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한국 민주화의 화신(化身)인 김찬국 선생이 서거(逝去)하신지 10주년 을 맞고 있다.
이제 그의 신학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 있다. 한국 민중 신학의 거목인 스승을 기리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뜻 깊은 일이라 본 다.
그가 진리의 삶을 살고 갈릴리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이 시대 사표(師表)가 된다.
이에 후학들이 이를 기리는 글을 쓸 수 있게 하며 그 예수 정신으로 돌아가서 강단이든 삶의 현장에서 갈릴리 민중의 삶을 산 선배들을 따라 믿음의 행진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후학들이 그 전 통을 잇고 또 그것이 예수를 다시 살아내는 삶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1
1) 안병무(Ahn Byung-Mu), Jesus of Galilee (Hong Kong: CCA, 2004), 6-262.
시 대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처럼 살면서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민 중을 대변하며 살 때 그 예수 정신은 계속 살아남아 십자가를 향한 행진을 하게 한다.
본고는 구약의 역사에서부터 신약 갈릴리 예수로 이어지는 역 사는 무엇인가 질문하며, 그 의미를 연구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구약 성 서는 구약의 정의의 역사서로서 우리에게 역사의 거울을 보여주며 모든 역사의 잣대로서 오늘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역사와 예언이라는 차원에서 연구하였던, 이사야 전공 자인 김찬국은 예언 역사 속에서 구약역사를 추출하였다.
그는 예언자의 눈을 가지고 연구하며 그것이 구약 역사서 연구의 중심이라 보며 독특한 예언자의 시각을 가졌다.
그는 구약 전체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연 구한다. 또한 논자는 구약 전반에 흐르는 구약의 역사와 구약 역사서(신 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역사서)에 대한 이해를 그가 어떻게 하였는지 살펴 보며, 구약 신학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며 그의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 되었는지 연구하고자 한다.
김찬국은 성서 본문과 역사현장, 역사적 배경 이라는 세 가지 축과, 그것이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살피며, 예언자들이 역사를 풀어가며 당시의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메시지를 통해, 그는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다.
그의 구약신학의 중심에는 정의의 사상이 있는지 살피며, 과연 정의 예 언자 아모스처럼 한국 사회의 불의와 부정과 불법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 의 예언자로서 어떻게 구약 성서를 풀어 가고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또한 구약역사서의 중심 주제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살피며, 끝으 로 구약 역사서 해석과 구약 신학의 중심으로 민중 신학을 전개하며 성서 해석 방법론으로 어떻게 적용하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선 행 연구로 발표했던 논문에 뒤이어 한국 민중 구약신학자와 민중 신학의 3대 신학자인 김찬국의 신학은 오늘도 우리에게 지시하고 암시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다.2)
2) 박신배, “구약 민중 신학의 재발견,” 신학사상 154 (2011), 37-65.
따라서 이 논문에서 구약 역사서를 해석하는 김찬국 의 구약역사 신학을 새롭게 연구하고자 한다.
II. 역사와 예언, 정의 역사와 예언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브라이언 펙함(Brian Peckham) 은 그의 책 <역사와 예언>에서 신앙의 근거와 예언 패러다임(이사야, 아 모스, 호세아)을 다루며 개혁(미가, 예레미야)과 쇠퇴와 몰락(나훔, 하박 국, 스바냐, 에스겔)등을 말하며 신명기 역사와 ‘수정과 반응’이라는 제목 으로 요엘과 오바댜, 요나를 다룬다.
마지막 장에서는 새 시대의 정치라 는 주제로 학개와 스가랴와 역대기, 말라기를 말하며 예언과 역사가 밀접 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3)
“역사와 예언은 상호연관이 있다. 역사는 문학적 산문 전승이며 예언은 학파의 시적 전승이다. 역사는 시대 마다 삶의 정황에 합리적 근거를 드러내고 있고, 예언은 미래성을 가지며 변혁의 의지와 역사변화의 의미를 가진 과거의 전승을 모아서 역사기록 에 투사하고 있다.”4)
3) Brian Peckham, History and Prophecy (New York: Doubleday, 1993), 1-24.
4) Ibid., 1. 74
그래서 브라이언 펙함은 역사는 ‘만족스럽고 교훈적 이며 비인간적인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곧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측면에서 특별하며 단호하며 행동을 요구하는 윤리의 촉구성이 있다.
그 둘은 함께 점차적으로 해석의 갈등을 빚으며 역사적 이 론의 요구에 굴복하는 예언이 신명기 기자에 의해 그 역사적 틀이 짜여지 고 율법에 의해 정리되고 존중되어졌을 때에만 그 의미가 있게 되어서 예 언과 역사의 관계가 균형을 잡게 된다고 한다.
역사는 그 역사 지향의 프 로그램을 향하게 되고 또 그것의 실제적인 세부사항을 줄여가게 된다.
이 처럼 펙함은 구약 전반에 대한 구조를 역사와 예언의 전승 과정을 생각하며 두 개의 개념, 역사와 예언이라는 차원이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상호관계의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밀접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 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역사와 예언이 하나의 신앙적 입장으로 재해석되어 역사를 해석하고 또 예언자의 예언 전승이 역사의 과정에서 배태된 것이 다.
최근에 정중호는 유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동성을 추적하여 다 문화의 한국 사회 현상을 읽어내고 있다.
이는 역사와 전승, 오늘의 역사 해석이라는 차원을 생각하고 있어서 새로운 역사해석 의미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5)
김찬국은 역사를 ‘약속과 해석 그리고 신앙과 자유의 사건’이라고 본 다.
