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세례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세례 요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교 세례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1) 그는 사람들을 물에 잠기게 하는 행위로 이름을 얻은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1) 다수의 학자는 예수 운동이 요한의 세례를 이어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Hartman, “Into the Name,” 31 이하. 이런 입장과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는 Ferguson, Baptism, 25-37, 60-82, 83-96을 참조
세례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요한의 경우 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2) 세례 요한의 경우를 통해 우리가 가진 언어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요한은 실제로 “세례 요한(Johannes der Täufer)”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화란어 “Johannes de Doper”가 “taufen”이라는 동사가 고트어의 “잠그다”라는 뜻을 가진 daupjan에서 유래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면,3) 영어 표현인 “John the Baptist”는 우리를 다시 그리스어 βαπτίζειν으로 이끈다.
마가는 요한을 Ἰωάννης ὁ βαπτίζων(막 6:14, 24)이라고 부르며,4) 다른 복음서 기자나 요세푸스는 Ἰωάννης ὁ βαπτιτής(막 8:28 병행; 마 3:1; Josephus, Ant, XVIII 116)라고 부른다.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 그리스어 문헌에서 처음 사용된 ὁ βαπτιστής 라는 표현은 독일어로 “Täufer”을 사용해서 더 이상 번역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일어 단어 “taufen”이 βάπτειν의 한 강의형(Intensivform)인βαπτίζειν의 의미, “잠그다”라는 뉘앙스를 더 이상 갖지 않기 때문이다.5)
2) 바울의 세례가 신비주의 종교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신비주의 종교에 속하는 문헌에는 동사 βαπτίζειν과 βάπτειν이 나타나지 않으며,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서 물에 잠긴다는 내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Burkert, Mystery-Cults, 101 참조. 신약성경과 관련된 논의는 Wagner, Problem, 13 이하를 참조.
3) Kluge, Etymologisches Wörterbuch, 723 참조.
4) 이와는 다르게 막 1:4에서 관사 ὁ는 나타나지 않는다. 곧 이것은 분사형 명사가아니라 P 46과 B를 따라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ἐγένετο Ἰωάννης βαπτίζων ἐν τῇἐρήμῳ καὶ κηρύσσων ….
5) LSJ, s.v.
그리스어의 의미를 참조한다면, 세례 요한을 영어로 “John the Dipper”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그리스어라고 하더라도, 세례 요한은 그리스인이 아니었고, 당시 사람들도그를 그리스어로 언급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nx'wOy으로 불렸으며, 그의 활동은 아마도 아람어 동사 lb;j.의 분사, 즉 lbej'로 표현되었을것이다.6)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의 이름과 활동을 합하여 al'b.j' !n"x'wOy 로 불렸을 것이다.
세례 요한에 관한 아람어나 히브리어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lbj의 의미로 미루어 볼 때,7) 그는 “다른 사람을 잠기게하는” 사람으로서 Yoḥānān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구약성경 히브리어 본문에 한 예가 있다. 마소라 본문은 신 33:24에서 분사 모음을 활용한다: lbejo. 칠십인역은 미래시제인 βάψει로 읽는다.
7) KB, s.v.; 4Q274[= Thohorot] Frg. 2, Kol. i, 4-6; 3Q15 [= CopperScroll] I 12. mMiq 7:7 및 mChag 2:6(분사, Qal + 관사), mPara 5:2 및 mMakh 4:7(분사, Hif. + 관사). 8) 의식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해서는 Strecker, Liminale Theologie, 300 이하를 참조.
세례 요한의 세례가 단지 몸을 정결케 하는 세례(Josephus, Ant XVIII 117)인지 아니면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막 1:4)인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어떠했든지 간에 세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Q] 3:8/마[Q] 3:8 참조), 서로를 향한 의(δικαιοσύνη), 하나님을 향한 경건(εὐσέβια), 또는 마음의 변화(μετάνοια, 막 1:4), 등 삶의 중대한 변화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초기 그리스도교 세례 의식에서 채택되었지만,8)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자료의 부재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물속에 잠기는 의식을 어떻게 실행했는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으며, 바울서신에서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τινα라는 바울의 표현은 일반적인 그리스어 언어 사용에서 대부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 이전의 전통은 어떠했는가?
II. 바울 이전 전통에서 “씻김”(고전 6:11)
고린도전서 6:11에는 βαπτίζεσθαι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주석가에 의하면 이 본문에는 세례가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바울 이전의 전통에 대한 언급으로 보이며, 바울 이전 시대의 어둠을 어느 정도 밝혀주는 것처럼 보인다.9)
요한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회적인 세례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동반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병치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 이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 중 일부10)는 소위 ἄδικ οι에 속해 있었다.
Ἀλλά가 세 번 반복되는 문장은 고린도 교인들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ἀλλὰ ἀπελούσασθε, ἀλλὰ ἡγιάσθητε, ἀλλὰ ἐδικαιώθητε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ἐν τῷ πνε ύματι τοῦ θεοῦ ἡμῶν.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ἀπελούσασ θε는 수동태로 “너희는 씻겼다”, 또는 “너희는 너희 자신을 씻도록 했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11)
이 씻긴 사건은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과거의 일회적인 세례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씻겼고, 이전에 있던 더러움은 상징적 또는 의식적 행위로 깨끗하게 되었다.12)
수동태 ἡγιάσθητε와 ἐδικαιώθητε는 완성된 행위의 논리적 주어가 강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씻긴 사건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13)
9) Schrage, 1Kor I, 426 이하, 434 이하; Zeller, 1Kor, 218 참조.
10) καὶ ταῦτά τινες ἦτε의 해석에 대해서는 Lindemann, 1Kor, 140 참조.
11) Conzelmann, 1Kor, 129 참조.
12) Weiss, 1Kor, 154 참조. 행 22:16에 따르면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씻을 것을 권한다(ἀναστὰς βάπτισαι καὶ ἀπόλουσαι τὰς ἁμαρτίας σου ὄνομα αὐτοῦ).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는 낯선 방식이다. Avemarie, Tauferzählungen, 127 이하.
13) Wolff, 1Kor, 122; Schrage, 1Kor I, 434. Delling은 이것이 주님을 향한 소속,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바르게 지적한다. Delling, Zueignung, 73.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통해 씻긴 사람들은 거룩함과 의로움, 즉 하나님의 속성을 부여받는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신적 활동의 대 상으로서, ἄδικοι라는 과거의 그들을 향한 규정은 사라진다.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는 것, 즉 삶의 변화는 씻긴 사건의 결과를 묘사한다.14)
성화 또는 칭의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일어나며 이 영은 그리스도께 속하는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15)
하나님의 영에 의해 씻긴 사건을 볼터(M. Wolter)가 말한 것처럼 “회심-, 입문의 세례(Bekehrungsund Initiationstaufe)”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16)
하지만 고린도전서 6:11에는 βαπτίζειν-κτλ. 용어가 빠져있기 때문에, 입문으로서 일회적인 씻김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βαπτίζειν-κτλ.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대신 ἀπολούομαι 또는 λουτρόν이 사용된 본문은 1세기 말까지 이어진다.17)
고린도전서 1:12-17은 세례 의식이 세례 요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흐르는) 물에 잠기는 일회적인 의식이었음을 보여주지만, 세례를 주는 특정한 개인은 더 이상 바울의 초점이 아니다.
“세례의 고유성은 세례자(세례를 주는 사람)의 고유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18)
14) Wolter, Paulus, 139 참조.
15) 고전 3:16; 6:19; 7:40; 12:3; 갈 4:6; 롬 8:9, 14, 27 참조.
16) Wolter, Paulus, 138 이하.
