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글
파레시아(παρρησία)는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 길어 올린 말로 ‘용기 있게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1)
파레시아의 의미에서 ‘용기 있게’가 의미하 는 바는 진실 말하기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위험이나 불이익을 감수한다 는 것을 뜻한다.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계보학의 방식으로 파헤쳤 던 푸코는 말년에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 전통으로부터 권력의 메커니 즘에 굴복하지 않고,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더 나아가서 권력의 작 동 방식을 변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푸코 가 파레시아 연구에서 강조했던 몇 가지 개념들을 활용하여, 파레시아스 테스(παρρησιαστής) 2)로서의 요한의 예수를 규명하는 것이다.
1) 나카야마 겐/전혜리 옮김, 『현자와 목자: 푸코와 파레시아』(서울: 그린비출판사, 2016), 4.
2) 푸코는 진실을 말하는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레시아스테스’(παρρησιαστής)에 대하여 프랑스어 번역 ‘파레시아스트’(parrèsiaste)를 사용한다.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 시아』(서울: 동녘, 2017), 92 각주 참조. 본 논문에서는 그리스어 ‘파레시아스테스’로 사용하고, 푸 코를 인용하는 경우에 ‘파레시아스트’를 사용할 것이다.
푸코의 연구에서 주목한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과 주체의 자기 이해(또는 자기 돌봄) 간의 관계.
둘째, 진실 말하기라는 말, 담론.
셋째, 위험을 무 릅쓰고 말해야 하는 의무(또는 책임).
넷째,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감당해 야 하는(또는 감당한) 피해.
다섯째, 진실 말하기가 가져온 변화(다른 삶).
푸코는 파레시아 연구를 통해서 권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실 말하 기’가 어떻게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다른’ 삶을 열어줄 수 있 는지 보여 주었다.
푸코가 고대의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발견하여 탐구한 파레시아의 특성들을 요한복음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요한의 예수 가 지닌 파레시아스테스로서의 특징들을 포착하는 데는 충분하다.
요한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의 사명은 ‘진리’(ἡ ἀλήθεια)인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진실 말하기는 유대 당국자들과 로마 총독이라는 권력자들 앞에서 용기 있게, 숨김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행해졌으며, 결국 이로 인 해 요한의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 음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영광’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의 부서진 몸 이 어떻게 새로운 몸으로 다르게 변화하는지 제시함으로써 요한의 예수 가 만드는 ‘다른’ 삶을 보여준다.
이 논문 제2장에서는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의 주요 특징들을 간략하 게 소개하고자 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읽기에 활용하고자 하는 개념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제3장에서는 푸코가 파레시아에서 주목한 주체와 진리의 관계를 진리로 자신을 드러내는 요한의 예수를 통해서 보여줄 것 이다.
제4장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점에서 파레시아의 중요 한 특징들을 반영하고 있는지 분석할 것이다.
예수는 권력자들 앞에서 ‘용기 있게’,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진리)을 말함으로써 위험에 처해진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권력자들이 행사하는 힘의 처벌을 감당한다.
인격적 으로 모욕당하고, 조롱당하고, 옷이 벗겨지고, 빼앗기고, 십자가에 못 박 히고,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린다.
그러나 예수의 진실 말하기는 멈추지 않 는다. 그의 파레시아는 죽음으로, 부서진 몸으로 끝나지 않는다.
파레시아스테스 예수의 부서진 몸은 부당한 권력의 행사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 운 길을 만들어낸다.
예수의 파레시아는 영광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묘 사되는 부활의 삶, 다른 삶을 가져온다.
예수의 진실 말하기가 권력자들 의 폭력적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삶, 다른 삶을 만들어내 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제5장에서는 푸코의 전망으로 읽은 요한의 예수 이해가 갖는 의의를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권력의 압박에도 불 구하고 진리를 통해서 자신을 주체로 세워나갈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새 로운 가능성이 주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필자는 권력에 의해서 강요 당하는 삶이 아닌, 권력자가 당연시하는 삶에 종속되지 않는, ‘다른’ 삶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 안에서 발견한다.
요한의 예수가 당시의 권력 기구였던 유대 당국과 로마 제국이 제시한 삶의 모형을 거부하 고, 자신의 진실 말하기를 통해서 새롭게 열어간 ‘다른’ 삶은 오늘날 요한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 되 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Ⅱ. 푸코의 파레시아와 요한복음 읽기
파레시아(παρρησία)는 어원적으로는 ‘모든 것’을 뜻하는 헬라어의 pan 과 ‘말해진 바’를 의미하는 어근 rēma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담대하게 말한다는 뜻이다.3)
3)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92.
이 단어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니체의 계보학적 관점에서 탐구해 온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에 의 해서 재조명된다.
푸코는 1980년대에 이르러, 현대인의 삶에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외부의 규율과 통제에 저항하는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고민한 다.
이 과정에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 등장하는 ‘자기 배려’(care of the self)의 전통을 찾아낸다.