“약속은 인간을 미래에 연결시켜(역사의식) 역사를 향한 감각을 주 는 것이다. 약속은 인간을 희망 속에서 약속 자체의 역사로 들어 올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실존 안에 특수한 종류의 역사적 특성으로 특징진 다. 약속으로 시작하고 결정된 역사는 순환적 반복과 재기에 있지 않다. 그 약속의 성취는 현저한 완성을 향해서 결정적으로 기울어진다. 몽롱한 힘이나 그 방향 자체의 법의 출현으로 그 방향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힘과 진실로 우리를 지적하는 방향의 말로 결정된다. 참된 의 미의 역사란 역사 그 자체의 방향 감각을 알아내고 그것을 믿고 있는 사 람에게만 기록이 된다.6)
역사 안에서 나의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려면 책 임적 자아의 실존적 결단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에 접촉 하여 나 개인이 죄를 회개하고 갱신한 사람이 되어서 역사 무대에 깔려 있 는 모든 혼돈과 무질서에 신앙을 가지고 신앙적 대결을 하여 하나님의 질 서를 세울 때에 인류의 미래는 구원을 향하는 역사가 되고 구원의 성취를 향한 전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는 의미를 가진 사건이되는 것이다.”7)
5) 정중호, “하나님의 이동성과 이스라엘의 다문화 사회,” 신학사상 171 (2015), 33-37.
6) E. H. 카르/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 까치, 1997).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 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7) 김찬국, “역사의식과 신앙,” 성서와 역사의식 (서울: 평민서당, 1986): 53-64.
더 나아가 그는 역사에 대한 해석(사건과 그 해석)이 중요함을 앤더슨 (B. W. Anderson)의 책, <성서의 재발견>에서 언급하고 있다.
앤더슨은 말하기를
“사건들은 어떤 역사적인 공백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역 사적 사건들은 인간의 체험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언제 나 어떤 설명이나 의미를 가지고 일어난다.
만약 이 사건이 창조적이며 역 사를 구성하는 사건이라면 그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며 결국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기록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일 그 사 건이 무의미한 것으로 체험되어졌다면 하루의 일과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처럼 빨리 잊어버려질 것이다.”8)
이처럼 김찬국은 역사는 그 해석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다.
김찬국의 신학에 있어,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역사와 예언”에 주목한 다.
석사 논문은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구약 의 정의, chedeka)인데 연세대에서 1954년 2월 15일을 제출하였다.
그는 구약 역사에 있어서 정의의 문제가 관심이 있고, 그 역사적 관심은 바로 한국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이루어지는가에 그 초점이 있었 다.
그는 구약의 역사 속에서 교회사의 종교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 다.
‘중세 종교 개혁의 신학적 발단은 하나님 의(義)의 재발견에 기인한 것 이고 그 하나님의 의가 생성도상에 있던 프로테스탄트의 근원과 근저가 되었다 함’은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영적 경험에서 찾아 볼 수 있다(동경신학대학편, 신학, 제2호(1950).”9)
8) B. W. Anderson/김찬국·조찬선 옮김, 성서의 재발견 (서울: 대한 기독교교육협회편, 1971), 177.
9) 김찬국,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1954), 1. 재인용, 북삼씨가 오토 쉴, 마틴루터 2집에서 335쪽에서 인용한 것임.
장공 김재준이 구약의 중심이 자유라고 보았다고 하면, 김찬국은 그 구 약의 핵심이 정의라고 보았다.10)
그래서 김찬국은 구약의 정의(義)에 얼 마나 천착하고 있는지 그 논문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다.
1장 하나님의 의 (義)의 개념, 2장 하나님의 의의 본질, 3장 하나님의 의와 계약, 4장 하나님 의 의와 심판, 5장 하나님의 의와 속죄, 6장 하나님의 의와 구속 등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구약의 계약신학에 대해 그는 구약 전체를 꿰뚫 는 핵심으로 정의의 문제로 보았다는 것이다. 구약의 계약이 바로 구약신 학의 중심이라고 볼 때, 그 중심에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구약신학의 통찰력을 가지고 보는 것은 구약학자의 혜안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김찬국은 서문에서 루터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자신이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의 심정으로 나라의 부정을 개선하는 정의감을 가지고 살겠 다는 의지를 가진다.
이는 예언자의 삶과 고백을 석사논문에서 이미 이렇 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1540년, 9월 2일-17일의 탁상일기에서 다 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에 시편 중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 소서‘(시편31:1)란 구절을 읽고 노래했을 때 나는 전율하고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역사에 원한을 품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 의 의(義)란 여기에서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그의 엄숙한 심판으로서 구원한다는 말일까. 그렇다 면 나는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도우 심이라는 말씀을 상상해 보았다. 감사하다. 내가 사리(事理)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의로서 우리를 의 롭게 하는 의(義)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어법을 이해하고 처음으로 시편 시인이 이해되었다.”11)
10) 김동환, “김재준의 정치사상,” 신학사상 164 (2014), 123-150.
11) 김찬국,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3-5.
더 나아가 김찬국은 시편23편을 다루고, 암브로시우스 감독 예언정신을 소개하며 3·1절의 의미를 출애굽 시편으로 펼친다.12)
이와 같은 루터 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시편강해 시에 ‘주의 의로 나를 도 우소서’란 구약의 심판적인 하나님의 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인 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1:17)란 신약의 구속적인 하나님의 의를 이해함으로 비로써 정의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적이면서 구속적인 의의 재발견이 루터로 하여금 확고한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했으며 그러한 신앙태도가 당시의 외면적 이고,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로마 교회의 신앙태도에 반기를 들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속적인 의의 역사를 믿는 참된 신앙 도(信仰道)를 후세에 밝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후 루터의 위대한 신학 적 공헌이 나타났으며 실로 종교개혁의 내면적 영적 근원이 되었던 것이 다.13)
김찬국은 루터의 신앙의인, 칭의의 문제를 다루며 하나님의 심판에 서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찾고 있으며 로마 교회의 부패하고 부정한 것에 대하여 반기를 든 종교개혁의 사건을 거론하고 있다.
바로 루터가 하나님 의 정의를 인식하고 그 믿음의 의를 깨닫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그 시대에 바로 서 있었음을 논문의 서문에서 언급하며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찬 국이 이 시대 종교개혁가로서 이같은 정염(情炎)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는 루터를 통해 시대의 우상을 파괴하는 정의감을 가지게 되 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14)
안병무도 그러한 권위의 우상을 파괴 해야 한다고 본다.15)
12) 박신배, “시편과 한국문화,” 태극신학과 한국문화, (서울: 동연, 2009), 307-310.
13) 김찬국,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3-5.
14) 강승일, “성경의 증거로 본 이스라엘의 반형상주의,”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4 (2017), 9-25
15) 안병무, “행동과 권위,” 성서적 실존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7), 278-287.