17) 엡 5:26; 딛 3:5; 히 10:22; 행 22:16도 참조. 요한과 그의 세례를 다루는 본문을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세례의 맥락에서 βαπτίζειν-κτλ. 용어는 마 28:19를 제외하고는 바울과 사도행전에서만 등장한다. 막 10:38 이하와 병행 본문에 대해서 세례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Delling이 잘 보여주었다. Delling, Studien, 236-56.
18) Wolter, Paulus, 132.
III. Βαπτίζειν/-εσθαι와 εἰς τι/τινα
그리스도교 세례의 맥락에서 βαπτίζειν을 사용한 최초의 증인이자 자신의 이해를 주로 수동태로 표현한 바울의 용례에 대해서 계속 알 아보기 전에,19) “세례”, “세례를 주다”, “세례를 받다”라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뒤에 있는 원래 그리스어 표현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20)
타동사로서 βάπτειν은 천을 염색할 때 천을 염색 재료에 담그는 것, 대장장이가 단조 도끼를 찬물에 담그는 것과 같이 액체에 어떤 것을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액체에 담그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을 때도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에서 안티고네는 어머니 이오카스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죽은 자에게서 청동검을 취해 들고, 몸속 깊숙이 찔렀다(ἔβαψεν).”21)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칼을 목구멍에 집어넣어(βάψασα) 날카롭게 하리라.”22)
동사 βαπτίζει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βάπτειν을 대체했다.
로마시대의 그리스어 문헌에서 βάπτειν은 종종 어떤 것을 염료에 담그는행위를 표현한다.
βαπτίζειν은 -ίζειν이 붙은 원인 형태(kausative Form)의동사로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액체에 잠기게 하여, 그 액체에 둘러싸게 만드는 행위를 나타낸다.
하지만 원인을 제공한다는 뉘앙스가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폴리비오스는 이 동사를사용하여 배가 가라앉는 것을 표현하며,23) 스트라보는 사해에 들어간어떤 사람이 “잠기지(βαπτίζεσθαι)” 않고, 떠다니고 있음을 묘사한다.24)
19) Ferguson, Baptism, 149: “그리스도교 세례는 행해지는 사건으로 스스로 행하는 세례(self-baptism)는 없다.”
20) Heitmüller의 이러한 방법론적 원리(Im Namen Jesu, 115 이하)는 계속해서 따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제시한 대표적인 자료 외에도 Ferguson, Baptism, 38-59를 참조.
21) Euripides, Phoenissae, 1577 이하: χαλκόκροτον δὲ λαβοῦσα νεκρῶν πάρα φάσγανον εἴσω | σαρκὸς ἔβαψεν.
22) Aischylos, Prometheus vinctus, 863: δίθηκτον ἐν σφαγαῖσι βάψασα ξίφος.
23) Polybios, Historiae, I 15,6 이하; XVI 6,2.
24) Strabon, Geographica, XVI 2,42: μηδὲ βαπτίζεσθαι τὸν ἐμβάντα ἀ᾽ ἐξαίρεσθαι.
하지만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어떤 액체에 잠기게 한다는 원인 제공의 뉘앙스가 포함될 때도 있다.
마가는 세례 요한에 의해 온 유대땅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요단강에 잠겼다고 말한다(ἐβαπτίζοντο ὑπ᾽ αὐτοῦ ἐν τῷ Ἰορδάνῃ ποταμῷ, 막 1:5).
그리고 마가복음 1:8의 표현에따르면 세례 요한의 행위는 사람들을 물에 잠기게 하는 것(ἐγὼ ἐβάπ- τισα ὑμᾶς ὕδατι)이었으며, 이것은 마지막 줄의 병행구 ἐν이 보여주는바와 같다(αὐτὸς δὲ βαπτίσει ὑμᾶς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25)
복음서 전승에따르면 세례 요한이 외친 말은 다음과 같다: ἐγὼ μὲν ὕδατι βαπτίζω ὑμᾶς … αὐτὸς ὑμᾶς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눅[Q] 3:16//마[Q] 3:11).
루키아노스의 인간혐오자(Misanthrop)는 겨울에
“강물에떠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말고, 머리를 아래로 밀어 ‘잠기게 하고’ (βαπτίζοντα)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하라” 26)고 말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포도주를 물로 희석하는 것을 “디오니소스를 바다에 잠기게하는 것(βαπτίζειν)” 27)으로 설명한다. βαπτίζειν은 중간태로 물에 손을담가서 씻는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막 7:4; 눅 11:38 참조).
우리의 질문과 관련하여 중요한 용례는 βαπτίζειν이 εἰς τι/τινα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어떤 것 안으로 잠기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28)
25) 행 8:38 참조.
26) Lukian, Timon, 44: δὲ δὰς χεῖρας ὀρέγων ἀντιλαβέσθαι, ὠθεῖν καὶ Τοῦτον ἐπὶ κεφα- λὴν, ὡς μηδὲ ἀνακύψαι δυνηθείη.
27) Plutarch, Quaestiones Naturales (= Moralia 914D): βαπτίζειν τὸν Διόνυσον πρὸς τὴν θάλατταν.
28) Josephus, Ant, IV 81; Heron, Pneumatica, I 2,30; Plutarch, Bruta animalia ratione uti (= Moralia 985E); De superstitione (= Moralia 166A); Soranus, Gynae-ciorum, IV 11,5 (= CMG IV 142,22): καὶ εἰς τὰς σφαγὰς βαπτίζειν τὸ σπαθίον μέχρι κενεμ βατήσεως εἰς τὸ ἔμβρυον); Anachreontea, 6.
아킬레우스 타티우스는 진흙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리비아의 한 강에 대해 기록한다:
“그 보물을 찾으려면 피치를 바른 장대를 물속에(εἰς τὸ ὕδωρ) 담그고(βαπ- τίζουσι), 강의 막힌 곳을 열어야 한다.”29)
하지만 잠기는 곳이 항상 물로 채워져 있을 필요는 없다.
플루타르코스는 중상을 입은 알비누스가
“피에(εἰς τὸ αἷμα) 손을 담그고(βαπτίσας) 전사한 병사들의 방패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트로피를 세웠다” 30)고 이야기한다.
βαπτίζεσθαι 형태에서 이런 의미는 동일하게 유지된다.31)
마가복음 1:9에서 예수의 세례는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는 “요한에 의해 요단강에 잠기셨다(ἐβαπτίσθη εἰς τὸν Ἰορδάνην ὑπὸ Ἰωάννου).”
스트라보는 리카오니아(Lykaonien)의 타타(Tatta) 호수의 물에 대해 “천연 식염수로서 이 물은 그 안에 잠긴(βαπτισθέντι εἰς αὐτό) 모든 것을 쉽게 응고시킨다” 32)고 말한다.
잠기는 곳이 반드시 어떤 액체일 필요는 없다.
요세푸스는 스키토폴리스 전투에서 사울의 아들 시몬이 친척을 살해한 후
“칼을 통째로 자기 목 안에 집어넣었다(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σφαγὴν ἐβάπτισεν)”33)고 말한다.
29) Achilleus Tatius, Leucippe et Clitophon, II 14,9: Κοντὸν οὖν εἰς τὸ ὕδωρ βαπτίζουσι πίσσῃ πεφαρμαγμένον, ἀνοίγουσί τε τοῦ ποταμοῦ τὰ κλεῖθρα.
30) Plutarch, Parallela minora (= Moralia 305C): καὶ εἰς τὸ αἷμα τὴν χεῖρα βαπτίσας ἔστησε τρόπαιον ἐπιγράψας.