자기 배려 또는 자기 돌봄이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와 견유 철학자들의 전통에서 발견되는데, 개인이 자신의 삶을 윤리적이고 자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수행하는 일 련의 저항적 실천과 태도를 의미한다.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여러 가 지 실천 중에서 특별히 파레시아(진실 말하기)에 주목한다.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으로부터 시작하여 견유학 파와 로마의 스토아 철학, 그리고 기원후 4-5세기의 초기 기독교 교부들 의 문헌에 줄기차게 나타난다.
그러나 파레시아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파레시아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파레시아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 또는 철학적 스승의 조언이나 친구의 충 고, 또는 화려한 수사나 괴변을 경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파레시아의 일반적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는 데, 그것은 파레시아가 권력자나 공동체나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는 정치 적이며, 윤리적인 발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는 파레시아란 개 인적 수난과 위험을 감수하는 진실한 담론적 실천이며, 고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파레시아적 실천을 통해 권력과 사회적 질서의 예속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푸코는 파레 시아가 언어적인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태도 또한 ‘파레시아적’이라고 지적한다. 가령, 견유학파의 무 소유나 기독교의 순교 등도 행동으로 진실을 대담하게 나타내는 파레시 아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행위 내에서 화자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과 자신이 맺는 개인적인 관계를 표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타자를 개선하고 돕기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파레시아 내에서 화자는 자유를 활용하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 며, 생명과 안전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고, 아첨 대신 비판을 택하며, 이득이나 이기심 대신 의무를 선택합니다.4)
푸코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 속에 나타난 파레시아의 다양한 용례를 분석하여 이 말이 지니는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의미를 포착해 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의 비극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화자들의 파 레시아가 지닌 정치적 함의를 분석하였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도덕적 파레시아가 지닌 의미를 강조하였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지 향한 윤리적 삶의 파레시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푸 코는 파레시아가 언어적 행위를 넘어, ‘자기 배려’라는 미학적 삶을 완성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아 름다운 삶, 그것은 진솔한 삶이고, 진실 속에 거주하는 삶, 진실을 위해 사는 삶이다.”5)
푸코는 파레시아스테스의 ‘진실 말하기’는 데카르트적인 명징성과는 다른 지점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즉 “파레시아스트(parrèsiaste)는 자 신이 말하는 바가 진실되다고 믿기 때문에 진실된 바를 말하며, 그것이 진짜로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6)
푸코는 파레시아스테스를 진실 을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파레시아스테스는 단순히 진실 을 말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것은 특정한 정치적,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7)
4) Ibid., 101.
5) Ibid., 379
6) Ibid., 94-95.
7) 파레시아스테스의 역할에 대해서는 Ibid., 130-134를 참조하라.
파레시아스테스의 역할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진실을 말하는 용기이다.
파레시아스테스는 고난을 감수하 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이 과정에서 진실은 개인적 이익이나 안전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가치로 간주된다.
둘째, 권력에 대한 도 전이다.
파레시아스테스는 권력자나 권력 체계가 감추거나 왜곡하려는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추구한다.
셋째, 윤 리적 책임이다.
파레시아스테스는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 을 감수하며, 공동체의 도덕적, 윤리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넷째, 자기 위험이다.
파레시아스테스는 자신의 안전, 명성, 지위 등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한다.
푸코는 이러한 파레시아스테스의 전형적인 인물로 소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 같은 인물들을 제시했다.
이 들은 자신의 생명과 사회적 지위를 걸고 진실을 말하며, 공동체의 도덕 적, 윤리적 상태를 개선하려 했던 인물들이다.
푸코는 초기 기독교에 이르러 파레시아의 개념이 변화한다고 지적한 다.
가령 4세기 이후 기독교 수도원 공동체는 권력자와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하던 파레시아를 참회와 고백의 방식으로 변화시킨다는 것 이다.8)
그러나 푸코가 주의 깊게 다루지 않은 기원후 1세기에 기록된 신 약 문헌들에 나타나는 파레시아의 개념은 3세기에 등장한 교부 시대와는 다르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가르침은 소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 같은 철학자들의 파레시아와 유사성을 지닌다.9)
마가복음 8장 32절은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παρρησίᾳ τὸν λόγον ἐλάλει) 10) 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7장 26절에서도 예수는 “드러내 놓고 말한”(παρρησίᾳ)것으로 언급된다.
8) 이 내용은 본 논문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어서 각주 설명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푸코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에 이르러서는 파레시아의 주체가 스승에서 제자로 전환된다. 이제 대중들에게 공개 적으로 자기 의사를 숨김없이 발언하는 파레시아의 전통이 은밀한 장소에서 참회의 형태로, 신을 향한 내밀한 자기 고백적 성격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사목적 권력이다. 사목적 권력은 공적 영토보다는 개인에게 관심한다. 이로써 파레시아는 주체의 자기 배려의 도구가 아니라 죄인의 자기혐오와 부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바뀌게 된 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40)가 사용한 푸블리카치오 수이(publicatio sui)라는 라틴 어는 헬라어 엑소몰로게시스(exomologesis)를 번역한 것으로, 참회자가 교회로의 복귀를 허가받 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자기해석학 의 기원』(서울: 동녘, 2022), 70-77 참조; 나카야마 겐/전혜리 옮김, 『현자와 목자』, 255.
9) 예수와 견유학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F. Gerald Downing, Christ and The Cynic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8)를 참고하라.