루터의 이런 신학적 사상은 루터의 종교개혁 후 수세기를 지난 오늘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신학사상은 현대 신학사상의 주류를 차지하며 우리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과 그 구속적인 의라는 측면은 역설적인 진리의 관계가 있다고 보며 그 개 념과 실체와 윤리의 적용을 우리의 신앙태도로 삼을 수 있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의 관념이 다만 루터에 의해서 재발견되고, 재고되며, 재인식된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에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 님의 정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찬국은 하나님의 의를 논하며 루터 와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연관하며 설명한다.
“실은 그런 역리적인 의의 관념이 구약성서에서 벌써 나타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의 하나님의 의의 재발견이라 함은 결국 그가 성경을 다시 발견한 것이고 당시 로마 교회가 제한한 성경 해석과 제정된 교리외의 것 을 논하는 성경 해석을 금지한데 대한 반대로서 성경 주석에의 문화를 새 로 개방했다는 사실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직접 성경의 원 (原)진리를 주석해서 확고한 복음적 신앙을 수립하려고 한 <성경으로 돌 아가자>는 혁신적 태도를 실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16)
16) 김찬국,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6-7.
김찬국은 여기서 로마 교회에 정면 도전할 뿐만 아니라 정의에 반(反)하는 성경해석의 문 제를 파헤치며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면 바로 성경해석의 문제와 그 본 질을 알아야 하고 이를 통해 진리를 알기 위해 성경주석을 바로 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 계약의 정의를 파헤치기 위해 루터의 성경 해석의 문 제를 깊이 다루며 로마 교회와 루터의 관계에 깊이 천착해서 진리와 정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러한 거시적 교회사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포착하여 삶의 현장까지 연결하여 민중의 삶의 신학으 로 실천한 학자였다.
김찬국의 인생은 정의를 위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하나님 편에서 정의와 진리를 선택했을 때 핍박과 고통 을 받았지만 마음에는 담대함과 기쁨이 있었다. 불의를 택해 안일함을 추 구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인 두 려움은 한 순간, 하나님 편에서는 두려움이 없었다.”17)
김찬국은 성경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
“성경으로 돌아 가자는 태도는 19세기 과학적 비평주의적 성경 연구 태도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찾지 못한 탓으로 오늘날 다시 요청되고 있다. 성경을 어디 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올바른 의미의 신앙적 진리를 해석해 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의의 진실한 의의(意義)를 발견 하려고 특히 구약성경으로 올라가서 살펴보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재발견은 루터 때 뿐 만에 한(限)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류가 고뇌하는 도의(道義)재건을 부르짖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의는 재발견되어야 하며 실제로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충만해야 할 것이다. 이 런 요청은 오늘의 세계 뿐 만 아니라 우리 한국사회에도 긴급히 요청되어 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요청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뜻하 는 요청이라 믿는다. 이런 뜻에 이 소 논문은 하나님의 의를 구약성서에서 찾아 그 의미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18)
17) 김찬국, “금관의 예수,” 역경의 열매, (서울: 국민일보, 1993), 46 18) 김찬국,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8-9.
김찬국은 구약 성서가 역사서 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으며 거기에 중심 주제는 정의(체다카)사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예언과 정치>를 풀어간다.
“구약성서의 역사기록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바 과학적 근거를 가진 틀림없는 객관성을 가진 기록들은 아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왕실중심의 실록들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모세오경의 역사기록들은 사실(史實)로서의 사실(fact)들을 정확히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도, 성서기자들이 자기들이 본 우주관, 인간관, 역사 전망, 죄관, 윤리관을 가지고 신앙 고백적으로 해석한 해석된 사건(event)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19)
김찬국은 진리에 이르는 성서해석 방법론과 성서해석, 역사의식까지 두루 언급하고 이처럼 논의하고 있다.
이는 마치 루터의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오늘의 세계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정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역 설하고 있다.20)
그는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처럼 흘러넘치 게 하는 혁명을 꿈꾸는 예언자였다.
이처럼 김찬국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의 종교개혁가 새 루터로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정의 의 예언자요 종교개혁가로서 정의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고 민주화를 위 해 올곧게 행동하는 양심인과 학자로서, 또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로서 역 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는 정의로운 한 사람에게서 공동체의 정의를 추 구하는 구약학자, 오늘 이 세대의 예언자로서 지평을 넓혀간 것이었다.
III. 구약역사서의 중심과 방법론, 민중 신학
김찬국의 역사의식에서부터 시작되어 구약 역사의 중심신학이 무엇 인가.
그리고 구약 신학적 역사신학의 주제는 언제부터 연구되었는가. 그 는 구약역사신학의 중심이 정의라고 보고 있다.
그는 제 2이사야의 창조 전승 연구를 박사논문으로 제출하며 창조전승을 구원사적으로 보는 연구 와 종교사적으로 보는 연구의 연구사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의 삶에서 창조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을 포착하고 이를 역사적 학문적 연구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연구해 나갔다.21)
19) 김찬국, 예언과 정치 (서울: 정우사, 1978), 10.
20) 김찬국, “구약의 하나님과 혁명적 변화,” 인간을 찾아서 (서울: 한길사, 1982), 75-84
21) 김찬국, 제 2이사야의 창조전승 연구 (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원, 1980), 1-14.
그는 구약의 제2이사야 전공분야에서 창조 신학을 연구한다.
한국의 어두운 상황을 이론적으로 밝히며 새로운 창조신학을 해야 할 것을 암시 하고 있었다.
한국의 어둔 시대에 창조신학자로서 신학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구약학 연구의 분야에서 묵시문학적 본문을 연구하는 것이 무 엇인지 보여준다.
그는 삶의 실천을 중시하며 민중 신학의 자리에서 올곧 게 산, 고난 받는 예언자가 되었고, 야웨의 수난 받는 종으로서 살며 제2이 사야 신학을 깊이 연구하며 한국의 민중 신학을 실천하여 살아있는 신학 이 되게 하였다.22)
22) 박신배, “구약 민중 신학의 재발견,” 구약신학의 새로운 모색: 한국적 구약신학하기 (서 울: 동연, 2016), 52.
김찬국의 신학 작업으로 들어가 볼 때 그가 제자들에게 논문 지도를 하 며 구약역사신학을 가르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 에 구약 연구 방법이 있었다.