31) βαπτίζεσϑαι와 ἔν τινι 또는 ἐπί τινος가 그리스도교 이전 전통에서 칠십인역과 요세푸스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표현은 스스로 물에 잠기거나, 물에 잠기는 것을 가리킨다. 4Βασ 45:14(καὶ κατέβη Ναιμαν καὶ ἐβαπτίσατο ἐν τῷ Ιορδάνῃ ἑπτάκι κατὰ τὸ ῥῆμα Ελισαιε); Josephus, Bell, I 437(πέμπεται μὲν οὖν ὁ παῖς διὰ νυκτὸς εἰς Ἱεριχοῦντα ἐκεῖ δὲ κατ᾽ ἐντολὴν ὑπὸ τῶν Γαλατῶν βαπτι- ζόμενος ἐν κολυμβήθρᾳ τελευτᾷ); Jdt 12:7 (καὶ ἐβαπτίζετο [sc. Ιουδιθ] ἐπὶ τῆς πηγῆς τοῦ ὕδατος).
32) Strabon, Geographica, XII 5,4: ἡ μὲν οὖν Τάττα ἁλοπήγιόν ἐστιν αὐτοφυές, οὕτω δὲ περιπήττεται ῥᾳδίως τὸ ὕδωρ παντὶ τῷ βαπτισθέντι εἰς αὐτό …
33) Josephus, Bell, II 476: ὅλον εἰς τὴν ἑαυτοῦ σφαγὴν ἐβάπτισεν τὸ ξίφος.
이런 용례들을 살펴볼 때 βαπτίζειν이 εἰς τι/τινα와 결합할 때의 의미는 명확하다. 이 표현은 능동일 때는 어떤 사람, 어떤 것을 어떤 것 (주로 액체, 하지만 몸도)으로 집어넣는 것을 나타내며, 수동일 때는 어떤 것, 혹은 누군가가 어떤 것 안으로 집어넣어지는 것, 그래서 사람이나 물체가 액체 또는 물체에 의해 둘러싸이게 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종합적으로 이 표현의 사전적 의미(lexikalischer Sinn)는 “~에 잠기게 하다(eintauchen in)”, “~에 잠기다(eingetaucht werden in)”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IV. 바울서신의 “그리스도의 몸, 또는 죽음으로 잠김”
이 표현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는 바울서신에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그리스어의 용법과 의미를 배경으로 바울의 표현을 이해했을 것이다.34)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35) 바울은 이 동사를 εἰς τι/τινα와 함께 사용하며, 수동태 과거형, 즉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τινα 형태를 사용한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을 후기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βαπτίζειν τινὰ εἰς τὸ ὄνομα τίνος 또는 βαπτισθῆναι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εἰς τὸ ὄνομα τίνος 구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합하지 않다.
이 구문은 바울서신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다른 신약성경 본문에 여섯 번 나타난다.36)
그리스도교 세례 용어의 발전 역사를 후기부터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37) 바울의 표현은 사도행전의 몇 가 지 예외가 아니라 당시 그리스어의 일반적인 언어 사용, 곧 코이네(Koine)의 용법에서 설명되어야 한다.38)
34) H. Lietzmann은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리스인의 귀에 βαπτίζειν은 ‘세례를 받다’가 아니라 ‘잠기다’, 곧 ‘그의 죽음에 잠겼다’는 의미로 들렸다.” Lietzmann, Röm, 65.
35) 고전 1:14, 16에서 직접 목적어를 가진 능동태 ἐβάπτισα, 고전 1:17의 부정사 βαπ- τίζιν과 고전 15:29의 ὑπέρ와 함께 사용된 수동태를 참조.
36) 예를 들어 롬 6:3의 표현을 마 28:19 또는 행 2:38; 8:16; 10:48; 19:3, 5와 동의어로 보는 Cranfield, Rom, 301에 반대. 37) 이것은 Bietenhard, ὄνομα, 274 이하, Hartman, “Into the Name,” 37-50의 주요 문제 이다.
38) 그러므로 Wolt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바울은 더 이상 동사와 명사를 원래 의미, ‘잠그다’ 또는 ‘씻다’로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pars-pro-toto 로 이 용어를 환유적으로 세례가 이루어지는 전체 행동에 적용한다. 이 때 원래 의미, ‘잠그다’, ‘씻다’는 뒤로 사라진다. Wolter, Paulus, 136.
εἰς τι/τινα의 유무와 무관하게 바울이 βαπτισθῆναι를 사용한 경우들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구절에서처럼39) 특별한 의미를 가정하지 않아도 그리스어의 일반적인 용법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접근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단지 고린도전서40)의 두 가지 경우에만 그리스도교적인 특별한 용례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한 몸 안으로 잠김”(고전 12:13)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라는 구문의 해석을 위해 그리스어 사용 측면에서 그렇게 모호하지 않은 고린도전서의 경우부터 시작해 보자.
고린도전서 12:13은 다음과 같다:
καὶ γὰρ 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ἡμεῖς πάντες εἰς ἓν σῶμα ἐβαπτίσθημεν.
랑(F. Lang)은 루터의 전통에 따라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41)
“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Denn wir wurden ja auch durch einen Geist alle zu einem Leib getauft).”42)
문제는 이러한 번역이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와 그 배경에 놓인 이미지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taufen”은 고트어의 daupjan, “담그다”, “잠그다”(eintauchen)에서 유래했다.43)
또한 고대 독일어의 중간 형태 toufan 은 여전히 “담그다”, “잠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독일어 “taufen”에서 “담그다”, “잠그다”라는 뉘앙스는 사라졌다.
현대 독일어 사전에 따르면 “taufen”은 단순히 “세례를 통해 누군가를, 특히 어린이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것”, 또는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44)
초기 그리스도교 세례의 관행이 변화하여 물에 잠기는 의식이 더 이상 포함되지 않게 되면서, 그리스어 표현의 의미는 모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어 표현의 의미 변화와 이 표현이 암시하는 다른 이미지로 인해 독일의 주석가들은 “한 몸을 이루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독일어 번역은 위에서 살펴본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τινα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한 영으로 우리 모두 한 몸으로(zu) 잠겼기(eingetaucht)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어색하다.
콘첼만(H. Conzelmann)은 문자적인 직역, 즉 공간적 의미를 살려서 “우리 모두 한 영으로 한 몸 안으로(in) 세례를 받았기(getauft)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한다.45)
42) Lang, Kor, 170 이하. Wolff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Wolff, 1Kor, 296. Lindemann은 εἰς의 공간적인 의미(~안으로)를 무시한다. 그는 본문이 단지 세례의 결과를 설명한다고 이해한다: “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Lindemann, 1Kor, 268.
43) Kluge, Etymologisches Wörterbuch, 723 참조.
44) Klappenbach/Steinitz, Wörterbuch, 3701 이하 참조.
45) Conzelmann, 1Kor, 256. Conzelmann은 세례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 한 몸으로”라는 결과적인 해석(konsekutive Deutung)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결정과 연합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Conzelmann, 1Kor, 256, 각주 16.
하르트만(L. Hartman)46) , 슈라게(W. Schrage)47) , 퍼거슨(E. Ferguson)48)도 이런 방식을 따른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ἓν σῶμα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쩰러(D. Zeller)에게 ἓν σῶμα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는 공간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고린도전서 1:13과 10:2를 참조하여 “몸을 향해(auf einen Leib hin)”, 즉 세례 후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 형성에 초점을 두는 결과적인 이해(konsekutives Verständnis)를 지지한다.49) 공간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슈라게도 앞의 ὁ Χριστός(12:12)를 고려하여 ἓν σῶμα를 “새로운 세계에 속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다.50)
린데만(A. Lindemann)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세례는 σῶμα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몸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51)
관사가 붙은 ὁ Χριστός는 ἓν σῶμα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틀을 제공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에 처한 그리스도의 몸”이다.52)
46) Hartman, “Into the Name,” 6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새로운 그리스도라는 영역 안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강조한다.”