10) 이 논문의 성서 인용은 새번역을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서 제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때도 파레시아가 사용된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 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ἐλάλουν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 μετὰ παρρησίας)(행 4:31)
에서 ‘담대 히 말함’ 역시 파레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이처럼 신약 문헌들의 파레시 아는 자기 고백적인 참회의 성격을 갖기보다는 그리스-로마의 문헌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공개적인 선포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바울과 사도 행전,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파레시아의 용법들은 대적자들과 권 력자 앞에서 대담하게 진실을 토로하는 파레시아의 문법을 명백하게 보 여준다.11)
가령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담대하게(μετὰ παρρησίας) 복음을 전 파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이러한 바울의 파레시아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파레시아, 혹은 견유주의자들의 파레시아와 매우 가까운 형태를 보여준 다.12)
또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비유에 나타나는 예수의 전복적 지혜(subversive wisdom)가 견유학파의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분석하였 다.13)
11) James Bernauer, “Michel Foucault’s Philosophy of Religion: an Introduction to the Non-Fascist Life,” James Bernauer and Jeremy Carrette (ed.), Michel Foucault and Theology: The Politics of Religious Experience (Ashgate: Routledge, 2004), 86 참조.
12) 김재현, “미셸 푸코의 파레시아 담론과 신약성서의 파레시아,” 「문화와 융합」 45/1 (2023/1), 535- 544.
13) Marcus J. Borg, Jesus A New Vision: Spirit, Culture, and the Life of Discipleship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7), 97-124를 참고하라.
예수의 무소유와 순교 또한 파레시아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서의 파레시아는 요한복음에서 분명하 게 발견된다.
요한의 예수는 파레시아를 수행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예수는 적대자들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담대하게 드러내 놓고 (παρρησίᾳ λαλεῖ) 안식일 법을 비판하며(요 7:26), 진리(알레세이아)를 선포하 는 자이다(γνώσεσθε τὴν ἀλήθειαν, καὶ 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요 8:32).
요한 의 예수는 푸코가 지적한 파레시아스테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 는 자신을 진리로 선포하는데(요 14:6), 예수의 파레시아 내에는 푸코가 주목했던 주체와 진실의 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푸코는 파레시아 가 ‘아래’로부터 생겨나서 ‘위’로 향한다고 지적한다.
즉 파레시아를 수행 하는 파레시아스테스는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서 말한다는 것이 다.
파레시아는 대화 상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촉발시키고, 그 로 인해 화자와 청자 간에 게임이 시작된다.
이러한 특성이 요한복음의 수난 이야기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8장 19절 이하 에 언급되고 있는 대제사장 심문 장면에서 예수와 경비병 간의 대화는(요 18:22-23) 예수가 권력자인 대제사장의 권위에 저항적으로 답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결국 이 불편한 대화는 예수를 결박하여 또 다른 권력자 에게 보내는 것으로 종료된다(요 18:24).
또한 19장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는데, 푸코는 불의한 참주 앞에서 행하는 침묵도 파레시아적 행위라고 지적한 바 있다.14)
14)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104-105 참조.
결국 이러한 행동들 때문에 파레시아스테스는 수난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데, 이러한 양상은 요한의 예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Ⅲ. 예수의 진실 말하기 ― 알레세이아와 파레시아
신약성서에서 ‘파레시아’가 명사형(παρρησία) 또는 동사형(παρρησιάζομαι) 으로 사용된 경우는 총 40회이고, 그중 12회가 사도행전에15), 9회가 요 한복음에 등장한다.
15) 신약성서에서 ‘파레시아’에 관한 연구가 많지 않은데, 그마저도 사도행전 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철원, 『신약성서의 그레꼬-로마적 읽기』(서울: 한들출 판사, 2000), 51-75; 김재현, “미셸 푸코의 파레시아 담론과 신약성서의 파레시아,” 538-543 참조.
요한 일서에 등장하는 4회를 포함한다면 요한 계열의 문헌이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16)
이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본문을 클라센(William Klassen)은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사적인 것과 대비되는 공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사례(요 7:4, 13, 26, 11:54),
둘째, 모호함이 아닌 명백함 의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요 10:24, 11:14, 16:25, 29),
셋째, 첫 번째의 공 적 의미와 연관되어 겁먹지 않고 대범함, 용감함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 (요7:26, 18:20)이다.17)
16) William Klassen, “ΠΑΡΡΗΣΙΑ IN THE JOHANNINE CORPUS,” John T. Fitzgerald (ed.), FRIENDSHIP, FLATTERY, AND FRANKNESS OF SPEECH: Studies on Friendship in the New Testament World (Leiden・New York・Köln: E. J. Brill, 1996), 239.
17) Ibid., 243.
