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기독교 전통은 구원의 궁극적인 모습을 “죽은 자들의 부활과 다가오 는 세상에서의 삶”(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혹은 “몸의 부활과 영생”(사 도신경)으로 표상한다.
이 표상에서 몸의 부활은 영생으로의 부활을 뜻하 고, 또한 다가오는 세상에 부활의 몸이 참여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여 기서 부활의 몸이 참여하게 될 ‘다가오는 세상’은 소위 ‘영적인’ 세상이 아 니라, 지금의 땅과 하늘의 만물이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계 21:1-5), 만물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님이 되시는 세상(고전 15:27-28), 속량 받은 부활의 몸뿐 아니라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른 피조물도 함께 참여하는 세상(롬 8:21-23)을 지시한다.
이처럼 기독 교 전통에서 구원의 궁극적인 모습이 ‘몸’과 ‘세상’ 등 신체적, 물리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가들이 구 원의 신체적, 물리적 차원에 대한 본격적으로 관심 두기 시작한 것은 비 교적 최근의 일이다.1)
다른 한편 20세기 후반부터 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활발해지기는 했지만, 몸과 마음(영혼)의 관계에 관한 인간학적 관심에 머물거나2) 억압 이나 차별, 질병이나 장애 등 현세의 관점에서 몸을 논하는 경우가 대부 분이고,3) 부활 등 종말론적 주제에 관한 논의는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 이다.
사실 근대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몸의 부활은 여전히 난해하 고 당혹스러운 주제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제기된 질문—“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은 오늘날에 도 여전히 적절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4)
1) 이것은 몸과 물질을 경시하는 고대 그리스 전통의 영향이 그동안 기독교 전통 안에서 얼마나 크 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메리 티모시 프로크스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몸을 경시하게 된 다양한 역사적 배경을 분석한다. Mary Timothy Prokes, Toward a Theology of the Body (Grand Rapids: Eerdmans, 1996), 제1장.
2) 20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성서학자와 조직신학자와 과학신학자 들이 영육이원론을 극복하는 전인 론적 인간 이해를 주장했다. 그중에서 일부 신학자들은 단순히 인간학적인 관심을 넘어서 몸 자체 를 독립적 주제로 진지하게 다루거나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지는 신학적, 윤리적 함의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각주 3을 참고하라.
3) 오늘날 몸을 독립적인 신학 주제로 다루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신학자들과 생태신학자들이 다. Stephanie Paulsell, Honoring the Body: Meditations on a Christian Practice (San Francisco: Jossey-Bass, 2003); Elizabeth Moltmann-Wendel, I Am My Body: A Theology of Embodiment (New York: Continuum, 1995); Mary Timothy Prokes, Toward a Theology of the Body; 도리스 스 트람/ 김상임 옮김, “여성들의 몸의 치유와 구원,” 『한국여성신학』 제39호 (1999/가을), 67-78; 전 현식, “성육신 신앙의 몸 현상학, 몸 신학적 이해,” 『신학논단』 56 (2009/6), 339-361; 전현식, “녹색 몸 신학의 방법론적 탐구,” 『신학논단』 64 (2011/6), 175-203 등을 참고하라. 그밖에 치유선교적 관점에서 그리고 생명공학의 도전 앞에서 몸을 다루는 논의도 주목할 만한다. 예를 들어, 채수일, “생명의 영과 몸의 신학: 선교신학의 시각에서,” 『신학사상』 124 (2004/3), 7-28; 강성영, “생명공 학과 몸의 윤리,” 『신학사상』 124 (2004/3), 29-54 참고.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와 별개로 일 찍이 1970년대 말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도로 ‘몸의 신학’을 전개해 왔다. 앤서니 퍼시/ 김한 수 옮김, 『쉽게 쓴 몸의 신학』(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Prokes, Toward a Theology of the Body 참고. 부활의 몸보다 현세의 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들의 논의와 관련해서 필자는 별 도의 연구를 기획하고 있다.
4) 현대적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 어, 최태영은 부활의 몸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면서,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몸을 포함한 전인의 부활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현세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의 물질적 연속성에 대한 통속적인 이 해의 오류를 적절하게 비판하지만, 여전히 현세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의 연속성의 구체적 내용 에 관해서는 거의 논의하는 바가 없다. 최태영,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몇 가지 오해,” 『신학사상』 135 (2006/12), 99-124.
이 글에서 필자는 몸에 대한 최근의 인문 사회 과학적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몸의 부 활 교리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하면서, 구원의 신체적, 물리적 차 원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 논의를 심화시키고자 한다.
Ⅱ. 몸의 현상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ruch Zarathustra)에서 프리 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플라톤 이래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주장해 온 서구 전통의 뿌리 깊은 몸 경시 사상에 맞서 선지자와 선각자 의 이름을 빌려 “나는 육체가 전부이며 육체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리고 영혼은 육체 안에 깃들인 그 무엇이다.”고 주장했다.5)
나아가 니체 는 몸(육체)을 “커다란 이성”, ‘정신’을 “조그마한 지성”이라고 부르면서 후자를 전자의 “조그마한 도구요, 또한 장난감”이라고 말한다.6)
이것은 몸을 영혼의 도구로 보아온 서구 전통의 선입견을 거꾸로 뒤집는 주장이 었다. 아마도 19세기 말 니체의 이 같은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영혼에 대한 몸의 우위를 주장한 니체의 주장은 몸에 대한 다양한 현상학적 설명을 통해 폭넓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7)
5) 프리드리히 니체/ 김지원 옮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서울: 고려출판문화공사, 1991), 32. 정화열은 니체의 몸의 정치를 “플라톤 이래 아주 오래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론적 관 조의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한다. 정화열/ 박현모 옮김, 『몸의 정치』(서울: 민음사, 1999), 240.
