 “이른바 ‘깨달음의 면모’(覺 義)란 ‘마음의 본연’(心體)이 ‘[근본무지에 따라] 분별하는 생각’(念)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마음의 본연’(心體)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곧 󰡔대승기신 론󰡕과 원효가 구사하는 ‘본각本覺’ ‘일심一心’ ‘진심眞心’ ‘심원心源’ ‘진각眞 覺’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법신法身’ ‘여래법신如來法身’과 같은 긍정형 기 호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사유방식을 기준으로 삼아 볼 때, 해석학적 선택지는 앞서 거론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는 ‘마 음의 본연’(心體)을 <마음이나 존재에 이미 내재하는 불변의 ‘참된 것’ ‘완 전한 것’>으로 읽고 그 기호들에 ‘불변의 본질적 속성’이나 ‘현상 배후의 독자적 실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본 연’(心體)을 <새로운 능력을 확보할 때 비로소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참됨’ ‘온전함’>으로 읽고 그 기호들에 ‘본질적 불변성’이나 ‘실체적 독자성 및 배후적 지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본질이나 실체를 지시하는 기호로 해석하는 전자의 사유방식을 채택 한다면, 이러한 기호들로 직조된 교학이나 이론은 불교적 사유 정체성과 결별하게 된다.

그것은 동, 서양에 걸쳐 넓게 포진한 ‘본질/실체를 설정하 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연대하는 것이며, 붓다가 혁명적으로 극복한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개념체계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이런 기호들에 대한 근대 이전의 이해에는 두 가지 사유방식이 혼재 하고 있는데 비해, 학문적 발전을 자부하는 근대 이후의 불교학에서는 오히려 전자의 사유방식에 의한 독법이 압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본연’(心體)이나 ‘본연적 깨달음’(本覺)을 <새로운 능력을 확보 할 때 비로소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참됨’ ‘온전함’>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을 때, 이 용어들은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참됨 /온전함을 후현後顯시킬 수 있는 잠재적 능력 혹은 잠재적 가능성’이 그 것이다.

참됨/온전함을 경험지평에 구현시킬 수 있는 조건들(始覺)을 확보해 갈 수 있는 능력이 깨달음의 주체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 려 있어야 하다.

이런 까닭에 ‘마음의 본연’(心體)이나 ‘본연적 깨달음’(本 覺)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나는 ‘후현後顯된 참됨/온전함’이고, 다른 하나는 ‘참됨/온전함을 후현後顯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실제로 󰡔대승기신론󰡕과 원효는 이들 용어들에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부여하고 있 다.

결국 ‘본연적 깨달음’(本覺)이라는 용어에는 ‘후현後顯되는 참됨/온전 함’과 ‘참됨/온전함을 후현後顯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미를 결합시켜 보면, 본각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능력을 확보할 때 비로소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참됨’ ‘온 전함’>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원효는 ‘참됨/온전함을 경험지평에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始覺)을 계발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힘을 ‘본각이 지닌 불가사의한 훈습熏習의 힘’이라고 부른다.

 

“ ‘깨달음의 면모’(覺義)라는 것에는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연적 깨달 음’(本覺)과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을 말한다. ‘본연적 깨달음’(本覺)이란 이 마음(아리야식)의 ‘본래면모’(性)가 ‘깨닫지 못함의 양상’(不覺相)을 벗어 난 것을 말하니, 이 [마음의] ‘깨달아 비추는 본래면모’(覺照性)를 ‘본연적 깨달음’(本覺)이라 부른다. 아래 󰡔대승기신론󰡕의 문장에서 <이른바 [‘참 그대로임’(眞如)] ‘스스로의 본연’(自體)에 위대한 지혜 광명의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52)라고 한 것과 같다.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란, 곧 이 마음 (아리야식)의 ‘본연’(體)[인 ‘본연적 깨달음’(本覺)]이 ‘근본무지’(無明)라는 조건에 따라 움직여 ‘[근본무지에 따라] 잘못 분별하는 생각’(妄念)을 짓지만, ‘본연적 깨달음’(本覺)의 ‘거듭된 영향력’(熏習力) 때문에 점점 ‘깨달음 의 작용’(覺用)이 있게 되다가 궁극에 이르러서는 ‘본연적 깨달음’(本覺)과 다시 같아지니, 이것을 ‘비로소 깨달아감’(始覺)이라 부른다.” 53)

 

     52) 󰡔대승기신론󰡕(T32, 579a15): “復次,真如自體相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 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恒。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53) 󰡔별기󰡕(1-683b5~11): 言覺義者, 卽有二種, 謂本覺始覺. 言本覺者, 謂此心性離不覺相, 是覺照性, 名爲本覺. 如下文云, “所謂自體有大智惠光明義故.” 言始覺者, 卽此心體隨 無明緣動, 作妄念, 而以本覺熏習力故, 稍有覺用, 乃至究竟, 還同本覺, 是名始覺.   

 

“이 ‘[분별망상의] 네 가지 양상’(四相)을 총괄하여 ‘[분별하는] 첫 생 각’(一念)이라 부르니, 이 ‘[분별하는] 첫 생각’(一念)과 ‘[분별망상의] 네 가지 양상’(四相)에 의거하여 ‘네 가지 지위’(四位)에 차례로 나아감을 밝 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본래 ‘근본무지 의 깨닫지 못하는 힘’(無明不覺之力)에 의거하여 ‘생겨남의 양상’(生相) 등 갖가지 ‘[허망한] 꿈과 같은 분별하는 생각’(夢念)을 일으켜 ‘마음의 본 원’(心源)을 동요시켜 바꾸어서 [마침내 분별망상의] ‘사라짐의 양상’(滅相) 에까지 이르고, 오랫동안 ‘[근본무지를 조건으로 삼는] 모든 세계’(三界) 속 에 꿈꾸듯 빠져들어 ‘여섯 가지로 과보를 받는 세계’(六趣)로 흘러 다니 다가, 이제 ‘본연적 깨달음의 불가사의한 거듭되는 영향‘(本覺不思議熏)을 받아 [분별에 이끌리는 것을] 싫어하고 [온전한 진리세계를]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차츰 ‘본래적 근원’(本源)으로 향하여 처음으로 [분별망상 의] ‘사라짐의 양상’(滅相)을 [깨달아] 그치고, 나아가 [분별망상의] ‘생겨 남의 양상’(生相)[을 깨달아 그치는데]에 이르러 환하게 크게 깨닫고,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동요한 것이 없음을 확연하게 깨달아, 이제 고요한 것 도 없고 본래 평등하여 ‘[온전함과] 하나로 같아지는 자리’(一如床)에 머 무르게 된다. [이것은]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말한 ‘꿈속에서 강물을 건너가는 비유’ 54)와 같은 것이니, 이 경전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요지도 이와 같다.” 55)

 

     54) 대정장(大正藏) 권16,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p.410a29~b3. ; 대정장(大 正藏) 권16,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p.364c1~3.