각각의 사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ζητεῖ αὐτὸς ἐν παρρησίᾳ εἶναι) 숨어서 일하는 사람 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 십시오.”(요 7:4)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οὐδεὶς μέντοι παρρησίᾳ ἐλάλει περὶ αὐτοῦ διὰ τὸν φόβοντῶν Ἰουδαίων.)”(요 7:13)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παρρησίᾳ λαλεῖ) 사람들이 그 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요 7:26)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Ἰησοῦς οὐκέτι παρρησίᾳ περιεπάτει ἐν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거기에서 떠 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 께 지내셨다.”(요11:54)
첫 번째 사례에서 이 용어들은 배후에 어떤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파레시아 용례의 중요한 특징으로, 어떤 위험과 그에 따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거나 또는 진실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 용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εἰπὲ ἡμῖν παρρησίᾳ).”(요 10:24)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혀 말씀하셨다.(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παρρησίᾳ) ‘나사로는 죽었다.’”(요 11:14)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였으나, 다시는 내가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줄 때가 올 것이다(ἀλλὰ παρρησίᾳ περὶ τοῦ πατρὸς ἀπαγγελῶ ὑμῖν.”(요 16:25)
“그의 제자들이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제 밝히어 말씀하여 주시고 (ἴδε νῦν ἐν παρρησίᾳ λαλεῖς)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니”(요 16:29)
두 번째 범주의 용례들은 모호하지 않게, 분명하게, 명백하게 말한다 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파레시아의 말하기가 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말 해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의 방식은 파레시아의 중 요한 특징으로서18), 전달하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여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를 없앨 뿐만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 여 있는 말하는 자, 즉 파레시아스테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핑계되거 나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18)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60-61.
세 번째 용례는 다음과 같다.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παρρησίᾳ λαλεῖ) 사람들이 그 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요 7: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ἐγὼ παρρησίᾳ λελάληκα τῷ κόσμῳ)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 에서 가르쳤으며, 아무 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요 18:20)
위의 용례들은 이 구절들이 언급되는 문맥과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 다.
요한복음 7장 26절의 경우는 바로 앞의 25절이 26절의 상황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요 7:25)
즉 예수 는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7장 1절에도 이러한 정황이 언급된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 셨다.”
7장 13절에도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예수에 대해서 말 하는 사람이 없다고 전한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 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어떤 위험을 부르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 이 예수를 잡아 묶어서”(요 18:12)
잡혀온 상황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
대 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교훈과 제자들에 대해서 묻자(요 18:19), 예수는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고,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 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 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요18:20)
라고 대답한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공적으로 공공연하게 회당과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권력자들에 게 결박당한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떳떳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주 장하고 있다.
‘파레시아’가 사용되는 문맥들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가 위협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진실을 말하는’ 전형 적인 파레시아스테스로서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코의 파레시아 분석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는 진실과 주체 의 관계이다.
푸코는 무엇이 진실인가, 그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등 진실 인식의 문제는 데카르트적 사유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는 고대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언급하고, 자신의 문제의식은 주체가 진실과 맺는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19)
이러한 전 망에서 요한의 예수는 진실(진리)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살펴보고자 한 다.20)
요한복음에서 진실은 ‘진리’(ἀλήθεια)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데21), 요 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사용된다.22)
요한복음은 예수를 로고스, 곧 말(말씀)로 규정하고, 진리와 연관시킨다(요 1:1, 14, 17).
요한의 예수는 하나님의 자기표현 용법인 ‘ἐγώ εἰμι’ 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인, 하나님과 일치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23)
19) Ibid., 94-95.
20) 김선정, “대학의 이념과 진리와 자유 정신의 성서적 이해,” 「대학과 선교」 47 (2021/1), 73-104, 특 히 요한복음의 진리 개념에 대해서는 제2장(78-82)을 참고하라.
21) ‘ἀλήθεια’라는 단어의 어원은 ‘ἀ-λήθος’의 의미로, 숨겨져 있지 않음(un-hidden), 폐쇄되지 않음, 드러나 있음(dis-closed)을 뜻한다.
22) ‘ἀλήθεια’는 요한복음에서 25회 등장하는데,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 합해서 7회 등장 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요한복음이 이 단어를 현저하게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The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Company, 1966), 499-501.
23) 불트만(R. Bultmann)은 요한의 진리를 신적 실재(divine reality)로 규정한다. R. Bultmann, “ἀλήθεια,” G. Kittel(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1 (Grand Rapids: W.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 245.
요한복 음에서 진리는 요한의 예수나 하나님을 설명하는 개념들, 즉 로고스(말 씀), 생명, 빛, 영과 같은 개념들과 연결되어 예수 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요한의 모든 신적 타이틀이 ‘진리’라는 단 어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직접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진리”로 선포한다.24)
또 예수는 다시 오는 보혜사로서 “진리의 영”(요 14:17)이라 는 이름을 갖는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 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
요한복음은 진리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정 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예수 자신이 진리이며, 동시에 진리를 드러 내는 분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에서 진리가 인간에게 선포된 아버지의 말씀이고, 그리스도 안에 성육되었고, 영의 활동을 통해서 조명된다는 점에서,25) 요한의 진리 는 인격성과 실행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호킨(D. J. Hawkin)은 이것을 작용적-실천적(operative-practical) 특성이라고 설명한다.26)
린드세이(D. R. Lindsay)는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ת ֽ� מֶֽ ֱאֱ emeth, faithful ness)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토대로 이해된 진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예수의 실존을 통해서, 실행적이고 역사적이고 종말론적 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27)
24) 호킨(D. J. Hawkin)에 따르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완전한 계시자’, ‘계시된 진리의 충만’으로서 의 ‘ἀλήθεια’이다. David J. Hawkin, “The Johhanine Concept of Truth and Its Implications for a Technological Society,” The Evangelical Quarterly LIX/1 (1987), 3-13.
