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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현대 일본문학에 나타난 전후의 은폐 기억과 그 망탈리테(mentalites)적 영향에 대한 연구-쓰시마 유코(津島裕子)의 『갈대 배가 떴다(葦舟, 飛んだ)』를 중심으로-/허석.목포大

 

 

 

1. 서론

 

2024년 7월 일본 최고 재판소는 구 우생보호법1) 피해자 배상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강제 수술이 일본 헌법 제13조(개인의 존중, 행복추구권)와 제14조(평등권)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하고 피 해자에 대한 국가 배상 명령을 확정하였다.

법이 제정되고 76년 만 에, 그리고 1996년 모체보호법으로 법이 개정되고 나서 28년 만에 이루어진 이 판결로 전후 혼돈시대에 자행되었된 국가 폭력이 뒤늦 게나마 인정되고, 그에 따라 피해자들이 구제를 받게 된 것은 참으 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목되는 것은 이 사태를 야기한 구 우생보호법의 제정(1948) 배 경에 패전 직후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일본 여성들이 본국으로 귀 환(引揚げ)2)하는 과정에서 소련군 등에 당한 성폭행과 그 결과로서 의 임신을 불법 임신으로 규정하고,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 가 강제적으로 시행한 낙태 수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 1948년 초당파 의원 입법으로 성립된 우생보호법은 유전성 질환자에게 본인의 동의 없이 불임수술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이 법에 의해 이루어진 불임수술은 약 25,000건(유전성 질환 이유의 강제 수술 14,466건, 동의 획득 후의 수술 8,518 건, 유전성 아닌 환자에 대한 강제 수술 1,909건)에 달하며, 수술받은 사람의 3/4 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성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野口憲太, 2024.

     2) 일본어 引揚げ의 사전적 의미는 철수나 퇴각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철수라 는 의미 속에 내포된 자의성을 고려하여 이주민들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중점을 둔 「귀환」으로 표기하였음을 미리 밝혀 둔다. 필자 주. 

 

일 본 정부는 일찍이 이 강제 수술이 지닌 문제점을 인식하고 관련 자 료의 폐기를 지시하는 등 국가 차원의 은폐를 시도하였고, 피해 당 사자는 당사자대로 불안과 공포, 절망과 회한을 수반한 이 고통스 러운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면서 이 비극은 오랜 시간 역사의 전면 에서 사라졌다.

일찍이 프로이드(S. Freud)는 「유아기 체험을 상기하는 것이 감 정적으로는 고통인 기억」을 은폐 기억(screen memory)으로 정의한 바 있다(フロイト, 2016:257-58).

그러나 상기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기억은 유아기뿐만 아니라 성년 이후에도 존재한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 여성들이 외지-특히 만주 지역에서 귀환하 는 도중 겪은 소련군 등에 의한 성폭행과 그에 따른 임신 및 강제 중절 수술의 기억이나 GHQ 점령 시대의 위안부나 街娼(팡팡)으서 의 기억도 당사자인 여성들은 물론, 주변 남성들에게 있어서도 다 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은폐 기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피해 당사자들의 의식 속에 깊이 침잠된 이러한 기억들이 전후 일본인들의 집단심성 형성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고, 나아가 그것은 현대 한일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 인 쓰시마 유코(津島裕子)가 2011년 마이니치(每日) 신문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발표한 소설 『갈대 배가 떴다(葦舟、飛んだ)』는 일본 전후 세대들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만주 이주 여성들 의 귀환 과정에 겪은 참담한 체험의 은폐와 후대에의 전승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세대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쓰시마 유코(津 島裕子)의 『갈대 배가 떴다(葦舟, 飛んだ)』는 이미 국내외적으로 기무라 사에코(木村朗子)와 曺榮晙, 王璇靜 등의 연구자들을 통하여 일정 부분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3)

 

    3) 일본에서 발표된 논문 중에는 기무라 사에코(木村朗子)의 「패전 후의 기억을 파헤친다-미래의 귀환 문학으로서의 쓰시마 유코의 『갈대 배가 떴다』(坪井秀 人編, 『戦後日本文化再考』, 三人社, 2019와 「기억과 증언, 그리고 공감적 청자 를 통해 전승되는 역사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曺榮晙의 『쓰시마 유코의 후 기 작품에 있어서의 표현 수법과 소설 미학』(나고야대학 학위논문, 2022), 「死 者에 대한 다성적인 상상력」이라는 부제 하의 王璇靜의 「津島裕子 『葦舟,飛ん だ』論」(『国文学攷』 第255号, 広島大学国語国文学会, 2023) 등이 주목되는 연 구 노작이고, 국내에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에는 조영준의 「連帯の共同体精神と歓 待の倫理からみる津島佑子の『葦舟、飛んだ』」(『동북아 문화연구』 2019 vol.1, 동북아시아문화학회)가 주목되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젠더론적 입장에서 전시 성폭력의 문제와 동 소설의 귀환 문학(引揚げ文学) 으로서의 의미 및 死者에 대한 다성적 상상력을 동원한 표현 수법 과 소설적 미학에 중점을 둔 것으로, 문자화된 은폐 기억이 다중에 게 공유되어 집합적 기억이 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타자화된 남 성들을 포함한 일본 사회 전체의 집단심성 형성에 끼친 사회학적 영향에 대해서는 모두 간과하고 있다.4)

 

     4) 이와 관련하여 曺榮晙은 그의 학위 논문 속에서 『あまりに野蛮な』)講談社, 2008) 의 대만에서의 번역과 연구 활성화를 거론하며, 만주가 주 무대인 『葦舟,飛ん だ』가 중국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현실과 연구 부재를 적시하고, 한국에서의 연구 불모 상태도 지적하고 있다(曺榮晙, 2022:104). 