     55) 󰡔기신론소󰡕(1-709a24~b8): 總此四相名爲一念, 約此一念四相, 以明四位階降. 欲明本 依無明不覺之力, 起生相等種種夢念, 動其心源, 轉至滅相, 長眠三界, 流轉六趣, 今因 本覺不思議熏, 起厭樂心, 漸向本源, 始息滅相乃, 至生相, 朗然大悟, 覺了自心本無所 動, 今無所靜, 本來平等, 住一如床. 如經所說夢度河喩, 此中應廣說大意如是.

 

그런데 본각을 이해하는 사유방식의 문제를 이상과 같이 형이상학적 유형과 경험주의적 유형으로 대별하여 정리하고 나면, 곧이어 또 하나의 과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온다.

<‘참됨/온전함을 경험지평에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始覺)과 이 비로소 확보하는 새로운 능력(始覺)으로 인해 드러나는 본각 지평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 그것은 인간의 경험실존에서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원 효가 언급한 ‘본각이 지닌 불가사의한 훈습熏習의 힘’의 정체도, 이 질문 에 응답한 내용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

‘깨달음 담론’을 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일 뿐 아니라, 모든 ‘깨달음 담론’이 수렵되어야 할 핵심부이기도 하다.

‘깨달음 담론구성’에 대한 필자의 전망도 결국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제대로 그리고 충실히 대답하려 면, 열린 태도와 정밀하게 고도화된 능력으로 많은 주제들을 성찰해야 한다.

기존의 교학이론으로만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칼럼식의 몇 마 디 촌평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미경 같은 미시적 성찰과 망원경 같은 거시적 시선을 동시에 작동시키면서 한 땀 한 땀 뜨개질 하 듯 채워가야 할 작업이다.

그것은 붓다의 법설과 다시 대화해 보는 여정 이며, 붓다 법설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학적 성취들과의 ‘만남과 헤어 짐’이 거듭되는 길이다.

가지 않았던 길일 수도 있고, 방치했던 길일 수 도 있으며, 놓쳤던 길일 수도 있고, 떠났던 길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길 열고 걸어보려는 의지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보태져야 비로소 드러나는 길이다.

‘깨달음 담론의 구성’은 그 길을 열어보려는 집단지성 의 협업이다.

 

6. 깨달음 독법의 새로운 모색

 

필자는 ‘본각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 하려는 첫 단추를 본각 개념을 읽는 사유방식에서 잡아보려고 하였다.

‘불교 정체성 담론’과 ‘깨달음의 방법론 담론’을 성찰적으로 구성하기 위 해서는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본각의 의미를 읽어내는 두 가지 상이한 사유방 식을 형이상학적 유형과 경험주의적 유형으로 구분하여 거론하였다.

형 이상학적 사유방식은, <본각은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며, 그것은 인간 내면이나 존재의 이면에 선재先在한다>라고 보는 시선이다.

경험주 의적 사유방식은, <본각이라 부르는 ‘참됨/온전함’은 존재론적으로 선재 先在하는 것이 아니며, 이제부터 확보하는 능력에 의해 비로소 경험하게 되고 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불변의 참된 것 /온전한 것의 내면적/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시선과, ‘참됨 및 온전 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을 주장하는 시선의 구분이었다.

본각을 보는 시선은 곧 수행론의 내용에 반영된다.

본각을 형이상학 적 시선으로 읽으면,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은 내면에 이미 본래부터 존재하지만 언어와 사유(혹은 분별망상)에 가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 ‘불 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을 드러내고 만나려면 언어와 사유를 초월해야 한다.

따라서 수행론에서는 인지인간의 운명적 면모인 언어와 사유를 부 정적으로 처리한다.

언어와 사유를 지우거나 벗겨냄으로써 가려져 있던  ‘불변의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수행론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그런데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불교인(특히 동북아시아 대승/선종 권역 구성원과 한국불교인)에게 혹 매우 익숙한 것은 아닌가?

<내 면에 혹은 우주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변의 완전한 것’이지만 언어와 분별사유에 의해 ‘가려져 있는 존재’>라는 존재론적 시선, <언어와 사유 의 장막을 벗겨내면 감추어져 있던 ‘불변의 완전하고 참된 것’이 일시에 통째로 드러나 빛을 발할 것>이라는 인식론적 시선, 이 형이상학적 존재 론과 인식론이 결합한 시선이, 자성自性·본성本性·불성佛性·여래장如 來藏·일심一心·진여眞如·본각本覺이라는 긍정기호들을 읽는 ‘깨달음 독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종 선불교의 돈오견성頓悟見性 언어와 화두 참구에도 이러한 깨달 음 독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견성見性은 <감추어져 있던 내면 의 ‘불변의 완전하고 참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깨달음이다>는 식의 이해가 혹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성佛性·자성自性· 본래면목·주인공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변의 완전한 것’이고, 그것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것이 선종 선불교의 ‘직지인심直指人心’ ‘즉심시불卽 心是佛’ ‘본래 부처’의 도리이다>라는 이해,

<그 본래부터의 완전한 존재 가 지금 그대로 현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챙겨가는 것이 묵조선黙照禪의 도리이다>라는 이해가, 선불교의 깨달음 독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 닌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유형의 깨달음 독법은 ‘우파니샤드 형이상학 의 불교적 유형’이라는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도뿐 아니라 모 든 문명권 사유의 질긴 경향이자 강력한 유혹인 형이상학적 해법이 불교 의 옷을 입고 여전히 곳곳에서 활개 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의 근거가 타당한 것이라면, 불교 내부에 자리 잡은 가장 비非불교적인 사유방식에 의해 불교의 자기 정체성과 생명력이 훼손되어 온 범위가 의외 로 광범위할 수 있다.