6)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61-62.
7) 장문정은 근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심신일원론에서 신체일원론으로 ‘신체로의 전회’가 일어났다고 분석한다. 장문정, “심신이원론에서 선험적 신체일원론으로: 멘느 드 비랑에서 메를로-퐁티까지,” 『대동철학』 35 (2006/6), 171-214 참고.
‘모든 것의 뿌리’, ‘모든 것의 원리’를 찾아 ‘사태 자체로’(Zur Sache selbst) 돌아가는 현상학을 창시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초 창기 의식이 언제나 모종의 의미를 지닌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 실에 주목하여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 ‘지향성’을 현상학적 탐구의 근 본 사태로 규정하고 ‘엄밀학’을 추구했다.8)
후기에 접어들어 후설은 의식 의 지향성보다 더 근원적인 지향성을 발견하고 지향성의 발생 과정을 추 적하는 ‘발생적 현상학’을 발전시켰다.9)
8)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후썰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서울: 서울대 학교출판부, 2004), 89-93 참고.
9) 후설의 후기 발생적 현상학에 대한 이남인의 간략한 소개글을 참고하라. Ibid., 256-267. 이남인에 따르면, 후설은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의 전통에서 서 있지만, 객관주의적 사유의 영향으로 과학의 가능 근거만 파고든 칸트와 달리, “과학적 세계의 토대가 되는 생활 세계 및 과학적 사유의 밑바탕 에서 작동하는 원초적 삶의 영역”을 현상학적 탐구의 근본 사태로 규정했다. 이남인, 『후설과 메를 로-퐁티: 지각의 현상학』(파주: 한길사, 2013), 89. 이남인은 후설의 ‘생활 세계’와 메를로-퐁티의 ‘지각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후설의 후기 발생적 현상학이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Ibid., 87-98.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등 이후의 현상학자들은 언어와 반성 이전 선술어적, 선 반성적 세계 경험에서 인간 현존재의 보다 근원적인 사태를 발견하고 그 사태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정신이나 의식보다 몸(신체)이 더 근원적인 사태로 드러났다.
현상학자들은 인간 의식의 지 향성 이전에 그 발생 근원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술어적, 선반성적 차원의 세계 곧 ‘생활 세계’(후설)를 발견하고, 생활 세계의 중심이 지금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나의 몸이라는 점에 주목했으며, 따라서 ‘세계내-존재’(하이데거) 혹은 ‘세계로의 존재’(메를로-퐁티)로서 현존재가 생활 세계에서 대상과 관계하는 지향적 관계 곧 몸(신체)의 지향성이 현상학적 탐구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현상학적 탐구에서 말하는 몸은 해부학이나 생리학에서 연구하는 몸 과 다르다. 해부학이나 생리학은 우리의 몸을 우리의 의식은 물론 세계 로부터 몸을 고립시켜 그것을 객관화, 대상화, 탈인격화한다.
따라서 말 하자면 몸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세계 내 많은 사물 중 하 나가 된다. 하지만 현상학적 탐구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살아있는 몸’ (living body) 혹은 ‘삶으로 살아낸 몸’(lived body)이자 누군가의 ‘고유한 몸’(one’s own body)로서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면서 세계와 주관을 구성하 는 근원적인 혹은 초월론적 토대로서 드러난다.10)
말하자면 나의 몸은 세계 내 존재로서 내가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의 근본 조건이다.
나는 나의 고유한 몸을 통해 세계 안에서 세계를 향해 실 존하고, 고유한 몸을 통해 세계 내 사물들은 물론이고, 다른 몸을 가진 다른 주관들과 몸을 통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세계와 몸은 서로를 침투하고 서로를 형성하는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 뗄 수 없이 결합해 있 다.11)
10) 강미라, 『몸, 주체, 권력: 메를로퐁티와 푸코의 몸 개념』(서울: 이학사, 2011), 14, 17-18 참고. 예 를 들어, 메를로-퐁티는 객관적 몸을 비롯한 객관적 세계의 발생 근원이 지각하는 몸(신체)에 있 음을 주목하고, 몸(신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지각의 현상학을 발전시킨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류의근 옮김, 『지각의 현상학』(서울: 문학과지성사, 2002), 128-130 참고. 스웨덴 신학자 올라 시 구르드손(Ola Sigurdson)의 다음 글을 참고하라. “사람의 신체화(embodiment)는 기독교 인간론 의 구성적 요소이다. 몸은 단순히 사람의 생물학적 구성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 사람이 세계 및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조건이다. 바로 그 사람의 세계-내-존재 방식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도 실현된다. (중략) 따라서 몸은 사람의 관계성의 매개체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주관성으로부 터 독립적인 매개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주관성을 구성하는 매개체로서, 그 사람의 관계성을 위 한 일종의 준-초월론적 조건이다.” Ola Sigurdson, Heavenly Bodies: Incarnation, the Gaze, and Embodiment i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16), 570.
11) 메를로-퐁티를 비롯해 많은 현상학자는 환각지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의 현상학적 의미를 탐구한 다. 생리학이나 심리학과 다른 현상학의 설명에 따르면, 절단된 팔은 단순히 신체 일부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신체 일부와 연관되어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세계의 상실을 내포하고 있다. 강미라, 『몸, 주체, 권력』, 46.
나의 고유한 몸을 통해 세계가 나의 일부가 되고, 나는 세계의 일부 가 된다.
나의 몸은 시간 속에서 세계와 얽혀 들어가면서 세계에 적응하 는 동시에 세계를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킨다.
