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1953년에 C. H. 도드(C. H. Dodd)가 요한복음 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을 출간하면서 요한복음의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도드는 요한복음을 통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이라는 종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영생을 “장차 올 세상의 삶”(life of the Age to Come)과 비교함으로 유대교의 내세관을 통해 요한복음의 영생을 설명했다.
또한 요한복음의 본문을 세심하게 살피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도 연결하여 요한복음의 영생을 히브리 사상 가운데 위치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이런 중요한 결론들을 남긴다:
1)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하는”(timeless) 하나님의 “영원한 오늘”(eternal To-day)을 사는 경험이다.1)
1)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150.
2) 요한복음의 영생은 헬레니즘의 신비종교가 말하는 정적(static)이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상의 생명 개념처럼 활발하며 즐거움이 가득한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도드에 따르면 영생이란 “인간의 시간”(This Age)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the Age to Come)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드의 영향력 있는 연구는 한계를 지닌다.
그의 연구는 Olam Ha-ba(‘올람 하바’)라는 요한복음 후대에 발달한 유대교의 내세 개념을 가져와 연구의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작 시기 이전의 제2성전 유대교의 역사 속에서 정보를 찾아야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본 연구는 제2성전 유대교의 부활과 영생에 관한 사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면서도 일치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할 것이다.
제2성전 유대교부터 초기 그리스도교까지 연결되는 부활과 영생에 관한 사상은 모두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이시며 공의를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의를 실현하는 방법이 어떤 부활의 모습으로, 어떤 구체적인 종말론적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에 있어서 제2성전 유대교 문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본 연구는 먼저 선택된 제2성전 유대교의 문헌 본문들을 통해서 다양성과 일치성을 기술할 것이다.
둘째, 본 연구는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을 제2성전 유대교 속에서 위치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이 다른 문헌들과 공유하고 있는 히브리적 사상을 파악하고, 그런 다음 요한복음이 고유하게 지닌 종말론 속 영생 사상을 설명해 볼 것이다.
II. 제2성전 유대교와 영생
본 연구의 목적이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영생 또는 생명이라는 키워드를 중점으로 본문들을 선택하고 분석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선택된 제2성전 문헌 본문들이 지닌 독특성과 차이점을 먼저 다룬 후, 이들이 공유하는 신학 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1. 집회서와 요한복음의 심판에 대한 공통성과 차이
시락서(Sirach)라고도 불리는 집회서(Ecclesiasticus)는 내세를 완전히 부정하는 문서로서 대표적이다.
집회서의 장르는 잠언, 욥기, 전도서, 지혜서와 같은 지혜문학에 속한다.
집회서의 머리글에서 볼 수 있듯이, 집회서는 시락의 아들(Ben Sirach) 예수라는 저자에 의해 쓰였고 그의 손자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했다.
“나의 할아버지 예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와 다른 선조들의 글을 읽는 일에 오랫동안 전념하셨습니다 … 에우에르게테스 임금통치 삼십팔 년에 저는 이집트에 가 얼마 동안 머물면서, 적지 않은 교훈이 담긴 이 책의 사본을 발견하고, 정성껏 열심히 이 글을 반드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가톨릭성경; 집회서 머리글 5-30).
예수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연도는 기원전 117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학자들은 원본의 저작 시기를 기원전 195-180년 사이로 추정한다.2)
집회서는 마카비 혁명과 안티오쿠스 4세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회서는 기원전 219-196년 사이에 활동한 대제사장 시몬 2세에 대한 회상을 기록한다.3)
따라서 집회서가 저작된 시기는 유대민족을 향한 헬라화와 탄압이 심해지기 직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집회서의 일원론적 신학을 설명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집회서는 내세, 부활, 또는 영생과 관련된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4)
2) James L. Crenshaw, The Book of Sirach,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5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610-11; John G. Snaith, Ecclesiasticus, CBCNEB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1; Bruce M. Metzger, An Introduction to the Apocryph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78.
3) Crenshaw, The Book of Sirach, 611.
4) 한 가지 예외는 48:11이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καὶ γὰρ ἡμεῖς ζωῇ ζησόμεθα).” 이 한 구절은 부활을 암시할 수도 있으나,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당신”은 선지자 엘리야를 뜻한다.
집회서의 세계관은 철저히 일원론적이다.
집회서의 저자는 전도서와 욥기의 정신과도 상응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즉 죽음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며, 죽음은 사람의 종말을 뜻한다.
예시로 8:7을 볼 수 있다.
“죽은 이를 두고 기뻐하지 말고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라.”
14:17 역시 죽음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육신은 모두 의복처럼 낡아지는 법 영원한 법칙이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2성전 유대교의 문서 중 집회서의 독특성은 지극히 현세 중심적인 일원론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집회서는 전도서와 욥기에 비해 죽음에 대해 비관적이지도 않으며, 죽음이 하나의 순리일 뿐임을 말한다(집회 14:12-19; 41:1-4). 집회서와 같은 문헌 때문에 부활과 영생의 개념이 유대교에서 보편적이기보다 분파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집회서가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적 사상과 공유하는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회서의 유대교적 정체성은 뚜렷하지만, 집회서의 언어는 헬라어이며 수사법 역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5)
5) Crenshaw, The Book of Sirach, 606.
집회서의 목적은 유대인의 유산과 율법에 맞는 생활을 지켜내려고 하는 데 있다.
또한 집회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에 깊은 관심이 있다.
다만 집회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현세에 주어진 삶에서 모두 실현되리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집회 2:14- 15; 5:7; 9:11-12; 11:26-28; 27:3; 27:29; 35:22).
이것은 요한복음이 지닌 종말론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와 사상이다.
집회서는 종말론적 언어, 혹은 추상적인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집회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의 죽음 전에 축복 또는 처벌로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집회서가 말하는 축복에는 장수(1:12, 20; 2:6; 15:17; 30:22; 30:24; 34:20), 건강(1:18; 34:20), 명예로운 죽음 또는 결말(1:13; 7:36; 9:11; 11:28), 부(1:17; 44:11), 자손들(30:4-6; 44:11-13), 후손들의 기념(44-50) 등등이 있다.