이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의 개입은 교학 형성의 가 장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사유 방식의 발자국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교학과 수행론에서부터 목격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남전과 북전 모두에서 교학과 수행론을 막론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내부에 자리 잡은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을 확인하고 성 찰하며 치유하는 것은 ‘깨달음 담론’이 감당해야 할 과제이다.

교학과 수 행론에 반영된 형이상학적 사유는 대부분 무아無我나 공空의 언어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확인과 성찰 및 치유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 도 직시해야 한다.

불교 내부의 강력한 반발이 가장 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결코 쉽지 않지만, 방치할 수도 없는 과제라고 본다.

불교의 미래 는 근본적으로 이 과제에 어떤 수준과 내용으로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고 본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본각’이나 ‘참됨/온전함’의 의미를 읽어내는 두 가지 상이한 사유방식이 ‘깨달음과 관련된 두 가지 비판담론’과 직결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 특히 선종을 계승하는 불교에 대해 언제 나 거론되는 두 가지 비판대상이, 다름 아닌 ‘깨달음을 보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해법’에서 발원하고 있다.

두 가지 비판대상이란 ‘깨달음 한 건주의’와 ‘깨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이다.

한국불교 전반에는 ‘한 번 깨닫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일시에 완결될 것이다’라는 기대가 수행 인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고, 특히 선종의 전통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쉽게 목격된다는 것이 ‘깨달음 한건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또 한 한국불교 구성원들은, 지적 성찰이나 언어적 표현을 깨달음의 장애요 인으로 간주하는 태도, 다시 말해 반反지성·반反언어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깨달음 반反지성주의 비판’의 요지이다.

필자는 ‘깨달음 한건주의’와 ‘깨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가 모두 ‘깨달음 에 관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 한건주의’라는 것은, 깨닫기만 하면, 화두 의심만 깨뜨리면, 단번에 완전한 깨달음을 일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단 밖에 무애도인으로 비약할 수 있다는 기대이다.

깨달음이 한 번 터지기 만 한다면, 원하던 모든 경지를 한꺼번에 모두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벅찬 설렘으로 수행에 임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들은 특히 선 종 선문의 돈오頓悟를 그 신념의 강력한 근거로 채택한다.

불교사상사, 특히 선종사의 돈점담론은 돈오를 둘러싼 형이상학적 시선과 경험주의적 시선의 충돌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이에 관한 필자의 생각은 따로 정리해 볼 계획이다.)

돈오는 선禪과 깨달음에 관한 선종의 관점을 파악하기 위한 핵심 관문이다.

필자는 돈오의 문제가 붓다의 법설을 탐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오에 관해 교계와 학계에서 진행된 현재까지의 탐구로는 돈오가 지니는 이러한 위상을 드러내기에 많이 부 족하다고 본다.

새로운 독법의 다양한 시도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영역이 다.

필자도 나름대로 음미해 왔지만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탐구해 보려고 한다. 56)

 

    56) 필자는 돈점담론을 주목해 왔는데, 이에 관한 탐구를 󰡔돈점 진리담론󰡕(서울: 세창출 판사, 2016)으로 정리한 바 있다. 앞으로도 관련 탐구를 지속적으로 추가해 볼 생각 이다. 

 

다만 돈오를 ‘깨달음 한건주의’의 근거로 채택하는 것은 엉뚱한 오독誤讀이라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라는 점은 밝혀둔다. ‘깨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의 태도를 취하는 학인들은 ‘진 리나 깨달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불가언설不可言說’을 주장한다.

‘지적 성찰과 언어는 깨달음의 방해물’이며, ‘진리나 깨달음은 사유나 언어에 의 해 파악할 수도 없고 그것들에 담아낼 수도 없다’는 관점에 선다.

이들은 모든 지적 성찰을 분별망상으로 취급하는 신비주의 인식론을 선호하고, ‘언어를 지우거나 언어에서 빠져나가야 진리/깨달음을 얻는다’고 보는 신 비주의 언어관을 채택한다.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천명은 신비주의 언어관이 즐겨 채택하는 논거이기도 하다.

‘진리나 깨달음은 불가언설不可言說’이라는 식의 언어부정적 시선은 불교의 개념체계 내에서도 그 연원이 깊다.

붓다는 ‘언어’와 ‘인간의 사유 및 욕망’의 ‘조건 인과관계’(연기)를 깊이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어에 관한 붓다의 태도는 명백히 경험주의적 시선의 연장선에 있는 것 이며, 형이상학적 시선에 의한 신비주의 언어관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붓다의 후학들 가운데는, 아마도 매우 이른 초기부터, 형이상학적 사유의 신비주의 언어관과 결탁해 버린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붓 다는 ‘언어와 사유·욕망·행위의 상호 조건인과’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언어가 지닌 부정적 역할과 긍정적 역할을 모두 ‘조건적으로’ 통찰한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관련하여 언어를 대하는 태도 역시 긍정과 부정 모두 를 아우르는 양가적兩價的 태도를 보여준다. ‘진리나 깨달음은 언어에 의 해 가려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 붓다의 태도인 것이다.

그 리고 언어가 진리나 깨달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게 하려면, 그 언어주체는 새로운 언어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태도이다.

궁극적 진리나 깨달음을 위해 언어를 지우거나 언어에서 빠져나가는 ‘신비주의의 언어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덫을 풀기 위해 ‘새로운 언어능력’을 확보하는 길을 여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며, 선 종은 이 붓다의 입장을 선禪의 범주에서 개성 있게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이해이다.