‘세계로의 존재’로서 몸은 단순히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이처럼 몸은 우리가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방식이자, 우리가 세계와 소통하는 고유한 매체 이다. 몸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계 속에 존재하며, 몸이 없다면 우리 가 어떻게 세계와 소통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내가 몸을 소유하고 있 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나의 몸이다.12)
혹은 나의 몸이 곧 나다.
몸은 단순히 소유나 인식의 대상(객체)가 아니라, 지각과 존재와 소통의 주체 다. 다른 사람(주관)과의 만남은 언제나 나의 몸과 상대방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몸을 통하지 않는 상호 주관적 관계는 없다. 그리고 몸은 항 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모든 관계를 떠난 우리 실존도 생각할 수 없다. 현상학적 탐구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신체화된(incarnate/embodied) 존재이자 관계적(relational) 존재임을 밝혀 준다.
몸과 몸을 통한 관계가 인간 실존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하여, 최근의 몸의 현상학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우리 몸이 우리가 몸으로 산 삶의 모든 경험과 관계를 ‘기억한다’ 는 것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미셀 앙리(Michel Henry)는 과거의 일을 회 상하고 재현하는 의식 차원의 기억과 구분되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기억으로서 ‘몸의 기억’(corporeal memory), ‘기억에 남지 않은 기억’(immemorial memory), ‘나의 원초적인 신체성에 새겨진’(inscribed in my original corporeity) 기억에 대해서 언급한다.13)
12) Paulsell, Honoring the Body, 16-21.
13) Michel Henry, Incarnation: A Philosophy of Flesh, trans. Karl Hefty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15), 144-145.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자전거를 탄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 도 나의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몸으로 산 삶의 모든 경험과 관계가 우리의 몸속에 기억되고 새겨진다는 통찰은 인간 실존의 신체성과 관계성에 더하여 시간성과 역 사성과 유연성에 대하여 중요한 진리를 전달한다. 이 땅에서 몸으로 사 는 한 사람의 삶은 모태에서 시작해서 죽는 순간에 끝이 난다. 탄생과 죽 음 사이에서 사람의 몸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매 순간의 경험과 관계가 그저 잠시 생겼다 금방 과거 로 사라져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는 몸에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 다. 일정한 기간 꾸준한 운동은 튼튼한 몸을 남기고, 나태와 방종은 허약 한 몸을 남긴다. 완벽한 피겨 스케이팅 연기는 오랜 기간 훈련된 몸이 몸에 익숙해진 스케이트화를 신고 있을 때 가능하다.
평생 숙련된 몸은 캄 캄한 밤에도 정교하게 떡을 썬다.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는 한순간에 만 들어지지 않는다.14)
14) 김정형, 『예수님의 눈물』(서울: 복있는사람, 2019), 192.
사람의 몸은 어느 한순간에 완성에 이르지 않고, 모 태에서부터 삶의 모든 순간의 경험과 관계를 그 속에 ‘기억하고’ ‘새기며’ 죽음의 순간까지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이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이 몸으로 살았던 삶의 모든 경 험과 관계를 기억하고 있는 몸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몸이 세계 안에서 세계를 향해 실존하고, 우리 몸이 사물 및 타 자와 관계를 맺는 능동적 주체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경험과 관계 가 우리의 역동적인 몸속에 기억되고 새겨진다는 이상의 현상학적 통찰 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몸의 구원 및 몸의 부활에 관한 최근의 신학 적 논의와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함의를 갖고 있다.
Ⅲ. 몸의 사회학
몸의 사회학은 인간 실존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현상학적 탐구와 다른 차원에서 우리 몸에 대한 신선한 통찰을 제공한다. 최근 사 회학은 사회적 관습이나 규율 혹은 환경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형성하고 변화시키는지를 밝혀냄으로써 우리 몸이 세상과 긴밀하게 얽힌 역동적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15)
15)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는 몸이 사회에 의해 형성되고 구속되고 심지어 창조된 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Chris Shilling, The Body and Social Theory, 3rd ed. (London: Sage, 2012), 75.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살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가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 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16)으로서 사회 역학을 전공하는 연구 자 김승섭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사회적 경험이 우리의 몸속에 새겨진다 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직장 내 차별의 경 험과 남학생들이 겪은 학교 폭력의 경험에 대한 연구 결과를 분석한 다 음, 김승섭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다음 그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보다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고도 그 경험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더 많이 아프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 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 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 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17)
또한 김승섭은 모태에서의 영양 결핍이 성인이 되었을 때 만성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며 사회적 경 험이 인간의 몸에 새겨진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피력한다.
김승섭에 따 르면 우리는 모두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 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다양 한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 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다.18)
16)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서울: 동아시아, 2017), 5-6.
17) Ibid., 22.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18) Ibid., 44-45. 또한 김승섭은 해부학의 역사에서 20세기 초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주검을 주로 해 부학 연구에 사용함으로써 신장 위에 있는 부신 조직의 정상적인 크기에 대한 잘못된 해부학적 지식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930년대까지도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많이 사용하면 근육 세포가 커지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몸에서 일상적으로 코르티솔이 더 자주 더 많이 분비되 면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진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Ibid., 53.