 

이하 본 연구는 소설 『갈대 배가 떴다(葦舟、飛んだ)』에 나타난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은폐 기억을 중심으로, 그것이 전후 일본 사 회의 집단심성과 국교 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에 끼친 영향을 알아 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전시 성폭력과 관련된 담론의 폭을 여성 피해자 중심에서 현장을 목격하거나 성 상납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 한 남성들의 기억까지 확대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 에서 행해진 일본인 남성들의 집단 성 매수(기생관광)의 심리적 연 원을 규명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문자 텍스트의 경우, 전 래의 문헌학적 연구 방법과 문화연구 방법을 기반으로 한 자료 조 사 및 징후적 독해 방법을 통한 텍스트의 표상적 의미 고찰에 주안 을 두고, 영상 텍스트의 경우 J·피스크의 영상 텍스트 분석 방법을 활용하였다.

 

2. 은폐 기억의 공유와 가타카나 히미쓰(ヒミツ)에 내재된 망탈리테

 

쓰시마 유코가 마이니치(每日)신문에 『갈대 배가 떴다』를 처음 발표한 것은 2009년 4월1일부터 2010년 5월15일까지의 일이다. 이 시기는 보수 우경화를 추진해 온 아베(安倍)-아소(麻生)로 이어지는 자민당 정권이 총선에서 패배하여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준 정치적 격변기5)이자,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국제적인 상황 역시 엄중 한 시기였다.

 

    5) 2009년 8월 30일 실시된 총선의 결과 자민당은 선거 전의 300석에서 181석이 준 119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31석에서 10석이 준 2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이 에 반하여 민주당은 전후 최다 의석인 308석을 획득하여 의석 점유율 64.2%로 집권 여당이 되었다. 

 

이러한 때에 패전 후 만주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도 중 일본 여성들이 겪은 소련군 등에 의한 성폭력과 생존을 위한 매 매춘 및 그 결과로서의 강제 중절 수술 등을 핵심 서사로 하는 동 소설의 발표는 결과적으로 전쟁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전면에 내세 움으로써 전후 일본인들의 전쟁과 관련된 보편적 망탈리테라고 할 수 있는 피해자적 일본인 상을 21세기에 들어서도 지속 가능한 것 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소학교 동창생 미치코(道子)의 죽음을 계기로 에미코 (高田笑子)의 집에 다시 모인 아키코(庄司昭子), 다쓰오(達夫), 유키 히코(室井雪彦)와 다쓰오의 여동생 리에(柳理惠) 등 5명의 전후 출 생자들이 자신들의 소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과정에 자신들이 전쟁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것을 자인하고, 유키히코의 발의로 과거 전쟁 에 대한 조사를 「보고」라는 형식을 통해 공유하는 구조로 이루어 져 있다.

텍스트에 나타난 「보고」는 유키히코의 태평양전쟁 말기 도시 지역에서 실시된 학동(學童)들의 집단 소개에 대한 조사를 필 두로, 리에에 의해 작성된 패전 직후 중국의 다롄(大連-본고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한자로 표기-필자 주)에서 벌어진 귀환민들의 참상, 죽은 미치코를 대신하여 에미코가 작성한 전쟁고아들의 양자 입양 문제, 죽은 미치코의 남편 다쓰오에 의해 작성된 러시아인 사 샤의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시베리아 이야기, 아키코의 아들 아키라 (庄司哲)가 조사한 중국인 安華였던 에미코의 어머니가 어떻게 일본인 사나에(高田さなえ)가 되었는가에 대한 조사 등 모두 7건이다.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서사를 끌고 가는 또 하나 의 동인으로 주목되는 것은 전전 세대인 유키히코의 어머니인 유키 바바(雪ババ)의 비밀과 미치코의 비밀, 에미코의 비밀 등 개인과 관 계된 3건의 비밀과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시 벌어진 중국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 등 가타카나의 ヒミツ(秘密)로 표기된 4개의 비밀이다.

이 가타카나로 표기된 4개의 비밀 중에서 일본인들의 전후 은폐 기 억과 관련되어 특히 주목되는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전전 시대를 산 유일한 발화자인 유키바바의 여학교 시절 친구에 대한 회상이라 고 할수있다.

서사에 따르면, 패전 직후 유키바바가 결혼하여 유키히코를 낳은 집에 어느 눈 내리는 밤 여학교 시절 친구가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 온다.

유키바바는 친구가 귀환 과정에 겪은 일을 그 친구의 가족이나 유키바바의 가족 누구에게도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일생의 비밀 (ヒミツ)로 삼겠다고 약속한 후, 소련군으로부터의 성폭행과 살아남기 위해서 감내해야 했던 소련군 상대의 매매춘 및 그 결과로서의 임 신과 귀환 후에 겪은 강제 낙태 수술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유키바바의 회상 가운데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본인들의 은폐 기억 과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만주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겪은 소련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패전 당시 120만 명에 달하였던 만주 거주 일본인 가운데 소련군의 참전 으로 만주국의 수도 新京(오늘날의 長春)을 탈출한 민간인은 불과 24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6)

 

     6) 서사 중에 리에의 보고에 따르면, 1945년 8월11일 신경에 소년군 폭격이 시작되 자 관동군 사령부는 만주국 황제와 만주국 고관과 함께 도망치기 위해 신경에서 모두 18회의 열차를 출발시켜 4만 명이 신경을 빠져나갔는데, 열차를 탄 사람들 은 대부분 관동군 관계자와 滿鐵 관계자, 대사관 직원들로 민간인은 불과 240명 에 불과하였고, 민간인이 열차에 탑승하려고 하면 강제로 이를 떨쳐내었다고 이 야기되고 있다(津島裕子, 2011:197).