반대로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의 처벌로는 고통스러운 죽음(7:17), 폭행(23:21), 재해(39:29-31)가 있다.
그러므로 집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집회서가 말하는 죽음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자신이 남기는 후손들, 이스라엘 공동체, 그리고 명예로운 이름이다.
37:25-26은 말한다.
“사람의 삶은 이미 날수가 정해져 있지만 이스라엘의 날수는 헤아릴 수 없다. 지혜로운 이는 제 백성 가운데에서 명예를 차지하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
41:11-13은 이름과 명성이 삶을 넘어 지속될 것을 가르쳐준다.
“인간들은 썩을 몸을 슬퍼하지만 죄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이름조차도 남지 않으리라. 네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라. 이름이 황금덩이 천 개보다 오래 남는다. 행복한 삶은 그 날수가 정해져 있지만 좋은 이름은 영원히 남으리라.”
44장부터 시작해 50장에서 마무리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 대한 칭송을 통해서도 사람이 자손과 언약과 명예를 통해 죽음을 넘는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들의 몸은 평화롭게 묻히고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다. 뭇 백성이 그들의 지혜를 기리고 회중이 그들을 칭송하리라”(44:13-15).
따라서 집회서가 보여주는 영원의 개념은 요한복음이 주장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영생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집회서와 요한복음이 공유하는 사상도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영원하심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집회서와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예상한다.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집회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현세에서의 축복 또는 벌로 이루어진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과 관련이 있다.
그 심판은 미래의 사건이면서 현재에 결정되는 문제이기도 하다(요 3:15-21; 5:22, 24, 27, 29; 12:48).
요한복음은 집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말론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대는 동일하게 갖고 있다.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 그리고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원론적 표현을 사용함으로 집회서와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는 듯하지만,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에 있어서 두 문헌은 상통한다.
두 문헌 모두 선과 악의 구분, 그리고 그에 잇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대는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집회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에 비해 요한복음은 구체적으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가 무엇인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집회서의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현실적이다.
의인에게는 건강과 장수와 명예와 자손의 축복이 주어지고 악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죽음과 재난이 주어진다.
집회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현세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집회서의 관점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의인의 고난과 같은 모순을 설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요한복음의 심판은 이원론적 세계관과 종말론적 역사관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의인의 고난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그는 부활을 통해 초월적 영생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 주는 자가 되어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영생을 준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비록 현세에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부활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자기의 생명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발성은 고난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힘이 된다.
집회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차이를 자주 강조한다.
집회서에 드물게 쓰이는 영원(αἰών)이라는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특성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인간의 한계와 대조되어 나타난다(17:1-2, 11, 28, 30, 32; 18:9-10).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께서 만물을 함께 창조하셨다”(18:1).
여기서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ὁ ζών εἰς τὸν αἰῶνα)으로 소개된다.
또한 36:22에서 저자는 땅 위의 만민이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ὁ θεὸς τῶν αἰώνων) 이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6)
6) καὶ γνώσονται πάντες οἱ ἐπὶ τῆς γῆς ὅτι σὺ κύριος εἶ ὁ θεὸς τῶν αἰώνων.
여기서 “영원하신 하나님”(the eternal God)은 “만세의 하나님”(God of the ages)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이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논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ζωὴ αἰώνιος)이란 표현으로 형용사 αἰώνιος는 17번 등장한다(요 3:15-16,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 3).
그리고 영생은 아들 예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 자주 등장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당연한 전제이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의 특별한 신학은 이 하나님에게 고유한 영원한 생명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전치사구 εἰς τὸν αἰῶνα(‘영원히’)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있다.
이 구는 요한복음에서 12번 사용되며 주로 영생과 관련된 본문에서 등장한다.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는 창세기에서 2번 등장하는데, 두 번 모두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금지하는 본문에서 등장한다(창 3:22; 6:3).
이 사실에 비추어 보면 집회서와 요한복음 모두 영생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에 동의하며 히브리적인 사고를 고수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영생이 세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사는 삶이라는 양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집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점과 공통성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차이점은
1) 집회서는 내세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정의가 현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모두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다.
집회서에서 죽음은 인간에게 당연한 순리이며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장치이다.7)
7) C. D.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in Early Judaism 200 BCE-CE 20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93.
2) 요한복음은 종말론적 언어를 통해 죽음 너머의 삶과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세까지 확장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현재에서 결정된다.
공통점으로는
1) 집회서와 요한복음 모두 영생이 하나님에게만 속한 고유한 속성임을 긍정하고 있다.
2) 실현의 방법은 다르지만, 두 문헌 모두 선과 악에 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기대한다
집회서와 요한복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겠다.
2. 지혜서의 “불멸”과 요한복음의 “영생”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라고도 불리는 지혜서는 집회서와 마찬가지로 지혜문학에 속하는 제2성전 시대의 문헌이다. 지혜서의 저자와 기록연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저자가 70인역의 이사야서와 욥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70인역 집필 후에 저작된 것만을 확신할 수 있다.8)
학자들은 저작 연도를 기원전 220년부터 기원후 50년 사이로 추정한다.9)
지혜서의 원어는 헬라어이며 헬라철학과 문화에 익숙한 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에 의해 쓰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10) 저자의 목적은 저자의 동족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지혜가 우상을 숭배하는 이웃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에 있다.11)
그리고 의로운 삶을 지켜나가면 불멸을 상으로 얻게 될 것을 주장함으로 현재의 고난을 설명하려는 의도 또한 존재한다.12)
8) Ernest G. Clarke, The Wisdom of Solomon, CBCNEB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1.
9) David Winston, The Wisdom of Solomon, AB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9), 20.
10) Winston, The Wisdom of Solomon, 1;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110.
11) Winston, The Wisdom of Solomon, 63.
12) Winston, The Wisdom of Solomon, 63.
