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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그리스-로마 전기 장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11:12-25 ― 성전 청결인가, 성전 종결인가?/권영주.한국침례大

Ⅰ.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1:12-25는 다양한 해석학적 쟁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저주하셨는데, 문제는 그 시점이 “무화과의 때가 아”(11:13)니었다는 것이다. 열매 맺을 때가 아닌 데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버트 런드 러셀(Bertrand Russll)은 이 에피소드에 대해

“나는 지혜의 문제나 덕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역사에 알려진 다른 인물들에 비해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논평한 바 있다.1)

 

    1)  Bertrand Russell, (New York: Clarion Books, Simon and Schuster, 1957), 19;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02), 339에서 재인용.

 

  둘째, 예수가 성전에서 보인 일련의 행동들, 즉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환전상과 상 인의 상과 의자를 뒤엎고, 성전 안에서 물건 가지고 다니는 것을 금한 행 위는 예수의 이전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수가 이토록 분개한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의 분노 대상과 목적은 무엇인가?

  셋째, 무화과나 무 사건과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 이어지는 믿음, 기도, 용서에 대한 예 수의 발언은 앞의 사건들과 무관한 것인가, 아니면 유관한 것인가?

한 편에서 로버트 스타인(Robert Stein)은 “나는 11:22-25의 어록들이 원래 무화과나무 저주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1:12- 21은 11:22-25의 주요 주제인 믿음, 기도, 용서와 별 관계가 없기 때문 이다”라고 말한다.2)

다른 한 편에서 애덤 윈(Adam Winn)은 “이 가르침 [믿음, 기도, 용서에 대한 가르침]과, 예수의 저주 그리고 예수의 상징적 성전 파괴 사이에는 강력한 연결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3)

 

      2)  Robert H. Stein, Mark, BEC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519.

      3)  Adam Winn,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Jesus the Messiah and Roman Imperial Ideology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18), 138.

 

로버트 스 타인과 애덤 윈은 서로 악수한 뒤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미련 없이 헤어져야 할까?

이 세 가지 문제는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얽혀 있으며, 한 문제에 대한 해결이 다른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필자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을 통한 읽기가 유용함을 논문 전반에 걸쳐 증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2장 에서는 그리스-로마 전기의 네 가지 장르적 특성을 간략히 서술한다.

3 장에서는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을 바탕으로 마가복음 11:12- 25의 다양한 해석학적 쟁점들을 다루며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4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요 주장을 정리하 고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을 덧붙인다. 

 

Ⅱ.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복음서의 장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학자들은 지난 세기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여 왔으나 이제는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 다.

리처드 버릿지(Richard A. Burridge)의 What Are the Gospels?: A Comparison with Graeco-Roman Biography의 출판 이후 많은 학자 들은 복음서의 장르가 그리스-로마 전기라고 생각한다.4)

하지만 아쉽게 도 복음서의 장르에 대한 논의가 복음서 해석에 접목되는 연구로 이어지 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리스-로마 전기 의 장르적 특성에 기반한 마가복음 읽기를 제안한 바 있다.5) 그리스-로마 전기의 네 가지 장르적 특성은

   ① 주인공에 대한 집중 적 관심,

   ② 주인공에 대한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덕스러운 삶으로 초청,

   ③ 비교/대조의 사용,

   ④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각 장르적 특성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다른 논문에서 제공한 바 있으며, 여 기서는 현재 논의와 관련된 주요한 특성만을 간략하게 기술한다.6)

 

     4)  권영주, “수로보니게 여인 에피소드(막 7:24-30) 다시 읽기: 그레코-로만 전기의 장르적 특성을 중 심으로,” 「신약논단」 29/4 (2022/12), 407.

    5)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권영주, “그리스-로마 전기 장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10:32-52,” 「성경원 문연구」 54 (2024/4), 107-24.

    6)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보기 위해서는, 권영주,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복음서의 장르적 읽기를 위한 프롤레고메나,” 「신약연구」 22/1 (2023/3), 7-40을 참 조하라. 여기서는 그곳의 논의를 요약하고 재진술한다.

 

현재 논의와 관련하여 장르적 특성 ①과 ②는 함께 언급될 필요가 있 다.

그리스-로마 전기의 주요한 장르적 특성은 주인공에 대한 집중적 관 심이다.

다시 말해, 전기는 사건 중심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 장르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전기에서도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전개되지만 장르에 세심한 유능한 독자는 특히 한 인물, 주인공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능한 독자는 전기의 어떠한 본문을 해 석하든지 간에 그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에게 일차적인 관심, 더 나아가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장르적 특성인 주 인공에 대한 인물 묘사로 이어진다.

유능한 독자는 주인공에 대한 지대 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어떤 인물로 묘사되는지 눈여겨 본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고대 전기와 현대 전기의 인물 묘사 방식이 상 이하다는 것이다.