김찬국의 구약 연구 방법론에서는 세 가지 카테고리가 중심에 있다.
그것이 바로 구약 본문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배경과 사회적 · 경제적 상황 등이다.
그 세 개의 범주로 본문에 대한 구 조 분석이 이뤄지면 본문(Text)과 현실(삶의 자리, Sitz im Leben)문제 파 악인데, 즉 그것이 현실 세계와 성서의 세계를 푸는 열쇠(Key)가 된다.
이 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종교 적인 면에서 고찰하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 지배자의 관계가 어떠한지 연구하며, 그곳에 정의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실현되는지, 불평등의 요소가 없었는지 물으며, 그 때의 경제적 상황은 백 성들이 정의롭고 공의로우며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는지 등을 탐구하 며 세 분야로 나누어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세 구조로 나누어 분석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논자는 ‘유다의 종교개혁 연구’를 하는데, 히스 기야 종교개혁과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연구에 있어서 이 정치적 상황, 종 교적 경향, 사회적 현실 등 세 가지 나누어 연구하도록 지도하여서 석사 논문을 썼다.23)
또한 석사과정의 구약학 세미나(신명기와 신명기 역사, 예언서 연구)는 학생들이 주도하여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는 하브루타 (유대인 교육법) 공부 방법으로 학생들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고 학습효 과가 뛰어나다.
그래서 학생들은 발표하고 교수는 구약학의 핵심을 정리 하여 말씀하셔서 종합적으로 파악하도록 유도하였다.
많은 정보를 제공 하고 세계의 구약학의 동향을 알게 하였고,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 며, 스스로 찾아가는 학문적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24)
‘김찬국의 민중 신학과 구약’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문화신학지(2011 년 8집)에 기고할 때 ‘민중 신학의 새로운 모색2’이라는 주제로 책을 묶었 다.
그 때에 선생님을 기리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민중 신학과 구약 이라는 관계를 두고 쓰게 되었다.
연세 신학의 민중 신학자 서남동과 더불 어 대중과 더불어 호흡하였던 구약 민중 신학자 김찬국을 넣어서, 삼 대의 민중 신학자의 반열에 드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하고 안병무와 함께 거론하였다.
그로인해 구약 민중 신학자 김찬국 정신은 다시 거론되는 계 기가 되었다.
그 첫 논문의 결론부에서 소개한 글은 왜 김찬국의 구약 민 중 신학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는 신학을 기반으 로 전개하고 있다.25)
거기에 복음이 정의와 사랑과 함께 나타난다는 공동 체 신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26)
23) 박신배, 구약의 개혁신학 (서울: 크리스천 헤럴드, 2006), 45-99; “유다왕국의 종교 개혁 연구-신명기 역사에서 히스기야·요시야 왕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6), 4-94.
24) 박신배, “구약 민중 신학의 재발견,” 51.
25) 알로이스 피어리스/성염 옮김, “아시아 종교들과 지역 교회의 선교,” 아시아의 해방신학 (서울: 분도출판사, 1990), 69-98. 김찬국, “눌린자의 편에 서는 교회,” 인간을 찾아서 (서 울: 한길사, 1982), 95-102.
26) 리까르도 안똔시크, 호세 미구엘 무나리스/김수복 옮김, 그리스도와 공동체 사회 (광주: 일과놀이, 1990), 315-336. 김찬국, “패배한 정의,” 인간을 찾아서, 103-110.
김찬국의 신학은 구약 민중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학의 구 조는 한국 신학의 세계화를 위한 신학으로서 민중 신학을 펼쳤고 삶의 신 학이 연결되어 민주화 작업을 하였으며 또한 한국 정치현실과 노동현장 속에 민중과 민족과 함께 하며 실천하는 신학으로서, 풀뿌리 정신으로 삶 의 현장으로 들어가 고난당한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피 해를 통해 민주화 운동의 큰 지평으로 우연히 나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 그 이 후의 나그네와 같은 순례자로서 민주주의 실현화를 위해 실천적 운 동을 벌어나가게 되었다.
이 뒤에는 구약의 정의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있 었으며 그 정의가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그는 구약의 세계와 현실 과의 사이에서 하늘 뜻이 펼쳐지는 삶, 어려운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민중 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의 차원에서 앞서 연구했던 신학적 결 실로서 이 땅에서 정의를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그의 신학의 배경에는 인 간 사랑이 기본에 있고 한민족의 얼을 강조하는 수업과 제자들의 가르침 에서, 한글 사랑이 있었다.
이수정의 사진이 그의 연구실에 있는데 청년 교육과 민족교육에 있어서 민중 신학의 중심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에세이로 쉽게 풀어쓴 행동의 언어로 표현하며, 시대의 양심으로서 서서 행동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예언자의 삶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김찬국은 민중 신학을 삶으로 살며 보여준다.
인간 김찬국은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살며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시대의 스승이 되었다.
고희 기 념 저서에서 지인들이 그를 기리며 벗에게 한마디 말하는 글에서 그의 인 생 전반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 주며 참 인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한다.”27)
27) 박신배, “김찬국의 민중 신학과 구약,” 문화와 신학 8 (2011), 30.
그가 구약 역사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두 개의 개념은 정의와 자유라 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구약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삼면에 걸쳐 거기에 비친 구약적인 자유주의를 연구한 글에서도 잘 알 수 있다.28)
그는 시대 마다 여호와 신앙에 따른 성전 시대와 바벨론 포로시대, 귀환 시대의 자유 주의 형태를 설명한다. “포로기 후 귀환에서도 오랫동안 교직정치 (Hierarchy)가 실시되었는데 그때에도 자유사상은 잊혀지지 않았다.
이 스라엘의 일반 백성은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제사직의 이상(출 애굽기 19:6)이 제 3 이사야로 인해서 재강조 되었다.
원래 제사기자들은 거룩한 국민의회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대표인 모세, 아론에 반대 한 고라당의 반역 사건을 기술하였던 바 있는데(민수기 16:1) 귀환 후의 이스라엘에는 비록 국가적 독립은 없었을지라도 일종의 종교적, 제사적 인 다시 말하면 종교 정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의 장로와 국민의회를 통해서 중요한 사건들을 처리 결정하였다(에스라서 10장, 느헤미야서 9장, 요엘서1:14, 이사야서 24:23).