지혜서는 집회서와 정반대되는 신정론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 너머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전반적인 지혜문학의 경향과는 달리 지혜서는 의로운 자들이 ἀθανασία(‘불사’[immortality])를 상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1:15; 3:4; 4:1; 6:18-19; 8:13, 17; 15:3).
현세의 삶만을 긍정하는 집회서를 비판하듯 지혜서의 저자는 현세에 대한 긍정을 악인들과 연결한다(2:1-20).
지혜서가 말하는 악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삶은 짧고 죽으면 끝이 난다(2:1).
사람이 죽은 후에는 몸은 재로 돌아가고 영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다(2:2-4).
그러므로 악인들은 살아 있을 때 즐기고, 취하고, 탐욕에 따라 억압하고 빼앗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한다(2:6-11).
그리고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의인을 고통과 죽음으로 시험하자고 말한다(2:12-20).
그러나 지혜서의 저자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2:21).
왜냐하면 거룩하고 흠 없는 의인에게는 불멸의 소망과 평화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민족들을 통치하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2:22; 3:1, 3-5, 8).
지혜서에 의하면 의인의 불멸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본성인 영원이다.
그리고 창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의도이다.
지혜서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2:23-24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톨릭성경은 23-24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지혜서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ἀφθαρσία(‘불멸’[incorruptible])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악에 의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오직 악을 행하는 자만이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23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함의 형상으로”(εἰκόνα τῆς ἰδίας ἀϊδιότητος) “인간을 만드셨다”(ἐποίησεν αὐτόν) 고 말한다. 지혜서의 표현이 다소 헬라적일지라도 그 사상의 기반은 창세기에 두고 있다.13)
“형상”(εἰκών)과 “영원”(ἀϊδιότητος)은 요한복음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지혜서의 창조신학은 요한복음 1장의 창조신학과 비교해 볼만하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에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요 1:1-4).
요한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영원을 본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영생을 주는 그 말씀이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빛으로서 어둠에 비췄으나 어둠은 그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얻지 못했다”(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1:5). 악과 어둠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3:18-20; 5:29).
그러나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의도가 세상에 구원과 영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3:16).
이 모든 것을 결합해 봤을 때 요한복음과 지혜서는 창조에 대한 비슷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영생을 주는 것을 의도하신다고 두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지혜서는 곳곳에서 2:23과 같은 창조신학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1:13).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고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게 세상을 만드셨다(1:14).
또한 12:1에서는 “당신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14)
13) Clarke, The Wisdom of Solomon, 27; “καὶ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τ᾽ εἰκόνα θεοῦ ἐποίησεν αὐτόν ἄρσεν καὶ θῆλυ ἐποίησεν αὐτούς”(창 1:27; LXX).
14)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111.
그러므로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악에 의해서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만이 죽음을 맞게 된다.
“악인들은 행실과 말로 죽음을 불러내고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것을 열망하며 죽음과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죽음에 속한 자들이 되어 마땅하다”(1:16).
이 구절은 이사야 28:18을 암시한다.15)
반대로 의인들은 불사하고 그들이 죽더라도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며 악인들에게만 그들이 멸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3:2-4).16) 지혜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자들은 때로는 고난을 겪지만 끝내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것이다.17)
지혜서가 말하는 이 불멸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가 없다. 지혜서는 “영혼”과 “불사”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 또는 영혼의 선재(pre-existence) 또는 영혼의 귀향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7:1, 6).18)
15)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6)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111.
17)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 3:1-5).
18)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같이 지혜서가 헬라철학의 영혼에 대한 이해를 반영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참조. Winston). 그러나 필자는 지혜서의 저자가 사용하는 영혼(ψυχή)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네페쉬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본다. 예시로 15:11을 볼 수 있다. “자기를 빚으시고 ‘활동하는 영혼’(ψυχὴν ἐνεργοῦσαν) 을 불어넣으셨으며 ‘생명의 숨’(πνεῦμα ζωτικόν)을불어넣어 주신 분은 알지도 못한 채.”
요한복음의 영생과 비교해 봤을 때 지혜서가 말하는 불멸은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혜서가 말하는 불멸은 부활과 체현(embodiment)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활과 영생이라는 표현은 지혜서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지혜서에서 불멸이란 “의로움”(δικαιοσύνη; 1:15)이고, “선”(ἀρετῆς)을 행하여 기억되는 것이며(4:1), 지혜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불멸을 얻어서 하나님 과 가까워지는 것이다(6:18-19).
불멸은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며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억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8:13, 17).
지혜서의 설명을 정리해 보자면 불멸은 의를 통해 얻는 것이며 지혜가 그 길로 인도해 주는 도움이 된다.
다만 이 불멸의 성격과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지혜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지혜서가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과 종말론적인 사건을 기대하는 초기 모습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지혜서의 불멸에 대한 소망은 그 언어가 매우 다르지만 요한복음과 공유하는 점들을 지니고 있다. 두 문헌은 죽음을 넘는 삶에 대한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
의인이 영생 또는 불멸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두 문헌은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명확하게 가르는 이원론을 보여준다.
선 또는 악을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반드시 받으리라는 신정론 또한 다른 유대 문헌들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지혜서에서 의인은 불멸과 불사로, 악인은 처벌과 파멸로 심판을 받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요 5:29).
요한복음이 ἀθανασία와 ἀφθαρσία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은 헬라철학과의 연결성을 배제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저자의 배경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사와 불멸의 개념 또한 영생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ἀθανασία 와 ἀφθαρσία는 바울서신에서 영생 또는 부활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롬 2:7; 고전 15:42, 50, 53-54; 딤후 1:10).
따라서 지혜서와 요한복음 모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며 의인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지혜서와 요한복음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문헌 모두 앎과 이해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γινώσκω(‘알다’)는 여러 번 등장하고 요한복음과 그노시스에 관한 연구 또한 많이 이루어졌다.