요컨대 과거 우리가 경험했던 차별 이나 폭력의 경험, 가난과 스트레스 등의 경험은 우리가 의식을 통해 기억하거나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선술어적, 선반성적 차원에서 우리 몸속에 깊이 새겨져 남아 있다가 질병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회 역학자로서 김승섭의 연구는 주로 질병에 초점을 맞추어 몸에 새겨진 부정적 흔적들과 기억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회적 경험이 몸에 새겨진다는 그의 기본적인 통찰은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경험과 관계로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차별이나 폭력이나 가난 등의 부 정적 사회 경험뿐 아니라, 칭찬이나 격려나 풍요 등의 긍정적 사회 경험 역시 언어와 반성 이전에 선술어적, 선반성적 차원에서 우리 몸에 새겨 진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김승섭을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주로 사 회적 경험이 인간의 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 에 불가불 몸의 수동적 측면을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앞서 살펴본 현상 학자들의 통찰은 주변 세계와 관계하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몸의 능동적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사회학자들의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19)
19) 강미라에 따르면, 오늘날 몸에 관련된 담론은 “몸을 능동적으로 삶을 전개하는 주체로 보는 담론 과 사회적-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담론으로 양분된다.” 강미라, 『몸, 주체, 권력』, 16. 하지만 강미라는 이 두 가지 담론이 서로 대립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메를로-퐁티와 푸코의 몸 개념을 비교 분석하면서 두 가지 담론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몸을 우리 자신이 겪는 살아있는 ‘고유한 몸’이며 능동적인 몸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지 역사적으 로 각인된 것이며 외적 작용에 수동적인 물질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 몸주체와 몸-권력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닌 대화 가능한 개념이다.” Ibid., 229.
우리 몸이 단순히 한순간의 삶이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삶을 기억하 고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몸’의 부활은 단순히 죽는 순간의 몸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의 지난 모 든 삶이 새겨진 몸의 영광스러운 변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판단하기에 ‘삶으로 살아낸 몸’ 곧 삶의 모든 기억을 간직한 몸에 대한 최 근의 인문 사회 과학적 통찰은 몸의 부활 교리에 관한 현대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아래에 소개할 두 현대 신학자가 제시한 부활 교리 해석에 대한 현대인들의 이해 가능성을 제고시킨다.
Ⅳ. 몸으로 구현된 전인적 구체적 인격의 부활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현상학과 사회학의 몸 이해와 공명하는 몸 의 부활 교리를 발전시킨 현대 신학자 중 한 사람은 로마 가톨릭 교의학 자 기스베르트 그레스하케(Gisbert Greshake, 1933- )다. 그레스하케는 지 난 세기 그리스 전통의 영혼 불멸 사상과 구분되는 히브리 전통의 몸의 부활 사상을 복원하려는 현대 기독교 사상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몸의 부 활 신앙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 설명하려고 시도한 다.20)
몸의 부활에 관한 설명에서 그레스하케가 가장 강조하는 점 중 하나 는 죽음의 극복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몸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소망은 사멸적 몸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영혼이 고유한 능력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그리스의 영혼 불멸 사상과 근본적 차이를 드러낸다.21)
20) 기스베르트 그레사케/ 심상태 옮김, 『종말신앙: 죽음보다 강한 희망』(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0), 특히 90-99. 심상태는 저자의 성(Greshake)을 ‘그레사케’로 번역했지만, 이 글에서는 독일 어 발음법에 따라 ‘그레스하케’라고 번역했다.
21) Ibid., 91.
몸의 부활을 인간 구원의 궁극적 모습이라고 할 때 그레스하케의 이 같은 주장은 구원론의 핵심에 자리하는 은총 교리를 다시금 강조하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레스하케가 볼 때 기독교의 몸의 부활 교리가 그리스의 영혼 불멸 사상과 구별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영혼뿐 아니라 몸을 포함한 전인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에 참여할 것을 소망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는 궁극적 구원은 인간의 일부의 완성이 아니라 전인의 완성이라는 점 을 강조한다.
‘나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중략) 여기에 당시의 문화 세계와 그 세계가 선포하는 새로운 희망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의 항변이 보인 다. 인간의 일부만이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전인인 인간과 그의 육신의 힘에 의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 세계 도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22)
22) Ibid., 92.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레스하케가 그리스 전통의 영육 이원론을 거 부하고 심신일원체로서의 전인 인간론에 기초해서 몸의 부활을 ‘육신을 가진’ 전인의 완성으로 설명할 뿐 아니라,
몸의 부활과 함께 몸을 통해 (‘육신의 힘에 의하여’) 연결된 피조 세계 전체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다는 사 실이다.
그레스하케가 내다보는 구원의 궁극적인 모습은 몸으로부터 분 리된 영혼이 불멸하는 것도 아니고, 피조 세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개별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몸을 포함한 전인이 몸을 통해 관계 맺은 전체 세계와 함께 완성에 이르는 것 이다.
이처럼 그레스하케가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유기적으로 결합 하는 방식으로 몸의 부활 교리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몸과 영혼이 뗄 수 없이 결합해 있다고 보는 전인적 인간 이해에 더하여 인간이 몸을 통해 창조 세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실재 이해가 그 배경에 전 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레스하케의 이러한 인간 이해와 실재 이해가 구원의 궁극적 지평을 공시적 차원에서 창조 세계 전체로 확장할 뿐 아니라, 또한 통시적 차원에서 전인의 삶의 역사 전체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죽음을 초월하는 새로운 생명 곧 영생에 참 여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주체성(영혼)이 아니라 ‘전인적 구체적 인격’ 이다. 그레스하케는 이 ‘전인적 구체적 인격’을 설명하면서 “세계와의 교 제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 라고 말한다.23)
그는 현상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현상학적 통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부활에 참여하는 ‘몸’으로서 이 ‘전인적 구체적 인격’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구조에는 육신과 물질세계가 항상 집약되어 있다. 세계의 한 부분이 우리 인간 안에 승화된 형태로 계 속 존재하고 있다. 연로한 얼굴의 주름살 속에 온갖 삶의 역사가 기 록되어 있듯이, 인간 역사 속에 되찾아낼 수 없는 ‘그의’ 역사와 세계 가 담겨져 있다. 신앙인이 하느님은 자기를 죽음 속에서도 버려두지 않고 온갖 미래가 끝장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그에게 보다 새롭고 더이상 능가할 수 없는 미래를 선사한다고 희망할 때, 이 염 원하는 미래는 차안 세계에서부터 피안 세계로 이주해가는 영혼만을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격체와 상관한다. 이 인격체 안 에는 세계의 한 부분이 영원히 수록되어 있으며 지양되어 있다. 인간 은 자신이 현세에서 이룩한 ‘시간의 수확’을 그의 죽음 속으로 가지고 간다. 육신과 세계와 역사가 죽음 속에서 탈피되지 않고 인간 속에서 영원히 내적으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희망은 영혼의 불멸성으로서 가 아니라 전인의 부활로서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표시되 어야 할 것이다24)
23) Ibid., 98.