그러므로 이 교직정 치란 것은 국민의회의 정치이었으므로 전제정치가 될 수 없었다.”29)
이 처럼 김찬국의 신학에는 항상 예언자 신학의 정의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 었다.
이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도 자유를 중요한 윤리적 가치로 주장 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30)
28) 김찬국, “구약성서에 나타난 자유주의,” 성서와 역사의식 (서울: 평민서당, 1986), 34-35.
29) Ibid..
30) 안병무, “현존하는 하나님,” 성서적 실존, 320-334. 박신배 | 김찬국의 구약 역사신학 -구약 역사서를 중심으로 85
IV. 구약 역사서와 구약 신학의 중심으로서 역사의식
여기서는 먼저 김찬국의 구약 신학 노트에 있는 신명기 역사서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어떻게 구약 역사서의 학문적 논 의가 구약신학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추론하고자 한다.
“신명기 학파의 편집-열왕기는 솔로몬 치세부터 바벨론 포로시대까지 역사를 기록해 나가 는데 있어서 두 왕국의 왕들의 한 사람의 행적을 종교적으로 비판하며 일 정한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는 신명기적 편집과 가필을 발견 하게 된다. 사무엘 서에서는 신명기적 신학과 기록의 전승을 정의하면서 약간의 신학적 설명으로 첨가하는 정도로 만족하였으나 열왕기에서는 어 떤 작업과 기준으로 신명기 역사 전체를 편집하였다고 한다. 열왕기는 주 전 561년에 여호야긴이 포로가 되어 기록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현재 형태 로 기록될 수 있었다고 저술된다(쿠에넨의 역사 비평적 방법(1887), 윌더 버거의 문학적 비평(1893). <열왕기의 두 편집설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1)
열왕기는 주전 600년경에 편집 기록되었으며 치세 기록에 재편집 가필 되었다고 주장한다.
젤린(Sellin)은 열왕기에 두 사람의 신명기적 역사가(편집자)의 편집 가필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였으 며 파이퍼(Pfeiffer)는 이 두 편집자의 구별을 하여서 첫째 사람은 편집자 이고 주전586년 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은 모르고 있으며 둘째 편집자 는 그 비극적 사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32)
이처럼 김찬국의 구약신학 노트에서 현대의 구약 신학적 학문논의를 따 라가며 그 구약 역사 신학적 방법을 섭렵하고 있고 또 이해하여 자신의 구 약 신학적 입장으로 더 나갈 수 있는 토대를 삼았다.33)
31) 김찬국, 구약신학 노트, 강의록, 7-120.
32) Ibid..
33) 김찬국의 구약 신학 노트는 1956년 1학기(4-9월)이었다. 이는 6.25동란 이후 나라가 어려 운 시기에 유학하며 세계 신학의 중심에서 세계적인 석학들의 학문을 배우고 우리의 신학 을 할 수 있는 학문적 사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찬국은 신명기 역사의 첫째 편집자가 이 열왕기 문서의 저자로서 신 명기의 포로기에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명기역사로서 국가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신명기 역사 문서의 첫째 편집자는 솔로몬 성전 건축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보았으나(왕 상3:3), 둘째 신명기 역사 편집자는 기브온에서 솔로몬이 제사 드리는 것 은 정당하다고 본다(왕상3:4).
이 신명기 문서 편집시대는 요시야 왕의 신 명기 편집 때부터(주전 621년)해서 예루살렘 멸망의 해(주전586년) 사이 로 잡으면 된다고 보며 좀 더 신명기 역사 연대를 따지고 보면 요시야 왕이 죽은 후(주전609)에 유다가 망해서 바빌론 포로(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 전 멸망)생활을 했다.
여기서 초기 신명기 역사서가 히스기야 시대에 쓰 여졌다는 것은 아직 논의하지 않고 있다.34)
그러나 신명기 역사 편집 시 기는, 그 시대의 중간을 잡아서 주전 600년으로 잡는 것이 좋다고 본다.
젤린(Sellin)은 이 문서를 쓴 것은 요시야 왕 때 서기관(Shaphan) 혹은 아 론의 아들 아히감(Ahikam)이라고 소개한다.35)
이처럼 김찬국은 신명기 역사의 저작 연대와 2중 편집설과, 그 역사적 배경을 논의하며 젤린의 편 집설을 소개하고 있으며 깊이 있는 학문적 논의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신명기 역사가의 본 저작은 신명기의 신학을 비교하여 설 명하고 있다.
또 역사연대를 기록하였으며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서의 신 중심의 약속을 지키면 백성과 국가가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케 하 였다고 말한다.36)
34) 박신배, “북이스라엘 전승과 초기 신명기 역사”, 신학논단 43 (2006), 275-295.
35) 김찬국, 구약신학 노트, 강의록, 7-121.
36) Ibid. 강의 노트는 한자와 필기체 글씨로 난독성이 크지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방향성으 로 해독한다. 후에 다시 정확하게 독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명기역사 신학을 언급하며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 는다는 것과 토라에 불순종하여 저주를 당한다는 신학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처음의 신명기 역사가의 기술이며 열왕기 기록의 편집 자인 둘째 신명기적 역사가는 바벨론 포로 치하에 기록하였다. 그가 경험 한 포로 생활은 열왕기하 25장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야긴의 석방(주전 561년)은 그 전 포로 회복이다. 주전 538년의 바벨론 포로로 부터의 귀환 은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이 신명기적인 문서의 특징적인 기사가 열왕기에 기술되어 나타난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왕상2:1-4; 8:22-66; 11:9-13; 12:26-31; 14:1-24; 15:1-15; 왕하17:21-23; 22장; 23:1-15, 21-28)”37)
김찬 국은 열왕기하 25장의 여호야긴 왕의 석방 사건을 보도하며 신명기 편집 자(2차)가 고레스 칙령에 의한 포로귀환 사건을 모르고 기사를 편집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또한 신명기 신학과 문서 층이 열왕 기 상하에 나타나는 신명기 역사 신학의 틀이 미래의 신명기 역사 연구에 있어서 예언적 연구를 이해하고 소개하고 있어서, 놀라운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더 확대하여 신명기 역사를 중심으로 <창세기-신명기>의 오경 역사와 역대기 역사의 관계를 함께 추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바벨 론 포로 시대의 신명기 학파의 역사서(The Historical Books of the exilic Deuteronomist)> 제목 하에 신명기 역사 편집과 그 신학적 설명을 한다.