요한복음에서는 진리를 아는 것,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 예수의 말을 이해하는 것 등등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 구절로 영생을 이렇게 정의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헬라어로부터 조금 더 직역을 하자면 이렇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 당신과 당신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9)
19) αὕτη δέ ἐστιν ἡ αἰώνιος ζωὴ ἵνα γινώσκωσιν σὲ τὸν μόνον ἀληθινὸν θεὸν καὶ ὃν ἀπέστειλας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이와 비슷하게 지혜서 역시 불멸에 관하여 이렇게 서술한다:
“당신을 앎은 온전한 정의이고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15:3).
여기서 저자는 ἐπίστασθαί와 εἰδέναι라는 표현을 쓴다.
두 단어 모두 깨달음, 이해, 앎을 뜻하는데 전자인 ἐπίσταμαι는 요한복음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인 οἶδα는 84회나 쓰인다.
따라서 앞서 불사와 영생을 비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앎에 있어서도 두 문헌은 다른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통하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혜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의와 연결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악으로 연결된다(2:13, 22; 12:27; 14:22; 15:3, 11).
지혜서는 의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γνῶσιν ἔχειν θεοῦ)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παῖδα κυρίου)이라고부른다”고 말한다(2:13).
3:7- 8에서 지혜서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찾아오실 순간에 그들은 빛을 내고 민족들을 통치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3:9a).20)
20) οἱ πεποιθότες ἐπ' αὐτῷ συνήσουσιν ἀλήθειαν καὶ οἱ πιστοὶ ἐν ἀγάπῃ προσμενοῦσιν αὐτῷ.
요한복음과 비슷하게 지혜서도 “진리를 이해하는 것”(συνήσουσιν ἀλή- θειαν)과 “하나님과 함께 사랑 안에 거하는 것”(ἐν ἀγάπῃ προσμενοῦσιν αὐτῷ)을 의인의 종말로 설명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두 문헌 모두 영생을 단지 길게 살거나 다시 사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여주고 있다.
영생과 불멸이란 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존재의 방식을 뜻하는 것이다. 이 두 문헌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불멸 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요한복음이 말하는 앎이란 영지주의가 말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히브리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일 수 있다.
그의 영원하신 속성을 알고 그에게 생명의 권한이 있는 것을 알아 그를 신뢰하기까지 이르라는 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영생의 권한과 수단이 모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를 또한 알라는 것이다(참조. 요 5:21-27).
예수를 알아가고 그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 영생은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 요한의 영생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은 신뢰하는 관계를 뜻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그 상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와 관계를 맺으려면 예수를 아는 지식이 먼저 필요하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9:35; 20:31).
거꾸로 말하자면, 영생에 이르는 것은 증언부터 시작하여 아는 것으로, 아는 것에서부터 믿는 것으로 발전하고, 믿는 것에서 따르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따라서 영생은 앎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3. 다니엘서와 요한복음의 부활과 영생
히브리 성경을 통틀어 부활과 영생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본문은 다니엘 12:2 밖에 없다.
다니엘 12:2는 외경과 묵시문헌들 가운데서도 부활과 영생을 직접 언급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 본문은 부활과 관련된 다른 문헌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될 만큼 제2성전 유대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예. 솔로몬의 시편 3:11-12).21)
21) “죄인의 멸망은 영원하다 …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일어나 영생에 이르고, 그들의 생명은 주님의 빛 속에 있게 될 것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The destruction of the sinner is forever … but those who fear the Lord shall rise up to eternal life, and their life shall be in the light of the Lord, and it shall never end);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77.
개역개정의 번역과 70인역의 번역은 이러하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καὶ πολλοὶ τῶν καθευδόντων ἐν γῆς χώματι ἐξεγερθήσονται οὗτοι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οὗτοι εἰς ὀνειδισμὸν καὶ εἰς αἰσχύνην αἰώνιον
여기서는 유일하게 요한복음과 동일한 “영원한 생명”(ζωὴν αἰώνιον)이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그리고 다니엘을 통해 신약성서 이전의 제2성전 유대교에서 부활과 영생에 대한 기대가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7-12장의 다니엘의 묵시적 환상은 기원전 2세기, 즉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인 핍박 시기에 작성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본다.22)
22) John J.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An Introduction to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87-88. 이은재 _제2성전 시대 유대교와 요한복음의 영생 신학❙17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다니엘 12:2는 10-12장의 환상에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10장에서 다니엘은 한 천사의 방문으로부터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10:20에서 천사는 말한다:
“내가 어찌하여 네게 왔는지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바사(페르시아)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
이 천사의 말은 페르시아의 멸망과 헬라제국의 융성을 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1:3-4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그의 제국이 4개의 나라로 분열될 것을 보여준다.23)
그 후의 내용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남방의 왕)와 셀레우코스 왕조(북방의 왕)의 전쟁이다.
그런 다음 11장 절반 이상의 내용은 안티오코스 4세의 군림과 핍박에 대해 다루고 있다.24)
그의 핍박 중에는 성전을 더럽히는 일들과 제사를 중단하고 우상을 세우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천사는 말한다(단 11:30-31).
많은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적군과 한패가 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기 있게 버티어 나갈 것이고, 백성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들(마스킬림)이 많은 백성을 깨우칠 것이라 천사는 말한다(11:32-33).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일부는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게 된다(11:33).
그러나 그들의 몰락은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는 연단의 과정이라고 천사는 설명한다(11:34).
그리고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계시가 12:1-3에서 정점을 찍는다.25)
23)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단 11:3-4); W. Sibley Towner, Daniel,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4) 154-55.
24)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110.
25) Collins, The Apocalyptic Imagination, 112. 18❙신약논단 제32권 제1호∙2025년 봄
천사 미가엘이 일어날 때 많은 이들이 깨어나 영원한 생명 또는 영원한 부끄러움에 이르고, 칼날과 불로 죽임을 당했던 지혜로운 자들은 하늘의 밝은 빛과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된다(12:2-3).
여기서 다니엘의 환상이 끝난다.
이 내용이 다니엘이 말하는 영생의 맥락이다.
다니엘이 설명하는 부활과 영생에는 요한복음의 영생과 유사한 부분들과 다른 부분들이 모두 존재한다.