24) Ibid., 99.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말하자면 부활에 참여하는 ‘몸’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몸(육체)도 아니 고, 죽은 몸(시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한 인격체’이다. ‘구체적인 한 인격 체’는 ‘연로한 얼굴의 주름살’처럼 한 사람의 몸에 기록된 그의 삶 전체를 가리킨다(‘시간의 수확’).25)
몸의 부활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최 종 순간뿐만 아니라, 자기 역사 전체를 다시 찾음을 의미한다.”26)
한 사 람이 이 땅에서 몸으로 살았던 삶의 모든 시간이 죽음을 거쳐 부활에 이 른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몸 삶은 불가불 세계의 일부를 그 속에 포함하고 또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기에, 죽음과 부활은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사 건으로 환원될 수 없다(‘육신과 세계와 역사’).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다가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해 보존되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맺은 세상 과의 관계이다. 우리 각자가 지속적으로 역사의 성격을 부각하듯이 각 개인의 역사는 지나쳐버릴 수 없이 다양한 요인과 자극에 의하여 형성되고 유지되고 침투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의 성 격을 형성되는 데 참여하고 우리의 구체적 모습 속에 영원히 지양되 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적 실재와 인간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개인적 사건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역사 속에 현존한다. 이렇게 부활에서 서 로의 관계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확인되는 것이다.27)
25) 김정형은 우리 몸의 이러한 특징을 도시 서울의 모습에 비유하며, ‘사십 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옛말의 뜻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한다. 김정형, 『예수님의 눈물』, 192-193. 도시 서울이 오랜 역사적 기억을 품고 있다는 생각에 관해서는 승효상,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 이는 도시』(서울: 돌베개, 2016), 44-45를 참고하라.
26) 그레사케, 『종말신앙』, 96.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27) Ibid., 101-102.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그레스하케는 개인과 세상의 상호 침투 및 상호 참여 관계에 대한 통 찰을 근거로 부활이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책상보의 비유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한다. “책상 보의 한 부분만을 잡아올려도 책상보 전체를 완전히 들어 올릴 수 있다. 책상보 전체가 다른 부분과 얽혀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각 자도 존재의 한 단편으로서 하느님께 되돌려진다.”28)
요컨대 그리스도인 들이 소망하는 ‘몸의 부활’은 인간이 자신의 전체 삶과 세계와 역사와 함 께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과정이자,29) 몸을 통해 공속 관계에 있는 개인 의 인생 역사와 세계의 역사 곧 “전체 실재가 사랑 속에서 충만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킨다.30)
28) Ibid., 102. 우리는 책상보의 논리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할 수 있다. 성육신이 하 나님의 아들이 피조 세계의 일부와 뗄 수 없는 상호 침투의 관계 속에 들어온 사건을 가리킨다 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과 뗄 수 없이 결합한 모든 창조 세계 의 부활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전 15:20-22 참고).
29) Ibid., 95.
30) Ibid., 102.
Ⅴ. 몸으로 산 삶의 역사 전체의 부활
그레스하케와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 신체성과 몸의 고유한 가치 를 강조하는 전인 인간론과 더불어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확장 된 몸의 부활 교리를 주장한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히브리-기 독교 전통의 전인 개념은 플라톤주의의 영육이원론이나 데카르트주의의 심신이원론과 다른 사상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일체로서 전인을 구성한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몸을 독 립적인 신학적 탐구 주제로 인정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31)
그 이유는 아마도 심신일원체로서 전인 개념을 단순히 긍정하지만, 몸에 대 한 마음(영혼)의 우위 사상을 여전히 고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몰트만은 몸과 마음 사이의 동등한 상호 작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심화시킨다. 이 점에서 몰트만의 인간 이해는 최근 현상학 및 사회학의 통찰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Gott in der Schöpfung)에서 몰트만은 프리 드리히 외팅거(Friedrich Oetinger)의 표현을 가져오면서 “신체성은 하나 님의 모든 활동의 종국(목적)이다”고 주장한다.32)
그 근거로 몰트만은 성 서적 전통에 호소하면서 창조, 화해, 구속 등 하나님의 경륜을 요약하는 세 가지 대표 활동 모두 궁극적으로 신체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설명한 다.33)
먼저 하나님의 세상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결단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활동을 거쳐 몸을 가진 피조물의 출현에 이른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는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을 통 해 하나님은 깨지고 상하고 병든 몸을 치유하고 존귀하게 하신다.
마지 막으로 하나님의 구속은 성령의 은사로 시작해서 영광스럽게 변형된 부 활의 몸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보는’ 시각적 경험에서 완성된 다. 몰트만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이처럼 신체성을 종국 으로 지향하는 창조, 화해, 구속의 우주적 드라마 속에서만 비로소 가능 하다. “우리는 물리적 창조에서 몸의 부활에 이르는 아치 안에서 인간의 진리에 관한 신학적 이해에 도달한다.”34)
31) 각주 3을 참고하라.
32)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옮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생태학적 창조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362.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 출처는 한글 번역서를 기준으로 하되, 인용한 글은 필자가 영 어 번역서를 참고하여 사역한 것을 활용한다. Jürgen Moltmann, God in Creation,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1993).