47) Schrage, 1Kor III, 215 이하: “한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한 몸 안으로 잠겼습니다.” 이것은 곧 “εἰς ἓν σῶμα”를 공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48) Ferguson, Baptism, 152: “세례는 한 사람이 한 몸 안으로 편입되는 사건이다.”
49) Zeller, 1Kor, 397.
50) Schrage, 1Kor III, 216 이하.
51) Lindemann, 1Kor, 271. 52) Zeller, 1Kor, 397.
곧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세례 경험에 대한 언급을 비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앞에서 살펴본 “잠기다”라는 βαπτισθῆναι의 의미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
비유적 언어 사용에서는 제공 영역(Spendebereich)의 요소가 대상 영역(Zielbereich)으 로 옮겨진다. 바울은 출신과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모든 수신자가 공통으로 가진 세례 경험을 언급한다.53)
비유를 식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울의 말하기 방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54)
고린도전서 12:13에서 ἐβαπτίσθημεν은 소위 “비-기본적인(non-basic)” 사용에 속한다.55)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 τι/τινα는 “어떤 것에 잠기는 것”을 나타내며, 그 대상이 반드시 액체일 필요는 없다.
물리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우리 모두”는 실제로 “한 몸” 안으로 잠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물속에 잠기는 이미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εἰς ἓν σῶμα) 통합되는 사건으로 옮겨진다.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동시에 서로가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ἓν σῶμα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가리키는 것처럼, ἓν πνεῦμα는 부활을 통해 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이 되신(고전 15:45 참조) 한 주님의 영을 가리킨다(고전 12:3-5 참조).
물속에 잠기는 이미지는 또한 물속에 잠긴 사람들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영에 “잠긴”(ἐποτίσθημεν, 고전 12:13) 이유를 분명히 밝혀준다.
그들은 모두 이전에 받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다.56)
53) 고전 12:13ab는 이 논문의 맥락에서 논의할 수 없다.
54) Semino, Metaphor, 11 이하에 나오는 프래글재즈(Pragglejaz) 그룹의 비유 식별 절차(MIP)의 내용을 참조.
55) “non-basic meaning”의 의미에 대해서는 Semino, Metaphor, 11를 참조.
56) 고전 10:16의 한 떡에 참여한다는 내용을 참조하여 고전 12:13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세례 후 주의 만찬에 참여하면서 “취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할 수 있다. Heinrici, Sendschreiben, 400 이하; Conzelmann, 1Kor, 250, 각주 70 참조. 다른 학자들은 세례 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이미지화하여 말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대해서는 Wolff, 1Kor, 299; Zeller, 1Kor, 398 이하. 세례와 주의 만찬 사이에서 결정을 유보하는 입장도 있다. Schrage, 1Kor III, 218.
그리스도의 몸에 잠긴다는 것은 또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3:26, 로마서 6:3-5, 고린도전서 1:13에서 볼 수 있듯이 바 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2. “그리스도 안으로 잠김”(갈 3:28)
갈라디아서 3:26-29의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να라는 문구 역시 물속에 잠기는 경험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통합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으로 잠겼으며,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습니다(ὅσοι γὰρ εἰς Χριστὸν ἐβαπτίσθητε Χριστὸν ἐνεδύσασθε).
(28)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성이나 여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와 같이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πάντες ὑμεῖς εἷ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갈 3:28)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으로 잠긴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다(ὑμεῖς Χριστοῦ, 갈 3:29).
이 주장의 출발점은 두 가지 중요한 진술에 있다:
(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갈 3: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은혜를 주셨다(갈 3:18).
이 출발점은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다(갈 3:6의 창 15:6이 이 점을 확인시켜 준다. 갈 3:11도 참조).
(2)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오직 한 후손, 곧 그리스도만을 약속받았다(갈 3:16).
바울은 성경에서 이러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창 12:3, 13:15 참조).
바울은 이 두 가지 출발점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첫 번째 결론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아브라함과 동일한 근거,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갈 3:7, 11, 18a).
여기에는 믿음에 이른 다른 민족의 사람들도 포함된다.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도 υἱοὶ Αβραάμ(갈 3:7)이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것이다(갈 3:8 이하).57)
두 번째 결론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13 이하와 3:26-29에서 진술된다. 첫째, 바울은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않아 저주를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저주에서 구원받았다고 주장한다(갈 3:13).
갈라디아서 3:14에는 예수의 죽음의 목적이 두 가지 공식으로 설명된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이 되고, 갈라디아 사람들 역시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58)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원래 아브라함의 “한 씨”(갈 3:16, 19)에게만 적용되었던 약속이 어떻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되었는가?
갈라디아서 3:26-29는 두 가지 비유적 진술로 이 질문에 답한다.59)
이것이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누구도 실제로 어떤 사람 안으로,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으로 “잠길”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사람을 “입을” 수 없다.60)
57) 믿음이 아니라 율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다(갈 3:10-12).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고(갈 3:11), 약속은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갈 3:18). “저주”(καταράομαι und ἐπικατάρατος)라는 주제는 창 12:3(27:29도 참조) 및 신 21:23, 27:26에서 수용된 것이다(갈 3:10, 13).
58)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τοῦ πνεύματος는 갈 3:2, 5를 참조할 때 목적격적 속격(genitivus objectivus)로 이해할 수 있다. Betz, Gal, 152 이하 참조.
59) Betz는 갈 3:28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설명 삽입구(an explantory insertion of great significance)”라고 부른다. Betz, Gal, 186.
60) 본문에서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비유를 식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Semino, Metaphor, 26 이하 참조. 바울의 ἐνδύειν 사용과 그 배경에 대해서는 Betz, Gal, 188 이하를, ἐπενδύεσθαι에 대해서는 Schmeller, 2Kor I, 291 이하 참조.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으로 잠겼으며,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습니다”(갈 3:27b)라고 말할 때, 이것은 공간적인 이미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εἰς Χριστὸν ἐβαπτίσθητε라는 구문을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ihr seid auf Christus getauft worden)”와 같이 번역하거나61) 단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62)
오히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으로 잠겼습니다” 63)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세례 의식을 비유적으로 옮긴 것이다.
신자들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갈라디아 사람들도 비유적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잠겼고, 그 결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둘러싸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는 계속 이어진다: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것이다.
이를 근거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29에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이방인 출신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마무리한다.64)
바울은 세례 용어의 비유적 사용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아닌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리스도 안으로 잠긴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65)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그리스도66)께 속한다는 사실(ὑμεῖς Χριστοῦ, 갈 3:29)67)을 분명히 한다.
61) 예를 들어 Schlier, Gal, 172 이하.
62) 예를 들어 Rohde, Gal, 164. Hartman은 “그리스도로(in Christus hinein)”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den Namen hinein)”에서 발전된 형태라고 주장한다. Hartman, “Into the Name”, 56,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아래 4.4. 참조).
63) Betz, Gal, 187; Ferguson, Baptism, 147 이하 참조.
64) 지면 관계상 갈 3:28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는다.
65) Dunn, Gal, 203.
66) 여기서 종말론적인 인류의 통일성을 찾을 필요는 없다. Mußner, Gal, 264 이하에 반대.
67) Rohde는 ὑμεῖς Χριστοῦ를 소유의 속격(genitivus possessivus)이라고 이해한다. Rohde, Gal, 166. Hartman, “Into the Name,” 57도 참조. 갈 3:16, 19를 참조할 때 관계, 부분의 속격(genitivus partitivus)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Ferguson, Baptism, 148 참조
“그리스도 안(in Christus)”이라는 공간적인 이미지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모든 신자와 함께
“하나”(εἷς, 갈 3:28)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그리스도께 속하는 한, 이러한 사실로부터(ἄρα)68)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갈 3:29).