현대 전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인물에 대한 설명 과 묘사를 하는 경우가 잦은 반면, 고대 전기는 작가의 논평보다는 해당 인물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독자들에게 넘 기는 경우가 많다.7)

따라서 유능한 독자는 전기를 해석할 때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장르적 특성 ③은 비교/대조의 사용이다.

비교/대조의 사용이 전기 장르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특성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기 장르에 자주 사용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교/대조의 대상은 다양하다.

주인공과 다른 인물 사이, 다른 인물들 사이, 그리고 개념과 사상 사이에 서도 비교/대조가 나타난다.

전기 작가는 비교/대조를 통해 다양한 목적 을 성취하지만, 특히 주인공의 인격과 됨됨이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장르적 특성 ④는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로 마 전기는 작품에 따라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주로 넓은 독자층을 상정 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가는 전기라는 장르를 선 택할 때 그것이 제한된 독자층이 아닌 넓은 독자층에게까지 배포되길 바 랐다는 것이다.8)

 

     7)  Craig S. Keener, Christobiography: Memory, History, and the Reliability of the Gospels (Grand Rapids: Eerdmans, 2019), 164.

     8)  Richard Bauckham, “For Whom Were Gospels Written?,” Richard Bauckham (ed.),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Rethinking the Gospel Audiences (Grand Rapids: Eerdmans, 1998), 28-29.

 

독자/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기라는 장르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비교적 접하기가 쉬웠고 진입 장벽이 낮았다는 것이 다.

그리스-로마 전기의 이러한 네 가지 장르적 특성은 본문마다 매번 모두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본문에 따라 하나 혹은 복수의 형태로 발견 된다.

그렇다면 이제 1장에서 언급했던 마가복음 11:12-25의 세 가지 문 제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전기의 장르적 특성이 이러한 논의에 어떻게 유 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일 차례다.

 

Ⅲ. 그리스-로마 전기 장르로 다시 읽는 마가복음 11:12-25 1.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부당한 처사인가?

예수는 멀리서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거기에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열매가 없자 예수 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1:14)

고 저주를 선포한다.

단순히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저주를 선포한 것도 납 득하기 어렵지만, 예수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직 무화과 나무의 열매 맺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11:13).

예수의 행동은 마치 아 직 시험도 치르지 않았는데 점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처벌한 것과 같다.

예수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심지어 부당하게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동일한 에피소드를 다루면서(마 21:18-19) 마가복음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는 진술을 삭제한 것 도 이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예수의 행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납득하기 어렵고 부당한 처 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예수의 행동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 다.

  첫째, 예수가 무화과나무에서 보길 원했던 것은 아직 완전히 익은 상 태가 아닌 초기 열매였을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화과나무는 보통 8월에서 10월 사이에 수확을 하는데, 3월이나 4월쯤 되면 나무에서 잎사귀와 함께 이러한 초기 열매를 발견할 수 있다.9)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유월절 기간 즉, 3월이나 4월 중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멀 리서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았을 때 거기에 먹을 만한 초기 열 매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와서 무화과나무를 보았을 때 아무 열매를 발견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예수는 무성한 잎사 귀의 외관과 달리 실속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 수 있다.10)

  둘째, 적지 않은 학자들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상 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무화과의 때”, 그리고 무화과나무 사건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후커(Morna D. Hooker)는 무화과나무 가 이스라엘을, “무화과의 때”는 메시아 시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11)

후커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는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에도 방문할 수 있 기 때문에(13:35 참조),1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메시아 예수를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본문의 무화과나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 엘은 메시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 다른 말로 하자면 메시아 예수를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 “무화과의 때” 즉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13)

또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구약과 유 대교 문헌의 용례를 들어서 무화과나무가 심판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이미지라는 것을 지적하거나14)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15)

 

   9)  Ben Witherington, The Gospel of Mark: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1), 312.          10)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340.

  11)  Morna D.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y (London: Continuum, 1991), 262.

   12)  Ibid., 267.

   13)  Ibid., 262.

   14)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340; Joel Marcus, Mark 8–16: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27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782.

  15)  Stein, Mark, 513-514; Francis J. Moloney,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2), 226; Nicholas Perrin, “Psalms of Solomon and Mark 11:12–25: The Great Priestly Showdown at the Temple,” Ben C. Blackwell & John K. Goodrich & Jason Maston (eds.), Reading Mark in Context: Jesus and Second Temple Judaism (Grand Rapids: Zondervan, 2018), 185. 

 

 후커 역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여기에 속하는 학자들은 구약과 유대교 문헌의 용례라는 구체적 인 증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무화과나 무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던 이전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예수의 행동이 상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확보한 것이다.

  셋째, 무화과나무 사건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마가복 음 11:12-21의 구조에서 도출해 낸 이들도 있다.