즉, 포로시대의 신명기 학파는 주전 550년경에 열왕기를 새로 편집하였 을 뿐만 아니라 레위기를 제외한 오경을 편집하였으며 세 가지 역사서, 여 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를 편집하였다.
후에 우리가 고찰한 바와 같 이 이 신명기 기록의 특별한 공헌은 여호수아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여호수아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설교(수23장)를 다시 기록하였으며 사사 기에서는 사사기의 수장(首將)을 제고하였으며 열왕기에서는 여호야긴 의 석방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한다.38)
37) Ibid.
38) Ibid.
바벨론 포로시대라는 암 흑과 어둠의 시대에 더 창조적인 성경 저작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하며, 오경과 신명기 역사의 기록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심 내용을 다루며 신명기 역사의 창조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또 계속 오경 신학과 문학 자 료를 언급하면서 역대기 역사까지 다루어 나간다.
김찬국은 그의 강의 노트에서 계속하여 구약역사 전반의 기록과 역대 기 역사 편집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 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창세기 2:4절 후반부터 시작한 야웨기자 (Yahwist)의 창세기 설화 설명을 하면서 찾아 이미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세시대, 족장시대, 모세 시대의 역사를 새 기록에다가 새 로이 역대기를 편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창조 되며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주전 550년 후부터 주전 200년까지 사이에 신명기 역사가들은 역사 편집서의 네 가지 역사(JEDP)를 편집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심 기록 시대는 에스라 시대이다.
그 시대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제사장(P)문서를 중심해서 가나안 침입시대 역사를 새로이 기 록한 것이 역대기이며 에스라-느헤미야서 역사로 나타났다고 소개한 다.39)
역대기가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종말론적 상황이 짙은 문서라는 사 실을 통해 당시의 한국 상황이 이렇게 어두운 역사가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40)
39) Ibid., 7-122.
40) 이윤경, “역대기사가의 분열왕국 전쟁기사에 나타난 전쟁이데올로기,” 신학사상 156 (2012), 9-41.
김찬국은 바벨론 혼돈의 시대가 역사적 창조의 시대로 구약의 오경역사와 신명기 역사, 역대기 역사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종합 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를 학문적으로 꿰뚫어보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 고 있다.
이는 오늘 현대의 구약신학과 구약학, 구약 역사서가 이뤄낸 결 과라고 보지만 이미 1950년대 초반에 뉴욕에서 김찬국은 우주적 차원에 서 이미 구약학의 세계를 통찰력 있게 공부하고 있었다.
한편, 신명기 역사의 신학적 문제를 신앙의 차원에서 다룬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 기록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만을 기술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역사 기록을 통해서 다른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 이다.
그 신명기 목적이 신앙적 충성, 신앙적 토라 순종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래서 신명기 역사 기록에 있어서 기사를 생략을 하거나 때론 기록 을 하거나 때론 보충하거나 왕실 전설과 같은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더 풍 부하게 역사를 해석해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명기적 사가의 문체가 명확히 드러났다.
그것은 세계사가 세계 심판이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 명을 주로 신앙선조의 죄 때문에 포로된 것임을 보이며 그러한 심판의 결 과는 신앙의 문제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거룩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았다.41)
41) 김찬국, 구약신학 노트, 강의록, 7-122.
놀라울 정도로 신명기 역사의 신학적 문제를 자기 역사 이해로 소화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계속하여 신명기 역 사가의 역사 기록 목적과 상황을 말하며 오늘의 한국 역사의 상황을 회상 하며 전망하도록 하고 있다.
“신명기 역사 기록 안의 여러 부분은 과거의 역사를 신앙적으로 고찰하여 기록하려고 한 것이며 신명기 작가는 신앙 적 석방 회복과 동시에 기복적 내용을 가지고 포로시대에 어떻게 하면 되 는가 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설명이 많은데 그것은 매 번 희망의 내용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종 다윗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여러 번 사죄(赦罪)를 받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왕상8:25,11:34, 15:4; 왕상 3:6, 8:25, 11:25, 엘로힘(Elohistic)적인 것은 출14:31, 민 12:7,8, 신3:5등). 하나님의 종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이스라엘에 게서 떠나지 않는다 한다(삼하7장). 우리는 이 신명기 학파의 마지막 기록 으로 왜 여호야긴이 바벨론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어 명예를 회복 하게 되었는가 하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포로의 때에 있으며 다윗시대를 연상했으며 동시에 국가의 황금시대가 시작되는 때라 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큰 신명기적 역사 기록에는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후 한 세기 동안에 계속해서 신명기적 역사가적인 기록 단편이 추가되어 있음을 기술 할 수 있다(신16:8-17, 20:1-9율법, 31:16-22,30의 모세의 노래)”42).
이토록 바벨론 포로시대의 신명기 역사가는 다윗의 황금시대를 연상하며 역사를 기록하고 또 역사 를 전망하며 새 지평을 가지고 있다.
김찬국은 이를 통해 한국 역사의 암 흑시대를 어떻게 밝게 비추일 수 있는가 생각을 하며 새 예언적 개혁을 꿈 꾸고 있었다. 이후 구약신학 노트는 구약학의 전문적인 분야인 성서 고고 학 분야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고 기독교 윤리학의 대가인 라인홀드 니버 의 강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 주석적 문제도 자세히 언 급하며 마치 이 시대의 예레미야 같은 심정으로 구약의 참예언자 전승을 이어가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43)
바벨론 포로시대 전후의 이스라엘 역 사의 예언시대는 민중 신학적 중요한 전거(典據)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44)
다른 한편, 김찬국은 시대의 어려움의 와중(渦中)에서 쿰란 문서, 사해 사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묵시문학 지평에서 역사의 전망을 바라보는 예언과 묵시의 역사적 차원을 알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종 말론적 지평을 열었다.