25) 김선정, “대학의 이념과 진리와 자유 정신의 성서적 이해,” 4.
26) David J. Hawkin, “The Johhanine Concept of Truth and Its Implications for a Technological Society,” 9-11, 13.
27) Dennis R. Lindsay, “What is Truth? ἀλήθεια in the Gospel of John,” Restoration Quarterly 35/3 (1993), 129-145 참조.
적대자들을 향해서 요한의 예수는 자신을 ‘진리를 말한 사람’으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자로 인식한다.
. “그러 나 지금 너희는, 너희에게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요 8:40)
또한 역설적이게도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 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요 8:45)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요 8:46)
예수는 제자들을 위하여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7)
라고 기도한다.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은 아들뿐 아니라 신자들도 거룩하게 만들고28), 모두를 하 나가 되게 한다(요 17:21, 23, 26).
28)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19)
예수는 빌라도에게 자신은 진리를 증언 하기 위해 태어났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예수 자신이 하는 말을 듣는다고 주장한다(요 18:37).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진리(진실)를 말하는 자인 동시에 그 자신이 진리로 규명 된다.
따라서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 곧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진리인 예수 를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오?”(요 18:38)라고 질문하는,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로 서 있다.
요한의 예수는 진리(진실) 그 자체로서, 당시 유대의 최 고 권력자였던 로마 총독 앞에서 진리(진실)를 말하는 파레시아스테스이 다.
푸코는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법정의 진술을 파레시아와 구분하 였다.
그렇다면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고 있는 예수의 상황은 파 레시아 상황으로 볼 수 없는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으므로 마치 재판의 상황인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요 19:13).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그가 받고 있는 심문의 성격을 전복시킨다.
예수 는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 는 것을 모르시오?”(요 19:10)라고 말하며 자신이 최종 판결권을 가진 자 라고 주장하는 빌라도 총독의 주장을 거부한다.
예수는 “위에서 주지 않 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요 19:11)라고 답변함으로써 빌라도의 재판권을 무력화시킨다.
요한복음에 서 예수는 죄와 거짓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공정 한 판단이 요구되는(요 7:24) 법정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요한복음 의 예수는 그를 고소한 자들에 의해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그 유 죄 판결은 역으로 다시 예수를 고소한 자들에게로 되돌아간다.29)
예수는 고소를 당하는 동시에 고소한다. 그는 죄의 유무에 대해서 판단을 받는 입장에 놓이는 동시에 판단을 내리는 입장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이중 법정 상황을 통해서 어떻게 심판받는 자가 심판하는 자가 될 수 있는지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30)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설정은 푸코가 파 레시아 상황에서 제외시킨 법정적 상황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진리를 말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푸코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의 유형을 파레시아스테스 이외에도 예언자, 현자, 교육자로 구분하였는데,31) 신의 이름으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예언자로서, 파레시아를 수행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29) Jerome H. Neyrey, “Jesus the Judge: Forensic Process in John 8,21-59,” Biblica 68 (1987), 509- 542.
30) 김선정, “요한 공동체의 재판(요 20:22-23),” 「신학사상」 115 (2001/겨울), 209 참조.
31) 푸코는 파레시아스트 이외에 진실을 말하는 자의 유형을 예언자, 현자, 교육자로 제시하는데, 그 중에 예언자는 신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 아스트와 구분된다고 하였다.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129-131.
요한의 예수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진리를 선포한다는 점 에서는 푸코가 구분한 예언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요한의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임 무는 자기 스스로의 임무이기도 하다.
예수가 자신의 이름으로 뿐만 아 니라 그를 보내신 자,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은 예 수의 파레시아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부서진 몸의 항거 ― 다른 삶, 부활하는 몸
인간의 몸32)에 대한 잔인한 폭력에 관한 증언이 예수 전통 한 가운데 에 자리하고 있다.
32) 김정형은 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해서 몸에 대한 현상학적, 사회학적 논의들이 가져온 중요 한 통찰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김정형 “몸의 현상학과 몸의 사회학을 통한 몸의 부활 교리의 현대적 재해석 가능성 탐구,” 「신학사상」 189 (2020/여름), 229-254. 제2장, 제3장 참조.
예수의 ‘몸’에 행해진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으로, 예수에게 부당하게 행사된 권력의 폭력으로, 예수의 파레시아가 감당한 위험의 실체였다.33)
요한의 진리를 육체성의 관점에 서 해석한 그란시(Jennifer A. Glancy)는 빌라도의 심문(고문) 단락을 중심 으로 요한의 진리 개념을 다루었다.34)
그는 예수가 로마의 통치자인 빌 라도 총독에게 진리에 대한 심문을 받고, 몸의 고문을 받는다는 요한복 음의 증언(18:37-19:1)을 고대 그레코-로만 사회의 사법적 절차 중 하나 였던 고문의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레코-로만 사회 에서는 고문이라는 폭력을 통해서 몸에서 진리를 끌어내려고 했다는 것 이다.