마가복음 11:12-21은 샌드위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샌드위치 구조는 처음과 끝에 위치하는 A계열 에피소드(A, A′)와 중간에 위치하는 B 에피소드(B)로 이루어져 있 는데, 구조상 이 둘은 함께 해석하도록 의도되었다.16)

이를 마가복음 11:12-21에 적용해 보자면, A계열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무화과나무 사 건과 B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성전 청결 사건은 함께 해석하도록 의도되 었다는 것이다.

샌드위치 구조의 이러한 해석을 고려하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 아닌 성전을 상징한다.17)

무화과나무가 잎은 무성하지만 열 매가 없었던 것처럼 성전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생명력을 잃었다.

또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던 것처럼 성전은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 다.18)

 

  16)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2), 436; Witherington, The Gospel of Mark, 312.

  17)  예를 들어 M. Eugene Boring, Mark: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2), 319에서 Boring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마가가 무화과나무 에피소드의 틀 안에 성전 ‘청결’을 삽입했다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상징적으로 성전을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18)  강요섭, “예수의 성전숙청 이야기에 대한 문학적-사회학적 고찰,” 「신학사상」 41 (1987/여름), 354.

 

필자는 이쯤에서 샌드위치 구조와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샌드위치 구조와 그리스-로 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길게 논증한 적이 있기 때문에,19) 여기서는 주요 주장만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그것이 마 가복음 11:12-21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논하고자 한다.

현재 주제 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요 주장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첫째,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는 A계열 에피소드와 B 에피소드는 표 면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긴밀한 관계를 이 루고 있으며, 이러한 상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존재 다.

마가복음 11:12-21의 A계열 에피소드에서 예수는 시장하셨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다.

무화과나무 사건의 등장인물은 예수와 제자들이다.

예수가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선포할 때(11:14)와 무화과나무 에 대한 저주가 성취되었을 때(11:21), 거기 제자들이 있었다. B 에피소드 인 성전 청결 사건의 도입부와 종결부를 보면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제 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막상 성전에는 예수 혼자 들어가신 것으로 묘사된 다.20)

   

    19)  권영주, “마가복음 6:14-29에 예수는 부재하는가?: 샌드위치 구조와 그레코-로만 전기의 장르적 특성을 중심으로,” 「신약연구」 21/1 (2022/3), 131-62.

   20)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Mark,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2007), 529.   

성전 청결 사건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 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11:15; Καὶ ἔρχονται εἰς Ἱεροσόλυμα. Καὶ εἰσελθὼν εἰς τὸ ἱερὸν [ἤρξατο]).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첫 번째 문장의 동사는 복수형(ἔρχονται), 두 번째 문장의 동사(ἤρξατο)와 분사(εἰσελθὼν)는 단수형이 다.

즉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은 복수인 그들이고, 성전에 들어가신 것은 단수인 예수이다.

그리고 성전 청결 사건이 마무리된 후 다시 복수형 동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ἐξεπορεύοντο)” (11:19).

 

이러한 정보와 함께 B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성전 청결 사건의 등장인물은 예수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무리이다(11:18). 샌드위치 구 조에서 두 사건은 표면적으로 볼 때 등장인물도 다르고 사건의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두 사건의 상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주인공, 즉 예수 의 존재다.

이 때문에 샌드위치 구조의 본문을 해석할 때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①과 ②(주인공에 대한 집중적 관심, 주인공에 대한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 들을 덕스러운 삶으로 초청)와 직결된다.

   둘째,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는 두 에피소드는 표면적으로 볼 때와 달 리 실제로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해석자는 두 에피소드 간 의 인물, 주제, 모티프 등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는 그 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③인 비교/대조의 사용과 자연스럽게 연 결된다.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해석자가 두 내러티브에 존재하는 연결성 을 비교/대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탐색하도록 요청된다.”21)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청결 사건의 연결성을 심도 있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본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다음 섹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 지만 자세한 본문 분석 이전에도 두 에피소드가 함께 해석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본문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청결 사 건에서 예수는 동일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선포하 기 전에 먼저 무화과나무에 가서 그것을 “보신” 것처럼(11:13), 예수는 성 전에 대한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성전에 가서 그것을 “보신”다 (11:11).22)

 

   21)  권영주, “마가복음 6:14-29에 예수는 부재하는가?,” 144.

   22)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267; Boring, Mark, 319

 

2. 성전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들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성전에 들어선 예수의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고, 배고픈 자와 병든 자를 향한 연 민의 마음을 품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였던 예수는 온데간데없다.

성전 에 들어가 사람들을 내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엎고,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예수의 모습은 생경하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하다.

예수의 격노만큼이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분 노도 대단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11:18).

예수는 왜 격노했을까?

성전에서 예수가 보인 일련 의 말과 행동들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한 말과 행동들 을 통해 예수는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성전 청결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답들을 통해 성전 청결 사건은 재정의되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것 이다.

성전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의 목적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대답들 이 제안되었다.