또 개인적으로도 붓다와 선종이 보여주는 이러한 언어 관에 동의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언어능력’은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 니라, 언어와 상호 조건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이해와 마음 및 행동’의 새로운 지평이다.

깨달음이나 진리 체험 등 인간의 그 어떤 경험현상의 발생도 언어를 떼어놓고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므로 언어에서 발생하 는 문제는 ‘언어와의 절연’을 통해 해결할 수 없고 ‘언어와의 새로운 관계’ 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입장으로 보인다.

‘언어와 접속한 채 언어의 덫을 푸는 제3의 길’을 연 것이 붓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제3의 길이 중도中道의 한 의미라고 본다.

언어를 어떤 관점으로 대하는 가에 따라, ‘진리나 깨달음에 대한 관점’ ‘진리/깨달음이 구현되는 세상의 내용과 그에 대한 전망’ ‘진리를 구현하는 과정’ 및 ‘깨달음 체득의 수행론’ 등에 관한 탐구방향과 내용이 달라진다.

‘깨달음 담론’의 주요내용을 결 정하는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근원적으로 언어와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언제나 언어에 대한 적극적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이것은 필자가 불교철학을 탐구하 는 초입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품어온 생각이다.

‘깨달음 담론구성’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현재까지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더 이상 관련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다. 57)

 

     57) 불교 언어관은 필자의 지속적 관심사이기에 「불교의 언어이해와 불립문자不立文 字」(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1984); 「원효의 언어이해」(󰡔신라문화󰡕 3/4합집,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87); 「언어, 붙들기와 여의기 그리고 굴리기-화두 의심 과 돈오 견성의 상관관계와 관련하여-」(󰡔동아시아불교문화󰡕 7집, 동아시아불교문 화학회, 2011); 「원효 선관(禪觀)의 철학적 읽기-선과 언어적 사유의 결합문제와 관련하여-」(󰡔동아시아불교문화󰡕 16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3); 󰡔돈점 진리 담론󰡕(서울: 세창출판사, 2017) 등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어 왔다. 향후 이 글에서 거론하는 ‘깨달음을 보는 형이상학적 사유와 경험주의적 사유의 차이’ 문제를 언어 관과 연관시키면서 그간의 탐구를 체계적으로 종합해 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불변의 참된/온전한 것’이 인간 내면이나 존재의 이면에 선재先在한다>라고 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방식에 의거한 ‘깨달음 신비주의’는 <언어와 사유의 장막 뒤에 감추어져 있 던 ‘불변의 완전하고 참된 것’과 직접 만나는 것이 깨달음이다>고 보는 시선이다.

따라서 ‘깨달음 신비주의’는,

<내면에 혹은 우주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어와 분별사유에 의해 ‘가려져 있는 존재’>라는 존 재론적 시선과,

<언어와 사유의 장막을 벗겨내면 감추어져 있던 ‘불변의 완전하고 참된 것’이 일시에 통째로 드러날 것>이라는 인식론적 시선을 수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 신비주의’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결합하 면 ‘깨달음 한건주의’와 ‘깨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를 발생시킨 다.

이렇게 보면, <완전한 것/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얻을 것이다>라는 ‘깨달음 한건주의’와 <지적 성찰과 언어는 깨달음의 방해물이고, 진리나 깨달음은 사유나 언어에 의해 파악할 수도 없고 담아낼 수도 없다>는 ‘깨 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는 결국 깨달음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동시에 이 깨달음 신비주의는 ‘깨달음에 관한 형이상학적 사유’에 의거하 고 있다.

결국 한국불교 비판담론의 주요 내용인 ‘깨달음 한건주의’와 ‘깨 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는 모두 ‘깨달음에 관한 형이상학적 사 유’의 표현인 것이다.

‘깨달음 한건주의’와 ‘깨달음 반反지성주의·반反언어주의’의 발생 연 원을 이렇게 파악한다면, 이 문제를 극복하는 길도 분명해진다.

깨달음에 관한 ‘형이상학적 독법’을 ‘경험주의적 독법’으로 바꾸는 것이 그 길이다.

깨달음 독법의 사유방식을 형이상학적 유형으로부터 경험주의적 유형으 로 바꾸는 것이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푸는 길이다.

‘불변의 참된 것/온전 한 것의 이면적/비언어적/비사유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신 비주의 시선은 놓아야 한다. 그리고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 현後顯’을 전망하는 시선, 언어와 사유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 용하는 시선을 채택해야 문제가 풀린다.

 자성·본성·불성·여래장·일심·진여·본각 등의 긍정기호들을 통 해 불교를 이해하고, 또 그런 기호들에 의거하여 수행체험을 드러내었던 전통 학인들 모두가, 지금 거론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그에 의거한 비불교적 깨달음 독법에 빠져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효를 보아 도 그렇다.

또한 ‘돈오’ ‘직지인심 견성성불’ ‘마음이 곧 부처’ ‘본래 면목’ ‘주인공’ 등의 선어禪語를 통해 수행하고, 체득 또한 그런 언어들을 통해 드러낸 선종 학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특히 실참 수행한 학 인들일수록 깨달음 독법의 비불교적 덫에 걸리지 않은 경우가 많아 보인 다.

그러나 높은 평가를 받는 전통 학인들의 언어가 모두 깨달음의 불교 적 독법을 취득했거나 그에 철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원효나 임제, 지 눌이나 성철의 언어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가 장 흔한 것은, 동일 학인에게 불교적 사유방식과 비불교적 사유방식이 혼재하는 경우일 것이다.

불교계보의 과거언어들을 탐구하는 현재학인들 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 이질적 요소들의 혼재 및 병존의 가능 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선종의 안목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붓다 선 법禪法의 핵심을 경이롭게 포착하여 놀라운 방식으로 펼쳐내는 선장禪杖 들의 경이로운 안목과 역량에 전율한다. 붓다 선법의 정지正知 지평에 곧바로 눈뜨게 해주고 그 자리에서 올려주는 ‘살려주는 말’(活句)들, 그 명확한 낙처落處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는 축복이다. 58)

 

    58) 붓다의 정지正知법문과 선종 선어禪語의 접속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시선 이기 때문에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견해의 내용은 확보하고 있지만, 글에 담아 내는 작업은 가급적 풍부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소통력과 설득력을 높여준다고 생각하여 수순을 밟아가는 중이다. 여기서는 견해의 핵심만을 밝히는 것에 그친다.