유사한 점부터 다루자면 첫 번째로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부활과 영생을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두 문헌의 종말론적 시각은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 또한 존재한다. 두 문헌 모두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부활과 영생을 설명하는데, 키워드는 “때”이다.
다니엘은 “정해진 때”의 의미가 강한 καιρός라는 단어를 쓴다.
다니엘 12:1에서 천사는 “그 때에”(ἐν τῷ καιρῷ ἐκείνῳ) 미가엘이 일어나고 환난이 닥치고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2-3절에서 말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지혜로운 자들의 영광스러운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 때”는 마지막, 또는 종말의 때로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고 심판하시는 때를 말한다.26)
이 마지막 때는 12:1의 앞뒤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단 11:27, 35, 40; 12:4).27)
학자들은 이 마지막 때는 안티오코스 4세가 죽는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지막 때까지”(ἕως καιροῦ συντελείας; 12:4)라는 표현과 환난과 구원과 천사들의 개입에 대한 내용을 볼 때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순간을 은유하는 것을 넘는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28)
요한복음은 “때가 오고 있다”(ἔρχεται ὥρα)는 표현과 “마지막 날에”(ἐ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라는 표현으로 종말론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29)
26) Towner, Daniel, 166.
27) Louis F. Hartman & Alexander A. DiLella, The Book of Daniel, AYBC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8), 303.
28) 렘 3:17과 4:11도 종말론적인 내용을 다루며 “그때”(ἐν τῷ καιρῷ ἐκείνῳ)라는 표현을 쓴다; John J. Collins, Daniel: A Commentary on the Book of Daniel, Hermeneia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3), 390.
29) “때가 오고 있다”(4:21, 23; 5:25, 28; 16:2, 25, 32); “그날에”(6:39-40, 44, 54; 11:24; 12:48).
이 두 표현은 영생, 부활, 심판, 또는 환난의 순간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따라서 다니엘과 요한복음은 공통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소망으로서 영생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활과 영생의 순간은 환난과도 매우 밀접한 시기에 있다. 이것은 두 번째 요점과도 연결된다.
다니엘과 요한복음 둘 다 영생의 출발점을 현재의 핍박에 두고 있다.
다니엘에서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한 율법의 금지와 우상숭배 강요와 처형과 약탈이 배경이 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한 출교와 로마제국에 의한 핍박이 배경이 된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당대의 핍박에 대한 가장 큰 단서는 예수의 고별담화(13-17장)에서 발견된다.
제자들은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요 15:18-20).
예수는 제자들을 실족하지 않길 원하며 그들이 계속 보전되길 원한다(16:1; 17:11).
제자들은 일부 유대교 공동체로부터 출교와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된다(16:2).
그들은 근심하게 되고 흩어지게 되며 환난을 겪게 된다(16:20-22, 32-33). 로마에 의한 핍박에 대한 단서는 κόσμος(‘세상’)이란 표현의 사용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요한복음에서 κόσμος는 말 그대로 세상, 인류, 피조세계, 그리고 현세를 뜻하기도 하지만 로마제국을 암시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30)
30) 요한공동체가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었던 것을 사실로 전제한다면 요한복음이 직접적인 반제국적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Craig S. Keener는 “하나님의 나라”의 정치적 뉘앙스 때문에 그 개념이 요한복음에서 “생명”으로 대체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vol. 1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3), 328.
요한복음 18:36에서 예수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의 나라는 로마에 반대되는 유형의 나라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제자들 또한 예수와 같이 세상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다(15:19; 17:6, 9, 14, 16).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로마에 의해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핍박의 이유는 황제숭배가 더 강화되고 유대전쟁 이후 제국에 도전이 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탄압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31)
31) Keener, The Gospel of John, 177-79.
궁극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영생과 핍박의 연관성은 12:25이 보여주고 있다:
“자기의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다니엘과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각각 다른 제국들 아래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불의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순교했다.
따라서 부활과 영생은 그들에게 당연한 소망으로, 그리고 마땅한 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종말의 때에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원한 수치로 심판받게 되리라는 소망을 두 문헌은 공유하고 있다.
이제 다니엘의 영생과 부활 그리고 요한복음의 영생과 부활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다니엘에서 등장하는 영생은 부활과 함께 묶여 있다.
다니엘에서 영생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일어나는 일이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단 12:2).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항상 부활과 함께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훨씬 범위가 넓은 개념으로서 빛, 영광,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설명하는 용어가 된다.
또한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험으로서 현재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단순히 “살아있음”을 넘는 상징적인 언어이다.
이 차이는 다니엘과 요한복음의 종말론적 관점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다니엘에서 종말은 더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한 사건을 뜻하고 있다.
다니엘 11-12장은 계속해서 미래의 한 사건을 가리켜 말한다(단 11:27, 35, 40; 12:1, 4).
그때는 바로 북방의 왕이 죽은 후에 미가엘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가 구원을 받는 사건을 뜻한다(11:45- 12:3).
다니엘 10-12장에서 이 외에 다른 종말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다니엘에서는 종말이 미래의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설명되며 “철저한 종말론”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요한복음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기도 하며 현재를 미래와 연결하기도 한다. 영생의 현재성은 문법적으로 현재시제를 통해 나타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현재에 “갖는다”(ἔχει)는 표현만 요한복음에서 8번 등장한다(요 3:15, 16, 36; 5:24; 6:40, 47, 54, 68). 또한 예수는 현재에 영생을 주기도 한다(10:28; 17:2). 이 현재에 얻는 영생은 미래와도 연결된다.
“아들을 보고 믿는 모든 자마다 영생을 갖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0).32)
32) πᾶς ὁ θεωρῶν τὸν υἱὸν καὶ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ἀναστήσω αὐτὸν ἐγὼ ἐ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ἔχει)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ἀναστήσω)”(6:54).
그리고 현재의 선택이 미래의 심판을 결정하기도 한다(3:36; 5:24; 12:48).
요한복음에서는 미래로 생각됐던 종말론적 사건이 현재에서 일어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καὶ νῦν ἐστιν)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4:23과 더불어 5:25는 예수를 통해 종말적 사건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보여준다.