여기서도 예수라는 주인공과 그의 말과 행동에 집중적 관심을 보이는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①과 ②는 고스란히 드 러난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그토록 격노한 모습을 보인 것은 성전이 경제 활동을 하는 곳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이러한 학자 들이 종종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 것은 11:17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와 예레 미야서의 말씀이다.

특히 “강도의 소굴”이라는 예레미야서 7:11의 표현 을 강조하면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마땅한데 돈을 바 꾸고 장사를 하며 게다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일이 성행하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했다는 것이다.24)

성전세를 내기 위해 환전이 필요했고 제사 를 위해 성전 제물을 사고파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절차였으나, 그러한 과정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전과 매매 는 “적절한 예배의 유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두개인과 산헤드린의 경 제적 이익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25)

 

    23)  이 입장에 속하는 학자들의 세부 견해와 논증은 다층적이긴 하지만 성전이 경제 활동을 하는 곳 으로 변질되었고, 예수가 그 점을 지적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이 입장에 속하는 대표적인 글은 Neill Hamilton, “Temple Cleansing and Temple Bank,” JBL 83/4 (1964/12), 365- 372.

   24)  최영실, “우리의 손으로 허물어야 할 ‘그 성전’,” 「신학사상」 120 (2003/봄), 78.

   25)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341.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은, 예레미야서에서 “강도의 소굴”이 사용된 원 문맥이 성전에서 이루어진 장사나 그와 관련된 경제적 이익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다.

예레미야서는 성전에서 취한 경제적 이익이 아닌 성전에 출입하는 자들의 행동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성전 밖에서는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지 않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며, 무죄한 자의 피 를 흘리고(렘 7:5-6),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 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들을 따[른다]”(렘 7:9).

하지만 성전 안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렘 7:4) 외치며 “우리 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는 가증한 고백을 하고 거짓 위안을 얻었던 것 이다.

이러한 예레미야서의 원 문맥의 상황을 살려서 성전 청결 사건을 해석하게 되면, 예수가 격노한 이유는 종교 지도자들과 상인들이 경제적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성전 안팎의 삶이 불일치했기 때문 이다.26)

실제로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12:40)는 자들로 묘사된다.

또한 유대교 문헌에서 제사장들은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고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27)

이처럼 첫 번째 해석학 적 입장은 구약의 원 문맥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발견된다.

  둘째,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격노한 이유가 매매와 환전이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는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감람산 (Mount of Olives)에서 이루어졌다.

감람산에서의 성전 제사 관련 매매 행 위는 주로 산헤드린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는데, 기원후 30년경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에 대항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매매 행위를 이방인의 뜰로 가져왔다는 것이다.28)

 

    26)  Boring, Mark, 323.

    27)  자세한 1차 문헌 목록은 Stein, Mark, 515-516을 참조하라.

    28)  이 견해는 Victor Eppstein, “The Historicity of the Gospel Account of the Cleansing of the Temple,” ZNW 55 (1964/1), 42-58에서 처음 주장되었고, 이후 다양한 학자들이 이를 부분적으로 혹 은 온전히 지지했다. 예를 들면 Bruce Chilton, A Feast of Meanings: Eucharistic Theologies from Jesus through Johannine Circles (Leiden: Brill, 1994), 172-176.

 

원래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들이 출입하여 기 도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그곳은 장사가 주를 이루는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예수가 이사야서 56:7 을 인용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 하는 집”이 되어야 마땅한데 성전 제사 관련 매매 행위로 인해 이방인의 뜰에서 이방인들은 기도할 공간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성전 제사 관련 매매 행위가 성전 밖(감람산)에서 성전 안(이방인의 뜰)으로 들어오 면서 이와 연관된 활동들이 성전 안의 각종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생겼 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마가복음 11:16에서 “물건을 가지고 성 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이렇게 해석하게 될 경우 물건은 제사와 관련된 성스러운 물건이 아닌 장사와 관련된 속된 물건이었을 것이다.

  셋째,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격노한 이유를 이 본문의 제목으로 자주 불리는 ‘성전 청결’에서 찾는다.

즉 예수가 격노한 것은 성전이 원래 의식적으로 정결한 곳이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본 모습을 상 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5절에서 예수가 상인들을 몰아낸 것은 성전 의 본 모습이 예배와 기도인데, 그곳이 장사를 하는 공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첫 번째 견해(예수가 격노한 것은 성전이 경제 활동을 하는 곳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조 점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활동이 과 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세 번째 견해는 성전의 정결 자체를 강조하고 성전에서의 경제 활동은 그와 관련된 하나의 논거로서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첫 번째 견해는 폭리를 취한 상 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한 구절로서 예레미야서 7:11의 “강도의 소 굴”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반면, 세번째 견해는 여기에서 예수의 행동 이 스가랴서 14:21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30)

 

     29)  Hans Dieter Betz, “Jesus and the Purity of the Temple (Mark 11:15-18): A Comparative Religion Approach,” JBL 116/3 (1997/10), 462.