그는 예수의 고문당한 육체, 피투성이 된 몸이 예수의 진리를 말하 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몸은 진리의 장소가 되는 몸(육체)으로, 채찍 질 당하고, 창에 찔리고, 폭력으로 상처 입은 몸의 진리를 증언한다.35)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파레시아는 그가 감수했던 위협들을 실제 상황 으로 만든다.
요한복음의 수난 단락은 예수를 잡으려고 온 사람들을 언 급하면서 당시의 지배 권력이었던 로마 제국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 킨다.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유다가 “로마 군대 병정들”(σπεῖρα)을 데리고 갔으며, “등불과 횃불과 무기”(μετὰ φανῶν καὶ λαμπάδων καὶ ὅπλων)를 들고 갔 다고 보도한다(18:3; 19:2, 23, 24, 25, 34).36)
33) Andrew T. Lincoln, Truth on Trial. The Lawsuit Motif in the Fourth Gospel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Inc., 2000), 408.
34) Jennifer A. Glancy, “Torture: Flesh, Truth, and the Fourth Gospel,” Biblical Interpretation 13/2 (2005), 107.
35) Ibid., 135-136.
36) 이 보도의 공관복음 버전에는 로마 권력이나 무기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μετὰ μαχαιρῶν καὶ ξύλων) ⋯”(마 26:47), “… 유다가 곧 왔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 과 몽둥이를 들고(μετὰ μαχαιρῶν καὶ ξύλων)”(막 14:43), “⋯ 유다라는 사람이 그들의 앞장을 서서 왔다. ⋯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강 도를 잡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μετὰ μαχαιρῶν καὶ ξύλων) 나왔느냐?”(눅 22:47-52).
이것은 곧이어 있을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권력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폭력적 권력 관계를 배경으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렸다는 보도(요 18:10),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 18:11)고 한 예수의 명령과 대립되어 그 폭력 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다른 한편 권력자를 자청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 는 예수의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세 번이나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요 18:38, 19:4, 6),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최종 결정한다(요 19:16).
관정의 안과 밖으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면서37) 공적 권력 자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리고 있는 무능한 권력이며, 그의 결정은 부당한 판결이다.
37) “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요 18:29, 관저 밖 - 필자 주)” “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 수를 불러내서 물었다.”(요 18:33)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아와서 말하였다.”(요 18:38, 관저 밖 - 필자 주) “그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요 19:1, 관저 안 - 필자 주) “그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요 19:4, 관저 밖 - 필자 주)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요 19:9)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요 9:13, 관저 밖 - 필자 주)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 (NY: Doubleday, 1970), 859.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가 내린, 진리(진실)와 거리가 먼, 잘못된 결정의 배후에는 빌 라도가 받고 있는 위협이 존재한다.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 아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하고 외쳤다.”(요 19:12)
빌라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예수는 죄가 없다)을 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위협, 즉 로마 황제의 권력을 내세운 협박에 맞서서 용감하게 실행하지 못한다.
예수를 심문하고, 판단하고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는 파레시아 수행에 실패하고 있는 인물로 예수와 대조를 이룬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몸은 결박당하고(18:12, 24), 끌려가고(18:13, 28), 손으로 맞고(18:22; 19:3), 고발당하고(18:29), 무고하게 모함당하고 (18:30), 죽음의 위협을 받고(18:31), 버림받고(18:40), 채찍질 당하고 (19:1), 가시관이 씌워지고(19:2, 5), 조롱당하고(19:2, 5), 자신의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고(19:17), 십자가에 못 박히고(19:23), 옷이 벗겨지는 수치와 더불어 옷을 빼앗기고(19:23-24), 십자가에 매달려 목말라 하고(19:29), 결국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다(19:30). 그리고 숨진 후에도 창에 찔려서 피와 물을 쏟는다(19:34).38)
이처럼 철저하게 부서진 몸으로 예수는 진실 말하기, 파레시아를 수행한다.
요한복음에서 진리이신 예수는 로고스가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으로 고백된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 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 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그레코-로만 사회 문화 속에서 영과 육에 대한 대립적 이해와 영의 우월성이 강조되 었고, 요한복음 내에서도 영에 대한 우위가 주장되는 본문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1장 14절의 본문은 가현주의를 배척하고 예수의 몸을 진리로 확인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39)
푸코는 파레시아가 진실에 대한 ‘발화’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푸코는 견유주의자들의 파레시아에서 이 러한 전형을 발견한다. 그들은 존재 방식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낸다.
이 런 의미에서 “견유주의에서는 자신의 삶이 위험해지는 것을 감수하지 않 고서는 진실을 얻을 수 없다.”
“푸코는 견유주의적 도발과 거부에서 도래 하게 만들어야 할 다른 삶의 양식이 구축되고 있음을 볼 뿐만 아니라 지 금 여기서 즉각적으로 현동화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 구축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견유주의는 파괴하는 만큼 창조하기 때문에 도발적이다.
투사 는 기존의 것을 비판하고 파괴하는 자인 동시에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 조하는 자이기도 하다.”40)
38) 고대 세계에서 십자가형이 얼마나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마르틴 헹엘 이 간략하게 잘 정리해 주었다. 마르틴 헹엘/김명수 옮김, 『십자가 처형』(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39-57 참고.