 

따라서 대부분의 이주자들은 귀국선이 출발하는 大連까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 여성들이 무방비로 적 군 앞에 노출되어 기억하기도 참담한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위의 유키바바의 화상에서 명기되어 있는 것과 같은 전시 성폭력으로서의 강간뿐만 아니라, 대련으로 철수한 이후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의적으로 저지른 소련군 상대의 매매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리품으로서의 강간에서 오락적인 강간으로 의 변용(山本めゆ, 2015:57)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이 매매춘 행위는 반자의적이라는 점에서 만주에서 귀환 중이던 개척단의 안위를 위 하여 자진해서 소련군에게 동족의 성을 제공한 성 접대와 더불어 전시 성폭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로카와(黒川) 개척단의 소련군에 대한 성 접대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7)

점령군 상대의 매매춘 행위에 대한 당사자의 은폐 기억화는 소련 군뿐만 아니라 미군의 경우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1980년대 초에 방영되어 TV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오싱(おし ん)」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8).

 

    7) 제국주의 일본은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설치(1931)한 이후 국내의 과잉인구를 해소할 목적으로 만주로의 이주민 입식을 계획하여 전국적으로 800개의 개척단 을 결성하여 만주로 파견하여, 패전 당시 27만여 명에 달하는 개척 이민이 만주 에 거류하였다. 구로카와 개척단은 1941년4월 선발대 29명이 만주로 이주한 것 을 시작으로 패전 시 129세대 650명이 만주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이웃 마을 구 타미(來民) 개척단 270여 명이 집단자결한 소식을 듣고 개척단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개척단 간부가 주동이 되어 18세 이상의 젊은 독신 여성을 소련군의 성 접 대역으로 파견하기로 하고, 12-15명의 여성을 선발하여 위안부 역할을 시켰다. 여성들 대부분은 사망하였고, 그중 3명의 생존자가 2000년 이후 이 사실을 중언 하여 사회문제화되었다(松田澄子, 2018:21-23). 

    8) NHK 방송 개시 30주년 기념작으로 1983년 4월4일부터 1984년 3월31일까지 전 297 회에 걸쳐 방영된 아침드라마 「오싱」은 初回 시청률 39.2%, 최고시청률 62.9%, 평균 시청률 52.6%를 기록한 일본의 국민 드라마였다(NHKドラマ番組部 監修, 2015:156-57). 

 

이 드라마 속에서 패전 후에 오싱 의 장남 유(雄)의 연인이었던 하쓰코(初子)가 이세(伊勢)의 집을 나와 도쿄에서 미군 상대의 위안부가 되었다.

오싱은 그런 하쓰코를 향해,

「4년간의 일은 이곳에 버리고 가자. 옛날 하쓰코가 되어 이 세로 돌아가는 거야. 지금까지의 일은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도 없 다. 히토시들에게는 제대로 된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하면 끝나 니까…」(드라마 「오싱」 제229화 녹취, 橋田寿賀子, 1984:36)

라고 말하면서 하쓰코의 얼굴을 닦아주는 장면이 있다.

여성에게는 수치 스럽고 참담한 기억을 같은 여성인 오싱이 듣고 이를 은폐하는 적 극적인 조력자 역할이 돋보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제적이든 반자의적이든 적군에 의한 성폭력 행위는 피해 당사 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은폐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위에 여성에게 주어진 형벌로서 훨씬 혹독한 것은 그러한 성폭 력의 결과로 임신한 여성들에 대하여 그것을 불법 임신으로 규정하 고, 본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강제 중절 수술을 단행한 전후 일본 정부의 폭거라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외지-특히 만주 지역에서 귀국한 여성들 가운데 임신한 여성들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본인의 동의 없이 강제 중절 수술을 시행하였다는 것은 이 미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일정부분 사실로 밝혀져 있다.9)

 

    9) 후생성 전 관료의 증언을 인용한 NHK의 보도에 따르면, 중절 수술을 받은 여성 들이 대략 2,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座談会 「国立病院の発足を回顧 して」『醫療』 1955년12월호, NHK. 「クローズアップ現代-終わらない戦争(2) 生きて いることが疎ましい知られざる戦渦の中絶」 2024년 8월26일 방영) 그러나 이것은 빙산 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상기 NHK 프로그램에 등장한 전 복지 상담원 가와지마 에쓰코(河島悦子)의 회고에 따르면, 「하루에 36인을 수술한 것 이 최고였고, 20명은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만주에서의 귀환이 본격화된 1946년4월부터 거의 2년에 걸쳐 이루어진 중절 수술은 그 수치를 훨씬 상회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전쟁과 관련하여 여성들이 입은 전시 성폭력이나 그에 따른 임신 및 낙태 수술 등 상기하기조차 싫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할지라 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내밀스런 비밀을 털어놓을 동성의 청자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유키바바 친구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주에서의 잇따른 성폭력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소련군과의 매 춘 및 그 결과로서의 강제 낙태 수술이라는 비밀을 유기바바는 「그 친구의 가족이나 유키바바의 가족 누구에게도 절대로 발설하 지 않고 일생의 비밀(ヒミツ)」로 하겠다」(津島裕子, 2011:418)고 약 속한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들 유키히코로부터 大連에 지인이 있 거나 간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도

「전쟁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나는 그다지 고생하지 않고 끝났지만, 大連처럼 소련에 점 령당한 곳은 특히 큰일이었다. 남자인 네가 알 리가 없는 고생 이…」(津島裕子, 2011:141)

라고 침묵으로 지켜지지만, 사건 발생 후 6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들의 소학교 동창생인 에미코에게 들려 주는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

이렇게 성폭행이나 성 접대 나아가 생 존을 위한 매매춘이라는 돌이키기도 끔찍한 기억이 의식 깊은 곳에 은폐되어 있다가 동류의 체험을 한 동성에게 공유되는 사례는 2019 년 8월24일 방영된 TV 아사히(テレビ朝日)의 『텔레멘터리-사실을 새긴다-구전되는는 전쟁과 성폭력(テレメンタリー史実を刻むー語り継ぐ戦 争と性暴力)』 속의 구로카와 개척단 이야기를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10)