서사적으로 볼 때, 5:25에 나오는 요한의 주장은 11장에서 나사로의 부활로 인증된다.
11장에서 마르다는 부활을 미래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그러나 예수는 현재시제(ἐγώ εἰμι)로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한다(11:25).
25-26절에서 예수의 말은 미래를 가리키기도 하나 그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음을 예수는 곧바로 보여준다.
43-44절에서 죽었던 나사로는 무덤에서 예수의 “음성”(φωνή)을 듣고 살아난다(참조. 5:25, 29).
여기서 마르다의 고백이 중요하다.
마르다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고 계시는”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11:27).
미래라고 여겨진 종말의 시간이 이제 곧 다가와 온 것처럼(ἔρχεται ὥρα καὶ νῦν ἐστιν),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종말의 심판자 예수가 이 세상에 이미 온 것이다.
예수는 현재와 미래에도 “생명을 주는 자”(life-giver)이다.33)
또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생명과 생명을 주는 자는 과거에서까지도 존재했다(1:4).
따라서 요한복음의 영생은 정말로 영원(eternity) 을 뜻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대(all ages)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과 요한복음의 차이는 사용되는 표현 방법들에서 발생한다.
전자는 우주적인(cosmic) 언어를 쓰지만 후자는 현실적이며 육체적인 언어를 쓰고 있다.
다니엘의 부활과 영생 본문은 천사가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다니엘에서는 부활과 동시에 지혜 있는 자들이 하늘의 빛과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는 우주적인 언어를 동반하고 있다(단 12:3).
여기서 별과 같이 빛나게 되는 지혜로운 자들의 변화는 8:10의 별들과도 연결되는 듯하다.34)
33) Keener, The Gospel of John, 652-53.
34) Elledge, Resurrection of the Dead, 33.
안티오코스 4세를 상징하는 듯 보이는 한 뿔이 자라나 하늘의 군대와 별들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는다(8:9-11).
12:2-3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별과 같이 되는 이 변화는 우주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사건으로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서 부활과 영생은 환상적이며 우주적인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탓에 그 뜻이 문자적으로 이해되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부활과 영생을 말할 때 환상적인 언어를 전혀 쓰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상징적이며 추상적인 요소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예. 요 6:35; 8:12; 12:50; 17:3).
하지만 그것이 환상적이거나 우주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영생을 얻은 자가 별과 같이 변한다거나 천사같이 변하리라는 본문은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 생명을 얻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 모습은 굉장히 육체적이며 일반적이고 현세적이다.
11장에서 나사로는 붕대를 감은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다(11:44).
그리고 부활한 그는 식사를 즐기려 만찬에 참석하고(12:2), 다시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12:9-11).35)
14:2에서 예수가 거처를 약속하는 아버지의 집은 일반적인 “집”(οἰκία)으로만 설명된다(참조. 고후 5:1).
새 창조이자 종말의 부활체의 지표가 되는 부활한 예수의 몸 또한 굉장히 육체적이며 일반적인 모습을 보인다.36)
마리아는 예수가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하기도 하고(20:15) 예수를 붙들기도 한다(20:17).37)
35) N. T.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3), 443.
36) 물론 20:12에서 천사들이 등장하고 19, 26에서 부활한 예수가 문이 잠긴 방을 넘나드는 것과 같이 신화적인 요소 또한 등장한다.
37) 마리아가 예수를 만졌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20:20) 도마에게는 만져보라고도 한다(20:27).
21장에서 예수는 조식을 직접 준비한다(21:9-15).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이 에녹과 같이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임을 확인해 준다(21:23).
영생을 가리키는 일곱 기적 또한 고려해 볼 수 있다(20:30-31).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고(2:1-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고(4:46-54),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고치고(5:2-9),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먹이고(6:1-14), 눈먼 자를 고치고(9:1-7), 나사로를 살리고(11:1-44),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다.38)
38)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669.
이 모든 사건은 현세에서 나타나는 일들이다.
그중에서 환상적인 언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영생이 드러나는 순간들은 모두 물리적이며 육체적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내세를 말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현세를 가리키고 있는 성서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은 현세의 사건들을 통해 영생을 설명하기도 하고 영생을 추상화시켜 그 초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영생을 해석하는 데 딜레마가 존재한다.
영생은 물리적인 것인가, 추상적인 것인가?
나는 둘 다라고 본다.
요한복음에서 현세와 내세는 서로를 설명하고, 내재와 초월이 예수 안에서 공존함으로 영생은 변증법적 관계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III. 제2성전 유대교의 흐름 속에서 본 요한복음의 영생과 그 의미
지금까지 이 연구는 집회서와 지혜서와 다니엘과 요한복음을 비교해 보았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문서를 통해 영생이란 개념이 제2성전 유대교 안에서 서서히 발전되고 있었음을 결론지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을 포함한 네 문헌을 관통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는 창조적 사역과 정의를 실현하시리라는 기대가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대의 구체적인 모습은 각 시대와 환경과 목적에 따라 분파적으로 나타나며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연대적 순서에 의하면 집회서가 가장 먼저 집필됐다.
집회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세와 종말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
집회서는 욥기, 전도서와 더불어 현세 중심적인 히브리적 사고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집회서는 이원론적 시각의 조짐 또한 갖고 있다.
특히 집회서에서 발견되는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선과 악에 잇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은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예. 17:20; 요 3:20).39)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대조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극심한 차이를 보여주는 “신학적 이원론”(theological dualism)으로 분류할 수 있다.40)
그렇다면 왜 시공간적 이원론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은 집회서에서 발견할 수 없을까? 41)
그 이유는 당대 유대 사회를 향한 탄압의 정도에 있다고 본다.
극심한 탄압이 없는 공동체와 저자만이 현세에서 누리는 부, 장수, 자손, 민족 등을 의에 대한 보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42)
39) Richard Bauckham, The Gospel of Glory: Major Themes in Johannine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5), 120.
40) Bauckham, The Gospel of Glory.