39) 조재형, “고대 영지 사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독론에 끼친 영향 - 신약성서의 영지주의적 본문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178 (2017/가을), 58-64. 조재형은 요한복음의 기독론이 고대 영지 사상의 모나드 개념의 영향을 받았으나, 몸에 대한 강조가 그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점이라고 평 가한다.
40) 미셸 푸코/심세광 · 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382, 384
특별히 푸코에게 있어서 몸은
“권력에 의해 포 위되어 … 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 몸-권력은 몸이 어떻게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자발적인 행위를 하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41)
푸코 는 권력 행사에 있어서 주체는 자유로워서 일방적으로 지배하거나 지배 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보았는데, 파레시아 전통에서 이러한 수동성과 능동성이 잘 드러난다.42)
요한복음 수난 단락에서 예수의 몸은 파레시아 수행으로 인한 부당한 권력 행사를 강제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동적 상황에 놓여 있는 동시에, 그러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43)
요한복음은 예수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부당한 권력 행사로 말미암 아 십자가형의 고난을 받았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빌라도의 판결권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고난을 주체적으로 감당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44)
요한의 예수는 자 신과 빌라도 총독 사이의 권력적 위계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한 의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종속되기는커녕 오히 려 둘 사이 권력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수난 보도 단락에서 요한의 예수 는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협에 당당 히 맞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요 18:4a)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두 번이나 주도적으로 질문한다(요 18:4b, 7).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스스로 자신을 밝힌다(요 18:5, 8).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누가 예수인지를 알려주는 유다의 입맞춤 같은 것은45) 필요하지 않다.
41) 강미라, 『몸, 주체, 권력: 메를로 퐁티와 푸코의 몸 개념』(서울: 이학사, 2011), 19. 푸코의 몸 개념 에 대한 사회학적 평가를 위해서는 브라이언 터너/임인숙 옮김, 『몸과 사회』 (서울: 몸과 마음, 2002), 제2장; 크리스 쉴링/임인숙 옮김, 『몸의 사회학』(서울: 나남, 2011), 제4장을 참고하라.
42) 강미라, 『몸, 주체, 권력: 메를로 퐁티와 푸코의 몸 개념』, 159-160.
43) 네이레이는 요한복음의 수난 단락이 어떻게 명예와 수치의 전복을 이루는지 분석하였다. Jerome H. Neyrey, The Gospel of John in Cultural and Rhetorical Perspectiv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2009), 412-438 참조.
44) Jennifer A. Glancy, “Torture: Flesh, Truth, and the Fourth Gospel,” 125 참조.
45) 이 장면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마 26:48)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신호를 짜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 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막 14:4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눅 22:48)
예수의 위엄 앞에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땅에 엎드러진다.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요 18:6)
또한 요한의 예수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지킨다.
“… ‘내가 그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 은 물러가게 하여라.’ …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한 사람 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요 18:8-9)
대제사장의 심문에도 예수는 당당한 태도로 답변한다.
“나는 드 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 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요 18:20)
예 수의 이 답변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18장 22절이 잘 보여준다.
“예수 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경비병 한 사람이 곁에 서 있다가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를 때렸다.”
이러한 행동 에 대해서 예수는 스스로 “옳게”(καλῶς)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 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요 18:23)
또한 요한의 예수는 자신 의 죽음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자기가 어 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암시하여 주신 말씀이 이루어졌다.”(요 18:32) 예수는 “당신은 왕이요?”(요 18:37)
라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서도 로마 총독인 빌라도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답변을 제 시한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 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요 18:37)
로마 총독 빌라도가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 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요 19:10)
라고 주장하자
“위에서 주 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요 19:11)
라고 답변하여 빌라도의 주장을 반박한다.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는,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요 19:15)라고 하면 서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요 19:21)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 수”(요 19:19) 라는 명패를 십자가 위에 붙인다.
예수의 죽음은 결국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으로 고백된다(요 19:24, 28, 36).
요한의 예수는 진리 그 자체로서,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유대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제국의 총독이 지닌 권력에 의해서 고난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이 권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권력에 종속되지 않 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로마 권력은 예수의 몸을 고문함으로 써 진리(예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고문 희생자에 불과하다)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고문 당한 예수의 몸은 스스로 그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발하고, 고난 받기를 택한 예수의 주체성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영광의 시간을 드러냄으로써 진리를 드러낸다.46)
이 전복적 관점은 주체로서, 진리와 하나 된 예수가 창출해내는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 푸코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른 삶을 구성한다.
이것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실천했던 파레 시아스테스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었다.47)
요한의 예수가 열어 보인 다른 삶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는 데,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이 다른 삶, 새로운 삶을 실현시킨다.48)
46) Jennifer A. Glancy, “Torture: Flesh, Truth, and the Fourth Gospel,” 125.
47) 푸코는 이러한 삶의 전형을 견유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한다.
48) 김정형은 기스베르트 그레스하케(Gisbert Greshake)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입장 을 중심으로 해서 몸의 부활에 대한 현대적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 김정형, “몸의 현상학과 몸 의 사회학을 통한 몸의 부활 교리의 현대적 재해석 가능성 탐구,” 제4장, 제5장 참조.