33)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364-365.
34) Ibid., 365.
몸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몰트만은 서양의 전통적인 인간론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인간 주체에 대한 신령주의적 이해와 인간의 몸에 대한 도구주의적 이해뿐 아니라, 영혼을 몸의 형식으로 보는 아리 스토텔레스주의-토마스주의의 인간 이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35)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 몰트만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인간론을 분석하면서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인간 이해를 극복했지만, 서양 문명의 신 령주의적, 도구주의적 인간 이해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6)
몰트만이 바르트의 인간 이해에서 가장 문제 삼는 것은 (몸과 영혼의 나눌 수 없는 통일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 및 영혼과 몸 사이의 불변하는 일방적 위계질서에 대한 바르트의 일관된 입장이 다.37)
이에 반해 몰트만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 대신 상호성의 관계를 핵 심으로 하는 인간 이해를 주장하며 “인간의 영혼과 몸, 내적인 것과 외적 인 것, 중심과 주변의 통일성”을 “언약, 공동체, 상호성, 상호 포월, 배 려, 동의, 조화, 우정” 등의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38)
35) Ibid., 363, 366 이하.
36) Ibid., 374.
37) Ibid., 374 이하. 몰트만에 따르면, 몸에 대한 영혼의 ‘지배’ 혹은 ‘통치’ 개념에 기초한 바르트의 인간론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역시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보는 그의 관점과 상응할 뿐 아니라, 성부의 지배와 성자의 순종 개념에 기초한 삼위일체론 및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계 경륜을 지배 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Ibid., 378-379.
38) Ibid., 383-384. 그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영혼’이나 ‘뇌’에 두는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영혼 의 우위’ 사상을 배격하며, 몸을 영혼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생각도 비판하다. 한 걸음 더 나아 가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 적용해서 설명한다. Ibid., 382.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 계에 대해 몰트만이 전통적인 군주론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평등과 상호 존중의 관점에서 그 관 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상호 존중과 배려의 페 리코레시스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 공동체는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tis)이 된다. Ibid., 383.
몸과 영혼의 상호 관계에 대한 몰트만의 이해는 영혼이 몸에 대해 일 방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몸 역시 영혼에 대해 고유한 영향을 미친 다는 점에 대한 그의 강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혼이 몸을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 역시 영혼을 강력하게 ‘형 성한다(inform).’ 몸은 계속해서 영혼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무의식이 계속해서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본능적인 것이 모든 자발적인 행 위에 늘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략) 몸 역시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혼의 의식에 말을 건다. 몸은 고유한 기 억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종종 영혼의 의식적인 회상과 충돌한다. 몸은 고유한 방식으로 본능적인 반응을 하며, 그것은 종종 의식적인 반응에서 유래하지만 그것과 다른 것을 표현한다.39)
여기서 몰트만이 영혼에 대한 몸의 관계를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관 계 및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본능’의 관계에 비유할 뿐 아니라, 몸의 ‘고 유한 언어’와 ‘고유한 기억’을 주장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몰트만 의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인간론에 대해 “남용된 몸의 편에서 저항할 권리”, “합리적인 영혼의 결정에 있어 감정이 발언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한편 지배하는 영혼과 순종하는 몸 사이의 조화를 당연하게 생각한 다고 비판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40)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에 대한 비판에 더하여 몸의 구원의 궁극적 모 습으로서 몸의 부활에 대한 몰트만의 사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 은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몰트만은 몸의 부활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이 보존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보 존되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한 인간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으 로 표시되는 모든 것” 혹은 “영혼이나 인격의 핵이나 내적인 정체성의 중 심점이 아니라, 삶의 모든 형태요, 삶의 모든 역사이며, 그의 이름이 나 타내는 인간의 모든 관계”로 묘사한다.41)
39) Ibid., 385.
40) Ibid., 376-377.
41)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옮김, 『오시는 하나님: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133.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몰트만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영혼’이나 인간 실존의 핵심이나 내면의 중심점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은 ‘영’(Geist) 개념을 인간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놓는다.
영은 몸과 영혼, 과거와 미래, 사회적인 관계와 자연적인 관계를 가 진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실현한다. (중략) 우리 안에서 생명의 영은 몸과 영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우리의 삶의 역 사에서 사회적 관계들의 상호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의 영’이 우리의 삶의 형태와 삶의 역사를 뜻한다면, 그것은 질적으로 우리 지체들의 총합보다 더 많은 우리 삶의 전체성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전체적 으로 살며, 전 인간이 죽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부활시킬 것이다.42)
몰트만은 이처럼 전체성의 관점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인간이 죽을 때 그의 부분들의 총합이 붕괴되지만, 그의 전체성의 새로 운 질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그가 영위한 삶의 출발점과 결 과로서 존속할 것”이라고 주장한다.43)
한 사람의 정체성을 삶의 전체성 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몰트만의 생각은 지금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의 연속성(동일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나아가 몰트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의 몸과 부활의 몸 사 이의 연속성을 ‘우리 삶의 전체성’ 곧 ‘몸과 영혼, 과거와 미래, 사회적 관 계와 자연적 관계를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몸의 부활은 고립된 개인의 부활일 수 없으며, 한 사람의 맺은 모든 사회 적, 자연적 관계의 ‘부활’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44)
42) Ibid., 133. 이탤릭체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몰트만은 형태심리학(Gestalt psychology)의 개념을 빌어와 한 사람의 ‘전체적 형태’(Gestalt)를 ‘인간의 영’이라고 부른다. Ibid., 134 참고.
43) Ibid., 134. 몰트만은 이로써 수정된 형태의 불멸 사상을 몸의 부활 교리에 수용한다. Ibid., 126, 각주 39 참고.