    30)  R. Alan Culpepper, Mark, Smyth & Helwys Bible Commentary (Macon: Smyth & Helwys, 2007), 377.   

 

이 견해의 대표적 지 지자인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31)

 

원 문맥에서 이 구절[스가랴서 14:21]은 여호와의 날에 성전 경내는 철저한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경제적 거래의 공간이 되어서 는 안 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 15절 후반부의 예수의 행동 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역사적으로 믿을 만하다면, 그것은 바깥쪽 뜰[이방인의 뜰]이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비둘기를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것 모두 성전 경내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콜린스는 16절도 성전의 정결 혹은 거룩함을 유지하는 관점에서 해 석한다.32)

그녀에 따르면 예수가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다니지 못 하게 한 것은 성전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 성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성전 제사와 관련된 성스러운 물건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고,

  둘째, 지름길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속된 물건을 성전 경내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적절 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정결의 관점에서 다양한 구절들을 해석 한다는 면에서 강점이 있지만, 예수가 실제로 인용한 구절이 스가랴서 14:21이 아니라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본문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 다.

  넷째,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격노한 이유가 성전에서 벌어진 일들 이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지지자는 리처드슨(Peter Richardson)이며 이후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33)

 

    31)  Collins, Mark, 529-530.

    32)  Ibid., 530.

    33)  Peter Richardson, Building Jewish in the Roman Era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04), 241- 252; William Domeris, “The Enigma of Jesus’ Temple Intervention: Four Essential Keys,” HvTSt 71/1 (2015/7), 1-8. 

 

리처드슨은 당시 성전세와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들 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차분히 기술한다.

그가 관찰한 사실 중 몇 가 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성전세는 은화로 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고, 외세의 통치 동안 유대 당국은 은화를 주조할 수 없었으며, 다른 은화들은 로마 황제의 초상과 같이 로마의 권력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34)

이러한 조건들을 대체로 만족시켜주는 것이 두로 세겔이었는데, 그것은 높은 질을 보유한 은화였고 정치적 색채가 짙지 않았기 때문이다.35)

이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두로 세겔을 사용하여 성전세를 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환전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었을까?

리처드슨에 따르면 두로 세겔의 앞면에는 두로의 신 멜카르트가 뒷면에 는 두로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고 “거룩하고 신성한 두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36) 예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이러한 성전세 관행을 우상 숭배로 여겼다는 것이다.37)

또한 리처드슨은 이러한 우상 숭배의 맥락에서 예레미야서 7:11의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을 재해석한다.

리처드슨은 예레미야서의 유대인들과 마가복음의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라 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예레미야서 본문에서 유다 사람들 이 성전 밖에서는 바알에게 분향하면서(11:9) 성전 안에 들어와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11:4)고 고백하는 행위를 통해 성전을 강도의 소 굴로 만들었다면, 마가복음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두로 신이 새겨진 세겔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세금을 내는 행위를 통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38)

 

    34)  Richardson, Building Jewish, 246-247.

    35)  Ibid., 247.

    36)  Ibid., 246.

    37)  Ibid., 248.

    38)  Ibid., 249.

 

리처드슨의 주장은 환전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은 예수의 행위에 대해서는 수긍할 만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지만, 예수의 다른 행위들(예를 들어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을 설명하 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위의 네 가지 견해는 모두 성전 청결 사건에서의 예수의 행동을 설득 력 있게 설명하지만, 부분적이거나 충분하지 못한 설명을 제공할 뿐이 다.

이 때문에 예수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을 좀 더 일관되고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견해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샌더스(E. P. Sanders)가 제일 먼저 주장하고 이후에 많은 학자들이 지지해 온, 소위 ‘상징적’ 견해 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행위는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보 다는 어떤 요점을 전달하기 위함”이다.39)

그 요점이란 성전이 더 이상 쓸 모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결국 파괴될 것이라는 점이다.

상징적 견해에 서는 예수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이 모두 성전의 무용함을 가리킨다.

먼저 15절에서 예수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는다.

여기서 매매하는 자들이란 성전 제사와 관련된 물건을 파는 자뿐만 아니라 물건 을 사는 자도 포함한다.

물건을 파는 자는 부당한 이득을 챙겼다는 이유 로(첫 번째 견해) 혹은 잘못된 장소에서 물건을 팔았다는 이유로(두 번째 견 해) 심판을 받을 수 있지만, 물건을 사는 자는 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위 의 네 가지 견해는 예수가 물건을 사는 자를 왜 쫓아냈는지에 대해 속 시 원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징적 견해로는 설명이 가능하 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전 제사와 관련된 제물을 사고 파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제물을 파는 자가 없으면 제사에 적합 한 제물을 구할 수 없으니 제사가 이루어질 수 없고, 제물을 사는 자가 없으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성전은 쓸모없는 공간이 된다.40)

 

     39)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Minneapolis: Fortress, 1985), 70; David E. Garland, Mar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6), 436에서 재인용.