 

예컨 대 임제 선사의 언어에는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 독법’에서 솟구쳐 오르 는 생명력이 펄펄 살아 넘친다. 그것도 창발적인 방식으로. 그런데 후기 선종으로 갈수록, 특히 상단上壇법문이 정형화된 이후부터, 선종 내부에 서 선어禪語들을 형이상학적 사유로 읽어내는 경향이 확산되고 누적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삼매를 거부하고 공空에 대한 이해를 즉각적으로 체득하게 하는 것>

<불성을 직관하게 하는 것>

<삼라만상이 불성의 현현임을 깨닫게 하는 것>

<참된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주인공인 참된 자아를 성취하게 하 는 것>

과 같은 선어 독법들은 가장 널리 채택되는 유형들이다.

그리고 이런 독법들 속에서는,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형이상 학적 시선들이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게 목격된다.

특히 근대 이후의 ‘학 문 불교학’이 보여주는 선불교 탐구는 이런 이해들을 이론화시키고 있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의 선불교 독법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한 나름 의 관점을 분명하게 밝히려면 밑그림에 해당하는 폭 넓은 작업이 선행 내지 병행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체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분 작업을 유기적 연관 속에서 이어가는 수순을 꾸준히 밟아가고 있다.

붓 다와 원효와의 대화내용도 그 연관체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야 깊고 도 넓은 조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불교를 선불교의 언어나 전통교학 의 언어만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한계가 명백하다.

그렇다고 주변부에 해 당하는 사변적 이해나 현학적 지식들을 수사학적 기법으로 열거하는데 그치고 정작 알맹이는 빠뜨리는 식의 비교철학적 독법도 남의 다리 긁는 격이 되기 십상이다.

앞서 거론한 ‘불교철학’의 조건들을 갖춘 새로운 독 법들이 많이 등장해야 한다.

선종의 언어들에서는 ‘주인공’ ‘보고 듣고 말하는 자’ ‘본래면목’ ‘진심 眞心’ 등과 같은 주체긍정형 용법과 ‘자성自性’ ‘본성本性’ 등과 같은 존재  긍정형 용법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런 기호들의 의미를 실체나 본질 혹은 아뜨만에 해당하는 ‘참 자아’로 읽은 후,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는 경우는 모두 불교가 아니다. 무아/공 사상에 위배하기 때문이다>

라고 비 판하는 주장들이 적지 않다.

교학의 모든 분야가 탐구되고 그 성과가 대 중에게 개방된 이후, 일반 학인이나 전문 학인을 막론하고 자주 거론하는 단골메뉴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선종 선불교 언어에 대한 의심과 불교계 현실에 대한 실망 및 비판의식을 결합하여, 급기야

<선禪을 통한 깨달음이나 대승교학의 긍정기호에 해당하는 깨달음은 없다>

라는 주장 으로까지 내달린다.

소위 비판불교 담론에서의 여래장사상 비판 및 선종 비판은 그 전형이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선문禪門에서 ‘육근을 드나드는 자’ ‘주인 자리’ ‘보고 듣고 말하는 자’ ‘보고 듣는 그 마음’ 등의 주체긍정형 언어용법이 등장하는 맥락과 이를 통해 알려주려는 국면에 대해 너무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문禪門의 이 런 언어용법이야말로 붓다 선법의 요점을 읽는 선종 선문의 안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용법들은 학인들로 하 여금 그 자리에서, 붓다가 눈뜨게 해 주려는 ‘정지正知’ 국면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언어적 가교라고 본다.

정학定學에 대한 선종의 해석학적 기여 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선종의 이런 언어용법이 안내해 주는 경험지평에 성공적으로 접속하 는 경우라 해도, 돌아보아야 할 대목들이 있다.

비록 정련된 사고력이나 지적 소양을 갖추지는 않았고, 또 적합한 불교용어나 이론을 구사하지는 못하여도, 이 지평에 눈뜬 공부인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안의 철학적 의미나 불교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스스로 잘 모르고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여러 언어지형을 조감하면서 그 개안의 좌표를 적확하고 균형 잡힌 안목으로 읽어내고 또 언어에 담아내는 능력을 계발 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해박한 교학과 선어禪語에 대한 박학한 지식소양 을 지닌 학인, 오랜 실참實參을 누적한 학인일지라도, 이 언어용법의 지 평에 전혀 접속하지 못한 학인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선문의 언어 용법들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대부분 ‘공성 직관론’ ‘불성佛性 구현론’ ‘본 래 부처론’ 등에 그치기 쉽다. 이 경우라면, 익숙한 관점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는 열린 탐구가 요청된다.

간혹 화두참구에서 득력했다는 공부인들이 격외의 선지를 펼친다면 서 일상 언어용법들과는 전혀 만날 수 없는 언구들을 능수능란하게 굴리 는 경우를 보게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언어주체가 과연 선문 선지를 드러내는 언어용법과 그 경험지평에 얼마나 제대로 접속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선문에서는 공부인들 사이에서 정형언어(언 구)와 변형언어(소리, 몸짓 등)를 사용하면서 선문 언어용법이 열어주는 지평에 얼마나 접속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을 가동하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점검방식만으로는 옥석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어 림짐작으로 순발력 있게 예전의 언구들을 흉내 내는 경우들도 많고, 그런 흉내 내기를 마치 승패 겨루듯 하면서 한 소식한 도인 행세를 하는 경우 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선종의 선문 안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도인 병 사례들의 전형들이다. 이 병에 걸려 변형된 아만我慢(이런 것은 법만法 慢이라 하기도 어렵다)으로 우쭐거리며 뻣뻣하게 목 굳고 꽉 막혀버린 경 우는 지금도 쉽게 목격된다. 59)

 

    59)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의 소견 일부를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 침’」, 󰡔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서울: 운주사, 2014)에 피력한 바 있다. 