44) 몰트만은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적 부활”에 대해서 언급한다. Ibid., 125.
이에 몰트만은 (그레스 하케와 마찬가지로) 몸을 포함한 전인의 삶 전체가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주장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면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의 부활을 주장한다.45)
그는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새 창조의 미래를 내다보며 지금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롬 8:19-21)도 함께 구원을 받을 것 이라고 전망한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모든 사물과 상황 의 우주적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희망과 함께 시작하는 모든 인격 적 종말론은 점점 더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46)
말하자 면, 몸으로 영위된 삶 전체의 부활은 몸과 공속 관계에 있는 온 세상의 새 창조를 내포하며, 따라서 개인적 종말론은 우주적 종말론과 연동되어 있다.47)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 전체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보존’된다 면 그것은 반드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있다. 죄악과 질병과 고통의 순간 들 역시 영원히 보존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몰트만 은 부활의 몸이 참여하는 ‘영원한 생명’은 지상에서의 삶이 단순히 ‘영원 화’(박제화)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48)
45) Ibid., 123.
46) Ibid., 124.
47) 이 점에서 몰트만은 그레스하케를 비롯해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죽음에서의 부활’ 사상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진다. 위의 책, 175-176. 다만 개인의 죽음 속에 있는 부활을 종말 론적 사건으로서 보편적 부활과 동일시하는 데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Ibid., 177-178.
48) Ibid., 124. 이와 연관해서 몰트만은 과정사상의 종말론에 대해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찰스 하트숀이 선명하게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의 역사는 ‘삶의 책’이다. 죽음과 함께 이 책은 끝나지만,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 서 영원히 남는다. (중략) [하지만 과정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객관적 불멸성’은 자동적으로 객 관적 목록처럼 [마치 비디오 필름처럼] 생각되며, 하나님의 바르게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기억의 이 인격적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Ibid., 130. ‘객관적 불멸성’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과정사상 에서 ‘응답적 사랑’으로서 신의 결과적 본성에 대한 논의가 신정론에 관한 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Cobb and Griffin, Process Theology, 122 이하 참고.
몰트만은 우리가 이 땅 에서 산 삶의 전체성으로서 지금의 몸과 영생에 참여하는 부활의 몸 사 이에 연속성이 있는 만큼이나 불연속성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 본다.
신약성서에서 ‘부활’(Auferweckung) 혹은 ‘일어남’(Auferstehung)에 가 장 가까운 표현은 ‘변화’(transformatio/고전 15:42)와 ‘변용’(transfiguratio/빌 3:21)이다.
여기서 ‘부활’은 한 사람이 자신의 치유와 화해와 완성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은, 하나님께는 그 무엇도 상실되지 않으며, 지상의 삶의 고통도, 행복의 순간도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마지 막 순간뿐만 아니라, 그의 전 역사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화 해되었고 올바르게 회복되었으며 치유되었고 완성된 그의 삶의 역사 로서 발견할 것이다. 이 삶 속에서 은혜로써 경험되는 것이 영광 가 운데서 완성될 것이다.49)
말하자면 영생으로의 부활에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몸 삶’(몸으로 산 삶)의 전 역사는 ‘보존’되는 동시에 ‘변화’될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현재 의 삶이 완전한 전체성으로 궁극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하며, 현재의 삶은 이 전체성으로 규정되어 있다.”50)
나아가 지금의 몸과 부활의 몸 사 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몰트만의 강조는 인격적 종말론과 연동 되어 있는 우주적 종말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태초에 무로부터 창조된 지금의 세계와 종말에 완성될 새 창조 사이에는 연속성 가운데 불연속성, 불연속성 가운데 연속성이 존재한다.51)
49)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124-125.
50) Ibid., 125.
51) Moltmann, “Creation and Theosis,” in The Far-Future Universe: Eschatology from a Comic Perspective, ed. George Ellis (Philadelphia: Templeton Foundation Press, 2002), 257. 몰트만에 따 르면, 우주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몸(삶)과 부활의 몸(삶) 사이의 불연속성은 단순 히 지금의 몸(삶)의 부정적 경험에 제한되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지금의 몸(삶)의 무상 성, 시간적 삶의 구조 자체가 부활의 몸(삶)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의 시간 구조에 참여하는 것 으로 변화될 것이다. 부활의 몸이 참여하는 영생의 시간성을 주제로 몰트만과 폴킹혼 사이의 논 쟁을 다룬 다음 글을 참고하라. Junghyung Kim, “Christian Hope in Dialogue with Natural Science: John Polkinghorne’s Incorporation of Bottom-up Thinking into Eschatology,” in God and the Scientist, eds. Fraser Watts and Christopher C. Knight (Farnham: Ashgate, 2012), 166-169.
Ⅵ.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몸의 부활에 관한 그레스하케와 몰트만의 이해는 서로 공명하는 점이 많다.
두 신학자 모두 구원의 궁극적 미래에 영혼뿐 아니라, 몸을 포함한 전인이 참여한다는 점을 강조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산 삶 전체 및 그 몸 삶과 연관된 우주 전체가 부활을 통해 영광스럽게 변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몸의 부활을 무덤 속에 묻힌 시체가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사건으로 보는 통속적인 부활 사상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52)
하 지만 몸의 부활을 한 사람의 몸, 삶 전체 및 그와 연결된 세계 전체의 완 성으로 보는 그레스하케와 몰트만의 생각은 최근 몸의 현상학 및 몸의 사회학의 통찰과 상당히 공명하면서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뿐 아니라, 현대 종말론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서 종말론의 개 인적 차원과 우주적 차원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몸의 구원과 관련해서 주로 현세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최근 인문 사회 과학의 몸 담론의 신학 적 의의를 강조했다.