 

    10) 다음은 동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미(スミ) 씨가 구로카와 개척단이 동 개척단의 안위를 위해 결혼 전의 젊은 소녀를 소련 장교들의 성 접대역으로 차출하여 그 일에 종사하게 된 경위를 증언하면서, 같은 처지에 놓였던 친구 후미에(文江) 씨 가 유족회 이외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는 조건 아래 자신에게 의탁된 후미에 씨의 시를 그녀의 사후, 귀국 후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공개한 것이다. 「소녀 의 목숨과 바꾸어(乙女の命と 引き替えに) / 단의 자결을 막기 위해(団の自決を  止める為に) / 젊은 소녀를 제물로(若い娘の 人柱) / 바쳐 지킨 개척단(捧げて守る  開拓団)」 (テレビ朝日, 『テレメンタリー史実を刻むー語り継ぐ戦争と性暴力)』, 2019年 8 月24日).

 

이러한 동성 친구 간의 비밀 공유는 전시 성폭력과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죽은 미치코와 에미코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 사 초반에 소학교 5년생이던 10살 때 교환하였다는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에미코의 녹색 돌로 된 작은 말과 미치코의 푸른 유리 조각 은 각각 에미코의 죽은 어머니에 대한 비밀과 미치코의 사샤라는 백계 러시아인과의 사연을 담은 표상이다.

미치코의 비밀을 담은 푸른 유리 조각은 에미코의 진술에 의해 미치코가 미국에서 귀국한 후에 넘겨준 것으로 확인되지만, 거기에는 하얼빈이라는 양자의 접 점에 의해 사샤에 대한 보통 이상의 감정을 가진 미치코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애정의 한 표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사연이 동성의 친구에 의해 공유되 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安華라는 중국인에서 아냐라는 러시 아식 이름을 갖고, 그 후에 다카타 사나에(高田さなえ)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에미코의 죽은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녹색 돌로 된 작은 말은 에미코가 10살 되었을 때에 미치코에게 건내준 것으 로, 에미코 자신이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미치코에 의해 철저히 봉 인되었던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타카나로 표기된 히미쓰(ヒミツ)는 한자어 秘密과 달리 여성에서 여성으로의 음성에 의한 전승을 전제로 한 작가의 의도적 기호라고 할 수 있다.11)

그것은 소리 문화의 특징이 대상과 의 밀접하고 감정이입적이며 공유적인 일체화 도모(W·J·オング, 2013:101)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한자어 秘密이 아닌 가타카 나 ヒミツ는 여성 화자와 청자 사이의 정서의 일체화와 그에 따른 비 밀 보장을 전제한 커뮤니케이션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비밀의 공유를 통하여 집단화되는 심성12)의 문제 라고 할 수있다.

 

    11) 이와 관련하여 기무라 사에코(木村朗子)는 전시 성폭력과 관련한 미치코와 다쓰 오의 대화와 관련하여 이 소설의 남자들은 패전 후 여성의 비밀의 질문자가 될 수 없도록 미리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木村朗子, 2019:336).

    12) 흔히 불어 망탈리테(mentalites)의 역어로 알려져 있는 심성 또는 집단심성은 뤼 시앵 페브르가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의 머리말에서 처음 제기한 것으로, 특 정한 시대에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 및 무의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지 적·정서적인 것을 망라한 것이다(뤼시앵 페브르, 2008:19). 

 

패전이라는 황망한 사태와 관련하여 만주 이주 일본인들이 일차 적으로 느꼈을 공통적인 심성은 남녀 공히 허탈과 소련군의 침공에 따른 불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이윽고 리에의 「보고 2」13)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지배 계급이 모두 철수해 버리고 자신들만이 만주 벌판에 내버려진 것을 알았을 때는 극도의 공포와 지배 계층 및 국가에 대한 분노였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3) 리에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쇼크를 받은 것은 이 날(8월11 일) 신경에서 18편의 열차가 떠났다는 것입니다만, 거기에 탈 수 있었던 4만 명 가까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관동군 관련, 만철 관련, 대사관 사람들로 민간인은 불과 240명이었다는 숫자입니다. 어디까지 정확한 숫자인지 나에게는 알 수 없 었지만 어떤 사람의 증언에서는 민간인들이 필사적으로 그 열차를 타려고 하면 가차없이 밀쳐내었다든가.」 (津島裕子, 2011:197) 

 

그리고 이 절망과 분노의 망탈리테는 1947년 만주로부터의 귀환 작 업이 일단락될 때까지 일본의 거의 모든 외지 귀환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집단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은폐 기억의 내연과 보상적 망탈리테

 