민영규 교수와의 대화는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 종파는 마카비 독립 운동 당시에 ‘의의 교사’로 창설된 종말론적 집단 이었다. 메시야가 와서 세울 천국의 날까지 준비하고 훈련했고 자신들을 구세군처럼 조직하여 훈련하였다.”45)
42) Ibid., 7-124.
43) Ibid., 8-10, 11-90.
44) 김경호 외 3인, 함께 읽는 구약성서 (서울: 한국 신학연구소, 1991), 214-257.
45) 김찬국, “예루살렘 입성기를 읽고,” 민영규, 예루살렘 입성기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6), 164.
더 나아가 김찬국은 기독교와 에세 네파의 관계성을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입장에 대해 구약학자의 이론을 소개 하며 자세히 다룬다.
“영국의 세계적 구약학자 로울리(H. H. Rowley)의 ‘모세로부터 쿰란까지’(1963)를 주로 참고하겠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은 사해 사본 연구의 총결산이라 하겠다. <메시야 사상> 사해 사 본에는 메시야 기대가 간직되어 있다. 즉 훈련교법서 9단 10행에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기대가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메시야 (다 윗계 메시야와 아론계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사독의’ 저술 9 단 21행에 에세네 종파의 창설자인 ‘의의 교사’가 죽은 후 40년 이내에 메 시야가 온다고 되어 있으니 이 ‘의의 교사’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제사장 아론계의 메시야 즉 제사장계 메시야(Priestly Messiah)를 기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구약에서는 메시야란 말이 ‘기름 부음 받은자’로 왕이나 제 사장에게 사용되었지만 다윗계 지도자를 기대하는 데에 메시야란 말이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쿰란 집단은 제사장 계열의 메시야를 기대 한 것 같다.”46)
묵시문학의 전망에서 메시야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살폈고 이를 구약역사와 한국 역사의 융합의 지평으로 이 끌어가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연구의 근원은 이미 1957 년 3월에 사해사본에 나타난 쿰란 신학의 논문에서 에세네파와 쿰란 신학 의 내용을 살피고 있다.47)
46) Ibid., 165-166.
47) 김찬국, “사해사본에 나타난 쿰란 신학,” 신학논단 3, (1957), 53-67.
이는 묵시문학적 지평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한국의 현실에서 묵시문학적 전망을 예견하고 있었다.
김찬국은 민영규 교수와 쿰란 종파와의 토론을 통해 학문적 입장은 달 랐지만 메시야 기대를 추구하는 믿음의 공동체와 의의 교사, 예수 그리스 도의 죽음과 부활은 한국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할지 모색하고 있었던 것 이다.
“나는 민 선생님이 쓰신 <사해문서의 쿰란 유적을 찾아서(10회)>를 읽은 독자로서만 아니라 쿰란 동굴지역에 가 본 일은 없지만 사해 동북쪽 연안 부근에 있는 쿰란 지역 동굴에서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 연구 동 태에 관해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왔었다. 민 선생님이 가정하신 예수의 에 세네파(Essenes) 종파 출신설에 대해서 내가 조사한 자료에 의한 견해를 소개해 보는 것도 성서학도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 여 몇 차례에 걸쳐 <쿰란 종파와 기독교 기원>에 관해 소개해 보고자 한 다.”48)
김찬국은 예수가 에세네 종파 출신설을 주장하는 민교수에게 대 해 그것은 지나친 주장이라고 하며, 민영규의 글을 다 다루고 나서 ‘이상 으로 에세네 종파와 기독교 기원을 비교하고 그 차이점을 들어보았는데 요는 양자 사이에 근사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을 지나치게 쿰란 화, 에세네화 하는 시도와 가정이 무리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 해사본 연구를 한 결과, 에세네종파의 제도 생활과 종교 사상을 연구하여 기독교 신앙과 비교 연구하는 데에는 새로운 자극을 끼치며 그 영향력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에 큰 공헌을 남겼다고 말한다.49)
예수와 에세네파 의 관계를 토론하며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의의 교사가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다른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예 수를 추종할 사람들이 신약에서 신학적으로 만민을 위한 대속을 위해서 죽었다고 의미화하고 있지만 쿰란 에세네 종파에서는 의의 교사의 죽음 에서 그런 속죄적인 의미를 발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50)
48) 김찬국, “예루살렘 입성기를 읽고,” 163-164.
49) Ibid., 175-176.
50) Ibid., 168.
김찬국은 예 수의 에세네파 관련을 부정하지만 정의의 교사 문제나 메시아 죽음의 문 제를 토론하면서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쿰란종파의 에센파가 당하는 의 의 핍박을 자신의 고난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는 성서와 현실에서 구약신학의 내용을 살피고 그 정의와 자유의 핵 심을 파악하고 현실화 작업을 한다.
그래서 그는 신명기 역사에 나타난 민 주주의(성서가 말하는 민주주의)를 다루었는데 그것이 구약역사를 바라 보는 중심 관점이 되었다. “이처럼 성서에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가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다.
그 원리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구약의 예언자 들은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왕들의 불법과 억압에 대결해 싸우면 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해 왔었다.
앞에서 본 신명기 정신은 신명기적 민 주주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신앙적 질서를 우선으로 하는 민주 주의적 과제와 실천이 오늘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도 실천되어지기를 절 실히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해방 후 역사에서도 신명기 역사가가 평한 바 있는 그 원칙에 합당한 정치가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히스기야, 요시야 왕 같은 정치인이 나타나서 한국 사회 전체를 정의와 평화로 이끌 수 있고, 민주주의의 근본인 백성(民)을 높이 받들고 사회발전을 가져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51)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공안 정치 시대에 사회의 정 의를 주장하는 아모스와 미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 전통에 서서 올곧게 예언 말씀을 전하는 모습이다.
또한 인간 변호사 한승헌은 한국 민주화 운 동의 성직자로서 ‘자애롭고 매력 있는 성직자’라는 평가를 하는 분으로서 민주화 운동의 한 복판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의로운 주의 종이 었다고 말한다.52)
51) 김찬국, 성서와 현실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298.
52) 한승헌, “법이 있는 풍경,” 김찬국과 111인, 나의 삶 나의 이야기2 (서울: 도서출판 연이, 1997), 284-289.