 

‘육근을 드나드는 자는 누구인가?’ ‘듣고 보는 주인공을 아는가?’ 등의 선문 언어용법이 지니는 의미나 그 경험지평, 그리고 이 언어용법들과  붓다 법설이 만나는 통문通門에 대해, 논리와 이론을 갖춘 관점을 밝히려 면 밑그림을 충분히 그려야 한다.

그것도 앞서 언급한 ‘불교 철학’의 붓으 로 그려야 진리담론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논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직관적 촌평이나 칼럼형 자유발언에 그치는 것은 진리담론 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는 독백이다.

그런 독백은 요란한 말잔치에서는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어도, 진리담론의 구성과 발전에는 기여할 수가 없 다. 눈에 얼른 들어오는 색소로 시선을 끌지만 영양가가 없는 식품과도 같다.

현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선문의 이 독특한 언어용법들을 거론하 는 학인들에게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이 언어용법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인들, 선문의 긍정형 기호들을 실체/본질/아뜨만 이론으로 일 축해 버리는 학인들에게는, 자신의 관점을 ‘조건적’으로 기술하기를 권한 다.

그 부정적 시선이, 선문의 이 언어용법들을 실체/본질주의 내지 아뜨 만 문법으로 읽으려는 시도들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에 그치기를 권한다.

<이런 언어들은 다 실체/본질/아뜨만 이론이다>고 주 장하는 것보다는, <실체/본질/아뜨만 문법으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현재 수준의 견식見識으로는 포착 하지 못한 지평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기술방식, 자신이 아직 제대로 모를 수 있을 가능성을 수용하는 겸손한 태도가 모두에게 이롭다.

적어도 선 종 선문의 언어는 그런 태도를 요구해도 되는 충분한 실존사례와 근거를 두텁게 축적하고 있다고 본다.

선문의 이런 언어용법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그 의미를 탐구하는 학인들, 탐구한 성과를 글에 담아 밝히려는 학인들에게는, 이런 언어용법 들이 왜 실체/본질/아뜨만론이 아니며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밝히는 작 업에 집중해 주기를 권한다.

소통 가능한 언어로 말이다.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나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해와 수용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언어 소통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문의 언어를 그대로 재배치하거나 교학적 언어로 해설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관점’을 ‘현재어’에 담아 ‘정밀하게’ 개진해야 한다.

그렇 다고 지적 재치로 그럴듯하게 풀어내는데 그쳐서도 안 된다.

‘불교철학의 붓’을 드는 것은 그런 점에서 소통력을 높이는 유력한 대안이다.

<참선 해 보면 안다>

<이 차이는 직접 체험의 영역이지 언어에 담을 수가 없 다>

는 식의 방어로는 설득력이 없고 성공하지도 못한다.

한국불교의 선종이 그나마 아직은 확보하고 있는 정신적 권위에 의지 하는 것으로는, 결코 비판에 대한 방어와 선문 가치의 확산에 성공하지 못한다.

큰돈을 들여 치르는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같은 노력이 전시효과 만 있고 영양가는 없는 행사가 되지 않으려면, 또 간화선 프로그램 같은 노력이 선문의 생명력을 부활시키는 실질적 토대가 되려면, 무엇보다 선 문 언어들에 대한 비판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선종의 언어는 실체/본 질/아뜨만론이 아닌가? 선종 학인들은 선의 긍정기호들을 형이상학적 독 법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종은 과연 불교이기는 한 것인가?>

-이 런 질문들에 설득력 있는 지적 언어로써 대답해야 한다.

 

이 작업에 우선 적으로 집중해서 성공해야 한다.

만약 이 문제풀이를 외면하거나, 제대로 된 작업을 하지 않거나, 해도 실패하면, 선종은 한국불교의 현실과 미래 구성과정에서 조만간 무기력하거나 소외될 것이다.

현재까지는 그나마 유지되는 선종의 종교적 권위마저 어느 순간 일시에 소멸하게 될 가능성 이 높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선을 주목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선을 연구하고 화두수행을 한다’는 식의 자기위로는 전혀 문제해결력이 없다. 이런 식의 자기위로와 식민지문화적 호객행위로 넘길 수 있는 문제 상황 이 아니다.

긍정형 기호들을 선호하거나 구사하는 선불교 구성원들 가운데, 실제 로 실체/본질/아뜨만적 진아眞我를 추구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적은 숫자도 아닐 것이라고 본다. 현재도 주변에서 빈번하게 목격한다.

심지어 선어 속에서 득력한 분들(흔히 ‘견성’했다고들 한다) 가운 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체득한 내용은 선문 언어용법의 지평에 접속한 것이지 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언어는 실체/본질/아뜨만적 의미와 쉽게 결 합할 수 있는 유형일 경우이다.

이들이 배우고 익힌 언어가, 긍정형 기호 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대승교학,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선어禪語들 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언어환경적 제약이라는 측면이 있다.

현재 학인들이 전통 학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평가할 때에는, 이 언어환경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해야 공정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긍정기 호들을 실제로 실체/본질/아뜨만적 의미로 이해하여 수행하였고, 그리하 여 체득이라는 것도 아뜨만 구도자들이 수행과정에서 체득하는 ‘집중에 수반하는 심신 변화나 정신적 특이현상’의 유형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선 종의 돈오견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선종 내부에는 이 두 가 지 사례들이 혼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공정한 이해와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선종이 구사하는 주체긍정형 언어용법과 존재긍정형 기호들이 과연 무아사상과 충돌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자아에 대한 부정형 서술은 무아사상에 부합하지만, 긍정형 서술은 무아에 위배 한다>

는 식의 단순한 관점으로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도 다룰 수도 없 다.

또 실체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현상의 인과적 전개를 밝혀주는 관점 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아 법설과 자연과학적 현상론의 상통을 거론할 수 있지만, 이런 자연과학적 대비만으로 무아 법설의 의미가 충분히 드러  나는 것도 아니다.

불교와 자연과학의 대비와 상호결합에 대한 관심은 분명 유익하다.