쓰시마 유코의 소설 『갈대 배가 떴다』의 핵심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유키바바의 증언에 따르면, 유키바바의 친구가 당한 피해는 소련군 등으로부터의 성폭행과 생존을 위한 매매춘, 그 결과로서의 임신과 강제 중절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 으로서도 수치와 치욕, 불안과 공포, 절망과 체념, 회한과 분노의 감정으로 점철된 이 기억은 텍스트 내에서 적어도 유키바바가 친구 와의 약속을 깨고 증언할 때까지 60년 세월을 가타카나 ヒミツ로 표 기된 비밀로서 은폐 기억화 되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피해 여성 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승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만주 귀환들 이 겪은 전시 성폭행과 관련된 이야기의 전승 양상은 구로카와 개 척단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로카와 개척단의 소련군에 대한 성 접대 실상이 세상에 처음으 로 공개된 것은 2013年 11月9日, 満蒙開拓団平和記念館에서 열린 「구술 증언자 강연회(語り部講演会)」에서 전 岐阜県黒川開拓団員 이었던 야스에 요시쿄(安江善子, 당시 89세)가 밝힌 「개척단의 목 숨을 구하기 위해 처녀들은 모두 울면서 소련군 장교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2018年에 기후(岐阜) 시 에서 열린 집회에서 사토 하루에(佐藤ハルエ, 岐阜県郡上市, 2024. 1.18.日 死去, 99세)가 관련 사실을 증언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나 카 사치코(田中幸子, 가명, 91세), 스즈무라 히사코(鈴村久子, 90세) 등이 자신들의 체험을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개적인 증언 과 소설을 통한 증언이 현재화하기 전까지 만주로부터의 귀환 여성 들이 체험한 전시 성폭력과 그 결과로서의 강제 낙태 수술은 당사 자들의 침묵 속에 제한적으로 관련자들의 의식 세계 내에서 극히 부분적으로 내연되어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이 전후 60-70년이 지나도록 자신들의 성폭력 기억을 은폐 기억으로 만들고 공개적인 증언을 억제해 온 데에는 일차적으로 가족과 사회의 냉혹 한 시선이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유키바바의 친구와 동행했던 30대 여성이 임신을 자각한 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가 족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었다.14)

 

    14) 서사에 따르면, 유키비비의 친구와 동행한 30대 여성은 남편은 군대 가고, 일본 에는 시부모와 그 형제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 정체 모를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유키바바의 친구 역시 소련군에게 몸을 판 것이 밝혀지면 곤 란하기 때문에 시골 부모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가족을 일차적으로 의식하는 모 습을 보여주고 있다.(津島裕子, 2011:420-21) 

 

유키바바의 회상 속에서 두 피해 여성의 이름을 끝까지 익명 처리하고 있는 점이나 가족과 관련된 부분을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그들이 아직 구래의 이에 (家) 제도의 틀 안에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고 할수있다.

주목되는 것은 귀환자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들이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동족 일본인 여성들에 대한 소련군의 성폭행 과 집단의 안위를 위해 동족 여성들을 접대라는 명목 아래 매매춘 일선으로 내몰았던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절망에서 오는 수치 와 분노의 트라우마가 귀국 후 어떠한 변용을 보이는가 하는 점이 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는 원 폭과 공습으로 상징되는 잿더미가 집합적 기억으로서의 피해자적 전쟁관을 사회에 만연시켰으며, 이는 태평양전쟁이 제국주의적인 침략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쟁의 원인과 책임 및 그로 인한 가해자 의식을 애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가해자에서 피해 자로의 프레임 체인지와 관련하여 샌프란시코 강화조약에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의 부재와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공직 추방 해제와 결부하여, 「일본인들 사이에 전쟁책임은 군인 중심의 국가 지도자들에 있고, 자신들은 국가 지도자들의 잘못된 정책의 희생자라는 국민 의식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吉田裕, 2007:231-33)는 지적은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 분위기를 적시하고 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피해자성이 두드러지는 이러한 사회 분 위기 속에서 그 자체로서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노정하는 만주 이주 민들의 귀환 시 겪은 성폭력 참상을 이야기할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오락적 강간에서 중개자·협력자·수익자로 활동한 만주 귀 환 남성들이 군인=가해자, 민간인=전쟁의 피해자라는 전후의 일본 사회 주류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면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구로카와 개척단이 성 접대 여성을 선발하면 서 참전 병사의 부인을 제외한 것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를 전 제로 이것을 공유하는 남성 사이에 태어난 연대 의식을 의미하는 남성 동맹 주의15)의 소산으로 본 이노마타(猪股)의 지적(猪股裕介,  2013:15)은 향후에 전개되는 남성들의 집단심성과 결부하여 매우 중 요한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5) 남성 동맹 주의는 코넬 대학 인문학부 교수인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가 사회 에 있어 남성의 지배성을 설명하기 위해 homosocialit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용어로, 그에 따르면 남성 동맹 주의 하에서 여성은 그 행위의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증여교환의 교환 항으로 환원되며, 여성은 인격적인 능동 성을 상실하고 소유물 내지는 소유되어야 할 물건으로만 취급된다. 酒井直樹, 2007: 28. 

 

1945-6년간에 일어난 다 롄(大連)에서의 귀환자들의 참상을 보고한 리에의 「보고 2」속에 언급된 다음 글이 그러한 남성 동맹 주의의 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략) 이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8살 먹은 아이일지라도, 60 살 먹은 여성도 폭행당하기 때문에 여자라는 여자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는 검댕을 칠하거나 하여 소련병의 눈을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중략) 회유책으로 마을 게이샤(芸者) 가운데에서도 특 히 생활이 곤란한 사람에게 소련병 상대를 부탁하고, 답례로 식량 을 많이 주었다고 합니다.」(津島裕子, 2011:200)

 

위 글에는 귀환이 늦어지는 상황 속에서 소련군에 대한 회유책으 로 특정 여성들에 대하여 「부탁」하였다는 성 접대의 실상이 그대 로 나타나 있다.16)

 

      16) 이렇게 자국 여성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점령군에게 제공하는 것 은 구로카와 개척단뿐만 아니라 소련이 점령한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 고 있다. 소련군이 점령한 한반도 북부 평안북도 선천에서 1945년9월에 발족한 日本人世話會가 소련군에 대한 여성 제공과 관련하여, 「26일에는 일본인 부녀 자를 매일 15인씩 소련군 위안을 위해 제공하도록 명령이 있었다. 世話會로서는 가장 곤란한 문제여서 연일 소개 각단과도 협의를 계속하였지만, 정조 문제와 무관계하다는 보증을 할 수 없기 때문에(후략)」(日沖政之助, 1980:208)라는 부분 이나 1949년부터 1951년에 걸쳐 출판된 『佐世保援護局局史』의 「각지 공히 10 월부터는 일본의 카페, 댄스홀이 영업을 개시하고, 이런 여자들에게 부탁하여 그 녀들이 희생적으로 慰問婦로서 挺身하여 주었기에 부녀자 피해는 그 후 상당히 감소하였던 것 같다.」(加藤聖文編, 2000:57)는 부분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성 동맹 주의 하에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면서 행위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증여 교환의 대상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있다