41) 예외적으로 엘리야를 회상하는 본문에서 죽음을 넘는 생명에 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집회 48:4-5, 11).
42) 이스라엘 민족의 연속과 대를 잇는 자손들에 대한 축복은 그 나름대로 죽음을 넘고 시대를 넘는 생명에 대한 이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집회서도 죽음을 넘는 생명에 대한 기대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혜서와 다니엘은 안티오코스 4세의 탄압과 마카베오 전쟁 이후로 저작됐다 추측해 볼 수 있다.
마카베오기 1, 2권으로부터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원전 2세기의 유대 사회는 극심한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자들이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유대 사회는 목격하게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런 이유로 지혜서와 다니엘에서는 죽음 너머의 생명에 대한 소망이 더욱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기대가 한편으로는 불멸의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과 영생이 주어지는 종말적 사건의 형태로 발전된 것이다.43)
43) Wright는 지혜서를 철학적 문서로서 읽을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핍박 역사를 반영한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있는 문서로 읽을 것을 제시한다. 지혜를 통해서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지혜롭게 살자는 초연한 메시지가 아니다. 유대인의 지혜인 율법을 지켜나가자는 저항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의도가 담긴 메시지라는 것이다.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173-74.
이런 다양한 신정론의 발전의 배경 속에서 요한복음이 등장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제2성전 유대교의 사고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앞서 살펴본 문헌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개념, 즉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계승되는가?
생명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은 이렇게 서술한다.
세상을 만드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요 1:3-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예수라는 사람으로 세상에 왔다(1:9-10, 14).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다루는 것이 요한복음의 서사이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다른 모습으로 생명이 회복되는 일들이 요한복음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그 사건들과 더불어 예수는 그 의도가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다고 가르친다.
집회서, 지혜서, 다니엘과 같이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요 3:15-16, 36; 4:14; 5:24; 6:35, 40; 10:10, 28; 12:47-50; 17:2-3; 20:31).
하나님의 뜻은 세상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요한은 매우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요한의 독특한 신학은 창조적 능력을 지닌 그 생명이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인가 말씀인가?
1:1-4의 맥락으로는 여기서 “그”는 말씀, 즉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요한의 언어유희가 있다고 본다.
대명사 “그”는 말씀을 가리키면서도,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관계성은 5:26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 안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영원한 생명이 그의 권한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도 있게 된 것이다.
요한의 메타포에서 예수는 영생을 주는 자이기도 하며, 영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예. 요 6:27, 33, 35, 48).
이러한 메타포들은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중보자이자 하나님 안에 내재했던 생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제2성전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창조적 생명은 이런 표현들로 요한복음에서 계승되고 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실현성을 요한은 강조하고 있다.
영생의 실현성은 곧 정의 실현의 문제와 직결된다. 지혜서에서는 불멸로, 다니엘에서는 종말의 때에 영생의 부활로 핍박받은 의인들이 보상을 받으며 정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된다.
요한복음은 의인들이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다니엘의 종말론적 언어와 하나님을 앎으로 불멸을 누리리라는 지혜서의 희망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요한복음은 지혜서보다 구체적이며 다니엘보다 현재 중심적이다.
지혜서의 불멸보다 요한복음의 영생이 구체적인 이유는 요한복음의 영생은 몸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생이 현현되는 표징들 또한 모호한 모습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바뀌고, 아픈 자가 낫고, 배고픈 자가 배를 불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구체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의 현현과 정의의 실현은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요한복음의 종말론은 다니엘의 종말론보다 현세 중심적이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현재부터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부활 또한 이미 부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예.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의 부활).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제2성전 유대교의 유산을 물려받아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리라는 기대를 공유한다.
요한복음은 분명히 악에 대한 심판을 예상하고 선전한다(요 3:17-19; 5:22-30; 12:31, 47-48; 16:11).
심판이 하나님과 예수의 의도는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의도는 세상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예수가 온 것의 목적이 아닐지라도, 그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44)
심판과 더불어 요한복음은 의인에게 부활과 영생이 주어짐으로써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의인이란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자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선과 무관하지 않다(요 1:46; 5:29; 7:12; 10:11, 14, 32).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의에 대한 보상은 지혜서와 다니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대가 발전하고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혜서와 다니엘의 역사적 상황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의 상황 역시 박해와 탄압의 상황이었다.
특히 예수의 고별담화를 통해 재구성해 본 요한공동체의 상황은 미움과 박해와 죽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45)
44) F. F. Bruce, The Gospel of John: Introduction, Exposition, and Notes (Grand Rapids: Eerdmans, 1983), 132.
45) 송진순, “포도나무 이야기(요 15:1-11)에 반영된 요한공동체의 기억과 자기 이해,” 신약논단 24/1 (2017), 83-85, 102.
그러나 그들의 삶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공동체의 연합으로, 기쁨으로, 사랑으로, 영광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영생이란 육체적 기능의 회복과 몸의 부활에 한정돼 있지 않다.
핍박과 죽음을 이겨내게 하는 삶의 태도가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기도 한 것이다.
영생은 목숨(ψυχή)과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영생은 생명을 주는 힘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안에 그 권한이 있으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반대로 목숨은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요 10:11-18; 12:25).
오히려 잃는 자들이 얻을 것이다.
“‘자기의 생명’(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는 예수의 말은 제자들만을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끝날 수가 없다. 그는 영생의 중보자이자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서 죽음으로 끝을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46)
영생을 주려면 그는 영생하는 존재여만 한다.
그는 또한 죽음을 이겨낸 증인으로서 삶의 승리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주고 있다.
예수는 이미 죽음과 세상을 이긴 자로서 그를 믿는 자들을 죽음을 넘어서는 삶으로 초대한다(16:33; 20:19-31; 21:19-20, 22).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와 창조적 활동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났다. 요한의 내러티브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의인이 불의하게 죽은 사건이 아니다.
예수에게는 영광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는 사건이다(12:23-24).47)
46) Andrew T. Lincoln,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Life in the Face of Death, ed. by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129.