필자는 모든 인문/사회/자연과학, 특히 철학과 자연과학의 성과를 수용 하지 못하는 불교라면 진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붓다 법설의 매력 하나가, 그 어떤 철학 및 과학적 탐구 성과도 거리낌 없이 받아낼 수 있 는 그릇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붓다의 법설이 자연과학의 언어로 환 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붓다의 법설이 자연과학과 통할 수는 있지만, 자연과학과는 다른 범주와 맥락에서 그 문제해결력을 발휘 하는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의 언어와 시선범 주 안에 붓다의 법설을 모두 편입시켜 처리하고 싶은 유혹은 항상 경계 해야 한다.

붓다의 법설을 비롯한 모든 진리담론은 ‘서로 만나면서도 헤 어지는’ 중층重層·다면多面의 현상이다.

특정의 층과 면 안에서 다른 진 리의 층과 면들을 통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찰적이며 개방적인 학인이라면, 중층·다면의 깨달음 담론들이 지니는 이 ‘겹쳐짐 과 갈라짐’의 맥락을 동시에 그리고 사실대로 직시해야 한다.

불교와 여 타의 진리담론들은 자신의 언어에 다른 담론을 편입시키거나 통합하려 하지 말고, 서로 어떻게 ‘조건적으로’ 통할 수 있고, 또 상호의 발전을 위 해 서로 어떤 ‘조건적’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방향이 더 유익 할 것이다.

무아 법설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 익숙한 학인들에게 󰡔열반경󰡕의 ‘상 常·낙樂·아我·정淨’ 같은 언어용법은, 그야말로 붓다에 대한 배신이고 아뜨만 사상의 불교적 변주를 입증하는 강력한 논거로 보일 것이다.

실 제로 불교학자들 가운데, 특히 서구 불교학자들 가운데서 이런 입장을 빈번하게 목격하게 된다.

아마 그들에게는 선종이나 대승교학의 긍정형 언어용법 자체가 미심쩍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심 <동북아시아 불교나 한국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 수 있다.

가치평가를 유 보하는 ‘학문 불교학’의 전공자로서, 혹은 학문교류나 연구 활동을 위해 표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심을 터놓을 기회가 있으면 대승불교와 선 종, 그리고 이들을 내용으로 하는 한국불교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 속내를 토로할 것이다.

한국불교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특히 남방불교와 아비담마 교학를 통해 붓다의 법설을 이해하는 학인들 가운데 이런 사례 들이 많이 목격된다.

거의 일반화된 현상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대승교 학과 선종의 긍정형 언어용법들은 무아의 교리조차 모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구도의 성찰적 학인이라면 다시 묻고 대답을 탐구해야 한다.

 

<무아 법설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아’라는 언표는 어떤 경험 지평을 지시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무아 법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대승불교 와 선종의 긍정형 기호들은 무아 지평과 어떤 관계인가?

결합적인가, 아 니면 이탈적인가?

퇴행과 변질인가, 진일보하는 행보인가?

대승교학과 선 종은 왜 긍정기호들을 선택하였는가?

만약 그런 기호들이 붓다 법설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하고 또 그 의미를 유효 하게 만드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거듭해야 하고,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답을 시도해야 한다.

많은 학인들은 <무아 법설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이미 충분하며 완결 되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들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의문이다.

붓다와 대화할수록 커지 는 문제의식이다.

우리는 아직 붓다의 무아 법설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커져간다.

그리고 무아 법설에 대한 이해를 진일보시키는 관문은 ‘붓다 선법禪法에 대한 탐구’로 보인다.

무아와 선禪에 관한 기존 의 ‘위빠사나 해석학’ 유형의 독법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해석학적 지대 를 열어야 하며, 그 주요한 관문 하나가 ‘붓다 선법禪法에 대한 탐구’라고생각한다.

그리고 붓다의 선법에 대한 선종의 안목은 매우 주목되어야 한다고 본다.

수행론을 포함한 불교의 교학/해석학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은 선 禪이라고 생각한다.

<선禪은 직접 수행하면 충분한 영역이다>

<선 체험 은 이해나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유나 이해는 선 수행의 장애 에 불과하다>

<대상 집중이 선의 구체적 방법이다>는 식의 이해가 일반 화된 선관禪觀일 것이다.

붓다의 선법禪法을 이런 선관禪觀으로 처리해 버리는 한, 무아 법설을 비롯한 붓다 법설의 이해는 새로운 내용을 추가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아 혹은 공이라는 말로 모든 불교를 설명해 버리 는 태도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할 것이다.

이른 바 비판불교 진영에서는 아예 <붓다는 선정 수행을 설하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그에 동 의하는 학인들도 많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법설을 편견 없이 탐구한다면 도저히 발언하기 어려운 극단적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전문 학인들 사이에서 등장하고 또 지지받는다는 것 자체가 붓다 선법에 대한 탐구의 결핍을 증언한다. 무아 법설도, 연기 법설도, 모두가 붓다의 선禪 법설과 연동되어야 그 면모가 제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붓다의 선禪 법설 에 대한 탐구가 다른 법설 영역에 비해 현저히 취약하다는 판단이 타당 하다면, 무아나 연기에 대한 이해에도 구멍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숙한 것들을 애써 낯설게 보고 성찰하려는 것이 ‘철학적 태도’이다. 붓다만큼 이러한 의미의 철학적 태도를 구도의 길에서도 요구하는 분은 찾기 어렵다.

무아/연기/공/선禪이라는 용어에 담아온 ‘해석학적 관행’들 마저 다시 낯설게 대할 때라야, 붓다의 법설을 거듭거듭 원점부터 재음미 할 수 있는 열린 탐구가 가능해진다.

그럴 때 기존의 해석학적 관점들도 제대로 이해되고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다.

빠진 것은 채워 넣고, 일탈 된 것은 제 길 위에 올려놓으며, 놓친 것은 새로 추가하는 ‘역동적 불교해석학’도 그럴 때라야 내용을 확보한다.

‘깨달음 담론’은 이런 문제들에 대 한 다채로운 응답들이 통섭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것은 언어와 연루된다.