따라서 자신이 지배해야 할 자산을 지키지 못한 남성은 그 사태에 대하여 수치와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목전에서 소련군의 성폭행 현장을 지켜보아야 했던 이들은 물론이 고, 귀환이 늦어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오락적 강간으로서의 매매 춘과 다수의 안전을 위한 회유책으로서의 소련군에 대한 성 접대를 기획한 개척단이나 돌봄회(世話會)의 남성 간부들이 맛보아야 했을 패배감과 모멸감은 트라우마로서 그들의 기억 속에 내내 은폐되어 수치와 분노의 망탈리테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이러한 수치와 분노의 망탈리테는 패전 후에 가동된 RAA(특수위안시설협회)의 위안부들이나 온리, 팡팡 등 주로 점령 미군을 상대로 한 위안소 및 위안부들의 존재와 더불어 국민적 규 모로 확대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인 여성이 외국인 병 사의 창부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폭로본(暴露 本)17)의 범람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7) 점령군인 미군이 일본인 여성에게 가한 폭력적인 성적 학대를 숨김없이 드러내 는 것을 목적으로 한 폭로본에는 『기지의 여자』(1953), 『일본의 정조-외국인 병사에게 능욕당한 여성들의 수기』(1953), 『속·일본의 정조』(1953),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점령하 일본 여성 수난의 기록』(1955), 『특수여성』(1955), 『매춘 호텔』(1957) 등이 있다(조정민, 2009:127). 

 

간과할 수 없 는 사실은 그것이 당시의 성년 남자에 국한된 사실이 아니라는 점 이다.

리에의 「보고 2」에 나오는 大連의 겨울 풍경을 적은 다음 예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들은 보았습니다. 공원이니 광장에서 난민들이 몸을 서 로 기댄 검은 덩어리로부터 질질 끌려 나가는 몇 구의 죽은 어른이 나 아이들의 몸을. … 아이들은 보았습니다. 항구에서 일하는 소련 병을 유혹하는 일본인 여자들의 모습을. 그것도 살아남기 위한 수 단이었습니다. 소련 장교에 달라붙은 아름다운 일본인 여자들도 있 었습니다. 아이들은 보았습니다. 거리 모퉁이에서 팔 물건(売物)이 라는 표찰을 목에 늘어뜨리고 혼자 하염없이 서 있는 난민 아이를. 아이들은 보았습니다. 항구에 떠 있는 여자의 시체를. 소련병에게 성폭행당하여 임신한 사람이었습니다」(津島裕子, 2011:208-09).

 

「아이들은 보았습니다」라는 두괄적 표현을 사용한 이 글에는 보는 주체가 어린 아이들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 은 그러한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아이들의 현주소이다.

그 것은 패전 후의 大連 시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본 아이들이 곧 1960 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쳐 성년이 되고, 그 시절 대만이나 한국 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본인 성 매수자의 주류적 연령층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집 중적으로 이루어진 일본인 남성들의 한국 성매매 관광을 의미하는 기생관광은 이렇게 상처받은 일본인 남성 동맹 주의의 또 다른 표 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보상적 망탈리테로서의 기생관광과 왜곡된 남성 동맹 주의

 

최초 패전 후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시작된 전후 일본인 남 성들의 해외 성 매수는 1960년대 후반 과거 식민지였던 대만을 중 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72년 중국과 국교를 맺으며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한 이후에는 한국이 새로운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 대상은 상대적으로 경제개발에 뒤진 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시아 전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일본인 남성들의 해외 성 매수는 기본적으로 성이 공공연하게 매매의 대상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시절의 유곽 설치(1589) 이래 근대의 공창제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남성들 사이에 성은 자본에 의해서 살 수 있는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위에 근대 에 이르러 반복적으로 자행된 청일전쟁·러일전쟁·중일전쟁 등 아시 아지역에 대한 침략전쟁은 전시 강간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성폭력 과 더불어 일본 남성들에게 해외라는 새로운 성 매수 시장을 인식 할 국민적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식민지주 의나 내셔널리즘은 남성 동맹 주의가 그 기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酒井直樹, 2007:25-28).

그러나 태평양전쟁 패전 후 만주에서의 귀환 과정에 발생한 일본 인 여성에 대한 소련군 등에 의한 성폭행과 성 상납, GHQ에 의해 주도된 공창제의 폐지와 점령군 미군을 위한 위안소 설치 등은 전 전·전중을 통하여 구축된 일본인들의 남성 동맹 주의에 심대한 타 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의 한국 전쟁과 그로 인한 특 수 등을 통한 경제 재건과 매춘방지법(1956)의 성립은 결과적으로 이 상처 입은 남성 동맹 주의에 해외라는 새로운 출구를 마련하여 주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시행된 일본인들의 해외여 행 자유화는 그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대만에 집중되었던 일본인들의 해외 집단 성 매수는 대만과 의 단교와 중일 국교 수립(1972)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 국을 새로운 성 매수의 대체 시장으로 주목하였다.