    40)  Winn,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134.  

 

예수가 파는 자와 사는 자 모두를 성전에서 내쫓았으니 제사가 드려질 수 없고, 제사가 빠진 성전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신세다.

또한 15절에서 예수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는데, 전자의 행동에 대해서는 네 번째 견해(우상 숭 배)가 나름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했으나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견해 는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엎은 것을 포함해 예수의 다른 행동들 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징적 견해는 여기서 도 일관된 설명을 제공한다.

샌더스에 따르면 돈을 바꾸는 것과 비둘기 를 사는 것은 순례자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었으며, 이 두 가지 행위를 하지 못하는 것은 곧 성전의 주요 기능인 제사가 드려 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41)

여기서도 요점은 동일하다.

제사가 없다 면 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절에서 예수는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물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σκεῦος’로서 이 단어 자 체로는 중립적인 의미(물건 혹은 그릇)를 지니지만 특정한 맥락 속에서 그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

세 번째 견해에서 콜린스는 이 단어가 현재 맥락을 고려할 때 성전 제사와 관련된 신성한 그릇을 의미한다고 인정했지만,42) 정작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 단어를 일반적이고 속된 그 릇처럼 취급한다.43)

이것은 일관되지 못한 해석이다.

필자는 콜린스와 마찬가지로 현재 맥락을 고려할 때 ‘σκεῦος’를 성전 제사와 관련된 신성한 그릇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44)

 

    41)  Ibid., 134-135.

    42)  Collins, Mark, 530: “현재 맥락은 성전 산이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와 관련된 신성한 그릇, 즉 제사 의식과 관련하여 제사장들이 사용한 그릇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43)  Ibid. “예수는 성전 산 바깥으로부터 가져온 일상적이고 속된 용기나 도구를 성전 지역을 지나 바 깥으로 다시 가져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44)  콜린스의 이러한 견해를 수용하는 학자들은 다수를 이룬다. 예를 들어 Culpepper, Mark, 378;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342-343; Marcus, Mark 8-16, 783; 안병무,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예수의 대결,” 「신학사상」 58 (1987/가을), 515.

 

하지만 콜린스와 달리 이러한 용 어 해석을 본문 해석에도 일관되게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면 여기서 예수가 한 행동의 요점은 무엇일까?

요점은 역시 동일하다.

예수가 성전 제사와 관련된 그릇이 이동되는 것을 막으셨다면 제사는 드 려지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성전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성전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성전이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에 대한 켈버(Werner Kelber)의 논평은 예리하고 정확하 다.45)

 

    45)  Werner Kelber, The Kingdom in Mark: A New Place and a New Time (Philadelphia: Fortress, 1974), 101; Winn, Reading Mark’s Christology under Caesar, 174에서 재인용.

 

그릇의 이동을 막은 것은 성전의 제사 역할을 멈추게 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관점에서 예수는 성전의 거래만 종결시킨 것이 아니라 제식과 의식도 중지시킨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성전은 더 이상 작동하 지 않는다. 성전의 모든 역할이 완전히 중단된 것이다.

 

상징적 견해로 17절을 보면 구약의 인용 또한 이해가 된다.

매매와 환전이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면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 성전은 장사 공간으로 전락했다.

여기서도 예수의 요점은 분명하다.

성전의 주요 역할인 기도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 성전이 무슨 필요 가 있겠는가.

앞서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살펴보았다.

 첫째는 성전 안팎의 삶이 불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성전 안에서는 번듯한 모습으로 예 배와 제사를 주관하지만, 성전 밖에서는 과부와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는 두로의 신 멜카르트가 새겨진 두로 세겔을 사용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세금을 내는 상황을 꼬집는 표현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첫 번째 해석이 예레미야서의 원문맥과 마가복음의 현재 문맥에 더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택하든 예수의 요점은 동일하다.

  첫 번째 해석의 경우,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성 전은 그 기능을 다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성전은 결국 무용지물 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두 번째 해석의 경우, 성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두로의 신의 힘을 빌려 운영된다면 그 성전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떤 해석을 택하든 성전의 무용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위에 제시된 네 가지 견해는 18절의 의미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하 지만 상징적 견해로 18절을 읽게 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18절은 지 금까지 예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 이는 데 뜻을 모았다고 기술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 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이 것은 그들에게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에 제시된 네 가지 견해는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설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예수의 분노 대상이 종교 지도자들만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 에서는 18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인 반응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징적 견해는 15-17절의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설명 하고 있으며 예수의 분노 대상 역시 한결같이 성전 혹은 성전 지도자들 을 향하고 있다.