68) BDR §451,8 참조.
이처럼 세례 용어의 비유적 사용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확증하는 바울의 주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잠김”(롬 6:3-5)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τινα 구문을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로마서 6:3-5도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69)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잠긴 우리는 모두 그의 죽음 안으로 잠긴 것을 알지 못합니까? 잠김을 통해(διὰ τοῦ βάπτισματος) 우리는 죽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βάπτισμα를 특별한 그리스도교 용어로 만든다.70)
69) Wolter는 이와 달리 공간적인 해석은 여기서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Wolter, Paulus, 133.
70) BAA, s.v. 및 LSJ, s.v.에 따르면 βάπτισμα는 바울서신(롬 6:4)에서만 발견되는 그리스도교 신조어(christliche Wortschöpfung)이다. Thesaurus Linguae Graecae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골로새서,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요세푸스(Ant, XVII 117)와 플루타르코스(De superstitione [Moralia 166A])도 남성형 βαπτισμός를 사용했다. 요세푸스(같은 책)는 βάπτισις도 사용했다. 두 단어 모두 그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Delling, Studien, 241이 언급하는 자료들, Ps.-Iamblich, Theologoumena arithmeticae, de Valco, IX p. 39,4; Oribasius, Collectiones medicae, X 3,10 (= CMG VI 1,2 p. 46,18)은 수 세기 이후의 것이다
이 어려운 구절의 문맥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두 번째 주요 부분에서 불경건한 자의 칭의의 실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개한다(롬 5:1-8:39).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비판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로마에서 비유대인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를 읽는 유대인 청중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는 두 번째 비판은 바울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롬 3:31).
첫 번째 비판은 이미 로마서 3:8에서 제기된 바 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을 향해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에 비추어 바울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주장한다고 비방했다.
바울은 답변으로 한 가지 논지를 제시한다.
그는 은혜 (χάρις)가 인간의 범죄보다 항상 더 크다고 주장한다(롬 5:20).
로마서 6장의 서두에서 바울은 이 주장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한 문제를 다룬다.
은혜가 항상 인간 범죄의 분량을 넘어 더 넘친다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가운데 계속 살아야 하는지 묻는 대적자들의 질문이 등장한다(롬 6:1).
바울은 수사학적 질문으로 공식화된 이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μὴ γένοιτο, 롬 6:2a).
이 추론은 6:2b-5, 6 이하와 6:8-11로 구성된 두 개의 단락으로 진행된다.
우선 첫 번째 단락의 시작 부분, 즉 공통적인 세례 경험으로부터 “죄 가운데 머무르는 것” 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부분에 집중해 보자.
바울은 네 단계의 추론 과정을 거친다:
(1) 바울은 먼저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롬 6:2bα), 곧 죄의 요구에서 벗어난 자로 정의한다
(ὁ γὰρ ἀποθανὼν δεδικαίωται ἀπὸ τῆς ἁμαρτίας, 롬 6:7; 7:1-6 참조).71)
71) δικαιοῦν ἀπό의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는 BDAG, s.v. 참조
(2)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살 수 있는지 묻는다(롬 6:2bβ).72)
72) ζῆν은 “살아있다” 외에도 “특정한 습관이나 삶의 패턴 가운데 살아가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BDAG, s.v.
이것은 이미 반박의 핵심을 담고 있지만, 바울은 여전히 자신과 수신자들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바울은 세례에 대한 자신의 해석(롬 6:3-5)을 통해 이를 수행한다.73)
바울은 공통적인 경험의 바탕에서 시작한다.
그는 로마의 수신자들에게 그들의 세례를 상기시킨다:
ὅσοι ἐβαπτίσθημεν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εἰς τὸν θάνατον αὐτοῦ ἐβαπτίσθημεν. Βαπτισθῆναι εἰς τι/τινα
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잠긴 존재,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들을 나타낸다.74)
이것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운명 사이의 연관성을 형성한다.75)
바울은 여기서 로마서 5:6-8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으며, 고린도전서 15:3 이하에 명시된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전승을 가져온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ὅτι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76)
그리고 세례 경험과 관련하여 이것을 확장한다. 잠긴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잠긴 것이며(εἰς τὸν θάνατον αὐτοῦ ἐβαπτίσθημεν),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ἀπεθάνομεν σὺν Χριστῷ, 롬 6:8).
신앙 전승은 장사됨에 대한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장사되셨다(καὶ ὅτι ἐτάφη [sc. Χριστός], 고전 15:4a).
그리고 세례를 통해 그의 죽음에 잠김으로써 “우리”도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συνετάφημεν, 롬 6:4).77)
누군가와 함께 장사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의 운명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78)
73) Wolter, Paulus, 143 참조.
74) Wilckens, Röm II, 11 이하; Dunn, Rom, 311; Ferguson, Baptism, 156 참조.
75) 곧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번역할 수 없다. Zeller, Röm, 124에 반대.
76) Michel, Röm, 205; Zeller, Röm, 124; Lohse, Röm, 187 참조.
77) Zahn의 질문(Röm, 296)은 이러한 점이 왜 συναπεθάνομεν이 아니라 συνετάφημεν 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
78) Herodot, Historia, V 5,7; Diodor, Bibliotheca, XVIII 22,8; Chariton, De Callirhoe narrationes amatoriae, VI 2,9; Claudius Aelianus, De natura animalium, VII 40,10; Flavius Philostratus, Vitae sophistarum, 2 (p. 558,5). 다른 문헌 자료들은 Jewett, Rom, 398, 각주 65 참조.
그리스도가 장사되셨고, 세례를 통해서 그의 죽음에 잠긴 사람들 역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리스도의 운명은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며,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죽음의 긍정적 효과도 함께 전가된다.
죄 가운데 계속 살아갈 수 없는 것(롬 6:2)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몸 안으로 잠겼기 때문이다(롬 6:3 이하).
즉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롬 6:8).
(4) 바울은 세례를 해석한 후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의 목적을 말한다(ἵνα, 롬 6:4).
바울은 다시 고린도전서 15:3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져온다(καὶ ὅτι ἐγήγερται [sc. Χριστός], 고전 15:4a).
로마서 6:4b의 새로운 형식 ἠγέρθη Χριστὸς ἐκ νεκρῶν은 두 비교 불변화사 사이에 위치한다(ὥσπερ … οὕτως). 바울은 죽음에 잠기고, 함께 장사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부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세례받은 자들의 운명 사이에 한 유비적 관계를 설정한다.79)
“아버지”, 곧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참여는 “우리”가 걸어가는, 즉 세례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생명의 새로움”에 유비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어울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80)
79) Delling, Zueignung, 74 이하; Dunn, Rom, 311; Ferguson, Baptism, 156 참조. 이것은 갈 3:27-28에서도 마찬가지이다(갈 2:19 이하; 3:13). 그리고 고전 1:1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아래 참조).
80) περιπατεῖν의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는 LSJ 및 BDAG, s.v. 참조.
죄 가운데 머무르는 삶 아니라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결정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세례 후에는 이어져야 한다.
이제 이 진술 뒤에 이어지는 근거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εἰ γὰρ σύμφυτοι γεγόναμεν τῷ ὁμοιώματι τοῦ θανάτου αὐτοῦ, ἀλλὰ καὶ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ἐσόμεθα(6:5).
바울은 εἰ와 완료형 γεγόναμεν을 사용하여 조건문에서 이미 실현된 한 상태를 표현한다.