1971년 9만 명 수준이던 한국의 일본인 관광객 입국자 수는 1972년 27만 명, 1973 년 47만 명, 1979년에는 65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급증하였다는 것 이 이를 잘 말하여주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렇게 급증한 일본인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순수 관광보다는 성 매수를 목적으로 한 남성 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일본인 남성의 해외 성 매수의 주요 대상이 되었던 한국과 대만 양국의 일본인 입국자 성비가 남성 대 여성이 93 대 7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연령대 도 30대에서 50대까지의 남녀 성비가 남성이 80%를 상회하고 있다 는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18)

일본인 남성들이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한국에서 이 렇게 집단적으로 성 매수에 나선 것은 과거 자신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였던 그곳에서 소련군이나 미 점령군 등에 의해 맛본 남성 동맹 주의의 굴욕을 수월한 경제력을 활용하여 보상받고자 하는 심 리가 그 내부에 집단화되어 하나의 심성으로 기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전후 30년이라는 시간적 연속성을 고려하였을 때, 패전 당시 남성 동맹 주의에 의한 굴욕을 맛보았던 세대들이 그러 한 세태의 중심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기생관광으로 통 칭되는 일본인 남성들의 한국에서의 집단 성 매수의 배경에 관광산 업을 외화획득의 중요 요인으로 파악하고, 성매매와 관련된 요정이 나 관광호텔, 여행사 등을 암묵리에 지원한 정부19)와 세월의 흐름 에 따라 거의 망각된 가난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꿈꾼 다수의 여 성들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18)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76년 일본인의 해외 총출국자 수는 2.852.584명으로 남성이 74.3%, 여성이 25.7%였다. 이를 해외 성 매수의 중 심이 된 대만과 한국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대만으로의 출국자 434,240명의 남녀 성비는 93.1% 대 6.9%, 한국으로의 출국자 403,654명의 남녀 성비는 94.3% 대 6.9%로 남성 출국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服部 貴子, 2019::387). 또한 연령대 별로는 1973년의 경우, 전체 출국자의 남녀 성비가 1,775,803명 대 513,163명으로 77대 23이나 30대에서 50대까지의 성비는 87 대 13 으로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다.

    19)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당시 정부는 사회 정화라는 명문 아래 성매매 근절 을 위한 윤락행위 등 방지법(1961.11)을 제정하였으나, 1962년 6월 전국에 104개 매매춘 특별구역을 제정하고 특정 지역 내에서의 성매매나 특수 관광호텔에서의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법 적용을 보류하였다. 또, 관광 기생에 대해 등록증을 발급하고, 성병 검사와 교양 교육을 주관함으로써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1973년에 개정된 관광사업진흥법에는 관광호텔이나 요정, 식당 등의 접객 요원에 대해 연 40시간 이상의 교육을 의무화하였다(권창규, 2018: 285-87). 

 

그러나 만주에서 귀환한 여성들이 겪은 참담한 체험이 일본 사회에서 거의 망각되어 온 것과 마찬가 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외화벌이라는 이름 아래 성매매 일선에 내 몰렸던 이들 관광 기생들의 존재가 학문적이나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문 학적 서사의 결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20)

그런 점에서 1970년대 청계천 일대 판자촌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1983) 속의 「게다짝푼」은 주인공 성희21)의 눈을 통해 관광 기생의 참혹한 삶의 일정 부분을 재현하 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한국 사회를 엄습한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에 직접 동원된 성희와 같은 관광 기생의 수는 대략 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 다.22)

 

     20) 권창규의 연구에 따르면, 관광 기생을 소재로 한 소설은 1970년대 서울 청계천 의 창녀촌 빈민들을 다룬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玄岩社, 1981)과 기생파 티를 그린 현장 소설로 발표된 정을병의 『파감되지 않는 봄』(1977) 등이 있을 뿐이다(권창규, 2018:285).

     21) 「게다짝푼」의 주인공 성희는 소설 속에서 춘천에서 여고를 졸업한 후, 서울의 언니 집에 와 있다가 형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집을 나와 변두리 다방의 레지 로 근무하다가 더 나은 보수를 바라고 일본인 상대의 성매매에 나선 22살의 여 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22) 1970년대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의 수는 사창을 포함하여 대략 20만 명으로 추 정(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83:21)되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일본인 상대의 성 매매 행위에 관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73년 여름 로이터 통신이 「한국관광공사엔 안내양이 1천5백 명으로 등록돼 있지만, 그보다 8천 명이 많은 규모가 일본인 접대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한 바 있디(나무위키 「기생관광」 참조). 

 

이 숫자의 인원이 90년대 초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기생관 광이 쇠퇴할 때까지 거의 20여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고 하면 그 수 는 실로 방대한 규모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 의 말을 가지지 못한 서벌턴(subaltern)적 존재로서, 일본 남성들의 남성 동맹 주의적 집단심성의 희생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을 대변하는 어떤 움직임도 없이 현재까지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 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입문에의 자의성과 고졸 이상의 학력 소유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 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 『꼬방동 네 사람들』 「게다짝푼」 속에서 성희의 고등학교 수업 내용을 말해주는 다음 인용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이 얘기해 준 것 중에 기억에 남 는 게 있는데, 정신대로 희생된 한국 여성들 얘기였어요.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몸은 짓밟 혀 만신창이가 됐지만 정신만은 조국을 기리며 민족의 비운을 한 탄했을 거 아니예요. 근데 지금 우리 세대 관광 기생들은 몸만 만 신창이가 된게 아니라 정신까지 만신창이가 된 게 아닌지 모르겠 어요.(후략)」(이동철, 1983:173)

 