현세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이 연 구의 결과는 현세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구원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 고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레스하케와 몰트만이 설명하듯이 몸의 부 활이 우리가 몸으로 산 삶의 전체성이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몸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몸으로 사는 오늘 이 순간의 삶 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몸 삶은 영 원한 삶(영생)에 잇대어 있고, 오늘 이 순간을 사는 몸이 부활을 통해 치 유되고 구속되고 완성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53)
52) 그레스하케는 통속적 부활 개념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한다. 그레사케, 『종말신앙』, 93-94.
53)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118 참고.
따라서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천천히 살며 삶에 관여하고, 순 간 속에 머무르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경험한다.54) 이렇게 부활 소망은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변 형시키는 살아있는 소망이 된다. 이 외에도 몸의 중요성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자각은 죄와 성화,55) 몸으로 생각하는 실천적 지성 계발,56) 질병과 장애와 노령화, 억압과 차 별과 폭력 등 몸과 몸 사이의 깨어지고 파괴된 관계, 그리고 모든 몸이 공존하는 생태계 파괴57)와 관련해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 대된다.
54) Ibid., 105.
55) 성공회 전통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성화된 몸: 완전함은 왜 ‘자아’ 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라는 논문에서, 근대적 자아 개념을 비판하면서 성화 교리와 관련해서 몸 의 위상을 새롭게 강조하는 흥미로운 주장을 전개한다. Stanley Hauerwas, “The Sanctified Body: Why Perfection Does Not Require a ‘Self’,” Embodied Holiness, eds. Samuel M. Powell and Michael E. Lodahl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9), 22-37.
56) 로완 윌리엄스/ 이철민 옮김, 『인간이 된다는 것』(서울: 복있는사람, 2019), 75-95.
57) 예를 들어, 전현식은 기후 재앙과 사회적 불평등 등 지구적 위기의 근원이 주체-객체, 정신-몸, 인간-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한다. 전현식, “성육신 신앙의 몸 현상 학, 몸 신학적 이해,” 351. 또한 전현식은 메를로-퐁티의 몸 현상학과 더불어 로즈마리 류터의 생 태여성학적 자연의 신학과 샐리 멕페이그의 성육신적 자연의 신학을 연구하고, “하나님, 세계, 인간을 유기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몸적 생명의 패러다임”을 재구성한다. 전현식, “녹색 몸 신학의 방법론적 탐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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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인간 실존의 근원적 형식으로서 몸이 가진 고유한 특징에 대한 최근 의 현상학적, 사회학적 연구들로부터 우리는 신체화된 정체성 개념을 도 출할 수 있다. 즉 모태에서부터 사람이 자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경험한 모든 삶의 관계가 그 사람의 고유한 몸과 정체성을 형성한다. 신체화된 정체성에 대한 최근의 이러한 인문 사회 과학적 통찰은 몸의 부활 교리 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의 단초를 제공하며, 부활의 몸이 우리 몸에 새겨 진 모든 삶과 관계 곧 우리가 몸으로 산 삶 전체가 치유되고 구속되고 회 복되어 영광스럽게 변형된 몸이 될 것이라는 최근의 신학적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주제어 신체성, 몸의 기억, 몸의 부활, 몸의 현상학, 몸의 사회학
Abstract
A Reflection upon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in Dialogue with the Phenomenology and Sociology of the Body Junghyung Kim (Assistant Professor, Systematic Theology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From recent phenomenological and sociological studies of the body as the fundamental form of human existence, we can derive the concept of the embodied identity. In other words, every life relationship that a person experiences through their living body from their mother’s womb forms their unique body and thus their unique identity. These recent humanities and sociological insights into the embodied identity enable a reinterpreta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support recent theological claims that all the life relationships engraved in one’s body — that is, the whole life one has lived through the body — shall be healed, redeemed, restored, and gloriously transformed in the resurrection of one’s body.
key word : Embodiment, Corporeal Memory, Resurrection of the Body, Phenomenology of the Body, Sociology of the Body
논문접수일: 2020년 5월 19일 논문수정일: 2020년 6월 2일 논문게재확정일: 2020년 6월 20일
神學思想 189집 · 2020 여름
*(참고)
『몸 주체 권력』
특히 이 책은 몸이 단순한 생물학적 객체를 넘어 주체성과 권력의 장이 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단순한 생물학적 기계가 아닌,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주체로 본다.
그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몸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토대다.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몸의 연장선으로, 그들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자유를 실현하는 매개체다.
『몸 주체 권력』은 이와 같은 관점을 통해 휠체어를 강제로 분리하려는 행위가 단순히 이동성을 박탈하는 것을 넘어, 장애인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몸의 온전성을 침해하는 폭력임을 통찰하게 한다.
이는 몸의 자유와 주체성이 물리적 환경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반면, 푸코는 몸을 권력이 작동하는 주요 장으로 보았다. 그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권력은 단순히 억압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과 통제를 통해 몸의 행위를 형성한다.
『몸 주체 권력』에서 다룬 푸코의 ‘규율적 권력’ 개념은 혜화역 사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공공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장애인의 몸을 통제하고 휠체어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행위는 권력이 개인의 몸을 규율하려는 시도의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이러한 권력 작동 방식이 단순한 물리적 강제를 넘어 사회적 구조와 규범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몸 주체 권력』은 단순히 몸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몸이 어떻게 규정되고 다뤄지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한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의 몸이 단순한 대상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장애인의 몸을 포함한 모든 몸이 가진 고유한 주체성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몸 주체 권력』은 몸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실제 사회적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이며, 독자로 하여금 몸과 주체성, 권력의 문제를 다시금 성찰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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