귀결문은 ἀλλὰ καί로 강조된다.81)
그렇다면 σύμφυτος γίνεσθαι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볼터에 따르면 σύμφυτος는 “συμφύειν(‘함께 자라다’)에서 파생된 수동적 의미의 동사적 형용사(Verbaladjektiv)”이다.82)
이 해석은 짠(Th. Zahn) 이후로 계속되어 왔지만,83) ‘자라다’라는 뉘앙스가 반드시 이 표현의 의미의 일부라고 확증할 수는 없다.84) συμφύειν은 또한 ‘통합하다’ 또는 ‘통일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LSJ는 σύμφυτος의 두 번째 용례를 “함께 자란”(grown together)으로 설명하지만,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는 “타고난”(born with one), “선천적인”(congenital, innate), “자연스러운” (natural)으로 정의하며, 여기에 대한 다양한 증거를 제시한다.85) 아래와 같은 더 많은 본문이 추가될 수 있다: 위 플라톤은 “좋은 상담, 미덕은 이성과 관련되어 있다(σύμφυτος)” 고 말한다.86)
플라톤 자신도 “모든 사람에게 지각은 폭력적인 인상으로 비슷해진다(σύμφυτον γίγνεσθαι)”고 말한다.87)
아리스토텔레스는 “타고난(τὰ σύμφυτα) 것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도 아이들은 부모와 비슷해진다”고 말한다.88)
플루타르코스는 신체의 고유한(σύμφυτον) 물질에 대해 이야기한다.89)
81) BDR §488,6.
82) Wolter, Röm I, 375, 각주 43.
83) Zahn, Röm, 298 이하; Lietzmann, Röm, 68; Michel, Röm, 205 이하.
84) Wilckens, Röm II, 13 참조.
85) LSJ, s.v.; Cranfield, Rom, 306 이하.
86) Ps.-Platon, Definitiones, 413c: Εὐβουλία ἀρετὴ λογισμοῦ σύμφυτος.
87) Platon, Timaios, 42a6: πρῶτον μὲν αἴσθησιν ἀναγκαῖον εἴη μίαν πᾶσιν ἐκ βιαίων παθημάτων σύμφυτον γίγνεσθαι. 88)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721b29: οὐγὰρ μόνον τὰσύμφυτα προσεοικότες γίγνονται τοῖς γονεῦσιν οἱ παῖδες ἀλλὰ καὶ τὰ ἐπίκτητα.
89) Plutarch, Quaestiones convivales (= Moralia 687B): εἶτʼ ἐπʼ αὐτὴν βαδίζει τὴν σύμφυτον λιβάδα τῆς σαρκὸς ἡ πύρωσις διώκουσα τὸ νοτερόν
식물학자들의 기록에도 σύμφυτος는 성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모든 식물은 생명체처럼 특정한 자연적인(σύμφυτον) 수분과 온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90)
의학 분야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갈렌에 따르면 (신체의) 각 부분에는 내재된(σύμφυτον) 긴장이 존재한다.91)
“근육의 모든 부분에는 수축을 위한 선천적(σύμφυτον)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92)
“태아를 감싼 피부는 자연적인(σύμφυτον) 옷으로 그의 창조자가 만든 것이다.”93)
바울은 σύμφυτοι γεγόναμεν이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동일한 관계(ὁμοίωμα)94)를 분명히 한다.
볼터는 바울이 ὁμοίωμα를 일반적으로 속격과 함께 사용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묘사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언어 사용과 세례라는 비유적 사건 사이의 의미적 차이”를 묘사하기 위해 ὁμοίωμα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95)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성(Gleichheit)”이라는 측면에서 내재적인 연관성을 형성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 전승(고전 15:4a)에 근거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잠긴 사람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동일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로마서 8:29에서 바울은 이 생각을 다시 한번 표현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받은 그의 자녀들이 맡아들(πρωτότοκος)인 그의 아들의 형상(εἰκών)과 닮은 모양(σύμμορφος)을 갖도록 하셨다.96)
90) Theophrast, Historia plantarum, I 2,4: ἅπαν γὰρ φυτὸν ἔχει τινὰὑγρότητα καὶ θερ- μότητα σύμφυτον ὥσπερ καὶ ζῶον. De causis plantarum, VI 16,7.12도 참조.
91) Galen, De naturalibus facultatibus, Kuhn 2, p. 19: ἕκαστον γὰρ τῶν μορίων ἔχει τινὰ τόνον σύμφυτον.
92) Galen, De motu musculorum 2, Kuhn 4, p. 391: ᾧ δῆλον, ὅτι πᾶν μόριον αὐτοῦ (sc. μῦς σύμφυτον ἔχει τὴν κίνησιν τὴν εἰςἑαυτὸσύνοδον. p. 405도 참조.
93) Galen, De foetuum formatione libellus, Kuhn 4, p. 657: σκέπασμα καὶ ἀμφίεσμα σύμφυτον ὑπὸ τοῦ δημιουργήσαντος αὐτὸ γεγονός.
94) Cranfield, Rom, 307; Zeller, Röm, 122 und 124; Jewett, Rom, 400 참조.
95) Wolter, Röm I, 376. 롬 1:23; 8:3; 빌 2:7 참조.
96) 바울은 다른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자들의 미래적인 부활과 연관시킨다. 살전 4:14; 고전 6:14; 15:20 이하; 고후 4:14 참조. 식별 절차(MIP)의 내용을 참조.
바울이 τίκτειν에서 파생된 용어 πρωτότοκος를 선택한 것은 로마서 6:5 의 σύμφυτοι γεγόναμεν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를 서로 연결하는 동일성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례에 대한 해석은 바울이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살 수 없다는 처음의 논지를 정당화하는 근거의 역할을 한다.97)
로마서 6:3-5에서 바울은 세례의 효력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고전 15:3 이하)이 어떻게 신자들의 세례 사건으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바울이 세례를 받은 자들 사이의 연합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례 의식을 비유적으로 언급한 고린도전서 12:13과 갈라디아서 3:27과는 차이가 난다.
로마서 6:3-5는 세례 자체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Ὥσπερ … οὕτως(롬 6:4)와 ὁμοίωμα(롬 6:5)의 사용을 고려할 때, 비유의 기준은 더 명확해진다.98)
비유의 기준은 다른 측면에서도 분명히 충족된다.99)
97) 롬 6:2b(죄에 대해서 죽었음)의 전제에 대한 추가 근거로서 롬 6:6은 6:5의 주장을 더 발전시킨다. 동일성은 세례를 받을 때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결과 죄의 성격을 띤 몸이 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섬기지 않는다는 지식에서 비롯된다. 롬 6:7은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우리” 역시 세례를 받을 때 죽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롬 7:1-6의 또 다른 비유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사람은 (정)죄에서 자유롭게 된다.
98) Dunn, “Metaphor”, 173-75; Dunn, Rom, 311 이하; Dunn, Theology, 452.
99) 다시 Semino, Metaphor, 11 이하에 나오는 프래글재즈(Pragglejaz) 그룹의 비유
우선 로마서 6:2의 ἀπεθάνομεν의 “비-기본적인(nonbasic)” 용례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분명한 사실 외에도 τῇ ἁμαρτίᾳ는 죽음이라는 표현의 특별한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ἐβαπτίσθημεν εἰς는 로마서 6:3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한 사람이 어떤 것에 잠긴다는 것은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 속한다.
하지만 잠기는 곳은 다른 사람(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εἰς Χρι-στὸν), 혹은 그의 죽음(εἰς τὸν θάνατον αὐτοῦ)이다.
비유적인 용법을 이미 확인한 갈 3:27, 고전 12:13에서와 같이 이것은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벗어난다.100)
ἐβαπτίσημεν이라는 단어는 두 번 사용되는데, 비유의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복(repetition)”을 확인할 수 있다.101)
100) 위를 참조.
101) Semino, Metaphor, 22.