김찬국의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한국 역사를 해석하는 도 구이며 성서의 역사가 곧 한국 역사를 보는 안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남북통일이란 민족적 과제가 오랫동안 분단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 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남북 분단의 역사적 비극과 상 처를 씻고 아물게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현실을 말하며 이러한 역사를 해결해야 한 시점에 처해 있다고 한다.
1988년 6월 10일 학생들의 통일을 위한 대행진은 민간 차원에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도 결국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북 학생 체육 교류 등을 비롯한 7·7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 은 큰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사의 희망적 전개를 낙관하기도 한 다.
이제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사가 보여주고 있는 남북 분열 로 인한 분단 왕국의 실태 및 통일의 염원과 실천이 강대국들의 외세 때문 에 좌절되어 버렸던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과 결과를 더듬어 보면서, 그 역사적 교훈에서 오늘날 한국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과제 해결에 필요한 새로운 교훈과 전망을 얻어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53)
53) 김찬국, 성서와 현실, 262.
이처럼 늘 김찬국은 성서와 현실이라는 두 과제를 염두에 두면서 항상 한국이라는 역사적 현 장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였다.
또 한국적 구약 신학화 작업을 하며 살아 있는 구약학 연구를 하고 예언자적 상징적 행동처럼 그도 역사와 삶의 현 장에서 예언을 실천하며 살았던 한국의 민중 신학자이자 예언자였다.
V. 나가는 말
지금까지 김찬국의 역사 신학을 그의 석사·박사 논문과 구약신학 노 트를 중심으로 구약 역사서를 연구하였다.
그의 구약신학의 출발점은 구 약의 정의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마틴 루터와 같은 종 교개혁의 신앙심과 정의감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역사에 대한 역사관을 형성하였다.
또한 제2이사야 연구를 통한 창조전승의 역사 연구는 시대 의 암흑기인 바벨론 포로기라는 시점에서 어떻게 역사의 창조적 사고와 창조적 역사 해석을 하였는지, 그를 통해 현재의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 는 원동력이 되었는지 연구하였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김찬국의 역사의 식의 씨앗과 전개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정의감과 역사의식을 찾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구약 전체의 역사기록과 해석을 하 며 이를 통해 민중 신학을 추구하는 결과로 도출되었다.
과거 구약학 연구 의 동향의 중심지 중 하나인 뉴욕 유니온에서 세계의 석학들과 같이 호흡 하던 때의 구약신학 노트를 통해 어떻게 구약신학과 구약역사서, 기독교 윤리와 예레미야서 주석 등의 학문적 논의를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씨앗 이 구약 신학적 학문이었고 그 연구의 편린을 통해 그 동력이 한국 사회와 민중의 아픔을 체휼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정의의식이 발아되어 사회의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삶과 실천이 되었음을 고찰하게 되었다.
역사의 식의 중심에는 정의와 자유라는 두 축이 있었고 거기에는 정의에 민감한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으로 그는 조국을 위해 눈물 흘리는 한 민중 신학자 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민족의 역사가 4289년(1956년 뉴욕 유학기), 4291년(1958년)등으로 표기하며 예레미야서 주석 강의서에 서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한민족의 역사의식에 얼마나 투철하였는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54)
54) 김찬국, 구약신학 노트, 강의록, 11-14.
구약 역사서 해석에는 ‘예 언과 역사, 정의’가 역사의 해석의 원리이며 구약 역사서를 푸는 해석방법 은 역사적 배경에서 종교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 사회적 배경을 세 축에서 함께 분석하여 그 시대를 파악하고 역사적 해석을 도출하였다.
그래서 시 대의 민중들의 해방정신을 찾아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과 억압을 해방하 는 신학을 찾아내고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예언자로서 불의의 정권에 맞서는 용기 있는 신학자였다.
이것은 제2이사야의 창조전승에서 예언자 정신을 찾았고 구약 성서에서 구약역사 정신인 정의를 찾아서 어두운 한 국 근대사의 정의의 예언자로서 한국 민주화의 뿌리가 되었고 정신적 지 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민중 신학자의 3대 인물로 거론되며 10 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다시 제자들의 사표가 되어 이 시대를 밝히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김찬국의 민중 신학의 출발점은 그의 역사의식, 구약 역 사서 신학, 그리고 구약역사의 예언자 신앙과 정의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주제어 : 김찬국의 역사 신학, 구약 역사서, 3대 한국 민중 신학자, 역사의식, 역사해석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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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Historical Theology of Chan Kook Gim -Focused on the Old Testament Historical Book
Shin-Bae Park, (Ph.D. Professor, Old Testament KC University)
This thesis is to study the theology of Chan Kook Gim with the em- phasis on 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 Historical Books. We focused on the dimensions of the History and the Prophets as he is able to distinguish the historical idea from the prophets. His views always include the Prophetic perspectives through the Old Testament. We will examine his understanding of the Old Testament History and the Old Testament Historical Books (i.e. Deuternomistic History, Chronicle History). We will also explore his actions and the applications in that place of life. The method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will be considered in three aspects; in the religious, political, and social background. He was the embodiment of the indigent people and played the righteous prophet role. His theology is presented through the analysis of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Text, Sitz im Leben. This thesis also is to clarify Chan Kook Gim as being one of three 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Min Jung Theology. We will examine to study the interpretation of Old Testament History and Old Testament Theology through his Minjung Theology, the Th. M. Thesis, Ph. D Dissertation, and the note of Old Testament Theology of 1956, We will find the seed of the righteous of the Old Testament Theology, focusing on the creative thinking of Babylonian Period Book (Deuteronomist), as well as obtaining the consciousness of the history in the Old Testament in the Historical text and the Interpretation of Min Jung Theology. His theology focuses on the social justice, the axis of the Prophet, and 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 Justice. The points of his study is the principal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Therefore, the conclusion is the key person of the Min Jung Theology Paradigm with Chan Kook Gim Theology as the starting point in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ld Testament Historical Theology, and Prophetic Justice. ∙
Keywords :The historical theology of Chan Kook Gim, The Old Testament Historical Book, The key man of Korea Min Jung Theologians,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The principal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투고접수일: 2019년 04월 05일 ∙ 심사완료일: 2019년 08월 24일 ∙ 게재확정일: 2019년 09월 09일
신학논단 제97집(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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