이것 은 부서진 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몸이다.
“내게 손을 대지 말 아라. …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 나님께로 올라간다 …”(요 20:17)
그래서 요한의 부활 보도는 예수의 부활 한 몸을 부서진 몸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다룬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만난 마리아나 디베랴 호수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 를 알아보지 못한다.49)
“…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 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요 20:14)
“… 그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 다.”(요 21:4)
또 예수는 문들이 닫혀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있는 공간 한가운데로 등장한다.
“…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 (요 20:19)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 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 서 …”(요 20:26)
예수의 제자 도마는
“…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 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 20:25)
라고 말하며 예수의 부서진 몸을 확인하고자 한다.50)
49) 부활한 예수를 보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Stephen T. Davis, “‘Seeing’ the Risen Jesus,” Stephen T. Davis & Daniel Kendall & Gerald O’Collins (ed.), The Resurre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126-147을 참고하라.
50) 도마 단락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Gregory J. Riley, Resurrection Reconsidered: Thomas and John in Controvers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00-126을 참고하라.
도마의 이 발언에 대하여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라고 말한 요한복음 20장 27절 은 도마가 마치 예수의 부활한 몸을 확인한 것처럼 오해된다.
요한복음 은 도마가 실제로 이것을 실행했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마는 예 수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도마가 예수 의 몸을 확인했다는 어떤 보도도 없이 다음의 고백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요 20:28)
이 와 유사한 사례가 요한복음 21장에도 등장한다.
예수께서 부활 후에 제 자들에게 나타나신 또 다른 일화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가져다주고 아침을 먹으라고 말한다.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 ‘와서 아 침을 먹어라.’ …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 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요 21:9, 12, 13)
예수께서 그것을 먹었다고 명백하게 보도하는 누가복음과 달리(눅 24:41-43)51) 요한복음은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요 21:15)
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아침을 먹은 사람들 중 에 예수가 포함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51)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 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눅 24:41-43)
요한의 예수는 부 서진 몸에서 부활한 몸으로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 제 국의 총독이나 유대 당국자들이 복종하기를 강요했던 삶과는 완전히 다 른 삶이었다.
Ⅴ. 나가는 글
푸코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재발견한 ‘파레시아(진실 말하기)’라는 렌즈를 통하여 요한복음의 예수를 파레시아스테스로 조명해 보았다.
푸 코는 파레시아를 통해서 자기 돌봄의 삶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폭력적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 논문은 1세기 신약 문헌인 요한복음 안에서 푸코의 소망 의 전거를 확인하였다.
요한의 예수는 주체로서 진리와 하나인 자, 진리 그 자체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의 사명, 곧 그의 의무는 이 진리를 증 언하는(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세상에 알리고,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믿고) 영 원한 생명을 얻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이 진리는 예수 당시 권력자였던 유대 당국과 로마 제국을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불온한 것으로 의심받아 예수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결국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진실 말하기를 수행한 예수의 몸은 권력의 힘으로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 게 부서진다.
그리고 그 부서진 예수의 몸은 그 폭력적 파괴를 감당했던 진실의 힘, 진리의 힘으로 다른 삶을 생성한다.
요한의 예수는 새로운 몸,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다.
요한의 예수는 우리가 진 리와 하나가 될 때 어떤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우리가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
한글초록
이 논문은 푸코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재발견한 파레시아(진실 말하 기)라는 렌즈를 통하여 파레시아스테스로서의 요한복음의 예수를 조명해 보았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통해서 자기 돌봄의 삶을 실현하고, 이를 통 해 폭력적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다른 삶의 가능 성을 제시하였다.
진실 말하기를 수행한 예수의 몸은 권력의 힘으로 십 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부서진다.
그리고 그 부서진 예수의 몸은 그 폭력 적 파괴를 감당했던 진실의 힘, 진리의 힘으로 다른 삶을 생성한다.
요한 의 예수는 새로운 몸,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다.
요한의 예수는 우리가 진리와 하나 될 때 어떤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주제어 파레시아, 요한의 예수, 파레시아스테스, 진리(알레세이아), 폭력, 저항, 다른 삶, 부활
Abstract
Parrhesia and Johannine Jesus Seon-Jeong Kim Associate Professor, New Testament Studies University College Yonsei University This paper examines Jesus in the Gospel of John as a parrēsiastēs through the lens of parrhesia (truth-telling), rediscovered by Michel Foucault in ancient Greek philosophy. Foucault suggested that through parrhesia, one can realize a life of self-care and propose the possibility of a different life as a free subject not tamed by violent power. The body of Johannine Jesus, who performed truthtelling, is brutally broken on the cross by the power of authority. And the broken body of Jesus generates a different life through the power of truth that endured its violent destruction. Johannine Jesus moves towards eternal life with a new, resurrected body. Johannine Jesus showed what kind of subject we can become when we unite with the truth.
key word :Parrhesia, Johannine Jesus, Parrēsiastēs, Alētheia, Violence, Resistance, Changed Life, Resurrection
논문접수일: 2024년 11월 20일 논문수정일: 2024년 12월 11일 논문게재확정일: 2024년 12월 20일
神學思想 207집 · 202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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