또한 βαπτίσμα라는 용어는 ἐβαπτίσημεν을 반복한 것이다.
로마서 6:4 의 συνετάφημεν도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συνθάπτειν은 일반적으로 무덤이나 석관에 실제로 묻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모양과 연합된 것이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신앙고백은 신자들의 세례 경험으로 비유적으로 옮겨지는데, 이것은 비유에 있어서 제공 영역(Spendebereich)의 역할을 한다.
바울은 자신과 신자들이 과거에 물에 잠긴 적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이 경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모양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잠기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바울은 신자들이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된 자들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계속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다.
리츠만(H. Lietzmann)은 세례를 통한 “상징적인 전이(symbolische Übertragung)”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그는 세례에서 죽음의 경험을 실제적인 것으로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이 세례로 옮겨지는 전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오랜 관습처럼) 전적인 사랑에서 물속에 잠길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물속에 잠겨 죽는 것이며, 장사되는 것이다.”102)
102) Lietzmann, Röm, 65.
그리스도 안으로 또는 그의 죽음 안으로 잠기는 것은 공간적 비유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여기서 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In-Christus-Sein)”이라는 거시 비유(Makro-Metapher)를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이 βαπτίζειν/ βαπτίζεσθαι를 사용한 다른 특수한 경우인 고린도전서 1:13-17과 10:2 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제로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벗어난 또 다른 강조점을 확인할 수 있다.
4. “바울과 모세 안으로 잠김”?(고전 1:13-17; 10:2)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분쟁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17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여러분 각자는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다, 나는 게바에게 속한다, 나는 그리스도에게속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12)
각각의 속격은 여기서 소속을 표현한다.103)
103) BDR §162,7 참조.
바울은 중간 질문(고전 1:13) 후에 그리스보와 가이오를 제외하고는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고전1:14).
이러한 특별한 감사의 이유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언급된다: ινα μή τις ειπῃ οτι εἰς τὸ ἐμὸν ὄνομα ἐβαπτίσθητε(고전 1:15).
이 그리스어구절은 우선 번역하지 않은 채로 두도록 하자. ἵνα-구문은 고린도전서1:12의 분쟁 문제와 다시 연결된다.
세례는 세례를 베푼 사람과 일종의 소속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
했고,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볼로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104) 베드로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견은 세례로 확립된 소속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소수에게만 세례를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 소수의 사람과 다른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εἰς τὸ ἐμὸν [sc. Παύλου] ὄνομα로 물속에 잠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울이 세례로 확립된 소속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기를 원하는지는 중간 질문(고전 1:13)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여러분은 나 바울의 이름으로(εἰς τὸ ὄνομα Παύλου) 세례를 받았습니까?”
이 수사적 의문문의 답은 정해져 있다.
μεμέρισται ὁ Χριστός라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다.
그리스도의 몸(τὸ σῶμα Χριστοῦ)은 분열되거나 갈라질 수 없다(고전 12:13 이하, 27 이하).
이 몸을 이루는 교회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구성하는 한 결코 분열되거나 갈라질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의 분열에 대해 신학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고린도전서 1:13의 두 번째 질문(μὴ Παῦλος ἐσταυρώθη ὑπέρ …;)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갈 1:4; 롬 4:25) 자신을 내어주셨고, 또 죽으셨다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 공식(고전 15:3)을 전제로 한다.
고린도전서 1:1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ἐσταυρώθη)105)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세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106)
104) 여기서 베드로가 고린도에서 세례를 준 것은 암시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 왔을 수도 있다.
105) σταυροῦν은 고후 13:4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106) Delling, Kreuzestod, 15 이하, 18, 28 이하 참조.
“잠기다”와 “죽다” 또는 “십자가 에 못 박히다” 사이의 연결은 매우 분명하며,107)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εἰς τὸ ὄνομα Παύλου 또는 εἰς τὸ ἐμὸν ὄνομα ἐβαπτίσθητε라는 구문을 통해서 세례가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받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108)
세례는 단지 세례를 받는 사람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세례를 받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죽음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εἰς τὸ ὄνομα … ἐβαπτίσθητε라는 문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분명한 것은 εἰς τὸ ὄνομα를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구는 세례 의식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 지향점을 형성한다.109)
βαπτίζεσθαι와 εἰς의 결합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에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τὸ ὄνομα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여기서만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110)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 τὸ ὄνομα에서 전치사구 εἰς τὸ ὄνομα는 동사의 지배를 받는다.
이 전치사구를 동사와 분리하여 동사의 의미와 무관한 독립적인 구문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111)
107) 이미 롬 6:3 이하 이전에 이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갈 3:27에서 다시 확인된다.
108) Wolff, 1Kor, 30은 다른 입장.
109) Delling, Zueignung, 70 이하: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을 십자가 사건과 관계를 맺게 한다. 세례와 십자가 사건은 함께 속하는 것이다. 고전 1:13은 처음부터 승귀하신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이 다른 본문에서 ἐν τῷ ὀνόματι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승귀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을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들이 현존하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물속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고전 5:4; 6:11; 빌 2:11 참조.
110) Frankemölle, Taufverständnis, 41-50; Ruck-Schröder, Name, 11-63의 연구사를 참조.
111) Hartman, “Into the Name,” 38 이하; Avemarie, Tauferzählungen, 35-40에 반대.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1세기 이전의 문헌 자료에서 εἰς τὸ ὄνομα가 신약성경의 용례를 제외하고는112) 매우 적게 나타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113)
이 표현은 칠십인역에서 동사를 수식하는 어구로 사용된 적이 없으며,114) βαπτίζειν/ -εσθαι와 함께 사용된 적도 없다.
하르트만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는 잘 확립되어 있었을 수 있지만, 성경적인 표현도 아니었고, 그리스어에서 기인한 표현도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115)
하지만 바울의 언어 사용은 사도행전의 여격 표현이 연결되는 후대의 구문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문헌 자료 외의 자료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0:47에 나오는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라는 문구는 아마도 사도행전 8:16, 19:5에 사용된 εἰς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Ἰησοῦ의 변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εἰς 대신에 장소의 뉘앙스를 가진 ἐν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116)
ἐν τῷ ὀνόματι는 일반 그리스어 문헌에서 βαπτίζειν/-εσθαι 외의 다른 동사와 함께 가끔 사용되었고,117)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는 유대 문헌 외에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118)
112) 마 28:19; 요 1:12; 2:23; 3:18; 행 8:16; 19:5; 고전 1:13; 히 6:10; 요일 5:13 참조.
113) Platon, Cratylus, 427c는 여기에 맞지 않는다. Lietzmann이 언급하는 헤로디안의 예시(1Kor, 7 이하), 군인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Ab excessu divi Marci, 2,2,10: ἔς τε τὸ ἐκείνου ὄνομα τοὺς συνήθεις ὅρκους ὀμόσαντες; 2,13,2: ὀμόσαι τε ἐς τὸ Σεβήρου ὄνομα)은 ὄμνυμι 형식에 의존하는 것으로 2세기의 라틴어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Bietenhard, ὄνομα, 244를 참조. 이 예시는 또한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 τὸ ὄνομα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114) Delling, Zueignung, 15 이하; Hartman, “Into the Name,” 38.
115) Hartman, “Into the Name,” 39.
116) Zerwick, Biblical Greek §99, 107-10.
117) ἐν τῷ ὀνόματι는 도구의 의미(Platon, Cratylus, 393d4: ἕως ἂν ἐγκρατὴς ᾖ ἡοὐσία τοῦ πράγματος δηλουμένη ἐν τῷ ὀνόματι), 혹은 장소의 의미 (Aristoteles, Poetica, 1457a33a: πλὴν οὐκ ἐν τῷ ὀνόματι σημαίνοντος καὶ ἀσήμου)로 해석할 수 있다. 카시우스 디오의 예시에 대해서는 Delling, Zueignung, 27 이하 참조.