15-17절에서 예수는 여러 가지 말과 행동을 통해 성전 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이는 성전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큰 타격과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성 전이 무용하다면 성전을 관리하는 그들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 문 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이 성전 지도자들의 성 전 안팎의 불일치한 삶을 겨냥하고 있다고 느꼈다면 18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것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상징적 해석은 샌드위치 구조의 A계열 에피소드인 무화과나무 사건의 메시지와도 잘 어울린다.

위에 제시된 네 가지 해석은 성 전의 잘못된 관행을 ‘부분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성전 자체의 무용함 과 그것의 파괴라는 메시지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반면 상징적 해석은 성전과 성전 지도자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으며 그것들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성전 청결 사건의 상징적 해석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랐던 것과 잘 어울린다.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는 두 에피소드가 함께 해석되어야 함을 고려할 때 무화과나무의 결말 은 성전의 결국을 암시한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소용이 없어 말라 없어졌듯이,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성전은 소용이 없으며 결 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샌드위치 구조에서 무화과나무와 성전은 자연스 럽게 비교/대조의 대상이 되고, 이는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 ③과 직결된다.

위의 논의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마가복음 11:15-19의 전통적인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고 재정비하 는 ‘성전 청결’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으며 그것 의 수명이 다했다는 ‘성전 종결’을 의미한 것이다.46)

 

   46)  Sharyn Echols Dowd, Reading Mark: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Second Gospel (Macon: Smyth & Helwys, 2000), 119.

 

이 본문은 ‘성전 청결 사건’이 아닌 ‘성전 종결 사건’으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3. 마가복음 11:22-25는 11:12-21과 무관한 것인가, 유관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11:12-21)이 샌 드위치 구조로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11:12-21과 11:22-25의 메시지가 서로 연결되 어 있는지, 아니면 후자는 전자와 다른 독립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11:22-25의 메시지는 11:12-21의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11:22-25에서 예수는 믿음과 기도와 용서에 대해 언급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11:12-21에서 직 접적으로 혹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대화의 주제 를 전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두 본문은 샌 드위치 구조만큼이나 주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이 끝난 직후 예수는 22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한다.

예수의 발언은 갑작스럽고 심지어 당황스 럽기까지 하다.

갑자기 하나님을 믿으라니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 면 예수의 발언은 성전 종결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고, 성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의 임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47)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예수의 발언 은 성전은 사라질지 몰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 예수는 23-24절에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의 말에서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는 표현은 믿음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기도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성전 종결 사건과 연관지어 해석해야 한다.48)

즉 여기서 산은 어떤 산이든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위치한 성전 산을 가리킨다.

바다는 전통적으로 심판을 의미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예수의 발언은 성전 종결 사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49)

예수의 발언은 미가서 4:1과 대조하여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미4:1,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미가서 4:1은 마지막 날에 성전 산이 높이 들릴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예수는 그 예언을 뒤엎으며 성전 산이 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50)

예수는 구약의 예언을 재정 의하며 성전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성전 종결 사건에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여전히 기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성전이 사라져도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통해 기도가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5절에서 예수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용서는 믿음 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성전 종결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51)

 

    47)  Witherington, The Gospel of Mark, 317.

    48)  Boring, Mark, 324.

    49)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270.

    50)  Witherington, The Gospel of Mark, 318.

 

성전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제사였으며, 다양한 제사를 통해 죄 용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성전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없어진다면 용서의 공간을 상실하게 될 것이 다.

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용서에 대해 말한다. 성전이 없어질지라도 용 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통해 여전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 기도, 용서의 주제를 다루는 11:22-25는 일견 11:12- 21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성전 종결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 다.

요점은 동일하다.

성전이 더 이상 소용없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성 전에서 이루어지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와 용서는 흔들림 없이 지 속될 것이다.

마가복음 11:22-25와 11:12-21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도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은 배경 음악처럼 작동 하고 있다.

이 섹션에서 우리는 주인공이신 예수의 말에 집중하였으며(장 르적 특성 ①과 ②), 두 본문의 주제적 유사성(장르적 특성 ③)을 고찰했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독립된 전승처럼 보이는 세 개의 본문(무화과나무 사건, 성전 종결 사건, 믿음/기도/용서에 대한 예수의 어록)이 사실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음을 살펴보았다.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11:12-21)은 샌드위치 구조로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기도/용서에 대한 예수의 어록(11:22-25) 역시 성전 종결 사건과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이 룬다.

이러한 논증을 하면서 필자는 논문 전반에 걸쳐 그리스-로마 전기 의 장르적 특성과의 연관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마가복음 11:12-25에 대한 본문 분석은 위에서 충분히 이루어 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문 분석의 결과와 그리스-로마 전기의 장르적 특성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간략하게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① 주인공에 대한 집중적 관심:

전기의 주요한 특성은 주인공을 중심 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인데 마가복음 11:12-25는 이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세 개의 본문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대화를 주도하 고, 사건을 전개시키는 행동의 주체는 다름 아닌 주인공 예수다.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이 샌드위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담보하는 것도 주인공 예수의 존재이다.