종군위안부의 강제성에 비추어 관광 기생들의 자의성을 보여주는 위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자인 성희가 고졸 수준의 학력 소지자 로 상당한 비판적 의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가 씨가 열한 명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 어요.」(상동, p.169)라는 성희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결코 낮 지 않은 학력 배경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는 중요 한 내발적 요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위에 80년대 초 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 이래 한국 사회에 비등해진 반일적 사회 분위기도 그들의 존재와 기억을 은폐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들어 지속적으로 소재화 되고 있는 일본인 현지처에 대한 문학적 기억23)은 국가주의와 자본 주의의 결합에 의해 나타난 성매매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3) 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박명아의 『아버지의 나라는 없었다』(다락방, 2020)에 나 오는 독립군 장군의 딸인 일인칭 주인공 내가 생활고로 인하여 일본인 상대의 요정에 취업하고, 이윽고 아버지 나이가 같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된다는 이야기 나 가난 때문에 일본인 현지처가 되어야 했던 금희 언니의 이야기를 그린 성보 경의 단편소설 「푸른 넥타이」(성보경, 『어쩌면 지금』, 문학들, 2021)와 권비 영의 『엄니』(Gasse, 2019)에 등장하는 미란이 고모 등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

 

소설 『갈대 배가 떴다』는 2008년이라는 현재적 서사 시점에서 전후 출생 1세대와 그들의 자식 세대인 2세대가 지닌 과거사에 대 한 무지와 무관심을 동인으로 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공 히 과거 전쟁에 대해서 무지·무관심을 드러내 보이지만,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하고 나름대로의 소통 수단을 찾아 과거사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초 전화와 팩스로 시작되었던 정보의 공유는 리에와 에미코의 네트 대필업이 라는 인터넷을 활용한 메일의 시대로 옮겨가고, 이는 아키코의 아들 아키라에 의해서 진일보한 PDF 파일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

이 는 음성문화로 내재된 비밀(ヒミツ)이 새로운 소통 수단을 찾아 빠르 게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문자화된 소설 의 출판도 광범한 독자 대중에게 은닉되고 은폐된 기억을 공유시키 는 데에 다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 환경의 개선에 따라 전쟁 상황을 직시하려는 그룹 외에 이를 자신들의 정략에 맞게 왜곡시키는 그룹도 똑같이 병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보수 우경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그들은 평균적 일본인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이용하여 표면적으로 애국심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강제 중절 수술 에 내재된 순혈주의를 이용하여 외국인에 대해 혐오적인 배외주의 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가지 주목하고 싶은 사실은 구로카와 성 접 대와 관련된 증언이 1991년에 행해진 한국의 金學順 할머니의 종군 위안부와 관련된 증언이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시 성 폭력 관련 은페 기억의 증언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국제적으로 공유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산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만주 귀환 여성들의 전시 성폭력 피해와 패전 후 일본 사회에 만연된 미 점령군에 대한 각종 위안부들의 존재가 일본 남성들의 집단심성에 미쳤을 영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이후 대만·한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일본인 남성들의 집단 성 매수는 성을 매매 가능한 것으로 보려는 역사적 인식 위에 패전 후 소련군과 미군들에 의해 수치와 분노로 점철된 남성 동맹 주의가 그 보상적 대안을 수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그 출구를 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서벌턴적 관 광 기생의 존재와 그에 따른 우리의 은폐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관광 기생과 그에 이은 일본인 현 지처 문제는 내셔널리즘의 한 기축을 이루는 문제로서 새롭게 주목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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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要 旨 >

この研究は2011年に発表された津島裕子の『葦舟、飛んだ』という小説を中心として 戦時の性暴力と関わった隠蔽記憶が戦後日本社会の集団心性にもたらした影響についっ て究め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研究結果によると、この小説のなかには四つのカタカナで表記 されたヒミツがあるが、この中で日本人の戦後隠蔽記憶と関わって特に注目されるのは満 州から引揚げた女性らが経験した性暴力の実状を伝えている雪ババの女学校時代の親友 に対する回想である。この回想を通じて注目されたのは同族の女性を守り切れなかった男性 らが味逢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屈辱と憤怒のマンタリテ出、これは戦後米軍のための慰安 所設置やパンパンの存在を通して日本人男性が共通的に持つようになったトラウマであると ともに隠蔽記憶担ったと思われる。そして、このように傷付いた男性同盟主義に基づいた日 本人男性の歪んだプライドは1970年代以後経済的に発展が遅れていた台湾や韓国への 集団的な性買収行為を通して補償を求める形態と現れたと思う。

 

< Abstract >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influence of coccealed memories related to wartime sexual violence on the collective mentality of postwar Japanese people, especially men, focusing on the novel The Reed Boat Flew by Yuko Tsushima, published in 2011. Research suggests that the novel contains four secrets, each marked with the katakana “himitsu.” Among them, the recollections of Ykibaba′s high school friend, who recounts the harrowing experiences of women, returning from Manchuria, exemplify the nature of postwar concealed memories. What is noteworthy is the mentality of humiliation and anger that men who failed to protect their fellow countrywomen had to experience, and this became a common trauma and hidden memory for Japanese men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comfort stations for the US occupying forces and comport women on the streets such as PangPang. The Gisaeng tour, which lasted for about 20 years starting in the 1970s, can be said to have existed as a collective mentality of the Japanese prople, who suffered from the Soviet and American forces during the Pacific War, and who wanted to use their superior economic power as a weapon to seek compensation from Korea, their former colony. And this incident requires much further research in the future, as it is a hidden memory for Koreans as well.

주제어:전후 일본(Postwar Japan), 은폐 기억(Coccealed Memory), 집단심성 (Mentality), 남성 동맹 주의(Homosociality)

 

논문접수일 : 2025. 10. 15. 논문심사일 : 2025. 12. 05. 게재확정일 : 2025. 12. 09.

日本語文學 第107輯

 

현대 일본 문학에 나타난 전후의 은폐 기억과 그 망탈리테(mentalites)적 영향에 대한 연구 -쓰시마 유코(津島裕子)의 『갈대 배가 떴다(葦舟, 飛んだ)』를 중심으로-.pdf
2.12MB

 

 http://dx.doi.org/10.18704/kjjll.2025.12.107.175