118) 바울에게는 나타나지 않으며, 칠십인역에 자주 나타나는 이 형태는 일반 그리스어 문헌에는 종종 나타난다. Delling, Zueignung, 28-31 참조. 헤르모크라테스에 따르면 아테네 사람들은 단지 “이름에 있어서만”(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 … ηὐξήθησαν, Thucydides, Historia, VI 33,6) 올라갔다.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는” 세금이 지불되지 않았다(εὑρίσκομεν … οὔτε πεπεντηκοστευμένον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 τῷ τούτων, Demosthenes, Contra Lacritium [= Or. 35] XXX 3). 판결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취하될 수도 있었다(Demosthenes, Contra Boeotum, 1 [= Or. 39] XXXVIII 5).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는 사도행전 2:38에서 βαπτίζειν/-εσθαι와 함께 사용되는데, 여기서 ἐπί는 사도행전 2:12 에 인용된 칠십인역 요엘 3:5의 ἐπικαλέσηται 때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는 다른 본문 형태들(variae lectiones)에서 볼 수 있듯이 ἐν τῷ ὀνόματι와 사실상 동일하다. 두 형태(ἐν 또는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ι)는 칠십인역과119) 신약성경에서120) 비교적 자주 나타나지만, βαπτίζεινεσθαι와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
사도행전에 이러한 연결이 사용된 것은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121) βαπτίζειν/-εσθαι를 사용한 사도행전의 표현은 세례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122)
Εἰς는 βαπτίζειν/-εσθαι의 사전적인 의미, “잠그다” 또는 “잠기다”에 잘 어울리는 데 반해 τὸ ὄνομα가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와 연결될 때는 특이한 형태가 된다.123)
119) Delling, Zueignung, 16-27; Avemarie, Tauferzählungen, 36, 각주 63 참조.
120) Bietenhard, ὄνομα, 270 참조.
121) Hartman, “Into the Name,” 38 이하.
122) Avemarie, Tauferzählungen, 32–34, 40 이하.
123) Avemarie는 오래된 그리스도교 세례 용어를 언급한다. Avemarie는 Heitmüller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예수로의 전이라는 개념은 누가가 세례를 언급하면서 ὄνομα 를 사용한 네 본문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자신 안으로 잠겼는지”(곧 앞에서 살펴본 세례 문구를 따른다면 ἢ εἰς Παῦλον ἐβαπτίσ- θητε가 되었을 것이다)의 여부를 묻지 않는다.
바울은 ἢ εἰς τὸ ὄνομα Παύλου ἐβαπτίσθητε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와 τὸ ὄνομα의 조합은 특이하기 때문에, 이 표현은 분명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에 잠길 수 없다.
바울은 세례 의식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운명과 연합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εἰς를 사용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τὸ ὄνομα가 이러한 표현과 결합할 수 있는가?
문헌 자료 외에 그리스어로 된 비문들과 도자기 및 파피루스에 남아 있는 자료들은 이 질문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이스만(A. Deissmann)124)과 마찬가지로 하이트뮬러(W. Heitmüller)는 εἰς τὸ ὄνομα라는 표현이 재정적인 영역(Finanzsprache)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125)
또한 고린도전서 1:13과 마태복음 28:19의 βαπτίζειν/-εσθαι 다음에 연결된 εἰς τὸ ὄνομα는 세례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26)
하이트뮬러를 지지하는 바이스(J. Weiss)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1:13에서 “강조점은 전적으로 특정한 개인적인 소속에 놓여 있다.”127)
다른 학자들은 εἰς τὸ ὄνομα가 재정적인 영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만, 이름이 언급된 사람에 대한 소속을 의미한다는 입장에는 동의한다.128)
슈라게(W. Schrage)는 하이트뮬러를 인용하면서 “세례를 통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덮어씌워진다” 129)고 말한다.
124) Deissmann, Bibelstudien, 143-45; Deissmann, Neue Bibelstudien, 24-26; Deissmann, “Rez. zu J. Boehmer”, 73 이하; Heitmüller, Im Namen Jesu, 101, 각주 4 참조.
125) Delling, Zueignung, 31 이하 참조. 해당 예시들은 Heitmüller, Im Namen Jesu, 101- 108; Mayser, Grammatik 2.1, 414 이하 참조. 비문 증거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126) Heitmüller, Im Namen Jesu, 116, 118.
127) Weiss, 1Kor, 19.
128) Delling, Zueignung, 35 이하; Lietzmann, 1Kor, 7 이하 참조.
129) Schrage, 1Kor I, 154.
쩰러(D. Zeller)는 “바울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바울의 이름과 관련하여”라는 의미로 이해한다.130)
다수의 주석가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를 주는 사람과의 소유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131)
고린도전서 1:13, 15에 나타난 세례와 소유관계에 대한 내용은 고대 그리스어 용례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세례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소유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세례 의식을 통해 물에 잠긴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3:28 이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εἷς …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ὑμεῖς Χριστοῦ).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바울, 아폴로, 게바, 등 세례를 베푼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다.
세례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지도자들의 설교와 세례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0:1에서 출애굽 사건에 대한 암시는 칠십인역 출 14:21 이하와 민수기 14:14의 인용에서 알 수 있으며, 이것은 10:2의 모세 이야기의 배경을 제공한다.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고(πάντες ὑπὸ τὴν νεφέλην ἦσαν), 모두 바다를 통과했다(καὶ πάντες διὰ τῆς θαλάσσης διῆλθον).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아래 있었으며, 양쪽에는 바다가 서 있었다.
구름과 바다를 통해서(ἐν τῇ νεφέλῃ ἐν τῇ θαλάσσῃ) 그들은 모두 “모세 안으로 잠겼다”(πάντες εἰς τὸν Μωϋσῆν ἐβαπτίσθησαν).132)
130) Zeller, 1Kor, 93.
131) Weiss, 1Kor, 19; Conzelmann, 1Kor, 50; Wolff, 1Kor, 30 참조.
132) 두 개의 ἐν 형식은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도구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Ferguson, Baptism, 152; Zeller, 1Kor, 324 참조.
바울은 출애굽 전승에는 없는 ἐβαπτίσησαν이라는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잠기는 세례 사건을 출애굽 전승과 연
결하며, 출애굽 사건을 일종의 세례 사건처럼 이야기한다.133)
다른 본문에서는 일반적인 바울의 세례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차적인 용례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134)
133) Conzelmann, 1Kor, 195 이하; Lindemann, 1Kor, 218; Ferguson, Baptism, 151.
134) Delling, Zueignung, 80에 반대. 퍼거슨 역시 세례의 비유적인 해석에 반대하지만 이 본문에 대해서는 “비유적인 사용”이라고 말한다. Ferguson, Baptism, 151.
V. 결론
Βαπτίζεσθαι εἰς τι/τινα의 고대 그리스어에서의 일반적인 용례와 그 의미에서 출발한다면, 바울이 자신과 그의 수신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세례 의식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들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13과 갈라디아서 3:2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잠긴” 경험을 가져와 세례를 받은 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서로 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 1:13, 15에서 바울은 세례 때 잠긴 사람들이 결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유로 이전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세례 의식을 통해서 일어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이야기한다.
로마서 6:3- 5에서 세례에 대한 강조점은 좀 다르다.
여기서 바울은 신앙고백의 언어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잠기는 것”, 곧 그의 죽음과의 연합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말한 다음, 이것을 근거로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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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25. 02. 10. 최종심사일: 2025. 03. 06. 게재확정일: 2025. 3. 10.
신약논단 제32권 제1호∙2025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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