  ② 주인공에 대한 인물 묘사를 통해 독자들을 덕스러운 삶으로 초청:

그리스-로마 전기의 인물 묘사 방식은 전기 작가의 코멘트를 최대한 자 제하고 해당 인물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어떤 인물 의 인격과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 울여야 한다.

논문 전체에 걸쳐 우리는 주인공 예수의 말과 행동을 집중 적으로 분석했다. 때문에 전기의 장르적 특성 ②는 논문 전반에 걸쳐 적 용되고 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했던 행동, 성전에서 보인 일 련의 행동들, 성전 종결 사건 이후 믿음과 기도와 용서에 대해 언급한 예 수의 말을 통해 우리가 도출해낸 결론들은 고대 전기 인물 묘사 방식을 세심하게 고려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③ 비교/대조의 사용:

그리스-로마 전기는 인물 혹은 개념 간의 비 교/대조를 종종 사용한다.

비교/대조는 특히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고 있 는 무화과나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 사이에서 발견된다.

먼저 형식적 인 면에서 두 에피소드는 상징적 해석을 취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 한 내용적인 면에서도 유사성을 보이는데, 무화과나무가 겉으로는 무성 해 보이지만 열매가 없어 소멸되었던 것처럼, 성전도 겉으로는 번듯해 보이지만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무화과나 무 사건과 성전 종결 사건은 구체적인 표현의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선포하기 전에 먼저 무화과나무에 가서 그것을 “보 신” 것처럼(11:13), 예수는 성전에 대한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성전 에 가서 그것을 “보신”다(11:11).

   ④ 넓은 독자층을 대상:

그리스-로마 전기는 제한된 독자층이 아닌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기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마가복음 11:12-25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전 종 결 사건 이후에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와 용서가 성전에 국 한되지 않고,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통해 지속 될 것임을 선포한다.

또한 옛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역할 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장소적, 인종적 경 계를 넘어 실현된다는 것은 분명 넓은 독자층을 향한 메시지라 할 수 있 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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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논문은 마가복음 11:12-25를 다루면서 세 가지 해석학적 질문에 집중한다.

  ①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부당한 처사인가?

  ② 성 전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들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③ 마가복음 11:22-25는 11:12-21과 무관한 것인가, 유관한 것인가?

이 세 가지 질 문은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질 문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주요한 원리들이 도출된다.

  첫째, 열매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는 것으로 인해 무화과나 무를 심판한 것은 부당한 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이 에피소드 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증거다.

  둘째, 성전에서 예수 가 보인 일련의 말과 행동들은 성전이 더 이상 쓸모없으며, 따라서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을 상징한다.   셋째, 샌드위치 구조를 고려할 때 무화과나 무에 대한 심판은 성전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넷째, 성전 종결 사건 이후 믿음, 기도, 용서에 대한 예수의 발언은 표면적으로 볼 때 성전 종 결 사건과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섯째, 마 가복음 11:12-25의 해석 전반에 걸쳐 그리스-로마 전기의 네 가지 장르 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제어 복음서 장르, 그리스-로마 전기, 무화과나무 사건, 성전 청결 사건, 성전 종결 사건, 마가복음 11:12-25

 

Abstract

Rereading Mark 11:12-25 in Light of Genre Characteristics of Greco-Roman Biography — Cleansing of the Temple or Closing of the Temple?

Youngju Kwon (Assistant Professor, New Testament Studies Department of Theology Korea Baptist Theological University and Seminary )

This study focuses on three hermeneutical questions in dealing with Mark 11:12-25. ① Can Jesus’ cursing of the fig tree be justified? ② What are Jesus’ words and deeds in the temple aimed at? ③ Is Mark 11:22-25 unrelated or related to 11:12-21? These three questions appear to be independent and irrelevant but are in fact closely related. In answering these questions, several key principles emerge. First, the judgment of the fig tree for its fruitlessness, even though it was not the season of fruit, seems unjust, but it is actually evidence suggesting that the episode should be interpreted symbolically. Second, Jesus’ words and deeds in the temple symbolize that the temple is no longer useful and will be eventually destroyed. Third, given the sandwich structure, the judgment on the fig tree points to judgment on the temple. Fourth, Jesus’ remarks about faith, prayer, and forgiveness after the episode about the closing of the temple may seem unrelated to that episode on the surface, but they are in fact closely connected. Fifth, four genre characteristics of Greco-Roman biography are evident throughout the interpretation of Mark 11:12-25.

key word : Gospel Genre, Greco-Roman Biography, Fig Tree, Cleansing of the Temple, Closing of the Temple, Mark 11:12-25

 

 

논문접수일: 2024년 12월 5일 논문수정일: 2024년 12월 14일 논문게재확정일: 2024년 12월 20일

神學思想 207집 · 202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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