인지인간의 어떤 경험도 언어와 격리될 수 없다. ‘깨달음 담론의 구성과 내용’도 언어로 채워지고, 언어로 상호작용하고, 언어로 공유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언어로써 분 류한 차이들의 질서에 대한 경험인 ‘이해’와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다.

언어가 이해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이해가 언어를 직조해 낸다.

이런 점 에서 <깨달음 담론은 오직 이해로써 구성된다>는 명제가 가능하다.

그러 나 이러한 명제가 타당하려면, <이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수반되 어야 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오직 이해일 뿐이며, 선禪 수행은 붓다가 말한 것 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비판불교 식의 ‘이해 지상주의’에 필자는 동의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거론하는 ‘이해’나 ‘분별 이해’ 및 ‘지혜 이해’는 그 범주와 내용이 통상적 의미의 이해와는 구별된다.

좁은 의미의 이해, 넓 은 의미의 이해, 분별의 이해, 지혜의 이해, 세간적 이해, 궁극적 이해 등, 이해에 대한 불교적 시선은 그 범주가 넓고 중층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해를 대하는 사유방식이 다르다.

이해를 ‘불교적으로 이해하려면’, 다양한 이해 범주들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성찰해야 한다.

‘이해’라는 현상에 대한 연기적 성찰이 요청되는 것이다.

‘깨달음과 이해’를 거론하려면, <불 교에서 이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해 불교’나 ‘이해 지상주의 깨달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차적으로 이런 성찰 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 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에 대한 충분한 불교적 성찰’을 전제로 한다면, 깨달음 담론구성과 깨달음 구현과정에서 차지하는 ‘이해’의 의미와 역할 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선禪 수행과 이해는 어떤 관계인가?>

<깨달음과 이해의 관계 는 어떤 것이며 또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자체가 깨달음 담론 의 중요한 주제이다.

지적 성찰의 무능과 결핍을 체험이라는 옷으로 감 추거나 정당화시키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비판이 곧바로 ‘이해 지상주의’의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학인들은 불교의 ‘깨달음 독법들’을 앞서 거론한 두 가지 사유방식을 기준 삼아 정직하고 용기 있 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물들어온 현상들 은 과감하게 치유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 법설에 대한 해석학, 즉 전통 교학과 수행론 가운데,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물들지 않고 그것 을 거부한 것으로 평가 받는 사례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연 붓다의 경험주의적 해법이 갖는 의미와 내용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그리고 충분 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거듭 되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 붓 다를 제한적으로 만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붓다와 대화 를 시도하면 할수록 커져가는 생각이다. 우리는 ‘깨달음 담론구성’을 통 해 과거의 해석학들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정리할 뿐 아니라, 다시 새로움 을 추가해야 한다.

붓다의 안목에 상응하는 사유방식이라면,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 역동적 후현後顯을 전망하는 경험주의적 시선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재나 삶의 ‘참됨 /온전함’은, 비록 ‘본래 그러한 것’(本然)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어도, 그것은 마음이나 존재의 현상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참됨/온전함’은, 마음이나 내면에 이미 있지만 가려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인지 능력의 새로운 향상을 통해 비로소 눈떠 경험 안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됨/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한 마음/인지 능력의 향상은, 언어와 사유의 퇴행적 폐기가 아니라 ‘언어와 사유 능력의 전진적 차원 향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는 깨달음 담론의 긴 여정에서 해석학적 출발 지 점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참됨/온전함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의 원 초적/거시적인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그 각각의 사유방식이 ‘경험세계와 인지능력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근원적 불화와 균열’(苦)을 어떻게 해결하 려는 것인가를 구체적/미시적으로 성찰해 가는 여정에 오르는 디딤돌을 하나 놓은 것이다.

이 디딤돌을 딛어야 오를 수 있는 길에 서면, 곧이어 응답해야 할 질문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참됨/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 ‘참됨/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한 마음/인지 능력의 향상’, ‘언어와 사유의 퇴행적 폐기가 아니라 언어와 사유 능력의 전진적 향상진화’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 혹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으로 써 어떤 문제들을 어떻게 풀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해 답해야 하는 과정 이 기다린다.

이 질문들에 얼마나 알차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깨달음 담 론’의 수준과 성패도 결정된다.

현재의 학인들이 대면하는 시절인연들은 매우 각별한 의미와 내용을 지닌다.

그 어느 시기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 던 새로운 환경이다.

불교 안팎으로 그렇다.

모든 불교정보가 이처럼 누 구에게나 전방위적으로 개방된 적이 있었던가?

무지의 분별이 구축해온 기만과 차별, 폭력의 방식과 제도가, 지금처럼 송두리째 지성적 성찰 앞 에 노출된 적이 있었던가? 인간과 세상의 온갖 양상들을 지금처럼 총체 적으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이 가능한 적이 있었던가?

이 최초의 조건 들은 그 각별함만큼이나 각별한 전망을 가능케 한다.

이 각별한 조건들을 ‘깨달음 담론’에 반영하면서 앞서 거론한 문제들을 충실하게 다루어간 다면,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전망해도 될 것이다.

 

 

참고문헌

마명 저, 진제 역, 󰡔대승기신론󰡕(T32). 원 효, 󰡔대승기신론 별기󰡕(󰡔한불전󰡕 1). 󰡔대승기신론소󰡕(󰡔한불전󰡕 1. 󰡔우파니샤드󰡕, 이재숙 옮김(서울: 한길사, 1997). 박태원, 󰡔돈점 진리담론󰡕(서울: 세창출판사, 2016). , 󰡔원효의 화쟁철학󰡕(서울: 세창출판사, 2017). ,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침’」, 󰡔 깨달음, 궁극인가 과 정인가󰡕, (서울: 운주사, 2014). , 「깨달음 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 󰡔불교평론󰡕 66, 2016.

 

 

 불교철학제2집 (2018.3월)

깨달음 담론구성의 첫 관문 ― &lsquo;본각本覺참됨온전함&rsquo;에 대한 두 가지 사유방식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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