47) 공관복음이 모두 공유하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십자가에 대한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난을 겪는다는 뜻의 πάσχω는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십자가 죽음을 가리킬 때 요한의 예수는 ὑψόω(‘높여지다’, ‘들리다’)와 영광이라는 표현만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의 폭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이해하는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영광과 높여짐이라는 표현으로 십자가를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묘사한다(참조. 요 5:44).
IV. 결론
본 연구는 집회서와 지혜서와 다니엘을 통해 영생과 관련된 제2성전 유대교의 다양한 관점들을 요한복음과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본 연구가 목표했던 두 가지를 논증했다.
첫째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 부활과 영생이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면서도 일치되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네 문헌을 살펴본 결과, 제2성전 유대교에서 영생에 대한 기대는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다양성 속에서 일관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기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문헌들이 모두 일치되게 가졌던 관점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의를 반드시 실현하시리라는 기대였다.
이러한 유산을 요한복음은 이어받아 영생이란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생명이 예수를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고유적인 영생 사상을 제2성전 유대교의 히브리적 사고 가운데 설명함으로 본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면 관계상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요세푸스, 그리고 에녹서 등의 영생과 관련된 본문들을 살펴보는 작업은 향후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서가 유대교와 히브리 사상의 유산 속에서 더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드의 결론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원함(timelessness)을 경험하는 삶이 곧 영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분으로서 영원한 존재이다.
인간은 세대와 시대에 한정돼 있다.
그럼에도 예수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맛보고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세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라는 사람으로 세상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는 육신 이상의 존재로 영원하게 됐다.
이런 예수를 통해 얻는 영생은 그저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것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요한복음의 기대를 고려하면 우리는 영생의 물리적인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요 5:29; 6:39-40, 44, 54).
그러나 영생을 물리적 현상에 가둘수는 없다.
요한복음이 독자에게 말하는 영생은 물리적인 세상을 통해 초월을 이해하고, 물리적인 이 세상 속에서 초월을 경험하라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적인 세계로의 초대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와 나 사이의 관계성을 뜻한다면, 영생은 그 관계성으로부터 얻는 경험을 함축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송진순. “포도나무 이야기(요 15:1-11)에 반영된 요한공동체의 기억과 자기 이해.” 신약논단 24 (2017), 79-112. Bauckham, Richard. The Gospel of Glory: Major Themes in Johannine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5. Bruce, F. F. The Gospel of John: Introduction, Exposition, and Notes. Grand Rapids: Eerdmans, 1983. Clarke, Ernest G. The Wisdom of Solomon. CBCNEB.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Collins, John J. The Apocalyptic Imagination: An Introduction to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Grand Rapids: Eerdmans, 1998. Collins, John J. Daniel: A Commentary on the Book of Daniel. Hermeneia.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3. Crenshaw, James L. “The Book of Sirach.”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5. Edited by Leander E. Keck and Richard J. Clifford.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603-867. Dodd, C. H.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Elledge, C. D. Resurrection of the Dead in Early Judaism 200 BCE-CE 20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Hartman and DiLella, Louis F. and Alexander A. The Book of Daniel. AYBC.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8. Keener, Craig S.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Vol. 1.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3. Lincoln, Andrew T.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Life in the Face of Death. Edited by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122-44. Metzger, Bruce M. An Introduction to the Apocryph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Snaith, John G. Ecclesiasticus. CBCNEB.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Towner, W. Sibley. Daniel.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4. Winston, David. The Wisdom of Solomon. AB.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9. Wright, N. 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3.
초록
본 연구는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을 제2성전 유대교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여 그 의미를 분석한다.
영생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헬라철학 또는 랍비 유대교와 비교하여 그 기원과 의미를 제시해 왔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히브리적 배경과 사상은 간과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요한복음이 구약성서의 전통과 제2성전 유대교의 영향 속에서 영생의 개념을 형성하고 발전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고 본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제2성전 시기의 유대교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회서, 지혜서, 다니엘에서의 영생 개념을 추적한 후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과 비교해 본다.
제2성전 유대교에서는 요한복음의 영생과 가까운 개념들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네 문헌은 내세와 종말론에 관하여 모두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네 문헌의 다양성 가운데에서도 서로 일치하는 전제적 개념도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 창조주로서 생명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 그리고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시리라는 심판에 대한 기대이다.
요한복음 역시 이런 사상을 제2성전 유대교와 공유한다.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관점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요한복음은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제2성전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발전한 개념이지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며, 물리적인 세상에서부터 초월을 경험하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삶이라고 본다.
주제어 영생, 요한복음, 제2성전 유대교, 신정론, 종말론
Abstract
Eternal Life of John’s Gospel within Second Temple Judaism
Lee, Eun-Jae (Hanshin University, Ph.D. Student)
Eternal life in the Fourth Gospel has been previously researched in comparison with similar ideas found in Hellenistic philosophy and Rabbinic Judaism.
These studies have thereby undervalued John’s Hebraic roots. Therefore, this study attempts to situate John within Second Temple Judaismby comparing it with Ecclesiasticus, Wisdom of Solomon, and Daniel. The three texts provide a glimpse of Jewish thought during the Second Temple period.
By comparing similar passages and ideas that could be related to eternal life in John, this study finds that these texts have widely different perspectives on eschatology and the afterlife. At the same time, they do share unifying ideas, which can be identified as: God’s eternity as His distinctive attribute, His divine wish to give life as the Creator, and the expectation that God will dispense His justice.
John also shares these thoughts. Within these Second Temple Jewish ideas, John makes a unique claim that Jesus is the one through whom God’s justice is being prevailed and the one through whom eternal life in God is being given.
This study concludes that John’s idea of eternal life was developed within Second Temple Judaism, while being unique in its perspective that eternal life is being given through Christ’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and that eternal
Keywords eternal life, Gospel of John, Second Temple Judaism, theodicy, eschatology
신약논단 제32권 제1호(2025년 봄)
투고일: 2025. 02. 10. 최종심사일: 2025. 02. 26. 게재확정일: 202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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